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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OF HORROR> : 공포의 세계에서 배회한다는 것

15

GG Vol. 

23. 12. 10.

"에너지 상자에 갇힌 거예요. 3.2초 만에 상자에서 탈출하면 타임 루프에서 나갈 수 있어요."

(...)


"현실 세계로 뭐하러 돌아가요? 죽음과 가난과 괴로움 가득한 세상인데. 그나마 여기에선 함께할 수 있잖아요."

(...)


"여긴 진짜가 아니에요. 여기서 하는 모든 건 의미가 없다고요."


<팜 스프링스>(맥스 바바코우, 2020)

 

선형적 서사에 있어 반복은 매혹의 대상이 아니다. 그 세계에서 무한한 반복이란 오직 탈출해야 할 환경에 불과하다. 이야기들은 그 사실을 붙잡고는 ‘사실 진짜 생은 반복의 바깥에 있어’라고 끝없이 주장한다. <팜 스프링스>가 흥미로웠던 것은 두 주인공이 일시적으로나마 반복에 매혹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결국 탈출의 의지가 발생하고, 두 사람은 또다시 ‘진짜 삶’과 마주하기 위해 바깥으로 탈출한다.

 

이러한 사실은 명백히 운명적이다. 말하자면 선형 서사는 언젠가 종말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무한한 반복은 불가능하다. 예외적인 상황이라고 해봐야 작품 외적인 활동, 관람자가 다시 읽기 혹은 되감기-다시 재생을 시도할 때 정도다. 로라 멀비는 영화에서의 이러한 지향이 영화의 운명임을 논한 적이 있다. 장 뤽 고다르의 1963년 작 <작은 병정>에 나온 대사(“영화는 1초에 24번의 진실이다.”)를 뒤집은 제목의 저서 『1초에 24번의 죽음』에서, 멀비는 서사 영화는 암전이라는 죽음을 향해 달려 나간다고 저술한다. “서사의 정지, 비유기체적인 형태로 돌아가는 비유로서의 죽음은 마치 스틸 프레임과 죽음의 결합이 이야기의 죽음으로 용해되는 것처럼 (...) 영화로 확장된다.”(『1초에 24번의 죽음』, 로라 멀비, 현실문화, 2007) 필름이 모두 돌아가면 그곳에 도사리는 것은 아무것도 투사되지 않는 검은 장막이다. 여기에 도사리는 것은 죽음의 이미지뿐이다. 이때 매체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것이 담지하는 서사 역시 죽음과 마주한다. 아니 오히려, 이것은 서사를 다루기 때문에 그 활동이 정지한다 봐도 무관하다. 서사는 시작하는 곳과 멈춰 서는 곳을 결정하는 지시로서의 제약이다. 더 이상 세계가 변혁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서사의 운동은 끝난다. 그것이 행복한 결말이든 불행한 결말이든 그것은 서사의 죽음이나 다름없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논의를 그대로 비디오 게임에 적용할 수 없다. 게임은 반복의 매혹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초기의 아케이드 비디오 게임에 있어서 ‘결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무한히 루프 하는 게임들(이를테면 타이토의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목표는 그 안에서 무한히 생존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비디오 게임에서의 ‘끝’은 ‘죽음’과 현상적으로 연결되었다. 이것은 지시적 죽음이 아니라 진짜 의미에서의, 세계 내부에서의 죽음을 뜻한다. GAME OVER는 멀비가 지정한 의미에서 암전-죽음과 연결된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이 지시된 ‘끝’을 담지하면서부터 상황은 변모한다. 여기서 끝은 두 단위로 분화된다. 하나는 GAME OVER로 표상되는 죽음의 끝=암전, 그리고 또 하나는 CLEAR로 표상되는 완결화된 끝이다. 때로 (특히 고전적 아케이드 게임들은) CLEAR를 GAME OVER라는 기표로 표기하긴 하지만, 그 누구도 양자를 동일한 결말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때 CLEAR가 GAME OVER와 대비되는 존재라고 한다면 이것은 명백히 암전에 대비되는 존재로서 ‘표백’에 위치한다. (‘깨끗이 한다’는 의미의 CLEAR와 표백은 마치 운명 된 짝처럼 들어맞기까지 한다.)

