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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움에 직면한 유럽의 게임 구독 서비스
스태디아는 실패했고, 엑스박스 게임패스는 성공했음에도 여전히 많은 게임팬들로부터 어느 정도 회의적인 시선을 받고 있는 가운데, 유럽에서 이와 같은 유형의 서비스가 미래 시장성을 가지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단 오늘날 게임 시장에서 하드코어 게이머는 소수다. 유럽에서 게임은 나이를 뛰어넘어 매우 광범위하게 확산 되어있는 활동이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6~60세 연령대의 절반에 가까운 인구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가운데 많은 수가 아마도 휴대폰으로 무료 게임을 플레이하는데 그친다 할지라도, 따라서 현 시점에 클라우드 게임이 그리 매력적인 상황은 아니라 할지라도, 구독 기반 게임의 부상은 그리 먼 시점의 일이 아닐 수 있다. < Back 어려움에 직면한 유럽의 게임 구독 서비스 09 GG Vol. 22. 12. 10. **You can see the English version of this article at this URL: https://gamegeneration.or.kr/board/post/view?pageNum=1&match=id:169 지난 15년 동안 게임을 만들고 소비하는 방식은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이는 보다 향상된 인터넷 연결 그리고 새로운 (모바일)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촉발된 변화였다. 한 때 컴퓨터 게임은 상점에서 물리적으로 판매되었고, 그렇게 해서 구매한 게임을 플레이하려면 거실에 위치한 가족용 컴퓨터나 게임용 콘솔 앞에서 여러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게임을 언제 어디서나 플레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변화는 우리가 게임을 소비하는 방식뿐 아니라 게임이 디자인되고 시장에 출시되는 방식까지 바꾸어 놓고 있다. 서비스로서의 게임, 소액 결제, 클라우드 게이밍, 인-게임 광고부터 해서 NFT와 콜렉터블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과 결제 형식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플레이어들도 이와 같은 거대한 변화상을 느끼고 있지만, 그 변화가 플레이어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게임 플레이를 둘러싼 보다 넓은 문화적 맥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게임은 현재 글로벌한 현상이기 때문에 세계의 각 권역별로 그 맥락들은 상이하게 나타날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유럽인의 관점에서 게임 문화를 논하려고 한다. 유럽의 게임 문화와 게이머 정체성 역사적으로 유럽 게임 시장은 대중화 된 개인용 컴퓨터 및 아마추어 게임 개발 활동과 해적판의 번성이라는 특성을 보여왔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 지금도 여전히 – 단순한 여가용 시간 때우기가 아니라 진지한 문화이자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이었다. 고가의 게임 하드웨어를 구매하거나 컴퓨터 앞에서 오랜 시간을 들여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그와 같은 라이프스타일의 전형으로 여겨져 왔다. 이와 더불어 게임이 일부 헌신적인 매니아들을 위한 하위문화라는 인식이 오랫동안 형성되어왔으며, 이 하위 문화의 “구성원”들은 본인이 달성한 성취(achievement)와 더불어 소유하고 있는 게임 장비의 테크니컬 스펙을 통해 그 정체성을 드러내곤 했다. 실력중심주의(meritocracy)적인 게임에서 플레이어의 (게임 하위문화 내) 지위는 게임플레이 실력에 달려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플레이를 잘한다는 것은, 운이 좋은 것이 아니라 열심히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불어 이와 같은 실력중심성이 게임의 가상적 환경에 한정되지 않고 전체 게임 생태계로 스며들어 확장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는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한 개인이 게이머로서 지닌 정체성의 가치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그 성취 - 후에 자아의 확장으로 이어지게 되는 - 에 의해 규정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상은 닌텐도 wii나 모바일 게임 등의 캐주얼 게임의 확산으로 어느 정도 바뀌긴 했다. 캐주얼게임이 보다 넓은 범주의 사람들에게 게임의 접근성을 높여주면서 게이머들의 하드코어한 “서브컬처”라는 규범이 변화해왔음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진정한” 하드코어 게이머들과 짧은 시간동안 간간이 플레이하는 캐주얼 플레이어들 간의 구분은 여전히 존재한다. 여기서 핵심은, 캐주얼 플레이는 하나의 활동인데 반해 하드코어 게이밍은 하나의 정체성이 된다는 점이다. 게이머 정체성에 도전하는 클라우드 게이밍 최근 비즈니스 모델이 게임을 망치고 있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린다. 어떻게 된 일일까? 한 가지 가능한 답변은 비즈니스 모델이 앞서 언급한 게이머 정체성의 구축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의 가장 중요한 발전 중 하나는 클라우드 게이밍과 리모트 플레이 서비스다. 구글 스태디아의 실패는 클라우드 게이밍이 기존의 게임 플레이 실천과 가치에 어떻게 도전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구글 스태디아는 런칭하기 전부터 “게임용 넷플릭스”라 불렸다. 스태디아는 플레이어들과 개발자들에게 각각 약속을 내걸었는데, 개발자들에게는 향후 출시될 타이틀 개발에 대한 경제적 지원과 더불어 엄청난 규모의 수용자들에 대한 즉각적인 접근을 약속했고, 플레이어들에게는 어떤 디바이스를 통해서든 언제나 옛 게임들을 비롯해서 새로 출시되는 메이저 작품까지 포함하는 게임의 다양성을 약속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월정액으로 제공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스태디아는 이 야심찬 약속들을 수행하지 못했으며, 그 이유는 잘 알려져 있다: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독점적인 블록버스터가 부재하다는 것, 일단 스태디아에 게임을 올려놓으려면 개발자들이 게임 이식 작업을 해야 했다는 것, 플레이어들이 스태디아에서 게임을 하려면 이미 소유한 게임일지라도 또 사야 했다는 것. 그리고 구글이 플레이어들이나 게임 업계로부터의 신망을 얻지 못한 채 외부자로서 게임 산업에 진입했다는 것도 한 몫했다. 하지만 그 근간에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점이 존재한다: 스태디아가 게이머 정체성의 구축 그 자체에 도전했다는 것이다. 플랫폼상에서 언제나 게임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스태디아의 약속이 고가의 게임 하드웨어에 대한 수요를 한물 간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언데 어디서나 게임에 접속할 수 있다는 것은 언뜻 좋게 들리지만, 고가의 게임 하드웨어 소유 여부가 하드코어 게이머를 규정짓는 속성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결국 스태디아가 한 일은 다양한 게임에 대한 풍족한 접근뿐 아니라 덜 헌신적인 플레이어 집단으로의 접근 또한 제공한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게임 문화 내 구축 되어있던 위계질서를 흐트러뜨린 셈이다. 앞서 게이머 정체성의 확장을 이야기하면서 언급했던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성취 또한 이와 연관되는데, 이러한 점과 관련해서도 스태디아는 문제가 있었다. 플레이어들이 게임 소프트웨어를 소유하는 게 아니라 서비스를 구독하고 그에 대한 접속권을 얻는 방식이,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게임에 쏟았던 자신들의 노력 및 그에 따른 성공과 성취가 자신의 것이라는 느낌을 잃게 될 것을 우려하게 만든 것이다. 마지막으로, 외부자인 구글이 시장을 파괴하고 정복하러 왔다는 사실 또한 플레이어들의 의심을 샀다. 아마추어 게임 제작이 초창기 시절부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해왔던 유럽의 게이머들은 당연히 더욱 그러했다. 업계 내 여타의 개발사들이 대개 게임 문화 내에서 “내부자 출신”으로 여겨졌던 것과 달리, 구글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소중한 문화를 정복하려 드는 거대 기업으로 보였던 것이다. 고결한 플레이어가 느끼는 위협감 물론 스태디아는 엑스박스의 게임패스처럼 새롭게 등장한 구독 서비스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유럽을 포함해서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편인 게임패스에 대해서도 여전히 비판적인 게이머들이 적지 않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이러한 경향을 소유권의 부재 및 하드코어 게이밍 중심의 “하위문화”의 낮아진 문턱과의 연관 속에서 생각해볼 만하다. 또한 바람직한 게임 문화를 망친다고 여겨지는 새로운 유형의 게임 및 결제 방식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분노도 영향이 없지 않을 것이다. 캐주얼 게임의 도래, 특히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 상에서 플레이하는 게임의 등장은 잘해봐야 수준 이하, 최악의 경우 게임도 아닌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불이 없는 무료 게임의 결제 방식(freemium games) 또한 게임 전체를 오염시킨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한 방식의 게임들은, 좋은 게임의 제작이 아닌,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더 많은 돈을 쓰도록 만드는데 디자인의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한편 게임 내 리소스는 스킬과 노력을 통해서 얻어야 정직한 것이라 여겨지는 경향 속에서, 소액 결제는 – 지금도 어느 정도는 여전히 – 약한 수준의 속임수(cheating)이라 여겨져 왔으며, 따라서 이는 열등한 플레이어나 사용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요약하자면 클라우드 게이밍 및 최신 게임 결제 방식의 발전 방향이 고결한 플레이어에게 위협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 클라우드 게이밍의 미래 스태디아는 실패했고, 엑스박스 게임패스는 성공했음에도 여전히 많은 게임팬들로부터 어느 정도 회의적인 시선을 받고 있는 가운데, 유럽에서 이와 같은 유형의 서비스가 미래 시장성을 가지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단 오늘날 게임 시장에서 하드코어 게이머는 소수다. 유럽에서 게임은 나이를 뛰어넘어 매우 광범위하게 확산 되어있는 활동이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6~60세 연령대의 절반에 가까운 인구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가운데 많은 수가 아마도 휴대폰으로 무료 게임을 플레이하는데 그친다 할지라도, 따라서 현 시점에 클라우드 게임이 그리 매력적인 상황은 아니라 할지라도, 구독 기반 게임의 부상은 그리 먼 시점의 일이 아닐 수 있다. 게임 개발의 측면에서 본다면 더욱 그러한 상황이다. 유럽 게임 산업은 Rockstar North 같은 몇몇 거대 회사나 CD Project Red나 IO Interactive등의 중간 규모 업체 몇 군데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인디 스튜디오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에게 있어 앞서 언급한 상황들에 따른 어려움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유럽 시장에 있어 진짜 어려움은 완전히 다른 전선에서 올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해볼 수 있다. 예컨대 기술 산업 분야의 규제, 특히 개인 정보 취급과 관련된 엄격한 규제 같은 문제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연구자) 이다 요르겐센 이다 요르겐센은 덴마크의 코펜하겐 IT 대학(IT University of Copenhagen)에서 게임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주로 젠더 재현, 게임 문화, 매체로서의 게임 등과 관련된 주제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는 서던 덴마크 대학(the University of Southern Denmark)에서 박사후 과정 중에 있다. (게임연구자) 나보라 게임연구자입니다. 게임 플레이는 꽤 오래 전부터 해왔지만, 게임학을 접한 것은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 우연히 게임 수업을 수강하면서였습니다. 졸업 후에는 간간히 게임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연구나 저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게임의 역사>, <게임의 이론>, <81년생 마리오> 등에 참여했습니다.
- 되돌릴 수 있는가? - 13기병방위권, 호라이즌, 우크라이나
물론 게임은 현실과 다르다. 게임을 통해 얻은 이러한 통찰을 현실에 적용한다고 하면 어떤 일이 가능할까? 회고적 평가를 전제하는 슬로건을 거부하는 것이 시작이다. 과거의 정상적 상태를 회복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원칙과 대안을 논하는 일이 필요하다. 과거 러시아가 지배한 영토가 어디든 우크라이나를 침공해도 되는 이유는 애초에 없다. < Back 되돌릴 수 있는가? - 13기병방위권, 호라이즌, 우크라이나 06 GG Vol. 22. 6. 10.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매력 중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세계에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는 데에 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말 그대로 세상이 멸망한 상황을 전제한다. 게임의 주인공은 망한 세상 안에서도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이러한 노력은 유저의 기대를 충족시킬 만큼의 결실을 맺는다. 즉, 우리가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장르를 향유하는 이유는 세상이 망하더라도 인류는 어떻게든 자기 삶을 꾸려 나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고 싶어서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세상이 망한다’라는 아이디어는 어디서 온 것일까? 어떤 대답이든 게임 밖 현실에 대한 불만족을 빼놓고 얘기할 수는 없다. 세상을 ‘리셋’할 수 있다면 당장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 대가를 치르는 원인이 된 어떤 실수 혹은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른다. 이런 믿음은 종종 정치적 구호로 표현된다. 가령 도널드 트럼프의 “Make America Great Again”은 무언가 잘못되기 시작하기 직전의 어떤 시점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즉 ‘정상화’의 욕망에 호응하는 회고적 선거 구호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감각은 전쟁에도 동원된다. 블라디미르 푸틴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반복해서 호출하는 세계관도 결국은 이것이다. 푸틴의 전쟁 논리에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일부’일 때만 ‘정상적 상태’일 수 있다. 따라서 푸틴에게 있어서 전쟁은 우크라이나를 새롭게 러시아의 영토로 병합하는 게 아니라 뭔가 잘못된 현재를 제대로 된 과거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게 푸틴이 지금의 사태를 ‘전쟁’이라 표현하지 않고 ‘특수작전’이라고만 고집스럽게 말하는 것의 배경 중 하나일 것이다. 반면 우크라이나인들의 인식은 이와는 정반대인데, 그들에게는 소련으로부터 지배를 당한 과거가 비정상적 상태인 현재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해법은 소련의 지배를 받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는 것일 수 있다. 우크라이나인들이 9세기의 ‘키이우 루시’까지 언급하는 이유는 정통성에 있어 우크라이나의 우위를 근본적으로 확립하고자 하는 바람이다. 하지만 실제 현실의 시계를 9세기로 돌릴 순 없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정치는 러시아가 아닌 유럽의 일부가 되는 게 가능했던 시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타협하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연합과 나토 가입이 오랜 기간 현안으로 다뤄져왔던 것이다. 그러나 일반론적으로 말해서, 특정 시점으로 돌아가는 것에 성공한다 해도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예를 들어 〈13기병 방위권〉의 결말에 대해 생각해보자. 〈13기병 방위권〉은 이상적 세계를 다시 만들기 위한 재시작의 시점을 언제로 해야 하느냐 라는 주제를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물론 이것이 게임이 다루는 주제의 전부는 아니다). 일본인들이 만든 게임이다 보니 ‘역사’는 일본이라는 국가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그 점을 감안해서 보자면 게임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과거 시점이 1945년과 1985년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게임이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때, 결국 일본인들이 ‘되돌아갈 수 있는’ 선택지는 패전으로 치달은 군국주의이거나 안보투쟁 이후 거품으로 귀결된 80년대라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게임의 주된 배경은 1985년의 세계이다. 1945년의 세계는 비록 그것이 외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멸망을 피하지 못했다. 살아남은 주인공들은 게임의 엔딩에서 자신들이 그 일부를 이루는 1985년의 세계를 새로운 미래에 다시 구현하려고 한다. 결국 〈13기병 방위권〉의 결말이 제시하는 ‘재시작’의 시점은 어찌됐건 1980년대로 봐야 하는 것이다. * 〈13기병 방위권〉은 일본 현대사의 여러 시점을 오가며 주인공들의 교복과 주변 환경 등을 통해 이를 드러내고자 한다. 각각의 시점은 실제 일본 현대사에서의 주요 분기점으로 나타난다. 오늘날의 일본 주류정치는 현실의 불만에 대한 돌파구를 군국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에서 찾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적극적 평화주의를 내세우며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가능하게 만든 일본 정부는 이제 ‘적 기지 공격 능력’을 거론하며 패권을 확장하려고 한다. 일본의 우익세력이 실제 전쟁을 일으킬 의지를 갖고 있는지와는 별개로, 이것은 어찌됐건 ‘전쟁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 어떤 행보로 평가하는 게 불가피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전쟁의 가능성’을 실제로 뒷받침하는 알리바이로 기능한다. 일본 뿐만 아니라 독일의 재무장도 같은 맥락에서 이뤄지고 있다. 이런 현실까지 고려하면 〈13기병 방위권〉의 메시지는 패전을 겪고 평화주의를 수동적으로 채택하는 결말을 굳이 반복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것으로도 읽힌다. 그러나 또한 부정할 수 없는 것은 현실에선 1945년이 있었기 때문에 1985년도 가능했다는 것이다. 패전이 있었기 때문에 요시다 내각의 평화주의가 가능했던 거고, 요시다 독트린이 있었기 때문에 그 반발로서 기시 내각이 1960년 신미일안보조약을 추진한 것이며, 그게 다시 1970년까지의 안보투쟁 국면과 그 이후 정경유착으로 기억되는 경제 우선의 시스템으로 귀결됐던 거다. 1985년은 그러한 이유로 조성된 호황기가 플라자 합의 등 대외 변수가 작용한 끝에 꺾이기 시작한 해다. 이 시점에 다시 시작한들, 불황과 이어지는 우익의 재부상을 막는 게 가능할까?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13기병 방위권〉의 결말은 ‘쇼와 향수’로의 도피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기만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 ‘회상편’과는 달리 ‘붕괴편’에선 기계들과의 싸움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사실은 작품 자신에 대한 우화처럼 느껴진다. 어느 시점에서 다시 시작해도 실패를 되풀이하는 게 불가피하다면 아예 태초로 돌아가보는 것은 어떨까? 〈호라이즌〉 시리즈는 이런 가정에 대한 이야기다. 다만 〈호라이즌〉이 상정한 다시 되돌아 온 ‘태초’는 인위적이다. 멸망 후 도래한 암흑 속에서 신이 “빛이 있으라”고 말하는 것은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새로운 시작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되돌아간다’는 것을 전제하려면 ‘재시작’은 반드시 인간이 설정한 어떤 조건들의 반영이어야 한다. 〈호라이즌〉에서는 비록 100%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이아’ 시스템이 이 역할을 전담한다. 그러나 바로 이 조건 때문에 ‘재시작’은 그저 ‘되돌아가는 것’이 될 수 없었다. 〈호라이즌 제로던〉은 원인을 알 수 없는 ‘가이아’ 시스템의 어떤 오류가 또 한번의 인류 멸망을 촉발할 위기를 일으킨 것을 주인공 에일로이가 막아내는 얘기다. 만일 〈호라이즌〉 시리즈의 얘기가 이렇게 마무리가 됐다면 우리는 돌발적으로 일어난 사태에 현명하게 대응한 인류가 이전 세계의 지식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재시작’의 시대를 순조롭게 이어가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의 결말은 이러한 기대를 순진한 것으로 만들고야 만다. 새로운 인류를 다시 멸망시킬 뻔한 ’가이아’의 오류는 돌발사태였던 게 아니라 이전 세계로부터의 연속성을 가진 사건의 결과였던 것이다. 심지어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의 결말은 이전 세계의 존재 때문에 멸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인류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 즉, 이전 세계의 맥락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모든 것을 새롭게 ‘재시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되돌아가고자 했다’라는 사실까지 되돌릴 수 없는 이상 온전히 되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유일하게 남는 선택지는 설령 미래가 절망뿐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발을 딛고 선 바로 그 지점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모색을 계속하는 것이다.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 엔딩의 에일로이와 동료들이 마주한 길도 그것이다. 물론 지구를 향해 달려오는 절대악에 직면해있는 이들의 미래는 그다지 밝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이것은 ‘게임’이기 때문에, 〈호라이즌〉 시리즈를 이것으로 끝내기로 한 게 아니라면, 에일로이와 동료들은 그게 뭐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물론 게임은 현실과 다르다. 게임을 통해 얻은 이러한 통찰을 현실에 적용한다고 하면 어떤 일이 가능할까? 회고적 평가를 전제하는 슬로건을 거부하는 것이 시작이다. 과거의 정상적 상태를 회복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원칙과 대안을 논하는 일이 필요하다. 과거 러시아가 지배한 영토가 어디든 우크라이나를 침공해도 되는 이유는 애초에 없다. 러시아의 침공이 부당한 이유는 먼 옛날부터 존재해 온 독립적 국가로서 우크라이나의 역사나 민족의 문제과 큰 관계없다. 전쟁은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 전쟁은 오늘 이 순간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인 것이다. 이미 답을 다들 알고 있는데, 안 되는 일을 안 된다고 말하는 걸 곧이곧대로 듣는 사람이 별로 없는 세상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시사평론가) 김민하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시사평론가로 활동하지만 게임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게이머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냉소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돼지의 왕』이 있고,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우파의 불만』, 『트위터, 그 140자 평등주의』 등의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최근작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가 있다.
- 상상된 공간의 지도화: 가상공간의 전시와 도식화
“지도는 영토보다 흥미롭다.”1) 프랑스 소설가 미셸 우엘백(Michel Houellebecq)의 문장이다. 영토가 위상학적 차원에서 물리적인 땅과 장소를 가리킨다면 지도는 그 땅을 표상하는 이미지다. 지도는 왜 영토보다 흥미로운가?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의 평면으로 기호화 하는 작업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지도는 신체와 물리적인 공간을 서로 마주하게 만드는 일종의 ‘인터페이스’(inter-face)로 기능하며, 현상학적 맥락에서 분리할 수 없는 공간적 경험을 하나의 대상으로 삼게 만드는 매개가 된다. 아마도 우엘백이 말한 ‘흥미’는, 실재 세계를 매핑(mapping)하는 인식론적 태도와 세계를 이미지로 상상하는 형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Back 상상된 공간의 지도화: 가상공간의 전시와 도식화 11 GG Vol. 23. 4. 10. “지도는 영토보다 흥미롭다.” 1) 프랑스 소설가 미셸 우엘백(Michel Houellebecq)의 문장이다. 영토가 위상학적 차원에서 물리적인 땅과 장소를 가리킨다면 지도는 그 땅을 표상하는 이미지다. 지도는 왜 영토보다 흥미로운가?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의 평면으로 기호화 하는 작업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지도는 신체와 물리적인 공간을 서로 마주하게 만드는 일종의 ‘인터페이스’(inter-face)로 기능하며, 현상학적 맥락에서 분리할 수 없는 공간적 경험을 하나의 대상으로 삼게 만드는 매개가 된다. 아마도 우엘백이 말한 ‘흥미’는, 실재 세계를 매핑(mapping)하는 인식론적 태도와 세계를 이미지로 상상하는 형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항상 지도를 만든다. 그것은 미지의 세계를 발굴하는 모험적 가능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지배와 통치의 욕망이 투사된 이미지다. 게임에서 지도는 게임의 배경과 레벨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도, 즉 맵(map)은 플레이어의 무대가 되며 스토리 전개를 구성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게임맵은 플레이어의 행위와 게임 시스템 사이의 인터페이스로서 작동하며 플레이어의 움직임을 안내하는 이미지다. 미술의 영역에서도 맵은 전시의 맥락에서 중요한 위상을 가진다. ‘전시 도면’으로 불리는 미술에서의 맵은 공간에서 목적지를 찾거나, 단순히 관객에게 동선을 안내하는 기능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시 이전부터 이후를 관장하는 시공간적 설계이며 공간과 작품의 관계, 그리고 작품을 향한 관객의 운동성까지 설정하는 또 다른 인터페이스다. 2) 인터페이스는 사전적 정의에서 ‘서로 다른 두 시스템을 접속’하게 하는 장치를 말한다. 상호작용을 기본 조건으로 하며 이질적인 대상을 어떻게 만나게 할 것인지에 관여하는 것이다. 사이를 매개하는 표면인 인터페이스 개념을 두고 던져야 할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인터페이스는 무엇과 무엇 사이에 놓여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그것들을 연결하는가? 게임에서 인터페이스는 인간의 행위를 소프트웨어와 연결시키는 과정에서 작동된다. 정보의 송수신을 넘어서 상호적으로 반응하는 체계를 드러내는 조건인 것이다. 오늘날 게임은 콘솔게임 같이 컴퓨터 모니터 시스템을 넘어 3차원의 가상현실, 증강현실, 혼합현실 등 메타버스의 세계에서 구성되고 있다. 그리고 메타버스는 게임뿐 아니라 미술 영역까지 깊숙하게 진입하는 중이다. 메타버스의 경제 안에서 현실과 가상이 경계 없이 혼합되고 있다면 우리는 두 장소가 어떤 방식으로 겹쳐지고 있는지 짚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글은 공간과 인간의 행위가 어떤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지 살피기 위해 게임의 문법을 빌려오는 당대 미술의 형식을 살펴본다. 특히 공간이 하나의 이미지로서 작동하는 메타버스 전시에서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의 이미지로 펼쳐낸 지도/도면 이미지를 어떻게 그릴 수 있을지 상상해본다. 지도가 일종의 접속면으로서 공간과 신체 행위를 매개하는 대상물이 된다면, 게임에서 공간은 어떤 방식으로 플레이어의 경험을 유도하는가? 게임과 미술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관심을 방향 짓고 경험을 구조화 하기 위해 규칙들을 사용한다. 게임의 디자이너는 특정 종류의 규정적 활동을 조형하고 안정화된 경험에 관한 규정을 세운다. 3) 이 규정은 게임 맵을 통해 구성되곤 하는데, 특히 2000년대 이후 어드벤처(adventure)류 게임은 하나의 스토리를 기반으로 주인공이 겪는 모험을 구성해왔다. 주인공은 몇몇 한정된 장소들을 돌아다니거나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챌린지를 넘어서는 방식으로 게임을 진행한다. 이때 게임맵은 게임의 배경을 설명하는 주요한 이미지로서 주인공의 모험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요한 역할을 하곤 했다. 한편, 오늘의 대다수 게임 공간은 3차원의 이미지로 나타나는 추세다. 현실의 모습을 본 따오거나, 도시의 랜드 마크, 도로 등 풍경을 그대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플레이어의 경험을 사실적이고 정교하게 설계하는 것이다. 과거 게임맵이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길을 잃지 않도록 주인공의 여정을 기록하고 안내하는 기능을 했다면, 오늘날 3D 애니메이션으로 시뮬레이션 된 게임은 게임의 공간을 단번에 파악 수 있는 맵을 제공하기보다 플레이어가 직접 공간을 탐색하면서 방향과 장소를 찾도록 설정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당대 게임맵은 플레이어가 공간을 스스로 탐험하면서 게임의 단계를 파악하게끔 유도한다. 이러한 방식은 게임 플레이어에게 게임의 목표 설정과 스테이지를 직접 설정할 수 있도록 방향키를 건네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게임이 ‘의사소통의 기술’이라고 할 때, 게임의 형식은 모종의 규칙과 규정을 필수조건으로 둔다. 4) 플레이는 행위성의 양상 및 활동의 형식을 서로 상호 참조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구조화 되는 것이다. 즉 마치 빽빽한 나무 사이로 길을 잃게 만드는 숲처럼, 게임은 한눈에 파악하기 어려운 낯선 공간을 구축하지만, 게임의 정해진 규칙과 방향성은 결코 플레이어를 방황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물론 룰을 따를지 말지는 플레이어의 몫으로 남겨둔다. 하지만 게임은 질서화 된 공간이 안내하는 특정 서사를 통해 플레이어의 몰입을 유도한다. 그곳에서 설명되지 않는 공간은 없다. 버그가 아닌 이상. 미술에서 지도에 준할만한 것은 전시 도면이다. 게임맵이 플레이어에게 따라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한다면, 전시 도면은 구체적이거나 단일한 지시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도면은 마치 여러 악보를 한데 모아 전체 곡의 구성을 파악할 수 있게끔 그려놓은 스코어(score)처럼 기능한다. 5) 말하자면 그것은, 개별 작품의 위치로부터 전시라는 하나의 풍경을 상상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이미지다. 하지만 2차원으로 펼쳐진 전시 공간에 개별 좌표를 기입해두는 방식의 전시 도면은 ‘대상 중심적’(object-centered)이었던 전통적인 예술 작품 형식에 적합하다. 특히 전시 도면이 단순히 작품의 위치를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인터랙티브 아트(Interactive art), VR 등 관객의 포지션이 중요한 작품을 하나의 좌표값으로 환원하기는 까다로워 보인다. 관객의 참여까지 작품의 일부로 확장한 까닭에 작품의 공간적인 범위와 기준이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 기술 기반의 작품이 예술의 큰 조류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다양한 입력 센서와 인터페이스의 발전에 따라 작품은 더 이상 완결된 형태로 관객에게 다가서지 않으며,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와 개입을 유도하기 시작했다. 작품의 의미 생산과 ‘출력’값은 관객의 ‘입력’으로부터 산출되는 것이다. 관객의 움직임이라는 물리적인 행위는 카메라 기술과 이미지 처리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컴퓨터 시스템과 상호 작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예술의 형식은 게임의 덕목을 닮아있다.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어떤 경험(gamer experience)을 부여하느냐에 집중하는 것처럼 인터랙티브 형식의 작품 역시 관객과 어떻게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내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터랙티브 아트는 전시라는 특수한 맥락 안에서 관객의 물리적 경험을 현상학적 차원에서 다루기보다 단편적인 행위만을 포착하고 투사하는 방식으로 반복되곤 한다. 이러한 반복은 작품에 대한 이미지적인 경험이라기보다 이미지 출력을 바라보게 하는 체험 수준에 머문다. 경험에 대한 예술의 갈망은 이후 여러 인터페이스의 발달과 함께 VR 기술을 예술의 형식으로 확장시키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이용한 상호작용과 달리 VR 기술은 현상학적인 차원에서 관객의 공간적 경험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작품과 물리적 행위의 상호성을 구성한다. HMD(Head Mount Display)를 착용한 관객은 자신의 신체로 실제 공간을 수행하는 동시에 이미지가 구축해놓은 가상공간을 활보한다. 3D 컴퓨팅 기술의 발전과 HMD의 상용화 및 보급으로 더욱 정교화 되고 있는 VR 경험은 가상공간에서 작품에 관한 몰입적 환경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새로운 기술 경험에 대한 가능성이 아니라, 관객이 공간과 관계 맺는 방식이다. 역사적으로 미술은 관객이 작품으로부터 거리를 어떻게 유지하는지를 탐구해왔다. 회화, 조각, 설치, 영상 등 어떤 형식이건 간에 전시라는 특수한 시공간에 작품을 위치시키는 것은 관념적 이미지를 어떻게 물질적인 차원에서 다룰 것인지에 관한 실험이다. 하지만 VR 기술이 작품의 형식으로 도입되면서 전시는 물리적인 공간에 가상의 이미지 공간을 겹쳐놓기 시작한다. 공간을 그려낸 전시 도면이 포착하지 못한 또 다른 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공간 안에 중층된 새공간. VR 작품을 표기하고 있는 도면은 실상 작품의 위치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작품으로 진입하는 장치 혹은 출발점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관객은 물리적인 공간과 이미지 공간 사이를 거닐며 자신의 행위를 기입한다. 이러한 형식은, 게임 디자이너가 어떻게 인간 경험의 일부를 공간에 기입하고 기록할 것인지 고민하는 지점에서 게임의 방법론과 닮아있다. 6) 특수한 물리적 행위가 어떻게 게임의 특정 규칙 및 목표와 상호작용하는지 질문하면서 공간을 디자인하는 게임의 특징과 유사한 것이다. 이때 특정한 서사를 기반으로 구체적인 목표가 설정되는 게임 형식과 달리 VR 작품으로 기획된 전시 형식은 관객으로 하여금 따라갈 서사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미지 혹은 작품을 파편적으로 흩뿌리며 관객으로 하여금 새로운 서사를 조합하고 구축하기를 제안한다. 이쯤에서 작년 하반기에 개최된 《닷과 대쉬의 모험》(2022, 엘리펀트스페이스)을 살펴보자. ‘버추얼 멀티플레이’라는 수식을 단 전시는 ‘규칙’과 ‘플레이’라는 키워드를 바탕으로 가상현실에서 예술 작품을 경험하도록 기획되었다. 버추얼 소셜 플랫폼 ‘Figro’와 물리적인 공간에서 두 달간 진행된 전시는 어드벤처류 게임의 구성을 따라간다. “가상현실의 접속자는 단순 이용자를 넘어 미래의 현실을 탐색하는 탐험자로서 다양한 관계 맺음을 시도”한다는 기조를 내세웠다. 7) 네트워크로 연결된 현실에서 작품을 경험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는 것이다. 전시는 2인이 참여하는 구성이며, 플랫폼에는 세 개의 작품이 있다는 안내원의 설명과 함께 시작한다. HMD를 착용하고 플랫폼에 들어서면 푸른 초원이 보인다. 저 멀리 작품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빛이 있다. 소목장세미의 〈환대의 재개장〉, 이해강의 〈느영나영〉, 임영주의 〈빙〉. 총 3인의 작가의 작업이 숲 속의 오두막처럼 위치한다. 이들은 하나의 메타버스에서 각자의 시나리오를 구축하고 있는데, 관객은 HMD 기기를 착용한 채 작품의 서사를 따라간다. 작품이 개별적으로 서사를 구축하는 한편, 전시에서 규칙과 서사를 발견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전시가 개별 작품의 나열이 아라 작품 간의 충돌로 인해 발생한 하나의 사건이라 할 때, ‘모험’을 표방하는 전시는 관객/플레이어로 하여금 어떤 방식으로 챌린지를 던져주는가? 개별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서, 전시가 가공한 세계에서 사건의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작품은 지도에 없는 섬처럼 표류하며, 그사이를 오가는 관객의 어지러운 방황이 시작된다. 전시에서 지도, 즉 전시 도면이 공간 속에서 관객의 포지션을 이해하게 하는 일종의 인터페이스라고 한다면, 메타버스 전시에서 도면은 어떤 방식으로 그려져야 할까? 아니, 애초에 이미지로 표현된 공간을 설명하는 또 다른 이미지가 필요한 걸까? 이 질문은 우리가 가닿을 수 없는 공간을 표기해야 한다는 지배 욕망에 기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메타버스라는 가상의 세계에서 관객의 자리와 위상에 관한 물음이다. 메타버스는 단순히 기술적으로 구현된 가상세계가 아니다. 이 세계는 디지털 디스플레이 안에서 시간과 공간의 개념적 확장을 실험한다. 메타버스를 정처 없이 배회하는 관객을 위해 지도가 필요하다면, 메타버스 공간은 어떤 방식으로 이미지화 되어야 하는가? 밀도 높은 이미지, 점점 더 리얼해지는 이미지가 공간에 자꾸만 레이어를 쌓고 있다. 이 중층의 이미지들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이미지를 공간화 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공간이 이미지화 되는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말하자면 공간을 무한하게 확장하기에 앞서 우리가 그곳을 상상하는 방식을 살펴볼 때다. 무섭게 선명해지는 이미지, 증식하는 레이어, 시뮬레이션 되는 세계. 다시 우엘백의 문장으로 돌아가 본다. “지도는 영토보다 흥미롭다.” 지도가 실재하는 영토에 관한 상상으로부터 그려진 이미지라면, 우리를 흥분시키는 것은 언제나 현실 혹은 실재 자체가 아니라 그로부터 상상된 세계다. 1) 미셸 우엘백, 『지도와 영토』(서울: 문학동네, 2011), 270쪽. 2) 현시원은 당대 미술에서 단순히 정보적인 수단으로서 인식되어오던 전시 도면에 새로운 위상을 부여한다. 오늘의 전시 도면이 일종의 드로잉/이미지와 스코어로서 전시에 대한 사고와 실현을 매개하는 독립적인 형식임을 주장하고 있다. 더 자세한 연구 내용은 다음을 참고할 것. 현시원, “전시 만들기와 기록으로서의 ‘전시 도면’ 연구 -큐레이터의 실험적 실천으로서의 전시 디스플레이를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22. 3) C. 티 응우옌, 이동휘 번역 『게임: 행위성의 예술』(서울: 워크룸, 2022), 190-191쪽 4) C. 티 응우옌, 이동휘 번역, 위의 책, 190쪽 5) 현시원, 위 논문, 135쪽. 6) C. 티 응우옌, 이동휘 번역, 위의 책, 36쪽 7) 뉴스와이어, “버추얼 멀티플레이 전시 ‘닷과 대쉬의 모험’, 온·오프라인 동시 개최”(2022. 10. 19.), https://www.newswire.co.kr/newsRead.php?no=953653 (최근접속일: 2023. 3. 25.)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술비평) 이민주 이민주는 서양화와 미술이론을 전공했다. 글 쓰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꾸린다. 퍼포먼스와 퍼포먼스 도큐멘테이션의 관계를 짚은 《동물성 루프》(공-원, 2019, 공동 기획), 다큐멘터리 이미지의 미학성과 정치성을 조명한 《논캡션 인터뷰》(의외의조합, 2021, 기획), 연극의 형식을 빌어 전시의 사건성을 모색한 《#2》(두산갤러리, 2023, 공동 기획)를 기획했다. 이미지가 만드는 사건과 수행적 성질에 주목하며 비평적 글쓰기를 고민하고,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의 번역 관계를 연구한다.
