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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명작과 현대 테크놀로지의 해후: 『검은 신화 : 오공』과 중국 AAA게임의 상상
2017년부터 중국 게임산업의 실제 매출은 확고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곧 중국 게임산업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AAA게임이야말로 한 나라의 게임산업의 종합적인 역량을 평가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 게이머들에게 뼈아픈 점은 중국이 내내 자체적인 3A게임을 개발하지 못하고 있고, 심지어 관련된 시도조차 부족하다는 사실에 있다. 다시 말해, 상업적 성장 측면에서 중국 게임산업은 ‘최고의 시대’이지만, 문화예술과 창조성의 측면에서는 ‘최악의 시대’라는 것이다. < Back 10 GG Vol. 23.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Activist, Writer) Deng Jian (邓剑) Associate Professor at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Soochow University. Focuses on digital game cultural studies as a primary research interest, and writes a column on games, among other pieces, for The Paper. (Activist, Writer) Myeonggyo Hong Activist and writer. Works at the social movement organization Platform C on East Asian international solidarity and social movements. Author of To My Vanished Chinese Friend and A Ghost Throws a Punch at the World, and translator of Xinjiang Uyghur Dystopia and Dying for an iPhone (co-translated).
- 떨리는 몸으로 플레이하기: 기대, 탐험, 그리고 인식
텅 비어있는 것 같은 어두운 복도를 걸어간다. 내 발소리와 금속 파이프에서 들려오는 끼익거리는 소리만이 이 고요함을 깨뜨린다. 손전등이 비추는 곳 너머의 어둠 속에 무엇이 숨어 있을지 알 수 없어 두려움이 엄습한다. 다음 방에 들어서자, 무거운 숨소리가 들려오고, 훼손된 사람의 신체가 불빛에 드러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그 모습에 나는 속이 메슥거린다. < Back 19 GG Vol. 24. 8.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Game Researcher) Aska Mayer A Doctoral Researcher at Tampere University Game Research Lab and the Finnish Center of Excellence in Game Culture Studies. Aska’s research is focused on bodily perceptions of digital games and technology, as well as apocalyptic media. (Game Researcher) Yeonwoo Lee Interested in games played together, and studies the relationality of games. Hopes that games can bring joy to everyone, all at once.
- <오웰> - ‘감시자본주의' 시대의 정치 불안
많은 누리꾼들은 검색엔진에서 막 검색한 키워드가 곧바로 온라인 쇼핑몰의 추천상품이 되고, 방금 전 친구들과 나눈 잡담의 소재가 갑자기 모바일 웹브라우저에 광고로 뜨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려깊은’ 서비스는 사람들이 상념과 공포에 빠뜨리고 그 때문에 지난 몇 년 동안 인터넷상의 개인정보 보호 및 데이터 수집은 주목할 만한 이슈였다. < Back <오웰> - ‘감시자본주의' 시대의 정치 불안 18 GG Vol. 24. 6. 10. 원문: 《奥威尔》:“监视资本主义”时代的政治焦虑. https://www.thepaper.cn/newsDetail_forward_16494534 많은 누리꾼들은 검색엔진에서 막 검색한 키워드가 곧바로 온라인 쇼핑몰의 추천상품이 되고, 방금 전 친구들과 나눈 잡담의 소재가 갑자기 모바일 웹브라우저에 광고로 뜨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려깊은’ 서비스는 사람들이 상념과 공포에 빠뜨리고 그 때문에 지난 몇 년 동안 인터넷상의 개인정보 보호 및 데이터 수집은 주목할 만한 이슈였다. 2020년 9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소셜딜레마(The Social Dilemma)>가 온라인에서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은 다방면으로 확산됐다. 주로 자본주의의 이윤 지향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춘 이 영화는 윤리적 감시와 도덕적 성찰이 부족한 소셜미디어 플랫폼이 만들어내는 혼란을 드러낸다. 이러한 플랫폼에서 일했던 여러 내부자들은 여러 유명 사이트가 사용자 데이터를 수집하고 알고리즘을 사용하여 지속적으로 특정 주제로 시청자를 유도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으며, 사람들이 플랫폼용 콘텐츠를 제작하도록 인센티브를 제공한다고 설명한다. 자본 지향에 대한 성찰은 사회적 반응의 한 단면일 뿐이다. 소셜미디어가 점점 더 많은 시간을 차지하고 많은 사람들이 정보를 이해하고 의견을 발표하고 소통하는 중요한 장소가 되면서, 정보의 정확성과 이견의 포용성 등에 대한 관심은 ‘감시자본주의’에 휘말려 정치적 불안감을 형성한다. 이에 따라 사이버 세계에서의 권위적 경향은 촉각을 곤두세우는 대상이 됐으며, 근래에는 반복적으로 논란거리로 부각되기도 했다. 2016년 10월 게임 개발사 오스모틱 스튜디오(Osmotic Studios)에 의해 <오웰: 당신의 눈을 떠라>라는 디스토피아 게임이 출시됐다. 2018년 2월, 속편 <오웰: 무지가 힘이다>가 발행됐다. ‘오웰’이라는 감시체제가 작동하는 방식을 묘사함으로써 디지털 생활에 잠재된 엄청난 위험을 보여주려는 두 게임의 시도는 게임 제작자들이 인터넷 시대의 정치적 위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특성화하는지에 대한 훌륭한 관점을 제공한다. 특성화된 사회 통제 : 자유국가의 감시계획 이 게임의 내러티브는 ‘더 네이션(The Nation)’이라는 가상 국가에서 일어난다. 불안한 이웃나라 정세와 국내 안보에 대한 우려 때문에 '오웰'이라는 극비 감시 프로그램을 실행하기로 한 것이다. 정보당국은 해외 지원자들을 조사요원으로 모집해 정보부서 직원의 지도 아래 정부 내 인사들이 열람할 수 없도록 돼 있는 자국민 파일을 감시하고, 사람들의 전자기기를 해킹해 반사회적 인물이나 테러리스트의 혐의가 있는지 검사하도록 한다. 플레이어는 조사관으로서 오웰 시스템을 직접 조작해 각종 혹은 공개적이거나 은밀한 정보 채널을 빌려 이른바 ‘위험 인물'의 사생활 깊숙이 침투할 수 있다. 게임의 첫 번째 에피소드는 자유광장 폭발 사건에서 시작된다. [사건에 대한 수사 과정에서] 당국은 폐쇄회로 영상을 보면서 경찰 습격으로 형사사건에 휘말린 젊은 여성이 폭발장치 설치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의심한다. 수사관들은 곧 그녀의 가족 정보, 소셜미디어 계정을 수집하여 그녀가 폭발 사건에 관여했는지 여부를 확인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하지만 수사가 진행될수록 플레이어들은 용의자를 특정할 근거가 의심스럽다는 점을 알 수 있게 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감정적으로 흘러가는 논쟁, 인터넷 친구나 커뮤니티의 정치적 경향이 기록되며, 이는 사회적으로 위험한 인물이라는 낙인으로 활용될 수 있다. 소셜미디어 및 언론 등의 의심스러운 증거를 통해 조사관은 특정 개인의 다양한 네트워크 흔적과 사적인 채팅 및 전화통화 녹음 내용까지 계속 모니터링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다. 에피소드2가 시작되면 회색 영역을 넘나드는 수사 임무 뒤에 있는 권위주의적 권력의 추진력은 더욱 적나라해진다. 같은 시간대에 반정부 블로그 ‘피플스 보이스(People's Voice)’의 라반 바르트(Raban Vhart ) 편집장은 주류 언론을 비판해 두터운 팬을 얻고 있다. 그가 유력지 ‘내셔널 비홀더(The National Beholder)’를 거듭 비난하자 오웰의 수뇌부는 그의 가족까지 수사 대상에 올리기로 하고 바르트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려 한다. 정부 관료는 앞 에피소드에서처럼 조사원의 유죄추정만 시사하는 게 아니라, 조사원에게 직접 위법 증거를 찾아내 체포영장을 발부하도록 한다. * 게임 속 ‘더네이션’에서 가장 권위 있는 뉴스 사이트 ‘내셔널 비홀더’ 흔히 디스토피아 게임의 배경 묘사에서는 권력당국의 사회적 통제 수단을 경계가 모호하고 제지하기 어려운 정치폭력으로 묘사한다. 같은 장르의 게임, 예를 들어 2016년 발매된 <비홀더(Beholder)>의 경우에도 주인공은 도시 세입자를 감시하는 건물 관리로 설정되어 있다. 이는 권력을 아래를 향해 무한정 뻗어나가는 공포정치의 풍경으로 연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체주의적 상상과 비교했을 때 <오웰>은 국가권력의 구현에 대해 훨씬 더 복잡하며, 당대 미디어 권력의 작동 논리에 가깝다. 게임 속에서 수사관들은 ‘내셔널 비홀더’ 뉴스 업데이트를 통해 주류 언론의 홍보 동향을 파악할 수 있다. 이 유력 언론은 국경 충돌과 테러 사건을 대량으로 보도하고, 헤드라인 뉴스를 통해 ‘더네이션’ 범죄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는 희소식을 플레이어에게 전달한다. 이들은 게임 배경에 대한 설명을 통해 왜 ‘오웰’ 시스템이 개인의 사생활 침해에 대해 대중의 항의를 받지 않을 수 있었는지 교묘하게 해석한다. 1978년 출간된 <위기 관리: 노상강도, 국가, 법과 질서(Policing the Crisis: Mugging, the State and Law and Order)> 책에서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을 비롯한 버밍엄학파 저자들은 전통적인 자유주의 국가들이 권위주의적 통제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영국에서는 언론 보도로 인한 작은 강도 사건이 대규모의 도덕적·법적 공황 상태로 이어지면서 사회가 갑자기 질서를 잃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는 다양한 운동이나 소수민족에 대한 우려와 적개심을 불러일으켰고, 법의 엄격한 집행과 사회거버넌스 정책을 촉구했다. 그러나 홀의 입장에서 볼 때 범죄가 핵심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도덕적 해이 때문도, 사회질서의 혼란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우선하는 것은 미디어[로 인한] 사태라는 점이다. 그것은 영국 정부 당국이 뉴스 보도에 대해 의도적인 영향을 직접적으로 가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복지국가가 쇠퇴하면서 자본주의[신자유주의] 정권에 대한 대중의 동의가 약해지면서 정치운동이 빈발했고, 자본에 대한 정부의 통제력이 부족해져 뉴스 주도권에서 상업매체의 방해를 받았다. 사회적 위기가 심화되는 가운데 긴박한 정세하 다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사회 통제권을 되찾아야 한다. 미디어 사태로 인한 사회적 공황은 일석이조의 훌륭한 방안이 될 수 있다. 경찰과 법원 시스템, 주류 언론의 범죄 문제 집중으로 가뜩이나 불안한 사회가 갑자기 부정적인 감정의 분출구를 찾게 되기 때문이다. 이후의 결과는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폭력이 예상되는 소외계층에 대한 공포 때문에 정부의 엄격한 사회적 통제를 묵인하게 됐고, 영국 정부 역시 공포에 떠밀려 모인 여론을 바탕으로 언론 통제권을 더 확장했다. 1991년 필립 슐레진저(Philip Schlesinger)가 집필한 에서도 저자는 테러로 분류되는 대형 사건들이 언론 통제의 중요한 동력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런 사건들에서 영국 정부 당국은 언론 보도의 정치적 경향과 내용을 합법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당국이 테러에 대한 해석권을 장악하고 이성적이고 의도적인 납치사건을 비논리적인 테러로 해석하는 데 직접적인 기여를 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역설적으로 정부가 언론 통제를 강화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앞서 게임 속 ‘더네이션’의 사회 상황을 살펴본 결과, 게임 제작자들이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유주의 국가들이 사회적 위기에 직면했을 때 나타나는 사회적 통제의 문제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웰>에서 ‘더네이션’이 위치한 지역은 불안정하다. 이웃나라 ‘파게스(Parges)’에서 오랜 내란이 이어지고 있어 ‘더네이션’은 군대를 파병해 지역 안보를 유지해야 한다. 이 때문에 ‘더네이션’이 더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적 갈등이 첨예하다. ‘파게스’로부터 대량의 난민이 유입되고, 퇴역 군인들이 취업난을 겪으며, 자국의 지식인들은 정부에 대해 불만을 갖는다. 이런 상황에서 ‘오웰’의 시스템은 주류 언론의 여론에 부응해 사회 통제라는 비장의 수단이 된다. 게임은 시스템 조사관의 관점에서 정보 부서, 반론 단체 및 일반 네티즌을 포함한 다양한 집단들에 대한 관점과 감정을 반영하며, 이러한 정보는 또한 현대 사회의 위기에 대한 게임 제작자의 개인적 이해를 반영한다. 인터넷 생태계 묘사하기 : 복잡한 개인, 모호한 국가 1. 이견집단의 내재적 긴장감 <오웰>은 디스토피아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캐릭터를 지나치게 편평하게 선악을 구분하지 않는다. 특히 반체제 인사들의 경우에도 인물군상을 차별적으로 형상화하지 않는다. 제작자들은 저항하는 사람들의 정의만 부각시키기보다는 사회적 환경과 다양한 인물들과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더네이션’의 사회 위기와 권력 통제는 신분 간 격차가 큰 시민들에게 각기 다른 영향을 미친다. 이 때문에 그들은 자성적인 능력을 발휘해 사회적 위기에 대처한다. 에피소드1에서 정부 정보당국은 ‘생각(The Thought)’이라는 엉성한 인터넷 동호회에 초점을 맞춰 폭발사건의 진범을 찾으려 한다. 