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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임 역사 초창기의 기록들: 닌텐도 뮤지엄 방문기

    2024년 10월 2일, 닌텐도 뮤지엄(Nintendo Museum)이 마침내 문을 열었다. 프로젝트 발표 이후 3년만의 소식이었다. 닌텐도의 역사와 유산을 기념하기 위해 설립된 이 박물관은 일본 교토부 우지시에 자리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박물관은 1969년에 세워진 우지 오구라 공장(Uji Ogura Plant)을 개조한 것인데, 이 공장은 닌텐도가 일본 전통 카드 게임인 화투와 서양식 트럼프 카드를 제작하던 시절부터 비디오 게임 산업으로 전환하는 과정까지 함께한 역사적인 공간이다. 닌텐도의 변천사를 상징하는 장소에서 다시금 과거와 현재를 모아놓은 셈이다. < Back 게임 역사 초창기의 기록들: 닌텐도 뮤지엄 방문기 22 GG Vol. 25. 2. 10. 닌텐도 뮤지엄 개괄 2024년 10월 2일, 닌텐도 뮤지엄(Nintendo Museum)이 마침내 문을 열었다. 프로젝트 발표 이후 3년만의 소식이었다. 닌텐도의 역사와 유산을 기념하기 위해 설립된 이 박물관은 일본 교토부 우지시에 자리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박물관은 1969년에 세워진 우지 오구라 공장(Uji Ogura Plant)을 개조한 것인데, 이 공장은 닌텐도가 일본 전통 카드 게임인 화투와 서양식 트럼프 카드를 제작하던 시절부터 비디오 게임 산업으로 전환하는 과정까지 함께한 역사적인 공간이다. 닌텐도의 변천사를 상징하는 장소에서 다시금 과거와 현재를 모아놓은 셈이다. * (위) 우지 오구라 공장과 (아래) 닌텐도 뮤지엄의 모습 비교 미야모토 시게루에 따르면 닌텐도 뮤지엄은 그동안 닌텐도가 모아놓은 것들을 보존하고, 이를 바탕으로 회사 안팎의 사람들과 닌텐도에 대하여 소통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1889년 화투 상점으로 시작한 닌텐도가 오늘날 비디오 게임 산업을 선도하는 세계적인 기업이 되기까지의 역사를 정리하여, ‘닌텐도’가 무엇이고 어떠한 방향성을 추구해왔는지, 또 어떠한 모습을 향해 갈지를 보여주는 것이 곧 박물관 설립의 의미일 테다. 입장 방법 닌텐도 뮤지엄에 가는 길은 마냥 쉽지만은 않다. 박물관은 사전 예약제(추첨제)로 운영되며, 입장을 원하는 사람들은 방문 희망일 3개월 전에 공식 홈페이지( https://museum-tickets.nintendo.com/en)에서 추첨을 넣거나, 취소표를 구매해야 한다. 모든 절차에는 무료로 생성할 수 있는 닌텐도 계정이 필요하다. 입장에 필요한 사전 정보는 다음과 같다. 입장료: 성인 3,300엔, 고등학생/중학생 2,200엔, 초등학생 1,100엔, 미취학 아동 무료 운영 시간: 오전 10시 ~ 오후 6시 휴관일: 매주 화요일, 연말연시 주소: 교토부 우지시 오구라초 카구라다 56번지 교통: ● ・긴테츠 교토선 "오구라역" 동쪽 출구에서 도보 5분 ● ・JR 나라선 "JR 오구라역" 북쪽 출구에서 도보 8분 ● ・JR 나라선 "우지역" 북쪽 출구에서 도보 22분 관람객들은 방문 희망일 기준 세 달 이전에 응모를 진행해야 한다. 만약 2025년 4월에 방문을 원한다면 2025년 1월 1일부터 1월 31일까지 응모를 넣어야 하며, 2025년 2월부터는 5월 분에 응모 가능하다. 각 날짜에는 10시부터 16시까지 총 13개 타임이 열리고, 관람 희망자들은 최대 3개까지 원하는 날짜/시간을 선택하여 신청할 수 있다. 응모에 대한 추첨 결과는 다음 달 1일 오후에 발표된다. 필자의 경우 18시 30분 경 닌텐도 뮤지엄 측으로부터 당첨되었다는 메일을 받았다. 당선 및 당락 결과는 개별적으로 발송된 메일을 통해 확인해볼 수 있으며, 이는 또한 닌텐도 뮤지엄 홈페이지에서도 가능하다. 당첨되었을 경우 홈페이지를 통하여 결제를 완료해야 티켓을 확정지을 수 있다. 결제를 완료하고 약간의 절차를 따르면 다음과 같은 QR코드를 얻을 수 있다. 해당 코드는 박물관 입장시 필요하며, 이후 관람객들은 표를 실물 카드로 교환하게 된다. 카드에는 8비트 그래픽 마리오 이미지 또는 본인의 Mii를 넣을 수 있다. 모두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진행 가능하다. * 닌텐도 뮤지엄 QR코드 및 실물 카드 박물관 구성 박물관은 크게 세 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큰 부지를 차지하고 있는 뮤지엄, 그 옆의 기념품점, 마지막으로 체험과 간단한 요깃 거리를 할 수 있는 카페 및 워크숍 구역이다. 지도상 나누어져 있지만, 뮤지엄과 기념품점 구역은 바로 옆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 쉽게 오갈 수 있다. 뮤지엄과 기념품점 중앙에 표시되어 있는 것이 본관의 중앙 입구이다. * 닌텐도 뮤지엄 조감도 건물의 중앙 입구에 들어가면, 관람객들은 우측에서 안내 데스크를 마주할 수 있다. 여기에서 워크숍 예약을 진행할 수 있는데, 모두 한정된 인원을 시간 단위로 받는다. 신청할 수 있는 워크숍으로는 (1) 만들기 (2) 플레이 두 가지가 있다. 모두는 닌텐도 뮤지엄의 상징인 ‘화투’와 관련된 것으로, 화투 세트를 만들어 보거나 주어진 판에서 화투를 플레이해볼 수 있다. 만들기는 2,000엔(한화로 약 20,000원)으로 약 1시간이 소요되며, 플레이는 500엔(한화로 약 5,000원)으로 약 30분이 소요된다. 플레이의 경우 이미지 인식 및 프로젝션 기술이 사용되어 초보자 역시 쉽게 화투를 접할 수 있다. * 닌텐도 뮤지엄 내부 투시도 뮤지엄 동은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2층의 전시 구역과 1층의 체험 구역이 바로 그것이다. 먼저 관람객들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는데, 그곳에 대부분의 전시품들이 배치되어 있다. 이후 다른 통로를 통해 아래로 내려가면 다양한 게임을 플레이해볼 수 있는 체험 구역이 나타난다. 전시 구성 우리가 일반적으로 ‘전시’라 부를 법한 것들은 대부분 2층의 전시 구역에서 볼 수 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리면 전시 공간의 중앙부로 나오게 된다. * 닌텐도 뮤지엄의 전시 구역. 표시된 구역은 관람 시작 부분이다. 중앙부를 중심으로 10개의 곡면 전시장이 설치되어 있으며, 각 장은 한 가지 종류의 콘솔을 다루고 있다. 자세히 다루고 있는 콘솔로는 패밀리컴퓨터/NES, 슈퍼패미컴/SNES, 닌텐도64, 게임보이, 게임보이 어드밴스, 게임큐브, 닌텐도 Wii, 닌텐도 DS, 닌텐도 2DS/3DS, 닌텐도 스위치가 있으며, 그 외에도 별도의 공간을 통해 기기별/주제별 전시가 마련되어 있다 - 게임앤워치를 위한 공간 역시 작게 만들어져 있다. * 닌텐도 뮤지엄 건축 모형. 간단하게나마 내부 공간 구성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의 콘솔을 다루는 각 전시장은 동일한 구성을 지니고 있다. 모두는 하드웨어를 배치해놓은 직사각형의 전시장을 거대한 곡면의 전시장이 감싸는 형태이다. 곡면의 전시장 위쪽에는 콘솔에 걸맞는 대형 컨트롤러가 있다. 내부에는 지역별 콘솔 판매 비율, 게임 플레이 영상, 소프트웨어 패키지, 주변기기가 전시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지역이나 시기에 따라 바뀌는 패키지의 변화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 전시장 전면부 전시장의 후면부에는 앞서 이야기되지 못한 각 콘솔의 특징과 의미가 전시되어 있다. 여기에는 광고 영상이나 특징적인 기기, 주변기기, 타이틀이 의미 단위로 배치되어 있다. 각각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하여 매뉴얼, 인포그래픽, 패키지가 다양하게 등장하며, 그에 따라 동일한 규격의 전면부와는 달리 보다 자유로운 구성을 보인다. 후면부에는 세 가지의 동일한 표지가 등장한다. 첫째는 금색 원 테두리로 해당 콘솔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시리즈를 의미하고(ex: 젤다의 전설 - 패밀리컴퓨터 디스크시스템), 둘째는 은색 원 테두리로 해당 콘솔에서 나타난 의미 있는 변화/도전을 나타내며(ex: 게임큐브 - 게임보이 어드밴스와 연결), 마지막으로 금색 별 모양의 테두리는 해당 콘솔에서 이루어진 세계 최초의 시도를 뜻한다(ex: 닌텐도64 - 컨트롤 스틱). * 전시장 후면부 이 외에도 전시 구역에는 각종 프로토타입 등 다양한 볼거리가 남아 있다. 특히 닌텐도의 시도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가 테마별로 잘 정리되어 있는데, 화투 회사로부터 닌텐도가 확장되어가는 과정, ‘3D’나 ‘운동’이 닌텐도에서 어떻게 다루어져왔는지의 궤적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시리즈별로도 전시 되어있어 각 시리즈가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 - 이를테면 ‘마리오’ 시리즈엔 어떤 게임들이나 캐릭터들이 있는지 - 살펴볼 수 있다. 2층 전시구역의 관람을 마치고 내려가면 체험구역에 들어갈 수 있다. 체험구역의 중앙부는 전시 공간이기도 한데, 여기서 관람객들은 ‘컨트롤러의 비교’, ‘라이트닝건’, ‘아이디어의 연속성’ 등의 테마 전시를 볼 수 있다. 각종 카드 게임 팩들 역시 전시되어 있다. 여기서 관람객들은 총 8가지 종류의 놀이를 체험해볼 수 있다. 모든 관람객들에게는 체험에 쓸 수 있는 10개의 코인이 티켓을 통해 지급된다. 관람객들은 이 코인을 사용하여 체험에 참여할 수 있다. 각각의 체험 마다 드는 코인의 개수가 다르니 체험 동선을 잘 짜는 것이 필수적이다. 체험 전시 목록과 소모 코인은 아래의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체험형 전시 목록 필자의 경우 총 5개(Zapper & Scope SP, Ultra Hand SP, Love Tester SP, Nintendo Classics, Big Controller)를 체험했다. 기대 이상이었던 것은 러브 테스터(Love Tester SP)였다. 1969년 출시된 휴대용 콘솔을 크게 만들어놓은 이 체험형 전시는 러브 테스터가 무엇인지를 간단하고 재미있게 체험할 수 있게 했다. 체험이 마무리되면 스크린쪽에서 사진이 자동으로 촬영된다. 이는 닌텐도 뮤지엄 개인 페이지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 닌텐도 뮤지엄 개인 페이지. 체험한 활동의 결과와 사진을 확인할 수 있다. 1층의 체험구역까지 관람을 마치면 퇴장 구역을 통해 전시 동을 나가게 된다. 관람객들은 긴 통로를 따라 걷게 되는데, 벽면에는 그동안 출시된 닌텐도의 제품들이 역순으로 전시되어 있다. 즉, 닌텐도 스위치로부터 시작하여 화투로 끝이 난다. 통로 끝에는 닌텐도 뮤지엄에서 제일 오래된 화투 수납함(Nintendo Storage Shelf for Hanafuda Label)이 배치되어 있다. 전시 총평 닌텐도 뮤지엄의 전시는 관람자 스스로 의미를 발견하도록 유도한다. 일반적인 박물관들이 서문이나 설명을 통하여 의미를 전달한다면, 닌텐도 뮤지엄에서는 줄글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각 구역에는 간단한 키워드 정도만 쓰여져 있었으며, 전시품과 기호들 만이 배치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정해진 관람 동선이 없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대부분의 전시 공간은 한두 개의 동선을 바탕으로 설계되지만, 닌텐도 뮤지엄의 전시 공간은 중앙에서 출발해 원하는 방향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 있었다. 그 결과, 보다 자유로운 방식의 관람이 가능했는데, 관람 당시도 사람들이 관심사에 따라 뿔뿔이 흩어지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렇게 관람객이 스스로 생각하고 탐구하고, 행동하게 하는 전시 방식은 정말 닌텐도스럽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정보는 제공하되 독해 방식을 특정하지 않음으로써, 자유롭게 생각하고 탐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닌텐도가 그동안 추구해온 방향성과도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전시 방식에서부터 닌텐도스러움을 전달했다는 점에서 앞서 미야모토 시게루가 이야기한 목표 역시 상당수 달성된 것이 아닐까 싶다. 게임 아카이빙과 닌텐도 뮤지엄 닌텐도 뮤지엄은 ‘닌텐도’에 대한 박물관으로, 게임 자체에 대한 박물관이라 보긴 어렵다. 닌텐도 뮤지엄이 전시하는 것은 닌텐도의 족적이고, 이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닌텐도의 가치와 철학이다. 그러나 닌텐도라는 기업이 게임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고려한다면, 게임에 대한 전시를 논하는 데에 있어 닌텐도 뮤지엄은 좋은 사례가 되어준다. 그렇다면 게임을 전시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게임 아카이빙’이 어떤 것인지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게임 아카이빙이란 게임과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 보존, 분류하는 일련의 과정을 뜻한다. 이는 게임을 단순히 보관하는 것을 넘어, 게임이 가진 문화적, 역사적, 학문적 가치를 보존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자료를 관리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게임기나 게임팩을 모으는 것만이 게임 아카이빙이 아니며, 게임을 모으고 전시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방식이나 내용이 게임의 역사적 맥락과 문화적 중요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면 적절한 아카이빙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아카이빙의 핵심은 보존과 선별인데, 역사적 가치와 연구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원형에 가깝게 자료를 보존해야 하며, 결코 모든 자료를 모을 수 없기에 의미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적절히 수집해야 한다. 비디오 게임의 경우 보존 작업이 특히 문제가 된다. 게임이나 게임기의 물리적인 외형 뿐만 아니라 장치의 작동 기능, 소프트웨어 역시 보존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단순히 외형만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소프트웨어와 데이터를 온전히 유지해야 하는 것은 매우 힘든 작업이다. 게임 소프트웨어는 특정 하드웨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복잡한 기술적 문제가 수반되기도 한다. 더불어, 비디오 게임의 물질적 특성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게임을 보존하는 일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물성이 없는 대상을 어떻게 수집하고 보존할지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에 착안하여 클라우드 컴퓨팅(Cloud Computing)기술이나 에뮬레이터(Emulator) 등이 사용되고 있으나, 이들 역시 게임의 원형이나 사용자 경험을 온전히 보존하지 못할 수 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수집을 넘어 전시를 진행하는 데 있어 사인은 더욱 복잡해진다. 게임은 ‘플레이’를 핵심으로 삼는 상호작용 매체이기 때문에, 단순히 누군가의 플레이 화면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게임을 ‘전시’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행위성을 전시하는 것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관람객이 전시품을 만지고 체험하게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대상의 원본성을 훼손할 수 있으며, 대개 한 번에 한두 명만 수용 가능한 비디오 게임의 특성상 플레이의 전 과정에 관람객들을 참여시키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하여 닌텐도 뮤지엄에서 제시한 해답은 게임의 플레이를 나머지 것들과 분리시켜 전시하는 것이었다. 닌텐도 뮤지엄의 전시는 크게 전시와 체험이라는 두 가지의 섹션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먼저 2층에는 게임기, 게임팩, 광고물, 매뉴얼 등이 의미 단위로 전시되어 있었고, 1층에는 게임과 게임기의 기능 및 특징을 강조한 체험 거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플레이에 관한 부분은 원본을 그대로 보이기보다는 게임과 게임기의 기능 및 특징을 강조한 형태의 체험장을 새롭게 구성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관람객들이 게임 또는 게임기기가 어떠한 행위성을 지니는지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이와 같은 전시 방식은 원본의 역사와 의미를 설명하면서도 관람객들에게 플레이 경험을 전달하는 데 유용하고, 또 원본을 잘 보존하는 데에도 효과적이다. 다만 닌텐도 뮤지엄의 방식에 역시 한계는 존재한다. 닌텐도 뮤지엄의 체험관은 원본의 플레이 경험을 그대로 제공해주기 어려우며, 더욱이 플레이 타임이 긴 경우나 MMO 등 다양한 사람들이 개입하는 플레이 경험은 충분히 전달하기 힘들다. 따라서, 게임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는 새로운 전시 방식과 방법론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게임 아카이빙과 게임을 다루는 전시에 대한 논의가 더 활발히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참고자료 강승진 (2024, 9, 25). [인터뷰] 닌텐도의 살아있는 역사, '미야모토 시게루'를 만나다. <인벤>. URL: https://www.inven.co.kr/webzine/news/?news=299543 (2025, 1, 3 열람) 닌텐도 뮤지엄 공식 홈페이지 ( https://museum.nintendo.com/en/index.html ) Nintendo Museum Direct ( https://youtu.be/JApUMBscKOc )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연구자) 이연우 함께하는 게임에 관심을 가지고 게임의 관계성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게임으로 다함께 즐거워지길 바랍니다.

