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 Back

‘너’의 가치를 소멸시키는 ‘우리’의 게임들 : 헤이즈라이트의 강제적 코옵 게임들에 관해

28

GG Vol. 

26. 2. 10.

비디오 게임 메커닉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그럴싸한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종종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허드슨 소프트의 1983년 작 「바이너리 월드」를 떠올리곤 한다. 이 게임의 메커닉은 1인에 의한 비대칭성의 동시조작을 그 중심에 둔다. 게임의 스테이지는 좌우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 스테이지의 상단에만 협소하게 연결된 통로가 보인다. 플레이는 좌우의 두 캐릭터(패미컴 판이라면 펭귄)을 동시에 조작하는데, 양자는 Y축의 움직임은 공유하지만 X축의 움직임은 반대로 적용된다. 한쪽의 펭귄은 플레이어의 조작계 그대로 움직이지만, 반대쪽의 펭귄은 역전된 X축의 움직임을 가진다. 플레이어는 이렇게 의도적으로 흐트러진 두 조작계에 적응해가며 두 펭귄을 골인 지점에서 만나게 해야 한다. 두 캐릭터는 연인이라는 설정이며, 플레이어가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는 '사랑'이라는 감정이다. 게임의 메커닉은 명백히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지를 그 불편한 조작계로 체험시키고 있다.

 

「바이너리 랜드」는 1인 플레이 게임이지만 이 게임을 통해서 코옵 플레이라는 독특한 수용자성의 면모를 얼핏 들여다볼 수 있다. 코옵 플레이, 그러니까 '두 플레이어의 협업'이라는 개념에는 양자간의 어긋남과 불응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코옵 플레이의 핵심은 둘이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그 맥락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최초의 아케이드용 코옵 플레이 게임으로 알려져 있는 「파이어 트럭」 역시 전열차와 후열차를 각자 움직여 목적지까지 간다는 '어긋남'의 감각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플레이의 쾌감은 둘이 하나처럼 움직이는 것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의 움직임에 지나치게 간섭해 해결 불가능한 혼란이 발생하는 것을 전제한다. 두 플레이어의 놀라운 협응이 혼돈을 정지시킬 때에 쾌감은 발생하는 것이다.

 

ree
* 「바이너리 랜드」(1983)는 협응의 문제를 한 명의 플레이어에게 체험시킨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코옵 플레이의 메커닉, 아니 그보다는 코옵 플레이를 발생시키는 전제는 비디오 게임의 역사를 따라가며 점차 변화해왔다. 그 미묘한 변화는 둘의 ‘차이’를 얼마나 벌려놓는지의 문제와 관계된다. 예를 들어 닌텐도의 「마리오 브라더스」나 타이토의 「버블 보블」, 테크노스 재팬의 「더블 드래곤」 같은 아케이드 코옵의 대명사같은 게임들은 차이라는 개념을 극도로 좁혀놓는다. 이들이 언제나 '형제' 또는 '쌍둥이'라는 설정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여기에는 양자(1플레이어와 2플레이어)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어야 한다는 명제가 붙는다. 형제 또는 쌍둥이라는 설정은 그 동질성을 구태여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다. 말하자면 이 당시의 코옵 플레이는 협력성이라는 목표지향은 작동하고 있었을지언정 둘 사이의 불협화음은 오직 상황적 문제로만 제기되었다. 「마리오 브라더스」의 경우, 뒤집어진 적을 쳐내려는 찰나에 다른 플레이어가 그 적을 되돌려놓아 어이없게 사망하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연출되곤 했다. 이 때에 둘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이란 '나'라는 플레이어 역시 작동시킬 수 있는 수행성의 가능태로서 존재한다. 즉 이 사건들의 통제 불가능성은 '나'의 대행된 몸을 통해서 유추하거나 다시금 재현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의미다. 이런 전제를 경유하자면, 이 때 코옵 플레이의 대상인 두번째 플레이어, 이른바 '너'는 구태여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네'가 존재하기에 흥미로워지는 국면이 있기야 하겠지만, '내'가 게임을 올바르게 돌파하는 데에는 오히려 방해되는 면도 있었던 셈이다. 이 형태의 '너'는 소통이 가능하지만 한편으로는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도플갱어나 다름 없었다.

