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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란으로 643개 검색됨

  • [Editor's View] 기술의 후예로서, 혹은 기술의 관찰자로서

    디지털게임은 기술매체입니다. 아마도 현재까지, 그리고 근미래까지도 당분간은 가장 첨단의 기술을 활용해 인간이 삶과 사고를 그려내는 매체로는 게임이 유력할 것입니다. 아니, 달리 말하자면 첨단의 기술들을 통합적으로 활용해 만드는 앞으로의 모든 미래 매체들을 우리는 게임, 혹은 게임의 연장선상에 있는 매체로 부를지도 모르겠습니다. < Back [Editor's View] 기술의 후예로서, 혹은 기술의 관찰자로서 24 GG Vol. 25. 6. 10. 디지털게임은 기술매체입니다. 아마도 현재까지, 그리고 근미래까지도 당분간은 가장 첨단의 기술을 활용해 인간이 삶과 사고를 그려내는 매체로는 게임이 유력할 것입니다. 아니, 달리 말하자면 첨단의 기술들을 통합적으로 활용해 만드는 앞으로의 모든 미래 매체들을 우리는 게임, 혹은 게임의 연장선상에 있는 매체로 부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술과 게임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디지털 기술이 들어오기 이전의 핀볼과 같은 기계부터 VR에 이르기까지 게임의 방식은 언제나 기술적으로 가능한 무언가와 연동되어 왔습니다. 1980년대 이후 연산장치의 급격한 발달 과정은 디지털게임의 발전과 같은 궤적에 놓였으며, 여러 올드게이머들이 경험하신 것처럼 때로는 최신 게임의 원활한 구동을 위해 다음 세대의 하드웨어와 기술을 작동시킬 수 있는 더 강력한 하드웨어를 필요로 하는 역전도 자주 발생한 바 있습니다. 그런 기술과 게임의 관계를 이야기하기 위해 GG가 던지는 질문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발전하는 기술은 우리의 게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쳐왔는가이고, 또 다른 각도에서의 질문은 그런 디지털게임은 게임 안에서 기술을 어떻게 재현하고 다뤄 왔는가입니다. 전자가 기술의 후속이라면, 후자는 기술에 대한 해석이자 예언일 것입니다. 게임 속에 비춰지는 기술의 변화와 기술을 통해 변화하는 게임의 외양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하며 우리는 다시 한 번 게임과 기술이 갖는 불가분의 관계를 곱씹어 봅니다. 21세기가 열린 이후 기술의 발전은 더욱 가파른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고, 이러한 발전은 동시에 고도화하기 시작한 자본주의 시스템의 눈길을 끌며 오늘날 기술 발전을 이윤이라는 측면에서 보는 시각을 중심에 두도록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GG는 비평웹진이고, 그러한 자본의 시선 바깥에서 게임과 기술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이번 호에서 꿈꿔 봅니다. GG는 올해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비평공모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GG와 함께 해 주실 많은 분들의 참여를 기다리며 공모전 준비가 완료되는 대로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드림.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인터뷰] DRX 무릎이 말하는 게이머와 조이스틱의 관계

    그렇다면 조이스틱에서 발생하는 감각과의 경험을 생생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오랜 기간 세계 최정상급으로 활동하고 있는 격투 게임 프로게이머라면, 아주 미묘한 감각과 게임 간의 상호작용을 더 면밀히 이야기해줄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십여 년간 탑 티어를 놓지 않으며 수많은 게임기기를 이용해본 게이머라면, 조이스틱의 변천에 따른 감각적 차이를 잘 설명해주지 않을까? 이러한 기대를 품고 이번호에서 편집장은 글로벌 이스포츠 전문기업 DRX 소속 철권 프로게이머인 '무릎' 배재민 선수를 만나고 왔다.  < Back [인터뷰] DRX 무릎이 말하는 게이머와 조이스틱의 관계 11 GG Vol. 23. 4. 10. 일찍이 마셜 매클루언(Herbert Marshall McLuhan)은 미디어를 신체와 감각기관의 연장이라고 보고, 발달하는 기술이 인간의 감각기관을 확장시키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굳이 복잡한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게임 인터페이스에 활용되는 기술들이 게이머의 감각을 게임 속 캐릭터와 연결시킨다는 점은 쉽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인터페이스들을 통해, 게이머의 눈은 게임 속 세상을 인지하고, 게이머의 손은 게임 캐릭터의 신체를 제어한다. 게이머의 아주 미세한 움직임 하나가 게임 캐릭터에 엄청난 영향을 주기도 하기에, 감각과 게임의 연결은 모든 게임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으로 감각과의 연결이 중요한 게임 장르를 꼽는다면 ‘대전(對戰) 격투 게임’이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프레임 단위로 상대방의 움직임을 읽고, 반응해야 하는 격투 게임에서 조이스틱이나 패드는 게이머의 감각을 극한까지 받아들인다. 그리고 게이머의 반응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게임의 내용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게이머의 경험까지도 변화시킨다. 그렇다면 조이스틱에서 발생하는 감각과의 경험을 생생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오랜 기간 세계 최정상급으로 활동하고 있는 격투 게임 프로게이머라면, 아주 미묘한 감각과 게임 간의 상호작용을 더 면밀히 이야기해줄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십여 년간 탑 티어를 놓지 않으며 수많은 게임기기를 이용해본 게이머라면, 조이스틱의 변천에 따른 감각적 차이를 잘 설명해주지 않을까? 이러한 기대를 품고 이번호에서 편집장은 글로벌 이스포츠 전문기업 DRX 소속 철권 프로게이머인 '무릎' 배재민 선수를 만나고 왔다. 편집장: 너무 유명한 선수를 모셔서, 굳이 소개를 부탁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웃음) DRX 무릎 선수는 오랫동안 대전 격투 게임에서 최정상급 위치를 유지해 오시면서 다양한 컨트롤러들을 만져보셨잖아요. 혹시 가장 처음 만져본 게임 컨트롤러가 무엇인지 기억나시나요? DRX 무릎: 맨 처음으로 만져봤던 건 오락실에 달려있는 기계였어요. 편집장: 혹시 어떤 게임인지도 기억하세요? DRX 무릎: 제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했던 게임이라서.. 아마.. 그 당시에는 〈스트리트 파이터 2〉였던 것 같아요. 당시에 동네에 오락실이 있었는데요. 아버지랑 목욕탕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가 ‘구경시켜줄까?’ 해서 들어갔었는데, 오락기가 일렬로 쭉 있더라고요. 다 처음 보는 거라서 너무 신기했는데, 당시에는 게임 제목을 오락실 사장님이 직접 써서 붙여놓으셨어요. 편집장: 맞아요. 매직으로 보통 써놨었죠. (웃음) DRX 무릎: 네. 매직으로. 그때 정확하게 〈스트리트파이터 2〉라고 안 되어 있었고, 그냥 ‘장풍 2’라고 쓰여 있었는데, 그 당시에 무협 영화가 엄청 유행하던 때라 장풍은 알았죠. 그렇게 ‘장풍2 해보고 싶다’고 해서 했던 게 (컨트롤러를 만져본) 처음이었어요. 편집장: 당시에는 커맨드를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니지 않나요? DRX 무릎: 네. 그냥 막 눌렀죠. 편집장: 그러면 당시에 왼쪽에 막대기가 있고, 오른쪽에 버튼이 있는 구조를 그때 처음 보신 거잖아요? DRX 무릎: 네. 그렇죠. 그 이후에 게임에 빠져서 게임기를 사주신 게 ‘제믹스’라는 게임긴데, 그거는 패드처럼 돼 있었어요. 편집장: 그러면 처음에 스틱을 잡으시고, 이거를 전후좌우로 움직이면 캐릭터가 움직인다는 걸 되게 어렸을 때부터 익히신 건가요? DRX 무릎: 그렇죠. 당시에는 게임기에 상하좌우 이렇게 적혀 있었거든요. 레버 방향 같은 거를. 그거 보고 조작을 하면서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대전 격투 게임이 움직임이 좀 자유롭잖아요? 그래서 잘은 모르겠지만 그냥 점프하고 싶다 하면은 그냥 (레버를 위로 올리는 손동작을 하며) 이렇게 했어요. 그러면 점프를 하더라고요. 편집장: 어떻게 보면 거의 초등학교 입학 전에 한글을 배우는 것과 비슷한 과정이군요. 특히 〈스트리트 파이터〉와 같은 계열은 스틱 커맨드가 있잖아요? 그래서 처음에는 장품 같은 걸 쏘는 것도 사실은 어려운데, 따로 어디서 배우신 거예요. 아니면 이렇게 움직여보다가 익히신 거예요? DRX 무릎: 처음에는 아예 모르니까 그냥 버튼만 누르고 그러다가 나중에 오락실 가서 알게 됐죠. 어떤 분이 쓰는 것 보고 물어봤어요. ‘이거 어떻게 쓰는 거예요?’하고. 편집장: 생각해보면 예전에는 기술을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어느 순간 보면 다들 쓰고 있었죠. 잡지 같은 데 기술표가 정리되긴 하지만, 다들 잡지를 사서 보는 건 아니니까요. 그러면 구전처럼 기술이 전해졌던 것이군요. DRX 무릎: 네. 오락실에서 어떤 아저씨가 알려주기도 하고, 뒤에서 손 보고 따라하기도 하고 그랬죠. 물론 아저씨라고 했지만 그때의 제 시각이니 사실 대학생일 수도 있고요. 편집장: 그러면 오락실 스틱부터 제믹스 콘솔까지 잡아보시고, 이후에도 정말 다양한 스틱들을 잡아보셨을 텐데, 지금 현재 쓰고 있는 스틱이 어떤 것인가요? DRX 무릎: 지금은 이제 조이스틱을 쓰고 있거든요. 음.. 저는 사실 다른 거를 쓰려면 쓸 수는 있지만, 이게 너무 익숙하고 너무 자유로워서 저는 딱히 다른 걸로는 안 바꾸게 되더라고요. 편집장: 격투 게임이 또 오래된 논쟁이 ‘키보드로 우승할 수 있는가?’ 이런 얘기도 있는데, 다른 기기들은 손에 잘 맞지 않으셨나보군요. DRX 무릎: 네. 일종의 세대 차이가 있지 않나 싶어요. 저는 오락실 세대라서 이게(조이스틱) 너무 익숙하고, 지금 사람들은 이게 너무 불편하다 그러더라고요. 그리고 나라마다 다른 점도 있는데요. 해외 같은 경우는 패드를 많이 쓰더라고요. 뭐.. 그 이유는 사실 되게 단순한데, 스틱이 비싸서. 플스(플레이스테이션)를 사면 패드가 딸려오고, 그걸로 하다 보니까. 그런 이유가 크더라고요. 그리고 해외에 오락실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있긴 해도 차를 타고 엄청 멀리 가야 한다거나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 같아요. 편집장: 한편으로 오래된 격투 게이머분들은 그런 차이도 되게 민감하시잖아요. 예를 들어 무각이냐 사각이냐 같은. DRX 무릎: 네. 그것도 많이 다르죠. 되게 옛날에는 팔각도 있었고요. 사각 같은 경우는 거의 일본 오락실에서 많이 쓰는 건데요. 우리나라는 애초에 오락실에 대중적으로는 팔각이나 무각 레버가 달려 있으니까 시작을 이걸로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이게(무각이) 너무 익숙하고, 사각은 잡는 레버라고 해야 할까요? 그게 너무 짧아서 불편하더라고요. 편집장: 잡는 방식도 서로 다르지 않나요? DRX 무릎: 네. 정말 각자가 편한 대로 잡더라고요. 누구는 이렇게 잡고, 누구는 이렇게 잡고(아래 사진 참조). 뭔가 정답이 있다기보다는 자기 손에 맞는 대로 각자가 다른 것 같아요. * 무릎이 묘사했던 여러 조이스틱 파지법. 실제로 오락실에 가면 여러 방식의 파지법을 볼 수 있다. 편집장: 어떻게 스틱을 잡든, 사실 게임에서는 캐릭터와 혼연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런 점에서 기판마다 차이점이 있나요? DRX 무릎: 음.. 공식 기판이 아닌 비인가 기판을 쓰는 스틱들이 있거든요. 일단 그런 것을 해보면 확실히 입력이 느린 느낌이 납니다. 예를 들어서 게임 시작하자마자 상대랑 같이 버튼을 눌러도 약간 미세한 차이가 있어요. 편집장: 혹시 그러면 대회 같은 곳에서도 비인가 기판이 나오는 경우도 있나요? DRX 무릎: 되게 예전에는 그것들이 나온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플레이스테이션 4부터는 비인가 스틱을 오래 쓸 수가 없어요. 8분인가 쓰면 갑자기 연결이 끊겨 버려서 게임이 안 되죠. 편집장: 정말 모르는 세계가 많군요. 저는 가끔 격투 게임의 세계가 무협지 같다는 생각을 해요. 파키스탄 가셨던 이야기를 보면 이것은 무협지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웃음) 은둔고수를 찾아나서는. 그런 맥락에서 스틱을 잡는 행위를 일종의 수련 단계로 설명할 수 있는 지점이 있을까요? 그러니까 스틱에 익숙해지는 단계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각의 단계라고 할까요? 스틱을 오래 잡고 있으면 점점 깨닫는 바가 있다거나 그런 점이 있을까요? DRX 무릎: 어려운 커맨드나 레버로 할 수 있는 단축 커맨드 같은 것들을 더 알게 되고 익숙해지는 지점은 있는 것 같아요. 편집장: 그러면 격투 게임을 함에 있어서 초보가 겪는 몇 가지 장벽들에 대해서 대표적인 것들을 이야기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DRX 무릎: 보통은 대각선을 제일 어려워합니다. 무각 레버는 사각처럼 확실하게 들어가는 공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대각을 입력하라고 했을 때, ‘대각이 도대체 어디예요?’ 이런 얘기도 되게 많고요. 그리고 횡신을 할 때 (레버를) 위로 당기라고 해서 힘을 주는 경우도 많아요. 그러면 점프를 하거든요. 횡신은 힘을 조절해서 약간 레버를 튕기듯이 해야 하는데, 그런 것도 많이들 어려워하시죠. 편집장: 그러면 저 같은 초보가 모여서, 횡을 배우겠다고 하면, 어떻게 가르치실 것 같으세요? 이게 말로 설명이 될까요? DRX 무릎: 그렇죠. 어렵죠. 저라면 일단 횡신 같은 경우에는 ‘레버를 위로 올린 다음에 손을 떼라’ 약간 이런 식으로 설명할 것 같긴 해요. 그래야 힘이 빠지고 튕기면서 횡이 나가거든요. 편집장: 이런 맥락에서 무림의 영역이 떠오른 것인데요. 머리나 말로 인지하는 것과 다르게 몸이 익혀야 하는 지점이 있잖아요. 그러면 얼마나 게임을 해야 몸에 익을 것인가라는 궁금증이 있는데, 무릎 선수는 원하는 타이밍에 원하는 기술을 하실 수 있으시잖아요. 그것까지는 보통 얼마나 걸릴까요? DRX 무릎: 요즘 분들은 그래도 한 3개월 이상 하면 대부분 사용하실 수 있을 거예요. 한 달 정도면 본인도 어느 정도 기술을 다 사용할 수는 있지만, 조금 미숙하다는 걸 알고 있는 정도고. 한 3개월 하시면 (상대방의) 심리를 모른다뿐이지 기술 같은 거는 다 쓸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편집장: 사실 격투 게임이 피지컬로만 다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상대방의 반응을 보고 막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요즘도 논란이 되고, 전에 영상에서도 말씀하신 것을 본 적이 있는데요. 그 지점에서 상대방 스킬을 보고 판단하는 심리적인 시간과, 그 판단 이후에 반응을 하는 손과 뇌의 시간 중에서는 어느 쪽이 더 무게가 있을까요? DRX 무릎: 제가 생각할 때는, 동체 시력보다는 머릿속에 입력된 정보가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든요. 아무리 반응 속도가 빠른 스포츠 선수를 데려다 놓고 철권을 시켜도 기술을 모르기 때문에 반응할 수 없을 거예요. 단순히 날아오는 공 같은 것이 아니고, 머리에 ‘이 기술은 하단이다’라는 정보가 있어야 모션을 보자마자 (레버를) 딱 당기는 거거든요. 근데 이것도 제가 봤을 때는 어느 정도 발동 프레임이 정해져 있어요. 사람이 보고 반응할 수 있는. 그 이하로 가면 사실 감으로 막는거죠. 적정 프레임이면 보고 입력된 걸로 하고 막을 수 있겠지만요. 편집장: 확실히 격투 게임에서는 경험을 통해서 경험치를 축적하고, 감으로 움직인다고 밖에 설명이 안 되는 영역도 존재하죠. 그런 지점에서 무릎 선수의 플레이가 감탄이 나오는 것은 한 두세 번 상대해보고 상대방의 움직임을 읽으시던데요. DRX 무릎: 왜냐하면 게임을 하다 보면 본인만의 스타일, 자주 쓰는 타이밍이라든가 공격 패턴이 있어요. 그거를 감추는 것은 사실 쉽지 않아서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편집장: 프로 격투 게이머로서 일정한 커리어를 만들어가는 데는 사실 경험이 피지컬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DRX 무릎: 네. 그게 제일 중요하죠. 아무리 잘하는 사람이라도 평소에는 잘하다가 대회만 가면 긴장해서 제 실력을 거의 내지도 못하는 경우도 있고요. 편집장: 또 캐릭터가 또 한두 개가 아닌데 그 패턴을 다 파악하고 그게 머릿속에 들어 있으면서 재깍재깍 나와줘야 하는 거니까. 그러면 초보 게이머들은 그런 변명을 합니다. “내가 피지컬이 너무 안 돼서 못 하는 거다”라고. DRX 무릎: 거의 그렇게 많이들 생각하시죠. 사실 그 지점은 반복 연습으로 뚫어야 하는 건데... 사실 즐기면서 게임을 하시는 분들은 반응해야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공격 패턴 같은 걸로 상대를 이기는 게 재밌는 것 같아요. 접근하는 방식의 차이죠. 편집장: 확실히 그런 지점에서 경험이나 감각이 중요하겠죠. 다시 좀 스틱 얘기로 돌아가면, 무릎 선수는 지금까지 여러 컨트롤러를 쓰셨을 거잖아요. 그러면 여러 스틱을 만지셨을 건데, 그중에 나한테 정말 잘 맞았던 뭔가가 있었다는 것이 있을까요? DRX 무릎: 제 기준에서는 잘 맞는 거는 어느 정도 레버랑 버튼의 배열이 약간 좀 공간이 있는 거라고 해야 할까요? 손이랑 버튼 위치가 좀 잘 맞는 스틱들이 있었어요. 이런 것들은 되게 게임하기 편했거든요. 그리고 레버의 탄성 같은 게 너무 강하면 게임을 하다 쉽게 피로가 쌓여요. 그래서 어느 정도 적정한 탄성의 스틱이 굉장히 잘 맞았죠. 편집장: 내 손에 맞는 편안함 같은 것들이 실제 퍼포먼스에도 영향이 크게 가나요? DRX 무릎: 아무래도 연습도 해야 하고 대회를 나갔을 때도 굉장히 긴 시간 동안 게임을 하게 되는데, 조작이 빠르고 많은 동작들을 넣어야 되다 보니까 손목이 굉장히 피로하거든요. 잘 맞는 레버로 게임을 하면 장시간 게임에도 멀쩡해요. 그런 점에서 차이가 있고, 조작이 굉장히 많이 들어나는 캐릭터를 하게 되면 하기 어려운 게 있어요. 편집장: 그러면 여러 컨트롤을 만지면서 이것은 그냥 기계가 아니라, 내 신체의 일부같이 여겨지는 그런 순간도 있으셨나요? DRX 무릎: 정말 잘 맞는 레버 같은 거를 만지게 되면, 기술이 정말 잘 나가요. 그런 것들 만나면 되게 좋았고. 지금 시대는 사실 본인한테 맞는 스틱을 구해서 쓸 수 있지만, 옛날 오락실 같은 경우는 그냥 달려있는 걸 썼었잖아요. 그러면 예를 들어서 기계가 한 네 대 있다고 쳤을 때, ‘저기서 두 번째 기계가 제일 잘 맞다’ 그런 것들이 있었죠. 편집장: 그것도 사실 오락실 주인이 정비를 하실 텐데 튜닝에 따라서 조금 또 스타일이 바뀔 수도 있는 거겠네요. DRX 무릎: 예전에는 몰랐지만 지금 봤을 때는, 고무의 탄성을 조금만 바꿔도 입력하는 느낌이 다르고요. 안에 있는 헤드 사이즈라고 하는 게 있는데, 그게 0.01 바뀌는데 느낌이 다르고 그래요. 스위치를 바꿔도 느낌이 다르고. 그래서 좋은 레버, 좋은 고무, 자기한테 맞는 헤드 사이즈 이런 것들을 찾아서 하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까 저는 무릎 레버라는 것을 만들어서 제 손에 맞는 것을 만들었죠. 편집장: 그거는 확실히 만족감이 드세요? 정말 딱 내가 생각하는 기술이 그대로 들어간다는 느낌이? DRX 무릎: 네. 세부적인 부품도 바꿔보면서 더 좋은 쪽으로 맞춰가다보니까, 저는 그거 말고 다른 걸로 하면 이제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어요. 편집장: 그러면 파키스탄 같이 해외 대회에서도 본인 스틱을 쓰세요? DRX 무릎: 네. 제 거를 가져가죠. 요즘은 대회를 다 콘솔로 하니까, 그런 것들이 장점이에요. 옛날에 오락실에서 했을 때는 확실히 좀 어렵죠. 예를 들어서 저는 이 오락실을 전혀 안 다녔는데, 대회한다고 해서 왔어요. 그런데 여기 다니는 사람들은 이미 익숙하니까 (스틱의 특성을) 잘 알잖아요. 제 입장에서는 ‘여기는 입력이 너무 안 되는데?’ 약간 이런 게 있어서 그런 불편함들이 있었죠. 편집장: 격투 게임 게시판 같은 곳을 가보면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아’ 이런 말들이 있는데. DRX 무릎: 요즘에는 옛날이 아닐까 싶어요. 확실히 ‘장비빨’이라는 것은 무시 못 하겠더라고요. 편집장: 장비빨을 무시할 수 없다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국제 대회 끝나고 영상을 보면 그렇게 잘 맞도록 주문 제작하신 조이스틱을 바닥에 내려놓거나 하시는 경우들도 있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고급 물건이라고 볼 수 있는 조이스틱이 무릎선수에게는 어떤 의미인가요? DRX 무릎: 어렸을 때부터 이미 스틱을 만지다 보니까 너무 익숙한 개념이고요. 이렇게 편하게 다룬다고 해서 험하게 다룬다기보다는, 학교 다닐 때 매는 책가방 같은 느낌이에요. 언제든지 챙길 수 있고, 언제든지 사용해야 하는 그런 느낌이라서. 저한테 스틱은 그냥 또 다른 손인 거죠. 일종의 혼연일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편집장: 대회에서는 눈으로 보는 것도 있고, 내가 생각하고 반응하는 영역도 결국은 레이턴시가 걸려 나가는 건데요. 네트워크 레이턴시 같은 것들도 많은 영향을 주잖아요. 아예 대놓고 반응 속도에 문제가 있으면 차라리 경기에 문제 있다고 하고 재경기를 하면 되는데, 이게 애매하게 걸리는 것들도 있잖아요. DRX 무릎: 5핑이 제일 빠른 건데, 갑자기 막 4핑이 뜨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때는 반응을 해도 안 되거든요. 이미 게임에서 입력이 늦게 들어가는 것이다 보니까, 그럴 때는 좀 그렇죠. 편집장: 그럴 때는 심판을 부르거나 하시나요? DRX 무릎: 보통은 어쩔 수 없다고 하고 그런 식으로 넘어갈 때가 많죠. 온라인은 어쩔 수 없지 않나 하고.. 편집장: 그래서 격투 게임에 초청전이 많은 거군요. 그러면 요새 이야기가 많은 가상 공간에서 격투 게임을 한다고 하면 그 안에서 뭔가를 할 수 있을까요? DRX 무릎: 아직 기술적으로 그게 어렵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들고요. 만약 가상 공간에서 게임을 한다고 하면, 오락실에서 이제 건너편 기계에 있는 사람이랑 붙는 그런 느낌일 것 같은데, 그런 점은 재미있겠죠. 왜냐하면 사실 온라인에서 하는 게임은 재미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옛날에 오락실을 가면 누군지는 모르지만 일단 건너편에 사람이 있고, 옆에 기계 보면 여기도 열심히 하고 있고 이런 느낌이라서. 제가 만약 게임을 안 하고 있어도 다른 화면을 보거나 잘하는 사람끼리 하는 것을 보고 재밌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지금은 그냥 혼자 집에서 하다 보니, 설령 계급을 올렸다고 해도 옆에 이야기할 사람도 없고, 그냥 자기 혼자만의 만족을 하고 끝나다 보니까, 아쉬운 그런 상태죠. 편집장: 그러면 가상의 상황을 설정하는 건데요. 인터페이스를 없애고 사람이 자기 생각만으로 캐릭터를 움직일 수 있는 기술이 나온다면, 어떨까요? 뇌파만으로 격투 게임을 컨트롤 할 수 있다면? DRX 무릎: 그러면 굉장히 더 피로할 것 같은데요. 그렇게 되면 머리로만 게임을 하는 건데 장시간 게임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요. 편집장: 약간 그런 점도 있잖아요. 프로 게이머를 이루는 주요 요소를 세 가지로 말하자면, 기술이나 캐릭터에 대한 지식, 그리고 이 지식을 활용해서 다음 패턴이 뭐가 나올지 파악하는 심리, 그리고 이것들을 내 퍼포먼스로 뽑아내는 육체적인 능력. 이렇게 지식, 심리, 피지컬 중에 마지막 것이 사라지는 거잖아요. 그랬을 때 게이머는 어떻게 바뀔까요? DRX 무릎: 손맛이라고 해야 될까요. 손맛이 일단 없어질 것 같고요. 제 영상 시청자분들 중에서는 손캠을 올려달라고 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으시거든요. 프로게이머 손놀림에는 리듬감도 있고 일반적인 손놀림이랑은 다르고 하니까. 그런 퍼포먼스 같은 것이 없어질 것 같네요. 편집장: 이런 질문은 다른 곳에서도 받아보셨겠지만, 오랜 기간 게임을 해오셨잖아요. 그런 지점에서 내 손이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으세요? DRX 무릎: 좀 있어요. 옛날에는 쉽게 썼던 거(기술)를 지금은 좀 연습이 필요한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옛날에는 보기만 하면 뚝딱하고 30분 만에 하던 거를 지금은 1시간, 1시간 반 이렇게 연습을 해야 할 때가 있죠. 편집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정상의 위치를 유지하고 계신다는 건, 한편으론 피지컬적 요소가 떨어지는 만큼 아까 말씀하셨던 심리나 지식의 영역으로 커버하시는 지점도 있을까요? DRX 무릎: 네. 피지컬이 조금은 떨어지더라도 그걸 뭔가 다른 방법으로 극복할 수 있으니까요. 피지컬이 정말 좋은 선수라도 엄청 노련미가 있는 사람 만나서 지는 걸 보면 절대적인 것은 없구나 싶기도 하고요. 무조건 어리다고 잘하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많다고 못 이기는 것도 아니잖아요? 옛날보다 게임은 오래 못하지만, 상대를 붙어보면 빠르게 파악할 수 있는 그런 게 생기는 것 같아요. 편집장: 그런데 그건 또 한편으로, 이 기사가 올라가면 ‘그건 무릎이니까 가능한 영역이다’고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웃음) 오랫동안 활동해오시면서 무릎 선수가 겪은 상대들 중에서 기량이 꺾인다든가, 혹은 에이징 커브가 왔다는 점을 느끼신 적이 있나요? 있으면 대충 어느 정도의 나이대에서 그런 지점이 온다고 느끼시나요? DRX 무릎: 예전에 이름을 날렸던 선수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확 내려가고 또 뭔가 전성기가 끝났다는 사람들을 많이들 봤죠. 제가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선수들을 봤는데, 대부분 한 30대가 되면 좀 확 내려가긴 하더라고요. 왜냐하면, 철권이 롤처럼 메타가 확 바뀌는 건 아니거든요.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게임을 할 때 오랫동안 플레이한 스타일을 잘 바꾸지를 못해요. 다른 게임처럼 전략 전술을 맞춰서 챔피언을 고르는 게임이 아니다 보니까, 캐릭터가 많지만 ‘나한테 맞는 캐릭터는 이거다’고 정하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자신의 패턴이나 습관 같은 것들을 바꾸기가 어려운데, 새롭게 등장하는 사람들은 또 새로운 것들을 들고 나오잖아요. 그래서 (어떤 캐릭터나 플레이에 대한) 연구가 어느 정도 끝나면 (그 선수가) 그냥 확 내려가는 그런 게 있어요. 편집장: 그러면 철권에서 에이징 커브라는 개념은 육체적인 반응 속도나 기량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착화되는 경향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겠네요. 사실 무릎 선수의 경우에는 거의 모든 캐릭터를 주챔급으로 하시는데, 게임을 분석하시고, 소위 말하는 ‘뇌지컬’로서의 장점들이 지금의 폼을 유지하시는 비결이실 것 같네요. DRX 무릎: 네. 에이징 커브를 겪는 많은 선수들이 고착화된 점을 잘 못 바꾼다고 해야 될 것 같아요. 한때 잘했어도 ‘이 캐릭터 플레이가 너무 어려운데 그걸 억지로 하는 것보다 차라리 내 스타일에 맞는 캐릭터를 할래’라고 생각하는 선수들은 어느 날 오랜만에 성적을 내는 경우는 있어도 자주는 못 그런 것 같아요. 편집장: 그거는 확실히 달성하기는 쉽지 않겠네요. 그만큼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니까. DRX 무릎: 그렇죠. 왜냐하면 여러 캐릭터를 어느 정도로 하는 사람들은 이미 너무 많거든요. 확실히 한 캐릭터만 메인으로 하는 사람들은 플레이가 약간 다른 느낌이 있어요. 그런데 갑자기 다른 캐릭터를 하면 어느 순간 다른 사람이랑 별 차이가 없는 정도의 수준까지밖에 안 돼요. 그래서 여러 캐릭터를 하기보다 한 캐릭터의 장인 느낌으로 가고, 변화를 거부하는 그런 게 있더라고요. 편집장: 격투 게임에 대해 사람들은 되게 쉽게 ‘피지컬 대결이다’고만 생각하지만, 무릎 선수가 그게 아니다는 걸 좀 보여주고 계시는 것 같아요. 또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은 것은, ‘표현한다’고 했을 때, 말을 언어를 써서 표현하는 것도 있지만 사실은 스틱으로 내 캐릭터를 통해 일종의 퍼포먼스로 내는 것 역시 표현이라고 볼 수 있을 건데, 스틱으로 상대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 느낌이 드신 적이 있으세요? DRX 무릎: 뭔가 말을 안 하고, 게임만 해도 멋있게 하려는 그런 게 있으면 상대도 알아요. 저도 알고. ‘얘 지금 고난이도 콤보를 보여주려고 하는구나. 멋있게 하려고 하네’ 그러면 저도 그렇게 하려고 하고. 그런 거를 느낄 때가 있어요. 말을 안해도 붙으면 딱 알아요. 편집장: 저는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언어를 넘어서는 커뮤니케이션이 존재하고, 상대의 기량뿐만 아니라 태도까지도 알 수 있는 그런 영역이 있군요. 조금은 결이 다른 질문인데요. 나중에 ‘무릎 기념관’이 생긴다고 했을 때, 전시관에는 어떤 스틱이 올라갈까요? DRX 무릎: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긴 한데요. (웃음) 그러면 아마 맨 처음에 썼던 거를 전시하지 않을까요? 지금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맨 처음에 쓰던, ‘이걸로 시작했습니다’고 올릴 것 같네요. 편집장: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제 곧 큰 변화가 한 번 오지 않습니까? 이제 〈철권 8〉이 나올 건데, 초심자들에게 첫 캐릭터를 추천해주신다면요? DRX 무릎: 트레일러만 봤을 때는 사실 저는 폴이 정말 좋아요. 많은 사람들한테 캐릭터 추천해드릴 때 폴을 많이 추천하거든요. 철권의 대표 캐릭터이기도 하고 개발사도 폴을 많이 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무조건 중간 성능 이상은 내거든요. 그런 캐릭터를 하는 것이 좋지 않나 싶습니다. * 무릎이 추천하는 철권의 대표 캐릭터 폴. 이전 시리즈보다 나이가 들고, 해맑아졌다. 편집장: 〈철권 8〉이 되면, 초보자 도장 같은 것도 활성화해 보실 생각도 있으신가요? DRX 무릎: 〈철권 8〉이 나오면 많은 분들이 도전하고 시작을 하실 텐데,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 기획하고 있습니다. 편집장: 저도 이 기회에 많이 배우겠습니다. 컨디션 잘 챙기시고요. 인터뷰 감사드립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디어문화연구자) 서도원 재미있는 삶을 살고자 문화를 공부합니다. 게임, 종교, 영화 등 폭넓은 문화 영역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 분투형 게임과 전쟁: 행위성의 뒤집힌 거울상