수사관들이 이들을 감시하는 과정에서 플레이어들은 좌편향의 이 집단이 사회 환경에 대한 불만을 공유하면서도 전혀 다른 행동 이념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생각’의 창시자 에이브러햄 골드펠스(Abraham Goldfels)는 당국의 미디어 거버넌스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었고, 청년들을 조직해 미디어 윤리에 대해 토론하는 데 열정적이었다. 정부가 오웰 시스템의 윤리계획에 참여해달라고 제안했을 때 그는 개방적 자세로 이에 참여했지만, 조사원으로서 도저히 임무를 중립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퇴했다. ‘생각’의 동인이었던 해리슨 오도넬(Harrison O'Donnell)은 ‘생각’의 블로그에 여러 차례 글을 올리기도 했지만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다가 주류 언론 ‘내셔널 비홀더’의 칼럼니스트로 변신했고,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펑크 신분을 감추려 애쓴다. 취업난과 정신질환, 폭력적 저항이 많은 편집증적 사고를 지닌 퇴역 군인 니나 마테르노바(Nina Maternova)는 끝까지 반발을 제기하고 정치문제에 대한 민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최선의 방법으로 자유광장에서 폭탄을 터뜨린다. 에피소드2에서 반체제 인사들의 모습은 더 어두워진다. ‘피플스보이스’ 편집장 라반 바르트는 ‘파게스’ 난민으로서 ‘파게스’의 국가적 재난과 개인적 불행은 ‘더네이션’에 의해 의도된 설계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의 가족과 추종자들은 그의 음모론에 대한 집착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 게임 속 ‘피플스보이스’ 편집장 라반 바르트는 “국가기관에 맞선 전쟁을 시작한다”는 글을 게시한다 서로 다른 사회적 위치에 서 있고, 다른 배경과 경력을 가진 반체제 인사들은 단순히 사회적 사명감에 의해 소환되는 단순한 저항자가 아니다. 정치이념의 성숙도에도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에이브러햄 골드펠스는 오랫동안 사회비판적 활동을 해온 지식인으로서 당국의 정책에 대해 보다 인내하며 체제 내 개혁의 가능성을 믿었던 반면, 다른 반체제 인사들은 안정적인 정치적 입장가 부재했다. 해리슨 오도넬의 정치적 태도는 급진적인 듯하면서도, 좌절할 때는 현실에 쉽게 고개를 숙인다. 니나와 바르트의 과격 행동은 ‘더네이션’에 대한 위화감과 관련이 깊지만, 그 배후의 가치에 대한 고민은 얕다. 이처럼 내부적 긴장감이 넘치는 인물군상을 부각해 보면, 정부 당국의 미디어 거버넌스 논리를 게임 안에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정보 교류가 빈번한 인터넷 시대에 사회 상황에 대한 여러 집단들의 능동적 반응은 편리한 미디어 조건으로 인해 더 쉽게 발견되고, 관심받고 인식되며, 더 큰 사회적 영향을 미친다. 급진적인 반대 의견과 행동이 확산될 가능성을 예상하는 것 외에도, 권력자들은 더 엄격한 사회적 통제를 고려해야 할 ‘강제’를 받을 수 있다.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사회적 리스크 때문에 오웰식의 시스템이 게임에 등장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반체제 인사들의 복잡성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단순히 정치적 압박의 저항자로만 보는 것은 정부와 민중 간 미묘한 관계를 적절하게 묘사하기 어렵게 만들고, 국가기구에 대한 게임의 주장을 너무 가볍게 보이게 할 수 있다. 2. 전능한 정부의 이미지 안타깝게도 <오웰>은 반체제 인사에 대한 묘사만큼 국가기관에 대한 묘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으로 인해 게임 내 당국에 대한 부정적 여론과 사회 통제 수단 간 관계는 효과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에피소드2에서 ‘피플스보이스’의 조직자 라반 바르트는 ‘더네이션’이 ‘파게스’ 정국에 개입해 현지 내란을 일으켰으리라는 음모론에 사로잡혀 있다. 나아가 그는 ‘더네이션’ 정부가 ‘피플스보이스’에 대한 보복으로 자유광장 폭발 사건을 일으켰고, 자기 아내를 살해했다고 믿고 있다. 오랜 정신적 편집증 때문에 그는 ‘더네이션’ 정부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다. 처음에 수사관들의 시각에서 보면 라반 바르트의 정부 고발은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그는 파게스에 있는 학교에서 우발적인 폭탄테러를 당했고, 그의 아내는 감시받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의도치 않게 폭발 사건에 연루된다. 하지만 수사가 진척될수록 게임 제작자들은 역설적으로 바르트의 입에서 나오는 음모론을 따라가도록 구현한다. 그것은 즉, 정부가 조직적으로 바르트를 도발하여 그가 편집장이란 직위를 통해 파게스 선거에 간접 개입하도록 했고, 이로 인해 바르트가 받는 항간의 소문들은 모두 오웰 시스템이 주관하는 통제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게임 속 ‘더네이션’ 정부의 모습은 너무 전능한 나머지 현실성이 떨어진다. 이 게임은 정보의 홍수가 쏟아지는 인터넷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디스토피아 게임의 진부한 클리셰를 벗어나지 않는다. 국가기관은 급변하는 여론 동향과 민중의 반응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미디어에 대한 권력구조의 상실과 관련한 제작자들의 우려를 투영한 측면이 크다. 인터넷의 힘은 실재한다. 하지만 일상에서 우리는 인터넷이 겉보기에는 더 큰 자유를 가져다주었지만 이로 인한 개인의 사생활 손실과 사회적 통제 강화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을 크게 느끼고 있다. 기술과 권력의 불균형에 직면하여 제작자들은 미디어가 사람들의 생각을 표현하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믿음이 없기에 <오웰> 역시 권력의 자리에 대해 인식하거나 이입하지 않는다. 또, 끊임없이 확장되는 권력의 미디어 권력, 개인의 프라이버시 침해를 주저하지 않는 미디어 거버넌스의 논리가 부분적으로는 온라인 여론의 복잡성과 실제 영향력에 대한 통제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한다. 현실에 대해 편향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에피소드2는 국가기관의 형성에 대해 전체주의화되기 시작한다. 오웰 시스템은 더 이상 수사관의 판단에 의존하지 않고, 정보 당국의 리더가 직접 수사에 개입해 바르트의 ‘흑색선전’을 찾아내 ‘피플스보이스’의 명성을 떨어뜨리고, 바르트 가족의 메신저 계정을 해킹해 이들을 체포할 수 있는 불법 증거를 찾도록 독려한다. * 에피소드2의 ‘인플루언서’ 메커니즘엔 댓글러 활용 여론공세로 비판여론 공격하기 기능이 있다 물론 이러한 전체주의적 상상력이 결코 목적 없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필립 슐레진저는 정치폭력에 대해 설명하면서, 막스 베버(Max Weber)와 기든스(Anthony Giddens)를 인용해 자유주의 국가에서 전체주의적 성향은 당국이 정치상황이 급박하다고 생각하고 민중들이 이를 묵인할 때 어떤 국민국가도 도덕적 전체주의를 피할 수 없게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역설적인 점은 미디어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통해 사회 정세의 긴장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이 당국에 의해 장악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3. 수사관 모델: 윤리적 계획은 가능한가? <오웰> 플레이의 핵심인 수사관 모델은 이런 현실적 우려에 대한 활로를 모색해보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그것은 즉 사회적 통제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실제 범죄를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권익을 보호하고 권력의 침투를 피할 수 있는 거버넌스 방법이 있는지 여부이다. 정부 지도자는 ‘더네이션’ 시민들의 사생활 정보에 직접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수사관들은 특정 사건이나 집단을 중심으로 조사할 수밖에 없지만, 수사 대상자의 위협성 여부를 판단할 때는 결정적인 의견을 제공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윤리적 비전이 개인에 대한 정치 폭력의 침해를 해결하지 못할 것임을 행간에서 암시하기도 한다. <오웰>의 두 에피소드 모두 수사관들이 개인의 정치적 성향과 취향, 사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정보를 정보당국에 제공하는데, 게임 내러티브의 전개는 복수의 엔딩으로 이어지도록 설정됐다. 반체제 인사들이 오웰의 감시 계획을 폭로했는지, 아니면 오웰 시스템이 사회적 위기를 통제했는지 여부는 수사관의 도덕적 선택에 크게 의존한다. 동시에 권력구조는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지도자가 수사관에게 내리는 대부분의 명령은 수사관이 피의자를 유죄로 판단하도록 강제하거나 유도할 의향을 갖고 있다. 에피소드1에서 플레이어는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하지만 폭발사건에 연루된 ‘생각’의 멤버 카산드라와 니나는 체포된다. 이와 비교했을 때 게임의 엔딩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생각’의 멤버들이 오웰 시스템의 위험성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 성공해 당국이 계획을 취소하더라도 시스템의 계획은 여전히 암암리에 진행된다. ‘더네이션’의 승인으로 수사관이 된 시민은 위험 인사로 기록 및 저장된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가 헤게모니를 다투는 과정에서 갖는 관성 때문에 공식 통제를 받는 오웰 시스템이 중립적 성격의 매개체 기술로 사용될 가능성은 없다. <오웰>의 정치적 불안 결국 오웰의 서사는 스스로가 설정한 딜레마에 빠진다. 이 게임은 ‘더네이션’ 당국의 상징에 대해 제작자들이 온라인 매체에 대해 비관적인 시각을 갖고 있음을 내비친다. 권력과 과학기술의 우위를 쥐고 있는 권력자를 상대로 권위주의적 성향의 사회통제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오웰>에는 권위 있는 언론과 일반 대중, 반체제 인사들 간의 상호작용이 매우 단순하게 표현된다. 당국은 유력 매체에 공개된 정보를 통해 항상 사람들의 감정을 조작하고 적시에 반체제 인사들을 격분시켜 그들이 예정된 계획에 복무하도록 한다. 이 게임의 제작자들이 정치적 힘의 복잡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비관적 미래상에 더 공감하고 있다. ‘한쪽으로 치우쳐진’ 인터넷 세계 권력구조 현상에서 취약계층의 저항은 항상 존재할 수 있지만, 강자가 항상 국민의 동의와 묵인을 얻는다면 권력은 계속 확장될 것이다. <오웰>의 게임 상징은 이런 관점의 ‘자기실현’이다. 한편으로 게임 속 네티즌의 이미지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는 감정적 집단으로 축소되고, 반체제 인사들은 대중들로부터 공감받지 못하는 외톨이로 묘사된다. 다른 한편, 인터넷 디스토피아에 대한 제작자의 과도한 관심은 인터넷 밖 현실의 표현 공간을 밀어낸다. 사람들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표현을 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사회적 상황에 대한 판단이 결여되어 있는 ‘오합지졸’인 것은 아니다. 인터넷 세계에서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냉정한 관점이 어쩌면 진짜 이견은 아닐 수 있다. 오히려 이러한 온건한 견해가 일상에서는 더 큰 목소리를 내고 주류가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기술과 권력의 결합이 <오웰>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매우 긴밀하더라도, 우리는 인터넷 세계가 오늘날 정치 지형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각종 뉴스와 인기검색어, 상업광고가 전방위적으로 다루는 인터넷 세계는 결국 사람들의 실생활, 실제의 사회적 감정이나 견고한 관점을 대체할 수 없다. 그러나 <오웰>에서 표현된 상징들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진정한 정치적 불안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인터넷 세계에 ‘이용자’로 진입할 수 있는 기술적 역량이 부족한 현대인들의 경우에는 정치적 다툼의 공간은 급속하게 축소되고 있다. 사람들의 관심이 헤드라인 뉴스와 감정적인 관점에 의해 빈번하게 끌올되는 지금의 상황에서 이념을 확고하게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견고한 관점을 형성해 주류와 경쟁할 가능성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점차 인터넷에 의존해 정보를 얻고, 자신의 인식을 구축하거나 소통하고, 심지어 생계를 유지한다. 인터넷 세계의 이질적인 권력구조는 긴장감 넘치는 국가-개인 관계를 대체하는 압도적인 ‘현실’로 인식되고 있다. <오웰>의 엔딩은 이런 ‘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디스토피아적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그것이 딜레마에 대한 해결책이 아닐지라도, 권력에 맞선 총력전을 펼쳐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현실’과 조심스레 거리를 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비관적인 인터넷 풍경의 배후에 여전히 남아 있는 가능성의 사회를 봐야 할 것이다. 통제 불능의 폭력이 아니라, 시행착오를 통해 꿈꾸는 방향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정치가 작동할 수 있는 논리를 보다 정교하게 이해해야 한다. Tags: 빅브라더, 파놉티콘, 전체주의, 감시, 혁명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연구자) 량청린 梁成林 (활동가, 작가) 홍명교 활동가, 작가. 사회운동단체 플랫폼C에서 동아시아 국제연대와 사회운동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를 썼고, <신장위구르 디스토피아>와 <아이폰을 위해 죽다>(공역) 등을 번역했다.