 

그러니까 차이는 오히려 그것의 필요성의 문제와도 결부되는 것 아닐까? '내'가 돌파할 수 없는 것을 '너'라서 돌파할 수 있게 되는 것. '나'의 방식만으로는 유추와 재현이 불가능한 것을 이루어주는 방법으로서의 '너'를 마주시키는 것이 변화의 명제였을 수도 있겠다. 전반적으로는 기능이 같지만 특수 공격에서만 차이가 발생하는 「서유항마록」 정도에 도달하면 플레이어로 하여금 '캐릭터를 통해 어떠한 해결법을 제시하겠다'라는 차이의 문제가 드러난다[1]. 캡콤의 「파이널 파이트」 까지 온다면, '숙련된 내가 더 다루기 어려운 캐릭터를 선택해 너를 보조하겠다'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다름의 방식이 도래한다. 캡콤은 이런 탐구의 선지자이며 선구자다. 이 방식의 극한을 아케이드라는 공간에서 체험시킨 것이 바로 「던전즈 & 드래곤즈 : 섀도우 오버 미스타라」(이하 「SOM」)다. 이 게임에 등장하는 서로 다른 클래스는 서로 다른 조작, 기능, 해법, 필요를 지닌다. 게임을 진행하기 위해서 플레이어들은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 클레릭에게는 치료를 요구하고, 특정한 무기나 아이템은 다른 이의 기능을 위해 양보한다. 상자를 여는 캐릭터를 통해 변화하는 아이템의 다이내믹함은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결정과 연결된다. 이 때 중요한 건 플레이에 그가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다. 파티에 클레릭이 없다면 치료 마법을 요구할 수 없다. 매직 유저가 없다면 광역 마법을 통해 적을 일소하거나 보스를 빠르게 다운 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SOM」은 함께 플레이하는 타인의 존재가 소통의 방식을 바꾸는 중요한 체험을 준다. 「몬스터 헌터」 시리즈의 근간이 여기에서부터였다고 해도 그다지 과장은 아닐 수 있다.

 

동질성과 차이의 문제를 지나치면 그 다음 마주하게 되는 것은 필요성의 문제다. 차이의 발생과 필요성의 발생은 온건히 맞물리지 않는다. 클레릭이 있다면 치료를 요구할 수 있지만, 치료 마법은 게임 플레이의 충분 조건은 되더라도 필요 조건이 되지는 않는다. 내가 더 뛰어나면, 숙련되어 있다면, 적의 패턴을 잘 알고 있다면, 더 안전한 루트를 알고 있다면 '너'의 도움을 구태여 받을 이유는 없다. (물론 있는데 구태여 만류할 필요까지야 없겠지만 말이다.) 이제 '너'가 다르다는 사실은 충분히 인지되었다. 하지만 '너'가 필요하다는 문제가 근원으로 들어오지는 않는다. '너'는 여전히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문제 없는 상황이 된다.

 

그렇다면 '너'를 지우는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그건 공교롭게도 비디오 게임이 기술 기반의 매체라는 사실에서 나온다. 비디오 게임은 포커를, 바둑을, 보드게임을 혼자서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비디오 게임의 연산 처리 능력은, 때로 '너'의 필요성을 지우기 위해 동원된다. TT 게임즈의 레고 게임 시리즈는 이 문제에 있어서 가장 흥미로운 샘플이다. 이 시리즈에는 '두 개의 버튼을 동시에 누르기', '한 사람이 플랫폼을 만들어준 사이에 점프해 넘어가기' 같은 협력 기반의 퍼즐이 자주 등장하지만, 그 과정에서 구태여 인간인 '너'를 필요로 하진 않는다. 홀로 플레이하는 나에게는 그 모든 일들을 보조할 AI 서포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캐릭터는 버튼을 함께 눌러주고, 내가 점프하는 동안에 플랫폼의 형성을 유지시켜 준다. 그러고보면 「SOM」에도 여러개의 발판 스위치를 눌러 들어갈 수 있는 방이 있긴 하지만, 그 근처에는 언제나 '사람을 대신할' 갑옷상像이 준비되어 있었다. (어떤 플레이어들은 이에 더해 적 캐릭터를 이용해 버튼을 누르기도 한다.)