    이와 같은 현상은 지난 세기 걸프전 이후 더욱 가속화된 ‘전쟁의 게임화’에 관한 분석에서 거울상을 발견한다. 게임의 한 장면처럼 보도되는 폭격의 현장에서부터 게이미피케이션을 통한 병사 훈련, 그리고 드론을 동원한 전쟁에 이르기까지. 게임이 전쟁을 재현(mimesis)할 때, 전쟁은 게임을 모사(mimesis)한다. < Back 분투형 게임과 전쟁: 행위성의 뒤집힌 거울상 25 GG Vol. 25. 8. 10. 블리자드 사(社)는 전쟁을 사랑했다 아니, 이름부터 ‘워’ 크래프트(Warcraft)였으니까. <워크래프트>는 한때는 게이머들에게 숭앙의 대상이었던 블리자드 사의 실시간 전략(Real-Time Strategy, RTS) 게임이자, 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Mas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Playing Game)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rld of Warcraft)>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 인간과 오크 사이의 전쟁을 그린 <워크래프트> 친구 집에서 처음 접하고 머릿속에서 도무지 떠나지 않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플레이하다가 밤을 새운 게 아니다. 머릿속에서 게임 플레이를 회상하고 상상하고 시뮬레이션하다가 불현듯 아침을 맞았다. 우주 전쟁, 그러니까 <스타크래프트(Starcraft)>가 출시되었을 때, 또 그랬다. 블리자드는 악마와도 싸운다. 액션 롤플레잉 게임 <디아블로(Diablo)>는 주인공이 겪는 고투의 후경에 성전(聖戰)을 배치한다. 한국의 올드 게이머들로서는 KOEI를 빠뜨릴 수 없다. KOEI의 <삼국지 2(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Ⅱ)>는 워크래프트보다도 먼저 심취했던 게임이었다. 삼국지가 소재인 게임에서 무얼 하겠는가? 전쟁이지. 조부모님 댁에 있는 삼촌의 컴퓨터에 설치해 두고, 몰래 밤새워 플레이하곤 했다. 몰래는 무슨 몰래. 연로한 분들의 이마에 주름을 늘게 하는, 앞날이 걱정되는 손자가 되었다. 심지어 ‘대항해시대 2’의 해전조차 좋았다. 그때는. <콜 오브 듀티(Call of Duty)>, <배틀필드(Battlefield)>, <메달 오브 아너(Medal of Honor)>, <월드 오브 탱크(World of Tanks)>, <월드 오브 워쉽(World of Warships)>, ,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Company of Heroes)>, <토탈 워(Total War)> 등등. 연극, 영화, 드라마, 소설 등 다른 매체들도 전쟁과 전투를 소재로 삼는다. 그런데 게임계에는, 정말 많다. 왜 그렇게 전쟁을 재현하는 데 진심이냐고 게임 개발자들에게 묻는 건 아예 당위적이기까지 하다. 대체 게임과 전쟁 사이에 어떤 접점이 있길래. 이런 마당에 전쟁을 재현하는 게임에 대한 윤리적, 정치적 분석이 게임 연구의 한 흐름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건 짝사랑이 아니었음을 이와 같은 현상은 지난 세기 걸프전 이후 더욱 가속화된 ‘전쟁의 게임화’에 관한 분석에서 거울상을 발견한다. 게임의 한 장면처럼 보도되는 폭격의 현장에서부터 게이미피케이션을 통한 병사 훈련, 그리고 드론을 동원한 전쟁에 이르기까지. 게임이 전쟁을 재현(mimesis)할 때, 전쟁은 게임을 모사(mimesis)한다. * 게임과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던 걸프 전쟁 당시 바그다드 공습 보도 화면 * 서로 거의 흡사한 실제 전투기에서의 폭격 화면과 게임 화면 그런데 정말 게임이 전쟁을 재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전쟁 역시 게임을 모사한다면, 분석은 게임을 전쟁의 재현물로 보는 것에 국한할 수 없다. 양자의 접점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 접근을 통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은 서로를 향해 점근(漸近)한다. 게임과 전쟁이 집결하는 공간의 성격은 하나로 귀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곳은 싸우는 공간이다. 물론 조용한 전쟁이 존재하는 것만큼이나 ‘싸움’의 범주 바깥에 자리한 게임들도 많다. 하지만 다툼, 쟁투, 분투, 고투가 게임과 전쟁 양쪽 모두에서 대주주의 지위를 점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 점에 있어서 게임과 전쟁을 일방적 관계가 아닌 상호-참조적 관계를 맺고 있다. 분투형 플레이와 목표의 지위 게임과 전쟁이 분기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 지점은 그 싸움의 목표다. 전쟁의 목적이나 목표는, 당신이 이데올로기 비판을 수행하거나 배면의 진의를 의심하는 이가 아니라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명확하다. 모든 위정자는 그들의 전쟁의 목표와 이유를 다중에게 선명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그 목표는 실질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게임에서는 그게 좀 어려운 경우가 있다. 친구와 <스트리트 파이터(Street Fighter)>를 함께 플레이한다고 해보자. 달뜬 얼굴로 내 캐릭터를 두들겨 패는 친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왜 이렇게까지 때리는 거야?”라고 묻는 것이다. 속 깊고 다정하며 사회적 지능 뛰어난 우리의 실제 친구는 내가 기분이 상했다고 생각하고 장난스러운 위로와 함께 기분을 풀어주려 할 테지만, 반사실적 가정을 이어가 보자. * 대전 격투 게임의 플레이 과정은 정말 분투 그 자체다. 가상의 이 친구는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래야 이기지.”라고 답할 것이다. 친구와 즐겁게 게임을 하다 패색이 짙다는 이유로 기분이 상한 우리는, 행위의 근본적 성격을 묻는 것으로 옹색함을 감출 수 있다. 친구에게 진지한 탐구자의 얼굴을 하고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이기려는 거야?”라고 묻도록 하자. 아니, 정말로, 그들은 왜 그렇게까지 할까? 격투 게임에서 승리하면 하늘에서 뭐라도 떨어지나? 뭔가 이득을 얻는 것도 아닐 텐데 내 친구는 대체 무엇을 위해 내 캐릭터를 그렇게 열심히 때릴까. 철학자 C. 티 응우옌 (C. Thi Nguyen)은, 게임 외적 보상이 관건이 아니라면, 그 목적이 둘로 나뉜다고 본다. 하나는 승리다. 승리하고 성취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며 그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내 친구는 나의 캐릭터를 두들겨 패고 나를 이겼다는 사실에서 행복감을 느낀다. 다른 목적도 있다. 바로 ‘싸움 그 자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철학자 버나드 슈츠(Bernard Suits)는 그의 저서 The Grasshopper: Games, Life and Utopia 에서 게임 플레이를 “불필요한 장애물을 극복하려는 자발적인 시도”로 정의한다. 골프를 생각해 보자. 골프 공을 홀에 넣는 것이 관건이라면 우리는 그냥 손으로 공을 들고 홀에 넣으면 된다. 하지만 우리는 굳이 클럽이라는 비효율적인 도구를 사용해 온갖 규칙 속에서 공을 치려 애쓴다. 어째서일까? 슈츠에 따르면, 바로 그 ‘비효율성’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고투와 분투의 과정 자체가 게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목표 달성이라는 결과보다, 그 과정의 고군분투가 우리에게 즐거움을 준다. 이때 장애물 너머에 있는 목표는 사실 무의미하다. 그것은 장애물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즐기기 위해 가정된 목표에 불과하다. 고투하는 그 과정을 위해 마련된 가상의 목표와 비효율적인 도구, 각종 규칙은 게임을 벗어나기만 하면 실제로는 불필요한 장애물이다. 그것은 고투 자체를 즐긴다는 목적에 의해서 의미와 필요를 획득한다. 성취, 보상, 승리보다는 그 싸우는 과정 자체가 즐거움과 의미의 원천이다. 응우옌은 이러한 슈츠의 게임 이론을 수용한다. 응우옌에 의하면, 유희를 위한 일시적 목표를 상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분투하는 과정을 즐기는 것은 게임에 존재하는 고유한 플레이 방식 중 하나다. 그리고 이러한 유형의 게임 플레이를 ‘분투형 플레이(striving play)’라고 응우옌은 명명한다. 분투형 플레이를 즐기는 게이머들은 승리에 뒤따르는 외적 보상이나 게임에서의 승리보다 분투, 고투, 싸움 그 자체를 즐긴다. 따라서 이제 우리의 친구는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다. “친구야, 내가 너를 그저 이겨 먹으려는 게 아니야. 승리라는 일시적 목표를 수용함으로써 너와 겨루는 과정 자체를 즐기려는 거야.” 게임과 전쟁의 분기(였던 것) 어색하게 문어체로 말하면서도 어딘가 포용력 있어 보이는 이 친구의 풍모와 달리, 응우옌의 이론은 모든 게임을 아우르는 포괄적, 일반적 설명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게임이라는 매체에서 유독 고유하게 나타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에 대해 논할 뿐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목적, 목표, 성취, 결과보다는 과정과 수행 중심적 참여를 가능케 하는 매체적 특성에서 발생한다. 이때 중요한 점은, 게임이 이러한 매체로서 기능할 때 그것이 전쟁과 확실하게 분기한다는 점이다. 특히 이 목표의 차원에서 그러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실제 전쟁과 전투에선 실질적 목표를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설정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저 분투를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주조된 일회적 목표 따위가 아니다. 저기 어딘가에 실제로 방공 포대가 존재하고 이라크의 대통령인 사담 후세인이 존재하며 그를 호위하고 있는 적군이 존재한다. 그것이야말로 실질적이고 명확한 목표다. 그것들은 미군의 전쟁 수행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형편 좋게 마련된 도구가 아니다. 분투형 플레이를 가능케 하는 게임 내에 설정된 목표는, 전쟁의 그것과 명확하게 구별된다. 군인들에게 주어지는 실제 전쟁의 목표와 달리, 분투형 게임의 목표는 본질적으로 불필요한 것이자 언제든 폐기할 수 있는 것이며 일회적인 것이면서 가상의 것이다. 전쟁의 목표가 전쟁 중의 행위를 성립시키기 위해 마련된 도구가 아닌 것에 비하여, 분투형 게임의 목표는 처음부터 끝까지 게임 내의 행위성을 조형하기 위해 마련된 도구의 일환이다. 그렇기에 그 게임의 행위성을 버리는 순간, 분투를 즐기려는 ‘유희적 태도’를 버리는 순간, 게임의 목표는 의미를 상실한다. 양자의 차이는 목표를 달성하고 마주하는 순간 더욱 돌출한다. 분투형 게임의 경우, 목표의 달성은 유희의 종식을 의미한다. 분투형 플레이를 성립시키는 것에서 의미를 부여받았던 목표였기에, 분투형 플레이가 중단되는 순간 그 목표는 의미를 상실한다. 논리적 귀결일 뿐이다. 성취 지향적 플레이의 경우라면 다르겠지만, 분투형 플레이에서는 목표가 달성되는 순간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건 어떤 현재성이 아니라 지난 분투 과정을 곱씹을 시간이다. 달성되는 순간 그것은 투명해진다. *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한 장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씬 레드 라인’ 같은 영화는 서로의 목표물이 되는 병사들이 얼마나 적나라하고 구체적인 존재인지 보여준다. 전쟁에서 달성된 목표는 더 붉다. 화염의 붉음이든 선혈의 붉음이든, 전쟁에서 달성된 목표는 진하고 구체적인 감각적 결과물을 행위자의 눈과 손 앞에 차려 놓는다. 목표가 달성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접근한 이가 마주하는 결과물의 감각적 구체성은 전혀 가볍지 않다. 쉽게 윤리적 무게로 치환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그간의 분투 과정을 반추하고 곱씹을 여유 같은 것은 주어지지 않는다. 자신의 행위가 초래한 결과물이 어떠한 것인지, 그것이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그리고 이러한 결과일 것이라고 정말 인지하고 각오하고는 있었는지, 그 결과물은 빨갛고 무겁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물어온다. 그리고 이제 이 분기가 사라지는 것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행위성의 정제, 예술, 그리고 정교한 야만 이러한 게임과 전쟁의 분기점은 현대의 전쟁이 게임의 면모를 닮아감에 따라 희미해진다. 이는 단순히 전쟁에서 수행되는 행위성이 게임에서의 그것과 유사하다든가, 아니면 유사한 인터페이스와 조작을 통해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행위가 수행된다는 점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태는 목표의 추상화와 그로 인한 행위성의 부각에 있다. 응우옌은 그의 저서 『게임: 행위성의 예술』에서 게임을 Art of Agency, 즉 행위성의 예술이라고 명명한다. 게임에는 유희적 목표, 전-유희적 목표, 유희적 태도, 규칙, 불필요한 장애물 등이 다양하게 배치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게임에서 특정한 행위성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분투형 플레이는 바로 이 행위성을 경험하는 최적의 플레이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게임은 이 행위성의 구현에서 미적 가치를 창출함으로써 행위성을 소재로 삼는 예술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게 응우옌의 주장이다. 게임이 목표와 성취로부터 해방되고 분투 행위에서 의의를 발견함으로써 그것은 행위성의 예술이 된다. 목표로부터 해방된 게임이 예술의 가능성을 획득하는 것에 비하여, 전쟁에서는 다른 양상이 관찰된다. 전쟁이 게임의 수행성을 닮아가는 것은 여러 방식으로 나타나지만, 그 행위성이 목표와 유리되는 것을 빠뜨릴 수 없다. 전투기 조종사는 목표 대상을 육안으로 관찰하지도 않은 채, 레이더를 보고 버튼을 눌러 미사일을 발사한다. 목표 대상의 구체적이고 적나라한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드론 전쟁은 더욱 노골적이다. 드론 조종사는 게임 컨트롤러와 유사한 장비로 ‘스크린 속’ 목표를 제거한다. 자폭형 드론이 목표에 적중하는 순간, 공포와 고통에 비명을 질렀을 법한 적군 병사는 스크린에서 사라진다. 이러한 방식의 전쟁을 수행하는 자는 목표에 접근할 기회로부터 면제되거나, 또는 그것을 박탈당한다. 면제와 박탈 사이의 모호성 속에서 그에게 주어지는 것은 ‘정밀 타격률’, ‘효율적 자원 운용’과 같은 데이터다. 즉, 그의 행위성에 대한 반추를 수치화하고 정돈한 것들이다. 그렇게 본디 구체적인 목표물들은 추상화된다. 그것은 모니터 안의 영상, 명멸하는 신호, 수치화된 데이터 등으로 추상화된다. 목표물이 추상화되는 곳에서 전쟁 수행자에게 더 분명하게 남는 것은 그의 행위성이다. 비로소 전쟁의 수행자는 데이터들을 바탕으로 분투와 전투에서 성립하는 행위성을 더욱 정교하게, 합리적으로 다듬어 간다. 그들은 마치 ‘분투형 플레이어’와 흡사한 조건에 놓이게 된다. 더 나아가, 이때 사상되는 것은 전쟁 목표물의 빨갛고, 무겁고, 뜨끈하고도 축축한 구체성이다. 죽음, 파괴, 트라우마는 스크린 속 데이터나 수리에 담기지 못하는 구체적이고 참혹한 현실이다. 그리고 앞서 지적했듯이 이러한 구체성은 전쟁 행위의 당사자에게서 여하한 윤리적 무게로 치환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면제인지 박탈인지 모를 공백의 정체가 확연해진다. 목표물과 거리가 멀어지는 현대의 전쟁 수행자는 이 피 튀기는 사후 정산서로부터 눈을 돌릴 수 있게 된다. 그들에게선 목표를 달성하고 결과를 야기한 행위자로서의 윤리적 ‘책임’은 증발하고 행위성의 정교한 도야만이 남는다. 그것은 정교하고도 섬세한 야만이다. * 드론 공격을 성공시키고 환호하는 병사의 모습 분투형 게임과 전쟁: 행위성의 뒤집힌 거울상 지금까지의 논의는 게임과 전쟁이 거울상의 관계에 놓여있음을 보여준다. 게임과 전쟁은 행위성의 뒤집힌 거울상으로서 서로를 비춘다. 분투형 게임에서는 실제로는 무의미한, 무가치한 목표를 설정한다. 그리고는 그것을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처럼 일회적인 가장과 유희적 태도를 취한다. 이를 통해 분투에서 즐거움을 느끼게 하거나 행위성을 조형한다. 목표가 일회적, 유희적 대상으로 왜소화되었기에 오히려 게임은 행위성의 예술적 가능성을 표현하는 매체가 될 수 있었다. 현대의 전쟁에서는, 무의미한 것이 유희적 태도를 통해 의미를 일시적으로 획득하는 것과 정반대의 사태가 벌어진다. 전장에 선 군인들은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는 척 가장하지 않는 것에 그칠 수 없다. 생사가 오고 가는 현장에서 그들의 목표를 진정으로 추구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맞이한다. 목표를 달성한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 역시 적나라한 구체성이었다. 하지만 현대의 전쟁에서 목표물은 굳이 접근하고 목격하고 손에 쥘 필요가 없는 것으로 유리되고 추상화된다. 그 목표가 무엇인지 알 수 없거나 상관없게 되어버림으로써, 분투형 게임에서와 마찬가지로, 군인들에게도 점차 분투와 행위성만이 남는다. ‘목표’와 ‘결과’와 ‘책임’이 휘발되어 가는 이러한 사태는, 예술적 가능성을 마련했던 분투형 게임에 대하여, 실로 행위성의 뒤집힌 거울상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Tags: 응우옌, 행위성, 전쟁, 예술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철학연구자) 최건 철학연구자로서의 정체성과 게임애호가 및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강의, 강연, 연구, 저술, 번역 활동에 임해왔으며, 현재는 인하대 등에서 학생들과 사유를 공유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 실패한 혁명의 잔여물로서의 디스코 음악:〈디스코 엘리시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혁명이라는 단어는 상당부분 고난과 실패의 의미로 다가온다. 게임이 다룬 파리코뮌 혹은 그 이후의 러시아 혁명, 가깝게는 중동에서의 혁명과 홍콩의 우산혁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혁명들이 실패했고 민중들은 다시 고난의 상황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그 모든 역사 속 실패한 혁명의 잔해를 딛고 사는 사람들이며, 디스코라는 음악 또한 60년대의 실패가 낳은 아쉬움과 침잠의 흔적일 것이다. 게임 〈디스코 엘리시움〉이 굳이 실패한 혁명의 도시를 배경으로 삼아 디스코라는 흘러간 장르를 꺼내붙이는 이유는 이 게임의 주제가 살인사건이 아닌 ‘실패한 혁명의 역사’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 Back 실패한 혁명의 잔여물로서의 디스코 음악:〈디스코 엘리시움〉 04 GG Vol. 22. 2. 10. - 이 글에는 게임 〈디스코 엘리시움〉의 중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게임을 플레이해보지 않은 독자들의 주의를 요합니다. - 2019년 출시되어 큰 화제를 불러모았던 롤플레잉 게임 〈디스코 엘리시움〉은 제목만으로는 게임의 형식이나 내용을 유추하기 어려운 게임이다. 가상의 세계인 엘리시움 속의 번화와 퇴보가 겹쳐진 항구도시 레바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어느 알코올중독 부패경찰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는 게임에서 디스코라는 말이 들어가는 이유를 찾기는 쉽지 않다. 게임에서 디스코는 주인공의 다소 뒤떨어지는 감각을 묘사하는 듯 보인다. 현실세계에서처럼 디스코는 레바숄 안에서도 흘러간 옛 추억, 레트로에 가까운 감성으로서의 음악과 문화로 나타난다. 중년 형사는 이따금 흥에 겨워 자신의 전성기를 함께 했던 디스코 음악을 즐기며 추억하지만, 동시대의 음악은 게임 속 어떤 이벤트에서 드러나듯 디스코의 시절을 지나버린 어떤 흐름이다. 그저 주인공의 세대를 드러낼 정도로만 쓰인 것으로 보인 가벼운 소재로서의 디스코는 그런데 왜 게임 제목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까? 엘리시움이라는 말이 어떤 평원, 세계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 게임의 제목은 마치 ‘디스코의 세계’로 들리기도 한다. 왜 쇠락한 항구의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이 게임의 제목에는 디스코가 들어갔을까? 혁명이 실패한 도시, 레바숄 〈디스코 엘리시움〉의 중심 무대인 레바숄의 항구 마르티네즈 광장 어느 벽에는 총알자국이 잔뜩 남은 흔적이 있는데, 플레이어가 상상력을 동원할 경우 이 벽에 혁명가들을 세워놓고 총살한 흔적을 되살릴 수 있는데, 파리코뮌의 흔적으로 남은 ‘혁명투사의 벽’을 재현한 경우다. 게임 속 레바숄은 도시 국가고, 해양 속 군도로 이루어진 엘리시움 세계 전체에서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로 크게 번영한 곳이었다. 항만노조의 힘이 매우 강했던 이 도시국가에서는 갈수록 급격하게 벌어지는 빈부격차와 같은 문제가 불거지며 대규모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는데, 이 혁명은 레바숄 내부적으로는 성공했지만 국제 무역중심지로서 갖는 레바숄의 중요성을 인지한 외세 열강이 적극적으로 군사력을 투사해 혁명을 무력으로 제압함으로써 혁명은 3일천하에 머무르고 만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세계적 무역중심지가 대규모 혁명에 의해 해방구로 변하고, 그 해방구를 외세 열강이 무력으로 진압한 결과가 번영과 낙후가 공존하는 게임 속 레바숄의 현재 모습이다. 제국주의 시대의 혁명이었던 파리코뮌은 실제로도 파리 시민들의 성공한 혁명을 외세가 개입해 무너뜨린 역사다. 〈디스코 엘리시움〉의 배경은 실패한 혁명이 남긴 잔해로 그려진다. 왕당파와 공화파로 나뉘어 싸우던 왕년의 용사들이 늙어 공놀이를 함께 하고, 혁명의 중심이었던 항만노조는 정부군과 타협하며 새로운 억압기구로 기능하기도 하는, 실패한 혁명의 도시로 레바숄은 플레이어에게 다가온다. 70년대를 풍미한 디스코 플레이어는 게임 중반부에 어느 폐허가 된 교회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놀고 있는 한 무리의 젊은이들을 만난다. 마약을 심하게 빨고 하드코어 음악에 절어 있는 이 청년들과의 대화에서 플레이어는 주인공이 매우 디스코를 사랑하는 인물임을 알게 된다. 실패한 혁명의 도시라는 배경 위에 얹은 한물 간 음악으로서의 디스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현실의 디스코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0세기의 7-80년대를 장식한 대중음악장르인 디스코는 디스코테크Discotheque를 어원으로 삼는다. 영어로는 레코드 라이브러리Record library로 번역 가능할 이 프랑스어는 특히 댄스 음악으로서 크게 부흥했는데, 그 이전의 댄스홀이 주로 라이브 밴드와 함께 하는 공간이었던 반면 디스코는 녹음된 음반을 틀어 놓고 그 음악에 맞춰 춤을 출 수 있는 공간으로서 의미지어졌다.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구현할 수 있는 댄스홀로서의 디스코테크는 등장 초기 미국에선 주로 슬럼과 같은 주변부 지역에서 번성했고, 고고나 지터버그(지루박) 같은 댄스 음악을 밀어내며 서서히 주류 댄스음악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디스코는 1970년대 중반에 이르면 대중적인 인기로 절정에 달하는데, 이 무렵을 상징하는 영화가 존 트라볼타 주연의 〈토요일 밤의 열기〉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인간 남성 춤으로도 유명한 존 트라볼타의 디스코 댄스는 1977년 디스코의 절정 시대를 보여주는 아이콘으로 남은 바 있었다. 이러한 디스코 인기는 한국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오늘날 ‘디스코텍’이라고 부르는, 그리고 심지어는 독특한 용법으로 달라진 ‘콜라텍’이라는 특유의 무도장을 가리키는 무언가로 나타났다. 그 와중에 유흥가 출입이 안되는 10대들을 위한 ‘롤라장’이라는 공간 또한 술을 빼고 롤러스케이트만 넣었을 뿐이지 사실상 디스코 음악으로 공간을 가득 채운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오늘날 80년대 디스코 컴필레이션 음반 이름이 ‘추억의 롤라장’임을 생각해보자.) 침잠하는 개인, 무너지는 풍요, 그리고 디스코 1977년 정점을 찍은 디스코 열풍은 서서히 시들해지는데, 1979년에는 아예 ‘디스코 폭파의 밤’이라는 폭동까지 일어나며 서서히 한물 간 음악으로 취급받기에 이르렀다. 60년대 말 무렵 시작되어 80년대까지의 전성기를 겪은 이 장르의 부흥과 몰락은 여러 모로 동시대의 사회상과 떨어뜨려 생각하기 어려운 지점들을 보여준다. 디스코 붐이 일었던 1970년대 미국 경제는 서서히 둔화된 성장세를 나타내고 있었다. 2차대전의 여파로 대활황이 일어났던 미국 경제는 60년대를 끝으로 황금기를 마무리하고 있었는데, 1974년에 이르면 오일쇼크라는 이슈를 맞으며 미국 공업이 주춤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고유가 시대를 맞으며 대배기량, 저연비의 미국 자동차는 일본과 같은 신흥공업국에서 뽑아내는 고연비 고효율 차량에게 시장을 내주기 시작했으며, 이는 미국 공업의 심장이었던 디트로이트와 같은 도시들의 몰락에 일조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공업노동자들의 삶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고숙련 노동자 중심의 자동차공장들이 문을 닫고, 풀타임 정규직으로 일하던 이들은 세차장이나 패스트푸드점의 파트타임 잡으로 일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노조의 결속력은 약해지고, 일자리의 전반적인 질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과거 60년대와는 사뭇 다른 흐름들이 나타났는데, 68혁명으로 대변되는 변혁을 향한 거시적이고 사회적인 요구들이 강했던 시기를 살아가던 히피의 시대가 저물기 시작한 것이었다. 혁명과 반전, 평화를 외치던 이들은 갑자기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고 비즈니스맨으로 자리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를 지켜본 70년대 여피들의 아랫 세대, 청년세대들에게 그들은 그저 입으로만 혁명을 외치다 주류질서로 편입한 꼰대로밖에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비해 여유롭지 못하게 변한 세상 속에서 개인은 더욱 원자화되었고, 70년대의 20대는 거시적인 사회 변화에의 요구와 같은 쪽보다는 좀더 개인의 삶을 향해 파고들기 시작했다. 록의 시대가 저물고 디스코의 시대로 넘어가는 흐름은 사회경제적인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혁명과 디스코 1970년대에 일어난 경제사회적 변화와 청년노동조건의 변화는 디스코의 발흥과 무관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이야기는 게임 〈디스코 엘리시움〉에서 다뤄진다. 대규모 혁명이 일어났지만 처절하게 실패한 상황 속에서 중년이 된 주인공은 실패한 혁명의 시대에 디스코를 들으며 자라난 세대였고, 이제는 그런 디스코마저도 한물 간 시대로서의 현재를 살고 있는 인물이다. 게임 속의 레바숄이 실패한 혁명의 공간이고, 그 속에서 디스코가 유행했다 사라졌다는 설정은 혁명과 음악의 관계를 실어낸 설정이다. 혁명과 음악의 관계는 제작사의 국적인 에스토니아의 배경을 통해서도 이해된다. 발트3국 중 하나인 에스토니아는 2차대전 이후 소련에 병합된 국가였지만 소련의 압제에 고통받으며 독립을 꾸준히 요구해온 역사를 가지고 있는 국가였고, 1989년 8월에는 에스토니아 – 라트비아 – 리투아니아를 잇는 600km가 넘는 인간띠를 만들며 다함께 노래를 부르는 이른바 ‘노래혁명’이라는 사건을 연출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혁명과 음악이라는 이 독특한 관계가 게임 안에 구현된 배경으로 짐작해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디스코 엘리시움〉의 디스코는 게임의 주제와 동떨어진 장식으로서의 소재가 아니라 사실상 게임이 다루는 세계의 중심에 자리하는 소재다. 디스코는 실패한 혁명 이후 개인으로 침잠하기 시작한 이들의 시대를 장식했던 음악이었고, 주인공은 그런 실패한 혁명의 뒷세대로서 젊음을 보냈지만 이제는 그나마도 역사의 뒤안길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사람이었다. 여전히 실패한 혁명의 잔재가 가득한 그늘진 도시에서 그렇게 혁명이라는 열정은 주인공과 동시대인들에게 식어버린 과거의 무엇으로만 비춰질 수 있었을 것이다. 혁명은 실패하지만, 그것이 The End는 아니다 그러나 게임은 독특한 퀘스트를 통해 반론을 제시한다. 서브퀘스트 중 하나였던 환상의 생물, 인슐린데 대벌레가 함께하는 엔딩에서다. 애초에 있을 것 같지 않던 환상의 생물인 거대 대벌레를 추적하는 퀘스트는 마치 무지개를 좇는 듯한 불가능한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 같지만, 게임의 최후반부에서 실제로 등장해버리는 인슐린데 대벌레의 존재와 메시지는 혁명과 디스코라는 주제를 묶어내는 결정적인 장면을 보여준다. 실패한 혁명이라고 여겨지던, 인류가 자신의 삶과 세상을 바꾸기 위해 목숨까지도 걸었던 그 무언가들이 정녕 모두 실패한 것으로만 치부할 수 있는 것인가?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던 인슐린데 대벌레를 직접 보게 되는 게임 최후반부의 장면은 우리가 혁명이라고 부르는, 인류가 영원히 가 닿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추구해 온 그 어떤 것과 그 실패의 과정들이 정녕 무의미한 것인가를 되물어버린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혁명이라는 단어는 상당부분 고난과 실패의 의미로 다가온다. 게임이 다룬 파리코뮌 혹은 그 이후의 러시아 혁명, 가깝게는 중동에서의 혁명과 홍콩의 우산혁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혁명들이 실패했고 민중들은 다시 고난의 상황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그 모든 역사 속 실패한 혁명의 잔해를 딛고 사는 사람들이며, 디스코라는 음악 또한 60년대의 실패가 낳은 아쉬움과 침잠의 흔적일 것이다. 게임 〈디스코 엘리시움〉이 굳이 실패한 혁명의 도시를 배경으로 삼아 디스코라는 흘러간 장르를 꺼내붙이는 이유는 이 게임의 주제가 살인사건이 아닌 ‘실패한 혁명의 역사’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신비동물 탐사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무언가를 평생동안 추구해가는 노부부와, 이야기의 끝에 환상처럼 등장해버리는 대벌레의 존재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마찬가지로 환상종으로 여길 수 있을 혁명이라는 실패와 좌절의 역사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질문한다. 〈디스코 엘리시움〉은 그래서 실패한 혁명의 잔여물로서의 우리 시대에 대한 물음이 된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지연시간을 두고 벌이는 개발자와 이용자의 개선과 적응

