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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인터페이스로서의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게임사회》 전시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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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3. 6. 10.

‘게임은 예술인가?’라는 질문이 다양한 담론장을 떠돌고 있다. 게임과 예술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행정과 법의 영역에서도 게임의 위상을 둘러싼 논의가 활발히 오가는 중이다. (물론 예술가, 행정가, 정치인, 사업가, 그리고 게이머 각각의 입장과 목표는 모두 다르겠지만) 이러한 정세에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게임 주제전은 중요한 기점이 될 것이기에 일단 《게임사회》라는 전시는 주목할 만하다. 국가가 운영하는 미술 기관에서 게임을 예술적 대상으로 직접 다루고, 나아가 게임 그 자체를 전시하는 것은 공식적인 선포가 아닐지라도 담론적 차원에서 어떠한 인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변기라도 미술관에 가져다 놓으면 미술 작품이 된다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처럼 게임을 미술관에서 전시했다는 것은 분명히 그것만으로도 중요한 사건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미술관에 전시되지 않더라도 게임은 이미 예술(적)이다. 사실 더 중요한 질문은 ‘왜 게임이 예술이 되어야 하는가’ 같은 것이 아닐까. 예술이라는 영역에 게임을 받아들이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예술의 입장과 게임의 입장은 또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전시 《게임사회》를 돌아보면서 이러한 질문에 답을 찾아보려한다. 


* 《게임사회》 전시 포스터

지금은 당연히 예술의 영역이라고 여겨지는 사진이나 영화 같은 매체들도 예술의 범주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저항이 있었다. 사진의 경우를 언급하고 넘어가면, 사진은 예술가 주체보다 기계가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사진 이미지의 기계적인 뚜렷함이 회화에 비하여 사진을 예술적이지 못하게 만든다는 인식이 팽배하기도 했다. 그래서 예술적 목적으로 사진을 다루는 작가들은 사진을 그림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해 연초점으로 사진의 선명도를 낮추거나 일부러 번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듯 사진은 회화와 결부된 특성들을 끊어내면서 독자적인 예술의 영역으로 인정받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장르의 고유성과 구분 자체가 모더니즘적이라는 것이지만) 그런 시기를 거쳐 사진이 예술의 맥락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지기 시작한 중요한 계기는, 지금 이 글에서 다루는 ‘전시’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사진이 미술관에 전시될 수 있는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시를 위해서 사진은 그 인터페이스의 구조를 변화시켰다. 사진은 원래 손에 들고 볼 수 있는 작은 액자나 책자 같은 인터페이스를 통해서 감상하는 매체였다. 그러나 사진이 예술로 편입되는 과정과 함께 기술이 발달하여 대형 필름을 통한 대형 인쇄가 가능해졌고, 그로 인해 사진도 다른 예술 매체들처럼 크게 벽에 걸어서 전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손에 들고 혼자 보는 사진이 아니라, 벽에 걸어 함께 볼 수 있는 사진이라는 인터페이스 차원의 변화는 사진이 예술로 받아들여지는 중요한 계기 중 하나가 된다. 무엇이든 미술관에 전시하면 다른 존재로 인식되는 레디메이드식의 위상 변화뿐만 아니라, 이렇게 실제로 인터페이스 차원의 변화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짚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그런 변화가 그 매체를 미술관에 전시하면서 발생하는 인터페이스 차원의 불화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손에 들고 보는 사진은 전시하기 적합하지 않은 매체였기 때문에 변화가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게임이 미술관에 전시될 때는 어떠한가. 오락실이나 PC방, 혹은 집에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경험과 전시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경험은 크게 다르다. 애초에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들의 목적이 다른 점도 짚어야겠지만, 게임을 ‘전시’하였을 때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점들이 있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근본적인 관람성의 문제부터, 플레이 시간의 문제, 나아가 게임 컨트롤러 차원의 인터페이스를 관객들에게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 등등. 이런 것들은 단지 화이트큐브 전시장을 오락실이나 PC방을 연상시키는 공간으로 디자인해서 해결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애초에 미술관은 게임을 전시하기에 적합한 인터페이스를 가지고 있지 않다. 더 근본적으로 게임은 전시되기 위해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전시에 적합하지 않은 매체를 전시하려고 하면서 발생하는 인터페이스 차원의 문제를 단순한 불화로 보지 않고, 예술과 게임 각각에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으로 파악할 수는 없을까.