 

ree
*「레고 호빗」(2014)같은 레고 비디오 게임들은 AI를 보조를 통해 협력의 퍼즐을 돌파할 수 있다.

 

물론 비디오 게임이 꼭 '너'를 느끼게 해줘야 하는가부터 의문을 던질 수도 있다. 물론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에는 이미 ‘네’가 존재해버린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너’와 ‘나’를 어떻게 관계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더 논해볼 수 있다. 여기에는 이전까지 말한 두 가지 명제가 중요하게 작동한다. 그것은 첫째, 차이를 가질 것 그리고 둘째, 상대를 필요로 할 것이다. 이 두가지 명제 중 하나라도 부재하다면, 우리는 비디오 게임의 세계에서 '너'를 요구하지 않게 될 테니까 말이다. 따라서 이 모든 전제를 수렴한다면, 이 안에는 ‘나’와 ‘너’라는 관계의 문제가 따라붙는다. 즉, 1플레이어인 ‘나’에게 있어서 ‘너’는 무관계한 누군가가 되어서는 안된다. ‘너’는 필요한 협력의 존재로서 바로 ‘나의 플레이’라는 세계에 초대되어야 한다. 즉 ‘나’와 ‘너’가 함께 게임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일종의 사건이 된다.

 

오스트리아의 종교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세계를 맞이하는 사람의 몸은 두 종류의 근원어, ‘나-너’와 ‘나-그것’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부버는 ‘나-너’라는 근원어는 ‘나’라는 개념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존재해온, 우리의 본질에 가까운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나-그것’의 근원어로 세계를 바라보게 되며 이는 사뭇 운명적이다. 이 때, ‘나-그것’이라는 근원어는 내가 대상을 관찰, 계측, 수량화, 가치 매김 등으로 만드는 방향성을 지칭한다. 부버는 나를 둘러싼 세계의 형상과 흐름은 ‘나-그것’을 향해 가는 결정론을 지니기에, ‘나-너’에 대한 지향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물론 부버의 논의가 가진 거대함을 비디오 게임의 코옵 플레이에 적용하는 것이 상당히 어색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나-그것’이라는 근원어의 규정은 이상할 정도로 비디오 게임의 수량화된 세계를 감각하는 우리의 체계와 닮아있다. 그렇다면 비디오 게임에서의 ‘나-너’라는 관계, 대상을 ‘그것’이 아닌 더 본질의 무언가로 감각하고 존치시키는 방식에 대해서 더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헤이즈라이트와 강제적 코옵Mandatory Co-Op


헤이즈라이트의 ‘강제적 코옵Mandatory Co-Op’ 게임들, 「어 웨이 아웃」, 「잇 테익스 투」, 「스플릿 픽션」의 특징은 이러한 ‘나-너’라는 관계를 통해서만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 이것은 게임의 기초적인 메커닉을 도해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결을 가진다. 단순히 협력적 게임 플레이, ‘내’가 무언가를 할 때 ‘너’의 도움을 받는다는 경험의 문제만으로는 이 게임들을 전부 설명할 수 없다. 여기에서 도사리는 건 그보다는 더 명백한 조건이다. 이 게임들은 게임의 플레이를 위해 특정화된 ‘너’를 요구한다.

