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결과
공란으로 1280개 검색됨
- [인터뷰] 플래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퍼포먼스와 그 이후: RIP Flash 팀
많은 사람들이 인생 첫 게임을 ‘플래시 게임’으로 접했고, ‘마시마로’나 ‘졸라맨’ 등 ‘플래시 애니메이션’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는 등 플래시는 2000년대 문화 전반에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플래시 서비스의 종료는 단순히 하나의 소프트웨어가 단종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인 문화의 단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에 R.I.P. 플래시 프로젝트는 플래시의 ‘죽음’을 기리며, 그 문화적 산물을 돌아보고자 하였다. < Back [인터뷰] 플래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퍼포먼스와 그 이후: RIP Flash 팀 05 GG Vol. 22. 4. 10. 게임 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최근에 진행되었던 ‘R.I.P. 플래시 프로젝트’를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https://www.thisisgame.com/webzine/special/nboard/5/?n=127359 ‘디스이즈게임’ 기사 참조) 어도비(Adobe)사의 플래시는 2020년 12월 31일부로 서비스가 종료되었고, R.I.P. 플래시 프로젝트는 이러한 플래시의 흔적들을 기억하고 그 죽음을 추모하려 했던 프로젝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 첫 게임을 ‘플래시 게임’으로 접했고, ‘마시마로’나 ‘졸라맨’ 등 ‘플래시 애니메이션’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는 등 플래시는 2000년대 문화 전반에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플래시 서비스의 종료는 단순히 하나의 소프트웨어가 단종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인 문화의 단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에 R.I.P. 플래시 프로젝트는 플래시의 ‘죽음’을 기리며, 그 문화적 산물을 돌아보고자 하였다. 이러한 R.I.P. 플래시 프로젝트가 지난 2월 말,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텀블벅’에서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종료되었다. 그러나 ‘장례’가 과거에 잠재된 미래를 살피는 행위인 것처럼 이 프로젝트의 의의 역시 과거형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에 이번 호에서 편집장은 R.I.P. 플래시 프로젝트를 기획한 박이선 게임문화연구자와 권태현 미술 큐레이터를 만나 프로젝트에 대한 소회를 묻고, 앞으로의 방향을 듣고자 했다. 편집장 : 오늘 인터뷰에서는 R.I.P. 플래시 프로젝트의 결과와 소회를 여쭙고 싶어요. 스스로 평가를 해보셨을 때, 프로젝트의 성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권태현: 작업을 처음 시작할 때에는 자신감이 높았어요. 시의적절하기도 하고, 나름 글로벌한 반응이 있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시작을 했죠, 그런데 실제로 작업을 진행하면서 스스로 의심하게 되더라고요. 기본적으로 플래시라는 것 자체가 글로벌한 플랫폼이고, 그 쓰임이라는 것도 굉장히 광범위한 거였기 때문에. ‘우리가 너무 거대한 것을 건드린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업은 너무 일부인데, 과대표 되는 방식으로 다루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죠. 박이선: 실제로 처음에 기획을 할 때에는 반응이 되게 좋았거든요. 처음에는 한예종에서 시작했다가, 반응이 좋아서 인천문화재단으로 옮기고, 그다음에는 텀블벅 펀딩으로 마무리를 했는데, 그 과정 내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 줬어요. 그런데 말씀하신 것처럼 연구를 하다 보니까 저희가 소프트웨어의 주체들, 그러니까 플래시를 만들었던 사람들까지 다 다루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플래시를 향유했던 사람들과 그 틀을 이용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담았지만, 정작 어도비나 매크로미디어(Macromedia)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 데 한계가 있었기에 그때는 반쪽짜리 잔치라고도 생각했어요. 권태현: 그런데 결론적으로 원고를 조금씩 취합하고, 편집을 해나가고, 대담을 진행하면서 오히려 이 프로젝트에 대한 확신이 생겼어요. 분명히 우리의 방법론이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학문적 베이스, 우리의 연구 역량으로 가닿을 수 없는 지점들이 있었고, 소프트웨어 생산자에 관한 연구는 기술 문화나 IT 연구하시는 분들이 훨씬 더 잘 정리할 수 있는 분야이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런 연구에서 누락 되기 쉬운 ‘사용자의 목소리’, ‘구술사’, ‘역사가 아닌 계보’를 봐야겠다는 목표를 잡았거든요. 이로써 프로젝트의 정체성이 확실해졌어요. 그래서 ‘플랫폼 스터디스(Platform Studies)’나 혹은 기술적으로 연구하시는 분들이 잘 정리해 놓은 것들이 있지만, 우리의 독창성은 한국이라는 맥락이나 게임이라는 맥락, 미술이라는 맥락과 같이 특정한 맥락 속에서 그것의 위치를 찾아가는 지점에 의미가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박이선: 결과적으로 그런 정체성을 명확히 잡고 프로젝트도 잘 되었어요. 소프트웨어 장례식을 한다는 게 특이하고, 플래시에 대한 감각도 공감이 된다면서 많은 분들이 참여해주셨고, 특히나 텀블벅에서 만났던 분들은 학계나 미술계, 게임계가 아니라 단순히 플래시 게임과 플래시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던 사람들로서 저희를 지지해주셨어요. 게다가 그분들은 저희가 아직 홍보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자기가 속한 커뮤니티에 자발적으로 홍보를 해주셨거든요. 그런 점들이 너무 감사하고, 이런 지지가 저희 책을 만드는 데 힘이 되었어요. 그래서 결과물도 저는 굉장히 만족해요. 책의 구성에서도, 그러니까 플래시에 대한 간결한 소개부터 주변 인터뷰도 싣고, 거기에 학계에 계시는 분들이 각각 포인트에 맞는 견해들을 주셔서 전반적인 구성이 좋게 나올 수 있었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주셔서 프로젝트가 잘 되었다고 생각해요. 편집장: 말씀 중에 궁금한 것이 생겼는데요. 관련 자료를 많이 보셨을 것 같은데, 매크로미디어나 어도비 같은 회사에 대한 연구는 북미 등 해외에서 진행이 많이 됐을까요? 권태현: 일단 기본적으로 MIT Press에서 나오는 플랫폼 스터디스(Platform Studies) 시리즈에 플래시가 있어요. 그게 저희도 가장 많이 참조했던 텍스트인데, 거기 보면 유저(user) 문화 같은 것도 물론 있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기술적인 맥락이 어떻게 반영되는지와 인프라스트럭쳐(infrastructure) 자체에 대한 분석이 주(主)가 되기 때문에 그런 연구가 나름 정리가 되어있다고 볼 수 있고요. 그리고 기술적이고 산업적인 것에 대한 분석이라기보다는 플래시가 가지는 산업적 위상에 대해서는 이선 씨가 저희 책 초반부에서 정리한 것이 있어요. 어도비가 플래시 단종하겠다고 발표한 바로 다음 날부터 2, 3일 동안 페이스북, 모질라 등 거대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성명을 발표했어요. 디렉터나 혹은 웹 브라우저 담당자 정도 되는 헤드(head)급 인사들이 편지를 썼거든요. 그것들을 저희가 전체를 번역해서 실었어요. 그런 것을 통해서 ‘기술적’인 산업이 아니라 그 산업 안에서의 관계, 그리고 거기서 플래시라는 것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그리고 그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플래시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어요. 재미있는 건 그러면서도 플래시의 시대가 지났기 때문에 이제는 ‘자기네들이 짱이다’는 (웃음) 메시지를 던지고 있어요. 박이선: 예를 들어 유니티 같은 경우는 “우리는 개발의 민주화 잃지 않을 거예요.” 이런 식으로 자기네 사명 다시 한번 외치는 거로 마무리하죠. (웃음) 권태현: 결과적으로 산업에 대한 연구는 이미 있는 것이 맞고, 저희의 프로젝트 안에서도 산업을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인간적이고 조금은 관계 중심적인 차원으로 다루었어요. 그런 면들이 이 책의 기획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방식으로 드러났다고 생각해요. 편집장: 해외에도 이용자 수용 양상에 관련된 연구나 프로젝트가 많이 있나요? 왜냐하면, 말씀하신 대로 이용자들의 경험과 문화적 산물을 본다는 것은 지역적인 측면이 중요해지거든요. 그래서 다른 지역에 좀 비슷한 프로젝트들이 있었는가도 궁금해요. 박이선: 저희가 처음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는 아까 말씀드린 MIT Press의 플래시 책이 사실상 유일했어요. 그 책은 2014년에 나왔던 책이거든요. 그때는 ‘플래시가 죽겠다’는 소식이 나오기 전이었고 저자는 그냥 플래시에 관심 있어서 플랫폼을 연구했던 거예요. 거기 안에는 수용자 연구도 있었지만, 기술 자체에 코드 분석 같은 것이 많이 담겨있었고 그 책 외에는 플래시에 대한 연구를 찾기가 힘들었어요. 권태현: 어딘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저희랑 유사한 콘셉트의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었고, 오히려 유저들의 문화에서 눈에 띄는 프로젝트들은 ‘아카이브 프로젝트’였어요. ‘내가 재밌게 했던 플래시 게임이 없어지니까 일단 아카이브를 만들어야 된다’라고 생각하는 유저들은 굉장히 많았던 것 같아요. 박이선: 그런 맥락에서 제가 생각하는 비슷한 프로젝트는 이거였어요. 미국에 두 명의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운영하는 재단이 있어요. 웹 디자인 뮤지엄이라고, 운영자 둘 다 웹 디자이너로서 나이 많은 개발자들이 운영하는 곳이 있는데요. 우리가 90년대 구글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해도 볼 수가 없잖아요? 그런 것들을 어떻게 복원을 해서 다 사진을 찍어두는 프로젝트예요. 그런 일들을 사비로 해오고 있었고, 그중에 하나로 플래시가 있었던 거죠. 이분들이 플래시의 원형들을 굉장히 잘 보존한 걸 webdesignmuseum.org에 게시해놨어요. 저희 작업도 이분들의 작업을 많이 참조했죠. 그리고 그분들이 재단 페이트리언(Patreon, 모금 후원 사이트)을 하시거든요. 저희도 후원을 하면서 열심히 해 달라고 응원을 해드렸어요. 그리고 추가로 웹 아카이브( web.archive.org ) 재단, 그러니까 미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모인 웹 재단이 저희가 그나마 참조했던 프로젝트였어요. 편집장: 제가 이 질문을 드리는 이유에는 이런 측면이 있습니다. 만약 이 프로젝트가 해외에서도 보기 드문 프로젝트였다면, 해외로 나가야 하는 의무도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권태현: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저도 몇 번 들었어요. 프로젝트에 참여하신 분들 중에서 외국에 계신 분들도 많았는데, 그분들이 “외국 친구들 보여주고 싶은데, 혹시 번역 계획이 있냐”는 연락을 두세 명한테 받았어요. 근데 저희가 일단 돈이 없어서 모르겠다고 말씀드렸죠. (웃음) 박이선: 재밌는 게 저희 프로젝트에 웹사이트가 있는데요. 그 웹사이트에 외국인들이 내용을 다 읽고 댓글을 다는 거예요. 거기 한글밖에 없는데 아랍어로도 댓글이 달리고. 그래서 ‘많은 분들이 공감을 해주시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권태현: 그런데 사실 말씀해 주신 것처럼 어떤 연구를 하더라도 사실 지역적인 연구가 될 수밖에 없잖아요. 근데 프로젝트를 하다 보니까 플래시 프로젝트보다는 한국 웹문화사의 성격이 되게 강해졌거든요. 그러니까 사실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 웹문화사에서 플래시는 당시 웹 문화의 조건이었기 때문에, 플래시에 대한 문화연구를 하면 그냥 당시의 웹문화사가 나와요. 그래서 이 프로젝트는 당대의 한국 웹문화사의 성격이 강할 것 같고, 한국 웹문화사가 궁금한 외국인들이 읽었을 때 오히려 더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플래시 일반에 대한 연구는 훨씬 더 좋은 콘텐츠들이 영문으로 있을 텐데, 만약에 저희 프로젝트를 번역했을 때 가치가 있다고 한다면, 90년대 후반 한국 웹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생길 것 같아요. 편집장: 그런 확장성을 생각해 보면 이 프로젝트가 끝이 아니라 시작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이 프로젝트에서 가지를 쳐서 뭔가를 더 할 수 있는, 그런 계획이나 움직임이 있을까요? 박이선: 지금은 우선 이 책을 서점에 납품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전시에 대한 기획들도 고민을 했는데, 코로나 19로 상황이 어려워졌죠. 권태현: 저희가 인천문화재단 펀딩을 받을 때, 인천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랑 콜라보를 하는 필수 요건이 있었어요. 그때 저희가 리스트를 봤는데, 국악을 하시는 분이 있는 거예요. 장례식 때 국악을 하는 드렁갱이(동해안별신굿에서 반주로 쓰이는 장단: 한국민속대백과사전)라는 것이 있거든요. 또 마침 연락을 해보니 그분이 드렁갱이 전문가였어요. 그래서 저희가 저희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드리고, 드렁갱이 음악도 받았어요. 그 음악을 틀어놓고 장례식을 한다거나 하는 계획들이 있었는데, 코로나 19로 어려워졌어요. 박이선: 당장은 어렵겠지만, 발전시키고 싶은 프로젝트는 있어요.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자발적으로 아카이브를 하시는 분들이 많거든요. 국내에 ‘와플래시’나 ‘플래시아크’처럼 아카이브 웹사이트를 만들어서 최근의 기술로 과거의 콘텐츠를 만들어 올리는 분들이나 해외에 그런 단체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그분들께 “왜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이런 아카이브를 하는 거냐”고 물으면 그분들의 과거 이력이 나오겠죠. 그런 부분이 궁금하고, 아카이브를 통해서 뭘 하고 싶은지 묻고 싶어요. 물론 ‘광고를 달기 위해서 한다’는 답변을 할 수도 있지만, 노력이 워낙 많이 가는 일이기 때문에 그 동기가 궁금해요. 권태현: 이런 맥락에서 저도 아카이브나 마이그레이션 같은 문제를 확장시키고 싶어요. 미술계의 뮤지올로지, 이 ‘미술관학’이라는 학제를 기반으로 제가 작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재난과 치유》 라는 전시의 위성프로젝트로 〈영구소장〉( https://youtu.be/WQ7takHNmTg)이라는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요. 그것과 연동되어서 저희 프로젝트 후반부에 ‘소프트웨어의 피라미드’가 만들어졌거든요. 그런 차원에서 방금 이선 씨가 말씀해 주신 ‘아카이브 피버’, 이 아카이브 열망에 소프트웨어 버전을 연작처럼 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어 ‘쿠키런’이라고 해도, 박물관이 단순히 ‘쿠키런’의 최신 버전을 그냥 다운받은 형태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쿠키런’의 인터페이스나 캐릭터, 디테일한 게임 디자인, 빌드 등 소프트웨어의 아카이브는 그 형태나 필요성이 또 다른 거죠. 물론, 미술품 아카이브도 물리적인 보존의 측면에서 어려움이 있지만, 소프트웨어는 전혀 다른 어려움이 있기에, 소프트웨어의 아카이브라는 것 자체가 되게 흥미롭고, 박물관학적으로도 연구할 가치가 굉장히 높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소프트웨어의 아카이브를 미술관학이나 박물관학에서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특히나 요즘 작품들은 이제 다 디지털 작업이기 때문에, 데이터로 미술관이 그걸 보관해야 하기 때문에 플래시나 게임의 아카이브 방법론에서 배울 점이 너무 많았어요. 편집장: 그런 부분이 참 아쉽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프로젝트가 생각보다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있거든요. 특히, 한국의 메이저 미디어에서 많이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프로젝트가 끝났지만 조금 더 회자될 수 있는 영역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박이선: 저희가 서울경제 등의 일간지에 나오긴 나왔어요. 그런데 저희한테 먼저 연락을 주신 기자분들의 나이대가 2, 30대세요. 그러니까 이 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지시는 분들은 어렸을 때 졸라맨이나 마시마로를 봤던, 공감대가 있으신 분들인 거죠. 편집장: 그런 문제가 있을 수 있겠네요. 