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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려움, 공포 그리고 폴아웃: 게임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공포의 양상

    내가 지금까지 게임을 플레이해오면서 기억하고 있는 공포의 유형으로는 2가지가 있다. 게임을 하면서 처음으로 겁을 먹은 것은 <레지던트 이블(Resident Evil)>의 악명 높은 장면을 플레이했을 때였다. 당시 <레지던트 이블>은 호러 게임이라기 보다는 속도가 느린 액션 게임쪽에 가까웠는데, 게임 내에서 복도를 걷고 있을 때 갑자기 개 한 마리가, 뒤이어 또 다른 한 마리가 창문을 뚫고 들어왔을 때 두려움과 혼란, 공포를 느꼈다. < Back 두려움, 공포 그리고 폴아웃: 게임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공포의 양상 19 GG Vol. 24. 8. 10. 들어가는 말: 공포에도 종류가 있다 내가 지금까지 게임을 플레이해오면서 기억하고 있는 공포의 유형으로는 2가지가 있다. 게임을 하면서 처음으로 겁을 먹은 것은 <레지던트 이블(Resident Evil)> [1] 의 악명 높은 장면을 플레이했을 때였다. 당시 <레지던트 이블>은 호러 게임이라기 보다는 속도가 느린 액션 게임쪽에 가까웠는데, 게임 내에서 복도를 걷고 있을 때 갑자기 개 한 마리가, 뒤이어 또 다른 한 마리가 창문을 뚫고 들어왔을 때 두려움과 혼란, 공포를 느꼈다. 이는 게임(및 여타 매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준적인 점프 스케어(역주: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는 연출 기법)였다. 당시 이 장면으로 겁을 먹긴 했지만, 스펜서 저택의 복도를 돌아다닐 때 약간 불안해진 것 말고는 그 개들 또는 그 개들이 상징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지는 않았다. 게임을 하면서 겁에 질렸던 두번째 - 그리고 보다 오래 지속되고 있는 - 기억은 <폴아웃3(Fallout 3)> [2] 에서 였다. 게임 초반 플레이어는 캐피탈 웨이스트랜드를 돌아다니면서 포스트-아포칼립스적인 약탈자들이 점유하고 있는 어둡고 칙칙한 식료품점 수퍼-두퍼 마트(the Super-Duper Mart)를 발견하게 된다. <레지던트 이블>의 개들과 다른 점은, 무슨 일이 일어날 것임을 내가 이미 알고 있으며 이 곳에서 약탈자들이 나타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약탈자들의 모습은 가시적이기까지 한데, 한 때 식료품점이었던 이 황폐한 장소의 복도를 초록빛 형광등이 희미하게 비추면서 생기는 그림자로 인해 약탈자들의 실루엣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멀리서 희미하게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른 종류의 고기가 천장에 걸려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는 바로 시체고기인데, 인간 신체의 부속물들이 천장의 쇠사슬로 연결되어 늘어져 있는 이 모습은 플레이어도 만약 발각된다면 그렇게 될 운명임을 알려주는 지표다. 게임 초반에 이 장소에 도달했었기 때문에 자원이 별로 없어 이 상황에서 싸울 수 있는 힘이 부족한 상태였으나, <폴아웃3>의 포스트-아포칼립스적인 웨이스트랜드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약탈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필요할 것임은 분명했다. 적들과 마주치지 않고 필요한 것을 찾아내기 위해 조심스럽게 돌아다니는 동안 내 심장박동은 점점 빨라졌고, 예상치 못하게 모퉁이에서 발소리를 듣거나 약탈자를 발견하게 되면 순간 공포에 휩싸였다. 수퍼-퍼 마트에서는 단 하나의 점프 스케어도 없었지만, <폴아웃3>의 이 시퀀스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정말 무서웠던 기억으로 내게 남아있다. * <폴아웃 3>의 수퍼두퍼 마트와 레이더들.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내가 겪었던 이와 같은 두 종류의 공포 경험은, 두려움과 공포에는 다양한 유형이 있으며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도 상이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점프 스케어 및 깜짝 놀라게 되는 공포(sudden frights)와 일상적인 공포간 차이, 그리고 스토리텔링, 게임 메커닉, 환경, 분위기에 대한 특정한 접근 방식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장기적 형태의 공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Sudden Frights 깜짝 놀래키기 깜짝 놀래키는 것, 즉 "점프스케어"는 많은 호러 게임에서 사용되어왔다. 우리는 호러 게임을 플레이할 때 긴장과 불안, 충격과 공포로 가득한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다. 플레이어들은 기꺼이 겁에 질리는 것을 기대한다. 갑작스러운 공포(sudden frights)에는 특정한 즐거움이 있으며, 그래서 놀이공원의 귀신의 집에서부터 호러 영화에 이르기까지 어떤 (놀래키는) 공포가 다가올 것인가에 대한 기대는 늘 엔터테인먼트의 일부가 된다. 밤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아웃라스트(Outlast)> [3] 와 <암네시아: 다크 디센트(Amnesia: The Dark Descent)> [4] 의 게임 디자인이 어떤 식으로 플레이어들을 깜짝 놀래키면서 공포를 주는지를 알아보자. 스포일러 주의 <아웃라스트(Outlast)>는 1인칭 서바이벌 호러 게임이다. 플레이어는 마운트 매시브 정신병원(Mount Massive Asylum)에서 수상쩍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취재를 가는 기자 마일즈 업셔(Miles Upshur)가 되어 게임을 플레이한다. 마일즈는 캠코더를 들고 정신병원 내부를 돌아다니면서 거기에 있던 모두가 a) 죽었거나, b) 임상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c) 임상적으로 문제가 있는 살인자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마일즈는 “마틴 신부(Father Martin)”와 마주치게 되는데, 이 인물은 자칭 “월라이더(Walrider)”의 수행자로서 후에 정신병원 깊숙한 곳에 감금되어있던 어떤 환자가 조종하는 나노머신의 환영인 것으로 밝혀진다. <암네시아(Amnesia)> 또한 비슷한 1인칭 서바이벌 호러 게임인데, 다만 퍼즐적 요소가 좀 더 복잡하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가 어떤 성 안의 방에서 깨어나면서 시작하는데, 자신이 다니엘(Daniel)로 불린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기억이 없다. 게임은 성 깊숙한 곳에 있는 알렉산더(Alexander)라는 남자를 죽이라는 예전의 자신(다니엘)이 쓴 편지에 따라 진행되는데, 성 안에는 각 구역마다 끔찍하게 변형된 모습의 괴물들과 다니엘을 죽이려는 “섀도우”들이 도사리고 있다. 이 두 게임 및 유사한 유형의 호러 게임들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플레이어에게 두려움을 자아내기 위해 미지의 것(the unknown)을 활용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혹은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 <암네시아>에서 이는 다니엘이 자초한 기억상실증의 결과로서 발생한 말 그대로의 무지(알지 못함)의 형태로 나타나며, <아웃라스트>에서는 취재하는 기자로서의 마일즈라는 인물 설정에서 나타나는데,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생소한 장소를 별 다른 단서 없이 돌아다니는 두 명의 주인공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러한 부분은 게임 내 환경 디자인에도 반영되어 있다. <암네시아>의 성과 <아웃라스트>의 정신병원에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을 무언가를 계속 추측하게 만드는 미로 같은 복도와 그림자 진 어두운 코너가 디자인되어 있다. 연구자 매즈 할(Mads Haahr)은 호러 게임에서 두려움과 불안의 감정을 고조시키기 위해 플레이어의 시각을 변형시키는 다양한 방식들을 분석한 바 있는데, 흐릿하게 만들기(그림자와 안개), 왜곡(플레이어의 시각을 워핑(warp)하는 것), 그리고 매개(<아웃라스트>의 캠코더처럼 2차 렌즈로 세상을 보도록 하는 것) 등은 두 게임 모두에서 발견된다 [5] . 두 게임의 1인칭 시점 또한 플레이어의 가시 범주를 제한하는데, 이는 내 눈에 보이는 주변부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느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아웃라스트>에서 마일즈가 코너를 빠르게 살필 수 있는 "엿보기(peeking)" 메커닉은 플레이어가 자신을 발견한 적과 갑자기 맞닥뜨리게 만들기도 한다. 하나의 효과로서 공포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것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있다고 예측될 때 고조된다 [6] . 이와 같은 시각의 변형과 함께, 시간이 흐르면서 긴장이 점점 고조되는데 이 모든 과정의 목적은 그 긴장을 깨뜨리는 것이 된다. * <암네시아: 다크 디센트>의 복도. [7] 한편 청각 디자인은 플레이어에게 시야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나무가 삐꺽거리고 바람이 부는 소리가 플레이어로 하여금 바짝 긴장하도록 하는 한편, 특정한 소리는 어떤 적이나 위협이 근처에 있음을 알려준다. <암네시아>에서 몬스터들의 으르렁 거리는 소리는 그들이 다니엘 근처에 있음을 의미하며, <아웃라스트>에서 체인이 쩔그렁거리는 소리나 무거운 발자국 소리는 마일즈를 잡으러 특정 구역의 보스들이 왔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청각 신호들이 플레이어에게 지침을 주지만, 이 적들은 여전히 "들을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8] 존재로서 플레이어에게 시각적으로 드러나지 않아 공포감을 더한다. 한동안 플레이어의 뒤를 쫓는 소리가 들리다가 마침내 괴물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은 점프 스케어 같은 느낌을 배가시킨다. 일반적인 환경음과 달리, 적에게 추격당할 때의 소리는 강렬한 음악과 함께 헐떡이는 숨소리로 빠르게 바뀐다. 플레이어가 적에게 발견되는 이 시나리오는 갑작스럽게 추격전이 벌어지면서 당연히 공포와 패닉을 유발시키지만, 플레이어는 이러한 추격전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비하고 있다. 하지만 그림자가 드리워진 주변을 부지런하게 살피고 청각 신호를 주의 깊게 듣고 있던 플레이어의 뒤에서 적이 나타나면 점프 스케어는 크게 성공한다. 언제 어디서 위협이 발생할 수 있을지 알 수 있는 모든 도구를 갖추고도 예측하지 못한 적의 등장은 플레이어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드러낸다 [9] . 무력함은 깜짝 놀라는 공포(sudden frights)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요소다. 두 게임의 오프닝에서 플레이어는 자신이 달리거나 숨거나 혹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에 대한 위협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옵션이 없는 것이다. 이는 권능에 대한 판타지를 제공해왔던 비디오게임의 전형에 대한 완전한 전복이다. 플레이어는 마법과 힘으로 무장한 용감한 전사가 아니라 단지 지옥같은 공간에서 도망치려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 갑자기 나타난 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방법이 없으며, 이는 완벽히 위협적인 상황이다. 이에 더해 <레지던트 이블>이라는 장르를 정의할 수 있는 메커닉인 자원 관리(resource management) 또한 플레이어의 무력감을 배가시킨다. <암네시아>와 <아웃라스트>의 경우 자원은 플레이어의 구역을 좀 더 밝게 유지하는 것과 연관되는데, <암네시아>에서의 틴더박스나 기름, <아웃라스트>의 캠코더용 배터리가 이에 해당한다. <암네시아>에서는 어둠에 노출되면 죽을 때까지 정신이 쇠약해지고, <아웃라스트>에서는 캠코더의 나이트비전으로 어둠 속의 적들을 좀 더 명확하게 볼 수 있다. 이러한 나이트 비전이 없다면 정신병원 안을 돌아다니는 일이 훨씬 더 위험해질 것이다. 플레이어는 (모든 자원의 위치를 아는 것이 아닌 한) 대개 게임하는 내내 자원 부족의 위기를 겪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은 플레이어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다. 일부 구역은 적의 경로와 가까운 곳에 있어 플레이어는 종종 더 많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를 무서운 상황에 노출시키기도 한다. 자원을 확보하되 잡힐 위험을 감수할 것인지, 아니면 그 구역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안전을 도모할 것인지는 서바이벌 호러 게임을 플레이하는 내내 플레이어들에게 던져지는 전략의 문제다. * <아웃라스트>의 야간투시경 화면. [10] 깜짝 놀래키는 유형의 게임에서는 안전을 확보하는 것마저 불안할 수 있다. <레지던트 이블>의 경우 플레이어가 게임을 저장할 수 있는 세이프룸이 있지만, <암네시아>와 <아웃라스트>에는 그러한 메커닉이 없다. <아웃라스트>의 경우 마일즈가 게임의 목표에 맞춰 진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스토리 장면이나 컷신 - 열쇠를 찾은 것, 경비실로 가는 것 등 - 있다. 게임 초반에 플레이어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데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이러한 컷신들이 긴장을 잠시 풀 수 있는 비디오게임의 "체크포인트"와 같은 것이라 여기게 된다. 하지만 마일즈가 보안실에 도달하자마자 마틴 신부에게 붙잡혀 마취된 후 정신병원 깊숙한 곳에 갇히게 되는데, 이 부분은 게임 내 주요 점프 스케어 중 하나다. 무력함과 마찬가지로 '그리 안전하지 못한 체크포인트'는 전형적인 비디오게임의 흐름을 뒤집으면서 플레이어를 깜짝 놀래키는데 기여한다. 깜짝 놀래키는 공포와 관련하여 언급할 마지막 부분은 지금까지 논의한 두 게임을 넘어 게임 내 플레이어의 죽음에 관한 것이다. <에일리언(Alien)> [11] 이나 <툼레이더(Tomb Raider)> [12] 같은 게임에서 리플리(Ripley)나 라라 크로프트(Lara Croft)는 (갑작스러워) 깜짝 놀래키는 방식으로 죽는다. 리플리가 제노모프(Xenomorph)에게 잡히는 장면이나 라라가 빠르게 진행되는 사건 속에서 손을 놓치는 장면 등은 플레이어를 깜짝 놀래키면서 그녀들이 죽거나 또는 어둠 속으로 추락할 것임을 예상하게 하는데, 이 모든 시퀀스에는 잔인한 유혈이 등장한다. 이러한 다양한 죽음의 시퀀스는 실패를 예감한 플레이어가 이번에는 어떤 끔찍한 방법으로 리플리나 라라를 죽게 한 것인지를 숨 죽인 채 온갖 애니메이션들을 봐야 함을 의미한다. 갑작스럽게 놀래키는 유형의 공포는 두려움에 대한 기대감, 겁을 먹으면서 얻게 되는 즐거움, 잘 디자인 된 게임플레이 경험에 대한 보상이다. 우리는 그것들이 실제로 우리를 다치게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다음의 점프 스케어를 기대하고 비명을 지르다가 웃어제끼면서 플레이를 이어간다. 갑작스러운 공포를 제공하는 호러 게임들이 초기 유튜버들의 커리어를 띄워준 데에는 이유가 있다. 갑작스러운 공포/놀래킴은 즐겁고 기억에 남으며 다른 누군가가 겁을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은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공포/놀래킴은 호러 게임 장르의 기준과 기대치를 충족할 때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 Persistent Motivating Fears 지속적으로 동기를 유발하는 공포 비디오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 특정한 행동을 취할 때 우리의 감정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설명하면서, 넬 반 데 모셀러(Nele Van De Mosselaer)는 허구적 게임 플레이어 찰스의 경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여기서 찰스는 공포 게임에서 슬라임과 맞닥뜨리는 등 비디오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을 대표한다: “화면 속에서 갑자기 초록색 슬라임 괴물이 자신을 향해 기어오자 찰스는 깜짝 놀랐다. 공포로 몸이 움츠러든 그는 콘트롤러의 스틱을 급하게 움직이면서 슬라임으로부터 도망쳤다. 자신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는 괴물을 보자 목숨이 위태로워진 찰스는 몸을 돌려 주먹으로 괴물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괴물은 고통스럽게 으르렁 거리면서도 찰스를 죽일 수 있었다 [13] ” 모셀러는 처음에는 도망치던 찰스가 몸을 돌랴 슬라임을 죽이려는 행동을 취하게 된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는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괴물에 대한 찰스의 두려움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가 느낀 공포가 그로 하여금 괴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콘트롤 스틱을 급하게 움직이도록 만들었고, 또한 괴물이 너무 가까이 왔을 때는 공격 버튼을 눌러대도록 만든 것이다. 슬라임 괴물을 두려워 하지 않는 또 다른 찰스를 상상해보자. 그는 이미 세번이나 죽임을 당해서 괴물에 대해 (공포보다는) 분노를 느끼고 있다. 이 찰스는 괴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콘트롤 스틱을 사용하기 보다는, 괴물을 향해 가기 위해 스틱을 움직일 것이며 공격 버튼을 보다 열심히 눌러댈 것이다 [14] .” 모셀러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는 바란, 사소한 수준의 두려움일지라도 다양한 장르와 메커닉에 걸쳐 우리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방식에 동기를 부여하는데 큰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공포(fear)는 놀람을 유발하는 순수한 정서적 반응을 넘어 오늘날의 게임 디자인에서 게임 내 행동과 메타게임적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 호러 게임 속에서 평범한 적 대신 끔찍한 좀비가 등장한다면 적에 대한 공격적 대응이 도피하는 반응으로 바뀔 것이다. 하지만 공포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을 방정식에서 제외한다면 공포의 역할은 무엇일까? 인간은 다양한 것(어둠, 거미, 유령 등)에 대한 공포증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호러 게임이나 호러 관련 장르에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매일같이 다양한 공포(실직하면 어쩌지, 내 파트너가 나를 떠나면 어쩌지, 아프고 싶지 않아 등)를 접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이는 우리의 일상적인 행동을 주도한다. 한정 시간 이벤트를 제공하는 호요버스의 인기 가챠 게임들이나 <로스트 아크> [15] ,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16] 등 인게임 머니를 벌기 위해 매일 플레이하도록 유도하는 지속형 게임의 플레이 패턴에 대해 생각해보자. 포모(FOMO/Fear Of Missing Out)는 이러한 유형의 게임 모델에 있어 핵심적인 원동력이다. 한정된 기회를 놓치거나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뒤쳐질 수 있다는 생각은 이러한 유형의 게임들에 있어 플레이어들이 강박적으로 게임을 플레이하도록 만드는 합법적인 두려움이다. 이러한 게임들은 종종 중독적인 플레이 패턴과 더 연계되지만, 플레이어 집단 내에서 사회적 지위가 떨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은 슬렌더맨이나 좀비보다는 덜 폭력적으로 보일지라도 플레이어로 하여금 더 자주 게임을 플레이하고 행동을 취하게 만드는 동기가 된다. 게임에서 캐릭터가 죽어 플레이어가 실패하는 경우는 매우 흔하게 일어난다. 이는 죽음에 대한 인간의 광범위한 두려움을 활용하는 것인 한편, 그럼에도 플레이어들은 게임 내 죽음과 현실에서의 죽음이 동일한 위험성을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게임에서 죽는 것은 이미 우리 안에 정립되어있는 상실 및 그것을 피하려는 욕구를 자극한다. 게임은 상실을 어느 정도 영구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어느 정도 조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디아블로(Diablo)>나 <파이어엠블렘(Fire Emblem)> 같은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게임을 시작할 때 '하드코어' 캐릭터를 만들거나 '영구 사망(permadeath)' 모드를 선택할 수 있다. 이는 게임 내에서 캐릭터가 한 번 사망하면 재시도를 하거나 체크포인트 같은 데서 부활할 수 없어 영원히 캐릭터가 삭제됨을 의미한다. 이러한 스타일의 게임플레이는 꽤 인기가 있으며 게임 플레이에 긴장감과 흥분도를 높린다. 사람들은 상실에 대한 두려움, 심지어 그것이 허구적인 것일지라도 자신이 캐릭터에 대해 내리는 모든 결정에 새로운 감정적 이해 관계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Nuclear Anxiety and Lingering Terror 핵에 대한 불안과 지속되는 두려움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의 책 의 도입부를 보면 버디 홀리(Buddy Holly)나 제임스 딘(James Dean) 같은 유명인 사고 희생자들이나 체르노빌이나 보팔 등의 유명한 재앙, 그리고 결핵이나 에이즈 같은 악명 높은 질병의 이름들이 챕터 내에 크고 굵은 글씨로 눈에 띄게 표기되어 있다 [17] . 이러한 단어들은 우리 내면에 지속적인 공포와 불안을 일으키는 상징적 힘이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러한 것들은 과거의 비극적이고 끔찍한 사건에 대한 기억들을 우리의 마음 속에 집어넣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공포 - 과거에 대한 지식으로 인해 예상하게 되는 미래의 공포 - 를 각인시키기도 한다. 이와 같은 두려운 예측은 겁에 질리도록 하는 공포(terror)로서 잘 알려져 있으며, 이 공포 안에서 미래의 공포가 우리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우리는 불안을 경험하게 된다 [18] . 다시 <레지던트 이블>과 <폴아웃3>로 돌아오자. 이제 나는 <레지던트 이블>의 개들이 촉발시켰던 점프 스케어보다 수퍼-두퍼 마트의 약탈자들이 나를 더 힘들게 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포스트-아포칼립스적인 미국의 풍경을 담은 웨이스트랜드 내에서 약탈자들이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그들과의 첫 조우 이래 지속적으로 환기되었기 때문이다. 폴아웃 시리즈를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가 인간이 얼마나 절박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폴아웃3>를 플레이하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이었고, 이후 이 시리즈를 플레이하는 내내 그런 느낌을 반복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전체 시리즈를 관통하는 거대한 두려움 - 여전히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핵 분쟁 및 그에 따른 두려움과 같은 [19] - 속에는 우리 사회가 갈수록 지속가능성을 잃어감에 따라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폭력적으로 돌변할 수 있고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그에 따른 공포로 인해 고통을 받을 수도 있다는 훨씬 더 단순하고 작은 가능성을 제시한다. 데이비드 페캠(David Peckham)은 "불안은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에 대해 우리가 치르는 대가" [20] 라고 말한 신경과학자 조셉 르두(Joseph LeDoux)의 연구를 언급한 바 있다. 폴아웃과 같은 시리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존재하는 역사적인 그리고 지금도 발생하고 있는 공포를 바탕으로 다가올 수 있는 미래들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해준다. <레지던트 이블>의 개들처럼 점프 스케어를 통해 단순히 사람이 깜짝 놀라는 반응을 일으키는 것 보다는, 수퍼-두퍼 마트에 잠입을 시도하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지는 여러 겹의 공포를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호러, 공포, 패닉, 그리고 불안이 한데 아우러져 공포의 완전한 패키지로서 함께 제공되는 것이다. 그 공간의 분위기와 매달려있는 사체들은 내가 내 캐릭터에 가할 수 있는 끔찍한 결과를 예측하게 하는 공포를 야기한다. 발자국 소리를 듣거나 발각될 것 같다는 생각은 약간의 패닉을 느끼게 한다. 궁극적으로 폴아웃 세계의 약탈자들이 지닌 함의 및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지닌 끔찍한 가능성을 표상하고 있는 방식이야말로 게임 그 자체의 경계를 넘어 우리와 우리의 세계가 어떻게 될 수 있을지에 대해 나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기억하게 만든다는 점이 제일 중요하다. 게임은 그 어떤 매체보다도 우리가 공포스러운 상황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하지만 의미있고 강력한 공포를 만들어내는데 있어 몰입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진정한 공포는 갑작스러운 소리나 끔찍한 괴물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서 발생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및 그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우리라는 존재가 지닌 끔찍한 의미가 그러한 놀램과 함께 고조될 때 발생한다. 만약 게임이 이런 종류의 위협을 - 그것이 아무리 먼 곳에 있는 것일지라도 - 야기하기 위해 겁주기/놀래키기(scare)를 활용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움을 느낄 때다. 갑작스럽게 놀래키는 공포(sudden frights)은 그 원천이 일상적인 것이든 초자연적인 것이든 간에 예상치 못했을 때 발생한다. 반대로 지속적인 공포와 불안은 '만약에(what if)?'로부터 야기된다. 폴아웃의 경우 너무나 현실적으로 무너진 사회의 모습을 '만약에?'으로 다루었다. 진짜가 아님을 알면서도 겁을 먹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즐거움과 위안도 분명 있겠지만, 우리 자신이 지닌 위험의 가능성 보다 더 불안한 것이 과연 있을까? [1] Capcom, 1996. [2] Bethesda Softworks, 2008. [3] Red Barrels, 2013. [4] Frictional Games, 2010. [5] Mads Haahr, ‘Playing with Vision: Sight and Seeing as Narrative and Game Mechanics in Survival Horror’, in Interactive Storytelling, ed. Rebecca Rouse, Hartmut Koenitz, and Mads Haahr (Cham: Springer International Publishing, 2018), 193–205, https://doi.org/10.1007/978-3-030-04028-4_20 . [6] Sara Ahmed, ‘The Affective Politics of Fear’, in The Cultural Politics of Emotion (Edinburgh, UNITED KINGDOM: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4), 62–81, http://ebookcentral.proquest.com/lib/concordia-ebooks/detail.action?docID=1767554 . [7] Amnesia: The Dark Descent Full HD 1080p/60fps GTX1070 Longplay Walkthrough Gameplay No Commentary, 2016, https://www.youtube.com/watch?v=hyUf3Ctx-Ck . [8] Rebecca Roberts, ‘Fear of the Unknown: Music and Sound Design in Psychological Horror Games’, in Music In Video Games (Routledge, 2014). [9] Tanya Krzywinska, ‘Hands-on Horror’, Spectator 22, no. 2 (2002): 12–23. [10] OUTLAST | Full HD 1080p/60fps Longplay Walkthrough Gameplay No Commentary, 2017, https://www.youtube.com/watch?v=zZNfd04GO-U . [11] Creative Assembly, 2014. [12] Crystal Dynamics, 2013. [13] Nele Van De Mosselaer, “How Can We be Moved to Shoot Zombies? A Paradox of Fictional Emotions and Actions in Interactive Fiction.” Journal of Literary Theory 12(2), 2018: 286. [14] Ibid., 286-287. [15] Smilegate, 2019. [16] Blizzard Entertainment, 2004. [17] Brian Massumi. “Everywhere You Want to Be: Introduction to Fear.” The Politics of Everyday Fear.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3; 3-38. [18] Joseph LeDoux. Anxious: Using the Brain to Understand and Treat Fear and Anxiety. New York: Penguin Books, 2015. [19] Ryan Scheiding. “War Never Changes? Creating an American Victimology in Fallout 4.” Representing Conflicts in Games: Antagonism, Rivalry, and Competition. Edited by Björn Sjöblom, Jonas Linderoth, and Anders Frank. London: Routledge, 2023; 135-152. [20] Joseph LeDoux, Lecture, New York State Writers Institute 2016. Cited in David Peckham, Fear: An Alternative History of the World. London: Profile Books, 2023, 7.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연구자) 마크 라제네스, Marc Lajeunesse 캐나다 몬트리올 콩코디아대학 커뮤니케이션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 온라인 게임의 독성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삼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더 공평하고 즐거운 놀이 경험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으로 게임 내에서 더 많은 긍정적인 조건을 들어내기 위한 독성 현상에의 이해를 추구한다. 스팀 마켓플레이스와 DOTA 2에 관한 논문을 작성한 바 있고 곧 출시될 '트위치 마이크로스트리밍'의 공동 저자이다. (게임연구자) 나보라 게임연구자입니다. 게임 플레이는 꽤 오래 전부터 해왔지만, 게임학을 접한 것은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 우연히 게임 수업을 수강하면서였습니다. 졸업 후에는 간간히 게임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연구나 저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게임의 역사>, <게임의 이론>, <81년생 마리오> 등에 참여했습니다.