 

가장 알기 쉬운 조건은 ‘랜덤 온라인 매칭’의 비적용이다. 요제프 파레스는 이 게임들을 ‘소통이 가능한 누군가’와만 플레이가 가능하도록 조건짓는다. 온라인 플레이는 가능하지만 불특정한 누군가와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특정할 수 있는 누군가와 온라인으로 즐기겠다면, 프렌즈 패스를 이용해 아주 쉽게 두 사람이 함께 플레이할 수 있다. 이 ‘강제적 코옵’ 플레이의 핵심은 모두 이 조건과 결부되어 있다.

 

이 조건에서 발생하는 것은 강력한 소통의 가능성이다. ‘동시에 또는 연속된 특정 행위를 함께 해서 상황을 돌파한다’는 전제조건에서 특별한 것이 작동하지 않는다. 헤이즈라이트의 게임들은 이 행위를 ‘직접적 소통의 방식을 통해’ 돌파하는 것을 유도하고 있다. 물론 플레이어가 원한다면 온라인을 통해서, 때로는 모르는 사람에게 프렌즈 패스를 전달해, 함께 플레이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하나 둘 셋’의 구호를 던져서 함께 빠져나가야 하는 손뼉치기의 형식에서 어색함을 느낀다면 이 게임들의 지향으로는 좀처럼 나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보면 이 게임들은 플레이의 목적에 역전을 두고 있는 느낌도 든다. 그러니까 게임을 플레이 하기 위해 두 사람이 동원되기 보다는, 때로는 두 사람이 함께 하기 위해서 게임들이 동원된다는 바로 그 느낌 말이다. 특히 요제프 파레스가 이 게임들을 위해 준비해놓은 서사의 틀이 이런 감각을 확충시킨다. 파레스가 말했듯 이 게임들에는 각각의 ‘관계의 감정’이 코드처럼 준비되어 있다. 「어 웨이 아웃」은 신뢰, 「잇 테익스 투」는 사랑, 「스플릿 픽션」은 우정이다. 이 게임들의 서사는 이 관계 감정들의 실현 불가능 혹은 분열의 직전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치 두 플레이어 사이에서도 이 관계들이 예비되어 있다는 듯이. 그런 면에서 앞서 말한 역전의 느낌은 게임 플레이 내내 도사린다.

 


마법의 사각형Magic Rectangle


그래서 이 게임들을 플레이할 때 느끼는 감각에는 특별한 구석이 있다. ‘특정할 수 있는 누군가’라는 조건을 클리어 하고 나면, 함께 플레이하는 ‘너’와 게임이라는 매개를 통해 연결되는 듯한 느낌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현실의 ‘너’는 현실의 조건들과 매개되어 있기에 단순하게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함을 가진 대상이다. 하지만 「잇 테익스 투」를 매개한다면, ‘너’는 특정한 스테이지에서 ‘내’가 발사하는 못을 박아주는 망치가 되어준다. 못 만으로는 게임 내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매우 특별해진다. 스테이지의 구조에 따라서 ‘너’는 망치를 휘두르는 사람, 화염을 쏴주는 사람, 중력을 거스르는 사람이 되며, ‘나’ 혼자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함께 해결해주는 둘도 없는 존재가 된다.

 

그럼에도 더 특별한 것은 이것이 어떠한 ‘롤플레이’의 연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잇 테익스 투」를 플레이할 때, 조준에 자신이 없는 파트너가 ‘나’에게 못의 역할을 넘겨주고 자신은 망치의 역할을 가져간 경우가 있었다. 우리는 순식간에 코디와 메이의 입장을 역전시켰지만 그로 인한 혼란은 그다지 겪지 않았다. 즉 우리에게 있어서 누가 코디이고 누가 메이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너’가 아닌 다른 이가 나에게 코디 또는 메이가 되어줄 수는 없었던 것일 뿐, 우리는 우리의 필요에 따라 우리를 매개하는 ‘대역의 몸’을 바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ree
*「스플릿 픽션」(2025)을 플레이 하다보면 서로의 특기를 따라 캐릭터를 교체하는 경우가 생긴다.