그러면 혹시 이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공공 기관이나 박물관 등으로 이관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을 하시나요? 권태현: 그런 가능성은 열려있는 것 같아요. 저희가 작년에 넥슨 컴퓨터 박물관 측과 관련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거든요. 비록 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전시를 하지는 못했지만,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셨어요. 박이선: 만약 20년 넘게 한국 게임을 만들었던 회사와 협업을 하면 저희 시각 외에도 훨씬 더 많은 얘기를 끌어낼 수 있겠죠. 넥슨의 경우에는 저희 연표에도 나오듯이, 애초에 플래시 부흥기 때 〈바람의 나라〉가 성장한 딱 그 시기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회사 측 견해가 들어가면 저희가 못 보던 시각이나 기술적인 측면 등이 추가적으로 들어가면서 유저 문화도 훨씬 더 깊이 있게 기술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비단 넥슨뿐 아니라 그런 제안이 들어오면 소수의 사람이 할 때 보다 더 풍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기에 저희는 이 프로젝트가 확장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어요. 편집장: 결국 이 프로젝트는 끝난 게 아닌 거잖아요. 그렇다면 이 프로젝트는 언제 끝날 것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지난번에 종료했던 것은 크라우드 펀딩에 대한 종료였던 거고, 실질적으로 이 프로젝트의 종료는 언제, 어떻게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박이선: 저는 저희 ripflash.net의 방명록에 더 이상 글이 달리지 않을 때, 프로젝트가 종료될 것으로 생각해요. 지금도 매일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모르겠는 댓글이 달리고 있는데, 아마 구글에 플래시를 검색해서 들어오시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더 이상 플래시를 검색하지 않으면 이 프로젝트가 끝나는 것이겠죠. * R.I.P. 플래시 프로젝트의 홈페이지, ripflash.net 편집장: 인터뷰가 거의 끝나가는데요. 개인적인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프로젝트가 일단 일단락 되었는데, 소회를 좀 말씀해주세요. 박이선: 일단 굉장히 힘들었어요. (웃음) 어떤 것의 역사를 정리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잖아요. 과거의 소프트웨어를 날짜별로 돌려가면서 그것의 의미를 찾는 일은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리고, 지금 그 플래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찾는 것이나 그들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적는 것도 사실 굉장히 힘든 일이었죠. 더 나아가서 이것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홍보까지 해야 되는 상황에서 어려운 일이었어요.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시도를 해봤고 유의미한 결과를 얻었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워요. 권태현: 저희가 이 프로젝트를 오래 끌고 온 만큼 기다려주시는 후원자님들도 있었고, 초기부터 지켜봐 주시고 응원해 주시는 분들이 있었기에 지속적으로 힘을 받고, 추동력을 받아가면서 마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희 홈페이지를 만들어주신 개발자분도 프로젝트가 너무 재미있다고 자발적으로 참여해주신 분들이거든요. 그분들처럼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만난 사람들과, 확장된 관계들이 일단 너무 소중하고 행복했어요. 결과적으로 책 말고도 남은 것들이 너무 많아요. 편집장: 마지막으로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한국 사회에 어떤 변화를 만들고 싶었는지, 혹은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박이선: 개인적으로는, ‘어떤 기술’을 이야기할 때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던 ‘사용자’들을 가시화했던 작업인 것 같아요.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싣고 그 사람들을 찾고 그 사람들의 과거들을 아카이빙 해놓음으로써, “기술이라는 것은 탑-다운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플래시 문화가 보여줬던 것처럼 커뮤니티가 기술을 만들고 선도했다”는 메시지를 던지려 했어요. 실제로 그런 기록도 있었어요. 플래시 초기에 매크로미디어가 커뮤니티에서 업데이트 되어야 할 사항들을 많이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었는데, 이처럼 커뮤니티와 개발자들이 사업 관계로서 협력했었거든요. 그래서 결국 사용자와 커뮤니티를 가시화했다는 의의가 있을 것 같아요.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디어문화연구자) 서도원 재미있는 삶을 살고자 문화를 공부합니다. 게임, 종교, 영화 등 폭넓은 문화 영역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 재현, 추상, 그리고 시뮬레이션의 정치
자동으로 움직이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일에는 묘한 즐거움이 있다. 물을 아래가 아니라 위로 쏘아 올리던 고대 로마의 분수부터 폭포 아래에서 쉼 없이 돌아가는 거대한 물레방아까지, 우리는 스스로 ‘작동(作動)’하는 대상에서 일종의 희열을 느낀다. 그리스의 헤론이 만든 회전하는 증기 장치에서 근대 산업기술 사이를 비집고 등장한 다양한 오토마타까지, 작동하는 무언가가 주는 즐거움은 기술의 고도화 여부와 관계없이 인류 문화 한켠을 차지해 왔다. < Back 재현, 추상, 그리고 시뮬레이션의 정치 27 GG Vol. 25. 12. 10. 오토마타와 시뮬레이션 사이 자동으로 움직이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일에는 묘한 즐거움이 있다. 물을 아래가 아니라 위로 쏘아 올리던 고대 로마의 분수부터 폭포 아래에서 쉼 없이 돌아가는 거대한 물레방아까지, 우리는 스스로 ‘작동(作動)’하는 대상에서 일종의 희열을 느낀다. 그리스의 헤론이 만든 회전하는 증기 장치에서 근대 산업기술 사이를 비집고 등장한 다양한 오토마타까지, 작동하는 무언가가 주는 즐거움은 기술의 고도화 여부와 관계없이 인류 문화 한켠을 차지해 왔다. 디지털게임의 한 장르로 자리 잡은 ‘시뮬레이션’은 이러한 작동의 세계를 한발 더 밀고 나간 개념이다. 단순히 작동을 바라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작동에 직접 개입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 시뮬레이션의 독특한 즐거움이다. 무언가를 원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게 만든다는 말은, 동시에 그 과정에서 언제든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뮬레이션’이 본래 게임 장르가 되기 이전에는 현실 세계의 현상과 질서를 모델링을 통해 재현하는 기술적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실제 장치나 제도를 구현하는 데 드는 비용—경제적 비용뿐 아니라 실패가 낳는 기회비용까지—을 절감하기 위한 방식이었다. 다시 말해 “작동의 실패는 언제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셈이다. 단순히 작동을 구경하는 즐거움은 게임화된 시뮬레이션 속에서는 실패의 위험을 관리하고 극복해 ‘성공적으로 작동하는 무엇’을 만들어냈다는 성취의 즐거움으로 확장된다. * 골드버그 장치(위)와 <요절복통 기계>(1992)는 겉보기엔 비슷하지만, 전자가 완성된 작동 장면을 감상하는 데 초점이 있다면 후자는 장치를 ‘만드는 과정’ 자체의 즐거움에 집중한다. 우리가 즐기는 시뮬레이션 게임에는 이 두 가지 즐거움이 나란히 담겨 있다. <팩토리오>에서 플레이어가 설계한 자동화 공장이 오차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풍경은 시각적 쾌감을 넘어서는 스펙터클이다. 동시에 그 완성된 체계를 직접 만들었다는 뿌듯함도 있다. 오토마타를 바라보는 즐거움과, 그 오토마타를 스스로 설계했다는 즐거움이 하나의 장르 안에서 조우한다. 완성된 레고 테크닉을 바라보는 기쁨과 레고를 조립하는 과정의 기쁨이 함께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즐거움은 시뮬레이션 장르의 고유한 지점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대전격투 게임을 떠올려보자. <철권>에서 플레이어는 복잡한 프레임 사이로 움직이며 상대의 체력을 깎아나간다. 여기서도 실패의 가능성이 전제되어 있고, 이를 넘어 승리했을 때의 기쁨은 분명 크다. 하지만 기술과 기술이 매끄럽게 연계되는 순간은 게임 속에 실시간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짧은 리플레이를 통해 스쳐 지나간다. 완성된 순간 자체를 오래 관조하는 구조가 아니다. 때로는 컷신처럼 게임 외부로 튀어나오거나, e스포츠나 영상 콘텐츠의 형태로 아예 바깥에 존재한다. 반면 <산소미포함>에서 완성된 지하도시가 철컹거리며 돌아가는 광경을 바라보거나, <롤러코스터 타이쿤>에서 자체적으로 굴러가는 완성된 공원을 지켜보는 즐거움은 시뮬레이션 장르의 플레이어들에게 매우 중요한 경험이다. 완성물을 관조한다는 것은 ‘복잡성을 장악했다’는 증명과도 같다. 복잡한 체계를 단순화된 규칙으로 조정해 낸 결론이 단순히 ‘승리!’라는 순간이 아니라, 그 완성된 작동이 펼쳐 보이는 논리적 풍경 전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조금 현실적인 비유를 들자면, 제국을 완성한 권력자가 느끼는 ‘잘 돌아가는 제국’의 감각에 가깝다. 화폐와 도량형을 통일하고, 인프라를 하나의 질서 하에 묶어낸 진시황이 느꼈을 법한 그 만족감—시뮬레이션 게임이 겨냥하는 지점은 어쩌면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시뮬레이션에서 추상되는 것들 시뮬레이션 게임에 ‘제국의 지배자’가 되는 즐거움이 있다면, 조금 뜬금없게 들릴 수도 있다. 물론 시뮬레이션 게임을 즐기는 플레이어들이 모두 권력지향적일 리 없다. 현실에서 권력을 행사하려면 엄청난 리스크와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타인을 억압하거나 제거하는 폭력의 문제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회적 법과 제도를 통해 이러한 욕망을 통제해 왔다. ‘게임’으로서의 시뮬레이션이 의미를 갖는 이유는, 본래의 시뮬레이션이 그랬듯이 현실의 비용—물리적·경제적·윤리적 비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놀이를 위한 시뮬레이션은 제한된 가상세계 안에서 적당한 성취를 맛보게 하고, 그 과정은 현실보다 훨씬 가볍다. 이 가성비 높은 즐거움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이 바로 ‘추상화’다. 현실에서 어떤 욕망을 구현하려면 수많은 조건들이 따라붙지만, 놀이로서의 시뮬레이션은 그중 많은 요소를 과감히 생략한다. 전략 시뮬레이션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를 보자. 플레이어는 군웅할거의 시대에서 천하통일을 목표로 한다. 영토는 인구와 생산력 같은 기본 스탯을 가지고 있고, 내정을 통해 수치를 끌어올린다. 군대를 징병하려면 농업·상업 개발과 인구 증가를 통해 얻은 금과 식량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내정’이라는 복잡한 개발 과정은 게임 안에서 그저 장수에게 하나의 커맨드를 실행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렇게 간단히 처리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현실의 토지개발 과정을 그대로 모사하면 게임의 주제—군웅할거의 경쟁—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시뮬레이션이 주는 즐거움에 방해가 되는 요소는 현실과의 대응 여부가 아니라, 재미를 기준으로 무엇이 남고 무엇이 사라지는지가 결정한다. <심시티>도 마찬가지다. 이 게임은 도시의 성장과 번영을 탁월하게 그려내지만, 그 우상향 그래프의 바탕에는 경제력, 특히 땅값과 세금 구조가 놓여 있다. 그렇기에 디테일을 구현하면서도, 예컨대 땅값 상승으로 기존 주민이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 같은 현실의 복잡한 요소들은 과감히 추상한다. 결국 시뮬레이션 게임을 평가하는 하나의 질문은 “무엇이 추상되었는가?”다. 이 기준을 플레이어마다 다르게 받아들이기에 장르 안에서도 다양한 논점이 발생한다. 실제 전투기와 흡사한 디테일이 ‘진정한 시뮬레이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에이스 컴뱃>이 납득되지 않는다. 반면 <팰콘 4.0>의 <자본론>보다 두꺼운 매뉴얼 앞에서 좌절한 이들에겐 정도면 충분히 ‘현실적인 시뮬레이션’이다. 추상과 정치 이 지점에서 ‘시뮬레이션’과 ‘시뮬레이션 게임’은 분리되어야 한다. 양자는 정치적으로 다른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무엇을 추상하고 무엇을 남겼느냐가 즐거움의 기준이 되는 순간, 게임은 의도치 않은 정치적 해석에 휘말릴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심시티>의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도 여기에 속한다. <문명> 시리즈는 이런 문제가 훨씬 더 첨예하게 드러나는 사례다. 이 게임은 인류사를 데이터와 연산을 기반으로 재구성하며 플레이어에게 ‘다른 시간선’을 만들어낼 기쁨을 준다. 실존 역사와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 자체가 즐거움의 원천이다. 하지만 제작사는 이 현실과 가상 사이의 간극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 왔다. 서구 백인 남성 중심으로 쓰인 기존 역사 서술의 한계를 보완하고자 지도자의 성비를 조정하고, 말리·하와이·폴리네시아 같은 비서구 문명을 적극 편입했다. 최근 시리즈일수록 점령과 정복 중심의 승리 조건에서 벗어나 과학·문화·종교·외교 승리 등 다양한 엔딩을 제시하며 제국주의적 서사의 편향을 완화하려 노력한다. 그럼에도 “역사에 승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따라붙는다. 이는 결국 ‘추상’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시뮬레이션 게임은 고정된 서사를 보여주는 대신 여러 요소를 배치해 플레이어가 조합하도록 설계한다. 이 과정에서 재미를 위해 무엇을 추상할지 결정하는 순간, 의도와 다르게 정치적 메시지가 발생할 수 있다. 재미를 위한 삭제가 ‘의도적 누락’으로 읽힐 때, 게임은 본래의 목적을 떠나 새로운 의미를 낳는다. 플레이어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와 세계를 구성하는 데이터의 일부가 빠져 있다는 사실은, 그 세계가 이미 정치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현실 모사와 재미, 혹은 즐거움의 문제로서의 시뮬레이션 게임 커뮤니티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 중 하나는 “게임은 재미가 최우선!”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말에 온전히 동의하진 않는다. 게임만이 재미를 추구하는 매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뉴스나 다큐멘터리도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재미’를 준다. 특히 현실의 논리를 재현하는 시뮬레이션 장르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복잡해진다. 시뮬레이션 게임은 현실의 구조를 기반으로 삼되, 재미를 위해 일부 요소를 추상해야 한다. 이는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요구와 ‘재미있어야 한다’는 요구가 충돌하는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시뮬레이션 게임은, 앞서 언급한 오토마타 비유를 조금 바꿔 말하면 마치 건프라 조립 세트에 가깝다. 완성품을 감상하는 즐거움과 만드는 과정의 즐거움이 하나의 패키지로 묶여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은 결국 현실의 특정 논리를 어떤 방식으로든 모사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현실의 모든 요소를 담아내는 시뮬레이션은 이미 게임이 아니라 실제 시뮬레이션 시스템이다. 게임으로 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추상이 필요하고, 그 추상은 곧 ‘무엇을 빼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라는 선택을 포함한다. 이 선택이 바로 정치다. 따라서 시뮬레이션 게임을 플레이한다는 것은, 어쩌면 상당히 정치적인 행위다. 무엇이 빠져 있고, 무엇이 강조되었는지, 그 결과로 만들어진 세계가 어떻게 ‘완전한 작동’처럼 느껴지는지를 살펴보는 일. 이러한 감상과 이해는 시뮬레이션 게임을 보다 비평적으로 즐기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게임평론가이자 연구자. 2015년부터 게임을 업으로 삼아, 평론가로서는 게임이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을, 연구자로서는 상품으로서의 게임이 사회 안에 자리잡는 구조를 살펴본다. 『81년생 마리오』(2017), 『현질의 탄생』(2022) 등을 썼고, 〈다큐프라임〉(EBS)을 비롯한 다큐멘터리와 여러 매체 연재에 참여했다. 디지털게임을 시간권리상품으로 분석한 연구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게임연구소 '드래곤랩'대표를 맡고 있으며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 〈폴아웃〉의 미국, 오늘날의 미국