 

표백의 결말은 엄밀히 말해 서사와 등치되지 않으며, 정확히는 게임이 추구하는 목표(objective)와 결부한다. 하지만 서사는 목표를 지시하기 가장 적합한 형식이다. 이를테면 캡콤의 <파이널 파이트>는 범죄조직 매드 기어가 시장의 딸을 납치했다는 컷씬으로부터 시작되고, 인질이었던 제시카가 연인 코디와 함께 떠나는 컷씬으로 종결된다. <파이널 파이트>를 플레이하는 동안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인질 제시카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매드 기어의 야욕을 꺾는다면 게임이 전제하는 목표를 해결했다는 사실과 함께 목표와 연결되는 서사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이 인지는 정확히 이 게임이 여기서 ‘끝’났다는 사실을 이해시킨다. 여기서 더는 새로운 것이 없다. 물론 플레이어에 따라서는 다른 캐릭터를 사용하거나 혹은 조금 색다른 플레이 방식을 시험해 보거나 아니면 다른 친구와 함께 해보기 위해 반복해서 게임을 플레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플레이어에게 한 번 표백의 결말(=CLEAR)이 찾아왔다는 사실은 지울 수 없다. 이 사실은 코디가 제시카와 함께 돌아가는 장면을 본 그때에 명백해진 것이다.

 

 

브라이언 업튼은 게임의 플레이어를 세 가지 분류(목표 중심적 플레이, 일관 중심적 플레이, 종결 중심적 플레이)로 나눈다. 이때 종결 중심적 플레이를 ‘서사주의적 의제’로 분류하며 이들의 목표란 ‘향후의 행동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지는 지점에 이르는’ 것이라 말한다. (『플레이의 미학』, 브라이언 업튼, 에이콘, 2019) 비디오 게임이 고도화되고 다수의 서사적 매개를 담지하게 되면서 일관 중심적 플레이는 대체로 표백의 결말(=CLEAR)을 향한 목표의식과 등치되었다. 이것은 표층적 단위에서의 하나의 끝, 더 플레이한다고 해도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표백’적 목표 지정이다. 물론 한 번의 CLEAR로 서사의 진위를 모두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고, 촘촘한 변곡점들 탓에 다른 방향의 서사를 즐기기 위해 루프를 감행하는 경우도 충분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들 모두 완전히 표백시키기 위한 반복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따라서 서사가 있는 비디오 게임 플레이를 암전과 표백이라는 관점에 놓고 정리한다면, 플레이어가 상정하는 완전한 표백을 위해 수없는 암전을 거쳐 가는 구조가 된다. 이때 암전은 부정적이며 불완전한 결말로서의 장애가 된다. 좀 더 명백히 하자면 표백은 매혹하지만, 암전은 매혹하지 않는다. 설령 몇 번의 루프를 더 반복하고자 하는 플레이어라고 하더라도 그가 원하는 것은 추가적인 표백일 뿐 추가적인 암전은 아니다. 이러한 게임 언어에서 암전을 향하는 충동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로그라이크 : 암전 충동과 표백 충동의 충돌 지점


다만 로그라이크(혹은 로그라이트)는 이 두 개의 충동이 다른 상관관계를 보인다. 이 장르는 절차적 생성, 캐릭터의 영구적 죽음이라는 두 기조를 통해 수많은 플레이를 생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는 매회의 플레이에서 마주하게 되는 장애와 다뤄야 하는 기술이 일정량 상이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말하자면 플레이어가 한 번의 암전을 경험한 뒤, 다시 게임의 내부에 들어가면 직전의 암전과 차이 있는 경험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물론 이전의 경험으로부터 학습한 지식은 의미 있게 작동하지만 때로는 그러한 것들로는 돌파하기 난해한 국면이나 상황과도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한 번의 표백에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로그라이크는 자신이 무한히 다른 가면을 쓸 수 있다는 사실로 플레이어를 유혹하기 때문이다. 로그라이크에서의 모든 플레이는 업튼이 규정하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뛰어드는 ‘눈먼 점프’와 같으며, 플레이어들은 ‘눈먼 점프’의 연속이기 때문에 즐긴다.

