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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도망쳐 도착한 곳의 낙원: 가브리엘 제빈,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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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5. 4. 10.

‘자유도’보다는 ‘아름다운 구속’


당신에게 최초의 경험을 준 게임은 무엇인가? “와! 이런 게 다 있었어!” 외치던 첫 전율을 아직 간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물론 그런 건 단 한 번의 경험일 수는 없다. 아직 인생이 대부분 미답지로 남아 있던 유년기에는 이런 충격적인 사례들이 여러 차례 쌓였을 것이고, 그 이후의 새로운 경험이 주는 충격들은 기술 발달의 비약적인 속도와 반비례하며 실제로는 더 혁명적이었더라도 그 인상이 점차 사그라졌을 것이다. 모든 명작들이 그러하듯 인생의 첫 순간을 장식한 게임들 또한 아직 미성숙했던 기술과 시장이라는 맥락을 제하고는 말할 수 없다.


내 세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에게 첫 충격을 선사한 게임은 <페르시아 왕자>였다. 당대의 기술을 감안하면 경이로운 수준의 부드러운 모션, 투박한 픽셀로 표현되었음에도 잔혹함이 생생하게 느껴지던 사망효과들은 작품성과 별개로 이 게임을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 한 구석에 새기는데 큰 역할을 했다.


1인칭의 짜릿한 스릴을 맛보게 한 <울펜슈타인 3D>, 엉뚱해 보이는 곳을 때리면 숨겨진 요소를 발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 <고인돌2>를 거쳐 <너구리>, <행온>, <수왕기>, <황금도끼>, <알렉스 키드> 등등 시대도 플랫폼도 제각각인 수많은 게임들을 조금씩 맛본 내가 마침내 정착한 곳은 TGL의 <파랜드 택틱스>, 팔콤의 <영웅전설> 같은 JRPG와 가이낙스의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였다. 그전까지의 게임들은 친구나 사촌형 어깨 너머로 잠깐 해보고 그쳤지만, 이 일본 게임들에 이르러 처음으로 온전히 애정을 들이며 내 손으로 엔딩까지 도달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본격적으로 PC게임이 대중화되던 시기였던 만큼 수많은 명작들이 등장하던 가운데 유독 이들에 사로잡힌 이유는 그래픽과 음악, 서사가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즈음 심지어 <디아블로>나 <툼레이더>도 출시되었지만 아직 초기 단계였던 3D 그래픽의 미감은 내 눈길을 사로잡을 수 없었다. 어린 내 눈에는 서구권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도 상당한 감점 요소였을 것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이런 음울한 스타일에 매혹되었다면 아주 비범한 게이머였을 것이 분명하다.)


* 이  아찔한 미감의 차이. 오늘날의 미국과 일본의 게임을 생각하면 미감과 이를 가능케 하는 기술이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여기에 딱 맞는 분류는 아니지만 ‘루돌로지’와 ‘내러톨로지’의 관점으로 본다면 유년기의 나는 확고한 ‘내러톨로지스트’에 가까웠던 모양이다. 돌아보면 당시 나에게 게임이란 기존의 만화와 책이 제공하던, 잘 직조된 상상력과 감동에 더욱 강렬하게 몰입할 수 있는 도구에 가까웠다. 나에게 게임의 수행성이란 몰입을 증폭하는 이야기의 현현 이상의 의미는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일단 그 세계가 감각적으로 아름다운 것이 중요했고, 이렇다 할 연출도 없이 뾰족 가슴으로 투박한 텍스쳐 사이를 뛰어다니는 라라 크로프트의 다채로운 액션은 내 흥미를 끌지 못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내가 플레이하는 캐릭터의 존재는 극중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과의 감정적 교류를 소설이나 만화에 비해 더욱 깊숙한 곳까지 끌어내는데 그 목적이 있다. 나는 현실의 정체성을 잃지 않은 채 잘 만들어진 캐릭터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내 감정을 투사한다. (이는 지금까지도 AAA급 게임 중 오픈월드보다는 서사의 몰입도가 높은 리니어 게임을 더 선호하는 내 취향으로 이어진다. 극단적으로는 차라리 비주얼노블이라 부를 법한 ‘퀀틱드림’의 게임들이 꼭 그렇다.) 반면 ‘루돌로지’적 주인공은 다른 캐릭터와의 감정적 교류보다는 세계 자체와 능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수행성에 초점이 맞춰진 만큼 캐릭터 자체는 좀 더 비어있는 경우가 많다. 비어있어야 하는 만큼 미안하지만 디자인도 좀 덜 공들인 느낌이다. 플레이 자체의 재미를 중시하는 ‘루돌로지스트’들에게는 표면적인 감각의 아름다움에 천착했던 내 기준이 영 마뜩찮거나 종종 ‘가짜 게이머’의 혐의가 붙을 수도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게임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삼는 이들은 적지 않으며 중요한 본질의 하나다. 가브리엘 제빈의 소설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은 이런 점을 잘 포착하고 있다.