    현대 게임 서버의 개발자들은 0.3초 지연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게임 서버를 개발한다. 이부분을 명시적으로 정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0.2초~0.5초에서 지연이 발생했을 때도 자연스럽게 게임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설계해야 한다는 부분은 경험을 통해서나 혹은 선배 개발자들의 조언을 통해 이어져 내려오기도 한다. < Back 지연시간을 두고 벌이는 개발자와 이용자의 개선과 적응 21 GG Vol. 24. 12. 10. 우리가 흔히 빛의 속도라고 부르는 표현이 있다. 요즘은 빛의 속도를 뛰어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완전히 잡혀서 SF를 다루는 콘텐츠에서도 실제로 빛의 속도를 뛰어넘는 속도를 내는 우주선 같은 것은 나오지 않는 시대가 되었는데, 그러다보니 실제 빛의 속도가 몇인가를 굳이 외우고 사는 사람들도 적은 편이다. 검색을 해보면 빛의 속력은 진공 상태에서 299,792,458 m/s 인데 우리가 흔히 알기 쉽게 비교하는 서울과 부산 간의 거리로 이것을 생각하면 1초에 460번정도 왕복할수 있는 셈이다. 조금 더 거리를 늘려보자. 서울의 정확한 지구 반대편의 위치를 고르라면 아마 바다 위가 될 테고, 그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는 부에노스 아일레스일 것이다. 부에노스 아일레스까지의 거리는 약 20000km 정도이고, 빛으로는 1초에 7.5번정도 왕복할 수 있다. * 서울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까지의 거리. 1초에 지구를 7번 반 돌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인간의 입장에서는 엄청 빠른 속도임에 분명하지만 어? 빛이란게 생각만큼 안빠른데? 싶은 생각도 든다. 쉽게 생각해보자. 여러분이 게임을 하는데 현대적으로 요구하는 모니터의 프레임레이트(초당 뿌려주는 화면의 개수)는 60fps 일테고, 고사양 게임용 디스플레이라면 144fps 일 것이다. 144fps 라면 프레임이 전환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프레임당 6.94ms 이고, 빛이 서울과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왕복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0.133ms 이다. 대략 19프레임 정도가 지나간 셈이다. 물론 이것은 아주 이상적인, 서울과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지구 표면을 지나는 가장 가까운 선으로 연결하고 진공 상태의 빛의 속도로 정보가 전달되었을 때 걸리는 시간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서울과 부에노스 아이레스 사이에서 통신을 할 때는 설령 광섬유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 거리가 최단거리도 아닐 뿐 더러 여러 가지 중계기, 광섬유가 아닌 통신망 등을 거치며 발생하는 손실에 의해 이론상의 시간 안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이런 부분은 게임을 만드는데 중대한 장애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점점 컴퓨터의 속도가 발전하면서 이러한 시간을 줄이는 것이 더욱 중요해지는 경향도 나타난다. 게임을 정의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정보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정보의 흐름 관점에서 게임을 보면 이는 물리적인 입력이 가상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다시 플레이어의 감각으로 전달되는 순환 구조이다. 이렇게 적어놓으면 굉장히 단순해 보이지만 학교에서 배웠던 컴퓨터의 구성요소들을 생각해보자. * 컴퓨터의 3요소: 입력장치, 처리장치, 출력장치. 우리가 보통 디지털 기기에서 즐기는 형태의 게임이 돌아가는 기계는 거의 다 이런 형태다. 입력, 출력, 처리 장치가 분리되어있는 경우도 존재하고 게임기처럼 입력장치(게임패드), 처리장치(각종 프로세서, 등등), 출력장치(스피커, 스크린)가 합쳐져 있는 경우도 존재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기기들의 시간은 사람의 신경반응속도를 제외한다면 게임에 미치는 시간적인 영향은 대부분 CPU의 처리속도와 저장매체의 통신속도 정도다. 턴제 게임이라면 문제가 없다. CPU플레이어들의 수많은 행동들을 계산하는 것도 이용자들은 기꺼이 기다려주기도 한다. RTS라면 이러한 문제점에 대비하기 위해 게임 안에 등장하는 유닛의 숫자를 제한한다. 유닛 수가 너무 많아저셔 각 유닛에 대한 처리가 CPU에 부담을 주거나 화면에 많은 유닛이 등장하면서 GPU의 처리시간이 늘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게임 개발자가 겪는, 특히 줄일 수 있다면 가장 줄여야만 하는 시간이라는 장애물은 어떤 것일까. 대표적인 부분은 로딩과 랙이다. 물론 개발 작업에 사용해야 하는 시간부터 이용자가 게임에 참여해 놓고 화장실에 가는 시간까지 수많은 시간들이 게임에 영향을 끼치지만 프로그래머가 컨트롤해야 하는 시간들은 이 부분이고 최대한 없는 것처럼 숨겨야 게임의 경험이 부드러워지는 부분이 바로 로딩과 랙이다. 좀 더 과거로 돌아가보자. 우리가 흔히 저장 아이콘으로 기억하는 디스크만 하더라도 나왔을 무렵에는 기존에 사용하던 카세트 형식의 자기 테이프보다 데이터를 읽어오는 속도에서 굉장한 우월함을 보였다. 당시 게이머들은 30분~1시간씩 데이터 로딩을 기다려가면서 게임을 해왔는데 게이머는 사실상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고 프로그래머들은 그 느린 데이터를 가져오는 속도, 한정된 용량등을 최대한 활용하여 성능을 내도록 수많은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사용해왔다. 하지만 온라인게임이라면 이 문제는 좀더 복잡해진다. 여기에 인체 신경의 반응속도까지 고려한다면 더 복잡한 상황이 벌어진다. 만약 온라인 게임 서버 등이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나의 행동에 피드백할 수 있는 또다른 플레이어 B 가 존재한다면? 실제로 명확한 수치는 아니지만 플레이어 A 가 한 행동이 플레이어 B 에게 도달하는데까지 걸리는 시간들을 쭉 나열해보자. * 데이터의 흐름에 걸리는 시간들 플레이어 A가 모니터에서 상황을 인식하고 (13ms), 고민한다음 (100ms), 손으로 입력한후(200ms), 키보드로부터 컴퓨터가 입력을 받아(1ms), 공유기로 신호를 보내고 (0.5ms), 인터넷으로 신호를 전달해서 (30ms), 게임서버로 보내진후 (30ms), 서버에서 처리를 한 후 다시 인터넷으로 신호를 보내서 (30ms), 상대방의 공유기에 신호가 도달하고 (30ms), 공유기에서 PC로 (0.5ms), 게이밍PC에서 모니터로 (10ms), 사람의 눈이 모니터에서 신호를 확인할 때까지 걸리는 (13ms)까지. 판단과 반응속도에 걸린 시간 300ms를 제외하면 158ms 정도 시간이 걸린다. 이건 그냥 그럴수 있다는 것이고 사실 인터넷은 여러 레이어를 통해서 연결이 진행되기 때문에 실제 시간은 이것보다 훨씬 많이 걸릴 뿐더러 컴퓨터 사양, 네트워크 환경, 서버와의 거리, 사람의 컨디션 등으로 이 수치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다만 이 수치를 아무리 줄여도 결국 중간 단계가 늘어날수록 딜레이는 생겨날 수 밖에 없다. 이 과정을 정보의 흐름이라고 생각해보자. 만약 우리가 게임의 데이터 처리에 있어 사용자의 모든 입력을 반영해야 한다면, 그리고 이렇게 만든 한국의 게임을 아르헨티나의 한국 게임을 사랑하는 청년이 플레이한다면 어떤 과정을 겪게 될까? 게임 서버가 사용자의 입력에 반응할 때까지 0.13초 정도가 필요하다. 이는 144Hz환경으로 환산한다면 19프레임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는 빛의 속도로 통신한다는 가정 하에 이루어진 계산이고 실제 현실에서는 앞서 언급한 여러 이유로 대략 0.3초 정도의 지연이 발생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조차 사실은 가장 낙관적인 계산이기도 하다. 만약 정말 서버가 유저의 입력을 기다려서 처리를 해야 한다면 우리는 한번의 처리를 0.3초에 한 번씩밖에 할 수 없고, 이는 1초에 3번밖에 계산을 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게임이 정보의 흐름이라면 결국 이 흐름의 속도는 이용자가 게임을 하는데 느끼는 핵심적인 경험의 요소 중 하나가 된다. 턴제 게임이라면 어떻게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실시간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게임들이라면 이러한 데이터 지연 시간 문제는 플레이에 큰 장애를 만들 수 밖에 없다. 격투게임, RTS, MMORPG, 액션게임, 많은 게임들은 이러한 이유로 온라인상의 멀티플레이로 구현하기 힘들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게임 개발자들은 결국 이를 극복하고 온라인상에서 플레이어에게 지연이 느껴지지 않는 수준의 구현을 이루어냈다. 현대 게임 서버의 개발자들은 0.3초 지연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게임 서버를 개발한다. 이부분을 명시적으로 정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0.2초~0.5초에서 지연이 발생했을 때도 자연스럽게 게임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설계해야 한다는 부분은 경험을 통해서나 혹은 선배 개발자들의 조언을 통해 이어져 내려오기도 한다. 과거에 이런 네트워크 지연으로 발생하는 게임의 버그들은 모든 기계장치가 모여있는 작업환경에서는 잘 발생하지 않아서 출시 시점에서야 몸으로 겪는 경우들이 많이 발생했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지연 처리의 중요성이 개발과정에서 부각되며 언리얼 엔진의 데디케이티드 서버부터 iOS의 에뮬레이터까지 게임 실행 차원에서 네트워크 지연에 대해 처리할 수 있는 일종의 에뮬레이션을 제공하는 경우들도 등장했다. 정보전달 속도라는 물리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개발자들은 다양한 해결책을 고안하고 있다. 가장 쉬운 방법은, 그냥 기다리는 것이다. 네트워크에서 지연이 발생했다면 그냥 동기화가 될 때까지 플레이어를 기다리게 만드는 방법도 존재한다. 모두가 다 같이 게임의 정지상태를 기다려줄 수 있는 참을성만 존재하면 괜찮다. 옛날 편지로 바둑을 두시던 분들 정도의 참을성이라면, 그리고 그런 게임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실시간으로 움직여야 하는 게임들이라면 아무래도 이러한 기다림은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게임 개발자들은 어떤 사람들의 대답이 늦어져도 게임이 계속 돌아가게 만드는 방법들을 계속 적용하고 있다. 일반적인 방법은 예측이다. 게임 프로그램이 이용자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이다. 예측을 해낼 수 있다면 네트워크 딜레이가 1초가 있어도 괜찮다. 컴퓨터가 1초 후의 이용자의 움직임을 예측했다면 1초후에 보여줄 것을 미리 계산해서 보여주는 것으로 게임 안에서의 흐름은 완전하게 동작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컴퓨터는 완벽한 예언가가 아니다. MMORPG나 액션게임을 하다가 만약에 상대방의 컴퓨터가 이동속도보다 빠르게 이동하는 부분을 겪었다면 컴퓨터가 예언을 실패한 것이다. 컴퓨터는 상대방의 이동을 예측해서 재현했지만 실제 결과가 달라졌기 때문에 나중에 입력된 실제 행동에 맞춰 미리 재현했던 부분과의 차이를 억지로 맞추는 것이다. * 캐릭터의 동기화. 갑자기 이동시키거나 보간해서 미끄러듯이 맞추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전격투에서는 이런 시간의 문제가 특히 많이, 깊게 발생한다. 과거의 격투게임의 대전은 오락실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지거나, 혹은 같은 기기에서 두 개의 게임패드가 붙어 이루어졌다. 네트워크 레이턴시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환경이었지만 격투게임의 이용자들은 자신의 입력을 가장 빠르게 게임에 입력하기 위해서 자신의 반사신경과 사고를 다듬는 것은 물론, 프레임 레벨에서 이루어지는 게임의 메커니즘을 파고들기도 했다. 이는 실제 게임의 입력 프레임과 처리 프레임, 그것이 모니터에 출력되는 프레임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한데, 1프레임 단위로 기술의 승패가 결정되는 대전 격투게임의 세계에서는 이런 상황까지 분석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하지만 오락실이란 공간이 시대의 변화에 못 버티고 점차 사라지는 환경에서 많은 대전격투게임들의 대전이 네트워크라는 가상의 공간으로 올라오면서 네트워크 레이턴시는 격투 게임 개발자들에게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왔다. 초기에는 네트워크 레이턴시 대응에 익숙하지 않아 나쁜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현대 대전 격투게임에 이르면 네트워크 대전 지원이 필수 요소로 인식되면서 기술과 꼼수 두 측면에서 모두 괄목할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격투게임에서 주로 이용되는 부분은 롤백이다. 흔히 롤백 넷코드라고 불리는 이러한 기능은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움직임을 컴퓨터가 미리 예측해서 해당 부분을 미리 보여줌으로써 게임이 실시간으로 빠르게 전달되고 있다는 “느낌”을 이용자에게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입력을 예측하는데 실패했다면 컴퓨터는 어떻게 이를 처리할까. 몇프레임 뒤로 게임을 롤백해버린다. 이런 대응을 위해 애니메이션 단위에서 몇 프레임이 뒤로 돌아가도 어색하지 않도록 아트 단위에서 작업하는 게임들도 존재하며, 어떤 게임들은 기술 발동의 애니메이션 시간에 조금 여유를 둬서 네트워크를 동기화할 시간을 벌기도 한다. 입력이 들어가자마자 발동되는 잡기 기술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MMORPG도 비슷하다. 게임들의 캐스팅(주문시전) 시간에는 서버와의 통신 시간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기능들이 일정부분 들어있다. 플레이어와 서버, 혹은 다른 플레이어 사이에서 주문의 결과를 동시에 나타나고 처리하기 위해서는 동기화 문제가 중요해지며, 이는 네트워크 레이턴시를 어떻게 숨길 것인가와 직접적으로 연관되기 때문이다. 많은 MMORPG가 논타겟팅이 아닌 타겟팅인 부분도 같은 이유에서다. 논타겟팅으로 진행을 한다면 타겟이 위치한 좌표가 서버와 플레이어의 컴퓨터 사이가 같은 시간 동일하게 나타나야 하는 동기화 문제가 중요해지며 이 이유는 플레이어가 실제로 자신의 공격 범위 안에 들어왔다고 생각하고 기술을 시전했을 때 기술의 성공 유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네트워크 지연을 숨기기 위해 게임의 디자인 측면에서 약점을 숨겨버리는 경우도 존재한다. 특히 즉시 기술이 발동하는 부분은 한번에 보내는 데이터의 양부터 속도까지 여러 가지 영향을 받는 요소이기 때문에 MMORPG에서는 한번에 많은 스킬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스킬을 사용했을 때 쿨타임 후에 동작하는 부분부터 타겟팅 문제, 플레이어 캐릭터의 상호 충돌 판정 제거와 같은 부분은 게임 서버의 개발 난이도를 낮추는 요소들이다. 물론 과감하게 여러 트릭과 기술력으로 문제점을 정면돌파하는 경우들도 존재한다. 만 명이 넘어가는 공통 월드의 MMORPG, 100명이 한 레벨에서 경쟁하는 FPS나, 4안 멀티가 가능한 벨트스크롤 액션게임 등은 그 전까지는 네트워크 환경에서 힘들다는 평가를 받던 도전을 트릭과 기술력으로 돌파했다고 보아도 괜찮을 것이다. 한편, 숨길 수가 없는 네트워크 지연은 앞서 말했듯이 강력하게 숨겨버린다. 예를 들어 게임 캐릭터의 위치는 조금 달라도 이용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결제한 금액이 틀리는 건 문제의 차원이 다르며, 보안 문제 역시 존재한다. 이러한 영역에서의 시간 지연은 강렬한 연출로 가려버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대 캐릭터 수집 가챠 게임의 캐릭터 뽑기에서 초반에 기대감을 연출하는 화려한 애니메이션은 이용자의 소비를 유도하는 강렬한 후킹 요소이기도 하지만, 서버와의 통신시간을 감추는 트릭이기도 하다. 드물게 준비된 연출 시간보다 반응에 시간이 더 많이 소요될 경우 문이 열리거나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지 않고 계속 이펙트가 돌아가는 연출을 본 사람들도 존재할 것이다. 네트워크 레이턴시가 아니라 데이터가 오가는 레이턴시 역시 개발자들에게는 주요하게 뛰어넘어야 할 벽들이다. 오픈월드는 특히 이 문제가 도전적으로 다가오는 장르인데, 오픈월드 내의 이동속도에 걸리는 제한 등은 이러한 하드웨어 한계로부터 기인한다. 오픈월드에서 빠른 속도로 이동했을 때 게임 월드의 로딩이 늦어진다면 이미 플레이어가 목표지점에 도착한 후에 건물이 생겨나던가 NPC가 생겨나는 것을 보아야 하기 때문에 이것 또한 개발자들에게는 극복해야하는 요소들이다. 블리자드의 <월드오브 워크래프트>는 이러한 로딩에 대한 요소를 레벨 디자인적인 요소로 해결하였다. 스톰윈드나 오그리마, 언더월드, 썬더 블러프의 입구는 한번에 도시 내부가 다 보일 수 없도록 통로를 크랭크 형태로 디자인함으로써 플레이어가 도시 내부에 들어가는 동안 도시 내 환경 요소들의 로딩을 마무리하기 위한 트릭 중 하나다. * 스톰윈드 정면. 도시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구에서 직진하는 대신 좌우의 크랭크식 통로로 꺾어져 들어가야 하며 이 시간동안 컴퓨터는 도시를 로드한다. 출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클래식 사이트. 지연시간 문제를 아예 강력한 기계적인 성능으로 메꿔버리는 경우도 존재한다. 플레이스테이션 5부터 게임기에서는 SSD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게임 로딩의 주요한 병목이 되는 디스크로부터 데이터를 읽어오는 시간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다. 게임 개발자들이 다양한 프로그래밍, 디자인 기술을 통해 시간지연 문제에 대응해 온 것 이상으로, 게이머들 또한 로딩과 랙을 중요하게 다루며 대응하고 발전해 온 바 있다. 최적화된 게임 플레이를 원하는 이용자들은 최대한 로딩을 적게 보기 위한 방법을 하고 실험하고 도입하고 있다. 특히 격투게임의 경우는 레이턴시를 프레임 단위로 계산하며 게임을 진행하는 것이 고수들 사이에는 일반적이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처럼 다인 참여형 대규모 레이드가 주요 콘텐츠인 게임에서도 게이머들은 자신의 DPS를 높이기 위해 스킬과 스킬 사이의 입력에 시간적인 손실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게임 서버와 클라이언트 사이의 시간에 대해서 끊임없이 연구한다. 개발자 입장에서 가장 황당한 경우는 네트워크 레이턴시가 존재할 때만 발생하는 틈을 노리는 기술들을 네트워크 대전에서 사용하는 경우일 것이다. 정상적인 네트워크 레이턴시라면 기술이 막혀야 하는 상황에서 레이턴시로 인해 클라이언트에서 기술이 막히기 전에 한번 더 기술을 사용하는 이런 특수한 사례들을 이용자는 성공률이 낮다고 하며 사용하지만, 개발자 입장에서는 네트워크 레이턴시, 즉 랙이 존재해야만 들어가는 기술을 사용하는 사례를 보며 네트워크 레이턴시조차 개발자들의 의도를 벗어나 사용하는 이용자들의 행동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게임 개발자에게 지연시간은 넘어서야 할 장애물이지만 게이머들에게는 이조차 자신이 이용할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개발자들은 이 장애물을 없애거나 줄이기 위해 싸우고, 이용자는 현실적인 랙에 적응하고 이용해가면서 디지털게임은 계속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개발자, 연구자) 오영욱 게임애호가, 게임프로그래머, 게임역사 연구가. 한국게임에 관심이 가지다가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것에 취미를 붙이고 2006년부터 꾸준히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고 있다. 〈한국게임의 역사〉, 〈81년생 마리오〉등의 책에 공저로 참여했으며, 〈던전 앤 파이터〉, 〈아크로폴리스〉, 〈포니타운〉, 〈타임라인던전〉 등의 게임에 개발로 참여했다.