중요한 것은 어떤 선택지를 고르더라도 그 결과는 앞서 본 것처럼 미국 역사의 어떤 장면을 재현하는 것에 그칠 거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수 없는 듯 보이는 트럼프와 바이든의 미국 역시도 길게 보면 동일한 미국 역사의 반복에 불과하다. 바이든은 트럼프를 불러 들이고, 트럼프는 다시 바이든을 되살려 내며 끝도 없이 갈등한다. < Back 〈폴아웃〉의 미국, 오늘날의 미국 04 GG Vol. 22. 2. 10. 도널드 트럼프의 시대는 끝났는데도 끝나지 않은 것 같다. 선거에선 졌지만 그를 지지한 대중적 에너지는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 에너지는 어디서 온 것일까? 더 나아가서, 트럼프를 만든 동력은 미국다운 것일까, 아니면 미국답지 않은 것일까? 트럼프의 선거 구호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였다. 반-트럼프 캠페인으로 선거에서 승리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당선 직후 “미국이 돌아왔다”고 했다. 트럼프의 미국과 바이든의 미국, ‘진정한 미국’은 어느 쪽인가. 폴아웃 시리즈는 정확히 그것을 의도하고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미국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폴아웃 세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NCR(New Califonia Republic)을 예로 들어보자. NCR은 미국인이 스스로 생각하는 미국 역사의 모사인 것처럼 보인다. NCR은 멸망한 세계에서 다시 일어난 인간이 국가의 형태까지 집단의 수준을 고도화 시킨 결과물이다. 이것은 과거 유럽인의 인식 속에서 ‘아무것도 없는 땅’이었을 신대륙에 국가를 건설한 미국의 모습을 재현한 듯 보인다. NCR은 문명 지향적이면서도 적당히 속물적이고, 팽창주의적이면서도 외부와의 과도한 갈등은 지양하는 모습을 보인다. 미국이 세계대전 이전까지 세계적 표준을 자처하면서도 상당기간 고립주의적 대외정책으로 일관했던 것과 겹치는 대목이다. 폴아웃 시리즈의 주인공은 대개 볼트 거주자인데, 폴아웃 1편과 2편에서 주인공은 NCR 또는 그 전신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조력하는 역할을 맡는다. 볼트에는 ‘구세계’ 문명이 보존돼있고, 그 일부였던 주인공은 볼트 밖으로 나오면서 멸망한 상태인 ‘신세계’와 처음 접촉하게 된다. 이건 유럽으로부터 건너온 ‘문명인’이 ‘야만’의 상태인 신대륙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고 식민지 건설을 시도했다는 역사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NCR은 그 이름에서 보듯 주요 근거지가 서부이고 무주공산이 된 황무지로 진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부 개척’의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면도 있다. 서부 개척은 앤드류 잭슨 이래 고양된 국민주의의 영향 아래 이뤄진 팽창의 결과인데, 이 과정에서 원주민들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이것은 ‘폴아웃 뉴베가스(이하 뉴베가스)’에서 후버 댐을 둘러싼 각 세력의 이전투구를 통해 게이머가 겪게 되는 바로 그 상황과 닮아 있다. 뉴베가스에 등장하는 악역 집단인 ‘시저의 군단’은 반문명적 행태로 일관하고 있다. 이는 서부 개척의 맥락에서 식민지인(colonist)의 눈에 비친 원주민을 재현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서부 진출의 과정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은 현지에 진출해있는 영국 또는 프랑스 군대와 동맹을 맺거나 군사적 지원을 받으며 저항했다. 동시에 현대 미국의 맥락에서 보면 ‘시저의 군단’은 명백히 중동의 이슬람국가(IS)를 모티프로 한 걸로 보인다. 그런데 익히 알려져 있듯 현대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냉전 당시 미국과 소련의 제국주의적 팽창으로부터 도움을 받거나 이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조직된 무장단체의 후신이다. ‘시저의 군단’을 이끄는 카이사르가 인도주의적 지식인-의료 단체인 ‘묵시록의 추종자’ 출신이라는 점은 이런 맥락을 반영한 듯 느껴진다. 즉, ‘시저의 군단’은 문명적 시도와 그 좌절이 초래한 반문명적 현상인 것이다. 이 점에서 게이머는 ‘시저의 군단’과 대립하는 경험을 통해 실제 미국이 겪은 또는 겪고 있는 역사적 아이러니와 마주하게 된다. 폴아웃 2편과 3편에 등장하는 악역 집단인 ‘엔클레이브’ 역시 ‘미국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묻게 되는 중요한 존재이다. ‘엔클레이브’는 황무지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구세계’ 권력이다. 그들은 지식과 무력을 독점하며 황무지인을 지배하려 하지만 본체는 저 멀리 어딘가에 숨겨져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엔클레이브’는 미국 독립전쟁 이전 대서양 건너편에서 식민지를 압박한 영국과 같은 존재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들과 문명을 공유하지만 황무지와의 공존을 선택하고 엔클레이브에 맞서는 볼트 거주자는 영국에 대항해 독립전쟁을 이끈 식민지 지식인 계층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 또 하나 있다. 초창기 미국의 정치사회를 지배한 것은 구세계와 신대륙 간의 대립 구도였는데, 구세계는 종종 권력, 지식, 성직제도 등과 등치 되었다는 게 그것이다. 가령 현실의 역사에서 대각성운동을 통해 일반화된 복음주의 교회는 식민지 주류였던 성직자-지식인들과 대립했다. 평신도 역시 설교자로서의 자격을 가질 수 있다는 당시 복음주의의 교리는 ‘구세계’를 기원으로 하는 기성 교회의 상식으로 보면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반면 복음주의자들이 볼 때 기성 교회는 지식과 권력, 신성을 독점한 기득권들일 뿐이다.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미국의 반지성주의에서 이 갈등이 지식과 권력에 대한 대중적 반감의 근원적 체험 중 하나이며, 이게 반지성주의와 민주주의 간 교집합의 한 축이 돼왔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볼트 거주자는 황무지인들에 우호적일지언정 결코 황무지인이 될 수는 없다는 점에서 현실에 존재했던 식민지 기득권에 가깝다. 멸망 이후 세계에서 지식과 무력을 독점하려는 또 하나의 세력인 ‘브라더후드 오브 스틸’(이하 브라더후드)에 대해 플레이어가 양가적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브라더후드’는 황무지인의 입장에서 보면 결국 엘리트주의로 뭉친 선량한 착취자에 지나지 않는데, 이는 실제 역사에서 식민지인들이 지식인-성직자로 구성된 기득권을 보며 느낀 감정과 유사할 것이다. 볼트 거주자에 감정을 이입한 플레이어로서는 ’브라더후드’에 어떤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그들의 다소 무책임한 처사들에 반발할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이다. 폴아웃 4편은 미국 역사에서 반복된 이러한 장면들을 압축적으로, 더 완성도 높게 재현하려 시도한 듯 보인다. 게임의 배경인 뉴잉글랜드 지역이라는 공간적 특성은 대전쟁 이전을 기억하고 있는 주인공의 처지와 맞물려 미국 역사의 시작을 가리키는 장치로 활용된다. 플레이어는 마치 신대륙에 처음 진출한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정착지를 건설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경험을 직접 할 수 있다. 주인공이 맨 처음 접촉하도록 돼있는 팩션인 ‘미닛맨’은 이런 맥락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다. 미국의 역사는 독립혁명을 위해 ‘애국자’들이 민병대를 조직하던 그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게 폴아웃 4가 소규모 도시 건설 시뮬레이션의 색채를 띄게 된 이유이다. 폴아웃 4에 등장하는 ‘인스티튜트’는 반지성주의와 반공주의의 결합이 매카시즘으로 표출된 역사를 빗댄 듯 보인다. 사실 ‘폴아웃 코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1950년대 수준에 멈춰있는 사회문화적 코드는 매카시즘 시대를 묘사한 것이다. 미국 역사가들은 매카시즘의 등장 배경이 된 사건으로 소련의 핵실험 성공, 중국의 공산화, 한국전쟁의 장기화를 꼽는다.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미국인들은 세계의 ‘외부’에 자신들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강대한 적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됐고, 이를 내부에서부터 맞서기 위한 시도로서 매카시즘을 선택하게 됐다는 것이다. 즉, 매카시즘은 앞서 논한대로 미국 역사에서 반복되는 권력, 구세계-기득권, 지식인에 대한 적대와 동일선상에 있다. 작중에서 ‘인스티튜트’를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은 ‘인스티튜트’가 만들어 낸 안드로이드인 ’신스’를 ‘도깨비’라 부르며 두려워하고 나아가서는 ‘신스’를 색출하기 위한 마녀사냥을 감행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이것은 매카시즘이 합리적 근거 없이 지식인과 관료, 예술가를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은 것과 본질적으로 유사한 일이다. 재미있는 것은 ‘신스’를 탄압받는 대상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구출하는 걸 목표로 하는 조직도 등장한다는 거다. 이들은 ‘레일로드’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데, 현실 역사에선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란 비밀결사가 남부의 흑인 노예들을 북부의 자유주로 탈출시키는 활동을 했던 걸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신스’는 매카시즘이란 맥락에선 ‘공산주의자’로 지목된 억울한 피해자인 동시에, 인종차별이란 측면에선 소수인종이 되는 셈이다. 반전은 ‘인스티튜트’가 ‘신스’를 동원해 이루려고 했던 목표가 결국 세계의 재건이었다는 점이다. ‘인스티튜트’가 매카시즘의 맥락에서 공산주의에 비견될 수 있다는 걸 다시 상기해보자. 공산주의는 현실에서 역사적 시행착오를 겪었고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공산주의가 지금의 상황을 보다 나아지게 하기 위한 시도의 하나였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면, 즉 오늘날의 미국에 어떤 공산주의적 시도가 필요하다는 점을 거부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또는 ‘신스’로 비유되는 이민자의 사회적 경제적 역할을 수용하는 것이 세계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 조건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신스’가 ‘공산주의자’이면서 동시에 ‘노예’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질문은 완전히 정반대의 관점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던질 수 있다. 가령 트럼프주의의 발호나 부시 정권의 이라크 침공 또한 미국인들이 처한 현실의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선택한 어떤 시도였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뉴베가스와 폴아웃4는 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란 대목에서 플레이어에게 선택권을 부여한다. 플레이어는 작중에 등장하는 특정 팩션에 가담해 상대에 타격을 입히거나 멸망시킬 수도 있고 독자적 세력을 만드는 걸 선택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상정할 수 있는 ‘트루 엔딩’은 주인공이 인간이 만들어 낼 새로운 미래에 기대를 걸며 자신만의 길을 가는 것일테지만 그게 최선의 선택인지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떤 선택지를 고르더라도 그 결과는 앞서 본 것처럼 미국 역사의 어떤 장면을 재현하는 것에 그칠 거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수 없는 듯 보이는 트럼프와 바이든의 미국 역시도 길게 보면 동일한 미국 역사의 반복에 불과하다. 바이든은 트럼프를 불러 들이고, 트럼프는 다시 바이든을 되살려 내며 끝도 없이 갈등한다. 폴아웃의 세계는 이런 현실이 필연적으로 불러온 ‘리셋’의 결과이다. 이전의 세계는 전쟁과 멸망으로 귀결되었는데, ‘리셋’ 이후에도 인류는 여전히 전쟁을 통해 멸망으로 가는 길을 반복한다. 그러나 인간은 또 한 번의 무의미한 반복에 지나지 않게 될지라도 뉴베가스의 예스맨이나 4편의 미닛맨들처럼 가보지 않은 길을 선택할 수 있다. 미국 독립혁명이 그런 선택의 결과였던 것처럼, 이 모든 게 전부 미국의 일부인 것이다. “War never changes”라는 폴아웃 시리즈의 슬로건은 이런 의미로 볼 수 있지 않을까.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시사평론가) 김민하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시사평론가로 활동하지만 게임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게이머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냉소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돼지의 왕』이 있고,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우파의 불만』, 『트위터, 그 140자 평등주의』 등의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최근작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가 있다.
- B급 게임이란 무엇인가
게임과 B급이 여러 차원에서 연결돼 왔기에, 둘의 관계를 명확히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분명한 것은, 게임에서 ‘B급’이라 불리는 것들 역시 (그렇지 않은 것들 못지않게) 나름의 의미를 만들어가며 게임문화의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동안 게임과 B급에 대한 논의는 본격적으로 이뤄지지 않은 감이 있다. 이 글에서는 앞서 말한 연결지점 중 세 번째와 네 번째 지점을 중심으로 게임+B급에 대해 논의하도록 한다. B급 정서나 코드가 게임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그것을 플레이어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살핌으로써, 게임에서의 B급, B급 게임, B급 게임문화 등이 게임문화 전반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정리한다. < Back 05 GG Vol. 22. 4.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hinKyu Kang Editorial board member of Culture/Science, a journal specializing in cultural theory. Researches media and culture, including games, broadcasting, comics, and fandom. Books include Fandom in Flux: From Play to Labor, From the Real to the Virtual (2024), Subculture Criticism (2020), IP: The Beginning of Every Story (2021, co-authored), Third Life: New Lifestyles in the Age of Technological Revolution (2020, co-authored), and The Theory of Games: From Play to Digital Games (2019, co-authored). Papers include "Fun Without Winning: Sociality, Agency, and Striving Play in Parent-Child Game Play" (2024), "Fandom That Consumes Communication: Idol Fan Platforms and the Reconfiguration of Fandom" (2022), "How Does 'In-Game Spending' Become Play?: Focusing on In-Depth Interviews with Whale Game Players" (2022, co-authored), and "Gamifying Broadcasting: From Producerly Text to Playerly Text" (2019).
- <원신>의 동남아시아 소프트 파워 효과 평가
