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아웃〉의 미국, 오늘날의 미국
04
GG Vol.
22. 2. 10.
도널드 트럼프의 시대는 끝났는데도 끝나지 않은 것 같다. 선거에선 졌지만 그를 지지한 대중적 에너지는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 에너지는 어디서 온 것일까? 더 나아가서, 트럼프를 만든 동력은 미국다운 것일까, 아니면 미국답지 않은 것일까? 트럼프의 선거 구호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였다. 반-트럼프 캠페인으로 선거에서 승리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당선 직후 “미국이 돌아왔다”고 했다. 트럼프의 미국과 바이든의 미국, ‘진정한 미국’은 어느 쪽인가.
폴아웃 시리즈는 정확히 그것을 의도하고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미국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폴아웃 세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NCR(New Califonia Republic)을 예로 들어보자. NCR은 미국인이 스스로 생각하는 미국 역사의 모사인 것처럼 보인다. NCR은 멸망한 세계에서 다시 일어난 인간이 국가의 형태까지 집단의 수준을 고도화 시킨 결과물이다. 이것은 과거 유럽인의 인식 속에서 ‘아무것도 없는 땅’이었을 신대륙에 국가를 건설한 미국의 모습을 재현한 듯 보인다. NCR은 문명 지향적이면서도 적당히 속물적이고, 팽창주의적이면서도 외부와의 과도한 갈등은 지양하는 모습을 보인다. 미국이 세계대전 이전까지 세계적 표준을 자처하면서도 상당기간 고립주의적 대외정책으로 일관했던 것과 겹치는 대목이다.
폴아웃 시리즈의 주인공은 대개 볼트 거주자인데, 폴아웃 1편과 2편에서 주인공은 NCR 또는 그 전신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조력하는 역할을 맡는다. 볼트에는 ‘구세계’ 문명이 보존돼있고, 그 일부였던 주인공은 볼트 밖으로 나오면서 멸망한 상태인 ‘신세계’와 처음 접촉하게 된다. 이건 유럽으로부터 건너온 ‘문명인’이 ‘야만’의 상태인 신대륙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고 식민지 건설을 시도했다는 역사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NCR은 그 이름에서 보듯 주요 근거지가 서부이고 무주공산이 된 황무지로 진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부 개척’의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면도 있다. 서부 개척은 앤드류 잭슨 이래 고양된 국민주의의 영향 아래 이뤄진 팽창의 결과인데, 이 과정에서 원주민들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이것은 ‘폴아웃 뉴베가스(이하 뉴베가스)’에서 후버 댐을 둘러싼 각 세력의 이전투구를 통해 게이머가 겪게 되는 바로 그 상황과 닮아 있다.
뉴베가스에 등장하는 악역 집단인 ‘시저의 군단’은 반문명적 행태로 일관하고 있다. 이는 서부 개척의 맥락에서 식민지인(colonist)의 눈에 비친 원주민을 재현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서부 진출의 과정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은 현지에 진출해있는 영국 또는 프랑스 군대와 동맹을 맺거나 군사적 지원을 받으며 저항했다. 동시에 현대 미국의 맥락에서 보면 ‘시저의 군단’은 명백히 중동의 이슬람국가(IS)를 모티프로 한 걸로 보인다. 그런데 익히 알려져 있듯 현대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냉전 당시 미국과 소련의 제국주의적 팽창으로부터 도움을 받거나 이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조직된 무장단체의 후신이다. ‘시저의 군단’을 이끄는 카이사르가 인도주의적 지식인-의료 단체인 ‘묵시록의 추종자’ 출신이라는 점은 이런 맥락을 반영한 듯 느껴진다. 즉, ‘시저의 군단’은 문명적 시도와 그 좌절이 초래한 반문명적 현상인 것이다. 이 점에서 게이머는 ‘시저의 군단’과 대립하는 경험을 통해 실제 미국이 겪은 또는 겪고 있는 역사적 아이러니와 마주하게 된다.