 

따라서 여기(=플레이의 장소)에는 4개의 몸이 있다. ‘나’, ‘너’, ‘리오/코디/미오’, ‘빈센트/메이/조이’라는 몸들. 실제의 몸과 디지털의 몸은 각각 묶음 쌍이 되어 서로를 교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실제와 디지털의 관계라면 언제든지 서로를 교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그리고 ‘리오/코디/미오’와 ‘빈센트/메이/조이’가 각별해지는 만큼 실제의 몸들도 그러한 가능성을 동시에 지니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결과물로서의 컷씬을 감상하며 ‘우리’의 성취와 분열 가능성에 대한 연장된 소통을 나눈다. 이 안에는 외부와의 교환 불가능한, 내부에서만의 한정된 교환을 허가하는 닫힌 체계가 발생한다. 요한 하위징아의 단어를 전유하자면, 이는 ‘마법의 사각형’이다.

 

이 닫힌 사각형 내부는 정말로 제의적이다. 디지털의 몸이 ‘함께’ 체험하는 것은 미묘하게도 ‘우리’가 함께 체험하는 감각을 준다. ‘우리’가 함께함의 기능을 증가시킬 수록, 디지털의 몸이 나아가는 ‘함께’도 점차 효과적으로 변모한다. 디지털의 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들은 감상의 대상이면서도 ‘우리’의 관심사가 된다. 즉, ‘우리’는 디지털의 몸을 매개하며 현실의 동시적 행위를 체험함과 동시에 디지털의 몸이 진행하는 서사를 감각한다. 사각형 안에서 네 개의 꼭짓점은 서로를 ‘그것’으로 인지하지 않는 관계적 울타리를 짓는다.

 

그렇기에 「어 웨이 아웃」의 마지막 부분, 빈센트의 배신과 대립의 구성은 상당히 이질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Gamecloud의 닉 밸런타인Nick Ballantyne은 이 게임의 후반부에 대해 《The What, Why & WTF: A Way Out’s Ending Sucked》[2]라는 강력한 제목으로 비판한다. 이런 비판은 대체로 강한 협력적 체계를 갑작스레 대립 구조로 바꿔 불편함을 야기했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하지만 마법의 사각형의 구조로 본다면 조금 관점이 달라진다. 이 게임에서 빈센트가 배신한 대상이 디지털의 파트너인 리오만이 아닌 것이다. 그는 현실의 ‘두 몸’ 까지도 배신한 것이 된다. (필요에 따라 디지털의 몸을 서로 바꿨을 수도 있는) ‘우리’는 그것을 조작하는 와중에도 빈센트의 진위와 진심을 알지 못했다. 이것은 규약의 위반이며, 사각형의 마법을 깨어버릴 저주다. 이후의 작품들인 「잇 테익스 투」와 「스플릿 픽션」이 주인공들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심어놓을지언정, 다른 ‘셋’을 배신하지 않도록 구성하고 있는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마법의 사각형은 비디오 게임이라는 ‘그것’의 세계에서 ‘우리’를 확고히 만들 수 있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사건이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 예찬」에서 이렇게 말한다.

 

ree
*「어 웨이 아웃」(2018)의 후반 전개가 주는 파격적인 배신감은 역설적으로 ‘마법의 사각형’의 존재를 확실히 알린다.

“예컨대 이런 것입니다. 하나가 아닌 둘에서 시작되어 세계를 경험하게 될 때, 세계는 과연 무엇일까? 동일성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차이로부터 검증되고, 실행되고, 체험된 세계란 과연 무엇일까? 저는 사랑이란 바로 이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 좀 더 솔직히 말해 차이의 관점에서 시련을 영위하는 것에 관여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에 시작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포함시키는 그런 계획입니다.”[3]

 

따라서 차이는 전제조건이어야 하지, 규약의 위배를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오직 알려진 다름만이 다름으로 인정될 때에야 ‘우리’는 코옵이라는 사건과 마주할 수 있다.

