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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문세미나] 디지털게임에 나타나는 알레아의 세 층위

    연구자인 임해량, 이동은은 알레아를 주술적 알레아, 시스템적 알레아, 영웅적 알레아 세 층위로 나누고, 그를 <하스스톤>의 일부 상황과 연결해 바라본다. 연구자들은 놀이가 가지는 우연성이 사행성 담론에 매몰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이것이 가지는 긍정적인 측면을 발굴해 내고자 한다. 즉 이 연구는 알레아를 새로이 탐색하려는 시도이다. < Back [논문세미나] 디지털게임에 나타나는 알레아의 세 층위 17 GG Vol. 24. 4. 10. 1. 들어가며 어린 시절 자주 했던 놀이들을 생각해 보면 그 결과가 상당 부분 운에 좌우되지 않았나 싶다. 가위바위보에서 손을 내고 희비를 오가게 되는 순간이나 공기놀이하다가 손을 삐끗하는 찰나 등, 노력만으로는 이기기 어려운 때가 간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놀이들은 결과를 종잡을 수 없는 만큼 더 몰입하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때때로 단순한 놀이의 형태를 넘어, 내기나 겨루기와 같은, 다소 복합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놀이에 대한 속성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이들이 있는데, 바로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와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다. 이 중 하위징아는 오늘날 놀이와 유희를 논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이로 인식되며, 카이와는 하위징아의 놀이 개념을 보다 유형화해 계승한 인물로 언급된다. 이번 논문 세미나는 후자의 인물, 카이와가 명명한 개념에서 출발한다. 카이와의 놀이는 대체로 아곤(Agon), 알레아(Alea), 미미크리(Mimicry), 일링크스(Ilinx)로 분류된다. 이 네 가지 항목은 각각 경쟁, 우연(운), 모방, 현기증이라는 속성을 지닌다. 경쟁의 아곤은 축구나 권투 등 승부를 겨룰 수 있는 놀이를 말한다. 알레아는 사다리 게임, 제비뽑기로 설명할 수 있고 미미크리는 역할극을, 일링크스는 코끼리 코를 하고 빙글빙글 돈 뒤 느껴지는 혼란스러움이나 흥분감으로 예를 들 수 있겠다. 이 네 가지 외에도 루두스(Ludus)와 파이디아(Paidia)라는 개념이 있지만,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바로 운, 우연을 뜻하는 ‘알레아’다. 연구자인 임해량, 이동은은 알레아를 주술적 알레아, 시스템적 알레아, 영웅적 알레아 세 층위로 나누고, 그를 <하스스톤>의 일부 상황과 연결해 바라본다. 연구자들은 놀이가 가지는 우연성이 사행성 담론에 매몰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이것이 가지는 긍정적인 측면을 발굴해 내고자 한다. 즉 이 연구는 알레아를 새로이 탐색하려는 시도이다. 2. 카이와와 알레아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놀이는 다소 복합적인 형태를 보이는데, 그것이 우연성과 연결되었을 때 도박이나 사행성 관련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이 도출된다. 게임에서 마주하게 되는 우연성은 곧장 도박과 통하게 되는가? 어느 정도 우연성을 의지하게 되는 게임은 사행성에 연관될 수밖에 없는가? 그렇다면 알레아라는 개념은 결국 룰렛 머신 부류의 게임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가? 이에 연구자들은 알레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알레아는 규칙을 통해 승패를 겨루지만 놀이하는 자가 그 과정에 자신의 의지를 행사할 수 없는 놀이를 일컫는다. 알레아의 승패는 오로지 우연을 통해 갈리는 것이 특징이며 그 즐거움의 본질이란 우연이 선사하는 절대적 평등을 통해 서로의 운명을 겨루는 데 있다.”(66쪽) ‘우연이 선사하는 절대적 평등’이란 특권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겨루기로 했을 때, 그 승부에서 발생한 운만으로도 특권을 가지지 못한 자가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한 마디로 “우연이 선사하는 위험과 기회는 공정하게 분배”(66쪽)된다. 이것이 연구자들이 강조하는 알레아의 실질적인 속성이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알레아 논의는 카이와를 의존해 왔기에 상당히 저평가되어 온 감이 있다. 카이와에 의하면 알레아는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어렵고, 그로 인해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창조적인 역할로 거듭나기 힘들다. 