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의 문화적 존재론: 천출(賤出), 기술적 총아, 참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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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1. 6. 10.
지금으로부터 십몇 년 전 이름을 대면 알법한 대기업 회장님 앞에서 ‘메타버스’란 키워드를 소재로 신사업 기획 프레젠테이션을 할 기회가 있었다. 린든 랩이 만든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라는 가상 세계가 메타버스란 키워드로 주목받던 시절이었다. 그 때 같이 그 기획안을 준비하던 그 대기업의 부장은 우리 팀에 이런 주의를 자주 주었다.
“회장님은 게임을 정말 싫어하세요. 자제분들에게도 절대 게임은 못하게 하시거든요. 그래서 신사업 기획에 우리 안이 절대 게임으로 보여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프레젠테이션에서 게임의 ‘게’자도 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기획은 아뿔싸! <세컨드 라이프> 같은 메타버스의 저작 툴의 개념과 그 당시 유행했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같은 MMORPG를 결합한 형태였던 것이다. 그 프레젠테이션에서 게임의 메커닉과 같은 핵심 요소들은 회장님이 게임을 싫어하신 나머지 처음에는 ‘재미요소’라는 단어로, 그 뒤에는 영어 단어 ‘funness’로 대체되었다가 최종 본에는 아예 빠지게 되었다. 물론 겉은 메타버스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분명히 사용자의 유입을 유도하기 위해 게임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는 소프트웨어를 게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상황은 매우 아이러니하면서 동시에 게임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 〈Second Life〉.
메타버스와 같은 새로운 플랫폼을 개발하여 부를 축적하고는 싶지만 이러한 플랫폼의 서비스가 게임이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인식은 게임과 게임을 플레이하는 행위 자체가 일반적인 사회의 기준으로는 별로 가치 없고 쓸모없는 행위라고 판단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이러한 게임 혐오 심리에는 게임이 문화적으로 무가치하다는 인식이 잠재되어 있다. 게임에 대해 무지한 사람일수록 게임에 대해 더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지만, 이러한 게임 포비아는 세대와 연령을 가리지 않고 게임을 근본 천출(賤出)의 문화로 간주해 왔다.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감상하는 행위는 이어질 노동을 위한 휴식과 투자로 간주되지만,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시간 낭비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그간 정치권과 미디어, 여성계, 종교계 등에서 주도했던 셧다운제, 쿨링오프제, 게임중독법, 게임 중독 질병코드 등재 등의 여러 게임규제들은 게임이라는 새로운 미디어가 가지고 있는 매체성을 기존 사회 가치에 반하는 것으로 자리매김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해왔다. 그 이면에는 정치권과 미디어를 비롯한 주류 사회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젊은 세대에 대해 두려워하는 부분이 내재되어 있기도 하다. 그동안 한국 사회는 끊임없이 교육과 노동을 가장 중요시하는 가치 강박을 그 이데올로기로 내세워왔다.[1] 따라서 자기 자식과 가족들을 그 교육과 노동의 장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다양한 대중문화들을 늘 희생양으로 삼아왔다. 7-80년대에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그런 희생양이었다면, 게임이 10대와 20대 사이에서 보편적인 대중문화 양식으로 자리 잡은 90년대 이후에는 게임에 대한 국가적인 규제와 미디어의 비판이 뒤따르게 되었다.
이러한 백래시 현상의 기저를 살펴보면 게임이 다른 매체보다 대중적으로 사랑받아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작용도 컸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2020년 대한민국 게임백서에 따르면 전 국민의 게임 이용률은 70.5%에 달한다고 한다.[2] 그 중 10대의 게임 이용률은 91.5%에 달하며 20대 85.1%, 30대 74.0%, 40대 76.6%, 50대 56.8% 등으로 거의 전 연령대에 걸쳐 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0년대 이후 한국 게임이 보여준 산업적인 성장과 양적 팽창은 다른 문화콘텐츠를 압도할 정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가진 자부심의 크기는 매우 작아 보인다.
