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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TT : 현대의 전면전을 디지털 세계에 격리하기
결국 RTT/워게임이 만들어지고 플레이되는 이유와 목적을 이해하는게 우선이다. 최초 프로이센 왕국에서 이루어진 워게임이 그러했듯, 결국 이 게임들은 전술의 개념적 검증이라는 목적에 충실하고자 하며 그래서 그 최초의 워게임의 특징을 답습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 Back RTT : 현대의 전면전을 디지털 세계에 격리하기 25 GG Vol. 25. 8. 10. 게임의 역사는 곧 승부의 역사이고, 그만큼 게임은 오랫동안 승부를 위한 각종 적대적 상호작용의 장으로서 발전해왔다. 굳이 적대적 상호작용이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을 쓴 이유는, 그 유명한 ‘핑퐁’ 의 공 쳐내기도 포함되고, ‘스타크래프트’ 에서 상대 기지에 핵폭탄을 쏘아버리는 것도 포함될 정도로 게임의 승부는 너무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런 카테고리 하에서 전면전 그 자체를 다루는 전략/전술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적대적 상호작용의 총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인류가 발휘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폭력인 전쟁 그 자체를 다룬다는 건 그 자체로 흥미롭고, 이게 유희로서 향유될 수 있다는 사실도 어쩌면 흥미롭다. 그리고 그 전쟁을 다루는 게임들은 그 속에서도 서로 다른 방식을 취해왔다. 최초의 전쟁 게임이라고 할 수 있는 군부의 워게임은 말 그대로 전쟁의 예행연습이었고, 그러한 방식을 거의 그대로 디지털로 옮긴 게임들도 속속 탄생했다. 워게임, 또는 RTT(Real Time Tactics)는 그중에서도 현실의 전쟁을 가장 그럴듯하게 묘사하는 게임이다. 남들이 보기엔 다 그게 그거 같은 전략/전술 시뮬레이션 중에서 RTT, 또는 워게임이 유독 무엇이 다른지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기본적으로 일종의 장르론이기 때문에 어느정도는 불완전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대체로 그렇다’ 라는 전제로 시작한다. 고증에서 나오는 비대칭 무기의 대결 RTT와 다른 전략, 전술 게임과의 차이는 디테일하게 파고든다면 수없이 많지만, 그 차이가 겉으로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굳이 풀어서 설명하자면 RTT 와 RTS를 비롯한 다른 전략/전술 장르와의 차이는 그 지향점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RTT 는 현대전을 비롯한 각 시대별 전장을 실제와 유사하게 묘사하는, 시뮬레이션으로서의 목적성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워게임이라는 형태의 시초 자체가 실제 군부의 모의전에서 출발했으니 당연하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강한 밀리터리 테마, 디테일한 시뮬레이션을 위해 한정된 전장/부대 단위 지휘, 하지만 전쟁을 스케일 다운하기 위한 비교적 빠듯한 게임적 허용을 통한 전력 간의 극적인 비대칭성 등이 드러나게 된다. 전력 간의 비대칭성은 현실의 무기체계에서 비롯된 특징이다. 보병용 개인화기로 탱크는 물론 전투기까지 때려잡는 ‘스타크래프트’ 시리즈의 해병 같은 사례와는 달리, 현실의 무기체계는 저마다 명확한 목적성을 가지고 그에 부합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현실의 보병화기는 당연히 장갑차량만 등장해도 무력화되기 마련이고, 장갑차량이나 전차에게는 사신과도 같은 대전차 미사일의 경우에도 몇몇 예외사례를 제외하면 당연하게 헬리콥터 같은 공중 표적은 공격시도도 할 수 없고, 대보병용으로 전용할 수 있다해도 비용 면에서 문제가 발생하거나 그러한 용도로 전용하는걸 아예 지원하지 않는 병기들도 있다. 다른 게임 플레이어들이 본다면 비대칭성을 넘어 제대로 디자인된 유닛이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극단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병기 개발에서의 기술적 한계와 비용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여느 게임처럼 만능병기가 실존하지 않는다. 모든 병기는 해당 병기를 운용할 군사집단의 요구사항을 반영한 ROC에 맞춰 설계되고, 생산되며 이 ROC 란 성능과 비용, 기술적 한계 사이에서 교묘히 줄타기를 한 결과이니. 그래서 현실의 병기들은 같은 미사일이라는 분류 하에서도 어디서 발사하는지,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지, 비행/유도 방식이 무엇인지에 따라 무수히 많은 하위분류로 다시 나뉘며, 각각의 병기는 제각각에 맞는 용도로 적절히 사용될 것을 요구한다. 쉽게 말해 닭잡는 칼은 닭만 잡을 수 있고, 소잡는 칼로도 닭은 잡을 수 없거나 잡을 수 있어도 그 효율이 심히 떨어지게 된다는 것. RTT 는 현실의 전장을 구현하는 것이 공통된 목적이므로, 지극히 제한적인 게임적 허용을 통해 이러한 실제 전장의 기본 구조를 답습한다. 그렇기 때문에 RTT에서 요구하는 숙련이란 이러한 상성 구조를 이해하고 적절한 병기를 배치, 그리고 활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몇가지 특징이 더 파생된다. RTT에서의 정찰은 단순히 적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적의 포진과 병기 배치를 파악하여 어떤 무기에 취약한지를 반드시 알아내야 하며, 내가 가진 전력 중에서 상대가 대처하기 어려운 수단을 찾아내 공격하거나 방어해야 한다. 이 정찰을 통해 미리 내 자산을 준비해두어야 한다. 이러한 병기들이 전장에서 갑자기 솟아나는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병기에는 상성이 있다. 단지 RTT 에서는 그 상성이 매우, 굉장히 극단적일 뿐이다 많은 RTS 경우 다소 상성이 맞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유닛이 어느정도 다용도성을 보장하기에 수적 우위나 회전력을 무기로 승부를 걸 수 있다. 하지만 RTT에서는 경보병이 수십 분대가 있어도 전차 한대를 상대할 수는 없고, 마찬가지로 전차를 소대 단위로 모아놓아도 한대의 공격헬기를 당해낼 수는 없다. 때문에 이러한 상성 싸움은 정찰전, 심리전, 그리고 나아가 게임에 들어가기 전 적절한 부대편성까지 모든 부분에 관여한다. 그래서 RTT는 끝없는 가위바위보 물리기의 굴레에 빠지기 쉽다. 내가 상대의 모든 병력에 맞춰 보병, 대전차 화력, 대공, 공격헬기 같은 수단을 모두 마련해놨다 하더라도 병력 배치에 따라서 취약지점은 생길 수 있고, 상대가 그 지점을 적절한 수단으로 파고들면 조합은 깨지게 된다. 만약 그렇게 잃은게 대공병기라면 상대의 전폭기나 공격헬기가 파고들 것이고, 그럼 전차를 잃고, 그럼 보병이나 적 전차가 들이닥치고… 이러한 연쇄적인 전장붕괴가 실현된다. 예시로 들만한 게임은 RTT 에서 가장 최근작들이라 할 수 있는 ‘WARNO’ 나 ‘브로큰 애로우’ 같은 게임들이다. 이들 게임은 일정한 크기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전면전을 그리고 있으며 지상전을 기반으로 몇가지를 추가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본격적으로 각각의 병기가 세분화되고 기술 발전에 따라 전차, 군용기 등이 등장하기 시작했던 2차 세계대전까지가 사실상 RTT/워게임의 한계선이 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 크다. 벌어지지 않은/을 전쟁을 상상하기 현대전을 다룬 RTT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자 게임의 성격을 결정하는 부분은 의외로 시나리오다. 톰 클랜시 스타일의 테크노 스릴러까지는 아니지만, ‘그럴싸한 가상 전쟁 시나리오’ 는 언제나 밀리터리 매니아들의 가장 뜨거운 화두이며 이 가상 전쟁 시나리오가 게임에 등장하는 세력과 병종, 그리고 대결의 구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은 이미 결과까지 모든 역사가 결정되어 있는 제 1, 2차 세계대전 같은 과거의 전쟁을 다루는 게임들 보다도 현대전을 기반으로 하는 게임들이 더욱 두드러진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그에 준하는 전면전 또는 총력전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그에 준하는 위기 상황은 냉전이라는 상황 하에 언제나 존재했기에 이 소재를 활용하여 각 시대별 전장의 상황을 가상으로 그려나가는 식이다. 소련이 미국 본토를 침공한다는 시나리오는 실현 가능성은 없지만, 그만큼 흥미는 배가 된다 현대전 기반의 RTT를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소개한 작품인 ‘월드 인 컨플릭트’ 는 1990년 즈음 냉전 붕괴 직전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WARNO’ 역시 냉전 말기를 다룬다. 두 게임의 시기는 비슷하지만 그 세부적인 시나리오와 게임의 진행 양상은 조금씩 달라진다. ‘월드 인 컨플릭트’ 는 냉전말 경제붕괴에 다다른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최후의 발악으로 미국 본토를 포함한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1세계를 직접 침공하는 다소 허구성이 강한 시나리오다. 반면 ‘WARNO’ 는 그 제목처럼 실제 유럽 전장에서 NATO 와 WP 의 전면 충돌을 실제 당시의 작전계획을 반영하여 프랑크푸르트 근방의 풀다 갭 공세 같은 시나리오로 그려낸다. 여기에 가장 최근작인 ‘브로큰 애로우’ 는 보다 시대를 뒤로 이동하여, 냉전은 끝났지만 최근 불거지는 신냉전이라는 긴장관계를 활용하여 러시아 연방과 미군의 21세기 충돌을 그린다. 이러한 특징으로 각각의 게임들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차이는 우선 투입되는 병기의 차이이다. 냉전 말기를 다룬 두 게임은 실제 당시 배치되어 있던 세력과 장비들을 묘사하여 PIVAD 같은 현대에는 도태된 장비가 등장하고는 한다. 시대상 공통적으로 대공 병기의 위력이 부족한 편이며, 당시 NATO 나 WP 의 교리에 따라 특정 분야에 특화되거나 약한 모습을 보인다. ‘브로큰 애로우’ 는 보다 미래의, 현시점에 가까운 근미래로 상정할 수 있으므로 대부분의 주력전차들이 능동방어시스템을 채용할 수 있으며 다수의 스텔스기 전력도 등장한다. 여기에 상상력을 좀더 발휘하여 그 실체가 불분명한 사일런트 호크, 러시아 연방의 신규 제식 전차이기는 하나 실제로 양산과 투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T-14 아르마타 전차까지 등장한다. 냉전 시대에만 존재했던 폐기된 전쟁 시나리오를 디지털 게임으로 구현해보기 이렇게 등장하는 병종, 장비가 다르다면 자연스럽게 각 게임이 묘사하는 전장의 모습도 달라진다. ‘WARNO’ 에서의 주력전차들은 대전차미사일에 매우 취약하지만, 능동방어시스템이 달린 ‘브로큰 애로우’ 의 주력전차들은 보병을 상대로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게 된다. 또한 ‘월드 인 컨플릭트’ 는 그 설정을 살려 모든 장비가 공수 형태로 투입된다.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의 경우에도 실제로 존재하는 지역을 분쟁 시나리오에 맞춰 등장시키기 때문에 제각각의 특징을 보인다. 2차 세계대전을 다루는 ‘스틸 디비전’ 시리즈는 2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투를 죄다 다루고 있고, ‘워게임’ 시리즈 중 ‘워게임: 레드 드래곤’ 은 동북아시아와 한반도가 등장하여 매우 익숙한 지형이 펼쳐진다. 이러한 기본 시나리오를 통해 플레이 기반이 만들어지고, 게임의 전체 골격이 시대에 맞춰 설계된다. 각 게임은 몇가지 공유하는 플레이 측면의 공통점이 있지만(조작 방식, 연막 같은 기본 기능들의 역할) 그 공유하는 부분들 만큼 시대적 차이, 또 시대별 전장에 대한 해석 차이로 차별점을 가진다. 이는 워게임의 기본에 맞닿아 있다. 모든 워게임은 정해진 시나리오 하에서 출발하며, 그 시나리오는 바로 작전계획이다. 즉 기본적으로 민간의 유희로서 진행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군대에서 펼치는 워게임과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고, 여기서 오히려 정확한 정보를 알지 못하거나 일부러 누락시킬 수 있는 유희적 창작을 통해서 더 흥미로운 창작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극대화 된다. 이런 시나리오 플레이에서 보이는 한가지 더 재미있는 현상은 플레이어들이 일종의 플레이 외적인 면에서 몰입을 하는 경우를 더 많이 보게 된다는 점이다. 90년대 초반 냉전의 시나리오는 매우 유명하고, 모든 밀리터리 매니아라면 알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들이 모두 달려들어 시나리오의 타당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여기에서 실제로 한 번도 실전에서 붙어보지 않은 병기들 간에 전면전이 펼쳐진다는 건 제인 연감 뜯어보며 병기 스펙 구경하는 밀덕들에게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일이다. 비록 그 결과가 반인륜적이지만, 이는 살상병기를 떠나서 어떤 기계가 제대로 작동하는 모습을 보며 뿌듯해하는 감상과 맞닿아 있다. 오히려 가공의 전쟁, 어차피 1시간 뒤면 휘발되어 사라질 혈흔과 포연이기에 철저히 감정을 배제하고 마치 카탈로그를 보고 물건의 성능을 가늠하고 실험을 거치는 것 같은 활동이 이루어지는 셈이다. 기호 뒤에 가려진 저해상도의 폭력성 전쟁을 다루는 게임은 언제나 전쟁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지적을 감수할 수 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RTT는 가장 전쟁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전장에서의 개인의 말살을 그 자체로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정작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두가지 특징 때문에 RTT/워게임이야 말로 전장의 잔혹성, 비인간성으로부터 일종의 방관자적 스탠스를 취한다. 하나는 전장과 플레이어 시점 사이의 극단적으로 먼 물리적 거리, 그리고 두번째는 철저히 개별 유닛을 하나의 인격체나 생명, 어떠한 개인이 아닌 병기로서만 취급하고 집중하는 특징이다. 이러한 이유로 RTT 특유의 사실적이면서도 극히 간접적인 전장의 체험이 이루어진다. 전장과 플레이어의 물리적 거리감을 활용해 살육의 잔혹함과 유희로서의 게임 사이 간극을 활용하는 사례는 여럿 있어왔다. ‘콜 오브 듀티’ 의 그 유명한 건쉽 미션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RTT/워게임은 다른 전략 게임들과 마찬가지로 그 거리가 플레이어로부터 상당히 멀지만, 지휘하는 부대의 규모나 전장의 스케일이 더욱 크다보니 게임 플레이 내내 유닛의 실제 모습을 보는 경우는 아예없고 유닛 기호만 가지고 컨트롤을 할 정도로 그 거리감이 더 극적으로 벌어져 있다. 이는 실제 유닛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기호를 가지고 추상화한다는 느낌을 더 강화한다. 이렇게 온통 기호로 가득 들어찬 화면에서 유닛 하나에 몰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앞서 설명한 유닛들이 가진 강력한 비대칭성과 확실한 목적성에서 비롯되어 각각의 유닛은 그들의 장비로 대표되게 된다. 같은 보병 분대라 하더라도 어느 한 분대를 골라 투입하고 활용하는 이유는 그 보병이 가진 장비들(대전차미사일, SAM, 기관총 등) 때문이지 그 보병의 개인성, 인격 따위가 아니기에 벌어지는 일이다. 실제로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도 이들 보병은 그저 장비의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즉, 이런 게임에서 보병을 볼 때는 그가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느냐 따위는 중요하지 않고 그냥 자벨린 대전차미사일, FIM-92 스팅어 라는 병기 자체로 인식하곤 한다. 보병 분대가 이럴진대, 전차나 헬리콥터 같은 탑승 병기는 더더욱 그렇다. 실제의 전쟁처럼 철저히 개인성은 말살되고 그저 전쟁의 톱니바퀴로서의 유닛을 보게되는 셈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유닛들은 끝없이 투입되고 활용되고 소모된다. 오히려 하나의 생명보다는 그저 전투를 진행하기 위한 자원으로서 병력의 소모를 줄이고 보존하는 방법을 궁리하게 된다는 점에서는, 어쩌면 전장의 원리란 결국 이런 것일까 싶기도 하다. 낮은 폭력의 해상도 덕분에, 대량살상을 성공하면 그것이 성과가 된다 즉, RTT 는 달리 말하면 ‘폭력의 해상도’ 가 상당히 낮은 편이다. 결국은 RTT 는 현실의 모사이자 시뮬레이션이라는 대전제를 깔고 가는데다 등장하는 폭력의 규모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더더욱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고, 차원의 벽을 뚫고 몰입과 공감을 하기보다는 그 차원의 벽을 지속적으로 인식하면서 거리감을 유지하게 된다. 실질적 구현이 아닌 개념적 구현에서 나오는 게임적 허용 하지만 RTT 역시 게임적 허용을 벗어날 수는 없다.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오류 또는 게임적 허용은 각종 무기의 사거리나 속도 같은 전장의 스케일이다. ‘WARNO’ 에서의 맵 크기는 3VS3 맵이 고작 9 km² 로 각 변이 3km 인 정사각형이며, 가장 큰 맵도 24X3km 로 현실의 전장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크기를 가지고 있다. 또한 게임 내에서 표시되는 거리 단위도 실제 축적에 비해 훨씬 축소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대전차 미사일들은 수킬로미터대의 사정거리를 지니고 있고, 지대공, 중거리공대공 같은 수단은 더욱 길다. 이는 여러모로 극히 비현실적인 상황과 밸런스를 만들어낸다. 단적인 예시는 후방과 전방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생기는 후방에의 위협, 포병과 공군 같은 화력지원 병기의 제한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은 사실상 게임플레이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빠질 수 없는 필연에 가깝다. 게임의 규모를 리얼 스케일로 그린다면, 전력이 출발해 전장에 도착하고 배치가 완료되는 데에만 수시간이 소모된다. 무엇보다도 거리가 늘어나고, 시간이 늘어나고, 결과적으로 기동이 제한되는 만큼 포병/전차/보병/항공/헬기 등의 유기적인 협동을 한명의 플레이어 입장에서 만들어내는 건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부분이 게임의 밸런스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큰 부분이기에 언제나 왈가왈부가 많은 부분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실제 지대공 미사일이 적기를 포착하고 미사일을 발사할 때까지는 최소한 수십초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전장이 잔뜩 좁아진 게임 내에서 그렇게 작동한다면 이미 전폭기가 맵 전체를 세바퀴쯤 돌고 폭탄을 모조리 투하한 뒤 코브라 기동 한 번 보여주고 집에 갔을 것이다. 반대로 항공기를 극사실적으로 묘사한다면 대부분의 제트 군용기는 전장에 체공할 수 있는 시간은 극히 짧으므로 원하는 때에 화력 투사를 하고 싶어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례가 발생한다. 결국, ‘현대전’ 이라는 개념을 게임 또는 시뮬레이션으로 실증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스케일 다운과 전반적인 간소화가 필수적이다. 적외선 시커가 작동하고 플레어를 뿌려 회피하는 기동을 실제로 구현하는게 아니라 그저 확률 계산으로 간소화 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이고, 몇몇 게임에서 차량의 연료는 시뮬레이션 대상에서 제외하는 이유도 그렇다. 디지털 세계에 전쟁을 격리하다 이러한 일련의 특징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RTT/워게임이 만들어지고 플레이되는 이유와 목적을 이해하는게 우선이다. 최초 프로이센 왕국에서 이루어진 워게임이 그러했듯, 결국 이 게임들은 전술의 개념적 검증이라는 목적에 충실하고자 하며 그래서 그 최초의 워게임의 특징을 답습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시나리오 중심, 적절한 스케일 다운과 간소화, 실제 전력을 반영한 유닛들. 그리고 그 뒤에 가려진 폭력성까지. 최초의 워게임은 근대 이전까지 일종의 도식화된 귀족들의 결투였던 전쟁을 고도화된 현대전으로 끌어올리는 도구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폭력의 직접적인 묘사가 배제되면서 철저히 효율성을 끌어올리기 위한 시뮬레이션으로서의 역할이 부각되었고, 그 기조가 이어진 것이 현재의 RTT다. 최초의 워게임에서 시작된 전술의 현대화, 병기의 발전은 마침내 그 억제력을 통해 현실에서 전면전을 근절시키는데 성공했다. 물론 최근에 들어서는 다시 전쟁이 우리의 삶을 침범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세상이 20세기 초로 돌아가지는 않을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에서 각각의 병기와 전술이 디지털 시뮬레이션에서나 그 탄생의 목적을 이루고 있는건 오히려 다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Tags: RTT, 현대전, 전술, 시뮬레이션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이명규 게임 기자(2014~), 글쓴이(2006~), 게이머(1996~)
- 게이머로서의 경험이 미술의 근간이 될 때, 〈게임사회〉 리뷰