- A급과 B급의 차이, 끊임없이 저항하고 결국은 차지하는
우리는 가끔 B급, 다시 말해 A급이 아닌 ‘것’을 하나의 영역으로 묶어 생각한다. 딱 집어서 이야기할 수 없지만 B급은 ‘A급이 아닌 무언가’로 정의된다. 그렇다면 B급을 인지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하는 것은 A급에 대한 정의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A는 늘 우리에게 ‘보편’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B를 보고나서야 A가 A임을, 다시 말해 그것이 우리에게 보편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 Back A급과 B급의 차이, 끊임없이 저항하고 결국은 차지하는 05 GG Vol. 22. 4. 10. 1. Intro 우리는 어떤 대상을 구매하거나 이용할 때 등급을 확인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획득하고자 하는 대상에 등급을 매기는 순간, 우리는 상대적으로 어떤 기준을 통해 이 대상이 우월하거나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경제적 가치로 환원되거나, 어떤 영역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게 된다. 우리는 가끔 B급, 다시 말해 A급이 아닌 ‘것’을 하나의 영역으로 묶어 생각한다. 딱 집어서 이야기할 수 없지만 B급은 ‘A급이 아닌 무언가’로 정의된다. 그렇다면 B급을 인지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하는 것은 A급에 대한 정의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A는 늘 우리에게 ‘보편’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B를 보고나서야 A가 A임을, 다시 말해 그것이 우리에게 보편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2. 아주 사적인 게임의 역사 난 어렸을 때 남동생이 게임을 하는 것을 보고 자랐다. 80년대생인 내가 PC게임을 시작하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집에서 하나뿐인 컴퓨터를 차지한 건 남동생이었다. 그 전까지 거실에 한 대 뿐인 텔레비전에 연결해 플레이할 수 있었던 일본산 콘솔 게임기기도 늘 남동생의 차지였다. 당시 컴퓨터 두 대를 들이기엔 기기 값이 너무 비쌌다. 하나를 사면 누군가가 차지하는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컴퓨터’의 영역에서 A급은 아마도 남동생이었던 것 같다. 자주 갔던 오락실에서도 플레이는 남동생이, 나는 그것을 뒤에서 지켜보는 역할을 주로 했다. 난 어쩌면 게이머의 영역에서 B급을 맡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는 동안 국내에서 게임 잡지가 발간되었고 남동생은 열심히 그 잡지를 구독했다. 그 덕에 나도 게임 잡지를 함께 읽게 됐다. 종종 게임 잡지에서는 새로 출시된 PC 게임을 소개하면서 베타 버전을 부록으로 넣어주기도 했다(지금 생각해보면 불법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지만). 그 중에서 내 눈을 사로 잡은건 〈프린세스 메이커〉라는 게임이었다. 당시 RPG 게임이나 어드벤처, FPS가 주류였던 PC 게임 내에서 캐릭터를 기르는 장르가(육성 시뮬레이션) 있다는 걸 그 당시 처음 알았다. 육성 시뮬레이션 장르의 시초라 할 수 있는 〈프린세스 메이커〉는 내가 처음으로 서점에 가서 게임CD를 구입하게 된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일본 가이낙스사에서 1991년에 제작했던 이 게임은 악마의 침입으로부터 왕국을 구한 용사가 마리아라는 고아 소녀를 키우고 그의 장래를 설계해주는 역할을 맡으면서 시작된다. 제목처럼 용사는 마리아의 아버지로 그를 프린세스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육성시뮬레이션 장르를 크게 대중화 시켰던 〈프린세스 메이커〉라는 게임은 당시 게임은 남성만의 놀이 문화라는 인식을 깨고 많은 여성층을 확보하여 게임 플레이에 있어 젠더 편향성을 무너뜨리는 계기로 작동했다. 한동안 육성 시뮬레이션 장르 게임에 푹 빠져 있던 나는 십대 후반을 기점으로 게임하기에서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PC방이 생기고, 온라인 게임이 흥행하기 시작하고, 게임채널이 생겨 이스포츠가 활성화되던 그때. 당시 수험생이었던 내가 게임을 할 시간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온라인 게임에서 기본이 되는 ‘팀 플레이’가 나는 불편했다. 내가 게임 플레이를 못해서 파티원에게 받을 비난도 싫었고, 상대적으로 끊임없이 익명의 누군가와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플레이를 하는 것이 적성에 맞질 않았다. 그러나 이십대가 됐고,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점차 게임 플랫폼이 컴퓨터에서 개별 모바일로 옮겨가게 되면서 나는 게임을 다시 플레이하게 됐다. 부담없이 싱글 플레이가 가능한 모바일 게임을 지속하다보니, 예전에 했던 PC 게임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나는 우연히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라온 〈어이쿠 왕자님〉이라는 게임 소개글을 읽게 됐다. 〈어이쿠 왕자님〉은 한 인디게임 제작팀이 자체적으로 개발해낸 PC게임이었는데, 여성을 위해 만들어진 게임이라는 모토로 시작했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2007년에 제작하고 발매되었던 이 게임은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의 포맷을 패러디한 BL(Boys Love 1) )장르 게임이다. BL장르는 근본적으로 비주류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 첫째, (주로) 여성이 생산하고 (대다수의) 여성이 소비하는, 생태계 특성상 젠더 편향적이다. 둘째, BL장르는 여성들 사이에서도 ‘독특한’ 취향의 것으로 특정된다. 대부분 BL장르 소비자들이 여성으로 상정되지만, 그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고 ‘동인’이나 ‘비공개 커뮤니티’방식으로 자신의 취향을 숨긴 채 활동해 온 역사가 이를 반증한다. 실제로 BL 콘텐츠를 소비하고 생산하는 여성들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취향에 대해 확고하게 이해하고 있으나, 성인이 되어서도 이를 드러내면서 소비하지 않는 경향들을 보인다. BL장르는 원본이라 할지라도 2차 생산의 성격을 갖는다. 이는 BL장르가 주류 콘텐츠가 아니었던(혹은 될 수 없었던) 역사에서 비롯된 것인데, 주류의 다음이나 맞은편, 다시 말해 이성애 젠더 질서에 맞서는 방식으로 생산되었기 때문에 의미화 과정에 있어 이용자들이 직접 생산해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정체성을 본질적으로 갖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주류적인 특성이 현대로 오면서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는 콘텐츠 소비 방식이 공적인 것에서 사적인 것으로, 다품종 소량생산체제에서, 롱테일 전략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생성되기 시작한 흐름으로 분석할 수 있다. 심지어 그 당시 나는 내가 키우는 딸이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에 이상하다는 감정을 느끼지 못했는데, 〈어이쿠 왕자님〉에는 고정된 젠더 정체성인 아버지 대신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선택적 주체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거하게 뒷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다시 말해 〈프린세스 메이커〉는 보편의 게이머를 ‘남성’으로 상정하고 있었던 것이고, 나는 여전히 게임의 역사에서 그 보편의 맞은편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그 순간 깨닫게 됐던 것이다. 3. B급의 힘 B급은 A급의 반대항에 서 있기 때문에, 주류문화에 매달리지 않는다. 동시에 B급은 반문화적인 성격도 함께 포함하고 있다. B급이 사회가 정한 A급인 주류에 반하는 것이라면, B급은 주류로 표현되는 지배적인 권력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효과에 대해 거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윤 극대화를 목적으로 한 거대 자본의 영향 아래에서는 창작의 자유와 다양성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B급은 꾸준히 주류게임의 맞은편에 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의미화 과정을 거치고 있다. 푸코가 지적했듯, 권력이 존재하는 곳에 저항이 있다. A급과 B급은 양분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 A가 존재하기 때문에 B가 존재하는, 권력의 내부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B급은 A급을 긍정하고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B급 정체성을 긍정하면서 존재한다. B급으로 불리면서도 끊임없이 생산을 지속하는 요인이 바로 여기 있다. B급이 가진 힘은 주류문화의 위계화나 독점화, 권력화에서 탈주하려는 욕망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내가 〈프린세스 메이커〉를 플레이하는 동안 강요되거나 권력으로 작동했던 무언가를 벗어나 〈어이쿠 왕자님〉을 플레이하게 되면서 느꼈던 해방감, 혹은 카타르시스는 결국 B급이라는 패러디의 형태로 드러났던 정체성을 긍정하면서 나타났던 현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A와 B의 존재는 위계가 아니라 서로 공존하며 권력의 줄다리기를 하는 셈이다. B급에서 자주 나타나는 패러디라는 양상을 살펴보면 더욱 그러하다. 패러디는 원본을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다. 정상과 비정상, 규범과 일탈, 그리고 주류와 타자를 구분하는 경계가 패러디를 통해 수면위로 떠오른다. 특히 사회가 이상이라고 상정한 것을 모방하고 비트는 것은 자연스러움이 결과적으로 권력을 통해 만들어진 것을 사유하게 한다. 스토리텔링 기법 중 하나인 스핀오프는 기존의 중심이 되었던 원작의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이 주인공이 되어 새로운 관점에서 이야기를 창작한다. B급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저항하고, 그 가운데 새로운 시각을 만들어낸다. 낯설다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B급의 시각은 A급을 다시 보게하고 권력이 어떤식으로 작동하는지 주체에게 새로운 경험을 안긴다. 게임의 영역에서는 상대적으로 다른 콘텐츠에 비해 경험의 몰입도가 높다. 그러니 우리는 B급에서 재미를 찾고 새로운 경험을 하길 욕망하는 것이다. A급과 다른 무엇을 또 다시 깨닫게 해주길 바라면서. 1) 남성동성애-서사를 일컫는 용어. 실제 동성애자의 문화와는 거리가 있으며, 남성동성애에 대한 판타지를 기반으로 한 장르라 볼 수 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경남대학교 미디어영상학과 조교수) 장민지 덕후 진화론(덕후는 정신적/육체적/기술적으로 진화한다)을 믿는 팬-미디어 연구자.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영상커뮤니케이션 전공으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5년 박사논문〈유동하는 세계에서 거주하는 삶 : 20~30대 여성청년 이주민들의 집의 의미와 장소화 과정〉으로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 학회 학술상, 2016년 〈비인간 캐릭터에 대한 대중의 환상〉으로 한국방송작가협회 한국방송평론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 [북리뷰] 이토록 숭고한 게임 속 괴물들 - 『플레이어 vs. 몬스터』
<다크 소울> 시리즈나 <엘든 링>과 같은 프롬 소프트웨어의 게임에는 어렵다는 인식이 강하게 작용한다.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죽음을 맞으면 화면에 빨갛게 떠오르는 ‘You Died’는 상징적인 밈으로 통용된다. 보스와의 전투는 게임의 까다로운 난이도를 구현하는 대표적인 축이다. 게임 유튜버들은 보스전을 성취하는 데에 몇 번의 ‘트라이’를 거쳤는지와 같은 극악한 고투를 부각하기도 한다. 한편 보스들의 기괴한 외형은 이러한 플레이를 더욱 각별하게 만든다. 대표적으로 <다크 소울3>의 튜토리얼 보스인 군다는 2페이즈에서 별안간 검은색 고름 덩어리가 되고, <엘든 링>의 멀기트는 꼬리를 몽둥이처럼 휘두르는 패턴 따위로 플레이어를 곤란하게 만든다. < Back [북리뷰] 이토록 숭고한 게임 속 괴물들 - 『플레이어 vs. 몬스터』 22 GG Vol. 25. 2. 10. <다크 소울> 시리즈나 <엘든 링>과 같은 프롬 소프트웨어의 게임에는 어렵다는 인식이 강하게 작용한다.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죽음을 맞으면 화면에 빨갛게 떠오르는 ‘You Died’는 상징적인 밈으로 통용된다. 보스와의 전투는 게임의 까다로운 난이도를 구현하는 대표적인 축이다. 게임 유튜버들은 보스전을 성취하는 데에 몇 번의 ‘트라이’를 거쳤는지와 같은 극악한 고투를 부각하기도 한다. 한편 보스들의 기괴한 외형은 이러한 플레이를 더욱 각별하게 만든다. 대표적으로 <다크 소울3>의 튜토리얼 보스인 군다는 2페이즈에서 별안간 검은색 고름 덩어리가 되고, <엘든 링>의 멀기트는 꼬리를 몽둥이처럼 휘두르는 패턴 따위로 플레이어를 곤란하게 만든다. 기이한 점은, 이렇게 적들을 마주하다 보면 어느 순간 묘한 매료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플레이어 vs. 몬스터』의 저자인 야로슬라브 슈벨흐는 <블러드본>의 이브리에타스가 품은 괴물적인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경험을 서술한다. 그는 이 경이로운 생명체를 계속 바라보고 싶었기에 결국 싸움을 택하지 않았다. 그의 일화를 읽는데 문득 <다크 소울3>에서 미디르를 잡은 후, 묘한 허탈감에 시달리며 소사한 시체만 가득 쌓인 폐허를 한참 동안 서성이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처럼 게임에서의 괴물은 격퇴해야 할 목표로 상정되어 있으면서도 호승심을 초과하는 괴상야릇한 매력을 발산한다. 그렇다면 게임은 괴물을 어떻게 빚어내고 제시할까? 이 책에서 슈벨흐는 <스페이스 인베이더(1978)>부터 <컨트롤(2019)>까지 게임을 역사적으로 아우르며 괴물의 존재론을 탐구한다. 숭고하지 않은 괴물 많은 문화에서는 저마다의 괴물을 이야기한다. 일본에서는 각종 요괴담이 돌고, 톨킨은 <반지의 제왕>에서는 스마우그가, <헤일로>에서는 외계인이. 이렇듯 널뛰는 괴물을 한데 모아 이 책에서는 범박하게 “현대 과학의 시각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생명체”로 범위를 한정 짓는다. 전통적으로 괴물은 바람직하지 않은 속성을 지닌 것으로 묘사된다. 기형적인 외모를 지녔거나 부덕한 내면을 가진 괴물은 규범을 위반하는 존재다. 이를테면 중세 유럽의 사람들은 얼굴이 가슴으로 함몰된 형태의 블렘미아이Blemmyae라는 괴물이 아프리카에서 산다고 상상했다. 중세인에게 정상적인 인간이란 온전한 머리를 통해 사물을 이해하는 존재이자 “전지전능한 창조주의 육체적 거울상”이었기 때문에 머리가 없는 블렘미아이는 육체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열등한 생물이었다 [1] . 이런 괴물들은 이성이 그려내는 세계의 너머를 자극하기에 공포스럽다. 성서 속 리바이어던처럼 창조주의 질서 안에 놓이되 동시에 그 권위를 위협하기도 하며, 부패한 고름이나 혈액과 같이 원래는 온전했‘던’ 육신에서부터 튀어나와 혐오를 불러일으키기도 해, 그 결과로 온갖 범주를 뒤섞어놓으며 인지적 혼란을 빚어내는 것이다. 슈벨흐는 괴물이 감상자에게 불러일으키는 특유의 감정을 숭고로 설명한다. 숭고함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은 “우리의 표현 능력에 적합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상상력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칸트는 이와 같은 숭고가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큰 것, 혹은 엄청난 위력을 지닌 것으로부터 유래한다고 설명한다. 무한성(무형식)을 지닌 대상에서 발견되는 숭고는 인간 상상력과 지성의 한계 너머를 자극한다는 점에서 우리를 매료시킨다는 것이다 [2] . 한편 슈벨흐는 인간 주체가 자신의 지식 구조에 괴물을 포함하려는 노력을 지속해 왔다고 말한다. 인간은 언제나 미지의 영역을 정복하려 해왔다. 지도를 그리며 잘 모르는 세계의 지형을 정교화하고, 백과사전을 편찬해 인간 아닌 종을 서술하려는 시도가 대표적이다. 신비한 힘을 지녔던 괴물 역시도 점차 인간의 체계 안에 편성된다. 정리 작업의 최종적인 목표는 괴물을 지식화하여 관리하고 이용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 슈벨흐는 괴물이 적이나 놀잇감의 형태로 단순화된다고 바라본다. 이누이트족의 투필라크는 그러한 설명과 걸맞은 사례이다. 본디 투필라크는 주술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비밀스럽게 제작되는 복수귀였으나, 그린란드가 유럽에 복속된 이후 이누이트 문화의 이국성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관광 기념품이 되었다. 괴물이 품은 고유한 아우라가 파괴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숭고를 완전히 상실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괴물이 지닌 특별한 맥락은 계속 갱신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가 부연 되기 때문이다. 좀비 모티프가 끝없이 진화하듯, 그들은 유순하게 길든 자리에서 심연을 응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게임에서 괴물은 어떻게 그려지는가? 그에 앞서 슈벨흐는 비디오 게임이 놓인 역사적 맥락을 짚는다. 비디오 게임은 냉전이라는 특수한 지정학적 사고에 얽매여 있던 시기에 태동한 미디어이다. 정부나 군을 통해 직접적으로 제공받은 하드웨어나 컴퓨팅 프로젝트에 관한 후원은 비디오 게임의 토대를 이루었다. FPS 장르에 이르는 기술사적 계보를 추적한 김영대의 글은 흥미로운 사례이다. 그에 따르면 미군에서 폭격기 조종사를 양성하기 위해 개발되었던 시뮬레이션 시스템은 이미지를 빠르게 렌더링함으로써 실시간성을 만들어냈고, 이는 <스페이심>과 같은 비디오 게임의 전투에 영향을 미쳤다 [3] . 이처럼 비디오 게임은 냉전의 문화적 요인에 긴박 되어 있다. 과학사학자 폴 에드워즈는 냉전의 세계관을 ‘폐쇄 세계closed world’로 설명한다. “모든 사고와 언어 그리고 행동이 궁극적으로 중심 갈등을 향하는 꼼짝 없이 자기 참조적인 공간”이라는 것이다. 특히나 발전된 컴퓨터 기술은 중앙에서 실시간으로 군사 통제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가상의 기획을 현실로 옮길 수 있었다. 그렇게 전산화된 세계는 하나의 형이상학적이고도 폐쇄적인 체계로 맺어졌다. “모든 요소가 통합되고 적절한 가중치가 부여되었다는 믿음 하에 계속해서 시나리오를 실행하고 또 실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모델링과 시뮬레이션에 전적으로 적합”했다 [4] . 즉 적대적 존재를 시뮬레이션의 세계에서 빚어내 입력에 따른 결과를 연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디오 게임의 괴물은 바로 그러한 시뮬레이션 안에 놓여 있다. 기호로 모델링된 괴물은 곧 조작 가능한 정의에 의해 좌우된다. 본래 냉전 시기 군사 이데올로기가 시뮬레이션의 발달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바-적과 나를 일관적인 시스템 안에 체계적으로 편성한 후, 행동과 미래를 예측하는 전략의 수립-가 비디오 게임 안에서 실현된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비디오 게임 속의 괴물이 “연산적이고(computational) 상품화된 타자성”을 지니며, 이로 인해 “분명 위협적인 존재이나 토벌 가능한 모순”으로 이해된다고 설명한다. 이 관점에서 그는 게임의 폭력성을 문제화할 때 살해 애니메이션이나 혈흔의 표현과 같이 피상적인 차원에서 다루기보다는, 그렇게 되도록 결정하고 배치하는 디지털적 권력을 문제 삼길 제안한다. 책의 2장과 3장에서는 게임 속 괴물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빚어지는지에 관한 사례가 부연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던전 앤 드래곤>은 연산 가능한 괴물을 폭발적으로 확산하는 데에 기여한 타이틀이다. PvE(Player Vs. Environment)를 “인간 심판이나 컴퓨터 소프트웨어 등의 제삼자가 일련의 장애물과 적을 제어하는 동안 플레이어가 시뮬레이션 환경에서 캐릭터를 조작해 그와 대결하는 게임 플레이 상황”으로 정의한다면, <던전 앤 드래곤>이 PvE의 형식과 함께 만연해졌음을 이해할 수 있다. ‘던전’이라는 어휘로 매혹적인 모험을 형상화하는 이 프랜차이즈는 톨킨식 장르 문학이 대중화됨에 따라 큰 인기를 누렸다. 톨킨은 허구의 세계인 아르다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계보나 언어와 같은 설정을 섬세하게 써 내려갔는데, 일종의 백과사전 집필로도 표현할 수 있는 톨킨의 작업은 이후 RPG 게임에서 시나리오를 짜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 <던전 앤 드래곤>은 바로 그러한 이질적 존재들, 백과사전 항목에 등재된 사우론과 프로도에게 각종 ‘능력치’를 부여했다. 그런 면에서 <던전 앤 드래곤>은 컴퓨터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계산적(computational) 게임이었다. 온갖 종류의 이종들은 정확한 통계에서 비롯된 능력치를 부여받아 “하나의 수학 규칙 매트릭스에 맞게” 배치되었고, 주사위를 랜덤하게 굴렸을 때의 수치와 고정 능력치를 조합하여 게임 이벤트가 진전되었다. 그 결과 “이미지, 문화, 통계를 결합해 괴물을 만들어내는 공식”이 게임계에 자리 잡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괴물들은 게임 플레이의 흐름을 형성하는 중책을 맡는다. “적절한 대응을 요구하는 일련의 명확한 목표가 앞에 있을 때 몰입할 가능성이 높다” [5] 고 칙센트미하이가 이야기하고 있을 때, 일정 수준 내에서 까다로운 괴물과 전투를 치르고 그에 대해 보상을 얻는 일련의 과정은 플레이어를 충분히 몰입시킨다. 따라서 난관을 어떻게 수용 가능한 수준으로 형상화할 것인가가 디자인의 주요한 화두가 된다. <갓 오브 워>의 전투 디자이너인 데니 예는 괴물을 통해서 플레이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끔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적이 가하는 공격은 일정한 패턴 속에서 이루어지며, 이를 충분히 관찰한 후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미리 예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릴 수 있어야” 하는 괴물은 사용자의 경험이라는 요소를 우선시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현대의 비디오 게임 속 괴물은 실용적인 방식으로 이해된다. 디자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실루엣 테스트는 괴물이 실용성과 미학성을 충족했는지 판별하기 위한 절차이다. 비교적 낯선 대상의 외형을 플레이어가 쉽게 판별하고, 다른 것들과 차별화해 구분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괴물은 외형적으로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키면서도 그로 인해서 만족스러운 사용자 경험을 저해해서는 안 된다. 미학적 측면에서 리얼리즘은 비디오 게임의 괴물과 관련이 깊다. 환상 속의 존재를 그럴듯하게 제시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현실의 요소를 동원하기에 이른다. 슈벨흐는 리얼리즘을 두고 ‘현실적’이라는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채택하는 일련의 미적이고 기술적인 관습들이라고 간략히 요약하는데, 특히나 비디오 게임에서 괴물을 디자인하는 데에 지배적인 것은 해부학적 리얼리즘이다. 이러한 경향은 비단 비디오 게임에서만 두드러지는 것은 아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래리 해리하우젠과 같은 예술가들은 자신의 창작 노트에서 상상 속 동물을 ‘자연스럽게’ 형상화할 수 있게 실존하는 동물의 생체적 지식을 기입하기도 했다. 그러한 인식은 비디오 게임 제작에서의 폴리곤 메쉬나 모션 캡쳐 등의 방식으로 계승되고 있다. 특히 비디오 게임에서의 시청각적 표현은 3D 그래픽으로 전환하며 초기 영화에서의 괴수 표현이 그러했듯 미니어처를 제작하는 형식으로 이해되었다. 타냐 크르지윈스카는 더 큰 그래픽 리소스가 아티스트들에게 “더욱 환상적인 개체를 만들 수 있을 자유”를 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도 했으나, 현실의 AAA게임에서 포토리얼리즘이라는 규범이 맹위를 떨치는 한, 괴물을 주변 환경에 걸맞게 높은 수준의 디테일로 모델링한다는 해부학적 개연성의 틀에 맞춘 재현이 지배적인 관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요컨대 비디오 게임이 창조한 괴물은 기능적으로나 외형적으로나 “객관화되고 관리 가능한 존재”로 표현된다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포스트휴먼이 괴물에게서 숭고를 느끼는 법 슈벨흐는 비디오 게임에서 괴물을 조형하는 방식이 <스페이스 인베이더> 이후로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고 서술한다. 기존의 PvE 도식을 고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시점에서 이와 같은 답보 상태는 문제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 주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글로벌 금융 위기나 기후 재앙, 판데믹과 같은 사건을 겪으며 뒤흔들렸다. 전반적으로 현재 만연한 위기와 이에 대한 지적 대응은 무언가를 괴물 같은 타자로 식별하고 해석할 수 있는 관찰자의 특권을 불안정하게 만든 것이다. 이런 시대 속에서 인간은 짓쳐 드는 위험으로부터 거리를 둔 채 패턴을 예측할 도피처도 없고, 그럴 만한 시간조차 없다. 더군다나 인간이 가상의 적을 효과적으로 적대하기 위해 고안한 테크놀로지는 버그나 데몬 같이 초자연적인 생명체처럼 움직이며 인간 제어를 무시하기도 한다. 버그는 컴퓨터의 오류를 의미하는 어휘로만 한정되지 않으며 ‘자그마한 오류’를 푸념하는 토마스 에디슨의 편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지난한 역사를 지닌다. 기계 상의 오류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일컫는 방식의 수사는 이들을 괴물의 한 종류로 볼 가능성을 확보한다. 결론적으로 슈벨흐는 숭고 개념을 재검토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사실 숭고를 이야기한 칸트에 따르면 위력을 지닌 무엇이 발하는 숭고는 “그 위력이 우리에게 강제력(실제의 위협)을 발휘하지 못할 때” 느낄 수 있다. 폭풍우에 실제로 휩쓸리는 동안은 오직 공포를 느낄 뿐이다. 진정 숭고함을 느끼기 위해서는 산장과 같은 안전한 곳으로 피신한 후에 대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제야 인간은 “감성의 한계를 넘어선 ‘거대한’ 것을 표상할 수 있으며, 상상력의 확장 가능성을 느끼며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7] . 그러나 임박한 재앙은 쉬이 파악될 수 없고, 안전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슈벨흐는 숭고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되, “헤아릴 수 없고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타자성이라는 의미에서의 괴물”은 여전히 유효한 프레임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 출처: E nvironmental_Pea791. “If the game was 3D, I think the enemies would look like this.”. Reddit. 책의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해부학적 개연성에 지배되지 않은 비디오 게임 속 괴물의 사례를 탐구한다. <언더 테일>과 같이 연민을 유발하며 인간의 거리 두기를 위협하는 괴물, 목적 없이 등장하며 파괴 불가능한 성질을 지닌 <컨트롤>의 아스트랄 스파이크, 다른 개체와 두뇌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군체처럼 기능하는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의 쥐, 게임 코드나 인터페이스를 장악하는 <메탈 기어 솔리드>의 사이코 맨티스와 같은 사례는 기존의 PvE 도식이 전제하던 교전 개념을 유쾌하게 폐기한다. 이와 같은 존재를 감각하는 과정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탐구하는 비판적 사유로서의 포스트휴먼 개념을 환기해 볼 수 있다. 포스트휴먼은 인간과 인간 아닌 것 사이를 엄격하게 나누는 이분법을 해체하려는 기획이다. 포스트휴먼의 사유에 의하면 인간을 인간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 고유의 특별함 때문이 아니다. 다른 것들과 상호작용하는 네트워크 안에 놓인 어떠한 위치가 그를 개인으로 배치할 뿐이다 [8] . 마찬가지로 슈벨흐가 열거한 사례는 인간 플레이어가 본래 누리던 우월한 지위를 해체하고, 게임이 할당한 디지털적 권력이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 감각할 수 있게 한다. 책을 따라서 이와 같은 예시를 읽다 보면, 이토록이나 다양한 괴물들이 PvE의 규범을 해체하고 있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낄지도 모른다. 비디오 게임 속의 괴물 즉 기이한 이들과의 뒤얽힘 속에서 플레이어는 환경(Environment)과 오직 적대하기만 하는 인간이 아닌, 그 안에서 함께하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1] 잭 하트넬. 장성주 역. 『중세 시대의 몸』. (2023). 서울: 시공사. 50쪽. [2] 김예경. (2018). 『프랑켄슈타인』, 숭고와 그로테스크. 우리어문연구,(62), 405-407쪽. [3] 김영대. (2019). 던전의 전투기들: FPS의 짧은 기술사. 문화연구, 7(1), 165-168. [4] 앙투안 부스케. 최석현 역. (2022). 미국 전쟁 기계의 사이버네틱스화: 냉전기 과학과 컴퓨터. 아카루트. 7-8쪽. [5]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이희재 역. 『몰입의 즐거움』. (2009). 서울: 해냄출판사. 45쪽. [6] Denny Yeh. Fighting a God: Behind the Scenes of God of War’s First Boss Battle. 2018.08.16.등록. 2025.01.24.접속. Playstation.Blog . https://blog.playstation.com/2018/08/16/fighting-a-god-behind-the-scenes-of-god-of-wars-first-boss-battle/ [7] 김예경. (2018). 『프랑켄슈타인』, 숭고와 그로테스크. 우리어문연구,(62), 408쪽. [8] 박준영. (2023). 『신유물론, 물질의 존재론과 정치학』. 서울: 그린비. 119-124쪽.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김규리 자기 소개 :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데스티니2를 오래 즐겨왔고, 다음 작인 마라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익숙한 게임이 주는 재미와 낯선 경험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보려 고민하고 있습니다.
