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기의 라디오 되기, 라디오의 게임기 되기: 이노 겐지의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1997)에서 생각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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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1. 12. 10.
비디오 게임에서 소리의 영역은 어떤 역사에 맞닿아 있을까? 영화가 문학과 회화, 연극, 음악 등의 온갖 예술사를 흡수하며 갱신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처럼, 비디오 게임의 역사에서도 직계와 방계를 넘나드는 여러 갈래의 영향 관계가 존재한다. 그 속에서 게임의 소리는 어떤 가능성의 영역이었을까?
* 게임 시장이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며 전 세계가 주목하는 문화 트렌드가 되었을 때, 이노 겐지(飯野賢治)는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 リアルサウンド 〜風のリグレット」(1997)를 발표하며, 신구(新舊) 미디어 테크놀로지 역사에 교차점을 찍는 실험을 감행했다.
전설적인 게임 크리에이터 이노 겐지(飯野賢治)가 1997년 세가 새턴으로 출시한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 リアルサウンド 〜風のリグレット」는 그래픽 없이 오직 소리로만 진행되는 게임이다. 조작 방식은 단순하다. 스토리 분기점마다 차임벨이 울리고 진행이 정지된다. 선택 사항은 컨트롤러의 방향 버튼을 눌러 정한다1). 각본은 무코다 구니코상 수상 작가이자 TV드라마 「도쿄 러브 스토리 東京ラブストーリー」(1991)의 사카모토 유지(坂元裕二)가 맡았다.2) 실종된 첫사랑 여성을 찾아 나선 대학 졸업반 남성의 이야기다. 서정적인 연애 서사에 추리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그런데 대사 분량이 일반 영화의 3배에 달해서, 게임의 드라마 부분만 재편집해서 도쿄 FM에서 방송되기도 했다.
* 사카모토 유지(坂元裕二)가 직접 밝히기 전까지는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의 각본가는 이노 겐지라고 알려져 있었다. 이노 겐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야 사카모토 유지는 그를 추모하며 블로그에 각본을 공개했다. 최초의 각본은 두 사람이 함께 했던 여행 중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의 비범함은 게이머의 신체를 정의하는 방식에서 빛난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 게임을 즐길 수 없는 걸까? 게임을 즐길 수 없는 몸이란 대체 무엇일까?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은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점자 설명서를 포함했다. 당시로서는 워낙 낯설고 파격적인 시도였던 터라 흥행에 참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야말로 선지자처럼 등장한 게임이었다. 게임 업계에서 장애인을 위한 게임 접근성(Game Accessibility)의 실질적인 조치가 이뤄진 것은, 이노 겐지보다 10년 이상 늦은 2010년대의 일이었다.3) 이노 겐지의 실험 이후로 청각 중심적인 게임 개발에 나선 후대의 작가들에게 이 작품은 가장 중요한 레퍼런스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이 게임은 시장의 우세종(優勢種)에서 밀려난 로우 테크 미디어와 낡은 예술의 재발견이기도 했다. 라디오 드라마 또는 오디오 북을 비디오 게임 기술에 접목한다는 것은, 신구(新舊) 미디어 테크놀로지 역사에 교차점을 찍는 시도였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정리 가능한 발상법이다. 무엇을 과거로부터 귀환시켜 현재와 만나게 할 것인가? 그 만남이 해봤던 일의 진부한 반복이 되지 않도록 정해야 할 n-1의 제약 조건은 무엇일까?4) 이노 겐지가 제거한 특권적 하나와 중심은 ‘시각’이었다.
소비 대중과 시장 논리가 최첨단 기술과 최신 유행에 집중되는 사이에, 구닥다리 취급을 받게 된 기술과 이에 기반한 작품들은 차례로 위축, 쇠퇴, 소멸의 과정을 밟게 된다. 대량 생산과 소비의 영역 안에 충분히 카운팅되는 소비자의 신체성이 정상 표준으로 전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이 되지 않는 소수자는 소외와 배제의 장벽 바깥으로 떠밀려난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대전환 과정에서도 모든 이가 수월히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체장애 유무만이 아니라, 적응을 강요받는 미디어 환경 변화에 맞닥뜨렸을 때의 낯섦, 불안, 불쾌 역시 일시적인 것으로 취급할 문제가 아니다.
