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는 자기 자신을 향해 끝없이 질문해야 한다” - 죄책감 3부작의 개발자 somi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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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1. 6. 10.
세계에서 마주하게 되는 죄책감을 느슨한 연결로 풀어낸 SOMI의 ‘죄책감 3부작’이 막을 내렸다. 전의 두 작품이 세상 밖으로 닿는 길을 터주었다면, 2020년 신작 <더 웨이크>는 한 개인의 과거와 깊은 내면으로 안내한다. 암호를 해독하며 엔딩에 이르렀을 때, 눈 앞에 펼쳐진 가장 개인적인 삶은 나를 뒤돌아보게 한다.
<더 웨이크>로 ‘죄책감 3부작’이 완성되었다
두 번째인 <리갈던전>까지 만든 뒤 내 게임이 ‘죄책감’에서 기인한다는 걸 느꼈다. 사회적 부조리와 구조적 불평등, 소외된 이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은데 방관자로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 <더 웨이크>는 개인적이고 근원적인 죄책감의 발원지를 찾으면서 시작되었다.
사진과 영상이 풍부해 게임에 더 몰입했다
영상과 사진 모두 내 앨범에서 가져왔다. 영상도 어렸을 때 삼촌이 홈 비디오 카메라로 찍어주신 걸 컴퓨터 파일로 변환해서 넣었다. 일상 그대로를 담아선지 제작하면서도 만감이 교차하더라. 플레이 하는 사람들이 게임 속 아버지를 욕할 때마다 우리 아빤데 저런 식으로 욕을 먹네 싶어서 기분이 묘하다. (웃음)
사람들의 반응은 확인했는지
자신의 어린 시절이나 부모와의 연대에 대한 회고 형식의 글을 리뷰로 남겨주시는 분이 많아서 놀랐다. 감동을 받기도 했다. 이 게임이 지난 상처를 치유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싶더라.
게임은 ‘만드는 사람을 비추는 창’
직업이 있는 상태에서 게임 개발을 시작했다
결심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게임에 얽힌 추억이 궁금하다
초등학교 입학 전 한국에 ‘재믹스’라는 게임기가 막 들어왔을 때 아버지께서 그걸 사오셨다. 동네 꼬맹이들이 모두 다 우리 집 앞으로 모여서 ‘갤러그’를 했고 가끔씩은 아버지, 어머니, 형, 나까지 네 식구가 함께 모여 ‘로드 러너’를 했다. 플레이어가 죽고 뜨는 정지 화면을 앞에 두고 온 식구가 어떻게 해야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갈 수 있을지 궁리했다. 게임 광고 화면에 쓰일 법한 아름다운 모습이지 않은가. 이 기억 덕분에 게임에 애착을 느끼게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메시지와 재미를 둘 다 잡는 데 성공한 개발자다
어떻게 하면 메시지를 부각하면서도 재미를 잡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말하는 게임의 ‘재미’란 뭘까? 혹자는 ‘재미’가 원시적인 말이라더라. 사람마다 기준도 다르고 의미도 포괄적이다. 그 자체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을 목표로 삼다 보면 유행을 따르게 된다. 그래서 게임에 어떤 세계를 담을지 고민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독자적인 세계관과 서사를 만들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에게 인격을 부여해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는 세계를 만드는 사람과 그의 생각을 닮게 된다. 그러니 개발자는 자신에 대해 더 많이 묻고 성장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게임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나
유년기 이후로는 게임에 대한 기억이 없다. 친구들 다 스타크래프트 하던 학창시절에도 공부만 했다. 게임 개발을 위해서 다시 게임을 접했다.
게임 개발에 뛰어든 이유는
고등학생 땐 만화를 그렸고 대학생 때는 신춘문예 등단의 꿈을 갖고 소설을 썼다. 항상 내 창작물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고 싶었다. 그러다 아이폰이 처음 들어왔을 때 앱스토어에 개인이 창작물을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을 듣고 이야기가 들어가는 앱을 제작해 배포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 아예 게임을 만들어볼까 생각이 들어 3개월 동안 무작정 게임을 받아 보고 나름의 게임 공부를 해서 <레츠놈>을 만들었다.