  • [인터뷰] 게임 전시가 줄 수 있는 사회적 담론의 균열 : <게임 사회> 기획자 홍이지 학예연구사 인터뷰

    게임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22년 10월에 방영했던 EBS 다큐멘터리 <게임에 진심인 편>을 기억할 것이다. 해당 다큐멘터리 3부에서는 ‘근데 이제 예술을 곁들인’이라는 제목으로, ‘게임을 예술로 볼 수 있을 것인지 아닌지’에 관한 담론들을 다루었다. 비단, <게임에 진심인 편>뿐만 아니라 게임과 예술의 경계를 어디로 둘 것인지에 관한 질문들은 훨씬 이전부터, 다양한 경로로 이어져 왔다. 그러나 이 간단한 질문에 결론을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동안 쌓여왔던 담론의 두께만큼 다양한 관점이 혼재해있기 때문이다. < Back [인터뷰] 게임 전시가 줄 수 있는 사회적 담론의 균열 : <게임 사회> 기획자 홍이지 학예연구사 인터뷰 12 GG Vol. 23. 6. 10. 게임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22년 10월에 방영했던 EBS 다큐멘터리 <게임에 진심인 편>을 기억할 것이다. 해당 다큐멘터리 3부에서는 ‘근데 이제 예술을 곁들인’이라는 제목으로, ‘게임을 예술로 볼 수 있을 것인지 아닌지’에 관한 담론들을 다루었다. 비단, <게임에 진심인 편>뿐만 아니라 게임과 예술의 경계를 어디로 둘 것인지에 관한 질문들은 훨씬 이전부터, 다양한 경로로 이어져 왔다. 그러나 이 간단한 질문에 결론을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동안 쌓여왔던 담론의 두께만큼 다양한 관점이 혼재해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는 게임과 예술의 경계를 구획하려 하는 시도 자체가 구태의연하다는 인식까지 존재한다. 그런데 실제로 게임과 예술의 경계가 무너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엄숙한 미술관, 그것도 한국 미술계에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이 23년 5월 12일부터 9월 10일까지 게임을 주제로 한 <게임 사회> 전시를 연 것이다. 이는 단순히 한국에서 게임의 문화적 지위가 변화했음을 나타내는 것뿐만 아니라, 미술 전시로의 게임이 어떤 이야기들을 만들 수 있는지, 게임으로의 예술이 가지는 특수성은 무엇인지 등 우리 사회에 새로운 질문들을 던졌다. 이에 해당 전시에 자문위원으로도 참여했던 편집장은 <게임 사회>를 기획한 홍이지 학예연구사와 만나 게임과 예술의 관계를 더 깊게 고찰하고자 하였다. 다만, 전반적인 전시에 관한 소개는 국립현대미술관 콘텐츠( https://www.youtube.com/watch?v=_mZEphegRDc) 에도 잘 나와 있기에, 인터뷰에서는 게임을 전시하는 것의 의의와 한계, 또 앞으로의 가능성들을 사유하고자 하였다. 이경혁 편집장: 안녕하세요. 학예연구사님. 먼저 자기소개를 간단히 부탁드릴게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저는 대학에서는 조각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는 이제 전시 기획을 전공을 한 뒤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을 하다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근무한 지 3년 되었습니다. 홍이지라고 합니다. 이경혁 편집장: 전시가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전시에 대한 반응들이 뜨겁더라구요. 인터넷에서도 많은 여론이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게임 관계자들과 미술 관계자들이 이번 전시를 보는 시각은 조금 다를 것 같은데, 현장에서는 어떻게 느끼시나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비단 미술계와 게임계로 나뉘는 것뿐 아니라, 게임계 안에서도 게이머가 보는 전시가 다르고, 게임 업계에 계시는 분이 보는 전시가 다르고, 게임을 콘텐츠로 기획하시는 기획자분이 보는 관점도 다른 것 같아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오히려 그렇기때문에 저희가 할 수 있는 얘기가 많은 것이 저는 재밌어요. 이 전시 하나만으로도 저희가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아서, 대화를 할 때마다 너무 흥미로워요. 이경혁 편집장: 사실 게임 전시라는 것이 리터러시의 문제가 있죠. 전시에서 애초에 게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알아볼 수 있는 지점들도 있고요. 사실은 일반적인 미술관도 심리적 거리감을 느끼는 분들이 있는 상황인데, 미술 전문가로서 게임에 관한 전시가 다른 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것과 다른 특이점이 있을까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사실 처음 기획 때부터 모든 사람들이 이 전시의 기획 의도를 한 방향으로 읽으시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각자의 리터러시가 다르니까요. 그래서 더욱 피드백이 궁금한 전시이기도 했어요. 일반적으로는 미술관에서 전시를 올려도 피드백은 거의 없거든요. 개인의 호불호나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코멘트 정도는 있지만, 전시 전반의 경험에 관한 피드백을 받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 전시는 오픈한 지 일주일 됐는데도 피드백이 너무 적극적이어서 굉장히 놀라워요. 그게 게임 전시의 특이점이기도 한 것 같아요. 이전에 우리 미술관에서 비슷하게 피드백을 받았던 전시는 ‘개를 위한 미술관’ 전시였어요. 강아지들이 들어왔을 때, 미술관이 가지고 있는 모종의 엄숙주의나 결계가 해제되면서 이 공간을 다르게 점유하고 경험했을 때 확실히 훨씬 더 적극적인 피드백이 있었던 것 같고, 또 그거를 염두하고 만들었던 전시이기도 해요. 왜냐하면 코로나 때, 저희 미술관이 몇 개월 동안 문을 닫았었거든요. 그런데 사실 얼마나 장소가 좋아요? 위치도 훌륭하고. 코로나 때 병상이 없을 때에도 여기를 이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많았거든요. 저희도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는 미술관이 기능을 하지 못할 게 뻔한데 이 공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미술관에 대한 경험과 이용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죠. 이번 기획도 이런 맥락에서 기획한 지점이 있어요. 다만, 피드백 중에는 기획자가 누구이며, 얼마나 게임을 해봤는지 묻는 질문들도 있어요. (웃음) 물론, 제가 게임을 하기는 하지만, 모든 게임을 섭렵하고 그런 것은 전혀 아니에요. 그러나 외부 기획자가 미술관에 와서 하는 전시와 여기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공공성을 주제로 해서 만드는 전시는 분명히 접근이 되게 다를 거라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그 층위를 보는 것도 중요하기는 한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공공미술로의 기획이 가질 수 있는 특수성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는데요. 아무래도 디지털 게임 전시도 있다보니 기계들이 많잖아요? 그 지점에서도 공공미술에서의 의의나 어려움들이 만들어질 것 같은데, 기계들은 괜찮나요? 잘 돌아가나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네. 괜찮아요. 저희가 우려했던 것보다 그래도 안정화는 빨리 됐고, 생각보다 안정적으로 전시되고 있어요. 저희 오픈하고 그다음 날 단체 관람객이 900명이었거든요. 그때가 진짜 위기였긴 했어요. 관람객분들이 개별로 혹은 두 세분씩 오실 때는 미술관의 분위기나 문법을 인지하고 오세요. 그런데 900명의 학생들이 한꺼번에 오니까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기계들은 별 탈 없이 잘 돌아가고 있어요. 이경혁 편집장: 이 전시의 기획의도 이면에 있던 고민들에 대해서도 좀 여쭤보고 싶은데요. 미디어 아트 작품이 굉장히 많던데, 전시가 끝나면 이 작품들은 어떻게 되나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사라져요. 실체로 남아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고요. 처음부터 저희가 작품들을 파일 형태로 받았는데, 어차피 전시가 끝나면 파일을 바로 폐기하고 그걸 사진을 찍어서, 소장품 대여처에 보내줘야 돼요. 김희천 작가님의 작품에 쓰인 큰 LED 이런 거는 패널도 그냥 다 해체해 버리는 거예요. 렌트기 때문에. 저희는 자산 취득을 할 수가 없어서 장비가 비싸도 렌트를 해야 돼요. 이 현장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면. 이경혁 편집장: 그러면 아카이빙을 한다 해도 사실상 ‘전시의 재현’이라는 건 불가능한 형태군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그렇죠. 이경혁 편집장: 음. 게임 매체가 원래 그렇긴 하죠. 게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원래 애초부터 재연이 불가능한 거니까요. 그래도 파일을 가지고 계신거면, 나중에 오페라처럼 다른 무대에서 다른 연출로 재현할 수는 있는 거겠네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네. 그런데 그것도 조금 문제가 있긴 해요. 제가 이번에 MoMA(Museum of Modern Art: 미국의 유명 근현대 미술관)랑 스미스소니언(미국 정부가 예산을 지원해주는 박물관)에서 각각 작품을 빌렸는데, 최종 협약서에 사인할 때까지 1년 가까이 걸렸거든요. 애초에 MoMA와 스미스소니언이 2010년 초반에 게임을 소장하기로 했는데, 당시에는 지금이랑 문법이 많이 달랐던 거죠. 지금의 관점에서 당시 계약서는 명확한 규정이 만들어지기 전에 체결된 거였거든요. 게다가 당시의 판단으로는 (게임 관련 전시물을) 어디까지 소장해야 되는지에 관한 연구가 너무 미비했기 때문에, 누구의 권한을 어디까지 일임받아서 관리할지에 대한 부분도 각각 다 달랐던 거죠. 어떤 게임사는 ‘전시할 때마다 허락을 받아야 한다’, 어떤 곳은 ‘전권을 다 준다’ 대중이 없었어요.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너무 달라졌고, 또 담당자들도 다 바뀌어서 판단을 유보했기 때문에, 저희가 이번에 전시할 때에는 MoMA에게 먼저 허락을 받고, MoMA의 모든 리스트를 보면서 게임 회사들에게 다시 또 허락을 받았어요. 그때 어떤 게임사는 알아보고 연락 준다고 하고 두 달, 여름 휴가라고 한 달, 어떤 곳은 ‘우리가 MoMA랑 계약을 했다고요?’ 하는 곳도 있고,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게다가 MoMA가 2010년에 전시를 하고 그 이후로는 아무도 전시를 안 했기 때문에, 저작권의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컨디션이 많이 바뀐 거예요. 그 사이에 데이터 파일도 굉장히 압축이 많이 되고, 전시물을 상영하는 방식도 달라졌고... 그래서 나중에 다시 재연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에요. 이경혁 편집장: 한편으로 MoMA에서 전시된 작품들도 실제 상용 작품들이고, 사실은 직접 컨택을 해서 전시해도 상관없지 않나요? 그런데 MoMA와 계약한 작품들을 빌려왔던 의도가 따로 있으셨을지 궁금해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저희도 그 지점에 대해서 고민을 했어요. 그런데 게임을 미술사로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필요했던 지점이었어요. 포스트 디지털 미술사의 맥락에서, 그러니까 89년 인터넷이 발달한 이후를 디지털 미술사로 정립을 하고 있는 와중인데, 이 디지털 미술사의 맥락에서 게임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거든요. 그런데 지금까지 미술사에서는 게임을 거의 다루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지금이라도 우리가 연구하고 있던 맥락 안에 게임을 긴급하고 진중하게 다룰 필요가 있었는데, 이러한 필요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MoMA의 사례가 주효했어요. 애초에 게임을 접해본 적이 없으신 분들에게도 ‘MoMA도 게임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이 설득에 도움이 되는 것이죠. 이경혁 편집장: 그렇다면 역사적 맥락 외에도 ‘미술 전시로서의 게임’이 가지는 특수성이 있을까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물론 있지만, 그걸 구현하는 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요. 단순한 체험으로 제공되는 것 외에, 저희가 미술관에서 감상하는 미디어 작품처럼 뭔가 감상의 여지가 생기고, 이걸 통해서 특정한 순간을 경험하고 그러기에는 미술관에서의 공간이 한정적이고, 너무 찰나인 거죠. 경험의 시간 자체가. 이경혁 편집장: 그렇죠. 사실 이번 전시 중에서 특히 심시티 같은 경우는 어떤 감각을 느끼는 체험을 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들죠. 결국, 전시장의 한계라는 것은 공연 공간에서, 줄을 서서 공연 기기를 잠깐 대여하는 방식에서부터 나올 것 같은데요. 오락실 게임은 이런 논리가 가능하겠지만, 심시티나 마인 크래프트가 공적 공간에 올라왔을 때는 또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시연 외에도 미술 작품과는 다르게 게임은 일반적으로 협업해서 만들어지잖아요? 그러면 아티스트가 누구인지 특정하기가 좀 어려운 부분도 있지 않니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맞아요. MoMA도 게임 전시는 항상 디자인 분과에서만 하는데, 시연이 어렵다는 점과 크레딧의 문제가 닿아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게임 전시의 형태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한 지점도 있고, 아직은 예술로서 게임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관한 관점의 차이들도 큰 것 같아요. 저희가 빌릴 때도 게임사의 반응에 따라서 그 게임사가 게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거든요. 가령, 제노바 첸(Sky : 빛의 아이들, Flower, Journey 제작자)은 확실히 스스로를 예술가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저희가 뭔가를 요구했을 때, 모든 걸 조건 없이, 질문을 하지도 않고, 무상으로 전부 제공해줬는데요. 확실히 게임이 예술로 보여줄 수 있는 자리라는 거에 대해서 굉장히 예민하게 받아들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또 저희가 지금 헤일로 2600을 보여주고 있는데, 스미스소니언 미술관을 통해 에드 프라이즈(Ed Fries, 헤일로 2600 개발자)의 연락을 받았어요. 저희는 모든 전시품을 똑같은 컨디션으로, 너무 향수를 불러일으키려고 하지 않는 방향에서, 관람객들에게 중립적으로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에드 프라이즈는 자신의 작업이 아트이기 때문에, 전시할 때 게임이 이용되었던 당시의 CRT 모니터로 바꿔 달라는 연락이 온 거예요. “접근성 확장을 위해서 전시에 버튼과 조이스틱을 쓴 것은 알겠지만, 내 작업은 이미 종결된 그 시기의 ‘작품’이기 때문에 다시 번역된 상태로 제공이 되는 형태는 반대한다.” 그런 거죠. 이런 지점에서는 게임과 전시에 대해서 고민들이 더 필요한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어떻게 보면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가 생각나기도 하는데요. 처음에는 이게 무슨 예술이냐고 하다가 지금은 백남준 류의 비디오 아트가 미술계에 자리가 생겼잖아요? 게임도 그런 게 가능할까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저는 어떤 측면에서는 (게임이) 이미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만큼 자리 잡혔다고 생각해요. 싱글 채널 비디오 아트에서 옛날에는 작가가 선형적인 타임라인 안에서 촬영을 해서 편집을 하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CGI가 안 들어가는 작업을 찾기가 힘든데, 그 CGI 작업 자체가 유니티 아니면 언리얼을 너무 많이 쓰기 때문에, 이미 게임의 문법으로 영상 언어를 만들고 있고, 그 과정에서 메타버스나 NFT를 경험해 본 작가들이 너무 많이 늘어났기 때문에, 게임의 작법을 어떻게 적용시키고 잘 만들지에 있어 기술력에 대한 갈구가 큰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작가들도 고민하는 게, 그런 기술력을 써서 작업을 만들면 1, 2년 사이에 빠르게 낡아버린다는 감각을 느끼게 되는거죠. 이제는 딱 보면 ‘이거는 심즈 미감, 이거는 플레이스테이션 1 미감, 이거는 언리얼 엔진 5 미감’ 이런 걸 바로바로 알 수 있기 때문에 너무 금방 낡아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번에 김희천 작가가 개발을 할 때도 큰 화면에 굉장히 압도적인 스펙터클을 만들 수 있었지만,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거는 풀레이스테이션 1 미감에 로우 폴리곤을 써서, 시간대를 흐트러뜨리고 싶은 의도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작가님이 다른 매체와의 인터뷰( https://www.esquirekorea.co.kr/article/77220)에서 언급한 예시 중에 라라 크로프트가 있었는데요. 옛날에,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을 때에는 게이머들 각자의 라라가 있었던 거예요.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라라. 그런데 기술이 발달해서 실사화가 되니까 모두가 실망했다는 거죠. 자기의 라라가 아니라서. 그런 상상의 여지를 열어두고 게임을 하던 그 시기가 현대 미술과도 닿아있는 것이, 예술을 감상하고 체화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딱 그 부분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요. 이경혁 편집장: 확실히 게임계에서는 그런 기술적 맥락들이 중요하죠. 사실 초창기 레트로 게임들은 지금처럼 폴리곤 방식으로 안 만들고, 도트로 이제 디자인을 했잖아요. 근데 도트디자인에서는 박모라고 하죠? CRT 특유의 번짐을 포함해서 디자인을 한 게 있었죠. 그런 미감들은 시대적인 맥락에서 감상되고, 이해되는 지점들이 있지요. 그런 맥락에서 생각나는 것이 이번 전시에서 <슈퍼 마리오 무비>는 다양하게 감상될 것 같은데, 이전 게이머들에게는 그 화면이 익숙하거든요. 게임팩을 처음 꽂았을 때, 뭔가 지직거리면서 나오는, 그래서 다시 훅훅 불고 게임팩을 꽂는 익숙한 화면인데, 그 경험이 없거나 그 시절을 안 겪은 요즘 게이머들은 무슨 화면인지 모르는 거죠. 그런건 도록에 아무리 써도 잘 알 수가 없죠. 홍이지 학예연구사: 그런 지점이 현대 미술과 게임의 접점이기도 한 것 같아요. 제가 브로셔에 쓴 글이 있어요. 게임을 하는 것과 현대 미술을 감상하는 과정이 되게 비슷하다고 써놓은 게 있거든요. 저는 실제로 그랬던 것이, 제가 게임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면 미술계에 계신 많은 분들은 제임을 잘 모르시거든요. 그런데 반대로 외부에서 ‘저 미술관에서 일해요’라고 하면 ‘저는 현대 미술은 하나도 모르겠어요’라고 하시는 분들이 많은 거죠. 이렇게 서로 문법이 다르고, 시간을 들여서 익히지 않으면 온전히 즐길 수 없는 두 대상을 공공미술관에서 다룬다는 점에 있어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어떻게 보면 이번 전시에 ‘접근성’을 무게감 있게 다룬 것도 연장선 상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경혁 편집장: 말씀해주신 접근성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데요. 이번 작업을 하시면서 접근성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보셨을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게임계의 바깥에 계신 입장에서 게임 접근성의 현재를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저희가 전시를 기획할 때, 컨트롤러를 이용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Xbox Adaptive Controller (Xbox 접근성 컨트롤러: 국립재활원의 ‘같이 게임! 가치게임’ 프로젝트에서도 소개되었던, 장애인의 게임 접근을 돕기 위한 컨트롤러)로 전시할 수 있는 게임이 거의 없는 거예요. 특히 국내 게임은 하나도 없었죠. 그런데 지스타가 열렸을 때, 넥슨에서 ‘카트라이더: 드리프트’가 나오니까 그거를 이 컨트롤러로 쓸 수 있게 기술적으로 검토를 해달라는 이야기가 국립재활원에서 있었고, 국립재활원 연구에 참여했던 가족들에게도 ‘단 하나라도 집에서 할 수 있는 국내 게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서 마지막에 ‘카트라이더: 드리프트’를 넣은 지점도 있어요. 그런데 사실 엑스박스 컨트롤러는 국내에서 팔지도 않고, 접근성이 많이 떨어지죠. 그리고 우리나라 게임 시장에서 게임에 대한 (장애인과 여러 소수자의) 접근성을 확장해야 한다는 논의는 많이 있었지만, 여전히 게임은 산업으로 분류되고 게임에 대한 평가도 이용자가 얼마인지 등 가시적인 숫자로 평가되기 때문에, 접근성에 관한 논의가 떨어지는 거예요. 이경혁 편집장: 그런 지점에서 한편으로는 이번 전시 이후에도 게임의 접근성에 관한 논의가 더 잘 드러날 수 있는 전시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사실 미술관과 접근성은 게임보다 먼저 논의들을 거쳤잖아요? 이제는 미술관이, ‘한국에서 장애인이 갈 수 있는, 가장 접근성이 높은 공간’ 중 하나로 꼽히는데, 거기에서 접근성에 관한 논의가 부족한 ‘게임’이 이야기된다는 지점이 유의미한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이야기가 더 나왔으면 하는 바람도 있어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그런데 저는 매일 내려가서 Xbox Adaptive Controller를 쓰시는 분들을 보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금방 익숙하게 잘하세요. 저희 딸이 11살인데, 저희 딸한테 마인 크래프트를 이 컨트롤러로도 시켜봤는데, 자기만의 방법을 만들어서 하긴 하더라고요. 확실히 접근성에 관한 논의들은 실제로 경험해보면서 느끼는 지점들이 있는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그렇죠. 어떤 컨트롤러에 익숙한지에 대한 문제를 확장하면 장애인 접근성에 관한 논의와 같은 맥락이에요. 그러니까 사실 접근성 관련 논의가 비단 장애인으로만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 보편성에 관한 논의이고, 오히려 메이저를 향해 가는 지점들이 분명히 있지요. 그래서 이러한 고민들을 손쉽게 ‘돈 안되는’, ‘착한 일’로 인식할 수 없는 것 같아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맞아요. 사람들이 접근성을 자꾸 소수자의 문제라고 쉽게 인식하지만, 크게 보면 사실 키오스크의 사례도 같은 맥락이죠. 만약 키오스크에서 에러가 떴을 때, 핸드폰을 많이 쓰는 세대는 직관적으로 초기 화면으로 넘어갈 수 있는 문해력이 있는데, 그게 전혀 없는 사람들은 그냥 손 놓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문해력이 없는 사람도 배려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 거죠. *김희천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동시에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상호작용의 현장 이경혁 편집장: 앞서 게임계의 다양한 반응과 그 지점에서 공공미술로의 특수성 같은 말씀들을 해주셨는데, 미술계의 반응은 좀 어떤가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미술계에도 다양한 의견이 있긴 한데요. 먼저 제가 예전에 <유령팔>이라는 전시를 했던 걸 많이들 아시니까, 연장선에서 봐주시는 분들은 포스트 디지털 미술사 맥락에서 읽어주시는 분들도 있고요. 또 어떤 분들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게임 전시를 해서 카타르시스가 있다고 봐주시는 분들도 있고요. 또 어떤 분들은 새로운 세대가 (미술계로) 진입해서, 경험이 확장되는 것을 의미있다고 봐주시는 분들도 있어요. 이경혁 편집장: 게임과 미술이라는 콜라보가 참 쉽지 않은 영역이었는데, 이후에는 어떻게 관계를 가져갈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좀 해야 할 시기 같아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그래서 미술 쪽에 비평하시는 분들 중에선 게임의 미감과 질감이 다음 세대의 미디어 아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민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왜냐하면 언리얼 풍이나 유니티 풍의 미감이나 마감이 단순히 작업물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작업 방식이나 사고 방식에도 영향을 주잖아요. 재미있는 사례로, 최근에는 실제 공간을 인식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온 것을 느끼는데요. 저는 실제 전시 장소에서 물리적인 양감과 구조를 이해하며 작품을 감상하고 설치하는데, 어떤 작가분들은 실제 전시장에 와서도 사진을 찍은 다음, 사진으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실제로 보는 것이 낫지 않나?’고 했더니, 자기는 핸드폰 스크린으로 보는 게 훨씬 이해가 빠르다고 말하는 거죠. 이처럼 프로그램이나 기술이나 게임의 문법이 여러 변화를 만든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재미있는 말씀이네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런 논의들이 게임이라는 매체를 시각적인 대상으로 볼 때 한정되는 문제이기도 한데요. 어떻게 보면 게임의 또 다른 정체성이자 특징인 규칙, 그리고 그 규칙과 상호작용하면서 겪게 되는 어떤 감정의 변화라는 것을 어떻게 다룰지도 고민할 수 있는 영역인 것 같아요. 미술이 게임의 방법론을 가져간다면 사실 이 고민이 필요할 것 같은데, 전시라는 방식으로 우리가 이런 영역을 다룰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세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좋은 예시가 김희천 작가 작업인 것 같아요. 김희천 작가 작업은 앞 부분에서 유니티로 만든, 모바일 게임을 하는 주인공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 게임의 아바타 같은 사람이 미술관을 돌아다니는데, 이후 실제 인물이 연기를 하는 파트가 끝나면 전시장에 구현된 35대의 CCTV가 이미지를 수집하고, 수집된 이미지가 실시간으로 변환되어서 출력되는 파트가 있거든요. 실제 게임적인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건 이 부분이죠. 우리는 보통 앞부분을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뒷부분을 게임으로 보지 않는데, 작가님에게는 이 부분이 게임인 거고, 내러티브가 있는 기존의 미디어 작품의 문법으로 해석했을 때 실시간 반영이 작품에 즉흥적으로 개입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이 이전의 영상 작품과는 다르게 볼 수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이경혁 편집장: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게임의 문법 쪽으로 가지를 뻗어간다면, 어차피 집에서도 경험을 할 수 있는데, 전시장에 가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웃음) 홍이지 학예연구사: 그렇죠. (웃음) 다만, 전시장이 어떤 풍경을 만들었는지가 너무 중요한 것 같아요. 실제적으로 어떤 콘텐츠가 상영되는 지보다, 사람들의 행동 양식, 반응, 상호작용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보는 것이 유효한 지점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전시장에 와서 보는 미디어 작업이 어떤 경험의 차이를 만드느냐에 대한 문제인데, 우리가 예술을 통해서 온당하게 다뤄야 할 내용에 대해서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 것. 사회적 주제에 대해서 모두가 드나드는 공간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가 굳어질 수 있는 사회 문법에 균열을 줄 수 있어요. 그런 균열을 만드는 공간이 미술관인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맞습니다. 게임 자체로는 이미 예술을 하고 있어요. 다만, 그중에 전시될 수 있는 방식이 미술관에서 전시된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모든 게임이 미술관을 가야하는 것도 아니며, 의미가 생기는 것도 아니지요.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작업 계획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 홍이지 학예연구사: 저는 81년생인데, 어렸을 때 게임을 하고 싶었지만, 엄마가 ‘여자애가 무슨 게임이야? 오락실에 가 있는 오빠나 빨리 데려와서 저녁 먹으라고 해.’ 라는 말을 듣고 자랐거든요. 그래서 오빠를 데리러 가면, 오빠는 친구들이랑 ‘스트리트 파이터’ 하고 있고, 오빠가 저한테 200원 주면 테트리스하고, 보글보글했던 기억이 있어요. 이것처럼 저는 어릴 적부터 게임을 접했지만, 동시에 사회적으로 남성적 문화라는 점에서 게임 문법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적 경험을 해왔어요. 그러다 보니까 지금도 게임에 몰입하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경험들을 하게 되고, 그런 경험들 때문에 이런 전시를 하게 된 것 같아요. <유령팔>도, 85년 이후 세대들이 포스트 미디엄을 다루고 있는 특성과 달라진 창작 환경에 대해서 짚어보고자 기획했어요. 물리적인 감각이나 스케일 감이나 물질에 대한 감각을 인지하는 세대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현대미술에도 그런 맥락에서 게임이 자연스럽게 이야기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앞으로의 전시도 이런 고민들을 담는 지점에서 세대적 경험에 균열을 만들어갈 것 같습니다. Tags: 인터뷰,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 전시, 미술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디어문화연구자) 서도원 재미있는 삶을 살고자 문화를 공부합니다. 게임, 종교, 영화 등 폭넓은 문화 영역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 This is a Title 01 | 게임제너레이션 GG