시장과 자본이 연일 메타버스에 환호하며, 일상을 한층 더 철저한 디지털 세계로 몰아넣고 있을 때, 어떤 이는 1990년대의 미디어 환경이 더 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자신에게 딱 좋았다고 불평한다. 이들의 세계가 과연 시대의 대세로부터 유리된 갈라파고스일까? 한 시대의 풍경과 삶의 방식에는 다채로운 차이들이 촘촘히 채워져야 한다. 일상의 모든 순간마다 삼성과 애플폰이 개입되고, 구글과 페이스북, 네이버, 카카오 플랫폼을 들락거리며 배달 음식 앱을 두들겨 끼니를 이어가는 생활이 지난 시대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복고 취향을 옹호하자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과거의 미디어 환경에서 가능했던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의 가능성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하고 실험해볼 충분한 시간이 부족했다. 자본과 시장 질서에 떠밀려 굴레가 정해진 가두리를 옮겨 다닐 뿐인 양식 물고기 신세가 대중 소비자의 실체다. 소비자는 주인으로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할 수 있는 것들의 한정된 목록 안에서 소비하고 싶어 하는 심신으로 훈육된다. 심신 장애의 기준 역시 대량 생산과 소비의 굴레에 최적화된 신체로 정해져 있다.
* 시청각에 의존할 수 없는 이들은 하드웨어의 몸체에서 발산되는 촉각, 후각, 미각 신호를 감응해 자신만의 테크노스케이프를 구성한다. 라디오로부터 독자적인 우주를 떠올릴 수 있는 이들이라면 이 기계를 어디까지 재발명, 재발견할 수 있을까? 게임기가 라디오의 실종된 미래가 될 수 있을까?
2021년을 기준으로 누적 출하량이 1억 1,590만 대에 달하는 플레이스테이션은 구닥다리 라디오보다 배리어 프리(barrier free)한 상품일까? 지금의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 기반의 장치들은 지나치게 시각 중심적이며, 하드웨어로부터 감지되는 촉각은 아날로그 시대의 라디오와 비교해 황폐하기 그지없다. 미니멀리즘을 신봉한 스티브 잡스 류의 디지털리스트들은 편협하기 짝이 없는 획일화로 아날로그 기계들이 이룩한 풍요로운 감각의 제국을 파괴했다. 시청각에 의존할 수 없는 이들은 하드웨어의 몸체에서 발산되는 촉각, 후각, 미각 신호를 감응해 자신만의 테크노스케이프를 구성한다. 기업이 제공하는 사용자 매뉴얼에선 한 줄도 읽을 수 없는 시그널로 직조된 세계다. 이 세계에선 시청각의 우위에 소외당하는 쓸데없는 감각의 노이즈 같은 건 없다.
라디오로부터 독자적인 우주를 떠올릴 수 있는 이들이라면 이 기계를 어디까지 재발명, 재발견할 수 있을까? 게임기가 라디오의 실종된 미래가 될 수 있을까? 게임 시장이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며 전 세계가 주목하는 문화 트렌드가 되었을 때, 이노 겐지는 게임기의 라디오 되기, 라디오의 게임기 되기의 혼종 실험을 감행했다.
비디오 게임은 그래픽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강렬한 시각 연출을 앞세워 흥행을 이어왔다. 게임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눈을 뜬 채로 유지하는 일이란, 게임의 시각성에 매혹되는 과정이면서, 게임의 미디어 환경이 게이머의 신체에 명령하는 감각 배치에 순응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시청각 반응이 과활성화될 때 상대적으로 무뎌지는 신체가 있다. 정반대도 가능하다. 평소 비활성화된 신체와 인지 능력을 깨울 방법으로도 게임은 유용하다. 그래서 게임 그 자체를 비판적으로 상대화하는 게임이 필요한 것이다.
이쯤에서 미디어의 역사를 되짚어 보아야 한다. 소리로 상상력과 몰입을 극대화하는 게임성은 라디오 드라마의 역사에 맞닿아 있다. 그뿐만 아니라 라디오 야구 중계의 탄생과도 무관하지 않다. 두 분야 모두 1920년대의 발명품이었다. 최초의 라디오 야구 중계는 1921년 미국 피츠버그의 KDKA 방송이었고, 같은 해에 다양한 형태의 드라마 실험이 라디오에서 시도됐다.5)
* 소리로 상상력과 몰입을 극대화하는 게임성은 라디오 드라마와 라디오 야구 중계의 탄생과 무관하지 않다. 두 분야 모두 1920년대의 발명품이었다.
지금의 감각에선 라디오 경기 중계쯤은 새로울 게 없는 고전적인 방송 방식이지만, 1920년대에는 최첨단 미디어 체험이었다. 청취자들은 야구 경기를 직접 관람하지 않고도 상상으로 몰입하는 재미를 알게 됐다. 이 시기의 상상력이란 디지털 기기에 일상을 잠식당한 지금 시대의 상상력과는 많은 점에서 달랐을 것이다.