현대미술을 볼 때마다, 스스로가 현대 미술을 향유하는 이들과 관심이 거의 없는 일반 관객들 사이의 회색분자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딱히 현대미술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도, 어렸을 때부터 향유해온 것도 아니지만 뒤늦게 재미를 붙였고,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그래서 꿈보다 제법 마음에 드는 해몽이 나오면 그걸 감상으로 삼아 마음에 두기. 그게 나름의 현대 미술을 즐기는 방식이었다. < Back 게이머로서의 경험이 미술의 근간이 될 때, 〈게임사회〉 리뷰 12 GG Vol. 23. 6. 10. 현대미술을 볼 때마다, 스스로가 현대 미술을 향유하는 이들과 관심이 거의 없는 일반 관객들 사이의 회색분자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딱히 현대미술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도, 어렸을 때부터 향유해온 것도 아니지만 뒤늦게 재미를 붙였고,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그래서 꿈보다 제법 마음에 드는 해몽이 나오면 그걸 감상으로 삼아 마음에 두기. 그게 나름의 현대 미술을 즐기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현대 미술을 보기 시작한 때부터 비디오 게임 아트는 항상 있어왔고, 자연스레 관심의 대상이 됐다. 그게 본업과 연결이 되어서일까? 아니면 그저 게임 자체가 흥미로운 소재여서일까? 어쨌거나 ‘미술관에 게임을 집어넣기’ 는 마치 코끼리를 냉장고에 집어넣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지켜보면서, “미술관에 적합한 게임이란 무엇인가?” 이라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 밖에 없었다. 일단 “굳이 구분지어야 할까?” 같은 번외격 논제는 차치하고 “정말로 게임의 바운더리는 한계가 없어서 미술관에도 적합한, 딱 알맞은 게임의 형태가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 하는 질문은 마치 우주를 향한 궁극의 질문처럼 달콤하면서도 답답한 명제였다. 물론, 그동안 게임을 소재로 한 미술 작업은 이미 많았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히토 슈타이얼이나 하룬 파로키 등을 비롯해 국내에서도 김희천, 강정석 등 많은 이들이 이미 비디오 게임, 그리고 게임 플레잉을 가지고 여러 작업을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 거기서 더 나아가는 건 게임 자체의 형태, 게임이라는 미디어 자체를 미술관에 들이려고 하는 시도들이다. 즉 이는 개인이 상호작용하는 예술이 어떻게 전시 예술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근래에는 각종 상용 게임 엔진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지고, 또 게임 플레이 경험을 가진 세대가 작가가 되기 시작하면서 그런 경향이 더 늘어났다고 생각해왔다. 시도는 정말 많았다. 보는 게임을 소재로 한 영상 작업, 아니면 아예 보는 게임의 형태로 실제 플레이 가능한 게임을 피처링 하는 작품, 김희천의 작품처럼 VR을 끼고 가상현실에서만 볼 수 있는 작품들, 하물며 아예 게임 엔진으로 제작되어 직접 플레이어가 되어볼 수 있는 작품들까지. 수많은 작품들이 미술관에 적합한 게임을 찾는 과정에서 전시관을 들락거렸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게임사회〉 는 그런 시도의 종합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플레이 가능한 게임, 그리고 게임의 형태를 한 미술 작업, 게임을 소재로 한 영상 작업, 해킹한 게임기 기판으로 실시간으로 작동하는 작품, 또는 게임을 비롯한 서브컬처를 특집처럼 다룬 작품들까지.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에서 위의 그 질문, “미술관에 적합한 게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의 답을 찾았는가 하면, 오히려 그 명제 자체를 뒤집어버리게 됐다. 〈게임사회〉 의 적지 않은 작품들은 그 형식 자체가 ‘비디오 게임’이라는 익숙한 형태를 띄고 있다. 그러나 각 작품을 해석하고 이해하는데에는 그런 ‘게이머로서의 경험’ 또는 기반지식이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각 작품의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몇몇 전시 작품들이 ‘게이머적인 경험’ 의 연장선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 컸다. 게이머로서의 경험과 결합하여 이 작품을 이해했을 때 그 깨달음이 매우 특별하게 느껴진 것은 코리 아칸젤의 〈/로데오/ 할리우드 플레이하기〉 였다. 이 작품은 코리 아칸젤이 얼마나 게이머적 경험을 이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작업이기도 했다. AI툴 또는 자동화 매크로를 통해 양산형 P2W 게임을 플레이하도록 함으로서 비인격적으로 변한 게임을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소모시킴으로서 나오는 해학이 이 작업의 재미였다. 이는 게이머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무분별한 결제유도와 반복적이고 재미없는 플레이로 가득 찬 양산형 모바일 게임에 대한 비판으로서 게이머들에게 매우 천착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또다른 좋은 예는 재키 코놀리의 〈지옥으로의 하강〉 이었다. 이 작품은 두가지의 보편적 경험에 기반하는데 먼저 코로나 판데믹으로 인한 사회봉쇄, 그리고 ‘GTA5’ 라는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게임의 경험이다. 우리가 ‘GTA5’ 를 플레이하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파괴적이고 소모적이다. ‘무엇이든 가능한 오픈월드’ 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며, 좀더 정확히 정의하자면 ‘각종 금기가 해제된 오픈월드’ 라고 할 수 있다. 즉, 가장 먼저 이 게임에서 생각하게 되는 건 살인과 약탈, 방화, 파괴 같은 현실 사회에서 용납되지 않는 행위들이다. 형식적으로는 그보다 많은 행위가 가능하지만, 금기가 없다는 점 덕분에 자연스럽게 그런 비일상적 일탈로 플레이가 귀결된다. 하지만 〈지옥으로의 하강〉 은 그런 파괴적이고 소모적인 플레이에서 벗어나 그 무대 자체를 보여준다. 얼마나 일상과 닮아있는지, 어떻게 이 세상이 대리세계로 인정받고 있는지를 비춘다. 고속도로 옆 편의점, 발전소 옆 철길, 이곳을 정처없이 걷는 주인공. 마치 플레이어들에게 묻는 것 같다. 당신이 살인과 약탈, 기타 파괴적 플레이로 물들였던 이곳이 사실은 판데믹 같은 우울한 시기에 우리가 조용히 묻어 지낼 수 있는 안식처가 아니었냐고. 개인적으로 가장 나쁜 예는 〈노텔 (서울 에디션)〉 이었다. 전시 작품 중 가장 비디오 게임 그 자체의 형태를 하고 있다. 겉으로 보면 이 작품을 실망스럽다고 한 것이 의외일 수도 있다. 전시된 작품 중 우리가 알고 있는 ‘비디오 게임’ 의 형태와 가장 닮아있는 작품이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오히려 기대치와 작품의 실제가 어긋나는 현상이 발생한다. 〈노텔 (서울 에디션)〉은 말그대로 비디오 게임 컨트롤러를 쥐고 인게임 3D 공간을 탐험하는 작품이다. 비주얼적으로도 훌륭하고, 흔히 미술가들이 만든 게임에서 발생하는 기술적인 문제도 크게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특성 때문에 관객은 이 작품을 그 자체로 게임으로 인식하게 되고, 흔히 알고 있는 게임의 기준으로 이 작품을 보게 된다는 점이다. 결국 그렇게 되면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한계, 즉 어디까지나 공간을 구현하고 그 안에서 이동할 수 있도록 했을 뿐, 그 어떤 상호작용이나 탐험의 목적성이 결여되어 있음이 크게 다가온다. 그러한 이유로 〈노텔 (서울 에디션)〉은 전시장에서 가장 오래 시간을 보낸 작품이기도 했는데, 과연 비 미술인 또는 미술 관객으로서의 경험이 없는 이들, 또는 게이머들이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리고 작품을 이해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인지 궁금해서였다. 작품은 누군가 플레이하면 그 주변에 둘러앉아 그걸 지켜볼 수 있게 되어 있었고, 많은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컨트롤러를 이어 받아가며 플레이했다. 하지만 그 반응은 대체로 한결같았다. “그래서 뭐지?”, “왜 아무 것도 없지?” 흥미롭게도 〈노텔 (서울 에디션)〉 그 형태적으로는 가장 게이머적 경험의 연장선에 있었지만 직접 컨트롤러를 쥐고 플레이하며 겪게되는 경험은 ‘게임’ 이라고 하기엔 너무 황량한 것이었다. 굳이 이 작품을 게임의 장르적 해석으로 보자면 어드벤처 게임에 가까울 것이지만, 이 작품은 탐험의 이유와 목적, ‘왜’ 와 ‘무엇’ 이 결여되어 있었다. 물론 현대 미술 시조에서 그런 명확한 목표 지점을 설정하는 건 불필요한 일로, 또 작가가 관객의 이해를 제한하는 행동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결정적으로 이 작품은 ‘게임’ 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면서 동시에 좋은 미술 작업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해졌다. 오히려 정말로 디스토피아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비효율적인 장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작업들의 긍정과 부정을 정리해보면, 실상 게임을 미술관에 들여놓는데에 중요한 건 ‘형태’ 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지난해 보았던 이안 쳉의 〈세계건설〉 전시에서도 동일한 느낌을 받았다. 이안 쳉의 〈사절〉 연작은 무한한 길이를 가진 일종의 자동화 시뮬레이션이다. 그러나 ‘무한한 길이’ 라고 되어있었지만 그 무한한 길이는 그 안에서 유의미한 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적절히 하이라이트하지 못한다면 순간 만큼의 가치를 가지기 오히려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BOB 이후의 삶: 찰리스 연구〉 는 스크린 뒤에서 PC를 통해 실시간 렌더링으로 보여주는 일종의 게임 라이브 컷씬의 연장선에 있었지만, 정작 그것이 관객에게 보여지는 방식은 폐쇄된 공간 안의 스크린 하나에서 상영되는 것이었기에 오히려 더 넓게 향유되고 더 깊이 플레이될 수 있는 작품이 이 공간에 갇혀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과적으로, 꼭 게임이라는 형태 자체에 집착할 필요는 없고, ‘게임플레이’ 라는 경험을 어떻게 미술관에서 재현하거나 또는 활용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작가와 전시 관계자들이 ‘게이머로서의 경험’ 을 가지고, 이를 ‘게이머’ 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작품을 만들고 구성하는게 더 중요하다는, 어쩌면 너무 정석적이면서도 원점회귀적인 결론에 다다르고 말았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었던 부분은 이전의 어떤 전시들보다도 영유아, 중년층, 20대 남성 같은 기존의 현대 미술 전시의 주 소비층이 아니었던 이들이 많이 보인 전시였다는 점이다. 그만큼 게임이라는 소재 자체가 더 많은 이들을 현대 미술관이라는 장소로 이끌어낸 것만은 분명했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는 작품들 뿐만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많은 관심이 갔다. 하지만 그 안에서 목격한, 그리고 간단히 이야기 해본 관객들에게서는 확실히 조금은 아쉬운 반응들을 얻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게이머들이 비디오 게임 아트라는 좋은 가교를 두고도 현대 미술로 넘어오기 어렵게 할까. 이번 전시를 통해 가장 크게 느낀, 비디오 게임과 현대 미술의 불협화음은 ‘친절함’, 좀더 포괄적으로 말하면 UI/UX 였다. 일반 관객들의 시선에서 현대미술은 기본적으로 불친절함을 소양으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는 어느정도 오해와 편견이라는걸 알고 있다. 단순히 의미파악 자체에 여러모로 복합적인 사유와 다양한 의식의 단계가 필요한 것 자체로 불친절함이라고 부르는 건 다소 부적절한 표현이다. 많은 현대의 명시, 명작 영화들이 이해에 난점이 있다고 해서 ‘불친절’ 하다고 비판받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유다. 그러나 미술관의 미술은 기본적으로 작품 외의 정보 전달을 극히 줄이고 설명이라고 할만한 것은 오직 스테이트먼트 하나만을 남겨 놓는다. 영상 작품들은 이미 상영되고 있고, 관객이 영상의 중간에 들어오게 되면 문맥을 파악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즉 이해를 돕기 위한 도구도 적고, 관람환경도 그렇지 않다. 그래서 어떤 전시 또는 작품을 이해하려면 충분한 시간을 두고 계속 ‘수용’ 하면서, 이를 머리속에서 정제하고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고난한 정신적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는 비디오 게임이 필수적으로 가져야 하는 UI/UX 의 덕목과 상충되는 면이 있다. 비디오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항상 일련의 튜토리얼이나 툴팁을 통해 게임을 이해하고 ‘이 게임을 플레이 하기 위해 지켜야하는 룰, 그리고 필요한 덕목’ 을 학습받는다. 심지어 명시화된 튜토리얼이 존재하지 않는 게임이라도 그런 학습 곡선을 고려해 게임의 구조를 만들기 마련이다. 그리고나서 플레이어는 비로소 게임을 이해해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현대미술은 바로 이 과정이 결여되어 있다. 수많은 비디오 게임 아트 전시가 시도되어 왔지만 충분히 상호작용성을 바탕으로 한 게임적 경험을 주었다는 생각이 든 전시가 적었던 이유는 바로 이 UI/UX 가 관객과 전시/작품 사이의 게임적 상호작용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모든 것이 가이드라인과 튜토리얼과 툴팁으로 채워져야 한다면 우리가 가지는 이해의 폭은 극도로 좁을 것이고 특정 가치관에 편향된 이해를 다수가 공유하게 되는 다소 위험한 상황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너무 결여된다면 이해 자체를 가로막는 장벽으로 기능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이걸 하나의 재미로 여기고 있지만, 더 많은 이들에게 이해받을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현대미술이 소수의 향유자들이 아닌 일반 대중으로부터 유리된 이유는 이 부분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슬프게도 일반 대중에게 이제 미술관은 모던한 카메라 세트장처럼 쓰이고 있다. 즉 미술관은 비디오 게임처럼 ‘개인화된 경험’ 을 완전히 얻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환경이자 풍조를 가지고 있다. 이를 이번 전시에서 단적으로 느낀 지점은 바로 각종 ‘불편한’ 컨트롤러와 연결된 게임들을 사람들이 직접 플레이할 때였다. 많은 사람들은 왜 익숙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불편하게 배치된 컨트롤러로 자신에게 이미 익숙한 게임을 플레이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스테이트먼트에는 그 의도가 써있기는 했지만 일목요연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필자가 나름의 해석을 곁들여 “장애인을 위해 만들어진 적응형 컨트롤러 또는 비직관적인 컨트롤러로 게임을 함으로서, 장애인이 일반적인 컨트롤러로 게임을 할 때의 불편함을 비장애인들이 체험한다.” 라는 의도를 덧붙이자 그제서야 이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결국 현대 미술관 내에서 이루어진 정규 전시이기에 기존에 잡혀있는 미술 전시의 틀을 바꿀 수는 없었고, 그것이 더 많은 이해를 원하는 이들에게 장벽처럼 작용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안타까운 점은 분명 게이머로서의 경험이 잘 녹아있는 좋은 작품들이 많았음에도 이를 수용하기 꽤 버거워하는 이들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게임사회〉 전시가 마음에 들었던 것은, 게이머적인 경험이 베이스가 되었을 때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작품이 많았기 때문이다. MOMA 소장 게임 컬렉션은 그냥 평범하게 전시되었다면 오히려 플레이 되기 어려운 환경에 가져다 놓은, 죽은 게임이 되었을테지만 적절한 컨트롤러의 변형으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았다. 앞서 언급한 코리 아칸젤의 작품, 그리고 재키 코놀리의 작품은 그 형태는 분명 평범한 영상 전시의 폼을 하고 있음에도 게이머로서의 경험과 천착되어 새로운 이해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이번 전시에서 얻은 또다른 깨달음은 게임은 확실히 사람들을 미술관으로 모을 힘이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여러 차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다녀갔지만 그동안 지켜 본 비 미술인 관객들의 행태는 딱 둘 중 하나였다. 그냥 슥 보고 지나가거나, 배경으로 두고 사진을 찍을 뿐. 하지만 이번 전시는 사뭇 달랐다. 많은 이들이 직접 게임을 플레이하려고 했고, 작품을 보며 자신의 게임 경험을 떠올려 이야기하고, 직접 작품을 체험하고자 컨트롤러를 움직였다.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가진 힘, 그리고 동시에 오프라인 공간이라는 한계는 이중적인 면이 있다. 〈게임사회〉 전시 또한 기존의 미술 전시들이 가진 일종의 딜레마를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그 작품의 면면에서 느낀 ‘게이머로서의 경험’ 은 즐거웠다.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더 들러서 마음에 들었던 작품들을 더 느긋하게, 지긋이 관람하고 싶다. Tags: 게임사회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미술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이명규 게임 기자(2014~), 글쓴이(2006~), 게이머(1996~)
- 개발자, 문화, 그리고 현금: 서구 AAA 게임계의 세 가지 경향
AAA게임은 예술, 산업, 문화가 결합되는 영역으로서 지속되어왔다. 게임 연구는 그러한 요소들이 - 진전을 계속하는 가운데 - 과거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못한 상태에 정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거대 차기작 출시에 대한 기대 및 차기 하이프 사이클에 대한 예측 그리고 다가올 시상식에 대한 흥분 속에서, AAA게임 개발이 보다 높은 예술적 수준의 미래를 향해 최고의 속도로 내달리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높이에 도달하기까지 훨씬 큰 극단의 고통이 수반될 것이다. 게임 언론계나 학계의 간섭, 그리고 업계 종사자들의 노동 관련 운동에도 불구하고, 게임의 적법성, 노동자와 플레이어에 대한 착취 등 오랫동안 존속되어온 문제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 Back 개발자, 문화, 그리고 현금: 서구 AAA 게임계의 세 가지 경향 10 GG Vol. 23. 2. 10. 2022년 12월 8일 할리우드 스타일로 “최고의 게임을 기념하는” 더 게임 어워드(The Game Award)가 9번째로 개최되었고, 1억 3백만명의 시청자들이 시상식을 생방송 스트리밍으로 지켜보았다. 1) 오스카 시상식과 비슷하게, 이 행사는 크고 작은 게임들에 대한 업계 인식의 융합이자, 게임의 예술적 또는 기술적 장점에 대한 검증이자, 게임 마케팅의 방향성이 드러나는 문화적 공간의 지표라 할 수 있다. 작은 규모의 게임도 다루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더 게임 어워드는 AAA마케팅 및 최신 블록버스터 게임들에 대한 문화적 장치(cultural apparatus)다. 실제로 더 게임 어워드는 축하공연이나 수락 연설같은 것을 없앤 속사포 스타일로 시상식을 진행한다. 이는 트레일러나 퍼스트룩, 게임플레이 프리미어 등을 위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함인데, 주로 정교한 음악 프레젠테이션이나 리드인(lead-ins) 등이 포함된다. 이번 시상식에서는 〈메탈기어 솔리드(Konami)〉와 〈데스 스트랜딩(Kojima Productions, 2019)〉 등으로 유명한 슈퍼스타 개발자 히데오 코지마(Hideo Kojima)가 등장하기도 했다. 〈갓 오브 워: 라그나로크(Sony, 2022)〉나 GOTY 수상작 〈엘든링(FromSoftware, 2022)〉 같은 거대 AAA 작품들이 스크린에 나타나는 비중에 있어 절대적이었던 가운데 그보다 소규모인 게임들 또한 잊혀졌던 것은 아니었으나, 더 게임 어워드는 주로 큰 예산으로 만들어진 주류 게임들을 축하하고 홍보하는 행사였다. 행사의 밤은 이제는 유명해진 어느 젊은 청년의 히데타카 미야자키(Hidetaka Miyazaki) 수락 연설 난입 사건과 함께 종료됐는데, 이는 우리가 주류 게임 문화로서 아무리 격식을 갖춘다 할지라도 그 수면 아래에는 밈-주도의 사회적 일탈이 끓고 있음을 일깨워주는 사건이었다. 더 게임 어워드에서 드러난 사회경제학적 권력의 융합은 서구의 AAA게임에 대한 연구에서 나타나는 3가지 경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첫째는 거대 예산 게임의 창의적 영역과 예술적 장점이고, 두번째는 그러한 거대 규모 프로젝트를 제작하고 출시하는 개발사와 노동 환경과 관련된 문화적 영역으로, 이는 게이머 커뮤니티에서 발생하고 있는 게임 문화와 엮어있다. 셋째는 프리미엄 엔터테인먼트 경험으로서 게임을 마케팅하고 수익을 창출하는 수익 요소에 관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AAA게임의 맥락에서 이와 같은 경향을 둘러싸고 생성되고 있는 담론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게임의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장점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선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게임이 사회에 미칠 수 있는 위해성과 혜택에 대해 미디어와 학계에서 엄청난 관심을 쏟았던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는데, 특히 아동과 청소년에 대해 폭력적인 게임 콘텐츠가 미칠 영향에 큰 관심이 모였다. 2) 이 시기 여러 게이머들과 일부 연구자들이 어렴풋이나마 게임의 예술적 가치에 대해 이해하고 있긴 했지만, 게임을 수준 낮은 미디어 형식으로 보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펠런 파커(Felan Parker)의 언급대로, 게임 및 게임이 지닌 예술적 특성에 대한 논의는 미국 영화비평가 로저 에버트(Roger Ebert)의 악명 높은,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자주 회자되는 “게임은 절대로 예술이 될 수 없다”는 언급 이후 2005-2010년 사이에 등장했다. 3) 이와 같은 언급으로 촉발된 논쟁에 언론과 학계의 관심이 모아진 가운데, 그와 같은 ‘비-예술’의 전제로부터 게임이 벗어날 수 있는 전략 중 하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할리우드 감독들이 그러하듯, 게임 디자이너를 자신이 만든 게임에 뚜렷한 예술적 스타일을 남길 수 있는 작가로 승화시키는 것이었다. 4 ) 그리고 이러한 경향을 몇달 전 게임 어워드에서 나타났던 핵심 게임 감독들의 높아진 격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AAA게임은 높은 가시성 그리고 생산 및 마케팅을 위한 엄청난 예산 덕에 새로운 콘솔을 위한 플래그십 게임으로서의 지위를 보유하고 있다. AAA게임은 또한 게임 디자인에 있어 기술적 한계를 끌어올리는 경우가 많고, 그에 따라 2010년 초반 인디게임 붐이 일기 전까지 예술적 게임 담론을 점유해왔다. 