특히 카이와는 알레아와 아곤을 모순적이면서도 결속적이라고 했는데, 그러면서도 알레아가 아곤보다는 보조적이라고 보았다(Caillois, 1967/2018). 이런 카이와의 주장은 사람에 따라 운의 힘이 달라지는, 어떠한 모순에 주목하면서 나타난다. 자수성가한 이에게는 큰 축복처럼 여겨지는 운이 날 때부터 권력자였던 사람에게는 부인 받게 되는 게 그 예다. 한 마디로 카이와는 운과 우연이 노력을 배제시키는 경향이 있고,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을 환상에 빠트린다고 본 것이다. 3. 알레아-우연이 가지는 의미 연구자들은 카이와의 의견에서 한층 더 나아가고자 한다. 이들은 카이와가 우연의 비창조적인 부분에만 주목했으며, 우연을 다층적으로 보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이를테면 우연은 고대 철학에서 부정적인 개념으로 인식되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긍정적인 의미로 변화하였다. ‘운명’과 ‘천운’을 비롯해, ‘천체’, ‘정의’, ‘징벌’, ‘미신’, ‘요행’, ‘행운’, ‘불행’, ‘행복’, ‘신’, ‘섭리’, ‘계시’, ‘기회’, ‘미래’, ‘가능’, ‘희망’, ‘기대’, ‘역설’, ‘반전’, ‘돌발’, ‘돌출’, ‘변수’ 등 역사의 흐름에 따라 다양화된 것이다(최성철, 2016). 가령 ‘운명’ 속 우연은 본래 신의 의지를 설명하기 위한 요소였다. 따라서 인간은 신을 의심할 수 없고 그저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즉 우연과 함께하는 ‘운명’은 신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며 인간을 신에게 속박하는 요소였다. 그러나 우연은 근대에 들어서면서 해방을 불러오는 ‘자유’의 의미도 띠게 되었다. 한 마디로 진리(운명)를 거스르는 상징에서 언젠가 자유를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긍정적인 가능성으로 자리 잡았다는 이야기다. 그 결과 우연은 ‘운명’과 ‘자유’라는, 다소 상반된 두 개념에 깃들게 되었다. 그렇다면 카이와가 이야기한 알레아는 운명과 자유 중 어떤 부분에 더 가까웠을까? 연구자들은 두 개념 모두 그렇다고 설명한다. 카이와가 서술한 우연이 부정적인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는 데에서 ‘운명’이 나타나지만, 결국 알레아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점에서 ‘자유’도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물론 투쟁과 경쟁을 의미하는 아곤이 ‘자유’라는 개념에 훨씬 근접할 수 있겠으나, 연구자들은 알레아를 아곤으로부터 독립시키고자 하였다. ‘운명’을 곧 ‘통제’로 단정해 온 이제까지의 알레아 논의를 ‘자유’가 공존하는 개념으로 확장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알레아를 세 층위로 나누면서 드러난다. 4. 알레아의 세 층위와 <하스스톤> 1) 주술적 알레아 연구자들은 알레아의 세 층위를 주술적 알레아, 시스템적 알레아, 영웅적 알레아로 이름 붙였다. 그리고 이 세 층위를 <하스스톤>에서 마주할 수 있는 상황들로 설명한다. 여기서 첫째로 주술적 알레아란 ‘주술’이라는 단어에서 추측할 수 있듯, 어떠한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존버(존나 버티기)’라는 말을 간단한 예시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주술적 알레아는 신에 대한 의구심을 죄악시했던 중세 기독교 인식(최성철, 2016)을 계승해, 승리를 위한 노력이나 적극성을 생략시킨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면에서 주술적 알레아의 핵심을 맹신과 더불어 “어떠한 개연성과 상관없이 누구든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비이성적 즐거움”(70쪽)이라고 정리한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주술적 알레아의 힘이 현대에 들어서면서 약해졌다고 언급한다. 과학을 기반으로 한 이성적 가치관은 현대인들을 변화시켰고, 이들이 맹목적인 믿음을 갖고 놀이하는 일도 적어지게 된 것이 이유다. 이에 연구자들은 순수한 의미의 주술적 알레아는 사라졌지만, 알레아 그 자체에 잠재된 주술성이 플레이어에 따라 발현될 가능성은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스스톤>은 주술적 알레아를 발현시킬 가능성이 있는 게임이다. 연구자들은 ‘무작위 효과 카드’를 사례로 드는데, 이 카드들은 범용성이 낮고 불안정하다는 단점을 안고 있다. 다만 이 중 일부는 역전의 열쇠로써 사용된다. 여기서 연구자들이 지목한 카드는 ‘난투’다. 난투 카드는 ‘무작위 하수인 하나를 제외한 모든 하수인을 처치’하는 효과가 있어서 승기를 다시 잡기 위해 애용되곤 한다. 