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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 닐」: 안전한 절멸의 행성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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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5. 12. 10.

건설 경영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연에 대한 문명적 통치를 다룬다. 그 시조인 맥시스의 「심시티」를 시작으로 유비 소프트「ANNO」시리즈, 프론티어 디벨롭먼트의 「주 플래닛」이나 「플래닛 코스터」를 시작할 때 플레이어를 반겨주는 것은 너른 자연의 공간이다. 플레이어에게는 이러한 ‘자연적 풍경’을 깎아내고 변형시키고 자원화할 수 있는 어떠한 특권이 주어진다. 이 관계를 역산해보자. 이 게임들에서 ‘자연의 풍경’이란 아무것도 없는 비어있는 공간, 생동하지 않는 세계로 규정된다. 「심시티」를 켜고 비어있는 세계를 가만히 둔 채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한히 시간을 보내보자. 화면에 수놓아진 자연적 풍경에는 아무런 변화조차 없을 것이다. 이 공간들은 생동하지 않는 세계로 해석되는 게 아니다. 애초에부터 생동하지 않도록 만들어졌다. 오직 플레이어에 의해 문명적 발전이 이루어지도록 제공된 공간일 뿐이다. 도나 해러웨이는 자신의 저서 『Modest_Witness@Second_Millennium』에서 맥시스의 ‘심 시리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기 있는 맥시스사의 게임 「심앤트」, 「심어스」, 「심시티」, 「심시티 2000」 그리고 「심라이프」는 모두 컴퓨터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에 기반한 지도 제작 게임이다. 이 게임들에서는, 생명 그 자체에서와 마찬가지로, 지도 제작이 곧 세계 제작이다.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사이버 공간화의 데카르트적 격자 관습 안에서, 이 게임들은 사용자들이 탐험, 창조, 발견, 상상, 개입의 서사 속에서 자신을 과학자로 여기도록 부추긴다. 데이터 기록 실천, 실험 프로토콜, 세계 설계를 배우는 것은 이 테크노사이언스 영역에서 정상적 주체가 되는 과정의 매끄러운 일부다. 지도 제작 실천은 본질적으로 다양한 목적을 위해 특정한 방식으로 세계를 형성하는 투영법projections을 배우는 것이다. 각 투영법은 특정한 종류의 관점perspective을 생산하고 함축한다.”[1]

 

그런 의미에서 프리 라이브스의 「테라 닐」은 독특한 위상을 지닌다. ‘역 건설게임’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운 이 게임은 ‘발전하기 위한 건설’이라는 목표를 지향하지 않는다. 「테라 닐」의 목적은 자연의 재생에 있다.

 

「테라 닐」 역시 시작시에는 건설을 위해 마련된 빈 공간을 보인다. 하지만 그 공간은 자연의 존재감 조차도 희박하다. 이 모든 공간은 ‘오염된 불모의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플레이어는 이 장소를 자원화해 부강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 자체를 자연의 공간으로 되돌릴 책임을 부여받는다. 즉 이 빈 공간에 올려놓는 모든 ‘건물’들은 그 자체가 자본적 축적을 위함이 아닌, 이 빈공간에 자연의 가능성을 심어놓기 위한 도구로 기능한다. 플레이어는 각 스테이지가 요청하는 정도의 ‘자연 회복’을 달성해야만 한다.

 

여기에 ‘역 건설게임’을 완성시키는 또 다른 메커니즘이 있다. 플레이어는 모든 스테이지에서 자연을 완전히 되살린 뒤, 자신의 모든 건설물을 파괴하고 이 공간을 떠나야 한다. 이를 통해 완전히 인간으로부터 유리되어있는, 스스로 생동하는 자연을 만들어내어야 한다. 플레이어는 마지막의 철수 공정을 마친 뒤 원한다면 얼마든지 재생된 세계를 관람할 수도 있다.