  • 게임기의 라디오 되기, 라디오의 게임기 되기: 이노 겐지의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1997)에서 생각할 것들

    비디오 게임에서 소리의 영역은 어떤 역사에 맞닿아 있을까? 영화가 문학과 회화, 연극, 음악 등의 온갖 예술사를 흡수하며 갱신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처럼, 비디오 게임의 역사에서도 직계와 방계를 넘나드는 여러 갈래의 영향 관계가 존재한다. 그 속에서 게임의 소리는 어떤 가능성의 영역이었을까? < Back 게임기의 라디오 되기, 라디오의 게임기 되기: 이노 겐지의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1997)에서 생각할 것들 03 GG Vol. 21. 12. 10. 비디오 게임에서 소리의 영역은 어떤 역사에 맞닿아 있을까? 영화가 문학과 회화, 연극, 음악 등의 온갖 예술사를 흡수하며 갱신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처럼, 비디오 게임의 역사에서도 직계와 방계를 넘나드는 여러 갈래의 영향 관계가 존재한다. 그 속에서 게임의 소리는 어떤 가능성의 영역이었을까? * 게임 시장이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며 전 세계가 주목하는 문화 트렌드가 되었을 때, 이노 겐지(飯野賢治)는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 リアルサウンド 〜風のリグレット」(1997)를 발표하며, 신구(新舊) 미디어 테크놀로지 역사에 교차점을 찍는 실험을 감행했다. 전설적인 게임 크리에이터 이노 겐지(飯野賢治)가 1997년 세가 새턴으로 출시한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 リアルサウンド 〜風のリグレット」는 그래픽 없이 오직 소리로만 진행되는 게임이다. 조작 방식은 단순하다. 스토리 분기점마다 차임벨이 울리고 진행이 정지된다. 선택 사항은 컨트롤러의 방향 버튼을 눌러 정한다 1) . 각본은 무코다 구니코상 수상 작가이자 TV드라마 「도쿄 러브 스토리 東京ラブストーリー」(1991)의 사카모토 유지(坂元裕二)가 맡았다. 2) 실종된 첫사랑 여성을 찾아 나선 대학 졸업반 남성의 이야기다. 서정적인 연애 서사에 추리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그런데 대사 분량이 일반 영화의 3배에 달해서, 게임의 드라마 부분만 재편집해서 도쿄 FM에서 방송되기도 했다. * 사카모토 유지(坂元裕二)가 직접 밝히기 전까지는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의 각본가는 이노 겐지라고 알려져 있었다. 이노 겐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야 사카모토 유지는 그를 추모하며 블로그에 각본을 공개했다. 최초의 각본은 두 사람이 함께 했던 여행 중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의 비범함은 게이머의 신체를 정의하는 방식에서 빛난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 게임을 즐길 수 없는 걸까? 게임을 즐길 수 없는 몸이란 대체 무엇일까?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은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점자 설명서를 포함했다. 당시로서는 워낙 낯설고 파격적인 시도였던 터라 흥행에 참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야말로 선지자처럼 등장한 게임이었다. 게임 업계에서 장애인을 위한 게임 접근성(Game Accessibility)의 실질적인 조치가 이뤄진 것은, 이노 겐지보다 10년 이상 늦은 2010년대의 일이었다. 3) 이노 겐지의 실험 이후로 청각 중심적인 게임 개발에 나선 후대의 작가들에게 이 작품은 가장 중요한 레퍼런스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이 게임은 시장의 우세종(優勢種)에서 밀려난 로우 테크 미디어와 낡은 예술의 재발견이기도 했다. 라디오 드라마 또는 오디오 북을 비디오 게임 기술에 접목한다는 것은, 신구(新舊) 미디어 테크놀로지 역사에 교차점을 찍는 시도였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정리 가능한 발상법이다. 무엇을 과거로부터 귀환시켜 현재와 만나게 할 것인가? 그 만남이 해봤던 일의 진부한 반복이 되지 않도록 정해야 할 n-1의 제약 조건은 무엇일까? 4) 이노 겐지가 제거한 특권적 하나와 중심은 ‘시각’이었다. 소비 대중과 시장 논리가 최첨단 기술과 최신 유행에 집중되는 사이에, 구닥다리 취급을 받게 된 기술과 이에 기반한 작품들은 차례로 위축, 쇠퇴, 소멸의 과정을 밟게 된다. 대량 생산과 소비의 영역 안에 충분히 카운팅되는 소비자의 신체성이 정상 표준으로 전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이 되지 않는 소수자는 소외와 배제의 장벽 바깥으로 떠밀려난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대전환 과정에서도 모든 이가 수월히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체장애 유무만이 아니라, 적응을 강요받는 미디어 환경 변화에 맞닥뜨렸을 때의 낯섦, 불안, 불쾌 역시 일시적인 것으로 취급할 문제가 아니다. 시장과 자본이 연일 메타버스에 환호하며, 일상을 한층 더 철저한 디지털 세계로 몰아넣고 있을 때, 어떤 이는 1990년대의 미디어 환경이 더 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자신에게 딱 좋았다고 불평한다. 이들의 세계가 과연 시대의 대세로부터 유리된 갈라파고스일까? 한 시대의 풍경과 삶의 방식에는 다채로운 차이들이 촘촘히 채워져야 한다. 일상의 모든 순간마다 삼성과 애플폰이 개입되고, 구글과 페이스북, 네이버, 카카오 플랫폼을 들락거리며 배달 음식 앱을 두들겨 끼니를 이어가는 생활이 지난 시대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복고 취향을 옹호하자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과거의 미디어 환경에서 가능했던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의 가능성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하고 실험해볼 충분한 시간이 부족했다. 자본과 시장 질서에 떠밀려 굴레가 정해진 가두리를 옮겨 다닐 뿐인 양식 물고기 신세가 대중 소비자의 실체다. 소비자는 주인으로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할 수 있는 것들의 한정된 목록 안에서 소비하고 싶어 하는 심신으로 훈육된다. 심신 장애의 기준 역시 대량 생산과 소비의 굴레에 최적화된 신체로 정해져 있다. * 시청각에 의존할 수 없는 이들은 하드웨어의 몸체에서 발산되는 촉각, 후각, 미각 신호를 감응해 자신만의 테크노스케이프를 구성한다. 라디오로부터 독자적인 우주를 떠올릴 수 있는 이들이라면 이 기계를 어디까지 재발명, 재발견할 수 있을까? 게임기가 라디오의 실종된 미래가 될 수 있을까? 2021년을 기준으로 누적 출하량이 1억 1,590만 대에 달하는 플레이스테이션은 구닥다리 라디오보다 배리어 프리(barrier free)한 상품일까? 지금의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 기반의 장치들은 지나치게 시각 중심적이며, 하드웨어로부터 감지되는 촉각은 아날로그 시대의 라디오와 비교해 황폐하기 그지없다. 미니멀리즘을 신봉한 스티브 잡스 류의 디지털리스트들은 편협하기 짝이 없는 획일화로 아날로그 기계들이 이룩한 풍요로운 감각의 제국을 파괴했다. 시청각에 의존할 수 없는 이들은 하드웨어의 몸체에서 발산되는 촉각, 후각, 미각 신호를 감응해 자신만의 테크노스케이프를 구성한다. 기업이 제공하는 사용자 매뉴얼에선 한 줄도 읽을 수 없는 시그널로 직조된 세계다. 이 세계에선 시청각의 우위에 소외당하는 쓸데없는 감각의 노이즈 같은 건 없다. 라디오로부터 독자적인 우주를 떠올릴 수 있는 이들이라면 이 기계를 어디까지 재발명, 재발견할 수 있을까? 게임기가 라디오의 실종된 미래가 될 수 있을까? 게임 시장이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며 전 세계가 주목하는 문화 트렌드가 되었을 때, 이노 겐지는 게임기의 라디오 되기, 라디오의 게임기 되기의 혼종 실험을 감행했다. 비디오 게임은 그래픽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강렬한 시각 연출을 앞세워 흥행을 이어왔다. 게임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눈을 뜬 채로 유지하는 일이란, 게임의 시각성에 매혹되는 과정이면서, 게임의 미디어 환경이 게이머의 신체에 명령하는 감각 배치에 순응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시청각 반응이 과활성화될 때 상대적으로 무뎌지는 신체가 있다. 정반대도 가능하다. 평소 비활성화된 신체와 인지 능력을 깨울 방법으로도 게임은 유용하다. 그래서 게임 그 자체를 비판적으로 상대화하는 게임이 필요한 것이다. 이쯤에서 미디어의 역사를 되짚어 보아야 한다. 소리로 상상력과 몰입을 극대화하는 게임성은 라디오 드라마의 역사에 맞닿아 있다. 그뿐만 아니라 라디오 야구 중계의 탄생과도 무관하지 않다. 두 분야 모두 1920년대의 발명품이었다. 최초의 라디오 야구 중계는 1921년 미국 피츠버그의 KDKA 방송이었고, 같은 해에 다양한 형태의 드라마 실험이 라디오에서 시도됐다. 5) * 소리로 상상력과 몰입을 극대화하는 게임성은 라디오 드라마와 라디오 야구 중계의 탄생과 무관하지 않다. 두 분야 모두 1920년대의 발명품이었다. 지금의 감각에선 라디오 경기 중계쯤은 새로울 게 없는 고전적인 방송 방식이지만, 1920년대에는 최첨단 미디어 체험이었다. 청취자들은 야구 경기를 직접 관람하지 않고도 상상으로 몰입하는 재미를 알게 됐다. 이 시기의 상상력이란 디지털 기기에 일상을 잠식당한 지금 시대의 상상력과는 많은 점에서 달랐을 것이다. 대중이 뭘 상상하든 수익성 있는 사업만 된다면 메이저리그 구단주들이야 방송국에 협조 못 할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도 처음에는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하지만 1930년대 대공황기에 접어들면서 경기 관람객 수가 급감하자 1939년까지 라디오 방송 중계를 전면 금지했다. 이런 일은 미디어의 역사마다 수도 없이 반복됐다. * 출판인이자 SF 작가이며, 열렬한 아마츄어 라디오 애호가였던 휴고 건즈백이 1919년에 창간한 . 미국 정부가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에 아마츄어 라디오 통신을 금지시키자, 건즈백은 지면을 활용해 금지 해제 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건즈백의 출판사는 1929년 파산한다. 이후 이 잡지는 BA Mackinnon과 Ziff-Davis Publishing으로 소유권이 이전됐고 1971년까지 발행됐다. 무선 통신망이 국가의 통제 아래 본격적인 관리를 받기 전인 1910년대까지만 해도, 라디오 기술은 일방향적인 방송 방식이 아니라 개개인의 송수신이 자유로운 쌍방향 방식이었다. 수많은 아마추어 무선가들이 독자적인 라디오 클럽을 운영할 수 있었다. 1917년을 기준으로 미국에만 15만 개에 이르는 무면허 아마추어 무선국이 존재했다. 6) 그들이 사용하는 라디오는 군용 VHF 통신 장비와 구조적으로 같았다. 1920년대에 대중화된 라디오는 여기서 송신 기능을 없애버린 것이다. 아마추어 무선 활동도 면허제가 도입되면서 국가 안보에 관련된 사안으로 통제됐다. 그 후 불과 10년도 안 되는 동안에 대중은 라디오 장치의 일방향성을 당연한 특징으로 여기게 되었다. 청취자의 상상계에서 아마추어 라디오국의 활력이 증발하고 야구장까지 자취를 감췄던 이력이다. 1930년대가 되면 세계 각국에서 라디오는 국가의 프로파간다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극작가이자 시인이며 미디어 실천가이기도 했던 브레히트는 1932년에 발표한 「의사소통 도구로서의 라디오 : 라디오의 기능에 관한 연설 Der Rundfunk als Kommunikationsapparat : Rede über die Funktion des Rundfunks」에서, 이 장치가 본래 양방향적인 의사소통 도구였음을 상기시켰다. 7) 그리고 오늘날의 인터넷과 비슷한 개념의 쌍방향 통신이 자유분방하게 이뤄지는 라디오 담론 네트워크를 구상했다. 1910년대의 자유분방했던 라디오 클럽의 유산이 국가와 자본에 포획되어 허무하게 꺾이지 않았다면 텔레커뮤니케이션의 역사는 지금과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지난 시대의 미디어 상상력을 통해 지금의 미디어 환경을 낯설게 다시 관찰할 수 있다. 방송을 듣기만 하는 몸에서 방송하는 몸으로 전환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전파의 저편을 향해 말하기 위해서, 공들여 이야깃거리를 준비하고 완성도를 높이려 노력하는 하루란 무엇일까? 오늘날의 게임 문화에서 이런 수행성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게임은 다양한 스케일과 채널을 갖춘 커뮤니케이션 장이면서, 쌍방향 방송이자 2차 창작(MOD)의 무대로 완연히 자리 잡았다. 8) 여기에서 더 나아가 게임이 (지난 시대 사람들이 영화가 그럴 수 있길 바랐던 것처럼) 문학과 회화, 연극, 음악, 로우 테크와 하이 테크, 구 미디어와 뉴 미디어를 새롭게 배치(n-1)하는 미디어 실천의 장이 될 수 있을까? * RAC7이 2015년에 발표한 「Dark Echo」는 청각이 중심이 되는 게임이라는 점에서 이전 시대의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과 비교해볼 만한 작품이다. 비록 현실화되지 못했지만 이노 겐지는 호러 버전의 청각 게임을 「리얼 사운드」의 후속작으로 발표하려 했다. 대상보다는 상황에 집중하게 되는 청각의 특징을 살리려면 연애물보다는 호러가 유리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의 방법론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될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흔히 문명화되지 않은 감각으로 취급되는 후각, 촉각이 증폭될 수 있도록 세가 새턴을 다른 장치에 뒤섞어 해킹해볼 수도 있겠다. 라디오에서 제거된 쌍방향 통신성을 복원하고, 참가자들이 변주된 이야기를 주고받는 네트워크 구축 역시 가능하다. 쉽게 접속하고 검색되며 파편화된 정보가 얄팍하게 소비되는 일이 만연한 오늘날의 미디어 환경에서, 애써 특권과 중심에서 돌아 나와 무한히 변신하려는 게임 실험을 기대해본다. 1) 久遠馨, 『Dの食卓はなぜ伝説のゲームになったのか?―次世代に遺したいゲームプランニングの基本』, 秀和システム, 2014, pp.30-32. 2) 각본 전문은 사카모토 유지의 블로그(https://han.gl/BCZsK)에 공개되어 있다. 3) Ian Hamilton, 「A history of game accessibility guidelines」, 『gamedeveloper.com』, 2021.6.17. (https://han.gl/VZFVo) 4)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1, p.47. 5) Eldon L. Ham, 『Broadcasting Baseball: A History of the National Pastime on Radio and Television』, McFarland, 2011, pp.40-42. 6) 요시미 순야, 『소리의 자본주의』, 송태욱 옮김, 이매진, 2005, pp.234-250. 안드레아스 뵌 · 안드레아스 자이들러, 『매체의 역사 읽기』, 이상훈 · 황승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0, pp.203-212. 7) 김성기, 「미디어 유토피아의 계보 : 브레히트의 ‘라디오 이론’에서 플루서의 ‘텔레마틱론’으로」, 『한국방송학보』 29권 4호, 한국방송학회, 2015, 5-32쪽. 8) 닉 다이어 위데포드, 그릭 드 퓨터, 『제국의 게임』, 남청수 옮김, 갈무리, 2015, pp.428-437.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교수) 임태훈 조선대학교 자유전공학부 조교수.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문학사의 접점, SF 문화와 사운드스케이프 예술을 연구하고 있다. 공저로 『기계비평들』, 『한국 테크노컬처 연대기』, 『시민을 위한 테크놀로지 가이드』가 있고, 대표 저서로 『검색되지 않을 자유』, 『우애의 미디올로지』 등이 있다.

  • 남성향 연애 게임에서의 '사랑'

    사랑을 게임 속에 재현해보고자 처음 시도됐던 남성향 연애 게임은 사랑 그 자체보다도 점차 게이머의 즐거움을 유발할 수 있도록 ‘게임성’에 집중하고자 했고, 이는 어느 정도 연애 게임의 진화된 모습으로 정착될 수 있었다. < Back 남성향 연애 게임에서의 '사랑' 16 GG Vol. 24. 2. 10. 디지털 게임에서 사랑을 가장 중심으로 삼는 장르는 역시 연애 게임일 것이다. 2018년도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실시된 닛케이 신문과의 연계 워크숍에서 대학생들이 연애 게임에 대한 조사 1) 를 실시한 바 있다 . 이 조사에 응답한 사람의 52%가 연애 게임을 해봤다고 진술했다. 절반이 넘는 수치이다. 조사를 주도한 학생들은 응답 결과와 함께 응답자들의 짧은 인터뷰, 연애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의 의견을 종합해, 연애 게임의 인기 요인을 ‘게임에서만 가능한 연애’와 ‘스토리나 캐릭터에 매력을 느낀다’로 보았다. 이들은 ‘연애 게임의 고유성’을 통해 연애의 이상을 더 가깝게 느끼게 해주고, 연애의 형태가 이로부터 진화하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이들은 단순히 연애나 사랑을 경험하거나 더 잘하기 위해 연애 게임을 즐기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게임 속 연애를 현실 연애의 간접 경험이 아닌, 게임 플레이 그 자체로 본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연애 게임은 연애와 사랑을 어떻게 다루고 있기에 이러한 해석을 할 수 있었을까? 앞서, 연애 게임이라는 장르를 정의하는 것은 꽤나 난제다. 큰 하위 장르로는 크게 연애 어드벤처와 연애 시뮬레이션이 있다. 우선, 연애 어드벤처는 연애를 테마로 한 텍스트 어드벤처다. 1980~90년대 텍스트 어드벤처의 유행 속에서 연애를 소재로 만들어진 게임들을 가리킨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장르적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원조 격으론 엘프(elf)의 1992년 작품 <동급생(同級生)>이 있다. 시나리오 속 선택지를 통해 자신만의 연애 스토리를 달성해가는 연애 어드벤처 방식은 오늘날의 연애 게임에서도 가장 많이 시도된다. 연애 시뮬레이션은 코나미의 1994년 작품인 남성향 연애 시뮬레이션 <도키메키 메모리얼(ときめきメモリアル)>를 시작으로 시작으로 발전해왔다 2) . 해당 작품에서 처음으로 도입된 능력치를 통한 호감도 시스템은 롤플레잉이나 육성 시뮬레이션에서 채용하던 캐릭터 육성 시스템을 연애에 맞게 바꾼 형태였다. 한국에서도 이 게임을 통해 속칭 ‘미연시(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3) 라는 용어가 널리 퍼졌다. 이러한 점에서 실질적인 ‘연애 시뮬레이션’은 주인공이나 주변 캐릭터의 육성, 성장과 같은 관리 요소와 텍스트 어드벤처 요소를 결합해 연애에 도달할 수 있도록 시뮬레이션 하는 장르를 의미한다. 간략하게 소개했지만, 연애 게임의 계보나 장르적 특성을 정리하는 것은 여러 논의를 통해야 하는 복잡한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 시초인 연애 어드벤처와 연애 시뮬레이션을 아우르는 남성향 연애 게임에서 연애와 사랑이라는 소재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에 집중하고자 한다. 연애 게임에서 흥미로운 점은 한국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연애 게임의 시작이 ‘남성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연애 게임은 단순히 남성 게이머만의 장르는 아니기도 하다. 여성 게이머를 타겟으로 한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그 시장은 지금에 와서 남성향과 견줄 만하다. 그렇다면 남성향 연애 게임은 여성향과는 무엇이 다를까? 기본적인 게임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다. 연애를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 여러 요소를 육성하며 플레이하거나, 텍스트 어드벤처 형태로 주어진 선택지를 골라가며 자신만의 연애를 달성하는 방식이다. 남성향이나 여성향 모두 같은 구조, 형태로 디자인된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가장 큰 차이점은 남성향의 경우 일반적으로 게이머가 남성 주인공 캐릭터가 되어 여러 여성 캐릭터 중 한 명을 선택해 연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이다. 여성향은 대체로 반대 구도를 채택한다. 등장 인물이나 인간관계 구도 외에도 세세하게는 게임이 채택하고 있는 세계관이나 설정 등 소재에서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다만, 두 성향의 차이로 제시된 소재나 설정에서 한 가지 오해하기 쉬운 것은 흔히 판타지 세계관이나 요소 등이 남성향에 치우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여성향의 경우에도 연애 시뮬레이션 장르 시초인 <안젤리크> 역시 이른바 정통 판타지를 채택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판타지라는 설정이 남성향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그러나 판타지를 ‘가상, 상상’이라는 의미로 볼 때, 남성향은 더욱 게임적인 판타지를 띠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같은 스포츠 중심의 현대풍 판타지 세계관인 작품이라고 해도 남성향인 <푸른 저편의 포리듬(蒼の彼方のフォーリズム)>과 여성향인 <프린스 오브 스트라이드(プリンスオブストライド)>는 판타지의 '농도'가 다르다. <프린스 오브 스트라이드>는 계주를 소재로 한 가상의 스포츠 ‘스트라이드’를 중심으로 한다. 스트라이드는 현실에서도 접할 수 있는 계주와 골자는 같다. 그에 반해, <푸른 저편의 포리듬>은 하늘을 날 수 있는 ‘안티 그래비티 슈즈’를 중심으로 한 ‘플라잉 서커스’라는 가상의 스포츠를 중심으로 한다. 전제부터 현실에서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는 설정과 세계관이다. 흔히 우리가 “게임이니까 그럴 수 있지”라고 말할 수 있는 소재이다. 물론 이런 경향이 일반화될 수는 없지만, 남성향의 취향을 반영하는 극적인 설정이나 테마가 적극적으로 채택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아마 남성향이 갖는 특징 중 하나인 강조된 가상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푸른 저편의 포리듬> 4) <프린스 오브 스트라이드> 5) 연애 게임의 서사는 연애의 달성, 즉, 사랑의 결실이라는 단순 명쾌한 목표를 제시한다. 연애 어드벤처 또한 시뮬레이션 요소만 없을 뿐, 오히려 이런 시나리오는 더욱 강조된다. 그런데 재밌는 건 의외로 남성향 연애 게임의 경우, 게임을 끝낸 후 보편적인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러한 감상은 연애 게임에 대한 게이머들의 리뷰를 봐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게임들이 감동적이고, 로맨틱한 사랑의 쟁취를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엔딩에 이르기까지 충분히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연애 게임의 대단원이 주는 것은 ‘즐거움’이다. 어째서 적극적으로 사랑을 테마로 하는 게임을 하는 데도 이런 느낌을 받는 것일까? 이는 앞서 언급한 남성향의 가상성에서부터 유추할 수 있다. 작품들의 플롯을 보고, 플레이하기 시작하면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은 ‘어떤 스토리일까?’, ‘어떤 캐릭터가 있고, 누구를 공략할까?’일 것이다. 그 이유는 게이머가 스토리를 이해하고 진행하기 위해 제시된 설정과 조건들, 각각 캐릭터가 지니고 있는 특징들을 익히는 과정에서 드라마틱하게 ‘비현실’적인 정보들을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들을 통해 게이머는 게임임을 인식하게 된다. 앞으로 겪게 될 사랑과 연애는 점차 현실적이지 않게 된다. 게이머 자신이 온전히 게임 속 주인공을 연기할 순 있지만, 현실에서 느끼는 사랑과는 멀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이 ‘게임적 인식 프레임’을 형성한다(井上, 2007). 게임 시작 지점에서 조금 더 진행을 하게 되면, 여성 캐릭터와의 여러 이벤트가 발생한다. 자신의 캐릭터를 육성하면서 발생한 이벤트일 수도 있고, 게이머 자신이 고른 선택지를 통해 유도된 것일 수도 있다. 이벤트는 시나리오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그러나 게이머는 앞서 형성된 게임적 인식 프레임을 통해,이 플레이가 현실의 연애가 아닌 ‘공략’을 위한 플레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여기서 게이머는 이벤트를 위해 자신만의 ‘공략 루트’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연애 게임의 ‘즐거움’임을 인지한다(江, 2019). 이 과정에서 시나리오는 게이머가 게임에 몰입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게임 플레이 그 자체의 결과가 되기도 한다. 게이머 자신이 게임에서 사랑과 연애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과는 달리, 주어진 게임의 목표를 달성하여 얻게 된 것이 시나리오다. 즉, 게이머는 자신의 플레이 결과로써 시나리오를 접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게임이 주는 사랑과 연애의 경험은 온전히 게임 속에서만 존재하게 된다.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여성향도 똑같은 거 아닌가?’ 그러나 여기서 다른 점은 여성향 연애 게임이 ‘캐릭터의 감정 서사’와 이른바 ‘노벨 게임화’를 중심으로 발전하는 궤적을 꼽을 수 있다(小出·尾鼻, 2018). 즉, 여성향 게임이 제공하는 주요한 플레이의 강조점이 서사 전달이라는 것이다. 더 좋은 시나리오를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과 연애라는 서사를 온전히 전달하는 것이 여성향 게임의 목표에 가깝다. 다시 남성향으로 돌아가보자. 지금의 남성향이 추구하는 시나리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성장이다. 청춘의 우정에서 사랑으로, 미흡하던 모습에서 되고 싶은 자신으로 점차 발전해 나가는 스토리이다. 이는 마치 롤플레잉 게임의 주인공 서사처럼 점차 영웅이 되어가는 모습을 그리는 것과 같다. 게임이 제공하는 선택지는 단순히 상대방의 호감을 사기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이 되고 싶었던 모습으로의 변화를 가능케 한다. 이 결과, 게임의 엔딩은 '완벽한 자신'과 '사랑의 결실'이라는 두 가지 값으로 수렴한다. 남성향 연애 게임의 이러한 서사를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게이머의 게임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이다. 강조된 판타지적 소재와 세계관, 캐릭터와의 갈등 구조, 역경의 극복 등은 이러한 시나리오를 보다 게임적으로 강조하는 요소가 된다. 시뮬레이션 플레이만 해도 일련의 텍스트로 정리되진 않지만, 게이머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시나리오 라이팅이기도 하다. 게임 디자인도 게이머의 적극적인 플레이를 상정한다. 즉, 남성향 연애 게임은 사랑의 획득 방식을 게임적으로 제공한다. 이를 위해 개발자들은 초창기 연애 시뮬레이션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게임성’을 다시금 불러온다. 어떻게 하면 더 재밌게 사랑이라는 요소를 게임 플레이로 치환할 수 있을 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은 점차 게이머의 적극적인 게임 플레이를 강조하는 작품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썸썸 편의점>과 같은 경영 시뮬레이션이 접목되어 있는 게임이나, DLSITE나 스팀의 일본 인디 연애 게임에서 연애 시뮬레이션에 RPG나 ‘서바이버즈 라이크’ 등을 접목하여 게임성에 더욱 집중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호감도를 얻게 되거나, 필요한 능력치나 아이템 등을 얻게 되기도 한다. 혹은 이러한 파트 이후 여러 이벤트들을 발생시키면서 다시 연애 어드벤처로 유도하는 방식 등을 교차적으로 활용한다. 테일즈샵의 <썸썸 편의점> 경영 파트(출처:스토브 인디) 남성향 연애 게임에서 연애와 사랑은 독특한 위치에 있다. 분명하게 연애의 경험을 표방하고 있지만, 이를 다루는 방식은 매우 게임적이다. 사랑은 그러한 연애를 서포트하기 위한 순간순간의 파라미터처럼 작동한다. 즉, 남성향 연애 게임에서 연애와 사랑은 게임 플레이이자 게임의 목표, 목적이 된다. 특히 사랑은 단순히 좋아한다는 감정이나 개념으로써 작동하는 것이 아닌, 게임의 공략 대상이 된다. 사랑은 남성향 연애 게임에서 ‘게임성’에 직결되는 요소이다. 게이머는 수치화 혹은 가시화된 사랑을 자기 캐릭터의 연애에 어떻게 반영할 수 있을 지 고민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사랑은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이러한 플레이를 통해 게이머는 게임의 즐거움을 얻게 된다. 즐거움의 원천은 분명하게 사랑과 연애이지만, 그 표현의 방식은 매우 게임적으로 설계된다. 남성향 연애 게임이 중시하고 있는 사랑의 표현은 단순히 감정의 재현이 아닌, 어떻게 사랑을 게임 디자인적으로 재미있게 제시할 수 있을 지에 대한 노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성향 연애 게임을 하면서 여러 사랑의 감정과 경험을 겪으면서도, 결과적으로 ‘재밌었다’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게 된다. 남성향 연애 게임의 시나리오나 디자인이 사랑의 본질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남성향 연애 게임은 복잡하면서도 단순할 수 있는 감정을 게임에 녹여내는 것에 집중하면서, 우리가 다른 장르에서 즐겨왔던 분위기를 제약된 연애 게임 구성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남성향적 테이스트가 시나리오 구조나 게임 디자인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연애와 사랑이라는 요소를 통해, 게임의 즐거움을 주는 방식이야 말로 남성향 연애 게임이 제공하는 사랑의 표현이다. 남성향 연애 게임은 게임 그 자체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게이머를 위한 또 다른 즐거움을 제공하는 장르인 셈이다. 오히려 사랑이라는 테마를 가장 게임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게임에 대한 사랑을 대표하는 장르일 수도 있다. 이를 위해 남성향 연애 게임은 적극적으로 가상성을 강조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장르의 게임을 혼종적으로 채택하기도 한다. 가끔 게임의 엔딩은 엉뚱하게 판타지 요소에 매몰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또한 남성향 연애 게임을 즐기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남성향 연애 게임의 인기가 점차 식어가던 시장 상황에서, 이러한 시도들은 인디 개발자들과 새로운 남성 게이머층을 끌어들이도록 기여하고 있다. 한국의 1인 인디 개발사 ‘스튜디오 사이’의 ‘액션RPG 연애 시뮬레이션’ <이터나이츠>와 같은 게임들처럼 말이다. <이터나이츠>(출처:스팀 상점 페이지) 필자의 생각이 연애 게임 전반에 보편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성향 또한 남성향에 관해 서술한 내용과 같은 방식으로 게임이 흘러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게임 속에 재현해보고자 처음 시도됐던 남성향 연애 게임은 사랑 그 자체보다도 점차 게이머의 즐거움을 유발할 수 있도록 ‘게임성’에 집중하고자 했고, 이는 어느 정도 연애 게임의 진화된 모습으로 정착될 수 있었다. 나아가 이러한 노력은 다시금 게임에서 ‘사랑’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남성향 연애 게임의 사랑은 게임 그 자체에 대한 애정 어린 표현은 아닐까? 참고문헌 井上明人(2007)「ゲームという認識の枠組み-日本の先行研究を中心に-」『デジタルゲーム学研究』第1巻1号、46-53p 江葉航(2019)「ビジュアルノベルにおける構造とそのリアリティー : ゲームデザインとゲームプレイをめぐって」『Core Ethics』第15号、35-46p 小出治都子、尾鼻崇(2018)「「乙女ゲーム」の歴史的研究 : キャラクター分析を中心に」『大阪樟蔭女子大学研究紀要』第8号、69-74p 1) https://www.nikkei.com/article/DGXMZO38898390T11C18A2000000/ 2) 여성향 연애 시뮬레이션인 코에이의 개발부서인 ‘루비파티’의 <안젤리크(アンジェリーク)> 또한 1994년 발매되었지만, <도키메키 메모리얼>이 발매 시기가 빨랐다. 3) 그러나 ‘미연시’는 이 게임에서 비롯된 준말이지만, 지금에 와서는 연애 시뮬레이션과 비주얼 노벨 형식의 연애 어드벤처를 모두 칭한다. 이는 연애 게임 시장의 주류가 점차 연애 어드벤처 장르로 치우치는 경향에서 비롯되었다. 4) https://aokana.sprite.net/ 5) http://posweb.jp/pos/game/index.html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박수진 게임연구에 발을 들인 대학원생입니다. 지금은 일본 리츠메이칸대학 첨단종합학술연구과에서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최근엔 게임을 매개로 한 다양한 게임 경험과 일본 내 서브컬처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글 쓰는 건 여전히 어렵습니다.