연구자들이 주술적 알레아와 난투 카드를 함께 이야기한 것도 그 때문이다. 난투 카드를 통해 승리할 수 있길 바라는 상황이 종종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듯 주술적 알레아는 역전을 바라는 이들로부터 재현된다. 2) 시스템적 알레아 자본주의 체제가 성장하게 된 17세기는 화폐 사용이 활발해지고 개인과 사회 모두가 격변했던 때다. 투기, 도박 등이 대중적 공간에 나타나기도 한 이 시기는 알레아의 상업화도 함께 이루어졌다(Reith, 2006). 이후 19세기에 활성화된 카지노는 알레아의 변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카지노에 설계된 교묘한 시스템이 사업자들에게는 막대한 이득을 안겨주고, 그 안의 플레이어들에게는 자신이 ‘놀이’를 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곳의 알레아는 믿음이라는 것이 침투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시스템화 되어있다. 이런 시스템적 알레아는 ‘우연이 선사하는 절대적 평등’이 아닌, 플레이어와 사업주 간의 수직적 관계를 상징한다. 현대 디지털 게임에서 나타나는 시스템적 알레아의 대표적인 예로는 랜덤박스가 있다. <하스스톤>은 카드 팩이 곧 랜덤박스다. 연구자들은 이 랜덤 카드 팩이 카지노의 수익 창출과 유사한 모습을 띤다고 분석한다. 철저히 수익 창출을 목적으로 하기에 좋은 아이템이 나올 확률은 낮고, 플레이어에게는 ‘놀이’라는 환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랜덤 카드 팩은 개선된 성능의 아이템이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돼서, 승률이 중요한 플레이어는 특히나 끊어내기 어렵다. 언급한 것처럼 랜덤박스는 여타 게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시스템적 알레아가 속속들이 침투해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알레아가 사행성과 도박만을 뜻한다는 오해로도 이어진다. 3) 영웅적 알레아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투쟁하는 영웅적 알레아는 고대 시절부터 ‘내기’의 형태로 명맥을 이어왔다. 내기는 특히 17~19세기의 기득권 사회에서 잘 이용됐는데, 이는 내기가 가치를 부여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던 탓이 크다. 내기(betting)가 가치 부여의 수단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도박(gambling)과 달리 뛰어난 판단과 노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이것을 19세기에 발표된 쥘 베른의 소설, <80일 간의 세계일주>를 통해 설명한다. 해당 소설 속에서 전개되는 내기는 선택(guessing)과 증명(proving)이라는 단계를 거친다. 이 선택과 증명은 극복해 내기만 하면 세상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절차로 기능한다. 이걸로 짐작할 수 있는 영웅적 알레아의 핵심은 ‘자유의지를 기반 삼아, 운명에 저항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가?’다. <하스스톤>에서 영웅적 알레아가 잘 드러나는 건 모험모드다. 이 모드는 한 번 죽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로그라이크 형식을 띠는데, 플레이어가 각각의 난이도와 도전 방식을 ‘선택’하고 이를 클리어함으로써 가치를 ‘증명’해 낼 수 있다. 이런 영웅적 알레아는 단순히 승리하거나 클리어하는 걸 넘어, 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다양한 가치에 중심을 둔다. 5. 나가며 물그릇에 기도하는 심정으로 게임을 하고, 랜덤박스에 지른 큰 금액을 재밌었으니 됐다며 합리화하고, 어려운 게임을 클리어하면서 스스로의 가치가 향상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아마 대부분의 게이머라면 이런 경험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 그래서 주술적 알레아, 시스템적 알레아, 영웅적 알레아에 대한 내용은 개념적으로 접근하지 않아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다만 현대 디지털 게임에 알레아가 형성될 자유도가 존재하는지 고민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몰입해 있을 때는 잊게 되는 사실이지만, 사실 게임은 정해진 설정을 기반으로 동작한다. 이는 시스템적 알레아에서 언급된 카지노의 체계와 동일하다. 반면 주술적 알레아와 영웅적 알레아는 본래 무엇 하나 정해진 것이 없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에 운을 걸면서 나타난 개념이다.