* 영문판(좌)과 한국어판(우)의 표지 디자인


셰익스피어와 호쿠사이, 레트로 게임의 만남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은 미국의 소설가 가브리엘 제빈이 2022년 출간한 소설로, 199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이르는 30년의 시간 동안 두 남녀 친구가 게임 개발자로서 성공해나가며 겪는 사랑과 도전에 대한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다. 매력적인 인물 묘사와 매끄러운 전개로 600쪽이 넘는 분량을 순식간에 소화시키는 페이지터너인 동시에, “아, 이게 소설의 매력이지”라는 감상이 절로 나오는 기본기가 탄탄한 서사예술이다.


사실 열정과 재능으로 충만한 청춘남녀의 사업적 성공담을 깔고, 그 위로 우정과 애정, 내면의 폐허가 교차하는 이야기 자체는 대단히 새롭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 모든 이야기가 비디오게임의 역사를 종단하는 자장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이 소설을 특별하게 만든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30년의 시간 동안 실제로 기념비적이었던 게임들이 세심한 애정을 담뿍 묻힌 채 하나하나 등장할 때마다, 한 시절이라도 게임에 빠져 본 독자라면 반가운 마음에 더욱 책을 놓지 못하게 된다. 소설에서 언급되는 게임들 중 내가 플레이해본 것들을 꼽아보면, 그 중에서도 <스트리트 파이터>나 <테트리스>, <수퍼 마리오> 시리즈처럼 게임과 무관한 대중에게도 익숙한 아이콘은 제외하더라도 <동키콩>, <개구리Frogger>, <덕 헌트>, <스페이스 인베이더>, <크로노 트리거>, <모탈 컴뱃>, <둠>, <울펜슈타인3D>, <메탈기어 솔리드>, <시간의 오카리나>, <킹스 퀘스트>처럼 반가운 이름들이 쉼 없이 등장한다.


한국에서도 읽어본 사람들의 호평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지만, 영미권에서는 출간된 2022년 아마존 ‘올해의 책’ 1위, 영국 선데이 타임즈 베스트셀러 1위, 뉴욕타임즈가 선정한 ‘21세기 100대 소설’에까지 선정되는 등 평단과 대중의 거대한 인기를 힘입어 파라마운트에서 판권을 구매해 영화화 작업도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게임 외에도 소설에 동원된 문화적 코드는 방만할 정도로 많다. 일단 제목은 <멕베스>에 등장하는 대사로,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게임의 의미에 대해 작중 인물이 직접 설명하는 대목에서 인용된다. 실제로 책을 보면 독특한 표지 디자인부터 눈에 들어온다. 영문판의 표지는 수많은 서구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 호쿠사이의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를 커다랗게 확대한 이미지 위에 레트로 게임 스타일의 화려한 폰트로 제목이 새겨져 있는 반면, 한국어판은 픽셀 느낌을 깔끔하게 살린 제목 위로 같은 호쿠사이 그림이 8비트 픽셀아트로 재해석되어 있다. 같은 작품을 주요 모티브로 살리되 각 문화권의 보편적인 미감을 따른 디자인으로 보인다. 한국어판의 디자인이 훨씬 마음에 드는 걸 보면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 것 같다. 애초에 서양 놈들 미감은 그 옛날부터 내 취향이 아니었다니까.


