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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절차와 수사와 죽음과 : 탈군사주의와 전쟁 게임

25

GG Vol. 

25. 8. 10.

야코 수오미넨은 《The Past as the Future? Nostalgia and Retrogaming in Digital Cutlure》에서 ‘디지털 게임을 포함한 미디어 문화는 본질적으로 유아성infantlism, 유치함chindishness 또는 청소년성juvenility을 내포하고 있으며(...)’라고 쓴다. 폭탄 같은 발언처럼 들리지만, 비디오 게임과 걸쳐있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논제다. 요컨데 우리가 게임학이라고 부를때의 루돌로지Ludology의 어원으로부터 발생하는 근원적 질문이다. 우리 사이에는 비디오 게임이라는 것이, 아니 게임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즐거움’에 대한 지향이라는 암묵적 동의가 있다. 이 때에 즐거움을 가장 원초적인 단위까지 훑고 내려가면 결국 유아성, 유치함, 청소년성 같은 것들과 마주하게 되는 것 아닐까?

 

그래서 비디오 게임과 전쟁이라는 두 키워드를 하나로 조합하면 그러한 ‘원초적 즐거움’의 상이 그려진다. 몰려드는 적, 화면을 메우는 총탄, 화면 어딘가에 표시되는 점수 또는 킬마크… 등등. 애초에 군사적 기술의 변용으로 탄생한 이 매체는 「미사일 커맨더」같은 군사주의적 테마의 게임과 함께 성장해왔다. 꼭 그 대상 또는 배경이 현실에 기반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타이토의「스페이스 인베이더」, 코나미의 「콘트라」같은 외계인과의 혈투를 그린 아케이드 게임도 엄밀히 말하자면 군사주의와 매개하고 있다. 직접 전장을 모사하지 않더라도 총기나 냉병기를 다루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조금 과장해서 폴 비릴리오를 경유하자면, 레이싱 게임 같은 기술 중심의 게임 마저도 군사주의에 대한 어슷한 인상 정도는 가지고 있겠다.

 

전쟁과 비디오 게임의 사이에는 언제나 군사주의라는 존재의 무게가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군사주의가 자리잡고 있는 위치는 원초적 재미라는 근원적 공간이다. 반전을 외치는 비디오 게임이 군사적 쾌감을 준다는 루도내러티브 부조화 문제는 구태의연하고 철지난 이야기일 정도다. 그래서, 전쟁과 비디오 게임의 사이에서 이 군사주의를 걷어내면 그 자리에 ‘진지한serious’이라는 단어가 들어서게 된다.

 

시리어스 게임serious game이라는 단어의 현존 자체가 비디오 게임에 드리워진 루두스의 음산함을 시사한다. 게임이 진지해려면 특정한 수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확실히, 군사주의를 우회하는 전쟁 비디오 게임은 대체로 이 시리어스 게임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물론 시리어스 게임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여러가지 논의가 있다. 초기에는 교육적 효과를 가진 게임들을 지칭하는 측면이 있었지만, 근원적으로 교육적 목적이 아닌 게임들을 교육적으로 전환 사용하는 경우가 생기면서 ‘교육적 효과’, 아니 더 넓게는 ‘어떠한 효과’를 내포하는 게임들까지 아우르게 된다. 자우티Djaouti, 알바레즈Alvarez, 제슬Jessel은 기존의 비디오 게임을 ‘엔터테인먼트 게임’으로 구분한 뒤, 시리어스 게임을 ‘진지함serious’과 ‘게임성game’을 모두 가진 게임으로 규정한다.[1] 물론 여기서도 이 ‘진지함’이 어느 범주까지를 뜻하는지에 대해서 규정하지 않는다면, 매우 모호해지긴 하지만 말이다.[2] 여튼 게임이 어떠한 엔터테인먼트를 초과하는 ‘진지한 테마’를 목적한다면 시리어스 게임의 범주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여기에 어떠한 충돌이 발생한다. 앞서 말했듯 루두스는 일정량 ‘진지함’을 배격하는 측면이 있다. 그것은 전쟁과 비디오 게임 사이에 언제나 군사주의가 들어설 수 밖에 없었던 바로 그 논리적 귀결과 맞붙는다. 따라서 비디오 게임이 군사주의와 거리를 두고, 그 이면의 이야기를 ‘진지하게’하려 할때, ‘시리어스’와 ‘루두스’ 사이에는 강렬한 긴장관계가 형성된다.