  • 게임에 대한 트랜스페미닌 커뮤니티의 문화 코드화

    트랜스페미닌 (transfeminine)은 논바이너리부터 트랜스여성까지, 트랜스젠더 중에 상대적으로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젠더 표현을 지향하는 모든 이들을 아우르는 표현이다. 논바이너리 중에 스스로를 여성 젠더에 더 가깝다고 느끼는 이들 (she/they)이 여기 속하고 트랜스여성 (she/her)이 가장 확실하게 속하는 계열이다. 그리고 트랜스페미닌 커뮤니티라고 하면 다양한 SNS 및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를 기반으로 산발적으로 발생한 정체성 기반 네트워크를 이른다. < Back 게임에 대한 트랜스페미닌 커뮤니티의 문화 코드화 21 GG Vol. 24. 12. 10. 트랜스페미닌 (transfeminine)은 논바이너리부터 트랜스여성까지, 트랜스젠더 중에 상대적으로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젠더 표현을 지향하는 모든 이들을 아우르는 표현이다. 논바이너리 중에 스스로를 여성 젠더에 더 가깝다고 느끼는 이들 (she/they)이 여기 속하고 트랜스여성 (she/her)이 가장 확실하게 속하는 계열이다. 그리고 트랜스페미닌 커뮤니티라고 하면 다양한 SNS 및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를 기반으로 산발적으로 발생한 정체성 기반 네트워크를 이른다. 정체성 기반 네트워크들이 으레 그러듯이 젠더 정체성만을 구심점으로 삼고 모이다 보니 사실상 소속원들끼리 정체성 외에 딱히 공통항이 많지는 않다. 하지만 오히려 당연하게도 개개인 각자가 서로 전혀 다른 고유하고 개별적인 특질들을 가지고 있는 만큼 더더욱 그나마 공유되고 있는 조그마한 지표라도 발견하면 그것들을 중심으로 문화 코드를 형성하고 향유한다. 특히 최근 트랜스페미닌 커뮤니티에서 반복적으로 호명되는 게임들이 있다. <울트라킬> (2020), <시그널리스> (2022), <폴아웃: 뉴 베가스> (2010), <셀레스트> (2018), 그리고 <길티 기어 스트라이브> (2021)는 각자가 트랜스펨들을 중심으로 하는 탄탄한 팬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양식의 밈들에서도 유난히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그렇다면 이 게임들은 어째서 트랜스펨 [1] 들에게 선택된 것일까? 이 게임들이 트랜스페미닌 정체성과 따로 특별히 공모하는 지점이라도 있는 걸까? <울트라킬>: 천사의 자기탐색과 CCTV 플레이어 [2] <울트라킬>은 아직 얼리 액세스 상태인 인디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상당한 크기의 팬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는 초고속-초폭력 고옥탄가의 FPS 게임이다. 미래에 모든 인류가 전쟁으로 인해 멸망한 뒤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울트라킬>의 세계관에서 오직 남은 것은 피를 연료로 삼아 작동하는 전쟁 기계들 뿐이다. 그리고 게임은 더 많은 피를 찾아 지옥으로 걸어 들어간 기계 “V1”의 이야기를 다룬다. 플레이어가 V1의 눈을 통해 경험하는 세계는 지옥을 지배하는 천사들의 고압적이고 수직적인 위계가 모든 영혼을 억압하고 있다. 딱히 V1에게 저항적이거나 혁명적인 정신이 있어서 천계와 맞서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오직 더 많은 피를 흘리기 위한 여정 속에서 천계 의회를 대표해 검을 휘두르는 “지옥의 심판자” 가브리엘과 싸우게 된다.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한 명의 주인공이 한 명 이상의 여러 적수들, 혹은 체제 전체에 부딪히고 결과적으로 그것들을 무너뜨리는 구조는 액션 게임에서 상당히 보편적이다. 그러나 (심지어 아직 완결이 안 났음에도) <울트라킬>의 주요 적대 인물인 가브리엘이 지금까지 굳게 믿고 있었던 천국에 대한 믿음을 주인공과의 만남을 통해 뿌리부터 의심하게 되고 당연하게 믿고 있었던 세계관이 뒤집히는 경험을 하며 스스로의 생의 목적, 나아가서는 정체성을 찾아가게 되는 여정은 액션 게임의 문법 속에서도 상당히 독특한 편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정작 주인공 V1은 단 한 줄의 대사도 갖지 않고 그 스스로가 고유하고 특별한 인격을 가지지도, 당연히 존재의 변화를 겪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울트라킬>의 서사는 주인공의 성장이 아니라 적의 성장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울트라킬>의 1막 마지막 장면의 보스전에서 가브리엘은 주인공과 첫 전투 이후 난생 처음으로 삶 전체에서 패배라는 것을 경험한다. 이때 대답 없는 신과 천국, 천사의 완전함에 대해 가브리엘이 가지고 있던 굳은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실패로 말미암아 천계에서 파면당한 가브리엘은 실패의 경험을 증오로 돌려 2막 보스전에서 다시 한번 주인공과 대면하게 된다. 그러나 게임 내 주인공의 적수라는 운명에 이기지 못하고 당연히 연거푸 패배하고 만다. 이 두 번째 패배 직후 가브리엘은 주인공으로 인해 피어올랐던 증오를 자기 존재 변화의 연료로 삼는다. 즉, 가브리엘은 절대적이며 운명적이어야 했을 신의 의지가 그대로 이뤄지지 않고 신의 가호가 자신을 지켜주지 못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고는 그렇다면 자신은 지금까지 누구를 위해서 살아온 것이며 이 모든 게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를 의문하게 된 것이다. “완벽해야 했을 조각은 처음부터 맞지 않는다 (The pieces never fit together to begin with.)” 찾아온 현현顯現에 따라 가브리엘은 처음으로 검을 다른 누구의 의지도 아닌 순수한 자기 자신의 의지로 휘둘러 지금까지 스스로 명령을 따라왔던 천국 의회를 직접 몰살한다. 총 3막으로 예정된 전체 서사 중에 현재 2막까지 완성되어 있는 <울트라킬>에서 플레이어에겐 별다른 서사가 주어지지 않고 주인공은 적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촉매 역할을 담당한다. 즉, 오히려 서사는 적대 인물이 경험하고 플레이어는 스스로가 인물의 변화 원인이 되어 적이 존재를 찾아가는 과정을 상대적 시선에서 목격하는 것이다. 가브리엘이 겪는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는 감정도 인격도 서사도 없는 V1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가브리엘과 정반대로 V1은 플레이어에게 오로지 게임 화면으로 송출되는 1인칭 시선만을 제공한다. V1은 스스로의 의지라고는 없이 철저히 플레이어의 의지에 따라서만 움직일 뿐이지만 오히려 그럼으로써 플레이어의 의지를 완벽하게 운반하는 그릇이 된다. 말하자면 주인공 캐릭터가 개별적 인물로서 존재하지 않고 플레이어의 의지에 개입하지도, 플레이어를 방해하지도, 가리지도 않으며 분리 없이 플레이어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에서 눈앞의 가브리엘이 자기 자신의 의지를 찾으며 점점 독자적 존재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소격 효과를 일으킨다. 플레이어 자신도 스스로 삶과 존재의 목적에 대해,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미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충분히 겪어온 트랜스젠더들은 이를 통해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기보단 경험적 공감을 느끼는 일이 더 잦을 것이다. 나아가 <울트라킬>의 게임플레이는 접근할 수 있는 방식이 매우 다채롭고 자유롭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팬 커뮤니티 형성에 용이한 조건을 가진다. 특히 게임 내 물리 엔진 및 총알 발사 메커니즘 등을 농락하며 수직 가속도를 수평 가속도로 전환해 맵을 눈 깜짝할 사이에 횡단하고 공중에 던진 동전에 총알을 420574331번 튕긴다든지 (아무렇게나 쓴 숫자가 아니라 실제 기록된 횟수이다) 하는 기행들이 가능한 환경은 플레이어들의 창의력과 집중력, 도전 의식을 자극한다. <울트라킬>의 제작자 하키타 (Hakita)는 본인이 바이섹슈얼이라고 밝힌 바 있으며 그 외에도 3D 디자이너 겸 그래픽 프로그래머인 빅토리아 홀랜드 (Victoria Holland)와 컨셉 및 텍스처 디자이너 프랜시스 시에 (Francis Xie)는 본격적으로 각각 트랜스여성과 트랜스남성 당사자이기도 하다. 즉, 작품 자체가 성소수자 당사자들에 의해 제작된 만큼 팬 커뮤니티 또한 성소수자들을 기반으로 구성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나아가 하키타는 기계 로봇인 주인공 V1에게는 어떤 젠더 대명사를 사용하는 것이 적합하냐는 팬들의 논의에 V1은 기계이기 때문에 젠더가 없으나 he/him 대명사를 사용한다고 답변했으며, 그럼에도 <울트라킬>에는 동시에 기계“임에도” 젠더가 존재하는 개체들마저 있다. “마인드플레이어” (Mindflayer)라는 적이 대표적인데, 게임 내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로 그녀는 머리 부분만이 기계 본체임에도 그 아래로 인간의 신체 형태와 유사한 플라스틱 외피를 굳이 스스로 형성해 활동한다. 플라스틱 신체 부분은 실질적으로 별다른 기능이 없이 오직 미적인 목적만을 지니고 있음에도 마인드플레이어는 그 과정에서 자신이 파괴되는 일이 있더라도 모든 힘을 다해 이 플라스틱 신체를 보호하려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필연적으로 주어진 신체가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여 형성한 몸을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마인드플레이어의 습성은 현실 속 트랜스젠더들에 대한 단적인 비유로 읽힐 수밖에 없다. <시그널리스>: 몸과 시간, 인식의 비명 <시그널리스>는 엄밀한 의미에서 올해 출시된 <사일런트 힐 2>의 공식 리메이크보다도 더욱더 충실하게 <사일런트 힐> 시리즈를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서바이벌 호러 인디 게임이다. 즉, 게임플레이 측면에선 기본적으로 탑다운 형식의 2.5D 그래픽을 기용하며 때때로 1인칭과 3인칭을 오가고 라디오를 비롯한 퍼즐을 적극적인 사용하며 의도적으로 불친절한 인벤토리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시그널리스>를 독립적인 걸작으로 만드는 면모는 극단적일 만치 비선형적이며 표현주의적인, 언뜻 난해하기까지 한 연출 방식이다. <시그널리스>가 한계까지 실험한 표현주의적 연출은 바로 시간과 인식의 비선형성, 존재의 분열 등을 다루는 서사와 운명적으로 맞물리며 빛을 발한다. 다시 말해 최근 인디 게임 중 <사일런트 힐>을 제대로 계승하는 또 다른 작품 <피어 앤 헝거> 시리즈가 그 계보 상의 공포와 끔찍한 그로테스크를 이어 나가고 있다면 <시그널리스>는 실질적으로 존재론적 비애와 절망의 측면에서 서바이벌 호러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먼 미래의 전체주의 사회 “유산 (Eusan)”은 성간 단위로 통치가 이루어지고 우주 개발을 진행 중이다. <시그널리스>의 세계관에서 “생체 공명”이라는 일종의 텔레파시 능력을 지닌 자들은 타인의 정신뿐만 아니라 신체의 유기체 조직에까지 간섭할 수 있고, 나아가 집단의 의식을 변형하는 형태로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현재의 유산 당국은 기존의 제국 체제에 대한 반란을 통해 세워졌는데, 이 제국의 여왕이 바로 강력한 생체 공명 능력을 통해 인류를 다스리던 자였다. 즉, 전 제국은 인식론적으로 작동하는 사회를 이루고 있었고 현 당국은 제국 통치에 대한 반발로 철저하게 유물론적인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이 유물론적 통치 사회가 탐험이라는 명목을 뒤집어쓴 기약 없는 우주 항해를 통해 한 생체 공명자 “아리안느 양”을 사실상 사형이나 마찬가지인 추방 조치에 처하자 인식론적 공포가 물질세계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플레이어는 생체 공명으로 인해 변이되고 있는 세계를 헤치고 아리안느를 다시 찾아야만 하는 복제-인조인간 “엘스터”를 조종한다. <시그널리스>의 세계 속엔 두 유형의 인간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엘스터와 같은 “레플리카”이고 다른 하나는 레플리카의 원형이라는 의미로 레플리카가 아닌 인간을 이르는 “게슈탈트”이다. 레플리카는 뛰어난 개인들의 신경패턴을 복사해, 인공내골격에 생물학적인 배양물을 채워넣은 뒤 외골격으로 둘러싼 신체에 이식한 복제품들이다. 같은 판본을 기반으로 복제된 개체들이므로 예측 가능한 일꾼으로 사용할 수 있으리라는 심산인 것이다. 그러나 복사 과정에서 기억은 전부 삭제하고 오로지 능력과 성격만을 남김에도 게슈탈트 생전의 중추 기억을 자극하는 외부 자극이 주어지면 기억의 편린이 재구성되고 만다. 또는 한정적이고 반복적인 임무 바깥의 새로운 상황을 접하게 된다면 독자적인 개인으로서 자아가 형성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레플리카가 게슈탈트의 기억을 되찾는 낌새를 보이거나 명확한 개성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을 들킨다면 그 즉시 “폐기”당한다. 즉, 게슈탈트와 레플리카 모두 억압적이고 통제적인 사회 안에서 고유한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내쫓기고 학대당한다. 특히 아리안느의 영향으로 돌연변이를 일으킨 많은 레플리카들은 그전까지 탄압당한 욕망과 트라우마 등을 고통스러운 형태로 드러낸다. 아리안느의 생체 공명은 단순히 현재 인식되는 공간적 물질계에만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라 기억과 시간까지 변이시키는데, 이로 인해 플레이어가 엘스터의 눈을 빌려 인지하는 세계엔 엘스터가 아닌 다양한 개인들의 경험 또한 섞여 들어온다. 특히 이 지점이 <시그널리스>의 서사와 연출을 난해하게 만드는 최전방이다. 현재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경험이 정확히 누구의 시공간이었는지 유추하기가 극도로 어려우며, 시퀀스마다 불규칙하게 게임은 1인칭과 3인칭 관점을 오가는데 플레이어는 관점 변경을 전혀 통제할 수 없다. 이렇게 플레이어가 엘스터를 통해 경험하는 타인의 기억 중 하나는 아리안느가 유물론적 기치를 바탕으로 한 유산 당국에서 경시되는 예술에 관심을 가진다는 점, 그리고 하얀 머리와 붉은 눈 등 남들과 다른 외모로 인해 성장 과정 속에서도 괴롭힘을 당해오던 것이었다. 규범 사회에서 예외적 존재로 배제당하고 항상 폭력의 최전방에서 사는 트랜스젠더에게 <시그널리스> 속 유산 사회와 그 시민들 사이의 고통스럽고 불합리한 관계는 먼 얘기가 아니다. 특히 유기체적, 즉, “생물학적” 인간이 아닌 존재인 레플리카는 트랜스젠더에게 비유 이상의 즉물적인 개념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게임 내에선 레플리카의 피와 살은 언뜻 인간의 평범한 살점과 구분되지 않는 외양을 지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어디까지나 생체공학으로 가공된 조직이기에 표류한 우주선 안에서 게슈탈트가 배고프다고 레플리카의 살을 뜯어 먹어 봤자 소화를 시킬 수 없다는 지침을 찾을 수 있다. 레플리카라는 이름에서부터 이미 그들은 고유한 인간 존재로 인정받는 게 아니라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는 “자원”, 보급형, 모조품으로 취급되고 있다. 하지만 기존에 존재하던 인간 도식의 모방이자 게슈탈트의 복제, 변주에 불과한 개체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레플리카는 단독적 인격과 자아가 필연적으로 깨어날 수밖에 없는 비극적 판형들인 것이다. 무엇보다 <시그널리스> 작중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게슈탈트, 레플리카를 막론하고 절대 대다수가 여성이다. 따라서 레플리카의 경우 그 키가 최대 260cm에 달하는 거대한 강철로 이루어진 “여성”들이라는 점에서 많은 트랜스펨에게 공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나아가 생체 공명의 영향으로 개인들이 몸의 물질적 차원과 몸에 대한 인식 사이의 경합을 겪어 변이하는 과정은 트랜스성의 관점에선 그저 가상의 시나리오가 아니다. <시그널리스>에서는 인간 존재뿐만 아니라 함선이나 우주정거장 등 세계 전체의 물질적 차원이 인식의 변화에 의해 피와 살점, 내장 등으로 점차 침식되어 간다. 마치 트랜스적 신체 인지 방식이 바깥 세계로까지 확장된 듯이 말이다.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세계 관찰 관점의 자유를 제공하지 않고 1인칭 시각과 3인칭 시각을 임의로 강제하는 것 또한 매체의 폭력이라는 점에서 몸이 존재에게 가하는 폭력, 유물론적 유산 사회가 시민 개인들에게 가하는 폭력과 공명한다. 즉, 언뜻 호러 장르라는 특징 때문에 변이하는 신체가 존재들에게 고통이나 폭력인 것처럼 오인될 수 있지만 <시그널리스>에선 오히려 그전까지 개개인의 존재를 가두고 각자의 의지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신체에 대한 인식의 반항이자 탈출이다. 그리고 인간 존재는 공간을 물질적 차원에서 인지하는 것 이상으로 시간 또한 신체를 통해 인식하고 몸에 직접 기록되기 때문에 트랜스 당사자들은 시간과 관계 맺는 방식도 비규범적인 경우가 많다. <시그널리스>에서 아리안느는 우주 속으로의 기약 없는 망명 속에서 결국 시간 감각을 잃어버리고, 그녀의 왜곡된 시간은 그녀가 생체 공명으로 영향을 끼치는 게임 내 세계에까지 직접적으로 반영된다. 이는 트랜스젠더들이 반드시 고유한 트랜스성으로서는 아니지만 현실의 조건으로 인해 흔히 처할 수밖에 되는 트라우마적 경험들로 인해 직조당하는 시간의 영원성과 동일하다. 마치 전쟁 경험자들이 흐르지 않는 특정 시간 속에 갇혀 평생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이들에게 시간은 선형적으로 흐르지도, 일정하게 작동하지도 않는다. <시그널리스>는 서사의 비선형성 뿐만 아니라 사건들의 공시성 (synchronizität)을 통해서도 인과적이지 않은 세계 인식을 드러낸다. 즉, 직접 연관되어 있지 않은 전혀 다른 시공간 속에서 동일하거나 유사한, “공명하는”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것 말이다. 끝으로 블랙홀 안쪽에서 일어나는 일을 사건의 지평선 바깥에서는 알 수 없다는 우주 검열 가설을 제창한 로저 펜로즈의 이름이 아리안느가 탑승한 우주선에 붙어 있듯이 억압당하는 개인들의 이야기는 바깥에서는 알 수 없다. 분명 다양한 현실의 시공간 속에서 실재해 왔음에도 스스로의 목소리가 주어지지 않은 트랜스젠더들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제대로 남아 있지 않고 당장 현재 또한 트랜스젠더들의 삶은 당사자가 아닌 바깥의 시스젠더들에겐 전혀 미지의 영역인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우주에선, 누구도 당신의 비명을 들을 수 없다.” [3] 바깥을 향한 언어의 갈망 따라서 <시그널리스>는 <울트라킬>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밀착된 방식으로 트랜스성과 관계하기에 게임 외적 측면에서 살펴보지 않아도 어째서 트랜스펨 커뮤니티가 형성됐는지는 의문의 영역조차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이쯤 되면 안 봐도 뻔하다고까지 할 수 있겠지만 2인 제작 게임인 <시그널리스>는 전적으로 트랜스 당사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제작자 유리 스턴 (Yuri Stern)은 논바이너리이고, 디자이너 바바라 비트만 (Barbara Wittmann)은 트랜스여성이다. 그러므로 <울트라킬>과 <시그널리스> 모두 작품 내외 양면으로 트랜스 정체성과 관계한다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극도의 고난이도 플랫포머 게임 <셀레스트> 또한 말 그대로 게임 안팎으로 스스로와 싸우며 산에 올라가는 고난과 역경을 감수하면서 자신을 찾는 과정을 그리며 트랜스젠더로서 정체화와 트랜지션 과정을 그려냈다. 역시 제작자 매디 소슨 (Maddy Thorson) 본인이 게임 출시 이후에 커밍아웃하였기도 하다. 그러나 <폴아웃: 뉴 베가스>와 같은 경우는 커뮤니티 상에서 다른 게임들보다도 특별히 사랑받고 있고 거의 트랜스펨의 상징과도 같은 지위에 올라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작품 자체가 직접적으로 트랜스성과 관계하고 있지도, 작품 제작 차원에 트랜스 당사자가 개입되어 있지도 않다. <길티 기어 스트라이브>도 전반적으로 <폴아웃: 뉴 베가스>와 크게 다르지 않고, <길티 기어> 시리즈 내에서 이미 2002년에 처음으로 출시되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역사를 가지고 존재해 왔던 “브리짓”이라는 캐릭터가 비교적 최근에 들어 와서야 본작에서 트랜스젠더로 “커밍아웃”을 한 이후로 해당 캐릭터에게 초점을 맞춘 팬덤 문화가 형성된 바가 있지만, 이 한 명의 매우 국소적인 캐릭터를 제외하고 전체 게임 차원에서는 특별히 트랜스적 주제를 다루고 있지도, 트랜스적 게임성을 갖추고 있지도 않다. 오히려 <길티 기어> 커뮤니티에서 게임과 가장 충실하고 긴밀하게 관계하고 있는 트랜스펨들은 브리짓을 기점으로 유입층이 늘어난 팬덤 영역에서가 아니라 그 바깥의 전체적이고 실질적인 게임 영역에 자신을 투여하는 실제 격투 게임 대회를 중심으로 <길티 기어> 커뮤니티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애초에 트랜스펨 개인들이 게임 영역에 대거 투입되고 전문적인 수준까지 훈련되는 일이 많은 것은 현실의 물리적 사회 공간에 참여가 허락되지 않고 자리가 주어지지 않으며 아주 철저히 배제되어 온 지금 이 순간도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있는 오랜 역사에서 오직 접근할 수 있는 취미라고는 외부의 공공장소로 나가지 않고 방 안에서 즐길 수 있는 게임밖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유가 크다. 따라서 이미 트랜스펨들은 오랜 시간 동안 많은 게임들을 즐겨왔고 그저 객관적이고 절대적으로 “좋은” 게임을 즐겨왔기 때문에 우연히 플레이 경험이 겹친 사례의 대표가 <폴아웃: 뉴 베가스>이다. 복잡하고 흥미로운 선택지와 플레이어 행동에 대한 예상치 못한 치밀하고 구체적인 결과들, 대화의 풍요로운 문체 등 현대적 RPG 게임의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는 <폴아웃: 뉴 베가스>에 대한 트랜스펨들의 선호는 단지 자기 탐색의 시간을 불가피하게 많이 가질 수밖에 없는 트랜스 당사자들이 비교적 고상한 취향을 획득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라는 반농담 반진담으로 설명하는 것이 용이할 것이다. 따라서 트랜스펨 커뮤니티가 문화 코드로 정체화하는 게임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트랜스 정체성과 관계하기도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필요 조건인 것만은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그저 트랜스펨 당사자들이 실제로 지금까지 각자가 시간을 많이 투여해 온 게임들이라는 것만이 약분 불가능한 최소한의 정수다. 애초에 트랜스 정체성 자체가 하나로 압축될 수 있는 단일한 결정이 아니라 수없이 다양하고 고유한 개인들의 사실상 임의적인 집합체이기 때문에 당연한 사실이었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동일한 구심점을 축으로 공전하며 조직된 코드의 궤적들을 따라 문화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것으로 주변적 존재들은 삶을 느낄 수 있는 자리를,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 정체성을 공유하는 개인들끼리 같은 작품을 향유했다는 사실만으로 연결감을 느끼고 만연한 소외와 고독을 조금이나마 완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당 작품을 매개 삼아 존재할 수마저 있다. 즉, 자신의 향유에 설명을 부여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 증명을 이루고 작품을 자기 정체성의 코드로 기입해 넣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기존에 존재하던 기성 규범 사회의 문화 코드를 대여하거나 그것에 편입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탈취해 고유하고 독자적인 맥락을 발생시키고 새로운 의미를 덧씌우는 과정이다. 그리고 개별적 언어, 방언을 만들어 냄으로써 소수자들은 스스로 설명 가능한 존재가 될 수 있다. 또한 밖으로 내쫓긴 이들에게 기존 사회와 언어 안에는 자신들을 위한 자리가 없으므로 대안적 관점을 창조해 내는 것이지만 이를 통해 역으로 작품 자체 또한 확장하고 그 의미를 다양화하며 그 질료를 풍요히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즉, 트랜스펨 커뮤니티의 문화 코드 구성 과정은 정체성과 게임이 상호적으로 재조직하는 교차 전이이다. 참조할 계보가 없는 돌연변이들이 만들어 낸 새로운 인공 고향은 말라붙은 터전에 다시 양분을 불어넣는다. 추신 트랜스펨들이 실제로 아주 오랫동안 게임을 즐겨왔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최근에서야 이러한 온라인 커뮤니티 상의 연결과 공유가 적극적으로 활성화된 측면이 있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맥락은 기존에 “여자”는 게임 따위를 하지 않는다는 말 같지도 않은 편견이 생각보다 꽤 널리 퍼져 있었기에 트랜스펨들 또한 자신의 취미가 충분히 “여성적”이지 않게 인식될까 봐 자랑스럽게 드러내기를 꺼리고 수치심에 부인하고 감추며 억눌러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 게이머에 대한 오명이 점점 벗겨지며 오히려 스포츠 게임과 같은 남성 위주 게임을 “캐주얼”한, 비전문적 게임의 영역으로 밀어 넣어 버리고 역으로 여성 게이머를 “코어”하며 전문적인, 집요한 플레이어들로 재조명하는 관점이 유통되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트랜스펨들도 수치심과 열등감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게임에 대한 취미를 당당하게 드러내며 서로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1] transfem. 트랜스페미닌(지정성별상의 남성이 젠더 스펙트럼상 여성에 좀더 가까운 경우)의 줄임말. 트랜스페미닌함을 지닌 개인들을 이를 때 자주 사용된다. [2] <울트라킬>의 주인공 V1은 폐쇄회로 텔레비전을 닮은 머리로 인해 팬 커뮤니티 내에서 CCTV라는 별명을 얻었다. [3] In space, no one can hear you scream. 리들리 스콧, 에이리언 (1979).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영이 폭력과 고통, 분열의 상관관계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 『정서 지도 그리기』, 『밑 빠진 독(毒)에 물 붓기』, 『월간 종이』 등을 제작하고 연극 <오페라 샬로트로니크>, <벼개가 된 사나히> 드라마터지를 맡았다. 『호르몬 일지』와 『게임 코러스』를 썼고, 『미친, 사랑의 노래』를 함께 썼다.