브랜든 커우(Brendan Keogh)는 AAA게임 개발사들이 수익 창출을 중시하는 거대 퍼블리셔 밑에서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게임들이 관습적이거나 안정지향적으로 전통적인 AAA게임의 틀에 맞춰 개발되어왔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5) 그럼에도 비디오게임 작가의 전설은 지속되었는데, 게임담론장에서 2010년대에 비해 ‘인디’게임들의 비중이 훨씬 적어진 가운데, 히데오 코지마의 〈데스 스트랜딩(Kojima Productions, 2019)〉 같은 게임은 관습에서 탈피한 게임플레이와 미학을 만들어냈다. AAA게임들은 부분적으로 ‘인디’적인 디자인 및 미학의 요소들로부터 영향을 받아왔다. 6) 물론 매년 출시되는 스포츠 시리즈 게임이나 〈콜 오브 듀티(Call of Duty, Acitivision)〉 같은 FPS 프랜차이즈처럼 관습을 무시하지 않는 친숙한 AAA게임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게임 시상식- 나아가 보다 확장된 게임 저널리즘 - 은 기존하는 친숙한 장르적 관습을 따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뭔가 살짝 새롭거나 도전적인 것을 제공함으로써 자신들이 작가의 작품이라는 느낌을 주는 인디적인 감성을 살짝 가미한 형태의 AAA게임들을 칭송한다. 게이머와 업계는 그와 같은 방식을 지지하는데, 그 이유는 ‘게임은 예술인가’라는 논쟁이 여전히 대중문화계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접근이 게임플레이를 하나의 가치있는 활동으로 보이게 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판매율을 높이고 소비자 기반을 넓힐 수 있도록 하는 게임의 숨겨진 문화적 속성을 승화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AAA개발사 내부의 작업 방식은 안타깝게도 게임 작가에 대한 강조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는데, 학계에서 이 문제를 다룬 바 있다. AAA 노동 문화에 있어 과도한 업무량과 젠더적으로 편향된 작업환경은 눈에 띄는 특징이다. 게임업계의 과도한 업무량에 대한 초기 연구로는 2006년 다이어-위데포드와 드 퓨터(Nick Dyer-Witheford and Greig de Peuter)의 작업을 들 수 있는데, 노동 착취, 번아웃, 이직률, 그리고 이 극단적인 노동 문화 내 노조 결성을 향한 투쟁 등을 다뤘다 7) . 12년 후인 2018년에는 코타쿠의 전 작가 제이슨 슈라이어(Jason Schreier)가 당시 〈레드 데드 리뎀션 II(Red Dead Redemption II, 2018)〉 마무리 작업을 진행하고 있던 락스타 게임즈(Rockstar Games)의 ‘크런치 문화’를 폭로했다. 8 ) 근 20여년의 세월동안 거대 예산 게임 개발분야의 문제로 알려져 왔음에도, 여전히 존속하고 있는 크런치 모드는 여러 분석과 연구의 핵심적인 주제로서 다뤄지고 있는데, 특히 학계에서는 노조 결성 및 노동자 권리와 관련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 9) 이와 관련해서 개발사 내 젠더 격차 문제가 있다. 2013년 게임 디벨로퍼 매거진(Game Developer’s Magazine)이 실시했던 설문조사를 인용한 연구에서, 드 윈터와 코큐렉은(Jennifer deWinter and Carly Kocurek)은 “급여에 있어 젠더 격차는 (96%가 남성인) 프로그래밍과 엔지니어링을 제외한 거의 모든 게임 관련 고용 부문에서 상당하다”고 지적했다. 10) 그 이유가 여성이 게임을 플레이하지 않기 때문이거나 여성이 게임업계에 진출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라는 짐작과는 반대로, 연구자들은 여성들이 게임 문화의 여성혐오적이고 해로운 요소의 영향을 받은 개발사 내 업무 문화에 의해 훨씬 더 소외받고 있다는 것,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여성들이 보다 빨리 번아웃하게 되고 업계를 떠나게 됨을 밝혀냈다. 11) 게임문화를 다룬 여러 연구들은 AAA게임들과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처럼 게임문화와 작업환경 간에 무한으로 반복되는 고리 때문이다. 게임문화나 개발사 내 업무 환경에 있어 그 어떠한 변화라도 게임문화 내 노동 공간과 놀이 공간 사이에서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은 중요하다. 최근 AAA게임을 비롯한 게임 전반에 걸쳐 많은 관심이 비즈니스 모델과 수익화에 쏠렸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소액결제, 확률형 아이템, 배틀 패스가 핵심이었다. 이러한 경향이 모바일 및 그리고 프리-투-플레이(free-to-play) 게임과 연관되는 것이긴 하지만, AAA게임의 정의가 규정되어있는 것은 아니므로 프리-투-플레이 모델의 카테고리에 AAA 게임이 배제되어야 할 본질적인 의미는 없다. 배틀패스를 다뤘던 다니엘 조세프(Daniel Joseph)의 연구가 보여주었듯, 〈에이펙스 레전드(Apex Legends)〉, 〈도타2(DOTA 2)〉, 〈포트나이트(Fortnite)〉 등 거대 개발사에서 만든 대작들도 프리-투-모델이나 소액결제를 주요 수익화 모델로서 활용할 수 있다. 12) 조세프가 주목한 것은, 게임사들이 소비자로부터 효과적으로 돈을 뽑아내기 위해 그러한 모델을 통해 사람들이 알아차리기 어려운 방식으로 게임을 쇼핑 플랫폼으로 전환시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13) 게이머들로부터 보다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게임 서비스나 시즌제 모델이 크게 강조되면서 소액결제 방식이 AAA게임들의 제작방식을 바꾸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모델들이 얼마나 약탈적으로 진화할 지 크게 우려 된다. 이는 단지 착취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익화 방식이 AAA게임의 제작 및 소비 방식을 변질시킨다는 문제로 이어진다. 이러한 상황은 또한 AAA 게임 개발에 있어 노동 문제에 더해 새로운 형태의 크런치 모드를 만들고 있다. 조세프가 지적하듯 〈포트나이트〉 개발자들은 “...(중략)...게임의 엄청난 성공 및 다음 시즌과 배틀 패스를 끊임없이 개발해야 하는 문제로 인해 주당 100시간에 이르는 노동 시간을 보고”하고 있다. 14) AAA게임은 예술, 산업, 문화가 결합되는 영역으로서 지속되어왔다. 게임 연구는 그러한 요소들이 - 진전을 계속하는 가운데 - 과거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못한 상태에 정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거대 차기작 출시에 대한 기대 및 차기 하이프 사이클에 대한 예측 그리고 다가올 시상식에 대한 흥분 속에서, AAA게임 개발이 보다 높은 예술적 수준의 미래를 향해 최고의 속도로 내달리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높이에 도달하기까지 훨씬 큰 극단의 고통이 수반될 것이다. 게임 언론계나 학계의 간섭, 그리고 업계 종사자들의 노동 관련 운동에도 불구하고, 게임의 적법성, 노동자와 플레이어에 대한 착취 등 오랫동안 존속되어온 문제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메이저 게임 개발사들이 예술적 인정과 명성 그리고 전능한 달러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속에서, AAA 영역에 대한 학계의 작업은 계속해서 해결되지 못한 채 존속하는 문제들을 비출 것이다. 참고문헌 1. Zheng, Jenny. “The Game Awards 2022 Received Over 103 Million Views, Sets New Viewership Record.” Gamespot. December 16th, 2022. 2. Ivory, James D., “A Brief History of Video Games.” The Video Game Debate: Unraveling the Physical, Social, and Psychological Effects of Digital Games. Edited by Rachel Kowert and Thorsten Quandt. New York and London: Routledge, 2016, 16-17. 3. Parker, Felan. “Roger Ebert and the Games-as-Art Debate.” Cinema Journal 57, no 3 (2018):77-79. 4. Ibid., 95-96. 5. Keogh, Brendan. “Between Triple-A, Indie, Casual, and DIY: Sites of Tension in the Videogames Cultural Industries.” The Routledge Companion to the Cultural Industries. Edited by Kate Oakley and Justin O’Connor. New York and London: Routledge, 2015. 153-154. 6. Lipkin, Nadav. “Examining Indie’s Independence: The Meaning of ‘Indie’ Games, The Politics of Production, and Mainstream Co-optation.” Loading… The Journal of the Canadian Game Studies Association 7, no 11 (2012): 8-15. 7. Dyer-Witheford, Nick, and de Peuter, Greig. “‘EA Spouse’ and the Crisis of Video Game Labour: Enjoyment, Exclusion, Exploitation, Exodus.” Canadian Journal of Communication 31, no 3 (2006): 599-617. 8. Schreier, Jason. “Inside Rockstar Games’ Culture of Crunch. Kotaku. October 23rd, 2018. 9. Cote, Amanda, and Harris, Brandon, C. “‘Weekends Became Something Other People Did’: Understanding and Intervening in the Habitus of Video Game Crunch.” Convergence: The International Journal of New Research into Media Technologies 27, no.1 (2021): 161-176. 10. deWinter, Jennifer and Kocurek, Carly. “” Gaming Representation: Race, Gender, and Sexuality in Video Games. Edited by Jennifer Malkowski and Treaandrea M. Russworm.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2017, 65. 11. Ibid. 12. Joseph, Daniel. “Battle Pass Capitalism.” Journal of Consumer Culture 21, 1 (2021):68-83. 13. Ibid., 81. 14. Ibid.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연구자) 마크 라제네스, Marc Lajeunesse 캐나다 몬트리올 콩코디아대학 커뮤니케이션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 온라인 게임의 독성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삼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더 공평하고 즐거운 놀이 경험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으로 게임 내에서 더 많은 긍정적인 조건을 들어내기 위한 독성 현상에의 이해를 추구한다. 스팀 마켓플레이스와 DOTA 2에 관한 논문을 작성한 바 있고 곧 출시될 '트위치 마이크로스트리밍'의 공동 저자이다. (게임연구자) 나보라 게임연구자입니다. 게임 플레이는 꽤 오래 전부터 해왔지만, 게임학을 접한 것은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 우연히 게임 수업을 수강하면서였습니다. 졸업 후에는 간간히 게임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연구나 저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게임의 역사>, <게임의 이론>, <81년생 마리오> 등에 참여했습니다.
- [인터뷰] : “중꺾마”의 장본인, 쿠키뉴스 문대찬 기자 인터뷰
흥미로운 점은 해당 표현을 처음 사용한 문대찬 기자가 ‘게임 전문지’가 아니라, 종합일간지의 기자라는 점이다. 문대찬 기자가 소속된 쿠키뉴스는 2005년에 만들어진 온라인 뉴스 서비스로, 정치, 경제, 사회 등 다양한 뉴스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단순히 인터넷 종합일간지가 게임을 다룬다는 점을 넘어, 게이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미디어 일반에 진출하면서 만들어지는 변화를 보게 한다. ‘중꺾마’의 대중화만 하더라도 게임과 게임 산업의 맥락을 정확히 포착할 수 있는 사람에 의해, 게임 문화가 대중적으로 확장된 사례이다. 이번 호에서 편집장은 ‘중꺾마’의 장본인인 문대찬 기자와 만나, 게임이 서브컬쳐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 Back [인터뷰] : “중꺾마”의 장본인, 쿠키뉴스 문대찬 기자 인터뷰 10 GG Vol. 23. 2. 10. 작년 한 해, 한국 사회를 관통한 밈이 있었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 이 밈은 2022년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 일명 ‘롤드컵’에서 프로게임단 DRX의 데프트(김혁규) 선수 인터뷰로부터 기인했다. 데프트 선수가 직접 이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인터뷰를 했던 쿠키뉴스의 문대찬 기자가 인터뷰를 요약하는 과정에서 〈DRX 데프트 "로그전 패배 괜찮아,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표현하며, 해당 문구가 탄생한 것이다. 상대적 약팀이라고 평가받던 DRX가 우승을 하자 해당 표현은 일종의 사회적 밈이 되었고, 이후 다른 e스포츠나 연예계, 한국의 월드컵 16강 진출 상황에서 사용되며 전국민적인 인지도를 쌓게 되었다. 그리고 이전에 유행했던 밈인 누칼협(누가 칼 들고 협박하냐?: 누군가의 불평에 대한 반응)과 같이 부정적인 성격이 아니라, 끈기와 의지, 꿈을 희망하였기에 ‘중꺾마’는 정치권, 스포츠계, 기업을 넘어 조선일보나 KBS, MBC, SBS, JTBC 등 기성 언론에까지 사용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해당 표현을 처음 사용한 문대찬 기자가 ‘게임 전문지’가 아니라, 종합일간지의 기자라는 점이다. 문대찬 기자가 소속된 쿠키뉴스는 2005년에 만들어진 온라인 뉴스 서비스로, 정치, 경제, 사회 등 다양한 뉴스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단순히 인터넷 종합일간지가 게임을 다룬다는 점을 넘어, 게이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미디어 일반에 진출하면서 만들어지는 변화를 보게 한다. ‘중꺾마’의 대중화만 하더라도 게임과 게임 산업의 맥락을 정확히 포착할 수 있는 사람에 의해, 게임 문화가 대중적으로 확장된 사례이다. 이번 호에서 편집장은 ‘중꺾마’의 장본인인 문대찬 기자와 만나, 게임이 서브컬쳐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경혁 편집장: 먼저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릴게요. 문대찬 기자: 쿠키 뉴스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서 이제 7년 차 기자인 문대찬입니다. 게임과 e스포츠를 취재한 지는 얼마 안 됐어요. 원래는 스포츠 기자로 들어왔는데, 저희 팀 자체가 게임 스포츠 팀이거든요. 그래서 2019년 말부터 e스포츠랑 게임 쪽 팀장울 맡게 되었어요. 이경혁 편집장: 그러나 그 이전부터 e스포츠를 보신 거죠? 문대찬 기자: 네. 어렸을 때 임요환 선수 팬이었거든요. 그래서 당시에는 e스포츠를 봤었고, 최근에도 후배 기자들 기사를 봐줘야 하니까 e스포츠 동향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죠. 그렇지만 본격적으로 e스포츠를 취재한 것은 작년이 첫 번째 시즌이었어요. 종합지 기자의 e스포츠 취재기 이경혁 편집장: 첫 해에 대박을 터트리신 거군요. (웃음) 스타 리그를 보시다가 이제는 LOL 리그를 취재하게 되셨는데, 그 둘 사이에는 간격과 차이가 조금 있잖아요. 어떤 부분이 조금 다르시던가요? 문대찬 기자: 간극이 있죠. 그런데 저는 오히려 기자를 하면서 (스타리그때 보다) e스포츠를 좀 더 사랑하게 된 것 같아요. 그전에는 e스포츠 보다 야구나 축구 같은 스포츠를 조금 더 좋아했었거든요. 그런데 e스포츠를 취재하다 보면 다른 스포츠보다 선수들과 1대1 인터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보장되어 있거든요. 그러다 보니 선수 한 명, 한 명을 알아가게 되고 e스포츠의 매력에 확 빠졌어요. 지금은 진짜 누구보다 e스포츠에 열광하면서 챙겨보게 되었죠. 이경혁 편집장: 선수들도 인터뷰에 협조적인가 보네요. 문대찬 기자: 네. 최근 들어서는 더더욱 그런 경향이 강해졌어요. 그리고 그중에서도 정말 프로 의식이 넘치는 선수들이 있거든요. 그중 한 명이 데프트 선수예요. (‘중꺾마’가 나온) 그 인터뷰도 정말 특별했던 게, 이번 시즌에는 패배 인터뷰가 도입됐지만, 원래 시즌 중에는 패배한 선수들을 인터뷰할 기회가 없었거든요. 롤드컵이나 국제대회에서만 허용이 되었는데, 사실 그날도 DRX가 패하면서 저는 걱정이 되었어요. 선수들 기분도 안 좋을 거고, 그러면 나올 수 있는 내용도 얼마 없을 거니까요. 그런데 데프트 선수가 너무나 프로 의식이 넘치게 인터뷰를 열심히 해줬어요. 저는 원래도 게임에 관한 이야기를 묻기보다 선수들이 성장하는 서사에 초점을 맞춰서 인터뷰를 하는 편인데, 데프트 선수가 그날 인터뷰를 적극적으로 해준 덕분에 저도 그 방향으로 더 집중해서 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사실 패배 인터뷰라는 게 굉장히 부담스러우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중꺾마’는 그 상황 속에서도 선수와 미디어의 적극적인 교감에서 나온 결과물이겠네요. 그런데 궁금한 것이 ‘중꺾마’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을 때, 크레딧에 대한 욕심이 안 생기기 어려울 것 같은데, 어떠셨어요? 문대찬 기자: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처음에 이 표현이 화제가 되었을 때, 이 말이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시는 분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래서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는데, 저는 결국 미디어와 언론이 할 수 있는 일은 해당 선수가 빛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제가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래서 오히려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아쉬움이나 그런 건 없던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그래도 문화체육부 장관이 DRX에게 표창장을 줄 때, 인간적으로 기자님도 같이 받으셔야 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했거든요. (웃음) 문대찬 기자: 팬들도 그런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런 말씀들이 고마웠죠. (웃음) 그리고 처음에는 진짜 실감이 안 났어요. 그런데 (언론)업계 분들을 만나다 보니 이분들이 다 이야기를 해주시고, 어떤 선배 기자님은 “오늘이 너의 날이다”고 말씀해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참 감사했죠. 그리고 무엇보다 요즘은 선수들의 반응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걸 느껴요. 최근에 어떤 선수와 인터뷰를 했는데, “오늘 ‘중꺾마’ 기자님 만난다고 해서 긴장을 했다”면서 “‘중꺾마’ 같은 걸 만들려다가 말실수를 하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게임단 관계자님들도 선수들이 이번 기회를 통해서 나도 더 적극적으로 인터뷰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셨어요. 이렇게 선수들한테 제가 인터뷰를 하고 싶은 기자가 된 점이 가장 뿌듯하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만족스러워요. 게이머 DNA를 가진 기자 이경혁 편집장: 정말 많이 달라졌겠네요. 선수 입장에서도 ‘기회가 왔다’고 생각할 수 있고, 요즘 기자는 부정적인 댓글을 들을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는데, 그런 걸 극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멋있습니다. 이제는 ‘중꺾마의 장본인’이 아니라, ‘인간 문대찬’에 대해서 조금 들어보고 싶은데요. 아까 말씀하신 스타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문대찬 기자: 사실 저는 딱 거기까지 봤어요. 최연성한테 결승전에서 패하고 눈물 흘렸을 때요. 그 이후로는 마음이 아파서 스타크래프트를 못 봤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어떻게 보면 ‘택뱅리쌍’으로 대표되는 후기 리그 시대는 못 보신 거군요. 스타를 직접 하기도 하셨나요? 문대찬 기자: 스타는 저도 친구들이 한창 하니까, 같이 많이 했었죠. 다만 저는 스타에서 아무래도 멀티테스킹이 어려웠어요. 롤은 곧잘 하는데, 스타는 그게 어렵더라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1:1 게임을 부담스러워해요. 누군가와 함께 짐을 짊어지고 하는 게임들을 좋아해서 롤이나 배틀 그라운드 같은 게임들을 선호하는 편이에요. 저는 게임을 혼자서 즐긴다기보다 어떤 사회적 커뮤니티로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그럼 어릴 적에는 어떤 게임들을 하셨어요? 처음 해보신 게임을 기억해보신다면 뭐가 될까요? 문대찬 기자: 제가 초등학교 1학년에 들어갔을 때, 지금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컴퓨터를 사주셨어요. 그때 CD가 같이 들려왔었는데,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여러 가지 고전 게임들이 들어가 있는 CD였어요. 