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게임, 게임 속 전쟁 그리고 비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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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5. 8. 10.
전쟁에 관한 소식을 언제 어디서든 즉각적으로 알 수 있는 시대다. 전쟁은 바로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지만, 그 사실을 떠올리지도 못할 만큼 우리 일상에 스며들어있다. 유튜브, SNS, 숏폼 등으로 노출되는 전쟁은 액정 너머의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관련 소식을 알고 싶을 때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손가락 하나면 충분하다. 이러한 부분에서 전쟁은 우리와 동떨어진 화제처럼 느껴지기만 한다.
그러나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으로 시작되는 대화는 늘 현실적인 걱정을 동반하는 것 같다. 전쟁이 일어나면 한국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징집 대상은 어떻게 선정될까? 그 상황에서 재산을 지킬 방법이 있긴 할까? 이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조금만 둘러봐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주제들이다. 이 이야기들이 결정적으로 묻고자 하는 건 하나 같이 안전이나 생존에 관련된다. 손가락 하나로 전쟁을 보고, 또 넘길 수 있게 되었어도 그것이 가져오는 파급력을 알기에 불안감 자체는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얘깃거리는 소위 남초 커뮤니티로 일컬어지는 곳에서 자주 확인되지만, 이 불안감이 비단 특정한 성별에만 적용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전쟁이 남성을 위주로 진행되어 온 역사가 있으며, 자연히 그에 관련된 요소들도 남성화되었다는 점이다. 비남성 또한 전쟁에 관여해 온 역사가 존재하나, 이들의 기여는 늘 남성보다 폄하됐다.
이러한 관점에서 게임과 전쟁은 어느 정도 유사한 부분을 보이는 듯하다. 게임은 전쟁과 여러모로 깊은 관계성을 맺고 있는데, 이 관계성은 2차 세계대전 즈음부터 시작됐다. 게임이 구동되는 매체인 컴퓨터가 2차 세계대전 전후로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지대한 발전을 이뤄온 컴퓨터는 우리 일상에 유용한 도구로 기능하는 건 물론, 오락 기기로도 활약하게 되었다. 이때 컴퓨터에서 즐길 수 있는 오락, 즉 게임은 도전하고 대결하는 것을 주요 콘텐츠로 삼아왔다. 우리가 게임의 대표적인 콘텐츠로 전투를 떠올리게 되는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 기인한 것일 테다. 더욱이 게임은 컴퓨터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점에서 나름의 기술력을 요구했기에,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게임에서 전쟁과 관련된 요소가 나타날수록 ‘남자가 하기 좋은 게임’으로 인정받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겠다. 전쟁과 게임, 남성(게이머)의 연계는 오늘날 너무나 자연화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하면 안 될 것이 바로 비남성(게이머)의 존재다. 이 연계 안에는 비남성 또한 분명히 자리하고 있다. 그를 의식했을 때, 다음의 질문이 나오게 된다. 남성성과 견고한 관계를 맺은 전쟁 게임 안에서 비남성 게이머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비남성에게 전쟁 게임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전쟁 게임이 이들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기에,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곳에 발을 디딘 걸까?
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전쟁’과 ‘게임’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전쟁에 대해서는 여러 관점에서 정의를 내릴 수 있겠지만, 그를 이미지에 한정 짓는다면 생각의 폭을 좁힐 수 있을 듯하다. 말이나 배를 타고 검과 창, 활 등의 무기를 사용하는 중세 전쟁의 이미지나, 군복을 입고 총과 대포를 쏘는 현대 전쟁의 이미지 같은 것들 말이다. 일반적으로 떠올릴만한 전쟁의 이미지라고 한다면 바로 이 두 가지 정도일 것이다. 이런 전쟁의 이미지들은 매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재현되는데, 게임도 그중 하나다.

<파이널 판타지 14> PVP 콘텐츠 ‘봉인된 바위섬’
이를테면 중세 전쟁의 이미지로, <파이널 판타지 14>의 PVP 콘텐츠인 ‘전장’을 들 수 있겠다. 24:24:24 삼파전으로 진행되는 <파이널 판타지 14>의 72인 전장은 거점 점령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그 과정에서 온 필드를 오가게 된다. 이때 연합 채팅에는 점령지가 스폰되는 시간과 그곳으로 이동하기 위한 경로가 연속적으로 올라온다. 맵에 간간이 나타나는 적의 움직임은 실시간으로 전략을 짜내기 위한 좋은 정보로 이용된다. 전투가 벌어지면 적은 물론, 팀의 역량도 함께 파악할 수 있게 되는데, 스킬 자원을 얼마나 축적했느냐에 따라 이 힘겨루기의 결과도 달라진다. 그렇게 수 번의 전투를 거쳐, 일정한 승리 횟수를 쌓으면 얻을 수 있는 ‘선봉장’이라는 타이틀은 전쟁에 숙달되었다는 걸 보여주는 증표와도 같다. 이 모든 요소는 중세 전쟁의 한 측면을 재현한 듯하다.