2023년 11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애니메 페스티벌 아시아(AFA)에서 miHoYo는 컨벤션 센터 입구, 즉 전시장 최고의 자리를 차지했다. 덕분에 팬들이 굿즈를 사기 위해 부스로 몰려들면서 3일 내내 통로가 막힐 지경이었다. 부스에는 miHoYo의 글로벌 흥행작이자 2020년 출시 이후 회사를 세계 무대에 올려놓은 게임, 《원신》의 포토존과 캐릭터 상품이 가득했다. < Back 29 GG Vol. 26. 4.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Editor-in-Chief in GameGeneration) (Editor-in-Chief in GameGeneration)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문예진흥법 개정: 게임이 예술 되어 돈이라도 있고 없고
예술인복지법이 언제 어떻게 개정될지는 알 수 없다. 앞서 말했듯 구체적인 논의가 아직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게임의 예술화에 있어서 한국은 이제 첫 번째 페이지를 연 것이고, 단순히 법 한두 개를 개정하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지속적인 업계 모니터링과 철학적 담론 탐색이 있어야 하며, 그 결과는 향후 여러 번의 개정으로 나타날 것이다. < Back 문예진흥법 개정: 게임이 예술 되어 돈이라도 있고 없고 09 GG Vol. 22. 12. 10. 게임이 예술 되어: 문화예술진흥법 개정 게임이 예술인가 하는 논의는 꾸준히 있어 왔다. 시대 따라 논의의 초점도 발전했다. 학계 내부에서 논의의 초점 하나가 영글면 바깥으로도 튀어나왔다. 열매는 칼럼이나 기사의 형태로 이따금 맺혔고, 지나가던 대중들은 댓글창에서 입씨름을 벌이고 다시 가던 길을 갔다. 그러던 2011년, 열매를 모으던 학계와 지나가던 대중들이 잠깐 멈추어선 소식이 있었다. 2011년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이 게임을 예술에 포함시키는 판례를 남겼다. 캘리포니아 주법에는 미성년자들에게 폭력적인 비디오 게임을 판매 혹은 대여하는 것이 불법이라 규정한 법이 있었는데, 이 법이 위헌이라는 것이었다. 위배되는 헌법은 수정헌법 1조. 예술 장르에게 언론 자유를 보장하는 부분이다. 이 판례가 나온 후 미국의 국립문화예술진흥기금(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 NEA)은 지원 대상에 게임을 포함시켰다. ‘텔레비전과 라디오 예술’ 항목의 이름을 ‘미디어 예술’로 바꾸면서 비디오 게임을 집어넣은 것이다. 11년이 지난 올해, 한국에서도 같은 소식이 있었다. 2022년 9월 27일 문화예술진흥법 개정이 공포되어 6개월 후인 2023년 3월 23일부터 효력을 가진다. 조승래 의원은 게임을 문화예술의 범위에 추가하는 부분을 대표 발의했다. 애니메이션은 유정주 의원, 뮤지컬은 이병훈 의원 대표 발의에 의해 추가되었다. 판례로 규정을 바꾼 미국과 달리 한국은 입법으로 규정이 바뀌었으므로 바뀐 조항에 따라 자동으로 게임은 지원 대상 예술 장르가 된다. 법의 제목부터 문화예술‘진흥’법이지 않은가. 일찍이 우탱클랜은 불멸의 구절을 랩했다. “Cash Rules Everything Around Me.” 주변 모든 것은 돈으로 돌아갈지니. (줄여서 CREAM이다) 크림처럼 달달한 지원금을 노리기 위해 법을 들여다 보자. 문화예술진흥법에는 지원금과 장려 정책이 명시되어 있다. 7조에는 전문예술법인을 만들 수 있는 규정이 있고, 11조에는 장려금 정책이, 14조에는 문화산업 지원에 관한 규정이 있다. 4장은 아예 전체가 문화예술진흥기금의 설립과 운영에 대한 조항들이다. 게임 속에 예술이 너무도 많아: 게임 내의 예술의 영토 게임의 특성인 경쟁성이나 참여성이 예술의 속성과 맞지 않기 때문에 예술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정도는 반박이 되었고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어서 추가 논의로 들어간 주장들이다. 그런데 상황은 바뀌었다. 이제 게임의 예술성 논의는 국가 시스템에 의해 한 단계를 넘어갔다. 법적으로 예술의 범주에 들어갔다. 다음 차례는 국가가 예술에게 주는 지원금과 지원책을 받으면 된다. 독립 개발자들은 국가 지원금을 받아 제작비로 쓸 수 있을 것이고, 대형 게임사 또한 국가의 연기금을 투자자로 받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대형 회사의 투자 사정은 그렇다 쳐도, 미국 NEA의 기금 지원의 경우에서는 분명히 개인 개발자나 소규모 그룹 개발사에 지원이 갔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게임의 어느 부분이 예술성을 갖고 있을까? 게임은 그림, 영상, 문자, 음악, 음향, 여기에 더하여 프로그래밍 코드 등의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게임의 예술성은 이 구성 요소 중 어디에 있는가? 혹은 이 구성 요소 모두 내지는 요소의 집합에 있는가? 감독, 각본, 연기 정도로 정리가 가능했던 영화의 경우보다 훨씬 복잡하다. 게임이 훨씬 더 복합적인 장르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게임의 예술성을 부정하는 시각도 있는 것이다.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그래서 게임 제작에 종사하는 사람 중 어디까지가 법적 예술인이 되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질문은 곱씹어 보면 하나의 질문이 아니다. 게임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디렉터, 혹은 디렉터들인가? 아론 스머츠(Aaron Smurts)는 게임 제작자가 영화 감독처럼 총체적인 환경을 구축하는 작업을 한다며 예술가로 분석한 바 있다. 하지만 게임 제작자도 영화 감독도 독립적으로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는 서사를 만들어낸 각본, 서사를 수행해낸 연기, 둘을 합쳐 의도를 투사해낸 감독의 셋으로 예술성의 영역을 정할 수 있었다. 이후 점차 촬영 행위 자체도 기법과 의도가 있는 예술이라는 인식이 생겼고, 분장과 의상과 음악도 같은 노선을 탔다. 물론 위계상 감독이나 각본이 가장 상위에서 통합 권위를 가져가는 모양새지만, 그래도 하위 분야들의 예술성이 완전히 부정당하지는 않는다. 그럼 게임에서도 비슷하게 하면 되지 않을까? 그래픽과 디자인을 입히는 파트까지는 예술일 것 같다. 그럼 UI 디자인은? 배경음악을 만드는 인력이 예술인이라면 음향을 디자인하는 인력은? 시나리오 작가는 예술인에 포함될 것 같은데, 이를 검수하고 수정하는 인력은 어떨까? 그러고 보니 소설과 만화에서 편집인은 예술인이던가 아니던가? 지금까지 열거한 모든 요소를 동원해 컷신 시네마틱 영상을 만들어내는 인력은 어떨까? 게임이기에 가능한 질문도 더해진다. 비디오 게임을 하나의 작품/상품이게 만들어내는 기술은 프로그래밍 기술이다. 그럼 게임 코딩을 한 프로그래머들은 예술인이 되는가? 비록 게임 제작진의 대다수가 감독/디렉터의 의도 하에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긴 하지만, 영화 제작도 같은 형태니까 게임에서도 대다수의 인력들을 예술인으로 인정해주면 될 것 같다. 그런데 프로그래밍도? 약간의 거슬림이 생긴다. 비디오 게임의 근간을 쌓는 작업이니 넣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러기엔 이미지가 너무 ‘기술직’이다. 사실 그렇게 이상하진 않다. 어차피 ‘藝術’이건 ‘arts’건 예술을 지칭하는 단어는 기술을 지칭하는 단어에서 왔기 때문이다. 정교하고 완벽에 가까운 기술적 경지를 지칭하는 개념이 점차 변하여 현재에는 예술성을 지칭하는 개념이 된 것이니까. 따라서 우리는 받아들이면 된다. 코딩하는 프로그래머도 게임을 만드는 데에 참여했다면 예술인일 수 있다. 그게 새로운 시대다. 효율적으로 만들어낸 코드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고도 하지 않는가. 물론 저 표현은 비유적 표현에 의한 감탄이지만, 법적 영역에서는 건조한 사실 진술이 될 수도 있다. 코딩도 예술적일 수 있다는 시선은 이미 한참 전에 제시되었다. 파올라 안토넬리(Paola Antonelli)는 2013년에 큐레이터로서 뉴욕현대미술관에서 게임 14종을 선정해 전시했다. 안토넬리는 전시작을 선정하기 위해 만든 기준에 그래픽, 유희성 등의 ‘예술적 기준’ 외에도 조작의 참신성과 코딩의 우아함을 집어넣었다. 같은 해, 독일의 미디어아트 전시회인 트랜스미디알레(Transmediale)에는 아예 즉석 코딩 공연이 올라갔다. 게임의 장르적 특성인 유희성이 규칙에서 나오고 그 규칙을 현실화시킨 것이 코딩이므로, 코딩의 최적화 수준 또한 예술성으로 볼 수 있다는 결론을 낸 것이다. * 이미 음악 연주의 방법으로 코딩이 쓰이고 있다. 그래서 게임의 예술화, 혹은 게임의 예술 편입은 예술 역사에서 혁명적 사건이다. 과거 게임의 예술화를 부정하는 논의를 다시 돌이켜 보자. 경쟁성이나 참여성 등의 특성이 기존 예술과 맞지 않는다는 의견들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2001년 경 나왔던 소설가 이영도의 발언이 기억에 남는다. ‘예술의 목적은 타자를 이해하는 것이다. 게임의 목적은 타자를 이기는 것이다. 따라서 게임은 예술이 아니지만 예술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스포츠는 예술이 아니지만 가치를 폄하 당하지 않는다.’ 게임의 다른 속성인 ‘협동’이 부각되면서 이 논리의 힘은 많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주목할 가치는 있다. 이 관점에서 게임의 예술화를 바라본다면, 예술 역사에서 처음으로 이질적인 체계를 가진 장르가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최초로 가장 이질적인 장르라는 점은 게임의 특성 중 수용자의 참여성에서도 드러난다. 기존 예술 장르에서 수용자의 기본 태도는 감상 내지는 관조였다. 반면 예술 신입인 게임에서는 직접 참여하여 경험한다. 새로운 수용 형태가 예술에 들어온 것이다. 게임이 예술이 될 수 있는가보다 사람들이 게임을 예술로 용인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박영욱 숙명여대 교수가 했던 말이다. 수용자 미학 이론으로는 맞는 얘기다. 뒤샹의 변기가 예술이 된 것은 사람들이 미술품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예술을 규정하는 것은 결국 예술을 해석하는 사람들, 수용자에게 달렸다. 사람들이 예술이라 지칭하는 것으로 예술품이 완성되며, 사람들의 해석에 따라 예술품의 가치가 결정된다. 돈이라도 있고 없고: 지원금과 노동권 그리하여 과거 논의까지 건드려가면서 얻어낸 결론은 낯설긴 해도 만족스럽다. 사람들이 게임을 예술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예술임을 인정했다. 이제 만족스러움을 안고 내년 3월부터 국가 지원금을 받아가면 된다. 하지만 당장은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예술인 지원 정책을 규정하고 있는 법은 예술인복지법인데, 이 법의 개정안이 아직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내의 논의가 끝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이 논의에는 코딩 프로그래머의 예술인 인정 여부가 담겨 있는 것 같다. 담당 부처의 논의가 대강이나마 윤곽이 잡히면, 그때 가서야 예술인복지법의 구체적인 개정안과 새 시행령이 나올 것이다. 현재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의원들이 발의해놓고 논의하고 있는 예술인복지법 내용은 예술인 자격 증명과 경력 증명에 관한 내용이다. 정부에 예술인으로 등록을 하여 지원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각종 서류가 필요하다. 그중에는 국가가 ‘예술 활동’이라고 인정하는 특정 활동의 증명도 있다. 물론 이런 서류 구비는 힘들고 귀찮고 헷갈리는 일이다. 그래서 앨범을 몇 장씩 내고 10년 넘게 활동한 중견 음악인도 예술인복지법에서 보면 예술인이 아닌 상황이 흔하다. 그러다 보니 예술인 등록제는 예술 활동을 증명한다기보다는 예술인임을 증명하는 의미로 더 많이 받아들여진다. 당연히 주류 시장과 비주류 담론 양쪽 모두에서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예술인임을 증명하고 지원금을 타가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현재는 이런 부작용을 없앨 패치를 논의하는 중인데, 현재 발의되어 올라와 있는 개정안을 보면 논의가 건설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지는 않다. 기실 국회는 지원금 관련한 고민만 해서는 안 된다. 예술인복지법 개정에 있어서는 노동권 문제도 다루어져야 한다. 또한 예술인복지법 5조는 예술인이 불공정 계약을 하지 않도록 하는 표준계약서 조항이다. 활동 증명과 표준계약서에서 알 수 있듯 주로 개인 및 프리랜서를 위주로 패러다임이 잡혀 있다. 그래도 프리랜서인 연예인이 기획사와 전속 계약을 체결할 때의 계약서 또한 이 조항을 기준으로 작성된다. 따라서 현재 게임 제작사와 노동 계약을 맺고 입사해 있는 시나리오 라이터, 디자이너, 3D 모델러, 코딩 프로그래머 등등에게도 표준계약서 준수 여부가 중요해질 수 있다. 게임업계의 고질적인 노동 문제를 풀 실마리가 여기서 등장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예술인복지법이 언제 어떻게 개정될지는 알 수 없다. 앞서 말했듯 구체적인 논의가 아직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게임의 예술화에 있어서 한국은 이제 첫 번째 페이지를 연 것이고, 단순히 법 한두 개를 개정하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지속적인 업계 모니터링과 철학적 담론 탐색이 있어야 하며, 그 결과는 향후 여러 번의 개정으로 나타날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덕질인) 홍성갑 프리랜서 작가. 이 직업명은 ‘무직’의 동의어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딴지일보에서 기자를 시작하여 국정원 댓글 조작을 최초로 보도했다. 평생 게이머로서 살면서, 2001년에 처음 게임 비평을 썼고 현재 유실된 것을 매우 기뻐하고 있다.
- [인터뷰] 구독 서비스가 게임에 가져올 변화: 스튜디오 사이 유재현 대표
넷플릭스는 사람들이 다양하고 재미있는 콘텐츠에 기꺼이 구독료를 내고 영상물을 시청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게임에서도 넷플릭스와 같은 게임 구독 서비스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게임 구매와 다운로드 형식이 ‘구독 서비스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 흐름의 선두 주자로 나선 것은 글로벌 게임 업체인 소니와 닌텐도였다. 지금은 애플까지 합세해 게임 구독 서비스를 둘러싼 플랫폼 경쟁이 점화되고 있다. 바야흐로 게임 구독 서비스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게임 구독 서비스가 기존의 게임 구매나 다운로드 형식을 대체하게 된다면, 이러한 유통 방식의 변화는 게임 텍스트에 어떤 영향을 줄까? < Back [인터뷰] 구독 서비스가 게임에 가져올 변화: 스튜디오 사이 유재현 대표 09 GG Vol. 22. 12. 10. 넷플릭스의 성공은 미디어 업계에 큰 반향을 불러왔다. 넷플릭스는 사람들이 다양하고 재미있는 콘텐츠에 기꺼이 구독료를 내고 영상물을 시청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게임에서도 넷플릭스와 같은 게임 구독 서비스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게임 구매와 다운로드 형식이 ‘구독 서비스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 흐름의 선두 주자로 나선 것은 글로벌 게임 업체인 소니와 닌텐도였다. 지금은 애플까지 합세해 게임 구독 서비스를 둘러싼 플랫폼 경쟁이 점화되고 있다. 바야흐로 게임 구독 서비스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게임 구독 서비스가 기존의 게임 구매나 다운로드 형식을 대체하게 된다면, 이러한 유통 방식의 변화는 게임 텍스트에 어떤 영향을 줄까? 구독 서비스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게임 개발자는 게이머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하게 될까? 혹시 구독 서비스는 게임 개발자에게 또 다른 고민을 얹어주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게임 구독 서비스는 비단 산업적인 변화만이 아니라 생산자(개발자)와 수용자(게이머) 모두에게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닐까? 이와 같은 질문들을 품고 편집장은 게이머이자 1인 개발자인 스튜디오 ‘사이’의 유재현 대표를 만나고 왔다. 편집장: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와 걸어오신 행보를 말씀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유재현 대표: 안녕하세요. 스튜디오 ‘사이’(Studio Sai)의 유재현입니다. 저는 VFX 아티스트와 테크니컬 아티스트(Technical Artist)로 디즈니, 라이엇, 댓게임컴퍼니, 그리고 애플 등에서 일하다 현재 스튜디오 사이를 창립했습니다. 현재는 1인 개발자로 ‘이터나이츠(Eternights)’를 만들어 출시를 앞두고 있습니다. 편집장: 게임 이야기가 나온 김에 조금 더 여쭤보겠습니다. ‘이터나이츠’를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 같은데요. 이 게임을 독자분들께 한두 마디로 소개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유재현 대표: 예. 간단히 말하자면, 데이팅 액션 게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편집장: 데이팅 액션 게임이요? 유재현 대표: (하하) 다들 데이팅 액션이라 하면 그렇게 반응하시더라고요. 근데 말 그대로 정말 데이팅 액션 게임이고요. 조금 더 설명해드리자면, 10대 청소년들이 아포칼립스 상황에서 살아남으면서 데이팅도 하고, 연애도 하면서 살아가는 소년 성장물 정도로 보시면 될 것 같아요. * 스튜디오 ‘사이’에서 개발중인 데이팅 액션 게임 ‘이터나이츠(Eternights)’ 편집장: 방금 말씀해주신 게임인 이터나이츠는 어떤 플랫폼에서 출시를 생각하고 계실까요? 1인 제작자 입장에서는 어떤 플랫폼에 어떤 방식으로 유통시킬 것인가가 중요할 것 같아요. 