거기에 알라딘 게임이 있었는데, 제 기억으로 그게 제 인생 첫 번째 게임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도 한 목숨 죽으면 동생이 한 목숨 하고 그렇게 플레이하는 스타일이었어요. (웃음) 이후에는 막 엄청 깊게 어떤 게임들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 번 빠지면 저는 되게 오래 하는 스타일이었어요. 마구마구를 진짜 열심히 했었거든요. 여기에도 친구들이 꽤 있었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했으니까 돈을 많이 쓸 수는 없었지만, 어느 정도 덱을 맞출 정도로 했었죠. 이경혁 편집장: 그렇게 게임을 하시면서 이제는 기자가 되셨는데, 사실 중요한 점은 게임 전문 기자가 아니라 종합지 기자이신 거잖아요? 그런 점에서 궁금한 것이 있는데, 게임과 e스포츠를 다루는 스포츠 기자와 다른 정치부나 경제부 등의 기자들은 서로 어떤 관계인가요? 문대찬 기자: 사실 회사 내에서도 다른 부서 기자분들과 교류할 일이 거의 없어요. 회사에서도 사실 e스포츠나 게임을 다룬다고 하면 뭔가 큰 걸 하고 잘하는 것 같은데 (라고만 생각하시고) 잘 모르시죠. 그래서 종합 매체에서 게임을 한다는 게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어요. 장점은 일단 많은 분들이 잘 모르시는 영역이다 보니까 조금 더 자유롭게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제가 이직을 하지 않고 오래 있을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걸 해야하는 사람이거든요. 저는 성장 과정에서도 학원을 안 가고 싶으면 안 갔어요. 부모님께서도 그렇게 해 주시는 편이었고요. 그런데 저희 회사는 제가 하고 싶은 것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분위기예요. 특히 게임과 e스포츠를 종합 매체에서 다루고 있는 매체가 저희랑 저희 계열사인 국민일보밖에 없어요. 그 상황에서 다른 매체 같은 경우는 (게임을 다루기에) 힘든 부분들이 있는데 저희는 배려도 많이 받고, 게임 전문지가 가지고 있는 이해관계 같은 것들도 없어요. 야간의 일정을 하더라도 다음 날 오전에 쉴 수 있게 해주고 그런 식이어서 저희도 열심히 할 수 있는 거죠. 다만, 단점도 회사의 많은 분들이 게임이라는 분야에 대해 잘 모르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기사를 쓰더라도 저희는 엄청 쉽게 썼고, 이것보다 더 쉽게 쓸 수 없는데, 어떤 분들은 너무 어려워서 모르겠다거나 하는 반응들을 보이셔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저희 팀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진다던가 그런 측면들이 있죠. 사실 ‘중꺾마’가 처음 e스포츠 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을 때 보고를 했어요. 그런데 당시 사내에선 큰 관심을 못 받았거든요. 단순히 ‘게임계 유행어’ 정도로 생각하신 것 같아요. 월드컵 때 중꺾마가 큰 관심을 받으면서 뒤늦게 노를 젓기 시작했는데, 그런 부분들이 아쉽죠. * 쿠키뉴스 홈페이지 메인 배너, ‘중꺾마’가 들어가있다. 이경혁 편집장: 저는 종합지에서 게임을 다룬다는 것에 의미가 되게 크다고 생각해요. 게임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이 영역을 산업적으로만 접근한다거나 하면 같은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거든요. 이런 맥락에서 종합지에서 게임을 전문적으로 다루시는 분들이 더 늘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전망이 좀 있을까요? 문대찬 기자: 그래도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것 같아요. 최근에 롤 파크에 오시는 통신사나 언론사 기자님들이 엄청 많아졌었어요. 기자실이 부족할 정도로요. 특히 결승전에는 무조건 거의 오시고, 이제 개막전도 많이 오셔요. 실제로 경제지나 이런 곳에서도 젊은 기자들에게 e스포츠 좋아하는지 많이 물어보신대요. 좋아한다고 하면 가보라고 해서 취재하시고, 그런 기자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그런 기자들이 갈수록 성장하면 점점 더 좋아지지 않을까 싶어요. 이경혁 편집장: 게임이 대중화되려면 미디어 종사자도 많이 늘어야 할 건데, 그런 부분에서 변화가 만들어지고 있군요. 마지막으로 게임 기자로의 어려움을 여쭙고 싶은데요. 기자님의 기사를 볼 때, 단편적이지 않은 게임들을 다뤄주시는 지점들이 인상 깊었거든요. 그런데 일반 독자들도 함께 볼 수 있는 기사를 쓰려는 점에서 어려움이 있으실까요? 문대찬 기자: 정말 그 부분이 가장 큰 고민이기는 해요. 게임에 대해서 잘 아는 일부 독자층을 만족시키는 기사를 쓸 것이냐? 아니면 이제 종합지의 신분으로, 모두가 다 알 수 있는 기사를 쓸 것이냐? 사실 노력도 많이 해봤어요. 가령, ‘한타’ 같은 용어들도 어려워하세요. 그런데 이걸 쉬운 용어로 바꾸기가 참 어려운 거죠. 홈런 같은 건데, 홈런을 뭐라고 다르게 표현하지는 않잖아요? 어떻게 보면 게임에 대한 배경 지식이 전혀 없으신 것이어서, 저희도 정말 많은 단어들을 바꿔봤어요. 한타는 대규모 교전이라고 쓰거든요. 그런 식의 노력을 많이 하는 편이고, MMORPG도 다중 접속 역할 분담 게임 이런 식으로 최대한 풀어서 쓰려고 하고 있어요. 그런 맥락에서 저희가 만든 기획 중에 ‘쿡기자가 해봤다’라는 기획이 있어요. 이걸 많은 분들이 좋아하세요. 왜냐하면 저희가 거기에 참석하는 기자들의 명함 같은 것들을 만들어놓았거든요. 이 기자는 어떤 게임을 선호하고, 게임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알려주고 시작을 해요. 어떤 기자가 혼자서 기사를 쓰면 그 판단은 해당 기자의 취향에 따라서 독자들에게 전달이 되는데, 각기 다른 취향을 가진 기자 셋이 모여서 한 게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니까 게임사 입장에서도, 독자들에게도 선택을 할 수 있게 정보를 전달드릴 수 있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향들로 많이 생각을 해보고 있어요.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디어문화연구자) 서도원 재미있는 삶을 살고자 문화를 공부합니다. 게임, 종교, 영화 등 폭넓은 문화 영역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 오락실 시대의 대표주자 대전격투 게임, 어떻게 변해왔나
2000년대 이후 대전격투게임에 초점을 맞춰, 사반세기 동안 대전격투게임과 그 문화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논의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대전격투게임의 주요 변화 양상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에 영향을 미친 요인들은 무엇이고, 그것이 게임 플레이를 어떻게 바꿔놓았는지를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구체적인 논의를 위해 역사적 맥락, 산업 구조, 기술 변화, 문화 수용 등의 차원을 고려한다. < Back 오락실 시대의 대표주자 대전격투 게임, 어떻게 변해왔나 23 GG Vol. 25. 4. 10. 21세기 사반세기의 대전격투게임 대전격투게임(fighting game)은 말 그대로 플레이어가 컴퓨터나 다른 플레이어를 상대로 싸우는 류의 게임을 말한다. 체스나 장기처럼 추상화되지 않고, 캐릭터끼리 직접 몸을 맞대 치고박는 원초적인 싸움 형태를 취함으로써 플레이어들에게 강한 자극을 주는 장르이기도 하다. 정확하진 않지만, 보통 1976년 세가에서 아케이드용으로 출시했던 <헤비급 챔프(Heavyweight Champ)>를 대전격투게임의 기원으로 꼽는다. 1:1 대결이라고는 해도 복싱시합에 국한돼 있었던 데다 스틱과 버튼도 사용하지 않아 지금과 같은 의미의 대전격투게임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그래도 흑백으로 그려진 두 명의 복서를 글러브 모양의 컨트롤러로 움직이며 펀치를 날리는 방식을 취하는 등 대전격투게임의 기본적 형태를 지녔다고는 할 수 있다. 이후 다양한 대전격투게임이 등장했지만, 대전격투게임이라는 장르를 확립한 대표적인 게임은 <스트리트 파이터 2(Street Fighter 2, 1991)>였다. 마치 영화나 만화의 세계를 그대로 게임으로 만든 듯한 연출과, 특수한 커맨드 입력을 통한 기술 시전이라는 신선한 조작방식에 더해, 플레이어의 실력으로 승부내기를 권장하는 게임 디자인은 많은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강한 흥미를 유발시켰다. <스트리트 파이터 2>의 그야말로 엄청난 히트 이후 1990년대 초중반까지 대전격투게임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아랑전설(Fatal Fury, 1991)>, <버추어 파이터(Virtua Fighter, 1993)>, <킹 오브 파이터(The King of Fighters, 1994)>, <철권(Tekken, 1994)>을 비롯해 굉장히 많은 수의 대전격투게임이 발매됐다. 1990년대 게임문화 전반의 흐름을 이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던 장르였고, 아케이드뿐 아니라 콘솔과 같은 플랫폼으로도 수많은 작품이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는 조금씩 대전격투게임 붐이 사그러들기 시작했고, 2000년대부터는 마니아들 중심으로 플레이되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스테디셀러 장르가 되어 AAA급 게임부터 인디게임에 이르기까지 매년 대전격투게임이 꾸준히 발매되고 있고, 특히 북미와 일본에서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기도 하다. 2000년대 이후 대전격투게임에 초점을 맞춰, 사반세기 동안 대전격투게임과 그 문화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논의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대전격투게임의 주요 변화 양상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에 영향을 미친 요인들은 무엇이고, 그것이 게임 플레이를 어떻게 바꿔놓았는지를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구체적인 논의를 위해 역사적 맥락, 산업 구조, 기술 변화, 문화 수용 등의 차원을 고려한다. 변화의 배경 구체적인 변화 양상을 논의하기에 앞서, 그 변화를 추동한 요인들에 대해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기술적 혁신과 플랫폼의 전환, 그리고 온라인화와 네트워크 대전의 부상이 대표적이다. 첫째, 기술적 혁신과 플랫폼의 전환이다. 2000년대 초반 가정용 콘솔과 PC의 기술적 발전은 대전격투게임 환경에 극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특히 플레이스테이션 2(PlayStation 2)와 Xbox의 등장은 아케이드에서 콘솔 중심으로의 본격적인 이동을 촉진했으며, PC방 문화의 안착은 대전격투게임 플레이 무대 중심을 바꿔놓았다. 고해상도의 그래픽, 향상된 프레임 속도 등 기술적인 발전은 플레이어들에게 아케이드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몰입감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기술적 혁신은 아케이드 산업의 쇠퇴와도 관련 맺는다. 이와는 별개로 ‘바다이야기 사태’와 같은 사건으로 인해 이 시기 한국에서 아케이드의 위상이 급격히 하락하게 된 측면도 있다. 이는 대전격투게임 플레이어의 감소를 야기하는 한편, 가정 내에서의 게임 환경이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는 계기로 작용했다. 둘째, 온라인화와 네트워크 대전의 부상이다. 초고속 인터넷 보급 확대와 네트워크 기술의 발전은 대전격투게임의 플레이 양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된 온라인 대전 기능은 지리적 한계를 없애고 글로벌한 경쟁 구도를 형성했다. 특히 Xbox 라이브(Xbox Live)와 플레이스테이션 네트워크(PlayStation Network) 같은 플랫폼은 온라인 대전 환경을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온라인화는 단순한 환경 변화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격투게임에서 중요한 심리전과 반응속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롤백 넷코드(rollback netcode)와 같은 기술이 도입되었으며, 이는 보다 원활한 대전 환경을 제공하고 경쟁을 더욱 심화시켰다. 랭킹 시스템의 확립으로 경쟁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플레이어들 간의 실력 격차를 더욱 명확히 드러내면서 숙련된 소수의 ‘고인물’ 문화 형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변화의 양상들 기술 변화와 온라인화를 중심으로 대전격투게임은 사반세기 동안 여러 측면으로 변모해왔다. 첫째, 2D에서 3D 그래픽 중심으로 이동한 듯 보였던 대전격투게임 트렌드 속에서, 다시 2D 스타일이 부활하는 움직임이 발견된다. 2000년대 초 대전격투게임은 하드웨어의 발전과 함께 본격적인 3D 그래픽 기반으로 전환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철권>, <버추어 파이터>, <데드 오어 얼라이브(Dead or Alive)> 시리즈로, 이들은 다면체 기반의 입체적 전장과 움직임을 제공하면서 시각적 현실감을 극대화하였다. 동시에 2D 기반 대전격투게임들은 조금씩 비인기 타이틀로 밀려났다. <스트리트 파이터 3: 3rd 스트라이크(Street Fighter III: 3rd Strike, 1999)와 같은 2D 고전 명작들도 복잡한 메커니즘과 고난이도 탓에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러나 2008년 <스트리트 파이터 4>가 출시되면서 상황이 반전된다. 이 게임은 3D 모델링 기술을 사용하되 2D 게임 플레이를 유지하는 ‘2.5D’ 방식으로, 전통성과 현대성을 동시에 포섭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는 과거 팬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동시에 새로운 플레이어층도 유입시키는 전략이었다. 이후 <길티 기어 Xrd(Guilty Gear Xrd, 2013)>는 셀셰이디드 렌더링(cel shaded rendering) 기법을 통해 3D 모델로 2D 애니메이션과 같은 비주얼을 구현하여 비평적 호평과 상업적 성공을 모두 거두었으며, <드래곤 볼 파이터 Z(Dragon Ball Fighter Z, 2018)>는 애니메이션 IP를 기반으로 동일 기술을 적용해 폭넓은 플레이어 층을 확보하기도 했다. 이러한 기술적·미학적 변화에 대한 고려는 3D에서 2D로의 단순 복고가 아니라, 시각 스타일과 게임 플레이의 통합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둘째, 글로벌 시장 전략과 캐릭터 다양성의 강화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대전격투게임 캐릭터의 재현은 스테레오 타입의 단순 반복에 가까웠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 대전격투게임 제작사들은 캐릭터들의 다양성에 신경을 쓰고 있다. <철권 7(2017)>은 샤힌(사우디), 조시(필리핀), 라르스(스웨덴), 리로이(흑인 무술가) 등의 캐릭터를 도입하였고, 현지 언어(아랍어, 타갈로그어 등)를 사용하는 음성 연출도 탑재했다. 이는 외양적 다양성만이 아니라, 문화적 리얼리즘 구현이라는 새로운 방향성을 의미한다. 또한 캐릭터 성별과 체형의 다양성, 성격과 배경의 서사성도 중요해졌다. <스트리트 파이터 6>의 마농(프랑스 여성 유도 선수), <길티 기어 스트라이브(Guilty Gear Strive, 2021)>의 브리짓(트랜스젠더), <더 킹 오브 파이터즈 XV(The King of Fighters XV, 2022)>의 돌로레스(흑인 여성 샤먼) 등은 기존 남성 중심, 체격 중심의 캐릭터 구성을 넘어서려는 시도로 평가된다. 이러한 변화는 글로벌 시장 다변화 전략과 맞물리며, 문화 다양성과 포용성을 중시하는 게임산업의 흐름과도 연결된다. 이처럼 대전격투게임은 다문화적 접점으로 기능하는 장르로 변모하고 있다. 셋째, 싱글플레이 요소와 RPG적 시스템의 결합이다. 대전격투게임의 본질은 PvP 대결이지만, 플레이어층 확대를 위해 PvE 콘텐츠와 싱글플레이 요소가 강화되는 경향도 보인다. 대표적인 예는 <모탈 컴뱃(Mortal Kombat)> 시리즈의 시네마틱 스토리 모드다. 단순한 컷씬 삽입을 넘어, 할리우드식 내러티브 구조를 도입함으로써 기존 대전격투게임에 새로움을 더했다. 2023년 출시된 <스트리트 파이터 6>의 월드 투어 모드는 더 나아가 오픈월드 탐색, NPC 대전, 캐릭터 육성 시스템 등을 통합한 RPG형 콘텐츠를 구현하였다. 이러한 시도들을 통해 대전격투게임은 대전 외적인 플레이 구조에서도 기술 습득의 서사화, 성장의 게임 플레이화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또한 캐릭터 커스터마이징, 장비 아이템, 스탯 강화 등 RPG 요소는 기존 대전격투게임의 단순반복성을 완화하며, 플레이어의 새로운 정체성 형성 및 몰입 강화 기능을 수행한다. 대전격투게임이 경쟁 중심 장르에서 경쟁과 모험이 함께하는 장르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넷째,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커뮤니티로의 이행이다. 대전격투게임의 온라인화는 게임 플레이 방식뿐 아니라 커뮤니티 성격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과거 아케이드게임장 중심의 직접적인 대면 교류는 온라인 포럼, 소셜 미디어, 스트리밍 플랫폼과 같은 비대면 커뮤니티로 대체되었다. 이 변화는 커뮤니티의 글로벌화와 함께 플레이어 간 정보·전략 공유를 급격히 가속화시켰다. 그러나 온라인 커뮤니티의 성장은, 숙련된 플레이어 중심의 폐쇄적인 문화가 심화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특정 기술과 전략에 대한 집중적인 논의와 공유가 이루어지는 반면, 신규 플레이어들에게는 다소 배타적인 환경이 조성되면서, 결과적으로는 전체 플레이어층의 확장보다는 특정 그룹의 전문화가 더욱 강조되는 현상을 초래했다. 다섯째, e스포츠의 부상과 글로벌 경쟁문화 확산이다. 2000년대 들어 대전격투게임이 겪은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e스포츠화의 급격한 발전이다. EVO(Evolution Championship Series)와 같은 글로벌 대회가 본격화되면서, 대전격투게임은 전문성을 요구로 하는 종목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과정에서 전문 플레이어가 등장하고 스폰서십과 프로리그가 활성화되었고, 이는 게임의 기술적이고 전략적인 수준을 극도로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e스포츠의 발전은 격투게임의 위상을 높이고 새로운 플레이어를 유입시키는 긍정적 효과도 있었지만, 전문적이고 고도화된 경쟁 환경으로 인해 일반 플레이어와 전문 선수 사이의 간극을 넓히는 문제점도 함께 발생시켰다. 여섯째, 인디 개발자의 실험적 다양성 추구다. 2000년대 후반 이후, ‘스팀(Steam)’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유통 플랫폼의 확산과 유니티(Unity), 언리얼 엔진(Unreal Engine) 등과 같은 개발 툴의 민주화로 인해 인디게임 씬의 대전격투 장르로의 진입이 활발해졌다. 랩 제로 게임즈(Lab Zero Games)의 <스컬걸즈(Skullgirls, 2012)는 여성 중심 캐릭터, 복고풍 애니메이션 스타일, 커뮤니티 중심 업데이트 구조로 대전격투 장르의 실험성과 다양성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인디 팀 마네6(Mane6)에서 개발한 <뎀스 파이팅 허드(Them’s Fightin’ Herds, 2020)>는 원래 <마이 리틀 포니(My Little Pony)> 팬 게임으로 시작해 독자 IP로 전환된 사례로, 비주류 미학과 대중성의 융합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인디 대전격투게임들은 기술적 실험, 표현 양식의 다양화, 커뮤니티 참여 모델의 구현 등을 가능케 했으며, 기존 주류 대전격투게임의 방향에도 일정 영향을 미쳤다. 더불어 인디 개발자들은 커스터마이징, 모드 지원, 공개 개발 등의 방식을 통해 개방형 게임문화를 격투게임에 도입한 주체로도 평가할 수 있다. 앞으로의 사반세기 지난 25년 동안 대전격투게임의 변화는 기술 혁신과 온라인화의 토대 하에, 2D 스타일의 부활, 글로벌 시장 전략과 캐릭터 다양성의 강화, 싱글플레이 요소와 RPG적 시스템의 결합,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커뮤니티로의 이행, e스포츠의 부상과 글로벌 경쟁문화 확산, 인디 개발자의 실험적 다양성 추구 등 다양한 축에서 이뤄져 왔다. 이러한 변화는 대전격투게임의 대중화와 전문화를 동시에 만들어내면서 복잡한 문화적 현상으로 이어졌다. 앞으로의 대전격투게임은 기술 발전과 플레이어 문화의 상호작용 속에서 대중성과 전문성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과제를 계속 안고 나아갈 것이다. 대전격투게임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신규 플레이어 유입을 촉진하고, 동시에 숙련된 플레이어를 위한 깊이 있는 경험을 유지하는 전략적 접근이 요청된다. 물론 둘 간 조화를 이루기 위한 게임 디자인 차원의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 초보자들도 쉽게 즐길 수 있도록 복잡한 입력 없이도 주요기술을 사용할 수 있게끔 조작체계를 단순화한다거나,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IP와의 협업을 통해 대중성을 강화한다거나, e스포츠 이벤트와 스트리밍 플랫폼을 적극 활용해 장르 인지도를 높이거나, 기존의 플랫폼 제한을 넘어 여러 플랫폼(PC-콘솔-모바일 등)에서 크로스 플레이가 가능하게 하는 등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동시에 숙련된 플레이어들이 요구하는 깊이와 전략성까지 유지하려는 균형 잡힌 디자인을 추구함은 물론이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숙련된 플레이어와 신규 플레이어 간의 실력 간극이 완전히 좁혀지고 있지는 않지만, 앞으로의 25년 동안 대전격투게임이 보다 많은 사람이 함께 똑같이 즐기는 장르가 될 수 있을지 주목해 볼 만하다. Tags: 대전격투게임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 편집위원) 강신규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 편집위원. 게임, 방송, 만화, 팬덤 등 미디어/문화에 대해 연구한다. 저서로 <흔들리는 팬덤: 놀이에서 노동으로, 현실에서 가상으로>(2024), <서브컬처 비평>(2020), <아이피, 모든 이야기의 시작>(2021, 공저), <서드 라이프: 기술혁명 시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2020, 공저), <게임의 이론: 놀이에서 디지털게임까지>(2019, 공저) 등이, 논문으로 ‘이기지 않아도 재미있다: 부모-자녀 게임 플레이의 사회성과 행위성, 그리고 분투형 플레이’(2024), ‘커뮤니케이션을 소비하는 팬덤: 아이돌 팬 플랫폼과 팬덤의 재구성’(2022), ‘‘현질’은 어떻게 플레이가 되는가: 핵납금 게임 플레이어 심층인터뷰를 중심으로’(2022, 공저), ‘게임화하는 방송: 생산자적 텍스트에서 플레이어적 텍스트로’(2019) 등이 있다.