    < Back This is a Title 01 This is placeholder text. To change this content, double-click on the element and click Change Content. This is placeholder text. To change this content, double-click on the element and click Change Content. Want to view and manage all your collections? Click on the Content Manager button in the Add panel on the left. Here, you can make changes to your content, add new fields, create dynamic pages and more. You can create as many collections as you need. Your collection is already set up for you with fields and content. Add your own, or import content from a CSV file. Add fields for any type of content you want to display, such as rich text, images, videos and more. You can also collect and store information from your site visitors using input elements like custom forms and fields. Be sure to click Sync after making changes in a collection, so visitors can see your newest content on your live site. Preview your site to check that all your elements are displaying content from the right collection fields. Previous Next

  • 22대 국회의원선거 공약이 말하는 대한민국과 디지털게임

    민주주의 국가의 운영은 행정부만큼이나 입법부도 중요하다. 입법부를 구성하는 선거가, 쓰는 입장에서는 한창 진행중이고 읽는 입장에서는 투표 직전이거나 끝났을 것이다. 그리고 게임 또한 문화이자 산업으로서, 정치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비단 단속이나 규제의 의미만이 아니고 진흥과 지원의 의미로도 그렇다. 그리하여 윤석열 대통령의 게임 공약을 분석했던 시도에 이어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등장한 게임 관련 공약을 살펴본다. < Back 22대 국회의원선거 공약이 말하는 대한민국과 디지털게임 17 GG Vol. 24. 4. 10. 민주주의 국가의 운영은 행정부만큼이나 입법부도 중요하다. 입법부를 구성하는 선거가, 쓰는 입장에서는 한창 진행중이고 읽는 입장에서는 투표 직전이거나 끝났을 것이다. 그리고 게임 또한 문화이자 산업으로서, 정치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비단 단속이나 규제의 의미만이 아니고 진흥과 지원의 의미로도 그렇다. 그리하여 윤석열 대통령의 게임 공약을 분석했던 시도에 이어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등장한 게임 관련 공약을 살펴본다. 하지만 현재의 정국은 윤석열 행정부에 대한 중간 판단이라는 중대한 이슈가 중심에 있다. 영부인과 그 가족의 비위 의혹, 헌정사상 최초의 R&D 예산 대폭 삭감, 각종 복지와 지원 사업의 축소, 생활 물가 급속 상승 등의 다양한 문제가 의제로 올라오고 있으니 게임이 중요한 정책 공약의 대상이 되기가 힘들다. 그래서인지 거대 양당 외의 정당에서는 정당 정책으로 제시된 게임 공약이 없다. 기껏해야 개혁신당이 스포츠토토의 종목에 e스포츠를 넣겠다는 정도다. 이 말을 뒤집으면, 즉, 거대 양당은 게임 정책을 중앙당 공약에 끼워넣었다. 그리고 그 정책 공약은 e스포츠의 산업적 측면에 치중돼 있다. 여당, 국민의힘 국민의힘은 중앙당 공약과 지역당 공약 모두에 게임을 언급하고 있다. 방향성도 구체적이다. 가장 앞에 있는 것은 게이머의 공정한 게임 경험이다. 핵 사용자에 대한 처벌을 실효적으로 제정하겠다 하는데 어떤 법을 개정할 생각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구체적인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게이머의 경험에 공정 담론을 합한 첫 번째 초점은 국민의힘이 몇 년째 주력하는 담론의 적용이고, 다음은 e스포츠다. * 국민의힘의 ‘제22대 국회의원선거 중앙 공약집’ 중에서. 글로벌 대회의 국내 개최라거나 지역 균형 발전 같은 내용은 정상적인 정치 세력이라면 내세우는 내용인데다 추상적이니 일단은 넘어가자. 제도권 교육을 통해 게임과 e스포츠의 전문 인력을 양성한다는 내용은 구체적 내용은 없으나 국가 자격증 신설로도 읽힐 수 있는 내용이다. 어떻든 간에 교육 기관을 만들거나 지정해야 할 것이고, 강사 인력과 커리큘럼 제작이 필요할 것이다. 예산 근거가 되는 법과 주관하는 위원회도 만들어야 한다. 이런 내용이 없으니 중요도가 높은 공약은 아니다. 같은 현상이 지역 공약에서도 일어났다. 부산은 G-STAR의 개최 도시인지라 게임 도시 브랜드를 노리는 지자체인데, 부산 공약에서 게임이 차지하는 비중은 딱 한 문장이다. 부산에서 어떤 신산업을 육성할지에 대한 언급에서 윤석열 행정부가 관심을 갖고 있는 블록체인과 원전이 나올 때 함께 나온다. 다소 당황스러운 열거인데, 블록체인은 가상자산 열풍 속에서 투기 상품을 개발하는 기술에 갇혀있는 상태고, 원전은 글로벌 스탠다드에서 탄소 감축 방안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논란이 상당한 분야다. 게임이 ICT 산업 분야라는 이유로 이런 애매한 분야와 함께 묶이고 있다. * 국민의힘의 ‘제22대 국회의원선거 시도 공약집’ 중에서. 야당, 더불어민주당 더불어민주당의 시각도 산업 위주이고 e스포츠 위주이긴 하지만, 분류가 약간 다르다. 콘텐츠 산업의 성장 유지를 위한 정책에서는 음악 공연 등의 행사 산업에 세액 공제를 신설하겠다고 하는데, 여기에 e스포츠 대회 운영도 들어 있다. 그리고 이 공약은 다른 정책과 연결이 된다. 더불어민주당의 부산 지역 공약이다. 부산을 e스포츠 성지로 만들기 위해 국제대회 유치 같은 내용은 여당과 동일하지만 세액 공제와 연계되므로 조금 더 구체화된다. 또한 일시적 이벤트인 대회만이 아니라 기관과 관광 스팟을 만들 생각이다. e스포츠진흥재단 설립이라는 아이디어는 지원 창구를 일원화 최소한 체계화하겠다는 말이다. 여기에 레전드 선수 기념관 및 박물관, 즉 e스포츠 명예의 전당을 건립한다. e스포츠에게 역사의 권위를 주겠다는 구체적 발상이고, 장소 또한 윤곽을 제시했다. 부산 서부권이다. 이런 내용이 콘텐츠 산업과 관광 산업의 분류에 들어가 있으니, ICT 산업으로 바라보는 여당의 시각과는 약간 맥락이 다르다. * ‘제22대 총선 더불어민주당 온라인 정책공약집’ 중에서. 이 공약은 더불어민주당의 지역구 출마자의 공약이 중앙당 공약으로 들어온 경우다. 그 후보는 부산 사하구 을의 이재성 후보다. 부산 사하을 더불어민주당 이재성 이번 선거 2호 영입인재인 이재성 후보는 넷마블 이사와 NC소프트 전무를 거친 게임 기업인 속성을 갖고 있다. 특히 2009년, G-STAR가 벡스코로 이전할 당시의 게임산업협회 운영위원장이기도 했다. 당시의 이전 이유 중 하나는 e스포츠 경기의 기적적 성공인 2004년의 소위 ‘광안리 대첩’이었는데, 이재성 후보는 그 명맥이 끊겼음을 아쉬워하고 있다. 그래서 중앙당 공약에는 국제대회 유치라고만 적혀 있던 것이 후보의 공약에서는 다대포 해수욕장이라는 구체적 장소로 바뀐다. 이 공약은 다른 언론에서는 다대동을 아예 e스포츠 테마 시티로 조성한다는 단계로 발전하기도 한다. 또한 진흥재단 아이디어에 더하여 후보는 e스포츠 기술, 아마도 행정 메커니즘을 연구하는 연구소도 설립하겠다고 한다. 명예의 전당 공약과 세제 지원 공약도 있으니 중앙당의 e스포츠 공약을 디자인한 주체가 이재성 후보와 그 캠프임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이상의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서 입법 노동자인 국회의원이 할 일은 당연히 입법인데, ‘e스포츠 진흥에 관한 법률’을 개정할 것이라 한다. 전면 개정이라고 표현했으니 이미 밑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의미다. 반면 이렇게 밑그림과 구체적인 요소를 상정하고 있는 후보는 별로 없다. 이재성 후보와 비견될 후보는 서울 동작구 갑의 새로운미래 전병헌 후보다. 서울 동작갑 새로운미래 전병헌 3선 의원이자 청와대 정무수석이었던 전병헌 후보는 과거 KESPA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하지만 회장직 수행 중에 롯데홈쇼핑으로부터 후원금을 받는 과정이 석연치 않았고, 뇌물로 보이는 상품권을 가족 전체가 받았으며, 해외 출장비 횡령 혐의도 있는 등 복잡하고 커다란 비위 사실로 기소되었다. 판결은 일부만 유죄였지만, 그 일부로도 굉장히 무거운 형을 받았다. 뇌물 수수로 벌금 2천만 원,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업무상 횡령으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피선거권을 잃었고, 2022년 윤석열 대통령의 사면으로 피선거권이 회복되어 이번 선거에 출마했다. 후보 본인은 자신의 전과에 대해 많은 억울함이 있다고 말하고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해도, 일단 중형이 내려진 것은 사실이며, 게임계를 대변하는 대표 아이콘으로 통했던 그의 정치 커리어가 끝난 것도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반면 그런 약점과는 별개로, 과거 아이콘이었던 전병헌 후보의 게임 공약은 실하다. 후보가 제시하는 공략 시장은 중국과 신남방 국가인데, 이는 지난 문재인 정권에서 아세안 정상 회의를 서울에서 열어 한-아세안 정상 회의의 형태로 만들면서, 신흥 경제 성장국들인 동남아시아로의 진출을 모색했던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전략을 세우고 진출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제도와 정책을 개발하는 용도로 e스포츠 연구기관을 설립해 씽크탱크로 사용한다. 이 부분은 이재성 후보와 발상이 같은데, 국제대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공약도 그렇다. 여러 가지 외부 요소까지 염두에 둔 것이 분명한 공약의 끝에는 지역 e스포츠 활성화라는 짤막한 언급도 있다. 현 윤석열 정권의 공약인 지역연고제를 떠올리게 한다. 전병헌 후보는 이렇게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이재성 후보의 그림과는 맥락이 다소 다르다. 어쨌든 이런 구상이 실현된다면 몇몇 지역에는 e스포츠 경기장이 필요해진다. 자기 지역구에 e스포츠센터나 경기장을 건설하는 공약을 한 후보들도 있지만 이재성, 전병헌 후보와 발을 맞추는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다양하지만 납작한 지역 공약 국민의힘으로 경기도 용인시 병 지역구에 출마한 고석 후보는 고등군사법원장을 했던 육군 준장, 즉 판사 장군이다. 현 정권의 공약을 염두에 뒀을 것이 분명한 용인 연고의 e스포츠 구단 창설을 공약했다. 같은 당으로 경기도 수원시 정 지역구의 이수정 후보는 유명한 범죄심리학자인데, e스포츠센터와 특성화 교육기관 설립을 공약했다. 센터에서 정확히 어떤 기능을 기대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교육기관 설립은 국민의힘 중앙당 공약의 내용이다. 센터 건립 공약은 3선 의원인 충주시의 국민의힘 이종배 후보 또한 공약했다. 국민의힘 경기도 평택시 갑의 한무경 후보는 글로벌 게임도시 조성을 공약했는데 추상적이기만 하여 가치 있는 공약이 되지 못했다. 더불어민주당 후보들도 비슷한 공약을 낸 후보들이 있다. 인천의 중구/강화군/옹진군 조택상 후보는 ‘2030 마린스카이 메가시티’라는 거대한 구상을 내놓으면서 생활스포츠타운과 게임복합문화영상 단지 조성을 끼워넣었다. 게임과 영상을 다루는 단지(complex)라고만 하여 전시 기능인지 경기장 기능인지 지원 센터 기능인지 알 수 없는 것은 이수정, 이종배 후보와 마찬가지다. 반면 고석 후보와 똑같이 고등군사법원장으로 육군 준장 예편한 3선 의원의 민홍철 의원은 경상남도 김해시 갑 후보인데, 지역 대학과 연계한 e스포츠 체육관 건립을 공약했다. 일단 체육관이니 경기가 가능하며, 대학과 연계한다는 것은 e스포츠 교육 기관을 인근 대학으로 지정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일정이 없을 때는 그 체육관을 대학의 실습 공간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추상성과 구체성이 동시에 만족된, 괜찮은 공약이다. 그러나 개발의 형태라는 점은 식상하기도 하다. 인천 계양구 을 후보이자 당대표이며 정부와 여당의 십자포화를 견뎌내고 있는 정국의 핵심, 이재명 후보 또한 얼마 전(심지어 원고를 마감한 후에!) 게임 공약을 발표했다. 온라인 커뮤니티 별 민심을 접수해 만들었다는 형식을 한 이 추가 공약들은, 예를 들면 자동차 커뮤니티인 보배드림에서 자동차 관련 정책 제안을 받았다는 식이었다. 게임 공약을 제안한 커뮤니티는 인벤닷컴. 이 공약의 제일 앞에는 게임 중독 근거법 개정이 있다. 통계법 22조를 개정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현재 질병코드 등재를 심사중인 민관협의체가 공회전하고 있는 것이 불안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행정 진행에 관해서는 분석을 한 적이 있다.) 인디게임을 취급하는 공공플랫폼을 활성화하는 것이 두 번째 공약이다. 인디게임의 판매와 제작 지원을 하려면 심사를 해야 하고, 그러자면 기준이 필요하므로 평가지표를 개발해야 하니 이것 또한 공약에 들어와 있다. 불공정한 게임 환경 철폐라는 공약은 얼핏 봐서는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뒷광고 규제라고는 하지만 인터넷 방송인과의 프로모션 콘텐츠까지 영향을 받을 것으로도 읽힌다. 일련의 이 공약들은 민심 청취라는 점에는 긍정적이지만 동시에 커뮤니티의 여론, 거기서도 일부 여론이 게임 정책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는 과대표의 우려도 존재한다. 게임이 산업일 뿐? 누군가는 충실하게, 누군가는 허술하게 게임 공약을 준비했으나 아쉬움이 큰 것은 어쩔 수 없다. 중앙당 공약은 거대 양당에만 그치고 있고, 공약을 낸 모두가 e스포츠, 그것도 산업의 측면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어쩔 수 없는 현실 정치의 속성이다. 당장 이재성 후보나 전병헌 후보가 산업 외 측면의 게임에 대해 어떤 비전을 갖고 있더라도 지역구 후보로 나온 이상은 그 비전을 노출하기가 어렵다. 지역구 국회의원은 중앙 정치인이지만 지역에서 당선되어야 하는, 사소하지만 중대한 모순 때문에 이들은 중앙 입법 공약보다 지역 개발 공약을 먼저 내놓아야만 당선 확률이 높아진다. 따라서 선거 공약에는 개발, 관광, 교육, 수출의 측면만 강조될 수밖에 없고 중앙당의 중앙 공약 또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유권자인 우리는 정치인이 공약으로 내놓는 한두 개의 단어를 보고 그 정치인의 방향성을 엿봐야 하는 어려운 게임을 하고 있다. 광안리 대첩을 재현하려는 이재성 후보나 한국 게임이 동아시아 시장 전체로 진출하는 꿈을 꾸는 전병헌 후보의 산업적 비전은 엿보았고, 노력한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지만 그 이상 혹은 그 외를 기대하는 것은 정말 무리일까.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덕질인) 홍성갑 프리랜서 작가. 이 직업명은 ‘무직’의 동의어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딴지일보에서 기자를 시작하여 국정원 댓글 조작을 최초로 보도했다. 평생 게이머로서 살면서, 2001년에 처음 게임 비평을 썼고 현재 유실된 것을 매우 기뻐하고 있다.

