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중시계의 이름은 플레이어에게 내리는 일종의 명령이다. 죽음이라는 사건을 기억하라(memento mortem). 그리고 기억하기 위해, 죽음이라는 개념을 상상하라. ‘기록’될 죽음 위에서 죽음의 ‘기억’을 상기하라. 그러므로 결국, 죽음의 장면(mortem)이 아닌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비디오게임이 미각의 재현에 언제나 주춤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이중적이다. 먼저 미각을 전달할 ‘출력장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부터 치명적이다. 물론 비디오게임이 사실의 재현매체도 아니거니와, 아직까지 맛을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음식 그 자체밖에 없다는 점에서 크게 문제될 만한 사유는 아니다. 그러니 또 다른 문제 쪽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어드벤처 게임이란 상당히 이상한 맥락의 장르명이다. 농담을 조금 보태자면, 서사가 있는 비디오 게임 중 ‘어드벤처’를 경험하지 않는 게임이 어디 있겠는가? 어니스트 아담스Ernest Adams는 『 Fundamental of Game Design』에서 ‘많은 모험적인 특징을 가진 게임들이 어드벤처 장르가 아니며, 반대로 많은 어드벤처 장르의 게임들이 모험을 다루지 않는다.’라며 이 장르명이 가진 이상한 아이러니를 언급한다.
이 때, ‘나’에게 ‘너’는 교환 불가능한 대상으로 남는다. 이 교환 불가능성은 ‘너’가 게임을 특별히 잘해서 남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달성한 순간은 달성의 정도와 무관하게 영원히 감각으로만 남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너’가 아닌 다른 누구를 앉힌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감각을 대체할 수는 없게 된다. 이것이 코옵 플레이의 마술이다.
「테라 닐」 역시 시작시에는 건설을 위해 마련된 빈 공간을 보인다. 하지만 그 공간은 자연의 존재감 조차도 희박하다. 이 모든 공간은 ‘오염된 불모의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플레이어는 이 장소를 자원화해 부강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 자체를 자연의 공간으로 되돌릴 책임을 부여받는다. 즉 이 빈 공간에 올려놓는 모든 ‘건물’들은 그 자체가 자본적 축적을 위함이 아닌, 이 빈공간에 자연의 가능성을 심어놓기 위한 도구로 기능한다. 플레이어는 각 스테이지가 요청하는 정도의 ‘자연 회복’을 달성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