- 전쟁, 게임, 게임 속 전쟁 그리고 비남성
전쟁이라는 주제는 비남성을 향한 가해와 피해의 이야기가 자주 교차한다. 이때 보이는 ‘전쟁이 나면 보호해 주지 않겠다’, ‘전쟁이 나면 마음대로 강간하고 다닐 거다’와 같은 말들은 다분히 위협적이다. 전쟁이라는 키워드에서 폭발하게 되는 남성성은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경계하게끔 만든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키워드에 게임이라는 레이어가 얹어질 때, 이 위협은 사라진다. 남성성으로 대표되는 전쟁의 성질이 상당수 무화되는 것이다. < Back 전쟁, 게임, 게임 속 전쟁 그리고 비남성 25 GG Vol. 25. 8. 10. 전쟁에 관한 소식을 언제 어디서든 즉각적으로 알 수 있는 시대다. 전쟁은 바로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지만, 그 사실을 떠올리지도 못할 만큼 우리 일상에 스며들어있다. 유튜브, SNS, 숏폼 등으로 노출되는 전쟁은 액정 너머의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관련 소식을 알고 싶을 때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손가락 하나면 충분하다. 이러한 부분에서 전쟁은 우리와 동떨어진 화제처럼 느껴지기만 한다. 그러나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으로 시작되는 대화는 늘 현실적인 걱정을 동반하는 것 같다. 전쟁이 일어나면 한국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징집 대상은 어떻게 선정될까? 그 상황에서 재산을 지킬 방법이 있긴 할까? 이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조금만 둘러봐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주제들이다. 이 이야기들이 결정적으로 묻고자 하는 건 하나 같이 안전이나 생존에 관련된다. 손가락 하나로 전쟁을 보고, 또 넘길 수 있게 되었어도 그것이 가져오는 파급력을 알기에 불안감 자체는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얘깃거리는 소위 남초 커뮤니티로 일컬어지는 곳에서 자주 확인되지만, 이 불안감이 비단 특정한 성별에만 적용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전쟁이 남성을 위주로 진행되어 온 역사가 있으며, 자연히 그에 관련된 요소들도 남성화되었다는 점이다. 비남성 또한 전쟁에 관여해 온 역사가 존재하나, 이들의 기여는 늘 남성보다 폄하됐다. 이러한 관점에서 게임과 전쟁은 어느 정도 유사한 부분을 보이는 듯하다. 게임은 전쟁과 여러모로 깊은 관계성을 맺고 있는데, 이 관계성은 2차 세계대전 즈음부터 시작됐다. 게임이 구동되는 매체인 컴퓨터가 2차 세계대전 전후로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지대한 발전을 이뤄온 컴퓨터는 우리 일상에 유용한 도구로 기능하는 건 물론, 오락 기기로도 활약하게 되었다. 이때 컴퓨터에서 즐길 수 있는 오락, 즉 게임은 도전하고 대결하는 것을 주요 콘텐츠로 삼아왔다. 우리가 게임의 대표적인 콘텐츠로 전투를 떠올리게 되는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 기인한 것일 테다. 더욱이 게임은 컴퓨터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점에서 나름의 기술력을 요구했기에,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게임에서 전쟁과 관련된 요소가 나타날수록 ‘남자가 하기 좋은 게임’으로 인정받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겠다. 전쟁과 게임, 남성(게이머)의 연계는 오늘날 너무나 자연화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하면 안 될 것이 바로 비남성(게이머)의 존재다. 이 연계 안에는 비남성 또한 분명히 자리하고 있다. 그를 의식했을 때, 다음의 질문이 나오게 된다. 남성성과 견고한 관계를 맺은 전쟁 게임 안에서 비남성 게이머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비남성에게 전쟁 게임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전쟁 게임이 이들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기에,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곳에 발을 디딘 걸까? 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전쟁’과 ‘게임’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전쟁에 대해서는 여러 관점에서 정의를 내릴 수 있겠지만, 그를 이미지에 한정 짓는다면 생각의 폭을 좁힐 수 있을 듯하다. 말이나 배를 타고 검과 창, 활 등의 무기를 사용하는 중세 전쟁의 이미지나, 군복을 입고 총과 대포를 쏘는 현대 전쟁의 이미지 같은 것들 말이다. 일반적으로 떠올릴만한 전쟁의 이미지라고 한다면 바로 이 두 가지 정도일 것이다. 이런 전쟁의 이미지들은 매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재현되는데, 게임도 그중 하나다. <파이널 판타지 14> PVP 콘텐츠 ‘봉인된 바위섬’ 이를테면 중세 전쟁의 이미지로, <파이널 판타지 14>의 PVP 콘텐츠인 ‘전장’을 들 수 있겠다. 24:24:24 삼파전으로 진행되는 <파이널 판타지 14>의 72인 전장은 거점 점령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그 과정에서 온 필드를 오가게 된다. 이때 연합 채팅에는 점령지가 스폰되는 시간과 그곳으로 이동하기 위한 경로가 연속적으로 올라온다. 맵에 간간이 나타나는 적의 움직임은 실시간으로 전략을 짜내기 위한 좋은 정보로 이용된다. 전투가 벌어지면 적은 물론, 팀의 역량도 함께 파악할 수 있게 되는데, 스킬 자원을 얼마나 축적했느냐에 따라 이 힘겨루기의 결과도 달라진다. 그렇게 수 번의 전투를 거쳐, 일정한 승리 횟수를 쌓으면 얻을 수 있는 ‘선봉장’이라는 타이틀은 전쟁에 숙달되었다는 걸 보여주는 증표와도 같다. 이 모든 요소는 중세 전쟁의 한 측면을 재현한 듯하다. 물론 <파이널 판타지 14>의 전쟁에는 현실과 관계없는 판타지가 상당수 가미되어 있다. 가장 대표적인 판타지 요소가 바로 힐과 부활이다. 이곳저곳에서 위협적인 공격이 몰아치더라도 플레이어들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전장에 뛰어든다. 여기에 죽음을 불사한다는 비장함은 없다. 왜냐하면 게임 안의 이들은 죽여도 죽지 않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들은 다수에게 공격받아도 즉시 치유되며, 행동 불가가 되더라도 5초 뒤 부활한다. 물론 행동 불가가 됨으로써 어느 정도의 페널티는 부과되지만, 몇 번의 죽음이 승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심지어는 그 죽음을 과감하게 감수하는 것도 전략이 될 때가 있다. 이런 판타지는 공격 한 번으로도 죽음에 이를 수 있는 현실의 전쟁과 아주 다른 모습이다.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II> 공식 이미지 이런 면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전쟁’이라는 키워드는 <콜 오브 듀티>나 <배틀필드>와 같은 게임이 더욱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게임들 또한 <파이널 판타지 14>와 유사한 판타지가 존재한다. 세이브와 로드가 플레이어를 완전한 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즉 현실의 전쟁에서는 없을 새로운 기회가 이 전쟁 게임들 안에는 존재한다. 아무리 실패해도 게임 안의 신체는 되돌아오며, 게임이 한 판 끝날 때마다 모든 상황은 리셋된다. 플레이어들은 게임을 클리어하지 못한 것에 아쉬워할지언정, 몸과 마음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상황에 맞닥뜨리지는 않는다. 이렇게 재시작하게 되었을 때 또다시 실패할까 봐 긴장하게 되지만, 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라기보단 게임 오버에 대한 경계에 가깝다. 다른 전쟁 게임들도 마찬가지다. 비명과 포격음은 BGM과 효과음, 기합 소리 등으로 대체되고, 마음에 들지 않는 판은 나가기 버튼으로 언제든 이탈할 수 있다. 전쟁 상황을 자유자재로 즐기는 플레이어의 모습은 게임 세계를 주무르는 신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렇게 판타지적인 부분이 다수 섞여있긴 하나, 게임은 전쟁이라는 콘텐츠와 우리의 감각을 즉각적으로 연결시킨다. 이는 플레이어가 직접 키보드를 치고 마우스를 움직이기에 가능해진다. 화면 너머 세상에 몰입하면서 발생하는 긴장감은 두려움만으로 채워지지 않고, 재미와 열의가 함께한다. 그 감각을 느끼는 데에 섹스나 젠더의 구분은 불필요하다. 하지만 <스타크래프트>나 <서든어택>, <리그 오브 레전드>와 같은 전국민적 인기의 전쟁 게임들을 떠올려보면, 그 주요 유저층은 늘 남성이라고 인식됐다. 이러한 선상에서 전쟁과 게임이 결합한 전쟁 게임이 ‘남자의 게임’처럼 인식되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 안에 비남성 게이머들이 존재하더라도, 전쟁/게임은 늘 남성의 영역이다. 이에 처음의 질문을 다시 불러오고 싶다. 비남성 게이머들은 왜 남성의 장르로 여겨지는 전쟁 게임에 발을 디디는가? 이들에게 전쟁 게임은 어떤 의미인가? 여기에는 저마다의 사유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저 재미있어서 플레이한다고 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성취감을 느끼기에 한다고 할 수도 있다. 또 누군가는 이런 게임이 유행해서 시작했을 수도 있고,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하게 됐을 수도 있다. 어쩌면 상당수는 전쟁 게임이라는 장르 자체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런 점에서 ‘비남성에게 전쟁 게임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애초부터 답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도 이 같은 질문을 던진 건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곳에 비남성들이 참여하게 되는 이유가 뭔지, 전쟁 게임의 무엇이 그들을 불러 모으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전쟁/게임의 속성에 대해서도 재고할 계기를 만들어준다. 더욱이 전쟁이라는 주제는 비남성을 향한 가해와 피해의 이야기가 자주 교차한다. 이때 보이는 ‘전쟁이 나면 보호해 주지 않겠다’, ‘전쟁이 나면 마음대로 강간하고 다닐 거다’와 같은 말들은 다분히 위협적이다. 전쟁이라는 키워드에서 폭발하게 되는 남성성은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경계하게끔 만든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키워드에 게임이라는 레이어가 얹어질 때, 이 위협은 사라진다. 남성성으로 대표되는 전쟁의 성질이 상당수 무화되는 것이다. 이 또한 다른 관점에서 포착할 수 있는, 전쟁 게임의 판타지적인 부분이다. 이러한 현상을 게임이 주는 원초적인 재미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결국 이 이야기는 현실과 게임의 경계가 어떻게 설정되는지, 게이머가 게임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로도 연결할 수 있다. 남성성의 영역으로 인식되는 게임, 그중에서도 전쟁 게임에 비남성이 뛰어들게 된 이유는 아직 일반화하여 보기 어렵다. 다만 게임이 현실을 어떻게 재현하는지, 그 안에서 발생하는 괴리는 무엇인지 고찰할 근거는 되어준다. 이러한 고찰을 거듭하다 보면 비남성과 전쟁/게임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 가능해질 것이다. Tags: 페미니즘, 비남성, 전쟁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백구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관해 관심 갖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비주얼 노벨 올 클리어에 열을 올리는 중입니다.
- [인터뷰] 게임은 현대미술의 탈출구가 될 수 있을까 - MMCA서울관 〈게임사회〉 展
국내 국립 미술관에서 게임을 주제로 한 전시가 기획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게임사회〉 전에 대한 언론과 소셜미디어의 관심은 예상보다 뜨거웠다. 흔히 접하기 어려운 주제의 전시를 사람들은 어떻게 감상하고 있을까? 이번 호에서 GG는 〈게임사회〉 전에 다녀온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왔다. < Back [인터뷰] 게임은 현대미술의 탈출구가 될 수 있을까 - MMCA서울관 〈게임사회〉 展 12 GG Vol. 23. 6. 10. ‘게임’하면 떠오르는 장소로 미술관이라 대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다소 독특한 형식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게임과 현대미술이라는, 얼핏 보면 낯선 두 영역이 손을 맞잡은 것이다. 국내 국립 미술관에서 게임을 주제로 한 전시가 기획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게임사회〉 전에 대한 언론과 소셜미디어의 관심은 예상보다 뜨거웠다. 흔히 접하기 어려운 주제의 전시를 사람들은 어떻게 감상하고 있을까? 이번 호에서 GG는 〈게임사회〉 전에 다녀온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왔다. Q. 반갑습니다. 먼저, GG 인터뷰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인터뷰는 〈게임사회〉 전시에 대한 시민들의 솔직한 감상평을 듣는 자리로 구성했는데요. 〈게임사회〉 전시는 어떻게 알고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하는 전시는 대부분 오는 편이라, 이번 전시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왔어요. 〈게임사회〉한다고 해서 게임으로 미술적인 것을 어떻게 풀어낼지 궁금했어요. -오늘 친구를 만나서 점심 따로 먹고 차 가져왔는데 카페 가는데, 주차되는 곳 가려고 하다보니까 여기 오게 되었어요. -저도 근처에서 약속 잡은 김에 실내에서 시원하게 있으려고 왔어요. 전시 정보는 트위터 통해서 예술가와 게임업계분들 통해서 접하게 되었어요. -저는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를 따라 예술 전시를 많이 봐왔고, 지금은 게임을 좋아하는데, 〈게임사회〉는 게임이라는 정박지가 있으니 그 지점에서 무엇을 펼쳐나갈지가 궁금해서 오게 되었어요. Q. 〈게임사회〉 전시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은 어떠셨나요? -전시 자체가 많은 사람이 공감하기 위해서 구성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대중을 겨냥하고 만든 것은 아닌 것 같아요 . 애초에 타겟팅이 게임을 좋아하는 대중은 아닌 것 같고, 게임을 도구로 쓰는 현대미술 작가들의 전시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연령은 크게 상관있는지 모르겠는데 확실히 게임 전시는 아닌 것 같았어요. 게임 개발자로서 이건 게임 전시는 아니라고 느껴졌어요. -웹에서 접했던 느낌과의 차이가 있었어요. 북미 인터넷 밈에 절여진 느낌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는 더 친절하고 소프트했어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그래서 라이트한 유저들 그러니까 오락실 게임을 기대하고 오는 유저들한테는 좀 많이 기대와 다를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하드코어 게이머를 위해서 만든 전시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 그래서 이거는 여느 미술 작품도 마찬가지겠지만, 오히려 여기서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이 너무 층이 나눠져 버리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흔히 말하는 게임 박람회와 달리 국현에 무슨 전시하는지 모르고 그냥 우연히 왔다가 가볍게 플레이해보고 가기에는 괜찮은 전시가 아닌가 싶어요. Q. 그렇다면, 오늘 전시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으실까요? -저는 완전 어렸을 때 보던 게임이랑 요즘에 나오는 그래픽 좋은 것들을 시간별로 보는 게 좋았어요. 1세대 게임 중에서 특히 ‘팩맨’이 공격성을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를 이번에서야 알게 되었어요 . 단순한 구조인데 이런 의미를 드러낼 수 있구나 했죠. -어릴 적에는 TV 앞에 가서 게임팩을 연결해서 마리오를 봤는데, 영화관처럼 의자에 앉아서 마리오를 본다는 것? 사실 마리오는 영화관 의자랑 안 어울리는 작품 구성이잖아요. 그런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것이 주는 감각들이 흥미로웠어요. -전시 초입부에 텍스트 기반 게임(반지하게임즈의 ‘서울 2033’)을 전시해놓았잖아요. 거기서 광고가 틀어졌는데, 처음엔 이게 가짜 광고인가 했어요. 그런데 진짜더라고요. 저는 이게 미술관의 실수라기보다는 오히려 게임 내적인 것들이 미술관에 침투하는 느낌 이 들었어요. 실제로 이런 생각을 의도한 건가 싶었어요. 사실 우리가 게임할 때 광고는 일상적인 경험이기도 하잖아요. 의도치 않은 것들이 미술관에 들어오는 건 꽤 즐거운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한편으로 ‘서울 2033’이 무료버전으로 깔려 있는 것은 전시가 미흡했다는 생각도 들어요. 보통 사람들은 전시 준비가 안 되었다고 생각할 것 같아요. -저도 ‘서울 2033’이 기억나는데, 그 게임은 음성 인식도 되고, 장애인도 즐길 수 있다고 써있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저는 1인 게임 개발에 관심이 있는데, 정확히 작품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정체성 게임(다니엘 브레이스웨이트 셜리의 ‘젠장, 그 여자 때문에 산다’)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결과를 마주하게 하는 게 재밌었어요. 저도 제 정체성과 관련해 어드벤쳐 게임 만드는 것을 생각 중에 있거든요. -마지막 영상(김희천 작가의 ‘커터3’)도 두 번을 봤는데, 첫 번째랑 두 번째가 다르더라고요. 처음에 봤을 때보다 두 번째 봤을 때, 게임 속의 캐릭터가 변화하는 게 보이더라고요.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모호해지는 것이 게임과 현실의 경계를 나타낸 것 같아서 두 번째 봤을 때 더 재밌게 받아들여졌습니다. * 반지하게임즈의 ‘서울2033’ Q. 이번 전시에는 관람객의 상호작용(interaction)할 수 있는 컨텐츠가 많았는데요. 전시에서 인터랙션 경험들은 어땠나요? -사실 워낙 미술이 어렵잖아요. 게다가 제가 게임이랑 친한 사람은 아니어서 조금 난해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어요. 그래도 생각보다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게 많았는데, 요즘 전시 트렌드와도 게임이 잘 맞는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현대 미술 쪽으로 접근하면 재밌을 수도 있겠는데, 저는 일단 영상물에 집중을 잘 못해서 전시 볼 때도 영상물을 오랫동안 안 보는 편 이거든요. -인터랙션 할 시간이 충분치 않았어요. 메시지를 인식할 시간을 줘야 해석하거나 할 텐데 시간이 충분치 않다보니 그러지 못했어요. 어떤 기기는 사전 예약해야 한다던데 심지어 주변에 사람이 없는데도 예약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었던 게 아쉬웠어요. -제가 갔던 시간은 그래도 사람이 조금 좀 없는 시간이었거든요. 저는 거기 있는 모든 게임들을 이렇게 그래도 해보려고 노력했는데도 각 콘텐츠 당 플레이 타임이 평균적으로 1분을 안 넘겼던 것 같아요. 사람이 없었음에도 뒷사람이 기다린다는 생각에 그거를 제가 계속 잡고 있기에 좀 미안하더라고요. -저는 미술관에서 만들어지는 인터랙션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캐치가 안 되더라고요. 게임 플레이야 당장 유튜브를 켜도 볼 수 있고, 미술관에서는 대체로 모르는 사람들이 플레이하는데 그 인터랙션 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 그리 의미가 있다고 느껴지진 않았어요. 미술관이 현실과 전혀 다른 공간이고, 전혀 다른 논리가 작동한다면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오히려 그런 관점 자체가 미술관을 너무 신비화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게임적 질감은 흥미로웠지만, ‘게임적 질감을 통해 인터랙티브 전시를 하는 것이 현대미술에서 그렇게 새로운 것인가? ’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Q. 말씀하신 내용들을 듣다보니 이번 전시에서 아쉬운 점들도 적잖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미술관 설명이 어렵잖아요. 조금 더 쉽게 풀었으면 어땠을까요? 미술관에 자주 오지 않는 분들을 위해서 조금 더 쉬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반대로 기존의 미술작품과 달리 이걸 너무 친절하게 해설해준다고 생각했어요. -게임을 전시하는 것은 난해한데, 게임 전시는 또 반대로 너무 단순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직접 관객이 들어가서 인터랙션할 수 있는 부분은 너무 단순하거나 너무 친절하게 해설해 놓았다라고 해야 할까요. 사실은 게임전시를 기대하고 들어가면, 거기서 새로운 경험을 얻는 것은 너무 쉽고 간단해요. 팩맨에서 새로운 경험을 얻는 것은 아니잖아요. -동시에 텍스트로 너무 많은 설명을 하려고 해요. 중국 작가의 작품 중에 한자랑 철학적 주제들을 자막으로 설명하는데, 비슷한 게임 중에 ‘디스코 엘리시움’과 비교해 아쉬움이 컸습니다. 자막으로 설명을 하니까 이게 오히려 게임 오브제로 설명되는 것 말고 어떤 함의를 가질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소개 글을 열심히 읽었어요. 기본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글을 읽고 뒤돌아서니까 아이들 작품이 있었는데, 이 전시가 무엇을 지향하는 것인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가 다소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어린이들 전시는 시각적으로 다가오는 게 있었지만, 그게 전반적인 전시와는 잘 안 어울렸던 것 같아요. 그저 나열된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 전시가 ‘ 게임 전시인지’, ‘게임을 전시하는’ 것인지가 모호했던 것 같아요 . 저는 오락실(루 양의 ‘물질세계의 위대한 모험’)에서 무슨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은 것인지, 미디어아트인지 게임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하룬 파로키의 〈평행〉은 국현에서 2019년, 2020년 이 즈음에 이미 전시했던 작품으로 알고 있어요. 똑같은 작품이 이번에도 실어졌던 게 아쉽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파로키 작품은 이전에 십자로 되어 있었고, 평행 1,2,3,4 작품을 사방에서 볼 수 있어서 서로 다른 것을 나타내고 있음을 보여줬는데, 지금은 벽면에 평면적으로 배치되서 파로키가 드러내고자 했던 지점을 조금 탈각시킨 것은 아닌가 싶었어요. * 루 양 작가의 대규모 영상 설치 작품 ‘물질 세계의 위대한 모험’ -그런 의미에서 저는 게임의 질감이 미술관 스크린으로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적절하게 작동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적이에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의 접근성 을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장 흑인 트렌스젠더만 해도 서서 플레이해야 하고, 눈높이가 안 맞으면 게임을 할 수가 없어요. 현대 미술은 그걸 메타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요. 그런데 흑인 트렌스젠더 작품이란 전형적인 교차성 작품인데, 다양성을 흑인-페미니즘에 집중한 느낌이었어요. 거기에서 ‘장애’는 교차하는 변수일텐데 이런 부분이 탈각되는 것은 아쉬웠어요. -제가 갔을 때는 흑인 트랜스젠더 전시 중에 하나가 아예 꺼져 있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 돌아다니면서 다시 보니까 처음에 ‘이 세계에 동의하시겠습니까?’ 그랬는데 거기에 ‘아니요’ 버튼을 누르면 그냥 바로 꺼지더라고요. 사실 그거 자체가 주는 메시지가 있죠. 문제는 그 화면에 그러니까 그 화면이 떴을 때, 같이 있었던 사람들은 그것이 주는 메시지를 느낄 수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화면이 한 10분씩 꺼져 있으니까 ‘그냥 고장 났구나’ 이렇게 생각할 것 같아요. -맞아요. 그렇게 꺼져버리면 다른 관람객들은 중간에 들어와서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게 아니라 ‘이게 뭐야?’ 하고 지나치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4관에 오락실처럼 마련해놓은 부스에 앉아서 하는 게임이 꺼지고, 바탕화면으로 가더라고요. 이건 흑인 트랜스젠더 전시관에서 ‘이 세계에 동의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NO’를 눌러서 화면이 꺼지는 것과 오락실 게임에서 바탕화면으로 가는 것이 상동하게 느껴지는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게임에서 최근에 많이 얘기되는 게 기술문화 내적인 것도 내적인 것이지만 ‘기계가 진동한다’ 거나 ‘ 기계가 오류를 일으킨다 ’거나가 많이 논의되는데, 화면이 꺼진 것은 의도된 것이며, 바탕화면으로 간 것은 분명 기술적 문제겠지만 그 자체가 오히려 게임이라는 혹은 게임이 실어진 기계가 매끈한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 있는 울퉁불퉁함 혹은 물질적 면모를 드러내는 것 같아요. -저는 사실 어색한 사람들과 있어서 흑인 트렌스젠더 게임을 플레이하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다음 방에서 해설 영상 같은 것이 나오잖아요. 해설 영상이 뭘 말하려는 것인지는 명료하게 제시되었지만, 동시에 이게 그럼 기존의 ‘미술 작품과 뭐가 그렇게 다른가’를 묻게 되더라고요. * 다니엘 브레이스웨이트 셜리 작가의 작품 ‘젠장, 그 여자 때문에 산다’ Q. 미술관에서 전시되는 게임에 대해서 한 마디를 하신다면? -‘우리 이런 것도 한다’라면서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하지만, 게임을 전시하는 것이 어떤 새로움을 주는지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미술과 마찬가지로 게임에도 사회적 변화가 있구나라는 것 말고는 의미를 찾기 힘들었다 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저는 미술관에서의 게임 전시가 질감을 잘 드러냈다고 생각해요. 영상 내적인 게 그 공간이랑 되게 겹쳐지는 부분들이 많고, 당장 에스컬레이터가 있고 그 공간을 바라보게 구조가 있잖아요. 빈백에서 누워서 보면 스크린(김희천의 ‘커터 3‘)이 보이고, 1층 2층 벽 같은 것들이 보이니 그 겹쳐짐 자체가 보여주는 시각적인 쾌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저도 1관과 4관을 본 다음에 그걸(김희천의 ‘커터 3‘) 봤는데 전시에서 추구하는 미감 같은 게 조금 중첩되는 것 같았어요 . 게임이나 게임 오브제, 혹은 게임 아키텍처가 미술관에 들어오는 느낌으로 흥미롭게 봤습니다. -공공미술이 시민 교육을 목적으로 할 때, 게임을 같이 가져가는 거는 굉장히 힘들지만, 좋은 시도였다고 생각을 해요 -저도 게임이라는 주제 자체를 미술관에서 다룬다는 게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해요. 다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게임을 미술로 보여주는 것 자체가 공공성을 담지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예전에 국현에서 강아지들을 인터렉티브하게 볼 수 있게 전시를 했었어요. 강아지 전시죠. 전시 앞에는 뭘 붙여도 말이 된다는 점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어요. 예전에 냉장고로도 전시를 했더라고요. 냉장고도 말이 되고, 강아지도 말이 되네. 그리고 게임도 말이 되네. 그렇다면, 그 너머(More than)가 가능하려면 좀 더 게임 자체의 무언가를 추가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맞아요. 예술전시가 굳이 게임을 통해야만 하는지? ‘게임전시’인지 ‘게임을 전시하는 것’인지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고민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Q. 미술관에서의 게임 전시에 대한 생각들을 조금 더 확장시켜봅시다. 향후에 이런 전시가 또 기획된다면, 어떤 지점들을 보완하면 좋을지 제언을 해주시겠어요? -게임과 예술을 어떤 식으로 경험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앞으로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다음에도 전시를 하게 된다면, ‘조금 더 게이머로서의 경험이나 게임 자체에 대한 탐색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게임을 활용해서 혹은 게임을 중요한 테마로 했던 기존의 국현 바깥의 전시에 비해 국현의 접근이 보수적이었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게임 제너레이션(Game Generation)에서도 소개되었을 것 같긴 한데, 서울시 행화탕 ‘가상정거장’에서 했던 ‘에란겔 다크 투어리즘’이나 아니면 마인 크래프트와 같은 작품들이 오히려 게임과 현대미술의 접점으로 보여줬던 급진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 에란겔 다크 투어리즘은 게임 내적으로 들어가서 의미를 전유해서 좀 되게 흥미로웠던 작품인 것 같은데, 저는 거기서 게임 기기의 질감이 드러났던 것이 흥미로웠어요. * 서울시 행화탕 ‘가상정거장’ 전시 프로젝트: 에란겔 다크 투어https://youtu.be/bxVCJVKH11o -그런데 지금 국현 전시는 어째서인지 되게 보수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아요. 보수적이라는 말은 게임 질감이든, 인터렉티브 작품이든, 스크린에서 만드는 것 자체가 큰 자극을 주지 못한다는 말이에요. -국현이기에 어쩔 수 없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아요. 큰 미술기관이다 보니까 급진적으로 나가기는 까다로운 부분들이 있겠다 싶었어요. -어떤 게임의 경우, 2분 동안 붙잡고 있어도 어떠한 규칙도 어떠한 플레이 목적도 딱히 알 수 없었는데, 그런 작품은 그냥 미감만 보고 나와야 하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감만 보고 나와야 한다는 것. 그게 보수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렇게 미감만 보는 전시가 기존에 없던 전시인가? 물으면 그건 또 아니라는 거죠. -기껏해야 5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에 게임 전시를 경험한다는 것은 매우 제한적인 시간이에요. 그것은 앞으로도 고민해야 할 지점일 것이라 생각해요. -그냥 무책임하게 자신의 어떤 감성과 감수성들로 밖에 보이지 않는 영역들이 저한테는 항상 무책임함으로 읽혀요. 저는 예술에서 늘 열려 있다. 그러니까 해석은 열려 있고, 그거는 관람객의 몫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저한테는 되게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최대한 자기 자신 그러니까 작가는 스스로가 고민을 해야죠. -게임 전시라고 했을 때 미술 안의 다양한 소재 중 하나가 아니라 게임이 줄 수 있는 어떤 특이점들이 어떻게 다뤄지는가를 봐야겠죠. -저는 게임이 현대미술의 탈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뭐 이런 생각도 들어요. 현대미술 같은 경우에는 적극적인 관람객의 능동성 같은 것들을 강조한다는 지점에서 사실은 게임이랑 되게 닿아있다고 생각해요. 둘 다 수용자들이 어떻게 읽게 할 것인가를 열어놓지만, 그게 작가의 무책임함으로 빠지지 않게 경계해야 하는 것도 같아요. 그래서 전 게임과 예술은 서로에게 탈출구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게임전시인 만큼 다양한 반응이 나온 것 같습니다. 덕분에 〈게임사회〉 전시에 대한 다채로운 의견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 참여자 태백(가명), 26살, 여성, 전 게임 QA 김성은, 30대 후반, 여성, 프리랜서 김재원(가명), 20대 초반, 여성, 학생 박진욱(가명), 30대 후반, 남성, 언론직 종사자 한승진(가명). 30대 초반, 남성, 에디터 Tags: 인터뷰, 국립현대미술관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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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우리는 무엇을 '롤플레이'하는가