- 그들만의 게임 바깥에서 서성거리기 : 다크소울3과 ‘프롬갤’의 ‘요르시카 살해 전통’ (장려상)
다크소울3은 나의 첫 패키지 게임이었다. 유튜브를 돌아다니다 이 게임을 소개하는 영상을 우연히 접했다. 고딕 건물이 빛바랜 색감과 얽혀드는 게임 속 광경이 매력적이었고, 그렇게 난생처음으로 스팀 게임이라는 걸 구매해 봤다. 무턱대고 시작한 게임은 참 까다로웠다. 알고 보니 다크소울은 어려운 난이도로 이름이 높은 타이틀이었다. 이 게임의 디자인은 다양한 함정이나 어려운 전투를 활용해 플레이어에게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부각한다.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죽고 화면에 떠오르는 'You Died' 문구는 일종의 밈이 될 정도였다. < Back 그들만의 게임 바깥에서 서성거리기 : 다크소울3과 ‘프롬갤’의 ‘요르시카 살해 전통’ (장려상) 07 GG Vol. 22. 8. 10. 1. 암호 설정 fromgall, 그곳의 ‘전통’ 다크소울3은 나의 첫 패키지 게임이었다. 유튜브를 돌아다니다 이 게임을 소개하는 영상을 우연히 접했다. 고딕 건물이 빛바랜 색감과 얽혀드는 게임 속 광경이 매력적이었고, 그렇게 난생처음으로 스팀 게임이라는 걸 구매해 봤다. 무턱대고 시작한 게임은 참 까다로웠다. 알고 보니 다크소울은 어려운 난이도로 이름이 높은 타이틀이었다. 이 게임의 디자인은 다양한 함정이나 어려운 전투를 활용해 플레이어에게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부각한다.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죽고 화면에 떠오르는 'You Died' 문구는 일종의 밈이 될 정도였다. 튜토리얼 보스인 '군다'를 9번의 시도 끝에 잡았을 때, 나는 완전히 기진맥진해지고 말았다. 동시에 짜릿한 흥분이 온몸을 내달렸다. 거듭된 죽음 끝에 쟁취해낸 승리는 퍽 달콤했다. 그렇게 맵을 순차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는데, 공략을 봐도 내 힘으로 온전히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했다. 그러던 와중 '프롬 소프트웨어 갤러리(이하 : 프롬갤)'라는 사이트를 방문했다 이곳에서는 프롬 소프트웨어 사가 발매한 다크소울3을 좋아하는 플레이어들이 머무르고 있었다. 이들은 fromgall이라는 통일된 서버 비밀번호를 설정해 까다로운 보스나 맵을 협력해줬고, ‘복지’와 같은 이름으로 이제 막 게임을 시작한 뉴비에게 각종 템을 지원했다. 별도의 가입 절차 없이 익명으로도 글을 업로드할 수 있다는 갤러리의 특성은 이제 막 게임이라는 걸 시작한 당시의 나에게 더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눈팅 끝에 익명으로 도움 요청 글을 작성하기도 했다. 댓글은 바로 달렸다. “그었음.” 나는 프롬갤의 게시글을 훑으며 게임 관련 새로운 정보를 발견하기도 하고, 타인의 기묘한 플레이를 보며 즐거움을 얻기도 했다. 그러는 한편, 특정한 게시글은 어떤 순간에서 내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오히려 분리감을 느끼게 했다. 프롬갤의 '전통'이었다. ‘어떤 한 집단에서 꾸준히 전해져 내려오는 행위’라는 전통의 사전적 의미를 환기하듯, 다양한 사람이 게임 내에서 유사한 행위를 수행하고 그것을 인증하는 형식으로 게시글을 작성했다. 많은 갤러들은 이에 긍정적으로 동조함으로써 긴 수명을 유지했다. 이 특정한 게시글은 일정한 포맷을 갖고 있다. 그 골자는 이러하다. 요르시카라는 이름의 NPC가 있다. 이 NPC는 '암월의 검'이라는 계약을 주관한다. 플레이어는 그와 계약을 맺고 특정 아이템을 모아 바쳐 보상을 얻는다. 아이템을 얻는 조건은 상당히 까다롭기 때문에 지난한 노가다를 요한다. 모든 노가다를 마쳐 보상을 다 얻은 플레이어는 요르시카를 (창의적으로) 죽인다. 2. “요르시카 야발련아 드뎌끝났다” 1) 프롬갤에 게시된 글을 바탕으로 이 온라인 커뮤니티의 전통 포맷을 한 번 살펴보자. “요르시카 야발련아 드뎌끝났다”는 글은 프롬갤의 전통의 요소를 모두 갖췄다. ‘드뎌(드디어) 끝났다’는 부사와 동사를 통해 작성자가 요르시카와 계약-서약자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는 장치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작성자는 NPC의 이름 뒤로 디시인사이드에서 욕설 ‘시발’을 변용한 ‘야발년’을 결합하여 이 인물에게서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낸다. 캡쳐된 게임 화면에서 작성자의 캐릭터는 ‘탐욕의 낙인’이라는 머리 장비를 장착하고 있다. 이는 캐릭터의 발견력 스탯을 올려주는 장비로, 아이템 노가다 작업에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상자를 뒤집어 쓴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캐릭터의 모습은 그 자체로 노가다 행위를 증빙해준다. 다크소울3에서 발견력 스탯을 증가시키는 장비는 제한적으로 존재하므로 공물 노가다에 뛰어든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외관은 전형적인 구석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스크린샷 속 캐릭터의 모습은 작성자와 유사한 경험을 겪은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표상이 된다. 작성자는 이제 막 암월의 검 노가다를 끝냈다. 공물 아이템 30개를 모아왔을 때 요르시카가 이를 보상과 교환하며 출력하는 특수 대사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왼쪽 하단의 UI는 작성자의 캐릭터가 장착하고 있는 장비를 보여주는데, 윗칸은 주문 아이템이 할당된 자리이다. ‘암월의 빛의 검’이라고 적힌 흰 글씨는 스크린샷 속에서 캐릭터가 대검에 인챈트하고 있는 기적의 이름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기적은 암월의 검 계약의 최종 보상이다. 작성자는 대사를 확인했으며, 노가다의 보상을 획득했다. 따라서 프롬갤의 전통이란 곧 게임 내 성취를 인증하는 자리이기도 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요르시카라는 NPC가 인게임에서 제공할 수 있는 물리적(인벤토리에 기입되는) 인센티브를 모두 취득했다. 이제 다른 동기가 개입하지 않는 이상 그와의 관계를 지속할 이유가 없다. 이에 그는 요르시카로부터 받아낸 기적을 살해에 직접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요르시카 어금니 꽉 깨물어라..’는 문장은 막 행할 폭력을 예고한다. 그는 자기 캐릭터가 암월의 빛의 검 기적을 대검에 바르는 순간적인 모션을 포착함으로써 역동성을 강화하며 이미지를 끝맺는다. 한편으로 NPC를 어떻게 창의적으로 죽였는지는 글의 매력을 판가름하는 요소가 된다. 이 글에서 인용한 게시글의 작성자는 오른손에 로스릭 기사의 대검으로 요르시카를 가격하려 한다. 그런데 UI를 자세히 살펴보면 대검의 이미지 우측 상단에 빨간 X자가 표시되어 있다. 이는 작성자의 캐릭터가 대검 아이템을 장비하기 위한 최소한의 스탯을 갖지 않았다는 알림이자 경고다. 요구치를 충족하지 않은 장비는 제 성능을 낼 수 없으며 미진한 피해를 준다. ‘일부러 데미지 낮춰서 더 때릴꺼라는 생각은 안하십니까? 당신’이라는 타 갤러의 댓글은 일견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작성자의 행위에 개연성을 부여해준다. 타인이 내러티브를 붙여 해석해줌으로써 작성자의 게시글은 전통의 계보에 안착하는 데에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즉 전통이란 프롬갤이라는 온라인 커뮤니티 내에서 축적된 일정한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구성원들의 웃음을 유발하는 발화 형식이라고 바라볼 수 있다. 3. 게임에서의 죽음 문제 여기서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살해 행위 그 자체가 아니다. 율이 게임 플레이를 두고 “플레이어가 게임 내부의 규칙과 상호작용 하면서 그 자신의 목표, 레퍼토리, 선호를 추구하는 것”이라 정의한 바 있듯, 게임은 플레이어의 직접적인 개입을 필요로 한다. 플레이어의 상호작용과 몰입을 강화하기 위한 요소로써 죽음은 적극적으로 활용되어 왔다. 죽음은 지속해오던 모든 상태 일체로부터 정지되는 것이며, 존재의 소멸을 의미하는 영원한 단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게임 속 죽음은 플레이어가 규칙을 이해하게 해주는 수단이 된다. 특히나 RPG 게임과 같은 장르에서는 길을 막는 적을 제거하면서 특정한 장소에 도달하는 것을 가장 기본적인 게임 메커닉으로 차용해 왔다. 플레이어가 경험한 죽음은 내부 규칙을 이해할 단초가 되며, 피드백을 거쳐 적을 성공적으로 살해할 경우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역량을 높인다. 게임에서의 죽음은 바로 이 지점에서 플레이어 개인의 폭력성·사회성에 대한 우려와 만나기도 한다. 화면 속이지만 누군가를 찌르고, 때리고, 살해하는 행위는 규범과 법률 속에서 자란 교양 시민과는 반대 선상에 놓인 행위로 이해된다. 게리 영은 이를 STA(Symbolic Taboo Activity)로 설명한다. 이는 가상에서는 가능한 행위이나 현실에서는 법과 도덕에 의해 금지되는 행위들이라는 것이다 2) . 그러나 플레이어의 행동 범주를 설정하는 절대적인 배경으로 게임의 규칙이 존재한다. 특정한 행위를 유도하는 일련의 규칙이 있는 이상 이를 개인의 비도덕성 문제로 환원하기는 어렵다는 측면이 존재한다 3) . 실제로 요르시카를 죽여야만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인 '요르시카의 성령'은 강력한 살해 동기로 작동한다. 이렇게 바라보았을 때 단순히 요르시카를 죽이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주로 플레이어 개인이 그 게임 세계 내부에 시선을 두고 플레이를 수행하고 완결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특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는 놀이가 일상생활과 분리된 그 고유의 질서를 갖는다는 ‘매직 서클’의 의미를 환기한다. 4. 여기 ‘나쁜 남자’가 있다 프롬갤 전통이 갖는 독특한 지점은 커뮤니티에 전시하여 공유하는 과정에 있다. 전시는 게임 밖의 세계에 위치한 청중을 동반한다. 독특한 플레이는 화제성을 갖기 마련이다. 디시인사이드 갤러리의 인터페이스는 경우에는 ‘추천’을 받아 ‘개념글’로 올라가는 구조를 통해 화제성을 수치화한다. 존 스튜어트 밀의 위해 원칙과 같이 보편적인 범주로 규정된 것 이상으로 발휘된 폭력이 심저에서 불쾌감을 자극할 때, 게시글 아래에 달린 경악성의 댓글은 그가 수행한 괴멸적인 플레이에 대한 긍정적인 피드백으로 즐길 수 있다. 니스는 “부도덕한 것으로 여겨지는 행위에 참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일종의 즐거움을 준다”고 이야기한다. 4) 이 ‘나쁜 남자’와 같이 규범을 위협하는 존재에 자기를 동일시할 수 있는 데서 즐거움은 증폭된다. 전시는 보다 많은 관객을 동원할수록 좋다. 그러한 목적성을 갖고 특정한 라인을 따라 행위를 수행하게 되면 갤러들은 익숙한 내용에 익숙한 반응과 익숙한 호의를 내비친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플레이가 따라가야 할 일종의 포맷이 생기는 셈이다. 그렇게 형성된 게시판 내의 놀이 형식에 맞추어 나의 플레이를 만드는, 게임의 매직 서클 내외부를 넘나드는 상호작용이 발생한다. 프롬갤이라는 공동체 내의 동력이 게임 내 플레이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요르시카 야발련아 드뎌끝났다”에서 작성자는 NPC를 폭행하기 위해 대검을 선택했다. 대검이라는 무기 종은 프롬갤 내부에서 특정한 상징성을 갖는데, ‘상남자’라면 마땅히 들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떤 무기로 플레이하는지에 따라 ‘게이’와 ‘진짜 남자’를 구분하는 발화를 프롬갤 내에서 목격할 수 있다. 게이와 상남자의 구분을 통해 프롬갤이라는 공동체가 공유하는 남성성에 대한 상상을 엿볼 수 있다. 이를테면 직검과 방패의 조합을 의미하는 ‘직방’은 이상적인 남성성을 갖추지 못한 ‘게이’와 동의어로 활용되는데, 이는 구르기를 통해 공격을 피하는 대신 방패로 막아내는 게 남자답지 못한 행위로 여겨지는 탓이다. 대검을 들기 위해서는 캐릭터가 양손으로 칼자루를 쥐어야 한다. 방패를 들지 않고서 자신의 체격을 훨씬 상회 하는 무기를 든 캐릭터는 그 자체로 공세적인 인상을 준다. 그는 비열하게 방패 뒤로 숨지 않는 ‘진정한 사나이’나 다름없다. 이는 수잔 제퍼드가 레이건 시대의 할리우드 남성 재현을 설명하기 위해 표현한 ‘하드 바디’를 떠올리게 한다. “지치지 않는, 근육질의, 무적의 남성 육체”에 대한 환상을 바탕으로 프롬갤은 “자신의 뜻을 남에게 강요하기 위해 강화된 몸”을 꿈꾼다. 5) 그러는 한편 암월의 검 계약은 플레이어를 노가다로 인도하며, 그는 희박한 확률이 그저 터지기만을 바라면서 주체성을 상실한다. 플레이어는 무력한 확률 앞에서 억울함을 환기한다. 프롬갤의 갤러들은 이를 남성 섹슈얼리티의 문제로 치환하여 요르시카를 정복함으로써 주체성을 되찾으려 한다. 게시글 작성자의 캐릭터는 대검을 들 수 없는 스탯임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소화하기 힘든 장비를 들기를 고수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프롬갤이라는 집단 내부에서 설정된 남성성의 환상을 입고서 요르시카를 살해한 셈이다. 5. 밈 앞에서 웃지 못할 때 이길호는 디시인사이드에서 발생하는 게시물이 끝없이 분화하고 변형되는 과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생산물은 하나의 갤러리 안에서 생산된다. 그것은 갤러들 사이의 관계에서 결과적으로는 어느 특정 갤러의 결과물로 도출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생산물의 소스는 명백히 다른 갤러에게 제공받았다. 그것은 여러 갤러들의 손을 거치면서 변형을 맞는다. 최종적으로 하나의 갤러가 일종의 ‘완성본’을 내놓는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매 순간 새로운 변형의 힘을 통과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미완성’이다.” 6) 이러한 갤러리 내 생산물의 분화 과정은 밈의 발생과 활용 방식을 닮아있다. 본래 밈이란 리처드 도킨스가 특정한 문화 요소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도입한 문화 유전자의 개념이나 온라인 생활에서는 달리 통용된다. 주로 밈이란 “특정한 이미지, 영상, 대사나 어휘 등이 유행하면서 퍼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7) 밈의 재미가 “공동의 이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며, 이에 밈이 호응을 얻은 것은 “개인주의 시대에 나타나는 하나의 증상”이라는 분석이 존재한다. 8) 밈이 생산되는 환경은 디시인사이드 갤러리와 유사해 보인다. 갤러들은 모여든 게시판에서 해당 주제를 갖고 말하기 위해 존재한다. 친목질을 배제한다는 엄격한 수평 관계를 유지하며 그저 한 개인으로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디시인사이드의 게임 게시판이 유머러스한 공간으로 여겨진다면 그것은 게임 플레이라는 공감대를 나누는 과정에서 타 갤러와 동질감을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유머란 곧 집단 내부에서 통용되는 규율이나 사고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프롬갤의 요르시카 살해 전통에서 유머를 느낀다면 그것은 어째서인가? 또 유머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전통이라는 밈에서 유머를 느낄 수 없는 것은 그 속에서 프롬 갤러들이 발화하는 여성 혐오의 의미가 자연스럽게 이들 공동체 내부에서 승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요르시카를 살해하는 게시글은 2016년 다크소울3이 발매된 이래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주 개념글로 올라갔다. 2022년 프롬 소프트웨어의 신작인 엘든링이 출시된 이래, 엘든링의 열기를 즐기는 지금의 시점에서 요르시카를 죽이는 전통은 이제 개념글에서 찾아보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프롬갤의 전통을 전통으로 만들어낸 동원을 상실하지 않은 이상, 새로운 전통이 태어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다만 밈이 될 정도로 화제성을 가진 플레이가 아직 전시되지 않았을 뿐이다. 나쁜 남자가 되기 위해 안달 난 프롬갤 앞에서, 나는 그저 서성거리고 있다. 1) 권천. “[일반] 똥3)요르시카 야발련아 드뎌끝났다.” 2021.11.28.등록. 2022.06.02.접속. 프롬소프트웨어 마이너 갤러리.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fromsoftware&no=2383063&page=1 2) Young, G. (2019). Enacting immorality within gamespace: Where should we draw the line, and why? In A. Attrill-Smith, C. Fullwood, M. Keep, & D. J. Kuss (Eds.), The Oxford handbook of cyberpsychology (pp. 588–608). Oxford University Press. pp. 589. 3) 미구엘 시카트. 김겸섭 역. 컴퓨터 게임의 윤리(n.p.: 커뮤니케이션 북스, 2014 4) Young, G. (2019). Enacting immorality within gamespace: Where should we draw the line, and why? In A. Attrill-Smith, C. Fullwood, M. Keep, & D. J. Kuss (Eds.), The Oxford handbook of cyberpsychology (pp. 588–608). Oxford University Press. pp. 600. 5) 수잔 제퍼드. 이형식 역. 하드 바디(n.p.:동문선, 2002) 6) 이길호. 우리는 디씨. (2012). 이매진: 서울. 82쪽. 7) 정지우. “무엇이 밈이 되는가”. 민음사. 릿터(32). 14쪽. 8) 이자연. “밈 검열, 그게 진짜이긴 해?”. 민음사. 릿터(32). 30쪽.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김규리 자기 소개 :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데스티니2를 오래 즐겨왔고, 다음 작인 마라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익숙한 게임이 주는 재미와 낯선 경험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보려 고민하고 있습니다.
- 게임 인터페이스로서의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게임사회》 전시 리뷰
‘게임은 예술인가?’라는 질문이 다양한 담론장을 떠돌고 있다. 게임과 예술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행정과 법의 영역에서도 게임의 위상을 둘러싼 논의가 활발히 오가는 중이다. (물론 예술가, 행정가, 정치인, 사업가, 그리고 게이머 각각의 입장과 목표는 모두 다르겠지만) 이러한 정세에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게임 주제전은 중요한 기점이 될 것이기에 일단 《게임사회》라는 전시는 주목할 만하다. < Back 게임 인터페이스로서의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게임사회》 전시 리뷰 12 GG Vol. 23. 6. 10. ‘게임은 예술인가?’라는 질문이 다양한 담론장을 떠돌고 있다. 게임과 예술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행정과 법의 영역에서도 게임의 위상을 둘러싼 논의가 활발히 오가는 중이다. (물론 예술가, 행정가, 정치인, 사업가, 그리고 게이머 각각의 입장과 목표는 모두 다르겠지만) 이러한 정세에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게임 주제전은 중요한 기점이 될 것이기에 일단 《게임사회》라는 전시는 주목할 만하다. 국가가 운영하는 미술 기관에서 게임을 예술적 대상으로 직접 다루고, 나아가 게임 그 자체를 전시하는 것은 공식적인 선포가 아닐지라도 담론적 차원에서 어떠한 인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변기라도 미술관에 가져다 놓으면 미술 작품이 된다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처럼 게임을 미술관에서 전시했다는 것은 분명히 그것만으로도 중요한 사건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미술관에 전시되지 않더라도 게임은 이미 예술(적)이다. 사실 더 중요한 질문은 ‘왜 게임이 예술이 되어야 하는가’ 같은 것이 아닐까. 예술이라는 영역에 게임을 받아들이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예술의 입장과 게임의 입장은 또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전시 《게임사회》를 돌아보면서 이러한 질문에 답을 찾아보려한다. * 《게임사회》 전시 포스터 지금은 당연히 예술의 영역이라고 여겨지는 사진이나 영화 같은 매체들도 예술의 범주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저항이 있었다. 사진의 경우를 언급하고 넘어가면, 사진은 예술가 주체보다 기계가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사진 이미지의 기계적인 뚜렷함이 회화에 비하여 사진을 예술적이지 못하게 만든다는 인식이 팽배하기도 했다. 그래서 예술적 목적으로 사진을 다루는 작가들은 사진을 그림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해 연초점으로 사진의 선명도를 낮추거나 일부러 번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듯 사진은 회화와 결부된 특성들을 끊어내면서 독자적인 예술의 영역으로 인정받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장르의 고유성과 구분 자체가 모더니즘적이라는 것이지만) 그런 시기를 거쳐 사진이 예술의 맥락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지기 시작한 중요한 계기는, 지금 이 글에서 다루는 ‘전시’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사진이 미술관에 전시될 수 있는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시를 위해서 사진은 그 인터페이스의 구조를 변화시켰다. 사진은 원래 손에 들고 볼 수 있는 작은 액자나 책자 같은 인터페이스를 통해서 감상하는 매체였다. 그러나 사진이 예술로 편입되는 과정과 함께 기술이 발달하여 대형 필름을 통한 대형 인쇄가 가능해졌고, 그로 인해 사진도 다른 예술 매체들처럼 크게 벽에 걸어서 전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손에 들고 혼자 보는 사진이 아니라, 벽에 걸어 함께 볼 수 있는 사진이라는 인터페이스 차원의 변화는 사진이 예술로 받아들여지는 중요한 계기 중 하나가 된다. 무엇이든 미술관에 전시하면 다른 존재로 인식되는 레디메이드식의 위상 변화뿐만 아니라, 이렇게 실제로 인터페이스 차원의 변화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짚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그런 변화가 그 매체를 미술관에 전시하면서 발생하는 인터페이스 차원의 불화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손에 들고 보는 사진은 전시하기 적합하지 않은 매체였기 때문에 변화가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게임이 미술관에 전시될 때는 어떠한가. 오락실이나 PC방, 혹은 집에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경험과 전시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경험은 크게 다르다. 애초에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들의 목적이 다른 점도 짚어야겠지만, 게임을 ‘전시’하였을 때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점들이 있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근본적인 관람성의 문제부터, 플레이 시간의 문제, 나아가 게임 컨트롤러 차원의 인터페이스를 관객들에게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 등등. 이런 것들은 단지 화이트큐브 전시장을 오락실이나 PC방을 연상시키는 공간으로 디자인해서 해결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애초에 미술관은 게임을 전시하기에 적합한 인터페이스를 가지고 있지 않다. 더 근본적으로 게임은 전시되기 위해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전시에 적합하지 않은 매체를 전시하려고 하면서 발생하는 인터페이스 차원의 문제를 단순한 불화로 보지 않고, 예술과 게임 각각에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으로 파악할 수는 없을까. 여기에서 인터페이스는 단지 게임 컨트롤러 같은 하드웨어 장치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서로 다른 것이 마주한 면(face) 사이(inter-)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게임사회》는 이러한 문제를 적극적으로 고민할 수 있는 장을 열어낸다. 게임과 게임적인 예술 작업을 함께 전시하고, 무엇보다 하나의 게임을 전시할 때에도 서로 다른 인터페이스 사이를 오갈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전시는 인터페이스 차원에서 단지 보기 좋고, 가장 편안하고, 잘 작동하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는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대부분의 전시된 게임에 키보드와 마우스, 게임패드, 조이스틱 같은 전형적인 게임 인터페이스와 함께 접근성 컨트롤러를 함께 배치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실질적인 배리어프리 차원에서도 중요하겠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그런 문제에만 머물지 않는다. 일반적인 게임 컨트롤러가 익숙한 사람들에게 접근성 컨트롤러는 오히려 불편한 인터페이스가 된다. (아예 게임 컨트롤러가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에게는 일반적인 게임패드 역시 조작이 쉽지 않은 무언가라는 점도 짚어야 한다.) 이런 불편함이 오히려 인터페이스라는 문제 자체를 다시 감각할 수 있는 전시의 중요한 형식이 되는 것이다. 《게임사회》의 〈심시티 2000〉 전시 전경 게임과 게임적인 예술 작업을 오가는 전시 구성도 비슷한 맥락에서 서로 다른 것들 사이의 교차(inter-)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플라워〉 같은 제노바 첸의 게임을 플레이하다가 이어지는 공간 안쪽으로 들어서면 하룬 파로키의 〈시리어스 게임〉과 〈평행〉 시리즈를 만나게 되는 식이다. 하룬 파로키는 게임과 현실의 관계를 흥미로운 방식으로 포착하고 있기에 그 작업의 내용에서도 전시의 기획적 맥락을 심화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지금 글의 맥락에서 파로키가 더욱 중요한 지점은, 그가 영화라는 매체를 미술관에 들여오면서 발생하는 인터페이스 차원의 변화를 본격적으로 논의할 수 있게 만든 주요 작가 중 한명이라는 점이다. 하나의 영상을 하나의 스크린을 통해 단선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직접 서로 다른 화면들 사이를 오가면서 감상하는 멀티채널 작업은 영화를 극장이 아니라 전시장에 옮겨오면서 가능해진 인터페이스 차원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전시된 파로키의 작업들도 시리즈를 멀티 채널처럼 설치했고, 특히, 그의 또 다른 작업 〈인터페이스〉의 경우에는 자신이 찍었던 영상과 그것을 편집하는 인터페이스의 모습을 2채널 영상으로 담아내면서 무빙이미지에서 인터페이스 문제를 본격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영역을 열어내었다. *하룬 파로키, 〈시리어스 게임 I-IV〉, 2009-2010, 다채널 비디오 설치, 컬러, 사운드, Harun Farocki GbR 소장. 영상스틸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게임은 예술인가’ 당연히 예술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질문에 그냥 답을 해버리는 것보다 이러한 질문을 통해서 예술이라는 범주와 게임이라는 범주를 함께 성찰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게임적인 것을 통해서 예술의 범주와 그 규정에 균열이 일어나야 이러한 질문에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진과 미술이 교차되면서 제도적 분열뿐만 아니라, 인터페이스 차원의 변화가 발생했던 것처럼. 게임 역시 미술과 교차되고, 미술 제도가 게임을 받아들이면서 서로의 영역에 변화를 촉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게임의 인터페이스로서의 미술관의 문제는 게임과 미술 각각의 형식적인 문제에서 더 나아갈 지점이 있다. 미술관 제도가 게임이라는 기존과 다른 형식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업데이트되어야 하는 측면들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술관은 전시뿐만 아니라 소장을 위한 기관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게임이 미술계에서 중요하게 논의되기 시작한 기점은 이번 전시 맥락에서도 중요하게 언급되는 2010년 뉴욕 현대미술관이 게임을 소장품으로 받아들인 사건이다. 그러나 역사로 기록할 만한 문화적 산물로서의 게임을 소장하려면, 단지 담론적 차원의 투쟁뿐만 아니라, 기존의 미술관 소장품 시스템에 큰 변화가 필요할 것이다. 구체적인 물질이 아니라, 코드로 이루어진 소프트웨어를 소장하는 문제는 미술관의 기존 소장품 시스템과 불화한다. (심지어 게임이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인터페이스의 결합인 경우가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더) 이렇게 게임은 미술관이라는 인터페이스 자체를 성찰하고 업데이트할 계기를 만들 타자가 될 수 있다. 게임을 통해서 변화하는 미술관의 모습을 계속 상상한다. Tags: 전시, 미술관, 게임사회, 국립현대미술관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큐레이터, 미술비평가) 권태현 글을 쓰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예술계에서 활동하지만 쉽게 예술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것들에 항상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예술 바깥의 것들을 어떻게 예술 안쪽의 대상으로 사유할 수 있을지 탐구한다. 정치적인 것을 감각의 문제로 파악하는 관점에 무게를 두고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7000eichen@gmail.com )
- [북리뷰] 여성 게이머는 총을 쏠 수 있는가? 그리고 이 질문은 왜 중요한가?