 

따라서 로그라이크는 암전의 충동을 가지는 장르다. 이 장르가 매혹의 무기로 휘두르는 무한성이란 캐릭터가 죽음을 맛봐야 작동시킬 수 있다. 플레이어는 로그라이크의 적극적 참여자가 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죽음을 스스로 즐겨야만 한다. 캐릭터의 영구적 죽음이라는 고통을 감내하며 획득해 낸 지식을 시험하기 위해, 또다시 ‘죽을 수도 있는’ 세계로 직접 뛰어드는 것이다. 특히나 이러한 암전의 지식을 수치화시키는 로그라이트는 더욱더 죽음에 능동성을 준다. 플레이어에게는 임시적 강화와 영구적 강화라는 두 개의 트랙이 존재한다. 한 번의 플레이에서 경험한 임시적 강화는 죽음과 함께 모조리 사라지지만, 그 플레이의 결과물은 영구적 강화의 재료가 된다. 이때 영구적 강화의 재료를 획득하는 방법은 캐릭터가 ‘죽는 것’이다. (혹은 게임에 따라서는 지정된 시간 동안 무사히 생존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이러한 형식의 대표 격인 <뱀파이어 서바이버즈>를 떠올려 보자. 이 게임은 지정된 시간 동안 살아남더라도 결국 사신 형태의 캐릭터가 나타나 캐릭터를 죽여버리고, GAME OVER의 결말을 남긴다. 이후 등장한 <뱀파이어 서바이버즈>의 유사 게임들은 대체로 이런 경우의 죽는 결말을 제거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로그라이크는 언제 ‘표백’되는가? 그저 암전의 충동으로 가득 찬 게임이라면 플레이어가 이 루프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한가? 그런데 공교롭게도, 로그라이크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로그>에도 공식적으로는 엔딩이 존재한다. 지하 22층 이하의 층에서 “Amulet of Yendor”를 습득한 뒤 다시 지상층으로 올라오면 화면에 성공을 축하하는 텍스트가 출력된다. 게임이 표백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물론 플레이어가 다시금 지하 던전에 내려가겠다 마음먹는 순간 이전과는 다른 구조의 던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플레이어가 <로그>에서 ‘표백의 결말’에 도달했다는 사실은 변화하지 않는다. 어떤 이에게는 이 표백의 경험이 게임의 종료 시점일 수 있다. 한편, 그러한 플레이어에게는 이전까지 경험했던 암전은 매혹의 대상임과 동시에 장애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설령 암전의 충동을 느끼는 플레이어에게도 그 충동을 유지하기 위한 장기적인 동력이 필요했을 수 있다. 표백의 충동은 이러한 장기적인 동력에 영향을 준다. 하지만 그러한 플레이어들은 표백의 충동을 해결한 뒤에도 암전의 충동을 느끼며 다시 뛰어들 수 있다. 로그라이크 내부에서 표백과 암전은 서로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지만, 하나의 충동이 다른 충동을 소멸시키지는 않는다. 두 충동은 생생한 형태로 그곳에 자리 잡고 있다.

 


