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투형 게임과 전쟁: 행위성의 뒤집힌 거울상
25
GG Vol.
25. 8. 10.
블리자드 사(社)는 전쟁을 사랑했다
아니, 이름부터 ‘워’ 크래프트(Warcraft)였으니까. <워크래프트>는 한때는 게이머들에게 숭앙의 대상이었던 블리자드 사의 실시간 전략(Real-Time Strategy, RTS) 게임이자, 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Mas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Playing Game)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rld of Warcraft)>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 인간과 오크 사이의 전쟁을 그린 <워크래프트>
친구 집에서 처음 접하고 머릿속에서 도무지 떠나지 않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플레이하다가 밤을 새운 게 아니다. 머릿속에서 게임 플레이를 회상하고 상상하고 시뮬레이션하다가 불현듯 아침을 맞았다. 우주 전쟁, 그러니까 <스타크래프트(Starcraft)>가 출시되었을 때, 또 그랬다. 블리자드는 악마와도 싸운다. 액션 롤플레잉 게임 <디아블로(Diablo)>는 주인공이 겪는 고투의 후경에 성전(聖戰)을 배치한다.
한국의 올드 게이머들로서는 KOEI를 빠뜨릴 수 없다. KOEI의 <삼국지 2(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Ⅱ)>는 워크래프트보다도 먼저 심취했던 게임이었다. 삼국지가 소재인 게임에서 무얼 하겠는가? 전쟁이지. 조부모님 댁에 있는 삼촌의 컴퓨터에 설치해 두고, 몰래 밤새워 플레이하곤 했다. 몰래는 무슨 몰래. 연로한 분들의 이마에 주름을 늘게 하는, 앞날이 걱정되는 손자가 되었다. 심지어 ‘대항해시대 2’의 해전조차 좋았다. 그때는.
<콜 오브 듀티(Call of Duty)>, <배틀필드(Battlefield)>, <메달 오브 아너(Medal of Honor)>, <월드 오브 탱크(World of Tanks)>, <월드 오브 워쉽(World of Warships)>, <DCS 월드(DCS Worlds)>,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Company of Heroes)>, <토탈 워(Total War)> 등등.
연극, 영화, 드라마, 소설 등 다른 매체들도 전쟁과 전투를 소재로 삼는다. 그런데 게임계에는, 정말 많다. 왜 그렇게 전쟁을 재현하는 데 진심이냐고 게임 개발자들에게 묻는 건 아예 당위적이기까지 하다. 대체 게임과 전쟁 사이에 어떤 접점이 있길래. 이런 마당에 전쟁을 재현하는 게임에 대한 윤리적, 정치적 분석이 게임 연구의 한 흐름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건 짝사랑이 아니었음을
이와 같은 현상은 지난 세기 걸프전 이후 더욱 가속화된 ‘전쟁의 게임화’에 관한 분석에서 거울상을 발견한다. 게임의 한 장면처럼 보도되는 폭격의 현장에서부터 게이미피케이션을 통한 병사 훈련, 그리고 드론을 동원한 전쟁에 이르기까지. 게임이 전쟁을 재현(mimesis)할 때, 전쟁은 게임을 모사(mimesis)한다.

* 게임과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던 걸프 전쟁 당시 바그다드 공습 보도 화면

* 서로 거의 흡사한 실제 전투기에서의 폭격 화면과 게임 화면
그런데 정말 게임이 전쟁을 재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전쟁 역시 게임을 모사한다면, 분석은 게임을 전쟁의 재현물로 보는 것에 국한할 수 없다. 양자의 접점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 접근을 통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은 서로를 향해 점근(漸近)한다.
게임과 전쟁이 집결하는 공간의 성격은 하나로 귀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곳은 싸우는 공간이다. 물론 조용한 전쟁이 존재하는 것만큼이나 ‘싸움’의 범주 바깥에 자리한 게임들도 많다. 하지만 다툼, 쟁투, 분투, 고투가 게임과 전쟁 양쪽 모두에서 대주주의 지위를 점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 점에 있어서 게임과 전쟁을 일방적 관계가 아닌 상호-참조적 관계를 맺고 있다.