  • [북리뷰] 도망쳐 도착한 곳의 낙원: 가브리엘 제빈,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심지어 게임을 업으로 삼은 이에게도. 그때 게임이 경이로웠던 것은 삶의 고통과는 무관한 신비 그 자체였기에 노스탤지어는 더욱 짙은 그리움을 부른다. 그럼 지금의 당신에게 게임은 어떤 경험인가. 지금 다시 플레이하면 분명 지루하게 느낄 그 시절의 게임들과 비교하면 오늘의 게임은 어떤 의미인가. 여전히 신비로운가, 혹은 신비를 잃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내게는 이 소설이 그렇게 묻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 Back [북리뷰] 도망쳐 도착한 곳의 낙원: 가브리엘 제빈,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23 GG Vol. 25. 4. 10. ‘자유도’보다는 ‘아름다운 구속’ 당신에게 최초의 경험을 준 게임은 무엇인가? “와! 이런 게 다 있었어!” 외치던 첫 전율을 아직 간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물론 그런 건 단 한 번의 경험일 수는 없다. 아직 인생이 대부분 미답지로 남아 있던 유년기에는 이런 충격적인 사례들이 여러 차례 쌓였을 것이고, 그 이후의 새로운 경험이 주는 충격들은 기술 발달의 비약적인 속도와 반비례하며 실제로는 더 혁명적이었더라도 그 인상이 점차 사그라졌을 것이다. 모든 명작들이 그러하듯 인생의 첫 순간을 장식한 게임들 또한 아직 미성숙했던 기술과 시장이라는 맥락을 제하고는 말할 수 없다. 내 세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에게 첫 충격을 선사한 게임은 <페르시아 왕자>였다. 당대의 기술을 감안하면 경이로운 수준의 부드러운 모션, 투박한 픽셀로 표현되었음에도 잔혹함이 생생하게 느껴지던 사망효과들은 작품성과 별개로 이 게임을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 한 구석에 새기는데 큰 역할을 했다. 1인칭의 짜릿한 스릴을 맛보게 한 <울펜슈타인 3D>, 엉뚱해 보이는 곳을 때리면 숨겨진 요소를 발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 <고인돌2>를 거쳐 <너구리>, <행온>, <수왕기>, <황금도끼>, <알렉스 키드> 등등 시대도 플랫폼도 제각각인 수많은 게임들을 조금씩 맛본 내가 마침내 정착한 곳은 TGL의 <파랜드 택틱스>, 팔콤의 <영웅전설> 같은 JRPG와 가이낙스의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였다. 그전까지의 게임들은 친구나 사촌형 어깨 너머로 잠깐 해보고 그쳤지만, 이 일본 게임들에 이르러 처음으로 온전히 애정을 들이며 내 손으로 엔딩까지 도달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본격적으로 PC게임이 대중화되던 시기였던 만큼 수많은 명작들이 등장하던 가운데 유독 이들에 사로잡힌 이유는 그래픽과 음악, 서사가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즈음 심지어 <디아블로>나 <툼레이더>도 출시되었지만 아직 초기 단계였던 3D 그래픽의 미감은 내 눈길을 사로잡을 수 없었다. 어린 내 눈에는 서구권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도 상당한 감점 요소였을 것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이런 음울한 스타일에 매혹되었다면 아주 비범한 게이머였을 것이 분명하다.) * 이 아찔한 미감의 차이. 오늘날의 미국과 일본의 게임을 생각하면 미감과 이를 가능케 하는 기술이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여기에 딱 맞는 분류는 아니지만 ‘루돌로지’와 ‘내러톨로지’의 관점으로 본다면 유년기의 나는 확고한 ‘내러톨로지스트’에 가까웠던 모양이다. 돌아보면 당시 나에게 게임이란 기존의 만화와 책이 제공하던, 잘 직조된 상상력과 감동에 더욱 강렬하게 몰입할 수 있는 도구에 가까웠다. 나에게 게임의 수행성이란 몰입을 증폭하는 이야기의 현현 이상의 의미는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일단 그 세계가 감각적으로 아름다운 것이 중요했고, 이렇다 할 연출도 없이 뾰족 가슴으로 투박한 텍스쳐 사이를 뛰어다니는 라라 크로프트의 다채로운 액션은 내 흥미를 끌지 못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내가 플레이하는 캐릭터의 존재는 극중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과의 감정적 교류를 소설이나 만화에 비해 더욱 깊숙한 곳까지 끌어내는데 그 목적이 있다. 나는 현실의 정체성을 잃지 않은 채 잘 만들어진 캐릭터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내 감정을 투사한다. (이는 지금까지도 AAA급 게임 중 오픈월드보다는 서사의 몰입도가 높은 리니어 게임을 더 선호하는 내 취향으로 이어진다. 극단적으로는 차라리 비주얼노블이라 부를 법한 ‘퀀틱드림’의 게임들이 꼭 그렇다.) 반면 ‘루돌로지’적 주인공은 다른 캐릭터와의 감정적 교류보다는 세계 자체와 능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수행성에 초점이 맞춰진 만큼 캐릭터 자체는 좀 더 비어있는 경우가 많다. 비어있어야 하는 만큼 미안하지만 디자인도 좀 덜 공들인 느낌이다. 플레이 자체의 재미를 중시하는 ‘루돌로지스트’들에게는 표면적인 감각의 아름다움에 천착했던 내 기준이 영 마뜩찮거나 종종 ‘가짜 게이머’의 혐의가 붙을 수도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게임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삼는 이들은 적지 않으며 중요한 본질의 하나다. 가브리엘 제빈의 소설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은 이런 점을 잘 포착하고 있다. * 영문판(좌)과 한국어판(우)의 표지 디자인 셰익스피어와 호쿠사이, 레트로 게임의 만남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은 미국의 소설가 가브리엘 제빈이 2022년 출간한 소설로, 199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이르는 30년의 시간 동안 두 남녀 친구가 게임 개발자로서 성공해나가며 겪는 사랑과 도전에 대한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다. 매력적인 인물 묘사와 매끄러운 전개로 600쪽이 넘는 분량을 순식간에 소화시키는 페이지터너인 동시에, “아, 이게 소설의 매력이지”라는 감상이 절로 나오는 기본기가 탄탄한 서사예술이다. 사실 열정과 재능으로 충만한 청춘남녀의 사업적 성공담을 깔고, 그 위로 우정과 애정, 내면의 폐허가 교차하는 이야기 자체는 대단히 새롭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 모든 이야기가 비디오게임의 역사를 종단하는 자장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이 소설을 특별하게 만든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30년의 시간 동안 실제로 기념비적이었던 게임들이 세심한 애정을 담뿍 묻힌 채 하나하나 등장할 때마다, 한 시절이라도 게임에 빠져 본 독자라면 반가운 마음에 더욱 책을 놓지 못하게 된다. 소설에서 언급되는 게임들 중 내가 플레이해본 것들을 꼽아보면, 그 중에서도 <스트리트 파이터>나 <테트리스>, <수퍼 마리오> 시리즈처럼 게임과 무관한 대중에게도 익숙한 아이콘은 제외하더라도 <동키콩>, <개구리Frogger>, <덕 헌트>, <스페이스 인베이더>, <크로노 트리거>, <모탈 컴뱃>, <둠>, <울펜슈타인3D>, <메탈기어 솔리드>, <시간의 오카리나>, <킹스 퀘스트>처럼 반가운 이름들이 쉼 없이 등장한다. 한국에서도 읽어본 사람들의 호평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지만, 영미권에서는 출간된 2022년 아마존 ‘올해의 책’ 1위, 영국 선데이 타임즈 베스트셀러 1위, 뉴욕타임즈가 선정한 ‘21세기 100대 소설’에까지 선정되는 등 평단과 대중의 거대한 인기를 힘입어 파라마운트에서 판권을 구매해 영화화 작업도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게임 외에도 소설에 동원된 문화적 코드는 방만할 정도로 많다. 일단 제목은 <멕베스>에 등장하는 대사로,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게임의 의미에 대해 작중 인물이 직접 설명하는 대목에서 인용된다. 실제로 책을 보면 독특한 표지 디자인부터 눈에 들어온다. 영문판의 표지는 수많은 서구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 호쿠사이의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를 커다랗게 확대한 이미지 위에 레트로 게임 스타일의 화려한 폰트로 제목이 새겨져 있는 반면, 한국어판은 픽셀 느낌을 깔끔하게 살린 제목 위로 같은 호쿠사이 그림이 8비트 픽셀아트로 재해석되어 있다. 같은 작품을 주요 모티브로 살리되 각 문화권의 보편적인 미감을 따른 디자인으로 보인다. 한국어판의 디자인이 훨씬 마음에 드는 걸 보면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 것 같다. 애초에 서양 놈들 미감은 그 옛날부터 내 취향이 아니었다니까. 게임 제작을 다루는 소설인데 왜 호쿠사이의 파도가 표지에 강조될 만큼 중요하냐면, 두 주인공 샘과 세이디가 처음으로 함께 제작해 이들을 업계의 신성으로 만들어준 게임 <이치고>의 중요한 모티브이기 때문이다. <이치고>는 하버드에 다니는 샘과 MIT의 세이디, 샘의 룸메이트 마크스가 대학생 신분으로 함께 개발하는 첫 게임으로, 어린 주인공 ‘이치고’가 도로시처럼 풍랑에 휩쓸려 세계를 떠돌다가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의 아마도 액션 어드벤처다. 당연히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게임이니 상상해보는 것 말고는 실제 모습을 확인할 길이 없지만, ‘세련되고 깔끔한 그래픽과 캐릭터 디자인, 감동적이고 가족 친화적인 스토리’ 라는 작중 홍보문구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댓게임컴퍼니’의 <저니>를 레퍼런스로 떠올리는 것 같다. 모험을 거치며 성장하는 아이의 서정적인 이야기라는 점에서 ‘플레이데드’의 <인사이드>나 <림보>와 겹치는 지점도 보인다. 1996년이라는 작중 시점과 게임의 묘사를 고려하면 한국어판 표지의 디자인처럼 수려한 도트 그래픽의 2D 게임일 가능성이 높다. 호쿠사이는 대학생 셋이 컴퓨터 두 대로 제작하는 현실에 대한 돌파구로서 차용되었다. “세이디는 한정된 자원으로 비디오게임을 만들 때는 그 제약을 스타일로 풀어내는 것이 해답임을 알고 있었다. (중략) 1830년대에 호쿠사이의 그림이 복제 가능했던 것과 동일한 이유로(한정된 색상, 형태 언어의 기만적 간결성), 컴퓨터그래픽으로도 그 화풍을 재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저니>에서 모든 게이머가 황홀경에 빠지는 장면(좌), <인사이드>와 <림보> 소설은 <이치고>의 개발을 맡은 세이디가 오프닝의 폭풍우를 만족스럽게 묘사하려고 고군분투하는 과정에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2D 그래픽의 한계 안에서도 파도의 역동성과 물의 투명함을 구현해 게임에 첫발을 디디는 게이머를 압도하며 시작하는 것이 이들에게 너무나 중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구현된 아름다운 그래픽은 대사가 많지 않은 것 같은 게임 <이치고>에서 주인공의 내면과 성장을 드러내는 미학적인 언어가 된다. 실제로 나를 비롯한 많은 게이머들이 게임 속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면 잠시 컨트롤러를 내려놓고 그 세계를 즐기거나 사진 모드를 켠다. 게다가 많은 경우 이러한 ‘전망대’ 포인트에서는 아예 제작진이 누리기를 종용하듯 카메라를 풍경 쪽으로 슬쩍 밀어주기도 한다. 퀘스트와 레벨업, 수집과 엔딩이라는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게임의 세계 속에서도 아름다움은 우리를 쉬게 만든다. 그리고 잠시 잠깐 찾아오는 이런 무의미의 시간들이 오히려 게임 속에 현실의 질감을 입힌다. 우리의 현실은 대부분 명료한 퀘스트보다는 무의미하고 무료한 시간들로 가득 차 있으니까. 아름다움은 여전히 내가 게임 속 세상을 찾는 중요한 이유다. 그리고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은 게임의 감각적 아름다움 그 자체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 사실을 반갑게 되새기게 해준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소설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유태계와 한국계 혼혈 미국인이면서 편모를 사고로 잃고 다리에 장애를 얻은 채 한인 조부모 손에 자란 샘과, 똑똑하고 부유하지만 어릴 적부터 백혈병을 앓던 언니 때문에 가족들로부터 소외를 느끼던 세이디가, 어린 시절 각자의 방식으로 게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묘사는 이 소설을 읽는 누구에게나 게임이 선사하는 자유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불완전한 신체의 확장으로 얻는 자유이기도 하고, 목적과 방향이 분명하게 주어지며 모든 성취와 과오가 점수로 계량화 되어 제시될 때 안도하는 역설적인 자유이기도 하다. 게임이 허락한 법칙 안에서라면 어떤 행동이든 다 시도해 봐도 인생이 잘못되지 않고, 설령 잘못되어도 세이브와 로드가 있는 게임 안에서 우리가 느끼는 자유 혹은 전능감은 최근 ‘회빙환’으로 대표되는 장르문학의 확장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게임적 쾌감이다. 최종 보스를 물리친 레벨 그대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다회차 플레이의 전능감. 다분히 게임적 발상을 두른 이런 이야기에 사람들이 보내는 열망은 역설적으로 삶에서 느끼는 부자유와 무력감의 반증일 것이다. 여기까지가 이 소설이 독자로 하여금 게임과 삶에 대해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도록 눈에 띄는 자리에 마련해놓은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샘과 세이디가 게이머로서의 자유를 만끽하는 것은 소설의 초반까지이고, <이치고>의 성공 이후로 두 사람은 창작자이자 사업가로서의 무게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이들에게 더 이상 게임은 자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특별히 세이디에게 더욱 그랬다. 샘은 어릴 적부터 그를 둘러싼 여러 정체성의 이유로 사회적 시선과 기대에 부응하는 일에 일찌감치 관심이 없었다. 이러한 태도는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자유로움으로 진화했고, 원래 갖고 있던 반짝이는 재능과 결합하며 샘은 주목받는 스타기획자로 질주하기 시작한다. 반면 <이치고>를 구현하는데 더 큰 역할을 한 세이디는, 늘 주변을 살피는 기질과 게임 산업 내의 여성이라는 위계가 결합해 성공의 과실을 샘만큼 누리지 못한다. 게다가 세이디는 게임이 예술이길 바랐다. 사람들을 충분히 즐겁게 해주면 족할 수 있었던 샘과 달리 세이디는 게임이 메시지를 체험시키는 순간이 찬란하게 빛나길 바랐다. 메시지와 독창성에 대한 열의가 넘치는 대중 예술은 높은 확률로 시장에서 외면받기 마련이다. 그것이 게임 시장이라면 더더욱. 세이디는 이야기 내내 그 간극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나는 독자이면서 게이머임과 동시에 한 사람의 창작자로서, 게다가 업계 기준으로는 내 작업물에 메시지와 독창성을 담아내고픈 열망이 비교적 큰 창작자로서, 하지만 그 열망의 크기에 비해 늘 상업적으로는 부족한 성적표를 받아드는 창작자로서 무엇보다 세이디의 괴로움에, <이치고> 속 폭풍우의 아름다움을 구현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 쏟아버린 바로 그 세이디의 막막함에 유독 몰입하며 소설을 읽었다. 한때 나에게 한없는 자유를 선사한 예술, 그 자유의 몸짓에 이끌려 뛰어든 업계에서 결과적으로는 매번 야망에 못 미치는 결과물을 내 손으로 만들어내고 마는 이 짓궂은 농담 같은 광경을 책 속에서 고스란히 발견했기 때문에. 더 우스운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렇게 이리저리 털린 영혼을 터덜터덜 추슬러 돌아가 안식을 얻는 곳이 결국 다시 그 예술의 요람 안이라는 사실이다. 세이디에게는 결국 게임이, 나에게는 결국 수많은 콘텐츠들이. 그렇게 지긋지긋한 한계에 진절머리 쳤으면서 다시 아름다운 풍경을 향해 스리슬쩍 밀어 올려주는 카메라에 저항 없이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결핍과 고통, 도피와 안식 사이에서 소설에서 표지의 호쿠사이 이상으로 중요하게 등장하는 작품은 고전 게임 <오리건 트레일>이다. 한국에서는 고전 게임에 꽤 빠삭한 이들에게도 인지도가 별로 없지만 미국에서는 교육용 소프트웨어로 쓰인 덕에 한 세대를 관통한 하나의 현상에 가까운 작품이다. 나 역시 그 문화를 공유하지 못하니 추측만 할 뿐이지만, 한국에서 하나의 게임이 이렇게 신드롬에 가까운 위상을 가졌던 사례를 상상해보자면 <스타크래프트>, 혹은 ‘한메타자연습’의 <베네치아> 정도 말고는 떠오르지 않는다. 미국에서도 쌍방향 상호작용이 전무하던 1970년대 교실에서는 이 원시적인 게임도 별천지로 받아들여졌던 모양이다. 일방적으로 주입받던 지식을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해준 <오리건 트레일>은 이 기술이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시기에 들어선 뒤로도 교실에서는 꽤 오랫동안 사랑받았던 것 같다. 맥락을 다 떼어놓고 교실의 아이들이 시대에 뒤떨어진 게임에 빠져있는 풍경만 떠올린다면 내 눈에는 컴퓨터실의 ‘피카츄 배구’가 아른거린다. 그땐 이미 <스타크래프트>와 <파이널판타지8>이 나온 시점이었지만 여전히 학교의 낙후된 컴퓨터에는 1MB가 채 안 되는 ‘피카츄 배구’가 선생님의 눈을 피해 깔려있었다. 학교를 나서면 호화로운 게임이 널려있던 시대에 집에서는 일부러 하라고 해도 마다할 게임을 교실에서는 다들 그렇게 삼매경일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군부대의 인트라넷을 통해서도 즐겼다는 소문도 들었다. 교실과 군대는 결핍의 공간이었으니까. 부족하고 괴로운 곳에서는 아주 조악한 게임도 무한한 자유를 경험케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게임에 가장 깊이 빠져들 때는 마음이 가장 황폐할 때다. 좋아하는 소설을 읽는 일도, 영화를 보는 일도 실은 마음의 체력을 많이 필요로 한다. 소설과 영화는 나에게 종이와 화면 너머로 즉각적인 행동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온전히 완성된 채 나의 자발적인 참여를 기다릴 뿐이다. 마음에 조금의 여유도 남아있지 않을 때는 그 참여조차 버겁게 느껴질 때가 많다. 하지만 게임은 아주 직접적으로, 신속하게 나의 행동을 요구한다. 그 요구에 매번 바삐 응하는 동안에는 황폐한 마음을 돌아볼 새가 없다. 그렇게 아예 정신을 내던지고 게임의 뒤통수를 한참 따라다니며 괴로운 시간을 통과해 나간다. 현실이 고통스러울수록 게임 속 아름다움이 더 빛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도피라고 표현해도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위대한 예술들은 자주 삶의 고통에서 내몰린 도피의 흔적들이기도 하다. 때로는 게임이 시시하게 느껴질 만큼 삶이 무한히 풍요롭거나 내가 단단하기를 바라기도 하지만, 그런 조건이라면 아마 나는 일생 게임과 작별할 일은 없을 것 같다. 글의 시작에서 나는 첫 게임의 추억에 대해 질문했다. 뒤이어 이어진 나의 게임 리스트와,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이 인용한 수많은 고전 게임들의 이름은 게이머라면 누구에게나 한 시절에 대한 진한 향수를 일으킨다. 더 이상 돌아갈 장소로서의 고향이 존재하지 않는 현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는 이제 떠나보낸 시간을 의미한다. 우리가 게임과 함께 보낸 최초의 시간들이 더욱 아련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른의 삶이 늘 뜻대로 되지 않는 덜컹거림의 연속이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게임을 업으로 삼은 이에게도. 그때 게임이 경이로웠던 것은 삶의 고통과는 무관한 신비 그 자체였기에 노스탤지어는 더욱 짙은 그리움을 부른다. 그럼 지금의 당신에게 게임은 어떤 경험인가. 지금 다시 플레이하면 분명 지루하게 느낄 그 시절의 게임들과 비교하면 오늘의 게임은 어떤 의미인가. 여전히 신비로운가, 혹은 신비를 잃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내게는 이 소설이 그렇게 묻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Tags: 북리뷰, 소설, 게임개발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콘텐츠 제작자) 조얼 지상파 PD로 시작해 다양한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다. 주로 콘솔게임을 즐기며, 멀티플레이를 싫어하는 내향인.