21세기의 사반세기를 돌아 마주한 것은 언어의 순수에 대한 갈망 하나만이 아니다. 70년대에 탄생하고, 90년대에 완숙하여, 2000년대에 끝없이 분화한 이 장르를 태초의 조건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RPG’라고 부르던 조건은 이제, 수많은 가능성들에 의해 취사적으로 선택되고 조립되고 분화되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제 비디오 게임의 세계에 순수한 RPG라는 것은 규정 불가능하다. < Back 지금 우리는 무엇을 '롤플레이'하는가 23 GG Vol. 25. 4. 10. 비디오 게임 장르로서의 RPG [1] 는 상당히 독특한 위치를 점하는 장르다. 이 장르는 태생부터 특정한 테이블 탑 게임을 도달해야 하는 이상적 모델로 삼으며 탄생했다. 초기 비디오게임 RPG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은 테이블탑 RPG(이하 TRPG)인 《던전즈 & 드래곤즈》(이하 D&D)를 혼자서 할 수 있도록 구현하는 것에 목표로 두었다. 대부분 미국의 대학 내 인트라넷 시스템이었던 PLATO [2] 를 그 플랫폼으로, D&D를 즐기던 대학생들에 의해 자주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세간에도 잘 알려져있다. 또한 리처드 개리엇의 초기 작품인「아칼라베스」 역시 초기 버전의 제목이 DnD였다는 사실 또한 익히 알려진 이야기다. 이 독특한 장르는 이러한 외부적 게임을 디지털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장르다. 물론 다른 장르들, 예를 들어 스포츠나 대전 격투 역시 현실의 ‘게임’을 디지털적으로 구현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RPG는 이들과는 다른 방식의 번역을 요구했는데, 그것은 RPG가 디지털의 방식으로 구현하려는 대상이 육체의 운동이나 정형화된 규칙이 아니기 때문이다. TRPG를 구동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했던 것, 그것은 TRPG의 가장 핵심적인 기반이 참가자들의 ‘언어’라는 사실이었다. TRPG 역시 대개는 적절히 구성된 게임 세계와 가변성이 큰 상황을 판단하기 위한 규칙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게임을 ‘불편하지 않게’ 유지하기 위한 기반적 틀거리에 한정된다. TRPG는 그 이상의 모든 요소들, 그러니까 게임 내에 등장하는 장애물의 종류, 풀어야 하는 퍼즐이나 수수께끼, 참가자들 이외에 존재하는 세계의 모든 요소가 완전히 구조화되어 있지 않다. 설령 특정한 적 캐릭터에게 수치적 데이터가 있다고 한들, 그들이 어떤 배치로, 어떤 전략으로, 어느 정도의 사기로, 어떤 목적으로, 어떤 마음 가짐으로 플레이어들과 대립하는지는 규정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게임을 진행하는 사람들 사이의 언어적 합의와 심판의 역할을 맡는 ‘게임 마스터’에 판단에 의해 규정된다. 또한 이러한 세계와 게임 플레이어들이 어떻게 상호 반응할 것인가, 당면한 문제를 어떠한 과정으로 해결할 것인가 역시 모두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서 확정된다. TRPG라는 게임이 가진 가장 핵심적인 기반은 언어이며, 비디오 게임으로서의 RPG는 이 기반의 ‘거대함’을 번역하는 것을 요구받은 장르다. *「울티마」(1981)는 자율적으로 접촉 가능한 세계를 통해 거대함의 컨셉을 작동시킨다. 초기 미국의 컴퓨터 RPG(이하 CRPG)들은 이 거대함을 ‘게임 세계’라는 컨셉으로 해석했다. 이를테면 세계는 선형적이거나 순환적이지 않았다. 플레이어는 사전적으로 규정된 세계 내에서 자율적으로 세계와 접촉할 수 있는 기능을 얻었다. 「울티마」는 탑뷰로 내려다본 세계와 1인칭의 시점으로 구현되는 던전을 모두 가지고 있었으며, 던전의 구성은 난수적이긴 했으나 일정한 패턴을 통해 구현되었다. 플레이어는 어떤 곳에 먼저 들를지, 무엇을 먼저 구매할지 따위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세계와 반응해나가야 했다. 「위저드리」는 그보다는 더 좁은 세계인 다층 구조의 지하 던전을 다루고 있지만, 이러한 구조물과 플레이어는 비선형적 관계를 맺었다. 좁은 지하의 터널 내부에서도 ‘어떤 방’을 ‘어떤 순서로’ 탐험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플레이어의 몫이었으며, 때로는 모험을 포기하고 다시 지상으로 귀환해 상태를 재정비하고 다시 내려가야 했다. 물론 이러한 반응성의 세계는 초기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 이를테면 「콜로설 케이브 어드벤처」나 「조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CRPG는 이런 어드벤처 게임들과는 전적으로 구분되는 체계를 내장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일종의 ‘수치에 의한 캐릭터 규정과 성장의 체계’다. 이 체계는 전적으로 그들이 원본으로 삼던 D&D의 것을 빌려온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언어라는 구조를 완전히 빌려올 수 없었던 디지털의 방법론에서 이 수치 개념이야 말로 가장 구현의 가능성이 높은 것이기도 했다. 지미 메이허Jimmy Maher는 《CRPG의 르네상스 파트 1》에서 이 문제를 꽤나 신랄하게 비판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CRPG는 전투와 병참 관리가 전부인 게임 엔진 위에 스토리와 세계 구축이라는 얇은 외피를 씌웠고, '롤플레잉role-playing' 게임이 아니라 '롤플레잉roll-playing'이 되었다.’ [3]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구현은 RPG라는 것이 초기 텍스트 어드벤처 혹은 다른 ‘거대한 서사’를 지탱하려는 비디오 게임 장르들과 구분되는 지점을 형성한다. RPG의 주인공은 결과적으로 ‘위대해짐’의 상태를 달성하는 것이다. 요컨 당대의 서사를 내포하는 다른 장르의 주인공들 역시 ‘더 복잡하고 장대한’ 장애물과 마주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장애물과 마주하는 주인공 그 자체가 그에 상응할만한 존재로 변화하지는 않는다. [4] 하지만 RPG가 D&D로부터 빌려온 이 캐릭터 성장의 구조는 플레이어의 캐릭터에게 ‘이전보다 더 나은 상태’를 부여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더 위대한 상태에 도달해 더 거대한 위협을 무찌르는 에픽epic [5] 의 서사의 구축이 가능해진다. [6] 한편 이러한 장대함의 구조는 TRPG의 ‘언어’라는 컨셉을 대체할만한 또 하나의 컨셉, 즉 ‘에픽의 서사’라는 컨셉을 가질 수 있는 기반이 되어줬다. 따라서 비디오 게임 장르인 RPG는 ‘(거대한) 게임 세계’와 ‘(거대한) 에픽의 서사’라는 두 가지 컨셉을 지닌 장르로 체계화되었다. 그리고 핵심은 이 두가지 컨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컨셉들이 발현시키는 고유한 RPG만의 체감 조건에 있다. 넓고 반응 가능한 세계, 그리고 점차 ‘위대해지는’ 캐릭터의 변화는 플레이어를 게임의 내부에서 ‘정처없이 서성거리’도록 내민다. 이런 구조는 원뿔형의 나선으로 토픽화 된다. 플레이어는 넓은 반응 중심의 게임 세계에서 다양한 대상을 만나며 ‘정처없이’ 움직이고, 이러한 움직임이 캐릭터를 ‘점차 위로 상승’시켜 최종적으로는 꼭대기peak와 접촉한다. 이런 구조는 초기 미국의 RPG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코드를 어느 정도 변용해 받아들인 일본의 RPG(Japanese RPG, 이후 JRPG)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단, 이 하위 장르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드래곤 퀘스트」는 프로듀서의 지향 [7] 에 의해 ‘게임 세계’보다는 ‘에픽의 서사’가 더 강조되었고, 이후의 JRPG가 그러한 서사에 더 집중하도록 만드는 기반을 부여했다. 이렇게 비디오 게임의 역사에 RPG라는 것이 탄생한다. 선형 혹은 순환형 세계에서 변화를 가지지 않던 주인공들이 존재하던 세계에 ‘정처 없는’ 플레이가 들어선 것이다. 1990년대 : CRPG의 고전기 이렇게 형성된 RPG라는 장르는 1990년대에 이르러 그 형태가 더욱 졍교해진다. 《롤플레잉 게임 스터디즈Role-playing Game Studies》(2018) 에서 슐스Schules, 피터슨Pterson, 피카드Picard는 ‘게임 제작 수의 폭발적인 증가와 출시되는 게임의 질적 향상으로 인해 일반적으로 학계와 팬들은 1990년대를 CRPG의 황금기로 간주한다.’ [8] 고 쓰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중반은 이후의 RPG를 규정했다고 말할 수 있는 몇 개의 게임들, 블리저드의 「디아블로」, 바이오웨어의 「발더스 게이트」, 인터플레이의 「폴 아웃」, 베데스다 소프트웍스의 「엘더스크롤 II : 대거 폴」, 스퀘어 소프트의 「파이널 판타지 VII」 등이 발매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다수/다종의 제작과 발매는 장르 내부에서의 적극적 분화를 이끌어낸다. 이 시기에 RPG가 유독 비디오 게임계의 주요 화두가 된 것은 비디오 게임 환경의 전적인 이동에 있기도 했다. 1990년대 개인용 PC의 보편화와 더불어 닌텐도, 세가의 적극적 공세는 비디오 게임의 소비 공간을 아케이드에서 가정으로 끌고 들어왔다. 이러한 소비 공간의 변화는 게임의 소비 방식 자체를 ‘일회적 양식’에서 ‘다회적 양식’으로 크게 변화시켰고, 플레이어들은 다회의 플레이가 맥락적으로 연결되는 경험을 요구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는 닌텐도의 「슈퍼 마리오 월드」같은 플랫포머 게임조차 맥락적 다회 플레이를 의식하는 구성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이경혁은 《현질의 탄생》에서 이렇게 적는다. "(게임의 소비 공간의 변화를 통해) 첫 번째로 발견할 수 있는 변화는 긴 호흡의 게임들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 엔딩 없이 무제한으로 반복되던 초창기 게임들은 서서히 나름의 서사를 가진, 다시 말해 엔딩이 있는 게임의 형태로 변화했다. (...) 콘솔/PC 게임들이 보여주는 세이브/로드를 통해 초장 시간의 서사를 갖는 게임 플레이는 (...)" [9] 70~80년대에 발흥한 RPG라는 장르는 이러한 비디오 게임 소비의 공간적 변화에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작동한다. 호리이 유지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점점 강해진다는 점이 재미있다고 생각했거든요. AVG는 수수께끼가 막히면 할 일이 없어져버리지만, RPG라면 일단 레벨을 올리기만 해도 즐길 수 있잖아요. 수수께끼를 풀고 레벨도 올리면서 계속 나아가면 많이 놀 수 있는데다가,(후략)." [10] 이 시기를 루이스 자네티Louis Gianetti의 장르 사이클에 놓고 본다면 전적으로 고전기 [11] 라고 볼 수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고전기는 ‘중간단계로서 균형, 풍요, 안정 같은 고전적인 이상을 구현’ [12] 한다. 즉, 80년대에 만들어진 RPG라는 장르 규칙은 1990년대의 폭발적 증가를 통해 수없이 반복되며 하나의 이상적 형태를 이룬다. 그리고 이 때의 RPG들이 무엇을 그 고전적 이상으로 삼았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990년대 RPG를 ‘RPG적’인 것으로 이해하게 만든 것은 사실상 거대한 세계, 에픽의 서사라는 컨셉보다도 그것을 달성시키는 ‘양식 조건’, 수치적 캐릭터 구성과 그 성장 체계에 기울어진 경향이 있다. 그것은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RPG를 ‘다른 장르와 다르게 만들어주는’ 메커니즘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무엇인가에 ‘RPG’라는 태그를 달 수 있는 조건은 플레이어 캐릭터에게 수치화된 ‘능력치’라는 것이 있는지, 점수화된 경험을 모아 ‘레벨’을 올릴 수 있는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를통해 이 시기에 ‘RPG화’라는 욕망은 이 메커니즘을 어떻게 이식하는지에 달려있었다. 예를들어 시에라 온라인이 이러한 ‘RPG성’을 이식해 만든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게임 시리즈 「퀘스트 포 글로리」 [13] 의 경우, 역시나 강조되는 것은 이러한 양식 조건이다. 당시의 게임 잡지인 《PC 매거진》 1993년 1월호는 이 게임의 세번째 작품을 소개하며 다음과 같은 문구를 사용한다. ‘이전의 「퀘스트 포 글로리」와 마찬가지로, QG3는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CRPG)과 그래픽 어드벤처가 혼합된 게임입니다. 캐릭터의 특성과 능력은 능력치의 리스트에 의해 정의됩니다. 상황의 성공 여부는 스킬 레벨에 따라 달라지며, 연습을 통해 스킬을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14] 이러한 규정은 연구자들에게서도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구석이 있다. 2008년 International Journal of Role-playing Games - Issue 1에 실린 마이클 히친스Michael Hitchens와 앤더스 드레이센Anders Drachen의 《롤플레잉 게임의 다양한 얼굴들》에는 싱글 플레이어 디지털 롤플레잉 게임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이 적혀있다. ‘이러한 게임은 캐릭터의 수치적 표현에 의존하며, 펜 앤 페이퍼 게임의 전형적인 스킬과 능력의 수치적 향상에 따라 캐릭터가 성장한다.’ [15] 또한 2012년 발매된 《비디오 게임 대백과》에서도 이와 유사한 문장을 찾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특징 중 하나는 모든 RPG에는 정량화할 수 있는 특징(테이블탑 스타일 RPG에서 사용되는 캐릭터 시트와 동등한 디지털적 요소)을 가진 플레이어 캐릭터가 있으며 캐릭터의 성장이 성공의 중심 척도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RPG 규칙 시스템에는 자주 '경험치 레벨'이 포함되는데, 이는 게임에서의 성공적인 진행을 통해 새로운 능력과 스킬로 '레벨 업'할 수 있는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다는 의미다.’ [16] *《PC GamePro》에서 배포한 「디아블로」(1996)의 리뷰 프린트 광고. 잡지에 따라서는 Action RPG로 소개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당시에도 이러한 양식 조건만으로 RPG를 설명할수 있는가에 대해 여러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1996년 블리저드의 「디아블로」가 출시된 뒤, 해당 게임을 CRPG로 구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17] 그럼에도 「디아블로」는 여러 게임 잡지들의 기사 등에서 ‘RPG’로 홍보되었으며 전통적 팬덤의 입장과 무관하게 RPG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즉 업계에서는 RPG라는 게임을 ‘제작’하는 데에 있어서 이러한 수치적 캐릭터 규정과 성장 방식을 하나의 문법으로 사용했다. 설령 전통적 RPG의 팬덤이 이를 수용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한편 이러한 비교적 가벼운 규정은 1990년대에 RPG의 제작을 더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는 토대가 되어주기도 했으며, 덕분에 다종으로 분화할 토대가 형성되었다는 사실도 생각할 여지가 있다. 이를테면 일본에서 탄생한 SRPG의 경우 세계와의 접촉이 선형적이고 불가역적임에도 불구하고 RPG의 하위 장르로 분류되고 있는데, 이는 개별적인 게임 무대stage에서의 자유로운 전술적 지침이 이러한 ‘정처없는 서성거림’을 일부 대체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1990년대는 그것의 고전기라고 부를 수 있는 조건과 동시에 그것에 다종의 분화를 만드는 수정기의 초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분화는 크게는 RPG의 거대 컨셉을 어떤 맥락에서 접근하느냐를 통해 분화되었다. 요컨대 지리적 요건에 의해서는 일시적으로 서구식 RPG(Western RPG, 이후 WRPG)라고 불리웠던 그것과 JRPG로, 인터넷이라는 기술 조건에 의해서는 단일 플레이어 RPG와 멀티 플레이어 RPG로 분화되었다. 이 때 이 분화를 만들어낸 배경에는 전적으로 RPG의 핵심인 ‘거대한 컨셉’에 대한 각자 다른 접근법이 있었다는 사실을 명시할 필요는 있다. 90년대 말의 RPG 1 : 지리적 분화로서의 WRPG와 JRPG 먼저 지리적 분화는 RPG가 내포한 ‘거대함’의 컨셉을 각자의 방식으로 발전시켜나가는 양상을 보인다. 이를테면 WRPG는 거대한 ‘세계’에 방점을 찍는 반면 JRPG는 거대한 ‘서사’에 방점을 찍는다. 특히 WRPG는 바이오웨어의 「발더스 게이트」로, JRPG는 스퀘어 소프트의 「파이널 판타지 VII」로 이러한 특징의 엇갈림이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일시적으로 침체기에 들어갔던 CRPG, 특히 D&D를 기반으로 하는 CRPG를 완전히 전복한 작품으로 꼽히는 「발더스 게이트」는 21세기 이후 서양식 RPG의 가장 모범적인 구성을 명백히 한다. 당연히 「발더스 게이트」 역시 에픽의 서사를 추구하지만, 그 내부에서 세계와의 접촉은 두 개념으로 분할되어 작동한다. 먼저 ‘주된 서사’는 챕터의 단위로 분절된다. 그리고 플레이어는 각 챕터의 내부에서 세계를 향한 ‘정처없는 서성거림’을 실행해 세계의 수많은 요소와 접촉하고 상호 작용한다. 물론 이러한 절차 기반의 세계 탐험은 이 게임보다 약 5년에 앞서 발매된 다이나믹스의 「크론도의 배신자」에서 이미 확립된 개념이긴 하나, 「발더스 게이트」는 이러한 세부적 접촉을 관리하는 저널의 역할, 그리고 각각의 접촉이 발생시키는 상당한 수준의 다면적 반응을 통해 세계 자체가 가진 생동성을 극히 도드라지게 만들어냈다. 단순히 세계에 흩뿌려진 작은 서사의 조각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을 넘어, 플레이어 캐릭터가 가진 특성이 대화의 양상에 반영되거나, 대화 양상이나 접촉의 순서가 이후의 결과에 영향을 주는 방식으로 세계의 생동을 전달한다. 따라서 「발더스 게이트」에서 가장 핵심적인 코드는 결국 ‘세계’가 된다. 이는 그와 유사한 시기에 발매된 두 편의 「폴 아웃」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요소로, 결국 이 시기 WRPG는 초기 CRPG가 가져온 ‘세계’의 맥락을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에 반해 「파이널 판타지 VII」는 전적으로 서사의 맥락을 향해만 나아간다. 발매 당시 「파이널 판타지 VII」는 서사의 중간을 채우는 화려한 컷씬으로 그 특징이 규정되곤 했다. 하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파이널 판타지 VII」에는 온갖 기이한 요소들이 산재한데, 특히 이야기의 진행을 메우는 미니 게임의 역할이 그렇다. 「파이널 판타지 VII」에는 챕터와 챕터를 메우는 독특한 구성의 미니 게임들이 등장하곤 하는데 이들은 슬로프에서 스노우 보드 타기, 잠수함을 조종해 적기를 격추하기 등 완전히 다른 장르로 발현되곤 한다. 게다가 각각의 미니게임은 (RPG의 규칙적 전제인) 플레이어의 성장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완전 독립된 구성이라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지점을 갖는다. 이들의 이상한 점은 이러한 외부적 플레이를 플레이어에게 강제하는 구성이라는 점에 있다. 마치 스퀘어 소프트는 자신들이 상정한 서사 전체를 ‘체험’시키려는 요량으로, 그러니까 서사가 허용한다면 그것을 게임 플레이로 해석해 체험시키겠다는 강력한 욕망을 가진 것 처럼 보인다. 즉 이 세계는 「발더스 게이트」처럼 플레이어에게 반응하기 보다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반응하길 바란다. 이 반응 요청의 하부 구조에 ‘에픽의 서사’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은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기묘한 게임의 세계적인 성공은 JRPG라는 것이 작동하는 원리가 그 무엇보다 ‘에픽의 서사’에 있음을 천명한다. JRPG는 ‘서사’라는 컨셉을 위해서라면 ‘세계’라는 축 마저 납작하게 만들 각오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파이널 판타지 VII」(1997)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서사에 상응하는 미니게임을 갑작스럽게 던지곤 한다. 이들은 21세기 초를 규정하는 다른 중요한 RPG들, 블랙 아일 스튜디오의 「플레인스케이프 : 토먼트」(이하 「토먼트」)와 스퀘어 소프트의 「파이널 판타지 X」의 분명한 토대가 된다. 21세기 초 사반세기의 RPG의 규정에는 이들로부터 이어지는 지리적 양태를 무시할 수 없는 흔적이 있다. 90년대 말의 RPG 2 : 통신 기술의 기반으로부터의 멀티 플레이어 RPG 한편 20세기 말은 인터넷이라는 기술을 통해 혁명적 디지털 기술의 변모가 존재하던 시기다. 이 조건은 RPG라는 장르에도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데, 본디 RPG가 모델로 삼고 있던 TRPG는 그 자체가 ‘다수의 플레이어들이 동시에 즐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요컨 반응성의 거대 세계라는 컨셉을 다수의 플레이어에게 동시에 감각 시킨다는 조건은 RPG의 이상적 모델과 연결되는 것이다. 사실 MORPG 또는 MMORPG는 그 선조로서 MUG를 가지고 있다. MUG는 기본적으로 「콜로설 케이브 어드벤처」 같은 텍스트 어드벤처를 다수의 환경이 동시에 즐기는 것으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다수의 플레이어들이 세계를 공유할 경우, 그 안에는 인식을 위한 ‘동일한 체계’가 필요하다. 결국 텍스트 어드벤처들이 가지고 있는 텍스트의 추상적 이미지만으로는 한계지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결국 ‘수치로 규정되는’ RPG의 양식적 기반이 그 내부에 들어선다. 그리고 인터넷의 전송 가능한 데이터의 수치가 증가함에 따라 텍스트라는 한계지점을 넘어 최종적으로 그래픽으로 운용되는 세계가 구동되기 시작한다. 이 시기 가장 중요한 MMORPG는 단연 1997년 출시된 「울티마 온라인」이다. 「울티마 온라인」에서 가장 확고히 인식되는 욕망은 세계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다. 어떤 면에서 이 게임으로부터는 TRPG의 그것을 넘어서고 싶다는 욕망, ‘거대 세계’라는 컨셉 안에서라면 그것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까지도 느껴진다. 물론 TRPG의 언어라는 컨셉은 무한한 가능성의 조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플레이어와 대면하는 게임 마스터라는 접면을 토대로 한다. 하지만 「울티마 온라인」은 모든 플레이어 캐릭터가 직접 세계의 구성 요소가 되어줌으로서, 가상적 세계 그 자체를 인간의 힘으로 ‘구동’시키고 싶어한다. 플레이어는 필요에 따라 여러 캐릭터를 생성할 수 있는데, 보편적인 RPG의 주인공인 ‘모험을 하는’ 캐릭터 외에도 경제 활동에 투신하는 직업인 캐릭터를 만들 수도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캐릭터들이 게임 내부에서 연결되고, 관계 맺고, 경제적 기반을 형성하는 것이 「울티마 오리진」의 이상적 모델이다. 따라서 여러면에서 「울티마 온라인」이 상정하는 ‘거대 세계’의 모델은 TRPG의 그것보다 더 커다란 측면이 있으며, 따라서 이 두 세계라는 컨셉은 오히려 구분되어 버린다. 즉, 「울티마 온라인」의 진행은 어느 순간 CRPG의 이상적 모델이었던 TRPG를 지나쳐버린다. 한편 싱글 플레이 RPG, 이를테면 「발더스 게이트」나 「디아블로」 등에서는 네트워크 기능을 통해 동일한 세션을 함께 즐기는 멀티 플레이가 탑재된다. 특히 D&D를 그 원전으로 삼는 「발더스 게이트」는 TRPG의 온라인 세션을 염두에 둔 구성임이 명백했다. 「발더스 게이트」를 동시에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들은 세계의 구성물이 되기보다는, 이미 만들어진 세계에 반응하는 존재로만 기능하도록 구성되어있다. 사실상 이 구성은 디지털 구조에 게임 마스터의 역할을 뒤집어 씌운 구성이라 할 수 있다. 그보다 더 심플한 「디아블로」는 하나의 지하 던전을 함께 헤집고 다니는 반응적 ‘파티’를 구성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이 경험은 사실상 고전 아케이드 게임인 「건틀렛」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것 처럼 여겨질 정도다. 그런 측면에서 이들은 「울티마 온라인」이 품고 있는 ‘다수의 플레이어에 의해 거대 컨셉이 스스로 구현되는 것’과는 거리를 둔다. 어떤면에서 보면 이 두 분화의 관계는 WRPG와 JRPG의 더 거대한 버전처럼도 보인다. 이를테면 「울티마 온라인」은 ‘거대 세계’라는 컨셉을 더욱이 거대하게 만드는 대신, 에픽의 가능성을 극도로 줄여버린다. 「울티마 온라인」에서 감각하는 서사는 본질적이기 보다는 구성적이다. 따라서 체감적인 서사성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조지프 캠벨의 의미에서) ‘신화적’이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 마찰하며 만들 수 있는 서사에는 역시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여전히 서사의 중심을 게임 시스템이 귀속시키려는 「발더스 게이트」는 더 전통적인 측에 속한다. 캠벨의 주장에 따라 신화적 서사가 ‘신의 세계’에 다녀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신 또는 그에 준하는 존재로서의 서사를 인가하는 자가 절실히 필요해진다. 「발더스 게이트」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게임 마스터라는 역할이며, 그것을 ‘기계 장치의 신’에 맡겨둠으로서 거대 서사라는 컨셉을 기능시킨다. 1990년대의 유산과 21세기 초의 RPG들 앞서 설명한 분화들의 결과는 21세기 초입의 가장 중요한 RPG로 그 효과를 연장한다. 앞서 설명한대로 「발더스 게이트」는 「토먼트」로 ‘거대 세계’라는 컨셉을 유산으로 남긴다. 이때 「토먼트」는 「발더스 게이트」가 가진 하이 판타지적 컨셉들로부터 이탈해 전투와 그에 준하는 세팅보다는 주인공 캐릭터인 ‘이름없는 자’가 어떻게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는지에 더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 방법론이 게임 진행의 형식이 되어주는 것을 넘어, 「토먼트」가 궁극적으로 그리는 에픽의 형태에까지 영향을 준다. 이렇게 「발더스 게이트」로부터 「토먼트」로 이어지는, 거대 세계의 컨셉을 통해 에픽의 서사를 달성한다는 개념은 21세기의 WRPG가 반복해서 품는 모델이 된다. 그 경향의 연장에는 바이오웨어의 「스타워즈 : 구 공화국의 기사단」 시리즈와 「드래곤 에이지」 시리즈, 베데스다 소프트웍스의 「엘더스크롤」 시리즈, 「폴아웃」 시리즈, 라이온헤드 스튜디오의 「페이블」 등으로 연장된다. 또 한편 「파이널 판타지 VII」에서부터 발흥한 JRPG의 태도는 동 시리즈의 신작이었던 「파이널 판타지 X」로 연장된다. 「파이널 판타지 X」는 이전의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가 가지고 있던,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세계의 직관적 체험’을 포기한 최초의 게임이다. 말미에 하늘을 나는 ‘비공정’을 획득해 세계의 어디든 날아다닐 수 있었던 이 시리즈에서 ‘월드 맵’이라는 개념을 포기한 최초의 게임이다. 「파이널 판타지 X」의 세계는 길게 이어진 길쭉한 홈통이 몇개씩 연속으로 연결된 형태이며, 그 홈통들 사이사이를 연결하기 위한 넓은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후 비공정에 탑승하더라도 플레이어는 그 행선지를 여러개의 선택지 중 하나로 선택하도록 요구받는다. 