유재현 대표: 이전에 비해서는 확실히 신경 쓸 게 많아지기는 했어요. 플랫폼마다 버튼 레이아웃이 달라지기도 해서 그런 걸 신경 써야 하기도 하고요. ‘이터나이츠’는 작년 말쯤에 소니 플레이스테이션(PlayStation) 콘솔 독점작이 됐어요. 콘솔로는 플레이스테이션만 나갈 예정이고요. 그리고 PC로는 스팀(Steam)하고 에픽 스토어(Epic Games Store) 이렇게 두 군데에 출시하게 될 예정입니다. 편집장: 사실 1인 개발자로서 게임을 제작하고 출시하는 입장에서 이전하고 많이 다른 게 있다면 구독 서비스잖아요. 예전에는 게임을 출시할 때, 게임 소프트웨어를 판매하는 온라인 마켓인 ESD(Electronic Software Distribution)로 올리거나, 프리 투 플레이(Free To Play)를 하게 하되, 인앱(In-App) 결제를 통해 수익을 낸다가 있었는데 구독이라는 개념은 너무 다르잖아요. 구독 서비스를 통해서 이터나이츠를 출시하게 된다면, 게임 내적으로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유재현 대표: ‘구독 서비스로 출시해 보겠냐’는 제안이 오면 엄청 좋을 것 같기는 해요. 근데 걱정이 들기도 하겠죠. 지금 만들어 놓은 이 게임의 경우는 보통 돈을 지불하고, 그만큼의 시간을 들이겠다고 어느 정도 결정한 사람들이 시작하게 되잖아요. 그 플레이어들이 예상하거나 기대하는 페이스가 있을 테고. 게임의 호흡도, 예를 들어서 지금 저희 게임은 신나는 액션이 처음 등장하는 타이밍이 게임 플레이하고 7~8분 후 정도예요. 이런 식으로 게임 유저들을 세계관 안으로 좀 더 끌어들인 다음 액션을 보여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전체적인 디자인을 했는데, 구독 서비스로 출시된다고 하면 아무래도 사람들이 첫 액션까지 그렇게 기다리지 않을 것 같거든요. 아마 2, 3분? 그것도 루즈할 것 같아요. 심지어는 한, 45초 안에 뭔가를 보여 주는 식의 인터랙션이 필요할 것 같기도 하고요. 그리고 아무래도 구독 서비스를 하면, 지원되는 게임이 많으니까 여러 가지 선택지가 열리잖아요. 이 게임 잠깐 하고, 다른 게임 할 수도 있는 거고. ‘찍먹’이라고 하죠? ‘찍먹’ 해도 돌아올 만큼의 매력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건 호불호의 영역이고요. 그러니까 대중들이 짧은 시간 안에 게임을 오래 플레이할 수 있도록, 그런 장치들에 신경 쓰는 세세한 디자인이 가장 필요하겠다. 아마 그런 쪽의 고민이 가장 많이 들 것 같아요. 편집장: 그럼 기존의 게임이 플레이스테이션 플러스 같은 구독 서비스로 출시되면 게임 콘텐츠는 어떻게 바뀌게 될까요? 유재현 대표: 그건 잘 모르겠어요. 방금 전에는 인스톨하지 않은 상태로 구독 서비스로만 플레이하는 게임의 경우를 말씀드린 거거든요. 근데 인스톨이 전제된 구독이라고 해도 좀 신경 쓰이긴 하겠어요. 구독 서비스라고 하면 아무래도 플레이 초반에 들어가는 큰 액션들에 확실히 신경 쓰고, 앞부분을 좀 더 타이트하게 만들지 않을까 싶어요. 리얼 타임으로 플레이어가 빠르게 해야 하는 것들을 많이 추가하고, 플레이어를 붙잡아 둘 수 있게 즉각적인 리워드를 준다거나. 어떻게 보면 선정적인 부분이나 잔인한 부분 같은 게 많아지지 않을까, 하고 좀 조심스럽게 예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시네마틱한 비주얼 요소들이 분명 초반부에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해요. 편집장: 한편으로는, 게임이 갖고 있는 특수성 중 하나로 상호적인 교류가 있잖아요. 이것들이 구독 서비스에서는 조금 다르게 나타날까요? 유재현 대표: 저는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메카닉적인 부분이 달라지는 만큼 게임을 어필하는 방식이 기존과는 달라져야 하는 것 같거든요. 좀 부담스럽기도 하겠지만, 제가 그런 상황에 놓여서 게임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면 리액션 측면을 풀어야 하는 과제처럼 받아들일 것 같아요. 편집장: 게임 디자이너의 입장에서는 그런 결제 서비스에 영향을 받는 게 굉장히 불편하거나 부담스러울 수 있을 것 같아요. 게임이 원래 보여 주고자 하는 흐름이 있었는데 그걸 수정해야 하니까요. 결제, 구독이라는 게 애초에 게임 텍스트 외부 원인이기도 하고요. 만약 구독 서비스 때문에 게임을 수정해야 한다면 제작자 입장에서는 아쉬움도 크실 것 같습니다. 유재현 대표: 아쉬움보다도, 어떻게 보면 제작자 입장에서는 따라가야 하는, 배워야 하는 흐름 같기도 해요. 꼭 게임에서의 구독 서비스 때문이 아니고 모든 매체나 모든 콘텐츠가 그렇게 되어 가는 것 같아요. 한두 장 넘기고 더 읽을지, 안 읽을지 결정할 수 있는 독서 플랫폼이 있는 것처럼? 게임 플레이어가 게임 도중에 리턴 하는 건 정말 자기 마음이잖아요. 결국 유저를 사로잡는 건 제작자의 역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다 보니까 일종의 ‘훅’을 초반에 잘 넣는 게 필요한 것 같고요. 플랫폼 변하는 만큼 저도 이것저것 배워 나가야겠죠. 편집장: 말씀해 주신 것처럼 이런 변화가 게임만의 변화가 아니기는 해요. 텍스트 디자인의 요소가 포함되는 영역에서 이런 변화가 많이 발견되는 것 같고요. 그런데 말씀 듣다 보니까, 제작자 말고 게이머로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가 좀 궁금해지는 것 같아요. 게임의 경우는 제작자가 가상공간을 만든다는 인식이 강하기도 하고, 현실과는 독립적인 ‘만들어진 세계’로 오랫동안 생각되어 왔잖아요. 그런데 부분 유료 결제나 구독 서비스가 등장하게 되면서 게임이 완전히 독립적인 세계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워진 것 같기도 하거든요. 이용자들도 그런 부분에 대한 반감이 큰 상황이고요. 구독 서비스를 사용해 보셨나요? 유재현 대표: 저는 구독 서비스를 써 본 적이 없어요. 애플만 잠깐 써 봤고, 아직까지는 그냥 제가 좋아하는 게임을 구매해서 플레이하는 게 익숙한 것 같아요. 편집장: 그럼 또 궁금해지네요. 구독 서비스가 있다는 걸 아시는데도 사용해 보지 않았던 이유가 있을까요? 유재현 대표: 저는 약간, 게임을 소유하는 게 좋아요. 확실히. 피지컬이든, 디지털이든. 얼마 전에 한국 들어갔을 때에도 게임 타이틀을 한 70개 사 왔어요. 그동안 사고 싶었던 것들이에요. 단순히 ‘게임 산업이 잘 되어야 한다’ 이런 의견 때문이 아니라 정말 개인적으로 갖고 싶어서요. 재미있어 보이면 가지고 싶어요. 물론 플레이 하면서 리턴 하는 경우도 있지만요. 아무튼 저는 마음에 들면 피지컬로 가지고 싶고, 좋아하는 게임은 소유하고 싶고 그래요. 편집장: 플레이스테이션 같은 경우도, 이번에 플레이스테이션 5를 출시하면서 디지털 에디션을 따로 만들었잖아요. 이런 걸 보면 확실히 스팀 이후에 ESD 플랫폼이 보편화되고 나서는 ‘소유’의 개념이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은 피지컬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를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온라인에서, 디지털 계정에 게임 플레이 권한을 가지는 걸 소유로 보기도 하고요. 두 가지 소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유재현 대표: 저는 온라인 소유도 소유라고 봐요. 디지털도 많이 소유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구독은 뭔가 불안함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구독이라는 게, 내가 확실한 개런티를 가지는 게 아니기도 하고, 좋아하는 게임이 언제든지 구독 클러스터에서 빠져나갈 수도 있는 거잖아요. 마치 제가 좋아하는 물건을 항상 누군가에게 맡겨 놓은 상태? 그 느낌이 싫은 것 같아요. 편집장: 말씀하신 걸 생각해 보면 구글, 애플과 플레이스테이션 앱의 차이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라이트하고 캐주얼한 게임이냐, 아니냐의 문제? 애플 아케이드는 하이퍼 캐주얼에 가까운 게임들로 구성되고 있는데, 아무래도 이런 게임들은 소유하고 싶다는 욕구가 좀 떨어지지 않을까요? 유재현 대표: 저는 갖고 싶다는 감정이 게임을 하는 사람들의 경험이나, 경험의 무게랑 관련된다고 생각해요. 보통은 그 무게가 스토리의 유무로 많이 갈리는 것 같고요. 게임을 플레이하고, 게임 스토리에 정말 공감하면서 그 게임 안에 살아 들어갔다가 나온 것 같은 감정을 느끼고, 그러면 되게 의미 있는 경험이 되겠죠. 아무래도 저는 게임이 얼마나 라이트하든 게임하면서 유의미한 감정적 울림 같은 걸 느끼면 피지컬 카피라도 갖고 싶거든요. 물론 사람마다 너무 다르겠지만. 아무튼 게임은 상품이고, 그러다 보니까 입소문에 의해서 알려지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해요. 그런 식으로 주변에 영업하게 되는 가장 큰 동기 중에 하나가, 게임 플레이하면서 느끼는 감정적인 흔들림인 것 같아요. 그걸 만들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툴 중 하나가 스토리라고 생각해서 그쪽에 집중하게 되고요. 이런 요소들이 있다면 저는 기꺼이 피지컬 카피라도 살 것 같아요. 편집장: 그럼 조금 다른 질문을 던져보고 싶어요. 북미에서 개발을 하고 계시다 보니 주변에 다른 개발자들도 있으시잖아요. 그분들과도 구독 같은, 어떤 유통 플랫폼의 변화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시나요? 유재현 대표: 하긴 해요. 그런데 자기가 포커스 하는 시장이 나눠져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지금 게임 시장이 크고, 플레이어 풀이 엄청 크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다들 자기 취향에 맞는, 자기 스타일의 게임 만드는 데 집중하는 것 같아요. 다들 자기 취향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나 같은 사람이 많겠지, 내가 좋아할 만한 게임을 만들면 이 정도 되는 플레이어들 중에서 이걸 할 만한 사람이 어느 정도 확보되기는 하겠지’ 하는 분위기가 있어요. 편집장: 제작자로서, 혹은 이용자로서 느끼시는 한국과 북미의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기도 해요. 예를 들면, 한국형 MMORPG라고 부르는 게임들, K-게임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있잖아요. 페이 투 윈(Pay to Win)이 강한 게임들. 북미에서는 이런 게임들이 대세가 된다거나, 그런 분위기라는 게 있을까요? 유재현 대표: 아무래도 여기는 좀 더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는 것 같아요. 한국의 경우는 유저들이 불만이 쌓이거나, 하면 이슈가 되잖아요. 커뮤니티에서 많이 회자되는 메인 이슈랄 게 있고. 그런데 여기는 ‘아, 저쪽에서 저런 일이 있었구나’ 하는 느낌으로 보고 넘기는 분위기예요. 한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없어요. 사람이 많아서일 수도 있는데, 확실히 다양하다는 느낌이 있어요. 편집장: 한국은 페이 투 윈이 주류가 되다 보니까 게임 관련 이슈가 더 크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북미는 풀이 다양해서 독점적인 모델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요. 듣다 보니 생각하게 되는데, 북미가 그런 상황이라면 구독이라는 서비스가 새로 생기더라도 확실히 한국이랑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르겠네요. 애플 아케이드 같은 건 어때요? 북미에서는 많이 결제하나요? 유재현 대표: 많이는 아닌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는 3개월 구독하고 끊었는데, 구독한 이유도 독점작 때문이었어요. 독점작이 재미있어 보였거든요. 편집장: 그러면 제작자 입장에서 구독 서비스가 충분히 어드벤티지가 있는 시장 플랫폼이라고 보시나요? 어떨까요? 유재현 대표: 주변 개발자 스튜디오들 보면, 구독 서비스로 게임을 서비스하게 되면 일종의 미니멈 개런티를 받는 것 같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미니멈 개런티를 받고 게임을 팔게 되는 거잖아요. 그걸 받고, 플레이 시간이 3만 시간 이상 축적되면 다른 방식의 개런티를 받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되면 아까 처음에 제가 말씀드렸던 ‘초반에 플레이어 사로잡기’, 이건 첫 번째 관문이겠죠. 그 다음부터는 사람들을 얼마나 오랫동안 붙잡느냐, 얼마나 오래 플레이하느냐에 따라서 게임의 가치가 정해지는 거니까요. 그런 면에서 저는 구독 서비스에 좀 회의적인 편이에요. 구독 서비스를 통해서 게임을 출시한다고 하면, 제작자 입장에서는 내가 만들고 싶은 방식의 인터랙션이나 호흡에 신경 쓰는 것보다도 플랫폼 성향에 맞춰서 자극적인 게임을 디자인하는 게 중요해지는 것 같거든요. 제작자들도 다 먹고 살려고, 정말 죽기 살기로 게임을 만드는 건데 게임 가치가 그런 식으로 정해지게 되면 아무래도 이전에 느꼈던 감성적인 게임을 재구현하거나 창조하고 싶다기보다는 스킬, 비주얼, 이런 자극적인 디자인을 우선시하게 되겠죠. 편집장: 지적하신 문제는 획일화에 관련된 것 같아요. 결국 구독 시장 안에 들어가서 다른 콘텐츠와 시간 점유 경쟁을 벌일 때 유리한 게임이 구독 서비스 내에서는 대세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시나 보네요. 유재현 대표: 예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는 것 같아요. 편집장: 그런데 저는 좀 다른 고민도 있어요. 구독 서비스 게임들은, 아무래도 유저 입장에서는 한 달에 정액을 내기 때문에 게임을 굳이 오래 할 필요가 없다고 인식되기 쉽잖아요. 그러면 너무 라이트한 게임들만 남게 되지 않을까? 아까 스토리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는데, 내러티브가 중심이 되는 게임들은 최소 플레이 타임을 할애해야 하고요. 이런 게임들은 초반에 확 끌어당기는 요소들을 보여 주지 못하면 끝까지 플레이하기 힘든 게 사실인데, 앞부분이 잔잔해야 절정 부분의 임팩트가 큰 게임들은 구독 서비스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유재현 대표: 힘들죠. 사전 정보가 없으면 진짜 힘들죠. 이 게임 끝까지 하면 분명히 가치가 있다는 걸 아니까 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런 정보가 없으면 비주얼로 정말 휘어 감든지, 아니면 메카닉이나 스토리로 휘어 감든지 해야 하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웹소설이나 웹툰이 딱 비슷한 예시인 것 같은데, 한 화만에 구독자를 휘어잡는 게 필요하니까요. 그 정도의 자극적인 시작 부분이 게임에서도 필요할 것 같긴 해요. 편집장: 어떻게 보면 구독 결제의 대표적 사례로 웹소설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은 제목에서 다 보여 주고요. ‘만렙 전사가 이세계로 가다!’ 이런 식으로요. 게임에서도 네이밍이 그렇게 중요해질까요? 유재현 대표: 비슷한 현상은 충분히 있을 것 같아요. 제목뿐만 아니라 타이틀 이미지도 그렇고, 마치 유튜브나 스팀에서 타이틀 이미지, 썸네일 구경하는 것처럼요. 그리고 사람들이 써 놓은 디스크립션의 첫 부분을 많이 보게 되니까, 딱 라이트 노벨 제목처럼 정보가 많이 압축된 홍보가 필요해지지 않을까 싶어요, 편집장: 그렇다면 전반적으로 라이트한 게임들이 구독 서비스와 잘 어울리게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구독 서비스가 헤비 게이머를 위한 서비스가 아닐 수도 있겠어요. 유재현 대표: 맞아요. 또 좀 헤비 게임을 즐기는 분들은 플랫폼별로 카피를 갖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엑스박스용, 플러스용, 스위치용, 이런 식으로. 필연적으로 스토리가 길어지는 게임들은 애플 아케이드 같은 구독 서비스랑 잘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런데 그거랑 반대로 좋은 예가 있는 게, itch.io ( https://itch.io/)라는 플랫폼이 있거든요. 굉장히 저렴한 가격으로 여러 가지 게임을 해 볼 수 있는데, 정말 훌륭한 내러티브 구성으로 15분 남짓이면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들이 몇 개 있었어요. 그런 게임들은 구독 서비스랑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그런 게임만 묶어 놓은 구독 서비스가 있다면 무조건 할 것 같아요. 편집장: 말씀하신 것처럼 구독 서비스를 통해서 게임을 제공하게 되면 사람들의 주목도를 끌기 위해서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많아지겠죠. 마케팅 부서나, 퍼블리싱이나, 이런 일을 함께해 줄 담당자가 없는 1인 개발자에게는 수익 측면의 고민이나 부담도 생길 것 같아요. 노동 강도와 수익이 정비례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유재현 대표: 아직은 조금 판단하기 힘든 것 같아요. 확실히 툴은 더 좋아지고 있고, 이전에 비하면 게임 개발도 훨씬 수월해지고 있거든요. 물론 잘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아지기 때문에 스킬을 계속 쌓아야 하는 것도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개발 자체가 수월해진 게 크다고 생각해요. 말씀하신 마케팅 같은 것들은 힘들기야 하겠지만, 한 번 하면 또 익숙해질 거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편집장: 그렇군요.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연구자) 하태현 문화와 역사, 종교와 게임 등 다양한 관심사를 갖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게임을 즐깁니다.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지 궁리하며 살고 있습니다.