 

「테라 닐」에 최초로 제공되는 빈 땅은 「심시티」 또는 본 장르의 다른 게임들에서 보이는 빈 땅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에 가깝다. 「심시티」의 그곳은 자연인 척 모사되었을 뿐 진짜 의미에서의 자연은 아닌 공간이다. 그것은 생명의 형태를 패러디한 공간이며, 동시에 문명의 통치가 ‘필요한’ 그저 사멸되어 있는는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반해 「테라 닐」의 빈 공간은 본래부터 멸망의 음울함을 가진 공간이다. 「테라 닐」이라는 제목조차 제국주의 시절 원주민의 땅을 ‘주인 없는 땅’이라 명명할 때 사용한 단어 ‘Terra Nullius’를 떠오르게 만든다. 흥미롭게도 게임의 역학에 있어 양 공간의 기능과 목적은 큰 차이가 없다. 오히려 「테라 닐」은 그 죽음의 이미지를 전면화함으로서 장르적 기능을 역행해 재생이라는 목적을 도출해낸다. 「테라 닐」은 ‘역 건설’이라는 게임적 메커닉을 통해 기존의 건설 시뮬레이션들이 가지고 있던 (해러웨이가 정의한) ‘지도그리기’의 역학을 무참히 드러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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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 닐」의 빈 땅

 

그런 의미에서, 「테라 닐」은 일종의 생태주의 게임이다. 그리고 「테라 닐」이 생태주의 게임인 이유는 기존의 건설 경영 게임들이 가진 반 생태주의적 특성 때문이다. 「테라 닐」의 혁신성은 어디까지나 기존의 건설 경영 시뮬레이션들이 가진 ‘지도 그리기’의 역학, 문명에 의한 자연 통치의 보편화에 저항할 때 기능한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 관점을 바꿀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가 진행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건설 시뮬레이션’의 기초적인 메커닉이라는 점이다. 그곳이 오염된 땅이라는 전제가 있다고 한들 플레이어는 올바른 방식으로 건물을 세우고, 그를 통해 포인트를 모으고, 그 포인트를 소모해 다시금 건물을 세워 나가는 방식으로 ‘빈 땅’을 (건물이 아닌 식물로) 채워나간다.

 

리뷰 등에서 종종 지적되고 있듯, 「테라 닐」에는 수상한 미스터리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플레이어가 재생해야하는 이 세계의 문제가 ‘왜’ 일어났는지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이며, 또 하나는 건물을 짓기 위한 (게임 내에서는 녹색의 나뭇잎으로 표현되는) 포인트의 정체가 정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 미묘한 미스터리는 이 게임에서의 문명과 자연 사이에 설명되지 않는 공백이 도사리고 있음을 시사한다.

 


세계는 복원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이 세계는 과연 어떤 연유로 이렇게 파괴된 것일까? 핵전쟁이 있었을까? 극심한 환경오염의 결과인가? 지구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인가? 아니면 운석 충돌에 의한 예상치 못한 파멸인가? 이 조건의 공백은 플레이어의 행위가 올라설 지지대를 치워버린다. 게임은 플레이어에게는 자연을 ‘재생’하라는 미션을 건내고 있을 뿐이다. 즉 플레이어가 지금 수행하는 수복이 실패에 대한 책임의 행위인지, 세계의 재건이라는 극복의 의지인지 모호하게 굴고 있는 셈이다.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재생의 기술을 가진 플레이어와 재생을 필요로 하는 땅이라는 이분화된 관계 뿐이다.

 

말하자면 이 조건이 지워지는 순간, 플레이어에게는 일정한 ‘선한 의지’만이 주어진다. 책임에 대해 설명하지 않기에 그 행위 전체가 자연의 수복이라는 고귀함으로 남겨지는 것이다. 플레이어에게 ‘위대한 일’을 위해 남겨져 있는 이 공간이 바로 「테라 닐」의 비어있는 땅이다. 이 조건은 에코모더니즘의 비전과 연결된다. 2015년 에코모더니즘 선언문An Ecomodernism Manifesto과 함께 발족한 이 사조는 기술 발전을 통해 자연을 보호하고 인간의 더 나은 삶Well-being을 증진할 수 있음을 주장하는 환경 철학이다. 에코 모더니스트들은 인류세Anthropocene의 한계를 인정하며 지금의 세계를 ‘좋은 또는 위대한 인류세’로 만들겠다는 기치를 내건다. 이 사조는 다양한 방면에서의 비판을 겪었다. 특히 클라이브 해밀턴Clive Hamilton은 이들이 인류세를 ‘퇴보의 상징이 아니라 극복을 통해 더 높은 단계로 도약하게 해주는 전환’으로 받아들이며 ‘흥분과 기쁨의 기색을 보이며 환영하고 있다’[2]고 강하게 비판한다.

