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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 추상, 그리고 시뮬레이션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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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5. 12. 10.

오토마타와 시뮬레이션 사이


자동으로 움직이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일에는 묘한 즐거움이 있다. 물을 아래가 아니라 위로 쏘아 올리던 고대 로마의 분수부터 폭포 아래에서 쉼 없이 돌아가는 거대한 물레방아까지, 우리는 스스로 ‘작동(作動)’하는 대상에서 일종의 희열을 느낀다. 그리스의 헤론이 만든 회전하는 증기 장치에서 근대 산업기술 사이를 비집고 등장한 다양한 오토마타까지, 작동하는 무언가가 주는 즐거움은 기술의 고도화 여부와 관계없이 인류 문화 한켠을 차지해 왔다.


디지털게임의 한 장르로 자리 잡은 ‘시뮬레이션’은 이러한 작동의 세계를 한발 더 밀고 나간 개념이다. 단순히 작동을 바라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작동에 직접 개입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 시뮬레이션의 독특한 즐거움이다.


무언가를 원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게 만든다는 말은, 동시에 그 과정에서 언제든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뮬레이션’이 본래 게임 장르가 되기 이전에는 현실 세계의 현상과 질서를 모델링을 통해 재현하는 기술적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실제 장치나 제도를 구현하는 데 드는 비용—경제적 비용뿐 아니라 실패가 낳는 기회비용까지—을 절감하기 위한 방식이었다. 다시 말해 “작동의 실패는 언제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셈이다. 단순히 작동을 구경하는 즐거움은 게임화된 시뮬레이션 속에서는 실패의 위험을 관리하고 극복해 ‘성공적으로 작동하는 무엇’을 만들어냈다는 성취의 즐거움으로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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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드버그 장치(위)와 <요절복통 기계>(1992)는 겉보기엔 비슷하지만, 전자가 완성된 작동 장면을 감상하는 데 초점이 있다면 후자는 장치를 ‘만드는 과정’ 자체의 즐거움에 집중한다.

우리가 즐기는 시뮬레이션 게임에는 이 두 가지 즐거움이 나란히 담겨 있다. <팩토리오>에서 플레이어가 설계한 자동화 공장이 오차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풍경은 시각적 쾌감을 넘어서는 스펙터클이다. 동시에 그 완성된 체계를 직접 만들었다는 뿌듯함도 있다. 오토마타를 바라보는 즐거움과, 그 오토마타를 스스로 설계했다는 즐거움이 하나의 장르 안에서 조우한다. 완성된 레고 테크닉을 바라보는 기쁨과 레고를 조립하는 과정의 기쁨이 함께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즐거움은 시뮬레이션 장르의 고유한 지점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대전격투 게임을 떠올려보자. <철권>에서 플레이어는 복잡한 프레임 사이로 움직이며 상대의 체력을 깎아나간다. 여기서도 실패의 가능성이 전제되어 있고, 이를 넘어 승리했을 때의 기쁨은 분명 크다. 하지만 기술과 기술이 매끄럽게 연계되는 순간은 게임 속에 실시간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짧은 리플레이를 통해 스쳐 지나간다. 완성된 순간 자체를 오래 관조하는 구조가 아니다. 때로는 컷신처럼 게임 외부로 튀어나오거나, e스포츠나 영상 콘텐츠의 형태로 아예 바깥에 존재한다.


반면 <산소미포함>에서 완성된 지하도시가 철컹거리며 돌아가는 광경을 바라보거나, <롤러코스터 타이쿤>에서 자체적으로 굴러가는 완성된 공원을 지켜보는 즐거움은 시뮬레이션 장르의 플레이어들에게 매우 중요한 경험이다. 완성물을 관조한다는 것은 ‘복잡성을 장악했다’는 증명과도 같다. 복잡한 체계를 단순화된 규칙으로 조정해 낸 결론이 단순히 ‘승리!’라는 순간이 아니라, 그 완성된 작동이 펼쳐 보이는 논리적 풍경 전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조금 현실적인 비유를 들자면, 제국을 완성한 권력자가 느끼는 ‘잘 돌아가는 제국’의 감각에 가깝다. 화폐와 도량형을 통일하고, 인프라를 하나의 질서 하에 묶어낸 진시황이 느꼈을 법한 그 만족감—시뮬레이션 게임이 겨냥하는 지점은 어쩌면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시뮬레이션에서 추상되는 것들


시뮬레이션 게임에 ‘제국의 지배자’가 되는 즐거움이 있다면, 조금 뜬금없게 들릴 수도 있다. 물론 시뮬레이션 게임을 즐기는 플레이어들이 모두 권력지향적일 리 없다. 현실에서 권력을 행사하려면 엄청난 리스크와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타인을 억압하거나 제거하는 폭력의 문제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회적 법과 제도를 통해 이러한 욕망을 통제해 왔다.


‘게임’으로서의 시뮬레이션이 의미를 갖는 이유는, 본래의 시뮬레이션이 그랬듯이 현실의 비용—물리적·경제적·윤리적 비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놀이를 위한 시뮬레이션은 제한된 가상세계 안에서 적당한 성취를 맛보게 하고, 그 과정은 현실보다 훨씬 가볍다.


이 가성비 높은 즐거움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이 바로 ‘추상화’다. 현실에서 어떤 욕망을 구현하려면 수많은 조건들이 따라붙지만, 놀이로서의 시뮬레이션은 그중 많은 요소를 과감히 생략한다.