  • [Editor's View] 게임과 소수자, 소수자와 게임

    그런 고민의 결과로 ‘GG’ 4호는 ‘소수자들의 게임’을 다뤄보고자 했습니다. 소수자라는 건 단지 숫자가 적은 집단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주류’가 아닌, 주류로부터 스스로가 아닌 ‘대상’으로 취급받는 많은 존재들을 우리는 소수자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게임은 그런 소수자와 얽히는 부분에서 아직까지 짧은 역사 때문인지 고민을 오래 해 오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 Back [Editor's View] 게임과 소수자, 소수자와 게임 04 GG Vol. 22. 2. 10.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게임은 매우 당연하게 서브컬처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좀더 짧게 잡아 10년 전의 분위기도 게임은 서브컬처를 다루는 경우에 자주 거론된 바 있죠. 하지만 요즘의 분위기라면 어떨까요? 여전히 서브컬처로서의 속성을 강하게 띠고 있는 부분들이 있지만, 이제는 대중문화라고 불러도 딱히 이견을 달기 어려운 분위기가 게임 전반을 강하게 지배합니다. 본격적인 대중문화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거쳐야 할 관문이 몇 가지 더 있을텐데, 그 중의 하나는 모두에게 가 닿는 문화로서 매체가 가져야 할 범용성일 것입니다. 사회구성원 모두를 불편부당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하고, 그 이용과 재현에 있어 누구도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목표. 물론 지금의 범용성있는 다른 대중문화들도 이를 완벽히 구현하는가를 물으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 있지만, 핵심은 결과보다도 그 지향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고민의 결과로 ‘GG’ 4호는 ‘소수자들의 게임’을 다뤄보고자 했습니다. 소수자라는 건 단지 숫자가 적은 집단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주류’가 아닌, 주류로부터 스스로가 아닌 ‘대상’으로 취급받는 많은 존재들을 우리는 소수자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게임은 그런 소수자와 얽히는 부분에서 아직까지 짧은 역사 때문인지 고민을 오래 해 오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크게 재현의 문제와 접근의 문제로 게임과 소수자의 맥락을 조망하고자 합니다. 핀란드에서 보내온 이다 요르겐슨의 글은 유럽에서 진행중인 게임의 소수자 재현 문제에 대한 소고를 담고 있습니다. 김겸섭이 소개하는 곤잘로 프라스카의 접근은 게임연구의 한 축을 이루는, 억압적 현실을 다룰 수 있는 매체로서의 가능성을 드러냅니다. 게임기획자로도 참여중인 시각장애인 당사자로서의 강신혜 작가는 시각정보를 중심으로 구성되는 디지털게임에 관한 접근성의 문제를 직접 제기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나아갈 바를 모색케 합니다. 게임 속 여성의 대상화 문제를 직접적으로 미소녀 게임이라는 장르를 통해 다루는 박다흰의 글 또한 게임에서의 재현 문제가 대중문화 시대에서 안게 될 이슈들을 잘 함축합니다. 최근의 트렌드를 다루는 섹션 B에서는 애플, 구글이라는 모바일 대형플랫폼들이 보여주는 인앱결제의 현황을 점검하고, 부분유료라는 수익모델의 부상 앞에서 오랜 게이머로 살아온 게임기획자가 마주하는 고민들을 들어봅니다. 최근 몰락이라는 단어가 붙기 시작한, 하지만 한때 한국 게임문화의 중심이었던 아케이드의 변화에 관한 이야기도 주목할 만 합니다. 섹션 C에서는 게임이 다루는 사회를 엿보는 글들을 모았습니다. ‘폴아웃’을 통해 오늘날의 미국을 돌아보고, ‘사이버펑크 2077’을 통해 SF로 드러나는 동시대 사회를 생각합니다. ‘디스코 엘리시움’ 속의 디스코가 갖는 의미, ‘동물의 숲’이 드러내는 여가와 자본주의의 문제 등을 다루고, ‘북리뷰’ 코너에서는 ‘리니지’ 바츠해방전쟁을 다뤄 주목받은 소설 ‘유령’에 대한 탈북자라는 소수자 관점으로의 접근을 시도합니다. 인터뷰 두 꼭지는 소수자라는 테마에 맞게 준비했습니다. 국립재활원에서 진행한 ‘같이 게임! 가치게임’ 프로젝트 현장에 직접 다녀왔습니다. 난민 문제를 다룬 게임 ’21 Days’를 직접 난민 당사자인 압둘 와합과 함께 플레이한 내용을 정리한 인터뷰 또한 소수자와 게임의 관계를 돌이켜보는 데 좋은 기회를 제공합니다. 4호를 기획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생각보다 소수자 – 게임 문제의 이슈가 잡지 한 권으로 다 담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하다는 점이었습니다. ‘GG’는 창간사에 담았던 대로 게임의 문화적 실천을 고민하는 잡지입니다. 4호의 기획은 GG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맛보기에 불과한 것이라고 느낍니다. 한국 사회에서 게임이 가질 의미를 향한 더 힘 실린 실천이 되기 위한 길에서 4호의 기획은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이정표이지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드림.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Is this Lies of K?: “Lies of P” game discourse in the context of the South Korean game industry’s longing for a stand-alone game title

    “Lies of P” (Neowiz, 2023) takes place in Krat, a fictional city inspired by the Belle Époque period in Europe. One of the game’s NPCs (non-player characters), Eugénie, is portrayed as an outsider from a distant country east of Krat. She claims to come from the so-called ‘country of the morning,’ with a visual character design that resembles East Asian ethnic groups. Perhaps this character’s story was inspired by the Joseon Dynasty, a kingdom that existed on the Korean peninsula from the 14th to 19th century, which was typified as the “Land of Morning Calm” in the West around the 18th century based on the loose translation of the country’s name in Chinese characters (朝鮮). < Back Is this Lies of K?: “Lies of P” game discourse in the context of the South Korean game industry’s longing for a stand-alone game title 19 GG Vol. 24. 8. 10. In Korean: https://www.gamegeneration.or.kr/article/8237fbae-ebdd-45ba-b5e4-445769f3b0b9 “Suffice it to say I'm from the country of the morning, beyond the ocean. But I wouldn't be much of a tour guide. All I know about it is their weapons.” “Lies of P” (Neowiz, 2023) takes place in Krat, a fictional city inspired by the Belle Époque period in Europe. One of the game’s NPCs (non-player characters), Eugénie, is portrayed as an outsider from a distant country east of Krat. She claims to come from the so-called ‘country of the morning,’ with a visual character design that resembles East Asian ethnic groups. Perhaps this character’s story was inspired by the Joseon Dynasty, a kingdom that existed on the Korean peninsula from the 14th to 19th century, which was typified as the “Land of Morning Calm” in the West around the 18th century based on the loose translation of the country’s name in Chinese characters (朝鮮) . In “Lies of P,” Eugénie is described as an expert in weaponry who aids the players on their journey through Krat. Compared to the Belle Époque-inspired mechanical wonders of Krat, Eugénie’s ‘country of the morning’ is envisioned as a distant, warm place. I see that perhaps Eugénie's character reflects the South Korean game industry’s pseudo-expansionism, which seeks to venture into the distanced, admired and imagined realm of core console video games. Lies of P, the proud “AAA made in Korea” “Lies of P” was developed by Round8 Studio, a subsidiary of Neowiz Games, one of the leading game developers and publishers in South Korea. Unlike many South Korean games, which are often multiplayer-focused, “Lies of P” offers a single-player action-adventure experience and is classified as a ‘stand-alone’ game. It falls within the ‘soulslike’ genre, known for its high difficulty levels, resource-limited combat systems, and extensive exploration within the game environment—a term originally inspired by the Japanese “Dark Souls” franchise. Meanwhile, the South Korean game industry is dominated by free-to-play mobile games with the so-called ‘lineagelike’ genre, being criticised by Korean players for its extensive dependency on competitive multiplayer modes and toxic microtransaction schemes. The term originated from South Korean games like “Lineage M” and “Lineage 2M” . In this context, for Korean players, “Lies of P” stands out from the South Korean game industry’s norms of malpractice. Therefore, upon its release, the game was praised by local media as a worthy addition to the game industry, capable of “impressing” even “the soulslike fans” and earning its credibility as an “AAA made in Korea”. * Word cloud visualisation of “Lies of P” in South Korean domestic media coverages (Original source: Big Kinds big data analysis system. Translated by Solip Park.) To understand the rhetoric of “AAA made in Korea”, we must first consider the regional context and discourse surrounding the South Korean games. As of 2022, video games are one of the most popular forms of entertainment in the nation, with 74.4% of the South Korean population playing some form of games 1) . The country has dedicated laws to promote and develop its video game industry, such as the South Korean Culture and Arts Promotion Act. However, gaming is not yet fully acknowledged as a legitimate ‘cultural activity’ (e.g., leisure, entertainment, self-making) in South Korean society but rather as an offspring of a capitalistic ‘business’ (e.g., industry, revenue-seeking, profitability). Tension between Korean publishers and their aggressive game monetisation schemes and gamers being critical of these business practices is rising. Even some individual Korean game developers associate their occupational identity with being a ‘gamer first’ rather than being a game developer, expressing their critical view towards the industry’s business practices. For example, Choi Ji-Won, the director of “Lies of P”, remarked, “I would not have chosen this job if I had to consider realistic factors, like the profitability (of the game)” 2) . His statement reveals a tendency to define the occupational role of a game developer while being an active, legitimate member of the gamer community that seeks to promote games as cultural creations. At the same time, South Korea is struggling to compete with the Chinese game industry, which has recorded substantial growth in recent years and has outperformed South Korea in developing and servicing online multiplayer games. Considering these factors, it is unsurprising to see "Lies of P" portrayed by local media as a new alternative that could alter the South Korean game industry – an alternative that could save South Korean games’ future. This is evident in the word cloud visualisation of “Lies of P” (see picture above), which indicates that the game was frequently mentioned by local media with keywords such as ‘MMORPG’, ‘Multiple Access Role Playing Game’, and even ‘Lineage’, despite the game being prominently single-player based. “Lies of P” was portrayed as a pivotal game that could alter the norms of the South Korean game industry. The game is console-based, which is unique on its own from Korea, and it managed to achieve commercial success with 1 million copies sold within the first month of its release. This is unprecedented in the South Korean game industry, which has historically been predominantly PC and mobile-centric. It is also estimated that a significant portion of “Lies of P” revenue, up to 90%, comes from overseas markets outside Korea, which is also unheard of in mainstream South Korean games. It is therefore deemed as, to quote, “setting up a new pathway for the stagnant Korean game market” that is suffering from a post-COVID game economic downfall and a decrease in active PC and mobile gamers 3) . South Korean media also highlighted a lesser impact of post-COVID on the console gaming market. They thus praised the success of “Lies of P” as a significant milestone for the future of the Korean game industry towards the promising console market 4) . The media discourse then further moves on to the quality of game design in “Lies of P” and its resemblance to existing soulslike games and their in-game mechanics. In other words, they described how faithfully “Lies of P” follows soulslike design canons while highlighting the game’s better achievements in “optimisation” and “(visual) graphics” 5) . For example, the game is described as “a stunning technical achievement” for its “successful multi-platform optimisation, even when some world-class developers struggle to create a high-performance gaming experience on the PC operating system” 6) . Others reported that the game also received critical acclaim from overseas for its “neat combat system, unique world setting, and realistic visual graphics” 7) . “Fox Ranger” to “Lies of P” – the journey of Korean stand-alone game Looking closer at the local Korean media discourse surrounding “Lies of P,” I wondered if there have been any similar cases in the history of South Korean games. One similar case that comes to mind is “Fox Rangers”, released in 1992 by Korean game developer Soft Action. The game is regarded as the earliest PC-based package game made in Korea to reach the commercial market. Soft Action promoted their game by releasing “a playable demo through a PC network (i.e., dial-up internet), allowing players to experience the first in-game level” while emphasising the game's adaptation of “advanced (computer) technology” 8) . As such, despite being nearly three decades apart, the releases of “Fox Ranger” and “Lies of P” resemble each other in significant ways, such as playable demos and emphasis on technical achievements. In the early 1990s, during the release of “Fox Rangers,” South Korean media expressed concerns about heavy foreign dependency in the South Korean game market. The media portrayed the US and Japanese game industries as mainstream, stating that “more than 90% of the (Korean) electronic game market is dominated by Japanese and American products”. Japan was particularly highlighted as a role model for game design and development, where gaming was recognised as a legitimate cultural activity, unlike in Korea. They also elaborated on the early South Korean game software development with a tone of triumph, emphasising its potential significance for the nation’s future export-driven economy and advancing information era. Some praised Nam Sang-gyu, the developer of “Fox Ranger”, as the “man of arms of (our) computer industry” 9) . Nam also asserted in one of his interviews that “It is a shame that our land’s children, who cannot yet read Korean properly, are already immersed in games with Japanese Katakana letters”, and advocated for “finding our sovereignty with game software” as “more important than any other types of software” 10) . Thus, linguistic literacy in games (i.e., the ability to play games in the Korean language) was seen as a crucial indicator for distinguishing games as “ours” versus “theirs”. Fast forward to 2023, let’s examine the case “Lies of P”. The game features only English voice-over. Right at the start of gameplay, Sophia, a character in “Lies of P”, calls out to the player from the darkness, saying, “Can you hear me?” I see this illustrates how “Lies of P” aims to break into the global game value chain beyond domestic borders. Indeed, “Lies of P” successfully partnered with Microsoft and is now accessible via Xbox Game Pass, marking its long-awaited entry into the mainstream console platform market that multinational gaming corporations have long dominated. Finally, the game has achieved legitimacy in using the prefix ‘K-’ (akin to ‘K-pop’ or ‘K-drama’), an abbreviation of ‘Korea’ with cross-regional connotations. In the Korean context, ‘K-’ represents a nuanced term that is distinctly “Korean” yet transcends national borders, being “original enough and also embraced by foreigners” 11) . In essence, “Lies of P” is seen as a game that appeals not only to South Korean gamers but also to global gamers who appreciate the soulslike genre. Moreover, the game is recognised as meeting the expectations of South Korean gamers who have long sought high-quality gameplay besides toxic monetisation while also aspiring to become active actors in the global ‘mainstream’ gamer discourse. For instance, some of the reviews of “Lies of P” on South Korean game news platforms often begin with praise for the soulslike genre itself. Phrases such as “(Lies of P) provided a completely new experience, even though I had never played a soulslike game before” are followed by admiration for the genre itself, suggesting, “As someone new to the soulslike genre, I confidently recommend Lies of P as an entry-level game that anyone can enjoy” 12) . Consequently, these reviews position “Lies of P” as an ‘invitation’ that introduces unaware Korean gamers to the unexplored realm of the global console game market, symbolised by the soulslike genre. The desire for ‘real game’ The enthusiastic reaction to finally being ‘invited’ into the soulslike game genre highlights the inherent division players create between those ‘inside’ and ‘outside’ the realm of global console gaming. So where does this border lie? What makes Korean players feel good or accomplished about playing a soulslike game? To answer these questions, we need to delve deeper into the surrounding context. In their book “Real Games”, published in 2019, Mia Consalvo and Christopher A. Paul highlighted a social phenomenon within gamer and game developer communities where they actively distinguish casual social games, claiming they are not ‘real games’. Consalvo and Paul discussed what distinguishes ‘real games’ and identified factors that gamers use to determine a game's legitimacy. The first factor was the game’s pedigree, questioning whether its developers have a history of creating games recognised as legitimate among gamers. The second factor was the content of the game itself, specifically its mechanics and controls. For these gamers and game developers, mobile games that can be played easily with just a few finger taps appeared trivial compared to games requiring complex and sophisticated controls using traditional interfaces like keyboards, mouse, and console controllers. Following this notion, mobile games were often labelled as ‘not real games’. Such socially constructed imaginary frameworks of what legitimises ‘real’ gamers divided those who can play ‘real games’ from those who cannot. This explains why Korean gamers and those familiar with gaming with conventional interfaces generally show their appreciation for “Lies of P” 13) . Let’s now take a closer look at the case of “Lies of P” – is it a ‘real game’? In terms of pedigree, the game’s developer Neowiz is distant from being legitimate among the core gamers. Like most South Korean game developers and publishers, Neowiz have historically focused on online games that are deemed closer to ‘not real games’. Since the late 1990s, the South Korean game industry has predominantly centred around MMORPGs, to quote, “a market biased towards online games distinct from the global market of arcade and home video games”. Notably, a significant portion of Neowiz’s revenue comes from social casino online games such as “Gostop” (Neowiz, 2013), parallel to what is considered a ‘real game’. Therefore, Neowiz’s “Lies of P” is seen as a shed tear of repentance of a Korean online game company that once made games far from being ‘real games’ – and now seeks to break into the console gaming realm. Let’s also look at an excerpt from an IT news article, titled, “Korea is a gaming powerhouse – but why are Korean games excluded from GOTY (The Game Award for Game of the Year)?” 14) . The article exemplifies South Korean gamer discourse that is longing to be acknowledged as an active and legitimate core gamer from the West. The aim is to be legitimised from the outside in order to be legitimised back in the homeland – to have ‘gaming’ become acknowledged as a legitimate ‘cultural activity’ in Korean society. We can see this as they self-describe Korea as a gaming ‘powerhouse’ that has achieved success in the online mobile game business but lacks the ability to be awarded from a prestigious venue. Moreover, while applauding standalone games like “The Witcher” series and “The Legend of Zelda: Breath of the Wild”, they omit to mention Korean GOTY nominee online game “PUBG: Battlegrounds” (Krafton, 2017), seemingly distancing online games from the realm of ‘real games’. The media discourse further legitimises the soulslike genre and consequently underscores the value of playing the game “Lies of P”. The game is praised to be truly immersive, where not only do in-game characters power up, but players themselves can also learn and hone their skills – enhancing their ability to control further complex and sophisticated game mechanics. In contrast, mobile games that are easily playable with figuretips are disparaged for providing little to no immersion or learning outcomes to its players. It is as if the game experience must be meaningful to be legitimised. This leads to the glorification of the constructed fantasy of ‘true (real) gamers’, those who are physically and cognitively capable of learning and executing complex game control. South Korean gamer discourse has been inherently shaped by societal regulations and industrial logic for several decades. Games were initially viewed as addictive substances and harmful entertainment with negative health impacts. But simultaneously, they were also recognised as the nation’s most profitable products, anchoring the nation’s export-driven economy. South Korean game companies aggressively emphasised the economic value of video games to counter societal perceptions of their harmfulness and addictiveness. They criticised regulations as the ‘death of Korean games’ while arguing passively that ‘games are culture’. Despite being an “old and awkward slogan” 15) , I believe the message of ‘games as culture’ will still prompt further inquiries into the broader interpretations of ‘then what accounts as culture’ in Korea – and foster a critical understanding of games and gaming in this region. For example, we are now witnessing slow but steady analytical attempts to excavate and rediscover games as historical cultural heritage. So I see “Lies of P” is certainly unique within the South Korean game context that is worth to be further discussed. This would lead to even deeper inquiries to delve deeper into Korean gamers, industry actors, and scholars. And finally begin to critically inquire the core values that underpin the hegemony of ‘real’ versus ‘not real’ gamers in South Korean gamer discourse. 1) KOCCA. (2023). 2022 White Paper on Korean Games. P.6. https://www.kocca.kr/kocca/bbs/view/B0000146/2001838.do?searchCnd=&searchWrd=&cateTp1=&cateTp2=&useYn=&menuNo=204154&categorys=0&subcate=0&cateCode=&type=&instNo=0&questionTp=&ufSetting=&recovery=&option1=&option2=&year=&morePage=&qtp=&domainId=&sortCode=&pageIndex=1# 2) See: Game Chosun (News), [PS10]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2855993&memberNo=12478036 (online news article, 30-November 2021). 3) KOCCA. (2023). Korean Gamer Status Report 2023. https://welcon.kocca.kr/cmm/fms/CrawlingFileDown.do?atchFileId=FILE_43e2b6fd-7f4b-46e5-97f4-5717804ae1b3&fileSn=1 4) See: Business Post (News), https://www.businesspost.co.kr/BP?command=article_view&num=330565 (online news article, 22-October 2023). 5) See: Thisisgames.com (News), https://m.thisisgame.com/webzine/nboard/16/?n=176290#:~:text=%EC%B4%9D%ED%8F%89%ED%95%98%EC%9E%90%EB%A9%B4%20%3CP%EC%9D%98%20%EA%B1%B0%EC%A7%93,%EC%9D%98%20%EA%B1%B0%EC%A7%93%3E%EC%9D%80%20%EA%B2%B8%EC%86%90%ED%95%A9%EB%8B%88%EB%8B%A4 . (game review, 14-September 2023) 6) See: Gameple (News), https://www.gameple.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7420 (game review, 19-October 2023). 7) See: Newsis (News), https://mobile.newsis.com/view.html?ar_id=NISX20220830_0001996358 (online news article, 31-August 2022). 8) Nam Young (2017). The Korean PC Game Industry in the 1990s: Challenge and Response of the PC Game Developers. 한국과학사학회지(Hanguk gwahaksa hakoeji) 9) See: Kyunghyang Shinmun (News), “新世代(신세대) 그들은 누구인가 (3) SW의 승부사들 10) See: The Chosun Ilbo (News), "우리말로 게임 국산개발 활기” (newspaper article, 15-January 1993. Retreived from Naver News Library digital archieve). 11) Park (2022). Expanding and Contesting ‘K’ : An Analysis of K Discourse of Korean News Reports. Korean Journal of Journalism & Communication Studies, 66(4), 144-186, 10.20879/kjjcs.2022.66.4.005 12) Kukinews (News), https://www.kukinews.com/newsView/kuk202309260243 (online news article, 17-September 2023). 13) Mia Consalvo; Christopher A. Paul, "Facebook Games Were Evil," in Real Games: What's Legitimate and What's Not in Contemporary Videogames , MIT Press, 2019, pp.1-26. https://ieeexplore.ieee.org/document/8877565 [PS13] 14) See: Appstory (News), https://news.appstory.co.kr/report13261 (online news article, 15-May 2020). 15) Tae-seop Choi, 모두를 위한 게임 취급 설명서: 게임에 대해 궁금하지만 게이머들은 답해줄 수 없는 것들, Hanibook, 2019, p.18.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Researcher) Kim Gyuri A researcher studying at Sungkyunkwan University, Department of of Korean Language and Literature, with the focus on immersive gameplay prompt from pre-existing canon versus unexpected encounterments. She is a long-time player of Bungie’s and excited for reboot. (Doctoral researcher at Aalto University, Finland) Solip Park Born and raised in Korea and now in Finland, Solip’s current research interest focused on immigrant and expatriates in the video game industry and game development cultures around the world. She is also the author and artist of "Game Expats Story" comic series. www.parksolip.com

  • 핑, 협상, 그리고 그림 - 플레이어들은 어떻게 소통하는가?