 

이러한 충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게임이 바로 Juggler Games의 「우리에 대한 나의 기억My Memories of Us」이다. 이 게임은 2차 세계대전의 와중 한 유대인 소녀와 도둑 소년이 함께 수용소로부터 탈출해 도망치는 이야기를 다룬다. 메커닉적으로는「발리언트 하츠」에 큰 빚을 졌다 할 정도로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지만, 각각 다른 특성을 지닌 두 주인공을 통한 퍼즐 메커닉은 새로운 흥미로움을 낳는다. 손을 잡으면 서로의 능력이 공유되고 손을 놓으면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된다는 메커닉은 게임이 부여하는 퍼즐을 보다 다채롭게 구축한다. 그러한 반면 이 게임은 ‘노년의 남성이 회상하는 과거’를 이유로 역사에 환상적인 면모들을 이식한다. 이를 통해 제3제국을 로봇으로, 제국의 총통을 로봇 왕으로, 유대인을 표시하는 노란 뱃지는 지워지지 않는 붉은색의 페인트로 묘사한다. 이 환상성(또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해야할까)이 있기에 더 다양한 퍼즐 메커닉이 나올 수 있었겠으나, 역사의 무게를 감소시켰다는 평은 피할 수 없었다. 《게임스팟》에서는 "게임의 더 귀여운 미적 요소와, 캐릭터들이 게토에 살게 되고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는 이야기 사이의 단절은 거슬린다. ...이러한 분위기의 혼란은 경험의 대부분을 약화시킨다."[3]고, 《닌텐도 라이프》에서는 “주요 비판점은 어린아이의 마음에서 만들어진 실질적인 위협과 그것이 기반으로 하는 진정한 공포 사이에서 나타나는 거슬리는 분위기의 불일치다.”[4]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이 게임이 더 현실적인 아트를 가졌다면 게임 전체를 ‘흥미롭게’ 만든 퍼즐 메커닉의 삽입은 불가능했을 것이 자명하다. 「우리에 대한 나의 기억」은 군사주의를 우회한 비디오 게임이 필연적으로 겪게되는 전쟁의 진지함과의 각축전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에 대한 나의 기억」은 나치 독일의 제3제국을 로봇 군대로 묘사한다.

 


의미가 구조를 앞지를 때


이런 충돌에 대해 이안 보고스트의 언어를 빌려 말하자면 ‘절차procedure’와 ‘수사rhetoric’ 사이의 긴장이라고도 정리할 수 있다. 게임적 절차(=구조)를 동원해 수사(=의미에 대한 표출)를 구축한다는 보고스트의 발안을 따르자면, 진지함은 언제나 수사의 목적에 위치한다. 여기서 절차는 이 수사의 구축에 결부된다. 하지만 게임의 절차, 그러니까 루딕 메커닉은 앞서 정리한대로 유희성을 기반으로 한다. 결국 진지함에 대한 수사를 어떻게 유희적으로, 그러니까 원초적이지 않은 흥미로움으로 구축하느냐가 긴장의 근원이다.

 

정리하자면 수사의 확고한 대상을 위해 절차가 동원되는가, 아니면 절차의 목적이 수사의 대상보다 더 높은 층위에서 작동하는가의 문제다. 이 긴장의 내부에서, 게임을 통해 전쟁의 ‘진지함’을 논한다면 과연 어떤 방식을 이루어야 할까?