  • 게임의 문화적 존재론: 천출(賤出), 기술적 총아, 참여문화

    이 작품의 결말은 AR 안경을 쓰고 이루어지는 놀이와 장난스러운 일이 등장인물의 연애 관계를 넘어 트라우마를 발생시키고, 이러한 과정에서 이를 사용하는 이들의 생명을 위협하게 되면서 파국을 맞게 된다. 부모들은 AR 안경을 압수해버리려고 하는데, 이 때 주인공인 유코와 그의 친구들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한 번 그 세계에 몸담아서 그 세계를 알아버렸기 때문에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는 게임의 세계를 이미 경험해버렸기 때문에 이제 게임 이전 시대로 되돌아 갈 수 없다. 그렇다면 게임이 만들어 낸 달콤함과 고통 모두를 인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 Back 게임의 문화적 존재론: 천출(賤出), 기술적 총아, 참여문화 01 GG Vol. 21. 6. 10. 지금으로부터 십몇 년 전 이름을 대면 알법한 대기업 회장님 앞에서 ‘메타버스’란 키워드를 소재로 신사업 기획 프레젠테이션을 할 기회가 있었다. 린든 랩이 만든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라는 가상 세계가 메타버스란 키워드로 주목받던 시절이었다. 그 때 같이 그 기획안을 준비하던 그 대기업의 부장은 우리 팀에 이런 주의를 자주 주었다. “회장님은 게임을 정말 싫어하세요. 자제분들에게도 절대 게임은 못하게 하시거든요. 그래서 신사업 기획에 우리 안이 절대 게임으로 보여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프레젠테이션에서 게임의 ‘게’자도 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기획은 아뿔싸! <세컨드 라이프> 같은 메타버스의 저작 툴의 개념과 그 당시 유행했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같은 MMORPG를 결합한 형태였던 것이다. 그 프레젠테이션에서 게임의 메커닉과 같은 핵심 요소들은 회장님이 게임을 싫어하신 나머지 처음에는 ‘재미요소’라는 단어로, 그 뒤에는 영어 단어 ‘funness’로 대체되었다가 최종 본에는 아예 빠지게 되었다. 물론 겉은 메타버스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분명히 사용자의 유입을 유도하기 위해 게임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는 소프트웨어를 게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상황은 매우 아이러니하면서 동시에 게임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 〈Second Life〉. 메타버스와 같은 새로운 플랫폼을 개발하여 부를 축적하고는 싶지만 이러한 플랫폼의 서비스가 게임이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인식은 게임과 게임을 플레이하는 행위 자체가 일반적인 사회의 기준으로는 별로 가치 없고 쓸모없는 행위라고 판단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이러한 게임 혐오 심리에는 게임이 문화적으로 무가치하다는 인식이 잠재되어 있다. 게임에 대해 무지한 사람일수록 게임에 대해 더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지만, 이러한 게임 포비아는 세대와 연령을 가리지 않고 게임을 근본 천출(賤出)의 문화로 간주해 왔다.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감상하는 행위는 이어질 노동을 위한 휴식과 투자로 간주되지만,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시간 낭비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그간 정치권과 미디어, 여성계, 종교계 등에서 주도했던 셧다운제, 쿨링오프제, 게임중독법, 게임 중독 질병코드 등재 등의 여러 게임규제들은 게임이라는 새로운 미디어가 가지고 있는 매체성을 기존 사회 가치에 반하는 것으로 자리매김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해왔다. 그 이면에는 정치권과 미디어를 비롯한 주류 사회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젊은 세대에 대해 두려워하는 부분이 내재되어 있기도 하다. 그동안 한국 사회는 끊임없이 교육과 노동을 가장 중요시하는 가치 강박을 그 이데올로기로 내세워왔다. [1] 따라서 자기 자식과 가족들을 그 교육과 노동의 장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다양한 대중문화들을 늘 희생양으로 삼아왔다. 7-80년대에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그런 희생양이었다면, 게임이 10대와 20대 사이에서 보편적인 대중문화 양식으로 자리 잡은 90년대 이후에는 게임에 대한 국가적인 규제와 미디어의 비판이 뒤따르게 되었다. 이러한 백래시 현상의 기저를 살펴보면 게임이 다른 매체보다 대중적으로 사랑받아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작용도 컸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2020년 대한민국 게임백서에 따르면 전 국민의 게임 이용률은 70.5%에 달한다고 한다. [2] 그 중 10대의 게임 이용률은 91.5%에 달하며 20대 85.1%, 30대 74.0%, 40대 76.6%, 50대 56.8% 등으로 거의 전 연령대에 걸쳐 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0년대 이후 한국 게임이 보여준 산업적인 성장과 양적 팽창은 다른 문화콘텐츠를 압도할 정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가진 자부심의 크기는 매우 작아 보인다. 2019년 5월 세계보건기구(WHO)에서 게임 이용 장애의 질병코드 등록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자 국내에서도 게임업계와 학계 및 협단체를 중심으로 이에 반대하는 여러 움직임들이 일어났다. 그 때 제기된 운동 중 하나가 주로 SNS를 배경으로 하여 ‘게임은 질병이 아닙니다. 게임은 문화입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거는 것이었다. 전 국민의 70% 이상이 여가 선용을 위해 플레이하는 게임이 대중문화 중 하나가 아닐 리가 없지만, 이러한 운동은 온라인에서 게임 사용자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연매출 15조가 넘어가는 게임 업계의 산업적인 기여 대부분은 확률형 아이템과 강화형 시스템을 통해 이룩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돈을 더 낸 사람이 게임에서 더 유리한 구조를 차지하는 ‘페이 투 윈(Pay to win)’ 시스템이 국내 게임시장의 주류가 되면서 그간 셧다운제, 쿨링오프제, 게임중독법 발의 등과 관련하여 항상 게임업계의 편이 되어주었던 사용자들의 성원이 이제는 게임 업계에 규제를 해달라는 청원으로 바뀌어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처럼 게임업계와 학계 및 협단체를 중심으로 제기한 ‘게임은 문화다’ 운동의 저변에는 그간 사회로부터 근본 천출의 문화로 취급받아온 억울함이 내재되어 있다. 게임을 만드는 쪽에서 ‘게임은 문화다’라고 주장해버리면서 그간 일반적인 사회 통념상 게임은 문화적인 결격 형태에 해당해 왔다는 것을 시인한 셈이기 때문이다. 확률형 아이템과 강화형 시스템이라는 국내 게임업계의 원죄가 존재했기 때문에 그러한 자격지심이 표출되었을 수도 있다. 다만 게임을 문화라고 주장할 수 있는 다양한 긍정적인 사례들이 대부분 해외의 사례였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게임 사용자들에게마저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업계 자체의 운동으로 끝나버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게임업계가 결연함만을 보여주는 대신 좀 더 의연하게 대처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게임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이 좋지 않은 것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게임을 단순히 문화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확률형 아이템 등에 대해 반성하는 자세를 보였으면 사용자들의 시선은 지금보더 훨씬 더 우호적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돈은 돈대로 벌고 싶고 문화로 인정도 받고 싶은 모순된 2가지 감정이 착종되면서 “게임은 당연히 문화가 맞는데, 왜 주변에 문화로 인정을 받아야 하지?”라는 의문이 생기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게임이 문제적인 매체가 된 것은 미구엘 시카트가 지적한 바대로 ‘게임이 행동을 유도하는 규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 [3] 이다. 행동을 유도한다는 것은 게임을 다른 매체와 구분시켜주는 결정적인 차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행동을 유발하면서 연쇄적으로 게임 내의 다음 상황에 집중하도록 강제하는 역할을 한다. 다른 매체와 달리 게임은 플레이어를 위해 플레이어가 참여할 시공간의 빈틈을 만들어 놓고 그 틈을 플레이어로 하여금 채우게 만든다.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게임 속의 시공간은 자신이 들어가서 채워 넣고 행동해야 할 무대가 된다. 이 때문에 게임은 사용자들에게 참여할 공간을 마련해주면서 지속적인 몰입을 유도할 수 있는 환경을 창조해 냈다. * 〈디스 워 오브 마인〉의 한 장면. 또한 게임 내에서 발생하는 행동은 필수적으로 가치의 평가와 직결된다. 게임은 작품 내에서 사용자들에게 특정한 행동을 하도록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특정한 행동을 촉구하는 주요한 설득적인 매체로 기능하게 된다. 최근 10년간 게임 플레이어를 대상으로 다양한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소셜 임팩트 게임(social impact games)의 창작이 급속도로 늘어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소셜 임팩트 게임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늘 언급되듯 <디스 워 오브 마인(This War of Mine)>이나 <미싱(Missing)> 같은 해외 사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국내에서도 제주 4.3사건의 비극성에 대해 초점을 맞춘 <언폴디드> 시리즈, 시리아 난민의 독일 정착 문제를 시뮬레이션 한 <21 데이즈>,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독립 운동을 벌였던 최재형 선생의 일대기를 조명한 <페치카> 같은 소셜 임팩트 게임들이 활발하게 창작되었고 주요 인디게임 공모전에서 입상을 해왔다. 게임의 표현력이 정교해지고 시스템적으로 플레이어를 설득하는 연출방식이 개발자들에게 공유되면서 이제 게임은 새로운 세대와 소통하고 그들을 설득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매체로 거듭나고 있다. 따라서 “게임은 문화인가?”라는 질문을 좀 더 상세하게 파고들기 위해서는 사실 먼저 ‘게임’과 ‘게이밍(gaming)’를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게이밍’이란 실제 게임을 플레이하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게임 플레이 주변에 전유되는 다양한 활동들 즉, 유튜브나 트위치로 게임 방송보기, 게임 웹진에서 게임과 관련한 정보와 소감 나누기 활동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게임은 그 자체로 일정한 가치를 지닌 문화상품이며, 게이밍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문화적인 행동 양식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게이밍이 보편적인 문화적 행동양식이 되기 전에는 이른바 오타쿠로 대표되는 하위문화(subculture)의 범주에서 주류 문화에 대한 대안형태로 존재했었지만, 지금과 같이 전 국민의 70% 이상이 게임하기 과정에 동참하는 상황에서 게임은 동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대표적인 대중문화 매체가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기존의 오타쿠로 대표되던 소속감 높은 하위문화적인 정체성은 다소 느슨하게 약화된 것이 사실이다. 비디오 게임에 온라인 네트워크 환경이 도입되면서 사용자들은 게임 내에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실시간으로 의견을 교환하는 사회적인 활동을 지속할 수 있게 되었다. 스마트폰의 도입 이후 이러한 게임을 통한 사회적인 활동은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일과 놀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매일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유튜브와 트위치, 디스코드에 모여 다른 사용자의 플레이를 감상하고 토론하며, 자신만의 엔터테인먼트를 새롭게 생산해낸다. 마인크래프트와 로블록스 같은 샌드박스나 메타버스 플랫폼에는 사용자들이 만들어 낸 수많은 서브 게임과 미션들로 가득하다. 최근의 게이밍 문화는 점점 혼자 플레이하는 스탠드 얼론(stand-alone) 게임에서 사용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끌어내는 방식으로 진화해 온 것이다. 최근의 메타버스 붐이 다시 일어나면서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보았던 <전뇌코일(電脳コイル)>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 작품은 2025-26년경 다이코쿠시라는 가상의 일본 소도시를 배경으로 이 도시로 전학 온 오코노기 유코와 아마사와 유코라는 두 여학생의 얽힌 인연을 다룬다. 2007년에 제작된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미래를 예견하듯 언제든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AR 안경이 작품 내의 주요 소재로 등장하게 된다. 이 작품의 결말은 AR 안경을 쓰고 이루어지는 놀이와 장난스러운 일이 등장인물의 연애 관계를 넘어 트라우마를 발생시키고, 이러한 과정에서 이를 사용하는 이들의 생명을 위협하게 되면서 파국을 맞게 된다. 부모들은 AR 안경을 압수해버리려고 하는데, 이 때 주인공인 유코와 그의 친구들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한 번 그 세계에 몸담아서 그 세계를 알아버렸기 때문에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는 게임의 세계를 이미 경험해버렸기 때문에 이제 게임 이전 시대로 되돌아 갈 수 없다. 그렇다면 게임이 만들어 낸 달콤함과 고통 모두를 인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 〈전뇌코일〉의 한 장면. 게임 속으로 들어와 버린 우리는 다시 게임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1] 이동연, 「누가 게임을 두려워하랴?」, 『게임포비아』, 커뮤니케이션북스, 2021, p.78. [2] 문화체육관광부, 『2020 대한민국 게임백서』, 한국콘텐츠진흥원, 2020, pp.495-496. [3] 미구엘 시카트, 김겸섭 역, 『컴퓨터 게임의 윤리』,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 p.6.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교수) 이정엽 순천향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게임 스토리텔링과 게임 디자인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인디게임 페스티벌인 부산인디커넥트페스티벌 창설을 주도하고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다.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인디게임 행사인 Independent Games Festival(IGF) 심사위원이기도 하다. 저서로 『디지털 스토리텔링』(공저, 2003), 『디지털 게임, 상상력의 새로운 영토』(2005), 『인디게임』(2015), 『이야기, 트랜스포머가 되다』(공저, 2015), 『81년생 마리오』(공저, 2017), 『게임의 이론』(공저, 2019), 『게임은 게임이다: 게임X생태계』(공저, 2021) 등이 있다.