    게임은 본질적으로 소셜입니다. 1970년대 후반의 MUD게임에서부터 90년대 초반의 MMORPG에 이르기까지, 게임을 하는 것은 사회성을 기르고 사회적 교류를 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져 왔습니다. 미디어에서 만연한 ‘외톨이’ 게이머의 스테레오 타입과는 정반대입니다. < Back 핑, 협상, 그리고 그림 - 플레이어들은 어떻게 소통하는가? 14 GG Vol. 23. 10. 10. 게임은 본질적으로 소셜입니다. 1970년대 후반의 MUD게임에서부터 90년대 초반의 MMORPG에 이르기까지, 게임을 하는 것은 사회성을 기르고 사회적 교류를 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져 왔습니다. 미디어에서 만연한 ‘외톨이’ 게이머의 스테레오 타입과는 정반대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캐나다와 미국 일부 지역에 강제 봉쇄와 통행금지 조치가 내려졌을 때 게임은 친구들과 연락을 유지하고 어울릴 수 있는 틀을 제공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헤드셋과 키보드를 사용하여 게임을 하고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게임이라는 사회적 공간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반사회적 행동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반사회적 행동의 전형적인 특징인 사회적 교류의 결여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종류의 사회적 '재미'를 위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의 배치에서 발생합니다. 그렇다면 플레이어는 게임에서 어떻게 소통할까요? 그들은 게임을 하면서 무엇을 소통할까요? 게임은 게임 안팎의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통한 소통을 장려해왔고 이 소통은 조직을 구성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가끔은 트롤링을 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왔습니다. 게임 내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폭넓은 연구는 '독성Toxicity 1) '이라는 오래된 문구를 이해하고 풀어내는 과정과 유사합니다. 이 글의 두 저자는 다양한 게임 커뮤니티(<오버워치>, ,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로스트아크>, <매직: 더 게더링 아레나>)를 연구해 이들이 소통하는 방식과 내용을 살펴봤습니다. 텍스트 채팅과 이에 대한 대응 가장 좋은 시작점은 게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커뮤니케이션 수단인 텍스트 채팅입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와 같은 MMORPG에서 대화와 정보를 주고받는 채널로, 플레이어들이 모집, 판매, 잡담 등을 할 수 있습니다. 음성 채팅이 도입되기 전까지만 해도 게임 내에서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음성 채팅 이후에 텍스트 채팅은 제한적인 방법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리고 텍스트 채팅의 제한적인 면은 텍스트 채팅이 발전하는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플레이어들은 자신들만의 게임 전용 어휘와 약어를 생성하고 구축해 텍스트 채팅을 더욱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간단한 예는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Riot Games, 2009). 플레이어는 팀 화면에 접속하면 일반적으로 텍스트 채팅으로 이동하여 다음을 수행합니다. 라인을 신청하고 상단, 중간, 하단 라인에 대해 '미드', '봇', '탑'을 입력합니다. 스스로를 원하는 라인에 할당하는 빠른 방법입니다. 메시지를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텍스트 채팅을 사용하는 비슷한 예로는 로스트아크와 같은 MMORPG에서 월드 보스 (특정 시간에 나타나며 여러 플레이어가 함께 쓰러뜨려야 하는 보스 몬스터)가 등장할 때입니다. 이 경우 플레이어는 월드 보스가 "왔다"고 입력하고 어떤 채널로 들어가서 싸워야 하는지 알려줄 수 있습니다. 텍스트 채팅은 미시에서 거시까지, 일대일에서 서버 전체 플레이어까지 확장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도달 범위에는 결과가 따릅니다. 혐오 발언은 텍스트 채팅을 통해 쉽게 퍼질 수 있습니다. 인종 차별, 성 차별 또는 동성애 혐오 발언 등 특정인 또는 모든 사람을 겨냥한 혐오 발언이 텍스트 채팅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이 문제가 너무 만연해져서 많은 게임 회사에서 혐오 용어를 차단하는 자동 필터를 도입했습니다. 하지만 플레이어가 혐오적인 단어를 창의적으로 작성할 때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싸이오닉스의 커뮤니티 매니저인 데빈 코너스는 GDC 2018에서 로켓 리그의 사용 금지 단어 및 채팅 필터 시스템에 대해 설명했습니다(이미지 1). 처음에는 20개의 금지 가능한 단어 목록이 있었습니다. 이후 이 리스트는 철자를 다르게 쓴 변형 단어와 다른 언어에서 발견되는 욕설이나 비속어까지 포함하게 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됐습니다. * 이미지1 - 데빈 코너스가 로켓 리그의 밴 시스템에 대해서 GDC 2018에서 설명하고 있다. (저자 스크린샷) 블리자드는 텍스트 채팅에 표시되는 좋지 않은 스포츠맨십을 보다 재치 있는 방식으로 관리합니다. 플레이어가 오버워치에서 경기가 끝나고 상대 팀을 이기기 너무나도 쉬웠다는 의미로 "GG EZ"를 입력하면, 이 약어는 재빨리 여러 우스꽝스러운 문구 중 하나로 수정됩니다(예: "취침 시간이 지났어요. 제발 엄마한테 말하지 마세요." 또는 "세상에나! 재미있었어요. 잘 놀았어!"). 이것은 위협을 가하지 않고도 미세한 독성의 순간을 완화하는 방법으로 불미스러운 행동에 대한 밴을 하겠다는 위협을 하지 않아도 되게 만듭니다. 하지만, GG EZ가 이와 같은 메시지로 대체되더라도 플레이어는 처음에 작성된 내용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 위에 적절한 치장이 씌워져 있든 없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분명히 이러한 유형의 동작은 로켓 리그 팀이 걸러내야 하는 것에 비해 유해성 임계값이 낮지만 오버워치에서도 똑같이 존재합니다. 이는 모두 텍스트 채팅에서 텍스트만 사용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게임 플레이는 물론 일상적인 문자 메시지에서 의사소통을 위해 많이 사용하는 이모티콘, 이모지, 스티커는 고려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모티콘은 2) 게임에서 더 복잡한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필수 요소였지만, 레전드 오브 룬테라(라이엇 게임즈, 2020), 매직: 더 개더링 아레나(위저즈 오브 더 코스트, 2018)(이하 매직), 마블 스냅(누버스, 2022)과 같은 인기 온라인 카드 게임에서 플레이어 간 커뮤니케이션의 유일한 수단으로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매직에는 텍스트 기반 이모티콘이 있지만, 플레이어는 각 게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수많은 애니메이션 스티커 중 하나를 사용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이미지 2). * 이미지 2 - <매직 더 개더링> 의 이모티콘 콜렉션 (저자 스크린샷) 언뜻 보기에는 커뮤니케이션을 비교적 적은 수의 문구와 애니메이션 이미지로 제한하면 플레이어의 독성을 줄일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플레이어는 실제로 아주 적은 양으로도 많은 표현을 할 수 있으며 종종 이모티콘의 의도된 기능을 뛰어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매직에서는 경기 시작 시 게임 캐릭터 중 하나인 기사(Gisa)가 좀비의 손을 흔드는 이모티콘을 사용하여 상대 플레이어에게 인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이미지 3). 이 이모티콘은 일반적인 '안녕하세요' 이모티콘보다 더 기발하고 재미있을 수 있지만 다른 불길한 용도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 이미지 3 - <매직 더 개더링> 캐릭터 기사가 손을 흔드는 이모티콘 (저자 스크린샷) 매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나리오를 상상해 보세요. 두 명의 플레이어가 몇 분에 걸쳐 보드를 크리처로 채우면서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카드를 내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각 플레이어는 필드에 새로운 카드를 낼 때마다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고 노력하며 박빙의 승부를 펼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플레이어 중 한 명이 '보드 청소’라고 알려진 카드를 내면, 한 플레이어가 게임 내내 쌓아온 수많은 카드가 전장에서 사라집니다. 그러면 보드를 파괴한 플레이어는 인사말 대신 "너의 모든 카드 안녕, 너의 모든 재미 안녕"이라는 의미의 기사 이모티콘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플레이어가 기사 이모티콘을 사용하는 한 가지 방법일 뿐입니다. 이 예시에서 중요한 점은 플레이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이모티콘의 사용 사례와 해석을 스스로 개발하며, 디자이너의 의도에도 다르게 모든 이모티콘이 긍정적이고 친근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일부 플레이어는 이모티콘을 사용하여 다른 플레이어를 트롤링하는 방법을 찾게 되고, 이러한 사용 사례는 게임 커뮤니티 전체에 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플레이어 혼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이모티콘에 대해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인기 있는 밈을 모방한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한 매직 이모티콘은 팝콘 먹는 캐릭터 사힐리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영화관에서 팝콘을 먹는 마이클 잭슨의 이미지와 다른 팝콘 먹는 이미지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 이미지 4 - 사힐리의 이모티콘과 마이클 잭슨이 팝콘을 먹는 모습 3) 이러한 이모티콘에서 영감을 얻은 밈은 특정 규칙이나 사용 사례를 조롱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으며, 상황을 농담으로 바꾸기 위한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팝콘 먹는 마이클 잭슨 이모티콘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가십거리를 볼 때 혹은 사회적 재난이나 드라마를 관찰할 때 자주 사용됩니다. 이러한 밈 형식을 기반으로 하는 이모티콘에는 긍정적이지 않은 의미가 미리 탑재되어 있으며, 이모티콘을 사용할 때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는 상대방에게만 전달됩니다. 밈을 기반으로 이모티콘을 만들면 플레이어 간에 공유된 언어가 생기고 이모티콘이 게임 내 커뮤니케이션의 관용적인 표현이 돼 더 쉽게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밈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농담을 만들어내는 방식 때문에 적대감으로 왜곡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모티콘의 우스꽝스러움이 플레이 중에 적대적이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할 수도 있는 반면 사용 방식과 이미 형성된 연관성 때문에 적대감을 불러일으킬 가능성도 높습니다. 이는 이모티콘을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이 내포하고 있는 커뮤니케이션 문화가 온라인 게임에서 플레이어 사이에 사용되는 가장 제한된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핑, 집어내기, 그리고 불만 표시하기 게임 플레이 중에 메시지를 빠르게 전달하기 위해 단어와 이미지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리그 오브 레전드>나 <도타 2>와 같은 MOBA에서 볼 수 있는 '핑'은 플레이어가 맵 영역, 아이템, 캐릭터를 클릭하면 해당 영역에 불이 들어와 다른 플레이어에게 무언가를 알리는 기능입니다. 핑은 느낌표나 물음표로 해당 영역에 시선을 끌 수 있습니다. 4) 빠른 신호는 전략을 세우거나, 팀으로 이동 경로를 계획하거나, 팀원이 수집해야 할 중요한 아이템을 가리키거나, 또는 특정 지역을 피하라는 경고 시스템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5) 핑과 관련된 여러 의미에 대한 일화는 저자 중 한명이 처음으로 AI가 아닌 실제 동료 플레이어와 를 플레이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첫 경기를 플레이하던 중 다른 플레이어가 자신의 주변 지역을 핑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게임에 익숙한 사람이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플레이어가 자신의 주의를 끌기 위해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거나 그 순간에 잘못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신규 플레이어가 경기 중 다른 플레이어와 소통하는 미묘한 방식에 대비할 수 있는 튜토리얼이 부족하다는 점이 더 논의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이런 핑을 이용한 커뮤니케이션은 커뮤니티에서 구축된 방식으로 게임의 온보딩 튜토리얼에서 다루기 어렵습니다. 플레이어가 핑 버튼을 마구잡이로 클릭하는 공격적인 핑은 종종 다른 플레이어의 행동에 불만을 표시하는 신호입니다. 만약 팀원 중 한 명이 게임을 포기하고 다른 팀원들을 방해하고자 할 때는 플레이어들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6) 음성채팅 모더레이션에 새로운 플레이어 음성 채팅은 1인칭 슈팅 게임부터 멀티플레이어 서바이벌 게임, 수많은 MMORPG의 대규모 그룹 플레이에 이르기까지 많은 온라인 게임에서 여전히 필수적인 기능입니다. 음성소통을 통해 플레이어는 빠르게 진행되는 온라인 플레이에서 종종 필요한 복잡한 표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음성을 사용하면 플레이어가 팀원이나 무작위 플레이어에게 어떤 말이든 할 수 있는 게임 내 환경이 조성되는 경우가 많으며, 여기에는 상당한 독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7) 음성 채팅은 보다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가져왔고, 플레이어가 협력하고 소통하는 방식에 기술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음성 채팅은 플레이어의 익명성을 제거하여 ‘키쇼나 그레이’가 '언어 프로파일링' 8) 이라고 부르는 방식으로 플레이어의 정체성(인종, 성별, 성적 취향)을 노출시켰습니다. 플레이어는 음성 채팅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사용했을 때 다른 플레이어로부터 듣는 혐오 발언과 받는 대우를 통해 자신이 가진 정체성이 교차하는 지점을 상기하게 됩니다. 게임에서 발생하는 음성 채팅의 양과 발생 속도 때문에 음성 채팅은 텍스트 채팅과 비교했을 때 더 관리하기 어렵습니다. 플레이어들이 일종의 통합 음성 채팅 모더레이션(운영 및 조정) 9) 을 요청해 온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며, 일부 플레이어들은 2017년부터 이를 요청해 왔습니다. 10) 음성채팅 모더레이션은 어려운 작업이지만, Modulate가 이러한 노력의 선두에 서 있습니다. Modulate는 게임 회사가 게임의 음성 소통에서 발생하는 유해성 사례를 식별, 분류, 사전 예방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설계된 음성 중재 기술인 ToxMod를 개발한 회사입니다. 지난 8월, Modulate는 액티비전과 협력하여 출시 예정인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III(액티비전, 2023년)에 ToxMod를 구현했습니다. Modulate의 COO인 테리 첸은 게임 내 소통을 건전하게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의 전반적인 의도는 소외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게임과 그 공간을 더 재미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재미는 우리가 하는 일의 최전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 특히 발로란트처럼 적을 상대로 전술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음성 채팅]이 필요한 게임의 경우, e스포츠에서 음성 채팅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는데, 이 정도의 독성이 존재한다면 게임을 즐기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ToxMod는 머신 러닝 기술을 사용하여 독성을 감지하고 등급을 매기지만, ToxMod가 자체적으로 사용자를 금지하거나 처벌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테리는 ToxMod를 "게임의 협력자이자 필요한 경우 경청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종의 추가 플레이어"로 간주합니다. ToxMod가 감지한 유해성은 플레이어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최종 결정을 내리는 운영자에게 표시되기 때문에 ToxMod는 개발자 및 운영자와 협력하여 유해한 커뮤니케이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운영됩니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저는 유해성 문제를 해결하는 최전선에 있는 사람으로서 기업과 플레이어가 문제해결을 위해 더 노력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테리에게 물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각 게임 내 커뮤니케이션 메커니즘에서 유해성이 얼마나 흔한지 살펴봤는데, 지금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요? 테리는 두 가지 중요한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1) 가장 실력이 뛰어나거나 인지도가 높은 플레이어의 요구사항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게임 전체에 걸친 플레이어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것. 전문가보다 더 많은 플레이어의 소중한 피드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최고 수준으로 게임을 플레이하지 않으며, 게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구간 또는 등급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많은 귀중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2) 긍정적인 부분을 인지하고 보상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테리는 "가장 진정성있는 조치는 Modulate ToxMod든, 나쁜 행동을 감지하고 긍정적인 행동에 대한 보상을 제공하기 위해 내부적으로 개발한 것이든, 보상을 위한 도구를 구현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플레이어, 개발자, 연구자로서 우리는 게임 내 커뮤니케이션의 부정적인 측면을 너무 많이 접하다 보니 좋은 본보기가 되는 플레이어들에게서 눈을 돌리게 됩니다. 기계적으로뿐만 아니라 게임 내에서 서로 소통하는 방식에서 보다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장려하는 시스템을 개선하고 구현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아바타의 반대편에 있는 우리는 결국 실제 사람이니까요.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게임 내 커뮤니케이션과 소셜 시스템을 논의할 때 고려해야 할 두 가지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를 어떻게 운영하고 조정할 것인가입니다. 소셜 공간에서 특정한 형태의 관리방식을 만드는 것은 인적 자원, 기술력,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한 매우 어려운 작업입니다. 프로 게이머 지망생이든 단순히 게임 공간에서 경쟁을 즐기는 플레이어든 게임 플레이에 경쟁의 관점을 도입하면, 게임에 걸린 것이 커지고 플레이어가 신경 써야 할 것이 더 많아집니다. 같은 공간에 단순히 분위기를 즐기러 온 플레이어도 있습니다. 결과에 상관없이 (이기고 싶지만) 친구들과 함께 플레이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번째 측면은 이러한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통한 '트롤링'과 독성입니다. 플레이어는 어떤 시스템이든 창의력을 발휘하여 원하는 대로 시스템을 전복하고 독성을 다른 플레이어에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게임은 사회적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이 글의 첫머리로 돌아갑니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온라인에 접속해 불쾌감을 주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 아니라 같은 플레이 공간을 즐기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게임 내 커뮤니케이션의 미래로 눈을 돌려보면, 최근 디스코드의 성공으로 인해 음성 채팅은 다소 세분화되었습니다. 많은 플레이어들이 게임 전용 서버에서 개인이 큐레이션한 커뮤니티 디스코드 서버로 음성 대화를 전환하여 게임 로비에 있는 낯선 사람이 아닌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고 있습니다. 일부 게임 전용 디스코드 서버가 존재하지만, 이는 게임 플레이 중 커뮤니케이션보다는 마케팅과 게임 관련 커뮤니티 구축에 더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가상 현실은 플레이어가 게임 중 커뮤니케이션을 구현하는 방식에 혁신을 가져올 수 있지만, 지금은 메스꺼움을 유발하는 장비를 착용한 어색한 반신체 아바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의지가 있는 곳에는 사회적 공간을 파괴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For more on modulate you can visit their website, https://www.modulate.ai/ . ***번역: 홍영훈 1) 2) Wadley, G., Carter, M., & Gibbs, M. (2015). Voice in Virtual Worlds: The Design, Use, and Influence of Voice Chat in Online Play. Human–Computer Interaction, 30(3–4), 336–365. https://doi.org/10.1080/07370024.2014.987346 3) Saheeli image from draftsim.com. https://draftsim.com/mtg-arena-emotes/ (accessed September 24th, 2023). Michael Jackson image from knowyourmeme.com. https://knowyourmeme.com/memes/popcorn-gifs . 4) Leavitt, Alex, Brian C. Keegan, and Joshua Clark. ‘Ping to Win? Non-Verbal Communication and Team Performance in Competitive Online Multiplayer Games’. In Proceedings of the 2016 CHI Conference on Human Factors in Computing Systems, 4337–50. CHI ’16. New York, NY, USA: Association for Computing Machinery, 2016. https://doi.org/10.1145/2858036.2858132 5) Wuertz, Jason, Scott Bateman, and Anthony Tang. ‘Why Players Use Pings and Annotations in Dota 2’. In Proceedings of the 2017 CHI Conference on Human Factors in Computing Systems, 1978–2018. CHI ’17. New York, NY, USA: Association for Computing Machinery, 2017. https://doi.org/10.1145/3025453.3025967 . 6) ibid. 7) Reid, Elizabeth, Regan L. Mandryk, Nicole A. Beres, Madison Klarkowski, and Julian Frommel. “‘Bad Vibrations’: Sensing Toxicity From In-Game Audio Features.” IEEE Transactions on Games 14, no 4 (2022): 558-568. 8) Gray, K. L. (2014). Chapter 3 - Deviant Acts: Racism and Sexism in Virtual Gaming Communities. In K. L. Gray (Ed.), Race, Gender, and Deviance in Xbox Live (pp. 35–46). Anderson Publishing, Ltd. https://doi.org/10.1016/B978-0-323-29649-6.00003-0 9) Märtens, Marcus, Siqi Shen, Alexandru Iosup and Fernando Kuipers. “Toxicity Detection in Multiplayer Online Games.” Proceedings of the 2015 International Workshop on Network and System Support for Games (NetGames). 03-04 December, 2015, Zagreb, Croatia, 1-6. 10) Blamey, Courtney. ‘One Tricks, Hero Picks, and Player Politics: Highlighting the Casual-Competitive Divide in the Overwatch Forums’. In Modes of Esports Engagement in Overwatch, edited by Maria Ruotsalainen, Maria Törhönen, and Veli-Matti Karhulahti, 31–47. Cham: Springer International Publishing, 2022. https://doi.org/10.1007/978-3-030-82767-0_3 . Tags: 핑, 커뮤니케이션, 트롤링, 음성채팅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연구자) 코트니 블레이미, Courtney Blamey 캐나다 몬트리올 콩코디아대학 커뮤니케이션 박사과정 재학중인 게임디자이너. 시리어스 게임에서의 의미발생 과정에 관한 박사논문을 준비중이며, 게임디자인에서 플레이어와 디자이너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과정에 관심을 두고 있다. 오버워치에서의 커뮤니티 구성 및 운영에 관한 블리자드의 접근방식을 개발자 및 게임커뮤니티에 관한 조사를 통해 풀어낸 연구를 진행한 바 있다. 게임과 게임 플레이어, TAG(Technoculture Arts and Games)를 연구하기 위한 혁신적인 방법을 개발하는 데 전념하는 공간인 mLab의 회원이다. (게임연구자) 마크 라제네스, Marc Lajeunesse 캐나다 몬트리올 콩코디아대학 커뮤니케이션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 온라인 게임의 독성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삼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더 공평하고 즐거운 놀이 경험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으로 게임 내에서 더 많은 긍정적인 조건을 들어내기 위한 독성 현상에의 이해를 추구한다. 스팀 마켓플레이스와 DOTA 2에 관한 논문을 작성한 바 있고 곧 출시될 '트위치 마이크로스트리밍'의 공동 저자이다.