  • : 공포의 세계에서 배회한다는 것

    선형적 서사에 있어 반복은 매혹의 대상이 아니다. 그 세계에서 무한한 반복이란 오직 탈출해야 할 환경에 불과하다. 이야기들은 그 사실을 붙잡고는 ‘사실 진짜 생은 반복의 바깥에 있어’라고 끝없이 주장한다. <팜 스프링스>가 흥미로웠던 것은 두 주인공이 일시적으로나마 반복에 매혹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결국 탈출의 의지가 발생하고, 두 사람은 또다시 ‘진짜 삶’과 마주하기 위해 바깥으로 탈출한다. < Back : 공포의 세계에서 배회한다는 것 15 GG Vol. 23. 12. 10. "에너지 상자에 갇힌 거예요. 3.2초 만에 상자에서 탈출하면 타임 루프에서 나갈 수 있어요." (...) "현실 세계로 뭐하러 돌아가요? 죽음과 가난과 괴로움 가득한 세상인데. 그나마 여기에선 함께할 수 있잖아요." (...) "여긴 진짜가 아니에요. 여기서 하는 모든 건 의미가 없다고요." <팜 스프링스>(맥스 바바코우, 2020) 선형적 서사에 있어 반복은 매혹의 대상이 아니다. 그 세계에서 무한한 반복이란 오직 탈출해야 할 환경에 불과하다. 이야기들은 그 사실을 붙잡고는 ‘사실 진짜 생은 반복의 바깥에 있어’라고 끝없이 주장한다. <팜 스프링스>가 흥미로웠던 것은 두 주인공이 일시적으로나마 반복에 매혹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결국 탈출의 의지가 발생하고, 두 사람은 또다시 ‘진짜 삶’과 마주하기 위해 바깥으로 탈출한다. 이러한 사실은 명백히 운명적이다. 말하자면 선형 서사는 언젠가 종말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무한한 반복은 불가능하다. 예외적인 상황이라고 해봐야 작품 외적인 활동, 관람자가 다시 읽기 혹은 되감기-다시 재생을 시도할 때 정도다. 로라 멀비는 영화에서의 이러한 지향이 영화의 운명임을 논한 적이 있다. 장 뤽 고다르의 1963년 작 <작은 병정>에 나온 대사(“영화는 1초에 24번의 진실이다.”)를 뒤집은 제목의 저서 『1초에 24번의 죽음』에서, 멀비는 서사 영화는 암전이라는 죽음을 향해 달려 나간다고 저술한다. “서사의 정지, 비유기체적인 형태로 돌아가는 비유로서의 죽음은 마치 스틸 프레임과 죽음의 결합이 이야기의 죽음으로 용해되는 것처럼 (...) 영화로 확장된다.”(『1초에 24번의 죽음』, 로라 멀비, 현실문화, 2007) 필름이 모두 돌아가면 그곳에 도사리는 것은 아무것도 투사되지 않는 검은 장막이다. 여기에 도사리는 것은 죽음의 이미지뿐이다. 이때 매체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것이 담지하는 서사 역시 죽음과 마주한다. 아니 오히려, 이것은 서사를 다루기 때문에 그 활동이 정지한다 봐도 무관하다. 서사는 시작하는 곳과 멈춰 서는 곳을 결정하는 지시로서의 제약이다. 더 이상 세계가 변혁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서사의 운동은 끝난다. 그것이 행복한 결말이든 불행한 결말이든 그것은 서사의 죽음이나 다름없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논의를 그대로 비디오 게임에 적용할 수 없다. 게임은 반복의 매혹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초기의 아케이드 비디오 게임에 있어서 ‘결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무한히 루프 하는 게임들(이를테면 타이토의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목표는 그 안에서 무한히 생존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비디오 게임에서의 ‘끝’은 ‘죽음’과 현상적으로 연결되었다. 이것은 지시적 죽음이 아니라 진짜 의미에서의, 세계 내부에서의 죽음을 뜻한다. GAME OVER는 멀비가 지정한 의미에서 암전-죽음과 연결된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이 지시된 ‘끝’을 담지하면서부터 상황은 변모한다. 여기서 끝은 두 단위로 분화된다. 하나는 GAME OVER로 표상되는 죽음의 끝=암전, 그리고 또 하나는 CLEAR로 표상되는 완결화된 끝이다. 때로 (특히 고전적 아케이드 게임들은) CLEAR를 GAME OVER라는 기표로 표기하긴 하지만, 그 누구도 양자를 동일한 결말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때 CLEAR가 GAME OVER와 대비되는 존재라고 한다면 이것은 명백히 암전에 대비되는 존재로서 ‘표백’에 위치한다. (‘깨끗이 한다’는 의미의 CLEAR와 표백은 마치 운명 된 짝처럼 들어맞기까지 한다.) 표백의 결말은 엄밀히 말해 서사와 등치되지 않으며, 정확히는 게임이 추구하는 목표(objective)와 결부한다. 하지만 서사는 목표를 지시하기 가장 적합한 형식이다. 이를테면 캡콤의 <파이널 파이트>는 범죄조직 매드 기어가 시장의 딸을 납치했다는 컷씬으로부터 시작되고, 인질이었던 제시카가 연인 코디와 함께 떠나는 컷씬으로 종결된다. <파이널 파이트>를 플레이하는 동안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인질 제시카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매드 기어의 야욕을 꺾는다면 게임이 전제하는 목표를 해결했다는 사실과 함께 목표와 연결되는 서사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이 인지는 정확히 이 게임이 여기서 ‘끝’났다는 사실을 이해시킨다. 여기서 더는 새로운 것이 없다. 물론 플레이어에 따라서는 다른 캐릭터를 사용하거나 혹은 조금 색다른 플레이 방식을 시험해 보거나 아니면 다른 친구와 함께 해보기 위해 반복해서 게임을 플레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플레이어에게 한 번 표백의 결말(=CLEAR)이 찾아왔다는 사실은 지울 수 없다. 이 사실은 코디가 제시카와 함께 돌아가는 장면을 본 그때에 명백해진 것이다. 브라이언 업튼은 게임의 플레이어를 세 가지 분류(목표 중심적 플레이, 일관 중심적 플레이, 종결 중심적 플레이)로 나눈다. 이때 종결 중심적 플레이를 ‘서사주의적 의제’로 분류하며 이들의 목표란 ‘향후의 행동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지는 지점에 이르는’ 것이라 말한다. (『플레이의 미학』, 브라이언 업튼, 에이콘, 2019) 비디오 게임이 고도화되고 다수의 서사적 매개를 담지하게 되면서 일관 중심적 플레이는 대체로 표백의 결말(=CLEAR)을 향한 목표의식과 등치되었다. 이것은 표층적 단위에서의 하나의 끝, 더 플레이한다고 해도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표백’적 목표 지정이다. 물론 한 번의 CLEAR로 서사의 진위를 모두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고, 촘촘한 변곡점들 탓에 다른 방향의 서사를 즐기기 위해 루프를 감행하는 경우도 충분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들 모두 완전히 표백시키기 위한 반복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따라서 서사가 있는 비디오 게임 플레이를 암전과 표백이라는 관점에 놓고 정리한다면, 플레이어가 상정하는 완전한 표백을 위해 수없는 암전을 거쳐 가는 구조가 된다. 이때 암전은 부정적이며 불완전한 결말로서의 장애가 된다. 좀 더 명백히 하자면 표백은 매혹하지만, 암전은 매혹하지 않는다. 설령 몇 번의 루프를 더 반복하고자 하는 플레이어라고 하더라도 그가 원하는 것은 추가적인 표백일 뿐 추가적인 암전은 아니다. 이러한 게임 언어에서 암전을 향하는 충동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로그라이크 : 암전 충동과 표백 충동의 충돌 지점 다만 로그라이크(혹은 로그라이트)는 이 두 개의 충동이 다른 상관관계를 보인다. 이 장르는 절차적 생성, 캐릭터의 영구적 죽음이라는 두 기조를 통해 수많은 플레이를 생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는 매회의 플레이에서 마주하게 되는 장애와 다뤄야 하는 기술이 일정량 상이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말하자면 플레이어가 한 번의 암전을 경험한 뒤, 다시 게임의 내부에 들어가면 직전의 암전과 차이 있는 경험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물론 이전의 경험으로부터 학습한 지식은 의미 있게 작동하지만 때로는 그러한 것들로는 돌파하기 난해한 국면이나 상황과도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한 번의 표백에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로그라이크는 자신이 무한히 다른 가면을 쓸 수 있다는 사실로 플레이어를 유혹하기 때문이다. 로그라이크에서의 모든 플레이는 업튼이 규정하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뛰어드는 ‘눈먼 점프’와 같으며, 플레이어들은 ‘눈먼 점프’의 연속이기 때문에 즐긴다. 따라서 로그라이크는 암전의 충동을 가지는 장르다. 이 장르가 매혹의 무기로 휘두르는 무한성이란 캐릭터가 죽음을 맛봐야 작동시킬 수 있다. 플레이어는 로그라이크의 적극적 참여자가 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죽음을 스스로 즐겨야만 한다. 캐릭터의 영구적 죽음이라는 고통을 감내하며 획득해 낸 지식을 시험하기 위해, 또다시 ‘죽을 수도 있는’ 세계로 직접 뛰어드는 것이다. 특히나 이러한 암전의 지식을 수치화시키는 로그라이트는 더욱더 죽음에 능동성을 준다. 플레이어에게는 임시적 강화와 영구적 강화라는 두 개의 트랙이 존재한다. 한 번의 플레이에서 경험한 임시적 강화는 죽음과 함께 모조리 사라지지만, 그 플레이의 결과물은 영구적 강화의 재료가 된다. 이때 영구적 강화의 재료를 획득하는 방법은 캐릭터가 ‘죽는 것’이다. (혹은 게임에 따라서는 지정된 시간 동안 무사히 생존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이러한 형식의 대표 격인 <뱀파이어 서바이버즈>를 떠올려 보자. 이 게임은 지정된 시간 동안 살아남더라도 결국 사신 형태의 캐릭터가 나타나 캐릭터를 죽여버리고, GAME OVER의 결말을 남긴다. 이후 등장한 <뱀파이어 서바이버즈>의 유사 게임들은 대체로 이런 경우의 죽는 결말을 제거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로그라이크는 언제 ‘표백’되는가? 그저 암전의 충동으로 가득 찬 게임이라면 플레이어가 이 루프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한가? 그런데 공교롭게도, 로그라이크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로그>에도 공식적으로는 엔딩이 존재한다. 지하 22층 이하의 층에서 “Amulet of Yendor”를 습득한 뒤 다시 지상층으로 올라오면 화면에 성공을 축하하는 텍스트가 출력된다. 게임이 표백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물론 플레이어가 다시금 지하 던전에 내려가겠다 마음먹는 순간 이전과는 다른 구조의 던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플레이어가 <로그>에서 ‘표백의 결말’에 도달했다는 사실은 변화하지 않는다. 어떤 이에게는 이 표백의 경험이 게임의 종료 시점일 수 있다. 한편, 그러한 플레이어에게는 이전까지 경험했던 암전은 매혹의 대상임과 동시에 장애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설령 암전의 충동을 느끼는 플레이어에게도 그 충동을 유지하기 위한 장기적인 동력이 필요했을 수 있다. 표백의 충동은 이러한 장기적인 동력에 영향을 준다. 하지만 그러한 플레이어들은 표백의 충동을 해결한 뒤에도 암전의 충동을 느끼며 다시 뛰어들 수 있다. 로그라이크 내부에서 표백과 암전은 서로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지만, 하나의 충동이 다른 충동을 소멸시키지는 않는다. 두 충동은 생생한 형태로 그곳에 자리 잡고 있다. 로그라이크와 서사의 문제 따라서 로그라이크에는 두 개의 결말 충동(암전과 표백)이 충돌하는 장르다. 플레이어들은 경험과 지식의 양을 늘리기 위해, 또한 그렇게 습득한 경험과 지식을 다시 활용하기 위해 끝없는 죽음(=암전)을 바란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게임들과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완결(=표백)에 이르기 위한 과정과도 같다. 이때, 앞서 말했듯이 표백을 지향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서사주의적 의제’에 해당한다. <로그>의 케이스도 게임이 제공하는 서사적 완결과도 일치한다. 하지만 암전 충동이 끝없이 들끓는 로그라이크에서 서사를 선형적으로 진행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 로그라이크는 순환의 바깥으로 나가기를 일정량 거부시키는 장르이지 않은가. 로그라이크에서의 체험은 결코 선형적인 감각으로 치환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시작된 뒤, 끝이 나기 전까지 같은 자리를 뱅글뱅글 돌아간다. 결국 이것을 하나의 거대한 완결 서사로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순환 그 자체를 선형적 서사의 내부에 집어넣을 수밖에 없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암전의 보상물로서 표백으로의 진행을 꾸준히 제공하는 <하데스>일 것이다. 이 게임에서는 표백에의 충동은 보상으로만 존재하기에 암전의 충동을 건드리는 일은 없다. 따라서 양자는 서로를 위배하지 않은 채 점진적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또는 이나 <서울 2033>처럼 암전에의 도전이 서사 형식의 텍스트로 진행되는 방식이 있다. 이들은 로그라이크 게임들이 매번의 플레이에서 던지는 장애물과 도전을 서술의 방식으로 치환한다. 상황이 텍스트로 주어지고, 플레이어는 자신에게 부여된 선택지를 탐색하고 결정함으로 그 결과를 확인한다. 다만 이러한 방식이 하나의 선형적 서사를 완전히 이룰 수 있는지는 의문이 따른다. 모든 파편화된 상황들은 그저 단기적인 판단능력을 요하는 인카운터에 지나지 않는다. 개별의 상황 내에서는 특정한 인과가 발생하지만, 상황과 상황 사이에서의 인과는 작동하지 않는다. 선형 서사라는 것은 거시적 관점에서의 구조화된 모델을 뜻한다. 게임을 플레이한 뒤 서사를 인식한다는 것은, 자신의 플레이 경험 내에서 하나의 서사 모델로 응축할 수 있는 경험들을 선별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개별의 경험들은 그것이 선형적으로 나열될 수 있는 일종의 연결점(nod)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그것이 바로 고전적 의미에서의 플롯이 된다. 이나 <서울 2033> 등의 파편화된 텍스트들은 하나의 모델로 응축되지 않을뿐더러, 동일한 이벤트가 반복되면 서사적 가치도 상실한다. 플레이어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담지하는 서술된 내용이 아니라 개별의 선택지가 가져다주는 혜택 혹은 페널티다. 물론 이 작품들에 있어서 이런 구성이 특별히 문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로그라이크의 순환 구조 내 장애물들을 의도해서 텍스트 적 형식으로 치환해 놓은 것뿐, 하나의 거시적이고 강렬히 직조된 드라마를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로그라이크의 양립되는 결말 충동을 기반으로, 경험 내부에 고전적 서사를 집어넣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증명할 뿐이다. 또 다른 예시로서는 비주얼 노벨 로그라이크를 표방하는 <노베나 디아볼로스>가 있다. 악마에 의해 단절된 마을에 고립된 주인공은 다섯 명의 여성 중에서 누가 악마인지를 밝혀낸 뒤, 인간인 캐릭터와 함께 마을을 빠져나와야 한다. 매 플레이마다 누가 인간 캐릭터인지 무작위로 설정되며, 그들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는 사건 현장 기록 역시 무작위로 배치된다. 이는 표백 충동의 내부에 변수를 작동시킨다는 점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도전이지만, 한 번의 플레이를 끝낸 뒤에는 서사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사건이 표백화되어 버린다는 약점이 있다. 이를테면 마을로 진입하는 장면, 각 인물과 조우하는 장면, 악마에게서 현 상황을 설명받는 장면 들은 두 번 이상 조우할 가치를 느끼기 어려운 요소들이다. 결국 플레이어가 원하는 것은 ‘특정 인물이 인간일 때 서사가 어떻게 변화하는가’에 국한되며 이는 명백히 암전 충동을 배제한다. 따라서 게임은 플레이어의 표백 충동을 돕기 위해 거시 서사만을 확인시키는 ‘엔딩 모드’를 탑재해 이러한 충동을 제어한다. 하지만 그 순간 <노베나 디아볼로스>는 로그라이크가 가지는 양립된 충동 개념에서 크게 벗어난다. ‘공포의 세계’에서 배회한다는 것 폴란드의 pantastaz가 제작한 는 2020년에 얼리 억세스를 시작해, 2023년 10월에 정식 출시 되었다. 일본의 공포 만화가 이토 준지의 아트와 러브크래프티안적 세계관, 20세기 후반 일본의 도시 전설적 서사를 규합해 2-bit 레트로 스타일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구축한 본 게임은 그 분위기만으로도 상당히 많은 관심을 받았다. 스팀의 소개 페이지에는 ‘괴물과의 턴제 전투, 가차 없는 선택으로 만들어지는 지옥 같은 로그라이트 RPG’라고 소개된 만큼 본 작품의 장르를 로그라이트로 규정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말하자면 역시 표백과 암전의 두 충동 사이에서 진동하는 게임이라는 의미다. 2023년 11월 기준 게임의 평가는 7,599개의 평가를 통해 매우 긍정적으로 표시되고 있지만, 평가의 면면을 살펴보면 게임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부정적 평가를 남기고 이탈한 플레이어들을 꽤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UI의 불친절함이나 지나치게 부적절한 난이도를 지적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게임이 예상과는 다르다는 지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특히 게임이 제공하는 이야기들이 지나치게 편린적이라 하나로 응축되지 않는다는 평가들은 매우 흥미로운 측면이 있다. 의 메커니즘은 기본적으로 테이블 탑 보드게임 <아컴 호러>의 디지털 스탠드 얼론 버전에 가깝다. 이를테면 행동에 따른 강제 이벤트, 능력치를 기반으로 하는 성공과 실패의 체크, 한 번의 게임 플레이에 배정되는 초월적 신의 존재, 캐릭터의 자원으로 양분되는 체력과 이성의 존재가 그러하다. 하지만 사실상 로그라이트 장르로서의 진행 양상은 큰 틀에서 을 연상시킨다. 플레이어는 랜덤하게 배정되는 5개의 ‘미스터리’를 돌파하여 마을 등대를 열 열쇠를 모아야 한다. 최종적으로는 등대에 들어가 사악한 존재의 부활을 막는 것이 목적이다. 이 최종적으로 엔딩을 보기 위해 총 8개의 ‘섹터’를 진행해야 하는 것과 5개의 ‘미스터리’를 진행해야 한다는 것은 게임 진행의 절차성에서 연결된다. 개별의 미스테리(=섹터)에서는 진행을 위해 맵이 제공되며, 플레이어는 맵에서 자신의 다음 이동 경로를 눌러 행동을 수행한다. 특별한 능력이 있는 장소(=상점 등)에서 필요한 행동을 할 수도 있고, 장소를 탐색해 벌어지는 이벤트를 해치우고 미스터리의 마무리를 향해 나아갈 수도 있다. 무엇을 하든 사악한 존재의 부활을 알리는 ‘파멸’ 게이지가 상승하며 이 게이지가 100%가 된다면 게임은 실패한다. (이는 의 추격과 유사한 메커니즘이다.)다만 의 섹터와 의 미스터리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섹터는 아무것도 제약하지 않는 공간이다. 물론 해당 공간에 대한 기초적인 규정은 존재하며, 그 규정을 통해 등장하는 이벤트의 속성이 달라지긴 하지만 각 섹터 간의 개념적 차이는 없다. 섹터는 플레이어가 활약할 수 있는 ‘너른 공간’이며, 그 공간을 한 번 거쳐 갔다고 해서 무엇인가 ‘표백’되는 일은 없다. 하지만 의 미스터리는 명백히 서사적인 개념이다. 미스터리는 도입의 서사, 진행을 위해 거쳐야 하는 장소들의 순서, 그리고 플레이어의 행동에 따라 달라지는 몇 가지 엔딩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미스터리는 공간화된 개념이 아니다. 전적으로 선형적 서사의 개념이며 이는 곧 ‘표백’이 가능하다는 의미가 된다. 물론 동일한 미스터리라고 해도 반복해서 도전할 때의 양상은 달라진다. 미스터리를 진행하기 위해 선택하는 ‘탐색’ 행동은 무작위적인 사건들을 가지고 오며, 이나 <서울 2033>과 마찬가지로 선택과 판정을 통해 결과가 도출된다. 하지만 앞서 이 두 게임의 형식을 통해 이야기한 바 이러한 인카운터 이벤트들은 하나의 노드로 연결되는 선형적 경험이 아니다. 따라서 이는 미스터리의 시작과 끝을 규정하는 인트로와 엔딩의 늘어선 노드의 배열에 들어가지 않는다. 말하자면 여기서 미스터리를 하나의 응축된 서사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무작위 인카운터들은 모두 탈각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문제는 미스터리는 어디까지나 표백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미스터리는 통상 2~4개의 엔딩을 가지고 있으며 대체로는 A 엔딩이 가장 이상적인(그러나 모든 것이 깔끔하게 해결되지는 않는) 결말이다. 플레이어가 한 번 A 엔딩으로의 길을(혹은 플레이어에 따라 해당 미스터리의 모든 엔딩을) 확인한다면, 해당 미스터리를 통섭하는 선형적 서사를 향한 욕망을 잃어버리고 만다. 즉 그 시점에서, 미스터리는 이미 ‘표백’되어 버린 셈이다. 플레이어가 이미 특정한 엔딩을 향하는 방법을 완전히 체득하고 나면 더 이상 이 미스터리는 매혹의 힘을 드러내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는 미스터리가 기초적으로 품고 있는 서사적 개념 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작위적 인카운터가 더 중요해진다. 그렇다, 오히려 암전의 충동이 더 강력해지는 것이다. 를 플레이할 수록, 무엇인가 잃어버리는 감각과 마주한다. 강력한 아트의 힘과 모호함으로 사람을 빨아들이는 미스터리들의 내용이 존재하지만, 게임의 플레이가 반복을 이룰 때마다 매혹의 힘을 점차 잃어만 간다. 그런데 애초에 본래의 미스터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본질이 감추어져 있는 일종의 퍼즐이며 그 매혹은 진위를 알고 싶다는 호기심에서 나온다. 미스터리는 가장 강력히 표백의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개념이며 따라서 표백에 의해 가장 빠르게 힘을 잃어버린다. 미스터리야말로 구조화된 서사의 형태를 가장 강력히 요구하는 포맷이다. 따라서 우리는 무한히 미스터리에 붙잡혀 있을 수 없다. 무한히 마주쳐야 하는 암전의 충동 앞에서 미스터리는 쉽사리 힘을 잃는다. 는 스스로가 가진 메커니즘으로 인해 가장 강력한 매혹의 힘을 퇴진시켜 버리고 마는 기이한 게임이다. 물론 공포의 매혹과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불안을 하나로 규합하는 것은 매우 훌륭한 실험이다. 하지만 빠져나올 수 없다는 불안은,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희망이 전제되었을 때 더 강력히 기능한다. 에 무엇인가 부재한 게 있다면 바로 그 희망인지도 모른다. 미스터리들이 너무나 빠르게 표백되어 버린 세계에서 하염없이 헤매는 것은 오히려 불안하지 않다. 어쩌면 그 세계에 영원히 반복하길 바랐던 기대의 작용이, 오히려 이 ‘공포의 세계’로부터 쉽사리 빠져나오게 만든 것은 아닐까.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평론가) 이선인 만화와 게임, 영화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합니다. MMORPG를 제외한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클리어가 라이프 워크입니다. 스팀덱을 주로 사용합니다.