폴아웃 2편과 3편에 등장하는 악역 집단인 ‘엔클레이브’ 역시 ‘미국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묻게 되는 중요한 존재이다. ‘엔클레이브’는 황무지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구세계’ 권력이다. 그들은 지식과 무력을 독점하며 황무지인을 지배하려 하지만 본체는 저 멀리 어딘가에 숨겨져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엔클레이브’는 미국 독립전쟁 이전 대서양 건너편에서 식민지를 압박한 영국과 같은 존재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들과 문명을 공유하지만 황무지와의 공존을 선택하고 엔클레이브에 맞서는 볼트 거주자는 영국에 대항해 독립전쟁을 이끈 식민지 지식인 계층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 또 하나 있다. 초창기 미국의 정치사회를 지배한 것은 구세계와 신대륙 간의 대립 구도였는데, 구세계는 종종 권력, 지식, 성직제도 등과 등치 되었다는 게 그것이다. 가령 현실의 역사에서 대각성운동을 통해 일반화된 복음주의 교회는 식민지 주류였던 성직자-지식인들과 대립했다. 평신도 역시 설교자로서의 자격을 가질 수 있다는 당시 복음주의의 교리는 ‘구세계’를 기원으로 하는 기성 교회의 상식으로 보면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반면 복음주의자들이 볼 때 기성 교회는 지식과 권력, 신성을 독점한 기득권들일 뿐이다.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미국의 반지성주의에서 이 갈등이 지식과 권력에 대한 대중적 반감의 근원적 체험 중 하나이며, 이게 반지성주의와 민주주의 간 교집합의 한 축이 돼왔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볼트 거주자는 황무지인들에 우호적일지언정 결코 황무지인이 될 수는 없다는 점에서 현실에 존재했던 식민지 기득권에 가깝다. 멸망 이후 세계에서 지식과 무력을 독점하려는 또 하나의 세력인 ‘브라더후드 오브 스틸’(이하 브라더후드)에 대해 플레이어가 양가적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브라더후드’는 황무지인의 입장에서 보면 결국 엘리트주의로 뭉친 선량한 착취자에 지나지 않는데, 이는 실제 역사에서 식민지인들이 지식인-성직자로 구성된 기득권을 보며 느낀 감정과 유사할 것이다. 볼트 거주자에 감정을 이입한 플레이어로서는 ’브라더후드’에 어떤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그들의 다소 무책임한 처사들에 반발할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이다.
폴아웃 4편은 미국 역사에서 반복된 이러한 장면들을 압축적으로, 더 완성도 높게 재현하려 시도한 듯 보인다. 게임의 배경인 뉴잉글랜드 지역이라는 공간적 특성은 대전쟁 이전을 기억하고 있는 주인공의 처지와 맞물려 미국 역사의 시작을 가리키는 장치로 활용된다. 플레이어는 마치 신대륙에 처음 진출한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정착지를 건설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경험을 직접 할 수 있다. 주인공이 맨 처음 접촉하도록 돼있는 팩션인 ‘미닛맨’은 이런 맥락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다. 미국의 역사는 독립혁명을 위해 ‘애국자’들이 민병대를 조직하던 그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게 폴아웃 4가 소규모 도시 건설 시뮬레이션의 색채를 띄게 된 이유이다.
폴아웃 4에 등장하는 ‘인스티튜트’는 반지성주의와 반공주의의 결합이 매카시즘으로 표출된 역사를 빗댄 듯 보인다. 사실 ‘폴아웃 코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1950년대 수준에 멈춰있는 사회문화적 코드는 매카시즘 시대를 묘사한 것이다. 미국 역사가들은 매카시즘의 등장 배경이 된 사건으로 소련의 핵실험 성공, 중국의 공산화, 한국전쟁의 장기화를 꼽는다.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미국인들은 세계의 ‘외부’에 자신들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강대한 적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됐고, 이를 내부에서부터 맞서기 위한 시도로서 매카시즘을 선택하게 됐다는 것이다. 즉, 매카시즘은 앞서 논한대로 미국 역사에서 반복되는 권력, 구세계-기득권, 지식인에 대한 적대와 동일선상에 있다.