  • 보이는 신체, 보이지 않는 신체

    게임과 신체는 불가분의 관계다. 현실세계 외부에 컴퓨터 기술로 별도의 가상세계를 만들고, 플레이어로 하여금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여하게끔 하는 것이 게임 플레이라면, 플레이어의 신체는 게임 플레이를 위한 기본 조건이 된다. 이 때 신체는 가상세계에의 개입을 위해 게임 밖에서 플레이어의 생각과 의지를 전달하는 도구로 기능한다. < Back 보이는 신체, 보이지 않는 신체 22 GG Vol. 25. 2. 10. 게임과 신체 게임과 신체는 불가분의 관계다. 현실세계 외부에 컴퓨터 기술로 별도의 가상세계를 만들고, 플레이어로 하여금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여하게끔 하는 것이 게임 플레이라면, 플레이어의 신체는 게임 플레이를 위한 기본 조건이 된다. 이 때 신체는 가상세계에의 개입을 위해 게임 밖에서 플레이어의 생각과 의지를 전달하는 도구로 기능한다. 다른 한 편으로, 게임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여한다고는 해도 플레이어의 신체는 게임 바깥인 현실에 있기에, 플레이어를 대신하는 게임 속 아바타의 존재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이 때 아바타는 플레이어 신체를 연장한 가상세계 속 구현물로, 게임 밖 플레이어의 신체를 통해 입력된 명령을 게임 내에서 실현해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렇듯 게임에서 신체는 크게 두 축, 즉 게임하는 플레이어의 신체, 그리고 게임 속 아바타의 신체로 논의된다. 둘을 게임의 밖과 안의 신체, 게임 시스템에 조응하는 신체와 게임에서 재현되는 신체, (가상세계 속) 눈에 보이는 신체와 보이지 않는 신체로도 구분할 수 있겠다. 두 축을 중심으로 게임과 신체가 서로 만나 얽히는 여러 지점들을 드러내고, 이를 통해 게임과 게임 플레이를 새롭게 읽어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플레이어의 신체가 아바타 신체와 무엇을 통해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것이 게임 플레이를 어떻게 바꿔놓는지, 관련해 논의 가능한 이슈들엔 무엇이 있고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들여다봐야 할지 살펴보고자 한다. 인터페이스와 신체 플레이어의 생각과 의지를 게임세계에 전달하는 도구로서 신체에 대해 언급했지만, 신체가 직접 게임세계에 침투 가능한 것은 아니다. 플레이어의 신체는 ‘인터페이스(interface)’를 통해야 비로소 스크린 너머 가상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가상의 환경과 사물 그리고 이야기에 직접 개입할 수 있게 된다. 게임에서 인터페이스는 플레이어와 게임 시스템 간 상호작용을 가능케 하는 매개체를 말한다. 크게 ‘물리적 인터페이스’와 ‘정보 인터페이스’로 구분된다. 전자가 가상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플레이어에게 처음부터 주어져야만 하는 게임 외적 요소로 컨트롤러, 키보드, 마우스 등을 포함한다면, 후자는 플레이어가 가상세계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게임 내적 요소이며 인벤토리, 맵, 정보창 등이 이에 속한다. 인터페이스를 통해 게임 밖 플레이어의 신체는 게임 속 아바타의 신체와 연결된다. 물리적 인터페이스는 특히 플레이어의 물리적 신체와 맞닿는다. 플레이어의 개인적 공간에 머물고, 심지어 신체와 자주 접촉한다. 플레이어의 생각과 의지가 신체를 거쳐 물리적 인터페이스에 입력되면, 입력치를 디지털 신호로 바꿔 정보 인터페이스나 캐릭터에게 보낸다. 플레이어가 플레이를 위해 물리적 인터페이스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물리적 인터페이스가 점차 플레이어의 신체로 통합됨에 따라 일부 피트니스 게임이나 레이싱 게임,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이하 ‘VR’) 게임류에서 플레이어의 신체가 그 자체로 물리적 인터페이스화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 홀로그램이나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이하 ‘AR’)은 물리적 인터페이스와 정보 인터페이스 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게임이 매개되고 재현된 세계를 제공하는 것임에도, 인터페이스를 통해 가상세계를 즉각적으로 바꿔나가는 과정에서 플레이어들은 그 세계를 마치 직접 경험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게임은 특정 시점(1인칭, 3인칭) 혹은 혼합형 시점(1+3인칭)을 사용하며 카메라 렌즈와 같은 매개효과를 이용해 플레이어를 그 세계 안으로 끌어들이고, 플레이어는 그 신체가 스크린 바깥에 있음에도 스크린 안에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를 ‘원격현전(tele-presence)’이라 부른다. 원격현전은 매개된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 인지되는 존재감으로, 실은 부재 상태인 타자나 사물과의 공동 공간감, 몰입, 현실감 등과 같은 심리적 상태 혹은 주관적 관념으로 이해된다(International Society for Presence Research, 2000). 면대면으로 직접 커뮤니케이션하는 것과 달리 미디어나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를 통해 매개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경우, 수용자는 일반적으로 실재하는 물리적 환경과 미디어를 통해 구현되는 환경을 동시에 지각한다. 그럼에도 몰입적인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고도의 원격현전을 제공하고, 플레이어는 자신의 신체가 위치한 현실과 플레이가 이뤄지고 있는 가상현실 간의 차이를 거의 느끼지 못하거나 최소한만 지각하게 된다(강신규, 2020). 원격현전을 통해 플레이어의 신체는, 인지적 차원에서 물리적 현실세계를 빠져나가 가상세계로 빨려들어간다. VR 게임과 신체 VR 게임은 기존의 물리적 인터페이스에서 벗어나 HMD(head-mounted display) 같은 기기를 착용한 플레이어의 신체를 입력장치화한다. 플레이어의 신체는 현실에 물리적으로 위치하지만, 기기를 통해 경혐되는 시청각 신호로 인해 뇌는 플레이어의 신체가 마치 가상공간 안에 있는 것처럼 인식한다. 플레이어의 신체가 가상공간 안에서 재현되기에 아바타는 VR 게임에서는 대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플레이어가 신체를 직접 움직여서 게임 속 자신의 움직임을 결정한다. 그 안에서의 활동은 기존 게임이 제공하는 가상세계에서보다 훨씬 더 조밀하고 촘촘한 감각의 집중을 요구한다. 할 수 있는 일도 많고, 해야 하는 일도 많다. 보통 게임에서의 시점이 장르나 특성에 따라 1인칭, 3인칭 그리고 혼합형 시점으로 다양하게 구분됐다면, VR 게임은 대부분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플레이가 이뤄지는 공간 역시 평면 공간, 스크롤링 공간, 입체(3D) 공간 등으로 구분되는데, VR 게임에서는 입체 공간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신체를 활용한 상호작용, 가상세계 안과 밖 시선의 일치, 입체 공간 제공 등을 통해 VR 게임은 기존 다른 게임보다 훨씬 더 강력한 원격현전을 유발할 가능성을 갖는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지는 세계가 핍진적(verisimilitude)일수록 플레이어는 비매개에 가까운 상호작용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현실과 얼마나 가까우냐가 아니라, 가상세계 안에 존재하는 환경, 캐릭터, 캐릭터의 행위, 상황과 개연성들이 얼마나 신뢰할 만하고 현실적이냐가 플레이어의 상호작용적 경험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때 VR 게임은 비물질적이지만 물질적인 것으로 지각될 만큼 ‘실재’하는 인식의 세계를 탄생시킨다. 마치 현실세계에서처럼 가상세계가 물리적 시공간을 제공하는 것처럼 인식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가상현실은 플레이어에게 ‘부재’를 떠오르게 만들 수밖에 없는데, 가상현실 속 모든 것이 물질적 구현이자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존재로서의 현실 속 많은 것과 대비되기 때문이다. 기기를 착용한 눈과 귀가 인식하는 가상세계와, 플레이어의 신체가 감지하는 주위 환경이 어긋나기 때문에 VR 게임은 종종 플레이어에게 어지럼증이나 울렁거림을 발생시킨다. 특히 드라이빙 시뮬레이션이나 1인칭 슈팅 게임(first person shooter, FPS)을 오래 플레이하다보면, 이른바 ‘사이버멀미(cybersickness)’를 느끼게 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사이버멀미를 줄이거나 없앨 수 있는 기술적 방안에 대한 고려가 다각도로 이뤄지고는 있지만, 현재와 같은 기술 상황에서 게임 개발자들이 사이버멀미를 피하기 위해 택하는 주된 방법은 아예 움직이지 않고 전지적 관찰자의 시점이 되거나, 순간이동으로 이동 과정의 표현을 생략하거나, 아니면 중력 없는 가상공간에 플레이어를 밀어 넣는 것이다. 멀미를 유발할 수 있는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취하는 셈이다. 하지만 기술의 발달로 향후 물리적 인터페이스가 전정기관과 같은 플레이어의 신경(기관)을 직접 자극하고 (실제 자극이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신체가 그에 반응하게 될 때가 오면, 더 이상 플레이어의 신체가 가상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일은 없게 될 것이다. 이는 가상세계가 보다 완전한 시뮬라크르(simulacre)가 됨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현재 VR 게임이 야기하는 사이버멀미는 가상세계를 가상세계로 인식하게 하는, 우리 신체가 만들어낸 닻과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강신규, 2020). AR 게임과 신체 AR 게임에서는 현실과 가상 간 경계가 투명해지고, 종종 가상세계를 위해 현실이 동원된다. <포켓몬고>는 현실세계 모든 곳을 무대로 삼아, 플레이어로 하여금 언제든 포켓몬스터(이하 ‘포켓몬’) 사냥을 통해 포켓몬 트레이너로서 활약하게 만드는 AR 게임이다. 포켓몬을 잡는 행위는 플레이어 신체의 물리적 공간 이동을 전제로 한다(홍성일·이수엽·박근서, 2017). 특정 지점에서 포켓몬을 마주치기 전까지 플레이어가 이동하는 행위는 현실 속에서 이뤄진다. 게임 플레이(포켓몬 사냥)를 위해 현실에서의 특정 행위(플레이어 신체의 이동)가 동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임 안의 것을 위해 게임 밖 요소가 동원되는 <포켓몬고>에서는, 게임 밖 요소가 더 많이 동원될수록 게임 안이 두둑해진다. 기존의 게임에서는 플레이어와 게임 시스템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데이터가 비롯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AR 게임에서는 그 데이터의 상당 부분이 게임 외부에서 온다. 플레이어와 게임 사이의 관계가, 플레이어와 게임 그리고 게임 밖으로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AR 게임에서는 플레이어의 공간과 게임 공간이 일치한다. 플레이어는 현실 속에서 게임을 플레이하며, 게임이 이뤄지는 공간 역시 현실이다. 따라서 AR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원격현전감이 아닌 현전감을 제공한다. 게임 속 공간 탐험이 게임 바깥 공간 탐험으로 바뀐다는 점도 AR 게임 플레이 고유의 특징이다. 기존 게임에서의 플레이는 곧 게임 공간을 탐험하고 통달하는 일과 관련되었다(박근서, 2009). 하지만 AR 게임에서의 플레이는 현실세계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기존 게임과 VR 게임이 새로운 공간을 창조한다면, AR 게임은 플레이어가 존재하는 현실세계에 필요한 가상의 정보를 중첩시킨다. 기존 게임과 VR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현실과 분리된 허구의 체험을 제공하지만 AR 게임은 현실과 가상의 접점을 유지한다. VR 게임의 경우 HMD와 같은 전용기기를 착용해야 디스플레이에서 가상세계를 인식할 수 있지만, AR 게임은 눈으로 보는 현실에 가상의 이미지나 정보 등을 입히는 방식으로 간단히 구현 가능하다. 따라서 현실세계에서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도 보다 쉽고 원활히 이뤄질 수 있다(강신규, 2020). 현실을 배경으로 플레이된다는 점에서 진짜 사실적이고 실재감을 느끼며 몰입할 수 있다는 특징도 지닌다. e스포츠와 신체 e스포츠에서도 ‘신체’가 화두다. 프로게이머의 국가 대항전이 글로벌 스포츠 이벤트로 자리 잡은지 오래지만, e스포츠가 전세계적으로 정식 스포츠 종목이 되진 못했다. 아시안 게임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지만, 올림픽 게임의 경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각국올림픽위원회(NOC) 등이 종목 채택을 고민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물론 e스포츠가 반드시 정식 스포츠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스포츠 관련 기관들의 승인이 있어야만 e스포츠가 진정한 스포츠가 되는 것도 아니다. e스포츠는 애초부터 경기장, 선수 간 경쟁, 규칙 등의 스포츠적인 요소와 스타 프로게이머, 팬 등과 같은 엔터테인먼트적 요소가 융합된 스포테인먼트였다. 그럼에도 e스포츠가 정식 스포츠가 될 때 e스포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개선될 여지가 크고, e스포츠 육성을 위한 공적지원 역시 더 확대될 수 있다. 그동안 한국에서 e스포츠는 긍정적이지 못한 인식으로 인해 본격적인 지원이나 육성 대상이 되지 못했다. 당연히 기존 스포츠와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한 측면도 있다. 종목 다양화와 국산 종목화, 인력 양성 및 경력 관리 시스템 확충, 관련 주체들 간 거버넌스 확립, 저작권 문제 등 e스포츠의 정식 스포츠화를 위해 가야 할 길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무엇보다도 e스포츠의 스포츠화에 있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근대 스포츠의 핵심 개념인 ‘대근육 사용’ 여부다. 경기가 행해지는 데 있어 대근육을 중요하게 사용하지 않는 e스포츠는 스포츠 범주에 포함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인간 의지의 육체적 발현을 대근육의 사용을 기준으로 구분하는 것은 시대에 부합하지 않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의지와 의지 간의 경쟁은 단순히 오프라인 상 대근육의 움직임 논의를 넘어 새롭게 개념화될 필요가 있다. 실제로 현재의 스포츠는 인간의 즐거움을 위한 행동을 개념화한 근대적 시각을 넘어, 시대의 변화를 반영해왔다. 미디어 기술의 발전, 팬들의 즐거움 추구방식 변화, 스포츠 관련 기술 및 도구의 발전 등은 근대 스포츠 개념 재구성의 필요를 촉발시켰고, 이제 인간의 신체와 정신은 근대 스포츠가 추구해온 경쟁성, 조직성, 제도화, 집중력, 작전, 신체활동 등의 요소를 넘어서는 새로운 스포츠들로 향한다. 극한의 물리적 공간(암벽, 절벽, 인공적인 링, 도시의 빌딩과 빌딩 사이 등)에서 인간 육체의 모든 가능성을 실험하는 익스트림 스포츠, 이종격투기 등은 신체 능력을 극대화하여 경쟁을 추구하는 스포츠에 해당한다. 근대 스포츠의 특성을 지니면서도 신체 활동보다는 작전, 집중력 등의 요소에 의해 경쟁이 이뤄지는 컬링, 사격, 양궁, 골프 등은 정신적 요소가 부각되는 스포츠라 할 수 있다. 가상공간을 통해 행해지는 e스포츠는 일반 스포츠 경기보다 더욱 동일한 외적 조건에서 이뤄지는 경쟁이며, 신체적 능력과 정신적 요소가 동시에 요구된다. 먼저, 정신적 요소는 경기의 승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노력을 통해 향상된 정신적 요소를 바탕으로 선수들은 경기에 임하며, 경기가 펼쳐지는 가상세계는 선수들의 정신적 요소를 견주는 장이 된다. 신체적인 능력의 경우 승패를 좌우할 만큼 절대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신적 요소 못지 않게 상당 부분 필요하다. 대근육을 쓰진 않으나 집중력 유지를 위해 기초 체력이 있어야 하고, 키보드와 마우스를 빠르고 정확하게 조작하는 일도 승패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다(채희상·강신규, 2011). 결국 e스포츠는 상당 수준의 신체적 반응과 순발력을 바탕으로 물리적 공간이 아닌 가상세계에서 전략, 집중력 등 정신적 요소를 극대화하여 경쟁하는 새로운 개념의 스포츠로 범주화될 수 있다. 전략과 집중력을 바탕으로 그 어떤 다른 스포츠보다도 빠르고 정확한 판단, 통찰력, 감정 조절과 상황 대처, 섬세한 컨트롤 등을 요구하는 멘탈 스포츠이자 피지컬 스포츠인 것이다. 게임 안과 밖의 여성 신체 게임에서의 신체에 대해 다루면서 ‘여성’ 논의를 빼놓을 수 없다. 게임과 여성에 대한 논의는 다각도로 이뤄져 왔지만, 그 중 신체를 중심으로 하는 논의에서는 주로 비판적 시각에서 게임 내 여성 신체의 재현(representation) 문제나, 플레이하는 신체로서 여성을 다루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전자가 게임 안의 여성 신체에 대해 살핀다면, 후자는 게임 밖의 여성 신체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여성 신체의 재현 논의는 게임 텍스트에서 여성이 전반적으로 희미하거나 부재하고, 텍스트 상에 드러난다 해도 스테레오타입화되거나, 성별화된 묘사의 대상이 된다는 데 주목한다(윤태진·김지윤, 2023; Dietz, 1998; Greenfield, 1994; Kinder, 1991). 여성 캐릭터가 게임 내러티브에서 부수적이거나 남성 의존적인 역할을 맡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현실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식으로 왜곡된 몸매를 지녔거나, 게임세계 속 상황(예를 들어, 모험, 사냥 등)에 적합하지 않은 의상 혹은 아이템을 걸쳤거나, 마찬가지로 게임세계 속 상황에 적합하지 않은 행동 혹은 몸짓을 보이는 경우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재현된 여성이 어떻게 (특히 남성) 플레이어들에게 받아들여지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는 논의들도 있다. 가령 FPS 속 플레이어 시선의 문제를 논의한 한 연구(Bryce & Rutter, 2002)는, 플레이어들이 특정 게임에 내재된 구조로 인해 불가피하게 남성적 시선을 채택하게 되고, 여성의 존재는 물신화된 대상으로 그려짐으로써 결국 남성적 즐거움에 동참하게 된다고 비판한다. 그런 게임에서 게임 플레이는 기존의 성 역할을 강화하고 재생산하는 행위가 된다. 여성 플레이어가 신체적 차이로 인해 남성보다 게임을 잘 하지 못한다거나, 직접적인 경쟁 위주의 게임보다는 캐주얼하거나 커뮤니케이션에 기반을 둔 게임류를 좋아한다거나(Krotoski, 2004), (남성 플레이어가 설명을 통해 게임을 학습하는 데 반해) 모델이 될 만한 게임 플레이를 따라하면서 게임하기를 배운다(Graner Ray, 2004)는 식으로 여성 플레이어를 규정하는 경우도 많다. 게임을 잘 하는 여성 플레이어를 독특한 대상으로 바라보거나, 온라인게임에서 여성 플레이어를 한 팀으로 만났을 때 한탄 혹은 희롱하거나, 여성 플레이어에게 보조적 역할을 수행하는 캐릭터 선택을 강요하는 등의 행위도 게임하는 사람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다양한 신체가 재현되지 않는 상황이 게임만의 문제가 아니라 해도, 인터페이스, 아바타, 상호작용, 그리고 시선 등을 통해 다른 미디어에 비해 보다 몰입적인 수용 환경을 제공하는 게임에서 여성에 대한 긍정적이지 못한 방식의 재현은 훨씬 더 문제적인 것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게임 플레이에서 성별의 차이를 내재적이고 불변하는 것으로 가정한 상태에서 여성 플레이어를 대하는 것도 문제다. 여성 플레이어 역시 남성 플레이어 못지 않게 다양한 게임을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도 아주 능숙하게 플레이한다. 게임을 생산과 소비 차원, 재현과 플레이 차원에서 남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여성을 비가시화된 대상으로 반대 편에 위치시키는 이해는, 게임 문화 전반을 이해하는 데 있어 아주 지엽적이고 편협한 파악만을 허용할 뿐이다. 관련해 남성적인 것, 혹은 여성적인 것으로 당연하게 부여돼 오던 가치 체계에 의혹을 제기하고 보다 포괄적 관점에서의 플레이어를 바라보려는 시도(예를 들어, 전경란, 2009), 여성 플레이어의 취향과 지향성에 기초해 그들을 만족시킬 게임이 필요하다는 주장(예를 들어, Laurel, 1998), 탈남성적 시각에서 여성 게이머의 주체성에 주목하고 여성 게이머를 가시화하는 시도(예를 들어, 윤태진·김지윤, 2023)들이 다양하고 폭넓게 이뤄지고 있다. 이런 의미 있는 작업들을 남성적인 것에 대한 전복이나 여성적인 것의 회복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게임 문화의 정착을 위한 것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앞으로의 게임과 신체 이상에서 게임하는 플레이어의 신체와 게임 속 아바타의 신체에 초점을 맞춰, 게임과 신체가 관계 맺는 세 지점을 살펴보았다. 첫 번째 지점은 ‘인터페이스’다. 게임 밖 플레이어 신체와 게임 속 아바타 신체를 연결하는 인터페이스가 무엇인지, 인터페이스를 매개로 플레이어의 신체가 가상세계 속으로 어떻게 진입하는지, VR 게임과 AR 게임에서 인터페이스가 어떻게 달라지고 그것이 플레이어와 아바타 신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했다. 두 번째 지점은 ‘e스포츠’다. 특히 e스포츠의 스포츠화에 있어 프로게이머의 신체가 어떻게 화두가 되는지, 그렇다면 e스포츠에서 신체는 어떤 역할을 하고 정신과는 어떻게 조응하는지 들여다봤다. 세 번째 지점은 ‘여성’으로, 게임 안에서 여성 신체가 어떻게 문제적으로 재현되고 게임 밖에서 여성 플레이어의 신체가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여지는지 논의했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게임이 신체와 밀접하게 관계 맺어왔듯, 앞으로도 둘 간 관계는 최소한 여전하거나 더욱 밀접해질 것으로 보인다. 단초는 기술의 발전, 이용자들의 다양한 플레이 방식 추구, 그리고 새로운 게임의 출현이다. VR 게임과 AR 게임이 인터페이스를 확장하고 또 경계를 허물면서 플레이어와 아바타의 신체가 마주하는 게임 플레이 경험을 달라지게 만들었듯, 앞으로도 얼마든지 새로운 기술과 게임은 게임 안과 밖의 신체가 갖는 의미를 바꿔놓을 수 있다. 현존하는 논의들이 게임과 신체가 관련 맺는 방식과 양상 그리고 의미를 충분히 설명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게임과 신체가 어떤 식으로 변화하거나 진화해갈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방향과 형태로 게임 플레이를 바꿔 나갈지 지속적으로 살필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강신규 (2020). 현실로 들어온 놀이: 서드 라이프 시대의 디지털게임. 원용진 등, <서드 라이프: 기술혁명 시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 (139~177쪽). 커뮤니케이션북스. 박근서 (2009). <게임하기>. 커뮤니케이션북스. 윤태진·김지윤 (2023). <여성 게이머는 총을 쏠 수 있는가>. 몽스북. 전경란 (2009). <디지털 게임, 게이머, 게임문화>. 커뮤니케이션북스. 채희상·강신규 (2011). e스포츠의 스포츠 범주화에 대한 탐색적 연구. <한국게임학회 논문지>, 11권 3호, 85~95쪽. 홍성일·이수엽·박근서 (2017). 이동적 사사화 개념의 재활성화를 위하여: 텔레비전, 워크맨, 포켓몬고. <미디어, 젠더 & 문화>, 32권 2호, 305∼340쪽. Dietz, T. L. (1998). An examination of violence and gender role portrayals in video games: Implications for gender socialization and aggressive behavior. Sex Roles, 38, pp.425~442. Graner Ray, S. (2004). Gender inclusive game design: Expanding the market. Hingham MA: Charles River Media. Greenfield, P. M. (1994). Video games as cultural artefacts. Journal of Applied Developmental Psychology, 15, pp.3~12. Kinder, M. (1991). Playing with power in movies, television, and video games: From muppet babies to teenage mutant ninja turtles. Berkeley: Univ. of California Press. Krotoski, A. (2004). Chicks and Joysticks: An exploration of women and gaming. London: Entertainment & Leisure Software Publishers Association. Laurel, B. (1998). An interview with Brenda Laurel, in J. Cassel & H. Jenkins (Eds.), From Barbie to Mortal Combat (pp.118~135). Boston: The MIT Press.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 편집위원) 강신규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 편집위원. 게임, 방송, 만화, 팬덤 등 미디어/문화에 대해 연구한다. 저서로 <흔들리는 팬덤: 놀이에서 노동으로, 현실에서 가상으로>(2024), <서브컬처 비평>(2020), <아이피, 모든 이야기의 시작>(2021, 공저), <서드 라이프: 기술혁명 시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2020, 공저), <게임의 이론: 놀이에서 디지털게임까지>(2019, 공저) 등이, 논문으로 ‘이기지 않아도 재미있다: 부모-자녀 게임 플레이의 사회성과 행위성, 그리고 분투형 플레이’(2024), ‘커뮤니케이션을 소비하는 팬덤: 아이돌 팬 플랫폼과 팬덤의 재구성’(2022), ‘‘현질’은 어떻게 플레이가 되는가: 핵납금 게임 플레이어 심층인터뷰를 중심으로’(2022, 공저), ‘게임화하는 방송: 생산자적 텍스트에서 플레이어적 텍스트로’(2019) 등이 있다.

  • 슈퍼 히어로 '게임'의 과거와 오늘

    원전인 수퍼히어로 만화는 여전히 독자적 산업을 잘 이끌고 있다. 그리고 영상 컨버전이 최근에 들어 절정을 찍었다면, 게임 컨버전은 비교적 신생이다. < Back 슈퍼 히어로 '게임'의 과거와 오늘 16 GG Vol. 24. 2. 10. 한 장르의 팬으로서, 그 장르가 대중의 화제에 자주 오르내리는 것을 마주할 때마다 양가적인 감정을 느낀다. 내가 사랑하는 장르를 많은 사람들이 갖고 놀기에 더불어 대화하는 즐거움을 느끼지만, 동시에 틀린 정보나 나와는 너무 다른 해석 앞에서 불안과 아픔을 느끼기도 한다. 다행인지 요즘은 그런 감정의 골짜기에 빠질 일이 별로 없다. 사람을 덜 만나서도 있지만 화제로 다뤄지는 빈도가 급격히 줄었기 때문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두 번째 사가인 멀티버스 사가가 진행되면서, 수퍼히어로 장르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서서히 식어가고 있다. 정확히는 영상화된 수퍼히어로, 수퍼히어로 영화에 대한 관심이다. 원전인 수퍼히어로 만화는 여전히 독자적 산업을 잘 이끌고 있다. 그리고 영상 컨버전이 최근에 들어 절정을 찍었다면, 게임 컨버전은 비교적 신생이다. 수퍼히어로라는 장르 만화, 특히 미국 만화를 고향으로 두고 있는 수퍼히어로라는 영웅 서사 장르는 세 가지의 특징이 있다. 그리고 영상이나 게임으로의 컨버전 또한 이 세 가지 특징을 플랫폼에 맞춰 변용하는 것에 핵심이 있다. 수퍼히어로라는 부류의 캐릭터와 서사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우선 첫 번째로 수퍼파워, 초능력이 있어야 한다. 두 번째 요건은 캐릭터를 디자인할 때 반드시 코스튬, 복장을 정해놓는다는 관습이다. 세 번째는 코스튬을 입고 수퍼파워를 휘두르는 수퍼히어로의 반대항인 수퍼빌런이 등장하여 양자 간의 결전을 절정으로 하는 서사 구조를 기본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이 세 특징 혹은 요건 중에서 앞의 둘은, 만화에서는 손쉽게 표현된다. 만화의 ‘수퍼파워’는 과장의 미학이기 때문이다. 초능력의 표현 또한 소설 문학 다음으로 경제적인 표현 수단 덕분에 손쉽게 표현한다. 반면 돈이 많이 드는 표현 수단을 쓰는 영상 문학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이지드로잉가이드닷컴이라는 그림 교육 사이트에서 ‘superhero’의 예시로 든 코스튬. 하지만 이런 디자인의 코스튬이 실사로 제시되면 유치해지기 쉽다. 3D 그래픽의 경우엔 다소 허들이 낮아지긴 하지만 낮아질 뿐이다. 만화의 표현으로는 괜찮았던 코스튬이 영상에서는 유치하거나 불합리해진다. 초능력의 표현은 컴퓨터 그래픽과 특수효과가 어느 이상의 수준이 되기 전까지는, 역시 유치한 연출 기법에 기대야 했다. 게임으로의 컨버전은 영상의 고생에 비하면 별 거 없었다. 영상의 ‘수퍼파워’가 컴퓨터 그래픽 기술의 발달이었기 때문에, 같은 수퍼파워를 쓰는 게임 입장에서는 미적 디자인과 게임 기획만 고민하면 되었다. 그리하여 영상과 게임 모두 공히, 코스튬이라는 요소는 미학적 코드를 약간 틀어서 해결했다. 초능력의 표현은 기술적 발전으로 해결했다. 그리고 수퍼히어로 장르가 영웅 서사의 일종이기 때문에 생긴 마지막 특징, 빌런과의 대결 서사는 표현형을, 클리셰를 결정짓게 되었다. 일단 대결 서사이기 때문에 기본 표현형은 액션 장르가 된다. 그래서 수퍼히어로와 수퍼빌런을 연기하는 모든 배우 및 스턴트는 다양한 액션을 소화해야 한다. 게임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로, 기본 장르가 액션으로 고정된다. 이 때문에 수퍼히어로 영화는 모두 액션 영화이거나 액션 요소가 강하며, 수퍼히어로 게임의 주류 또한 상황이 비슷하다. 수퍼히어로 영화의 성과 게임이 참고할 수 있었던 수퍼히어로 영화 장르의 역사를 보면 그 결과로 나온 클리셰의 구조를 요약할 수 있다. 영상화의 시도는 40년대부터 있었지만, 수퍼히어로 영화라는 하위 장르를 집대성한 첫 작품은 1989년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 영화였다. 2003년 샘 레이미 감독의 ‘스파이더맨 2’는 앞선 배트맨의 성과를 좀 더 대중적인 형태로 구성하는 데에 성공했다. 수퍼히어로의 캐릭터성 – 작중 세계의 구현 – 영화 서사의 성격을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모델이었고, 이는 사실 원전 만화에서 명작들이 가닿은 지점이기도 했다. 팀 버튼의 1989년 배트맨 코스튬. 원전의 코스튬에서 회색과 남색 부위를 없애버렸다. 이 코스튬은 어둑한 고담시를 구현한 미장센, 심리적 불안정을 드러내는 연기와 유기적으로 맞아떨어졌다.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트릴로지는 현실적인 수퍼히어로를 보여주려 애썼다. 이는 마블의 캐릭터 묘사 전략이기도 한데, 영화의 사실적인 뉴욕 풍경 및 스파이더맨의 오리지널 캐릭터성과도 맞아 떨어졌다. 이 두 영화의 성취를 통해 수퍼히어로 영상 문학에서 정형화된 클리셰 구조가 등장했다. 초반에는 히어로와 빌런의 오리진 스토리를 보여준다. 이후 전개에서 둘의 갈등이 형성되어 부딪히면서 액션 장면들이 나오고, 빌런의 계획을 히어로가 박살내는 절정부에서 둘의 최종 결전이 벌어진다. 히어로의 승리로 이야기가 종결된 후에는 다음 영화를 예고하는 짤막한 에필로그가 덧붙는다. 이렇게 클리셰를 완성한 수퍼히어로 영화는 2008년,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와 존 패브로의 ‘아이언맨’에서 다음 단계로 진입한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정립된 서사 구조를 따라가는 한편 교묘하게 뒤틀어서 다른 용도로 썼다는 점이다. 다크 나이트 3부작은 원전 만화에서 성공했던 상징 체계 도입 전략을 써서 성공했고, ‘아이언맨’은 에필로그를 이용해 작중 세계 확장 전략을 시작했다. 다크 나이트 영화는 미국 의회도서관의 영구 보존 영화에 포함되는 걸작으로 남았다. 아이언맨의 첫 영화는 기획도 거창하지 않은 평범한 수퍼히어로 영화로 제작되었으나 ‘장비 제작’을 서사의 중심에 놓는 등의 독특한 테이스트가 현실감을 부여하면서 독자적인 성취를 이뤘다. 이 두 영화의 성취는 만화 원전의 두 회사, DC와 마블의 스타일과도 걸맞는다. DC는 수퍼히어로 장르를 개창한 회사이며, 그래서인지 영웅의 신적 면모를 강조하는 스타일을 갖고 있다. 이는 서사가 상징 체계와 궁합이 잘 맞는다는 의미다. 마블은 스탠 리 이후 ‘현실성의 닻’을 독자적 스타일로 하고 있다. 현실의 독자와 유사성을 설정과 서사에 집어넣어, 독자의 감정이입을 꾀하는 전략인데, 이것이 아이언맨 이후 진행된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다만 DC 캐릭터들의 작가주의적 스타일은 이후 한참 길을 찾지 못하다가 2019년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에서 간신히 부활한 반면, 마블이 시도한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인피니티 사가의 완성이라는 확장 전략의 업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다수의 영상 작품이 하나의 서사로 확장 통합되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그러나 현재에는 다음 클리셰로 발전하지 못하면서 목적 잃은 확장이 되어 답보 상태에 이르러 새로운 돌파구가 될 작품을 기다리는 상태다. 수퍼히어로 게임, 시작 그리고 수퍼히어로 게임은 영상 장르가 겪은 이 모든 경험을 흡수했다. 기본적으로 게임에서의 수퍼히어로 서사 또한 만화와 영화가 먼저 만들어놓은 클리셰 구조를 따라간다. 당연한 것이, 게임은 대결 서사를 녹여내기 딱 좋은 플랫폼이다. 하지만 초창기의 수퍼히어로 소재 게임은, 서사 구조가 복잡하거나 장대하지 않았고 게임 디자인이 심층적이지 않았던 초기 게임의 특성을 그대로 공유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장르는 스크롤 액션이었다. 특히 이런 게임들은 영화 시장에서 히트한 작품의 홍보용 게임이었는데, 1989년 배트맨 영화를 기반으로 한 패미컴의 배트맨 게임 시리즈가 대표적이었고, 이런 류의 게임들은 대부분 퀄리티가 낮았다. 반면 코나미의 1992년작 ‘엑스멘’은 영화에 기대지 않은 게임이었다. 여전히 장르는 벨트스크롤 액션이었지만, 익숙한 장르를 제대로 만들기만 하면 이미 시장에서 널리 알려진 캐릭터의 인기를 이용해 충분히 히트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무려 6인 플레이가 가능했던 엑스멘. 스크롤 액션 장르 다음으로 수퍼히어로가 이식된 장르는 격투였다. 역시 마블의 캐릭터들이 쓰였는데, 1994년의 ‘엑스멘: 칠드런 오브 디 아톰’, 1995년의 ‘마블 슈퍼 히어로즈,’ 바로 다음 해 나온 캡콤의 ‘엑스맨 vs 스트리트 파이터’와 이후 시리즈는 대결 서사를 납작하게 압축하면 격투 게임 디자인으로 치환 가능함을 간파한 결과물이다. 비록 캐릭터 밸런스는 엉망이었지만 캡콤의 ‘vs 시리즈’는 주욱 이어지면서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한다. 이 계보는 DC 방면에서는 2008년의 ‘모탈 컴뱃 vs DC 유니버스’를 거쳐 2012년의 ‘인저스티스: 갓즈 어몽 어스’로 이어진다. 인저스티스 시리즈는 수퍼히어로 게임 중 격투 장르의 최신판이다. 수퍼히어로 게임, 액션 어드벤처 스크롤 액션, 격투를 지나 수퍼히어로 서사가 게임에서 제대로 꽃을 피운 장르는, 액션 어드벤처다. 2009년 락스테이디의 ‘배트맨: 아캄 어사일럼’은 배트맨의 캐릭터성, 원전 서사의 특성, 게임 디자인의 완성도 모두를 잡아낸 명작으로, 이후의 수퍼히어로 게임의 전형성을 제시해냈다. 하지만 이 정점까지 가는 길은 험했다. 2000년, 액티비전에서 ‘스파이더맨’이 발매되었고 후속작 ‘스파이더맨 2: 엔터 일렉트로’가 이듬해에 발매되었다. 최초의 3D 스파이더맨 게임이었으며 액션 어드벤처 장르에서 전투와 웹 스윙 액션을 구현해냈다. 이 시리즈의 시도는 곧이어 2005년부터 2011년까지 발매된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영화를 게임화한 시리즈와 액티비전의 2008년 ‘스파이더맨: 웹 오브 섀도우즈’, 2010년 ‘스파이더맨: 섀터드 디멘션즈’ 등의 시도로 확대되었다. 한편 2005년에는 영화 ‘배트맨 비긴즈’의 홍보용 게임 또한 유사한 성과를 올렸다. 영화에 기대는 게임임에도 2005년의 배트맨/스파이더맨의 두 작품은 다소의 완성도를 보인다. 스파이더맨은 웹 스윙 액션을 오픈월드에서 펼친다는 게임 디자인을 완성해가고 있었고, 배트맨은 연막탄 같이 환경에 맞는 도구를 사용해 적을 제압한다는 게임 디자인을 만들어냈다. 둘 모두 각자의 캐릭터성을 구현해낸 성과다. 이 성과가 2009년의 ‘아캄 어사일럼’에서 시작되는 아캄 시리즈와 2018년 인섬니악의 ‘마블즈 스파이더맨’ 시리즈로 이어지는 것이다. 아캄 시리즈의 성취는 이후 스파이더맨 게임에서 재조합된다. 영화에서 있었던 일이 그대로 게임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마블즈 스파이더맨은 아캄 어사일럼과 함께 이후 등장할 수퍼히어로 액션 어드벤처 게임의 전형을 만들어냈다. 이 두 작품에서의 배트맨/스파이더맨은 원전 만화의 배트맨/스파이더맨을 체험하는, 게임 자체의 특성을 십분 이용했다. 아캄 시리즈의 수사 모드는 탐정 소설의 후예로서 “세계 최고의 탐정”인 배트맨의 캐릭터성을 반영했다.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웹 스윙 액션 또한 같은 성격의 요소다. 수퍼히어로 캐릭터의 캐릭터 컨셉 자체를 게임 디자인에 녹여낸 것이다. 물론 프리플로우라는 간편하면서도 화려한 전투 시스템이 아캄 어사일럼에서 마블즈 스파이더맨으로 이어진 것도 성과였다. 이 두 시리즈를 통해 수퍼히어로 게임의 주류는 오픈월드 액션 어드벤처 장르가 되었고, 이에 따른 클리셰도 정립되었다. 영화와 달리 문서의 형태로 전달이 가능한 오리진 스토리는 생략한다. 오픈월드 내지는 느슨하게 열린 형태로 연결되는 스테이지가 게임 내 공간이 된다. 액션 어드벤처에서 전투를 하며, 영상과 달리 시간 제한이 없는 게임의 특성상 빌런도 여럿 등장하기에 결전 서사도 여럿 중첩된다. 캐릭터는 롤플레잉처럼 레벨링 성장을 하는데, 이 과정을 배트맨의 장비나 스파이더맨의 수트를 업그레이드하는 형식으로 풀어낸다. 이 클리셰를 종합한 첫 번째 시도가 2020년의 ‘마블즈 어벤저스’다. 오픈월드는 포기한 대신 각 스테이지가 매우 넓으며, 빌런만이 아니라 히어로도 여럿 등장하며, 성장 시스템이 있고, 프리플로우 대신 진 삼국무쌍과 유사한 액션 시스템을 사용했다. 이 작품의 만듦새는 다소 떨어지긴 했으니 캐릭터별 특색을 가진 액션은 잘 표현되었고, 같은 형태가 이후의 AAA 수퍼히어로 게임에서 반복되었다. 바로 다음 해에 발매된 ‘마블즈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플레이어블 캐릭터만 하나로 축소한 마블즈 어벤저스의 업그레이드 버전에 가깝다. 2022년의 ‘고담 나이츠’는 아캄 시리즈의 연장선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같은 해 발매된 ‘미드나잇 선즈’는 앞선 클리셰를 대부분 따르지만 장르가 X-COM 스타일의 턴제 전술인 것이 특징이다. DC 캐릭터의 레고 버전을 컨셉으로 한 레고 DC 게임 시리즈도 이런 분류에 포함된다. DC 캐릭터의 레고 버전을 이용해 게임을 만든 레고 DC 시리즈의 게임 또한 액션 어드벤처가 기본 장르다. 그리고 영화의 예에서 보듯 클리셰 정립이 완료되면 정체기가 등장한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게임의 단점이 마블즈 어벤저스와 동일한 점, 고담 나이츠의 완성도가 애매했던 점, 마블즈 어벤저스와 미드나잇 선즈가 결국 흥행에 실패한 점은 수퍼히어로 게임 또한 영화처럼 다음 돌파구를 필요로 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넓은 맵에서 벌어지는 액션과 성장의 경험은 이미 충분하다. 오픈월드에서의 액션 어드벤처는 폭넓은 경험을 보장하지만, 경계가 명확하다. 그렇다면 다른 시도는 무엇이 있을까? 수퍼히어로 게임의 다른 시도 주류의 시도와는 동떨어진 장르에서도 수퍼히어로 서사를 써보려는 시도가 있다. 가장 먼저 모바일 환경의 게임에서는 큰 성과를 내지 못한 다양한 게임들이 있다. 2018년에 발매하여 2020년에 종료한 ‘DC 언체인드’는 액션의 외피를 쓴 수집형 게임이다. ‘마블 퍼즐 퀘스트’, ‘마블 스트라이크 포스: 스쿼드 RPG’, ‘마블 퓨처파이트’ 같은 게임들 또한 매치3 퍼즐이나 수집 장르의 게임에 수퍼히어로 스킨을 씌운 수준이다. 이런 사실상의 수집 장르 게임이 카드 배틀의 형태로 바뀌는 시도는 이제 시작되는 중이다. 2023년작 ‘마블 스냅’은 게임성 면에서는 호평을 받았으나, 얼리 억세스로 시작한 ‘DC 듀얼 포스’는 2월 29일에 서비스를 종료할 예정이다. 한편 MMO 장르에서는 수퍼히어로가 흔하지 않다. 유의미한 게임은 ‘시티 오브 히어로즈’(COH)와 ‘DC 유니버스 온라인’(DCUO)이다. COH는 2004년에 시작, DCUO는 2011년에 서비스를 시작했다. MMORPG 장르가 클리셰와 시스템이 완성된 후 긴 정체기를 겪는 장르여서인지 신작이 없다시피하다. 그나마 2013년에 시작한 ‘마블 히어로즈’는 핵 앤 슬래시의 MMO였는데, 2017년에 서비스를 종료했다. 선구자인 COH 또한 2019년에 결국 서비스를 종료해 유저 서버만 남았으니, 현재 수퍼히어로 MMO 게임은 DCUO가 유일하다시피 한 상태다. COH와 DCUO의 특색은 커스터마이징에 있다. 이 두 게임은 기존 히어로/빌런 캐릭터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드는 방식인데, 그래서 캐릭터의 초능력 또한 스킬 트리 조합의 형태를 통해 자기만의 초능력 조합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을 택했다. 스킬 조합을 통해 자신만의 수퍼히어로를 커스터마이징한다는 컨셉은 게임 제목인 ‘시티 오브 히어로즈’와 잘 어울렸다. DC 유니버스 온라인은 COH와 같은 계열의 커스터마이징을 지원한다. 이는 새로운 수퍼히어로가 되어 기존 DC의 수퍼히어로 캐릭터를 멘토로 둔다는 스토리와 어울린다. 아쉽게 끝난 장르 도전도 있다. 클래식한 어드벤처 장르의 게임을 만들어 온 텔테일 게임즈는 DC에서는 배트맨을, 마블에서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사용해 2016년과 2017년에 게임을 발매했다. 수퍼히어로의 요건 중에서 서사 부분에 집중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게임들의 높은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텔테일 게임즈가 경영난으로 인해 폐업하게 되면서 일단락 되었다. 다음 지점을 향한 고민 수퍼히어로 장르에서는 역사에서 반복되어온 공식이 하나 있다. 이 산업에서 혁신이라 할 수 있는 시도는 DC 코믹스가 먼저 시도한다. 장르를 개창한 최초의 수퍼히어로인 수퍼맨이 DC의 캐릭터이며, 수퍼히어로 팀이라는 아이디어도 DC가 먼저 시작했으며, 장르의 두 번째 확장기인 실버 에이지(Silver Age)를 시작한 것도 DC가 플래시를 통해 멀티버스 서사를 들여오면서였다. 실버 에이지의 다음 시대를 연 것도 DC였으며, 영상화 시대의 방점도 배트맨 영화들이 수행했다. 반면 마블 코믹스는 시장의 혁신을 완성하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 실버 에이지를 대표하는 캐릭터가 아이언맨인 것과, 배트맨에서 생긴 영상화 조류의 변곡점을 스파이더맨과 아이언맨 영화가 이어받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시다. 반면 게임에서 수퍼히어로 게임의 주류가 액션 어드벤처 장르로 정립되는 과정은 예외로 보인다. 다수의 스파이더맨 게임이 시도한 3D 오픈월드 액션의 시도가, 비슷한 시도를 한 배트맨 게임보다 더 충실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시도를 종합하여 변곡점이 된 작품이 ‘배트맨: 아캄 어사일럼’이었고, 이 시스템을 계승해 발전시킨 작품이 ‘마블즈 스파이더맨’이라는 것은 역사의 공식대로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리고 초기의 유산을 이어온 격투 장르와, 주류가 된 액션 어드벤처 장르 외의 수퍼히어로 게임은 성과가 미미하거나 없거나 계보가 끊긴 상태다. 앞서서 영화와 게임에서 수퍼히어로 장르가 정체기라는 서술을 했지만, 기실 수퍼히어로라는 장르 전체가 현재 정체기다. 최초 원전인 만화에서는 풍부한 역사와 저렴한 표현 형식의 강점을 활용해 지속적으로 혁신을 꾀해 왔지만, 최근 10여 년 동안은 자기 복제 혹은 자기 변주의 레벨에 머무는 중이다. 그리고 만화에 비해 표현 형식을 구현함에 있어 자본이 더 필요한 영화와 게임의 경우에는, 이미 만화가 쌓아놓은 다양한 형식의 서사를 이식해 오거나 자신들만의 형식을 개척하기에는 굼뜬 편이다. 그리하여 현재 수퍼히어로 만화와 영화는 다음 단계의 성과가 어떤 것인지 제시하는 작품을 기다리는 중이다. 반면 수퍼히어로 게임은 현재 주류가 된 액션 어드벤처라는 장르적 한계를 깨야 하는 과제를 갖고 있다. 그런 돌파구를 보여줄 작품을 기다린다. 수퍼히어로 영화는 등장 요소의 문화적 다양성을 다음 지점으로 정했고, 그 지점으로 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시행착오를 쌓는 중이다. 수퍼히어로 게임의 화두는 무엇일까? 같을까, 다를까?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덕질인) 홍성갑 프리랜서 작가. 이 직업명은 ‘무직’의 동의어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딴지일보에서 기자를 시작하여 국정원 댓글 조작을 최초로 보도했다. 평생 게이머로서 살면서, 2001년에 처음 게임 비평을 썼고 현재 유실된 것을 매우 기뻐하고 있다.