  • [논문세미나] Press X to Wait: The Cultural Politics of Slow Game Time in Red Dead Redemption 2

    이번 세미나에서 리뷰할 논문은 지난 2022년 8월 ‘게임 스터디즈(Game Studies)’라는 저널에 게재된 〈Press X to Wait: The Cultural Politics of Slow Game Time in Red Dead Redemption 2〉이다. 번역하면 “X를 눌러 기다리시오: 레드 데드 리뎀션 2에서 느리게 흘러가는 게임 시간의 문화정치” 정도 될 수 있다. 이 논문은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레드 데드 리뎀션 2〉과 시간에 대한 감각을 다룬다.  < Back [논문세미나] Press X to Wait: The Cultural Politics of Slow Game Time in Red Dead Redemption 2 11 GG Vol. 23. 4. 10. 이번 세미나에서 리뷰할 논문은 지난 2022년 8월 ‘게임 스터디즈(Game Studies)’라는 저널에 게재된 〈Press X to Wait: The Cultural Politics of Slow Game Time in Red Dead Redemption 2〉이다. 번역하면 “X를 눌러 기다리시오: 레드 데드 리뎀션 2에서 느리게 흘러가는 게임 시간의 문화정치” 정도 될 수 있다. 이 논문은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레드 데드 리뎀션 2〉과 시간에 대한 감각을 다룬다. 저자는 존 밴더호프(John Vanderhoef), 매튜 토마스 페인(Matthew Thomas Payne)이다. 둘 다 미국에서 미디어 관련 교수로 활동하고 있고, 특히 매튜 토마스 페인은 밀리터리 게임과 전쟁의 관계에 관한 저서를 쓴 이력이 있다. 게임 스터디즈는 게임의 학문적 연구를 주관하는 국제 학술 저널이다. 일반적으로 학교에 소속되어 있거나 열람권을 유료 결제해야 논문 전문을 읽을 수 있지만, 게임 스터디즈는 누구나 자유롭게 읽을 수 있도록 웹에서 무료로 논문을 제공하고 있다. 웹 기반으로 운영되며, 2001년부터 지금까지 게임을 주제로 한 전세계의 다양한 논문들이 게재되어 왔다. 원문을 확인하고 싶다면 아래 URL에 접속하여 직접 읽어볼 수 있다: https://gamestudies.org/2203/articles/vanderhoef_payne 논문의 배경은 게임 리뷰에서 나타난 ‘불만’ 레드 데드 리뎀션2(Red Dead Redemption 2, 이하 레데리2)는 미국의 게임회사 락스타 게임즈(Rockstar Games)의 ‘레드 데드(Red Dead)’ 시리즈의 3번째 작이다. 동일 회사의 GTA(Grand Theft Auto) 시리즈로 잘 알려진 오픈월드 시스템에 1800년대 말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게임이 펼쳐진다. 그래서 ‘서부판 GTA’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2018년 콘솔 플랫폼에 먼저 출시되었고, 1년 뒤에 PC 플랫폼에서도 플레이 할 수 있게 되었다. 레데리2는 출시 되자마자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특히 이 게임은 매우 현실적인 그래픽을 보여주었고 게임 전반에 탁월한 현실 고증이 배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초원을 활보하는 카우보이가 된 듯하게 말을 모는 방법이나 공간 이동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NPC가 플레이어의 상황에 반응하여 대화를 나누고, 야생 동물 등 주변 환경과 상호 작용이 현실감있게 구현 되었다. 레데리2의 자유도는 무궁무진해서 “이것도 될까?”하는 실험 영상 클립이 온라인 공유되어 게임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주목을 받았다. 2020년 스팀에서 올해의 게임을 수상할만큼 게임의 인기는 독보적이었고, 다수의 게임 어워드에서 노미네이트 되었다. 전작 이후 약 8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개발된 이 게임은 출시된 이후 락스타 게임즈의 아성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각인시켰다. 그런데 연구자들은 레데리2의 인기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높은 평점과 별개로 사람들의 리뷰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불만이 있던 것이다. 장점을 언급한 다음 게임 플레이가 “너무 느리다”, “지루하다”, “답답하다”라는 표현이 일색인 것이 여러 리뷰에서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게임의 현실성이 장점으로 평가되었지만, 동시에 캐릭터가 현실적인 속도 그대로 행동하는 것을 지켜보는 데에 플레이어들은 지루하고 답답함을 느끼고 말았다. 연구자들은 이와 같이 현실성 구현이라는 단일한 특성이 가지는 양가적인 의미에 주목했다. "It is defiantly slow-paced, exuberantly unfun, and wholly unconcerned with catering to the needs or wants of its players" (이 게임은 분명히 느리고, 지루하며, 플레이어들의 요구나 욕구를 고려하지 않는다) – from 평론가 “game should be called Red Dead Slow Motion” (게임 이름은 '레드 데드 슬로우 모션'이라고 불려야 한다) – from 메타 크리틱 "It is a boring and tedious simulation game... with horribly unresponsive controls and terribly slow pacing” (이 게임은 지루하고 답답한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흉측할 만큼 반응이 늦은 컨트롤과 지나치게 느린 페이스로) – from 메타 크리틱 * 논문에서 언급된 레데리2의 해외 부정적인 리뷰들 무엇이 게임을 느리게 할까요? 우리는 ‘게임적 속도감’에 익숙해져있다. 떨어진 아이템에 스치면서 ‘줍기’ 버튼을 눌러 인벤토리로 즉시 이동시키고, 식재료를 선택하여 ‘요리하기’ 버튼을 누르면 순간적으로 음식이 완성이 되는 것이다. 이동할 때면 포탈이나 워프 기능을 사용해서 멀리 떨어진 거리를 단숨에 찾아갈 수 있다. 어찌보면 게임의 현실은 진행 속도가 빠르다기보다, 뒤따라 이어지는 불필요한(현실에서는 필요한) 과정을 삭제하고 바로 결과값을 제공하고 있다. ‘과정의 삭제’가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레데리2는 게임적 속도감이 적용되지 않는다. 논문에서 다양한 예시들이 언급되지만, 대표적으로 시체에서 아이템을 얻을 때 직접 허리를 굽혀 뒤적이는 것이 그 예이다. 집 안에서 파밍을 할 때면 방 전체를 돌아다니며 가구를 일일히 손으로 열어서 확인해야한다. 공간 이동의 경우, 원거리 워프 기능을 사용할 수 있도록 게임 안에 (눈에 안 뜨이게) 제공되고는 있지만, 레데리2는 드넓은 맵을 말을 타고 목적지까지 이동해야 하는 내러티브적 구조를 가진다. 게임에서 많은 일이 실제 우리가 행동하듯 벌어지도록 구현이 되어 있다. 이렇게 결과로 바로 이행되지 않고 현실처럼 모든 과정을 겪도록 하는 경험은 플레이어에게 불쾌한 감각을 만들어낸다. 많은 사람들이 이 ‘느린’ 감각을 게임의 부정적인 면으로 꼽고 있으니, 게임을 만든 회사의 입장에서는 개선이 필요한 사항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게임 가격은 게임에 푹 빠지기 위한 값이다 레데리2는 AAA(트리플 A)게임이다. 트리플 A를 특집으로 다루었던 GG 지난 호에서 충분히 언급되었듯, AAA게임을 개발하기 위해서 아주 긴 시간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력이 투입된다. 게임 산업에서 AAA는 영화 산업에서 쓰이는 ‘블록버스터’라는 말과 비슷하다. 게임의 퀄리티를 최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만큼 큰 자본을 투자했기 때문에 수려한 그래픽, 탄탄한 내러티브를 자랑하는 것이 특징이다. 플레이어가 품을 수 있는 상상을 게임 내에서 최대한 허용하며 호불호를 줄이고 자유도와 사용성을 높이기 위해 지난한 테스트 과정도 거치며 게임의 모난 면은 둥글게 깎여나간다. AAA게임의 신작 출시 소식이 예정되면, 사람들은 게임에서 어떻게 시간이 ‘순삭’ 될지 기대한다. 지갑을 손에 쥐고 결코 저렴하지 않는 그 값을 기꺼이 지불할 순간만을 기다리기도 한다. 게임에 몰입한 채 내일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방대한 맵을 탐험하다 정신차려보면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잘 시간이 되어있는 게 AAA 게임 플레이의 감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AAA게임 플레이어가 가지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개발사는 게임 제작에 많은 힘을 쏟을 수밖에 없다. 애니메이션 하나 하나 대충 그려내지 않기 위해 긴 시간동안 공을 들인다. 만약 표현이 어색해서 몰입이 깨지거나 개발 공수가 덜 들어간 것처럼 보여 게임의 퀄리티가 떨어진다는 평을 듣게 되면 회사 이미지에 금이 갈 수도 있다. AAA 게임의 영역에서 게임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되는 그 ‘몰입적 리얼리티’는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공수가 과도한 나머지 너무 디테일한 표현으로 플레이어가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기다려야하고 몰입이 깨져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회사의 입장에서 게임의 현실감 추구가 가지는 모순적인 결과다. 논문의 저자들은 상업성의 최전선에 있는 AAA 게임이 현실적인 표현에서 두 가치의 충돌을 발생시키고 있는 현상을 문화정치(cultural politics)의 순간으로 보고 있다. 제목에도 쓰여 있는 문화정치라는 말은, 문화의 영역에서 다양한 의미들이 충돌하고 각각 관계와 역학이 드러나는 상태 를 뜻한다. 고자본 투입의 결과로 고급 노동력을 오랜 시간 투입하여 리얼리즘을 표방하는 AAA게임을 개발했지만 그 가치는 역설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일부 이끌게 되었다. 효율적인 진행을 추구하는 게임 시간의 헤게모니 2007년 게임 학술 기관인 DiGRA 컨퍼런스에 ‘플레이의 헤게모니(hegemony of play)’라는 주제로 한 연구가 발표되었다. 이 연구는 빠른 상호작용에 능숙하고 복잡한 공간을 파악해 공간 전환을 잘 하는 사람에게 맞추어진 게임 디자인이 산업이나 플레이어 담론에서 주류 혹은 지향되어야 하는 가치로 일컫어지면서, 게임 플레이에서 일종의 헤게모니를 형성하고 있다는 주장을 했다. 문화 연구에서 주로 사용되는 헤게모니(hegemony)란 지배를 뜻하는 개념이다. 하나의 집단이 다른 집단보다 지배적인 위치에 놓여있는 것, 그러니까 어떠한 집단이 추구하는 가치가 더 우월하고 지배적으로 생각되는 상태를 말한다. 2007년의 발표에 이어, 본 논문의 저자들은 레데리2를 통해 ‘게임 시간의 헤게모니 hegemonic game time’를 말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빠르고 효율적인 진행을 추구하는 것은 플레이어들에게 중요한 가치로 인정된다. 이는 하나의 게임을 어떻게 헤매지 않고 빠르게 클리어 했는지의 문제다. 자원을 낭비하지 않고 최소한의 아이템과 시간을 소비하여 원하는 목표로 도달함은 ‘게임을 잘하는’ 능력이며 우월한 가치로 평가된다. 따라서 이러한 게임에서의 시간 개념은 우리 사회의 능력주의와도 연결되고, 어떠한 헤게모니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플레이어들에게 추구되어야 할 가치이며 개발사도 그에 맞게 어느 정도 ‘편리한’ 시스템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레데리2의 개발사는 그와는 반대되는 양상을 보였다. 게임을 통해 발견하는 우리 사회의 시간 개념 시간이라는 개념은 점차 발전해왔다. 산업자본주의, 후기 산업자본주의, 신자유주의를 거치며 시간은 낭비되어서는 안되는 귀한 가치로 여겨져 왔다. 동일한 시간 안에 더 많은 효율성을 추구하자는 목적 아래에 사회 시스템 전반의 모든 장치들이 움직이고 있다. ‘경제성’은 같은 의미를 뜻하는 말이다. 이러한 사회가 요구하는 시간 개념에 부합하기 위해서, 심지어 즐거움조차도 효율적이고 생산적이어야 한다. 이 논문과 마찬가지로, 최근 발간된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도 비슷한 현상에 주목했다. 사람들은 넷플릭스나 유튜브에서 제공하는 ‘15초 뒤로’ 또는 ‘배속’ 기능을 통해 빠르게 시청할 수 있다. 또는 영화를 시청하는 대신, 영화 줄거리를 간략하게 전달하는 영상을 시청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시간 압박이 발생하는 나머지 여가생활의 일환으로서 영화 한 편을 2시간동안 시청하는 과정보다 ‘영화를 봤다/안봤다’, ‘영화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라는 경험의 유무로서 또는 지식의 습득으로서 콘텐츠 소비가 더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적 시간 개념에서 즐거운 여가생활이란, 시간이 낭비된다는 감각이 드러나지 않는 상태에서 달성될 수 있다. 따라서 레데리2에서 플레이어가 주인공 아서 모건의 지난한 인생을 기다리는 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키패드에 손이 결박되는 것처럼 느끼는 답답함과 그로 인해 몰입이 끊기면서 내가 얼마나 게임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지 다시 ‘현생’을 자각하게 되는 이 감각은 우리 사회에서 귀중한 시간의 가치를 드러낸다. 온라인 리뷰에서 보이는 부정적인 감정들은 그 가치와 멀어질 때 발생하는 긴장감과 불안함으로서 볼 수 있다고 분석될 수 있다. “(X)를 눌러 사색 하시겠습니까?” 이 논문은 그렇다고 레데리2가 극도로 느린 게임은 아니라고 주의한다. 글 전체에 걸쳐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지루함과 답답함을 느끼게 하는 부분을 분석하고 있지만 게임을 더이상 못할 정도로 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논문 또한 레데리2가 지루하다는 리뷰에 하나 더 첨가되는 것이 아니라, AAA게임으로서 추구되어야 하는 리얼리즘이라는 가치가 담겼으나 그것이 ‘과했을 때’ 플레이어들에게 부정적인 감각이 발생한 것에 주목하고, 게임을 통해 우리 사회에 어떠한 가치가 추구되었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는 목적 하에 연구를 전개해나갔다. 콘솔 게임기 패드에서 ‘X’는 어떤 행동 수행을 결정하는 키다. 하지만 레데리2에서는 X는 곧 플레이어에게 (잠시의) 기다림을 요하는 키이기도 하다. 레데리2라는 게임을 통해 AAA게임 플레이어가 기대하는 게임 디자인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 사회 전반에 퍼진 시간 압박 인식은 어떤 의미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필자는 더 나아가 이 논문을 통해 과정을 삭제하고 결과로 직행하는 ‘게임적 속도감’에 대해 주목하고 싶다. 게임이 현실을 대변한다고 하지만, 게임이 정말 현실과 같아졌을 때 받아들이기 어려워지는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인지해야 한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연구자) 보라무 사회적인 관점에서 게임을 연구합니다. 게임이라는 도구를 통해 결국 인간을 탐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은 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 전쟁, 게임, 그리고 게임화라는 이름의 수치화

    전쟁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유명 게임 프랜차이즈의 대사도 있지만, 좀 더 현실에 가까운 영역에서 전쟁은 진화를 거듭해왔다. 그러한 진화는 ‘전쟁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의 답이 특정 방향으로 발전해 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전쟁은 내 이웃과 친구들의 비극 혹은 그걸 막기 위한 결단인가, 아니면 권력을 잡거나 방어하기 위해 장기판의 말을 옮기는 것과 같은 형식의 게임에 불과한가? < Back 전쟁, 게임, 그리고 게임화라는 이름의 수치화 25 GG Vol. 25. 8. 10. 전쟁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유명 게임 프랜차이즈의 대사도 있지만, 좀 더 현실에 가까운 영역에서 전쟁은 진화를 거듭해왔다. 그러한 진화는 ‘전쟁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의 답이 특정 방향으로 발전해 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전쟁은 내 이웃과 친구들의 비극 혹은 그걸 막기 위한 결단인가, 아니면 권력을 잡거나 방어하기 위해 장기판의 말을 옮기는 것과 같은 형식의 게임에 불과한가? 전자라면 전쟁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 태도는 최대한 그것을 막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후자라면?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며 따라서 게임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효율적으로 찾는 게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우리의 현실은 어디에 있는가? 이는 게임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워게임’은 현대 전쟁의 중요 요소 중 하나이다. 워게임의 시초는 ‘크릭스슈필(Kriegsspiel)’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보드 게임이다. 1800년경 프로이센의 퇴역 장교 등을 중심으로 개발된 이 게임은 곧 프로이센군의 공식 훈련 교재가 되었다. 또 ‘크릭스슈필’은 민간의 상업용 보드게임의 조상 중 하나로도 간주된다. 전쟁을 상징과 규칙으로 환원하고 이에 근거한 판단과 결정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군용의 ‘워게임’과 오늘날 우리가 가정에서 즐기는 전쟁 소재의 게임은 공통지반을 갖고 있다. 양자는 비슷한 경로를 따라 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게임으로 발전했다. 수많은 측면에서 다른 점을 갖고 있지만 본질이라는 측면에선 사실상 같은 것인 셈이다. ‘워게임’의 본질을 사실 우리는 그간 수많은 전략 게임을 플레이 하면서 간파해왔다. 우리가 익히 알듯, 힘이 없는 개인의 입장에서 전쟁은 각 개인의 겪는 비극의 총합이다. 그러나 ‘워게임’은 제 기능에 충실하기 위해 전쟁을 제3자적 입장, 그러니까 전지적 시점에서 상징화 해야 한다. 이를 위해 ‘비극’과 같은 서사적 요소들은 게임 시스템 그 자체와 일단 분리된다. 가정용 게임에서도 우리는 늘상 이러한 일을 겪는다. 가령 리얼타임전략시뮬레이션(RTS)을 떠올려 보자. 현실에서 병사는 총알 한 개에 목숨을 잃는다. 현대전을 소재로 한 어떤 RTS 게임에서 병사 유닛은 수십 발의 총알을 맞아야 비로소 죽는다. 총알을 운 좋게 피한 것일까? 게임의 화면으로 표현되지 않는 은폐 엄폐 동작이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우리는 공격을 당한 횟수에 비례해 유닛의 체력이 감소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병사는 분명 피격당했다. 치명적 부상을 입지 않은 것 뿐일까? 이 경우는 체력이 탄환이 몸에 명중할 때마다 비균등하게 감소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체력은 입은 피해에 따라 균등하게,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정해진 산식에 의거한 계산에 따라 감소한다. 이런 방식으로 총을 맞는 것이냐 피하는 것이냐의 문제, 즉 총을 맞는 순간 이 병사가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은 어떻게 되느냐와 같은 개인의 실존과 관련한 문제는 게임 시스템 안에서 소거된다. 전쟁을 주제로 한 게임의 이런 측면은 전쟁 규모의 재현과 관련해서도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때가 종종 있다. <파이어 엠블렘> 시리즈와 같은 전략롤플레잉(SRPG) 게임의 경우 전쟁에 준하는 세력의 대립 등을 묘사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정작 하나의 스테이지에 등장하는 아군은 아무리 많아야 십수명의 캐릭터가 전부이다. 하나의 캐릭터는 하나의 사람이 아닌 한 무리의 부대를 상징하는 것일까? 그러나 무기의 장비, 체력 회복, 사망 등의 요소는 명백하게 개인화 되어 있다. <랑그릿사>의 경우 지휘관 외 병사 유닛을 따로 배치할 수 있도록 해 현실감을 높였지만 그래봐야 한 스테이지에 등장하는 유닛 수는 수십 명 정도이다. 전쟁이 아닌 패싸움 수준이다. 그렇다면 사태는 좀 더 간단한 논리로 해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고작 몇십 명의 병사를 휘하에 거느리고 뽐내는 황제가 꼭 세상을 지배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이를 게임적 맥락에서 전쟁의 이야기로서 수용한다. 시적 허용이 아닌 게임적 허용, 좀 더 나아간 개념으로 한다면 ‘게임화’의 단면이다. 이러한 게임들이 대개 턴 방식을 규칙으로 취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당연히 실제의 전쟁이 ‘너 한 번 나 한 번’식의 턴제로 진행되지는 않는다(물론 턴제의 형식은 동시턴 방식 등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 턴 방식을 강제하는 것은 두 가지 조건이다. 첫째는 전장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다양한 변수에 대한 실시간 대응을 재현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을 일정 기준에 따라 정지시킨 상태에서 게이머에게 충분한 시간을 들여 순차적 결정을 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다. 둘째는 ‘게임’이 ‘겨루기’라는 형식을 어느 정도는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려면 양측에 똑같은 공정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이 두 가지 점을 고려한 ‘게임화’의 결과물이 턴제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게임화’는 현실을 상징화 하는 과정에 반영되는 일종의 편집 기술에 비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편집을 통해 전쟁의 무엇을 덜어내고 게이머에게 무엇을 경험하도록 할 것인가? 패러독스 인터랙티브 사의 <하츠 오브 아이언> 시리즈는 전략에 충실한 쪽으로 기운다. 이 게임에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같은 감성은 없다. 게이머는 철저히 이해타산에 맞춰 결정을 내리는 냉혹한 전쟁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실제 현대의 전쟁 지도자에게 실제 전장에서 특정 병사의 영웅적 활약상이나 동료애에 기반한 미담 같은 것은 본질이 아니다. 그에게 전쟁은 지도와 숫자로 이루어진 ‘게임’일 뿐이다. <하츠 오브 아이언> 시리즈가 그리는 전쟁은 그러한 세계에 존재한다. 전투 역시 상당 부분은 숫자로만 표현된다. 전장의 실제 모습을 재현하는데 집중하는 것은 주로 1인칭 슈팅(FPS) 게임이다. 가령 유명 영화의 장면을 오마주한 <콜 오브 듀티> 초기작의 경우 누구에겐 총알만 주고 누구에겐 총만 주는 방식으로 부족한 물자 문제를 때웠던 소비에트군의 부조리를 경험할 수 있다. 이 장면에서 게이머는 죽은 아군의 시체에서 소총을 확보해 자신이 받은 실탄을 장착해 사용해야 된다. 만일 전선에서 후퇴해 도망가려고 하면 바로 뒤에서 독전을 하는 정치장교의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된다. 이런 형식의 FPS에서 게이머는 전쟁 지도부의 전략과 전체 전쟁의 양상을 잘 알 수 없지만 전쟁터에서 어떻게든 작전을 수행하고 살아 남아야 하는 병사의 처지를 실감할 수 있다. 크리에이티브 어셈블리사의 <토탈 워> 시리즈는 그 이름답게 전쟁의 모든 면을 보여주기 위한 총력전을 펼치는 시도처럼 느껴진다. <토탈 워>에는 전쟁 지도자의 냉혹한 계산과 전장의 스펙터클이 함께 공존한다. 물론 무게추는 전략 전술을 경험하는 것에 쏠려 있다. <토탈 워>의 의의는 다른 전쟁 게임과 비교해 실제 전장에서의 상징화 수준을 현실에 가깝게 내린 것에 둘 수 있다. 이런 방식을 통해 전략 수준의 결정이 실제 전장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시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전략 전술을 잘못 짠 영향으로 떼죽음을 당하는 중세 병사들을 보고 있으면 현장 지휘관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마련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시도를 통해 게이머가 전장의 비극이라는 서사적 측면을 대리 체험하는 면이 분명히 있지만, 결과적으로 익숙해지는 것은 전쟁의 기술적 측면이라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령 <콜 오브 듀티>가 영화였다면 관객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투입된 등장 인물이 전우의 시체에서 획득하는 소총의 종류 같은 것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게이머는 게임 속에서 바로 자신이 획득한 장비이기에 그것이 모신나강 라이플임을 인식하게 된다. 이제 관심의 초점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내 소총이 모신나강이라면 적군이 쓰는 총은 무엇인가? 각각 어떤 특징이 있는가? 발사음은 어떻게 다른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게이머는 전쟁의 비극을 그린 서사 안에서도 적군과의 교전을 직접 수행하는 과정을 통해 전투의 기술적 측면을 간접 학습하게 된다. 가령 총격전을 벌이기 전에 은폐 엄폐를 하기 좋은 지형을 찾는다든가, 교전 중에 실탄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확인한다든가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게이머는 자연스럽게 전쟁을 내면화 할 수 있다. 실제 FPS를 모병 홍보 또는 훈련 과정의 일부에 활용하려고 한 시도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주장이 억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시리즈는 미 육군이 직접 개발한 홍보용 FPS 게임이다. 는 미국과 영연방 및 나토 국가 등의 훈련 소프트웨어로 등을 기반으로 했다. 더 이전으로 올라가면 전술 훈련을 목표로 한 실험적 시도로서 의 MOD였던 의 존재도 있다. 수준은 높지 않았지만 말이다. ‘게임을 하면 살인에 둔감해진다’와 같은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가령 ‘살인’은 사회적으로 금지된 행위이다. 대다수 게임이 살인을 소재로 한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엄하게 금지된 행위에 대한 게이머의 경각심이 희미해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만일 그렇다면 벌써 세상은 살인과 절도의 천국이 되었을 것이다. 시리즈의 인기를 생각해보자. 시리즈의 성공으로 세상이 ‘자동차 도둑놈’들의 세상이 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사회가 허용하거나 나아가서는 권장하는 분야에 대한 게임의 영향이라면 어떨까? 게임은 게이머의 사회에 대한 인식 및 태도에 분명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전쟁은 비극이지만, 오늘날 게임이 전쟁의 준비에 이미 활용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나? 우리 사회는 전쟁을 이미 ‘불가피한 게임’으로 받아들이고 전쟁의 본질을 ‘효율적으로 이기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효율적으로 이기는 방법을 찾는 것’은 사회적으로 허용되며, 심지어 권장된다. 그렇기에 거기에 게임이 기여할 수 있고, 기여하고 있는 거다. 실제 ‘워게임’의 일반화는 전쟁의 양상을 바꿨다. 두 가지 면에서다. 첫째, ‘워게임’으로 통칭되는 시뮬레이션은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 위험을 낮추는 요인으로 기능한다. 실제 전쟁을 치르기 전에 서로 간의 치열한 시뮬레이션 및 계산에 따른 ‘장군-멍군’식 대비 대책으로 미리 충돌을 방지할 수 있다. 둘째, 그럼에도 결국 군사적 충돌을 감행하게 된다면? ‘워게임’은 효율적이고 유연한 전략 수립을 가능하게 해 승리의 가능성을 높인다. 최근 강대국이 개입한 전쟁의 양상은 어떤 형태로든 이런 양상을 띄고 있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가장 본질적 이유는 게임이 ‘숫자’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게임도 숫자, 전쟁도 숫자, 세상도 숫자이다. 모두가 숫자를 향할 때 효율과 최대 이익이라는 공통분모가 만들어진다. ‘게임에 사상을 담지 말라’는 구호가 게이머들 사이에서 종종 나오지만, 이렇게 게임에는 이미 지배이데올로기라는 형태로 사상(ideology)이 반영되어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란을 공습하고 가자 지구에서 인종학살을 지속하는 이스라엘의 사례를 보며, 그리고 그러한 전쟁의 구실이 되는 정치, 그 정치를 떠받치는 대중적 동력의 실재를 확인하며 다시 한 번 느끼는 것은, 우리의 삶은 숫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늘 숫자로 상징화 되지만, 언제나 잔여물이 남으며 그것은 무시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전쟁을 반대한다는 것은 앞에서 쓴 전쟁의 또다른 의미, 즉 전쟁의 본질은 우리 삶의 비극이라는 진실을 상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러한 일은 곧 전쟁이 숫자가 아니라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시작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숫자가 아닌 게임이 존재할 수 있을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여기서 제기하는 의문이 ‘반전 메시지’를 담은 게임의 가능성에 대한 건 아니라는 거다. 과 같은 게임은 반전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결국 게이머가 주되게 수용하는 것은 ‘효율적 관리 및 생존’이라는 장르적 요소다. 게임을 바라보고 수용하는 관점의 경로의존성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므로, 오히려 여기서 필요한 건 그러한 경로의존성을 벗어날 수 있는 이정표를 제시하는 것, 즉 해석이며 비평이다. 숫자의 세계에서 숫자가 될 수 없는 것들에 주목하고 그런 것들을 짚어 내줘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게임과 우리의 삶 모두에 죽음이 아닌 생명을 불어 넣을 수 있다. Tags: 수치화, 워게임, 재현윤리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시사평론가) 김민하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시사평론가로 활동하지만 게임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게이머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냉소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돼지의 왕』이 있고,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우파의 불만』, 『트위터, 그 140자 평등주의』 등의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최근작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가 있다.