창작의 종류에 따라 필요한 역량이 다르다는 걸 느꼈을 것 같다
게임 개발자에겐 필요한 역량은 무엇일까
잘 모르겠다. 어떤 특징이 장점이 될 지 단점이 될 지는 알 수 없다. 개발 초반엔 내 게임 경험이 부족해 기존 게임 문법을 모르는 게 단점이 될 줄 알았는데 그런 접근법을 신선하게 여기고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있더라.
그럼 본인의 장점을 꼽자면
한 분야에서 출중한 재능을 가지지는 못 했지만 작은 요소들의 조화를 이룰 줄 안다. 고등학교 때부터 만화 그리는 걸 좋아해서 대학교 때는 그래픽 디자인을 했다. 디자인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내가 도맡아 했다. 문학적인 경험도 있고. 이렇게 여러 분야를 소화해 보고 작은 요소들을 접목할 줄 알았던 점이 게임이라는 특이한 장르에서 도움되었던 게 아닐까 싶다.
이야기로서 게임
크레딧을 보면 항상 책이 등장한다
각 게임마다 어떤 책에서 영향을 받았는지 듣고 싶다
책 읽는 걸 좋아한다. 세상엔 귀한 작품이 많다. 게임 개발을 할 때도 다 끝내고 읽을 책을 리스트로 만들어둘 정도다. <레플리카>를 처음 완성했을 때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재능있는 리플리>라는 소설을 기반으로 했다. 그러다 2016년 국정농단이 한창일 때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에서 한 국회의원분께서 코리 닥터로의 장편소설 <리틀 브라더>를 언급하시는 걸 듣게 되었다. 소설을 읽고 대한민국의 참혹한 현실과 대비되어 고민이 많아져서 원작 작가 분께 허락을 구하고 플롯을 가져왔다.
<더 웨이크>를 제작할 땐 페미니즘과 성소수자 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관련 서적을 모아 읽고 있었다. 그때 엘리슨 백델의 그래픽노블 <펀 홈>을 접했다. 작가가 가족의 죽음을 중심으로 자아를 통찰한다는 데서 감화되어 기본 구성을 가져오게 되었다. 게임을 이끌어가는 암호 기계는 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사용한 ‘에니그마’를 차용했다. 이 또한 다비드 라게르크란츠의 <앨런 튜링의 최후의 방정식>을 읽다가 찾은 소재다.
주제의식이 뚜렷한 편이다
기억나는 사람들 반응은
<레플리카> 출시 초기에는 빨갱이 소리와 함께 ‘북한에서 만든 게임 아니냐’는 반응이 제법 있었다. 특이했던 반응은 …해외에서 전직 CIA 요원을 하셨던 분이 추천글을 써 주셨던 게 기억에 남는다. ‘Voice Of America’란 매체에선 나를 ‘한국의 저항적 운동가’라고 표현하더라. (웃음) 정치적 내용이 포함된 게임인 만큼 어느 정도 예상한 전형적인 반응이라서 게임이 역할을 다 했다 싶었다.https://www.voanews.com/east-asia/south-korean-video-game-raises-awareness-government-surveillance
여러 포맷 중에서도 게임으로 이야기하면 무엇이 가능해질까
전엔 게임은 종합예술이라면서 게임의 상호작용성을 휘황찬란하게 설명했다. 특히 탄핵 당일 날 사람들이 축배처럼 <레플리카>를 플레이 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명을 받았다. 게임을 통해 플레이어들이 서사에 참여해 공명을 일으킬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이후에, 게임에서 주인공의 고통을 체험했을 거라 믿었던 사람들이 한 개인의 사상을 검증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았다. <레플리카>에서 정보 기관이 개인을 억압하기 위해 사용한 검열 방식과 유사했다. 더 이상 게임의 매체적 특성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게임은 단지 이야기를 담는 그릇일 뿐이다. 중요한 건 게임 안에 담긴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가 얼마나 큰 감흥을 줄 수 있는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게임은 문화다?
