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된 공간의 지도화: 가상공간의 전시와 도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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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3. 4. 10.
“지도는 영토보다 흥미롭다.”1) 프랑스 소설가 미셸 우엘백(Michel Houellebecq)의 문장이다. 영토가 위상학적 차원에서 물리적인 땅과 장소를 가리킨다면 지도는 그 땅을 표상하는 이미지다. 지도는 왜 영토보다 흥미로운가?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의 평면으로 기호화 하는 작업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지도는 신체와 물리적인 공간을 서로 마주하게 만드는 일종의 ‘인터페이스’(inter-face)로 기능하며, 현상학적 맥락에서 분리할 수 없는 공간적 경험을 하나의 대상으로 삼게 만드는 매개가 된다. 아마도 우엘백이 말한 ‘흥미’는, 실재 세계를 매핑(mapping)하는 인식론적 태도와 세계를 이미지로 상상하는 형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항상 지도를 만든다. 그것은 미지의 세계를 발굴하는 모험적 가능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지배와 통치의 욕망이 투사된 이미지다. 게임에서 지도는 게임의 배경과 레벨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도, 즉 맵(map)은 플레이어의 무대가 되며 스토리 전개를 구성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게임맵은 플레이어의 행위와 게임 시스템 사이의 인터페이스로서 작동하며 플레이어의 움직임을 안내하는 이미지다. 미술의 영역에서도 맵은 전시의 맥락에서 중요한 위상을 가진다. ‘전시 도면’으로 불리는 미술에서의 맵은 공간에서 목적지를 찾거나, 단순히 관객에게 동선을 안내하는 기능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시 이전부터 이후를 관장하는 시공간적 설계이며 공간과 작품의 관계, 그리고 작품을 향한 관객의 운동성까지 설정하는 또 다른 인터페이스다.2)
인터페이스는 사전적 정의에서 ‘서로 다른 두 시스템을 접속’하게 하는 장치를 말한다. 상호작용을 기본 조건으로 하며 이질적인 대상을 어떻게 만나게 할 것인지에 관여하는 것이다. 사이를 매개하는 표면인 인터페이스 개념을 두고 던져야 할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인터페이스는 무엇과 무엇 사이에 놓여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그것들을 연결하는가? 게임에서 인터페이스는 인간의 행위를 소프트웨어와 연결시키는 과정에서 작동된다. 정보의 송수신을 넘어서 상호적으로 반응하는 체계를 드러내는 조건인 것이다. 오늘날 게임은 콘솔게임 같이 컴퓨터 모니터 시스템을 넘어 3차원의 가상현실, 증강현실, 혼합현실 등 메타버스의 세계에서 구성되고 있다. 그리고 메타버스는 게임뿐 아니라 미술 영역까지 깊숙하게 진입하는 중이다. 메타버스의 경제 안에서 현실과 가상이 경계 없이 혼합되고 있다면 우리는 두 장소가 어떤 방식으로 겹쳐지고 있는지 짚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글은 공간과 인간의 행위가 어떤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지 살피기 위해 게임의 문법을 빌려오는 당대 미술의 형식을 살펴본다. 특히 공간이 하나의 이미지로서 작동하는 메타버스 전시에서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의 이미지로 펼쳐낸 지도/도면 이미지를 어떻게 그릴 수 있을지 상상해본다.
지도가 일종의 접속면으로서 공간과 신체 행위를 매개하는 대상물이 된다면, 게임에서 공간은 어떤 방식으로 플레이어의 경험을 유도하는가? 게임과 미술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관심을 방향 짓고 경험을 구조화 하기 위해 규칙들을 사용한다. 게임의 디자이너는 특정 종류의 규정적 활동을 조형하고 안정화된 경험에 관한 규정을 세운다.3) 이 규정은 게임 맵을 통해 구성되곤 하는데, 특히 2000년대 이후 어드벤처(adventure)류 게임은 하나의 스토리를 기반으로 주인공이 겪는 모험을 구성해왔다. 주인공은 몇몇 한정된 장소들을 돌아다니거나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챌린지를 넘어서는 방식으로 게임을 진행한다. 이때 게임맵은 게임의 배경을 설명하는 주요한 이미지로서 주인공의 모험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요한 역할을 하곤 했다.
한편, 오늘의 대다수 게임 공간은 3차원의 이미지로 나타나는 추세다. 현실의 모습을 본 따오거나, 도시의 랜드 마크, 도로 등 풍경을 그대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플레이어의 경험을 사실적이고 정교하게 설계하는 것이다. 과거 게임맵이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길을 잃지 않도록 주인공의 여정을 기록하고 안내하는 기능을 했다면, 오늘날 3D 애니메이션으로 시뮬레이션 된 게임은 게임의 공간을 단번에 파악 수 있는 맵을 제공하기보다 플레이어가 직접 공간을 탐색하면서 방향과 장소를 찾도록 설정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당대 게임맵은 플레이어가 공간을 스스로 탐험하면서 게임의 단계를 파악하게끔 유도한다.