시각적으로는 세계의 가상 모델을 드러내긴 하지만 플레이어가 임의로 세계를 날아다니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파이널 판타지 X」는 거대 세계라는 컨셉을 최소한도의 크기로 납작하게 만든 뒤, 에픽의 서사라는 컨셉만을 비대하게 증가시킨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면에서 21세기 JRPG를 규정하는 전제가 되어준다. 이를테면 21세기 초를 대표한다 할 수 있는 아틀러스의 「페르소나」 시리즈 역시 그렇다. 본디 「진 여신전생」 시리즈의 외전으로 시작한 이 시리즈는 (외전임을 증명하는 ‘여신이문록’이라는 단어를 처음 제거한) 3편부터 그 게임 플레이가 크게 변화한다. 여기서부터 이 시리즈는 세계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거대한 부감적 시선을 제거해버린다. 그리고 공간이 아닌 시간을 통해 길쭉한 홈통을 만들고 플레이어를 통과시킨다. 하루하루의 행동을 통해 앞으로 진행하도록 요구하는 게임의 구성은 거대 세계에 응하는 체험이라는 감각을 끊어버리고, 불가역적인 시간의 컨셉 안에 플레이어를 가둬버린다. 「페르소나」는 일정 시기마다 벌어지는 대형 이벤트와 그곳에서 발생하는 인간적 드라마를 공간의 개념보다 더 강조한다. 「페르소나」 역시 에픽의 서사 앞에서 세계의 규모를 납작하게 누르는 시리즈라 할 수 있다. 90년대를 넘어 21세기를 관통하는 또 다른 인기 JRPG 시리즈인 「포켓몬스터」 시리즈 역시, 몇 개의 구역이 홈통이 되어 서사의 핵심 축인 ‘마을’의 연결고리로 작동한다. 물론 이후의 모든 JRPG가 이런 ‘연속된 홈통의 구조’를 가지지는 않겠지만, 이후 JRPG에선 서사의 컨셉이 세계의 컨셉보다 우위라는 것, 서사가 세계를 짓누르는 구성이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지우기 어렵다. *「파이널 판타지 III」와 「파이널 판타지 X」의 비공정 화면의 비교 한편 21세기의 초입에 등장한 또다른 서양의Western RPG인 「디아블로 2」는 「발더스 게이트」의 논제와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전작인 「디아블로」로부터 이어진 던전 크롤링 중심의 이 게임은 「로그」로부터 빌려온 무작위 생성의 던전을 그 세계의 핵심 축으로 가진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세계의 반응을 기대하기 보다는 세계에 ‘반응하며’ 탐험하게 되는데, 이러한 구성은 어떤 면에서는 세계만을 비대하게 키워낸 MMORPG에 대응하며 존재하는 것 처럼도 보인다. 이러한 반응성이 극히 적은 게임의 플레이는 웨스트우드의 「녹스」, 가스 파워드 게임의 「던전 시즈」 시리즈, 레이븐 소프트웨어의 「마블 얼티밋 얼라이언스」 등으로 이어지며 WRPG의 한 축을 이룬다. 단 이들은 첫번째 「디아블로」보다는 더 디테일한 서사를 중시하는 면이 있으나, WRPG와 유사한 정도의 반응적 세계를 구축하진 않는다는 면에서 다른 경향을 지닌다. 한편 MMORPG는 계속된 「울티마 온라인」의 논제, 플레이어를 구성물로서 세계를 구성하려는 욕망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매달리는 측면이 있었다. 요컨 NPC에 의한 상행위를 완전히 지우고 플레이어들만으로 경제를 지탱하려 했었던 「애쉬론즈콜 2」나 플레이어를 세력에 귀속시키고 소통의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해 플레이어들간의 군집적 결속을 유도하려 했던 「다크 에이지 오브 카멜롯」이 대표적인 예시가 된다. 특히 1999년 발매된 SOE의 「에버 퀘스트」는 이러한 시스템의 ‘특화된 지점’의 인적 네트워크를 강조하기 보다는, 그 세계의 구성에 있어 협력의 ‘필요성’을 통해 커뮤니티를 작동시키는 독특한 게임이었다. 「에버 퀘스트」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대신 세계의 규모, 문제, 해결의 양상에서 타인의 도움이 없이는 달성이 불가능하다는 (어떤 면에서는 고전적 형태의 레벨 디자인의 변용을 통해) 방법론의 측면을 강화한다. 그 결과 플레이어들은 자의적으로 세계를 생동시켰으며, 「울티마 온라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거대 세계’를 구성해 나갔다. 그리고 21세기의 MMORPG를 확고히 규정한 게임은 블리저드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WoW)일 것이다. 「WoW」는 그 구성에 있어 이전의 MMORPG들이 거쳐온 다양한 개념들을 규합하고 있긴 하지만, 오히려 「울티마 온라인」의 논제인 ‘플레이어를 구성물로 세계를 구동’하려는 욕망으로부터는 꽤나 이탈해있다. 물론 팩션을 통한 응집이나, 인스턴스 던전과 레이드 등을 통해 발현되는 「에버 퀘스트」적인 커뮤니티 구성은 충분히 작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WoW」를 더 특별하게 만든 것은 어떤 면에서는 싱글 플레이 RPG로부터 그 방법을 빌려온 ‘세계를 추동하는 거대한 서사’의 컨셉이기도 했다. ‘퀘스트 텍스트가 단순한 플레이버 텍스트가 아닌’ MMORPG로서 「WoW」는 독특한 지점에 있는 게임이다. 말하자면 「WoW」는 MMORPG가 끌고 나간 ‘거대 세계’의 컨셉을 이어받아 플레이어들을 구성물로 삼는 세계를 구축하는 한 편, 플레이어 캐릭터로 하여금 고전적인 RPG의 에픽 서사의 컨셉, 즉 ‘위대해지기’를 체감시키는 텍스트적 힘을 발휘하는 게임이다. 따라서 「WoW」의 강점은 적절한 정도의 수동성이다. 특히 2010년 벌어진 거대 이벤트 ‘대격변’은 그 수동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한다. 세계의 형태, 구조를 뒤바꾼 이 충격적인 이벤트는 플레이어들의 참여적 성질로 벌어진 것이 아니다. 여기엔 오직 부여된 서사만이 존재한다. 어떤 면에서 「WoW」의 플레이어들은 이미 ‘거대 서사’의 컨셉을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이 수동적 변화를 쉽게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21세기 : 레벨링 시스템의 보편화와 장르 재정립의 시대 그러는 한편, 비디오 게임의 주 무대가 완전히 가정으로 바뀌어버린 21세기는 고전적인 RPG의 양식적 모델이 가진 독립성이 붕괴되어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21세기는 비디오 게임의 플레이 형식을 맥락적 다회성으로 완전히 정착시킨 시기이기도 하거니와, 기술적 발전으로 말미암아 그 어떤 장르에서도 ‘위대해지기’를 실현할 수 있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캡콤의 「귀무자」 시리즈나 「데빌 메이 크라이」 시리즈, 산타모니카 스튜디오의 「갓 오브 워」 시리즈, 세가의 「용과 같이」 초창기 시리즈는 모두 ‘액션 어드벤처’라는 장르의 형태에 귀속되어 있는 시리즈이다. 하지만 이들은 플레이어 캐릭터가 강화되는 일종의 성장 테이블을 지녀 장기간 세션의 반복을 통해 점차 에픽의 위대함에 가까워진다. 물론 예시로 든 게임들은 21세기 초에 등장해 그 초석을 마련한 게임들일 뿐이다. 21세기의 ‘커다란’ 게임들이란 대체로 수집, 구매, 강화, 스킬 트리 등의 성장 체계를 기본적인 언어로 삼는다. 따라서 이 약 20년의 시기는 1990년에 세워두었던 RPG의 양식적 모델을 완전히 해체해버린다. 더 이상 RPG는 수치화된 캐릭터 구성과 레벨식 성장이라는 것으로 장르 모델을 세울 수 없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정처없는 서성거림’이라는 모델 역시 그 존속에 불투명함이 발생한다. 「GTA 3」부터 가속화된 ‘오픈월드’라는 형식의 확산은, RPG라는 규정의 여부와 무관하게 플레이어 캐릭터를 펼쳐진 세계에서 이리저리 떠돌게 만든다. 플레이어는 어떠한 일을 해야 하는지 인지하지 못한 채 세계를 향해 어떠한 행동을 취하고 그 반응을 기대한다. 게임 세계의 규모를, 용량이 닿는 한 얼마든지 키울 수 있는 작금의 게임 세계에서 ‘정처없는 서성거림’을 장르 특유의 체감적 모델로 세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지고 있는 셈이다. * 아케이드형 벨트 스크롤 액션 게임에 가까운「캐슬 크래셔즈」역시 정처 없이 떠돌거나(좌), 캐릭터를 성장(우)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이를테면 소니의 「마블스 스파이더맨」은 RPG인가? 이 게임에는 명백한 형태의 성장 체계(RPG의 양식적 모델)가 존재하며, 또 한편으로는 이미 얼마든지 떠돌 수 있는 맨해튼의 지도(RPG의 체감적 모델)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게임을 ARPG로 부르지 않는다. 이런 구성은 락스테디의 「배트맨 : 아캄 수용소」를 위시한 아캄 시리즈나 레메디 엔터테인먼트의 「컨트롤」, 심지어는 베히모스의 「캐슬 크래셔즈」같은 아케이드 테이스트가 짙은 빗뎀업 게임까지 수도없이 찾아낼 수 있다. 물론 이 게임들에게서는 ‘세계의 디테일한 반응’이나, ‘고전적 성장 시스템’ 등이 부재하다는 점을 들 수는 있겠지만, 그러한 소소한 어긋남은 RPG라는 장르의 내부에서도 얼마든지 발생해왔던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무엇이 이러한 게임을 ‘RPG’라고 부르는 것을 저지하는 것일까? 오히려 이러한 물음이, 사반세기가 지난 바로 지금에 와서 RPG라고 하는 것에 대한 본질적 질문과 맞닿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21세기 RPG의 사반세기 : 지금 우리는 무엇을 ‘롤플레이’하는가. 2018년 Routledge로부터 발매된 《롤플레잉 게임 스터디즈》에서는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 한 명의 플레이어가 컴퓨터 장치로 플레이한다. ● 플레이어는 가상의 게임 세계에서 하나 이상의 캐릭터의 행동을 생성하고 관리한다. ● 컴퓨터는 모든 비플레이어 캐릭터를 포함한 게임 규칙과 게임 세계의 내부 모델을 실행하고, 인터페이스를 통해 표현을 렌더링하며 플레이어의 입력에 따라 모델과 표현을 업데이트한다. ● 게임 세계는 플레이어의 상상력을 기반으로 시청각적 표현을 생성하는 계산 모델에 의해 구성된다. ● 게임 세계는 일반적으로 판타지, SF, 호러 또는 이들의 혼합물인 일종의 장르 픽션의 것을 따른다. ● 시도할 수 있는 캐릭터의 행동은 게임 인터페이스를 통해 제공되는 옵션으로 제한된다. ● 캐릭터의 능력과 행동의 결과는 일반적으로 정량적 확률 규칙 시스템 또는 플레이어의 반사 신경과 명령 입력 능력에 의해 결정된다. ● 게임은 보통 여러 세션에 걸쳐 진행된다. ● 게임 내 이벤트는 일반적으로 게임 세계의 광범위한 스크립트(플레이어가 아닌 캐릭터 행동 포함)를 통해 사전 계획된 플롯을 따라 명확한 종료 지점을 향해 안내되지만, 플레이어는 이러한 플롯이 끝나기 전/도중/후 언제든지 개방적으로 플레이할 수 있다. ● 전투 처리를 위한 광범위한 규칙이 있다. ● 플레이어 캐릭터는 성장 시스템을 통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향상된다. [18] 비교적 최근에 정리된 규정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규정이 앞서 제기한 RPG라는 장르 특성의 광범위화에 따른 해체 가능성을 돌파하도록 돕진 못한다. 요컨 상기의 모든 요건은 앞서 말했던 「마블스 스파이더맨」이나 그와 유사한 액션 어드벤처 전체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RPG라는 장르의 개념적 소멸을 앞두고 있는 것인가? 물론 이제와서 ‘21세기에는 모든 게임이 RPG다.’라는 성긴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러한 해체의 시대에도 여전히 우리가 ‘RPG’라고 하는 것을 어떠한 감각으로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 좁은 통로를 통과하고, 캐릭터를 강화하고, 적과 조우해 전투하는 일을 겪는다고 해도 「데드 스페이스」는 명백히 RPG가 아니지만 「세계수의 미궁」은 명백히 RPG로 인식된다. 단순히 턴 베이스의 전투냐 아니냐로 결정되는 감각도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위쳐」나 「다크 소울」을 RPG로 인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렇게 접근해보자. 지금의 RPG가 무엇인가를 규정 또는 재규정하려는 태도로부터 잠시 이탈하는 것이다. 그보다는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 21세기의 RPG는 무엇을 시도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극도로 분화되거나 통합되어버린 세계를 향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접근은 구분짓기categorizing 뿐이기 때문이다. 가장 먼 지점에 위치하는 게임들은 액션 어드벤처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태도로의 ‘액션 RPG’ 군집이다. 특히 근래에 도드라지는 것은 프롬 소프트웨어의 「다크 소울」을 위시한 일련의 느슨한 시리즈이다. 이 시리즈의 특징은 세계에 대한 극도로 희소한 규정이다. 요컨 소울 시리즈에서 플레이어에 대한 세계의 반응성이란 극도로 폭력적인 방향으로 제한되어 있다. 그렇지만 어쩐지 프롬 소프트웨어는 이 ‘세계’ 자체가 그러한 반응만을 가지는 곳이라고 규정하려는 뉘앙스가 있다. 쉽게 말해서 이 세계는 ‘말하지 않는다’. 설정의 이야기가 아니라 게임이 세계를 규정하는 특징이 그렇다. 오직 이 세계의 언어란 간접화법의 언어, 쉽게 말해 ‘플레이버 텍스트’를 통해 우회하는 언어로서 세계의 규정을 전달한다. 이 세계에 「발더스 게이트」의 논제가 작동하지 않는 것은 이 게임이 ARPG이기 때문 뿐만이 아니라, 이 세계가 좀처럼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소울 시리즈는 초기 CRPG의 순수함을 유지하려 한다. 말하자면 세계에 대한 반응을 오직 ‘읽어야만’ 하는 세계. 읽는 시간 이외에는 세계가 가져다주는 극도의 폭력에 대항하며, 서성일 수 있는 품을 넓혀야 하는 그런 곳 말이다. 프롬 소프트웨어의 프로듀서 미야자키 히데타카는 이런 인터뷰를 남기기도 했다. "감히 말하자면 「데몬즈 소울」에서는 소위 ‘게임 애호가’의 공통된 가치관, 그러니까 동양과 서양의 구분 이전에 존재하는 ‘게임스러움’ 또는 ‘흥미로운 부분’을 구성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저드리」와 같은 많은 고전 게임이 가지고있는 매우 단순하고 원시적인 게임의 속성 말입니다." [19] 즉 이 군집은 어떤 면에선 ‘행동의 가능성이 극히 제한되던’ 시대의, 디지털 게임의 원시적인 개념들만으로 D&D의 형태를 재현하려고 했던 바로 그 시기를 RPG라고 규정한다. 요컨 이것은 뒤틀린 형태의 에뮬레이션이다. 시대의 기술적 한계를 의도된 불편함과 폭력으로 규정하고는 그것을 최신의 기술로 되짚어 구현하려는 기이한 욕망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군집에는 RPG라는 개념에 대한 원초적인 애정이 존재한다. 이들은 RPG란 언어의 컨셉에 그 핵심이 있다는 사실에 의지한다. *「다크 소울」과 그에 연계된 게임들에 있어 에픽을 창조하는 것은 ‘말’이 아닌 ‘글’이다. 또 다른 먼 군집은 대한민국에서 ‘수집형 RPG’라고 불리우는 군집이다. 이들은 (약간은 강경한 태도를 가지자면) RPG라는 그 어떠한 기반도 가지지 못한 기이한 위치에 머무르고 있다. 이들은 스퀘어 에닉스의 「확산성 밀리언 아서」로부터 비롯된 CCG(Collective Card Game)의 연장선상에 머무르고 있는데, 그 수집의 대상이 ‘카드’가 아니라 수치화된 캐릭터라는 점에서 RPG라는 위치를 점한다. 조은하는 이러한 한국형 수집 RPG의 시초적 게임으로 핀콘의 「헬로 히어로」를 들며, 이 장르의 특징을 이렇게 정리한다. ‘국내 개발사들은 일본 CCG가 스마트폰 환경 하에 효율적으로 재구성한 RPG 시스템을 일부 수용하면서, 움직이지 않는 일본 CCG의 일러스트 카드를 움직이는 2D, 3D 캐릭터로 바꾸고, 과도하게 단순화된 형식적인 전투 시스템을 화려한 스킬과 시네마틱 연출을 통해 볼거리를 만드는 작업들을 시도했다.’ [20] 여기서의 핵심 문구은 아마도 ‘스마트폰 환경 하에 효율적으로 재구성한 RPG 시스템’ 일 것이다. 이 문장에서 발안하는 ‘RPG 시스템’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1990년대에 형성된, 양식 조건으로서의 RPG 구성요소, 즉 ‘수치화된 캐릭터와 그에 대한 성장 시스템’일 것이다. 요컨 모바일 중심의 이 ‘수집형 RPG’는 그러한 양식 조건이 바로 RPG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일군이다. 여기에는 세계에 대한 반응 추구, 생동성, 체감적인 ‘위대해지기’의 요소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요컨대 거대함의 두 컨셉(세계, 서사)이 모두 약화되어 작동하는 셈이다. 물론 수집형 RPG에도 텍스트를 기반으로 하는 서사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세계과의 면밀한 접촉과 극단적으로 유리된, 텍스트 어드벤처의 그것과 동등한 위상으로 작동한다. 쉽게 말해 수집형 RPG에서 ‘거대 세계의 컨셉’은 실종되어 있고, ‘거대 서사의 컨셉’은 장르 밖에서 작동한다. 오직 RPG라는 형태는 양식으로서 기능하는데 그친다. 물론 이러한 형태의 ARPG적 변용들, 「원신」이나 「젠레스 존 제로」등은 세계와의 생동을 그려내며 조금은 더 원형적인 RPG의 형태로 나아가는 면이 있다. 한편 MMORPG의 군집은 조금 복잡한 양태를 가진다. 라이브 서비스라는 명목 하에, MMORPG는 그 플레이어 요구의 개념이 크게 변화한다. 한 축은 MMORPG의 본질적인 욕망인 ‘게임 세계’의 소유로 뻗어나가는 군집이다. 21세기 초에 서비스를 시작해 여전히 유지되는 「EVE 온라인」을 필두로 경제 체계나 생활 콘텐츠를 채워나가는 경향의 게임들 (「아키에이지」, 「알비온 온라인」, 「검은 사막」, 「코난 엑자일」 등)이 한 축을 이루는 반면, 게임 세계와의 반응보다는 특정한 챕터 등의 절기를 중심으로 서사를 지속적으로 지원받는 서사 중심의 MMORPG(「파이널 판타지 14」, 「스타 워즈 : 구 공화국」, 「엘더스크롤 온라인」,「로스트 아크」 등)가 한 축을 이룬다. 하지만 초기 MMORPG가 추구했던 ‘세계 그 자체의 거대한 운용’을 극히 시도하는 경향은 줄어들고 있는데, 어떤 면에서는 게임이 다루는 세계가 ‘게임 세계’라는 범주를 추월하려는 경향을 억제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 쉽게 알 수 있듯 「EVE 온라인」 등이 장기간 발전시켜온 이 가상의 세계는 결코 친절한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의 MMORPG는 이러한 비대해진 게임 세계가 곧 완전한 가상의 세계가 될 수 없다는 한계 지점에 대한 토로와도 같다. MMORPG가 다루는 게임 세계가 TRPG가 다루는 게임 세계, ‘합의와 관리의 세계’를 추월해버렸을 때, 그 벽의 너머에서 접촉하는 것은 실제 세계의 영향력일 수 밖에 없다. MMORPG는 이미 CRPG의 순수성으로부터 너무 멀리 와버렸는지도 모른다. 이곳은 순수한 게임 세계라기보다는 현실 세계의 튀어나온 작은 혹, 현실세계의 영향이 장단기 반영되는 거울과도 같은 세계가 되어버렸다. 오히려 여러면에서, 서사의 컨셉을 다시 끌고온 MMORPG들이 다시금 ‘ 체험 가능한 게임 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 시켜주고 있다. 결국 MMORPG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세계라는 컨셉을 중심에 두고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결국 ‘RPG’라는 장르의 논리만으로는 수집할 수 없는 더 거대하고 독립적인 장르가 되어버렸으며, 더욱이 그렇게 나아가게 될 것만 같다. 또 다른 군집은 JRPG의 순수성을 추종하는 군집이다. JRPG의 테이스트가 일종의 보편 가능성이 된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다. 21세기에 들어와 정확히 10년이 지난 2010년에 《JRPG가 고쳐야 할 10가지 방식》 [21] 이라는 굴욕적인 칼럼이 게재되기도 했다. 불과 15년전까지만 해도 JRPG는 고전적 RPG의 순수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온, 어떠한 변용된 돌연변이와도 같았다. 물론 해당 칼럼이 모두에게 호의적으로 읽혔던 것은 아니나, 이러한 칼럼이 쓰여지고 유통된 배경에는 분명 서양 게이머 군집의 JRPG에 대한 기묘한 위화감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배제는 철저히 로컬리티의 결과물이다. 즉 ‘JRPG’라는 단어로부터 전달되는 지정학적 문제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칼럼이 정말로 JRPG가 ‘비교적 질이 낮은’ 장르였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이 시기까지 RPG란 정말로 동-서라는 세계로 그 형태가 분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15년 정도가 지난 지금, JRPG는 하나의 코드로서 지정학적 한계를 넘어선다. 흥미롭게도 근 10년 사이에 나온 JRPG의 코드를 가진 게임들에는 일본 외의 지역에서 만들어진 게임이 다수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크로스 코드」(독일), 「코스믹 스타 히로인」(미국), 「피어 & 헝거」(핀란드), 「겟 인 더 카, 루저!」(캐나다), 「인디비지블」(미국), 「잭 무브」(대만), 「씨 오브 스타즈」(캐나다), 「클레르 옵스퀴르 : 33 원정대」(프랑스) 등등. 이는 게임 제작자의 세대 분리를 드러내는 통계적 결과일 수도 있다. 요컨대 JRPG를 서구세계에 알린 「파이널 판타지 VII」가 등장한지 약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 코드를 자기 내부의 문화적 양식으로 인지하는 서구의 게임 제작자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런 세대론보다 중요한 건 아마도 ‘세계’의 컨셉을 줄이고 ‘서사’의 컨셉을 증가시키는 밸런스의 RPG가 하나의 보편 가능성이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 군집은 그러한 좁게 뻗은 길을 따르는 ‘위대해지기’ 역시 RPG라는 장르의 코어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드러낸다. 이제 JRPG는 초기 CRPG의 간단한 번안물 이상이다. JRPG 역시 고전적 RPG의 범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명백한 영역을 지닌 하위 장르로 영속할 것이다. *「씨 오브 스타즈」(2023)는 전적으로 90년대 JRPG의 감각을 되살린다.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는 「크로노 트리거」나 「슈퍼마리오 RPG」 등의 형식을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설명해야 하는 군집은, 그 무엇보다 본래의 순수성에 도달하려는 의지를 지닌 군집이다. 이 군집에는 다음과 같은 게임들을 넣을 수 있다. 뮤네이처의 「인격해체」, 안샤르 스튜디오의 「게임 덱」, 점프 오버 디 에이지의 「시티즌 슬리퍼」 그리고 ZA/UM의 「디스코 엘리시움」. 이러한 게임들은 전적으로 TRPG의 핵심인 ‘언어’를 믿는다. 세계는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 플레이어는 언어를 통해 세계와 소통하고, 플레이어의 선택은 세계의 구조로 틈입해 세계의 반응을 이끈다. 그 사이에 플레이어가 구체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규정된 난수의 규칙rule을 통해 결과를 도출해야 한다-그리고 게임은 전적으로 언어에 귀속되어야 하므로, 규칙의 사용까지도 플레이어에게 ‘언어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렇다. 이 군집은 RPG라는 장르가 탄생하던 시기에 목적하던 것을 다시금 획득하려 든다. 바로 TRPG를 순수한 이상으로 삼고 그것을 추종한다. 이들의 목적은 ‘TRPG적인’ 플레이를 비디오 게임의 과정으로 번역해 이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군집의 게임이 갑자기 근 몇년 사이에 도드라진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다. 물론 이전에도 아울캣 게임즈의 「패스파인더」 시리즈나 라리안 스튜디오의 「디비니티」 시리즈가 바이오웨어의 명맥을 이어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과 (그리고 최근에 발매된 「발더스 게이트 3」와) 현재의 군집이 다른 것은, 이들은 자신들의 이상적 어머니로서 D&D를 유일한 위치에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들어 「게임 덱」, 「시티즌 슬리퍼」, 「디스코 엘리시움」에는 정확한 의미에서의 ‘전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캐릭터를 구성하는 수치적 체계가 시각적으로 보이는 ‘물리 세계’에 어떻게 작용하느냐에는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서사의 중심 체계로서의 ‘언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더 관심이 있다. [22] 그런 면에서 이 구성의 배경에는 초기 게임 베이스의 TRPG가 아니라 2000년대 이후에 확산된 스토리 중심story-driven의 TRPG가 있다는 느낌을 준다. 마치 이들은 TRPG라는 테이블 게임계의 움직임과 조응하는 방식으로서의 비디오 게임을 지향하는 감각을 준다. 그리고 이 마지막 군집의 등장이 비교적 최근이라는 사실은, RPG라는 장르의 충분 조건이 보편화를 통해 해체되어가는 시대라는 사실과 충돌한다. 즉 모든 비디오 게임이 (비디오 게임 장르로서의) RPG가 되어가는 이 시대에, 이 게임들은 비디오 게임 바깥의 이상을 다시금 불러들여 RPG를 재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디스코 엘리시움」의 작가이자 디자이너인 로베르트 쿠르비츠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롤플레잉 게임을 완전히 혁신하고 싶습니다. 그 혁명을 실현할 때까지 게임을 미세조정 했습니다. 스토리, 선택, 결과의 활용을 혁신하는 것이죠. 스킬의 용례. “스킬"이라는 의미. 저는 실제 삶, 인간의 상상력, 슬픔, 암시의 힘, 춤 등 테이블탑 RPG와 현실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진정한 경험을 실제로 표현하는 평화로운 스킬이 있었으면 했습니다.’ [23] 그리고 이러한 이상의 달성은 섬세한 그래픽이나 구체적인 컷씬으로는 달성이 불가능한 것이 명백하다. 해결 가능성은 오직 언어, 언어 그리고 언어이다. 오직 언어만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 이 게임의 제작자들은 긴 시간을 우회해, 그리고 필요한 바로 이 때에 RPG라는 장르의 핵심으로 다시금 언어를 소환한다. 이때 이 언어의 필요성은 시대의 기술과 미묘한 접합점을 만든다. 이 시점에서 「언커버 더 스모킹건」을 떠올리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이상향이 거대 언어 모델Large Language Model과 접촉하며 끝없이 앞질러 나갈 것인가? 글쎄, 그러한 예측까지는 아직 미진한 일인 것 같다. *「시티즌 슬리퍼」(2022)는 매일의 주사위를 굴리고 해당 주사위를 어떠한 업무에 쓰느냐로 하루의 진행이 결정된다. 하지만 결국 그런 행위의 중심에는 최종적으로 출력될 텍스트의 변형이라는 기대가 있다. 결국 RPG의, 약 반세기에 걸친 장르의 역사를 돌자 장르의 가장 순수한 조건과 마주치게 된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RPG는 언어라는 이상점으로 끝없이 향할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조금은 부정하고 싶어진다. 아마도, 언어라는 이상향이 RPG를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할 것이다. 21세기의 사반세기를 돌아 마주한 것은 언어의 순수에 대한 갈망 하나만이 아니다. 70년대에 탄생하고, 90년대에 완숙하여, 2000년대에 끝없이 분화한 이 장르를 태초의 조건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RPG’라고 부르던 조건은 이제, 수많은 가능성들에 의해 취사적으로 선택되고 조립되고 분화되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제 비디오 게임의 세계에 순수한 RPG라는 것은 규정 불가능하다. 우리가 감각하는 모든 가능성, 타 장르와의 융합, 혁신은 다 각기 다른 분류로서의 RPG로 기능할 것이다. 필요에 따라 몇 가지 군집들을 들긴 했지만, 이 내부에서 전부 다루지 못한 다른 가능성들(요컨 로그라이크 군집, 레벨링을 동원하는 메트로바니아 군집 등)도 존재한다. 어쩌면 이제 RPG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사유가 전부 통괄하기에는 지나치게 거대한 장르가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21세기의 사반세기를 지나오는 RPG에 대한 가장 유효한 문장을 동원하는 것이 좋을듯 하다. 이 지난한 글을 호세 P. 제이갈과 세바스티안 디터딩이 《롤플레잉 게임의 규정》의 전반부를 열기 위해 사용한 문장으로 마무리 지으려 한다. “사실 롤플레잉 게임(RPG)은 어쩌면 가장 논쟁적인 게임 현상, 즉 예외, 특이점, 게임 같지 않은 게임일지도 모릅니다.” [24] [25] [1] RPG는 한국에서는 보통 비디오 게임의 장르로 일컬어지지만, 그 발현지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는 먼저 등장한 테이블탑 또는 라이브 액션 게임을 부르는 용어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특정한 수식없이 RPG라는 단어를 사용할 경우 무엇을 지칭하는지에 대한 혼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본 글은 비디오 게임의 장르를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두고 있기 때문에 RPG라는 단어는 비디오 게임의 그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규정하며, 맥락에 따라 CRPG라는 단어를 병용한다. 테이블탑 게임은 TRPG로 구분하여 표기한다. [2] Programmed Logic for Automatic Teaching Operations의 약자. 1960년대 초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의 도널드 비처가 중심이 되어 개발한 시스템으로 PLATO IV라는 독립적인 단말을 통해 구동되었다. [3] “So, most CRPGs spread a thin veneer of story and world-building atop game engines that were really all about combat and logistics; they became “roll-playing” rather than “role-playing” games.” (The CRPG Renaissance Part 1. https://www.filfre.net/2025/01/the-crpg-renaissance-part-1-fallout/ ) [4] 이를테면 캡콤의 플랫포밍 액션 게임인 「마계촌」에서 주인공 아서는 최종적으로 마왕 아스타로스라는 거대한 적을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그 단계에서 아서의 변화는 게임 플레이 와중 획득한 아이템에 기반한 것들이며, 이 가역적 변화는 언제든지 아서를 최초의 모습으로 되돌릴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RPG에서의 성장은 이와는 달리 기본적으로 불가역성을 전제한 것이다. [5] 여기서 사용하는 에픽을 ‘서사시’로 번역하지 않은 이유는 ‘시’라는 형식보다 그것이 담지하는 서사적 특질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요컨 《장르의 해부Anatomy of Genre》에서 존 트루비John Truby는 에픽을 ‘한 인간 또는 집단에 의해 국가 또는 세계가 크게 변화하는 이야기’로 규정한다. [6] 그들이 원본으로 삼는 D&D 역시 이러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초기 D&D는 캐릭터의 진행에 따라 Basic, Expert, Companion, Master, Immortal라는 각기 다른 책을 사용하도록 유도했다. 