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떠오른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게임 공간 안에서, 주술적 알레아와 영웅적 알레아는 결국 시스템적 알레아에 귀속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다시 말해 게임에는 제작자들의 계산과 기술이 개입되어 있는데, 두 알레아의 가치를 순수하게 누릴 수 있느냐는 소리다. 물론 연구자들도 두 알레아를 한정된 사례에만 적용하긴 했으나, 그래도 게임이 애초 만들어진 세계, 자본에 의해 통제되는 세계라는 점에서 맹점이 드러난다. 이를테면 오락실 기기에 코인을 추가하는 행위나 모바일 게임에서 이루어지는 캐릭터 육성 등에도 시스템적 알레아의 흔적은 남는다. 그러면 게임 안의 알레아들은 시스템적 알레아에 귀속되는 방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걸까? 본문에 서술되지는 않았지만, 연구자들은 관람적 알레아라는 개념을 결론부에 언급한다. 관람적 알레아는 게임 스트리밍이나 e스포츠 방송을 관람할 때 발현된다. 이 알레아는 타인을 매개로 하기에 상당히 간접적이다. 즉 게임을 즐기면서도 시스템적 알레아에 귀속될 확률이 낮다. 이러한 측면에서 관람적 알레아를 주목할 필요성을 함께 제시하고 싶다. 연구자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처럼 우연성에 관한 논의는 상당히 좁은 의미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게임이라는 매체와 알레아에 대해 더 많은 토론이 오가면 사행성이나 도박 담론에 치우치지 않는, 순수한 ‘우연놀이’ 또한 논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참고문헌 Caillois, R. (1967). Les jeux et les hommes. 이상률 (역) (2018). <놀이와 인간>. 서울: 문예출판사. Reith, G. (2005). The Age of Chane: Gambling in Western Culture. New York: Routledge 최성철 (2016). <역사와 우연>. 서울: 도서출판 길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백구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관해 관심 갖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비주얼 노벨 올 클리어에 열을 올리는 중입니다.

  • 무엇이 이스포츠팀을 팀으로 만드는가

    2021년 10월말, 이스포츠 업계에서는 전기가 될만한 일이 일어났다. 북미의 명문 이스포츠 구단인 페이즈 클랜이 SPAC을 통해서 내년 상반기에 나스닥 상장을 노린다는 뉴스가 나온 것이다. 사실 이스포츠 구단들의 성장세는 가팔랐고 증권시장에 상장하는 것이 최초도 아니다. 덴마크의 이스포츠 구단 아스트랄리스는 2019년 나스닥 코펜하겐 거래소에 상장됐고 영국의 길드 이스포츠는 2020년에 런던증권거래소에 상장됐다. 하지만 사람들이 놀란 것은 페이즈 클랜 측이 밝힌 기업 가치는 10억 달러였다. < Back 무엇이 이스포츠팀을 팀으로 만드는가 03 GG Vol. 21. 12. 10. 2021년 10월말, 이스포츠 업계에서는 전기가 될만한 일이 일어났다. 북미의 명문 이스포츠 구단인 페이즈 클랜이 SPAC을 통해서 내년 상반기에 나스닥 상장을 노린다는 뉴스가 나온 것이다. 사실 이스포츠 구단들의 성장세는 가팔랐고 증권시장에 상장하는 것이 최초도 아니다. 덴마크의 이스포츠 구단 아스트랄리스는 2019년 나스닥 코펜하겐 거래소에 상장됐고 영국의 길드 이스포츠는 2020년에 런던증권거래소에 상장됐다. 하지만 사람들이 놀란 것은 페이즈 클랜 측이 밝힌 기업 가치는 10억 달러였다. 10억 달러는 지나친 고평가라는 지적은 앞다투어 나왔다. 이스포츠 산업의 장래가 유명한 것은 누구나 아는 것이지만 2020년 500억에도 못미치는 매출을 올린 회사가 조단위의 기업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페이즈 클랜의 가치에 대한 논의가 나올 때 가장 뼈아픈 지적은 페이즈 클랜이 결국 ‘후디 조직’이라는 것이었다. 후디 조직. 영어로 하면 Hoodie Organization이다. 이는 인기가 높은 이스포츠 구단들에 자주 붙는 멸칭이다. 이스포츠 자체로 내는 수익은 그다지 많지 않고 ‘후디’ 등의 의류를 비롯한 굿즈 판매로 돈을 버는 구단을 비하하는 것이다. 실제로 캐나다의 게임매체 더게이머의 제임스 트로튼은 페이즈 클랜의 전체매출 중 이스포츠로 올리는 수익은 20%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이스포츠 구단임에도 불구하고 스포츠로 버는 수익의 규모가 작다는 것은 과연 구단이라는 조직의 존재의의가 뭔지를 생각하게 된다. 스포츠에서 발생하는 수익이 20프로에 미친다면 과연 이들에게 스포츠가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스트리밍과 같은 미디어 활동과 브랜딩을 통한 수익창출이 주요수입원이라면 스포츠는 그저 그들에게 액세서리에 불과할 수도 있다. 