  • 넷마블 게임 박물관에 느꼈던 게임의 과거와 미래

    2025년 3월 넷마블 게임 박물관이 정식으로 일반 공개를 시작했다. 넷마블 게임 박물관은 아직 정확하게 공지는 되지 않았지만 현재(2025년)기준으로 한국에서 최초로 정부에 등록된 게임을 테마로 한 박물관이 될 가능성이 높다.(국내에서 이름에 컴퓨터가 들어간 등록박물관은 2023년 기준으로 넥슨 컴퓨터 박물관이 유일하다.) < Back 23 GG Vol. 25. 4. 10. Tags: 넷마블, 아카이빙, 박물관, 학예연구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YoungWook Oh Game enthusiast, game programmer, and historian of games. A growing interest in Korean games turned into a hobby of collecting and organizing materials, and has been steadily gathering and archiving them since 2006. Co-authored books including The History of Korean Games and Mario, Born in '81, and contributed as a developer to games such as Dungeon & Fighter, Acropolis, Pony Town, and Timeline Dungeon.

  • 게임에 재현된 농업의 유형들과 재현의 의미에 대하여

    디지털게임이 농업을 다루는 일은 보기 드물지 않다. 적지 않은 게임들이 본격적으로 농업의 과정을 재현함으로써 그 속에서 재미를 만들려고 하고, 농업 자체의 재현이 아닐지라도 농업이라는 개념 속에 우리에게 익숙한 어떤 과정을 게임 규칙 안에 편입시키는 시도를 많은 게임사들이 이어 온 바 있다. 다만 이 때 ‘농업’, ‘농사’라는 것은 무엇인지를 조금 진지한 표정으로 되물어보면, 같은 농업이라는 단어와 개념을 사람들은 서로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고 살펴보며 의미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Back 게임에 재현된 농업의 유형들과 재현의 의미에 대하여 30 GG Vol. 26. 6. 10. 이 글은 논문 [(이경혁, 2026), <농업은 게임에서 어떻게 상상되는가: 디지털게임 속 농업 재현의 유형과 사회문화적 의미>, 농촌사회, vol. 36(1), 349-407] 을 기반으로 다듬어진 글입니다. 논문 원문은 KCI링크( 바로가기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PC 앞 도시 게이머들에게 농업은 어떻게 다가오는가 2020년에는 게임 분야에서 꽤나 흥미로운 사건이 한국과 일본에서 비슷한 시기에 벌어졌는데, 게임 한 편이 두 나라의 농촌진흥청 웹사이트를 마비시킨 일이었다. 동아시아의 주요 식량작물인 벼농사를 꽤나 디테일하게 녹여낸 플랫포머 액션 게임 <천수의 사쿠나히메> 플레이어들은 게임에서 사실상 캐릭터의 성장을 책임지는 벼농사의 디테일을 알기 위해 온갖 농사 관련 정보를 찾아다녔고, 가상의 논을 향한 이 열망은 각 서버들을 뻗게 만들며 뉴스 면을 장식했다. 디지털게임이 농업을 다루는 일은 보기 드물지 않다. 적지 않은 게임들이 본격적으로 농업의 과정을 재현함으로써 그 속에서 재미를 만들려고 하고, 농업 자체의 재현이 아닐지라도 농업이라는 개념 속에 우리에게 익숙한 어떤 과정을 게임 규칙 안에 편입시키는 시도를 많은 게임사들이 이어 온 바 있다. 다만 이 때 ‘농업’, ‘농사’라는 것은 무엇인지를 조금 진지한 표정으로 되물어보면, 같은 농업이라는 단어와 개념을 사람들은 서로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고 살펴보며 의미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정을 다루는 매체로서 디지털게임이 농업을 재현한다는 것은 비농업인구가 훨씬 많은 현대 사회에서 농업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살피고자 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다룬 농업과 농촌의 이야기가 무엇을 함의하는지를 살피는 연구가 존재하는 것과 달리, 게임에서 농사가 다뤄지는 방식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살피는 연구는 없던 상황이다. 이 글은 그 의문에서 출발한 논문, <농업은 게임에서 어떻게 상상되는가: 디지털게임 속 농업 재현의 유형과 사회적 의미>(농촌사회학회, 36호 1권)에서 다뤄진 내용을 정리한 글이다. 논문은 2000년대 이후 디지털게임 속에서 나타난 농업 재현을 크게 다섯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각각의 유형들이 오늘날의 농업과 농촌을 어떤 방식으로 재현하는지를 분석하고자 했다. 게임 속에 재현되는 농업, 농촌에 관한 다섯 가지 유형은 각각 목가적 생활양식, 산업적 경영체계, 생존을 위한 재생산장치, 성장 보조 시스템, 주기 순환의 시간장치로 나타나며, 각각의 유형들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농업과 농촌이라는 관념을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목가적 농업, 산업적 농업, 생존의 농업 첫 번째 유형인 목가적 생활양식으로서의 농업은 <스타듀 밸리>로 대표되는, 이른바 ‘힐링’의 요소가 강하게 결합된 농업과 농촌을 재현하는 유형이다. 도시에서의 틀에 박힌 삶에 염증을 느낀 주인공이 시골로 이주해 농장을 재건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루는 <스타듀 밸리>에서 농업은 그저 작물을 생산하는 것으로만 그려지기보다는 농촌이라는 생활공간과 그 안에서 엮이는 인적 네트워크를 포괄하는 총체적 관계로서 나타난다. 농업이라는 말에 담긴 이른바 ‘농촌성’이 <스타듀 밸리>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재현되는 농업과 농촌의 특성이다. <목장이야기> 등에서부터 이어져 내려 온 농촌성 재현을 중심에 둔 게임들은 농업을 목가적 생활양식의 일환으로 보고자 한다. 경쟁과 위험, 시장과 생산보다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안정과 회복, 그리고 정착의 감각이다. 농업과 농촌을 이처럼 정서적으로 안정된 관계의 공간으로 그리는 것은 ‘이상적 농촌성Rural idyll’이라는 개념으로 이미 다른 매체에서도 나타난 바 있는데, 앞서 이야기한 <리틀 포레스트>나 <전원일기> 등이 농촌을 도시와 대비되는 ‘인간미 넘치는 공간’으로 묘사하는 것들이 대표적이다. 목가적 생활양식으로 농업을 다루는 이러한 게임들은 그 숫자가 많지는 않더라도 사실상 농업 게임을 대표하는 유형으로 꼽히는데, 농업과 농촌을 이처럼 낭만적인 공간으로 그리는 것에 대한 위험성은 이미 다른 매체들에서도 지적된 바 있는 패턴이다. 농촌사회학자 리-앤 서덜랜드는 컴퓨터 앞에서 게임을 통해서만 농업을 접하는 도시 생활자들이 갖게 되는 농업과 농촌에 대한 이미지를 ‘책상 앞 농촌desk-chair countryside’라고 개념화한 바 있는데, 이는 직접 농촌에서 농업을 영유하며 살거나 영화나 소설처럼 누군가 만든 농촌의 이미지를 바라보는 것과는 다른 제 3의 방식으로 농촌과 농업을 이해하는 것임을 지적한 바 있다. 두 번째 유형은 산업적 경영체계로서의 농업이다. <파밍 시뮬레이터>로 대표되는 이 유형은 앞선 유형과는 달리 농업에서 낭만성과 인간관계를 제거한 채 오로지 작물의 생산과 유통, 판매라는 시장 체제 안에서의 농업만을 다루는 유형이다. 이 유형의 게임들은 작물을 먹거리로 보기보다는 공장에서 생산해 시장에 내다 파는 공산품과 마찬가지로 상품commodities의 일환으로 보며, 그 생산과정 또한 자연과의 교감이 아니라 현대화된 장비와 시스템을 통해 대량으로 생산이 이뤄지는 장면을 재현하고자 한다. 농업에 대한 이미지를 둘로 나눈다면, 앞선 유형이 ‘농촌에서의 농업’에 가깝고 이 유형이 ‘영농법인의 농업’에 가까울 것이다. 후술할 다른 유형들과도 가장 구분되는 산업적 경영체계로서의 농업 게임들이 갖는 특징은 오로지 상품 관계로만 농업과 그 산물을 바라본다는 점이다. <파밍 시뮬레이터>는 농업의 생산물을 플레이어가 직접 먹거나 요리하지 않으며, 밀과 옥수수는 오직 판매를 통해 현금화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가치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소규모 가족농이나 마을 단위의 협업을 통해 이뤄지는 한국의 농업보다는 대규모 농지에서 기계화된 농업을 돌리는 북미와 같은 공간에서의 농업에 대한 재현으로 볼 수 있는 유형이다. 세 번째 유형은 아마도 여러 게임 속에 가장 보편적으로 녹아들어 있을 생존을 위한 재생산장치로서의 농업이다.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규칙을 전제한 뒤, 생존을 위한 식량 확보의 일환으로 농업은 서바이벌 규칙을 가진 게임 안에 편입된다. 이름부터가 이 개념을 상징하는 게임인 <굶지마!>가 대표적인데, 처음 게임 시작 부분에서는 채집과 사냥으로 이뤄지던 식량 조달은 이후 농업을 본격화하고 대량생산체제에 편입시킴으로써 구성원의 생존을 안정화하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최종 단계에서는 결국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추게 되는 것이 이 유형의 농업 게임들이지만, 앞선 산업적 경영체계로서의 농업을 다룬 게임들과는 달리 이 대량생산은 대부분 ‘구성원의 생존’을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점차 생산량을 늘려야 하는 대부분의 생존 및 운영시뮬레이션 게임들에서 식량은 부가적으로는 거래 요소이지만 기본적으로는 ‘먹기 위한’ 용도로 활용된다. 먹지 않으면 죽는 게임에서 먹거리를 생산하는, 살기 위한 먹거리 창출이라는 농업의 원시적이고 근본적인 목표가 이러한 유형의 게임 속에서 재현된다. 성장 보조, 혹은 시간장치로서의 농업 네 번째 유형은 성장 보조 시스템으로서의 농업이 다뤄지는 게임들이다. <천수의 사쿠나히메> 와 같은 게임은 먹지 않는다고 굶어 죽는 규칙을 넣지는 않지만, 게임 캐릭터의 능력치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식량을 생산하고 먹어야 한다. 이는 하드코어한 생존 룰이 적용되지 않는 여러 롤플레잉 게임에서도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유형으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와 같은 게임들에서 식량이 일종의 버프로 기능하는 점과 맞물린다. 네 번째 유형은 농업과 먹거리가 갖는 ‘식약동원食藥同原’의 개념 하에 이루어진다. 먹음으로써 몸과 정신이 강해진다는 이 개념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 개념을 밑바탕에 깐 뒤에 이루어지는 두 번째 레이어에 가깝다. 먹음으로써 강해지고, 그 강함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먹을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가 네 번째 유형이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초창기에 버프용 약초를 구하기 위해 리젠되는 지역을 돌던 행위를 ‘무 농사’라고 불렀던 것이 이 맥락과 상통한다. 마지막 다섯 번째 유형은 사실 농업 재현인지 의문일 수 있을 유형으로, 주기 순환의 시간장치로서의 농업이다. 2010년대 서구권을 휩쓸었던 <팜빌>과, 그와 유사한 여러 소셜 네트워크 게임들에서 나타났던 농업을 돌이켜보면 알기 쉽다. 이런 게임들에 등장하는 농업은 작물의 생산과 수확이라는 농업의 뼈대를 갖추고 있지만, 그 구조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 플랫폼이 설계한 재방문 주기, 다시말해 리텐션 구조에 농업의 외피를 씌운 것에 가깝다. 비슷한 소셜 게임들이 모두 특정한 무언가를 만들거나 건설하는 명령을 내린 뒤 몇 시간, 며칠 뒤에 완성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고, 그 중 하나로 농업의 파종 – 수확 순환 개념이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재현되는 농업은 게이머들로부터 농업이 일정한 시간을 기다려야 수확이 가능한 산업이라는 인식을 받음으로써 가능해진다. 씨를 뿌린 뒤 기다렸다 거둔다는 순환의 구조는 게이머들이 플랫폼으로부터 제공받고자 하는 보상을 자연스럽게 기다릴 수 있게 만들어주는 설득력의 요소로 작용한다. 앞서 이야기한 여러 농촌과 농업의 이미지는 이 유형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애초에 이 유형이 유독 모바일, 온라인 기반으로 이용자의 재방문 주기를 설계하는 경우에만 나타난다는 것이 중요한 증거다. 게임으로 농업을 이해한다는 말의 깊은 의미를 곱씹으며 게임이 농업을 다룬다는 말은 이처럼 결코 하나의 방식으로 일반화하기 어렵다. 다섯 가지 유형은 모두 농업을 재현하고 있지만, 살펴본 것처럼 이 농업이라는 개념 자체가 각각의 사람들에게 서로 다르게 이해되며, 어떤 관계망 속에서 농업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게임 속에서 재현되는 농업은 그 의미부터 구조까지 모두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유형을 가로지르는 공통점이 있다면 아마도 현실의 농업이 가지고 있는 고단함 자체는 배제되거나 순화된다는 점일 것이다. 일전의 GG 글에서도 지적된 바 있듯이, 놀이로 기획된 디지털게임의 재현에서 농업의 고단함은 굳이 그려지지 않는다. 현실 농사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부채, 가격 폭락에 따른 대손실, 고된 노동과 자연재해 등은 복구 가능한 수준으로 그려지곤 한다. 농업의 어려움에 대해 목가적 유형은 공동체의 온기로 덮어내고, 생존형은 전략적으로 관리 가능한 위기로 그려내며, 시간장치형은 예측 가능한 타이머로 풀어낸다. 당연하게도 매체로서의 게임이 농업의 모든 면을 담아내야만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애초에 규칙과 반복을 통해 의미를 생산하는 디지털게임에서 그려내는 농업과 농촌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그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없다. 다만 문제는 갈수록 현실의 농업으로부터 거리가 멀어지는 도시거주자 중심의 현대 대중문화 속에서 때로는 낭만화되고 때로는 산업화된 농업의 시스템만을 재현된 매체 안에서 보는 것이 가질 수 있는 매체론적인 문제에 있다. <리틀 포레스트>에 대한 여러 문제제기들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농업과 농촌이라는 개념에 대해 단지 매체의 재현된 결과만으로 과도하게 손쉬운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게임 속 농업을 두고 따져야 할 것은 '얼마나 정확하냐'가 아닐지도 모른다. 더 중요한 건 무엇이 거듭 선택되고 무엇이 거듭 빠지는가, 그리고 그 선택의 패턴이 우리가 농업을 상상하는 방식을 어느 쪽으로 끌고 가는가에 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농업 게임의 재미나 가치를 부정하려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게임 속 농사가 누군가 정성껏 고르고 배열한 한 편의 재현물이라는 사실을 아는 플레이어는 그 경험이 주는 즐거움을 누리면서도 그것이 현실의 농사와 어디서 만나고 어디서 갈라지는지를 함께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농촌진흥청 서버를 마비시켰던 그 엉뚱한 호기심이야말로 농업이 뭔지 모르는 도시민들에게 ‘농업이란 무엇인가’를 한번 더 상기하게 해 준 좋은 기회가 아니었던가.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게임평론가이자 연구자. 2015년부터 게임을 업으로 삼아, 평론가로서는 게임이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을, 연구자로서는 상품으로서의 게임이 사회 안에 자리잡는 구조를 살펴본다. 『81년생 마리오』(2017), 『현질의 탄생』(2022) 등을 썼고, 〈다큐프라임〉(EBS)을 비롯한 다큐멘터리와 여러 매체 연재에 참여했다. 디지털게임을 시간권리상품으로 분석한 연구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게임연구소 '드래곤랩'대표를 맡고 있으며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 <컨슘 미> 리뷰: 개인적 게임의 등장과 먹는 행위의 의미적 변화