- 제3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 수상작 발표
2024년 진행된 제3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 수상작을 다음과 같이 발표합니다. < Back 제3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 수상작 발표 20 GG Vol. 24. 10. 10. 안녕하세요, 게임제너레이션입니다. 2024년 진행된 제3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 수상작을 다음과 같이 발표합니다. 기계장치의 우주 - 레인월드와 아우터와일즈의 불능감에 대해 (나원영) 크리퍼가 부수고 간 자리 (박정서) : 미술관이라는 공포 체험 (윤수빈) 게임으로부터의 선택, 선택으로부터의 풍경 (김성은) 이상 네 개 작품을 공모전 수상작으로 발표합니다. 수상작은 GG 20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응모해주신 많은 분들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게임제너레이션 드림.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게임평론가이자 연구자. 2015년부터 게임을 업으로 삼아, 평론가로서는 게임이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을, 연구자로서는 상품으로서의 게임이 사회 안에 자리잡는 구조를 살펴본다. 『81년생 마리오』(2017), 『현질의 탄생』(2022) 등을 썼고, 〈다큐프라임〉(EBS)을 비롯한 다큐멘터리와 여러 매체 연재에 참여했다. 디지털게임을 시간권리상품으로 분석한 연구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게임연구소 '드래곤랩'대표를 맡고 있으며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 <폴아웃 3>로 보는 후쿠시마 오염수 사태
인간은 절멸을 앞둔 위기 속에서도 ‘프로젝트 퓨리티’가 가능하든 그렇지 않든, 계속 노력할 것이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로 방사능 비가 내리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상기에 서술한 문제가 실제로 발생하거나 그것이 우려될 때, 인류는 블레이드 러너의 그 장면을 다시 떠올리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인류는 살아갈 것이고 또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오늘의 결정을 신중히 하고 혹시 다른 대안이 없는지 좀 더 찾아보자는 주장은 보편타당성을 갖게 된다. 그렇기에 우려나 악몽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남의 발언을 선동으로 규정하는 선동이 더 위험한 세상 아닌가? < Back <폴아웃 3>로 보는 후쿠시마 오염수 사태 14 GG Vol. 23. 10. 10. 한국의 대표적 록 밴드 자우림의 멤버인 김윤아가 트위터(지금은 엑스)에 한 마디 쓴 걸 가지고 정치권이 시비를 거는 것을 보면서 해도 너무한다 싶었다. 김윤아는 정확히 이렇게 썼다. “나는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블레이드러너> + 4년에 영화적 디스토피아가 현실이 되기 시작한다. 방사능 비가 그치지 않아 빛도 들지 않는 영화 속 LA의 풍경. 오늘 같은 날 지옥에 대해 생각한다.” 보시다시피, 도쿄전력이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해 앞으로 방사능 비가 내리게 될 거라는 ‘사실’을 얘기한 게 아니다. 아티스트로서의 감상을 말하고 있는 것 뿐이다. 로봇개가 대통령실 경비를 선다는 뉴스를 보면서 “<사이버펑크 2077>이 현실이 되고 있다”고 쓰면 안 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은 현실판 아라사카나 밀리테크와의 부적절한 커넥션을 의심할 수도 있을 거고, 그런 얘기를 소재로 한 시나리오를 쓰는 데에 이를 수도 있을 거다. 그런데, 그런 얘기를 공개적으로 했다는 이유로 여당 대표에게 비난받아야 한다면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런 사회는 어떤 기준으로도 ‘자유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없다. 영화든 게임이든 작품은 현실의 어떤 요소로부터 영감을 받아 태어난다. 그렇기에 작품은 늘 현실의 반영이다. 동시에, 작품은 현실을 정확하게 모사할 것을 강요받지 않는다. 가령 블레이드 러너 작중의 일본적 이미지는 1980년대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고들 하던 시기 서구인들이 가졌던 어떤 불안감의 표현이다. 친일 혹은 반일 ‘선동’이 아니다. 록펠러센터가 미쓰비시에 팔리던 시대다. <블레이드 러너>를 보고 ‘서구의 미래는 일본 자본에 지배당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 그러한 불안감의 원인, 즉 버블경제는 미국과 일본의 시민에게 무엇이었나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게 바람직한 태도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현실을 반영한 작품을 해석해 다시 현실을 돌아보는 기회를 얻게 된다. 핵전쟁과 방사능 등 다양한 이유로 인한 지구 멸망을 다룬 이야기는 다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최근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펜하이머>를 통해 볼 수 있듯, 인류 최초의 핵실험은 1950년대의 국제 정세를 지배할 정도였다. 역사학자 앨런 브링클리는 자신의 저서에서 매카시즘 발흥의 원인 세 가지 중 하나로 소련의 핵실험 성공을 꼽았다(나머지 두 개는 중국의 공산화와 한국전쟁의 장기화이다). 그만큼 인류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던 거다. 핵과 방사능을 주제로 한 창작이 많을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이치다. 이러한 작품 중에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직접적으로 연상하게 되는 것도 있는데, 핵전쟁으로 멸망한 황무지에 깨끗한 물을 공급하겠다는 ’프로젝트 퓨리티’를 주요 소재로 한 <폴아웃3>가 대표적이다. <폴아웃3>의 주인공은 ‘프로젝트 퓨리티’ 가동을 가업으로 하는 집안에 태어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아버지와 생이별하는 것으로 모험을 시작해 결국은 물의 방사능을 정화하는데에 성공한다. 어찌보면 간단하게 감동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서사 구조지만 현실과 연결해보면 쉬운 얘기는 아니다. <폴아웃3>를 통해 현실을 돌아보도록 하자. 후쿠시마 원전의 현실에서 ‘프로젝트 퓨리티’는 가능할까? 도쿄전력은 다핵종제거설비(ALPS)를 통해 가능하다는 방식의 설명을 내놓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이들의 설명이 이론적으로 맞다는 것을 인증했다. 물론 이론이 실제가 될 것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 따라서 IAEA는 장기간의 관찰에 나서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론이 실제가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예외적 상황을 만들 수 있는 변수를 최대한 줄이고 통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확률적으로 볼 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시행횟수, 즉 시간이다.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은 방류가 최소 30년간 진행되는 것을 전제로 폐로 계획을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데브리’라 불리는, 방사능 폐기물과 융합된 잔해물 제거에 여태까지 진척이 없으므로 폐로에 걸리는 기간은 더 길어질 수밖에 없다. 일본 언론은 70년 이상, 나아가서는 다음 세기까지도 방류가 이어질 수 있다고 전망한다. 이렇게 시간이 길어지면 예외적 상황이 발생할 절대적 가능성도 늘어날 것이다. 여기서 예외적 상황이란 ALPS의 고장 또는 외적 요인에 의한 파괴 등이다. 원전도 처음에 설계할 때에는 다양한 시나리오에서 안전성을 유지하는 걸 전제로 한다. 미사일에 직격을 당해도 멀쩡하다는 식의 설명이 대표적이다. 이론적으로는 후쿠시마 원전도 완벽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진과 쓰나미, 이로 인한 비상전력 차단과 냉각장치의 무력화는 ‘상정 외’의 사태였고, 그 결과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원전을 만들 때에는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ALPS를 중심으로 한 오염수 방류 시스템에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보장이 있는가? 만일 ALPS에 문제가 생기고 상당 기간 이것이 방치될 경우 어떻게 되는가 찬성론자들은 과학을 믿으라며 ‘원자의 아이들 교단’과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 정화하기 전의 오염수를 마시는 것으로 안전성을 증명하겠다거나 ‘세슘 우럭’도 평생에 한 번 정도라면 먹어도 된다는 식이다. 반대론자들은 해양생태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방사성 물질에 영향을 받은 플랑크톤이나 소형 생물들이 먹이사슬의 상위를 차지하는 다른 생물의 방사능 농축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슘 우럭’의 존재는 이의 근거이다. 과학의 최대 장점이자 약점은 이 시점에서는 뭐라 단언할 수 없다, 즉 모른다는 점을 겸허하게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근거없는 우려라고 할지 모르지만, 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근거가 없다는 게 없다는 것의 근거는 될 수 없다. 인류는 지금 있을지 모를 희생을 감수하면서 핵문명에 안주하느냐, 아니면 당장 고통스럽더라도 희생을 최소화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느냐의 갈림길에 서있다. 후자는 불가능할 것 같지 않지만, 전자를 주장하는 힘이 워낙 막강하다. 사고 원전의 성공적 수습은 친원전론자 입장에선 대반격의 기틀이다. ‘사고가 나면 수습할 길이 없다’는 원전의 최대 약점을 어떤 방식으로든 극복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핵무기를 적극적으로 운용하는 것에 방점을 찍는 사람의 입장에서 봐도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수 배출은 승인돼야 한다. 원전에서 배출된 핵연료 등의 재처리 등을 시행하는 군사시설에서도 오염수 배출을 둘러싼 같은 논란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폴아웃3>에서 묘사된 ‘프로젝트 퓨리티’는 오히려 그게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암시한다는 점을 같이 보면 어떨까 이야기에는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기 위한 비현실적 장치가 종종 등장한다. 가령 <발더스 게이트 3>의 일리시드 올챙이는 어떤가 감염병의 공포를 연상케 하는 이 장치 덕분에 주인공들은 서로의 의도나 동기를 의심하지 않고 곧바로 신뢰관계를 쌓을 수 있다. 올챙이 자체는 원 설정에 있는 것이라 해도 주인공들이 서로 신뢰를 쌓게 되는 계기가 되는 ‘올챙이 타임’은 시점이 인위적이다. 만일 이 장치가 없었다면 주인공들이 파티를 구성하기까지 그야말로 한세월이 걸렸을 것이다. <폴아웃> 시리즈 에서는 G.E.C.K이 그 역할을 한다. G.E.C.K은 시리즈마다 설정이 조금씩 다르지만 방사능 오염이라는 장애물을 타파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로 등장한다. 3편에서 ‘프로젝트 퓨리티’가 가능한 핵심 근거이다. 주인공이 볼트87에서 찾아내지 못했다면 ‘프로젝트 퓨리티’는 가능하지 않았다. 그런데 G.E.C.K은 애초에 노골적으로 비현실적 존재를 상정한 결과물처럼 느껴진다. 그렇기에 설정이 일관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 거다. 게임에서와는 달리 현실에 G.E.C.K은 존재하지 않는다. Rad-away 같은 약물의 복용으로 방사능 오염을 한순간에 되돌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때문에 ‘프로젝트 퓨리티’는 애초에 비현실적이라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핵은 G.E.C.K도 없고 Rad-away도 없는 우리가 함부로 이용하기에 너무나 위험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폴아웃3>를 통해 우리는 미래의 어떤 모습에 대한 영감을 얻을 수 있을까? 세계 멸망 이후에도 어떻게든 인간은 살아간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인간은 절멸을 앞둔 위기 속에서도 ‘프로젝트 퓨리티’가 가능하든 그렇지 않든, 계속 노력할 것이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로 방사능 비가 내리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상기에 서술한 문제가 실제로 발생하거나 그것이 우려될 때, 인류는 블레이드 러너의 그 장면을 다시 떠올리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인류는 살아갈 것이고 또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오늘의 결정을 신중히 하고 혹시 다른 대안이 없는지 좀 더 찾아보자는 주장은 보편타당성을 갖게 된다. 그렇기에 우려나 악몽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남의 발언을 선동으로 규정하는 선동이 더 위험한 세상 아닌가? Tags: 후쿠시마, 오염수, 폴아웃3, 프로젝트퓨리티, GECK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시사평론가) 김민하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시사평론가로 활동하지만 게임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게이머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냉소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돼지의 왕』이 있고,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우파의 불만』, 『트위터, 그 140자 평등주의』 등의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최근작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가 있다.
- 게임기의 라디오 되기, 라디오의 게임기 되기: 이노 겐지의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1997)에서 생각할 것들
비디오 게임에서 소리의 영역은 어떤 역사에 맞닿아 있을까? 영화가 문학과 회화, 연극, 음악 등의 온갖 예술사를 흡수하며 갱신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처럼, 비디오 게임의 역사에서도 직계와 방계를 넘나드는 여러 갈래의 영향 관계가 존재한다. 그 속에서 게임의 소리는 어떤 가능성의 영역이었을까? < Back 게임기의 라디오 되기, 라디오의 게임기 되기: 이노 겐지의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1997)에서 생각할 것들 03 GG Vol. 21. 12. 10. 비디오 게임에서 소리의 영역은 어떤 역사에 맞닿아 있을까? 영화가 문학과 회화, 연극, 음악 등의 온갖 예술사를 흡수하며 갱신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처럼, 비디오 게임의 역사에서도 직계와 방계를 넘나드는 여러 갈래의 영향 관계가 존재한다. 그 속에서 게임의 소리는 어떤 가능성의 영역이었을까? * 게임 시장이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며 전 세계가 주목하는 문화 트렌드가 되었을 때, 이노 겐지(飯野賢治)는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 リアルサウンド 〜風のリグレット」(1997)를 발표하며, 신구(新舊) 미디어 테크놀로지 역사에 교차점을 찍는 실험을 감행했다. 전설적인 게임 크리에이터 이노 겐지(飯野賢治)가 1997년 세가 새턴으로 출시한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 リアルサウンド 〜風のリグレット」는 그래픽 없이 오직 소리로만 진행되는 게임이다. 조작 방식은 단순하다. 스토리 분기점마다 차임벨이 울리고 진행이 정지된다. 선택 사항은 컨트롤러의 방향 버튼을 눌러 정한다 1) . 각본은 무코다 구니코상 수상 작가이자 TV드라마 「도쿄 러브 스토리 東京ラブストーリー」(1991)의 사카모토 유지(坂元裕二)가 맡았다. 2) 실종된 첫사랑 여성을 찾아 나선 대학 졸업반 남성의 이야기다. 서정적인 연애 서사에 추리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그런데 대사 분량이 일반 영화의 3배에 달해서, 게임의 드라마 부분만 재편집해서 도쿄 FM에서 방송되기도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tOlTH9UQ4 * 사카모토 유지(坂元裕二)가 직접 밝히기 전까지는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의 각본가는 이노 겐지라고 알려져 있었다. 이노 겐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야 사카모토 유지는 그를 추모하며 블로그에 각본을 공개했다. 최초의 각본은 두 사람이 함께 했던 여행 중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의 비범함은 게이머의 신체를 정의하는 방식에서 빛난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 게임을 즐길 수 없는 걸까? 게임을 즐길 수 없는 몸이란 대체 무엇일까?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은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점자 설명서를 포함했다. 당시로서는 워낙 낯설고 파격적인 시도였던 터라 흥행에 참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야말로 선지자처럼 등장한 게임이었다. 게임 업계에서 장애인을 위한 게임 접근성(Game Accessibility)의 실질적인 조치가 이뤄진 것은, 이노 겐지보다 10년 이상 늦은 2010년대의 일이었다. 3) 이노 겐지의 실험 이후로 청각 중심적인 게임 개발에 나선 후대의 작가들에게 이 작품은 가장 중요한 레퍼런스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이 게임은 시장의 우세종(優勢種)에서 밀려난 로우 테크 미디어와 낡은 예술의 재발견이기도 했다. 라디오 드라마 또는 오디오 북을 비디오 게임 기술에 접목한다는 것은, 신구(新舊) 미디어 테크놀로지 역사에 교차점을 찍는 시도였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정리 가능한 발상법이다. 무엇을 과거로부터 귀환시켜 현재와 만나게 할 것인가? 그 만남이 해봤던 일의 진부한 반복이 되지 않도록 정해야 할 n-1의 제약 조건은 무엇일까? 4) 이노 겐지가 제거한 특권적 하나와 중심은 ‘시각’이었다. 소비 대중과 시장 논리가 최첨단 기술과 최신 유행에 집중되는 사이에, 구닥다리 취급을 받게 된 기술과 이에 기반한 작품들은 차례로 위축, 쇠퇴, 소멸의 과정을 밟게 된다. 대량 생산과 소비의 영역 안에 충분히 카운팅되는 소비자의 신체성이 정상 표준으로 전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이 되지 않는 소수자는 소외와 배제의 장벽 바깥으로 떠밀려난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대전환 과정에서도 모든 이가 수월히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체장애 유무만이 아니라, 적응을 강요받는 미디어 환경 변화에 맞닥뜨렸을 때의 낯섦, 불안, 불쾌 역시 일시적인 것으로 취급할 문제가 아니다. 시장과 자본이 연일 메타버스에 환호하며, 일상을 한층 더 철저한 디지털 세계로 몰아넣고 있을 때, 어떤 이는 1990년대의 미디어 환경이 더 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자신에게 딱 좋았다고 불평한다. 이들의 세계가 과연 시대의 대세로부터 유리된 갈라파고스일까? 한 시대의 풍경과 삶의 방식에는 다채로운 차이들이 촘촘히 채워져야 한다. 일상의 모든 순간마다 삼성과 애플폰이 개입되고, 구글과 페이스북, 네이버, 카카오 플랫폼을 들락거리며 배달 음식 앱을 두들겨 끼니를 이어가는 생활이 지난 시대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복고 취향을 옹호하자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과거의 미디어 환경에서 가능했던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의 가능성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하고 실험해볼 충분한 시간이 부족했다. 자본과 시장 질서에 떠밀려 굴레가 정해진 가두리를 옮겨 다닐 뿐인 양식 물고기 신세가 대중 소비자의 실체다. 소비자는 주인으로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할 수 있는 것들의 한정된 목록 안에서 소비하고 싶어 하는 심신으로 훈육된다. 심신 장애의 기준 역시 대량 생산과 소비의 굴레에 최적화된 신체로 정해져 있다. * 시청각에 의존할 수 없는 이들은 하드웨어의 몸체에서 발산되는 촉각, 후각, 미각 신호를 감응해 자신만의 테크노스케이프를 구성한다. 라디오로부터 독자적인 우주를 떠올릴 수 있는 이들이라면 이 기계를 어디까지 재발명, 재발견할 수 있을까? 게임기가 라디오의 실종된 미래가 될 수 있을까? 2021년을 기준으로 누적 출하량이 1억 1,590만 대에 달하는 플레이스테이션은 구닥다리 라디오보다 배리어 프리(barrier free)한 상품일까? 지금의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 기반의 장치들은 지나치게 시각 중심적이며, 하드웨어로부터 감지되는 촉각은 아날로그 시대의 라디오와 비교해 황폐하기 그지없다. 미니멀리즘을 신봉한 스티브 잡스 류의 디지털리스트들은 편협하기 짝이 없는 획일화로 아날로그 기계들이 이룩한 풍요로운 감각의 제국을 파괴했다. 시청각에 의존할 수 없는 이들은 하드웨어의 몸체에서 발산되는 촉각, 후각, 미각 신호를 감응해 자신만의 테크노스케이프를 구성한다. 기업이 제공하는 사용자 매뉴얼에선 한 줄도 읽을 수 없는 시그널로 직조된 세계다. 이 세계에선 시청각의 우위에 소외당하는 쓸데없는 감각의 노이즈 같은 건 없다. 라디오로부터 독자적인 우주를 떠올릴 수 있는 이들이라면 이 기계를 어디까지 재발명, 재발견할 수 있을까? 게임기가 라디오의 실종된 미래가 될 수 있을까? 게임 시장이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며 전 세계가 주목하는 문화 트렌드가 되었을 때, 이노 겐지는 게임기의 라디오 되기, 라디오의 게임기 되기의 혼종 실험을 감행했다. 비디오 게임은 그래픽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강렬한 시각 연출을 앞세워 흥행을 이어왔다. 게임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눈을 뜬 채로 유지하는 일이란, 게임의 시각성에 매혹되는 과정이면서, 게임의 미디어 환경이 게이머의 신체에 명령하는 감각 배치에 순응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시청각 반응이 과활성화될 때 상대적으로 무뎌지는 신체가 있다. 정반대도 가능하다. 평소 비활성화된 신체와 인지 능력을 깨울 방법으로도 게임은 유용하다. 그래서 게임 그 자체를 비판적으로 상대화하는 게임이 필요한 것이다. 이쯤에서 미디어의 역사를 되짚어 보아야 한다. 소리로 상상력과 몰입을 극대화하는 게임성은 라디오 드라마의 역사에 맞닿아 있다. 그뿐만 아니라 라디오 야구 중계의 탄생과도 무관하지 않다. 두 분야 모두 1920년대의 발명품이었다. 최초의 라디오 야구 중계는 1921년 미국 피츠버그의 KDKA 방송이었고, 같은 해에 다양한 형태의 드라마 실험이 라디오에서 시도됐다. 5) * 소리로 상상력과 몰입을 극대화하는 게임성은 라디오 드라마와 라디오 야구 중계의 탄생과 무관하지 않다. 두 분야 모두 1920년대의 발명품이었다. 지금의 감각에선 라디오 경기 중계쯤은 새로울 게 없는 고전적인 방송 방식이지만, 1920년대에는 최첨단 미디어 체험이었다. 청취자들은 야구 경기를 직접 관람하지 않고도 상상으로 몰입하는 재미를 알게 됐다. 이 시기의 상상력이란 디지털 기기에 일상을 잠식당한 지금 시대의 상상력과는 많은 점에서 달랐을 것이다. 대중이 뭘 상상하든 수익성 있는 사업만 된다면 메이저리그 구단주들이야 방송국에 협조 못 할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도 처음에는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하지만 1930년대 대공황기에 접어들면서 경기 관람객 수가 급감하자 1939년까지 라디오 방송 중계를 전면 금지했다. 이런 일은 미디어의 역사마다 수도 없이 반복됐다. * 출판인이자 SF 작가이며, 열렬한 아마츄어 라디오 애호가였던 휴고 건즈백이 1919년에 창간한 . 미국 정부가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에 아마츄어 라디오 통신을 금지시키자, 건즈백은 지면을 활용해 금지 해제 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건즈백의 출판사는 1929년 파산한다. 이후 이 잡지는 BA Mackinnon과 Ziff-Davis Publishing으로 소유권이 이전됐고 1971년까지 발행됐다. 무선 통신망이 국가의 통제 아래 본격적인 관리를 받기 전인 1910년대까지만 해도, 라디오 기술은 일방향적인 방송 방식이 아니라 개개인의 송수신이 자유로운 쌍방향 방식이었다. 수많은 아마추어 무선가들이 독자적인 라디오 클럽을 운영할 수 있었다. 1917년을 기준으로 미국에만 15만 개에 이르는 무면허 아마추어 무선국이 존재했다. 6) 그들이 사용하는 라디오는 군용 VHF 통신 장비와 구조적으로 같았다. 1920년대에 대중화된 라디오는 여기서 송신 기능을 없애버린 것이다. 아마추어 무선 활동도 면허제가 도입되면서 국가 안보에 관련된 사안으로 통제됐다. 그 후 불과 10년도 안 되는 동안에 대중은 라디오 장치의 일방향성을 당연한 특징으로 여기게 되었다. 청취자의 상상계에서 아마추어 라디오국의 활력이 증발하고 야구장까지 자취를 감췄던 이력이다. 1930년대가 되면 세계 각국에서 라디오는 국가의 프로파간다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극작가이자 시인이며 미디어 실천가이기도 했던 브레히트는 1932년에 발표한 「의사소통 도구로서의 라디오 : 라디오의 기능에 관한 연설 Der Rundfunk als Kommunikationsapparat : Rede über die Funktion des Rundfunks」에서, 이 장치가 본래 양방향적인 의사소통 도구였음을 상기시켰다. 7) 그리고 오늘날의 인터넷과 비슷한 개념의 쌍방향 통신이 자유분방하게 이뤄지는 라디오 담론 네트워크를 구상했다. 1910년대의 자유분방했던 라디오 클럽의 유산이 국가와 자본에 포획되어 허무하게 꺾이지 않았다면 텔레커뮤니케이션의 역사는 지금과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지난 시대의 미디어 상상력을 통해 지금의 미디어 환경을 낯설게 다시 관찰할 수 있다. 방송을 듣기만 하는 몸에서 방송하는 몸으로 전환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전파의 저편을 향해 말하기 위해서, 공들여 이야깃거리를 준비하고 완성도를 높이려 노력하는 하루란 무엇일까? 오늘날의 게임 문화에서 이런 수행성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게임은 다양한 스케일과 채널을 갖춘 커뮤니케이션 장이면서, 쌍방향 방송이자 2차 창작(MOD)의 무대로 완연히 자리 잡았다. 8) 여기에서 더 나아가 게임이 (지난 시대 사람들이 영화가 그럴 수 있길 바랐던 것처럼) 문학과 회화, 연극, 음악, 로우 테크와 하이 테크, 구 미디어와 뉴 미디어를 새롭게 배치(n-1)하는 미디어 실천의 장이 될 수 있을까? https://www.youtube.com/watch?v=tuOC8oTrFbM * RAC7이 2015년에 발표한 「Dark Echo」는 청각이 중심이 되는 게임이라는 점에서 이전 시대의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과 비교해볼 만한 작품이다. 비록 현실화되지 못했지만 이노 겐지는 호러 버전의 청각 게임을 「리얼 사운드」의 후속작으로 발표하려 했다. 대상보다는 상황에 집중하게 되는 청각의 특징을 살리려면 연애물보다는 호러가 유리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의 방법론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될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흔히 문명화되지 않은 감각으로 취급되는 후각, 촉각이 증폭될 수 있도록 세가 새턴을 다른 장치에 뒤섞어 해킹해볼 수도 있겠다. 라디오에서 제거된 쌍방향 통신성을 복원하고, 참가자들이 변주된 이야기를 주고받는 네트워크 구축 역시 가능하다. 쉽게 접속하고 검색되며 파편화된 정보가 얄팍하게 소비되는 일이 만연한 오늘날의 미디어 환경에서, 애써 특권과 중심에서 돌아 나와 무한히 변신하려는 게임 실험을 기대해본다. 1) 久遠馨, 『Dの食卓はなぜ伝説のゲームになったのか?―次世代に遺したいゲームプランニングの基本』, 秀和システム, 2014, pp.30-32. 2) 각본 전문은 사카모토 유지의 블로그(https://han.gl/BCZsK)에 공개되어 있다. 3) Ian Hamilton, 「A history of game accessibility guidelines」, 『gamedeveloper.com』, 2021.6.17. (https://han.gl/VZFVo) 4)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1, p.47. 5) Eldon L. Ham, 『Broadcasting Baseball: A History of the National Pastime on Radio and Television』, McFarland, 2011, pp.40-42. 6) 요시미 순야, 『소리의 자본주의』, 송태욱 옮김, 이매진, 2005, pp.234-250. 안드레아스 뵌 · 안드레아스 자이들러, 『매체의 역사 읽기』, 이상훈 · 황승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0, pp.203-212. 7) 김성기, 「미디어 유토피아의 계보 : 브레히트의 ‘라디오 이론’에서 플루서의 ‘텔레마틱론’으로」, 『한국방송학보』 29권 4호, 한국방송학회, 2015, 5-32쪽. 8) 닉 다이어 위데포드, 그릭 드 퓨터, 『제국의 게임』, 남청수 옮김, 갈무리, 2015, pp.428-437.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교수) 임태훈 조선대학교 자유전공학부 조교수.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문학사의 접점, SF 문화와 사운드스케이프 예술을 연구하고 있다. 공저로 『기계비평들』, 『한국 테크노컬처 연대기』, 『시민을 위한 테크놀로지 가이드』가 있고, 대표 저서로 『검색되지 않을 자유』, 『우애의 미디올로지』 등이 있다.