 

「테라 닐」이 ‘땅’을 다루는 태도 역시 이러한 비판의 도마 위에 있다. 땅의 탄생 조건을 의도적으로 흐리고 있는 이 게임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좋은 또는 위대한 재생’에만 집중하도록 만든다. 그와 동시에 게임에 작동하는 모든 기술적 토대는 자연에 과시적으로 작동한다. 어떻게보면 「테라 닐」의 ‘땅’은 자연적으로 재생할 수 없다는 음울한 자연성을 전제하고 있기도 하다. 이는 「심시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생하지 못하는 땅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이 자본을 증가시키는 것이든, 자연을 재생시키는 것이든 ‘빈 땅’으로 규정된 장소들은 스스로 생장하지 못하는 한계지어진 곳이다. 오직 기술만이 변화를 작동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테라 닐」은 기존의 건설 시뮬레이션과 공명한다.

 


녹색의 자원으로부터


한편 이 게임이 다루는 기술은 상당히 고도의 기술이다. 모두 말라버린 지상에 충분할만치 지하수를 공급할 수 있는 펌프를 시작으로, 주변의 온도와 습도를 극적으로 변동시킬 수 있는 장비, 그에 더해 이러한 기술을 작동시킬 수 있는 고효율의 발전기가 사용된다. 하지만 게임은 이러한 고능한 장비를 ‘어떠한 자원을 통해’ 설치하는지 역시 설명하려들지 않는다. 각 건물의 설치는 게임 내에서 획득하는 ‘녹색의 포인트’를 통해 설치할 수 있는데, 이 포인트는 자연의 회복 정도에 따라 일정량 확보되는 구조다.

 

게임이 의도적으로 흐리고 있는 이 두 개념의 관계, 즉 ‘자연의 회복’과 ‘기술의 설치’는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지 않는다. 애초에 이 관계에는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과연 자연으로부터 무엇인가 채취하지 않고서 이러한 기술을 작동시킬 수 있는가? 플레이어는 기술을 통해 자연을 ‘재생시키는 국면’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대체 이 기술은 어디서부터 왔고 어디로 가는가? 도저히 설명해줄 수 없는 이 관계는 「ANNO 1800」에 대한 반복된 비판과 연결되는 구석이 있다. 해상로를 통한 자원의 보충을 기반으로 하는 「ANNO 1800」은 역사적으로 존재했을 원주민과 착취 노동의 조건을 은근슬쩍 지워버린다. 이 게임에는 그저 일용직 노동자인 호날레로jornalero와 전문 노동자인 오브레로obrero라는 자발적인 존재들이 묘사될 뿐이다. 즉 플레이어에게 있어 어떠한 자원적 획득은 그 채집의 노동과 ‘마찰 없는 관계’로 정리되어 있다. 《PC Gamers》의 사무엘 호티Samuel Horti는 ‘어떤 식으로 보더라도 식민지화를 노예제, 잔혹함, 폭력, 질병과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3]라며 이러한 구조를 강하게 비판한다. 결국 이 끊어진 관계를 통해 플레이어는 자원의 운용에 어떠한 심적 불편함도 겪지 않고 자연스럽게 발전으로 이행하게 된다. 「테라 닐」의 조건도 마찬가지다. 고도의 기술 그리고 설치와 운용이라는 고도의 코스트를 요하는 작업들이 어떠한 물적 조건 하에 이루어지는지 제거됨으로서, 이 게임은 혹여나 기술이 가지고 있을지 모를 자연 착취의 가능성을 은폐한다.

 

물론 이것을 밸런스의 개념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기술이라는 문명의 투입은 자연의 재생 정도와 일정량 균형을 맞추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전제한다면 이 관계는 포인트의 ‘소모’가 아니라 지도 위에 세워진 건물의 ‘점유도’와 대비되는 자연의 회복 ‘정도’로 묘사되는 것이 더 알맞았을지도 모른다. 즉 이 메커니즘에는 명백한 모순이 있다. 「테라 닐」의 메커닉은 매우 알기 쉬운 건설 시뮬레이션의 기본형을 따르고 있는데, 특히 일정한 건설을 통한 ‘수익’과 그 자본의 ‘소비’를 통한 성장 모델은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어찌보면 「테라 닐」은 건설 시뮬레이션에 애초부터 내재되어 있는 착취적 모델을 통해 그 자체를 비판하려는 모순된 그림을 그리는 셈이다. ‘자본의 획득과 소비’라는 관계가 근간이 되어있는 한 비판이라는 목적에는 완전히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떠한 스킨을 사용하고 있다 한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모델로 삼고 있다면, 그저 현 인류의 보편적 사유에 동참하고 있을 뿐이다.