- [인터뷰] e스포츠의 현장감은 어디서 오는가: 라이엇게임즈 함영승 PD
그런데 따지고 보면 뭔가 이상하다. ‘현장 중계를 가서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는 말은,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으로 경기를 보는 것이 아쉽다는 의미인데, 게임의 배경은 이미 온라인 세계가 아니던가? 그러면 e스포츠에서 현장감은 무엇을 의미할까? 팬들이 경기장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소환사의 협곡’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인데, 대체 팬들은 어떠한 지점에서 현장감을 느끼는 것일까? 전통적인 스포츠에서 이야기하는 현장감과 e스포츠의 현장감은 그 성질이 다를까? 이러한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 이번 호에서는 MBC에서 전통 스포츠를 중계하다가 지금은 LCK 중계를 하고 있는 라이엇게임즈의 함영승 PD를 만나고 왔다. < Back 08 GG Vol. 22. 10.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Dowon Seo Studies culture in pursuit of a more interesting life. Curious about a wide range of cultural domains, including games, religion, and film.
- 경계에 선 매체 : “콘솔 게임은 대중매체인가?”
결국 콘솔 게임이 대중매체인가 하는 질문은 현재 시점에서 대답하자면, 그렇다, 아니다, 단정지어 말하기 어렵다. 이는 단순히 기술적 기능이나 시장 점유율의 문제가 아니라, 게임이 우리 사회에서 수행하는 복합적 역할과 사람들이 게임을 통해 연결되고 소통하는 방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 Back 경계에 선 매체 : “콘솔 게임은 대중매체인가?” 25 GG Vol. 25. 8. 10. 손 안의 세계에서 모두의 거실로 지난 GG 23호에서 나는 지하철에서 스팀덱을 꺼내는 것을 주저했던 경험 을 이야기했다. 640그램의 무게감과 함께 느꼈던 그 미묘한 시선들, 그리고 "저 사람 게임에 진심인가보다"라는 상상 속 목소리들. 그런데 최근 콘솔 게임을 둘러싼 여러 변화들을 관찰하면서, 그때의 경험이 단순히 개인적인 민감함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게임이라는 매체가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 그리고 그 위상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신호였던 것이다. 이런 의문은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과연 콘솔 게임을 대중매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중매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대중매체의 조건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많은 사람이 즐긴다고 해서 대중매체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대중매체는 몇 가지 핵심적 특징을 갖는다. 첫째는 광범위한 접근성이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는 공유 가능한 경험이다. 개인적 소비를 넘어서 사회적 담론과 공통의 문화적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셋째는 일상적 통합성이다. 특별한 경우에만 접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한다. 넷째는 문화적 영향력이다. 사회의 가치관, 담론, 정체성 형성에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기준으로 20세기 대중매체들을 살펴보면 명확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신문은 19세기 후반부터 대량 인쇄 기술과 배급 시스템의 발달로 광범위한 독자층을 확보했고, 공통의 뉴스와 담론을 제공하며 근대 사회의 공동체 형성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라디오는 1920년대부터 가정으로 침투하여 일상의 배경이 되었고, 동시성을 바탕으로 한 집단적 경험을 가능하게 했다. TV는 1950년대부터 시각적 요소를 추가하여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거실의 중심에 자리잡으며 가족 단위의 공유 경험을 만들어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들 매체가 모두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속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라디오나 TV가 귀하던 시절에는, 한 가족이나 이웃들이 한 공간에 모여서 함께 청취하고 시청했다. 책의 경우에도 개인적인 경험 매체로 보이지만, 잡지나 만화책 한 권을 여러 명이 돌려가며 읽는 방식으로 집단적 경험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런 집단적 경험의 공유가 이들 매체를 진정한 대중매체로 만드는 핵심 요소였다. 하지만 대중매체의 소비 패턴은 극적으로 변화했다. 매체를 접하게 되는 공간도 모두 상이하다. 누군가는 방 안에서, 대중교통에서, 점심시간에 짬을 내 회사에서 등, 사람들의 이동이 증가한 것처럼 매체도 사람과 함께 이동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스마트폰이 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선 스마트폰을 통해 접하게 되는 넷플릭스, 디즈니 플러스와 같은 OTT 콘텐츠 뿐만 아니라, 숏츠나 릴스와 같은 숏폼 콘텐츠도 "함께, 한 공간에서 보는" 것이 아님에도 "함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요소를 갖고, 전세계적인 콘텐츠가 되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시공간의 장벽 없이 매체와 콘텐츠에 대한 접근이 전세계 어디에서든 가능해지고 이를 통한 경험의 공유와 소통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이제 한국 드라마를 미국에서 실시간으로 시청할 수 있고, 일본의 게임을 유럽에서 동시에 플레이할 수 있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동일하거나 유사한 콘텐츠를 거의 같은 시점에 접하게 되면서, 그러한 경험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사회적으로 공유되고 통용되는 새로운 패턴이 형성된 것이다. 예를 들어,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이나 '케이팝 데몬 헌터스' 같은 콘텐츠는 전세계에서 동시에 화제가 되었고, 각국의 소셜미디어에서 동일한 장면과 대사들이 밈으로 확산되었다. 유튜브의 바이럴 영상이나 틱톡의 챌린지도 마찬가지다. 물리적으로는 각자의 공간에서 개별적으로 소비하지만,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해 전지구적 규모의 공유 경험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대 콘솔 게임의 위치를 ‘휴대성’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콘솔 게임의 휴대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휴대 가능한 미디어'의 역사적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항상 정보와 문화 콘텐츠를 이동하면서 소비하려 했고, 기술은 이런 욕구에 부응하여 발전해왔다. 하지만 게임기의 경우는 다른 미디어와 구별되는 독특한 발전 경로를 보여준다. 1970년대 초기 콘솔들은 완전히 고정된 기기였다. '마그나복스 오디세이'나 '아타리 2600'은 TV에 연결되어야만 작동했고, 거실이라는 특정 공간에 설치되는 것이 당연했다. 이는 당시 가전제품의 일반적 특성이기도 했다. TV, 라디오, 턴테이블 모두 무겁고 부피가 커서 한 번 설치하면 쉽게 옮기기 어려운 물건들이었다. 1980년대 후반 닌텐도 게임보이의 등장은 이런 패러다임에 균열을 가했다. 처음으로 게임이 거실을 벗어나 개인의 손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초기 휴대용 콘솔의 휴대성은 여전히 제한적이었다. 배터리 수명이 짧았고, 화면이 작고 흐릿했으며, 무엇보다 거실 콘솔과는 완전히 다른 게임들만 플레이할 수 있었다. 이는 '휴대용'과 '거실용'이 서로 다른 카테고리의 제품이라는 인식을 만들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런 구분은 점차 의미를 잃기 시작했다. 닌텐도 DS와 소니 PSP는 거실 콘솔에 근접한 성능과 복잡성을 휴대용 기기에서 구현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들은 '축소된' 경험을 제공하는 보조적 기기로 여겨졌다. 진정한 비디오 게임 경험은 거실의 대형 TV와 강력한 콘솔에서만 가능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2017년 닌텐도 스위치의 등장은 이런 이분법을 근본적으로 해체했다. 처음으로 거실 콘솔과 휴대용 콘솔이 하나의 기기에서 완전히 통합된 것이다. 같은 게임을 집에서는 대형 TV로, 밖에서는 휴대용으로 끊김 없이 플레이할 수 있게 되었다. 게임 경험이 더 이상 특정 장소에 종속되지 않게 된 것이다. 현대인은 하루종일 여러 공간을 이동하며, 각 공간에서 서로 다른 활동을 한다. 집에서는 휴식을, 대중교통에서는 개인적 시간을, 직장에서는 업무를, 카페에서는 사교적 만남을 갖는다. 하이브리드 콘솔은 이런 다양한 맥락에 자연스럽게 적응한다. 전통적으로 게임은 매우 개인적인 매체로 여겨져 왔다. 혼자서 즐기는 오락, 특정 계층이나 세대만의 취미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최근의 변화들을 살펴보면 이런 인식이 과연 여전히 유효한지 의문이 든다. 콘솔 게임도 개별적 경험과 사회적 공유를 결합하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실천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여전히 경제적 접근성이나 기술적 진입장벽 같은 한계들이 존재한다. 또한 게임에 대한 사회적 편견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콘솔 게임이 제공하는 새로운 형태의 상호작용성, 사회적 연결성, 문화적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런 복합적 상황에서 우리는 콘솔 게임의 매체적 지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콘솔 게임의 단순한 기술적 기능이나 시장 규모의 확장만을 살펴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콘솔 게임이 우리의 일상과 사회적 관계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경험을 종합적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현대 콘솔의 기술적 진화가 열어가는 새로운 문화적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동하는 경험(Mobility)과 투명해지는 도구(Readiness-to-hand) 망치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목수를 떠올려보자. 그에게 망치는 더 이상 '무거운 금속 덩어리'가 아니다. 손목의 미묘한 움직임이 망치 머리의 정확한 타격으로 이어지고, 못이 박히는 소리만으로도 작업의 성공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이때 망치는 목수의 의식에서 사라진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망치는 목수의 손과 팔의 자연스러운 연장이 되어 '투명'해진다. 20세기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런 현상을 '용재성'(Zuhandenheit, readiness-to-hand)이라고 불렀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도구와 맺는 관계에는 두 가지 모드가 있다. 하나는 '현전성'(Vorhandenheit, present-at-hand)으로, 도구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분석하는 상태다. 망치의 무게가 몇 그램인지, 손잡이의 재질이 무엇인지를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바로 '용재성'으로, 도구가 우리의 의도와 목적을 실현하는 투명한 매개체가 되는 상태다. 이때 우리는 도구를 통해 세계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하이데거의 ‘현전성’과 ‘용재성’ 개념을 게임에 접목한 흥미로운 논의가 있다. 게임을 처음 접하는 사람을 관찰해보면 이 두 모드의 차이를 명확히 볼 수 있다. 초보자는 컨트롤러의 각 버튼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의식적으로 기억하려 애쓴다. 이때 컨트롤러는 복잡하고 낯선 기계장치일 뿐이다. 하지만 수십 시간의 플레이를 거친 숙련된 게이머에게 컨트롤러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다. 그들은 버튼의 위치를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게임 속 캐릭터를 움직이고 싶다는 의도가 손가락의 움직임으로 즉시 번역되고, 그 결과가 화면에서 자연스럽게 구현된다. 컨트롤러는 '투명'해졌고, 플레이어의 신체는 게임 세계까지 확장되었다. 이 논의를 풀어서 설명하자면, 플레이어는 게임 속 적이 나타나면 즉시 공격 버튼을 누르고, 절벽이 나타나면 자연스럽게 점프한다. 이때 플레이어들은 "지금 X버튼을 눌러야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점프해야겠다"는 의도가 바로 손가락의 움직임으로 번역되고, 화면에서 캐릭터가 점프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컨트롤러는 완전히 '투명'해져서, 플레이어의 신체와 게임 세계 사이의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되는 것이다. 이런 용재성은 게임 컨트롤러와 마찬가지로, 콘솔 게임의 도구로써의 특성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하지만 현대 콘솔 게임의 진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도구적 관점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서 영국의 사회학자 존 어리(John Urry, 2007)의 모빌리티 이론이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어리는 현대 사회를 "어느 때든, 어느 장소에서든 네트워크화된" 모빌리티 사회로 규정했다. 그는 현대인의 정체성이 고정된 장소나 단일한 기술과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기술적 환경과의 복합적 상호작용을 통해 구성된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는 다섯 가지 서로 다른 형태의 모빌리티가 존재한다. 