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세미나] '스트리트파이터'는 무술martial arts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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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3. 8. 10.
크리스 고토 존스(Chris G. Jones)는 캐나다 빅토리아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주전공은 동양철학과 일본불교, 명상과 종교 계통이다. 논문 <스트리트 파이터는 무술martial art인가?>이 왜 철학연구라조부터 나왔을지를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철학자인 그는 ‘스트리트 파이터’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디지털 격투 게임이 플레이되는 과정을 살피며 그 속에 배어 있는 대중문화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이 기술미디어 시대에 어떻게 새롭게 자리잡고 있는지를 추적한다. 2018년에 나왔지만 여전히 흥미로운 이 논문을 오늘 소개한다.
From dragon to the Beast
대전격투 게임의 기원을 게임학자들이라면 다른 쪽에서 찾겠지만, 존스는 대중문화사 속에서 대전격투 게임의 선조로 이소룡Bruce Lee과 그의 영화들을 꼽는다. 그는 이소룡의 영화들, <용쟁호투>, <사망유희>와 같은 그의 대표작들이 유행을 탔던 1970년대와 2004년 격투 게임의 한 장면을 대비시키는데, 바로 EVO #37의 그 유명한 장면, 우메하라 다이고의 ‘더 비스트 이벤트’다.
워낙 전설적인 e스포츠 명장면으로 회자되는 우메하라 다이고 대 저스틴 웡의 ‘스트리트 파이터 3’ 대결은 막판 KO위기에 놓인 우메하라의 켄이 상대 춘리의 초필살기 연타를 가드하지 않고(가드하면 가드 대미지가 들어와 KO당한다) 하나하나 패리해내며 완벽하게 방어해낸 후, 점프에 이은 초필살기 반격으로 역KO시키며 게임을 뒤집은 결정적인 장면이었다. 존스는 이 장면을 보며 70년대 이소룡 영화가 선보였던 무술 붐이 2000년대에는 대전격투 게임에서 다시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는다.
존스는 7-80년대 서구권에서 일었던 이소룡을 중심으로 한 무술 붐과 마찬가지로 학계는 2000년대의 이 영상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본다. 우메하라의 역전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의 리터러시가 필요한데, 첫째는 ‘스트리트 파이터 3’의 기본적인 시스템과 규칙에 대한 이해, 둘째는 이 시스템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이를 받아들여 정확한 움직임을 수행하는 신체의 운동능력이다. 이를 존스는 각각 객체기술object skill, 운용기술locomotive skill이라고 일컫는데, 현재의 게임연구분야는 텍스트에 중점을 둔 관계로 주어진 규칙을 받아들이는 수용자의 운용기술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운용기술, 다시말해 주어진 텍스트를 받아들이는 수용자의 관념과 자세에서 존스는 70년대 무술영화 붐과 2000년대 대전격투 게임이 같은 맥락에 선다고 분석한다. 오늘날 현대 격투기에서 사실상 중국 전통무술의 실전성은 파훼되었지만, 7-80년대에 이소룡 영화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동양무술은 북미에서 실제로 무술 도장의 붐을 이끌어냈고 수많은 청년들로 하여금 괴성을 지르며 신체를 움직이는 무술의 동작을 따라하게 만들었으며, 같은 맥락에서 EVO #37 이벤트 또한 동시대의 수용자들로 하여금 디지털화된 무술과 비슷한 무엇을 따라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존스가 무술을 이야기할 때 중심에 두는 것은 무술이라는 개념을 다루는 자세와 방식이다. 존스는 이소룡과 무술영화가 보여주는 체술은 체술의 보여주기에 머무르지 않고 일종의 신비하고 경건한 수련의 자세를 포함한다고 본다. 이를테면 이소룡이 주요한 장면에서 명상에 가까운 집중을 보여주거나, 무술영화들이 주인공의 수련을 다룰 때 끊임없는(이른바 ‘용맹정진’으로 대표될) 반복숙달이 단순히 육체적 훈련에 머무르지 않고 일종의 정신수양에 가 닿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 존스는 주목한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의 디지털 대전격투 게임을 다루는 게이머들과 게이머 커뮤니티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된다. 게이머 커뮤니티는 일정 수준에 오른 격투 게이머들의 경지를 수련과 정진을 통해 도달할 수 있으며, 단순히 육체적인 숙달의 문제 뿐 아니라 정신적인 수양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를테면 앞서 이야기한 우메하라의 경우, 4초 동안 쏟아지는 춘리의 초필살기 13개의 연타를 한번도 틀리지 않고 정확한 타이밍에 튕겨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눈과 손의 반응속도 뿐 아니라 그런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침착과 냉정을 잃지 않는 마음가짐이며, 이러한 자세가 곧 이소룡이 선보인 그것과 동일하다는 이야기다.