 

이를테면 의미가 구조를 앞지르는 경우, 이는 명백히 역사 교육을 위한 콘텐츠가 된다. Charles Games의 「아텐타트 1942Attentat 1942」와 「스보보다 1945 : 해방Svoboda 1945 : Liberation」이 대표적인 예시다. 두 게임은 모두 체코의 근현대사에 대한 역사 교육 자료의 일환으로 만들어졌으며, 의도적으로 복잡한 사회적 양태의 시기, 체코슬로바키아 총독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암살된 뒤에 벌어진 억압적 통제 ‘하이드리하디’가 발생한 1942년과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던 독일인들에 대한 폭력적 추방이 시행된 1945년을 그 조사의 배경으로 삼는다. 플레이어는 모종의 이유로 과거에 있었던 진실을 찾아내야 하는 현대의 체코인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노벨 게임’ 스타일의 인터뷰를 진행하며 정보를 모아야 한다. 비록 재연 배우들을 사용하긴 했지만, 가상의 인터뷰라는 형식은 전쟁 중의 민중들이 겪은 미시사의 복잡함을 인지시킨다.

 

인터뷰이들은 대부분 타자에 대한 극도의 불안과 의심을 갖는다. 그리고 이는 전적으로 전쟁이라는 현상이 주는 공포로부터 기인한다. 유대인이 아님에도 유대인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할아버지의 역사를 추적하는「아텐타트 1942」의 경우,  주인공의 할머니는 불신으로 가득했던 과거를 회상한다. 누군가의 불온한 고발이 남편에게 부당한 문제를 일으켰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인 지금까지도) 할머니의 의심의 대상인 이웃집 남자 역시 나치당의 폭압에 의한 피해자라고 고백한다. 그 역시 총독부에 의해 강압적으로 친독적인 기사를 써야 했던 과거에 고통받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서로에 대한 정보는 파편화되어, 결국 켜켜히 쌓인 오해가 한 사람을 비극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아텐타트 1942」는 가상화된 인터뷰의 반복으로 진행된다.

 

「아텐타트 1942」는 이를 위해 역사 탐구를 가상적으로 분화시킨다. 게임 중 발생하는 모든 인터뷰는 인터뷰이의 정보 전체를 한번에 획득하지 못한다. 하지만 진행 중 발생한 미니게임을 통해 지급받은 코인을 사용하면 인터뷰를 처음부터 다시 할 수 있다. 이 ‘처음부터’ 다시는 문자 그대로의 처음부터, 즉 ‘이전의 인터뷰가 없었던 것’으로는 간주한다. 하지만 플레이어에게 이전 인터뷰의 정보는 남아있다. 이러한 인식상의 오류가 있음에도, 딱히 이런 과정을「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즈」처럼 초상적 능력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즉 사실상 주인공은 부족한 정보들로 구성된 한 플로우의 인터뷰 경험만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우연치 않게 진짜 ‘진실’과 접촉하게 된 셈이다. 이는 게임이기에 가능한 잠재태의 경험만이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일 뿐이다. 따라서 게임이 아닌 현실의, 그러니까 실재태의 인터뷰는 결코 진실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는 회의주의에 가깝다. 어쩌면 이 현상이 「아텐타트 1942」의 인터뷰이들이 가진 정보 부족의 비극을 일부 설명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개인은 근본적으로 가진 판단의 한계지점을 가지며 오해와 불신의 가능성은 언제나 곁에 도사린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거대한 이벤트는 이런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증가시킨다. 플레이어가 추적한 진실은 이러한 세계의 초상이며, 오직 각 인간에 대한 불가능한 정보 습득의 반복으로만 도달할 수 있다는 수사인 셈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아텐타트 1942」는 매우 흥미로운 메커닉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제시하는 미니 게임들에는 그다지 미덕은 없다. 물론 증언자들의 코너에 몰린 긴장을 체감시킬 의도로 삽입된 것들이긴 하나, 증언 기반이라는 한계로 인해 고정된 결과만을 산출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미니게임의 성패는 오히려 인터뷰의 반복을 위해 코인을 버는 용도로만 사용될 뿐, 증언의 디테일이나 결과를 극단적으로 변화시키진 못한다. 따라서 이 게임이 다루는 ‘절차’는 역시 확실한 의미 층위를 가지기 어렵다. 사실상 대부분의 ‘수사’는 게임 자체의 구조보다는 이 게임이 담지하는 인터뷰에서 (말 그대로의 수사로서) 나오기 떄문이다.