분투형 플레이와 목표의 지위
게임과 전쟁이 분기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 지점은 그 싸움의 목표다. 전쟁의 목적이나 목표는, 당신이 이데올로기 비판을 수행하거나 배면의 진의를 의심하는 이가 아니라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명확하다. 모든 위정자는 그들의 전쟁의 목표와 이유를 다중에게 선명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그 목표는 실질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게임에서는 그게 좀 어려운 경우가 있다. 친구와 <스트리트 파이터(Street Fighter)>를 함께 플레이한다고 해보자. 달뜬 얼굴로 내 캐릭터를 두들겨 패는 친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왜 이렇게까지 때리는 거야?”라고 묻는 것이다. 속 깊고 다정하며 사회적 지능 뛰어난 우리의 실제 친구는 내가 기분이 상했다고 생각하고 장난스러운 위로와 함께 기분을 풀어주려 할 테지만, 반사실적 가정을 이어가 보자.

* 대전 격투 게임의 플레이 과정은 정말 분투 그 자체다.
가상의 이 친구는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래야 이기지.”라고 답할 것이다. 친구와 즐겁게 게임을 하다 패색이 짙다는 이유로 기분이 상한 우리는, 행위의 근본적 성격을 묻는 것으로 옹색함을 감출 수 있다. 친구에게 진지한 탐구자의 얼굴을 하고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이기려는 거야?”라고 묻도록 하자.
아니, 정말로, 그들은 왜 그렇게까지 할까? 격투 게임에서 승리하면 하늘에서 뭐라도 떨어지나? 뭔가 이득을 얻는 것도 아닐 텐데 내 친구는 대체 무엇을 위해 내 캐릭터를 그렇게 열심히 때릴까. 철학자 C. 티 응우옌 (C. Thi Nguyen)은, 게임 외적 보상이 관건이 아니라면, 그 목적이 둘로 나뉜다고 본다. 하나는 승리다. 승리하고 성취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며 그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내 친구는 나의 캐릭터를 두들겨 패고 나를 이겼다는 사실에서 행복감을 느낀다.
다른 목적도 있다. 바로 ‘싸움 그 자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철학자 버나드 슈츠(Bernard Suits)는 그의 저서 The Grasshopper: Games, Life and Utopia에서 게임 플레이를 “불필요한 장애물을 극복하려는 자발적인 시도”로 정의한다. 골프를 생각해 보자. 골프 공을 홀에 넣는 것이 관건이라면 우리는 그냥 손으로 공을 들고 홀에 넣으면 된다. 하지만 우리는 굳이 클럽이라는 비효율적인 도구를 사용해 온갖 규칙 속에서 공을 치려 애쓴다. 어째서일까? 슈츠에 따르면, 바로 그 ‘비효율성’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고투와 분투의 과정 자체가 게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목표 달성이라는 결과보다, 그 과정의 고군분투가 우리에게 즐거움을 준다.
이때 장애물 너머에 있는 목표는 사실 무의미하다. 그것은 장애물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즐기기 위해 가정된 목표에 불과하다. 고투하는 그 과정을 위해 마련된 가상의 목표와 비효율적인 도구, 각종 규칙은 게임을 벗어나기만 하면 실제로는 불필요한 장애물이다. 그것은 고투 자체를 즐긴다는 목적에 의해서 의미와 필요를 획득한다. 성취, 보상, 승리보다는 그 싸우는 과정 자체가 즐거움과 의미의 원천이다.
응우옌은 이러한 슈츠의 게임 이론을 수용한다. 응우옌에 의하면, 유희를 위한 일시적 목표를 상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분투하는 과정을 즐기는 것은 게임에 존재하는 고유한 플레이 방식 중 하나다. 그리고 이러한 유형의 게임 플레이를 ‘분투형 플레이(striving play)’라고 응우옌은 명명한다. 분투형 플레이를 즐기는 게이머들은 승리에 뒤따르는 외적 보상이나 게임에서의 승리보다 분투, 고투, 싸움 그 자체를 즐긴다. 따라서 이제 우리의 친구는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다.
“친구야, 내가 너를 그저 이겨 먹으려는 게 아니야. 승리라는 일시적 목표를 수용함으로써 너와 겨루는 과정 자체를 즐기려는 거야.”
게임과 전쟁의 분기(였던 것)
어색하게 문어체로 말하면서도 어딘가 포용력 있어 보이는 이 친구의 풍모와 달리, 응우옌의 이론은 모든 게임을 아우르는 포괄적, 일반적 설명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게임이라는 매체에서 유독 고유하게 나타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에 대해 논할 뿐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목적, 목표, 성취, 결과보다는 과정과 수행 중심적 참여를 가능케 하는 매체적 특성에서 발생한다.