최종적으로 위대해진 캐릭터는 Immortal 단계에 이르러 불멸자의 시험을 통과해 필멸자를 초월할 수 있게 된다. [7] 호리이 유지는 본래 만화의 스토리 작가를 지향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원래 저는 코이케 카즈오 극화 서당에 다니다가 만화가 지망생을 거쳐 라이터가 된 케이스다 보니 극화 원작을 하자는 마음도 있었고요.” (PLANETS Vol. 7, 「호리이 유지 인터뷰 : 일본 게임의 진화가 향하는 곳」, 2010) [8] ‘The 1990s is generally viewed by academics and fans as a golden age for CRPGs due to the explosion of games that were developed and the quality of games released’(《Role-Playing Game Studies》, 2018, Routedge, Edited by Sebastian Deterding and José Zagal) [9] 《현질의 탄생》, 이경혁, 2022, 이상북스 [10] “だんだん強くなる、というのが面白いなと思ったんですよ。AVGって謎に詰まるとやることがなくなっちゃうけど、RPGならとりあえずレベルさえ上げれば楽しめるので、謎解きつつレベル上げつつでずっとやっていけば、いっぱい遊べるし、。”(PLANETS Vol. 7, 「호리이 유지 인터뷰 : 일본 게임의 진화가 향하는 곳」, 2010) [11] 루이스 자네티는 영화 장르의 변화 사이클을 초창기, 고전기, 수정기, 패러디기로 나눈다.자네티의 장르 사이클은 기본적으로 영화 장르의 이론에 적용하는 개념이지만, 시장을 형성하는 매체 전반의 장르 변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충분히 도움이 되기에 여기에 적용한다. [12] 《영화의 이해》, 루이스 자네티, 2017, K-Books [13] 이 시리즈의 3편은 국내에 동서게임채널을 통해 「영웅의 길 3」라는 제목으로 발매되었다. [14] ‘Like the other Quest for Glory games, QG3 is a hybrid of Computer Role-Playing Game (CRPG) and graphic adventure. Your character's attributes and abilities are defeined by a list of statistics. SUccess in a task depends on skill levels, and practive improves those skill.’ (《PC Mag》 Jan. 1993) [15] ‘These games rely on quantitative representations of the character, with character development following the quantitative improvement in skills and abilities typical of pen-and-paper games.’ (《Many Faces of Role-Playing Game》, 2008, International Journal of Role-playing Games - Issue 1, Michael Hitchens and Anders Drachen) [16] ‘one feature that is commonly considered a defining one is that all RPGs have playercharacters with quantifiable features (digital equivalents of the character sheets used in tabletop style RPGs), and character progression is used as a central measurement of success. Traditional RPG rule systems often include “experience levels,” meaning that successful advancement in games translates into “experience points” through which a PC can “level up” to new powers and skills.’ (《Encyclopedia of Video-Game》, 2012, Greenwood, Edited by Mark J. P. Wolf) [17] 구글 그룹에서 다음과 같은 유즈넷 대화를 찾을 수 있다. 해당 대화는 1997년 2월에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Diablo : an CRPG, what a joke!」 ( https://groups.google.com/g/comp.sys.ibm.pc.games.rpg/c/7wJEyHTsdkE/m/EnpYnKMTBnUJ?utm_source=chatgpt.com&pli=1 ) [18] 《Role-Playing Game Studies》, 2018, Routedge, Edited by Sebastian Deterding and José Zagal [19] ‘If you dare to say, in "demon’s soul", I think that there is something that constructs game-like or interesting parts before the east-west of Ocean, with the common values of so-called "game lovers" . "Wizardry" It is a very simple and primitive game property that many of the classic games such as had.’ (「Interview with Mr. Hidetaka Miyazaki who gave birth to a world-class hit "Dark Soul" from inexperienced game production」, Gigazine, 2012) [20] 《한국형 수집 RPG 장르 형성 연구》, 조은하, 2018 [21] 《Top 10 Ways to Fix JRPGs》 ( https://www.ign.com/articles/2010/01/12/top-10-ways-to-fix-jrpgs ) [22] 「인격해체」만은 예외적으로 전투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 게임이 자신의 부모로 삼고 있는 것은 명백히 카오지움의 《크툴루의 부름》이다. [23] ‘I want to completely revolutionise role-playing games. We need to fine-tune our game until we make that revolution possible. To revolutionise the use of stories, choices, and consequences. The use of skills. What “skill” means. I want there to be peaceful skills that actually represent real life, human imagination, sadness, the power of suggestion, dance... you know, that whole range of authentic experiences you get from tabletop RPGs and from reality.’ (《Choose your own misadventure Part 2》, https://steamcommunity.com/games/632470/announcements/detail/1615021499154801682 ) [24] ‘In fact, role-playing games (RPGs) are maybe the most contentious game phenomenon: the exception, the outlier, the not-quite-a-game game.’ (《Role-Playing Game Studies》, 2018, Routedge, Edited by Sebastian Deterding and José Zagal) [25] 물론 해당 문장은 본문에서 테이블탑 RPG, 라이브 액션 RPG를 통괄하는 RPG라는 범주 전체를 포괄하는 문장으로 쓰였다. 하지만 지나치게 분화해버린 비디오 게임 RPG에게도 충분히 통용되는 의미이리라. Tags: 롤플레잉, 장르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평론가) 이선인 만화와 게임, 영화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합니다. MMORPG를 제외한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클리어가 라이프 워크입니다. 스팀덱을 주로 사용합니다.
- 게임 시장에서 비디오 게임 콘솔과 범용 PC의 40년 경쟁이 낳은 변화들
범용 컴퓨터가 본격적으로 등장해 ‘PC 게이밍’이 성립되기 전 게임은 그 자신만을 구동하는 독자적인 콘솔의 영역에서 오롯이 유희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전용 기기가 아니라 범용 기기에서 실행되는 PC 게임의 세계는 콘솔의 옆에서 어떻게 자라났고 이 둘의 접촉은 어떤 변화를 낳았을까? < Back 게임 시장에서 비디오 게임 콘솔과 범용 PC의 40년 경쟁이 낳은 변화들 24 GG Vol. 25. 6. 10. 우리는 그저 게임으로 부르는 걸 영어권에선 ‘비디오 게임 (video game)’으로 부르는 이유가 있다. 게임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보드게임이나 스포츠 등 전반에서 작동하는 일련의 규칙 체계를 이르는 개념이라는 사실도 있지만 현대에 우리가 흔히 게임으로 칭하는 디지털 매체상의 놀이는 원래 TV에 연결해서 플레이하는 물건이으로 보편화되었었기 때문이다. 즉, 범용 컴퓨터가 본격적으로 등장해 ‘PC 게이밍’이 성립되기 전 게임은 그 자신만을 구동하는 독자적인 콘솔의 영역에서 오롯이 유희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전용 기기가 아니라 범용 기기에서 실행되는 PC 게임의 세계는 콘솔의 옆에서 어떻게 자라났고 이 둘의 접촉은 어떤 변화를 낳았을까? 비디오 게임 콘솔과 범용 PC의 혈투 역사 * 코모도어 64와 패미컴 1972년 최초의 가정용 비디오 게임 콘솔로 발매된 ‘마그나복스 오디세이’를 시작으로 1974년 그 유명한 ‘아타리’의 <퐁> 출시까지 콘솔 시장의 태동이 있었다. 그러나 아타리가 주도하던 시장은 게임 소프트웨어에 대한 관리책이 마련되어 있지 않던 터에 ‘아타리 쇼크’라는 대대적 붕괴를 맞이하게 된다 [1] . 이때부터 비디오 게임 콘솔의 대적자로 범용 PC가 슬슬 부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80년대에마저도 아직 PC는 비디오 게임에 제대로 상대가 되지는 못하는데, 이는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는 가격 때문이었다. 단적으로 1985년 북미에 출시된 ‘닌텐도’의 ‘패미컴 (NES)’은 출시가가 179달러였지만 [2] 같은 해 출시된 ‘코모도어’의 ‘아미가 1000’은 1,295달러 [3] 였고 가격을 대폭 낮춘 ‘아미가 500’조차 699달러에 육박했다 [4] . 패미컴과의 실질적인 경쟁은 1982년도에 출시된 ‘코모도어 64’와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코모도어 64는 아타리 쇼크 당시 콘솔 시장이 붕괴하고 바로 그 폐허 위에 남은 PC의 승자였다. 그러나 아미가 같은 경우엔 가격에 걸맞게 패미컴에 비해 비교도 안 되는 압도적 성능을 지니고 있었지만 코모도어 64는 높은 가격에 비해 성능이 특출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패미컴은 최대 54개의 색상 중에 한번에 25개까지 표시할 수 있었지만 코모도어 64는 16개의 색상 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5] . CPU 또한 코모도어 64가 기용했던 ‘MOS Technology 6510’는 최대 1.022 MHz까지 출력 가능했지만 [6] 패미컴의 ‘Ricoh 2A03’은 1.79 MHz까지 성능을 내는 것이 가능했다 [7] . 코모도어 64가 앞서는 부문은 패미컴의 2KB 램보다 뛰어난 64KB 램, 그리고 CPU에 음향 처리 장치가 내장되어 있었던 패미컴과 달리 별개의 음향 칩을 외장으로 달고 나왔다는 점뿐이었다 [8] . 차례로 ‘아타리 8비트 컴퓨터’ (1979, 8비트, 550달러) [9] , ‘IBM PC’ (1981, 16비트, 1,565달러) [10] , 그리고 코모도어 64는 초기 고유한 PC 게임 시장을 구축하긴 했어도 그중 가장 많이 팔린 코모도어 64의 1천2백만 대 판매수 [11] 는 패미컴의 6천만 대 판매 부수를 따라잡기엔 턱없었다 [12] . 즉, 80년대 중반까지 비디오 게임 콘솔이 8비트 성능에 머물러 있던 데에 반해 PC는 16비트라는 우월한 성능을 자랑했음에도 정작 1987년의 16비트 세대 게임 시장을 시작하는 주축이 되지조차 못했다. ‘비트 전쟁’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16비트 세대의 콘솔 시장은 ‘PC 엔진 (TurboGrafx-16)’이 8비트 프로세서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사실상’ 16비트만큼의 성능을 내는 것으로 홍보한 데서 시작한다 [13] . 다시 말해 게임을 실행할 수 있는 기기는 콘솔과 PC를 통틀어 이미 1981년도에 8비트와 16비트가 혼재했지만 ‘게임 콘솔’로서 16비트의 경쟁이 시작된 건 1987년도이다. 이는 PC가 아직 콘솔의 아성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PC 엔진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사실 정말 게임 콘솔 기기 자체가 16비트인지 8비트인지도 중요하지 않을 만큼 성능이 반드시 콘솔 시장 경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만도 않는다는 바를 시사한다. 콘솔 시장에서 중요한 건 가격, 그리고 해당 기기에서 구동할 수 있는 게임 소프트웨어들의 목록 등이었고 성능은 그저 홍보 전략 요소에 지나지 않았다. 어쨌든 이때까지는 거의 아타리, 닌텐도가 콘솔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다면 이 1987년부터 본격적으로 ‘콘솔 전쟁’이라 할 만한 시장 경쟁이 시작된다. 이때의 경쟁은 PC 엔진을 만든 ‘NEC’, ‘메가 드라이브’를 만든 ‘세가’, 그리고 ‘슈퍼 패미컴’을 만든 닌텐도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각각 ‘게임보이’, ‘게임 기어’, ‘PC 엔진 GT’를 출시해 휴대용 게임기 시장이 처음으로 열리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이 삼자대전의 구도는 어째선지 2025년 현재까지도 그 참가자들은 바뀌어도 대전자의 수가 꾸준하게 유지된다. 닌텐도는 그대로 있고 NEC와 세가의 자리에 ‘소니’와 ‘마이크로소프트’가 대신 입장하면 지금의 콘솔 전쟁 그림이 그려지게 되는 것이다. 기존의 2D 게임 위주였던 콘솔 업계가 3D로 방향을 옮기는 계기가 되기도 했던 1994년도 32비트 전쟁의 시기에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을 들고 입장하며 NEC를 밀어낸다. 닌텐도는 ‘닌텐도 64’를 발매했고 이름처럼 64비트 CPU를 탑재해 플레이스테이션보다 우월한 성능을 자랑했으며 가격도 더 저렴했지만 시장 경쟁에서는 플레이스테이션에게 패배한다. 플레이스테이션에 비해 복잡한 게임 개발 환경과 외부 개발사들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았던 턱이다 [14] . 플레이스테이션은 4,000여 개의 게임을 지원했으나 [15] 닌텐도 64는 총 388개의 게임밖에 출시하지 않았다 [16] . 이 모든 싸움에서 제일 뒤로 밀려난 ‘세가 새턴’조차 1,000개가 넘는 게임이 출시됐다 (그럼에도 세가는 셋 중 가격이 가장 비쌌다) [17] . 이와 같은 ‘독점작’의 문제는 2017년에도 ‘닌텐도 스위치’ 독점작이었던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가, 그리고 2024년에도 ‘플레이스테이션 5’ 독점작이었던 <아스트로봇>이 올해의 게임상을 타는 등, 지금까지 현재진행형으로 살아있다. 그런데 플레이 가능한 게임의 개수로만 따지면 코모도어 64가 패미컴보다 훨씬 많았다. 코모도어 64의 게임들을 기록하는 데이터베이스 ‘LEMON 64’는 현재까지 8360여개의 작품들을 소장하는 걸로 기록하고 있지만 [18] 패미컴은 1,300여 개의 게임밖에 출시하지 않았다 [19] . 여기서는 가격도 시장 구성 요소로 작용했지만 무엇보다 기기 작동의 편의성이 중요한 차별점을 만들었다. PC에서 게임을 실행하기 위해선 코모도어 64의 ‘베이직 (BASIC)’, 그리고 그 이후 PC 게임을 선두했던 ‘DOS’ 등 각 운영 체제를 위한 명령어를 구사할 수 있었어야 했으나 콘솔은 그저 카트리지나 CD를 꽂고 전원을 켜기만 하면 그 외에 별다른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점이 접근성의 측면에서 큰 경쟁성을 가져갔다. 그러므로 본격적인 UI 개발을 통해 PC의 접근성 문제가 일반 소비자층에게 해결되기 시작한 ‘윈도우즈’ 운영 체제의 출시가 PC 게임에게 결정적인 경쟁력을 가져다준 계기라고 볼 수 있다. 코모도어 64까지는 가정용 PC의 세대가 운영 체제인 베이직보다 기기명 자체인 코모도어로 더 흔히 불렸다면 DOS와 윈도우즈부터는 본격적으로 기기보다 운영 체제로 PC의 세대를 지칭하는 현상으로 옮겨간다. 이는 PC가 점차 모듈화되어가며 하나의 회사에서 본체부터 마우스까지 하나하나 완성된 형태로 찍어내는 이전의 방식으로부터 ‘인텔’, ‘HP’, ‘델’ 등이 IBM과 호환되는 PC 체제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하며 하나의 제조사가 지배권을 갖기보다는 여러 제조사들이 공유하는 운영 체제가 소비자들에게는 더 공통적으로 분포되었기 때문이다 [20] . 특히 VGA, 사운드 블라스터, PCI 등, 품질과 성능을 보장하는 ‘표준’들이 차례로 소개되며 현대적 PC의 발판이 점차 잡히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렇게 지배적 운영 체제가 명령어 기반의 DOS로부터 사용자 친화적 UI 기반의 윈도우즈로 옮겨가며 게임 시장에서의 PC가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기존에 PC에서 개발된 장르의 영역은 콘솔에 비해 ‘액션’보다는 ‘어드벤처’에 치중되었다. 콘솔이 기용하는 조이스틱과 PC가 사용하는 마우스와 키보드의 차이가 장르 발전 방향을 다르게 만들어 준 것이다. <1942> (1984)와 <더블 드래곤> (1987)으로 각각 대표되는 종스크롤과 횡스크롤 액션 장르는 아예 오락실 게임으로 먼저 출시된 후 콘솔로 이식되었고,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1985)의 플랫포머 장르조차 근본적으로 <동키콩> (1981)에서 시작된 오락실 양식의 변주였다. <스타 폭스> (1993)의 레일 슈터 장르도 당연히 오락실 게임 <스페이스 해리어> (1985)에서 이어졌다. 스포츠 게임은 우선 <퐁>부터 본래 오락실 게임이었으니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즉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콘솔’은 ‘아케이드 콘솔’에서 옮겨 온 ‘홈 콘솔’을 줄여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콘솔계에서 <드래곤 퀘스트> (1986)와 <파이널 판타지> (1987)로 등장한 RPG 게임들은 PC에서 시작된 <울티마> (1981)와 <위저드리> (1981)의 게임성을 전수한 것이다. 다시 말해 콘솔은 오락실에서 계승되는 조이스틱을 통한 ‘액션’ 위주의 게임성을 담당했고, PC는 마우스와 키보드를 이용한 탐험, ‘어드벤처’의 게임성을 발전시킨 것이다. 특히 키보드로 텍스트를 입력할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 1976년 최초의 텍스트 기반 게임 <어드벤처>가 탄생했고 [21] , 여기에 그래픽이 입혀져 1980년 <킹스 퀘스트> 시리즈가 시작된다 [22] . 그리고 스틱과 버튼 조작에 비해 커서 이동 및 클릭이 용이하다는 점을 이용해 <원숭이 섬의 비밀> (1990)과 <미스트> (1993)로 대표되는 포인트 앤 클릭 장르의 세계도 개시된다. 마찬가지의 이점이 발전시킨 또 하나의 장르가 전략 및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1980년 ‘애플 II’용으로 출시된 <컴퓨터 비스마르크>의 장르는 1983년 <리치 포 더 스타즈>와 <노부나가의 야망>에서 확산하고 발전한다. 여기서 1989년 <심시티>와 1991년 <문명>의 성공으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장르 지형이 펼쳐진다. 이렇게 기기 특성에 따라 콘솔과 구별되는 장르 발달 기조를 보이다 본격적으로 액션의 혁신마저 PC에서 이뤄진 계기가 바로 DOS 시대다. <울티마 언더월드> (1992)와 <시스템 쇼크> (1994)로 이머시브 심이, <어둠 속에 나 홀로> (1992)로 서바이벌 호러가, 그리고 <울펜슈타인 3D> (1992)와 <둠> (1993)으로 FPS가 시작된 것이다. * 펜티엄 2 PC와 DirectX 개발 도구 배포 CD 그리고 1995년 ‘윈도우즈 95’의 출시로 PC의 보급 지형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1997년 플레이스테이션은 북미에서 6백만 대의 판매 부수를 기록했지만 [23] 이미 3천7백만 가구가 PC를 보유하고 있었다 [24] . 그러나 아직도 플레이스테이션에 맞먹는 PC를 장만하려면 비교도 안 되는 천문학적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당시 가장 보편적이었으며 플레이스테이션의 ‘R3000’ CPU와 맞먹는 성능을 지닌 인텔 486 CPU는 출시 당시 도매가로만 1,056달러에 육박했다. 플레이스테이션이 출시된 1994년 486의 도매가는 272달러까지 떨어졌지만 플레이스테이션 콘솔 전체가 299달러였던 것과 달리 [25] 486 CPU가 내장된 PC 완제품을 사기 위해선 1,000달러를 지불해야 했다 (486 출시 당시의 PC 완제품 가격을 상상해 보라) [26] . 그러므로 PC의 보급률이 급등한 이후로도 아직은 성능 대비 가격의 문제로 게임 시장에선 콘솔이 여전히 강세였다. 1997년, 233MHz의 출력을 낼 수 있는 ‘Cyrix 6x86’ CPU를 탑재한 ‘저가형’ 컴퓨터는 699달러에 팔렸다 [27] . 아무리 클럭 수가 성능의 직선적 지표는 아닐지라도 1988년 개발된 CPU를 탑재하고 있는 플레이스테이션보다 전반적인 성능이 좋았으리라는 점에 의문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해진 기기 사양에 알맞게 완벽하게 최적화된 전용 게임 소프트웨어만을 구동하는 콘솔 게임에 비해 플레이 경험 자체의 향상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디아블로> (1997)나 <스타크래프트> (1998)와 같은 2D 게임들이 본격적으로 PC 게임의 부흥을 가져오기 시작하는 동안 콘솔에서는 벌써 <파이널 판타지 7>, <골든아이 007>, <크래쉬 밴디쿳> 등의 3D 게임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일례로 <파이널 판타지 7> 같은 경우엔 1998년 PC로 이식이 이루어졌는데 해당 게임을 구동하기 위한 최소 사양은 ‘펜티엄 133’에 3D 가속 기능이 있는 외장 그래픽 카드를 포함한 기기였고 1998년에 저 사양을 간신히 만족시키는 PC가 (모니터 없이) 999달러에 팔리고 있었다 (제대로 ‘3D 게이밍 컴퓨터’라는 이름이 붙은 제품은 1699달러에 팔리고 있었으며 고사양 제품은 3599달러까지 육박했다 [28] .) 같은 해 출시되어 이후의 게임계를 완전히 뒤바꿔 놓을 <하프라이프>도 비슷한 최소 사양을 요구했다. 그러나 <파이널 판타지 7>은 1997년 출시 직후 한 달 만에 2백6십만 부를 팔았고 [29] <하프라이프>는 그 획기적인 게임성에도 한 달 동안 2십1만 부밖에 팔지 못했다 [30] . (1998년 가장 많이 팔린 PC 게임이었던 <스타크래프트>는 1년에 걸쳐 전세계적으로 1백5십만 부를 팔았다 [31] .) 그럼에도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우즈 95를 출시하고 얼마 안 있어 ‘DirectX’ 게임 소프트웨어 개발 키트를 배포한 이후 PC 게임 개발에 붙은 불은 점점 더 커져만 갈 뿐이었다. 2000년대로 들어오며 콘솔 경쟁에서도 세가가 빠지고 마이크로소프트가 ‘엑스박스’를 들고 오며 현대의 구도가 완성된다. 이번 싸움에서는 닌텐도의 ‘게임큐브’와 엑스박스 모두를 제치고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2’가 압도적으로 승리하고, 그 다음엔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3’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박스 360’을 제치고 닌텐도의 ‘위’가 올라선다. 직후 ‘플레이스테이션 4’는 다시 완벽한 승리를 되찾았고 닌텐도 스위치 또한 그 다음 선두로 복귀한다. 즉, 2000년대에 벌어진 모든 콘솔 전쟁에서 성능은 또 다시 역시나 결정적 인자로 작용하지 않았고 오히려 성능이 가장 뛰어났던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박스 제품군이 단 한 번도 승자의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문제는 마이크로소프트의 경우 콘솔의 영역에서만 싸움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PC의 영역에서도 동시적으로 덤빈다는 것이었다. 콘솔과 PC 사이 성능 및 가격 대비의 격차는 1985년도에 비해서 아주 근소하게 줄었을 뿐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남아 있지만 PC의 접근성은 어느 순간 선택이 아니라 생활에 필수 차원까지 넘어가 버렸다. 가정마다 게임을 위해 기기를 마련하지는 않아도 인터넷이나 문서 작성 등을 위해 PC를 구입하는 것은 기본적 생활 수단의 차원이 되었고 이를 위해 국가에서는 지원까지 하기 시작했다 [32] . 따라서 차세대 게임과 별개로 저사양의 고전 게임이나 인디 게임, 혹은 웹 기반 (플래시) 게임 등은 디지털 게임이라는 개념 자체의 최종적 보편화를 가져왔다. 목돈을 깨 콘솔을 사지 않아도 하다못해 도서관 PC를 이용해서라도 게임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기술 경제 상승 지향에 따른 문화적 족쇄 * Voodoo 그래픽 카드 코모도어 64부터 DOS까지 가정용 PC에서 게임은 항상 해당 기기에서 ‘돌아가는’ 소프트웨어였지 하드웨어가 해당 소프트웨어를 구동하기 위해 상향되는 방식으로 개발되지는 않았다. 가정용 PC는 기본적으로 너른 활용을 지향했으므로 움직이는 궤적 자체가 달랐다고 할 수 있지만 콘솔 시장도 당대의 지배적인 콘솔의 성능 한계에 따라 소프트웨어의 역량이 제한받았다. 가정 보급용 하드웨어가 감당하지 못하는 게임 소프트웨어가 개발되고 그에 맞춰 ‘돌릴 수 있는’ 하드웨어가 개발되는 건 비교적 최근에서야 일어나기 시작한 현상인 것이다. PC의 최상위 그래픽카드를 염두에 두고 개발된 게임이 오히려 콘솔 버전으로는 그래픽 사양을 낮춰서 발매한다든지, 콘솔로 발매된 게임이 PC로 이식되며 텍스처 해상도의 한계를 해제한 상태로 발매한다든지 하는 일은 오늘날 비일비재하다. 그 전에는 비호환-완성형 이었던 범용 PC가 모듈형-조립식 으로 옮겨감에 따라 구매자의 요구에 맞춰 다양한 사양 조건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이렇게 게임도 정해진 특정 기기에 따른 고정 옵션으로 이식되는 형식이었던 과거와 달리 사용자 개개인 PC의 조건에 맞게 임의로 조정할 수 있는 범용 그래픽 설정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DOS 게임이었던 <울티마 언더월드>에서 벌써 현대 그래픽 설정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디테일 설정’이 메뉴에 존재한다. 그리고 <크라이시스> (2007)는 이미 동시기 콘솔 사양에서 지원하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그래픽을 자랑해 게임을 기준으로 한 PC 벤치마킹 흐름의 시작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과거에는 그래픽 설정 따위가 없는 상태로 게임이 출고되었고 해당 기본 상태가 곧 최고 설정으로 책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각자 사양이 전부 다른 PC 상에서 게임을 실행하니 사용자의 플레이 환경에 맞출 수 있는 설정을 제공하기 시작했는데, 역으로 또 사용자들은 자신의 PC 환경을 게임의 최고 사양에 맞추고자 움직이게 된 것이다. 단순히 실행이 된다를 넘어서 그래픽 최고 옵션으로 최소 60fps는 보장이 되어야 게임이 제대로 ‘돌아간다’라고 할 수 있고 플레이 경험을 충만하게 만끽한다 할 수 있게 되었다. 1996년 최초로 소비자가 구매 가능한 그래픽 카드 “Voodoo”가 출시된 이후 29년 동안 지금까지 가장 최첨단의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 더 나은 부품을 갖고자 하는 욕망은 게이머들 사이에서 커지기만 했고, 게임도 이에 맞춰 차세대 기술을 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사양의 한계를 실험하는 피드백 고리가 형성되고 말았다 [33] . 특히 소위 ‘AAA 게임’이라고 불리는 대기업 개발 게임들은 게임성의 혁신을 도모하기보단 오로지 게임 구동 기기에 얼마나 부하를 줄 수 있는지만을 대결하는 듯한지가 오래다. 마치 비트 전쟁이 카드 전쟁으로 대체된 것처럼. 무엇보다 게임의 본질에 정말로 성능이 중요하지 않은 점마저 동일하게 옮겨온 것처럼 보인다. 결국 기업이 주도하는 ‘혁신’은 어디까지나 문화로서의 게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시장’의 경쟁에 관한 것일 뿐이다. 단순 그래픽 카드에서만 성능 박탈감의 문제가 생겨난 것도 아니다. 2003년 ‘스팀’이 개척한 온라인 게임 판매 서비스를 기점으로 게임 개발자들은 이전까지 CD나 카트리지로 배포하며 용량의 한계와 싸워야 했던 오랜 어려움의 역사와 드디어 이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프트웨어의 유통은 물리적 데이터 저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해도 플레이어들의 하드 드라이브 용량이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나아가 저장소의 문제는 용량뿐 아니라 파일 읽기 속도가 게임 로딩 성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미 플레이스테이션 3 시절부터 CD 읽기 속도의 한계로 대용량에 메모리를 많이 사용하는 게임의 로딩 속도가 PC에 비해 현저하게 차이 나기 시작했다. 플레이스테이션 4로 와서는 콘솔도 하드 드라이브를 장착했고 스팀이 개척해 놓은 교역로를 따라 소프트웨어의 디지털 유통 추세를 따랐다. 