 

그렇다면 유사한 구분, 즉 의미가 구조를 앞지르는 게임 중에서도 구조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케이스라면 어떤 형태일까. Rayonist의 「그리프 라이크 어 스트레이 독Grief like a stray dog」를 예시로 들 수 있다. 사실상 아트 게임에 가까운 이 게임 역시 동유럽의 전쟁 시기를 다룬다. 주인공 나디아는 아버지가 전쟁에 나간 뒤, 무기력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우체부의 일을 맡는다. 이 마을의 집 대다수는 가족 중 한명이 참전한 상태인 터라 모두 긴장 상태에 있다. 그리고 나디아는 그 긴장의 트리거가 된다.

 

나디아가 전달하는 편지는 크게 두 종류인데, 흰 편지는 가족의 생존을 의미하지만 검은 편지는 가족의 전사를 의미한다. 편지를 전해주는 장면은 클로즈업 된 두 개의 팔로 묘사되며, 플레이어의 마우스 움직임에 따라 나디아의 손도 움직이게 된다. 보통 배달하게 되는 흰 편지는 그저 손을 움직여 상대방의 손에 편지를 쥐어주면 된다. 하지만 그 편지가 검은 편지일 때, 나디아의 손은 흰 편지 때보다 훨씬 느리게 움직인다.

 

「그리프 라이크 어 스트레이 독」에서, 전사 통보 편지의 전달은 느린 속도로 표현된다.

 

이 게임에는 약 60분 정도 지속되는 짧은 서사와 그림책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아트가 있다. 하지만 게임의 코어는 바로 이 손의 움직임이다. 편지를 건네 준다는 간단한 행위가 조건에 따라 완전히 다른 움직임을 부여받는 것이다. 검은 편지를 건네 주게 될 때, 플레이어는 그 느린 팔의 움직임을 통해 나디아의 복잡한 감정을 공유받는다.물론 이 두 편지가 동시기에 공존한다는 점, 그리고 언제나 그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점에서 편지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사건에 대한 제유나 다름없다. 그리고 팔의 움직임은 그 전쟁이 주는 상처와 고통에 대한 직접적인 표출이다. 물론 그러한 역학을 제외하면 게임 전체는 매우 빈약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지만, 전쟁이라는 비극을 ‘플레이 가능한’ 행위로 번역하려 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의미와 구조가 만날 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리프 라이크 어 스트레이 독」은 전형적인 시리어스 게임이기는 하지만 의미와 구조가 융합되는 강렬한 체험을 선사하는 게임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군사주의를 이탈한 비디오 게임은 (군사주의를 동원하는 비디오 게임과 마찬가지로) 절차와 수사가 거의 유사한 층위에 있을 때 더 강한 힘을 발휘한다.

 

이를테면, 역시 11bit Studios의「디스 워 오브 마인This war of mine」을 빼놓을 수 없다. 이 게임은 「림 월드Rimworld」같은 전형적인 서바이벌 장르의 구조를 답습하고 있다. 플레이어가 다수의 캐릭터를 ‘관리’하며 방해되는 물건을 치우고, 필요한 재료를 수집하고, 새로운 물건을 만드는 일을 반복하며 하루하루 생존해나간다. 하지만 여기에 이 캐릭터들이 ‘전쟁에 의해 황폐화된 도시의 생존자’라는 서사 층위가 씌워진다. 따라서 플레이어가 다룰 수 있는 ‘세계 전체’는 한정적 자원의 세계로 규정된다. 즉 이 세계에서 획득 가능한 물건은 플레이어 캐릭터에게도, NPC에게도 본질적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의미다. 이런 와중에 플레이어는 밤마다 다른 건물에 들어가 필수적인 자원들을 챙겨와야만 생존할 수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도시에 남겨진 다른 생존자들과 조우하는 경우가 생기며, 자원의 소유권을 놓고 경쟁하는 일도 발생한다. 때로 병든 가족 같은 사연을 가진 생존자와 조우할 때엔, 그들을 위해 의료품을 남겨올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생존을 위해 가져올 것인가 같은 도덕적 딜레마가 발생한다.