첫째는 사람의 신체적 이동, 둘째는 사물의 물리적 이동, 셋째는 상상적 여행(책이나 영화를 통한 정신적 이동), 넷째는 가상 여행(인터넷이나 전화를 통한 실시간 소통), 다섯째는 소통적 이동(사람 간의 메시지 교환)이다. 흥미롭게도 현대 콘솔 게임은 이 모든 형태의 모빌리티를 동시에 구현하고 있다. TV에 연결하던 전통적인 거실 기반 콘솔은 주로 세 번째 모빌리티, 즉 상상적 여행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플레이어는 소파에 앉아 게임 속 가상 세계로 '상상적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최근의 닌텐도 스위치와 같은 하이브리드 콘솔은 게임을 이용하는 공간의 제한을 완전히 뛰어넘는다. 사용자가 물리적으로 이동할 때 게임기도 함께 이동하며, 동시에 게임 진행 상황과 세이브 데이터라는 '디지털 객체'도 끊김 없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집에서 대형 TV로 즐기던 게임을 지하철에서 휴대 모드로 이어갈 수 있고, 다시 친구 집에 가서 그곳의 TV에 연결해 함께 플레이할 수 있다. 여기서 하이데거의 ‘용재성’과 어리의 ‘모빌리티’가 만난다. 콘솔이 진정으로 '투명한 도구'가 되려면 단순히 조작이 쉬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다양한 모빌리티 욕구에 자연스럽게 부응해야 한다. 현대인은 고정된 장소에서만 게임을 즐기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동 중에도,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도, 혼자 있을 때도 게임 경험이 끊김없이 이어지기를 원한다. 이런 욕구가 충족될 때 콘솔은 비로소 진정한 용재적 도구가 될 수 있다. 어리(2007)는 또한 현대 사회에서 "이동하는(mobile) 기계"와 "체류(inhabit)하는 기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분석했다. 이동하는 기계는 자동차, 기차처럼 물리적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들이고, 체류하는 기계는 전화, 인터넷처럼 한 장소에 머물면서도 다른 곳과 연결되게 해주는 기술들이다. 현대 콘솔은 이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갖는다. 휴대 모드에서는 '이동하는 기계'로 작동하고, 도킹 모드(독 모드)에서는 '체류하는 기계'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콘솔 게임의 이중적 특성은 용재성을 한층 더 정교하게 만든다. 과거에는 게임을 하기 위해 특정 장소(거실, 방)에 가야 했고, 특정 자세(소파에 앉기, 책상 앞에 앉기)를 취해야 했다. 이는 게임 경험에 공간적, 신체적 제약을 가했다. 하지만 현대 콘솔은 이런 제약을 제거한다. 어떤 장소에서든, 어떤 자세에서든 자연스럽게 게임을 즐길 수 있게 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투명성'을 실현한다. 또한 콘솔의 모빌리티는 우리가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도 바꾸고 있다. 전통적인 거실 콘솔에서는 게임을 위해 별도의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게임은 여가 시간의 활동이었고, 다른 일상적 활동들과는 분리된 영역에 속했다. 하지만 휴대 가능한 콘솔은 게임을 일상의 틈새 시간으로 침투시켰다. 버스를 기다리는 5분, 점심시간의 30분, 잠들기 전의 1시간이 모두 게임 시간이 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게임 플레이 시간이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게임 경험이 파편화되면서도 동시에 연속성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아침에 집에서 시작한 게임을 지하철에서 잠깐 이어가고, 점심시간에 다시 진행하며,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마무리하는 식으로 하나의 게임 경험이 하루종일에 걸쳐 분산되지만 통합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시간 경험의 변화는 어리가 분석한 현대 사회의 "시간-공간 압축" 현상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기술의 발달로 물리적 거리는 의미를 잃어가고, 대신 시간의 활용 방식이 더욱 중요해진다. 콘솔의 모빌리티는 이런 압축된 시간-공간에서 게임 경험을 최적화하는 도구 역할을 한다. 더 나아가 어리가 제시한 "용재적인 기계, 이미지, 통신장치가 그득한" 현대 사회에서 콘솔은 다른 기기들과 연결되면서 더욱 복합적인 용재성을 구현한다. 예를 들면, 콘솔로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동시에 스마트폰으로 친구의 온라인 상태를 확인하고, 태블릿으로 게임 공략을 검색하며, PC에 연결된 디스코드로는 채팅을 한다. 이때 각 기기는 고유한 역할을 하면서도 하나의 통합된 경험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한다. 이런 통합적 경험에서 중요한 것은 각 기기 간의 전환이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사용자는 어떤 기기를 사용하고 있는지를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경험을 추구하고, 기술은 배경으로 물러난다. 이것이야말로 하이데거가 말한 용재성의 본질이며, 어리가 예견한 모빌리티의 이상적 사례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기술적 발전이 단순히 '더 많은 감각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진정한 용재성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적절한 정보'를 '적절한 때'에 제공할 때 달성된다. 하이데거식으로 해석하자면, 망치를 사용할 때 우리가 망치의 재질이나 소재를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잘 설계된 콘솔은 플레이어가 그 기술 자체를 의식하지 않게 만든다. 결국 현대 콘솔 게임의 진화는 기술의 진화이면서 동시에 기술의 소거 과정이기도 하다. 더 정교한 기술을 통해 기술을 덜 의식하게 만드는 것, 더 복잡한 시스템을 통해 더 편리하고 단순한 경험을 제공하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사용자의 다양한 모빌리티 욕구를 자연스럽게 충족시키는 것. 이것이 21세기 콘솔이 달성한 성취라고 할 수 있다. 손 안의 작은 기기가 거대한 게임 세계로의 투명한 창이 되고, 동시에 언제 어디서나 접근 가능한 문화적 매개체가 되는 것. 여기서 우리는 기술과 인간이 맺을 수 있는 이상적인 관계의 한 모습을 발견한다. 기술은 다시 한번 투명해지고, 사람들은 온전히 함께 게임하는 즐거움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이런 변화는 개인적 경험의 차원을 넘어선다. 하이데거는 용재성이 단순히 개인과 도구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이 세계와 맺는 근본적인 관계 방식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도구를 통해 세계에 개입하고, 도구가 투명해질 때 비로소 세계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게임의 맥락에서 보면, 콘솔이 투명해질 때, 기술적 매개는 사라지고 플레이어는 게임 세계와 직접적 관계를 맺으며, 다른 플레이어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연결된 개인들의 새로운 ‘디지털 놀이터’ 1980년대, 누군가 스트리트 파이터를 플레이하고 있으면, 그 뒤로 서너 명이 모여들고 "어퍼컷!", "가드해!", "콤보 넣어!"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흔한 오락실 풍경이었다. 플레이어가 어려운 기술을 성공시키면 함께 환호하고, 실패하면 함께 아쉬워한다. 때로는 게임을 직접 하지 않는 사람이 더 흥미진진하게 경험을 즐기기도 한다. 이는 2000년대 PC방에서의 풍경도 비슷했다. 이런 집단적 게임 경험은 단순히 한 사람의 플레이를 여러 명이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공유된 사건을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개인 PC의 보급이 증가하면서 오락실이나 PC방보다는 집에서 혼자 게임을 하는 것이 기본이 되었고, 멀티플레이어 게임이 있다 해도 각자 자신의 화면만 보며 플레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온라인 게임을 통해 전 세계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었지만, 그 연결은 주로 기능적이고 목적 지향적이었다. 게임을 이기기 위해, 미션을 완수하기 위해 협력하는 것이지, '함께 있는 즐거움'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PC 게임 환경에서는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외부 도구들이 발달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디스코드(Discord)다. 2015년 출시된 디스코드는 게이머들이 음성 채팅을 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게임 화면을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했다. 이를 통해 물리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마치 같은 공간에서 게임을 하는 듯한 경험이 가능해졌다. 디스코드의 화면 공유 기능이 게이머들에게 미친 영향은 생각보다 혁명적이었다. 온라인상으로도 친구가 어려운 보스와 싸우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응원하거나 조언할 수 있게 되었고, 복잡한 퍼즐 게임을 함께 풀어나가거나, 새로운 게임의 조작법을 가르쳐주는 것도 가능해졌다. 하지만 이런 경험을 위해서는 게임과는 별도의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해야 했고, 특히 콘솔 게임의 경우 종종 복잡한 설정이나 세팅으로 인해 원활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콘솔 사용자들은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생태계 안에서 제한된 소통 수단만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음성 채팅은 가능했지만 화면 공유는 불가능했고, 디스코드 같은 외부 애플리케이션과의 연동도 어려웠다. *닌텐도 스위치2 그런데 최근 닌텐도 스위치2가 화면 공유와 통합 음성 채팅 기능을 자체적으로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기능 추가를 넘어서는 의미를 갖는다. 이제 콘솔 사용자들도 별도의 외부 도구나 복잡한 설정 과정 없이 게임 화면을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음성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하이데거의 투명성 개념과 연결할 수 있다. 소통을 위한 기술적 복잡성이 사라지고, 순수한 게임 경험과 사회적 상호작용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런 기능이 서로 다른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작동한다는 점이다. 즉, 멀티 플레이를 위한 화면 공유와 채팅 뿐만 아니라, 이제는 콘솔 게임 중에 각자 다른 게임을 하면서도 서로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한 명은 복잡한 RPG의 스토리를 진행하고, 다른 한 명은 액션 게임의 보스전을 벌이면서도 서로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며 대화할 수 있다. 이는 콘솔 게임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된 새로운 형태의 집단적 게임 경험이다. 이런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20년간 폭발적으로 성장한 게임 실황 방송 문화를 함께 살펴봐야 한다. 트위치, 유튜브, 아프리카TV 등의 플랫폼을 통해 "게임 보기"는 하나의 독립적인 엔터테인먼트 장르로 자리잡았다. 수백만 명이 다른 사람의 게임 플레이를 시청하며, 채팅을 통해 실시간으로 소통한다. 이는 과거 아케이드의 "구경하는 재미"가 디지털 환경에서 대규모로 재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시청자들은 스트리머의 뛰어난 실력에 감탄하거나, 실패하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거나, 어려운 구간을 함께 고민한다. 때로는 채팅을 통해 힌트를 주거나 응원 메시지를 보내기도 한다. 이는 일방향적 시청이 아니라 쌍방향적 참여다. 콘솔의 내장 화면 공유 기능은 이런 게임 실황 문화를 개인적이고 친밀한 차원으로 가져온 것이다. 수만 명의 시청자가 아니라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하는 소규모 실황인 셈이다. 하지만 규모가 작다고 해서 그 의미가 축소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친밀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화면 공유는 더욱 자연스럽고 깊이 있는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변화들이 만들어내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 놀이터'다. 전통적인 놀이터는 명확한 물리적 경계를 가진 공간이었다. 학교 운동장, 동네 공원,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 등이 그 예다. 이런 공간에서 아이들은 함께 뛰어놀고, 게임을 만들어내고, 사회적 관계를 형성한다. 중요한 것은 이런 놀이가 단순히 개별적인 활동들의 합이 아니라는 점이다. 놀이터에서는 각자 다른 놀이를 하면서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네를 타는 아이, 미끄럼틀을 오르내리는 아이, 모래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하나의 역동적인 놀이터 생태계를 만들어낸다. 기존 콘솔 환경에서는 어려웠던 화면 공유 기능이 새롭게 만들어내는 디지털 놀이터도 비슷한 특성을 갖는다. 각자 다른 게임을 하지만, 동시에 하나의 공유된 소통 공간에서 함께 있다. 이는 물리적 놀이터와 여러 면에서 유사한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는 특성도 갖는다. 우선 공간의 제약이 없다. 전 세계 어디에 있든, 언제든지 접속만 할 수 있으면 이 디지털 놀이터에 들어갈 수 있다. 또한 놀이의 다양성도 무한하다. 물리적 놀이터에서는 그 공간이 제공하는 시설의 한계가 있지만, 디지털 놀이터에서는 수천 가지의 서로 다른 게임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런 디지털 놀이터가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경계를 흐린다는 점이다. 나는 내 집 침실이라는 가장 사적인 공간에서 게임을 하고 있지만, 동시에 친구들과 연결된 반공적 공간에도 존재한다. 내 게임 화면은 나만의 것이면서 동시에 친구들과 공유된다. 