작중에서 ‘인스티튜트’를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은 ‘인스티튜트’가 만들어 낸 안드로이드인 ’신스’를 ‘도깨비’라 부르며 두려워하고 나아가서는 ‘신스’를 색출하기 위한 마녀사냥을 감행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이것은 매카시즘이 합리적 근거 없이 지식인과 관료, 예술가를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은 것과 본질적으로 유사한 일이다.
재미있는 것은 ‘신스’를 탄압받는 대상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구출하는 걸 목표로 하는 조직도 등장한다는 거다. 이들은 ‘레일로드’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데, 현실 역사에선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란 비밀결사가 남부의 흑인 노예들을 북부의 자유주로 탈출시키는 활동을 했던 걸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신스’는 매카시즘이란 맥락에선 ‘공산주의자’로 지목된 억울한 피해자인 동시에, 인종차별이란 측면에선 소수인종이 되는 셈이다.
반전은 ‘인스티튜트’가 ‘신스’를 동원해 이루려고 했던 목표가 결국 세계의 재건이었다는 점이다. ‘인스티튜트’가 매카시즘의 맥락에서 공산주의에 비견될 수 있다는 걸 다시 상기해보자. 공산주의는 현실에서 역사적 시행착오를 겪었고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공산주의가 지금의 상황을 보다 나아지게 하기 위한 시도의 하나였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면, 즉 오늘날의 미국에 어떤 공산주의적 시도가 필요하다는 점을 거부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또는 ‘신스’로 비유되는 이민자의 사회적 경제적 역할을 수용하는 것이 세계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 조건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신스’가 ‘공산주의자’이면서 동시에 ‘노예’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질문은 완전히 정반대의 관점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던질 수 있다. 가령 트럼프주의의 발호나 부시 정권의 이라크 침공 또한 미국인들이 처한 현실의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선택한 어떤 시도였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뉴베가스와 폴아웃4는 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란 대목에서 플레이어에게 선택권을 부여한다. 플레이어는 작중에 등장하는 특정 팩션에 가담해 상대에 타격을 입히거나 멸망시킬 수도 있고 독자적 세력을 만드는 걸 선택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상정할 수 있는 ‘트루 엔딩’은 주인공이 인간이 만들어 낼 새로운 미래에 기대를 걸며 자신만의 길을 가는 것일테지만 그게 최선의 선택인지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떤 선택지를 고르더라도 그 결과는 앞서 본 것처럼 미국 역사의 어떤 장면을 재현하는 것에 그칠 거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수 없는 듯 보이는 트럼프와 바이든의 미국 역시도 길게 보면 동일한 미국 역사의 반복에 불과하다. 바이든은 트럼프를 불러 들이고, 트럼프는 다시 바이든을 되살려 내며 끝도 없이 갈등한다. 폴아웃의 세계는 이런 현실이 필연적으로 불러온 ‘리셋’의 결과이다. 이전의 세계는 전쟁과 멸망으로 귀결되었는데, ‘리셋’ 이후에도 인류는 여전히 전쟁을 통해 멸망으로 가는 길을 반복한다. 그러나 인간은 또 한 번의 무의미한 반복에 지나지 않게 될지라도 뉴베가스의 예스맨이나 4편의 미닛맨들처럼 가보지 않은 길을 선택할 수 있다. 미국 독립혁명이 그런 선택의 결과였던 것처럼, 이 모든 게 전부 미국의 일부인 것이다. “War never changes”라는 폴아웃 시리즈의 슬로건은 이런 의미로 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