 

그런데 이 게임의 특징은 바로 장르적 순수성에 있다. 「디스 워 오브 마인」에서 전시의 생존자라는 서사 층위를 벗겨내면 상당히 전형적인 서바이벌 장르의 구조만이 남는다. 자원의 한정성과 생존의 고통은 해당 장르가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코드다. 즉 이 게임의 루두스적 구조는 매우 전형적이고 표층적인 역학을 가지고 있으며, 오히려 ‘진지한’ 층위가 이 구조를 더 강렬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구조는 반대의 사유를 가능케 한다. 전쟁이라는 사건은 인간들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는가?  「디스 워 오브 마인」은 바로, 전쟁은 우리들을 서바이벌 장르의 고통스러운 세계로 밀어넣는다고 답한다. 이 사유의 과정은 전적으로 군사주의적이지 않은, 군사주의를 우회해서 작동한다. 따라서 「디스 워 오브 마인」은 비디오 게임의 장르를 경유하며 전쟁을 규정하는 흥미로운 사례가 된다.

 

혹은 좀 더 서사적 층위로 접근하는 Birdisland/PortaPlay의 「게르다 : 어 플레임 인 윈터Gerda A Flame in Winter」(이하 「게르다」)의 경우는 어떨까. 2차 세계 대전 당시 덴마크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이 게임은, 독특하게도 「디스코 엘리시움」과 유사한 TTRPG 스타일의 서사 중심Story-Driven 게임이다. 주인공인 게르다는 덴마크인 어머니와 독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독일/덴마크의 혼혈이다. 나치당이 마을을 점령하고 있는 1945년의 어느날, 남편인 안데르가 레지스탕스 혐의로 게쉬타포에게 체포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남편을 지키고 싶어하는 게르다는 여러 사람들의 힘을 빌리려고 하며 이야기는 점점 더 복잡한 층위로 들어선다.

 

게임 메커닉은 장면 단위로 진행되며, 게르다는 장면 내의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나 아이템 수색을 통해 정보를 획득해나간다. 그리고 때때로 대화의 와중에 게르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는 두 종류의 선택지가 발생하곤 한다. 하나는 세 가지 능력치인 연민Compassion, 통찰Insight, 재치Wit 중 하나를 사용하는 선택지로, 즉시 호의적인 효과가 나지만 해당 능력치를 1 소모한다. 능력치는 각 장면이 끝난 뒤, 일기에 적을 내용에 따라 한 능력치를 1점 회복할 수 있다. 또 다른 선택지는 일종의 판정 국면이며, 대화 상대가 속한 소속과 대화 상대와의 관계도, 가지고 있는 정보를 기반으로 난이도가 결정된다.

 

 

「게르다 : 어 플레임 인 윈터」는 단순한 하나의 선택으로 급격한 관계의 증감을 경험시킨다.

 

흥미로운 것은 이 관계도의 증감이다. 관계도는 매 대화의 선택에 따라 즉시적으로 1씩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거의 모든 대화에 증감의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매번 선택의 고민은 깊어진다. 특히 각기 다른 소속의 인물들이 시시비비를 가리는 국면인 경우에 고통은 증가한다. 양측 모두에게 호의적으로 작동하는 대답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관계도 상승을 포기하거나, 혹은 하락의 가능성을 감내해야만 한다.

 

이 시스템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전쟁이라는 테마를 건드린다. 하나, 이런 즉각적인 관계의 변화는 현실에 비추자면 매우 급작스럽고 이례적인 일이다. 물론 대화란 본질적으로 인상을 결정하는 행위이기는 하나, 각각의 발언 또는 선택이 이후의 가능성을 훼손할 정도로 변동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것은 게임의 메커닉이라고 하기에도 지나치게 과도하다. 하지만 「게르다」는 이 게임의 시기가 전시라는 사실을 통해 이 메커닉을 설득시킨다. 나치 통치의 덴마크는 극도의 분열 상태고, 독일인과 덴마크인은 서로를 의심하고 증오한다. 게르다가 일하는 진료소의 의사는 독일인은 절대로 치료할 수 없다며 거절하고, 독일인들은 모든 덴마크인을 잠재적 반동분자로 치부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관계도의 급격한 증감은 오히려 설득력을 낳는다. 그리고 이 메커닉과 설정은 놀랍게도 서로를 돕는다. 전시라는 배경은 메커닉을 설득시키고, 메커닉은 전쟁이 가져다주는 공동체의 균열을 설명한다.[5]