이 책은 ‘여성 게이머는 총을 쏠 수 있는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에서 출발하여 게이머, 게임 캐릭터, 게임 산업 관련 종사자 앞에 ‘여성’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때 마주할 수밖에 없는 어려움과 불편함, 그리고 이런 문제들이 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해서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단순히 ‘이런 사례가 있고 그래서 나쁘다’는 식의 단편적인 나열이 아니라 앞서 밝힌 문제들이 어디에서부터 기인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면서 과연 지금까지 여성을 위한, 여성을 그린, 여성에 의한 게임이 존재하였는가에 대한 질문도 함께 던지고 있다. < Back [북리뷰] 여성 게이머는 총을 쏠 수 있는가? 그리고 이 질문은 왜 중요한가? 13 GG Vol. 23. 8. 10. 이 책은 ‘여성 게이머는 총을 쏠 수 있는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에서 출발하여 게이머, 게임 캐릭터, 게임 산업 관련 종사자 앞에 ‘여성’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때 마주할 수밖에 없는 어려움과 불편함, 그리고 이런 문제들이 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해서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단순히 ‘이런 사례가 있고 그래서 나쁘다’는 식의 단편적인 나열이 아니라 앞서 밝힌 문제들이 어디에서부터 기인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면서 과연 지금까지 여성을 위한, 여성을 그린, 여성에 의한 게임이 존재하였는가에 대한 질문도 함께 던지고 있다. ‘게임하는 여성’, ‘게임 속 여성’, ‘게임을 만드는 여성’ 들은 게임과 관련된 다 영역에서 눈에 띄는 양적 증가세를 보여 주었다. 그런데도 지금껏 주목받지 못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문제의식에 접근하기 위해 BJ갓건배와 클러저스 사건, 여성 게이머에 대한 비하적인 표현으로 시작한 ‘혜지’부터 게임 커뮤니티에 만연한 트롤링 문제, 게구리 선수의 실력 인증 논쟁, 게이머게이트 등 이 사회를 시끄럽게 뒤흔든 게임과 관련된 사건들을 사례로 들고 있다. 또한 이러한 사건들이 단순히 게임을 매개로 한 성별 간의 갈등에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그들이 설 자리는 어디인가?-‘초대받지 않은 침입자’ 이 책에서는 여성 게이머들에 대한 이야기를 메건 콘디스의 연구를 중심으로 ‘섹시한 보조’, ‘어리바리한 초보’, ‘게임 덕후인 척하는 거짓말쟁이’라는 세 가지 타입으로 분류하여 다루고 있다. 여성 게이머들은 이러한 전형적 이미지로 인해 게임 내에서 주로 ‘보조’일 (간주할) 뿐이다. 또한 진정한 게임을 즐기기 보다는 캐주얼 게임과 같은 ‘가짜 게임’을 주로 플레이하는 존재로, 종종 게임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받게 된다. 최상위급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게임을 능숙하게 플레이하는 여성 게이머는 과도한 동경과 추앙의 대상으로 포장되기도 하며 (‘여왕벌’), ‘그럴 수가 없다. 분명 무엇인가 꼼수를 사용했을 것이다.’라는 시선도 받게 된다. 이에 따라 여성 게이머들은 자신을 감추거나 ‘진짜 게이머’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게임을 플레이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여성 게이머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증명하고 인증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여성 게이머들이 자신들을 위한 영역이 아닌 곳에 불쑥 들어온 ‘초대받지 않은 침입자’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텔레비전의 광고에서 조차 이러한 이미지는 달라지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이 책에서는 게임 이용 조사 결과나 자료 등을 바탕으로 실제로 여성 게이머의 비율은 남성과 큰 차이가 없다는 재미있는 통계를 제시한다. 더불어 ‘진짜’ 게임이 아니라고 폄하되는 캐주얼 게임을 즐기는 인구가 더 많으며 이와 같은 경향은 성별과 연령에 상관없이 존재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러한 여성 게이머에 대한 시선이 비단 한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저자들은 ‘초대받지 않은 침입자’라는 라벨링으로 인해 여성 프로 게이머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 또한 크게 영향을 받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미 다양한 스포츠 분야에서 성별에 따른 능력 및 실력 차이에 대한 견고한 신화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여성 게이머가 남성 게이머에 비해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있다. 이는 게임을 논의할 때 기존의 신체적 혹은 물리적인 차이뿐만 아니라 특정 성 역할에 대한 편견과 인식이 우리 사회에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 책을 통해 저자들은 다수가 아닌 소수의 게이머들(혹은 소수로 폄하되고 있는 게이머들)에 대한 편견이 우리 사회 전반에 여전히 존재하기에, 이러한 편견과 차별 어린 시선이 여성 게이머들의 게임 즐기기와 경험을 어떤 식으로 방해하고 있으며 게임 커뮤니티 형성에 어떠한 걸림돌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진짜 게임’도 아니다-‘진짜’를 찾아라. 여성 게이머들은 종종 게임 커뮤니티에서 ‘진짜 게이머’가 아니라는 편견을 마주하게 된다는 사실은 앞서 살펴보았다. 저자들이 밝힌 바와 같이 남성 게이머들이 주로 플레이한다고 알려진 하드코어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열정적이고 진정한 게이머로서 인식되며, 여성 게이머들이 관심을 가지고 즐기는 것에 대한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거대해졌다. 여성 게이머들은 주로 ‘진짜 게임’이 아닌 ‘가짜 게임’을 좋아한다는 인식과 ‘진짜 게임’ 혹은 ‘진짜 게이머’에 대한 신념은 현재 우리의 게임 문화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저자들은 하드코어-캐주얼 게임이 명확히 정의된 것이 아니라는 예스파 율의 지적을 인용하며 “하드코어- 캐주얼 구분은 애초부터 명확하게 고정된 것도 아니지만, 현실에서의 반복적 용어 사용은 어느새 이 구분을 남성적-여성적 구조로 전이시켰다.”(71쪽) 고 지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식의 ‘진짜-가짜’, ‘남성-여성’과 같이 단순하게 이분화한 논쟁은 무의미하다고도 주장한다. 오히려 여성 게이머의 증가와 같은 이러한 일련의 변화가 게임도 게이머도 다양화되고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여는 현상으로 보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이 책에서 그리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진짜 게임’, ‘가짜 게임’을 논의하기에 앞서 ‘총을 쏠 수 있는지’를 묻는 불편한 환경 속에서 ‘진짜’ 게임을 즐길 수 있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다. 다양한 장르와 플레이 스타일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며 그 세계의 주류를 구성하고 있더라도 잘못된 관념이라면 언젠가는 깨고 반드시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누구를 위하여 재현하는가. 이 책에서는 게임 속 여성 캐릭터에 대한 잘못된 재현 방식과 편파적인 역할 배분, 그리고 라라 크로프트의 재현을 둘러싼 계속되었던 논쟁을 들어 게임 속 여성 캐릭터의 문제를 조명하고 있다. 저자들은 지금까지 여성 캐릭터 재현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이유 중 하나로 게임에서는 때때로 인간의 모습을 하지 않는 캐릭터가 등장하며 남녀 구분이 어려운 경우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초기의 픽셀 중심 그래픽과 비교하여 게임 그래픽 영역에서는 기술적으로 엄청난 발전이 이루어져 왔으며, 게임 캐릭터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도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 기존과는 다른 여성 캐릭터의 등장은 분명히 주목할 만한 새로운 흐름이다. 그런데도 이 책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여전히 게임 속 여성 캐릭터들은 쉽게 성적 대상화가 되거나 폭력, 착취를 받는 형태로 재현되곤 한다. 특히 저자들은 무분별한 재현의 양적 증가는 오히려 기존의 잘못된 고정적 이미지를 고착시키는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여성 재현 문제는 게임이 가지는 플레이라는 상호작용적 특성이 있기 때문에 단순한 시각적 이미지 재현 이상의 복잡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는 저자들이 설명한 것과 같이 “게임의 메카닉적인 요소와도 깊은 관련을 맺는다는 점”(132쪽) 을 인지해야 하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새로운 흐름을 ‘바로 지금’, 주의 깊게 살펴보는 작업이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게임은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다양한 상호작용을 만들고 그 사회의 문화와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는 동시에 새로운 가치를 모색하는 데에 중요한 미디어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고장난 파이프라인’이 아니다. 저자들은 게임 산업에서의 여성 노동자들이 대부분 핵심적인 업무와는 관련이 적은 일을 하는 이들로 인식되고 있다고 언급한다. 이러한 현상은 여성 게이머들 혹은 게임 내에 재현되는 여성 캐릭터들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여성 게임 개발자들이 경험하는 차별 사례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여성 게임 노동자들이 커리어를 이어 나가기 위해 겪는 어려움을 ‘고장 난 파이프라인’으로 비유하여, 이러한 문제들이 구조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지적한다. 저자들은 “성평등 의식이 높다고 평가받는 스웨덴에서조차 여성 게임 제작 노동자의 능력이 과소평가된다는 비판과 반성이 있었다. “게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게임을 만들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와 “여성은 진짜 게이머가 될 수 없다.”는 믿음이 결합해 남성 중심의 노동 문화를 형성했다는 것이다.”(211쪽)라는 설명을 통해 게임 산업 전체에 퍼져 있는 여성 노동자들이 겪는 차별, 능력에 대한 불신, 선입견 등의 문제들은 전 세계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게임 산업 여성 노동자들과 관련된 사례들은 분명 게임 업계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특정 성별의 노동자들이 다수인 직업군에서도 그와 비슷한 사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이렇게 게임 산업 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면서 우리 사회 전반에 대한 고찰을 함께 담으려고 시도한다. 이러한 노력이 게임 산업에 만연한 불평등과 편견을 조금씩 줄이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며 게임 산업의 고질적인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말이다. 게이머는 총을 쏴야만 하는가?-그 무엇도 강요하지 않는 게임 나라로 오세요. ‘여성 게이머는 총을 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이 책의 타이틀이자 저자들의 중요한 고찰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게임은 아이들을 ‘게임뇌’로 만들며 중독시키는 유치하고 저급한 문화로 여겨져 왔다. 또한 전자 오락실, PC방으로 대표되는 게임을 플레이하는 장소도 젊은 세대의 정신적, 신체적 건강에 유해한 기피의 대상이었다.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은 이 책의 주요 대상인 ‘게임하는 여성’, ‘게임 속 여성’, ‘게임을 만드는 여성’들을 향한 차별과 유사한 모습을 하고있다. 저자들은 약 290쪽에 걸쳐 이러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해체하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여성 게이머, 여성 캐릭터, 여성 게임 산업 노동자와 이들을 둘러싼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분석함으로써 지금까지 비주류로 소외되었던 이들을 포함하여 "즐거운 게임을 모두가 즐겁게 하기 위한"(280쪽) 다양성을 존중하고 포용할 수 있는 게임 문화 형성에 대한 논의로 확장하고자 한다. 상식적이지 않은 차별과 편견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자연스럽게 수용되고 당연시되어 가는 과정에 대한 비판적이고 성찰적인 의문과 논의가 게임 문화의 포용성을 높이며 게임 산업의 변화를 이끌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저자들이 “게임이 가장 대중적이고 가장 보편적인 일상적 여가·오락이 될 날이 머지않았다. 이미 도래했거나.”(269쪽)라고 언급한 것처럼 게임은 이제 더 이상 특정 성별이나 세대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진짜 게이머’와 ‘가짜 게이머’에 대한 논쟁 역시 게임 문화 속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과도기적인 현상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진정한 게이머’, ‘진짜’의 기준을 게임을 즐기는 방식이나 애정의 정도로 증명하는 것은 불필요한 것처럼 생각된다. ‘진짜’를 위해 혹은 ‘가짜’라는 비난을 피하려고 방아쇠를 당기거나 칼을 휘둘러 지금 플레이하고 있는 게임이 ‘진짜’ 게임인지, 게임에 대한 본인의 애정이 ‘찐’인지 아닌지를 물건의 진위를 감정받는 것처럼 증명할 필요는 없다. 여성 게이머라고 해서 특정 장르의 게임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총을 쏘는 것을 즐기는 게이머가 있다면 수집하고 레시피를 조합하여 음료를 만들거나 상자에서 꺼낸 물건을 차곡차곡 정리하는 행위를 무한반복 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으로 재미와 즐거움을 느끼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들을 누가 ‘진짜’ 게이머가 아니라고 그들이 플레이하는 것이 ‘진짜 게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많은 이들이 자신의 취향과 관심사를 자유롭게 표현하며, 이를 반영한 각기 다른 장르와 주제, 캐릭터를 다루는 게임을 접함으로써 비선형적인 경험을 확장할 수 있는 게임 문화를 위해 나아갈 시기라고 이 책은 우리 사회를 향해 이야기하고 있다. 모두가 총을 쏠 수 있지만 모두가 쏠 필요는 없으며 굳이 쏠 수 있는지 혹은 잘 쏘는지에 대한 증명이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환경에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그런 사회로, 더는 강요하고 차별하는 사회가 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는『여성 게이머는 총을 쏠 수 있는가?』는 당장 완전한 해결책을 제안하지는 않지만 새로운 게임 문화를 위한 논의의 출발점을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큰 의의를 가진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리츠메이칸대학 기누가사 종합 연구 기구 전문 연구원) 신주형 주로 시리어스 게임과 시리어스 게임을 플레이하는 장소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리츠메이칸대학 게임 연구 센터 (RCGS)의 게임 아카이빙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고 있다.
- 판단하고 행동하는 효율의 <피크민 4>
프라스카를 포함한 루돌로지스트 관점에서의 분석대로 비디오 게임은 일종의 시뮬레이션이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디지털digital의 시뮬레이션이라는 점이 핵심이다. 본질적으로 비디오 게임은 세계를 어느 정도 계산 가능한 것digit으로 치환해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비디오 게임의 세계는 숫자로 치환된 현실을 가진다. 이것은 디지털 게임에 있어 불변의 조건이다. < Back 판단하고 행동하는 효율의 <피크민 4> 18 GG Vol. 24. 6. 10. 수치적 접근과 감각적 접근 프라스카를 포함한 루돌로지스트 관점에서의 분석대로 비디오 게임은 일종의 시뮬레이션이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디지털digital의 시뮬레이션이라는 점이 핵심이다. 본질적으로 비디오 게임은 세계를 어느 정도 계산 가능한 것digit으로 치환해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비디오 게임의 세계는 숫자로 치환된 현실을 가진다. 이것은 디지털 게임에 있어 불변의 조건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디지털 게임의 총체가 숫자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 우리가 디지털 게임과 접촉하는 접면surface은 수치적 정보와 감각적 정보의 혼합물이다. 캐릭터는 힘 18과 민첩 14와 지능 8으로 이루어지지만 한편으로는 외형 등의 시각적 정보와 (게임에 따라서는) 목소리 등을 통한 청각적 정보로 이루어지는 감각적 규정도 동시에 가진다. <슈퍼마리오 브라더스>의 굼바는 한 번의 점프로 죽일 수 있을 정도의 체력, 수치적으로 규정된 속도, 지향성의 운동 알고리즘을 가진 존재이며 동시에 도끼눈을 하고 마리오를 죽이기 위해 덤벼드는 괴물이기도 하다. 이런 조건에서 다음의 질문을 떠올릴 수 있다. 수치가 감각에 복종하는가, 아니면 감각이 수치에 복종하는가. 여기에 명백한 대답은 불가능하다. 차라리 비디오 게임이란 수치와 감각이 일으키는 긴장의 중심에 존재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저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서 하나의 축이 다른 축을 앞지를 수 있다. 요컨대 게이머들 사이에서 유통되는 ‘효율론’의 경우, 전적으로 수치가 감각보다 높은 층위를 차지하는 전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치가 감각을 완전히 소멸시키지는 않는다.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강캐를 애캐로 삼으면 된다.’는 유쾌한 레토릭이 떠돌아다닌다.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강한 캐릭터가 아닐 때 생기는 안타까움을 역설적으로 논하는 일종의 해학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중요한 건, 결국 ‘강캐’에 대한 메타적 접근(=수치적 접근) 조차도 ‘애캐’에 대한 친밀감의 접근(=감각적 접근)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명규의 서술대로 특정 캐릭터와의 연애를 하기 위해서라면 게임의 재시작조차 불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 감각적 접근이란 말 그대로 ‘감각적’ 접근이다. 플레이어는 어느 때에 대상으로부터 감각적 친밀감을 얻는가? 그것은 감각적으로 접촉할 수 있을 때다. 요컨데 찰리 채플린의 그 명언,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의 작동이 비디오 게임에서도 일부 유효하다는 것이다. 플레이어가 인물에게 접근할 때, 요컨대 그 대상의 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을 때 감각적 인식의 가능성은 오른다. 따라서 게임이 규정하는 고정된 시점을 벗어나 캐릭터를 다양한 방향에서 비추어는 컷씬은 일거에 감각 접근을 수치 접근보다 앞지르게 만드는 효과를 준다. 그 외에도 음성의 삽입을 통한 청각의 접근, 진동 등의 기능을 통한 촉각적 접근은 나와 대상이 연결될 수 있다는 감각적 가능성을 증가시켜 준다. 많이 배제되는 경향이긴 하지만, 비디오 게임에서 촉각은 특별한 위치를 점한다. 비디오 게임을 여타 매체와 차별화시키는 감각이 바로 촉각이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는 (동작 인식 센서를 활용하는 게임이 아닌 이상에야) 결국 컨트롤러를 ‘손으로 잡고’ 버튼을 ‘손가락으로 눌러야’ 대상과 연결된다. 조금 과하게 표현하자면 컨트롤러는 <스타크래프트>나 영화 <아바타>에 등장하는 신경삭Nerve cord [2] 같기도 하다. 나와 게임이 연결되는 접촉의 연결지점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의 손으로부터 뻗어나간 신경삭이 게임 내부의 무엇과 연결되어 있느냐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다. 요컨대 (대부분의 액션 게임들처럼) 특정한 인간과 연결되어 있는 것인가, 아니면 (대부분의 시뮬레이션 게임들처럼)확인 불가능한 가상의 신적god-like 존재와 연결되어 있는 것인가. * 그림 1 : 코에이의 <삼국지 14> 이에 비추어 보자면 대부분의 시뮬레이션 게임들이 극도의 효율적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배경에는 단순히 인구 혹은 전력戰力 따위로 수치되는 경향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플레이어의 인지가 대상(=유닛)과 감각적으로 유리되어 있다는 전제도 함께 작동한다. 특히나 특별히 어떠한 인물이라 특정할 수 없는 매니저 혹은 전략 지도자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한 가상적 부표, 즉 커서는 그 전달 대상과의 촉각적 접촉을 완전히 끊어버린다. 이 때 유닛이란 신경삭으로 연결되지 않은 감각 바깥의 존재들이며 따라서 이들의 생존 혹은 고용 상태 같은 것도 어디까지나 가상적 감각으로 체화된다. 그들과 거리가 멀어질 수록, 요컨대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처럼 병사 1의 존재를 절대 인지할 수 없을 정도의 단절이 발생한다면 결코 생명의 수치로 환원되지 않는다. <삼국지>의 전투 중 부대와 부대의 싸움으로 100의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우리에겐 100명의 부상 혹은 사망으로 인지되지 않는다. <피크민4>와 접촉의 메커니즘 닌텐도의 <피크민 4>는 2024년 TGA에서 최고의 시뮬레이션/전략 게임Best Sim/Strategy Award를 수상했다. <피크민> 시리즈의 장르는 제작사에 의해 AI액션AIアクション [3] 으로 분류되고 있으나, 정확히 액션의 문법을 따르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모호한 지점이 있다. 오히려 TGA의 수상이 말해주듯,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공간 내에서 유닛을 ‘생산’하고, 업무적 분류에 따라 ‘명령’하는 실시간 전략RTS:Real Time Strategy에 가까운 문법을 가진다. 다만 목표가 적진의 괴멸이 아닌 물건의 수집이라는 점, 건설의 개념이 없다는 점, 자원 수집과 생산 명령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타의 RTS와는 다른 감각을 줄 뿐이다. 그럼에도 유닛을 어떻게 분리하고 운영할 것인가라는 측면에서 RTS의 전략을 상당히 공유한다. 그런 면에서 <피크민 4>를 RTS로 구분하는 것이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게임이 부분적으로 ‘액션’으로 구분되는 이유는 세계를 비추는 방식이 신적이기보다는 인물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피크민> 시리즈에는 RTS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커서의 메커니즘이 배제되어 있다. 플레이어는 ‘주인공’으로 규정되는 중요 캐릭터 [4] 를 직접 조작해 유닛인 피크민들에게 명령을 내려야 한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가상적 부표가 아닌 명백히 물리적인 주체와 신경삭으로 연결되는 경험을 거치고, 시뮬레이션 일반과 상이한 감각을 느끼게 된다. 특히 유닛을 운용하는 가장 기초적인 메커니즘이 대상이 되는 피크민을 ‘들어 던지는’, 상당히 밀도 높은 물리적인 접촉 형태를 취한다. * 그림 2 : <피크민> 시리즈에는 언제나 피크민의 손실에 대한 상실의 메시지가 존재한다. <피크민> 시리즈의 독특함은 바로 이 접촉의 메커니즘에서 나온다. 전략적 판단을 전제로 하는 전략 게임의 세계임에도 개별 유닛 하나하나와 직접 접촉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각각의 피크민은 <스타크래프트> 같은 RTS의 유닛 일반과는 전혀 다른 존재감을 갖는다. 이들은 명백히 살아있으며, 자신들만의 생태가 있고, 때로는 죽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명령에 헌신하며 잘못된 판단은 이들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 특히 피크민의 죽음은 시체 위로 승천하는 영혼으로 표현된다. 만화적 유쾌함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고체적’ 성질에서 부유하다 사라져버리는 ‘기체적’ 성질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피크민> 시리즈는 RTS로서는 이례적으로 개별적 유닛의 실존을 강력하게 표출한다. 효율과 계획력 * 그림 3 : 피크민은 스스로 놀지 않는다. 오직 플레이어가 그들을 놀리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피크민 4>에는 ‘계획력’이라는 개념이 강조된다. 작품은 계획력을 ‘순서를 생각해서 효율 좋게 작업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게임 내적으로는 피크민의 분산적 운용과 쉼없는 컨트롤을 통한 시간대비의 효율적인 움직임을 총칭하는 단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피크민 4>는 표면적으로 효율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 효율은 전적으로 현재 보편적으로 유통되는 의미, 즉 감각을 앞지르는 수치의 전면화와는 근본을 달리하는 개념이다. <피크민 4>는 효율적인 수치보다는 효율적인 움직임을 강조한다. 앞서 구분했던 대로 수치와 감각의 개념으로 치환해 보자면, <피크민 4>가 강조하는 효율은 감각의 운용에 가깝다. 비록 게임은 몇 종/마리의 피크민과 동행 중인가 하는 수치적 스테이터스를 표시하긴 하지만, 이 수치의 효과는 전적으로 플레이어가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하는가에 따라 극도로 변화한다. 이 변곡이 바로 본작이 추구하는 ‘계획력’이다. 이 감각적 효율 추구는 대상에 대한 전적인 친화를 기반으로 한다. 요컨대 여기에는 덜 효율적인 수치에 대한 배제 또는 제거의 행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피크민 4>의 효율은 오직 하나의 기준을 통해서만 작동한다. 그것은 플레이어의 감각 활용이며, 조금 더 물리적으로 말하자면 쉼없는 판단과 움직임의 동원이다. 이러한 규정에 의해 성패의 거시적 판단이 확고해진다. 요컨대 <피크민> 시리즈에는 ‘유닛이 약하기 때문에’ 실패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시리즈에서의 실패는 오직 플레이어의 상황과 능력에 대한 오판, 비전략적 혹은 비효율적 움직임 등으로만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실패의 결과는 피크민이라는 생명의 소실로 연결되는 치명적인 감각의 실패를 낳는다. 전략 시뮬레이션이란 결국 매니지먼트의 시뮬레이션이다. 유닛으로 총칭되는 병력과 병기에 대한 관리가 그 규칙의 체계를 구성하는 장르인 것이다. 하지만 때로 비디오 게임의 매니지먼트는 지나치게 감각의 세계를 배제하곤 한다. 실패는 냉엄한 수치의 손실인 것 뿐인가? 혹은 패배의 원인은 수치적 불완전성, ‘더 뛰어나지 못한’ 관리의 대상이 포함되었기 때문인가? <피크민> 시리즈는 이러한 수치 매니지먼트 또는 효율론의 한계 지점을 가로질러 매니지먼트의 가장 기초적인 원리로 되돌아간다. <피크민 4>는 계획력이라는 단어를 경유해, 플레이어로 하여금 매니지먼트의 본질에 대해 설파한다. 스스로 판단하고 직접 행동하라. 바로 이것이 매니지먼트의 효율이며, 그것은 감각의 무게다. [5] * 그림 4 : 계획력이란 순서를 생각해서 효율좋게 작업하는 능력을 말한다. 일상생활에서도 계획력을 발휘하는 습관을 들이면 좋을 것이다. [1] 「게임의 로맨스가 진짜 사랑은 아니지만 중요해, CRPG의 로맨스」 (이명규, GG 16호) [2] 이 두 작품에서 신경삭은 모두 다른 존재와의 정신적 연결을 위한 기관으로 등장한다. 특히 <아바타>에서는 신경 다발을 물리적으로 연결하는 장면이 다수 나온다. [3] 정확히 말하면 전작인 <피크민 3>까지 이러한 장르명으로 규정한다. [4] 전작들인 1편과 2편에는 올리마를 단독으로 조작했으며 3편에서는 알프, 브리트니, 찰리라는 3인 팀을 교체하며 조작할 수 있었다. 4편에서는 플레이어가 직접 제작한 캐릭터를 사용한다. [5] <피크민 4>의 로딩 스크린에 나오는 문구 중에는 일상생활에서도 계획력을 발휘하는 습관을 들여보라는 내용이 있다. 이러한 사유를 현실에까지 연장시키고 싶다는 바람의 투영같기도 하다. Tags: 피크민, 감각, 시뮬레이션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평론가) 이선인 만화와 게임, 영화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합니다. MMORPG를 제외한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클리어가 라이프 워크입니다. 스팀덱을 주로 사용합니다.