    <컨슘 미(Consume Me)>는 여러모로 특이한 면이 많은 게임이다. 중국계 미국인 개발자 제니 지아오 샤(Jenny Jiao Hsia)와 그의 동료 AP 톰슨(AP Thompson)이 개발한 이 게임은 2025년 IGF(Independent Games Festival)에서 그랑프리에 해당하는 시머스 맥널리 상을 수상했다. 글로벌 게임 씬에서 가장 권위있는 인디게임 페스티벌에서 수상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게임 언론에서 이 게임이 리뷰된 사례는 단 한 건도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산업 담론에만 관심 많은 한국의 게임 웹진은 차치하고라도 1,000건이 넘는 스팀 게임 리뷰 중에서도 한국어 리뷰는 단 3건에 불과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메타크리틱에 따르면 <컨슘 미>를 비평한 매체는 17군데로 이 가운데에는 《Edge》, 《Eurogamer》 등 주요 게임 매체를 포함하여 《Guardian》과 같은 종합지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유독 국내에서는 <컨슘 미>에 대한 거의 아무런 비평도 일어나지 않았다. < Back A Review of Consume Me: The Rise of the Personal Game and the Shifting Meaning of Eating 30 GG Vol. 26. 6. 10. Consume Me is a game with many peculiar facets, in more ways than one. Developed by the Chinese American developer Jenny Jiao Hsia and her collaborator AP Thompson, it won the Seumas McNally Grand Prize—the grand prize—at the 2025 Independent Games Festival (IGF). Despite winning at the most prestigious indie game festival in the global game scene, there is not a single instance of this game being reviewed in domestic game media. Setting aside, of course, Korea's game webzines with their interest only in industry discourse, even among the more than 1,000 Steam reviews, Korean-language reviews number a mere three. Why has this happened? According to Metacritic, seventeen outlets reviewed Consume Me , including major game media such as Edge and Eurogamer , as well as general-interest papers like the Guardian . Yet in Korea uniquely, almost no criticism of Consume Me arose at all. This is, above all, perhaps because Consume Me was a personal game—one that transformed Jenny's own story, to a certain degree, into a fictionalized game situation. Of course, given that domestic game journalism has developed within an industry-centered grammar, this response may, in a way, be only natural. Korean game discourse has long developed around industrial elements—market size, platform competition, business models, updates, e-sports—and as a result, a critical language for reading games at the level of personal expression or performative experience was relatively hard to accumulate. Yet individuals who had been developing small games survived within the market from the late 2000s on, switching their weapons little by little to Flash, Unity, HTML5, and so on, and this became the occasion for a democratization of indie game development. Anna Anthropy, who in 2012 wrote a book titled Rise of the Videogame Zinesters , regards games in it as a tool of artistic and personal expression and emphasizes the message that anyone can become a creator.[1] As the accessibility of game-making tools increased, she argued, one could make games expressing personal experiences and emotions even without programming skills. She explained this current by way of the "zine" movement, the self-publishing culture of the past. The book's subtitle is "How Freaks, Normals, Amateurs, Artists, Dreamers, Drop-outs, Queers, Housewives, and People Like You Are Taking Back an Art Form." Jenny, who developed Consume Me , was no more than a sensitive teenager—keenly attuned to dieting and good at drawing—but on entering the NYU Game Center and meeting a partner who could shore up the programming, she became able to turn her own autobiographical story into a game. Consume Me takes as its material the obsession with dieting that Jenny experienced during her high school years. The player takes Jenny's position and, through puzzle-form minigames, must hit calorie targets when eating, and when these are exceeded, must meet the calorie target through exercise, household chores, and the like. But as the chapters progress, the tasks and events imposed on Jenny pile up. In Chapter 2, she has to save money for a date with her boyfriend, which has to be covered by helping with chores and getting an allowance from her mother. In Chapter 3, a rival appears at school and she must win the contest against them, while at the same time the calorie-management figures rise. And in Chapter 4, she has to keep up a long-distance relationship with her boyfriend, where sending messages or making video calls all mortgages what little free time remains in the day. Before long, exercise gets pushed back, and laundry, cleaning, walking the dog, studying, and the rest are easily neglected. * A mealtime scene from Consume Me The progression of Consume Me unfolds, on the whole, through this form of dieting and time management. Up to this point, the method differs little from existing game mechanics. But the developer's mechanical framing of the act of eating, and the attitude with which the game brings itself to a close, show a difference from games faithful to genre grammar. Generally, the act of eating in games has been keyed to the grammar of reward systems—the recovery of energy, growth through buffs, and so on. But in Consume Me , the act of eating leads to guilt and to self-censorship through calorie calculation, and this expands into the psychological anxiety of Jenny, the protagonist within the game. Another interesting point is the hand-drawing-based visual style of Consume Me . Jenny's expressions and gestures within the game, the shapes of the food, the interface design—all maintain a doodle-like exaggeration and cuteness, which keeps the player from viewing the in-game situations only through an excessively tragic or pathological lens. Jenny is engulfed in anxiety as she endlessly calculates calories and fails at self-management, but the game does not reproduce this only in a heavy, depressive way. Rather, Consume Me maintains a somewhat comical, self-deprecating distance while making us observe self-loathing and obsession. This mode of expression seems closer to having the player follow, for a moment, the wavering performative structure of a human being than to pushing them into cheap pity or self-pity. The mealtime scenes of Consume Me proceed as simple minigame-style puzzle-fitting. The foods appear in forms like Tetris blocks, and through these you must fill Jenny's stomach to the brim. But there are always a block or two's worth of cells you can't fill, and this lowers Jenny's satiety figure. To make up for it, you can get by—buying a one-cell block, a cheese topping, for $3 at the shop and then fitting the puzzle. Only, this cheese topping is very high in calories relative to its block size and also high in price, so it can't be used often. The player therefore always has to keep low-calorie but high-priced vegetable dishes and the like stocked, expensively, at the shop, and for this must perfectly help with the mother's chores to top up the allowance. But if you stay faithful only to chores and the act of eating, time runs short for studying, exercising, and dating the boyfriend, so rigorous planning and time management according to schedule and events become necessary. Yet Consume Me shakes up this time-management system by inserting, midway through the schedule, random events the player can hardly control. The ideal body, diet, and self-management the player pursues are, at a glance, set up as in-game goals, but the game continually inserts points at which this ideal body and self-management are bound to fail. Even without recalling the rhetoric of failure[2] from Ian Bogost's famous game-theory book Persuasive Games , this game has made us retrace that process of failed self-management we have experienced countless times in daily life. The failure one comes to experience in Consume Me can be seen as closer to a device that makes you experience how unsustainable modern society's self-management ideology is, rather than simply meaning a failure of self-management. Strictly speaking, however, Consume Me does not use the extreme rhetoric of failure of works Bogost cited as examples in Persuasive Games , such as September 12th or McDonald's Videogame . The game's ending, in several events, makes you traverse back and forth between a procedurality and causality so rigidly close to our lives and a humanity whose outcome cannot be known. Moving into Chapter 3, Jenny's boyfriend Oliver goes into a brief long-distance relationship, and here the game decrease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by –3 each day. Chatting by message recovers +2 in the relationship, and a video call recovers +5, but message chat consumes one hour and a video call two hours. Since the free time given in a day is only two hours, the player always has to invest at least about an hour in chores, studying, exercise, and so on, and spends the remaining hour on message chat with Oliver. Yet despite this investment, repeating only message chat will inevitably drive the two's relationship toward catastrophe. After many twists and turns, on moving into Chapter 4, Jenny faces a situation where, after a consultation with the college guidance counselor, she has to settle on a target university and write an admissions essay. Since this demands still more time, Jenny tearfully confides the situation to Oliver. At this Oliver kindly replies, "Our relationship isn't a video game. Do I look that petty to you? Even if you don't contact me for a week or so, I think our relationship is fine. So focus on writing your college admissions essay." * A video-call scene from Consume Me In this way, Consume Me shakes up the trap of the mechanical pattern inherent in the game's procedural rhetoric (or rhetoric of failure) itself, foregrounding the strengths of the personal game. In the end, at some point in this game, the player comes to realize that it is hard to sustain this mechanical self-management mechanic perfectly. In that process, Jenny, the protagonist within the game, comes to realize for herself that she cannot perfectly accomplish dieting, romance, exercise, college admissions, and friendships all at once. And then she arrives at the conclusion that, because life goes on anyway, she has to live on somehow. This shows, in a way, the process of "self-compromise" by which our lives are always sustained—something with a face very different from the procedurality of the digital game. To show how the mechanical face of a game's procedurality can be supplanted by the I-novel-like individuality of the modern novel, Consume Me pushes the player into a structure of agency. The philosopher C. Thi Nguyen has explained games as an art form of "temporary agency," in which the player temporarily borrows another structure of agency.[3] Just as the I-novel put the interiority of the modern subject into language, the personal game makes the system that constitutes the contemporary personal subject playable and makes us think within it. And after internalizing the player into thoroughly following the system of procedurality, it arrives at an ambiguous ending that defends humanity by deftly twisting, through the flaws within that structure, the point that our lives are not composed of procedurality alone. In fact, the first time I played Consume Me was at BIC in 2019. At the BIC held the year just before COVID broke out, I was serving as chair of the jury, and the Consume Me I played then was a game dealing only with the current Chapter 1—that is, the eating disorder Jenny had experienced. That incomplete build was somewhat closer to a social impact game than the present one, and the individuality did not protrude much. But after five years of development, the Consume Me released on Steam returned, with added volume, as a more composite personal game combining romance, college admissions, friendships, and more. To be sure, the clear problem-framing of the eating disorder was somewhat diluted, and the density of closed obsession that the early demo had possessed was also reduced. Yet over those five years of development, Consume Me changed, beyond a simple social impact game, into a personal game encompassing the structure of life as a whole—romance, college admissions, friendships, labor. The commercialized Consume Me became a far richer and more playable game, but precisely because of that richness, the suffocating sense of self-management that the early demo had shown was somewhat eased. If the early Consume Me was a game that pushed the player into a single obsessive performative structure, the finished Consume Me came closer to a game that shows the fact that, even within that structure, the human being can never, in the end, be fully proceduralized. * The various weekly goals and self-management system of Consume Me So why, then, have such personal games rarely emerged in contemporary game development culture? The explanation that large-scale game development, being collective creation, made personal expression impossible, and that only with indie games could solo developers or small teams finally speak such stories aloud—this, I think, is only half right. The game is a medium required to have a structure of agency that makes you play it in a particular direction, and a system transparency in which a clear purpose of play must be set. In other words, that the medium of the game has long been designed in a way unsuited to expressing "personal experience" corresponds, I would suggest, to the other half of the explanation. Compared with the media of literature and film, which relatively quickly accepted an individual's depression, desire, obsession, and trivial emotions as objects of expression, the game long developed its systems only around victory, mastery, conquest, efficiency, and clear goals. In other words, the game needed a simplified rationality for clear goals, calculable values, optimizable choices, and the like—and the personal game, using various rhetorical devices, is expressing, little by little, the eating disorders, depression, self-loathing, anxiety, and obsession that had been hard to express in games. For this reason, the personal game does not stop at being merely a game that handles a personal story. Consume Me , by twisting the structure of agency granted to the player, depicts the ordinary individual—the wavering human being—who experiences emotional depletion while enduring repetitive obsession, self-surveillance, and the failures that follow from imperfect choices. If the modern I-novel discovered the interiority of the modern person, the contemporary personal game makes playable the very performative structure of the contemporary human who lives within the logic of self-management and optimization. And Consume Me , by ceaselessly inserting contingency, failure, and emotional wavering into that structure, shows the fact that the human being can never be fully proceduralized. [1] Anna Anthropy, Rise of the Videogame Zinesters (Seven Stories Press, 2012). [2] Ian Bogost has noted a rhetoric of failure whereby a game developer, through the design of mechanics, deliberately inserts a process of failure into the game, making the player experience failure and thereby arrive at an intended realization. This rhetoric of failure is recognized as a game-specific rhetoric difficult to realize in other media. Ian Bogost, Persuasive Games: The Expressive Power of Videogames (The MIT Press, 2010). [3] C. Thi Nguyen, Games: Agency as Art (Oxford University Press, 202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eong Yeop Lee Professor in the Department of Culture & Contents at Soonchunhyang University. Researches game storytelling and game design as central concerns, and led the founding of the Busan Indie Connect Festival—a leading indie game festival—where serves as head of the jury. Also a juror for the Independent Games Festival (IGF), one of the most prestigious indie game events internationally. Books include Digital Storytelling (co-authored, 2003), Digital Games: A New Territory of Imagination (2005), Indie Games (2015), Stories Become Transformers (co-authored, 2015), Mario, Born in '81 (co-authored, 2017), The Theory of Games (co-authored, 2019), and Games Are Games: Game × Ecosystem (co-authored, 2021).