게임 제작을 다루는 소설인데 왜 호쿠사이의 파도가 표지에 강조될 만큼 중요하냐면, 두 주인공 샘과 세이디가 처음으로 함께 제작해 이들을 업계의 신성으로 만들어준 게임 <이치고>의 중요한 모티브이기 때문이다.


<이치고>는 하버드에 다니는 샘과 MIT의 세이디, 샘의 룸메이트 마크스가 대학생 신분으로 함께 개발하는 첫 게임으로, 어린 주인공 ‘이치고’가 도로시처럼 풍랑에 휩쓸려 세계를 떠돌다가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의 아마도 액션 어드벤처다. 당연히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게임이니 상상해보는 것 말고는 실제 모습을 확인할 길이 없지만, ‘세련되고 깔끔한 그래픽과 캐릭터 디자인, 감동적이고 가족 친화적인 스토리’라는 작중 홍보문구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댓게임컴퍼니’의 <저니>를 레퍼런스로 떠올리는 것 같다. 모험을 거치며 성장하는 아이의 서정적인 이야기라는 점에서 ‘플레이데드’의 <인사이드>나 <림보>와 겹치는 지점도 보인다. 1996년이라는 작중 시점과 게임의 묘사를 고려하면 한국어판 표지의 디자인처럼 수려한 도트 그래픽의 2D 게임일 가능성이 높다. 호쿠사이는 대학생 셋이 컴퓨터 두 대로 제작하는 현실에 대한 돌파구로서 차용되었다.


“세이디는 한정된 자원으로 비디오게임을 만들 때는 그 제약을 스타일로 풀어내는 것이 해답임을 알고 있었다. (중략) 1830년대에 호쿠사이의 그림이 복제 가능했던 것과 동일한 이유로(한정된 색상, 형태 언어의 기만적 간결성), 컴퓨터그래픽으로도 그 화풍을 재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저니>에서 모든 게이머가 황홀경에 빠지는 장면(좌), <인사이드>와 <림보>

소설은 <이치고>의 개발을 맡은 세이디가 오프닝의 폭풍우를 만족스럽게 묘사하려고 고군분투하는 과정에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2D 그래픽의 한계 안에서도 파도의 역동성과 물의 투명함을 구현해 게임에 첫발을 디디는 게이머를 압도하며 시작하는 것이 이들에게 너무나 중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구현된 아름다운 그래픽은 대사가 많지 않은 것 같은 게임 <이치고>에서 주인공의 내면과 성장을 드러내는 미학적인 언어가 된다.


실제로 나를 비롯한 많은 게이머들이 게임 속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면 잠시 컨트롤러를 내려놓고 그 세계를 즐기거나 사진 모드를 켠다. 게다가 많은 경우 이러한 ‘전망대’ 포인트에서는 아예 제작진이 누리기를 종용하듯 카메라를 풍경 쪽으로 슬쩍 밀어주기도 한다. 퀘스트와 레벨업, 수집과 엔딩이라는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게임의 세계 속에서도 아름다움은 우리를 쉬게 만든다. 그리고 잠시 잠깐 찾아오는 이런 무의미의 시간들이 오히려 게임 속에 현실의 질감을 입힌다. 우리의 현실은 대부분 명료한 퀘스트보다는 무의미하고 무료한 시간들로 가득 차 있으니까. 아름다움은 여전히 내가 게임 속 세상을 찾는 중요한 이유다. 그리고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은 게임의 감각적 아름다움 그 자체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 사실을 반갑게 되새기게 해준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소설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유태계와 한국계 혼혈 미국인이면서 편모를 사고로 잃고 다리에 장애를 얻은 채 한인 조부모 손에 자란 샘과, 똑똑하고 부유하지만 어릴 적부터 백혈병을 앓던 언니 때문에 가족들로부터 소외를 느끼던 세이디가, 어린 시절 각자의 방식으로 게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묘사는 이 소설을 읽는 누구에게나 게임이 선사하는 자유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불완전한 신체의 확장으로 얻는 자유이기도 하고, 목적과 방향이 분명하게 주어지며 모든 성취와 과오가 점수로 계량화 되어 제시될 때 안도하는 역설적인 자유이기도 하다.