이는 전통적인 공간 개념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새로운 형태의 공간성이다. 이런 공간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예의와 규범도 생겨난다. 예를 들어, 친구가 중요한 게임 장면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대화를 자제하는 암묵적 규칙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적절한 조언을 제공하는 방식, 게임의 스포일러를 피하는 방법 등이 자연스로운 규범으로 형성된다. 이는 아케이드나 PC방에서 발달했던 집단적 게임 문화의 디지털 버전처럼 보인다. 물론 디지털 환경이라는 점에서 나타나는 고유한 특성도 있다. 디지털 환경 속에서 주고받는 기존의 음성 채팅이나 텍스트 메시지는 주로 언어적 소통에 의존했다. 하지만 화면을 공유하면 비언어적 소통이 가능해진다. 친구가 게임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를 말해주지 않아도 화면을 통해 직접 관찰할 수 있다. 아케이드 시대, PC방 세대의 집단적 게임 문화가 콘솔 게임으로 이어져 다시 현대적으로 재해석된다. 결국 콘솔의 이러한 발전은 단순한 기술적 기능 추가가 아니라, 게임이라는 매체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공간의 근본적 재편, 개인적 경험과 집단적 경험,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제 연결된 개인들이 만들어내는 이 새로운 놀이터에서, 게임은 더 이상 혼자 즐기는 오락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사회적 경험이 되고 있다. 경계에 선 매체: 콘솔 게임의 대중매체적 가능성 지금까지 우리는 콘솔 게임의 진화를 철학적, 사회학적 렌즈를 통해 다각도로 분석해왔다. 하이데거의 용재성 개념을 통해 콘솔이 어떻게 투명한 도구가 되어가는지를 살펴보았고, 존 어리의 모빌리티 이론으로 현대 콘솔이 구현하는 새로운 형태의 이동성을 탐구했다. 화면 공유와 음성 채팅 기능이 만들어내는 디지털 소통 공간의 확장을 분석했고, 다중 기기 생태계에서 콘솔이 차지하는 복합적 위치를 조명했다. 이 모든 논의가 궁극적으로 향하는 질문은 하나다. 과연 콘솔 게임을 새로운 형식의 대중매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콘솔 게임이 고정된 거실에서 벗어나 개인의 일상 어디에나 스며들 수 있게 된 변화는 단순한 기술적 개선이 아니라 매체적 존재 방식의 근본적 전환을 의미한다. 과거 콘솔 게임이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장소에서 하는 특별한 활동"이었다면, 이제는 "언제 어디서나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일상적 매체"로 변모했다. 이는 20세기 대중매체들이 거쳐온 전형적인 진화 경로와 정확히 일치한다. 라디오가 거실의 대형 가구에서 휴대용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TV가 가족 중심의 고정 기기에서 개인화된 시청 도구로 발전한 것과 같은 궤적이다. 하이데거의 용재성 개념으로 분석할 때, 현대 콘솔의 가장 중요한 성취는 기술적 복잡성을 점차 보이지 않도록 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술은 배경으로 물러나고 순수한 게임 경험만이 전면에 나서는 것이다. 동시에 어리의 모빌리티 이론은 이런 투명성이 어떻게 현대인의 복합적 일상과 조화를 이루는지를 보여준다. 콘솔은 "이동하는 기계"와 "체류하는 기계"의 이중적 특성을 완벽하게 구현하면서, 사용자의 다섯 가지 모빌리티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킨다. 신체적 이동과 함께 이동하고, 디지털 콘텐츠를 전송하며, 가상 세계로의 상상적 여행을 제공하고, 실시간 소통을 가능하게 하며, 지속적인 메시지 교환을 지원한다. 이런 모빌리티의 구현은 콘솔 게임을 단순한 오락 도구에서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익숙하게 등장하는 매체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욱 주목할 점은 콘솔 게임이 글로벌하면서도 동시에 로컬한 특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같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전세계에서 사용되지만, 각 지역의 문화적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사용 패턴과 사회적 의미를 생성한다. 이는 주로 서구에서 개발되어 전세계로 일방향적으로 확산되던 기존의 대중매체 패턴과는 다른 양상이다. 하지만 이런 매체적 진화에도 불구하고, 콘솔 게임이 진정한 '대중' 매체라고 단언하기에는 여전히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구조적이고 지속적인 문제는 경제적 진입장벽이다. 콘솔 기기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구매해야 하는 경제적 부담은 콘솔 유저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현실이다. 최근 도입된 닌텐도 스위치 2의 '나눔 통신', 플레이스테이션의 '셰어 플레이', Xbox의 '홈 공유' 등은 분명히 혁신적인 시도다. 이런 기능들은 게임 소프트웨어의 공유를 통해 경제적 부담을 일정 정도 완화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내재되어 있다. 콘솔 산업의 비즈니스 모델 자체가 하드웨어 판매량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기기 자체의 개별 소유는 여전히 필수적이다. 결국 '나눔'이 가능한 것은 소프트웨어에 국한되며, 하드웨어라는 물리적 기반은 여전히 개별적 구매를 요구한다. 이런 경제적 구조는 콘솔 게임을 "특별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의 전유물"로 만드는 근본적 요인으로 여전히 작용한다. 아무리 기술적으로 접근성이 향상되고 사회적 기능이 확장되어도, 수십만원에 달하는 초기 투자 비용은 상당한 계층을 배제한다. 이는 라디오나 TV가 점차 가격이 하락하면서 진정한 대중화를 이룬 것과는 대조적이다. 또한 콘솔 게임이 갖는 고유한 매체적 특성 자체도 대중매체로서의 보편성에 제약을 가한다. 콘솔 게임은 본질적으로 능동적 참여를 요구하는 매체다. TV나 라디오처럼 수동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매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을 갖는다. 이는 한편으로는 상호작용성이라는 고유한 가치를 제공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참여를 위한 학습 비용과 시간 투자를 요구한다. 이러한 비용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높은 진입장벽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더욱이 게임에 대한 사회적 편견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기성세대나 특정 문화권에서는 게임을 여전히 시간 낭비나 유해한 활동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인식적 장벽은 기술적 발전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화적 차원의 문제다. 그렇다면 이런 한계들이 콘솔 게임의 매체적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이런 한계들은 콘솔 게임이 갖는 독특한 매체적 특성을 보여주는 지표로 이해해야 한다. 책이 영화와 다르고, 영화가 TV와 다르듯, 콘솔 게임도 기존 매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중과 관계를 맺는다. 각 매체는 고유한 진입장벽과 특성을 가지면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결국 콘솔 게임이 대중매체인가 하는 질문은 현재 시점에서 대답하자면, 그렇다, 아니다, 단정지어 말하기 어렵다. 이는 단순히 기술적 기능이나 시장 점유율의 문제가 아니라, 게임이 우리 사회에서 수행하는 복합적 역할과 사람들이 게임을 통해 연결되고 소통하는 방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콘솔 게임은 현재 대중매체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매체라고 규정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현재로서는 콘솔 게임을 "경계에 선 매체"라는 독특한 위치를 점하는 존재로 이해하는 것은 어떨까? Tags: 콘솔, 스팀덱, PSP, 미디어, 하드웨어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디어콘텐츠연구자) 이미몽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닌텐도 게임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몇 개월 전 스팀덱을 할부로 구매하여 열심히 즐기고 있습니다. 경희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선 문화매개를 전공했고, 현재는 일본의 리츠메이칸 대학교 첨단종합학술연구과 박사과정에 재학중 입니다. 게임과 웹툰 등 디지털 미디어 콘텐츠와 문화를 연구합니다.
- 합리적 트릭스터: 플레이어와 설계자 사이의 숙련화 게임
게임에 몰입한 플레이어에게 수지타산이나 합리성만큼 낯선 단어는 없을 것이다. 게임 플레이야말로 가장 비합리적인 행위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유용한 생산물을 안겨주지 않는다. 수많은 게이머들이 주변으로부터 ‘공부를 그렇게 했어봐라’ 는 말을 듣는 이유는 게임이 기본적으로 인생에서 효율적인 시간에 해당하지 않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인간의 노동은 삶의 여러 토대를 제공하지만, 게임은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일지언정 물질적인 도움을 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 Back 합리적 트릭스터: 플레이어와 설계자 사이의 숙련화 게임 18 GG Vol. 24. 6. 10. 게임에 몰입한 플레이어에게 수지타산이나 합리성만큼 낯선 단어는 없을 것이다. 게임 플레이야말로 가장 비합리적인 행위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유용한 생산물을 안겨주지 않는다. 수많은 게이머들이 주변으로부터 ‘공부를 그렇게 했어봐라’ 는 말을 듣는 이유는 게임이 기본적으로 인생에서 효율적인 시간에 해당하지 않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인간의 노동은 삶의 여러 토대를 제공하지만, 게임은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일지언정 물질적인 도움을 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인간의 다양한 행위 중에서도 가장 합목적적인 행위이면서 동시에 가장 비합리적인 행위가 곧 게임 플레이인 것이다. 열역학 법칙으로 보면, 게임은 엔트로피가 가장 높은 부문에 해당한다. 이처럼 모순적인 게임플레이의 위상은 ‘어떤 게임을 설계할 것인가’의 문제로도 이어진다. 예컨대 자동차를 만들 때 설계자는 물리학적 효율성에 온 힘을 기울이면 된다. 에너지 효율, 내구성 등이 우선이고 감성의 영역인 디자인은 그 다음에 온다. 그런데 게임의 설계자들은 이 둘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게이밍에서 절대적 효율성, 절대적 감성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두 행성 간의 중력이 균형을 이루는 라그랑주점을 포착하듯 플레이어와 설계자 사이에서는 치열한 두뇌 게임이 펼쳐지고, ‘설계적 효율성’ 과 ‘플레이의 효율성’은 복잡계의 영역으로 간다. 게임은 기본적으로 고도 노동 집약적인 산업과 밀접해 있기 때문에 특히 트리플A 게임은 이 라그랑주점을 찾는 노하우를 생산의 표준으로 만들고자 한다. 반면 플레이어들은 이 안정적인 균형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점으로부터 벗어나 예상치 못한 궤도를 탐험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영화나 방송 산업이 장르 문법이나 컨벤션을 활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게임플레이 자체가 이중적이고 모순적이기 때문에, 플레이어도 설계자도 틀에 박힌 수학적 질서도를 사랑하는 동시에 그것을 한편으로는 혐오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같은 플레이어와 설계자 사이의 긴장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최근 위기를 겪고 있는 유비소프트와 엔씨소프트의 게임들이다. <어쌔씬 크리드> 시리즈로 유명한 유비소프트는 ‘유비식 오픈월드’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글로벌 퍼블리셔다. 유비소프트에서 제작한 대다수의 게임들은 아주 비슷한 플랫포머 구간을 가지고 있는데, 게임 속 메인 진행에 간접적으로만 영향을 미치는 사이드 스토리를 수행하면서 플레이 시간을 늘리고 게이머로 하여금 나머지 공간을 탐색하도록 유도하는 파트다. 화려한 그래픽과 연출, 실감나는 전투 등으로 치장된 메인스토리 진행을 하다 보면 플레이어는 반드시 ‘유비식 오픈월드’를 마주하게 된다. 이 구간은 제작하기 쉽다. 심지어는 자사에서 같은 엔진으로 개발한 다른 게임의 프리셋과 소스, 레벨링 노하우를 가져다 쓸 수도 있다. 유비소프트에 ‘게임 제작의 테일러리즘’이라는 웃지못할 라벨이 붙여진 이유는 이처럼 플레이어들과의 치열한 라그랑주점 찾기를 2순위로 미뤄두고 도입한 개발 프로세스의 균질화가 게임의 매커닉과 플랫폼구간에서 노골적으로 현상되기 때문이다. 이러니 유비식 오픈월드에 익숙한 플레이어들은 플랫포머 구간에 들어서는 순간 한숨을 쉬며 1년차 예비군이 훈련장에 와서 으레 하듯이 뻔하고 관습적인 게임 플레이를 이어나간다. 똑같은 농담, 비슷한 목표와 성취, 하찮은 심부름, 좀 더 원활한 다음 페이즈 진행을 위한 아이템 수집 등…이 때부터 플레이를 지배하는 것은 치열함이 아니라 관성이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관성에 익숙한 존재다. 관성도 플레이의 중요한 요소다. 똑같은 던전에 들어가서 수십 번씩, 땅 짚고 헤엄치듯 한 손으로 클리어해나가는 플레이어들, 스피드런을 즐기는 사람들과 그것을 관음증처럼 지켜보는 게임 ‘시청자’들도 있다. 그러나 글로벌한 네트워크 속에서 게임플레이의 암묵지는 결국 지층처럼 켜켜이 쌓인다. 시간이 지나면서 관성은 악성이 된다는 이야기다. <어쌔씬 크리드> 에서도, <와치독> 에서도, <디비전> 에서도, <고스트리콘>에서도 똑같은 감각으로 비슷한 사이드퀘스트 구간을 헤매다 보면 설계자도 플레이어들도 반발하게 된다. 엔씨소프트의 게임들은 유비소프트와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실패하고 있다. 유비소프트가 개발 층위에서의 테일러리즘을 도입했다가 교착 상태에 빠졌다면, 엔씨소프트는 플레이 층위에서 포드주의를 도입했다가 과소소비라는 파국을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비슷비슷한 사이드퀘스트와 아이템 수집 등으로 이뤄진 유비식 오픈월드는 적당히 플레이하면서 넘기면 된다. 그런데 ‘리니지 라이크’ 게임들은 여기에 비즈니스 모델까지 더했다. 