- <로블록스>에서 어린이는 어떻게 생활하는가?
<디지털 시민교육을 위한 어린이 미디어 생활 연구: 로블록스에서 어린이는 어떻게 생활하는가?>는 로블록스에서의 어린의 삶을 이해한 후, 비로소 의미있는 디지털 시민교육이 가능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다. 전국미디어리터러시교사협회(KATOM) 소속인 교사 및 연구자들은 직접 로블록스 이용자를 대상으로 로블록스 속 어린이의 삶을 질적연구방법론으로 분석하였다. 이 글에서는 위 보고서를 인용해 로블록스에서의 어린이의 삶을 살펴보고자 한다. < Back <로블록스>에서 어린이는 어떻게 생활하는가? 25 GG Vol. 25. 8. 10. 교육의 가장 큰 목적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면, 디지털 미디어 교육에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어린이의 미디어 속 삶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 그들의 삶과 문제상황들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초등학생의 미디어 이용 중 가장 주목해야 할 플랫폼은 로블록스이다. 로블록스는 2023년 기준(2023, 한국언론진흥재단) 초등학생의 90%가 이용하는 플랫폼이며 10대에서는 남녀 상관없이 유튜브, 카카오톡에 이어 이용률이 가장 높다. 이용률 면에서도 주목해야 하지만, 로블록스는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고등학생까지, 모든 성별이 함께 이용하는 ‘메타버스’ 기반 게임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린이들은 로블록스 안에서 살아간다. <디지털 시민교육을 위한 어린이 미디어 생활 연구: 로블록스에서 어린이는 어떻게 생활하는가?>는 로블록스에서의 어린이의 삶을 이해한 후, 비로소 의미있는 디지털 시민교육이 가능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다. 전국미디어리터러시교사협회(KATOM) 소속인 교사 및 연구자들은 직접 로블록스 이용자를 대상으로 로블록스 속 어린이의 삶을 질적연구방법론으로 분석하였다. 이 글에서는 위 보고서를 인용해 로블록스에서의 어린이의 삶을 살펴보고자 한다. 어린이들의 온라인 놀이터, 그리고 작은 지구촌 로블록스가 어린이들에게 중요한 플랫폼이 된 것은 팬더믹 시기 이후이다. 이 시기에 전 세계적으로 고립된 어린이들은 로블록스 안에서 만나 놀이를 시작했다. 그리고 팬더믹 시기가 끝났지만 로블록스 공간은 어린이들의 온라인 놀이터로 살아남았다. 일상 속에 정착한 스마트기기 덕분이기도 했지만 사교육으로 부족해진 공동의 놀이 시간, 소음에 대해 늘 조심해야 하는 공동거주공간의 특성, 안전한 놀이공간을 확보하기 어려운 도시공간 등 다양한 요인이 어린이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오프라인 놀이터를 포기하고 온라인 놀이터를 선택하게 했다. 로블록스는 밤 늦게라도, 잠깐이라도 어린이들이 모여서 놀이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해외로 어학연수를 가거나 멀리 이사를 간 친구, 진학으로 멀어진 친구들과도 어린이들은 로블록스 안에서 만날 수 있다. 어린이들은 로블록스 공간 안에서 친구들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 만으로도 힐링이 된다고 한다. 서희(11, 여)가 그린 로블록스 경험은 놀이공원처럼 표현되었다. 소통과 어울림은 로블록스 경험의 중심에 있다. 어린이들이 로블록스 안에서 만나는 것은 친구나 가족뿐인 것은 아니다. 로블록스는 온라인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장이다. 진희(12, 여)는 로블록스에서 만난 온라인 친구와의 만남이 준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진희는 어린이들이 많이 경험하는 점프맵에서 처음 본 사람들과 함께 게임을 했다.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함께 놀아주고 플레이할 때 기다려 주는 등 배려해 주면서 유대를 쌓았으며 이것은 즐거운 경험이었다. 많은 어린이들은 로블록스 안에서 친해진 온라인 친구를 여럿 가지고 있다.플레이어들의 다양성은 어린이들에게 국제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완전 핫하게 꾸민 스킨’이나 매너를 잘 지킨다는 이유로 외국인을 선호하는 어린이들도 있다. 특별히 영어를 잘 못해도, 바디랭귀지와 이모트, VR 등을 통해 소통은 충분히 가능하다. 특히 스킨은 로블록스에서의 중요한 비언어적 소통수단이다. 어린이들은 모르는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스킨을 이용해 상대방의 정체성을 파악하고, 자신을 표현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다 보니, 무료스킨만으로 자신을 꾸미다가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거나 이유없이 욕을 먹을 수도 있다는 불문율도 어린이들 사이에 있다. 여러모로 로블록스에서의 삶 역시 비용이 드는 사회생활인 것이다. 로블록스에서의 부정적 경험들 무료 스킨의 일화에서 드러나듯, 모르는 사람들과의 만남엔 부정적 경험도 있다. 어린이들이 가장 많이 호소하는 것은 폭력적 이용자들이다. 어린이들은 유독 한국 이용자들이 이런 특성이 많다고 호소한다. 게임을 하다가, 아이템을 거래하다가 이들은 폭력적으로 행동한다. 소통을 시도하다가 잘 안되어서 자리를 피하면 끝까지 쫓아와 욕을 하는 이용자도 있다. 어린이들은 이런 상황들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고 한다. 게임 중 갑자기 욕을 먹은 경험 (김민아, 10, 여) 저학년 어린이들은 이런 일이 있을 때 자리를 피하거나 게임을 중단해 버리지만, 같이 맞서서 욕을 하거나 싸우는 어린이도 적지 않다. 게임 공간 안에서 폭력적 문화가 대물림되는 과정이다. ‘어드민’ 의 괴롭힘은 보다 적극적인 괴롭힘이다. Free Admin 게임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어드민 권한을 가질 수 있는데, 어드민 등급이 로벅스 가격에 의해 결정되다보니 본래의 취지와는 다르게 높은 등급의 어드민 이용자들이 다른 이용자들을 괴롭히거나 죽이는 명령어를 적용시켜 게임을 못하게 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재윤(11, 여)은 ‘로블록스에 대한 내 생각’을 마인드맵으로 표현하였는데, ‘맵’ 키워드와 관련하여 경험한 기분나쁜 경험에 대한 생각을 가득 적었다. 어린이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점프맵’과 관련하여, ‘어드민이 많다.’, ‘나쁜 어드민’, ‘게임을 못하게 맵을 망가트린다.’ 등의 진술이 반복된다. 고은은 어드민처럼 보이는 사람이 못 가게 하더니 욕을 했고, 쫓아오면서 욕을 하길래 같이 욕을 했더니 그 사람이 신고를 해서 계정이 정지되었다. 이런 일은 종종 있다. 어린이들이 경험하는 또 다른 충격적인 경험은 ‘사기’ 이다. 위의 재윤의 마인드맵에도, 다른 어린이들의 만화에도 사기 경험은 가장 높은 빈도수로 나타난다. ‘입양하세요’ 게임에서 이런 일이 특히 빈번하게 일어난다. 아원(16, 여)은 초등학교때 열심히 키우던 닭이 있었다. 그런데 어떤 이용자가 다가와서 좋은 아이템으로 바꾸어준다고 했다. 그런데 그 이용자는 닭을 받고 사라져버렸다. ‘실감이 안난다.’ ‘현실을 부정한다.’ ‘게임에서 열심히 번 것이어서 주저앉아 운다.’ 사기는 어린이들이 게임 공간에 들인 노력과 마음을 한 순간에 무너트린다. 로벅스가 만드는 삶의 고난 이런 문제들은 오프라인 공간과 마찬가지로 어린이들의 삶의 공간이 무료가 아니라는 지극히 냉정한 현실에 기인한다. 로블록스는 로벅스 경제의 토대 위에 세워져 있고, 무료 포인트나 이벤트 등은 없다. 이상적으로는 이러한 로벅스 경제는 어린이들이 광고 없이 디지털 미디어 공간에서 건전한 경제생활을 연습할 수 있는 경험의 토대가 되겠지만, 이용자 중심의 로벅스 세계, 그리고 어린이들의 게임 머니를 통제하는 양육 관행은 어린이들을 로블록스 세계의 경제적 약자로 만들었다. 어린이들의 로블록스 경험에서는 앞서 언급한 ‘사기’ 외에도 ‘구걸’, ‘기부’. ‘노동’ 등의 키워드가 공통적으로, 그리고 높은 빈도수로 나타난다. 오프라인에서라면 아동권리 보호차원에서라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온라인에서는 그런 보호가 없다. 미디어 기업 대 이용자의 관계가 아닌, 이용자와 이용자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플리즈 도네이트’ 게임은 기부를 위해 찾는 게임이다. 이곳에서는 기부, 즉 로벅스를 주고받는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진다. 무과금 유저인 어린이들은 게임을 하고, 점프를 하고, 리액션을 하면서 로벅스를 기부받고 남는 로벅스를 기부하기도 한다. 인터뷰에 응한 어린이들은 이것을 ‘노동’이라고 표현했다. 재미있으려고 플레이하는 것이 아니라 로벅스를 얻기 위해 무의미한 플레이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을 하고도 댓가를 받지 못하는 일도 많다. 현수(11, 여)는 이것을 공사장에서 노동을 했는데 월급을 못 받는 것과도 같다고 했다. 심지어 로벅스를 기부해달라고 ‘구걸’을 하는 일도 빈번하다. 기성세대가 듣기에 충격적인 이러한 일화들은 어린이들의 일상이다. 유엔아동권리협약에서는 2021년 일반논평 제 25호를 통해 디지털 환경에서의 아동권리 또한 오프라인과 마찬가지로 적용된다는 것을 발표하였으나, 디지털 미디어 환경은 아직 정글에 가깝다. 디지털 시민의식, 그리고 온라인에서의 아동 권리 로블록스 경험 속에 포함된 부정적 경험들에 대해 기성세대들이 가장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점은 접근을 차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차단은 근본적으로 디지털 미디어에서의 삶을 막을 수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해결방법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잃는 결과를 가져온다 또한 이것은 어린이들이 미디어 안에서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소통과 즐거움의 기회, 그리고 미디어 이용자로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는 권리 침해에 해당한다. 다양한 경험과 시행착오 안에서 어린이들은 미디어 정글 안에서 살아갈 방법을 고민하고, 삶의 지식을 얻는다. 연구에 참여한 어린이들은 면담 전에는 노동, 혐오와 차별, 성적 대상화, 상업적 이용, 언어폭력 등 많은 문제들을 권리침해로 인식하지 못했지만 면담과 선생님과의 대화를 거치면서 로블록스에서 만난 위기에 대처하거나, 악성 이용자를 차단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고 말해주었다. 나중에 찾아와서 나쁜 이용자를 차단한 이야기를 해 준 어린이도 있었다. 그래서, 어린이들은 디지털 시민교육이 좋은 로블록스 세계를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로블록스는 자신들에게 소중한 공간이니, 서로서로 약속을 잘 지켜서 로블록스를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어른들의 도움이다. 어른들은 보호자이기도 하지만, 로블록스와 같은 디지털 세계를 구성하는 이용자들이며, 아이들에게는 미디어 안의 강자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민의식이 어린이 청소년 뿐 아니라 모든 미디어 이용자들에게 필요한 중요한 이유이다. 이 연구는 로블록스 본사에 전달되어, 어린이들의 의견들은 일부 새로운 정책에 적용되었다. 교사, 학부모, 어린이를 위한 가이드북 [1] 이 만들어지고, 로블록스의 신고기능을 강화하고, 필터를 없애는 대신 채팅기능을 연령별로 차단하는 등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어린이들의 경험이 지금 이 글처럼 더 많은 이용자들에게 공유되고, 게임 교육에 대한 인식 개선을 이끌어내는 것일 듯 하다. 디지털 시민들의 노력을 통해 더 안전한 어린이들의 놀이터가 되길 기대한다. [1] 로블록스-디지털 시민교육 가이드북은 KATOM 홈페이지( katom.me )에서 다운로드받을 수 있다. 참고문헌 박유신, 김아미, 김세진, 김완수, 김원영, 박소현, 서용리, 양철진, 하윤영, 차은영(2023) 「디지털 시민교육을 위한 어린이 미디어 생활 연구: 로블록스에서 어린이는 어떻게 생활하는가?」, 전국미디어리터러시교사협회 Tags: 미디어리터러시, 교육, 어린이, 로블록스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교사) 박유신 초등학교 교사이며, 미디어와 교육 연구자이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 게임, AI에 이르기까지, 어린이들의 디지털 미디어에서의 삶과 문화를 인정하는 것이 교육의 기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더 알고 싶어하지만 쉽지 않다. 전국미디어리터러시교사협회에서 회장직을 수행중이다.
- [논문세미나] '스트리트파이터'는 무술martial arts인가?