 

둘째, 게르다의 정체성이 분열되어 있다는 점이다. 물론 게르다는 덴마크에서 나고 자랐으며, 덴마크인 남편과 살고 있다. 하지만 나치당을 지지하지만 인간적인 면이 있는 게르다의 아버지, 게쉬타포의 사무실에서 비서로 일하는 친척 등 독일인들과의 관계도 무시할 수는 없다. 한편 가장 친한 친구는 게쉬타포 소속이지만 합리적인 남성인 볼프강과 연인관계이기도 하다. 이 모든 복잡한 관계는 게르다를 선택의 지점으로 몰아넣는다. 덴마크인들은 필요하다면 게르다를 독일인으로 취급하고 반대의 경우도 비일비재하게 이루어진다. 플레이어는 자신의 정체성을 설정하고 그것을 상대방에게 설득해야 하지만, 남편을 구해야한다는 목적은 또 다른쪽과의 관계 역시 신경쓰도록 만든다. 결국 이러한 분열과 정체성의 혼란 역시 전쟁이라는 사건에 의해 발생한다. 이 또한 의미와 구조의 확실한 일치를 낳는다.

 

따라서 「게르다」는 「디스 워 오브 마인」의 경우와는 조금 다르다. 「디스 워 오브 마인」이 장르적 전형을 끌어들여 ‘시리어스’를 설득시킨다면, 「게르다」는 ‘시리어스’와 ‘루두스’가 거의 동일한 역학으로 서로를 돕는다. 하지만 결국 둘 다 게임 메커닉이라는 자원을 이용해 전쟁이란 무엇인지 플레이어에게 전달한다.

 

동일한 면에서 흥미롭게 바라볼만한 게임이 바로 Madnetic Games의 「WW2 리빌더」다. 이 게임은 「하우스 플리퍼」 또는 「파워 워시 시뮬레이터」와 같은 청소/리노베이션 시뮬레이션 장르의 게임으로, 2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 독일, 프랑스에서 각 격전지를 원상복구하는 일을 맡는다. 플레이어의 주된 행위는 전형적인 리노베이션 게임의 그것으로, 현장에서 물건을 해체해 자원으로 만들고, 쓰레기를 치우고, 파괴된 도로를 메우거나 벽을 새로 건설하는 재생작업이다. 이 역시 「디스 워 오브 마인」과 유사한 작동을 가진다. 순수한 장르의 틀에 전쟁(정확히는 전후)이라는 서사 층위를 덧씌워서 전쟁의 감각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WW2 리빌더」에는 탈군사주의라는 맥락에서 더 깊은 효과가 발생한다. 그것은 청소/리노베이션 시뮬레이터라는 장르 자체가 가진 탈군사적인, 아니 정확히는 반군사적인 틀이다. 이 장르는 대체로 1인칭의 시점을 지니며, 플레이어는 호스의 물을 ‘쏘거나’, 해체 장비를 ‘휘둘러’ 먼지를 지우고 폐허화된 공간을 해체한다. 이 과정은 정확히 FPS와 반대의 역학이며, 사실상 거의 FPS에 대한 패러디다. 이들의 시점, UI, 조작법은 전적으로 FPS와 동일하지만 양자가 만들어내는 풍광은 정확히 반대의 것이다. FPS는 파괴하고, 시체와 폐허를 남기지만 청소/리노베이션 시뮬레이터는 정리하고, 깨끗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애초에 이 장르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비세라 클린업 디테일Viscera Cleanup Detail」부터가 가상적 전투의 뒷정리라는 컨셉이었던 것이다. 청소/리노베이션 시뮬레이션의 공간은 ‘사건’ 이전 상황을 연상하도록 설정되어 있으며, 플레이어의 역할은 그런 ‘사건’이 남긴 불쾌감을 떠안고, 장소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회복자라고 할 수 있다.