 


가치없는 ‘너’와 마주하는 순간으로서


물론 이러한 규약의 힘과 에너지가 헤이즈라이트의 게임들에게서만 나오지는 않는다. 「킵 토킹 앤 노바디 익스플로드」나 「더 패스트 위딘」, 「레고 보이저스」같은 게임들 역시 특정화된 대상으로서의 ‘너’를 소환한다. 이 게임들에서 무엇인가를 달성하고, 함께 손뼉을 치고 기뻐할 때 ‘너’는 그 순간 특별한 대상으로서 존재한다. 부버는 ‘그것’의 세계에서 우리가 ‘너’를 느낄 수 있는 방법은 ‘너’로 영원히 존재하는 종교적 대상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코옵 플레이를 통한다면, 일시적으로나마 ‘너’를 감각하는 것이 가능한지도 모른다.

 

이 때, ‘나’에게 ‘너’는 교환 불가능한 대상으로 남는다. 이 교환 불가능성은 ‘너’가 게임을 특별히 잘해서 남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달성한 순간은 달성의 정도와 무관하게 영원히 감각으로만 남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너’가 아닌 다른 누구를 앉힌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감각을 대체할 수는 없게 된다. 이것이 코옵 플레이의 마술이다. 앞서 언급한 조건들, 차이를 가질 것과 필요로 할 것이 만족된다면 특별한 ‘우리’가 탄생할 조건도 될 수 있다. 대체불가능성의 탄생이다. 빌럼 플루서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타자인 너는 내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죽으면 내가 너에 관하여 어떤 손실을 입는 것이 아니라 너의 죽음을 통해 모든 사물들이 가치를 잃는 것이다. 사물들이 가치를 지니는 것은 내가 그것들을 교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그것들을 교환하는 이유는 내가 네 안에서 나를 알아보기 때문이다. 나의 타자인 너는 모든 가치의 무가치한 기반이다.”[4]

 

우리는 삶에서 ‘가치없는 너’를 얼마나 경험할 수 있을까? 공교롭게도 나와 다른 ‘너’가, 게임의 진행을 위해 필요한 존재가 될 때에 우리는 교환 불가능한 경험으로서의 ‘우리’를 맛볼 수 있게 된다. 비디오 게임이라는 필요성의 세계가, 그러니까 ‘그것’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비로소 느낄 수 있다는 아이러니야 말로 ‘우리’가 ‘함께’ 게임을 하는 이유가 된다. 플루서는 이어서 ‘나’와 ‘너’는 죽을 수 있을지언정, ‘우리’는 불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의 게임은 불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옵 플레이는 비디오 게임만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축복이 되리라.

 

ree
* 통신을 주고 받는 「레고 보이저스」(2025)의 두 주인공들

 




[1] 「서유항마록」의 세 플레이어 캐릭터는 기초적인 조작계를 공유하며, 어느 정도의 능력치 차이를 가진다. 하지만 일종의 특수 공격인 대금단大金丹을 소모하는 공격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2] https://gamecloud.net.au/features/opinion/a-way-outs-ending-sucked
[3] 알랭 바디우 「사랑 예찬」, 조재룡 역, 도서출판 길(2010)
[4] 빌럼 플루서 「사물과 비사물」, 김태희·김태한 역, 필로소픽(2023)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이경혁.jpg

(평론가)

만화와 게임, 영화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합니다. MMORPG를 제외한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클리어가 라이프 워크입니다. 스팀덱을 주로 사용합니다.

이경혁.jpg

크래프톤로고

​게임세대의 문화담론 플랫폼 게임제너레이션은 크래프톤의 후원으로 게임문화재단이 만들고 있습니다.

gg로고
게임문화재단
드래곤랩 로고

Powered by 

발행처 : (재)게임문화재단  I  발행인 : 유병한  I  편집인 : 조수현

주소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로 114, 2층(방배동)  I  등록번호 : 서초마00115호  I  등록일 : 2021.6.28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