  • [인터뷰] 게임은 현대미술의 탈출구가 될 수 있을까 - MMCA서울관 〈게임사회〉 展

    국내 국립 미술관에서 게임을 주제로 한 전시가 기획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게임사회〉 전에 대한 언론과 소셜미디어의 관심은 예상보다 뜨거웠다. 흔히 접하기 어려운 주제의 전시를 사람들은 어떻게 감상하고 있을까? 이번 호에서 GG는 〈게임사회〉 전에 다녀온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왔다. < Back [인터뷰] 게임은 현대미술의 탈출구가 될 수 있을까 - MMCA서울관 〈게임사회〉 展 12 GG Vol. 23. 6. 10. ‘게임’하면 떠오르는 장소로 미술관이라 대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다소 독특한 형식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게임과 현대미술이라는, 얼핏 보면 낯선 두 영역이 손을 맞잡은 것이다. 국내 국립 미술관에서 게임을 주제로 한 전시가 기획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게임사회〉 전에 대한 언론과 소셜미디어의 관심은 예상보다 뜨거웠다. 흔히 접하기 어려운 주제의 전시를 사람들은 어떻게 감상하고 있을까? 이번 호에서 GG는 〈게임사회〉 전에 다녀온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왔다. Q. 반갑습니다. 먼저, GG 인터뷰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인터뷰는 〈게임사회〉 전시에 대한 시민들의 솔직한 감상평을 듣는 자리로 구성했는데요. 〈게임사회〉 전시는 어떻게 알고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하는 전시는 대부분 오는 편이라, 이번 전시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왔어요. 〈게임사회〉한다고 해서 게임으로 미술적인 것을 어떻게 풀어낼지 궁금했어요. -오늘 친구를 만나서 점심 따로 먹고 차 가져왔는데 카페 가는데, 주차되는 곳 가려고 하다보니까 여기 오게 되었어요. -저도 근처에서 약속 잡은 김에 실내에서 시원하게 있으려고 왔어요. 전시 정보는 트위터 통해서 예술가와 게임업계분들 통해서 접하게 되었어요. -저는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를 따라 예술 전시를 많이 봐왔고, 지금은 게임을 좋아하는데, 〈게임사회〉는 게임이라는 정박지가 있으니 그 지점에서 무엇을 펼쳐나갈지가 궁금해서 오게 되었어요. Q. 〈게임사회〉 전시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은 어떠셨나요? -전시 자체가 많은 사람이 공감하기 위해서 구성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대중을 겨냥하고 만든 것은 아닌 것 같아요 . 애초에 타겟팅이 게임을 좋아하는 대중은 아닌 것 같고, 게임을 도구로 쓰는 현대미술 작가들의 전시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연령은 크게 상관있는지 모르겠는데 확실히 게임 전시는 아닌 것 같았어요. 게임 개발자로서 이건 게임 전시는 아니라고 느껴졌어요. -웹에서 접했던 느낌과의 차이가 있었어요. 북미 인터넷 밈에 절여진 느낌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는 더 친절하고 소프트했어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그래서 라이트한 유저들 그러니까 오락실 게임을 기대하고 오는 유저들한테는 좀 많이 기대와 다를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하드코어 게이머를 위해서 만든 전시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 그래서 이거는 여느 미술 작품도 마찬가지겠지만, 오히려 여기서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이 너무 층이 나눠져 버리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흔히 말하는 게임 박람회와 달리 국현에 무슨 전시하는지 모르고 그냥 우연히 왔다가 가볍게 플레이해보고 가기에는 괜찮은 전시가 아닌가 싶어요. Q. 그렇다면, 오늘 전시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으실까요? -저는 완전 어렸을 때 보던 게임이랑 요즘에 나오는 그래픽 좋은 것들을 시간별로 보는 게 좋았어요. 1세대 게임 중에서 특히 ‘팩맨’이 공격성을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를 이번에서야 알게 되었어요 . 단순한 구조인데 이런 의미를 드러낼 수 있구나 했죠. -어릴 적에는 TV 앞에 가서 게임팩을 연결해서 마리오를 봤는데, 영화관처럼 의자에 앉아서 마리오를 본다는 것? 사실 마리오는 영화관 의자랑 안 어울리는 작품 구성이잖아요. 그런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것이 주는 감각들이 흥미로웠어요. -전시 초입부에 텍스트 기반 게임(반지하게임즈의 ‘서울 2033’)을 전시해놓았잖아요. 거기서 광고가 틀어졌는데, 처음엔 이게 가짜 광고인가 했어요. 그런데 진짜더라고요. 저는 이게 미술관의 실수라기보다는 오히려 게임 내적인 것들이 미술관에 침투하는 느낌 이 들었어요. 실제로 이런 생각을 의도한 건가 싶었어요. 사실 우리가 게임할 때 광고는 일상적인 경험이기도 하잖아요. 의도치 않은 것들이 미술관에 들어오는 건 꽤 즐거운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한편으로 ‘서울 2033’이 무료버전으로 깔려 있는 것은 전시가 미흡했다는 생각도 들어요. 보통 사람들은 전시 준비가 안 되었다고 생각할 것 같아요. -저도 ‘서울 2033’이 기억나는데, 그 게임은 음성 인식도 되고, 장애인도 즐길 수 있다고 써있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저는 1인 게임 개발에 관심이 있는데, 정확히 작품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정체성 게임(다니엘 브레이스웨이트 셜리의 ‘젠장, 그 여자 때문에 산다’)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결과를 마주하게 하는 게 재밌었어요. 저도 제 정체성과 관련해 어드벤쳐 게임 만드는 것을 생각 중에 있거든요. -마지막 영상(김희천 작가의 ‘커터3’)도 두 번을 봤는데, 첫 번째랑 두 번째가 다르더라고요. 처음에 봤을 때보다 두 번째 봤을 때, 게임 속의 캐릭터가 변화하는 게 보이더라고요.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모호해지는 것이 게임과 현실의 경계를 나타낸 것 같아서 두 번째 봤을 때 더 재밌게 받아들여졌습니다. * 반지하게임즈의 ‘서울2033’ Q. 이번 전시에는 관람객의 상호작용(interaction)할 수 있는 컨텐츠가 많았는데요. 전시에서 인터랙션 경험들은 어땠나요? -사실 워낙 미술이 어렵잖아요. 게다가 제가 게임이랑 친한 사람은 아니어서 조금 난해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어요. 그래도 생각보다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게 많았는데, 요즘 전시 트렌드와도 게임이 잘 맞는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현대 미술 쪽으로 접근하면 재밌을 수도 있겠는데, 저는 일단 영상물에 집중을 잘 못해서 전시 볼 때도 영상물을 오랫동안 안 보는 편 이거든요. -인터랙션 할 시간이 충분치 않았어요. 메시지를 인식할 시간을 줘야 해석하거나 할 텐데 시간이 충분치 않다보니 그러지 못했어요. 어떤 기기는 사전 예약해야 한다던데 심지어 주변에 사람이 없는데도 예약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었던 게 아쉬웠어요. -제가 갔던 시간은 그래도 사람이 조금 좀 없는 시간이었거든요. 저는 거기 있는 모든 게임들을 이렇게 그래도 해보려고 노력했는데도 각 콘텐츠 당 플레이 타임이 평균적으로 1분을 안 넘겼던 것 같아요. 사람이 없었음에도 뒷사람이 기다린다는 생각에 그거를 제가 계속 잡고 있기에 좀 미안하더라고요. -저는 미술관에서 만들어지는 인터랙션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캐치가 안 되더라고요. 게임 플레이야 당장 유튜브를 켜도 볼 수 있고, 미술관에서는 대체로 모르는 사람들이 플레이하는데 그 인터랙션 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 그리 의미가 있다고 느껴지진 않았어요. 미술관이 현실과 전혀 다른 공간이고, 전혀 다른 논리가 작동한다면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오히려 그런 관점 자체가 미술관을 너무 신비화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게임적 질감은 흥미로웠지만, ‘게임적 질감을 통해 인터랙티브 전시를 하는 것이 현대미술에서 그렇게 새로운 것인가? ’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Q. 말씀하신 내용들을 듣다보니 이번 전시에서 아쉬운 점들도 적잖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미술관 설명이 어렵잖아요. 조금 더 쉽게 풀었으면 어땠을까요? 미술관에 자주 오지 않는 분들을 위해서 조금 더 쉬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반대로 기존의 미술작품과 달리 이걸 너무 친절하게 해설해준다고 생각했어요. -게임을 전시하는 것은 난해한데, 게임 전시는 또 반대로 너무 단순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직접 관객이 들어가서 인터랙션할 수 있는 부분은 너무 단순하거나 너무 친절하게 해설해 놓았다라고 해야 할까요. 사실은 게임전시를 기대하고 들어가면, 거기서 새로운 경험을 얻는 것은 너무 쉽고 간단해요. 팩맨에서 새로운 경험을 얻는 것은 아니잖아요. -동시에 텍스트로 너무 많은 설명을 하려고 해요. 중국 작가의 작품 중에 한자랑 철학적 주제들을 자막으로 설명하는데, 비슷한 게임 중에 ‘디스코 엘리시움’과 비교해 아쉬움이 컸습니다. 자막으로 설명을 하니까 이게 오히려 게임 오브제로 설명되는 것 말고 어떤 함의를 가질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소개 글을 열심히 읽었어요. 기본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글을 읽고 뒤돌아서니까 아이들 작품이 있었는데, 이 전시가 무엇을 지향하는 것인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가 다소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어린이들 전시는 시각적으로 다가오는 게 있었지만, 그게 전반적인 전시와는 잘 안 어울렸던 것 같아요. 그저 나열된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 전시가 ‘ 게임 전시인지’, ‘게임을 전시하는’ 것인지가 모호했던 것 같아요 . 저는 오락실(루 양의 ‘물질세계의 위대한 모험’)에서 무슨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은 것인지, 미디어아트인지 게임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하룬 파로키의 〈평행〉은 국현에서 2019년, 2020년 이 즈음에 이미 전시했던 작품으로 알고 있어요. 똑같은 작품이 이번에도 실어졌던 게 아쉽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파로키 작품은 이전에 십자로 되어 있었고, 평행 1,2,3,4 작품을 사방에서 볼 수 있어서 서로 다른 것을 나타내고 있음을 보여줬는데, 지금은 벽면에 평면적으로 배치되서 파로키가 드러내고자 했던 지점을 조금 탈각시킨 것은 아닌가 싶었어요. * 루 양 작가의 대규모 영상 설치 작품 ‘물질 세계의 위대한 모험’ -그런 의미에서 저는 게임의 질감이 미술관 스크린으로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적절하게 작동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적이에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의 접근성 을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장 흑인 트렌스젠더만 해도 서서 플레이해야 하고, 눈높이가 안 맞으면 게임을 할 수가 없어요. 현대 미술은 그걸 메타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요. 그런데 흑인 트렌스젠더 작품이란 전형적인 교차성 작품인데, 다양성을 흑인-페미니즘에 집중한 느낌이었어요. 거기에서 ‘장애’는 교차하는 변수일텐데 이런 부분이 탈각되는 것은 아쉬웠어요. -제가 갔을 때는 흑인 트랜스젠더 전시 중에 하나가 아예 꺼져 있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 돌아다니면서 다시 보니까 처음에 ‘이 세계에 동의하시겠습니까?’ 그랬는데 거기에 ‘아니요’ 버튼을 누르면 그냥 바로 꺼지더라고요. 사실 그거 자체가 주는 메시지가 있죠. 문제는 그 화면에 그러니까 그 화면이 떴을 때, 같이 있었던 사람들은 그것이 주는 메시지를 느낄 수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화면이 한 10분씩 꺼져 있으니까 ‘그냥 고장 났구나’ 이렇게 생각할 것 같아요. -맞아요. 그렇게 꺼져버리면 다른 관람객들은 중간에 들어와서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게 아니라 ‘이게 뭐야?’ 하고 지나치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4관에 오락실처럼 마련해놓은 부스에 앉아서 하는 게임이 꺼지고, 바탕화면으로 가더라고요. 이건 흑인 트랜스젠더 전시관에서 ‘이 세계에 동의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NO’를 눌러서 화면이 꺼지는 것과 오락실 게임에서 바탕화면으로 가는 것이 상동하게 느껴지는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게임에서 최근에 많이 얘기되는 게 기술문화 내적인 것도 내적인 것이지만 ‘기계가 진동한다’ 거나 ‘ 기계가 오류를 일으킨다 ’거나가 많이 논의되는데, 화면이 꺼진 것은 의도된 것이며, 바탕화면으로 간 것은 분명 기술적 문제겠지만 그 자체가 오히려 게임이라는 혹은 게임이 실어진 기계가 매끈한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 있는 울퉁불퉁함 혹은 물질적 면모를 드러내는 것 같아요. -저는 사실 어색한 사람들과 있어서 흑인 트렌스젠더 게임을 플레이하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다음 방에서 해설 영상 같은 것이 나오잖아요. 해설 영상이 뭘 말하려는 것인지는 명료하게 제시되었지만, 동시에 이게 그럼 기존의 ‘미술 작품과 뭐가 그렇게 다른가’를 묻게 되더라고요. * 다니엘 브레이스웨이트 셜리 작가의 작품 ‘젠장, 그 여자 때문에 산다’ Q. 미술관에서 전시되는 게임에 대해서 한 마디를 하신다면? -‘우리 이런 것도 한다’라면서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하지만, 게임을 전시하는 것이 어떤 새로움을 주는지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미술과 마찬가지로 게임에도 사회적 변화가 있구나라는 것 말고는 의미를 찾기 힘들었다 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저는 미술관에서의 게임 전시가 질감을 잘 드러냈다고 생각해요. 영상 내적인 게 그 공간이랑 되게 겹쳐지는 부분들이 많고, 당장 에스컬레이터가 있고 그 공간을 바라보게 구조가 있잖아요. 빈백에서 누워서 보면 스크린(김희천의 ‘커터 3‘)이 보이고, 1층 2층 벽 같은 것들이 보이니 그 겹쳐짐 자체가 보여주는 시각적인 쾌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저도 1관과 4관을 본 다음에 그걸(김희천의 ‘커터 3‘) 봤는데 전시에서 추구하는 미감 같은 게 조금 중첩되는 것 같았어요 . 게임이나 게임 오브제, 혹은 게임 아키텍처가 미술관에 들어오는 느낌으로 흥미롭게 봤습니다. -공공미술이 시민 교육을 목적으로 할 때, 게임을 같이 가져가는 거는 굉장히 힘들지만, 좋은 시도였다고 생각을 해요 -저도 게임이라는 주제 자체를 미술관에서 다룬다는 게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해요. 다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게임을 미술로 보여주는 것 자체가 공공성을 담지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예전에 국현에서 강아지들을 인터렉티브하게 볼 수 있게 전시를 했었어요. 강아지 전시죠. 전시 앞에는 뭘 붙여도 말이 된다는 점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어요. 예전에 냉장고로도 전시를 했더라고요. 냉장고도 말이 되고, 강아지도 말이 되네. 그리고 게임도 말이 되네. 그렇다면, 그 너머(More than)가 가능하려면 좀 더 게임 자체의 무언가를 추가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맞아요. 예술전시가 굳이 게임을 통해야만 하는지? ‘게임전시’인지 ‘게임을 전시하는 것’인지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고민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Q. 미술관에서의 게임 전시에 대한 생각들을 조금 더 확장시켜봅시다. 향후에 이런 전시가 또 기획된다면, 어떤 지점들을 보완하면 좋을지 제언을 해주시겠어요? -게임과 예술을 어떤 식으로 경험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앞으로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다음에도 전시를 하게 된다면, ‘조금 더 게이머로서의 경험이나 게임 자체에 대한 탐색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게임을 활용해서 혹은 게임을 중요한 테마로 했던 기존의 국현 바깥의 전시에 비해 국현의 접근이 보수적이었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게임 제너레이션(Game Generation)에서도 소개되었을 것 같긴 한데, 서울시 행화탕 ‘가상정거장’에서 했던 ‘에란겔 다크 투어리즘’이나 아니면 마인 크래프트와 같은 작품들이 오히려 게임과 현대미술의 접점으로 보여줬던 급진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 에란겔 다크 투어리즘은 게임 내적으로 들어가서 의미를 전유해서 좀 되게 흥미로웠던 작품인 것 같은데, 저는 거기서 게임 기기의 질감이 드러났던 것이 흥미로웠어요. * 서울시 행화탕 ‘가상정거장’ 전시 프로젝트: 에란겔 다크 투어https://youtu.be/bxVCJVKH11o -그런데 지금 국현 전시는 어째서인지 되게 보수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아요. 보수적이라는 말은 게임 질감이든, 인터렉티브 작품이든, 스크린에서 만드는 것 자체가 큰 자극을 주지 못한다는 말이에요. -국현이기에 어쩔 수 없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아요. 큰 미술기관이다 보니까 급진적으로 나가기는 까다로운 부분들이 있겠다 싶었어요. -어떤 게임의 경우, 2분 동안 붙잡고 있어도 어떠한 규칙도 어떠한 플레이 목적도 딱히 알 수 없었는데, 그런 작품은 그냥 미감만 보고 나와야 하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감만 보고 나와야 한다는 것. 그게 보수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렇게 미감만 보는 전시가 기존에 없던 전시인가? 물으면 그건 또 아니라는 거죠. -기껏해야 5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에 게임 전시를 경험한다는 것은 매우 제한적인 시간이에요. 그것은 앞으로도 고민해야 할 지점일 것이라 생각해요. -그냥 무책임하게 자신의 어떤 감성과 감수성들로 밖에 보이지 않는 영역들이 저한테는 항상 무책임함으로 읽혀요. 저는 예술에서 늘 열려 있다. 그러니까 해석은 열려 있고, 그거는 관람객의 몫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저한테는 되게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최대한 자기 자신 그러니까 작가는 스스로가 고민을 해야죠. -게임 전시라고 했을 때 미술 안의 다양한 소재 중 하나가 아니라 게임이 줄 수 있는 어떤 특이점들이 어떻게 다뤄지는가를 봐야겠죠. -저는 게임이 현대미술의 탈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뭐 이런 생각도 들어요. 현대미술 같은 경우에는 적극적인 관람객의 능동성 같은 것들을 강조한다는 지점에서 사실은 게임이랑 되게 닿아있다고 생각해요. 둘 다 수용자들이 어떻게 읽게 할 것인가를 열어놓지만, 그게 작가의 무책임함으로 빠지지 않게 경계해야 하는 것도 같아요. 그래서 전 게임과 예술은 서로에게 탈출구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게임전시인 만큼 다양한 반응이 나온 것 같습니다. 덕분에 〈게임사회〉 전시에 대한 다채로운 의견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 참여자 태백(가명), 26살, 여성, 전 게임 QA 김성은, 30대 후반, 여성, 프리랜서 김재원(가명), 20대 초반, 여성, 학생 박진욱(가명), 30대 후반, 남성, 언론직 종사자 한승진(가명). 30대 초반, 남성, 에디터 Tags: 인터뷰, 국립현대미술관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연구자) 하태현 문화와 역사, 종교와 게임 등 다양한 관심사를 갖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게임을 즐깁니다.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지 궁리하며 살고 있습니다.

