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전쟁기계와 게이밍, 전 지구적 지각의 병참학 - 세계체제 자본주의 게임공간의 알레고리
25
GG Vol.
25. 8. 10.
시뮬레이션, 지각의 재목적화 혹은 전술화
먼 미래, 22세기 말 우주로 진출한 인류는 태양계 외곽에서 외계 종족 ‘버거’와 조우한다. 버거는 인간을 적으로 간주하고 두 차례 지구를 침공하지만 지구 함대는 가까스로 막아내고 3차 전쟁을 준비한다. 지구인들은 뛰어난 상황 판단, 전술 지휘 능력을 지닌 아이들을 선발해 게임으로 그들을 훈련시킨다. 이 게임은 각각 ‘마인드 게임’, ‘배틀 게임’, ‘함대 지휘 시뮬레이션’ 세 가지로 이뤄져 있다. ‘마인드 게임’은 심리 분석용 롤플레잉 게임, ‘배틀 게임’은 무중력 공간에서 펼쳐지는 분대 단위 전투 게임이며, ‘함대 지휘 시뮬레이션’은 대규모 함대를 통제해 싸우는 지휘 게임이다. ‘엔더 위긴’은 특출난 재능을 지닌 유망주로, 유년 학교에서 사령관 학교까지 승승장구하며 성장한다. 엔더는 졸업 시험으로 전 인류 군대를 이끌고 버거의 모행성을 침공하는 함대 결전 시나리오를 플레이하는데, 엄청난 아군 희생, 비인간적이고 극단적인 전략 운용 끝에 가까스로 버거 종족을 멸망시키는 데 성공한다. 게임이 끝나나자 그를 지도하던 선생들은 엔더를 추켜세우며 환호한다. “자네가 해냈어. 자네가 인류를 구원한 거야. 이건 게임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다네, 엔더.” 망연자실한 엔더는 그제야 자신이 희생시킨 동료들, 폐허, 버거 종족 멸망이 모두 자기 손에서 벌어진 진짜였음을 깨닫는다.

* 올슨 스콧 카드, 『엔더의 게임』(1985). 영화 <엔더의 게임>(2013).
올슨 스콧 카드의 SF소설 <엔더의 게임>의 스토리다. 이 작품은 <스타워즈>, <스타트렉>, 은하영웅전설>, <듄> 등 전쟁을 소재로 한 유명 스페이스 오페라물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게임을 소재로 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소설이 다루는 전쟁 게임 덕분에, 다른 작품들에 비해 훨씬 현실적으로 전쟁의 본질을 보여준다. 왜 그럴까? 프랑스의 기술철학자 폴 비릴리오(Paul Virilio)에 따르면, 전쟁의 핵심은 적의 인구와 영토를 파괴하는 물리력이 아니라 적의 ‘지각’을 지배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전쟁은 마술적 스펙타클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스펙타클을 생산하는 것이 전쟁의 목표다. 적을 무찌르는 것은 곧 적의 지각을 사로잡는 것이고, 죽음 이전에 죽음의 공포를 적에게 심어주는 것이다…무기의 힘은 야만적인 물리력이 아닌 영적인 힘이다.” [1]
그렇다면 공포와 흥분, 무력감과 엔돌핀, 도파민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길들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은 무엇이 될까? 흥분과 공포를 대리 체험하고 뇌리에서 구조화하도록 만들어주는 ‘시뮬레이션’은 게임을 만들고, 플레이할 때 가장 활성화된다. 두뇌의 시뮬레이션 기능은 인간 진화의 핵심으로 단순히 시청각적 감각의 모방을 넘어 지각의 체계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인간은 어릴 때부터 본능적으로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상황의 서사를 시뮬레이션한 뒤 스스로 모방·학습해 나간다.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들은 예술의 본질이 모방이라고 했지만, 모방의 진정으로 구조적이고 구성적인 측면은 놀이에 있음을 우린 유년 시절 즐겼던 수많은 게임으로부터 배웠다. 경찰과 도둑놀이, 술래잡기에서 사냥감을 쫓거나 혹은 포식자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체득했으며, 장난감 총칼을 든 전투에서는 폭력의 위험성과 쾌감을 동시에 느꼈다. 게임, 특히 폭력이나 전쟁을 소재로 한 게임은 이 감각을 체험하는 가장 가깝고도 단순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게임이 아이를 폭력적으로 만든다’는 말이 진공에서 튀어나온 것은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방식으로 우리의 지각을 바꿔놓기 때문이다. 이라크전쟁 미 해병대의 잔혹한 현실을 풍자한 전쟁드라마 <제너레이션 킬>에는 게임광 출신 병사 ‘트롬블리 일병’이 등장한다. 그는 전투에서 자신이 즐겼던 FPS 게임의 효과음을 입으로 내며 사격하고, 적군을 사살할 때마다 킬 카운트를 확인한다. “전쟁은 왜 이리 지루하죠? 게임은 화려하고 실감나던데.”