게임이 허락한 법칙 안에서라면 어떤 행동이든 다 시도해 봐도 인생이 잘못되지 않고, 설령 잘못되어도 세이브와 로드가 있는 게임 안에서 우리가 느끼는 자유 혹은 전능감은 최근 ‘회빙환’으로 대표되는 장르문학의 확장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게임적 쾌감이다. 최종 보스를 물리친 레벨 그대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다회차 플레이의 전능감. 다분히 게임적 발상을 두른 이런 이야기에 사람들이 보내는 열망은 역설적으로 삶에서 느끼는 부자유와 무력감의 반증일 것이다.


여기까지가 이 소설이 독자로 하여금 게임과 삶에 대해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도록 눈에 띄는 자리에 마련해놓은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샘과 세이디가 게이머로서의 자유를 만끽하는 것은 소설의 초반까지이고, <이치고>의 성공 이후로 두 사람은 창작자이자 사업가로서의 무게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이들에게 더 이상 게임은 자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특별히 세이디에게 더욱 그랬다. 샘은 어릴 적부터 그를 둘러싼 여러 정체성의 이유로 사회적 시선과 기대에 부응하는 일에 일찌감치 관심이 없었다. 이러한 태도는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자유로움으로 진화했고, 원래 갖고 있던 반짝이는 재능과 결합하며 샘은 주목받는 스타기획자로 질주하기 시작한다.


반면 <이치고>를 구현하는데 더 큰 역할을 한 세이디는, 늘 주변을 살피는 기질과 게임 산업 내의 여성이라는 위계가 결합해 성공의 과실을 샘만큼 누리지 못한다. 게다가 세이디는 게임이 예술이길 바랐다. 사람들을 충분히 즐겁게 해주면 족할 수 있었던 샘과 달리 세이디는 게임이 메시지를 체험시키는 순간이 찬란하게 빛나길 바랐다. 메시지와 독창성에 대한 열의가 넘치는 대중 예술은 높은 확률로 시장에서 외면받기 마련이다. 그것이 게임 시장이라면 더더욱. 세이디는 이야기 내내 그 간극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나는 독자이면서 게이머임과 동시에 한 사람의 창작자로서, 게다가 업계 기준으로는 내 작업물에 메시지와 독창성을 담아내고픈 열망이 비교적 큰 창작자로서, 하지만 그 열망의 크기에 비해 늘 상업적으로는 부족한 성적표를 받아드는 창작자로서 무엇보다 세이디의 괴로움에, <이치고> 속 폭풍우의 아름다움을 구현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 쏟아버린 바로 그 세이디의 막막함에 유독 몰입하며 소설을 읽었다. 한때 나에게 한없는 자유를 선사한 예술, 그 자유의 몸짓에 이끌려 뛰어든 업계에서 결과적으로는 매번 야망에 못 미치는 결과물을 내 손으로 만들어내고 마는 이 짓궂은 농담 같은 광경을 책 속에서 고스란히 발견했기 때문에. 더 우스운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렇게 이리저리 털린 영혼을 터덜터덜 추슬러 돌아가 안식을 얻는 곳이 결국 다시 그 예술의 요람 안이라는 사실이다. 세이디에게는 결국 게임이, 나에게는 결국 수많은 콘텐츠들이. 그렇게 지긋지긋한 한계에 진절머리 쳤으면서 다시 아름다운 풍경을 향해 스리슬쩍 밀어 올려주는 카메라에 저항 없이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결핍과 고통, 도피와 안식 사이에서


소설에서 표지의 호쿠사이 이상으로 중요하게 등장하는 작품은 고전 게임 <오리건 트레일>이다. 한국에서는 고전 게임에 꽤 빠삭한 이들에게도 인지도가 별로 없지만 미국에서는 교육용 소프트웨어로 쓰인 덕에 한 세대를 관통한 하나의 현상에 가까운 작품이다. 나 역시 그 문화를 공유하지 못하니 추측만 할 뿐이지만, 한국에서 하나의 게임이 이렇게 신드롬에 가까운 위상을 가졌던 사례를 상상해보자면 <스타크래프트>, 혹은 ‘한메타자연습’의 <베네치아> 정도 말고는 떠오르지 않는다.