 

「WW2 리빌더」가 군사주의 게임의 가장 인기있는 테마인 제2차 세계대전을 이용하고 있는 것은 놀랄만치 통렬한 패러디다. 즉 이 게임의 모든 스테이지는, 그 앞에 있었을 FPS의 거대한 대전을 상상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특히 각 스테이지마다 존재하는 검은 형체의 존재는 이 개념을 전면화한다. 게임의 특정 지점에 서 있는 이 검은 형체와 접촉하면, 플레이어는 잠시 전쟁 당시의 기억 공간으로 이전된다. 군수 공장의 부두라면 배가 진수하는 광경이, 폭격지라면 폭격 당시가 재생되는 식이다. 이를 통해 게임의 스테이지는 모두 전쟁이라는 역사를 가진 공간이 되며, 게임의 플레이 역시 가상화된 다크 투어가 된다. 따라서 「WW2 리빌더」는 다크 투어리즘의 게임이며 동시에 그 공간을 회복시키는 전후의 회복적 게임이 된다. 지나간 전쟁의 전장에 놓인 총을 그저 ‘고철’로 환원시킬 때, 이 게임은 군사주의와의 싸움에서 완벽히 승리한다.

 

「WW2 리빌더」는 전장에 남아있는 총기를 ‘고철 3개’로 표시한다.

 

 

게임은 이를 위해 주인공들에게 특정한 정체성을 부여한다. 영국의 주인공은 전쟁 중 사망한 파일럿의 동생이며, 독일의 주인공은 참전자의 아내, 프랑스의 주인공은 전쟁 중 고향이 파괴된 참전 당사자다. 이들은 모두 전쟁이라는 사건으로 인해 무엇인가를 상실한 자들이지만, 그 증오의 소용돌이에 잠식되기 보다는 조용히 삶의 공간을 회복시키는 일에 전념한다. 「WW2 리빌더」는 테마, 서사 그리고 메커닉이 모두 일거에 작동하는 가장 전복적인 탈군사주의 게임이자 안티 FPS다.

 


전쟁과 절차와 수사와 죽음과


이러한 탈군사주의 비디오 게임은 어느새 확고한 자기 영역을 만들어가고 있다. 분량의 문제로 모두 소개하진 못했지만, 시리아 내전에서의 탈출 중인 아내와의 텔레그램 대화를 컨셉으로 삼은 「버리 미, 마이 러브Bury me, My love」, 제2차 세계대전 중 수용소에 끌려가게 된 스탈린그라드 출신의 소녀가 주인공인 「톤 어웨이Torn Away」, 나치가 부상 중인 독일에서 반나치 지하 조직을 운용하는 「쓰루 더 다키스트 오브 타임스Through The Darkest of Times」, 2차대전 후 독일인 아이를 입양한 노르웨이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는 「마이 차일드 레벤스보른My Child Lebensborn」같은 게임들은 충분히 거론될만한 가치가 있는 게임들이다. 이 게임들은 모두 군사적 테마, 전투나 사격 등의 메커닉을 가지지 않으면서도 전쟁의 이면에서 벌어진 일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조금은 독특한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글을 정리하려 한다. LKA의 1인칭 심리 호러 어드벤처 게임인 「마사 이즈 데드Martha is Dead」는 전시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명시적으로 전쟁을 다루는 게임은 아니다. 주인공 줄리아의 아버지가 독일군 소속이라는 점, 주인공들인 쌍둥이 자매와 관계가 있는 남성이 파르티잔 활동을 한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 어떠한 전쟁의 지배력도 게임에 직접적으로 투영되지 않는다. 게임은 오직 쌍둥이 동생을 잃은 한 여성의 파괴되어가는 내면을 그리는 싸이코 스릴러의 전형을 따른다. 심지어는 그 쌍둥이가 실재했는지, 아니면 자신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격인지조차 불분명하게 만든다.

 

「마사 이즈 데드」에서 동생 마사가 죽는 순간에 하늘엔 전투기가 날아간다.