그러나 이제는 HDD가 SDD에 비해 읽기 속도가 현저히 뒤처지기 시작했고 또 다시 플레이스테이션 4는 PC에 비해 로딩 속도의 문제에 부딪혀야 했으며 플레이스테이션 5에 와서는 소니도 콘솔에 SSD를 장착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콘솔 개발 기업들이 이 모든 변화를 따라가는 동안 PC를 보유한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로 따라잡아야 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게임의 물리적 복사본의 소유권을 넘기는 기존의 유통 방식에서 디지털 판매로 넘어가며 플레이어들이 더 이상 금액을 지불해도 게임을 진정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영구 대여’하는 것일 뿐이라는 문제도 현재진행형인 문제다. 당신 계정 속 디지털 라이브러리에 ‘저장’된 게임은 개발사나 유통사 등이 언제든지 맘만 먹으면 임의로 ‘서비스 중지’시켜 버릴 수 있다. 그래픽의 발전뿐 아니라 용량, 연산 속도까지 기술과 맞물린 게임의 경험은 플레이어를 ‘소비자’로 만들고 자본에 종속시켰다. 다시 말해 음악, 문학, 미술, 영화, 연극 등 해당 문화를 향유하는 데에 매체의 기술 변화가 치명적인 속도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우리가 이미 오래전에 이 예술 형식들을 위한 정보 보존-전달 기술 성장의 특이점을 지나온 것이다. 그러나 게임은 가장 최첨단의 기술과 너무 밀접하게 뒤얽힌 나머지 현재 독자가 작품과 접촉하는 데에 너무나 많은 물리적 · 경제적 제약을 너무나 빠른 속도로 뒤처지지 않고 쉼 없이 뛰어넘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게임은 우리 세대의 구텐베르크 성서이다. 문제는 우리 세대가 후기자본주의 · 신자유주의 시대라는 것이고 지금의 채륜들은 양피지에서 파피루스로, 파피루스에서 종이로 바뀐 천 년의 흐름을 10년 안에 집약시키고 있고 또 구텐베르크들은 상승 지향에 미쳐 금속 활자의 크기를 어디까지 줄여 같은 종이 안에 얼마나 많은 글씨를 욱여넣을 수 있는지, 종이를 3D 활자 기록 장치로 만들 순 없을지 고민하고 있다. 독자들은 점점 더 크기가 작아지고 기록 방식이 복잡해지는 글씨에 맞춰 글 하나를 읽기 위해 광학 장치를 계속 바꿔 가며 장만해야 한다. 그러나 글자 수가 많다고 좋은 글이 되는 것은 아니다. 확장된 접근성에 따른 인디 게임의 폭발 * ZX 스펙트럼에서 구동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범용 PC의 게임계 장악이 반드시 시장 중심 개발-소비 피드백 고리라는 문화적 폐해만 가져다 준 것은 아니다. IBM-코모도어 시대부터 이미 PC의 보급은 게임 개발 자체에 대한 접근성을 한껏 넓혀 주었고, 따라서 인디 게임의 효시도 이때 이미 쏘아 올려졌었다. 1982년 미국에서 버니 드 코븐과 재런 러니어는 “최초의 예술 게임”으로 일컬어지는 <에일리언 가든>을 아타리 8비트 컴퓨터용으로 만들었다 [34] . 영국에서 1983년부터 제프 민터는 코모도어 64용으로 <돌연변이 낙타의 공격> [35] , <호버 보버> 등을 독립 개발했고 [36] , 매튜 스미스는 프리랜서 개발자로 일하며 ‘ZX 스펙트럼’ 개인용 컴퓨터를 이용해 <스틱스>, <매닉 마이너>, <젯 셋 윌리> 등을 만들었다 [37] . 1984년 멜 크라우처는 실험적 게임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ZX 스펙트럼용으로 내놓는다 [38] . 나아가 1982년 앤드류 플루겔만이 IBM PC로 ‘PC-Talk’을 개발해 [39] 셰어웨어의 단초를 닦은 것으로 프로그램 독립 유통의 세계가 열렸다 [40] . 그리고 1996년 매크로미디어사에서 ‘플래시’ 웹 애니메이션 플러그인을 내놓은 건 또 한 번 인디 PC 게임 세계의 전례 없던 폭발을 일으킨다 [41] . 그 어느 때보다 쉽고 단순해진 게임 제작과 게임을 따로 설치할 필요 없이 그저 웹 접속만으로 플레이 경험에 접근이 가능하다는 플래시 기반 게임의 이점은 단연 인디 세계 뿐만 아니라 게임이라는 매체 자체의 전례 없는 전파를 일으킨다. 개인들에게 게임 개발의 용이함을 넓혀 준 개발 도구들도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1992년 개인들에게 게임 개발의 용이함을 넓혀 준 ‘RPG 메이커’가 처음 발매되었고 [42] 1999년엔 ‘게임메이커’가 공개되었다 [43] . 그리고 3D 구현이 가능은 하지만 그럼에도 2D 게임 개발이 주역이었던 이전의 인디 게임 도구들에서 2005년에 공개된 ‘유니티’, 2014년에 출시된 ‘고도’ [44] , 2015년에 무료 공개가 된 ‘언리얼’의 순서로 넘어가며 [45] 3D 인디 게임들이 점차 폭발적으로 출현하기 시작한다. 콘솔이 지배하던 게임계의 영역에서도 카트리지를 해킹하는 ‘롬핵’, 독자적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홈브루’ 등의 방식으로 초기 인디 게임의 형태가 출현하기는 했지만, 하드웨어락 시스템이나 카트리지 기판 조작의 물리적 난이도 등으로 PC를 통한 개인 개발의 잠재력에는 미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게임 소프트웨어 자체가 카트리지에서 CD로, 그리고 디지털 배포 형식으로 옮겨가며 가격이 내려가는 듯했다가 AAA 게임들의 경우 상기했던 기술 상승 지향의 문제로 개발 비용이 계속해서 치솟아 다시 높아지는 추세이다. 하지만 인디 게임들을 들여다보자면 그 어느 때보다 저렴한 가격에 가장 획기적이고 충만한 게임 경험을 선사해 주는 창작자들의 세계가 분명 쌓아 올려져 있다. 우리에겐 아직도 탈중앙, 탈자본을 꿈꿀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1] Dmitri Williams, “Structure and competition in the U.S. home video game industry” International Journal on Media Management (London: Routledge, 2009), pp. 42-43. [2] https://www.thegamer.com/how-much-did-every-nintendo-console-cost-at-launch/ [3] https://www.pcworld.com/article/507533/inside_amiga_1000.html [4] https://www.computinghistory.org.uk/det/7800/commodore-amiga-a500/ [5] https://arstechnica.com/gaming/2021/12/time-to-feel-old-inside-the-nes-on-its-30th-birthday/ [6] Rolf Brückmann, et al., 64 intern (Düsseldorf: Data Becker, 1983), p. 585. [7] Nathan Altice, I AM ERROR , (Cambridge: MIT Press), p. 49. [8] Tekla S. Perry, et al., “Design case history: the Commodore 64” IEEE Spectrum (New York: IEEE, ), Vol. 22, No. 3, pp. 48-50. [9] David H. Ahl, “Random Ramblings”. Creative Computing (Chicago: Ziff-Davis, 1979). Vol. 5, No. 8, p. 26. [10] https://www.ibm.com/history/personal-computer [11] https://www.guinnessworldrecords.com/world-records/72695-most-computer-sales [12] https://www.nintendo.co.jp/ir/en/finance/hard_soft/index.html [13] Carl Therrien, et al., “Enter the bit wars: A study of video game marketing and platform crafting in the wake of the TurboGrafx-16 launch” New Media & Society (Thousand Oaks: Sage Publishing, 2015) Volume 18, Issue 10, p. 4. [14] Newsweek, “It's Hip To Be Square”, Newsweek (Washington, D.C.: The Washington Post Company, 2000), 2000. 09. 03. [15] https://www.thegamer.com/how-many-games-were-made-for-the-original-playstation-ps1/ [16] https://www.thegamer.com/nintendo-64-how-many-games/ [17] https://segaretro.org/Saturn_games [18] https://www.lemon64.com/games/ [19] https://www.thegamer.com/how-many-games-made-for-nes-famicom/ [20] Tom R. Holfhill, “The MS-DOS Invasion: IBM Compatibles Are Conning Home” Compute! (New York: ABC Publishing, 1986), pp. 32-38. [21] Nick Montfort, Twisty Little Passages (Cambridge: MIT Press, 2003), p. 86. [22] <어드벤처>가 1980년 아타리 콘솔용으로 재탄생했을 때 ‘액션 어드벤처’ 게임이 되었고 이는 1986년 <젤다의 전설>의 전신이 된다. [23] Forbes, “The Game: Sony PlayStation versus Nintendo 64” Forbes (Jersey City, Forbes Media, 1997), 1997. 09. 19. [24] Eric C. Newburger, Computer Use in the United States: October 1997 (Washington, DC: U. S. Census Bureau, 1999), p. 1. [25] Imagine Publishing, The PlayStation Book (Bournemouth: Imagine Publishing, 2015) p. 28. [26] Lawrence J. Magid, “Another Good Year for PC Bargains” Los Angeles Times (El Segundo: Los Angeles Times Communications, 1993), 1993. 12. 23. [27] TigerDirect, Price Blitz (El Segundo: TigerDirect, 1997), Vol 8, Issues 3, p. 15. [28] Imagine Media, PC accelerator (New York: Imagine Media, 1998), Vol 1, No 2, pp. 143-145. [29] https://www.ign.com/articles/1997/03/06/final-fantasy-vii-sales-figures [30] Imagine Media, PC GAMER (New York: Imagine Media, 1999) Vol 6, No 4, p. 50. [31] https://www.ign.com/articles/1999/01/21/starcraft-named-1-seller-in-1998 [32] https://news.seoul.go.kr/gov/lovepc-request-info [33] Imagine Publishing, Next Generation (Brisbane: Imagine Publishing, 1997), p. 68. [34] Jesper Juul, HANDMADE PIXELS (Cambridge: The MIT Press, 2019), p. 62. [35] Scott Kincaid, “Attack of the Mutant Camels”. Ahoy! (New York: Ion International, 1984). No. 5, p. 59. [36] Jesper Juul, op. cit., p. 43. [37] Chris Bourne, “matthew uncaged” Sinclair User (London: EMAP, 1984), Issue 33, pp. 89-90. [38] Jesper Juul, op. cit., pp. 57-58. [39] Dennis Erokan, et al., “ANDREW FLUEGELMAN: PC-Talk and Beyond” MicroTimes (Oakland: BAM Publications, 1985), Volume 2, Number 5, pp. 19-22. [40] Damon Camille, “Shareware: An Alternative to the High Cost of Software” Medical Reference Services Quarterly (Philadelphia: The Howath Press, 1987), Volume 6, Issue 3, pp. 76-77. [41] https://www.wired.com/story/history-of-macromedia-flash/ [42] Keith Stuart, “I made the worst role-playing game of all time – and loved every minute of it” The Guardian (London: Guardian Media Group, 2025), 2025. 02. 13. [43] https://gamemaker.io/en/blog/gamemaker-25 [44] https://analyticsindiamag.com/ai-trends/battle-of-game-engines-godot-vs-unity/ [45] https://www.ign.com/articles/2015/03/02/unreal-engine-4-is-free-for-everyone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영이 폭력과 고통, 분열의 상관관계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 『정서 지도 그리기』, 『밑 빠진 독(毒)에 물 붓기』, 『월간 종이』 등을 제작하고 연극 <오페라 샬로트로니크>, <벼개가 된 사나히> 드라마터지를 맡았다. 『호르몬 일지』와 『게임 코러스』를 썼고, 『미친, 사랑의 노래』를 함께 썼다.
- [논문세미나] From geek masculinity to Gamergate: The technological rationality of online abuse
이 논문은 온라인 커뮤니티와 플랫폼을 중심으로 자행되는 사이버 폭력의 배경을 밝히기 위해 우선 기술 또는 게임로 정체성을 유지하는 오타쿠 남성성이 있음을 짚어낸다. < Back [논문세미나] From geek masculinity to Gamergate: The technological rationality of online abuse 16 GG Vol. 24. 2. 10. 2014년 미국에서 ‘게이머게이트(Gamergate)’라고 불리는 희대의 사건이 발생했다. 특정 게임 개발자에게 온라인 상 집단 공격이 쏟아졌고 가해 집단은 ‘게이머’로 표상되는 익명의 온라인 플랫폼 이용자들이었다. 이들이 목표물로 삼은 대상은 여성이었으며 “저 XX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게임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심리가 그들의 공격 속에 숨어있었다. 2023년 말, 한국에서 게이머게이트와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 대형 게임 회사의 게임 홍보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한 여성 애니메이터가 남성을 비하하는 특정 표식을 애니메이션 안에 의도적으로 심었다며 온라인 이용자들이 집단적 공격을 가한 ‘뿌리 사태’가 바로 그것이다. 2014년의 미국의 게이머게이트와 2023년의 한국의 뿌리 사태는 10년의 시차가 발생하지만 온라인 커뮤니티 이용자들이 여성 게임 업계 종사자를 향해 다양한 방식의 폭력을 가했다는 면에서 비슷한 점이 있다. 두 사건을 함께 놓고 바라볼 수 있을까? 이번 논문 세미나에서 다룰 논문은 “오타쿠 남성성에서 게이머게이트까지: 사이버 폭력의 기술적 합리성(From geek masculinity to Gamergate: The technological rationality of online abuse)”이다. 저자는 게이머게이트 사건처럼 사이버 폭력이 발생한 배경에 *오타쿠 남성성이 있음을 짚고, 트위터나 포챈 같은 온라인 플랫폼이 사이버 폭력을 상당 부분 조장했음을 논문을 통해 밝히고 있다. *오타쿠 남성성이라고 번역한 개념의 원제는 ‘Geek Masculinity’다. ‘Geek’은 한국어로 보통 괴짜라고 해석된다. 따라서 ‘괴짜 남성성’이라고 번역 할 수 있으나 한국에서는 특정 대상에 집착하고 사회적으로 폐쇄성을 보이며 온라인 커뮤니티에 매몰된 사람들을 오타쿠라고 왕왕 부르기 때문에 그 의미를 살리기로 했다. 게이머게이트의 시작 게이머게이트 사건의 배경에는 2013년의 게임 가 있었다. 우울증 환자가 겪는 어려움을 1인칭 시점에서 담아낸 텍스트 기반 게임으로, 여성 게임 개발자 조이 퀸(Joey Quinn)이 개발했다. 퀸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게임의 서사를 구성하면서 다른 우울증 환자들이 이 게임을 통해 삶에 도움을 얻기를 희망했다. 게임은 유명 배우 로빈 윌리암스의 자살 소식과 같은 날 스팀에서 발매되어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고 게임 매체에서 기사로 다뤄지기도 했다. 하지만 온라인 커뮤니티 포챈(4chan)에서는 환영 받지 못했다. 포챈 이용자들은 게임 발매 이후 개발자 조이 퀸을 비난하는 담론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게임은 마치 소설을 읽듯 단조로운 구조를 가졌기 때문에 ‘진정한 게임’이 될 수 없었다. 게다가 게임에서 표현하는 우울증은 사실 여성들의 문제이자 개인의 무능력으로 인한 것이 아니냐는 논조도 있었다. 커뮤니티 이용자들은 퀸의 게임이 당시 게임업계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자 이를 부정적으로 보면서 게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게임 발매 1년 뒤인 2014년, 포챈에 올라온 하나의 글로부터 문제가 촉발됐다. 이 글은 퀸과 과거 연인 관계였다고 주장하는 애론 조니가 작성한 것으로, 퀸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내용이었다. 퀸이 자신을 두고 바람을 폈는데 그 대상은 게임 평론가였고, 퀸은 자신이 여성이라는 점을 게임 업계에 악용하여 게임이 실제 수준보다 높게 평가 받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 글은 원래 포챈에 올라오기 전 다른 웹사이트에 처음 게재되었다. 하지만 게시판 관리자로부터 검열되어 빠르게 삭제되었고 조니는 퀸에 대한 비난 담론이 이미 있었던 포챈으로 자리를 옮겨 글을 재업로드한 것이다. 게임계 사이버 폭력의 대명사가 된 ‘게이머게이트’ 사실 이 주장은 조니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 사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실이건 아니건 커뮤니티 이용자들에게 그 여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커뮤니티는 퀸을 게임 업계를 망치려 한 악인으로 지목했다. 이어 퀸을 향한 비난 및 조롱이 담긴 글들이 빠르게 생산되고 또 재생산 되었다. 집 주소와 연락처 같은 신상 정보는 윤리의식 없이 무차별적으로 유통되었다. 걷잡을 수 없는 집단 사이버 폭력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포챈에서 시작된 폭력의 흐름은 다른 곳으로 일파만파 번져나갔다. 에잇챈(8chan)과 같은 타 온라인 커뮤니티나 레딧(Reddit), 트위터(Twitter)로 퍼져갔다. 포챈과 에잇챈은 특히 ‘오타쿠’(geek) 성향의 ‘남초’ 커뮤니티들로 알려져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신상 정보가 노출된 퀸에게 자살 권유, 강간 협박, 살해의 위협이 이어졌다. 퀸은 친구들이 있는 안전한 곳으로 거주지를 옮기기도 했으며 이러한 신상 털기와 신변 위협은 퀸 뿐만이 아니라 퀸 주변의 게임 개발자나 사태를 비판하는 평론가들, 더나아가 게임 업계 내 여성과 소수자 전반에게 가해지면서 수많은 피해자를 낳았다. 이 사건이 ‘게이머게이트’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배경에는 애덤 볼드윈이라는 극우 성향의 미국의 배우가 있다. 그는 트위터를 중심으로 우파 정치 메시지를 전파하는 인물 중 하나였는데, 과거 1970년대 미국 정부에서 조직적으로 사실이 은폐된 ‘워터게이트’(watergate) 사건의 이름을 따와 게임계에서도 일부 종사자들로 인해 사실이 은폐되고 있다며 #gamergate 라는 해쉬태그를 트위터에 처음 만들었다. 그리고 좌파 성향의 페미니스트로 인해 위협이 발생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추가했다. 이에 동조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트위터에서 게이머게이트 해쉬태그를 달고 무분별한 악플을 일삼고 심지어는 ‘십자군 전쟁’ 밈 이미지에 이입하면서 피해자들과 이들에 동조하는 일반인들까지 집단적으로 괴롭혔다. 온라인 커뮤니티발 대규모, 연쇄, 집단 사이버 폭력 사태였던 게이머게이트는 온라인 대안 우파의 세력 확산에 불을 지피면서 결론적으로 2016년 트럼프가 당선된 배경 중 하나로 꼽히게 된다. 기술을 취해 남성성을 획득한 오타쿠들 오늘날 게이머게이트와 같은 사이버 폭력(online abuse)은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사회적 문제이다. 이에 따라 논문은 이러한 사이버 폭력이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밝히기 위해 컴퓨팅 기술의 발전 과정 속에서 나타난 ‘오타쿠 남성성’에 주목한다. 우선, 논문에서는 초기 컴퓨터가 여성의 도구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세계 대전 당시, 복잡한 계산을 수행하기 위해 개발된 컴퓨터를 주로 여성 과학자들이 다뤄왔다. 전후에도 단순 반복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인식이 지속되어, 컴퓨팅 분야에서는 낮은 임금으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주로 종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으로 컴퓨터는 전문가들이 다루는 도구로 변모하게 되었고, 1960년대 들어서는 남성 공학자들의 전유물로 간주되었다. 1980년대에는 컴퓨터와 게임을 소유 및 정복하는 이미지가 남성 문화에 적합하다고 대중문화를 통해 여겨지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남성성은 힘이 세다거나 건장한 외모, 사교적인 태도 등으로 여성들에게 호감을 얻는 것으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컴퓨팅 분야에서 기술적 능력을 가진 경우에는 예외가 될 수 있었다. 프로그래머나 컴퓨터 엔지니어 중에서 대인관계나 공감성 면에서는 부족할 수 있지만 기술적 능력을 갖춘 사람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다. 실리콘 밸리 신화에서는 사회성이 부족하거나 괴팍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도 성공적인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게임과 같은 기술 문화, 온라인 문화에 능숙한 오타쿠(논문에서는 ‘geek’)들은 자신의 입지를 지켜내기 위해 기술 지식과 적성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는 것이 논문의 분석이다. 논문에 따르면, 이러한 오타쿠 문화는 전통적인 남성성을 대신하여 기술이라는 대안적 루트를 통해 남성성을 획득하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만약 게임이나 인터넷 문화 같은 기술의 영역에 남성적 정체성을 흔드는 다양한 사용자가 나타난다면, 침범하지 못하도록 방어하고 유지시키는 목적에서 기술 문화가 위협을 받게되면 공격적인 충동이 발생할 수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폭력을 더 키운 것은 ‘플랫폼 기술’ 온라인 플랫폼들의 소통 문화와 상호작용 메커니즘은 폭력적이고 격렬한 교류를 초래했지만 사용자를 타인의 학대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제공하지 않았다. 게이머게이트 사건에서 포챈과 에잇챈이 주요 무대 및 자료 생산장으로 부각되었다. 익명 사용자로부터 작성된 글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되며, 빠르게 댓글이 달리고, 밈이 전파되지만 이전에 작성된 글을 손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작성자가 내용에 책임감을 지지 않는 구조가 근본적으로 있다. 트위터는 자신의 트윗에 대한 다른 사용자의 답글을 삭제할 수 없게 하며 논쟁이 쉽게 발생할 수 있도록 설계 되었다. 따라서 자료를 신속하게 유통하는 유통망이자 집단적이고 연쇄적인 공격을 허용 할 수 있었다. 물론 트위터에는 부당한 대우에 맞서고 이름을 밝히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지만, 평판, 고용, 사용자의 심리적 건강에 큰 피해를 입히는 대량 표적 공격의 수단으로도 사용되었다. 그런데 게이머게이트 사건은 논란을 이용하여 이익을 취하는 측에 의해 한 층 더 복잡해진다. 극우 저널리스트 마일로 야노풀로스(Milo Yiannopoulos)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게이머게이트를 옹호하며 중요한 존재로 부상했다. 그는 여성 게임 평론가인 아니타 사키시안(Anita Sarkkesian)을 모욕하는 유튜브 동영상으로 유명세를 얻었는데, 이 영상은 핵심 메시지는 게이머게이트였고 사키시안을 향한 모욕을 정당화하고 있었다. 동영상은 수백만 회 시청을 기록하며 광고 수익을 창출했고, 그는 후원 플랫폼인 페트리온 계정을 운영하면서 거액의 후원도 받았다. 이러한 개인뿐만 아니라 게이머게이트의 트래픽으로 다양한 플랫폼과 소셜 미디어가 수익을 얻는 비즈니스 모델이 추가로 작동하여 논란은 더욱 잔혹하게 진행되었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기술적 합리성’ 개념을 통해 1964년에 인간과 기계, 기술은 독립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기술 또한 사회가 만들어낸 요소로, 특정 장치나 도구를 넘어서 사회적 관계, 사고와 행동의 패턴이 모두 기술에 포함된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기술은 사회적 관계를 재생산하며 사회적인 도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포챈과 같은 온라인 커뮤니티나 트위터와 같은 소셜 미디어 서비스는 이러한 기제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고, 더 이상 자유분방하고 중립적인 유틸리티가 아닌 합리성에 의해 젠더 불평등을 유지시킨 것이다. 게이머게이트를 통해 바라보는 뿌리 사태 이 논문은 온라인 커뮤니티와 플랫폼을 중심으로 자행되는 사이버 폭력의 배경을 밝히기 위해 우선 기술 또는 게임로 정체성을 유지하는 오타쿠 남성성이 있음을 짚어낸다. 만약 다른 정체성이 기술 영역을 침범했을 때 오타쿠 남성성은 그에 대한 방어 기제로서 공격적인 충동 반응을 보이는데, 이러한 양상이 온라인 상에서 당사자를 향한 허위 소문 유포, 모욕, 조롱, 신상 털기, 신변 위협 등의 폭력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투명한 공론장이라는 신화에 둘러싸인 온라인 플랫폼들은 사실상 폭력을 더 키우는 존재였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존재하는 사이버 폭력의 상황에서 합리성의 원칙에 의해 왜곡된 의견을 재생산하는데 일조 하기도 하고, 공격을 용이하게 하고, 비즈니스 모델을 접목시켜 이익을 취하기도 했다. 논문을 통해 적용하면, 2023년의 한국의 ‘뿌리 사태’는 남성을 비하하는 표식이 게임 애니메이션마다 교묘하게 숨겨져 있다고 믿는 음모에 휩싸인 한국 오타쿠 남성성 주체들이 일으킨 사이버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애니메이션을 초 단위의 프레임으로 슬라이스 하여 캐릭터의 움직임이나 화면의 구름 표현에서 집게 손가락 모양을 어름풋이 끼워 맞추는 허무한 주장들은 오타쿠 남성성의 근간을 유지해주는 게임이 다른 정체성으로부터 위협을 받는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애니메이터는 10년 전 미국의 피해자들과 똑같은 수법으로 비난과 모욕을 받고, 개인 정보를 노출 당하고, 고용과 신변의 위협을 받는 꼴이었다. 비록 음모가 상대적으로 빠르게 해소되어 더 큰 폭력으로 더해지진 않았지만 애니메이터를 고용했던 사업체는 평판에 위협을 받고 금전적인 피해를 떠안게 되었다. 다만 뿌리 사태에서 하나 더 짚고 갈 점은, 폭력을 더 키운 기반이 포챈이나 트위터가 아닌 원청을 준 게임사였다는 점일 것이다. 물신주의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유저 이탈의 두려움 때문에 사실 관계 확인보다는 폭력의 편에서 설 수밖에 없던 그들의 대처는, 과거의 논문이 다 짚어내지 못한 새로운 해석점을 요구하고 있다. 참고문헌 Salter, M. (2018). From geek masculinity to Gamergate: The technological rationality of online abuse. Crime, Media, Culture, 14(2), 247-264.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연구자) 보라무 사회적인 관점에서 게임을 연구합니다. 게임이라는 도구를 통해 결국 인간을 탐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은 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 리듬 게임, 가장 빈곤해서 가장 자유로운(우수상)