2019년 5월 세계보건기구(WHO)에서 게임 이용 장애의 질병코드 등록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자 국내에서도 게임업계와 학계 및 협단체를 중심으로 이에 반대하는 여러 움직임들이 일어났다. 그 때 제기된 운동 중 하나가 주로 SNS를 배경으로 하여 ‘게임은 질병이 아닙니다. 게임은 문화입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거는 것이었다. 전 국민의 70% 이상이 여가 선용을 위해 플레이하는 게임이 대중문화 중 하나가 아닐 리가 없지만, 이러한 운동은 온라인에서 게임 사용자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연매출 15조가 넘어가는 게임 업계의 산업적인 기여 대부분은 확률형 아이템과 강화형 시스템을 통해 이룩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돈을 더 낸 사람이 게임에서 더 유리한 구조를 차지하는 ‘페이 투 윈(Pay to win)’ 시스템이 국내 게임시장의 주류가 되면서 그간 셧다운제, 쿨링오프제, 게임중독법 발의 등과 관련하여 항상 게임업계의 편이 되어주었던 사용자들의 성원이 이제는 게임 업계에 규제를 해달라는 청원으로 바뀌어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처럼 게임업계와 학계 및 협단체를 중심으로 제기한 ‘게임은 문화다’ 운동의 저변에는 그간 사회로부터 근본 천출의 문화로 취급받아온 억울함이 내재되어 있다. 게임을 만드는 쪽에서 ‘게임은 문화다’라고 주장해버리면서 그간 일반적인 사회 통념상 게임은 문화적인 결격 형태에 해당해 왔다는 것을 시인한 셈이기 때문이다. 확률형 아이템과 강화형 시스템이라는 국내 게임업계의 원죄가 존재했기 때문에 그러한 자격지심이 표출되었을 수도 있다. 다만 게임을 문화라고 주장할 수 있는 다양한 긍정적인 사례들이 대부분 해외의 사례였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게임 사용자들에게마저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업계 자체의 운동으로 끝나버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게임업계가 결연함만을 보여주는 대신 좀 더 의연하게 대처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게임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이 좋지 않은 것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게임을 단순히 문화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확률형 아이템 등에 대해 반성하는 자세를 보였으면 사용자들의 시선은 지금보더 훨씬 더 우호적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돈은 돈대로 벌고 싶고 문화로 인정도 받고 싶은 모순된 2가지 감정이 착종되면서 “게임은 당연히 문화가 맞는데, 왜 주변에 문화로 인정을 받아야 하지?”라는 의문이 생기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게임이 문제적인 매체가 된 것은 미구엘 시카트가 지적한 바대로 ‘게임이 행동을 유도하는 규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3]이다. 행동을 유도한다는 것은 게임을 다른 매체와 구분시켜주는 결정적인 차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행동을 유발하면서 연쇄적으로 게임 내의 다음 상황에 집중하도록 강제하는 역할을 한다. 다른 매체와 달리 게임은 플레이어를 위해 플레이어가 참여할 시공간의 빈틈을 만들어 놓고 그 틈을 플레이어로 하여금 채우게 만든다.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게임 속의 시공간은 자신이 들어가서 채워 넣고 행동해야 할 무대가 된다. 이 때문에 게임은 사용자들에게 참여할 공간을 마련해주면서 지속적인 몰입을 유도할 수 있는 환경을 창조해 냈다.
* 〈디스 워 오브 마인〉의 한 장면.