물론 <파이널 판타지 14>의 전쟁에는 현실과 관계없는 판타지가 상당수 가미되어 있다. 가장 대표적인 판타지 요소가 바로 힐과 부활이다. 이곳저곳에서 위협적인 공격이 몰아치더라도 플레이어들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전장에 뛰어든다. 여기에 죽음을 불사한다는 비장함은 없다. 왜냐하면 게임 안의 이들은 죽여도 죽지 않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들은 다수에게 공격받아도 즉시 치유되며, 행동 불가가 되더라도 5초 뒤 부활한다. 물론 행동 불가가 됨으로써 어느 정도의 페널티는 부과되지만, 몇 번의 죽음이 승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심지어는 그 죽음을 과감하게 감수하는 것도 전략이 될 때가 있다. 이런 판타지는 공격 한 번으로도 죽음에 이를 수 있는 현실의 전쟁과 아주 다른 모습이다.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II> 공식 이미지
이런 면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전쟁’이라는 키워드는 <콜 오브 듀티>나 <배틀필드>와 같은 게임이 더욱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게임들 또한 <파이널 판타지 14>와 유사한 판타지가 존재한다. 세이브와 로드가 플레이어를 완전한 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즉 현실의 전쟁에서는 없을 새로운 기회가 이 전쟁 게임들 안에는 존재한다. 아무리 실패해도 게임 안의 신체는 되돌아오며, 게임이 한 판 끝날 때마다 모든 상황은 리셋된다. 플레이어들은 게임을 클리어하지 못한 것에 아쉬워할지언정, 몸과 마음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상황에 맞닥뜨리지는 않는다. 이렇게 재시작하게 되었을 때 또다시 실패할까 봐 긴장하게 되지만, 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라기보단 게임 오버에 대한 경계에 가깝다. 다른 전쟁 게임들도 마찬가지다. 비명과 포격음은 BGM과 효과음, 기합 소리 등으로 대체되고, 마음에 들지 않는 판은 나가기 버튼으로 언제든 이탈할 수 있다. 전쟁 상황을 자유자재로 즐기는 플레이어의 모습은 게임 세계를 주무르는 신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렇게 판타지적인 부분이 다수 섞여있긴 하나, 게임은 전쟁이라는 콘텐츠와 우리의 감각을 즉각적으로 연결시킨다. 이는 플레이어가 직접 키보드를 치고 마우스를 움직이기에 가능해진다. 화면 너머 세상에 몰입하면서 발생하는 긴장감은 두려움만으로 채워지지 않고, 재미와 열의가 함께한다. 그 감각을 느끼는 데에 섹스나 젠더의 구분은 불필요하다. 하지만 <스타크래프트>나 <서든어택>, <리그 오브 레전드>와 같은 전국민적 인기의 전쟁 게임들을 떠올려보면, 그 주요 유저층은 늘 남성이라고 인식됐다. 이러한 선상에서 전쟁과 게임이 결합한 전쟁 게임이 ‘남자의 게임’처럼 인식되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 안에 비남성 게이머들이 존재하더라도, 전쟁/게임은 늘 남성의 영역이다. 이에 처음의 질문을 다시 불러오고 싶다. 비남성 게이머들은 왜 남성의 장르로 여겨지는 전쟁 게임에 발을 디디는가? 이들에게 전쟁 게임은 어떤 의미인가?
여기에는 저마다의 사유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저 재미있어서 플레이한다고 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성취감을 느끼기에 한다고 할 수도 있다. 또 누군가는 이런 게임이 유행해서 시작했을 수도 있고,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하게 됐을 수도 있다. 어쩌면 상당수는 전쟁 게임이라는 장르 자체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런 점에서 ‘비남성에게 전쟁 게임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애초부터 답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도 이 같은 질문을 던진 건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곳에 비남성들이 참여하게 되는 이유가 뭔지, 전쟁 게임의 무엇이 그들을 불러 모으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전쟁/게임의 속성에 대해서도 재고할 계기를 만들어준다.
더욱이 전쟁이라는 주제는 비남성을 향한 가해와 피해의 이야기가 자주 교차한다. 이때 보이는 ‘전쟁이 나면 보호해 주지 않겠다’, ‘전쟁이 나면 마음대로 강간하고 다닐 거다’와 같은 말들은 다분히 위협적이다. 전쟁이라는 키워드에서 폭발하게 되는 남성성은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경계하게끔 만든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키워드에 게임이라는 레이어가 얹어질 때, 이 위협은 사라진다. 남성성으로 대표되는 전쟁의 성질이 상당수 무화되는 것이다. 이 또한 다른 관점에서 포착할 수 있는, 전쟁 게임의 판타지적인 부분이다. 이러한 현상을 게임이 주는 원초적인 재미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결국 이 이야기는 현실과 게임의 경계가 어떻게 설정되는지, 게이머가 게임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로도 연결할 수 있다. 남성성의 영역으로 인식되는 게임, 그중에서도 전쟁 게임에 비남성이 뛰어들게 된 이유는 아직 일반화하여 보기 어렵다. 다만 게임이 현실을 어떻게 재현하는지, 그 안에서 발생하는 괴리는 무엇인지 고찰할 근거는 되어준다. 이러한 고찰을 거듭하다 보면 비남성과 전쟁/게임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 가능해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