플레이어들을 처음부터 ‘린저씨’로 호명하고, 그들이 게임 설치에 앞서 두둑한 현금부터 준비할 것을 가정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관습적인 플레이가 뭔지를 먼저 끼워넣는 식이다. 패키지 관광객들을 싣고 하루에 수십 군데를 투어하지만, 그 장소들은 모두 협약을 맺은 곳이거나 쇼핑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들이다. 한국의 특성은 이렇게 성공한 한 선구적인 사례들을 후발 주자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카피한다는 데 있다. 이제 우리는 ‘리니지 라이크’의 모든 게임들에서 ‘유비식 오픈월드’와 같은 ‘한국식 과금 구간’을 본다. 심지어는 플레이타임이 어느 정도 되었을 때 현금결제 창이 뜰지도 플레이어들은 예측하게 된다. 엔씨를 포함해 그간 한국 게임사들이 ‘생산한’ 게임들은 이 문법을 따라 포드주의적 자동화까지 도입, 방치형 게임이나 자동사냥으로까지 진화했다. 이 게임들은 게임플레이의 관성과 새로움 사이의 경합, 개발자와 플레이어간의 합리적 두뇌게임을 제거하고 모든 것을 교환의 법칙으로 환원한다. 레벨업도, 좌충우돌도, 글리치도 어뷰징도 없는 세계 – 얼마나 매끄러운가? 그러나 이런 식의 포드주의는 필연적으로 ‘탈숙련화’를 야기한다. 노동의 탈숙련화가 아니라 개발의 탈숙련화, 플레이의 탈숙련화다. 개발자들은 새로운 기술과 엔진을 실험하지 못해 뒤처지고, 플레이어들은 다른 게이밍의 경험을 받아들이지 못해 도태된다. 포드주의가 야기한 문제, ‘탈숙련화’는 자본주의의 역설이자 자동화의 고질병이다. 포드사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어셈블리 라인에 완전 자동화 결합 시스템을 도입했고, 일시적으로 매출은 엄청나게 증대됐다. 대량의 노동자들은 해고되거나 회사를 떠났고, 공장에 남은 사람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자동화 기기 옆에서 빗질이나 허드렛일 따위를 하는 존재가 됐다. 그러나 탈숙련화가 진행되자, 역설적이게도 미국 전체 노동자의 삶이 위기에 빠졌다. 여기엔 두 가지가 있다. 포드 공장에 도입된 모델이 하나의 플랫폼이 되어 다른 제조업 부문에서도 우후죽순 도입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실업 상태가 되거나 비숙련 단순직종으로 이동, 자동화 공장에서 생산된 상품들이 시장에서 판매되지 않고 재고가 증가하는 역설이다. 숙련노동자들이 사라지자 생산 현장에서 공유되던 암묵지 노하우들도 사라졌고, 결국 미국의 완전자동화 산업은 일본의 반자동화 산업에 헤게모니를 내주게 되었다. 포드주의는 야심찬 자동화를 추구했지만 그로 인해 빈부 격차가 커지고, 노동자들의 삶이 불안정해질 뿐 아니라 공산품들의 품질도 떨어지는 결과를 야기했다. 유비나 엔씨의 제국이 조금씩 몰락하는 가운데, 게임 설계자들은 ‘탈숙련화’가 게임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현상임을 이제는 상기해야 한다. 경제적이고 수학적인 효율성은 게이밍에서 다각적으로 다뤄져야 한다. 플레이어는 합리적이면서 동시에 광기어린 사람들이고, 설계자들은 정교한 건축술을 구사하지만 동시에 베토벤의 영감으로 창조하기도 하는 입법자들이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들은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해 글리치를 찾거나, 최단시간 레벨업 경로, 보스 제거에 가장 효율적인 세팅을 찾아내고자 하지만 그 과정 자체는 능동적면서 복잡한 시행착오가 동반되어야 재미를 느낀다. <세키로>나 <다크 소울> 시리즈에 몰입한 사람들은 왜 10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손가락 관절염을 느끼며 한 보스를 붙잡고 소리를 질러댈까? 역사에 문외한인 <문명>의 플레이어는 왜 17세기에 스텔스기를 완성하는 세종대왕과 몇날 며칠 자웅을 겨루는가? 자학적인 성격이어서가 아니라 합리성을 향한 복잡성의 과정, 게이밍의 역학적 질서도와 복잡성이 교차하는‘에르고딕(ergodic)’에 탑승한 승객이어서이다. 그들은 열 시간이고 스무 시간이고 게임패드를 집어 던져가며 가장 어려운 난이도로 보스를 클리어한 다음, 이를 깨기 위해 동원한 다양한 전략과 방법, 세팅, 꼼수까지 자랑스럽게 소셜미디어나 유튜브에 자랑할 것이다. 이렇게 공유되고 축적되는 숙련 비법은 모든 플레이어들에 의해 재즈 스탠다드 음악 연주처럼 변주될 것이고, 개발자들도 이를 참고할 것이다. ‘숙련화’ 된 플레이어와 개발자들에 의해 긍정적 피드백(positive feedback) 루프가 완성된다. 게이밍이 훨씬 다양하고, 복잡하고, 기발한 방식으로 플레이어와 개발자 모두를 놀라게 하며 희열에 차게 만들고, 새로운 매커닉과 창의적인 구조가 만들어진다. 탈숙련화가 아니라 숙련화, 소외가 아니라 주체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유비식 플랫포머 승객’ 이나 ‘린저씨’들과 그들을 고객으로만 호명하는 개발사들에는 그런 피드백 루프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유비소프트와 엔씨 및 이들의 ‘탈숙련화’ 모델을 참조로 하는 모든 게임개발사들은 비즈니스 모델이나 제작효율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숙련된 플레이어들로부터 숙련된 플레이를 확보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잘 활성화된 게임은 당연히 <마인크래프트>다. 플레이어가 설계자가 되고, 설계자가 자신이 창조한 게임을 플레이한다. 노하우는 오픈소스 환경에서, 커뮤니티에서 공유될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전문가집단과 협업을 하거나 공동 프로젝트까지 한다. 숙련화된 설계자와 플레이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들은 모두가 ‘합리적 트릭스터’ 다. 우리는 합리적 트릭스터들이 최근 열광하는 숙련화 게임의 두 가능성을 주목해야 한다. 첫째로는 <스텔라 블레이드> 같은 게임이 전통적인 게임 서사와 미장센으로 뉴트로로 돌아오는 방식,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긴 하지만 생성AI를 활용한 게이밍의 등장이다. 이 두 시나리오 모두 테일러리즘이나 포드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산업 부문에서나 게이밍에서나 완전히 화려하게 자동화된 기술진보가 아니라 결국 합리적 효율성과 주체적 효능감 사이를 횡단하는 사람들, ‘합리적 트릭스터’들이 길을 여는 것을 본다. ‘트릭스터’의 감각을 상실한 게임의 설계자와 플레이어들은 더 이상 체스를 두지 못한다. 트릭스터는 질서를 가장한 혼돈을 창출하기 좋아하는 악당이고, 꾀를 내어 난제들을 교묘히 해결하는 것을 좋아하는 현자다. 게이밍은 수많은 트릭스터들이 머리를 맞대고 누가 누구를 어떻게 속일까, 황금율을 어떻게 파괴할까 고민하면서 자신들만의 라그랑주점을 찾아나가는 장이다. 문학이나 시네마에서는 이런 것들이 기만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 시네마의 관객은 종종 맥거핀을 찾아내고 실망하거나 핍진하지 못한 연출에 화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게이밍에서 좋은 설계자들은 재미를 만들어내기 위해 플레이어들을 어떻게 기만할지를 숙고한다. 플레이어들은 설계자의 주권을 깨트리는데서 희열을 느낀다. 게이밍은 플레이어와 설계자 사이의 탈숙련화 게임이 아닌 숙련화 게임을 통해 더 풍요로워지는 것이 아닐까? 확실히, 8비트 게임의 등장 이후 수십 년간 축적된 게이밍 경험은 유비식 오픈월드나 한국형 과금 게임에 종언을 고하고 있다. Tags: 오픈월드, 트릭스터, 포디즘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디지털 문화연구/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신현우 문화연구자, 문화평론가이며 기술비판이론과 미디어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게이밍, 인공지능, 플랫폼, 블록체인을 둘러싼 문화현상을 연구하며 서울과기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한다.
- 온라인게임, 멀티플레이, 그리고 경쟁
한때는 ‘온라인 게임’이 곧 새로운 미래가 될 거라 믿던 시기도 있었다. 코로나19라는 이벤트까지 거친 후 지금 돌아보면 어떤가? 부분적으로 온라인 시스템을 수용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게임은 여전히 오프라인이 중심인 느낌이다. < Back 온라인게임, 멀티플레이, 그리고 경쟁 08 GG Vol. 22. 10. 10. 한때는 ‘온라인 게임’이 곧 새로운 미래가 될 거라 믿던 시기도 있었다. 코로나19라는 이벤트까지 거친 후 지금 돌아보면 어떤가? 부분적으로 온라인 시스템을 수용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게임은 여전히 오프라인이 중심인 느낌이다. 우리는 온라인에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첫째는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감각이다. ‘경쟁’을 유도하는 게임 시스템이라면 인간을 상대로 하는 편이 가장 재미있다. AI와 경쟁하는 것은 아무래도 흥미가 떨어진다. 가정용 게임기가 ‘2인용’ 컨트롤러를 동반해 등장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온라인을 활용한 FPS나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등도 이러한 맥락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경쟁’만이 이런 감각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협력해 공통의 과제를 달성하는 것 또한 게임을 ‘함께’하는 일의 묘미다. 온라인을 활용한 게임 자체는 PC통신 시대에 이미 등장했는데, 이른바 MUD(Multi User Dungeon) 게임이 그것이다. 오늘날에는 전세계 이용자들과 함께 목적을 달성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MMORPG들이 이 명맥을 잇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여러 사람이 공통의 과제를 해결한다는 사실 자체가 만들어내는 맥락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게 우리가 온라인 게임에 거는 두 번째 기대, 일상과는 분리된 또다른 공동체에 대한 감각을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이 하나의 공통 과제를 달성하려면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협력을 할 수 없는 상대와는 필연적으로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교류하고 협상하며 손을 잡았다가 다시 놓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 하나의 ‘사회’가 성립되고 작동하는 과정이 게임 내에서 재현되는 것이다. 게임 사회가 현실 사회와 분리돼있으므로, 이 안에서의 ‘나’ 역시 현실 사회와 분리돼있다. 따라서 ‘나’는 게임 안의 ‘아바타’에 대안적 자기상을 투영한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현실 사회에 대한 감각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게임 내 사회를 대한다. 따라서 게임과 현실은 형식상 분리돼있으나 내용적으로는 유사성을 가진다. 혹시 그렇지 않은 상태라 하더라도 ‘나’는 게임 내에서 ‘대안적 나’로 존재하기 위해 게임 내 법칙이 어느 정도 현실을 따르기를 희망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현실의 나’는 게임 시스템과 상호 교류하며 긴장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온라인 게임을 하면서 게임 내 세상이 현실처럼 부조리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게임 내의 현실 모사가 마치 ‘성경공부’ 같을 필요까지는 없다. 정확히 말하면 현실의 부조리는 게임 시스템에 어느 정도 실감이 날 만큼만 반영되어야 한다. 이용자가 감당할 수 없는 부조리조차 현실과의 유사성이라는 명목으로 게임에 재현되면 ‘대안적 나’를 게임 내에서 추구할 방법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온라인 게임의 이용자인 우리는 현실의 무엇에 대한 재현까지 용납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방식을 보면 이게 드러난다. 초창기 MMORPG의 설계자들은 게임 내 사회가 하나의 거대한 종합격투기 링처럼 여겨지기 보다는 대안적 사회로서 소비되기를 바랐다. 울티마 온라인이나 에버퀘스트와 같은 사례를 보면 그렇다. 초기 울티마 온라인의 경우 최대 7개의 부문 스킬에 대해서만 ‘그랜드 마스터’ 자격을 가질 수 있었다. ‘채광’, ‘낚시’, ‘벌목’과 같은 생산 기술부터 ‘검술’, ‘궁술’ 등의 전투 기술에 이르기까지, 전체 스킬의 종류는 50가지에 달한다. 이용자 입장에선 이 중 자기 캐릭터 컨셉에 맞는 스킬 7개 스킬만을 선택해야 하는 거다. 레벨을 올리면 ‘아바타’를 한도 끝도 없이 강화할 수 있는 현대 게임 디자인과는 다른 형태다. 지금의 기준으로 생각해 본다면 다른 사람과의 협동을 장려하고 레벨 올리고 사냥하는 것 외의 활동을 유도하는 것인데, 이용자는 결과적으로 ‘사회 구성원’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감당하게 된다. 과거 MMORPG 이용자들이 자기 경험담을 연재의 형식으로 올린 글이 인기를 얻었던 것도 이런 특성이 작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초창기 MMORPG의 형태는 어느새 우리에게 익숙한 경쟁 위주, 즉 자기 캐릭터를 강화하고 여기에 맞춘 컨텐츠를 소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형태로 변화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울티마 온라인류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이용자의 시스템에 대한 기대를 반영한 것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기대’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노력’에 상응한 ‘보상’이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노력’의 결과가 수치화 되어 정확히 측정되어야 한다. 즉, 온라인 게임 일부의 이러한 변화는 ‘현실의 자신’이 사회에 바라는 법칙이 게임 시스템 내에서도 작동하기를 바란 결과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대의 반영이 ‘게임의 재미’에 미친 영향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오늘날 게임을 대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태도는 ‘노력’과 ‘보상’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는 듯 느껴질 때가 많다. 어느 시점까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보상을 달성할 수 있는지를 알아 내야 남보다 빨리 ‘강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효율성’의 추구가 ‘재미’의 대부분을 뒤덮어버린 듯 보일 때가 많다는 것이다. ‘스타크래프트 최강 종족’에 관련한 밈은 이러한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테란, 프로토스, 저그 중 최강의 종족은 무엇인가 하는 논쟁은 긴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게 뭐든 제4의 종족, Korean이 최강이라는 결론에 이견이 없었던 때가 있었다. 