이때 중요한 점은, 게임이 이러한 매체로서 기능할 때 그것이 전쟁과 확실하게 분기한다는 점이다. 특히 이 목표의 차원에서 그러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실제 전쟁과 전투에선 실질적 목표를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설정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저 분투를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주조된 일회적 목표 따위가 아니다. 저기 어딘가에 실제로 방공 포대가 존재하고 이라크의 대통령인 사담 후세인이 존재하며 그를 호위하고 있는 적군이 존재한다. 그것이야말로 실질적이고 명확한 목표다. 그것들은 미군의 전쟁 수행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형편 좋게 마련된 도구가 아니다.
분투형 플레이를 가능케 하는 게임 내에 설정된 목표는, 전쟁의 그것과 명확하게 구별된다. 군인들에게 주어지는 실제 전쟁의 목표와 달리, 분투형 게임의 목표는 본질적으로 불필요한 것이자 언제든 폐기할 수 있는 것이며 일회적인 것이면서 가상의 것이다. 전쟁의 목표가 전쟁 중의 행위를 성립시키기 위해 마련된 도구가 아닌 것에 비하여, 분투형 게임의 목표는 처음부터 끝까지 게임 내의 행위성을 조형하기 위해 마련된 도구의 일환이다. 그렇기에 그 게임의 행위성을 버리는 순간, 분투를 즐기려는 ‘유희적 태도’를 버리는 순간, 게임의 목표는 의미를 상실한다.
양자의 차이는 목표를 달성하고 마주하는 순간 더욱 돌출한다. 분투형 게임의 경우, 목표의 달성은 유희의 종식을 의미한다. 분투형 플레이를 성립시키는 것에서 의미를 부여받았던 목표였기에, 분투형 플레이가 중단되는 순간 그 목표는 의미를 상실한다. 논리적 귀결일 뿐이다. 성취 지향적 플레이의 경우라면 다르겠지만, 분투형 플레이에서는 목표가 달성되는 순간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건 어떤 현재성이 아니라 지난 분투 과정을 곱씹을 시간이다. 달성되는 순간 그것은 투명해진다.

*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한 장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씬 레드 라인’ 같은 영화는 서로의 목표물이 되는 병사들이 얼마나 적나라하고 구체적인 존재인지 보여준다.
전쟁에서 달성된 목표는 더 붉다. 화염의 붉음이든 선혈의 붉음이든, 전쟁에서 달성된 목표는 진하고 구체적인 감각적 결과물을 행위자의 눈과 손 앞에 차려 놓는다. 목표가 달성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접근한 이가 마주하는 결과물의 감각적 구체성은 전혀 가볍지 않다. 쉽게 윤리적 무게로 치환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그간의 분투 과정을 반추하고 곱씹을 여유 같은 것은 주어지지 않는다. 자신의 행위가 초래한 결과물이 어떠한 것인지, 그것이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그리고 이러한 결과일 것이라고 정말 인지하고 각오하고는 있었는지, 그 결과물은 빨갛고 무겁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물어온다.
그리고 이제 이 분기가 사라지는 것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행위성의 정제, 예술, 그리고 정교한 야만
이러한 게임과 전쟁의 분기점은 현대의 전쟁이 게임의 면모를 닮아감에 따라 희미해진다. 이는 단순히 전쟁에서 수행되는 행위성이 게임에서의 그것과 유사하다든가, 아니면 유사한 인터페이스와 조작을 통해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행위가 수행된다는 점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태는 목표의 추상화와 그로 인한 행위성의 부각에 있다.
응우옌은 그의 저서 『게임: 행위성의 예술』에서 게임을 Art of Agency, 즉 행위성의 예술이라고 명명한다. 게임에는 유희적 목표, 전-유희적 목표, 유희적 태도, 규칙, 불필요한 장애물 등이 다양하게 배치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게임에서 특정한 행위성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분투형 플레이는 바로 이 행위성을 경험하는 최적의 플레이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게임은 이 행위성의 구현에서 미적 가치를 창출함으로써 행위성을 소재로 삼는 예술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게 응우옌의 주장이다. 게임이 목표와 성취로부터 해방되고 분투 행위에서 의의를 발견함으로써 그것은 행위성의 예술이 된다.