스포츠적인 측면에서 퍼포먼스를 보여주면 자연스럽게 팬베이스가 늘어나게 되고 이를 통해서 수익을 창출하는 기존 스포츠 구단들의 공식이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누군가는 페이즈 클랜이 이스포츠 리그에서 우승을 해서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사진은 그저 후디가 몇천장 더 나가는 식의 마케팅 캠페인의 일환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스트리머들이 모인 집단과 이스포츠 구단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 기본적으로 스트리머들이 모인 집단도 브랜딩을 할 수 있고 대회에도 참가를 할 수 있다. 프로로서 이스포츠 판에서 경쟁을 하는 선수들도 스트리밍을 자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둘의 차이점은 더 모호해진다. 두 개의 조직은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이 보인다. 이런 차이점에 대해서 가장 잘 대답해 줄 수 있는 인사들을 인터뷰했다. 북미의 사정을 듣고나서는 한국의 사정도 궁금해져서 인터뷰를 했다. 예상치 못하게 같은 답을 들었다. 게임을 잘 하는 사람이 프로게이머가 되려면 인터뷰에 응한 사람은 조나단 판이었다. 라이엇 게임스의 직원으로 일하던 그가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 구단의 창립자이자 CEO로 일해줄 것을 제안 받은 것은 2015년 이었다. 그가 창단하게 된 팀 엠버는 리그 오브 레전드 챌린저스 리그에 도전을 했다. 성적을 내지 못하고 1년도 안 돼 구단 자체가 해산됐지만 그 이후로도 그는 이스포츠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로, 이스포츠에 투자하는 투자자로, 아마존 게임스와 지금은 메타가 된 페이스북의 전략담당으로 일을 했다. 이스포츠의 짧은 역사를 생각할 때 이 표현이 적확할지는 미지수지만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국내 이스포츠 업계에서는 샌드박스 게이밍의 정회윤 단장이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아직도 현업에서 선수들과 가장 가까이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날카로운 인사이트를 제공했다. 그의 대답은 매우 간단했다. 스트리머가 모이면 스트리머 집단이고 선수들이 모이면 구단이다.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든다. 게임을 잘하는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미 엘리트 스포츠인들이 받아야 하는 훈련과 거쳐야 하는 과정들이 성립돼 있는 전통적인 스포츠와 달리 이스포츠는 아직 이런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다. 따라서 정말 게임을 잘하는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의 실력 차이는 다른 스포츠에 비해 적은 편이다. 실력에서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의 차이를 찾기는 쉽지 않다. 인사이더들이 이야기하는 ‘프로와 아마의 차이’는 멘탈이었다. 그저 게임을 잘하는 아마추어 시절에는 수 틀리면 게임을 놓아버려도 되고 욕을 해도 된다. 한 개인으로서 인성에 대한 비판은 들을 수 있겠지만 거기까지다. 하지만 프로 선수가 되면 상황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언행에 대한 주목이 높아지고 미디어에 노출된다. 공인의 정의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말들이 있지만 프로 선수가 된 이상 그저 게임을 즐기고 잘하던 시절과는 다른 언행을 보여야 하고 이런 언행들이 모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그들은 공인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프로 선수가 되면 아마추어 선수들 때와는 전혀 다른 수준의 압박이 가해지게 된다. 간단하게 말해서 책임감이 생기고 ‘짜증난다고 때려칠’ 수 있는 상황과는 멀어진다. 게임 한 판을 할 때마다의 압박도 전혀 다르다. 조나단 판은 “프로 선수로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멘탈적인 부분이다. 강도높은 훈련과 경기에서의 압박을 버텨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그래서 모든 게임을 잘하는 사람들이 훌륭한 선수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스트레스와 압박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전했다. 정 단장 또한 “실제로 선수들을 이해하기 위해 몇일간 합숙한 적이 있는데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굉장히 따라가기 힘든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기 외적인 측면에서도 논란거리를 만들면 안 되기 때문에 개인으로서의 소양도 중요한 부분이다. 