마인드게임, 배틀 게임, 지휘 시뮬레이션
폴 비릴리오는 인류 전쟁 역사의 본질이 ‘지각의 병참학’ 이었다고 정의한다. 전쟁은 점점 물리적인 공간이라기보다는 ‘지각장’으로 변해가고 있다. 다시 말해 물리적인 힘이 직접 교차하는 성격은 사라지고 은폐와 드러내기, 즉 ‘보기’에 대한 테크닉의 장으로 바뀌어가는 중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드론은 현대전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최첨단 대공 레이더는 드론을 포착하지 못했고, 수십억짜리 주력전차들은 마트에서나 파는 상용 드론에 무력화됐다. 군함 한 척 없는 우크라이나 해군은 해상 드론으로 러시아 해군 기함 모스크바함을 격침했다. 트위터X에는 양측이 올린 전투드론 영상으로 도배되어 있는데, 보병의 개인화기로는 드론을 잡는 게 불가능하다. ‘보는 순간 교전한다’가 아니라 ‘보는 순간 모든 건 끝났다’가 이 전쟁이 자아내는 냉혹한 현실이다. 현대 전쟁은 동호인들이 즐기던 값싼 취미에 의해 공간의 소멸을 야기하고 있으며, <콜 오브 듀티> 나 <메달 오브 아너>의 흥분 넘치는 ‘택티컬’은 전쟁의 도파민을 가장 장벽 없이 즐길 수 있는 밀리테인먼트로 기능했다. 하지만 그 어떤 게임이 <엔더의 게임>에서 주인공이 마지막에 느낀 절망감을 반영하는가?
‘마인드 게임’에 해당하는 심리분석 및 RPG게임, ‘배틀 게임’에 해당하는 피지컬 중심의 전술 게임(FPS), 함대 지휘 시뮬레이션(실시간 및 턴제 전략 시뮬레이션)은 놀라울 정도로 전쟁의 심연에 가까이 있다. 전쟁-게임-기술의 삼체문제가 향하는 지점은 더 많은 살상, 더 효율적인 응시, 유기체적 지각에 대한 무기체적 지각의 승리에 있다. 우리는 <에이스 컴뱃> 같이 화려한 현대 전투기 도그파이팅을 소재로 한 슈팅 게임에서 인간 인지와 감각의 승리를 자처하지만, 붉은 남작의 시대와 같은 낭만 넘치는 기사도 이야기는 전쟁기술과 게임기술의 결합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능동 위상 배열 레이더(은폐를 드러내는 장치), 장거리 공대공 미사일(물리력 투사), 조기 경보 시스템(전장 조망 체계), 네트워크전 시스템(데이터 공유), 그리고 조종사에 주어지는 HMD(헬멧 마운트 디스플레이)와 키네틱 조작장치의 조합으로 구성되는 BVR(Beyond Vision Range) 전투는 밀리테인먼트에서 순수 인간 육체의 지각 능력이 얼마나 비루한지를 보여준다. 러-우 전쟁에 참전했던 서방의 한 용병은 전쟁 내내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는 자주포 포격음과 폭발소리, 드론의 비행 소리만 들었고, 육안으로 적을 볼 기회는 거의 없었다고 증언한다. “그들을 눈으로 본다는 건 곧 내가 죽는다는 걸 의미합니다.”

* 17세기 천체 망원경의 출현은 전쟁 기계와 정찰 기계를 합치시켰다. 광학장치로 조망하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시야가 미치지 않는 곳까지 전투가 확장되고, 현실적인 것과 가상적인 것은 뒤섞인다. 20세기 초 카메라와 항공기, 인공위성과 레이더는 H.G.웰스가 자신이 직접 제작한 전쟁게임 <리틀 워즈>의 현실-가상 복합 조망체계를 실현시켰다. 현대의 정찰드론과 VR기술의 결합은 시야가 미치지 않는 곳에 물리력을 투사할 뿐 아니라 ‘본다는 것’의 의미를 바꾸고, 배틀 게임-지휘 시뮬레이션의 가상적 지각을 실제 전장에 위상학적으로 정렬시킨다.