 


분재화된 자연으로


「테라 닐」이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자연은 무엇인가. 어쩌면 이 게임의 가장 흥미로운 메커닉인 철거 국면에 그 답이 있다. 각 스테이지의 말미에서, 플레이어는 자신이 만들어낸 모든 건설물들을 해체하고 그 땅으로부터 빠져나가야 한다. 해체에도 포인트가 소모되기 때문에 건설의 과정에서부터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를 미리 설계해 둘 필요가 있다. 아슬아슬하게 포인트를 소모해 철거 국면을 끝낸 뒤 모선과 함께 날아오를 때의 쾌감이 「테라 닐」의 핵심적인 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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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조성에 의한 보너스 포인트의 목록들

 

하지만 이 때 남겨진 땅은 해러웨이적으로 ‘지도화된’ 땅이다. 플레이어는 이 아름다운 땅을 만들기 위해 땅 전체의 온도, 습도, 방사능의 양 등의 수치를 안정적으로 조절해야 한다. 각 스테이지마다 제시되는 ‘일정한 정도의 환경 조건’을 달성하면 대량의 포인트를 보상으로 받는다. 특정한 환경의 조성은 동물들의 복귀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지나치게 기적같은 상황은 전적으로 수치적 관리에 대한 일종의 보상체계다. ‘동물의 귀환’이라는 상당히 복잡하고 섬세한 생태적인 결과가 그저 (광의의) 경제적 결과로서 부여되는 것이다. 솔직해지자. 이 동물들은 「심시티」에서 RCI의 밸런스를 명확히 했을 때 보상으로 받는 인구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즉 플레이어가 ‘떠나고 난 뒤’ 남겨진 아름다운 땅은 전적으로 플레이어의 기술적 관리에 의한 보상물이다. 재생을 거친 인간의 ‘철수’는 이 보상을 더 아름답게 남기기 위한 극단의 분리주의적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윌리엄 크로넌William Cronon의 관점을 따라가보자. 크로넌은 『The trouble with Wilderness : or Getting back to the wrong nature』에서 야생wilderness라는 개념이 19세기 낭만주의에 의해 발명된 문화적 발명품이라는 사실을 논한다. 이것이 발명품이라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이 ‘야생’이 전적으로 문명 내부에서의 이상화를 위해 자연-문명이라는 이원화를 이용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크로넌이 보는 발명된 야생이란 문명이 바라보는 ‘숭고하고 신성한 사원’이자 ‘강인한 개척자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근간이 된다. 야생을 ‘인간이 거주하지 않는 곳’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오히려 ‘인간이 거주하는 곳’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이 은폐된다. 그리고 인간과 끝없이 분리된 이상적 공간인 자연은 오히려 인간이 점유한 곳으로부터 점차 밀려난다는 것이다.[4]

 

도대체 「테라 닐」에서 재생을 주도하는 인간이 거주하는 곳은 어디인가? 그 곳에 자연은 어떻게 자리잡고 있는가? 재생된 자연에서 인간이 떠나야 함을 당위로 만든다면, 지금 인간의 세계에는 완전히 자연과 격리되어 있는가? 「테라 닐」의 마지막 미스터리는 크로넌이 설명하는 불안의 위계를 담지한다. 「테라 닐」의 인류가 바라보는 자연이란 스펙터클의 대상으로서 잔존하는 거대화한 분재나 다름없는 것 아닐까?

 

「테라 닐」의 플레이를 끝내고 나면 그런 의문에 봉착한다. 왜 이 게임의 인류는 재생된 자연과 하나되어 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인가. 자연의 재생이 가능한 기술을 갖추고 있음에도 자연과의 격리를 선택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어쩌면 「테라 닐」의 인류가 거주하는 곳은 게임의 배경이 되는 행성에서 까마득히 먼 또 다른 행성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곳에는 억류된 오염과 방사능과 오물이 득시글거리고 있을지 누가 아는가. 재생의 기술이 보여주는 모순의 빈 공간에는 이렇듯 분리된 불안의 상상력이 가득 차오른다. 크로넌은 이러한 분리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는다.