로그라이크와 서사의 문제


따라서 로그라이크에는 두 개의 결말 충동(암전과 표백)이 충돌하는 장르다. 플레이어들은 경험과 지식의 양을 늘리기 위해, 또한 그렇게 습득한 경험과 지식을 다시 활용하기 위해 끝없는 죽음(=암전)을 바란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게임들과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완결(=표백)에 이르기 위한 과정과도 같다. 이때, 앞서 말했듯이 표백을 지향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서사주의적 의제’에 해당한다. <로그>의 케이스도 게임이 제공하는 서사적 완결과도 일치한다. 하지만 암전 충동이 끝없이 들끓는 로그라이크에서 서사를 선형적으로 진행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 로그라이크는 순환의 바깥으로 나가기를 일정량 거부시키는 장르이지 않은가. 로그라이크에서의 체험은 결코 선형적인 감각으로 치환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시작된 뒤, 끝이 나기 전까지 같은 자리를 뱅글뱅글 돌아간다. 결국 이것을 하나의 거대한 완결 서사로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순환 그 자체를 선형적 서사의 내부에 집어넣을 수밖에 없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암전의 보상물로서 표백으로의 진행을 꾸준히 제공하는 <하데스>일 것이다. 이 게임에서는 표백에의 충동은 보상으로만 존재하기에 암전의 충동을 건드리는 일은 없다. 따라서 양자는 서로를 위배하지 않은 채 점진적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또는 <FTL>이나 <서울 2033>처럼 암전에의 도전이 서사 형식의 텍스트로 진행되는 방식이 있다. 이들은 로그라이크 게임들이 매번의 플레이에서 던지는 장애물과 도전을 서술의 방식으로 치환한다. 상황이 텍스트로 주어지고, 플레이어는 자신에게 부여된 선택지를 탐색하고 결정함으로 그 결과를 확인한다. 다만 이러한 방식이 하나의 선형적 서사를 완전히 이룰 수 있는지는 의문이 따른다. 모든 파편화된 상황들은 그저 단기적인 판단능력을 요하는 인카운터에 지나지 않는다. 개별의 상황 내에서는 특정한 인과가 발생하지만, 상황과 상황 사이에서의 인과는 작동하지 않는다. 선형 서사라는 것은 거시적 관점에서의 구조화된 모델을 뜻한다. 게임을 플레이한 뒤 서사를 인식한다는 것은, 자신의 플레이 경험 내에서 하나의 서사 모델로 응축할 수 있는 경험들을 선별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개별의 경험들은 그것이 선형적으로 나열될 수 있는 일종의 연결점(nod)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그것이 바로 고전적 의미에서의 플롯이 된다. <FTL>이나 <서울 2033> 등의 파편화된 텍스트들은 하나의 모델로 응축되지 않을뿐더러, 동일한 이벤트가 반복되면 서사적 가치도 상실한다. 플레이어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담지하는 서술된 내용이 아니라 개별의 선택지가 가져다주는 혜택 혹은 페널티다. 물론 이 작품들에 있어서 이런 구성이 특별히 문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로그라이크의 순환 구조 내 장애물들을 의도해서 텍스트 적 형식으로 치환해 놓은 것뿐, 하나의 거시적이고 강렬히 직조된 드라마를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로그라이크의 양립되는 결말 충동을 기반으로, 경험 내부에 고전적 서사를 집어넣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증명할 뿐이다.


 

또 다른 예시로서는 비주얼 노벨 로그라이크를 표방하는 <노베나 디아볼로스>가 있다. 악마에 의해 단절된 마을에 고립된 주인공은 다섯 명의 여성 중에서 누가 악마인지를 밝혀낸 뒤, 인간인 캐릭터와 함께 마을을 빠져나와야 한다. 매 플레이마다 누가 인간 캐릭터인지 무작위로 설정되며, 그들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는 사건 현장 기록 역시 무작위로 배치된다. 이는 표백 충동의 내부에 변수를 작동시킨다는 점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도전이지만, 한 번의 플레이를 끝낸 뒤에는 서사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사건이 표백화되어 버린다는 약점이 있다. 이를테면 마을로 진입하는 장면, 각 인물과 조우하는 장면, 악마에게서 현 상황을 설명받는 장면 들은 두 번 이상 조우할 가치를 느끼기 어려운 요소들이다. 결국 플레이어가 원하는 것은 ‘특정 인물이 인간일 때 서사가 어떻게 변화하는가’에 국한되며 이는 명백히 암전 충동을 배제한다. 따라서 게임은 플레이어의 표백 충동을 돕기 위해 거시 서사만을 확인시키는 ‘엔딩 모드’를 탑재해 이러한 충동을 제어한다. 하지만 그 순간 <노베나 디아볼로스>는 로그라이크가 가지는 양립된 충동 개념에서 크게 벗어난다.