전략 시뮬레이션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를 보자. 플레이어는 군웅할거의 시대에서 천하통일을 목표로 한다. 영토는 인구와 생산력 같은 기본 스탯을 가지고 있고, 내정을 통해 수치를 끌어올린다. 군대를 징병하려면 농업·상업 개발과 인구 증가를 통해 얻은 금과 식량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내정’이라는 복잡한 개발 과정은 게임 안에서 그저 장수에게 하나의 커맨드를 실행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렇게 간단히 처리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현실의 토지개발 과정을 그대로 모사하면 게임의 주제—군웅할거의 경쟁—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시뮬레이션이 주는 즐거움에 방해가 되는 요소는 현실과의 대응 여부가 아니라, 재미를 기준으로 무엇이 남고 무엇이 사라지는지가 결정한다.


<심시티>도 마찬가지다. 이 게임은 도시의 성장과 번영을 탁월하게 그려내지만, 그 우상향 그래프의 바탕에는 경제력, 특히 땅값과 세금 구조가 놓여 있다. 그렇기에 디테일을 구현하면서도, 예컨대 땅값 상승으로 기존 주민이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 같은 현실의 복잡한 요소들은 과감히 추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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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시뮬레이션 게임을 평가하는 하나의 질문은 “무엇이 추상되었는가?”다. 이 기준을 플레이어마다 다르게 받아들이기에 장르 안에서도 다양한 논점이 발생한다. 실제 전투기와 흡사한 디테일이 ‘진정한 시뮬레이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에이스 컴뱃>이 납득되지 않는다. 반면 <팰콘 4.0>의 <자본론>보다 두꺼운 매뉴얼 앞에서 좌절한 이들에겐 <DCS 월드> 정도면 충분히 ‘현실적인 시뮬레이션’이다.



추상과 정치


이 지점에서 ‘시뮬레이션’과 ‘시뮬레이션 게임’은 분리되어야 한다. 양자는 정치적으로 다른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무엇을 추상하고 무엇을 남겼느냐가 즐거움의 기준이 되는 순간, 게임은 의도치 않은 정치적 해석에 휘말릴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심시티>의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도 여기에 속한다.


<문명> 시리즈는 이런 문제가 훨씬 더 첨예하게 드러나는 사례다. 이 게임은 인류사를 데이터와 연산을 기반으로 재구성하며 플레이어에게 ‘다른 시간선’을 만들어낼 기쁨을 준다. 실존 역사와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 자체가 즐거움의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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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작사는 이 현실과 가상 사이의 간극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 왔다. 서구 백인 남성 중심으로 쓰인 기존 역사 서술의 한계를 보완하고자 지도자의 성비를 조정하고, 말리·하와이·폴리네시아 같은 비서구 문명을 적극 편입했다. 최근 시리즈일수록 점령과 정복 중심의 승리 조건에서 벗어나 과학·문화·종교·외교 승리 등 다양한 엔딩을 제시하며 제국주의적 서사의 편향을 완화하려 노력한다. 그럼에도 “역사에 승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따라붙는다.


이는 결국 ‘추상’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시뮬레이션 게임은 고정된 서사를 보여주는 대신 여러 요소를 배치해 플레이어가 조합하도록 설계한다. 이 과정에서 재미를 위해 무엇을 추상할지 결정하는 순간, 의도와 다르게 정치적 메시지가 발생할 수 있다. 재미를 위한 삭제가 ‘의도적 누락’으로 읽힐 때, 게임은 본래의 목적을 떠나 새로운 의미를 낳는다. 플레이어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와 세계를 구성하는 데이터의 일부가 빠져 있다는 사실은, 그 세계가 이미 정치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현실 모사와 재미, 혹은 즐거움의 문제로서의 시뮬레이션


게임 커뮤니티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 중 하나는 “게임은 재미가 최우선!”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말에 온전히 동의하진 않는다. 게임만이 재미를 추구하는 매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뉴스나 다큐멘터리도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재미’를 준다.


특히 현실의 논리를 재현하는 시뮬레이션 장르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복잡해진다. 시뮬레이션 게임은 현실의 구조를 기반으로 삼되, 재미를 위해 일부 요소를 추상해야 한다. 이는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요구와 ‘재미있어야 한다’는 요구가 충돌하는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시뮬레이션 게임은, 앞서 언급한 오토마타 비유를 조금 바꿔 말하면 마치 건프라 조립 세트에 가깝다. 완성품을 감상하는 즐거움과 만드는 과정의 즐거움이 하나의 패키지로 묶여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은 결국 현실의 특정 논리를 어떤 방식으로든 모사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현실의 모든 요소를 담아내는 시뮬레이션은 이미 게임이 아니라 실제 시뮬레이션 시스템이다. 게임으로 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추상이 필요하고, 그 추상은 곧 ‘무엇을 빼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라는 선택을 포함한다. 이 선택이 바로 정치다.


따라서 시뮬레이션 게임을 플레이한다는 것은, 어쩌면 상당히 정치적인 행위다. 무엇이 빠져 있고, 무엇이 강조되었는지, 그 결과로 만들어진 세계가 어떻게 ‘완전한 작동’처럼 느껴지는지를 살펴보는 일. 이러한 감상과 이해는 시뮬레이션 게임을 보다 비평적으로 즐기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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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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