  • 「테라 닐」: 안전한 절멸의 행성으로부터

    「테라 닐」 역시 시작시에는 건설을 위해 마련된 빈 공간을 보인다. 하지만 그 공간은 자연의 존재감 조차도 희박하다. 이 모든 공간은 ‘오염된 불모의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플레이어는 이 장소를 자원화해 부강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 자체를 자연의 공간으로 되돌릴 책임을 부여받는다. 즉 이 빈 공간에 올려놓는 모든 ‘건물’들은 그 자체가 자본적 축적을 위함이 아닌, 이 빈공간에 자연의 가능성을 심어놓기 위한 도구로 기능한다. 플레이어는 각 스테이지가 요청하는 정도의 ‘자연 회복’을 달성해야만 한다. < Back 「테라 닐」: 안전한 절멸의 행성으로부터 27 GG Vol. 25. 12. 10. 건설 경영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연에 대한 문명적 통치를 다룬다. 그 시조인 맥시스의 「심시티」를 시작으로 유비 소프트「ANNO」시리즈, 프론티어 디벨롭먼트의 「주 플래닛」이나 「플래닛 코스터」를 시작할 때 플레이어를 반겨주는 것은 너른 자연의 공간이다. 플레이어에게는 이러한 ‘자연적 풍경’을 깎아내고 변형시키고 자원화할 수 있는 어떠한 특권이 주어진다. 이 관계를 역산해보자. 이 게임들에서 ‘자연의 풍경’이란 아무것도 없는 비어있는 공간, 생동하지 않는 세계로 규정된다. 「심시티」를 켜고 비어있는 세계를 가만히 둔 채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한히 시간을 보내보자. 화면에 수놓아진 자연적 풍경에는 아무런 변화조차 없을 것이다. 이 공간들은 생동하지 않는 세계로 해석되는 게 아니다. 애초에부터 생동하지 않도록 만들어졌다. 오직 플레이어에 의해 문명적 발전이 이루어지도록 제공된 공간일 뿐이다. 도나 해러웨이는 자신의 저서 『Modest_Witness@Second_Millennium』에서 맥시스의 ‘심 시리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기 있는 맥시스사의 게임 「심앤트」, 「심어스」, 「심시티」, 「심시티 2000」 그리고 「심라이프」는 모두 컴퓨터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에 기반한 지도 제작 게임이다. 이 게임들에서는, 생명 그 자체에서와 마찬가지로, 지도 제작이 곧 세계 제작이다.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사이버 공간화의 데카르트적 격자 관습 안에서, 이 게임들은 사용자들이 탐험, 창조, 발견, 상상, 개입의 서사 속에서 자신을 과학자로 여기도록 부추긴다. 데이터 기록 실천, 실험 프로토콜, 세계 설계를 배우는 것은 이 테크노사이언스 영역에서 정상적 주체가 되는 과정의 매끄러운 일부다. 지도 제작 실천은 본질적으로 다양한 목적을 위해 특정한 방식으로 세계를 형성하는 투영법projections을 배우는 것이다. 각 투영법은 특정한 종류의 관점perspective을 생산하고 함축한다.” [1] 그런 의미에서 프리 라이브스의 「테라 닐」은 독특한 위상을 지닌다. ‘역 건설게임’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운 이 게임은 ‘발전하기 위한 건설’이라는 목표를 지향하지 않는다. 「테라 닐」의 목적은 자연의 재생에 있다. 「테라 닐」 역시 시작시에는 건설을 위해 마련된 빈 공간을 보인다. 하지만 그 공간은 자연의 존재감 조차도 희박하다. 이 모든 공간은 ‘오염된 불모의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플레이어는 이 장소를 자원화해 부강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 자체를 자연의 공간으로 되돌릴 책임을 부여받는다. 즉 이 빈 공간에 올려놓는 모든 ‘건물’들은 그 자체가 자본적 축적을 위함이 아닌, 이 빈공간에 자연의 가능성을 심어놓기 위한 도구로 기능한다. 플레이어는 각 스테이지가 요청하는 정도의 ‘자연 회복’을 달성해야만 한다. 여기에 ‘역 건설게임’을 완성시키는 또 다른 메커니즘이 있다. 플레이어는 모든 스테이지에서 자연을 완전히 되살린 뒤, 자신의 모든 건설물을 파괴하고 이 공간을 떠나야 한다. 이를 통해 완전히 인간으로부터 유리되어있는, 스스로 생동하는 자연을 만들어내어야 한다. 플레이어는 마지막의 철수 공정을 마친 뒤 원한다면 얼마든지 재생된 세계를 관람할 수도 있다. 「테라 닐」에 최초로 제공되는 빈 땅은 「심시티」 또는 본 장르의 다른 게임들에서 보이는 빈 땅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에 가깝다. 「심시티」의 그곳은 자연인 척 모사되었을 뿐 진짜 의미에서의 자연은 아닌 공간이다. 그것은 생명의 형태를 패러디한 공간이며, 동시에 문명의 통치가 ‘필요한’ 그저 사멸되어 있는는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반해 「테라 닐」의 빈 공간은 본래부터 멸망의 음울함을 가진 공간이다. 「테라 닐」이라는 제목조차 제국주의 시절 원주민의 땅을 ‘주인 없는 땅’이라 명명할 때 사용한 단어 ‘Terra Nullius’를 떠오르게 만든다. 흥미롭게도 게임의 역학에 있어 양 공간의 기능과 목적은 큰 차이가 없다. 오히려 「테라 닐」은 그 죽음의 이미지를 전면화함으로서 장르적 기능을 역행해 재생이라는 목적을 도출해낸다. 「테라 닐」은 ‘역 건설’이라는 게임적 메커닉을 통해 기존의 건설 시뮬레이션들이 가지고 있던 (해러웨이가 정의한) ‘지도그리기’의 역학을 무참히 드러내버린다. 「테라 닐」의 빈 땅 그런 의미에서, 「테라 닐」은 일종의 생태주의 게임이다. 그리고 「테라 닐」이 생태주의 게임인 이유는 기존의 건설 경영 게임들이 가진 반 생태주의적 특성 때문이다. 「테라 닐」의 혁신성은 어디까지나 기존의 건설 경영 시뮬레이션들이 가진 ‘지도 그리기’의 역학, 문명에 의한 자연 통치의 보편화에 저항할 때 기능한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 관점을 바꿀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가 진행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건설 시뮬레이션’의 기초적인 메커닉이라는 점이다. 그곳이 오염된 땅이라는 전제가 있다고 한들 플레이어는 올바른 방식으로 건물을 세우고, 그를 통해 포인트를 모으고, 그 포인트를 소모해 다시금 건물을 세워 나가는 방식으로 ‘빈 땅’을 (건물이 아닌 식물로) 채워나간다. 리뷰 등에서 종종 지적되고 있듯, 「테라 닐」에는 수상한 미스터리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플레이어가 재생해야하는 이 세계의 문제가 ‘왜’ 일어났는지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이며, 또 하나는 건물을 짓기 위한 (게임 내에서는 녹색의 나뭇잎으로 표현되는) 포인트의 정체가 정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 미묘한 미스터리는 이 게임에서의 문명과 자연 사이에 설명되지 않는 공백이 도사리고 있음을 시사한다. 세계는 복원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이 세계는 과연 어떤 연유로 이렇게 파괴된 것일까? 핵전쟁이 있었을까? 극심한 환경오염의 결과인가? 지구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인가? 아니면 운석 충돌에 의한 예상치 못한 파멸인가? 이 조건의 공백은 플레이어의 행위가 올라설 지지대를 치워버린다. 게임은 플레이어에게는 자연을 ‘재생’하라는 미션을 건내고 있을 뿐이다. 즉 플레이어가 지금 수행하는 수복이 실패에 대한 책임의 행위인지, 세계의 재건이라는 극복의 의지인지 모호하게 굴고 있는 셈이다.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재생의 기술을 가진 플레이어와 재생을 필요로 하는 땅이라는 이분화된 관계 뿐이다. 말하자면 이 조건이 지워지는 순간, 플레이어에게는 일정한 ‘선한 의지’만이 주어진다. 책임에 대해 설명하지 않기에 그 행위 전체가 자연의 수복이라는 고귀함으로 남겨지는 것이다. 플레이어에게 ‘위대한 일’을 위해 남겨져 있는 이 공간이 바로 「테라 닐」의 비어있는 땅이다. 이 조건은 에코모더니즘의 비전과 연결된다. 2015년 에코모더니즘 선언문An Ecomodernism Manifesto과 함께 발족한 이 사조는 기술 발전을 통해 자연을 보호하고 인간의 더 나은 삶Well-being을 증진할 수 있음을 주장하는 환경 철학이다. 에코 모더니스트들은 인류세Anthropocene의 한계를 인정하며 지금의 세계를 ‘좋은 또는 위대한 인류세’로 만들겠다는 기치를 내건다. 이 사조는 다양한 방면에서의 비판을 겪었다. 특히 클라이브 해밀턴Clive Hamilton은 이들이 인류세를 ‘퇴보의 상징이 아니라 극복을 통해 더 높은 단계로 도약하게 해주는 전환’으로 받아들이며 ‘흥분과 기쁨의 기색을 보이며 환영하고 있다’ [2] 고 강하게 비판한다. 「테라 닐」이 ‘땅’을 다루는 태도 역시 이러한 비판의 도마 위에 있다. 땅의 탄생 조건을 의도적으로 흐리고 있는 이 게임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좋은 또는 위대한 재생’에만 집중하도록 만든다. 그와 동시에 게임에 작동하는 모든 기술적 토대는 자연에 과시적으로 작동한다. 어떻게보면 「테라 닐」의 ‘땅’은 자연적으로 재생할 수 없다는 음울한 자연성을 전제하고 있기도 하다. 이는 「심시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생하지 못하는 땅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이 자본을 증가시키는 것이든, 자연을 재생시키는 것이든 ‘빈 땅’으로 규정된 장소들은 스스로 생장하지 못하는 한계지어진 곳이다. 오직 기술만이 변화를 작동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테라 닐」은 기존의 건설 시뮬레이션과 공명한다. 녹색의 자원으로부터 한편 이 게임이 다루는 기술은 상당히 고도의 기술이다. 모두 말라버린 지상에 충분할만치 지하수를 공급할 수 있는 펌프를 시작으로, 주변의 온도와 습도를 극적으로 변동시킬 수 있는 장비, 그에 더해 이러한 기술을 작동시킬 수 있는 고효율의 발전기가 사용된다. 하지만 게임은 이러한 고능한 장비를 ‘어떠한 자원을 통해’ 설치하는지 역시 설명하려들지 않는다. 각 건물의 설치는 게임 내에서 획득하는 ‘녹색의 포인트’를 통해 설치할 수 있는데, 이 포인트는 자연의 회복 정도에 따라 일정량 확보되는 구조다. 게임이 의도적으로 흐리고 있는 이 두 개념의 관계, 즉 ‘자연의 회복’과 ‘기술의 설치’는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지 않는다. 애초에 이 관계에는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과연 자연으로부터 무엇인가 채취하지 않고서 이러한 기술을 작동시킬 수 있는가? 플레이어는 기술을 통해 자연을 ‘재생시키는 국면’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대체 이 기술은 어디서부터 왔고 어디로 가는가? 도저히 설명해줄 수 없는 이 관계는 「ANNO 1800」에 대한 반복된 비판과 연결되는 구석이 있다. 해상로를 통한 자원의 보충을 기반으로 하는 「ANNO 1800」은 역사적으로 존재했을 원주민과 착취 노동의 조건을 은근슬쩍 지워버린다. 이 게임에는 그저 일용직 노동자인 호날레로jornalero와 전문 노동자인 오브레로obrero라는 자발적인 존재들이 묘사될 뿐이다. 즉 플레이어에게 있어 어떠한 자원적 획득은 그 채집의 노동과 ‘마찰 없는 관계’로 정리되어 있다. 《PC Gamers》의 사무엘 호티Samuel Horti는 ‘어떤 식으로 보더라도 식민지화를 노예제, 잔혹함, 폭력, 질병과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3] 라며 이러한 구조를 강하게 비판한다. 결국 이 끊어진 관계를 통해 플레이어는 자원의 운용에 어떠한 심적 불편함도 겪지 않고 자연스럽게 발전으로 이행하게 된다. 「테라 닐」의 조건도 마찬가지다. 고도의 기술 그리고 설치와 운용이라는 고도의 코스트를 요하는 작업들이 어떠한 물적 조건 하에 이루어지는지 제거됨으로서, 이 게임은 혹여나 기술이 가지고 있을지 모를 자연 착취의 가능성을 은폐한다. 물론 이것을 밸런스의 개념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기술이라는 문명의 투입은 자연의 재생 정도와 일정량 균형을 맞추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전제한다면 이 관계는 포인트의 ‘소모’가 아니라 지도 위에 세워진 건물의 ‘점유도’와 대비되는 자연의 회복 ‘정도’로 묘사되는 것이 더 알맞았을지도 모른다. 즉 이 메커니즘에는 명백한 모순이 있다. 