 


‘공포의 세계’에서 배회한다는 것



폴란드의 pantastaz가 제작한 <WORLD OF HORROR>는 2020년에 얼리 억세스를 시작해, 2023년 10월에 정식 출시 되었다. 일본의 공포 만화가 이토 준지의 아트와 러브크래프티안적 세계관, 20세기 후반 일본의 도시 전설적 서사를 규합해 2-bit 레트로 스타일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구축한 본 게임은 그 분위기만으로도 상당히 많은 관심을 받았다. 스팀의 소개 페이지에는 ‘괴물과의 턴제 전투, 가차 없는 선택으로 만들어지는 지옥 같은 로그라이트 RPG’라고 소개된 만큼 본 작품의 장르를 로그라이트로 규정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말하자면 <WORLD OF HORROR> 역시 표백과 암전의 두 충동 사이에서 진동하는 게임이라는 의미다. 2023년 11월 기준 게임의 평가는 7,599개의 평가를 통해 매우 긍정적으로 표시되고 있지만, 평가의 면면을 살펴보면 게임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부정적 평가를 남기고 이탈한 플레이어들을 꽤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UI의 불친절함이나 지나치게 부적절한 난이도를 지적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게임이 예상과는 다르다는 지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특히 게임이 제공하는 이야기들이 지나치게 편린적이라 하나로 응축되지 않는다는 평가들은 매우 흥미로운 측면이 있다.



<WORLD OF HORROR>의 메커니즘은 기본적으로 테이블 탑 보드게임 <아컴 호러>의 디지털 스탠드 얼론 버전에 가깝다. 이를테면 행동에 따른 강제 이벤트, 능력치를 기반으로 하는 성공과 실패의 체크, 한 번의 게임 플레이에 배정되는 초월적 신의 존재, 캐릭터의 자원으로 양분되는 체력과 이성의 존재가 그러하다. 하지만 사실상 로그라이트 장르로서의 진행 양상은 큰 틀에서 <FTL>을 연상시킨다. 플레이어는 랜덤하게 배정되는 5개의 ‘미스터리’를 돌파하여 마을 등대를 열 열쇠를 모아야 한다. 최종적으로는 등대에 들어가 사악한 존재의 부활을 막는 것이 목적이다. <FTL>이 최종적으로 엔딩을 보기 위해 총 8개의 ‘섹터’를 진행해야 하는 것과 5개의 ‘미스터리’를 진행해야 한다는 것은 게임 진행의 절차성에서 연결된다. 개별의 미스테리(=섹터)에서는 진행을 위해 맵이 제공되며, 플레이어는 맵에서 자신의 다음 이동 경로를 눌러 행동을 수행한다. 특별한 능력이 있는 장소(=상점 등)에서 필요한 행동을 할 수도 있고, 장소를 탐색해 벌어지는 이벤트를 해치우고 미스터리의 마무리를 향해 나아갈 수도 있다. 무엇을 하든 사악한 존재의 부활을 알리는 ‘파멸’ 게이지가 상승하며 이 게이지가 100%가 된다면 게임은 실패한다. (이는 <FTL>의 추격과 유사한 메커니즘이다.)다만 <FTL>의 섹터와 <WOLRD OF HORROR>의 미스터리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섹터는 아무것도 제약하지 않는 공간이다. 물론 해당 공간에 대한 기초적인 규정은 존재하며, 그 규정을 통해 등장하는 이벤트의 속성이 달라지긴 하지만 각 섹터 간의 개념적 차이는 없다. 섹터는 플레이어가 활약할 수 있는 ‘너른 공간’이며, 그 공간을 한 번 거쳐 갔다고 해서 무엇인가 ‘표백’되는 일은 없다. 하지만 <WORLD OF HORROR>의 미스터리는 명백히 서사적인 개념이다. 미스터리는 도입의 서사, 진행을 위해 거쳐야 하는 장소들의 순서, 그리고 플레이어의 행동에 따라 달라지는 몇 가지 엔딩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미스터리는 공간화된 개념이 아니다. 전적으로 선형적 서사의 개념이며 이는 곧 ‘표백’이 가능하다는 의미가 된다.



