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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듬 게임, 가장 빈곤해서 가장 자유로운(우수상)

07

GG Vol. 

22. 8. 10.

가장 빈곤한 게임 장르로서의 리듬 게임 


본고에서 우리는 〈비트매니아beatmania〉, 〈이지투디제이EZ2DJ〉를 필두로 해서 〈디모Deemo〉, 〈사이터스Cytus〉까지 이르는 리듬 게임을 게임 일반의 극한이 되는 형태로서, 정확히는 가장 빈곤한 게임의 형태로서 다루고자 한다. 다만 우리는 숱한 리듬 게임들을 하나하나 비평할 의도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고, 리듬 게임 전반에 공통된 요소를 가지고 다소 추상적인 수준에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다른 장르라면 지나친 단순화로 보일 이와 같은 장르 일반에 대한 비평은 리듬 게임 장르 특유의 빈곤함에 의거해서 가능해진다. 리듬 게임이 우리가 주장하는 것처럼 가장 빈곤한 장르라면 어떤 의미에서인가? ‘악보’에 맞추어 대응하는 ‘키’를 입력하는 것이 거의 전부인 이 단순한 장르에서는 자유가 전혀 허락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다. ‘타이밍’이 이 장르의 본질을 규정하며, 그 외의 모든 요소들, 예컨대 서사라든지 경험치라든지 하는 요소들은 이 장르에 대해 부수적이거나 장식적이다. 그런 요소들은 물론 몰입감을 더해주지만, 리듬 게임이 선사하는 쾌감에 불가결하진 않다. 


리듬 게임이 이처럼 빈곤하리만치 단순한 장르라면 과연 거기에 새삼 비평할 만한 가치나 분석할 만한 구석이 있을까? 세계universe 자체를 집어삼킬 기세로 다가오고 있는 광활한 메타버스metaverse의 시대에 하필이면 리듬 게임에 대해서 논한다는 것은 퇴행적이고 고루하게 보이지 않는가? 이것이 즉시 제기될 법한 의문이다. 리듬 게임에는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ゼルダの伝説 ブレスオブザワイルド〉처럼 완성도 높은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맛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쌔신 크리드Assassin’s Creed〉나 〈레드 데드 리뎀션Red Dead Redemption〉 시리즈처럼 다른 세계의 안으로 들어가는 맛이 있는 것도 아니며 〈스탠리 패러블The Stanley Parable〉처럼 내러티브narrative를 비틀어 플레이어로 하여금 철학적으로 각성하도록 유도하는 맛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리듬 게임이 현실에서는 드문 어떤 체험을 환상의 형태로 제공하는 것조차 아니다. 리듬 게임의 재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하지만 ‘플레이’라는 용어가 리듬 게임만큼 꼭 들어맞는 장르도 또 없을 것이다. 그 용어가 ‘연주’를 뜻하는 한에서 말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바로 그런 연유로 리듬 게임은 쉽게 냉소의 대상이 되곤 한다. 종종 이 냉소는 리듬 게임을 하고 놀 거라면 차라리 피아노, 드럼, 기타 등을 직접 연주하는 게 낫지 않느냐는 물음의 형태를 취한다. 실제로 리듬 게임인 〈락스미스Rock Smith〉로 기타를 익혀서 기술적으로는 뛰어나지만 악보는 전혀 읽지 못하고 스케일scale 같은 개념도 알지 못하는 기타리스트 세대가 등장해서 고전적인 방식으로 기타를 배운 세대를 당황케 만든 바 있다. 그러므로 저 냉소적 물음에 진리치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런데 곧이곧대로 보면 저 냉소는 리듬 게임이야말로 게임 플레이의 원초적 면모를 드러내고 있음을 함축한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현생現生을 살지 않고 게임을 하는가? 이런 의문은 현실보다 더 풍부하고 강렬한 체험,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체험을 제공하는 게임의 경우에는 별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리듬 게임의 경우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우리는 왜 악기를 직접 ‘연주’하지 않고 굳이 그 열화판처럼 보이는 리듬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일까? 현실이 게임보다 더 풍요로울 때조차도, 게임이 현실보다 더 빈곤할 때조차도 우리가 여전히 게임을 플레이한다는 사실을 더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즉 게임의 빈곤함을 단순히 현실에 비한 게임의 부족함이나 미진함 정도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빈곤함이야말로 게임을 더욱 게임답게 만드는 속성이라고 간주하여야 한다. 