 

“우리의 과제는 인간과 비인간, 비자연과 자연, 타락과 비타락이 세상을 이해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개념적 지도로 기능하는 양극적 도덕 저울에 따라 사물을 생각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다. 대신 우리는 자연적이면서도 문화적인 풍경의 전체 연속체를 포용해야 한다. 그 안에서 도시, 교외, 전원, 야생은 각각 고유한 적절한 위치를 가지며, 우리는 불필요하게 다른 것들을 폄하하지 않으면서 그 각각을 찬미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멀리 사는 이국적인 타자만큼이나 내면의 타자와 옆집의 타자를 존중해야 한다. 이는 다른 자연적 사물들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교훈이다. 특히 우리는 도시에서 야생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집"이라는 단어 안에 어떻게든 포함될 수 있는 공통의 중간 지점을 발견해야 한다. 결국 집은 우리가 생계를 꾸리는 곳이다. 그곳은 우리가 책임을 지는 장소이며, 그 안에 있는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최선의 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지속시키려 노력하는 장소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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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건설이라는 메커닉은 결국 그 땅으로부터 떠나는 결과로 연결된다.
 

플레이어가 「테라 닐」의 각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고 볼 수 있는 마지막 이미지는 재생된 자연을 향유할 수 있는 신적인 관점의 감상 모드다. 나무가 우거지고, 비가 내리고, 바다에 산호가 가득한 이 풍요는 인간의 관점으로는 결코 향유할 수 없다. 감상 모드를 끝내고 나서면 사라지는 이 환영과도 같은 이미지에는 실제로 플레이어를 위한 자리는 없다. 잠시나마라도 이 안에서 나무를 베고, 물을 긷고, 낚시를 하는 체험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게임을 모두 끝내면 모든 동물과 식물의 샘플을 실은 우주선이 우주를 향해 솟구치는 감격스러운 광경을 볼 수 있다. 지금까지 플레이어를 이끌어온 환경 재생 매뉴얼이 그 우주선의 내부에 안치된다. 이는 환경의 재생을 끝내고 ‘그들만의 삶’을 인정하며 또 다른 재생의 세계를 찾아나서는 아름다운 광경일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구의 샘플들을 통해 어떠한 환경을 ‘테라포밍’하기 위한 준비처럼도 보일 수 있다. 「테라 닐」의 플레이 플로우가 그 모든 과정을 증명한다. 우주선이 ‘지구의 것’을 가지고 날아가기 때문이다. 물론 조금 더 긍정적으로 상상해보자. 인류는 지구를 두고 다른 행성으로 이주했으며, 지금 가지고 날아가는 모든 샘플과 자료는 그들의 행성을 위한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또 다른 행성을 ‘지구화Terraforming’하려한다는 상상은 끊어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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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복이 끝난 행성은 홀로 놔둔 채, 인간은 우주로 나아간다.

 

아니면 조금 더 급진적으로 나가보자. 혹시 「테라 닐」의 우주에는 인류가 없는 것 아닐까? 이 세계를 재생하려는 의지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 다른 차원, 다른 의식에 의해 발현되는 것 아닐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테라 닐」의 세계 내에는 그 어떤 인간의 흔적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자연 훼손의 업을 가진 인간에 대한 징벌적 태도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런 환경이 제공하는 것은 우리는 절대 가지지 못할 ‘안전한 절멸’의 경험이다. 모니터 바깥의 인간, 그러니까 재생 주체로서의 플레이어는 세계 내부와 무관하게 현전하며 행성을 관리한다. 비어있는 공간에서 절멸의 아픔을 낭만적으로 느끼는 이 주체에게 있어, 최종적으로 제시되는 행성은 그저 잘 가꿔진 분재의 일종일 뿐이다. 그렇다면 샘플을 가지고 떠나는 우주선의 아름다운 상승은 우주 전체가 분재화될 씨앗 운반자로 기능하는 것이다. 안전한 절멸의 경험은 결국 무한한 ‘테라 눌리우스Terra Nullius’가 펼쳐진 가능성의 우주를 꿈꾸게 한다.

 

 



[1] Donna Harraway(1997), 『Modest_Witness@Second_Millennium』, Routledge
[2] 클라이브 해밀튼 지음, 정서진 옮김, 『인류세』, 이상북스(2018)
[3] Samuel Horti(2019), 「What Anno 1800 gets wrong, and right, about colonialism and the Industrial Revolution」, PC Gamers
[4] William Cronon(1995), 『Uncommon Ground: Rethinking the Human Place in Nature』
[5] William Cronon(1995),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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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만화와 게임, 영화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합니다. MMORPG를 제외한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클리어가 라이프 워크입니다. 스팀덱을 주로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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