여기에서 인터페이스는 단지 게임 컨트롤러 같은 하드웨어 장치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서로 다른 것이 마주한 면(face) 사이(inter-)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게임사회》는 이러한 문제를 적극적으로 고민할 수 있는 장을 열어낸다. 게임과 게임적인 예술 작업을 함께 전시하고, 무엇보다 하나의 게임을 전시할 때에도 서로 다른 인터페이스 사이를 오갈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전시는 인터페이스 차원에서 단지 보기 좋고, 가장 편안하고, 잘 작동하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는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대부분의 전시된 게임에 키보드와 마우스, 게임패드, 조이스틱 같은 전형적인 게임 인터페이스와 함께 접근성 컨트롤러를 함께 배치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실질적인 배리어프리 차원에서도 중요하겠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그런 문제에만 머물지 않는다. 일반적인 게임 컨트롤러가 익숙한 사람들에게 접근성 컨트롤러는 오히려 불편한 인터페이스가 된다. (아예 게임 컨트롤러가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에게는 일반적인 게임패드 역시 조작이 쉽지 않은 무언가라는 점도 짚어야 한다.) 이런 불편함이 오히려 인터페이스라는 문제 자체를 다시 감각할 수 있는 전시의 중요한 형식이 되는 것이다.


 《게임사회》의 〈심시티 2000〉 전시 전경

게임과 게임적인 예술 작업을 오가는 전시 구성도 비슷한 맥락에서 서로 다른 것들 사이의 교차(inter-)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플라워〉 같은 제노바 첸의 게임을 플레이하다가 이어지는 공간 안쪽으로 들어서면 하룬 파로키의 〈시리어스 게임〉과 〈평행〉 시리즈를 만나게 되는 식이다. 하룬 파로키는 게임과 현실의 관계를 흥미로운 방식으로 포착하고 있기에 그 작업의 내용에서도 전시의 기획적 맥락을 심화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지금 글의 맥락에서 파로키가 더욱 중요한 지점은, 그가 영화라는 매체를 미술관에 들여오면서 발생하는 인터페이스 차원의 변화를 본격적으로 논의할 수 있게 만든 주요 작가 중 한명이라는 점이다. 하나의 영상을 하나의 스크린을 통해 단선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직접 서로 다른 화면들 사이를 오가면서 감상하는 멀티채널 작업은 영화를 극장이 아니라 전시장에 옮겨오면서 가능해진 인터페이스 차원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전시된 파로키의 작업들도 시리즈를 멀티 채널처럼 설치했고, 특히, 그의 또 다른 작업 〈인터페이스〉의 경우에는 자신이 찍었던 영상과 그것을 편집하는 인터페이스의 모습을 2채널 영상으로 담아내면서 무빙이미지에서 인터페이스 문제를 본격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영역을 열어내었다.

  

*하룬 파로키, 〈시리어스 게임 I-IV〉, 2009-2010, 다채널 비디오 설치, 컬러, 사운드, Harun Farocki GbR 소장. 영상스틸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게임은 예술인가’ 당연히 예술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질문에 그냥 답을 해버리는 것보다 이러한 질문을 통해서 예술이라는 범주와 게임이라는 범주를 함께 성찰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게임적인 것을 통해서 예술의 범주와 그 규정에 균열이 일어나야 이러한 질문에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진과 미술이 교차되면서 제도적 분열뿐만 아니라, 인터페이스 차원의 변화가 발생했던 것처럼. 게임 역시 미술과 교차되고, 미술 제도가 게임을 받아들이면서 서로의 영역에 변화를 촉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게임의 인터페이스로서의 미술관의 문제는 게임과 미술 각각의 형식적인 문제에서 더 나아갈 지점이 있다. 미술관 제도가 게임이라는 기존과 다른 형식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업데이트되어야 하는 측면들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술관은 전시뿐만 아니라 소장을 위한 기관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게임이 미술계에서 중요하게 논의되기 시작한 기점은 이번 전시 맥락에서도 중요하게 언급되는 2010년 뉴욕 현대미술관이 게임을 소장품으로 받아들인 사건이다. 그러나 역사로 기록할 만한 문화적 산물로서의 게임을 소장하려면, 단지 담론적 차원의 투쟁뿐만 아니라, 기존의 미술관 소장품 시스템에 큰 변화가 필요할 것이다. 구체적인 물질이 아니라, 코드로 이루어진 소프트웨어를 소장하는 문제는 미술관의 기존 소장품 시스템과 불화한다. (심지어 게임이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인터페이스의 결합인 경우가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더) 이렇게 게임은 미술관이라는 인터페이스 자체를 성찰하고 업데이트할 계기를 만들 타자가 될 수 있다. 게임을 통해서 변화하는 미술관의 모습을 계속 상상한다. 


Tags:

전시, 미술관, 게임사회,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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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터, 미술비평가)

글을 쓰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예술계에서 활동하지만 쉽게 예술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것들에 항상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예술 바깥의 것들을 어떻게 예술 안쪽의 대상으로 사유할 수 있을지 탐구한다. 정치적인 것을 감각의 문제로 파악하는 관점에 무게를 두고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7000eiche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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