리듬 게임에 고유한 유한성의 쾌감


악기 연주와 리듬 게임 플레이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빈곤함과 결부된 소진 가능성이다. 클래식이든 대중음악이든 실제 음악의 ‘악보’는 우리에게 거의 무한한 해석의 자유를 허락한다. 무음無音의 음악인 존 케이지John Cage의 〈4분33초〉조차도 그렇다. 그래서 하나의 곡을 두고도 그토록 다양한 연주와 변주가 등장하고 그토록 다양한 커버cover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즉 음악의 경우 악보는 소진 불가능한 객체다. 하지만 리듬 게임의 ‘악보’는 그렇지 않다. 리듬 게임의 최종적인 목표는 다름 아니라 악보를 완전히 소진시키는 데 있으며, 거기에는 별다른 해석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리듬 게임 장르를 두고 통용되는 유명한 경구 “빛이 나는 곳을 손가락으로 누르는 게 아니라 손가락이 가는 곳에서 빛이 난다”는 악보가 플레이어에 의해 완전히 학습되었음을, 따라서 완전히 소진되었음을 뜻한다.


관건은 이런 소진을 통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인식하는 데 있다. 우리는 앞서 리듬 게임은 빈곤하다고 말했다. 즉 리듬 게임의 플레이어에게는 선택의 자유나 운신의 폭이 별로 없다. 기껏해야 화면을 왼손 두 번째 손가락으로 누를지 세 번째 손가락으로 누를지, 아니면 발판을 오른발로 밟을지 왼발로 밟을지 정도를 결정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징검다리를 있는 그대로 따라가는 게 리듬 게임의 제일 목표이자 유일한 목표다. 이는 리듬 게임을 깨기 위한 왕도가 게임이라는 ‘타자’에게 ‘자기’를 완전히 내맡기는 데에,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타자의 ‘리듬’에 자기의 ‘리듬’을 동기화시키는 데에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이때 리듬 게임이라는 타자는 무한한 해석과는 거리가 먼, 전적으로 유한한 타자다. 즉 이론적으로 리듬 게임의 플레이어는 타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퍼펙트’한 판정으로 관통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현실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쾌락이다. 


현실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 및 다른 물건들과, 즉 타자들과 끊임없이 교섭하고 협상하면서 그 리듬에 나를 맞추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현실적 타자들의 리듬이란 무척 변덕스러운 것이고, 실제의 악보 사례가 보여주듯 심지어는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이 변덕스러움, 자유로움, 무한함은 결코 축복이 아니다. 타자의 리듬에 나의 리듬을 맞추고 동기화시키는 것은 기본적으로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사둔 요거트가 상하기 전에 챙겨 먹어야 하고 방금 받은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식기를 기다려야 하며 지하철역에 가득 들어찬 인파와 발걸음을 맞춰야 하고 오늘도 이어지는 상사의 일장연설에 적절한 ‘리듬’으로 맞장구를 쳐야 한다. 요컨대 이 현실 세계의 리듬은 나의 리듬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줄곧 나보다 느리거나 빠르다. 


이와 달리 리듬 게임은 이런 리듬의 괴리를 완전히 극복함으로써 타자와의 무결한 동기화가 가능하다는 일체감을 플레이어에게 선사한다. 이런 일체감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전능감에 가까울 수 있지만, 결코 타자에 대해 폭력적인 전능감은 아니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왜냐하면 이 동기화는 타자의 리듬을 나의 리듬에 끼워 맞추는 식으로 이루어지기는커녕 정반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리듬 게임에서는 오히려 내 쪽이 타자의 리듬에 굴복해야 한다. 곡曲을 소진시키고 ‘클리어’하기 위해서 나는 타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타자를 완전히 소화했고 완전히 이해했다는 쾌감, 타자와 완전히 동기화됐다는 쾌감은 오로지 게임에서만 적법하게 허락되는 것이다. 그것은 현생에서는 물론이고 다른 문화 영역에서도 무척 희귀하고 심지어는 금지되어 있기까지 하다. 예컨대 영화, 소설, 회화, 음악 등의 경우, 내가 그 작품을 완벽히 이해했고 그것과 완벽히 동기화되었다고, 그리고 그런 내가 보기에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단언한다면, 그런 식으로 그것을 소진시킨다면 아주 난폭하고 비윤리적인 짓일 것이다. 내가 어떤 대상의 진리와 전모를 완전히 파악했다는 단언은 해당 대상을 두고 무한히 전개될 수 있을 풍요로운 대화의 가능성 전체를 미리 차단하기에 그렇다. 하지만 리듬 게임의 경우에는 바로 그런 유한한 차폐가, 즉 ‘풀 콤보 퍼펙트 플레이’가 합법적인 목표로 제시된다. 해석의 자유나 변주의 가능성 같은 데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유한’하고 ‘폐쇄’적인 타자의 악보에 나의 리듬을 녹여 넣음으로써 완전한 동기화를 달성해야 한다. 



리듬 게임의 독특한 자유로움


물론 개방성 자체를 모사하는 것을 재미의 근거로 삼는 게임들이 있어서, 유한한 폐쇄성에 의해 가능해지는 완전한 동기화로부터 쾌감을 추출해 내는 리듬 게임과 대척을 이룬다. 아닌 게 아니라 근래의 게임 중 상당수는, 특히 장대한 서사와 드넓은 ‘오픈 월드open world’를 주요한 무기로 삼고 있는 게임들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다채로운 체험들을 가능케 만드는 데서 존재 가치를 확보하는 것처럼 보인다. 플레이어에게 마치 무한히 자유로운 것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가상假想을 선사하는 것이다. 