목표로부터 해방된 게임이 예술의 가능성을 획득하는 것에 비하여, 전쟁에서는 다른 양상이 관찰된다. 전쟁이 게임의 수행성을 닮아가는 것은 여러 방식으로 나타나지만, 그 행위성이 목표와 유리되는 것을 빠뜨릴 수 없다. 전투기 조종사는 목표 대상을 육안으로 관찰하지도 않은 채, 레이더를 보고 버튼을 눌러 미사일을 발사한다. 목표 대상의 구체적이고 적나라한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드론 전쟁은 더욱 노골적이다. 드론 조종사는 게임 컨트롤러와 유사한 장비로 ‘스크린 속’ 목표를 제거한다. 자폭형 드론이 목표에 적중하는 순간, 공포와 고통에 비명을 질렀을 법한 적군 병사는 스크린에서 사라진다.
이러한 방식의 전쟁을 수행하는 자는 목표에 접근할 기회로부터 면제되거나, 또는 그것을 박탈당한다. 면제와 박탈 사이의 모호성 속에서 그에게 주어지는 것은 ‘정밀 타격률’, ‘효율적 자원 운용’과 같은 데이터다. 즉, 그의 행위성에 대한 반추를 수치화하고 정돈한 것들이다. 그렇게 본디 구체적인 목표물들은 추상화된다. 그것은 모니터 안의 영상, 명멸하는 신호, 수치화된 데이터 등으로 추상화된다. 목표물이 추상화되는 곳에서 전쟁 수행자에게 더 분명하게 남는 것은 그의 행위성이다. 비로소 전쟁의 수행자는 데이터들을 바탕으로 분투와 전투에서 성립하는 행위성을 더욱 정교하게, 합리적으로 다듬어 간다. 그들은 마치 ‘분투형 플레이어’와 흡사한 조건에 놓이게 된다.
더 나아가, 이때 사상되는 것은 전쟁 목표물의 빨갛고, 무겁고, 뜨끈하고도 축축한 구체성이다. 죽음, 파괴, 트라우마는 스크린 속 데이터나 수리에 담기지 못하는 구체적이고 참혹한 현실이다. 그리고 앞서 지적했듯이 이러한 구체성은 전쟁 행위의 당사자에게서 여하한 윤리적 무게로 치환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면제인지 박탈인지 모를 공백의 정체가 확연해진다. 목표물과 거리가 멀어지는 현대의 전쟁 수행자는 이 피 튀기는 사후 정산서로부터 눈을 돌릴 수 있게 된다. 그들에게선 목표를 달성하고 결과를 야기한 행위자로서의 윤리적 ‘책임’은 증발하고 행위성의 정교한 도야만이 남는다. 그것은 정교하고도 섬세한 야만이다.

* 드론 공격을 성공시키고 환호하는 병사의 모습
분투형 게임과 전쟁: 행위성의 뒤집힌 거울상
지금까지의 논의는 게임과 전쟁이 거울상의 관계에 놓여있음을 보여준다. 게임과 전쟁은 행위성의 뒤집힌 거울상으로서 서로를 비춘다. 분투형 게임에서는 실제로는 무의미한, 무가치한 목표를 설정한다. 그리고는 그것을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처럼 일회적인 가장과 유희적 태도를 취한다. 이를 통해 분투에서 즐거움을 느끼게 하거나 행위성을 조형한다. 목표가 일회적, 유희적 대상으로 왜소화되었기에 오히려 게임은 행위성의 예술적 가능성을 표현하는 매체가 될 수 있었다.
현대의 전쟁에서는, 무의미한 것이 유희적 태도를 통해 의미를 일시적으로 획득하는 것과 정반대의 사태가 벌어진다. 전장에 선 군인들은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는 척 가장하지 않는 것에 그칠 수 없다. 생사가 오고 가는 현장에서 그들의 목표를 진정으로 추구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맞이한다. 목표를 달성한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 역시 적나라한 구체성이었다. 하지만 현대의 전쟁에서 목표물은 굳이 접근하고 목격하고 손에 쥘 필요가 없는 것으로 유리되고 추상화된다. 그 목표가 무엇인지 알 수 없거나 상관없게 되어버림으로써, 분투형 게임에서와 마찬가지로, 군인들에게도 점차 분투와 행위성만이 남는다. ‘목표’와 ‘결과’와 ‘책임’이 휘발되어 가는 이러한 사태는, 예술적 가능성을 마련했던 분투형 게임에 대하여, 실로 행위성의 뒤집힌 거울상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