  • 25년의 심즈, 내일의 인조이

    게임의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국가의 경영과 역사 속 전쟁, 용과 엘프가 나오는 판타지,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의 생존은 훌륭한 게임 소재다. 그렇지만 컴퓨터 조립(PC 제작 시뮬레이터)이나 트럭 운전(유로트럭), 자동차 조립(카 메카닉 시뮬레이터)처럼 비교적 사소한 일들도 게임이 된다. < Back 25년의 심즈, 내일의 인조이 24 GG Vol. 25. 6. 10. 게임의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국가의 경영과 역사 속 전쟁, 용과 엘프가 나오는 판타지,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의 생존은 훌륭한 게임 소재다. 그렇지만 컴퓨터 조립(PC 제작 시뮬레이터)이나 트럭 운전(유로트럭), 자동차 조립(카 메카닉 시뮬레이터)처럼 비교적 사소한 일들도 게임이 된다. 이러한 시뮬레이션 게임 가운데 '청소'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청소게임은 꽤 매니악한 팬층을 형성하고 있는데, 필자의 지인은 '방 청소를 미뤄두고 <하우스 플리퍼>를 밤새 플레이했다'는 경험을 전했다. <하우스 플리퍼> 외에 고압세척기와 비누액으로 묵은때를 벗겨내는 개운함을 주는 쾌감을 가진 <파워 워시 시뮬레이터>나 살인현장을 청소한다는 콘셉트의 <연쇄청소부들>, 자동차를 운전하지 않고 세차만 하는 <카 워시 시뮬레이터> 등이 유명하다. 게임의 소재가 이렇게도 무궁무진한데, 그 자체로 무궁무진한 삶은 또 얼마나 좋은 게임 소재겠나. 인간의 희노애락과 생로병사는 그 자체로 많은 공감 요소를 가진다. 비디오게임의 시대가 오기 이전부터 인간의 삶은 역할극이 됐고, 그러한 놀이로 현실에서 꿈꿀 수 없는 로망이 충족됐다. 바비 인형을 가지고 하던 놀이는 라이프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대체됐다. 그리고 이 장르의 최고봉에는 단연 심즈 시리즈가 있다. 한국의 크래프톤은 올해 <인조이>의 얼리액세스를 시작하며 심즈 시리즈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적지 않은 프로젝트들이 심즈 시리즈의 아성을 넘보려했지만, 그 아성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과연 <인조이>는 이 독창적 장르 안에서 안착할 수 있을까? 그를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라이프 시뮬레이션의 최고봉 '심즈' 시리즈 먼저 짧게나마 25년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는 심즈 시리즈의 역사를 돌아보려 한다. <심즈>(2000)는 <심시티>, <심어스>, <심앤트> 등을 '심'시리즈를 창작한 윌 라이트가 만들었다. 그의 스튜디오 맥시스는 '장난감'을 디지털게임으로 구현해야겠다는 철학(Toy-Based Design Philosophy)으로 90년대 게임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구가했다. 언급한 게임들의 연이은 성공으로 딸 캐시 라이트와 시간을 보낼 수 없었던 윌 라이트는 소꿉놀이를 하던 딸의 모습을 보고 <심즈>의 밑그림을 그렸다. 게임의 프로젝트명은 '인형의 집'(Dollhouse)이었다. 그간 도시나 농장 같은 큰 공간을 무대로 삼았던 맥시스는 규모를 줄여 마을 속에서 인간의 삶을 게임에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심즈>는 식욕, 수면욕, 명예욕, 그리고 성욕과 같은 인간의 기본 욕구를 파라미터화했으며, 플레이어로 하여금 전지적 시점에서 심(인간 캐릭터)들의 생을 관리하도록 설계했다. 이뿐 아니라 집을 짓는 건축 모드나 상품을 구매해서 살림살이를 발전시켜 나가는 구매 모드는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고도화된 상태로 준비됐다. <심즈>를 개발하던 중, 맥시스는 공격적 M&A 전략으로 공룡이 되어가던 EA에 인수됐다. <심즈>는 2000년 EA의 유통망을 타고 전 세계에 출시됐다. <심즈>는 발매 첫해 177만 장이라는 기록적인 판매고를 기록했고, 공격적인 확장팩 전략으로 5년 동안 약 630만 장이 판매됐다.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과정에서 투자자들은 물론 개발자들까지 '이런 게임을 누가 재밌어하느냐'라는 반응을 내놓았지만, 윌 라이트의 '심'은 <심즈>로 당당히 마침표를 찍었다. <심즈>는 세계 비디오게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 <심즈> <심즈 2>(2004)는 전편의 엄청난 성공 덕에 추진력을 얻게 되었다. 2.5D 그래픽에서 회전 가능한 3D로 개발되었으며, 부모의 생김새를 물려받거나 관계도 히스토리가 남는 등 여러 측면에서 고도화가 이루어졌다. 윌 라이트의 회고에 따르면 2004년 나온 <심즈 2>는 "플레이어가 세밀한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고, 캐릭터는 욕망과 두려움을 갖게 되었"으며 "이웃들은 절박한 주부들과 바람피는 남편들로 얽힌 TV 리얼리티쇼처럼 구성"되었다. <심즈 2>에 접어들면서 모드(Mod; modification) 커뮤니티가 훨씬 더 활발해졌다. 전작 <심즈>에 모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심즈> 플레이어들은 .iff 확장자를 분석하면서 여러 비공식 툴을 배포했고, EA도 이런 UGC(유저 창작 콘텐츠)를 딱히 막지 않았다. 그 결과 The Sims Resource, SimFreaks, 7DeadlySims 같은 홈페이지가 생겨났고,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보다 모딩 콘텐츠를 배포하며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심즈>는 태생적으로 2.5D 게임이었고, 게임으로 표현할 수 있는 UGC 또한 한계가 명확했다. 이런 단점을 극복한 <심즈 2>의 모딩, UGC 커뮤니티는 더 넓고 깊어졌다. 2000년대 중반이 되면서 패키지 게임을 하면서 온라인을 참고하는 일이 점차 익숙해졌다. 퓨 리서치 센터에 따르면, <심즈>가 출시된 2000년의 인터넷 이용률은 52%, <심즈 2>가 출시된 2004년은 63%를 기록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 DSL, 케이블 등 고속 인터넷 서비스가 보급되며 더 많은 사람들이 안정적인 인터넷 접속을 경험했던 것이다. * <심즈 2> 한편, <심즈 2>의 선임 게임 디자이너를 맡았던 윌 라이트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매료되고 있었다. 그는 <심즈 2> 발매 이후 <스포어>의 개발에 착수했으며, 2009년에는 맥시스에서 퇴사했다. 그는 시간이 흘러 심즈 시리즈의 25년을 기념하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나는 속편 작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I never really liked the idea of working on sequels)라고 고백했다. 윌 라이트는 떠났지만 <심즈 3>(2009)는 계속 개발됐다. <심즈 3>는 시리즈 최초로 오픈월드를 채택했다. 모든 부지를 연결한 대담한 시도는 박수를 받았지만, 발매 초기 최적화와 버그 문제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오브젝트와 색감과 광택이 추가되면서 커스터마이징의 옵션이 전편에 비해 상당히 많아졌다. 오픈월드와 그 영향으로 높아진 자유도는 게임의 실행성과 범용성을 낮추는 대신 독특한 재미를 주었다. 비슷한 시기에 출시된 오픈월드 게임은 모두 액션이나 슈팅, RPG 장르의 게임이었다. 라이프 시뮬레이션에서는 오픈월드 게임이 개발되지 않았다. (물론 개발이 이루어진 해당 장르의 게임 자체가 적다) 심을 '래빗홀'로 빠뜨리지 않고 일상을 모두 보이는 곳에서 진행하기로 한 기획은 기술적 어려움을 딛고 결국 성공했다. 주변의 심들은 함께 늙어가고, 하나의 월드에서 함께 삶을 살았다. 그렇지만 기술적 난도가 너무 높았던 탓에 맥시스는 <심즈 4>(2014)에서 오픈월드를 포기했다. 오픈월드와 자유도, 커스터마이징 삼박자를 두루 갖추었기 때문에 몇몇 매니아들은 아직도 <심즈 3>를 플레이한다. * <심즈 3> <심즈 4>는 오픈월드를 포기한 대신 편의성과 접근성을 대폭 끌어올렸다. 월드가 작아지면서 스토리모드나 차량 등이 삭제됐지만, 커뮤니티에 자신의 플레이를 업로드하기 위한 여러 기능들이 추가됐다. '인칭 시점'과 '갤러리 공유' 등이 업데이트됐으며, 밥을 먹으면서 대화하는 것과 같은 사소한 기능들이 대폭 추가됐다. 동작과 감정 표현 또한 부드러워졌다. 다만 <심즈 4>는 가장 논쟁적인 심즈다. 오픈월드의 삭제에도 최적화 문제가 제기됐고, 게임이 원래는 온라인게임으로 개발되었으나 급하게 스탠드 얼론으로 출시됐다는 폭로까지 나왔다. 4편에 들어서 EA의 DLC 정책이 문제가 되었는데, 2025년 기준 <심즈 4>에는 90개 넘는 DLC가 출시되었다. 코어 이용자는 100만 원 이상을 사용해야 게임의 모든 월드, 직업, 테마, 아이템 등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차세대 심즈로 '프로젝트 르네'가 존재하지만, 발표가 늦어지면서 <심즈 4>는 2014년부터 지금까지 라이브게임의 형태로 계속 서비스되고 있다. * <심즈 4> 쉽지 않았던 심즈 뛰어넘기 25년의 역사 동안 심즈 시리즈에 도전장을 내민 프로젝트는 적지 않았다. <세컨드 라이프>(2003)는 사회적 상호작용을 무기로 삼았고 한때 신드롬을 일으켰으며, 충성 고객을 확보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세컨드 라이프>는 2020년대 메타버스 열풍과 함께 재발굴되었으나 결론적으로는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에 자리를 내줬다. 독일에서 만든 <싱글즈>(2003)는 '성인용 심즈'로 주목을 받았으나 2005년 2편 이후 발매가 멈추었다. 연애와 섹스에 거의 모든 기능을 맞추면서 큰 반향을 이끌지 못했다. 인터페이스와 AI의 만듦새 또한 <심즈>보다 떨어졌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모바일게임으로 출발한 <버츄얼 패밀리>(2009)는 PC 환경을 갖추지 않은 게이머에게 어느 정도 반향을 끌었다. 간략화된 시뮬레이션 기능으로 말 그대로 '가상 가족'의 육성과 성장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그럼에도 이 게임은 PC 심즈 시리즈와 비교하기에는 기능적으로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2018년 EA가 <심즈 모바일>을 내놓으면서 이쪽 시장에서도 양분화가 이루어졌다. * <세컨드 라이프> 파라독스의 '라이프 바이 유'는 가장 유력한 대항마였으나 출시를 2주 앞둔 2024년 6월 돌연 출시가 취소됐다. 해당 발표 이후 개발사는 폐쇄됐고 "게임이 순조롭게 개발되고 있었다"라는 전 직원의 폭로가 나오면서 파라독스 측의 일방적인 개발 취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게임이 두 차례 연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추가 연기로는 ROI를 맞출 수 없었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추측이 나온다. 그밖에 '알터라이프'와 '파라라이브'가 현재 개발 중이나 언제 출시될지는 알 수 없다. 개발진의 규모가 EA-맥시스와는 비교할 수 없이 기 때문에 심즈 시리즈와 비교할 수 있는 라이프 시뮬레이션이 나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우려가 있다. 여담이지만, 심즈 시리즈를 즐기는 주요한 이유는 ‘권능감’이었다. 수영장에 사다리를 치워버리거나, 불타는 방 안에 심을 가두어버리는 괴상한 플레이는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 도전자들은 그러한 컬트적인 인기에 도달하지 못했다. * <라이프 바이 유> 인조이의 도전장 크래프톤의 <인조이>는 지난 3월 얼리엑세스를 시작했고 출시 1주차에 100만 장의 판매량을 돌파하며 그간의 심즈 경쟁자 중에서는 가장 훌륭한 초기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방송 플랫폼 SOOP(옛 아프리카)과 치지직에서 게임 카테고리 시청자 수 1위, 트위치에서는 3위를 기록하며 '보는 게임'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인조이> 창작물 공유 플랫폼 '캔버스'(CANVAS)는 이용자 수 120만 명을 돌파했다. 기사를 탈고 중인 현재(5월 29일) <인조이>에는 1,678명의 일 피크 이용자가 접속한 것으로 확인된다. <심즈 3>에는 1,487명, <심즈 4>에는 32,035명의 피크 이용자를 기록했다. 초반에 보여준 파괴력을 라이브까지 안정적으로 잇고 있지는 못하는 인상이다. 개발진은 흐름을 되살리기 위해서 이달(2025년 5월) 말 공식 모드 개발 툴을 업데이트하겠다고 밝혔다. 모드킷에는 어셋 다운로드 기능, 마야 블렌더 플러그인, 언리얼엔진 5 기반 모드 프로젝트 생성, 커스포지 연동 등이 지원된다. 모딩을 통해 자신만의 게임을 즐기는 해당 장르 커뮤니티의 동향에 주목하는 행보로 보인다. 특정 게임을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필자는 다만 심즈 시리즈라는 거울을 통해 <인조이>의 가능성과 한계를 비춰보고자 한다 * <인조이> 인조이의 미래는 심즈에 있다 ⓐ 심즈: 사회에 대한 메시지 사실 25년 전 <심즈>로부터 기술적으로 배울 점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윌 라이트가 추구했던 작가주의는 <인조이> 개발진이 참고할 만하다. <심즈>는 미국 중산층 가정의 소비문화를 냉소적으로 비판하는 게임이었다. 게임 속 구매 모드에서는 냉장고와 TV는 행복을 보장하는 아이템처럼 묘사됐지만, 금방 고장나리기 마련이고, 심은 그것을 고치려다가 죽어버린다. 도둑이 들어서 물건을 훔쳐 가고, 게임은 플레이어를 놀리는 듯한 문구를 노출했다. <인조이>에는 그런 날카로움이 거의 배제된 인상이다. 상호작용 옵션은 많지만 '사업 파트너'나 '천생연분'과 같은 미리 마련된 틀 안에 갇혀있으며, 시스템은 조이가 사고를 당하거나 좋은 일이 생길 때나 그저 다독일 뿐, 플레이어를 자극하지 않는다. 게임 속 구매 가능한 물건들을 모아놓은 카탈로그는 거의 비어 있으며, 얼리엑세스 버전부터 가전기업의 PPL 상품이 들어있다. <인조이>는 언리얼엔진 5의 기능성을 선보이는 훌륭한 쇼룸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서 창작자의 메시지를 찾기는 어려웠다. AI 기반 자율 시뮬레이션 속에 인간 사회의 아이러니나 직업의 애환 같은 것은 이 게임에서 거의 없었다. 굳이 비판적인 메시지가 아니어도 좋다. 게임의 김형준 디렉터는 <인조이>로 하여금 "사람들이 가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가족의 소중함에 대한 메시지는 게임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돋보일 수 있을까? ⓑ 심즈 2: 모딩으로 완성되는 게임 <심즈 2>의 진정한 가치는 모딩에 있었다. 유저들은 새로운 옷과 가구, 맵뿐 아니라 캐릭터의 유전 구조와 사회적 관계까지 손을 댔다. 개중에는 일반적인 윤리의 선을 넘는 튜닝도 존재했지만, 이는 곧 게임이 창작 플랫폼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스팀에 착한 게임만 있는 것은 아니듯 말이다) <인조이>도 '툴킷'이자 '플랫폼'을 지향해야 한다. 다행히 개발진은 그에 대한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캔버스(CANVAS) 플랫폼과 5월 말 예정된 공식 모드킷 업데이트로 <인조이>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다. 다만 모딩이 성공한 모든 게임이 그러하였듯, 자유로운 창작이 그 생태계를 지탱할 것이다. <심즈 4>에서는 범죄자 모드, 빌런 모드뿐 아니라 게임 속 시스템을 완전히 변경하는 모드들이 마련되어 있다. 아름다운 조이(인조이의 캐릭터)나 집을 만들고 싶은 사람은 캔버스에서 활동하고, <인조이> 가능성의 극한을 체험하고 싶은 사람은 별도의 창작마당에서 논다면 <인조이>는 활력을 얻을 수 있다. ⓒ 심즈 3: 양날의 검, 오픈월드 <심즈 3>의 오픈월드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다. 심들이 동네 곳곳을 로딩 없이 오가고, 이웃들도 자율적으로 삶을 꾸려갔다. 한 세계 안에서 모두가 동시에 살아가는 구조는 유례없는 몰입감을 선사했지만, 동시에 끊임없는 버그와 성능 저하라는 대가를 치렀다. <인조이>는 언리얼엔진 5 오픈월드를 채택했다. 높은 권장사양을 요구하고 있고, <심즈 3> 때와 유사한 최적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EA가 그러했듯이 크래프톤 또한 이 장벽을 넘어서야 게임이 오래 가는 플랫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게임을 즐기는 타겟층의 하드웨어 조건을 고려한다면, 권장사양의 다운그레이드는 반드시 검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심즈 4: DLC는 얼마나 많아야 할까? <심즈 4>는 라이브 게임으로 전환되면서 콘텐츠 확장에 집중했다. 문제는 그 확장의 방향이었다. DLC는 90종이 넘고, 모든 콘텐츠를 체험하려면 100만 원이 넘는 돈이 들게 됐다. 이는 유저들의 피로감으로 직결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심즈 4>에 들인 매몰비용이 <인조이>보다 많은 원인이 되었다. <인조이>는 현재 44,800원에 판매 중이고 이 기간 동안의 DLC는 무료로 제공한다. <심즈 4>가 부분 유료화 모델을 채택했고, 잠재적인 경쟁자인 후속작 프로젝트 르네 역시 부분 유료화 모델이 유력하게 점쳐지는 상황이므로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크래프톤의 고민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BM에 대한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DLC의 수와 가격보다 그것을 유저들에게 설득하는 방식이다. 단순히 콘텐츠를 분절해 파는 구조는 유저의 피로도를 높일 수 있다. 그렇다고 유료 DLC가 전혀 없는 모델을 추구하면 만든 이들에게 상업적 효능감을 줄 수 없을 것이다. DLC 전략 또한 까다로운 커뮤니티와 ‘스파링’ 과정 끝에 제출되어야 할 것이다. DLC 전략은 콘텐츠 분할이 아닌, 커뮤니티와의 협업을 통해 완성되어야 한다. 크래프톤이 <인조이>를 일회성 화제작이 아닌, 살아 있는 플랫폼으로 키우고자 한다면, “무엇을 얼마나 팔 것인가”보다 “누구와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 97개에 달하는 <심즈 4>의 추가 콘텐츠 마치며 삶은 게임이 될 수 있을까? ― <심즈>는 이 질문을 25년간 반복해 왔다. 그리고 지금, 한국의 <인조이>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인형의 집’ 안에 담긴 욕망, 기술, 플랫폼, 그리고 가족은 독특한 게이머 그룹을 형성했고 10여 년 전에 나온 <심즈 4>는 아직도 파급력있는 라이브게임으로 군림하고 있다. 도전자의 위치에 선 <인조이>는 <심즈>가 이룩한 것과 같은 역사를 그릴 수 있을까?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김재석 디스이즈게임 취재기자. 에디터와 치트키의 권능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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