  • 전쟁과 절차와 수사와 죽음과 : 탈군사주의와 전쟁 게임

    글의 시작부터 이야기 했듯, 비디오 게임과 군사주의는 오랜 시간 함께 해온 파트너와도 같다. 즉 게임에 전쟁의 그림자가 조금이라도 드리우는 순간, 무시무시한 존재감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마사 이즈 데드」가 전쟁을 직접 지시하지 않으려고 할수록, 전쟁의 역량은 그 안에 깊숙히 파고든다. 다른 이유가 없다. 「마사 이즈 데드」가 비디오 게임이기 때문이다. < Back 전쟁과 절차와 수사와 죽음과 : 탈군사주의와 전쟁 게임 25 GG Vol. 25. 8. 10. ! Widget Didn’t Load Check your internet and refresh this page. If that doesn’t work, contact us. Tags: 군사주의, 욕망, 반전운동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평론가) 이선인 만화와 게임, 영화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합니다. MMORPG를 제외한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클리어가 라이프 워크입니다. 스팀덱을 주로 사용합니다.

  • 텍사스 한복판에서 사회주의 게임의 깃발을 꽂다 - Tonight we Riot

    ‘투나잇 위 라이엇’은 너무도 투박하게. 그리고 솔직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단순하게 바라보자면 그저 이룰 수 없는 폭력과 메시지만을 담은 게임이 될 것이란 것은 분명한 단점이다. 하지만 적어도 몇 부분에서는 현실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려 노력하는 계기로는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극단적 자본주의를 배경으로 현실의 한계와 폐해를 담아낸 게임이 있듯이, 한편으로는 해방이라는 소재로 사회주의의 한계와 현실적 고민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게임이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 Back 텍사스 한복판에서 사회주의 게임의 깃발을 꽂다 - Tonight we Riot 06 GG Vol. 22. 6. 10.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지역. 미국 내에서 백인 비율이 가장 많은 지역. 마초이즘으로 대표되는 도시 텍사스. 텍사스는 맥시코와의 접경지역이라는 특성에 기반하여, 미국의 역사 속에서도 특수하고 주체적인 성향을 갖는 장소임은 틀림없다. 그리고 텍사스의 중심 오스틴. 이 곳에서 하나의 움직임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들이 있는 장소를 생각하면 떠올리기 어려운. 붉은 물결이 나부끼는 인디 타이틀 ‘투나잇 위 라이엇(Tonight We Riot)’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메인 화면부터 적기. 붉은 깃발이 나부끼는 투나잇 위 라이엇은 분명하게 위험한 게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자본주의의 문제가 극에 달한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지극히 사회주의적-동시에 아나키즘적인-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한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자칫하다가는 ‘혁명으로 세상을 뒤집어 엎자’는 동의하기 어려운 형태의 것으로 게임이 자리할 수 있어서다. 따라서 게임이 내포하고 있는 메시지의 옳고 그름을 떠나, 개발사가 게임을 만들게 된 계기와 전달 방식. 그리고 여러모로 문제작이 될 법한 이 게임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독특한 개발사의 위험한 메시지를 담은 ‘투나잇 위 라이엇’이 현재 사회상에서 가질 수 있는 존재감을 말이다. 텍사스 한복판에서 사회주의를 외치다 - PPU 512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왼쪽으로 매우 치우쳐진 게임을 만든 이들을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무릇 창작물에는 만든 사람들의 생각이 투영되기 마련이다. ‘투나잇 위 라이엇’처럼 소재가 매우 명확한 게임이라면, 이와 같은 경향은 더 크기 마련이다. 어떤 인물들이기에 좌측 방향 지시등을 넣고 악셀을 끝까지 밟는 시도를 하게 되었는가. 배경에는 어떠한 요소가 있는 지를 알아보는 것으로 게임이 만들어진 맥락을 짐작해볼 수 있다. 우선 흥미로운 점은 ‘투나잇 위 라이엇’이 미국 개발자들 손에서 탄생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개발사인 픽셀 근로자 조합 512(PIxel Pushers Union 512, 이하 PPU512)는 미국 공화당의 텃밭이라고 할 수 있는 텍사스주 오스틴에 위치하고 있다. 즉, 가장 보수적인 정치성향을 띄는 장소에서 매우 급진적인 메시지를 담은 게임을 만든 셈이 된다. 개발사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노동조합(Union)’이다. 사무실 근로자를 뜻하는 속어 Pencil Pusher에서 영감을 받아 픽셀 근로자(Pixel Pusher)로 회사의 이름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노동조합을 표방하는 만큼, 이 회사에는 마땅한 소유자가 없다. 회사는 구성원인 노동자들이 소유권을 가지고 있고 이익이 모든 구성원에게 수익과 책임이 균등하게 분배된다. 회사의 방향을 좌지우지하는 특정 인물은 없으며, 모든 결정은 구성원들의 목소리를 듣고 취합하여 결정한다. * 그러니까, 이런 친구들이다. ‘데드셀’로 성공 궤도에 오른 프랑스의 개발사 ‘모션트윈(Motion Twin)’과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는 대표도 소유자도 없는 독특한 회사의 형태를 가진다. 기존과 다른 형태의, 소위 ‘좌파적’이라 정의할 수 있는 이러한 개발자들의 지향점은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 Wobblies, 워블리)와 지향점이 겹쳐 있다. 이와 같은 구조에서는 노동자 스스로가 자신의 매니저를 선출하는 작업장 민주주의를 채택하여 운영하거나, 구성원들이 모두 동등한 권리를 가지게 된다. 워블리의 성향이 아나코-생디칼리즘(anarcho-syndicalism)에 가깝다는 것을 고려하면, PPU 512와 같은 인디 개발사들의 성향은 아나키스트적 상향까지 어느 정도 지니고 있다. 이들은 구성원들의 직접행동, 연대와 노동자의 자주경영 등을 원칙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정리해보면, 개발사의 성향 자체는 개인이 권력이나 통제로 억압되지 않고 공동체의 자치로 구성된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구성원들의 노동운동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PPU 512의 설립자이자 구성원 중 한 명인 테드 앤더슨(Ted Anderson)은 지난해 GDC2019에서 인디 개발사의 노동자 협동 모델을 주제로 강연을 진행하기도 했으며, 유럽의 게임 노동자 연합(Game Workers Unite)에 긍정적인 시선을 던지기도 했다. * 여러가지 측면에서 정체성이 매우 확고한 개발조직인 셈. 이렇듯 PPU 512는 그 정체성이 매우 분명한 회사이자 조직이다. 개인의 자유와 결정권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들에게는 구성원과 공동체의 자율이 중요하게 다뤄지며, 직접적인 노동 운동과 행동 등을 통해서 사회를 바꿔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PPU 512 구성원 전반의 가치관은 결과적으로 그들이 만들어내는 창작물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분명하게 급진적인. 그리고 핍박받는 노동자의 해방이라는 주제는 ‘투나잇 위 라이엇’에 고스란히 투영됐다. 아주 직접적이고 포장이 없는 날것 그대로의 메시지가 말이다. 투박하게 게임으로 담아낸 소재 ‘투나잇 위 라이엇’은 인간성이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담아낸다. 플레이어는 악덕 자본가가 지배한 디스토피아적 도시국가에서 한 명의 노동자이며, 붉은 깃발을 한 손에 들고 다른 노동자들을 규합하고 자본에서 ‘해방’되는 것이 목표다. 좌에서 우로 이동하며 등장하는 적들과 대치하고 노동자들을 제압하는 경찰과 자본 권력에서 해방을 노린다. 소재 자체는 그간 노동운동의 역사에 수도 없이 있었던 것들이지만, 표현은 직설적으로 이루어진다. 게임 플레이의 기본적인 틀은 ‘군중 제어 액션’ 또는 피크민과 같은 AI액션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 스테이지 끝까지 군중을 최대한 많이 살려서 도달해야 하고, 스테이지 진행 도중에는 다양한 형태의 적들이 등장해 플레이어를 방해한다.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군중 속의 일원만을 조작하게 된다. 투나잇 위 라이엇에는 플레이어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웅적 캐릭터 또는 플레이어가 스스로를 투영할 수 있는 주인공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군중과는 다른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도, 명령을 내리는 커서의 역할도 없다. 어디까지나 깃발을 든 사람은 노동자의 일원이며, 사망 시에는 다른 노동자가 깃발을 들고 해방을 이끌어 나간다. 이는 메시지와 게임 플레이 시스템에서의 조화라고 볼 수 있다. PPU 512가 기반을 두는 지향점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구성원인 노동자들의 자율과 선택이다. 그렇기에 게임은 영웅이 아닌 평범한 노동자, 군중의 하나로 플레이어를 설정한다.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집단을 만들고 직접행동으로 변화를 이끌어 나간다는 생각 그대로다. PPU 512가 개인의 주체적인 결정과 자유에 방점을 두는 것처럼, 게임 또한 개인이 집단으로 구성되고 목적을 달성하는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대를 지휘하여 무언가를 파괴한다는 점에서 형태가 유사한 인디 게임 ‘시 솔트(Sea Salt)’와 비교해보면 투나잇 위 라이엇의 플레이는 조금 다른 흐름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종하는 주체가 플레이어기는 하지만, 시 솔트처럼 부대를 하나의 묶음으로 보기 보다는 그 속에 개별적인 존재들이 있음을 강조한다. 투나잇 위 라이엇에서 충원되는 유닛들은 전투에 소비되는 소모적인 자원보다, 보존하고 함께 목적에 도달하는 존재에 가깝다. 세밀한 움직임을 조절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위험을 피하고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다. * 커서가 곧 플레이어라고 할 수 있는 인디 게임, '시 솔트' 흥미로운 것은 개발자 스스로가 "솔직하고 비현실적인 좌파적 게임(leftist game)"이라고 스스로를 정의하고 있음에도 파괴 행위에 대한 보상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스테이지의 목적은 자본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이지만, 그 과정에서 수반되는 폭력들에는 마땅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 경찰들의 피가 바닥에 얼룩져도, 살수차가 터져나가도 스테이지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게임 내에서 보상이 주어지는 것은 클리어 시, 살아남은 노동자들의 수에 따라서 결정될 뿐이다. 게임 플레이 측면에서 투나잇 위 라이엇은 평이하게 구성된 타이틀이라고 할 수 있다. 특징적이거나 놀라운 시스템, 플레이는 없지만, 적어도 게임을 하는 과정에서 딱히 모난 곳은 없다. 메시지가 분명한 게임임을 감안하고도 플레이 과정에서 과도한 불편함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극복할 수 있는 어려움과 준수한 플레이를 보여준다. 이는 투나잇 위 라이엇의 게임 플레이가 메시지에 매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PPU 512는 이 부분에서 나름의 선을 지켰다. 자신들의 역할은 비현실적인 어디까지나 좌파적 게임을 구성하는 것에 있고, 담아낸 메시지와 비현실적 배경에서 어떤 것을 읽어낼지는 플레이어의 역할로 넘긴 셈이다. 등장하는 적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들이 만든 게임에서 ‘담아낸 메시지가 옳다’고 강요하는 방향보다는, 그저 생각해보는 계기로 구성하고 게임으로서의 플레이에 집중한다. 그렇기에 플레이의 방식과 시스템에 집중할 수 있다. 더불어 개발자들의 의도와 메시지를 읽어내고자 한다면, 스스로 몇 가지 해석을 곁들여볼 수도 있을 것이다. * 시선에 따라서는 파괴를 주제로 한 게임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억압 그리고 분노에 대하여 투나잇 위 라이엇의 게임 플레이는 너무도 확연하게 억압-자본에 의한 것이든, 권력에 의한 것이든. 혹은 극단적 자본에 의한 것이든-에 맞서는 저항을 그리고 있다. 억압이라는 폭력에 맞서 싸우는 일련의 과정은 적기와 피. 그리고 파괴와 폭력의 형태로 완성됐다. 비슷한 소재를 다뤘던 ‘라이엇: 시빌 언레스트(Riot: Civil Unrest)’와 비교하면 차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2017년 얼리 액세스로 출시된 ‘라이엇: 시빌 언레스트’는 ‘투나잇 위 라이엇’과 마찬가지로 투쟁이라는 다루고 접근한 바 있다. 실제 벌어졌던 사건들을 게임의 배경으로 놓아두고 시위대와 공권력. 양 측을 플레이할 수 있도록 했다. 라이엇 : 시빌 언레스트의 지향점은 파괴가 아니다.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 서로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며, 양측의 관점이나 가치관을 살펴보고서 플레이어 스스로가 감정과 생각을 갈무리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직설적이기 보다는 논란을 배제한,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접근법을 택했다. * 양 쪽 모두를 플레이할 수 있던 '라이엇: 시빌 언레스트' 하지만 ‘투나잇 위 라이엇’은 다르다. 의도가 명백하게 정치적이고 게임이 보여주는 폭력은 강렬하다. 존재하는 모든 억압으로의 해방이 이루어져야만, 노동과 생각의 해방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주장에 근거한다. 이를 두고 ‘너무 급진적이어서 불편하다’는 감정이 고개를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게임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서 이와 같은 행동으로 이어지기는 불가능하고 동시에 대중의 지지도 받지 못할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게임에 구현한 저항의 형태가,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개발 구성원 또한 동시에 느끼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개발 구성원의 지향점에 맞게 게임 전반을 구축하기는 했지만, 이외의 주변 환경은 여전히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다양 복잡한 사회 시스템이 설계되어 있다. 그리고 이를 벗어나서는 현재의 생활이 유지되기 어렵다. 당장 이들이 게임을 출시한 플랫폼들도 현재의 사회적 시스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현대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자본주의에는 이미 많은 사회주의적 요소들이 가미되어 발전해 나가고 있는 상태다. 복지, 노동, 기본권 등 정책적으로든 사회 규범적으로든 사회주의의 요소들은 이미 현실 곳곳에 자리를 잡았다. 게다가 폭력을 통해서 근본적인 갈등과 문제점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지금까지의 역사를 통해 계속해서 증명된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PPU 512가 전달하고자 한 것은 적기와 피, 화염으로써 대표되는 노동 해방이 아니라, 분노에 대한 표현에 가깝다. 게임 플레이가 어느 정도의 목적성을 띄고 있기는 하지만 이를 가르치려 하지는 않는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담아내고자 한 메시지의 강렬함과는 별개로 중심은 게임으로서의 표현에 확실하게 무게를 두고 있으며, 사상을 선전하기 위한 매체로 작동하지는 않았다. 사회 복지나 안전망이 전무한 자본주의의 폐해가 극에 달한 세계를 배경으로, 현실에서 벌어지기 어려운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극단적인 상상으로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일종의 충격요법이다. 있을 수 없고 벌어질 수 없음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분노를 표출하고 이후의 해결 방법을 생각해보자는 역할에 가깝다. 속된 말로 "이렇게 다 뒤집어 엎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빡쳐있다. 그러니까 우리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 좀 해보자" 같은 느낌에 가깝다. * 이코노미스트가 분석했듯, 사회 불평등이 사회주의 열풍으로 이어진 점에서 표현의 방향이 같다고도 볼 수 있다. 스스로의 정치성향을 아나코-생디칼리즘이라고 언급했던 노암 촘스키(Avram Noam Chomsky)의 발언과 ‘투나잇 위 라이엇’을 양 쪽에 놓고 생각해보자. 정치 성향에서 촘스키와 방향을 같이하는 PPU 512의 의도는 약간은 더 명확해진다. 촘스키는 자본주의의 폐해와 관련하여, 신자유주의 이후 자본이 정치를 억압하고 조종하여 자본의 이익을 최대화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 아래에서 노동자와 시민은 억압되며, 이를 벗어나기 위해여 자본과 정치 권력에 저항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촘스키는 이 과정에서 해방의 방법론을 폭력이 아닌 대화와 소통으로 봤다. 언어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촘스키는 모든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있기에, 비판적 사고를 통한 교류와 도출되는 대안들로 억압에 맞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투나잇 위 라이엇’은 이러한 관점에서 소재가 될 수 있다. PPU 512 또한 이러한 점을 노린 것처럼 보인다. 테드 앤더슨은 인터뷰에서 “내게는 모든 것이 정치적이다. 모든 사람이 평소에 행하는 크고 작은 활동들 모두가 그러하며, 크고 작든 간에 초라하거나 부정적이지도 않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이 이와 같은 정치적 측면의 역사와 현실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 정치와 개인은 불가분한 관계이며, 그렇기에 이러한 게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메시지를 담은 게임들로 현실적인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란 방향성을 내비치기도 했다. * GDC 2019에서 강연을 진행한 PPU 512의 테드 앤더슨 즉, PPU 512는 게임을 통해서 나름의 화두를 던진 셈이다. 결론을 내거나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시작으로 생각하고 고민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목적이다. 2008년 금융위기를 시작으로 최근 몇 년간 미국의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회주의적 화두-민주적 사회주의를 말하는 버니 샌더스와 같은 인사를 포함한-를 보면, ‘투나잇 위 라이엇’은 비현실적인 상황을 통해서 현실적 불합리와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생각과 논의를 해보게 만드는 역할도 가능해 보인다. 투나잇 위 라이엇이 발매된 지 약 1년이 지난 2021년. PPU 512가 자리한 텍사스에 대한파 및 정전 사태가 발생하며, 이들의 시각은 한편으로는 명확하고 분명했던 우려와 같은 것처럼 느껴진다. 멕시코와 미국 사이에 자리했던 텍사스는 1845년 미국의 아래로 편입됐다. 보다 거대한 부를 낳는 방향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후 텍사스는 자본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거의 모든 것을 시장에 흐름에 맡긴다는 선택을 내렸다. 지극히 독자적인 이들의 성향과 선택은 이후 텍사스를 미국 공화당이 꾸준히 강세를 보이는 주이자, 보수적이고 국수주의에 가까운 색체를 띄는 것으로 연결됐고 점차 시장은 극한으로 자유화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시대적 흐름 속에서 텍사스 지역에 있는 사람들은 자본이라는 깃발 아래, 삶을 영위하고 하나의 부품과 같이 살아간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 지역적 성향은 각자의 삶이 불평등하고 극복할 수 없는 하나의 억압과 제한 속에 있는 것처럼 만들었고. 필연적으로 안온한 생활이 위협받는 상황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상황은 PPU 512가 적기를 나부끼게 만든 이유이자. 게임을 통해서 스스로의 열망을 표현하는 배경이 됐다. 실제로 게임의 완성 이후인 2021년 2월. 대한파 상황에서 자본이 일상의 평온함을 위협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을 보면, 자본가와의 상황을 뒤집는 ‘투나잇 위 라이엇’은 텍사스라는 장소이기에 가능했던 것이자. 텍사스에서 조합을 만들었던 반골들의 감정 표현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투나잇 위 라이엇’은 너무도 투박하게. 그리고 솔직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단순하게 바라보자면 그저 이룰 수 없는 폭력과 메시지만을 담은 게임이 될 것이란 것은 분명한 단점이다. 하지만 적어도 몇 부분에서는 현실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려 노력하는 계기로는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극단적 자본주의를 배경으로 현실의 한계와 폐해를 담아낸 게임이 있듯이, 한편으로는 해방이라는 소재로 사회주의의 한계와 현실적 고민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게임이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분노하라’의 저자 스테판 에셀이 "저항하는 것은 곧 창조하는 것이고 창조하는 것은 곧 저항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했던 것처럼, 현실에 분노하고 개인의 상상력에 기반한 다양한 창조와 저항이 현실을 조금씩 바꿔나갈 수 있지는 않을까. 독특한 회사 구조와 발칙한 상상력을 소재로, 텍사스 한복판에서 사회주의를 외치는 PPU 512의 결과물은 최근 미국이 보여주고 있는 상황들. 사회적 배경에서 생각해 본다면, 나름의 의미를 갖출 수도 있을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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