격투 게임과 테크노-오리엔탈리즘, 오타쿠
무술이라는 주제는 서구에서 다분히 오리엔탈리즘적 관점과 엮여 받아들여져 왔다. 이소룡은 서구인들에게 백인이 아닌 미국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반헤게모니적 남성성으로 인식되었다. 그가 <맹룡과강>에서 척 노리스와 맨손격투를 벌여 승리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소룡의 무술영화는 <정무문>에서 일제 강점기에 놓인 중국의 상황을 다루는 것처럼 민족, 인종이라는 테마와 떼어놓기 어려운 주제였고, 이와 같은 맥락은 현재의 대전격투 프로 게임 씬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일명 ‘아시아인의 손Asian Hands’이라는 개념이 그것이다. 아시아인들이 여러 e스포츠 종목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고(이는 한국의 ‘스타크래프트’나 ‘리그오브레전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서구인들은 과거 이소룡이 그랬던 것처럼 이들 아시안 프로게이머들을 일종의 초인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우리와는 다른 존재라고 받아들인다. 이는 단순히 서구인들의 시선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실제 대회에 출전하는 일본 게이머들은 스스로가 ‘우리는 일본인이므로 훨씬 잘 해낼 것이다’라고 인터뷰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존스는 신비주의적으로만 언급되는 ‘아시아인의 손’을 이해하기 위해서 키지마kijima의 오사카 게이머 관찰연구 결과(2012)를 살펴본다. 존스에게 있어 격투게임에서의 일본 우세는 그들이 뭔가 신비하고 영적인 훈련을 거친다기보다는 아케이드 환경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서구에서 거의 소멸한 아케이드에서의 대전격투는 일본에선 여전히 주요 상업지구의 대형 오락실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 지점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애매하다. 아케이드의 소멸은 규모는 다를지라도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반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아케이드를 거점으로 삼아 일명 ‘무사도’라고 불리는 특유의 문화로부터 기인하는 도장깨기dojo-yaburi가 일본에는 활성화되어 있고, 이 과정을 통해 일본 게이머들은 끊임없이 강한 상대를 만나며 더욱 수련에 정진할 수 있다는 것이 존스의 분석이다.
그러나 이런 점보다 대중적으로는 ‘신비로운 아시아인들의 놀라운 격투능력’이 온라인 격투에서도 발휘된다고 이해된다. 신화적인 무술 담론은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술담론과 현대 격투게임의 이와 같은 융합에는 80년대 일본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테크노-오리엔탈리즘의 오타쿠적 변형과 재수용이 함께 자리한다.
홍콩과 도쿄, 상하이의 네온사인 가득한 ‘이국적’ 야경으로 그려졌던 80년대의 테크노-오리엔탈리즘은 디지털게임과 맞물리면서 오타쿠의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낸다. 90년대 이른바 ‘쿨 재팬’의 출현과 함께 일어난 이 변화는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2001)을 통해 해석의 기초를 얻게 되었다. 데이터베이스화한 동물, 슈퍼 정보처리기로서의 오타쿠는 기존의 다른 매체 오타쿠와 달리 게임 오타쿠를 일정 몰입도에 도달하기까지 강박적 헌신과 지속적 연습을 이어간다는 형식으로 차별화시키며 일명 ‘야리코미’와 같은 게임 플레이 스타일을 만들어냈고, 이러한 게임 오타쿠는 무술 담론과 결합한 대전격투 게임과 만나며 오타쿠적 몰입을 무사도적 수련과 정진으로 이해하는 새로운 대중적 이해를 낳았다고 존스는 이야기한다.
Emperor가 아니라 Demon King인 이상혁의 문제
서구권에서 바라보는 무술, 혹은 무술의 개념을 가져온 게임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 독자들 입장에서는 흥미로운데, 무술과 같은 개념은 같은 동아시아권 문화에 있어 우리에겐 좀더 내재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서구권에서 바라본 것처럼 우리에게 무술은 굉장히 신비로운 것으로는 다가오지 않는다. 이를테면 한국에서도 격투 게임의 어떤 순간들을 무술, 아니 좀더 우리 식으로라면 격투게임 고수들의 모임을 일종의 무림武林으로 비유하거나, 무릎 배재민의 파키스탄 원정을 일종의 폐관수련으로 이해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분명 존스의 이해와 우리의 이해는 일면 상통하지만, 과연 우리의 그것이 서구의 것처럼 신비스러운 대상인가를 생각해보면 둘의 차이 또한 명확하다.
테크노-오리엔탈리즘은 디지털게임과 함께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오타쿠 문화와 엮이며 독특한 장면을 자아낸다. 다만 존스의 의견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아마도 ‘왜 e스포츠에서 동아시아 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내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존스의 의견은 명확한 단 하나의 답으로는 자리하기 어려울 것이다. 당장 한국이 우세를 점하는 e스포츠 종목들을 생각해 본다면 이들이 존스의 개념 안에서 거론되는 오타쿠로 분류될 수 있는지와 같은 쟁점들을 새롭게 마주하게 될 것이다. 한국에서도 아케이드는 이제 대중적인 문화에서 멀어져가는 추세고, 오히려 대전격투 게임의 고수들은 네트워크 플레이로 도장을 옮겨 안착한 지 오래다. PC방의 존재는 여전히 과거 아케이드와 같은 오프라인 도장 역할을 하고 있지만, 애초에 ‘리그 오브 레전드’ 같은 게임은 PC방의 로컬이 아닌 네트워크상의 5:5 대전을 전제로 한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이 또한 명백한 해답이 되기는 어렵다.
결론을 대신하는 한 가지 힌트라면, 적어도 우리는 왜 동아시아 선수들, 좀더 우리 입장으로 좁혀 본다면 왜 한국의 e스포츠는 그토록 높은 성과를 내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새로운 답변의 접근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한국이 e스포츠의 선두주자라는 것까지만을 이야기하지만, 한편으로는 세계 최고의 LOL 플레이어인 페이커 이상혁의 별명이 서구권에서 ‘Emperor’가 아니라 ‘Demon King’이라는 사실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점을 존스의 글은 돌아보게 한다. 테크노 오리엔탈리즘과 엮여 돌아가는 오늘날의 e스포츠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e스포츠 그 자체 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e스포츠”로 끊임없이 서구에서 타자화되는 경향과 그 결과 또한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