미국에서도 쌍방향 상호작용이 전무하던 1970년대 교실에서는 이 원시적인 게임도 별천지로 받아들여졌던 모양이다. 일방적으로 주입받던 지식을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해준 <오리건 트레일>은 이 기술이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시기에 들어선 뒤로도 교실에서는 꽤 오랫동안 사랑받았던 것 같다. 맥락을 다 떼어놓고 교실의 아이들이 시대에 뒤떨어진 게임에 빠져있는 풍경만 떠올린다면 내 눈에는 컴퓨터실의 ‘피카츄 배구’가 아른거린다. 그땐 이미 <스타크래프트>와 <파이널판타지8>이 나온 시점이었지만 여전히 학교의 낙후된 컴퓨터에는 1MB가 채 안 되는 ‘피카츄 배구’가 선생님의 눈을 피해 깔려있었다. 학교를 나서면 호화로운 게임이 널려있던 시대에 집에서는 일부러 하라고 해도 마다할 게임을 교실에서는 다들 그렇게 삼매경일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군부대의 인트라넷을 통해서도 즐겼다는 소문도 들었다. 교실과 군대는 결핍의 공간이었으니까. 부족하고 괴로운 곳에서는 아주 조악한 게임도 무한한 자유를 경험케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게임에 가장 깊이 빠져들 때는 마음이 가장 황폐할 때다. 좋아하는 소설을 읽는 일도, 영화를 보는 일도 실은 마음의 체력을 많이 필요로 한다. 소설과 영화는 나에게 종이와 화면 너머로 즉각적인 행동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온전히 완성된 채 나의 자발적인 참여를 기다릴 뿐이다. 마음에 조금의 여유도 남아있지 않을 때는 그 참여조차 버겁게 느껴질 때가 많다. 하지만 게임은 아주 직접적으로, 신속하게 나의 행동을 요구한다. 그 요구에 매번 바삐 응하는 동안에는 황폐한 마음을 돌아볼 새가 없다. 그렇게 아예 정신을 내던지고 게임의 뒤통수를 한참 따라다니며 괴로운 시간을 통과해 나간다. 현실이 고통스러울수록 게임 속 아름다움이 더 빛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도피라고 표현해도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위대한 예술들은 자주 삶의 고통에서 내몰린 도피의 흔적들이기도 하다. 때로는 게임이 시시하게 느껴질 만큼 삶이 무한히 풍요롭거나 내가 단단하기를 바라기도 하지만, 그런 조건이라면 아마 나는 일생 게임과 작별할 일은 없을 것 같다.


글의 시작에서 나는 첫 게임의 추억에 대해 질문했다. 뒤이어 이어진 나의 게임 리스트와,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이 인용한 수많은 고전 게임들의 이름은 게이머라면 누구에게나 한 시절에 대한 진한 향수를 일으킨다. 더 이상 돌아갈 장소로서의 고향이 존재하지 않는 현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는 이제 떠나보낸 시간을 의미한다. 우리가 게임과 함께 보낸 최초의 시간들이 더욱 아련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른의 삶이 늘 뜻대로 되지 않는 덜컹거림의 연속이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게임을 업으로 삼은 이에게도. 그때 게임이 경이로웠던 것은 삶의 고통과는 무관한 신비 그 자체였기에 노스탤지어는 더욱 짙은 그리움을 부른다. 그럼 지금의 당신에게 게임은 어떤 경험인가. 지금 다시 플레이하면 분명 지루하게 느낄 그 시절의 게임들과 비교하면 오늘의 게임은 어떤 의미인가. 여전히 신비로운가, 혹은 신비를 잃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내게는 이 소설이 그렇게 묻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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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소설, 게임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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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제작자)

지상파 PD로 시작해 다양한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다.
주로 콘솔게임을 즐기며, 멀티플레이를 싫어하는 내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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