개입할 수 없는 플레이어, 그리고 전쟁이라는 게임 공간
‘게임을 즐기면 폭력에 둔감해지고 야만성에 휩싸인다’는 비판은 정말 1차원적인 발상이다. <콜 오브 듀티>, <스타크래프트>, <하츠 오브 아이언>이나 <A.R.M.A> 시리즈를 즐긴다고 플레이어가 야만 전사가 되지는 않는다. 이런 주장은 ‘게임은 질병이다’라는 허무맹랑한 거짓말과 더불어 종교 근본주의자, 전미 총기협회 관계자가 즐겨 쓰는 조삼모사 수사학에 불과하다. 총기 난사 사고의 근본적인 문제는 총을 둘러싼 삶의 규범(예컨대 미국 수정헌법 2조)에 있지 <GTA> 시리즈에 있지 않다. 한편 게임을 사랑하고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게이머들, 게임 산업 관계자들, 의료 전문가 집단은 게임과 폭력이 아무 상관없으며 산업에 해가 되는 규제를 모두 풀어야 한다거나 ‘자유’ 라는 측면에서 검열을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소모적인 갑론을박 속에서 두 가지가 뒤로 밀려나게 되는데, 하나는 전쟁-폭력-게임을 둘러싼 전 지구의 지정학적 갈등에 대한 구조적 비판이 사라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기와 게임을 결합하는 군산복합 기술체계의 실체가 가려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투의 폭력이 아닌 전쟁의 폭력이 무엇인지 아는 문제, 전쟁-게임을 매개하는 기술을 이해하는 문제가 시급하게 요청되는 바이다.
상황주의 예술가이자 좌파 정보기술 비평가인 맥켄지 와크(Mckenzie Wark)는 자신의 책 『게이머 이론』에서 이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낸다. 게임은 단순히 군사 기술을 민간에 옮겨온 것이거나 병사를 훈련시키는 장치가 아니라, 인터페이스와 컨트롤러를 조작해 정보를 빠르게 처리하고 반응하는 능력(capability)의 총체라는 것이다[2]. 문제는 VR기기를 쓰고 전투 중인 드론 조종사가 전쟁의 정치경제적 맥락에 개입할 수 없는 것처럼, 인터페이스를 조작하는 게이머들 또한 그러하다는 것이다. 군인들처럼 게이머들 또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임무를 완수하는 것만 요구될 뿐이다. 무기에 복잡하게 연동되어있는 인터페이스, 통제장치의 코드(전쟁의 정치적 목적)는 감춰져 있고, 전쟁 폭력은 추상화된다. <제너레이션 킬>에서 트롬블리 일병이 왜 전쟁을 지루해 했는지 이제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게임에서는 ‘임무 완료’ 와 임무 소요시간, 성과 등이나마 보여주지만 현실에서 전투의 결과는 모호하기 짝이 없다. 적군을 몇 명 죽여서 어떤 정치적 승리를 거뒀는지, 그 영향력이 무엇이었는지 일개 병사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군인은 끊임없이 고통(agony)에 시달린다. 자신의 행위가 만들어낸 결과가 도대체 뭔지 파악할 길이 없어서이다. 와크에 따르면, 전 지구적 군산복합체를 중심으로 펼쳐진 세계체제 공간은 이제 게임공간(Gamespace)이 되어간다.
지정학, 전쟁, 국제정치, 산업과 노동 모두 게임 인터페이스-컨트롤러의 코드를 닮아가지만, 게임의 규칙은 불공정하고 깨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게임의 규칙이 공정하다고 믿고 이 게임의 알레고리(Allegory)를 수행하지만, 현실이라는 게임공간에는 정당한 보상도 공정한 규칙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게임간이란 곧 자본주의 불평등의 게임이며, 알레고리는 지배 권력이 예외상태로 배제된 자들을 추방하는 알고리즘이라 할 수 있다[3].
거대전쟁기계(Mega War Machine)의 전달자로서 플레이어
이런 관점에서 보면, <콜 오브 듀티>와 <배틀필드> 등 전쟁 스펙타클 게임류는 다른 문제, 전쟁을 둘러싼 국제정치의 복잡한 지형들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보여주는 문제로 비판받는다고 할 수 있다. 이 게임을 즐긴 사람들, 그러니까 프라이스 대위를 존경하거나 멋있다고 느끼는 플레이어들 중 중동의 복잡한 정세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이 게임들은 시아파와 수니파, 대영제국 시절의 식민주의와 이스라엘의 극단적인 시오니즘, 그리고 ISIS의 창궐과 아프가니스탄의 부족주의, 쿠르드족 민병대 등이 왜 각자의 이해관계로 전쟁에 얽히는지에 대해 지나친 일반화를 통해 말초적 재미로 소구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페르시아인과 아랍인들의 차이조차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프라이스 대위가 전쟁을 통해 도대체 무슨 값(price)를 받아내려는지도 알 길이 없다. 플레이어가 이른바 ‘택티컬’한 흥분 속에서 얻는 가짜 교훈이란 이슬람교가 극단적인 테러리즘 종교라는 일차원적 믿음과 허구헌날 클리셰로 등장하는 러시아 갱단의 무기 탈취 및 지구 멸망 시나리오 등이다. 다이어-위데포드와 드 퓨터의 명저, 『제국의 게임』은 이런 관점에서 게임이 MIME-NET(Military, Industry, Media, Entertainment Network)이라고 일부라고 비판한다. 비디오게임은 한 마디로 ‘제국’의 가상 이데올로기적 장치이다. 그것은 군사적인 해결책을 정상인 것처럼 포장하고, 지정학적 갈등을 단순한 선과 악의 대결로 그리며, 게이머들을 가상의 군인으로 훈련시킨다[4].