 

하지만 이 게임은 미묘하게 전쟁이라는 요소를 게임의 내부에 가지고 들어오려고 한다. 줄리아가 동생 마사의 시체를 발견하는 그 장면에서, 하늘에는 비행기 엔진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몇 대의 비행기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광경이 보인다. 하지만 이후 마사의 죽음과 비행기의 운용에는 그 어떠한 인과관계도 도출되지 않는다. 마사는 그 때 죽었고, 비행기는 때마침 지나간 것 뿐이다. 하지만 줄리아의 꿈에 나타난 사신은 서로 자신이 마사라고 주장하는 쌍둥이를 보고 허탈한듯 말한다. ‘전쟁 시에는 항상 누군가 죽는 거야.’라고.

 

「마사 이즈 데드」가 게임의 내부에 전쟁을 끌고 들어오는 방식은 모던 시네마적 역학과 유사하다. 마사의 죽음과 비행기 사이에는 전적으로 미장센의 결부가 있다. 줄리아의 심리적 파괴의 작동에는 자주 군사적인 이미지가 끼어들어온다. 남자친구의 죽음은 줄리아의 내면적 파괴로 이어지지만, 거기에는 파르티잔 활동과 독일군의 점령이라는 세계적 혼란이 어슷하게 걸쳐져있다.

 

이 게임을 탈군사적인 독법으로 읽는다면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볼 생각이 없거나 관심이 없는 플레이어들에겐 구태여 그런 독법이 필요 하지 않다. 이것은 뭐랄까, 앞서 말한 방법에 따른다면, 마치 구조가 의미를 앞지른 게임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 게임에서 전쟁은 전달해야할 주된 테마는 아니지만, 독법에 따라서는 전쟁과 죽음의 상관관계에 대한 음울하고 자기파괴적인 체험을 준다.

 

이 긴장은 어쩌면 비디오 게임에 군사적인 이미지가 등장하면서부터 원초적으로 도사리고 있는 어떠한 힘에 의해 발생한 것 같기도 하다. 글의 시작부터 이야기 했듯, 비디오 게임과 군사주의는 오랜 시간 함께 해온 파트너와도 같다. 즉 게임에 전쟁의 그림자가 조금이라도 드리우는 순간, 무시무시한 존재감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마사 이즈 데드」가 전쟁을 직접 지시하지 않으려고 할수록, 전쟁의 역량은 그 안에 깊숙히 파고든다. 다른 이유가 없다. 「마사 이즈 데드」가 비디오 게임이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비디오 게임에 남은 숙제는, 군사주의라는 이 난감한 파트너와 어떻게 적당한 거리를 두는가 일지도 모른다. 비디오 게임은 「이카리」로, 「듄 2」로, 「코만도스」로, 「진 삼국무쌍」으로, 그리고 더 많은 게임들로 전쟁을 낭만적 이미지와 등치시켜 왔다. 군사 테마의 쾌감이 짙을 수록, 그것에 대한 반작용은 더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아니 당위적으로 늘어나야 한다. 그것이 수오미넨이 말한 비디오 게임의 원초적 테제, 유치함, 유아성 그리고 청소년성과 결별할 어떠한 방법에 도달하는 길일 지도 모른다.





[1]《Classifying Serious Games: the G/P/S model》(Damien Djaouti, Julian Alvarez, Jean-Pierre Jessel, 2016)
[2] 이를테면 「파이널 판타지 VII」은 전형적인 JRPG의 구조를 가지지만, 기술 중심주의와 환경 파괴에 대한 진지한 서사를 가진다. 이 경우 「FFVII」를 시리어스 게임이라고 규정해야 하는가는 조금 복잡한 질문을 만든다.
[3] https://www.gamespot.com/reviews/my-memory-of-us-review-war-has-changed/1900-6417007/
[4] https://www.nintendolife.com/reviews/switch-eshop/my-memory-of-us
[5] 흥미로운 것은 이 게임에서 독일인과 게쉬타포의 관계도는 분리되어있다. 독일인은 ‘독일인’으로, 게쉬타포들은 ‘점령군’으로 표기된다. 독일인 소속의 인물들은 본래부터 이 땅에 살던 독일인을 포함하는 개념이기에, 때로 ‘독일인’은 상승해도 ‘점령군’은 줄어드는 선택지도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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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주의, 욕망, 반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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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만화와 게임, 영화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합니다. MMORPG를 제외한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클리어가 라이프 워크입니다. 스팀덱을 주로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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