- [고스트] 시리즈: 찬바라의 뒤섞인 계보 위에서 패링하기
찬바라를 적극 수용한 게임도 다채로운 그래픽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던 1980년대부터 찾아볼 수 있다. 세가의 아케이드 게임 [사무라이](侍, 1979), 데이터 이스트의 제목부터 [찬바라](ちゃんばら)인 횡스크롤 액션 게임부터 [사무라이 스피리츠](サムライスピリッツ, 1993), [부시도 블레이드](ブシドーブレード, 1997) 등의 대전 격투 게임, 닌자 잠입 액션을 표방한 [천주](天誅, 1998), 최근의 [세키로: 쉐도우 다이 트와이스](セキロ: シャドウズ ダイ トゥワイス, 2019)까지, 사무라이와 닌자를 주인공 삼은 대부분의 액션 게임을 찬바라 게임의 범주에 집어넣어도 무방할 것이다. 미소녀 좀비 액션을 표방한 [오네찬바라](お姉チャンバラ, 2004) 같은 게임도 있으니 말이다. < Back The Ghost Games: A Parry Through Chanbara's Tangled Family Tree 30 GG Vol. 26. 6. 10. Chanbara (ちゃんばら) is a compound of chanchan (ちゃんちゃん), the onomatopoeia for the sound of clashing blades, and barabara (ばらばら), the onomatopoeia for the sound of blood scattering. Originally a term of derision for the slapdash Edo-period costume dramas churned out in bulk, it is now used as a genre label covering films, novels, games, and plays in which samurai, ninja, and the like carry on their action with bladed weapons. There is even a sport called chanbara that uses foam swords and padded weapons, so the term itself can be said to circulate widely, indifferent to genre or medium. Chanbara first came into popular use in the dawn of the Japanese film industry, from the 1920s up to the defeat of 1945. Chanbara theater did exist in the late nineteenth century, but it was the costume dramas mass-produced from the silent era onward—taking swordplay as their central material—that fixed the word in popular usage. In the period when imperial Japan was beginning its wars in earnest, the chanbara costume drama was also pressed into service as nationalist propaganda emphasizing bushido . By one count, six thousand costume dramas were produced in Japan from 1908 up to the defeat, a figure equal to half the films made in the country.[1] Not all of these, of course, would have been chanbara films. Poster for the arcade game Chanbara (top) and the cover of Onechanbara*, released on PS2 (bottom).* For this reason chanbara can be seen as a subgenre of popular culture boasting a history of more than a hundred years. Games that actively took up chanbara can be found from the 1980s, the moment when richly varied graphics began to appear in earnest. From Sega's arcade game Samurai (侍, 1979) and Data East's side-scrolling action game titled, right on the nose, Chanbara (ちゃんばら); through fighting games like Samurai Shodown (サムライスピリッツ, 1993) and Bushido Blade (ブシドーブレード, 1997); to the ninja-infiltration action of Tenchu (天誅, 1998) and the recent Sekiro: Shadows Die Twice (セキロ, 2019)—it would do no harm to file most action games with samurai and ninja as protagonists under the heading of chanbara games. After all, there is even a game like Onechanbara (お姉チャンバラ, 2004), billed as bishōjo-zombie action. To set the starting point of this genealogical sketch outside of games is only natural, since chanbara seeped into popular culture through the films (and a few novels) of the early twentieth century. In the lineage of exploitation—where a word first used as an insult settled into a genre as the works piled up—chanbara holds its place with confidence. Ghost of Tsushima (2020), the final exclusive for the PlayStation 4, and its successor Ghost of Yōtei (2025) can be called the most recent works of the chanbara genre as it has settled into popular culture. Nate Fox, the creative director of both games, has stated that he was influenced by the chanbara manga he read in childhood, such as Lone Wolf and Cub (子連れ狼, 1970–1976) and Usagi Yojimbo (兎用心棒, 1984–). I leave them unmentioned because it is not an area I know well, but anime like Samurai Champloo (サムライチャンプルー, 2004–2005) and manga like Bleach (ブリーチ, 2001–2016) and the recent mega-hit Demon Slayer: Kimetsu no Yaiba (鬼滅の刃, 2016–2020) can be said to profess the chanbara genre or to fall within its sphere of influence. When the American studio Sucker Punch announced it would make a chanbara game, that these would become its primary references was a matter of course. To bind into a single genealogy the chanbara scattered across the whole field of popular culture would be impossible. What can be drawn, though, is an unfinished genealogy that moves between film and game—the traits of chanbara one comes to feel while playing Ghost of Tsushima and Ghost of Yōtei , or the path running between the spaghetti Westerns and other Westerns born under chanbara's influence and the Japanese-style Westerns that branched off once that influence returned home to Japan. From Western to Chanbara, and Back to Western In a Japan where, after the defeat, the Occupation forces had banned the depiction of swordsmanship and other martial arts on film, the revival of the chanbara film came through Akira Kurosawa. Not long after the Occupation's censorship was lifted in 1952, Seven Samurai (七人の侍, 1954) was released. Because this was the Kurosawa who a few years earlier had taken the Grand Prix at the Venice International Film Festival with Rashomon (羅生門, 1950), another masterpiece from his hand at once captured the critics and the public alike. Kurosawa makes no secret that his chanbara films—the series of films starring Toshiro Mifune as a samurai—were influenced by the Hollywood Western. In the early twentieth century, when the chanbara film was gripping the Japanese public, the genre that flourished alongside it was unquestionably the Western. From the silent era through the postwar Occupation, the Western was the biggest film commodity not only in Japan but worldwide. Kurosawa, too, took the Westerns of this period as his chief motif. Seven Samurai (top) and How Green Was My Valley (bottom). The setup, for instance, of a near-rōnin samurai helping villagers face off against bandits immediately calls to mind a film like John Ford's My Darling Clementine (1946). Though not a Western, John Ford's How Green Was My Valley (1941) is also drawn upon for scenes in Seven Samurai . The scenes in Yojimbo (用心棒, 1961) and Sanjuro (椿三十郎, 1962), where the wandering rōnin departs right after the final duel, naturally summon up not only Ford's Stagecoach (1939) but George Stevens's Shane (1953) and Fred Zinnemann's High Noon (1952). Even in a war film like Throne of Blood (蜘蛛巣城, 1957) or an adventure like The Hidden Fortress (隠し砦の三悪人, 1958), Kurosawa put a katana in Mifune's hand and had him swing it. As John Wayne's figure functioned in Ford's films, Kurosawa made Mifune's feral aspect the emblem of the anti-hero in his own. As if in answer to the signal flare of chanbara's revival fired off by Kurosawa, several chanbara series appeared in succession. Zatoichi (座頭市, 1962), starring Shintaro Katsu, takes a blind swordsman as its protagonist and runs on through twenty-six sequels and a remake directed by and starring Takeshi Kitano. Lone Wolf and Cub: Sword of Vengeance (子連れ狼 子を貸し腕貸しつかまつる, 1972), produced by the very Shintaro Katsu who played Zatoichi, was based on the manga of the same name and, recording a major hit, was made into six films and a TV drama. Alongside their popularity in Japan, these works were categorized—together with Hong Kong kung-fu/wuxia films and Korean kwŏn'gyŏk (fist-fighting) films—as "Asian martial arts films," and circulated worldwide in the form of pirated prints, unauthorized dubs, and recut versions. Of course, the films of the Venice Grand Prix laureate Akira Kurosawa were introduced around the world through official distribution networks and exerted great influence on Europe and Hollywood. Steven Spielberg and George Lucas put out Star Wars (1977), effectively a remake of The Hidden Fortress . In being a pseudo-Western set in space, this creates a strange genealogy in which the films of Kurosawa—who took John Ford as his cinematic master—pass through chanbara and circle back once more to the Western. A more direct uptake took place in Italy. A Fistful of Dollars (1964), produced by Sergio Leone with Clint Eastwood, lifts Yojimbo wholesale—so much so that there is an anecdote about Eastwood thinking of Yojimbo the moment he read the script. That said, Leone's spaghetti Western drags over only the shell of the chanbara film Kurosawa made. He takes only the components—the plot, the anti-hero character, the showdown—and makes a film of an entirely different character. Different, one might say, from Kurosawa's films, which transposed the way the John Ford Western depicts America into something Japanese. The similar compositions of Yojimbo (top) and A Fistful of Dollars (bottom). In any case, through Leone's films the Western entered a different phase. The outlaw anti-hero became the mainstream of the spaghetti Western, and the level of violence rose above that of the 1930s–50s Western—as in the machine-gun spraying of Sergio Corbucci's Django (1966). Hollywood, too, put out The Magnificent Seven (1960), a direct remake of Seven Samurai ; this drew notice for its glittering star casting, but the film's own impact was not large—though it did become a film that, together with spaghetti Westerns and revisionist Westerns like The Wild Bunch (1969), spawned countless imitators. The spaghetti Western, influenced by Kurosawa's chanbara films, returns to Japan once more—just as in 1970s Korea the Manchurian Western emerged under the influence of Leone's (and Kurosawa's) films. Juzo Itami's Tampopo (タンポポ, 1985), which hauls in a great heap of Western clichés, used "ramen Western" as its promotional tagline, displaying Japanese cinema's answer to the spaghetti Western. An anime conscious of the Western right down to its title, like Cowboy Bebop (カウボーイビバップ, 1998), recorded a major hit, and Takashi Miike, a master of Japanese genre film, even made it into the competition section of the Venice International Film Festival with Sukiyaki Western Django (スキヤキ・ウエスタン ジャンゴ, 2007). The manga Golden Kamuy (ゴールデンカムイ, 2014–2022), which reached its conclusion a few years ago, carried on the tradition of the Japanese Western too, setting itself in Hokkaido and featuring Ainu people as major characters. Chanbara as Cultural Melting Pot, or Chimera So… the work of drawing a genealogy that moves between Western and chanbara brings on a certain awkwardness. As one can see from the countless films mentioned above, drawing the genealogy of these films is possible, but it is no different from a maze in which one is bound at some point to lose the way. Genres mix across borders—as in Zatoichi Meets the One-Armed Swordsman (新座頭市 破れ!唐人剣, 1971), the twenty-second film in the series, which attempted a kind of collaboration with the Hong Kong wuxia masterpiece The One-Armed Swordsman (獨臂刀, 1967)[2]—and, as seen above, diverse mutations are born within the repetition of a genre's import and re-import. Indeed, unlike Japan's pre-defeat chanbara films, which put bushido forward as their theme, the chanbara films after Kurosawa (as the revisionist Westerns did) exposed the cruel violence and toxic masculinity inherent in bushido, and at times revealed an aversion to the lingering traces of feudalism. Masaki Kobayashi's Harakiri (切腹, 1962), which took ritual disembowelment as its material, and Bushido, Samurai Saga (武士道殘酷物語, 1963), which criticized the totalitarianism grounded in bushido, appeared around the same time as Kurosawa's chanbara films. Chanbara films critical of bushido continue to appear to this day: The Twilight Samurai (たそがれ清兵衛, 2002), portraying a fading samurai at the end of the Edo shogunate; Nagisa Oshima's Taboo (御法度, 1999), treating the male homosociality grounded in bushido; and, similarly, Takeshi Kitano's Kubi (首, 2023), treating the (sexual) violence within a samurai band of the Sengoku era. The Kill Bill poster, mixing Bruce Lee's yellow tracksuit with the chanbara katana (top), and the 47 Ronin poster, a representative case of conscripting the samurai as a symbol of Orientalism (bottom). On the other hand, in a situation where the figure of the samurai is no longer what it was, bushido migrates to objects that are not chanbara. The tokusatsu hero series Kamen Rider (仮面ライダー), begun in 1971, presents—for an older audience than other tokusatsu shows—a dark hero in a style resembling the chanbara film, or the spaghetti Western's outlaw. Some of the series' spin-offs even set out, with an adults-only rating in mind, chanbara-style gore and bloodshed. If inside Japan chanbara mutates into the tokusatsu hero, outside Japan chanbara becomes a representative symbol of Orientalism and Wapanism (the Western fetishization of things Japanese). In the spaghetti Western Red Sun (Sole rosso, 1972), featuring Toshiro Mifune, a samurai appears, out of nowhere, in the Western desert. In The Last Samurai (2003), starring Tom Cruise, the samurai is placed in exactly the position of the Western's "Indian." Tarantino's Kill Bill: Volume 1 (2003), which haphazardly blends chanbara with kung-fu film, blaxploitation, and more, pays homage to everything from Kurosawa's films to Zatoichi , Lady Snowblood (修羅雪姬, 1973), and Tattooed Life (刺靑一代, 1965).