이러한 방식은 게임 플레이어에게 게임의 목표 설정과 스테이지를 직접 설정할 수 있도록 방향키를 건네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게임이 ‘의사소통의 기술’이라고 할 때, 게임의 형식은 모종의 규칙과 규정을 필수조건으로 둔다.4) 플레이는 행위성의 양상 및 활동의 형식을 서로 상호 참조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구조화 되는 것이다. 즉 마치 빽빽한 나무 사이로 길을 잃게 만드는 숲처럼, 게임은 한눈에 파악하기 어려운 낯선 공간을 구축하지만, 게임의 정해진 규칙과 방향성은 결코 플레이어를 방황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물론 룰을 따를지 말지는 플레이어의 몫으로 남겨둔다. 하지만 게임은 질서화 된 공간이 안내하는 특정 서사를 통해 플레이어의 몰입을 유도한다. 그곳에서 설명되지 않는 공간은 없다. 버그가 아닌 이상.
미술에서 지도에 준할만한 것은 전시 도면이다. 게임맵이 플레이어에게 따라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한다면, 전시 도면은 구체적이거나 단일한 지시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도면은 마치 여러 악보를 한데 모아 전체 곡의 구성을 파악할 수 있게끔 그려놓은 스코어(score)처럼 기능한다.5) 말하자면 그것은, 개별 작품의 위치로부터 전시라는 하나의 풍경을 상상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이미지다. 하지만 2차원으로 펼쳐진 전시 공간에 개별 좌표를 기입해두는 방식의 전시 도면은 ‘대상 중심적’(object-centered)이었던 전통적인 예술 작품 형식에 적합하다. 특히 전시 도면이 단순히 작품의 위치를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인터랙티브 아트(Interactive art), VR 등 관객의 포지션이 중요한 작품을 하나의 좌표값으로 환원하기는 까다로워 보인다. 관객의 참여까지 작품의 일부로 확장한 까닭에 작품의 공간적인 범위와 기준이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 기술 기반의 작품이 예술의 큰 조류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다양한 입력 센서와 인터페이스의 발전에 따라 작품은 더 이상 완결된 형태로 관객에게 다가서지 않으며,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와 개입을 유도하기 시작했다. 작품의 의미 생산과 ‘출력’값은 관객의 ‘입력’으로부터 산출되는 것이다. 관객의 움직임이라는 물리적인 행위는 카메라 기술과 이미지 처리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컴퓨터 시스템과 상호 작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예술의 형식은 게임의 덕목을 닮아있다.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어떤 경험(gamer experience)을 부여하느냐에 집중하는 것처럼 인터랙티브 형식의 작품 역시 관객과 어떻게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내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터랙티브 아트는 전시라는 특수한 맥락 안에서 관객의 물리적 경험을 현상학적 차원에서 다루기보다 단편적인 행위만을 포착하고 투사하는 방식으로 반복되곤 한다.
이러한 반복은 작품에 대한 이미지적인 경험이라기보다 이미지 출력을 바라보게 하는 체험 수준에 머문다. 경험에 대한 예술의 갈망은 이후 여러 인터페이스의 발달과 함께 VR 기술을 예술의 형식으로 확장시키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이용한 상호작용과 달리 VR 기술은 현상학적인 차원에서 관객의 공간적 경험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작품과 물리적 행위의 상호성을 구성한다. HMD(Head Mount Display)를 착용한 관객은 자신의 신체로 실제 공간을 수행하는 동시에 이미지가 구축해놓은 가상공간을 활보한다. 3D 컴퓨팅 기술의 발전과 HMD의 상용화 및 보급으로 더욱 정교화 되고 있는 VR 경험은 가상공간에서 작품에 관한 몰입적 환경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새로운 기술 경험에 대한 가능성이 아니라, 관객이 공간과 관계 맺는 방식이다.