한국의 정부기관이 거론하는 ‘게임은 문화다’라는 구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형 개발사들은 플레이어들이 아이템에 더 큰 금액을 소비할 수 있도록 BM(비즈니스 모델, Business model) 설계에 열을 올리며 도박과의 경계가 흐릿한 확률형 가챠 게임을 쏟아낸다. 인간의 중독 기제에 관한 연구를 하고 중독 유발 요소를 적재적소에 배치했다고 자랑스럽게 인터뷰 한다. 여성혐오나 소수자 혐오를 부추기는 게임이 지속적으로 출시 되고 여성 캐릭터의 신체 부위를 더 현실같이 재현하는 데 최신 기술이 동원된다. 우리가 게임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문화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바보 같은 선언보단 지금까지의 잘못을 반성하고 앞으로 어떤 게임을 만들 지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하다고 본다. 정말로 게임이 문화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문화로서의 게임, 가능할까
모두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만 보는 게 아니듯, 게임도 이야기의 힘만으로 매력적인 작품을 만들 수 있다. 투입된 자본의 양이나 중독성을 자극하는 요소를 떠나서 매력적인 작품은 지금도 충분히 많다. 앞으로 그런 작품들이 사람들에게 더 큰 공감을 불러 일으킬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런 게임들이 국내에 많지 않은 게 문제다.
대형 자본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소규모 게임을 인디게임으로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있다
인디게임 개발 당사자로서 생각은 어떤지 듣고 싶다
인디 게임은 저항 정신이다. 국가와 사회의 주류에, 유행하는 장르나 플랫폼, 서사 구조, 기믹에 저항하면 인디게임이라고 생각한다. 형식적인 부분을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 개발자들이 대형 퍼블리셔에 엮이는 건 그 우산 속으로 들어가야 자신의 게임을 더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1인 인디게임 개발자로서 SOMI
크레딧을 보면 항상 협업자가 있다
협업자를 어떻게 구하는지 궁금하다
어디서든 좋은 음악이나 원화, 양질의 번역을 보면 작업 의뢰 연락을 드린다. 내 소개와 포트폴리오, 협업을 원하는 작업물에 대한 소개를 보내는 거다. 이렇게 해서 서로의 작업 방식에 대한 이해가 전제된 상태로 협업을 시작하게 되면 제작에 대한 관점을 공유할 수도 있고 서로 작업물 퀄리티를 알아서 좋은 시너지가 난다.
상업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갖춘 인디게임 중 추천할 작품이 있다면
이탈리아 개발자 중 레너드 멘치아리의 '라이엇: 시빌 언레스트(RIOT: Civil Unrest,)'를 추천한다. 플레이어는 시위 현장에서 시위대, 경찰, 시위를 막는 경찰 중 누구든 선택할 수 있다. 각자 입장에서 플레이 하다 보면 시위 속 대립하는 당사자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지게 된다. 개발자가 이탈리아에서 시위에 참여했던 경험을 토대로 주요 국가를 돌아 다니면서 취재한 시위 현장을 게임에 녹여냈다. 그것도 사비로. (웃음) 2016년도 ‘인디 케이드(IndieCade)’에서 만나 친해진 친구라, 그 게임의 한국판 경찰 목소리는 내가 연기했다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다. 레너드와 퍼블리셔 사이에 마찰이 있어서 레너드 버전은 모바일에서 무료로 배포되어 있으니 꼭 플레이 해보길 바란다. ‘이터널 캐슬(The Eternal Castle)’도 추천한다.
다음엔 리듬게임을 만들어 보고 싶다고 했었는데
리듬 게임은 이상향 같은 존재다. 매번 잘못된 번역 때문에 시달렸다. 그래서 <더 웨이크> 때는 아예 문학 작품을 번역하시는 분께 의뢰 드렸고 전엔 팬분들이 배포 이후 자발적으로 번역에 참여해주시기도 했다. 늘 텍스트 없는 게임을 만들고 싶지만 만약에 하고 싶은 얘기가 생긴다면 마음이 또 바뀔 거다.
언제까지 게임을 만들고 싶은지
일과 게임 개발을 병행하는 게 쉽지 않다. 퇴근해서 저녁을 먹으면 딱 8시 반, 아기랑 놀고 집안일 하다 보면 11시, 12시라 하루에 쏟을 수 있는 시간이 새벽의 한 두 시간 뿐이다. 갑자기 게임이 빵 뜨면 6개월 정도 휴직하면서 게임을 마음껏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