대중이 뭘 상상하든 수익성 있는 사업만 된다면 메이저리그 구단주들이야 방송국에 협조 못 할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도 처음에는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하지만 1930년대 대공황기에 접어들면서 경기 관람객 수가 급감하자 1939년까지 라디오 방송 중계를 전면 금지했다. 이런 일은 미디어의 역사마다 수도 없이 반복됐다.
* 출판인이자 SF 작가이며, 열렬한 아마츄어 라디오 애호가였던 휴고 건즈백이 1919년에 창간한 . 미국 정부가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에 아마츄어 라디오 통신을 금지시키자, 건즈백은 지면을 활용해 금지 해제 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건즈백의 출판사는 1929년 파산한다. 이후 이 잡지는 BA Mackinnon과 Ziff-Davis Publishing으로 소유권이 이전됐고 1971년까지 발행됐다.
무선 통신망이 국가의 통제 아래 본격적인 관리를 받기 전인 1910년대까지만 해도, 라디오 기술은 일방향적인 방송 방식이 아니라 개개인의 송수신이 자유로운 쌍방향 방식이었다. 수많은 아마추어 무선가들이 독자적인 라디오 클럽을 운영할 수 있었다. 1917년을 기준으로 미국에만 15만 개에 이르는 무면허 아마추어 무선국이 존재했다.6)
그들이 사용하는 라디오는 군용 VHF 통신 장비와 구조적으로 같았다. 1920년대에 대중화된 라디오는 여기서 송신 기능을 없애버린 것이다. 아마추어 무선 활동도 면허제가 도입되면서 국가 안보에 관련된 사안으로 통제됐다. 그 후 불과 10년도 안 되는 동안에 대중은 라디오 장치의 일방향성을 당연한 특징으로 여기게 되었다. 청취자의 상상계에서 아마추어 라디오국의 활력이 증발하고 야구장까지 자취를 감췄던 이력이다.
1930년대가 되면 세계 각국에서 라디오는 국가의 프로파간다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극작가이자 시인이며 미디어 실천가이기도 했던 브레히트는 1932년에 발표한 「의사소통 도구로서의 라디오 : 라디오의 기능에 관한 연설 Der Rundfunk als Kommunikationsapparat : Rede über die Funktion des Rundfunks」에서, 이 장치가 본래 양방향적인 의사소통 도구였음을 상기시켰다.7) 그리고 오늘날의 인터넷과 비슷한 개념의 쌍방향 통신이 자유분방하게 이뤄지는 라디오 담론 네트워크를 구상했다. 1910년대의 자유분방했던 라디오 클럽의 유산이 국가와 자본에 포획되어 허무하게 꺾이지 않았다면 텔레커뮤니케이션의 역사는 지금과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지난 시대의 미디어 상상력을 통해 지금의 미디어 환경을 낯설게 다시 관찰할 수 있다.
방송을 듣기만 하는 몸에서 방송하는 몸으로 전환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전파의 저편을 향해 말하기 위해서, 공들여 이야깃거리를 준비하고 완성도를 높이려 노력하는 하루란 무엇일까? 오늘날의 게임 문화에서 이런 수행성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게임은 다양한 스케일과 채널을 갖춘 커뮤니케이션 장이면서, 쌍방향 방송이자 2차 창작(MOD)의 무대로 완연히 자리 잡았다.8) 여기에서 더 나아가 게임이 (지난 시대 사람들이 영화가 그럴 수 있길 바랐던 것처럼) 문학과 회화, 연극, 음악, 로우 테크와 하이 테크, 구 미디어와 뉴 미디어를 새롭게 배치(n-1)하는 미디어 실천의 장이 될 수 있을까?
* RAC7이 2015년에 발표한 「Dark Echo」는 청각이 중심이 되는 게임이라는 점에서 이전 시대의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과 비교해볼 만한 작품이다. 비록 현실화되지 못했지만 이노 겐지는 호러 버전의 청각 게임을 「리얼 사운드」의 후속작으로 발표하려 했다. 대상보다는 상황에 집중하게 되는 청각의 특징을 살리려면 연애물보다는 호러가 유리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의 방법론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될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흔히 문명화되지 않은 감각으로 취급되는 후각, 촉각이 증폭될 수 있도록 세가 새턴을 다른 장치에 뒤섞어 해킹해볼 수도 있겠다. 라디오에서 제거된 쌍방향 통신성을 복원하고, 참가자들이 변주된 이야기를 주고받는 네트워크 구축 역시 가능하다. 쉽게 접속하고 검색되며 파편화된 정보가 얄팍하게 소비되는 일이 만연한 오늘날의 미디어 환경에서, 애써 특권과 중심에서 돌아 나와 무한히 변신하려는 게임 실험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