이것은 한국인들이 스스로 ‘민속놀이’라고 말할 정도로 한국 내 스타크래프트 이용자 숫자가 많았던 때문이다. ‘고수’가 등장할 확률은 어느 나라든 낮지만 모수가 크면 절대적 숫자는 늘어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사회 전반과 제도에 대한 불신이 큰 한국 사회의 현실이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도 가능하지 않을까? 개발자가 유도한대로 정해진 시스템에 맞춰 플레이하는 게 아니라 규칙의 허점을 찾아내고 적극적으로 이를 활용하면서 경쟁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키는 방식에 한국인들이 특히 익숙했던 것 아니냐는 추론이다. 우리는 이미 스타크래프트 뿐만이 아닌 뉴스에서도 법제도를 교묘하게 악용한 사기꾼의 사례나 입시 제도를 둘러싼 논란 등에서 비슷한 예들을 마주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공적인 틀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확인된다. 한국이 각자도생의 ‘저신뢰 사회’라는 사실은 OECD의 설문조사나 해외 연구기관의 통계, 프랜시스 후쿠야마라는 학자의 주장 등을 통해 상당 부분 뒷받침 되고 있다. 비교적 최근인 2019년 영국의 싱크탱크 레가툼연구소가 발표한 ‘2019 레가툼 번영지수’를 보면 한국은 사회자본 부문에서 전체 167개국 중 142위를 기록했다. 간단한 검색만으로도 이런 근거는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나마 ‘경쟁’을 중심으로 하는 게임 장르에선 이러한 각자도생의 본능이 ‘재미’를 크게 훼손하지는 않을 수 있다. 정신적 피로를 안기는 ‘채팅’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러나 앞서 짚었듯 우리가 온라인 게임에 거는 기대가 현실의 부조리까지 전부 재현하는 건 아니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용자가 거의 모든 게임을 대하면서 나타나는 ‘효율성 추구’는 ‘경쟁’이 중심이 되지 않는 게임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재미의 폭을 제한하는 결과가 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런 종류의 게임에서는 ‘효율성 추구’가 게임과 현실의 벽을 무너뜨리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도 스펙 쌓기로 피곤한데 게임에서까지 그래야 하는가? 문제는,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온라인 게임의 특성상 뭘 만들어도 여기서 벗어나기는 어려워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각자도생의 현실 사회도 많은 사람들의 욕망이 이리 저리 조율돼 반영된 결과이다. 바로 그 사람들을 가상현실이라는 다른 시스템 안에 넣어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는 거다. 그렇다면, 경쟁을 위해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시스템의 반대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게임일까? 앞서 언급한대로 ‘대안적 나’를 추구할 수 있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경험을 가질 수 있는 게임이다. 남들과 경쟁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는 게임의 형식은 어떻게 가능할까? 오늘날 이 모델에 가장 가까워 보이는 게 ‘온라인 없는 오픈월드’이다. ‘오픈월드’의 핵심은 그것 자체가 현실과 분리된 또 다른 현실세계의 정밀한 모사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오픈월드’라면 그 안에서 다른 외부의 개입 없이도 이용자가 하고자 하는 모든 행위를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최대한도로 구현하기 위해 유명 오픈월드 게임들은 사실적 그래픽으로 넓은 세계를 묘사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물론 이런 것들은 외적 표현에 불과하다. 문제는 내용이다. 온라인 게임이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접속해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매일 새로운 사건과 드라마가 창출된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가 없는 오프라인 오픈월드는 어떻게 ‘사회’일 수 있는가? 수많은 ‘퀘스트’가 등장하는 식의 구성이 ‘오픈월드’의 필수가 된 건 이런 이유다.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출력할 수 있다면 그것 자체를 인공지능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튜링 머신의 아이디어와 유사한 결론이다. 이용자가 예측할 수 없고 언제나 새롭게 느낄 만큼의 수많은 사건이 등장한다면 그것은 ‘대안적 현실’과 구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는 이게 ‘오픈월드’의 한계를 규정짓는 요소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퀘스트’는 어디까지나 ‘퀘스트’일 뿐이다. 게임 내 사건이 더 이상 ‘사건’일 수 없다면, ‘오픈월드’가 ‘현실 사회’의 모사처럼 보일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런 점에서 역사적 인물, 사건 등 배경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또 하나의 타개책이 될 수 있다. 이를테면 ‘어쌔신 크리드 오딧세이’에서 우리는 결코 요구하는 바를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질문’의 방식으로 돌려 표현하는 소크라테스에게 ‘퀘스트’를 수주하면서 현실의 역사에 속해있다는 감각을 갖게 되고, 이것이 게임 내에서 ’사회’의 존재를 체감하는 또 하나의 요소로 작용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굳이 그 시대의 최강자가 되기 위한 최단 경로를 밟는 것에 몰두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중요한 어떤 인물이 되어 보면 되는 것이다. 물론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이런 저런 설정은 완전한 역사적 인물로의 몰입에 방해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어쌔신 크리드’가 그리는 세계에 완전히 녹아들기 위해서는 역사와 현실을 넘나드는 초현실적 액자 구성을 받아들여야 하고 외계인인지 뭔지 알 수 없는 고대인들의 사회를 둘러싼 갖가지 설정을 이해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어쌔신 크리드’는 이상적인 ‘오픈월드’를 구현하는데 전적인 노력을 쏟은 게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쨌든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현실과의 접점을 찾는 것으로 ‘오픈월드’의 ‘구멍’을 메꾸는 시도는 ‘효율성 추구’의 함정으로부터 게임을 구원하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다. 아예 이 대목에만 집중한 게임도 있다. ‘대항해시대’를 비롯해 역사 시뮬레이션 시리즈로 유명한 코에이의 ‘태합입지전’ 시리즈는 이런 경향을 잘 보여준 사례로 들 수 있다. 18년만에 리마스터 된 5편의 경우 장엄한 자연 환경의 묘사나 월드맵의 끝없는 물음표 같은 것은 없다. 이 게임은 철저하게 그림과 숫자로만 이뤄져있다. 그럼에도 게이머는 일본 전국시대를 살아가는 인물이 되어 주체적으로 역사에 개입하는 경험을 느낄 수 있다.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죽기 전에 아케치 미쓰히데를 제거한다든가, 그 전에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꾀하는 등의 대안역사적 시도를 해볼 수 있는데, 아예 이런 정치적 문제와는 관계가 없는 소시민으로서의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 미니게임으로 현실의 복잡한 문제를 상징화 해 대체한 시도는 따로 주제를 잡아 다뤄볼만한 기법이다. 이제 다시 애초의 문제의식으로 돌아와보자. ‘역사’를 설정으로 삼는 ‘오픈월드’를 통해 가상 사회와 현실의 접점을 만들고 그 안에서 대안적 시도를 허용하는 게임 디자인이 가능하다면, ‘현재’나 ‘미래’를 근거로 한 것도 동일한 효과를 거두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디스토피아를 소재로 한 ‘오픈월드’ 게임의 존재는 이 가능성을 시사한다.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에서, 혹은 각자도생의 현실에서 정말로 이용자가 원하는 삶은 무엇인지를 묻고, 모두에게 득이 되는 선택을 스스로 고안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면, 그게 ‘게임적 재미’로서 의미를 갖게 될 수 있다면, 그리고 게임을 만드는 이들이 그러한 과업에 지속적으로 도전할 수 있다면, 게임은 비로소 현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온라인 게임’의 어떤 이상이 기계적 효율성 추구의 굴레에서 벗어나 ‘오프라인’에서도 의미를 갖게 되는 가장 직선적이면서 또한 가장 어려운 방법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시사평론가) 김민하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시사평론가로 활동하지만 게임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게이머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냉소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돼지의 왕』이 있고,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우파의 불만』, 『트위터, 그 140자 평등주의』 등의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최근작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가 있다.
- 농사 게임은 왜 힐링이 되었는가: 픽셀 농사와 진짜 밭 사이에서
평화로운 게임과 다르게, 현실은 훨씬 가혹했다. 노루망을 치지 않아서 상추 밭은 송두리째 사라져버렸다. 현실에서는 야생동물, 폭염, 장마, 해충 등 통제 불가능한 변수가 언제든 침입한다. 각종 병충해도 단 몇 주 사이에 농사를 완전히 무너뜨린다. 너무 덥거나 습하면 작물이 빠르게 상하고, 한 번의 폭우로 뿌리가 썩어버리기도 한다. 농부는 이러한 피해 요소들을 ‘기본값’으로 가정하고, 당연한듯이 울타리와 농약, 비료, 배수로 등 가능한 모든 대비책을 동원하여 농사를 유지하는 자세가 필수적이다. < Back 27 GG Vol. 25. 1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Leesun Park Studies games from a social perspective. Believes that games, as a tool, ultimately offer a way to explore what it means to be human. These days, mainly writing.
- QUOVADIS, 게임법 - 국회 안에서 바라본 게임법 진행의 경과와 미래
물론 전부개정안의 모든 내용이 정답이라는 것은 아니다. 발의하고 보니 보완해야할 부분들도 여럿 보였다. 특히 국내대리인지정제도는 더욱 강화해서 발의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부개정안에 빠져 있거나 부족한 부분들은 심사 과정에서 더 나은 방향으로 수정될 것이다. 또한 다른 게임법 일부개정안과도 병합심사되어 더 좋은 내용으로 고쳐질 것이다. 이를테면 확률형 아이템에 대해서는 컴플리트 가챠 규제 법안이나 이용자 권익보호위원회 규정 법안과 함께 병합심사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느릴지언정 멈추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꾸준히 내딛고 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국민의 꾸준한 관심은 국회를 일하게 한다. < Back 01 GG Vol. 21. 6.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DoKyung Lee My proudest achievement is having proposed and passed more game-related bills than anyone in the history of the National Assembly. But an even greater source of pride is landing the server-first kill on Lich King hard mode in WoW, and having played the shaman in RoMg, the famous Chaos clan...
- 누가 미국을 묻는다면 패드를 들어 GTA를 플레이하게 하라
이토록 GTA는 찬사와 공격, 열광과 거부를 동시에 받아왔다. 한편에서는 미국 사회를 가장 정확하게 묘사한 문화적 기록물로 평가받고,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도덕·질서에 대한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공격받았던 것이다. 2기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통치가 점입가경으로 치닫는 지금, 미국이라는 지리적, 문화적 배경 속에서 범죄에 대한 이야기를 쉬지 않고 꺼내온 GTA 시리즈가 지니는 의미는 남다르다 할 수 있겠다. < Back 28 GG Vol. 26. 2. 10. Tags: 락스타, GTA, 미국, 범죄, 느와르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aeseok Kim Worked for eight years as a reporter at ThisIsGame. Now handles external relations at a subculture startup. Loves editors and the power of cheat codes.
- 불투명한 인터페이스: 연결과 차단 사이
그렇다면 플레이어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도록 디자인된 ‘작동이 되지 않는’ 인터페이스는 그저 배경으로 남는 것일까? 이 질문에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게임 인터페이스의 분류 방법을 경유할 필요가 있다. < Back 22 GG Vol. 25.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Wombat A freelancer who does odd jobs of all kinds. Interested, fittingly, in all kinds of odds and ends. With games, the interest runs especially deep.