한국에서도 많은 선수들이 온라인 상에서 논란이 될만한 용어를 쓰면서 구설수에 오른 바 있다. 북미에서도 선수들의 발언 때문에 논란이 생긴 사례를 쓰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이런 선수들이 모두 인성을 비판받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기본적인 소양이 부족해서 생긴 실수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논란거리를 만들지 않고 더 나아가서는 누군가에게 영감이 될 만한 언행을 경기 외적으로도 보여주는 것은 개인적 소양에서 나온다. 구단의 역할에 대해 강한 멘탈과 소양이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의 차이. 그렇다면 여기서 바로 따라오는 것이 구단의 역할이다. 단순히 선수를 모아놓는 것이 구단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이 이스포츠 또한 선수는 항상 완성돼 있는 존재가 아니라 키워지는 존재기도 하기 하다. 그래서 구단은 선수들의 멘탈 케어에 만전을 기해야 하며 소양을 길러주려는 노력도 해야 한다. 조나단 판은 엠버에서의 1년을 다큐멘터리로 남겨놓았다. 그들이 챌린저스 리그에서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 〈At All Cost〉는 이스포츠 구단의 영광스러운 부분이 아닌 실패와 좌절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독특한 지점이 있다. 조나단 판은 구단을 운영하면서 선수들의 멘탈 케어를 매우 중요하게 여겨서 이를 위한 시간을 따로 배분하고 체력적 부분과 정신력의 연결고리 또한 지적하면서 선수들에게 운동세션도 제공했다. 시즌이 진행되면서 긴 시즌을 버텨내게 하는 정신력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깨닫고 스포츠 심리학자인 웰던 그린을 헤드 코치로 영입한 적도 있다. 물론 이런 노력들이 현재 완벽한 것은 아니며 결실을 맺기에는 아직 먼 것이 현실이다. 정 단장은 “기본적으로 우리는 선수들이 스포츠 선수들의 멘탈리티나 소양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어린 연령대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성숙함이나 노련미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이스포츠 선수들의 멘탈 관리는 결국 10대-20대 청년들을 케어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단순히 스포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업군 - 학원, 아이돌, 심지어 바둑에서까지 많은 케이스를 연구하고 벤치마킹하려 한다”고 전했다. 할리우드 리포터에 따르면 비공식적인 통계가 말하는 프로 게이머의 선수생명은 5년 안팎이라고 한다. 일반적인 스포츠 선수들에 비하면 너무나도 짧은 ‘생명’이다. 이스포츠 구단이 스트리머 집단과 다른 점에 대한 짧은 연구는 전세계 이스포츠 업계에 강렬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스트리머 집단이 아니고 구단으로 불리고 싶다면 제대로 된 지원체계를 확립해서 구단이 구단다워져야 한다고.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나성인) 홍영훈 캘리포니아에서 살면서 게임업계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에 출연하고 매체에 기고를 하며 많은 분들에게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패션부터 게임까지 분야에 상관없이 재밌는 글을 평생 쓰고 싶습니다.

  • [Editor's view]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근래들어 출시되는 많은 게임들을 묶을 수 있는 하나의 키워드는 ‘복고’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이 넘은 게임들이 새로운 플랫폼과 형식으로 다시 현역 복귀 신고를 줄줄이 하고 있는 분위기다. 왕년의 인기 게임들은 함께 성장해 이제는 중장년에 이른 게이머들에게 추억을 앞세우며 다시금 인기를 몰았다. 가장 최근 출시한 <디아블로 2: 레저렉션>은 20여년 전 게임규칙을 그대로 가져왔지만 PC방 게임순위 2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 Back [Editor's view]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02 GG Vol. 21. 8. 10. 근래들어 출시되는 많은 게임들을 묶을 수 있는 하나의 키워드는 ‘복고’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이 넘은 게임들이 새로운 플랫폼과 형식으로 다시 현역 복귀 신고를 줄줄이 하고 있는 분위기다. 