* 당신은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하는가? 전설적인 델타포스와 네이비 씰 대원이 되어 적진에서 ‘택티컬’한 교전을 하길 갈망하는가? 2004년 그런 확신을 안고 미군이 이라크를 점령했지만, 이라크에 대량 살상무기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 국제사회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을 향한 ‘택티컬한’ 침략이 하마스의 인질극에서 비롯됐다고 보는가? 실상은 20여년 가까이 이어진 봉쇄로 가자지구 인구 대부분이 굶어죽는 비참한 현실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자신의 선조들이 아우슈비츠에서 당한 인종청소와 똑같은 전쟁범죄를 재현하는 시오니스트들의 추악한 형용모순이다. 이스라엘인들이 가자지구에서 행하는 ‘전술’이란 굶주린 사람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하고, 병원과 구호트럭을 폭격하는 학살행위 등이다. 불평등이라는 룰이 적용된 이 세계체제 게임공간에서, <콜 오브 듀티>를 즐기는 것의 의미와 <디스 워 오브 마인>이 생산하는 전쟁의 구조적 폭력 비판은 동시에 상기되어야 한다. 이 게임의 플레이어는 군 통수권자들이지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플레이어가 아니라 그저 폭격으로부터 살아남고자 발버둥 쳐야만 하는 NPC(None Playable Character)에 불과할 따름이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전쟁을 찬미하고 미국 중심 국제 질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는 게임 말고도 영화, 드라마, 다방면에 널려 있다. 그렇지 않은 매체를 찾기가 힘들 정도다. 그러나 ‘세계 체제 게임공간’ 에 접속해 최신 전쟁무기를 휘두르는 플레이어의 감각은 이데올로기 너머의 문제로, 기술체계와 지각의 병참학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 오래 전 기술문명사학자인 루이스 멈포드는 기술의 본질이 단일한 대상이나 혹은 용도 변경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라, 거대기계(Megamachine)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거대기계란 물리적 강제력과 물리학, 수학, 천문학 등 과학적 지식, 그리고 관료제의 권위가 결합한 사회적 기계로, 인간 자체를 부품으로 삼아 구축된 사회조직의 총체이다[5]. 고대 이집트 시대 피라미드에서부터 현대 증기기관까지, 인류의 기술 문명은 대량 살상 능력과 대량 생산 노동력, 사회 지배 이데올로기를 결합한 기술 체계의 앙상블로 진화해 왔다. 현대의 거대기계는 더 파괴적인 원자력과 미디어 재현 기술을 흡수하며 ‘권력의 펜타곤’으로 진화한다. 여기에는 기업의 경제력, 군사력, 그리고 대중매체까지 포함되며, 레짐의 유지와 권력 증식만을 목표로 움직이는 반 유기적 시스템(anti-organic system) 안에서 인간은 부품 그 자체로 전락한다[6].
게임산업과 군산복합체, 그리고 전쟁과 세계체제 빅테크-자본주의 권력은 이미 유기적으로 결합한 거대 전쟁기계(Mega Warmachine)이 된 것은 아닐까? 자폭드론은 VR과 조이패드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드론에 탑재된 전장AI는 피터 틸, 일론 머스크 같은 빅테크 기술 영주들이 정부와 동맹을 맺고 발달시킨 안면인식, 스타링크, 범죄자 식별 알고리즘을 망라하는 AI와 거대 언어모델을 동반한다. 이를 처리하기 위한 컴퓨터 연산 장치를 공급하는 업자는 엔비디아와 AMD 등 게임계 핵심적인 하드웨어 업체들이다. 이 냉혹한 전지구 권력의 게임공간 안에서 플레이어들은 힘의 수직적 전달자, 말 그대로 행위의 주체가 아닌 논 플레이어블 캐릭터(None Playable Character)가 된 것은 아닐까? 우리에게 전쟁은 이제 단순히 TV나 소셜미디어에서 흘러나오는 스펙타클이 아닌, 실존의 위협이라는 사실이 인지되어야 한다. “전쟁, 전쟁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