또한 게임 내에서 발생하는 행동은 필수적으로 가치의 평가와 직결된다. 게임은 작품 내에서 사용자들에게 특정한 행동을 하도록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특정한 행동을 촉구하는 주요한 설득적인 매체로 기능하게 된다. 최근 10년간 게임 플레이어를 대상으로 다양한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소셜 임팩트 게임(social impact games)의 창작이 급속도로 늘어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소셜 임팩트 게임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늘 언급되듯 <디스 워 오브 마인(This War of Mine)>이나 <미싱(Missing)> 같은 해외 사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국내에서도 제주 4.3사건의 비극성에 대해 초점을 맞춘 <언폴디드> 시리즈, 시리아 난민의 독일 정착 문제를 시뮬레이션 한 <21 데이즈>,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독립 운동을 벌였던 최재형 선생의 일대기를 조명한 <페치카> 같은 소셜 임팩트 게임들이 활발하게 창작되었고 주요 인디게임 공모전에서 입상을 해왔다. 게임의 표현력이 정교해지고 시스템적으로 플레이어를 설득하는 연출방식이 개발자들에게 공유되면서 이제 게임은 새로운 세대와 소통하고 그들을 설득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매체로 거듭나고 있다.
따라서 “게임은 문화인가?”라는 질문을 좀 더 상세하게 파고들기 위해서는 사실 먼저 ‘게임’과 ‘게이밍(gaming)’를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게이밍’이란 실제 게임을 플레이하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게임 플레이 주변에 전유되는 다양한 활동들 즉, 유튜브나 트위치로 게임 방송보기, 게임 웹진에서 게임과 관련한 정보와 소감 나누기 활동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게임은 그 자체로 일정한 가치를 지닌 문화상품이며, 게이밍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문화적인 행동 양식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게이밍이 보편적인 문화적 행동양식이 되기 전에는 이른바 오타쿠로 대표되는 하위문화(subculture)의 범주에서 주류 문화에 대한 대안형태로 존재했었지만, 지금과 같이 전 국민의 70% 이상이 게임하기 과정에 동참하는 상황에서 게임은 동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대표적인 대중문화 매체가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기존의 오타쿠로 대표되던 소속감 높은 하위문화적인 정체성은 다소 느슨하게 약화된 것이 사실이다.
비디오 게임에 온라인 네트워크 환경이 도입되면서 사용자들은 게임 내에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실시간으로 의견을 교환하는 사회적인 활동을 지속할 수 있게 되었다. 스마트폰의 도입 이후 이러한 게임을 통한 사회적인 활동은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일과 놀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매일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유튜브와 트위치, 디스코드에 모여 다른 사용자의 플레이를 감상하고 토론하며, 자신만의 엔터테인먼트를 새롭게 생산해낸다. 마인크래프트와 로블록스 같은 샌드박스나 메타버스 플랫폼에는 사용자들이 만들어 낸 수많은 서브 게임과 미션들로 가득하다. 최근의 게이밍 문화는 점점 혼자 플레이하는 스탠드 얼론(stand-alone) 게임에서 사용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끌어내는 방식으로 진화해 온 것이다.
최근의 메타버스 붐이 다시 일어나면서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보았던 <전뇌코일(電脳コイル)>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 작품은 2025-26년경 다이코쿠시라는 가상의 일본 소도시를 배경으로 이 도시로 전학 온 오코노기 유코와 아마사와 유코라는 두 여학생의 얽힌 인연을 다룬다. 2007년에 제작된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미래를 예견하듯 언제든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AR 안경이 작품 내의 주요 소재로 등장하게 된다.
이 작품의 결말은 AR 안경을 쓰고 이루어지는 놀이와 장난스러운 일이 등장인물의 연애 관계를 넘어 트라우마를 발생시키고, 이러한 과정에서 이를 사용하는 이들의 생명을 위협하게 되면서 파국을 맞게 된다. 부모들은 AR 안경을 압수해버리려고 하는데, 이 때 주인공인 유코와 그의 친구들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한 번 그 세계에 몸담아서 그 세계를 알아버렸기 때문에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는 게임의 세계를 이미 경험해버렸기 때문에 이제 게임 이전 시대로 되돌아 갈 수 없다. 그렇다면 게임이 만들어 낸 달콤함과 고통 모두를 인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만이 남아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