물론 동일한 미스터리라고 해도 반복해서 도전할 때의 양상은 달라진다. 미스터리를 진행하기 위해 선택하는 ‘탐색’ 행동은 무작위적인 사건들을 가지고 오며, <FTL>이나 <서울 2033>과 마찬가지로 선택과 판정을 통해 결과가 도출된다. 하지만 앞서 이 두 게임의 형식을 통해 이야기한 바 이러한 인카운터 이벤트들은 하나의 노드로 연결되는 선형적 경험이 아니다. 따라서 이는 미스터리의 시작과 끝을 규정하는 인트로와 엔딩의 늘어선 노드의 배열에 들어가지 않는다. 말하자면 여기서 미스터리를 하나의 응축된 서사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무작위 인카운터들은 모두 탈각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문제는 미스터리는 어디까지나 표백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미스터리는 통상 2~4개의 엔딩을 가지고 있으며 대체로는 A 엔딩이 가장 이상적인(그러나 모든 것이 깔끔하게 해결되지는 않는) 결말이다. 플레이어가 한 번 A 엔딩으로의 길을(혹은 플레이어에 따라 해당 미스터리의 모든 엔딩을) 확인한다면, 해당 미스터리를 통섭하는 선형적 서사를 향한 욕망을 잃어버리고 만다. 즉 그 시점에서, 미스터리는 이미 ‘표백’되어 버린 셈이다. 플레이어가 이미 특정한 엔딩을 향하는 방법을 완전히 체득하고 나면 더 이상 이 미스터리는 매혹의 힘을 드러내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는 미스터리가 기초적으로 품고 있는 서사적 개념 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작위적 인카운터가 더 중요해진다. 그렇다, 오히려 암전의 충동이 더 강력해지는 것이다.


 

<WORLD OF HORROR>를 플레이할 수록, 무엇인가 잃어버리는 감각과 마주한다. 강력한 아트의 힘과 모호함으로 사람을 빨아들이는 미스터리들의 내용이 존재하지만, 게임의 플레이가 반복을 이룰 때마다 매혹의 힘을 점차 잃어만 간다. 그런데 애초에 본래의 미스터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본질이 감추어져 있는 일종의 퍼즐이며 그 매혹은 진위를 알고 싶다는 호기심에서 나온다. 미스터리는 가장 강력히 표백의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개념이며 따라서 표백에 의해 가장 빠르게 힘을 잃어버린다. 미스터리야말로 구조화된 서사의 형태를 가장 강력히 요구하는 포맷이다. 따라서 우리는 무한히 미스터리에 붙잡혀 있을 수 없다. 무한히 마주쳐야 하는 암전의 충동 앞에서 미스터리는 쉽사리 힘을 잃는다. <WORLD OF HORROR>는 스스로가 가진 메커니즘으로 인해 가장 강력한 매혹의 힘을 퇴진시켜 버리고 마는 기이한 게임이다. 물론 공포의 매혹과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불안을 하나로 규합하는 것은 매우 훌륭한 실험이다. 하지만 빠져나올 수 없다는 불안은,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희망이 전제되었을 때 더 강력히 기능한다. <WORLD OF HORROR>에 무엇인가 부재한 게 있다면 바로 그 희망인지도 모른다. 미스터리들이 너무나 빠르게 표백되어 버린 세계에서 하염없이 헤매는 것은 오히려 불안하지 않다. 어쩌면 그 세계에 영원히 반복하길 바랐던 기대의 작용이, 오히려 이 ‘공포의 세계’로부터 쉽사리 빠져나오게 만든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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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만화와 게임, 영화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합니다. MMORPG를 제외한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클리어가 라이프 워크입니다. 스팀덱을 주로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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