왕년의 인기 게임들은 함께 성장해 이제는 중장년에 이른 게이머들에게 추억을 앞세우며 다시금 인기를 몰았다. 가장 최근 출시한 <디아블로 2: 레저렉션>은 20여년 전 게임규칙을 그대로 가져왔지만 PC방 게임순위 2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게임의 역사도 어느새 반세기가 넘어가기 시작한 만큼, 게임에도 이제는 복고라는 말이 어울리기 시작했다. 많은 인디게임들이 내세우는 8비트 도트그래픽 풍은 시대가 지나고 기술이 변하는 와중에 하나의 양식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고전 게임들이 안겨줬던 감성들은 이른바 ‘정신적 후속작’들을 통해 계승되기도 한다. <게임 제너레이션> 2호의 테마는 ‘레트로, 클래식, 복고’다. 복고 열풍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게임의 역사가 나름의 숙성을 거쳤다는 반증이고, 우리는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고 있는 어떤 일련의 흐름들에 주목할 필요를 떠올린다. 과거지향적이면서도 마냥 과거에 머무르지 않는 레트로 게임들과 그 계승작들은 오늘날 우리에겐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해보고자 했다. 인트로의 두 글은 각각 클래식 게임을 상정한다면 어떤 조건일지에 대한 고민과, 오늘날 레트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들의 저변에 자리한 노스탤지어로서의 감성을 다룬다. 메인 기획에서는 레트로 시절에 존재했던 한국 게임비평의 흔적들을 더듬고, 인류 최초의 디지털게임 세대로 일컬어볼 수 있을 노년 게이머의 존재에 대한 질문들을 던져보고자 했다. 인디게임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레트로 양식의 재구현은 어떤 맥락일지를 검토하고, 한국이 아닌 북유럽에서 이뤄지고 있는 레트로게임에 관한 담론들을 받아보았다. 트렌드 섹션의 세 꼭지 중 첫번째는 9월 팬데믹 상황에서 진행된 부산인디커넥트 2021 현장 직관의 경험을 듣고자 했다. 현직 변호사가 보는 <역전재판>의 이야기는 흥미롭고, <디아블로2: 레저렉션>의 출시를 기점으로 블리자드라는 대형 게임사의 변화를 지켜보고자 했다. 2호의 아티클들은 1호보다 숫자를 늘려 좀더 풍부하게 구성하고자 했다. 조이스틱이라는 인터페이스를 통해 게임과 게이머의 공진화를 살펴봄으로써 기술문화연구의 측면에서 게임에 접근하는 시선의 의미를 볼 수 있었고, <퀘이크> 리마스터에 대한 비평은 메인기획에서도 다룬 레트로의 유유한 흐름이 어떻게 현대적으로 재구성되는지에 대한 설득력있는 설명을 제시한다. 세계 최대 게임시장이면서도 정작 알려진 바는 적은 중국의 초창기 게임사에 대한 해외기고글은 좀처럼 만나보기 힘든 새로운 정보들을 제공한다. 새로 신설한 북리뷰 코너에서는 매 호마다 게임을 다루는 서적과 논문, 연구자료들을 접하기 쉽게 정리하고자 한다. 첫 글로는 게임의 폭력성 문제를 다루며 올해 번역 출간된 <모럴 컴뱃>을 함께 읽는다. 게임을 다루는 젊은 작가들의 시도는 각각 게임에서 벌어지는 모험에서 나타나는 젠더 문제와 초창기 3D그래픽이 만들어낸 결과물에 대한 접근을 다룬다. 인터뷰 기사는 오래된 레트로게이머이자 유튜버인 ‘꿀딴지곰’과 나눈 레트로게임 이야기와 ‘서울2033’으로 알려진 인디게임개발사 반지하게임즈 이유원대표와 나눈 인디게임 이야기를 정리했다. 프로그램 자체는 아카이빙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정작 프로그램을 통해 플레이어가 만들어낸 플레이는 설령 화면을 녹화한다 하더라도 보존이 쉽지 않은 것이 디지털게임이라는 매체의 독특한 점일 것이다. 레트로라는 이름으로 남은 편린을 여러 필자들과 함께 되짚으면서 떠오른 것은 지나간 나의 게임 플레이 순간들이었다. 말로 설명하려 해도 쉽게 전달되지 않는, 그러나 나의 기억 안에서만큼은 너무나도 짜릿했던, 혹은 생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어떤 순간들은 기록하고 보존할 수 없기에 더욱 아련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어떤 노랫말대로,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이 레트로 게임을 거쳐 간 이들의 플레이일지도 모르겠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즐기는 사람들을 지켜라 - 만화는 어떻게 멸시와 비하를 딛고 일어섰는가