거듭 말하자면 리듬 게임은 빈곤한 장르다. 그러나 그 빈곤함은 게임 일반에 공통된 특정한 요소를 급진적으로 밀어붙임으로써 세공된 빈곤함이다. 가위바위보를 할 때조차도 우리는 상대와 ‘동시’에 손을 내밀어야 하고, “안 내면 술래”다. 동궤에서 리듬 게임은 유한하고 폐쇄적인 장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유한성과 폐쇄성 덕분에 우리는 극도의 해방감을 체험하게 된다. < Back 리듬 게임, 가장 빈곤해서 가장 자유로운(우수상) 07 GG Vol. 22. 8. 10. 가장 빈곤한 게임 장르로서의 리듬 게임 본고에서 우리는 〈비트매니아beatmania〉, 〈이지투디제이EZ2DJ〉를 필두로 해서 〈디모Deemo〉, 〈사이터스Cytus〉까지 이르는 리듬 게임을 게임 일반의 극한이 되는 형태로서, 정확히는 가장 빈곤한 게임의 형태로서 다루고자 한다. 다만 우리는 숱한 리듬 게임들을 하나하나 비평할 의도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고, 리듬 게임 전반에 공통된 요소를 가지고 다소 추상적인 수준에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다른 장르라면 지나친 단순화로 보일 이와 같은 장르 일반에 대한 비평은 리듬 게임 장르 특유의 빈곤함에 의거해서 가능해진다. 리듬 게임이 우리가 주장하는 것처럼 가장 빈곤한 장르라면 어떤 의미에서인가? ‘악보’에 맞추어 대응하는 ‘키’를 입력하는 것이 거의 전부인 이 단순한 장르에서는 자유가 전혀 허락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다. ‘타이밍’이 이 장르의 본질을 규정하며, 그 외의 모든 요소들, 예컨대 서사라든지 경험치라든지 하는 요소들은 이 장르에 대해 부수적이거나 장식적이다. 그런 요소들은 물론 몰입감을 더해주지만, 리듬 게임이 선사하는 쾌감에 불가결하진 않다. 리듬 게임이 이처럼 빈곤하리만치 단순한 장르라면 과연 거기에 새삼 비평할 만한 가치나 분석할 만한 구석이 있을까? 세계universe 자체를 집어삼킬 기세로 다가오고 있는 광활한 메타버스metaverse의 시대에 하필이면 리듬 게임에 대해서 논한다는 것은 퇴행적이고 고루하게 보이지 않는가? 이것이 즉시 제기될 법한 의문이다. 리듬 게임에는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ゼルダの伝説 ブレスオブザワイルド〉처럼 완성도 높은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맛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쌔신 크리드Assassin’s Creed〉나 〈레드 데드 리뎀션Red Dead Redemption〉 시리즈처럼 다른 세계의 안으로 들어가는 맛이 있는 것도 아니며 〈스탠리 패러블The Stanley Parable〉처럼 내러티브narrative를 비틀어 플레이어로 하여금 철학적으로 각성하도록 유도하는 맛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리듬 게임이 현실에서는 드문 어떤 체험을 환상의 형태로 제공하는 것조차 아니다. 리듬 게임의 재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하지만 ‘플레이’라는 용어가 리듬 게임만큼 꼭 들어맞는 장르도 또 없을 것이다. 그 용어가 ‘연주’를 뜻하는 한에서 말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바로 그런 연유로 리듬 게임은 쉽게 냉소의 대상이 되곤 한다. 종종 이 냉소는 리듬 게임을 하고 놀 거라면 차라리 피아노, 드럼, 기타 등을 직접 연주하는 게 낫지 않느냐는 물음의 형태를 취한다. 실제로 리듬 게임인 〈락스미스Rock Smith〉로 기타를 익혀서 기술적으로는 뛰어나지만 악보는 전혀 읽지 못하고 스케일scale 같은 개념도 알지 못하는 기타리스트 세대가 등장해서 고전적인 방식으로 기타를 배운 세대를 당황케 만든 바 있다. 그러므로 저 냉소적 물음에 진리치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런데 곧이곧대로 보면 저 냉소는 리듬 게임이야말로 게임 플레이의 원초적 면모를 드러내고 있음을 함축한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현생現生을 살지 않고 게임을 하는가? 이런 의문은 현실보다 더 풍부하고 강렬한 체험,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체험을 제공하는 게임의 경우에는 별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리듬 게임의 경우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우리는 왜 악기를 직접 ‘연주’하지 않고 굳이 그 열화판처럼 보이는 리듬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일까? 현실이 게임보다 더 풍요로울 때조차도, 게임이 현실보다 더 빈곤할 때조차도 우리가 여전히 게임을 플레이한다는 사실을 더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즉 게임의 빈곤함을 단순히 현실에 비한 게임의 부족함이나 미진함 정도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빈곤함이야말로 게임을 더욱 게임답게 만드는 속성이라고 간주하여야 한다. 리듬 게임에 고유한 유한성의 쾌감 악기 연주와 리듬 게임 플레이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빈곤함과 결부된 소진 가능성이다. 클래식이든 대중음악이든 실제 음악의 ‘악보’는 우리에게 거의 무한한 해석의 자유를 허락한다. 무음無音의 음악인 존 케이지John Cage의 〈4분33초〉조차도 그렇다. 그래서 하나의 곡을 두고도 그토록 다양한 연주와 변주가 등장하고 그토록 다양한 커버cover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즉 음악의 경우 악보는 소진 불가능한 객체다. 하지만 리듬 게임의 ‘악보’는 그렇지 않다. 리듬 게임의 최종적인 목표는 다름 아니라 악보를 완전히 소진시키는 데 있으며, 거기에는 별다른 해석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리듬 게임 장르를 두고 통용되는 유명한 경구 “빛이 나는 곳을 손가락으로 누르는 게 아니라 손가락이 가는 곳에서 빛이 난다”는 악보가 플레이어에 의해 완전히 학습되었음을, 따라서 완전히 소진되었음을 뜻한다. 관건은 이런 소진을 통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인식하는 데 있다. 우리는 앞서 리듬 게임은 빈곤하다고 말했다. 즉 리듬 게임의 플레이어에게는 선택의 자유나 운신의 폭이 별로 없다. 기껏해야 화면을 왼손 두 번째 손가락으로 누를지 세 번째 손가락으로 누를지, 아니면 발판을 오른발로 밟을지 왼발로 밟을지 정도를 결정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징검다리를 있는 그대로 따라가는 게 리듬 게임의 제일 목표이자 유일한 목표다. 이는 리듬 게임을 깨기 위한 왕도가 게임이라는 ‘타자’에게 ‘자기’를 완전히 내맡기는 데에,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타자의 ‘리듬’에 자기의 ‘리듬’을 동기화시키는 데에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이때 리듬 게임이라는 타자는 무한한 해석과는 거리가 먼, 전적으로 유한한 타자다. 즉 이론적으로 리듬 게임의 플레이어는 타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퍼펙트’한 판정으로 관통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현실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쾌락이다. 현실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 및 다른 물건들과, 즉 타자들과 끊임없이 교섭하고 협상하면서 그 리듬에 나를 맞추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현실적 타자들의 리듬이란 무척 변덕스러운 것이고, 실제의 악보 사례가 보여주듯 심지어는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이 변덕스러움, 자유로움, 무한함은 결코 축복이 아니다. 타자의 리듬에 나의 리듬을 맞추고 동기화시키는 것은 기본적으로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사둔 요거트가 상하기 전에 챙겨 먹어야 하고 방금 받은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식기를 기다려야 하며 지하철역에 가득 들어찬 인파와 발걸음을 맞춰야 하고 오늘도 이어지는 상사의 일장연설에 적절한 ‘리듬’으로 맞장구를 쳐야 한다. 요컨대 이 현실 세계의 리듬은 나의 리듬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줄곧 나보다 느리거나 빠르다. 이와 달리 리듬 게임은 이런 리듬의 괴리를 완전히 극복함으로써 타자와의 무결한 동기화가 가능하다는 일체감을 플레이어에게 선사한다. 이런 일체감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전능감에 가까울 수 있지만, 결코 타자에 대해 폭력적인 전능감은 아니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왜냐하면 이 동기화는 타자의 리듬을 나의 리듬에 끼워 맞추는 식으로 이루어지기는커녕 정반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리듬 게임에서는 오히려 내 쪽이 타자의 리듬에 굴복해야 한다. 곡曲을 소진시키고 ‘클리어’하기 위해서 나는 타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타자를 완전히 소화했고 완전히 이해했다는 쾌감, 타자와 완전히 동기화됐다는 쾌감은 오로지 게임에서만 적법하게 허락되는 것이다. 그것은 현생에서는 물론이고 다른 문화 영역에서도 무척 희귀하고 심지어는 금지되어 있기까지 하다. 예컨대 영화, 소설, 회화, 음악 등의 경우, 내가 그 작품을 완벽히 이해했고 그것과 완벽히 동기화되었다고, 그리고 그런 내가 보기에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단언한다면, 그런 식으로 그것을 소진시킨다면 아주 난폭하고 비윤리적인 짓일 것이다. 내가 어떤 대상의 진리와 전모를 완전히 파악했다는 단언은 해당 대상을 두고 무한히 전개될 수 있을 풍요로운 대화의 가능성 전체를 미리 차단하기에 그렇다. 하지만 리듬 게임의 경우에는 바로 그런 유한한 차폐가, 즉 ‘풀 콤보 퍼펙트 플레이’가 합법적인 목표로 제시된다. 해석의 자유나 변주의 가능성 같은 데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유한’하고 ‘폐쇄’적인 타자의 악보에 나의 리듬을 녹여 넣음으로써 완전한 동기화를 달성해야 한다. 리듬 게임의 독특한 자유로움 물론 개방성 자체를 모사하는 것을 재미의 근거로 삼는 게임들이 있어서, 유한한 폐쇄성에 의해 가능해지는 완전한 동기화로부터 쾌감을 추출해 내는 리듬 게임과 대척을 이룬다. 아닌 게 아니라 근래의 게임 중 상당수는, 특히 장대한 서사와 드넓은 ‘오픈 월드open world’를 주요한 무기로 삼고 있는 게임들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다채로운 체험들을 가능케 만드는 데서 존재 가치를 확보하는 것처럼 보인다. 플레이어에게 마치 무한히 자유로운 것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가상假想을 선사하는 것이다. 위에서 지나가듯 언급한 〈스탠리 패러블〉은 다름 아니라 무한한 자유라는 가상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오픈 월드 게임들에 대한 ‘이념적’ 풍자로서 성립한다. 내레이터narrator가 플레이어의 행동을 미리 앞질러 말함으로써 결국 그렇게 행동하게 만드는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내레이터의 지시대로 게임을 진행해서도 곤란하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곤란하다는 이율배반을 체험하게 된다. 플레이어가 마음대로 하려고 해도 내레이터는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말하며, 심지어는 버그처럼 생각되는 요소가 눈에 띄어 이용하면 그것조차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는 식으로 내레이터가 응수하는 이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플레이어는 결과적으로 자유라는 관념 자체를 의문시하게 된다. 〈스탠리 패러블〉은 이렇게 순조로운 내러티브라는 관념을 고장내고 게임 내부의 세계(“월드”)에 ‘자유롭게’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제 리듬 게임은 자유를 모사하기 위해 제작된 게임들에 대한 ‘물리적’ 논박으로서 〈스탠리 패러블〉을 보충한다. 오픈 월드 게임들에 대한 리뷰가 게임 내부의 세계 안에서 어디까지 용인되고 어디부터 금지되는지 실험해보는 과정을 필히 거친다는 사실은 그것들의 핵심적 재미가 무엇에 의해 산출되는지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게임이라는 대상을 향유하는 태세가 기본적으로 그것이 제공하는 모든 가능성을 샅샅이 탐사하고 소진시켜 보는 데 있음 역시 보여준다. 리듬 게임의 경우에 소진되어야 할 것이 악보라면 오픈 월드 게임의 경우에는 세계 자체일 뿐이다. 동일 선상에서 흥미로운 점은 많은 수의 게임이 리듬 게임으로 환원될 수 있을 것처럼, 혹은 적어도 리듬 게임이 게임의 어떤 본질적 면모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 예컨대 유튜브에 많이 올라와 있는 〈슈퍼마리오Super Mario〉 시리즈의 타임 어택(-최단 시간에 게임을 클리어해서 엔딩을 보는 플레이) 영상들에서 고수들은 〈슈퍼마리오〉를 마치 리듬 게임처럼 플레이하는데, 이때 횡스크롤로 진행되는 〈슈퍼마리오〉의 스테이지는 〈비트매니아〉의 악보와 아주 유사한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스테이지의 설계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슈퍼마리오〉 고수는 악보를 외운 〈비트매니아〉 고수와 다를 바 없다. 둘은 모두 자신이 플레이하는 게임을 완전히 소진시킨 이들이다. 리듬 게임의 경구를 비틀어 인용하자면, ‘거북이가 오기 때문에 마리오가 점프하는 것이 아니라 마리오가 점프한 자리에 거북이가 오는 것’이다. 비단 〈슈퍼마리오〉의 경우에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단순한 부류부터 복잡한 부류까지 모든 게임에는 타자와의 동기화를 통한 소진이 전부인 국면, 즉 리듬 게임을 닮는 국면이 존재하며, 이는 게임의 재미 일반을 설명하는 건 아닐지라도 오로지 게임에서만 합법적으로 수용되는 쾌감이라는 점에서 게임 특유의 것이다. 거듭 말하자면 리듬 게임은 빈곤한 장르다. 그러나 그 빈곤함은 게임 일반에 공통된 특정한 요소를 급진적으로 밀어붙임으로써 세공된 빈곤함이다. 가위바위보를 할 때조차도 우리는 상대와 ‘동시’에 손을 내밀어야 하고, “안 내면 술래”다. 동궤에서 리듬 게임은 유한하고 폐쇄적인 장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유한성과 폐쇄성 덕분에 우리는 극도의 해방감을 체험하게 된다. 그게 아니라면 타자의 리듬에 나의 리듬을 완벽히 동기화시키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한하고 개방적이고 유연한 실제의 타자와는 장단을 맞출 수 없다. 타자에게 나를 한 끗의 오차도 없이 딱 맞췄다는 감각, 그래서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되었다는 감각은 곧 나를 가장 굳건하게 속박하고 있는 ‘자기’가 소산消散되는 감각으로, 게임 외의 영역에서는 거의 느낄 수 없는 것이다. 리듬 게임은 빈곤하고 유한하고 폐쇄적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독특한 자유로움,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되는 이 자유로움을 맛보게 만든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파리8대학교 LLCP 박사과정) 김민호 데카르트의 『정념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데리다 사유의 전개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작성하고 있다. 매체나 문화에 대한 철학적 비평에 관심을 두고 있다.
- 게임의 문화적 존재론: 천출(賤出), 기술적 총아, 참여문화
이 작품의 결말은 AR 안경을 쓰고 이루어지는 놀이와 장난스러운 일이 등장인물의 연애 관계를 넘어 트라우마를 발생시키고, 이러한 과정에서 이를 사용하는 이들의 생명을 위협하게 되면서 파국을 맞게 된다. 부모들은 AR 안경을 압수해버리려고 하는데, 이 때 주인공인 유코와 그의 친구들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한 번 그 세계에 몸담아서 그 세계를 알아버렸기 때문에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는 게임의 세계를 이미 경험해버렸기 때문에 이제 게임 이전 시대로 되돌아 갈 수 없다. 그렇다면 게임이 만들어 낸 달콤함과 고통 모두를 인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 Back 게임의 문화적 존재론: 천출(賤出), 기술적 총아, 참여문화 01 GG Vol. 21. 6. 10. 지금으로부터 십몇 년 전 이름을 대면 알법한 대기업 회장님 앞에서 ‘메타버스’란 키워드를 소재로 신사업 기획 프레젠테이션을 할 기회가 있었다. 린든 랩이 만든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라는 가상 세계가 메타버스란 키워드로 주목받던 시절이었다. 그 때 같이 그 기획안을 준비하던 그 대기업의 부장은 우리 팀에 이런 주의를 자주 주었다. “회장님은 게임을 정말 싫어하세요. 자제분들에게도 절대 게임은 못하게 하시거든요. 그래서 신사업 기획에 우리 안이 절대 게임으로 보여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프레젠테이션에서 게임의 ‘게’자도 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기획은 아뿔싸! <세컨드 라이프> 같은 메타버스의 저작 툴의 개념과 그 당시 유행했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같은 MMORPG를 결합한 형태였던 것이다. 그 프레젠테이션에서 게임의 메커닉과 같은 핵심 요소들은 회장님이 게임을 싫어하신 나머지 처음에는 ‘재미요소’라는 단어로, 그 뒤에는 영어 단어 ‘funness’로 대체되었다가 최종 본에는 아예 빠지게 되었다. 물론 겉은 메타버스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분명히 사용자의 유입을 유도하기 위해 게임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는 소프트웨어를 게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상황은 매우 아이러니하면서 동시에 게임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 〈Second Life〉. 메타버스와 같은 새로운 플랫폼을 개발하여 부를 축적하고는 싶지만 이러한 플랫폼의 서비스가 게임이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인식은 게임과 게임을 플레이하는 행위 자체가 일반적인 사회의 기준으로는 별로 가치 없고 쓸모없는 행위라고 판단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이러한 게임 혐오 심리에는 게임이 문화적으로 무가치하다는 인식이 잠재되어 있다. 게임에 대해 무지한 사람일수록 게임에 대해 더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지만, 이러한 게임 포비아는 세대와 연령을 가리지 않고 게임을 근본 천출(賤出)의 문화로 간주해 왔다.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감상하는 행위는 이어질 노동을 위한 휴식과 투자로 간주되지만,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시간 낭비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그간 정치권과 미디어, 여성계, 종교계 등에서 주도했던 셧다운제, 쿨링오프제, 게임중독법, 게임 중독 질병코드 등재 등의 여러 게임규제들은 게임이라는 새로운 미디어가 가지고 있는 매체성을 기존 사회 가치에 반하는 것으로 자리매김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해왔다. 그 이면에는 정치권과 미디어를 비롯한 주류 사회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젊은 세대에 대해 두려워하는 부분이 내재되어 있기도 하다. 그동안 한국 사회는 끊임없이 교육과 노동을 가장 중요시하는 가치 강박을 그 이데올로기로 내세워왔다. [1] 따라서 자기 자식과 가족들을 그 교육과 노동의 장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다양한 대중문화들을 늘 희생양으로 삼아왔다. 7-80년대에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그런 희생양이었다면, 게임이 10대와 20대 사이에서 보편적인 대중문화 양식으로 자리 잡은 90년대 이후에는 게임에 대한 국가적인 규제와 미디어의 비판이 뒤따르게 되었다. 이러한 백래시 현상의 기저를 살펴보면 게임이 다른 매체보다 대중적으로 사랑받아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작용도 컸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2020년 대한민국 게임백서에 따르면 전 국민의 게임 이용률은 70.5%에 달한다고 한다. [2] 그 중 10대의 게임 이용률은 91.5%에 달하며 20대 85.1%, 30대 74.0%, 40대 76.6%, 50대 56.8% 등으로 거의 전 연령대에 걸쳐 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0년대 이후 한국 게임이 보여준 산업적인 성장과 양적 팽창은 다른 문화콘텐츠를 압도할 정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가진 자부심의 크기는 매우 작아 보인다. 2019년 5월 세계보건기구(WHO)에서 게임 이용 장애의 질병코드 등록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자 국내에서도 게임업계와 학계 및 협단체를 중심으로 이에 반대하는 여러 움직임들이 일어났다. 그 때 제기된 운동 중 하나가 주로 SNS를 배경으로 하여 ‘게임은 질병이 아닙니다. 게임은 문화입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거는 것이었다. 전 국민의 70% 이상이 여가 선용을 위해 플레이하는 게임이 대중문화 중 하나가 아닐 리가 없지만, 이러한 운동은 온라인에서 게임 사용자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연매출 15조가 넘어가는 게임 업계의 산업적인 기여 대부분은 확률형 아이템과 강화형 시스템을 통해 이룩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돈을 더 낸 사람이 게임에서 더 유리한 구조를 차지하는 ‘페이 투 윈(Pay to win)’ 시스템이 국내 게임시장의 주류가 되면서 그간 셧다운제, 쿨링오프제, 게임중독법 발의 등과 관련하여 항상 게임업계의 편이 되어주었던 사용자들의 성원이 이제는 게임 업계에 규제를 해달라는 청원으로 바뀌어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처럼 게임업계와 학계 및 협단체를 중심으로 제기한 ‘게임은 문화다’ 운동의 저변에는 그간 사회로부터 근본 천출의 문화로 취급받아온 억울함이 내재되어 있다. 게임을 만드는 쪽에서 ‘게임은 문화다’라고 주장해버리면서 그간 일반적인 사회 통념상 게임은 문화적인 결격 형태에 해당해 왔다는 것을 시인한 셈이기 때문이다. 확률형 아이템과 강화형 시스템이라는 국내 게임업계의 원죄가 존재했기 때문에 그러한 자격지심이 표출되었을 수도 있다. 다만 게임을 문화라고 주장할 수 있는 다양한 긍정적인 사례들이 대부분 해외의 사례였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게임 사용자들에게마저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업계 자체의 운동으로 끝나버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게임업계가 결연함만을 보여주는 대신 좀 더 의연하게 대처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게임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이 좋지 않은 것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게임을 단순히 문화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확률형 아이템 등에 대해 반성하는 자세를 보였으면 사용자들의 시선은 지금보더 훨씬 더 우호적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돈은 돈대로 벌고 싶고 문화로 인정도 받고 싶은 모순된 2가지 감정이 착종되면서 “게임은 당연히 문화가 맞는데, 왜 주변에 문화로 인정을 받아야 하지?”라는 의문이 생기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게임이 문제적인 매체가 된 것은 미구엘 시카트가 지적한 바대로 ‘게임이 행동을 유도하는 규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 [3] 이다. 행동을 유도한다는 것은 게임을 다른 매체와 구분시켜주는 결정적인 차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행동을 유발하면서 연쇄적으로 게임 내의 다음 상황에 집중하도록 강제하는 역할을 한다. 다른 매체와 달리 게임은 플레이어를 위해 플레이어가 참여할 시공간의 빈틈을 만들어 놓고 그 틈을 플레이어로 하여금 채우게 만든다.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게임 속의 시공간은 자신이 들어가서 채워 넣고 행동해야 할 무대가 된다. 이 때문에 게임은 사용자들에게 참여할 공간을 마련해주면서 지속적인 몰입을 유도할 수 있는 환경을 창조해 냈다. * 〈디스 워 오브 마인〉의 한 장면. 또한 게임 내에서 발생하는 행동은 필수적으로 가치의 평가와 직결된다. 게임은 작품 내에서 사용자들에게 특정한 행동을 하도록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특정한 행동을 촉구하는 주요한 설득적인 매체로 기능하게 된다. 최근 10년간 게임 플레이어를 대상으로 다양한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소셜 임팩트 게임(social impact games)의 창작이 급속도로 늘어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소셜 임팩트 게임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늘 언급되듯 <디스 워 오브 마인(This War of Mine)>이나 <미싱(Missing)> 같은 해외 사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국내에서도 제주 4.3사건의 비극성에 대해 초점을 맞춘 <언폴디드> 시리즈, 시리아 난민의 독일 정착 문제를 시뮬레이션 한 <21 데이즈>,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독립 운동을 벌였던 최재형 선생의 일대기를 조명한 <페치카> 같은 소셜 임팩트 게임들이 활발하게 창작되었고 주요 인디게임 공모전에서 입상을 해왔다. 게임의 표현력이 정교해지고 시스템적으로 플레이어를 설득하는 연출방식이 개발자들에게 공유되면서 이제 게임은 새로운 세대와 소통하고 그들을 설득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매체로 거듭나고 있다. 따라서 “게임은 문화인가?”라는 질문을 좀 더 상세하게 파고들기 위해서는 사실 먼저 ‘게임’과 ‘게이밍(gaming)’를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게이밍’이란 실제 게임을 플레이하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게임 플레이 주변에 전유되는 다양한 활동들 즉, 유튜브나 트위치로 게임 방송보기, 게임 웹진에서 게임과 관련한 정보와 소감 나누기 활동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게임은 그 자체로 일정한 가치를 지닌 문화상품이며, 게이밍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문화적인 행동 양식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게이밍이 보편적인 문화적 행동양식이 되기 전에는 이른바 오타쿠로 대표되는 하위문화(subculture)의 범주에서 주류 문화에 대한 대안형태로 존재했었지만, 지금과 같이 전 국민의 70% 이상이 게임하기 과정에 동참하는 상황에서 게임은 동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대표적인 대중문화 매체가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기존의 오타쿠로 대표되던 소속감 높은 하위문화적인 정체성은 다소 느슨하게 약화된 것이 사실이다. 비디오 게임에 온라인 네트워크 환경이 도입되면서 사용자들은 게임 내에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실시간으로 의견을 교환하는 사회적인 활동을 지속할 수 있게 되었다. 스마트폰의 도입 이후 이러한 게임을 통한 사회적인 활동은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일과 놀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매일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유튜브와 트위치, 디스코드에 모여 다른 사용자의 플레이를 감상하고 토론하며, 자신만의 엔터테인먼트를 새롭게 생산해낸다. 마인크래프트와 로블록스 같은 샌드박스나 메타버스 플랫폼에는 사용자들이 만들어 낸 수많은 서브 게임과 미션들로 가득하다. 최근의 게이밍 문화는 점점 혼자 플레이하는 스탠드 얼론(stand-alone) 게임에서 사용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끌어내는 방식으로 진화해 온 것이다. 최근의 메타버스 붐이 다시 일어나면서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보았던 <전뇌코일(電脳コイル)>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 작품은 2025-26년경 다이코쿠시라는 가상의 일본 소도시를 배경으로 이 도시로 전학 온 오코노기 유코와 아마사와 유코라는 두 여학생의 얽힌 인연을 다룬다. 2007년에 제작된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미래를 예견하듯 언제든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AR 안경이 작품 내의 주요 소재로 등장하게 된다. 이 작품의 결말은 AR 안경을 쓰고 이루어지는 놀이와 장난스러운 일이 등장인물의 연애 관계를 넘어 트라우마를 발생시키고, 이러한 과정에서 이를 사용하는 이들의 생명을 위협하게 되면서 파국을 맞게 된다. 부모들은 AR 안경을 압수해버리려고 하는데, 이 때 주인공인 유코와 그의 친구들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한 번 그 세계에 몸담아서 그 세계를 알아버렸기 때문에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는 게임의 세계를 이미 경험해버렸기 때문에 이제 게임 이전 시대로 되돌아 갈 수 없다. 그렇다면 게임이 만들어 낸 달콤함과 고통 모두를 인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 〈전뇌코일〉의 한 장면. 게임 속으로 들어와 버린 우리는 다시 게임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1] 이동연, 「누가 게임을 두려워하랴?」, 『게임포비아』, 커뮤니케이션북스, 2021, p.78. [2] 문화체육관광부, 『2020 대한민국 게임백서』, 한국콘텐츠진흥원, 2020, pp.495-496. [3] 미구엘 시카트, 김겸섭 역, 『컴퓨터 게임의 윤리』,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 p.6.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교수) 이정엽 순천향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게임 스토리텔링과 게임 디자인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인디게임 페스티벌인 부산인디커넥트페스티벌 창설을 주도하고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다.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인디게임 행사인 Independent Games Festival(IGF) 심사위원이기도 하다. 저서로 『디지털 스토리텔링』(공저, 2003), 『디지털 게임, 상상력의 새로운 영토』(2005), 『인디게임』(2015), 『이야기, 트랜스포머가 되다』(공저, 2015), 『81년생 마리오』(공저, 2017), 『게임의 이론』(공저, 2019), 『게임은 게임이다: 게임X생태계』(공저, 202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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