[3] Beyond such successful films, there are of course cases like 47 Ronin (2013), starring Keanu Reeves, or the villain "Silver Samurai" in The Wolverine (2013)—but such cases are, so to speak, without end. So: chanbara has now become a genre, or a representation, unrelated to bushido. What bushido can one feel in the duel between Wolverine and the Silver Samurai? Even if it were the bushido that Inazo Nitobe[4] Orientalistically distorted in Bushido: The Soul of Japan (1899). The bushido-flavored imagery shown by Arasaka in Cyberpunk 2077 (2020), for instance, is nothing more than imagery borrowed. The grotesque form of Adam Smasher, Arasaka's "kagemusha," is already set far apart from anything like bushido. Or take how, in John Wick: Chapter 4 (2023), Caine, played by Donnie Yen, reveals the strange contradiction of being a kung-fu master and at the same time the blind swordsman "Zatoichi." What is emphasized in samurai-led games like Samurai Shodown or Bushido Blade is not bushido but only "chanbara" swordplay and its pleasures. The imagery and characters left behind by the chanbara film keep being broken down into morphemes—mobilized for the genre or concept of the action—and reassembled, over and over. Adam Smasher, bodyguard of the Japanese corporation Arasaka in Cyberpunk 2077*. The armor encasing his body references the design of samurai armor. The katana in the capture is also a weapon you can make major use of in the game. Personally, I cleared my first playthrough using only the katana….* At that very point, the two chanbara games made by the American studio Sucker Punch come close to being cases that lay out, just as they are, the complex topography of the genealogy in which "chanbara" sits. Ghost of Tsushima , set in the Kamakura period, takes as its central material the Yuan dynasty's 1274 attempt to subjugate Tsushima. When Tsushima is suddenly overrun and occupied by the Mongol army, the game captures the process by which Jin Sakai—a samurai who alone survives the battle—abandons bushido and becomes the first shinobi (ninja). Because, in the face of the Mongol army's overwhelming force, responding while keeping to bushido is impossible. In this story, the clichés accumulated in moving between chanbara and Western do not work all that much. The protagonist is not a rōnin or outlaw like Toshiro Mifune or Clint Eastwood, and, depicted as the nephew of the lord who governs Tsushima, he is in his own way a man of power. The only chanbara/Western element within this story, one might say, is the point at which he casts off bushido and becomes a kind of anti-hero, "the Ghost." Its successor Ghost of Yōtei , set in Hokkaido, far more actively draws in a chanbara/Western mood. Music that sounds like Ennio Morricone-style Western scores played on instruments like the shamisen; the vast Hokkaido landscape that has already served as the backdrop for many a Japanese Western; a rōnin protagonist returning home with reasons of her own—from story to setting, in many directions, it evokes the cinematic genealogies mentioned above more than its predecessor did. On top of that, many striking elements are scattered throughout: the "standoff" combat system in both games pulls in the shot composition of the showdown that ran from Yojimbo to A Fistful of Dollars , and so on. https://www.youtube.com/watch?v=lbB3EUruQ4U Footage of Ghost of Yōtei played with Kurosawa, Miike, and Watanabe Modes all switched on. A hybrid situation unfolds: a black-and-white screen mimicking a film look, drenched in excessive blood, while jazzy music plays. But how can the two games be positioned atop the chanbara/Western genealogy described above? Intriguingly, both games reveal their own hybrid identity through the modes they themselves provide. If Ghost of Tsushima has a "Kurosawa Mode" offering a black-and-white image and sound with a texture resembling Akira Kurosawa's films, Ghost of Yōtei has modes taken, respectively, from Takashi Miike of Sukiyaki Western Django and Shinichiro Watanabe of Cowboy Bebop and Samurai Champloo . In Miike Mode the blood and mud spray all the more; in Watanabe Mode the Western-ish music is swapped for lo-fi contemporary music. To play the game with all three modes switched on would be an experience that lets you take in the accumulated genealogy of the chanbara genre all at once. Playing Ghost of Yōtei in that state is quite a chore, admittedly…. Seen from the standpoint of bushido, Jin Sakai of Ghost of Tsushima and Atsu of Ghost of Yōtei are figures converging on a midpoint from opposite directions. Jin Sakai, a samurai grounded in bushido, gradually abandons it after defeat and becomes the first shinobi. Atsu, who burned with vengeance from the start, comes (without becoming a samurai) to understand bushido a little, through her companions the "Wolf Pack" and, above all, through her reunion with Jubei, the twin younger brother she had not known was alive. But this is no more than an alibi to keep the narrative running. To dig deep and analyze these stories is closer to exhuming the stale spirituality called bushido. And what we would then find would likely be a figure like an oni, rotted here and there. Chanbara = Parrying? Bushido has been reduced to an object of discard or critique, and the samurai and ninja have been taxidermied—from a thoroughly Orientalist gaze—into mere popular-culture icons. The center of gravity binding them together seems all but gone. So what, then, do the works that can be bound together as "chanbara" have in common? Here we need to return once more to the etymology. It is worth attending to the fact that what audiences went wild for in the early-twentieth-century Japanese costume dramas disparaged as chanbara was, rather than bushido, the swordplay itself. The so-called tachimawari (立ち回り)—the staged melee—comes close to the heart of chanbara. After all, even the etymology of chanbara is the compounding of onomatopoeia depicting blades clashing and blood scattering. The final duel of Sanjuro (top)—chanbara itself—and a standoff scene from Ghost of Yōtei (bottom). Translate the onomatopoeia "chanchan barabara" into a game mechanic and you get parrying. Indeed, the game known as the first to feature parrying is the samurai fighting game Samurai Shodown II (真SAMURAI SPIRITS 覇王丸地獄変, 1994). Parrying as a game mechanic then began to be used mainly in fighting games like Killer Instinct 2 (1996) and the Tekken series (鉄拳, 1994–). The technique of parrying itself, of course, existed from the Middle Ages in Western swordsmanship and in sports like fencing; but chanbara's influence is immense in its becoming established as a game mechanic. Parrying in Samurai Shodown II (top) and a parrying GIF from Sekiro (bottom). Today parrying can be found not only in fighting games but in nearly every action game—whether the game uses bladed weapons and shields or centers on fists and kicks. Even in a JRPG-style turn-based game like Clair Obscur: Expedition 33 (2025), where combat and magic mingle, parrying has come to be used as the single most important system. What popularized the parry system across action games today was, in all likelihood, the games of FromSoftware. In Dark Souls (2011), the dull sound effect that appeared on a successful parry was essential to the "riposte," the critical follow-up that lets you deal heavy damage. But befitting a game famous for its punishing difficulty, from Dark Souls through Elden Ring (2022) parrying was less a tool every player needed than an optional play-style for veterans. The intriguing case is Sekiro . While it keeps its distance from FromSoftware's orthodox Souls line, in this game—which foregrounds a single weapon and a Posture system—the single most important action is parrying. Memorizing the enemy's attack patterns wholesale and knocking them back (in-game the action is rendered not as "parry" but as "deflect") makes up most of the action, to the point where players call it a rhythm game. The method of filling the enemy's Posture gauge through deflects, breaking their stance, and landing a single blow left as strong an impression as the Dark Souls series, and created a fad of another kind. What is more, the "shinobi-kill" (忍殺) Deathblow—dispatching the opponent with a single strike after trading blows blade to blade—immediately evokes the iconic final scene of Sanjuro . Parrying in Ghost of Yōtei. Ghost of Tsushima , too, adopts a similar system. Of course, since its release date is only about a year apart from Sekiro 's, there would not have been enough time to borrow Sekiro's system directly. But Ghost of Tsushima likewise has nearly the same construction of action mechanic—breaking the opponent's stance through a parry and landing a single blow. The differences are only that it has more moments of one-against-many combat than Sekiro , and that the action is built around learning various swordsmanship stances and responding according to the opponent's weapon (katana, spear, shield, and so on). This is not greatly different in Ghost of Yōtei ; the only difference is that Jin Sakai's various swordsmanship stances are replaced, for Atsu, by various weapons—the ōdachi, the kusarigama, the spear, the dual blades, and more. In the "standoff," one of the game's systems, the figures of protagonist and enemy glaring at each other belong to chanbara but at the same time to the Western. From the vantage of the 2020s it is impossible to tell them apart. That the stages of both games handle regions outside Japan's "mainland"—Tsushima and Hokkaido—is surely a clear Western influence. Ghost of Tsushima , which chooses the thirteenth century rather than the Sengoku era, and Ghost of Yōtei , which treats the Sengoku era and mentions great battles like Sekigahara yet stands one step removed from their center, draw in the Western by way of avoiding the chanbara film's two principal settings (the Sengoku era and the Edo shogunate). What makes the two games chanbara, though, is that their action follows the parry-based manner of the chanbara film. That parrying as a game mechanic emerged under chanbara's influence, the two games faithfully inherit. So, in the end, the core of the two games is this: that they are swordfighting games. From top: the final duel of Yojimbo, the duel of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1966), and a standoff scene from Ghost of Tsushima. The similarity of composition runs through them. Merely by richly providing the pleasure of action one can expect from a chanbara action game, the two games are a success. The Western-style atmosphere that settled into Hokkaido by way of the spaghetti Western from chanbara, the narrative of a wandering, outlaw anti-hero—these are no more than a set of shells needed to render chanbara action vividly. Picked apart in detail, these shells are not even sufficiently "real." The Yuan subjugation of Tsushima, the chief motif of Ghost of Tsushima , involved not only Mongol forces but Goryeo (Korean) troops, who do not appear in the game. The design of Jin Sakai's armor and katana follows the Sengoku era rather than the thirteenth-century Kamakura era—because that is the image of the samurai more familiar to those who will play the game. That Ghost of Yōtei , unlike other games set in the Sengoku era, takes Hokkaido as its stage is to present a plausible backdrop for a lone individual, Atsu, to defeat the Saitō clan and the Yōtei Six; beyond that, a reason is hard to find. The construction of the finished game comes closer to the result of selecting the options through which a fitting chanbara-action tachimawari can be played and felt via the PlayStation DualShock/DualSense. In that context, atop the genealogy that the genre named "chanbara" has formed across all sorts of media, Ghost of Tsushima and Ghost of Yōtei are, paradoxically, composed of elements that lay out one by one the path chanbara has traveled. The traces of bushido as a national project; the motifs and clichés developed in exchange with the Western; parrying, the chanbara of game mechanics. Chanbara is a genre of the Japanese popular-culture tradition and, at the same time, has become a cultural icon whose traces can be found in any country on earth. At any rate, the two works—American games both—confirm this anew. [1] Kim Ryeo-sil, Ilbon yeonghwa-wa naesyeoneollijeum [Japanese Cinema and Nationalism] (Seoul: Chaeksesang, 2005), 28. [2] As an aside, the Japanese release of this film is said to have ended with Zatoichi's victory, while the Hong Kong release ended with the One-Armed Swordsman's. [3] Strictly speaking, the protagonist is a yakuza rather than a samurai, but the swordfight of the latter half, captured in long takes, can be said to follow the chanbara template. [4] A Japanese thinker, educator, and statesman, known as an internationalist who worked toward Japan's modernization in the Meiji era; he was also the figure depicted on the old 5,000-yen note.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Dongsoo Park Majored in art studies as an undergraduate and is currently studying media cultural studies at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Yonsei University. Writes primarily about film, while keeping a curious eye on visual culture broadly—art, games, and broadcasting among them. Also a film critic, host of the podcast Café Critique, and an organizer of community film screenings.
- 예술이 되기 전에, 현실의 주인이 될 각오를 해야 한다
오로지 게임애호가일 뿐인 입장에서 게임과 예술에 대해 생각하면 “게임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외침을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다들 아는대로 이러한 클리셰적 항변은 예술과 게임의 본질이나 실제로 게임이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는 조건 등을 따지는 것과는 큰 관계가 없다. ‘게임을 하는 나’에 대한 정당화 시도가 핵심이다. < Back 12 GG Vol. 23. 6. 10. Tags: 예술, 전시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aeSeok Kim Kim is known for his activities as a critical expert on current affairs in various press media. But he is also an active gamer who never let go of games. Some of his publications includes 『a cynical society』, 『Otaku Loved Lenin』, as well as a co-author of 『Now, Here, Far-Rightism』, 『right-wing discontent』, 『Twitter, that 140-character egalitarianism』. His latest publication is 『Democracy where you vote because you don't like that side』.

![[인터뷰] 플래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퍼포먼스와 그 이후: RIP Flash 팀](https://static.wixstatic.com/media/d03518_385d041d9c424d7e8500760b3a4bf164~mv2.jpg/v1/fit/w_176,h_124,q_80,usm_0.66_1.00_0.01,blur_3,enc_auto/d03518_385d041d9c424d7e8500760b3a4bf164~mv2.jpg)





![[인터뷰] 구독 서비스가 게임에 가져올 변화: 스튜디오 사이 유재현 대표](https://static.wixstatic.com/media/d03518_6f4952aa1d3d4622a83d8968eb611360~mv2.jpg/v1/fit/w_176,h_124,q_80,usm_0.66_1.00_0.01,blur_3,enc_auto/d03518_6f4952aa1d3d4622a83d8968eb611360~mv2.jpg)



![[고스트] 시리즈: 찬바라의 뒤섞인 계보 위에서 패링하기](https://static.wixstatic.com/media/d03518_b1961b77e0e142e98b20d590c4f54d0b~mv2.jpg/v1/fit/w_176,h_124,q_80,usm_0.66_1.00_0.01,blur_3,enc_auto/d03518_b1961b77e0e142e98b20d590c4f54d0b~mv2.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