위에서 지나가듯 언급한 〈스탠리 패러블〉은 다름 아니라 무한한 자유라는 가상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오픈 월드 게임들에 대한 ‘이념적’ 풍자로서 성립한다. 내레이터narrator가 플레이어의 행동을 미리 앞질러 말함으로써 결국 그렇게 행동하게 만드는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내레이터의 지시대로 게임을 진행해서도 곤란하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곤란하다는 이율배반을 체험하게 된다. 플레이어가 마음대로 하려고 해도 내레이터는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말하며, 심지어는 버그처럼 생각되는 요소가 눈에 띄어 이용하면 그것조차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는 식으로 내레이터가 응수하는 이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플레이어는 결과적으로 자유라는 관념 자체를 의문시하게 된다. 〈스탠리 패러블〉은 이렇게 순조로운 내러티브라는 관념을 고장내고 게임 내부의 세계(“월드”)에 ‘자유롭게’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제 리듬 게임은 자유를 모사하기 위해 제작된 게임들에 대한 ‘물리적’ 논박으로서 〈스탠리 패러블〉을 보충한다. 오픈 월드 게임들에 대한 리뷰가 게임 내부의 세계 안에서 어디까지 용인되고 어디부터 금지되는지 실험해보는 과정을 필히 거친다는 사실은 그것들의 핵심적 재미가 무엇에 의해 산출되는지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게임이라는 대상을 향유하는 태세가 기본적으로 그것이 제공하는 모든 가능성을 샅샅이 탐사하고 소진시켜 보는 데 있음 역시 보여준다. 리듬 게임의 경우에 소진되어야 할 것이 악보라면 오픈 월드 게임의 경우에는 세계 자체일 뿐이다. 


동일 선상에서 흥미로운 점은 많은 수의 게임이 리듬 게임으로 환원될 수 있을 것처럼, 혹은 적어도 리듬 게임이 게임의 어떤 본질적 면모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 예컨대 유튜브에 많이 올라와 있는 〈슈퍼마리오Super Mario〉 시리즈의 타임 어택(-최단 시간에 게임을 클리어해서 엔딩을 보는 플레이) 영상들에서 고수들은 〈슈퍼마리오〉를 마치 리듬 게임처럼 플레이하는데, 이때 횡스크롤로 진행되는 〈슈퍼마리오〉의 스테이지는 〈비트매니아〉의 악보와 아주 유사한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스테이지의 설계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슈퍼마리오〉 고수는 악보를 외운 〈비트매니아〉 고수와 다를 바 없다. 둘은 모두 자신이 플레이하는 게임을 완전히 소진시킨 이들이다. 리듬 게임의 경구를 비틀어 인용하자면, ‘거북이가 오기 때문에 마리오가 점프하는 것이 아니라 마리오가 점프한 자리에 거북이가 오는 것’이다. 비단 〈슈퍼마리오〉의 경우에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단순한 부류부터 복잡한 부류까지 모든 게임에는 타자와의 동기화를 통한 소진이 전부인 국면, 즉 리듬 게임을 닮는 국면이 존재하며, 이는 게임의 재미 일반을 설명하는 건 아닐지라도 오로지 게임에서만 합법적으로 수용되는 쾌감이라는 점에서 게임 특유의 것이다. 


거듭 말하자면 리듬 게임은 빈곤한 장르다. 그러나 그 빈곤함은 게임 일반에 공통된 특정한 요소를 급진적으로 밀어붙임으로써 세공된 빈곤함이다. 가위바위보를 할 때조차도 우리는 상대와 ‘동시’에 손을 내밀어야 하고, “안 내면 술래”다. 동궤에서 리듬 게임은 유한하고 폐쇄적인 장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유한성과 폐쇄성 덕분에 우리는 극도의 해방감을 체험하게 된다. 그게 아니라면 타자의 리듬에 나의 리듬을 완벽히 동기화시키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한하고 개방적이고 유연한 실제의 타자와는 장단을 맞출 수 없다. 타자에게 나를 한 끗의 오차도 없이 딱 맞췄다는 감각, 그래서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되었다는 감각은 곧 나를 가장 굳건하게 속박하고 있는 ‘자기’가 소산消散되는 감각으로, 게임 외의 영역에서는 거의 느낄 수 없는 것이다. 리듬 게임은 빈곤하고 유한하고 폐쇄적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독특한 자유로움,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되는 이 자유로움을 맛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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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8대학교 LLCP 박사과정)

데카르트의 『정념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데리다 사유의 전개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작성하고 있다. 매체나 문화에 대한 철학적 비평에 관심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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