「테라 닐」의 메커닉은 매우 알기 쉬운 건설 시뮬레이션의 기본형을 따르고 있는데, 특히 일정한 건설을 통한 ‘수익’과 그 자본의 ‘소비’를 통한 성장 모델은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어찌보면 「테라 닐」은 건설 시뮬레이션에 애초부터 내재되어 있는 착취적 모델을 통해 그 자체를 비판하려는 모순된 그림을 그리는 셈이다. ‘자본의 획득과 소비’라는 관계가 근간이 되어있는 한 비판이라는 목적에는 완전히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떠한 스킨을 사용하고 있다 한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모델로 삼고 있다면, 그저 현 인류의 보편적 사유에 동참하고 있을 뿐이다. 분재화된 자연으로 「테라 닐」이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자연은 무엇인가. 어쩌면 이 게임의 가장 흥미로운 메커닉인 철거 국면에 그 답이 있다. 각 스테이지의 말미에서, 플레이어는 자신이 만들어낸 모든 건설물들을 해체하고 그 땅으로부터 빠져나가야 한다. 해체에도 포인트가 소모되기 때문에 건설의 과정에서부터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를 미리 설계해 둘 필요가 있다. 아슬아슬하게 포인트를 소모해 철거 국면을 끝낸 뒤 모선과 함께 날아오를 때의 쾌감이 「테라 닐」의 핵심적인 재미다. 환경 조성에 의한 보너스 포인트의 목록들 하지만 이 때 남겨진 땅은 해러웨이적으로 ‘지도화된’ 땅이다. 플레이어는 이 아름다운 땅을 만들기 위해 땅 전체의 온도, 습도, 방사능의 양 등의 수치를 안정적으로 조절해야 한다. 각 스테이지마다 제시되는 ‘일정한 정도의 환경 조건’을 달성하면 대량의 포인트를 보상으로 받는다. 특정한 환경의 조성은 동물들의 복귀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지나치게 기적같은 상황은 전적으로 수치적 관리에 대한 일종의 보상체계다. ‘동물의 귀환’이라는 상당히 복잡하고 섬세한 생태적인 결과가 그저 (광의의) 경제적 결과로서 부여되는 것이다. 솔직해지자. 이 동물들은 「심시티」에서 RCI의 밸런스를 명확히 했을 때 보상으로 받는 인구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즉 플레이어가 ‘떠나고 난 뒤’ 남겨진 아름다운 땅은 전적으로 플레이어의 기술적 관리에 의한 보상물이다. 재생을 거친 인간의 ‘철수’는 이 보상을 더 아름답게 남기기 위한 극단의 분리주의적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윌리엄 크로넌William Cronon의 관점을 따라가보자. 크로넌은 『The trouble with Wilderness : or Getting back to the wrong nature』에서 야생wilderness라는 개념이 19세기 낭만주의에 의해 발명된 문화적 발명품이라는 사실을 논한다. 이것이 발명품이라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이 ‘야생’이 전적으로 문명 내부에서의 이상화를 위해 자연-문명이라는 이원화를 이용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크로넌이 보는 발명된 야생이란 문명이 바라보는 ‘숭고하고 신성한 사원’이자 ‘강인한 개척자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근간이 된다. 야생을 ‘인간이 거주하지 않는 곳’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오히려 ‘인간이 거주하는 곳’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이 은폐된다. 그리고 인간과 끝없이 분리된 이상적 공간인 자연은 오히려 인간이 점유한 곳으로부터 점차 밀려난다는 것이다. [4] 도대체 「테라 닐」에서 재생을 주도하는 인간이 거주하는 곳은 어디인가? 그 곳에 자연은 어떻게 자리잡고 있는가? 재생된 자연에서 인간이 떠나야 함을 당위로 만든다면, 지금 인간의 세계에는 완전히 자연과 격리되어 있는가? 「테라 닐」의 마지막 미스터리는 크로넌이 설명하는 불안의 위계를 담지한다. 「테라 닐」의 인류가 바라보는 자연이란 스펙터클의 대상으로서 잔존하는 거대화한 분재나 다름없는 것 아닐까? 「테라 닐」의 플레이를 끝내고 나면 그런 의문에 봉착한다. 왜 이 게임의 인류는 재생된 자연과 하나되어 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인가. 자연의 재생이 가능한 기술을 갖추고 있음에도 자연과의 격리를 선택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어쩌면 「테라 닐」의 인류가 거주하는 곳은 게임의 배경이 되는 행성에서 까마득히 먼 또 다른 행성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곳에는 억류된 오염과 방사능과 오물이 득시글거리고 있을지 누가 아는가. 재생의 기술이 보여주는 모순의 빈 공간에는 이렇듯 분리된 불안의 상상력이 가득 차오른다. 크로넌은 이러한 분리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는다. “우리의 과제는 인간과 비인간, 비자연과 자연, 타락과 비타락이 세상을 이해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개념적 지도로 기능하는 양극적 도덕 저울에 따라 사물을 생각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다. 대신 우리는 자연적이면서도 문화적인 풍경의 전체 연속체를 포용해야 한다. 그 안에서 도시, 교외, 전원, 야생은 각각 고유한 적절한 위치를 가지며, 우리는 불필요하게 다른 것들을 폄하하지 않으면서 그 각각을 찬미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멀리 사는 이국적인 타자만큼이나 내면의 타자와 옆집의 타자를 존중해야 한다. 이는 다른 자연적 사물들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교훈이다. 특히 우리는 도시에서 야생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집"이라는 단어 안에 어떻게든 포함될 수 있는 공통의 중간 지점을 발견해야 한다. 결국 집은 우리가 생계를 꾸리는 곳이다. 그곳은 우리가 책임을 지는 장소이며, 그 안에 있는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최선의 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지속시키려 노력하는 장소다.” [5] 역 건설이라는 메커닉은 결국 그 땅으로부터 떠나는 결과로 연결된다. 플레이어가 「테라 닐」의 각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고 볼 수 있는 마지막 이미지는 재생된 자연을 향유할 수 있는 신적인 관점의 감상 모드다. 나무가 우거지고, 비가 내리고, 바다에 산호가 가득한 이 풍요는 인간의 관점으로는 결코 향유할 수 없다. 감상 모드를 끝내고 나서면 사라지는 이 환영과도 같은 이미지에는 실제로 플레이어를 위한 자리는 없다. 잠시나마라도 이 안에서 나무를 베고, 물을 긷고, 낚시를 하는 체험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게임을 모두 끝내면 모든 동물과 식물의 샘플을 실은 우주선이 우주를 향해 솟구치는 감격스러운 광경을 볼 수 있다. 지금까지 플레이어를 이끌어온 환경 재생 매뉴얼이 그 우주선의 내부에 안치된다. 이는 환경의 재생을 끝내고 ‘그들만의 삶’을 인정하며 또 다른 재생의 세계를 찾아나서는 아름다운 광경일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구의 샘플들을 통해 어떠한 환경을 ‘테라포밍’하기 위한 준비처럼도 보일 수 있다. 「테라 닐」의 플레이 플로우가 그 모든 과정을 증명한다. 우주선이 ‘지구의 것’을 가지고 날아가기 때문이다. 물론 조금 더 긍정적으로 상상해보자. 인류는 지구를 두고 다른 행성으로 이주했으며, 지금 가지고 날아가는 모든 샘플과 자료는 그들의 행성을 위한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또 다른 행성을 ‘지구화Terraforming’하려한다는 상상은 끊어낼 수 없다. 수복이 끝난 행성은 홀로 놔둔 채, 인간은 우주로 나아간다. 아니면 조금 더 급진적으로 나가보자. 혹시 「테라 닐」의 우주에는 인류가 없는 것 아닐까? 이 세계를 재생하려는 의지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 다른 차원, 다른 의식에 의해 발현되는 것 아닐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테라 닐」의 세계 내에는 그 어떤 인간의 흔적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자연 훼손의 업을 가진 인간에 대한 징벌적 태도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런 환경이 제공하는 것은 우리는 절대 가지지 못할 ‘안전한 절멸’의 경험이다. 모니터 바깥의 인간, 그러니까 재생 주체로서의 플레이어는 세계 내부와 무관하게 현전하며 행성을 관리한다. 비어있는 공간에서 절멸의 아픔을 낭만적으로 느끼는 이 주체에게 있어, 최종적으로 제시되는 행성은 그저 잘 가꿔진 분재의 일종일 뿐이다. 그렇다면 샘플을 가지고 떠나는 우주선의 아름다운 상승은 우주 전체가 분재화될 씨앗 운반자로 기능하는 것이다. 안전한 절멸의 경험은 결국 무한한 ‘테라 눌리우스Terra Nullius’가 펼쳐진 가능성의 우주를 꿈꾸게 한다. [1] Donna Harraway(1997), 『Modest_Witness@Second_Millennium』, Routledge [2] 클라이브 해밀튼 지음, 정서진 옮김, 『인류세』, 이상북스(2018) [3] Samuel Horti(2019), 「What Anno 1800 gets wrong, and right, about colonialism and the Industrial Revolution」, PC Gamers [4] William Cronon(1995), 『Uncommon Ground: Rethinking the Human Place in Nature』 [5] William Cronon(1995), 앞의 책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평론가) 이선인 만화와 게임, 영화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합니다. MMORPG를 제외한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클리어가 라이프 워크입니다. 스팀덱을 주로 사용합니다.

  • [Editor's View] 손이 바쁜 공모전 특집호를 마무리하며

    비록 한 해에 여섯 호 밖에 나오지 않는 것 같지만, GG의 발행은 꽤나 연속성이 있는 편입니다. 두 달에 한 번 발행하는 잡지를 위해 발행 전 달에 기획회의를 하고, 걸맞는 필자를 섭외한 뒤 각각의 필자들이 한 달간 원고를 준비합니다. < Back 26 GG Vol. 25. 10.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공모전] 게임과 행위 원리 – 놀이와 협박

    플레이어는 게임을 왜 플레이하는가? 이 질문은 노는 자가 왜 노는가라는 질문으로 대체될 수 있다. 최근의 논의들 중에는 게임을 예술로 ‘인정’받고자 어떠한 실용성이나 사회 · 정치적 참여 등에 기여한다며 생산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게임은 그러한 효용적 가치들을 충분히 발생시킬 수는 매체인 것으로 보이긴 한다. 그러나 그것이 플레이어가 게임을 왜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가 정말로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실천과 효용을 함양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500시간 동안 앉아 있는가? 재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 Back 13 GG Vol. 23. 8.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Yeong-Yi Writes with an interest in the interrelations among violence, suffering, and division. Produced works including Mapping the Affective, Pouring Water into a Poisoned Bottomless Jar, and Monthly Paper, and served as dramaturg for the plays Opera Charlotronique and The Man Who Became a Pillow. Author of Hormone Journal and Game Chorus, and co-author of A Mad, Love Song.