역사적으로 미술은 관객이 작품으로부터 거리를 어떻게 유지하는지를 탐구해왔다. 회화, 조각, 설치, 영상 등 어떤 형식이건 간에 전시라는 특수한 시공간에 작품을 위치시키는 것은 관념적 이미지를 어떻게 물질적인 차원에서 다룰 것인지에 관한 실험이다. 하지만 VR 기술이 작품의 형식으로 도입되면서 전시는 물리적인 공간에 가상의 이미지 공간을 겹쳐놓기 시작한다. 공간을 그려낸 전시 도면이 포착하지 못한 또 다른 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공간 안에 중층된 새공간. VR 작품을 표기하고 있는 도면은 실상 작품의 위치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작품으로 진입하는 장치 혹은 출발점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관객은 물리적인 공간과 이미지 공간 사이를 거닐며 자신의 행위를 기입한다. 이러한 형식은, 게임 디자이너가 어떻게 인간 경험의 일부를 공간에 기입하고 기록할 것인지 고민하는 지점에서 게임의 방법론과 닮아있다.6) 특수한 물리적 행위가 어떻게 게임의 특정 규칙 및 목표와 상호작용하는지 질문하면서 공간을 디자인하는 게임의 특징과 유사한 것이다. 이때 특정한 서사를 기반으로 구체적인 목표가 설정되는 게임 형식과 달리 VR 작품으로 기획된 전시 형식은 관객으로 하여금 따라갈 서사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미지 혹은 작품을 파편적으로 흩뿌리며 관객으로 하여금 새로운 서사를 조합하고 구축하기를 제안한다.
이쯤에서 작년 하반기에 개최된 《닷과 대쉬의 모험》(2022, 엘리펀트스페이스)을 살펴보자. ‘버추얼 멀티플레이’라는 수식을 단 전시는 ‘규칙’과 ‘플레이’라는 키워드를 바탕으로 가상현실에서 예술 작품을 경험하도록 기획되었다. 버추얼 소셜 플랫폼 ‘Figro’와 물리적인 공간에서 두 달간 진행된 전시는 어드벤처류 게임의 구성을 따라간다. “가상현실의 접속자는 단순 이용자를 넘어 미래의 현실을 탐색하는 탐험자로서 다양한 관계 맺음을 시도”한다는 기조를 내세웠다.7) 네트워크로 연결된 현실에서 작품을 경험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는 것이다.
전시는 2인이 참여하는 구성이며, 플랫폼에는 세 개의 작품이 있다는 안내원의 설명과 함께 시작한다. HMD를 착용하고 플랫폼에 들어서면 푸른 초원이 보인다. 저 멀리 작품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빛이 있다. 소목장세미의 〈환대의 재개장〉, 이해강의 〈느영나영〉, 임영주의 〈빙〉. 총 3인의 작가의 작업이 숲 속의 오두막처럼 위치한다. 이들은 하나의 메타버스에서 각자의 시나리오를 구축하고 있는데, 관객은 HMD 기기를 착용한 채 작품의 서사를 따라간다. 작품이 개별적으로 서사를 구축하는 한편, 전시에서 규칙과 서사를 발견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전시가 개별 작품의 나열이 아라 작품 간의 충돌로 인해 발생한 하나의 사건이라 할 때, ‘모험’을 표방하는 전시는 관객/플레이어로 하여금 어떤 방식으로 챌린지를 던져주는가? 개별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서, 전시가 가공한 세계에서 사건의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작품은 지도에 없는 섬처럼 표류하며, 그사이를 오가는 관객의 어지러운 방황이 시작된다.
전시에서 지도, 즉 전시 도면이 공간 속에서 관객의 포지션을 이해하게 하는 일종의 인터페이스라고 한다면, 메타버스 전시에서 도면은 어떤 방식으로 그려져야 할까? 아니, 애초에 이미지로 표현된 공간을 설명하는 또 다른 이미지가 필요한 걸까? 이 질문은 우리가 가닿을 수 없는 공간을 표기해야 한다는 지배 욕망에 기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메타버스라는 가상의 세계에서 관객의 자리와 위상에 관한 물음이다. 메타버스는 단순히 기술적으로 구현된 가상세계가 아니다. 이 세계는 디지털 디스플레이 안에서 시간과 공간의 개념적 확장을 실험한다. 메타버스를 정처 없이 배회하는 관객을 위해 지도가 필요하다면, 메타버스 공간은 어떤 방식으로 이미지화 되어야 하는가? 밀도 높은 이미지, 점점 더 리얼해지는 이미지가 공간에 자꾸만 레이어를 쌓고 있다. 이 중층의 이미지들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이미지를 공간화 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공간이 이미지화 되는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말하자면 공간을 무한하게 확장하기에 앞서 우리가 그곳을 상상하는 방식을 살펴볼 때다. 무섭게 선명해지는 이미지, 증식하는 레이어, 시뮬레이션 되는 세계. 다시 우엘백의 문장으로 돌아가 본다. “지도는 영토보다 흥미롭다.” 지도가 실재하는 영토에 관한 상상으로부터 그려진 이미지라면, 우리를 흥분시키는 것은 언제나 현실 혹은 실재 자체가 아니라 그로부터 상상된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