그리고 그 운용기술, 다시말해 주어진 텍스트를 받아들이는 수용자의 관념과 자세에서 존스는 70년대 무술영화 붐과 2000년대 대전격투 게임이 같은 맥락에 선다고 분석한다. 오늘날 현대 격투기에서 사실상 중국 전통무술의 실전성은 파훼되었지만, 7-80년대에 이소룡 영화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동양무술은 북미에서 실제로 무술 도장의 붐을 이끌어냈고 수많은 청년들로 하여금 괴성을 지르며 신체를 움직이는 무술의 동작을 따라하게 만들었으며, 같은 맥락에서 EVO #37 이벤트 또한 동시대의 수용자들로 하여금 디지털화된 무술과 비슷한 무엇을 따라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 Back [논문세미나] '스트리트파이터'는 무술martial arts인가? 13 GG Vol. 23. 8. 10. 크리스 고토 존스 (Chris G. Jones) 는 캐나다 빅토리아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 주전공은 동양철학과 일본불교 , 명상과 종교 계통이다 . 논문 < 스트리트 파이터는 무술 martial art 인가 ?> 이 왜 철학연구라조부터 나왔을지를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 철학자인 그는 ‘ 스트리트 파이터 ’ 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디지털 격투 게임이 플레이되는 과정을 살피며 그 속에 배어 있는 대중문화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이 기술미디어 시대에 어떻게 새롭게 자리잡고 있는지를 추적한다 . 2018 년에 나왔지만 여전히 흥미로운 이 논문을 오늘 소개한다 . From dragon to the Beast 대전격투 게임의 기원을 게임학자들이라면 다른 쪽에서 찾겠지만 , 존스는 대중문화사 속에서 대전격투 게임의 선조로 이소룡 Bruce Lee 과 그의 영화들을 꼽는다 . 그는 이소룡의 영화들 , < 용쟁호투 >, < 사망유희 > 와 같은 그의 대표작들이 유행을 탔던 1970 년대와 2004 년 격투 게임의 한 장면을 대비시키는데 , 바로 EVO #37 의 그 유명한 장면 , 우메하라 다이고의 ‘ 더 비스트 이벤트 ’ 다 . 워낙 전설적인 e 스포츠 명장면으로 회자되는 우메하라 다이고 대 저스틴 웡의 ‘ 스트리트 파이터 3’ 대결은 막판 KO 위기에 놓인 우메하라의 켄이 상대 춘리의 초필살기 연타를 가드하지 않고 ( 가드하면 가드 대미지가 들어와 KO 당한다 ) 하나하나 패리해내며 완벽하게 방어해낸 후 , 점프에 이은 초필살기 반격으로 역 KO 시키며 게임을 뒤집은 결정적인 장면이었다 . 존스는 이 장면을 보며 70 년대 이소룡 영화가 선보였던 무술 붐이 2000 년대에는 대전격투 게임에서 다시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는다 . 존스는 7-80 년대 서구권에서 일었던 이소룡을 중심으로 한 무술 붐과 마찬가지로 학계는 2000 년대의 이 영상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본다 . 우메하라의 역전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의 리터러시가 필요한데 , 첫째는 ‘ 스트리트 파이터 3’ 의 기본적인 시스템과 규칙에 대한 이해 , 둘째는 이 시스템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이를 받아들여 정확한 움직임을 수행하는 신체의 운동능력이다 . 이를 존스는 각각 객체기술 object skill, 운용기술 locomotive skill 이라고 일컫는데 , 현재의 게임연구분야는 텍스트에 중점을 둔 관계로 주어진 규칙을 받아들이는 수용자의 운용기술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 그리고 그 운용기술 , 다시말해 주어진 텍스트를 받아들이는 수용자의 관념과 자세에서 존스는 70 년대 무술영화 붐과 2000 년대 대전격투 게임이 같은 맥락에 선다고 분석한다 . 오늘날 현대 격투기에서 사실상 중국 전통무술의 실전성은 파훼되었지만 , 7-80 년대에 이소룡 영화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동양무술은 북미에서 실제로 무술 도장의 붐을 이끌어냈고 수많은 청년들로 하여금 괴성을 지르며 신체를 움직이는 무술의 동작을 따라하게 만들었으며 , 같은 맥락에서 EVO #37 이벤트 또한 동시대의 수용자들로 하여금 디지털화된 무술과 비슷한 무엇을 따라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 존스가 무술을 이야기할 때 중심에 두는 것은 무술이라는 개념을 다루는 자세와 방식이다 . 존스는 이소룡과 무술영화가 보여주는 체술은 체술의 보여주기에 머무르지 않고 일종의 신비하고 경건한 수련의 자세를 포함한다고 본다 . 이를테면 이소룡이 주요한 장면에서 명상에 가까운 집중을 보여주거나 , 무술영화들이 주인공의 수련을 다룰 때 끊임없는 ( 이른바 ‘ 용맹정진 ’ 으로 대표될 ) 반복숙달이 단순히 육체적 훈련에 머무르지 않고 일종의 정신수양에 가 닿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 존스는 주목한다 . 그리고 이는 오늘날의 디지털 대전격투 게임을 다루는 게이머들과 게이머 커뮤니티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된다 . 게이머 커뮤니티는 일정 수준에 오른 격투 게이머들의 경지를 수련과 정진을 통해 도달할 수 있으며 , 단순히 육체적인 숙달의 문제 뿐 아니라 정신적인 수양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 이를테면 앞서 이야기한 우메하라의 경우 , 4 초 동안 쏟아지는 춘리의 초필살기 13 개의 연타를 한번도 틀리지 않고 정확한 타이밍에 튕겨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눈과 손의 반응속도 뿐 아니라 그런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침착과 냉정을 잃지 않는 마음가짐이며 , 이러한 자세가 곧 이소룡이 선보인 그것과 동일하다는 이야기다 . 격투 게임과 테크노-오리엔탈리즘, 오타쿠 무술이라는 주제는 서구에서 다분히 오리엔탈리즘적 관점과 엮여 받아들여져 왔다 . 이소룡은 서구인들에게 백인이 아닌 미국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반헤게모니적 남성성으로 인식되었다 . 그가 < 맹룡과강 > 에서 척 노리스와 맨손격투를 벌여 승리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 이소룡의 무술영화는 < 정무문 > 에서 일제 강점기에 놓인 중국의 상황을 다루는 것처럼 민족 , 인종이라는 테마와 떼어놓기 어려운 주제였고 , 이와 같은 맥락은 현재의 대전격투 프로 게임 씬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 일명 ‘ 아시아인의 손 Asian Hands’ 이라는 개념이 그것이다 . 아시아인들이 여러 e 스포츠 종목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고 ( 이는 한국의 ‘ 스타크래프트 ’ 나 ‘ 리그오브레전드 ’ 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같은 맥락에서 서구인들은 과거 이소룡이 그랬던 것처럼 이들 아시안 프로게이머들을 일종의 초인적이고 신비주의적인 , 우리와는 다른 존재라고 받아들인다 . 이는 단순히 서구인들의 시선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 실제 대회에 출전하는 일본 게이머들은 스스로가 ‘ 우리는 일본인이므로 훨씬 잘 해낼 것이다 ’ 라고 인터뷰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 존스는 신비주의적으로만 언급되는 ‘ 아시아인의 손 ’ 을 이해하기 위해서 키지마 kijima 의 오사카 게이머 관찰연구 결과 (2012) 를 살펴본다 . 존스에게 있어 격투게임에서의 일본 우세는 그들이 뭔가 신비하고 영적인 훈련을 거친다기보다는 아케이드 환경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 서구에서 거의 소멸한 아케이드에서의 대전격투는 일본에선 여전히 주요 상업지구의 대형 오락실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 ( 다만 이 지점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애매하다 . 아케이드의 소멸은 규모는 다를지라도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반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 그리고 이런 아케이드를 거점으로 삼아 일명 ‘ 무사도 ’ 라고 불리는 특유의 문화로부터 기인하는 도장깨기 dojo-yaburi 가 일본에는 활성화되어 있고 , 이 과정을 통해 일본 게이머들은 끊임없이 강한 상대를 만나며 더욱 수련에 정진할 수 있다는 것이 존스의 분석이다 . 그러나 이런 점보다 대중적으로는 ‘ 신비로운 아시아인들의 놀라운 격투능력 ’ 이 온라인 격투에서도 발휘된다고 이해된다 . 신화적인 무술 담론은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 그리고 무술담론과 현대 격투게임의 이와 같은 융합에는 80 년대 일본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테크노 - 오리엔탈리즘의 오타쿠적 변형과 재수용이 함께 자리한다 . 홍콩과 도쿄 , 상하이의 네온사인 가득한 ‘ 이국적 ’ 야경으로 그려졌던 80 년대의 테크노 - 오리엔탈리즘은 디지털게임과 맞물리면서 오타쿠의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낸다 . 90 년대 이른바 ‘ 쿨 재팬 ’ 의 출현과 함께 일어난 이 변화는 아즈마 히로키의 <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2001) 을 통해 해석의 기초를 얻게 되었다 . 데이터베이스화한 동물 , 슈퍼 정보처리기로서의 오타쿠는 기존의 다른 매체 오타쿠와 달리 게임 오타쿠를 일정 몰입도에 도달하기까지 강박적 헌신과 지속적 연습을 이어간다는 형식으로 차별화시키며 일명 ‘ 야리코미 ’ 와 같은 게임 플레이 스타일을 만들어냈고 , 이러한 게임 오타쿠는 무술 담론과 결합한 대전격투 게임과 만나며 오타쿠적 몰입을 무사도적 수련과 정진으로 이해하는 새로운 대중적 이해를 낳았다고 존스는 이야기한다 . Emperor가 아니라 Demon King인 이상혁의 문제 서구권에서 바라보는 무술 , 혹은 무술의 개념을 가져온 게임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 독자들 입장에서는 흥미로운데 , 무술과 같은 개념은 같은 동아시아권 문화에 있어 우리에겐 좀더 내재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 서구권에서 바라본 것처럼 우리에게 무술은 굉장히 신비로운 것으로는 다가오지 않는다 . 이를테면 한국에서도 격투 게임의 어떤 순간들을 무술 , 아니 좀더 우리 식으로라면 격투게임 고수들의 모임을 일종의 무림武林으로 비유하거나 , 무릎 배재민의 파키스탄 원정을 일종의 폐관수련으로 이해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 분명 존스의 이해와 우리의 이해는 일면 상통하지만 , 과연 우리의 그것이 서구의 것처럼 신비스러운 대상인가를 생각해보면 둘의 차이 또한 명확하다 . 테크노 - 오리엔탈리즘은 디지털게임과 함께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오타쿠 문화와 엮이며 독특한 장면을 자아낸다 . 다만 존스의 의견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 아마도 ‘ 왜 e 스포츠에서 동아시아 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내는가 ?’ 라는 질문에 대해 존스의 의견은 명확한 단 하나의 답으로는 자리하기 어려울 것이다 . 당장 한국이 우세를 점하는 e 스포츠 종목들을 생각해 본다면 이들이 존스의 개념 안에서 거론되는 오타쿠로 분류될 수 있는지와 같은 쟁점들을 새롭게 마주하게 될 것이다 . 한국에서도 아케이드는 이제 대중적인 문화에서 멀어져가는 추세고 , 오히려 대전격투 게임의 고수들은 네트워크 플레이로 도장을 옮겨 안착한 지 오래다 . PC 방의 존재는 여전히 과거 아케이드와 같은 오프라인 도장 역할을 하고 있지만 , 애초에 ‘ 리그 오브 레전드 ’ 같은 게임은 PC 방의 로컬이 아닌 네트워크상의 5:5 대전을 전제로 한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이 또한 명백한 해답이 되기는 어렵다 . 결론을 대신하는 한 가지 힌트라면 , 적어도 우리는 왜 동아시아 선수들 , 좀더 우리 입장으로 좁혀 본다면 왜 한국의 e 스포츠는 그토록 높은 성과를 내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새로운 답변의 접근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는 한국이 e 스포츠의 선두주자라는 것까지만을 이야기하지만 , 한편으로는 세계 최고의 LOL 플레이어인 페이커 이상혁의 별명이 서구권에서 ‘Emperor’ 가 아니라 ‘Demon King’ 이라는 사실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점을 존스의 글은 돌아보게 한다 . 테크노 오리엔탈리즘과 엮여 돌아가는 오늘날의 e 스포츠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e 스포츠 그 자체 뿐 아니라 , “ 동아시아의 e 스포츠 ” 로 끊임없이 서구에서 타자화되는 경향과 그 결과 또한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 참고문헌 Kijima, Y. (2012). “The Fighting Gamer Otaku Community: What are they ighting about?” In Fandom Unbound: Otaku Culture in a Connected World, eds. Mizuko Ito, Daisuke Okabe, and Izumi Tsuji. Yale University Press, 2012, pp. 249–74.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 현실과 가상의 구분을 없앴던 비범함에 대해서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은 2024년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로, 노르웨이의 ‘마츠 스틴’라는 게이머의 삶에 주목한다. 작품은 작년 한 해 동안 선댄스 영화제에서의 수상과 더불어 여러 영화제에 이름을 올리며 유명세를 얻었고, 현재는 OTT서비스 ‘넷플릭스’와 계약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다큐멘터리에 접근할 수 있도록 공개되어있다. < Back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 현실과 가상의 구분을 없앴던 비범함에 대해서 23 GG Vol. 25. 4. 10.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은 2024년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로, 노르웨이의 ‘마츠 스틴’라는 게이머의 삶에 주목한다. 작품은 작년 한 해 동안 선댄스 영화제에서의 수상과 더불어 여러 영화제에 이름을 올리며 유명세를 얻었고, 현재는 OTT서비스 ‘넷플릭스’와 계약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다큐멘터리에 접근할 수 있도록 공개되어있다. 하지만 제목만 봤을 때, 이것이 게임에 관한 다큐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울 것이다. 그동안 게임을 소재로 한 다큐들이 <하이 스코어>(2020), <낫 어 게임>(2020), <프리 투 플레이>(2014), <인디 게임: 더 무비>(2012)처럼 제목에서부터 ‘게임’에 대한 내용임을 알려왔다는 점과 다르게, 이 다큐는 게임 다큐라는 사실보다는 ‘이벨린’이라는 인물에 방점을 찍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벨린은 누구이길래 주목받게 되었는가? 걸을 수 없는 소년에게 쥐어진 게임기 다큐는 1990년대 홈 캠코더로 촬영된 한 소년의 어린 시절 영상으로 시작된다. 이 소년의 이름은 ‘마츠 스틴’. 노르웨이에서 태어나 가족의 사랑 속에서 자라났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의 몸 상태에 이상이 감지된다. 거동할 때마다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의지하거나, 늘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반복된다. 이 의자는 점점 휠체어로 대체되고, 화면 너머로 마츠가 중증 질환을 앓고 있음을 암시한다. 마츠가 앓은 병은 ‘듀센 근이영양증’이라는 희귀 질환이다. 어린 시절 발병해 시간이 지날수록 근육이 점차 소실되는 병으로, 걷거나 음식을 먹는 등 일상적인 신체 활동이 서서히 불가능해진다. 점점 불편해지는 몸은 사회생활을 가로막았고, 대인 관계 또한 큰 장벽에 부딪혔다. 다른 아이들이 운동을 하거나 어울려 놀 때, 마츠는 그들을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곤 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홈비디오 속에서 유난히 자주 포착되는 물건이 있다. 바로 게임기다. 마츠는 게임보이, 닌텐도64와 같은 콘솔 게임기를 즐겨 사용했다. 일반적으로 아이가 게임에 지나치게 몰두하면 부모가 이를 제지하기 마련이지만, 마츠의 부모는 달랐다. 게임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던 마츠에게, 그가 원하는 만큼 게임을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 가족들과 휴양지 여행을 떠난 어린시절 마츠의 두 손에는 게임 보이가 들려있다. (출처: 유튜브 영상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 Official Trailer | Netflix”) 아제로스 대륙을 여행한 마츠 2000년대에 들어서며 블리자드의 온라인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와우>)가 전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은 판타지 세계관 ‘아제로스’ 대륙으로 접속해, 아바타의 몸을 빌려 또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다. 마츠도 이에 동참하여 노트북으로 와우 세계에 접속했고,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한다. 마츠는 <와우> 세계에서 굉장히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가 <와우>를 플레이한 10년 동안 총 플레이 타임은 약 2만 시간 가까이에 달했다. 아제로스의 방대한 대륙을 여행하며 그는 다양한 국적의 유저들과 교류를 이어갔다. 하지만 그의 신체는 점점 움직이기 어려워졌고, 게임을 플레이하는 데에도 제약이 따랐다. 처음에는 키보드와 마우스를 사용해 조작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마츠는 특수 장비의 도움을 받게 된다. 게임에 필요한 조작키가 원형으로 배치된 이 맞춤형 장치는 마츠를 위해서 특별하게 제작된 것이었고, 이 덕분에 다른 유저들과 함께 게임 플레이를 지속할 수 있었다. * 마츠가 사용하는 컴퓨터 조작 장치 (출처: 유튜브 영상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 Official Trailer | Netflix”)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 알린 마츠의 죽음 듀센병 환자의 평균 수명은 보통 20대에 머무른다. 마츠 역시 병세가 악화된 끝에, 2014년 가족들의 깊은 슬픔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계속 재생되던 홈비디오 테이프는 멈추었고, 가족들은 애통스러운 감정으로 그를 추억한다. 그리고 마츠가 오랜 시간을 보냈던 온라인 세계에도 이 사실을 알리고자, 가족들은 그가 생전에 운영했던 온라인 블로그에 부고 소식을 게시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츠를 추모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메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츠를 ‘이벨린’으로 부르고 있었다. 이벨린이 <와우> 세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던 인물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에 대한 추모 메시지를 전해온 것이다. 다큐 제목에 등장한 ‘이벨린’은 마츠의 <와우> 캐릭터명이다. 긴 머리를 가진 건장한 남성 도적. 이벨린의 모습은 휠체어 위의 왜소한 현실의 마츠와는 전혀 달랐다. 그러나 마츠는 이벨린으로서, <와우>의 길드 ‘스타라이트’에 오래 몸담으며 수많은 사람들과 폭넓은 관계를 맺었다. 유가족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활발한 사회적 삶이 그 안에 있었다. * 게임에서 다른 유저들과 활발하게 사회생활했던 이벨린 (출처: 유튜브 영상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 Official Trailer | Netflix”) 현실에서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기 어려웠던 마츠는, 이벨린으로서 연인을 만나 사랑을 경험하기도 했다. ‘루머’라는 캐릭터와 숲속에서 데이트를 하며 첫사랑을 나눴고, 루머의 현실 인물인 ‘리세트’가 가족과 갈등을 겪었을 땐 직접 편지를 써 그녀의 부모와 화해의 길을 터주기도 했다. 또 한 명의 길드원이 자녀와 소통에 어려움을 겪자, 마츠는 그 아이와 함께 게임을 하도록 주선해 관계를 회복하도록 도왔다. 그는 단지 도움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진심으로 돕고 응원하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마츠 덕분에 삶이 더 나아졌다”고 말했다. 겉으로는 게임만 하며 고립된 삶을 산 듯 보였던 마츠. 그러나 그는 언제나 연결되어 있었다. 이벨린이라는 이름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깊은 삶을 살아냈다.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가족은, 마츠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이전에는 제한된 삶으로 여겼던 그 생애가 사실은 너무도 풍성하고 비범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장례식은 슬픔보다는 뒤늦은 기쁨과 안도 속에서 치러진다. * 홈비디오 속의 마츠 (출처: 유튜브 영상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 Official Trailer | Netflix”) 채팅으로 기록된 과거의 시간들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이 과거를 다시 그려내는 방법은 매우 독특하다. 일반적인 다큐멘터리가 과거에 기록된 영상이나 사진을 편집하거나, 당시 인물들을 인터뷰를 바탕으로 사건을 재구성하는 반면, 이 작품의 핵심 기록물은 다름 아닌 ‘채팅 기록’이다. 마츠는 음성 채팅 없이 텍스트로만 대화를 나눴기 때문에 그가 나눈 모든 의사소통은 대화 로그로서 기록되어 있었다. 일부러 아카이브 하지 않아도, 이미 보존되고 기록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보존된 이벨린의 문장들은 사후에도 그의 삶을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흔적이 되었다. 제작진은 이 채팅 기록을 대역 성우가 낭독하도록 하여 현재 시점에서 재구성했다. 성우들이 읽은 대본은 모두 이벨린이 나눴던 채팅과 동일한 문장이었고, 이 음성은 애니메이션에 더빙되어 영상으로 제작되었다. 재연 애니메이션은 실제 게임 내 캐릭터와 주변 사물, 배경, 다른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표정으로까지 장면 하나하나로 연출되어 게임 속에서 녹화되었다. * 이벨린의 목소리를 맡은 에드 라킨(Ed Larkin)외에도 모든 성우가 장애인이다. (출처: 유튜브 영상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 Behind The Scenes | Netflix”) 여기에 제작진은 마츠의 삶을 더욱 면밀하게 재현하기 위해 또 다른 층위를 더했다. 채팅을 읽는 성우들을 모두 장애를 가진 사람들로 구성한 것이다. 이벨린과 이벨린의 첫사랑 루머, 주변 길드원, 친구들 모두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로 입혀졌다. 루머를 연기한 성우는,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이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가상 캐릭터’가 아닌, 실제 사람이 뒤에 있는 ‘아바타’였기 때문에 깊은 존중감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그들이 실제로 이 상황에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 섬세하게 고려하면서 연기해야만 했다고 인터뷰에서 덧붙였다. 연극 대본처럼 남은 채팅 기록 덕분에 게임 속 캐릭터로 과거를 재현하는 이 방식은 게이머의 삶을 다큐로 풀어내는 방식 중에서 매우 신선하고 도전적인 시도로 보인다. 다만 그 과정에서 ‘재현’과 ‘재연’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약간의 아쉬움도 남는다. 다큐로서의 과거를 충실히 복원했다기보다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감정적으로 과장된 재연이 되는 듯한 느낌이 남기 때문이다. 특히 이벨린이 루머와 숲속 호숫가에서 연애하며 첫키스를 나눴던 사건을 정면 카메라로 촬영하여 보여줄 때는, 마츠의 매우 사적인 기록, 그러니까 원치 않는 사춘기 소년의 일기장을 억지로 들춰보는 듯한 기분을 안겨주기도 했다. 물론 마츠가 살아생전에 이 다큐멘터리 제작에 관여했기 때문에, 이 역시 그가 의도한 연출일 수도 있겠다. * 데이트를 즐기는 이벨린과 그의 첫사랑 루머 (출처: 유튜브 영상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 Official Trailer | Netflix”) 현실 도피라는 오해 마츠는 매일 아침, 이벨린으로 접속해 아제로스 대륙(게임 속 세계)을 달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현실에선 달릴 수 없었지만, 게임 속에서는 원 없이 달릴 수 있었다. 현실의 제약이 닿지 않는 가상 세계는 마츠에게 해방의 공간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그는 이벨린이라는 존재로 살아가며 자유로운 신체로 움직였고, 장애인이라는 사회적 정체성을 넘어서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능동적인 주체로서 자신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은 자칫 ‘게임은 현실 도피처’라는 식의 해석으로 단순화되기 쉽다. 실제로 마츠는 자신의 블로그에 “게임은 탈출구이고, 모니터는 자유로운 공간으로 향하는 관문”이라고 썼다. 게임을 탈출 혹은 도피의 수단으로 보는 관점은, 현실의 고통과 결핍에서 심리적으로 벗어나기 위한 몰입이나 위안으로만 게임을 설명하곤 한다. 이때 현실은 그대로 남아 있고, 억압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잠시 보류될 뿐이다. 더 나아가 장 보드리야르의 시각에서 보자면, 이러한 가상 세계는 실재를 대체하는 이미지에 불과하며, 우리는 그 안에서 ‘해방의 감정’만을 소비하게 된다. 이 관점에서 보면, 다큐가 게임을 낭만화하고, 단선적인 감동 구조로만 재현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 매일 30분씩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대륙을 뛰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는 이벨린 (출처: 유튜브 영상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 Behind The Scenes | Netflix”) 그러나 마츠의 사례는 단순한 현실 도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가상 세계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했고, 사람들과의 대화와 연대를 통해 현실로도 울림을 확장시켰다. 게임 속에서 나눈 말과 관계는 다시 현실에서 목소리가 되었고, 그 메아리는 여전히 강하게 울리고 있었다. 이벨린의 첫사랑 루머의 목소리 역을 맡은 켈시(Kelsey Ellison)는 자신도 장애인으로서 가상 세계로의 탈출이 주는 자유를 공감하는 한편, 마츠가 도피주의(escapism)를 잘 활용했다고 평가했다. 하루 종일 누워 봉사자들의 도움을 받는 마츠를 수동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게 아니라, 적어도 자신이 가진 것을 최대한 활용하는 능동적인 힘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고,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고무시키는 데에 노력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마츠가 단지 억압된 현실의 신체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부족하다. 자유/억압의 이분법적인 규정보다, 완전히 새로운 문법 안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존재했던 인물로 바라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존재의 전환, 존재의 확장으로서 바라봄이 더 정교하고 정당할 것이다. 마츠는 생전 이렇게 말했다. “이벨린은 저의 확장판이에요. 저의 다른 면모이죠” 존재의 확장이라는 비범함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은 단순한 감동 서사를 넘어, 가상 세계 안에서의 삶이 어떻게 존재를 확장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마츠는 게임으로 도피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확장했고, 새로운 문법을 통해 타인과 연결되었다. 가상 세계가 현실의 억압을 완전히 지워주진 않았지만, 그는 그 안에서 한계를 넘는 관계를 만들고, 사회적 의미를 생산하는 능동적인 존재로 살아갔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다큐가 보여주는 진짜 이벨린의 ‘비범함’이라는 평가는 마츠가 이벨린으로서 보여줬던 활약뿐만이 아니라, 게임이라는 조건 속에서 여전히 현실을 향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보냈기 때문이다. 그가 남긴 채팅 기록, 함께 시간을 보낸 동료들, 그리고 이 다큐를 본 사람들이 기억하는 ‘이벨린’은 마츠가 단지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현실을 구성했던 하나의 주체였음을 증명한다. * 이벨린이 죽은 이후, 블리자드는 이벨린이 자주 다니던 엘린 숲 한켠에 이벨린을 추모하는 비석을 세웠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 그곳에 모여 그를 다시금 기억했다. 그리고 블리자드는 이벨린의 캐릭터에 관한 유료 아이템 판매하고 그 수익을 듀센 치료를 위해 기부하기도 했다. (출처: 유튜브 영상 “Rest in Peace, ibelin) Tags: 다큐멘터리, WOW, MMORPG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박이선 사회적인 관점에서 게임을 연구합니다. 게임이라는 도구를 통해 결국 인간을 탐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은 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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