  •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의 타임라인

    그래서 게임과 중독에 관한 글을 쓸 때 모든 식자들은 엘리트주의적 정서를 느낀다. 이 복잡한 맥락을 나는 잘 정리해서 이해했으니 알려주고 싶다! 실제로 이 글의 서두는 그렇게 쓰여졌고, 완성 후에 후회했다. 그런 정리는 이미 너무 많다. 현재에는 게임 중독, 혹은 게임이용장애에 대해 우리 한국 사회가 어떻게 대응과 준비를 하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 더 가치 있을 것이다. < Back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의 타임라인 14 GG Vol. 23. 10. 10. 게임 중독, 지겨운 단어 2019년 5월 25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제72회 총회에서 국제질병분류(ICD)의 제11차 개정판이 발표했다. 대규모 개정이 28년만이었다. 28년 묵은 업데이트를 한꺼번에 하다 보니 질병 코드가 14000여 개에서 55000여 개로 대폭 늘었다. 이 개정에 게임이용장애가 질병 코드 6C51을 얻어 등재되면서 논의가 폭발했다. 게임에 대한 탄압, 중독 아니고 과몰입, 중독 아니고 이용장애, 게임은 문화, 게임은 산업, 물질 중독이 아닌 행위 중독, 이 모든 담론 속의 맥락이 제각각 근거가 있었다. 인류 사회 전체에서 어지러운 난상 토론이 일어났다. 그나마 최근에야 좀 정리가 되었지만, 여전히 수많은 단어와 개념들이 이리저리 얽힌다. 게임과 폭력, 두 단어가 만났을 때 일어났던 혼란은 게임과 중독, 두 단어가 만났을 때도 그대로 일어났다. 인간은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래서 게임과 중독에 관한 글을 쓸 때 모든 식자들은 엘리트주의적 정서를 느낀다. 이 복잡한 맥락을 나는 잘 정리해서 이해했으니 알려주고 싶다! 실제로 이 글의 서두는 그렇게 쓰여졌고, 완성 후에 후회했다. 그런 정리는 이미 너무 많다. 현재에는 게임 중독, 혹은 게임이용장애에 대해 우리 한국 사회가 어떻게 대응과 준비를 하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 더 가치 있을 것이다. 각계의 입장 의료와 보건 영역에서는 예방과 치료를 위한 사회적 투자를 주문한다. 게임이용장애가 수면장애, 섭식장애와 같은 행위 중독이고, 인류사에서 이를 질병으로 규정한 초기 단계이기 때문에 적용과 관찰이 필요하다는 관점이다. 새로운 중독 개념을 관찰하여 도입하는 과정이라는 인류사적 맥락에서 타당하다. 산업과 문화 영역에서는, 이 두 관점이 상호보완이 되다니 감개무량하지만, 우려에서 반대까지를 표현하고 있다. 예술 분야 혹은 산업 전반에 대한 낙인 효과를 우려하는 관점이다. 훌륭한 아이디어라 해도 현실에 적용될 때는 다운그레이드/침강 현상이 일어났던 역사를 고려할 때 타당하다. 의료 논리와 업계 논리의 타당성이 충돌한다. 행정부 부처 별로도 의견이 충돌한다. 문화 계열은 반대, 보건 계열은 찬성이다. 1차적인 이유는 역시 예산이다. 돈을 받아 집행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선 자신이 수행하는 임무의 중요성을 우선할 수밖에 없고, 실제로 그런 사업 임무는 제각각 중요할 것이다. 반면 이들에게 돈을 내어주는 입장인 기획재정부는 생각을 알 수가 없다. 정치의 시간 이렇게 논리와 입장이 충돌할 때 정리하는 업무를 인간은 정치라고 부른다. 한국의 정치 또한 다른 모든 나라처럼 질병 코드 등재에 관련된 행정 체계를 만들어 놓았다. WHO에서 개정된 ICD를 반영하라는 ‘권고’를 한국 정부에 보낸다. 권고받은 정보를 한국 행정부처가 검토하여 한국의 질병분류인 KSD에 전체 혹은 일부를 반영한다. 이번의 경우, 새로 늘어난 것만 41000여 개 질병이니 검토 및 분류 작업은 오래 걸릴 것이고, 따라서 최소 2025년의 정기 개정 시기에 반영될 것이거나 그보다 늦어질 수도 있다. 이 절차의 소관 부서는 보건복지부가 아니라 통계청이다. 반영 이후에는 보건복지부에서 수행하겠지만, ISD의 성격이 수많은 질병을 규정하고 코드화하여 모아놓은 통계 편람이기 때문에, 반영 업무 자체는 통계청이 주관해야 한다. 한국은 2019년 7월 23일에 통계청에 민관 협의체를 만들었다. WHO의 ISD 갱신 2개월 후이니 매우 빠른 편이다. 그런데 이 민관 협의체는 41000여 개 신규 질병 코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게임이용장애, 대중적 용어로는 게임중독 질병 코드 하나만을 다루는 협의체다. 민간위원 14명과 정부위원 8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의료, 게임, 법조, 시민단체, 기타 전문가, 교육부, 과학기술부, 여성가족부, 통계청, 국가조정실, 복지부, 문화체육부의 인물이 모두 들어가 있다. 관련자는 물론 관리자 역할인 국가조정실까지 모두 모인 것이다. 이 22인이 연구와 토론을 통해 결론을 내면, 국가통계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서 등재 결정으로 이어진다. 민관협의체의 타임라인 민관협의체는 결정을 내릴 근거를 수집하기 위해 먼저 연구 용역을 3건 발주했다. 연구들은 2019년 12월부터 구체적 단계에 들어갔고, 2년 후에야 완성이 되었다. 이 3건의 연구를 토대로 회의가 연거푸 열렸는데, 2022년 1월 12일의 8차 회의에서 일이 벌어졌다. 올라온 연구 보고서 셋 중에서 하나의 신빙성과 정합성을 일부 민간위원이 문제 삼은 것이다. 해당 보고서는 게임이용장애의 역학조사가 방법론적으로 가능하다는 내용의 ‘게임이용장애 실태조가 기획’ 연구였다. 역학조사를 통해 계량화된 수치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인데, 연구 셋 중에서 유일하게 질병코드 도입 찬성측에 유리한 연구 결과였다. 아무튼 이 연구에서 문제점이 지적되자 후속 보완 연구를 하기로 결정이 났다. 그런데 이후 민관협의체는 8개월 동안 후속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을뿐더러 추가 회의도 열리지 않았다. 정권 교체기였기 때문에 생긴 지연이라는 해석이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졌다. 정지해있던 민관협의체는 2022년 말에 다시 가동되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이상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12월 21일, 통계청은 언론 보도에 대한 반박 보도자료를 냈다. 해당 보도는 사라진 것으로 보여 확인할 수 없지만, 민관협의체 회의에서 통계청 관계자가 ‘한국은 WHO 결정을 그대로 수용해야 해서 게임이용장애는 질병코드에 등재될 것’이라는 말을 했다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민관협의체 무용론이 등장한 것이다. 통계청은 민관협의체의 결정은 효력이 있고 한국은 국내표준분류를 만들 때 국내 여건을 감안한다는 내용의 반박을 했지만, 해가 바뀐 4월 4일 국민일보는 여전히 민관협의체 무용론이 존재한다 는 보도를 했다. 8차 회의 이후 아직도 후속 보완 연구가 시작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함께였다. 이에 대해서는 통계청과 국무조정실 양쪽에서 반박 보도자료를 내놨다. 후속 연구는 9차 회의에서 결정된 후 세부계획 수립 중에 있으며 2023년 4월 중에 착수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같은 내용의 반박이 4월 24일 뉴스원의 기사 에 대해서도 나왔다. 즉, 2023년 10월 현재에는 아직 연구가 진행중일 것이다. 통계법 제22조 1항 그렇다면 민관협의체 무용론의 논리적 근거는 무엇일까. 통계법이다. 통계법 제22조는 표준분류 조항이다. 1항에서는 이렇게 서술한다. “통계청장은 통계작성기관이 동일한 기준에 따라 통계를 작성할 수 있도록 국제표준분류를 기준으로 산업, 직업, 질병·사인(死因) 등에 관한 표준분류를 작성·고시하여야 한다.” 국제표준분류, 예를 들어 게임이용장애 질병 코드 등재 사안에서는 WHO의 ICD가 기준이 된다는 의미를 ‘국제표준분류를 따라가라’ 의미로 보면 강제조항이 된다. 반면 ‘참고하라’는 의미로 보면 권고조항이 된다. 언론 보도에 나온 분위기를 보면 민관협의체와 그 주변 분위기는 강제조항 해석이 우세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강제조항 해석이 우세하고 이를 우려하는 분위기라는 의미는 즉, 현재 민관협의체의 분위기는 질병 코드 등재에 부정적인 쪽으로 흐른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런 분위기를 포착한 언론 보도가 나오기 전인 2023년 2월 27일, 더불어민주당 이상헌 의원은 통계법 개정안을 대표발의 했다. 바로 해당 22조 1항을 고치는 내용이다. 국제표준분류가 기준이 아닌 참고가 되며, 전문가와 이해관계자 등의 의견 수렴을 거쳐 국제표준분류의 반영 여부를 결정하는 절차가 들어가는 개정안이다. 하지만 윤석열 행정부는 이 개정안에 대해 소극적으로 보이지만 반대 입장이다. 한국의 통계 기준이 국제 기준과 지나치게 거리를 두게 되면 국가간의 통계 비교 문제가 생긴다는 우려, 즉 통계 기준의 갈라파고스화를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상헌 의원의 통계법 개정안은 아직 계류 중이며, 21대 국회의 회기 막바지임을 고려하면 이대로 회기 종료가 되어 폐기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무용론이 고개를 들었고, 이와 별개로 국무조정실에서 4월 20일, 별도의 연구 용역이 나왔다. ‘게임산업 규제 개선 및 진흥 방안 연구’였는데, 여기에 게임 질병 코드 사안도 들어가 있었다. 통계청 산하 민관협의체에서 결론을 늦게 내고 있으니, 중앙부처 주도로 질병 코드 등재를 강행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이런 해석에 대해서 국무조정실은 곧바로 그런 의도가 아니며, 결정 주체는 통계청의 민관협의체라고 확언을 했다. 국무조정실의 이 발언은 두 가지 의미로 독해가 가능하다. 첫 번째, 민관협의체의 연구 용역과 별도의 계획은 없다. 즉, 민관협의체에게만 권한이 있다. 두 번째, 민관협의체의 결론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계획은 없다. 즉, 지지부진해져서 결론이 안 나오면 계획을 세우겠다. 두 번째 해석에는 약간의 비약이 들어가 있으므로 가능성은 낮다. 여기까지가 질병 코드 등재에 관한 타임라인이며, 타임라인은 4월 말로 끊겨 있다. 그로부터 반 년이 지난 2023년 10월 현재, 한국은 아직 민관협의체가 발주한 추가 연구 용역을 기다리고 있다. 현재의 구도 이 사안에 가장 깊게 연관된 플레이어는 국회, 행정부, 산업계, 문화계, 의료계다. 이 중에서 의료 외에는 미지근하거나 방어 입장을 취하고 있다. 질병 코드 등재에 대해 의료계는 찬성, 산업계와 문화계는 반대 입장이다. 행정부는 대체적으로 미지근하다. 언론의 분석에 따르면 부처 간의 찬반 의견이 팽팽한 것이 이유로 보인다. 반면 정치권은 이 사안을 다루는 소수 국회의원들의 주도로 반대쪽으로 기울고 있다. 과방위 간사인 더불어민주당 조승래 의원은 게임산업진흥법 개정안을 관철시키며 게임 중독 용어를 게임 과몰입으로 대체했다. 통계법 개정안을 발의한 이상헌 의원은, 여당 국민의힘의 하태경 의원과 함께 게임계의 여론을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으려 노력하는 주요 정치인이다. 그리고 이런 정치인들의 활동을 언론이 보도하는 모습에서는 논조의 변화가 읽힌다. 국회에서 법안이 발의되어 소위원회에 상정이 되면, 이에 대해 국회 내 전문위원들이 검토보고서를 만들게 된다. 그런데 이상헌 의원의 통계법 개정안 발의에 대한 보도에는 김일권 수석전문위원이 검토보고서 넣은 “게임이용장애를 질병으로 인정할 경우 관련 규제와 낙인효과가 일으킬 악영향에 대해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 법률 전문위원의 의견이 기사화에 포함되는 경우는 많지 않은 바, 언론사가 찬반 중 어느 쪽의 의견에 더 손을 들어주고 싶은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WHO가 ISD를 전면 개정한 2019년에는 ‘게임 중독’이 용어로 사용되면서 게임에 부정적인 기사가 많이 생산되었다. 반면 2020년에는 게임의 순기능을 강조하는 담론이 계속 유통되었고, 이런 여론이 조성되면서 2022년의 게임의 문화 예술 지위가 인정된 문화예술진흥법 개정, 2023년의 게임 과몰입 용어를 사용한 게임산업진흥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한국의 여론이 어느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언론의 태도 변화로 읽어낼 수 있는 셈이다. 대부분의 경우 정책은 여론을 따라가게 마련이다. 따라서 게임이용장애 질병 코드 등재 사안을 다루는 통계청 민관협의체의 절차가 느린 것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찬반 의견이 강력히 부딪히는 가운데, 코드 등재를 하지 않으면서도 그 부작용 방지를 철저하고 확실하게 하기 위한 일처리를 하는 중이라서 느린 것일 수 있다. 혹은 행정부 내에 코드 등재를 하려는 확고한 의지가 있어서 싸우는 중이라서 느린 것일 수도 있다. 지금 서술한 해석에는 약간의 비약과 희망이 들어가 있으며, 실제는 두 가지 해석 사이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Tags: 게임중독, KCD-11, ICD-11,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덕질인) 홍성갑 프리랜서 작가. 이 직업명은 ‘무직’의 동의어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딴지일보에서 기자를 시작하여 국정원 댓글 조작을 최초로 보도했다. 평생 게이머로서 살면서, 2001년에 처음 게임 비평을 썼고 현재 유실된 것을 매우 기뻐하고 있다.

  • 『아이프리버스』와 『비밀의 아이프리』, “프리파라 아저씨”: 무엇이 ‘비밀’인가?

    체크 남방을 입은 덩치 산만한 남자가 자기 몸뚱이만 한 알록달록한 보라색 아케이드 게임기 앞에 앉아 있고, 그 뒤에서 작은 여자아이가 차례를 기다리는 사진이 밈처럼 퍼진 적이 있다. 그 게임의 이름은 『프리파라』다. 모두가 사진을 찍혀 밈이 되어 인터넷 세상을 부유하지는 않지만, 많은 수의 프리파라 “프리파라 아저씨”들이 있었고, 프리파라의 시대 당시 10대 중반이었던 나에게 프리파라의 모든 것을 가르쳐준 것도 프리파라 아저씨(들)이었다. < Back 27 GG Vol. 25. 1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ubin Yoon Became a gamer through a bond with the Pokémon series that began in 2007, though in 2023 declared a breakup with it. Even so, the line of output text from the Pokémon games—"The sunlight turned harsh!"—remains a life motto. Has lived a life of making fanzines whenever a new favorite game comes along, but since 2024 has taken up game criticism as a new language for appreciation. Sometimes writes and draws fan works under the handle "Runts."

  • 게임플레이의 영화화에서 게임-보기의 영화화로

    “치킨 조키!” 주인공 스티브가 외치자 영화관의 관객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팝콘을 집어 던진다. 영화 <마인크래프트 무비>(2025)가 개봉한 미국 영화관의 풍경이다. 틱톡 등 숏폼 플랫폼을 타고 바이럴된 컬트적 현상은 지난해 예고편이 공개되자 거센 조롱이 뒤따랐던 것에서 출발한다. 스티브역의 잭 블랙은 게임 팬들이 생각하던 이미지와 큰 괴리가 있었고, CGI로 ‘실사화’된 마인크래프트 특유의 네모난 이미지가 언캐니 밸리를 자극했다. < Back 24 GG Vol. 25. 6.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Dongsoo Park Majored in art studies as an undergraduate and is currently studying media cultural studies at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Yonsei University. Writes primarily about film, while keeping a curious eye on visual culture broadly—art, games, and broadcasting among them. Also a film critic, host of the podcast Café Critique, and an organizer of community film screen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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