- 22대 국회의원선거 공약이 말하는 대한민국과 디지털게임
민주주의 국가의 운영은 행정부만큼이나 입법부도 중요하다. 입법부를 구성하는 선거가, 쓰는 입장에서는 한창 진행중이고 읽는 입장에서는 투표 직전이거나 끝났을 것이다. 그리고 게임 또한 문화이자 산업으로서, 정치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비단 단속이나 규제의 의미만이 아니고 진흥과 지원의 의미로도 그렇다. 그리하여 윤석열 대통령의 게임 공약을 분석했던 시도에 이어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등장한 게임 관련 공약을 살펴본다. < Back 22대 국회의원선거 공약이 말하는 대한민국과 디지털게임 17 GG Vol. 24. 4. 10. 민주주의 국가의 운영은 행정부만큼이나 입법부도 중요하다. 입법부를 구성하는 선거가, 쓰는 입장에서는 한창 진행중이고 읽는 입장에서는 투표 직전이거나 끝났을 것이다. 그리고 게임 또한 문화이자 산업으로서, 정치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비단 단속이나 규제의 의미만이 아니고 진흥과 지원의 의미로도 그렇다. 그리하여 윤석열 대통령의 게임 공약을 분석했던 시도에 이어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등장한 게임 관련 공약을 살펴본다. 하지만 현재의 정국은 윤석열 행정부에 대한 중간 판단이라는 중대한 이슈가 중심에 있다. 영부인과 그 가족의 비위 의혹, 헌정사상 최초의 R&D 예산 대폭 삭감, 각종 복지와 지원 사업의 축소, 생활 물가 급속 상승 등의 다양한 문제가 의제로 올라오고 있으니 게임이 중요한 정책 공약의 대상이 되기가 힘들다. 그래서인지 거대 양당 외의 정당에서는 정당 정책으로 제시된 게임 공약이 없다. 기껏해야 개혁신당이 스포츠토토의 종목에 e스포츠를 넣겠다는 정도다. 이 말을 뒤집으면, 즉, 거대 양당은 게임 정책을 중앙당 공약에 끼워넣었다. 그리고 그 정책 공약은 e스포츠의 산업적 측면에 치중돼 있다. 여당, 국민의힘 국민의힘은 중앙당 공약과 지역당 공약 모두에 게임을 언급하고 있다. 방향성도 구체적이다. 가장 앞에 있는 것은 게이머의 공정한 게임 경험이다. 핵 사용자에 대한 처벌을 실효적으로 제정하겠다 하는데 어떤 법을 개정할 생각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구체적인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게이머의 경험에 공정 담론을 합한 첫 번째 초점은 국민의힘이 몇 년째 주력하는 담론의 적용이고, 다음은 e스포츠다. * 국민의힘의 ‘제22대 국회의원선거 중앙 공약집’ 중에서. 글로벌 대회의 국내 개최라거나 지역 균형 발전 같은 내용은 정상적인 정치 세력이라면 내세우는 내용인데다 추상적이니 일단은 넘어가자. 제도권 교육을 통해 게임과 e스포츠의 전문 인력을 양성한다는 내용은 구체적 내용은 없으나 국가 자격증 신설로도 읽힐 수 있는 내용이다. 어떻든 간에 교육 기관을 만들거나 지정해야 할 것이고, 강사 인력과 커리큘럼 제작이 필요할 것이다. 예산 근거가 되는 법과 주관하는 위원회도 만들어야 한다. 이런 내용이 없으니 중요도가 높은 공약은 아니다. 같은 현상이 지역 공약에서도 일어났다. 부산은 G-STAR의 개최 도시인지라 게임 도시 브랜드를 노리는 지자체인데, 부산 공약에서 게임이 차지하는 비중은 딱 한 문장이다. 부산에서 어떤 신산업을 육성할지에 대한 언급에서 윤석열 행정부가 관심을 갖고 있는 블록체인과 원전이 나올 때 함께 나온다. 다소 당황스러운 열거인데, 블록체인은 가상자산 열풍 속에서 투기 상품을 개발하는 기술에 갇혀있는 상태고, 원전은 글로벌 스탠다드에서 탄소 감축 방안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논란이 상당한 분야다. 게임이 ICT 산업 분야라는 이유로 이런 애매한 분야와 함께 묶이고 있다. * 국민의힘의 ‘제22대 국회의원선거 시도 공약집’ 중에서. 야당, 더불어민주당 더불어민주당의 시각도 산업 위주이고 e스포츠 위주이긴 하지만, 분류가 약간 다르다. 콘텐츠 산업의 성장 유지를 위한 정책에서는 음악 공연 등의 행사 산업에 세액 공제를 신설하겠다고 하는데, 여기에 e스포츠 대회 운영도 들어 있다. 그리고 이 공약은 다른 정책과 연결이 된다. 더불어민주당의 부산 지역 공약이다. 부산을 e스포츠 성지로 만들기 위해 국제대회 유치 같은 내용은 여당과 동일하지만 세액 공제와 연계되므로 조금 더 구체화된다. 또한 일시적 이벤트인 대회만이 아니라 기관과 관광 스팟을 만들 생각이다. e스포츠진흥재단 설립이라는 아이디어는 지원 창구를 일원화 최소한 체계화하겠다는 말이다. 여기에 레전드 선수 기념관 및 박물관, 즉 e스포츠 명예의 전당을 건립한다. e스포츠에게 역사의 권위를 주겠다는 구체적 발상이고, 장소 또한 윤곽을 제시했다. 부산 서부권이다. 이런 내용이 콘텐츠 산업과 관광 산업의 분류에 들어가 있으니, ICT 산업으로 바라보는 여당의 시각과는 약간 맥락이 다르다. * ‘제22대 총선 더불어민주당 온라인 정책공약집’ 중에서. 이 공약은 더불어민주당의 지역구 출마자의 공약이 중앙당 공약으로 들어온 경우다. 그 후보는 부산 사하구 을의 이재성 후보다. 부산 사하을 더불어민주당 이재성 이번 선거 2호 영입인재인 이재성 후보는 넷마블 이사와 NC소프트 전무를 거친 게임 기업인 속성을 갖고 있다. 특히 2009년, G-STAR가 벡스코로 이전할 당시의 게임산업협회 운영위원장이기도 했다. 당시의 이전 이유 중 하나는 e스포츠 경기의 기적적 성공인 2004년의 소위 ‘광안리 대첩’이었는데, 이재성 후보는 그 명맥이 끊겼음을 아쉬워하고 있다. 그래서 중앙당 공약에는 국제대회 유치라고만 적혀 있던 것이 후보의 공약에서는 다대포 해수욕장이라는 구체적 장소로 바뀐다. 이 공약은 다른 언론에서는 다대동을 아예 e스포츠 테마 시티로 조성한다는 단계로 발전하기도 한다. 또한 진흥재단 아이디어에 더하여 후보는 e스포츠 기술, 아마도 행정 메커니즘을 연구하는 연구소도 설립하겠다고 한다. 명예의 전당 공약과 세제 지원 공약도 있으니 중앙당의 e스포츠 공약을 디자인한 주체가 이재성 후보와 그 캠프임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이상의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서 입법 노동자인 국회의원이 할 일은 당연히 입법인데, ‘e스포츠 진흥에 관한 법률’을 개정할 것이라 한다. 전면 개정이라고 표현했으니 이미 밑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의미다. 반면 이렇게 밑그림과 구체적인 요소를 상정하고 있는 후보는 별로 없다. 이재성 후보와 비견될 후보는 서울 동작구 갑의 새로운미래 전병헌 후보다. 서울 동작갑 새로운미래 전병헌 3선 의원이자 청와대 정무수석이었던 전병헌 후보는 과거 KESPA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하지만 회장직 수행 중에 롯데홈쇼핑으로부터 후원금을 받는 과정이 석연치 않았고, 뇌물로 보이는 상품권을 가족 전체가 받았으며, 해외 출장비 횡령 혐의도 있는 등 복잡하고 커다란 비위 사실로 기소되었다. 판결은 일부만 유죄였지만, 그 일부로도 굉장히 무거운 형을 받았다. 뇌물 수수로 벌금 2천만 원,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업무상 횡령으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피선거권을 잃었고, 2022년 윤석열 대통령의 사면으로 피선거권이 회복되어 이번 선거에 출마했다. 후보 본인은 자신의 전과에 대해 많은 억울함이 있다고 말하고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해도, 일단 중형이 내려진 것은 사실이며, 게임계를 대변하는 대표 아이콘으로 통했던 그의 정치 커리어가 끝난 것도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반면 그런 약점과는 별개로, 과거 아이콘이었던 전병헌 후보의 게임 공약은 실하다. 후보가 제시하는 공략 시장은 중국과 신남방 국가인데, 이는 지난 문재인 정권에서 아세안 정상 회의를 서울에서 열어 한-아세안 정상 회의의 형태로 만들면서, 신흥 경제 성장국들인 동남아시아로의 진출을 모색했던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전략을 세우고 진출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제도와 정책을 개발하는 용도로 e스포츠 연구기관을 설립해 씽크탱크로 사용한다. 이 부분은 이재성 후보와 발상이 같은데, 국제대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공약도 그렇다. 여러 가지 외부 요소까지 염두에 둔 것이 분명한 공약의 끝에는 지역 e스포츠 활성화라는 짤막한 언급도 있다. 현 윤석열 정권의 공약인 지역연고제를 떠올리게 한다. 전병헌 후보는 이렇게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이재성 후보의 그림과는 맥락이 다소 다르다. 어쨌든 이런 구상이 실현된다면 몇몇 지역에는 e스포츠 경기장이 필요해진다. 자기 지역구에 e스포츠센터나 경기장을 건설하는 공약을 한 후보들도 있지만 이재성, 전병헌 후보와 발을 맞추는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다양하지만 납작한 지역 공약 국민의힘으로 경기도 용인시 병 지역구에 출마한 고석 후보는 고등군사법원장을 했던 육군 준장, 즉 판사 장군이다. 현 정권의 공약을 염두에 뒀을 것이 분명한 용인 연고의 e스포츠 구단 창설을 공약했다. 같은 당으로 경기도 수원시 정 지역구의 이수정 후보는 유명한 범죄심리학자인데, e스포츠센터와 특성화 교육기관 설립을 공약했다. 센터에서 정확히 어떤 기능을 기대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교육기관 설립은 국민의힘 중앙당 공약의 내용이다. 센터 건립 공약은 3선 의원인 충주시의 국민의힘 이종배 후보 또한 공약했다. 국민의힘 경기도 평택시 갑의 한무경 후보는 글로벌 게임도시 조성을 공약했는데 추상적이기만 하여 가치 있는 공약이 되지 못했다. 더불어민주당 후보들도 비슷한 공약을 낸 후보들이 있다. 인천의 중구/강화군/옹진군 조택상 후보는 ‘2030 마린스카이 메가시티’라는 거대한 구상을 내놓으면서 생활스포츠타운과 게임복합문화영상 단지 조성을 끼워넣었다. 게임과 영상을 다루는 단지(complex)라고만 하여 전시 기능인지 경기장 기능인지 지원 센터 기능인지 알 수 없는 것은 이수정, 이종배 후보와 마찬가지다. 반면 고석 후보와 똑같이 고등군사법원장으로 육군 준장 예편한 3선 의원의 민홍철 의원은 경상남도 김해시 갑 후보인데, 지역 대학과 연계한 e스포츠 체육관 건립을 공약했다. 일단 체육관이니 경기가 가능하며, 대학과 연계한다는 것은 e스포츠 교육 기관을 인근 대학으로 지정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일정이 없을 때는 그 체육관을 대학의 실습 공간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추상성과 구체성이 동시에 만족된, 괜찮은 공약이다. 그러나 개발의 형태라는 점은 식상하기도 하다. 인천 계양구 을 후보이자 당대표이며 정부와 여당의 십자포화를 견뎌내고 있는 정국의 핵심, 이재명 후보 또한 얼마 전(심지어 원고를 마감한 후에!) 게임 공약을 발표했다. 온라인 커뮤니티 별 민심을 접수해 만들었다는 형식을 한 이 추가 공약들은, 예를 들면 자동차 커뮤니티인 보배드림에서 자동차 관련 정책 제안을 받았다는 식이었다. 게임 공약을 제안한 커뮤니티는 인벤닷컴. 이 공약의 제일 앞에는 게임 중독 근거법 개정이 있다. 통계법 22조를 개정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현재 질병코드 등재를 심사중인 민관협의체가 공회전하고 있는 것이 불안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행정 진행에 관해서는 분석을 한 적이 있다.) 인디게임을 취급하는 공공플랫폼을 활성화하는 것이 두 번째 공약이다. 인디게임의 판매와 제작 지원을 하려면 심사를 해야 하고, 그러자면 기준이 필요하므로 평가지표를 개발해야 하니 이것 또한 공약에 들어와 있다. 불공정한 게임 환경 철폐라는 공약은 얼핏 봐서는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뒷광고 규제라고는 하지만 인터넷 방송인과의 프로모션 콘텐츠까지 영향을 받을 것으로도 읽힌다. 일련의 이 공약들은 민심 청취라는 점에는 긍정적이지만 동시에 커뮤니티의 여론, 거기서도 일부 여론이 게임 정책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는 과대표의 우려도 존재한다. 게임이 산업일 뿐? 누군가는 충실하게, 누군가는 허술하게 게임 공약을 준비했으나 아쉬움이 큰 것은 어쩔 수 없다. 중앙당 공약은 거대 양당에만 그치고 있고, 공약을 낸 모두가 e스포츠, 그것도 산업의 측면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어쩔 수 없는 현실 정치의 속성이다. 당장 이재성 후보나 전병헌 후보가 산업 외 측면의 게임에 대해 어떤 비전을 갖고 있더라도 지역구 후보로 나온 이상은 그 비전을 노출하기가 어렵다. 지역구 국회의원은 중앙 정치인이지만 지역에서 당선되어야 하는, 사소하지만 중대한 모순 때문에 이들은 중앙 입법 공약보다 지역 개발 공약을 먼저 내놓아야만 당선 확률이 높아진다. 따라서 선거 공약에는 개발, 관광, 교육, 수출의 측면만 강조될 수밖에 없고 중앙당의 중앙 공약 또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유권자인 우리는 정치인이 공약으로 내놓는 한두 개의 단어를 보고 그 정치인의 방향성을 엿봐야 하는 어려운 게임을 하고 있다. 광안리 대첩을 재현하려는 이재성 후보나 한국 게임이 동아시아 시장 전체로 진출하는 꿈을 꾸는 전병헌 후보의 산업적 비전은 엿보았고, 노력한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지만 그 이상 혹은 그 외를 기대하는 것은 정말 무리일까.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덕질인) 홍성갑 프리랜서 작가. 이 직업명은 ‘무직’의 동의어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딴지일보에서 기자를 시작하여 국정원 댓글 조작을 최초로 보도했다. 평생 게이머로서 살면서, 2001년에 처음 게임 비평을 썼고 현재 유실된 것을 매우 기뻐하고 있다.




![[인터뷰] e스포츠의 현장감은 어디서 오는가: 라이엇게임즈 함영승 PD](https://static.wixstatic.com/media/d03518_7ad13ecd4c5646e68741a09adbc1bd16~mv2.jpg/v1/fit/w_176,h_124,q_80,usm_0.66_1.00_0.01,blur_3,enc_auto/d03518_7ad13ecd4c5646e68741a09adbc1bd16~mv2.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