    1972년 6월 29일 동아일보에선 “불량만화 화형식”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불량만화는 사회악의 근원이다”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운 ‘한국아동도서보급협회’는 서울 남산 야외음악당(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위치한 자리다!)에서 ‘어린이 악서 추방대회’를 열고 만화책을 모아 불태웠다. 이 단체는 만화를 두고 ‘유소년의 정서발달을 해친다’, ‘제대로 된 지식을 전달하지 못한다’, 그리고 ‘맞춤법과 띄어쓰기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주류의 시선에서, 당시 만화는 ‘악서’였던 셈이다. < Back 즐기는 사람들을 지켜라 - 만화는 어떻게 멸시와 비하를 딛고 일어섰는가 01 GG Vol. 21. 6. 10. 1972년 6월 29일 동아일보에선 “불량만화 화형식”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불량만화는 사회악의 근원이다”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운 ‘한국아동도서보급협회’는 서울 남산 야외음악당(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위치한 자리다!)에서 ‘어린이 악서 추방대회’를 열고 만화책을 모아 불태웠다. 이 단체는 만화를 두고 ‘유소년의 정서발달을 해친다’, ‘제대로 된 지식을 전달하지 못한다’, 그리고 ‘맞춤법과 띄어쓰기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주류의 시선에서, 당시 만화는 ‘악서’였던 셈이다. * 애니센터 앞에서 불타는 만화. 1996년에는 정부가 만화의 표현을 제한하고, 이를 어기면 형사처벌하는 법안이 발의됐다. 이른바 ‘청보법 파동’이다. 여기에 항의하기 위해 만화가들이 여의도에 모여 ‘만화심의 철폐를 위한 범만화인 결의대회’를 열었고, 1997년에는 이현세 작가의 <천국의 신화>가 기소됐다. 대회가 열린 1996년 11월 3일은 만화의 날이 됐고, 2001년 국가 공식 기념일이 됐다. 2000년 여름에는 ‘둘리아빠’ 김수정 당시 만화가협회장의 주도로 청보법 파동에 항의하는 침묵시위가 개최됐다. 김수정 화백은 “만화가협회 회원과 함께 나서겠다”고 이야기했지만, 현장에는 아마추어 만화동아리 연합,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학생을 비롯한 일반 독자들이 있었다. [1] 2012년에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일부 웹툰을 청소년유해매체로 지정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독자와 작가들이 함께 싸웠다. 이 결과 세워진 ‘웹툰자율규제위원회’에서는 2018년 ‘웹툰 자율규제 연령등급 기준에 관한 연구’를 통해 콘텐츠 분야 최초로 ‘차별’에 대한 내용이 포함된 자가진단표를 공개 [2] 하기도 했다. 대중과 호흡하는 콘텐츠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이후에도 평단과 독자들이 웹툰을 제공하는 플랫폼의 역할과 콘텐츠 제공자의 책임, 작가의 위상 변화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2000년과 2012년 사례는 창작자와 향유자가 한 목소리를 내며 만화를 지켜낸 순간들이다. 말하자면, 불량 콘텐츠였던 만화가 문화가 되어가는 장면이다. 현재, 2021년에는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대중교통에서도, 집에서도, 카페에서도, 어디서나 웹툰을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국의 만화는 이렇게 ‘문화’의 영역으로 발을 들였다. 게임도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다. 게임은 ‘청소년의 건전한 정서발달을 해치고’, ‘폭력성을 추동해 범죄를 유발하고’, 심지어 ‘중독을 유발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그런데, 저 말들은 만화에도 똑같이 쓰였던 말이다. 즐기는 사람이 있어야 문화다 소위 ‘주류’의 시선에서 보는 만화는 하위 문화로 여겨졌다. 불량하고, 어딘가 해로울 것 같고, 악당들이 유해물질을 이용해서(?) 만들어내는 이미지다.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도 만화 화형식(?)이 거행되곤 했다. 우리나라는 국가 차원의 탄압이었지만, 미국에서는 업체들이 앞장서서 CCA(Comics Code Authority)라는 단체를 만들어 ‘승인된’ 만화만 발행하도록 하기도 했다. 미국이 자랑하는 표현의 자유보다 무서운 것이 주류의 시선이었던 셈이다. * 미국 CCA의 승인 씰. 이런 주류의 시선이 탄압하는 역사는 매체를 가리지 않고 유구하다. 소설이, 신문이, 영화가 그랬다. 그러니 가장 막내(?)격 매체인 만화와 게임이 탄압받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인지도 모른다. 이쯤 되면 ‘새로 등장한 매체에 느끼는 공포’를 부르는 말이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하지만 이런 탄압과 오명, 억측과 오해에도 불구하고 만화가 ‘문화’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에는 즐기는 사람들의 힘이 가장 컸다. 2000년 종로 거리에서, 2012년 온라인 게시판에서 창작자와 독자가 함께 목소리를 냈고, 결국 만화는 천천히 문화로 자리잡았다. 그럼에도 만화계에선 여전히 플랫폼의 역할, 콘텐츠 제공자의 책임, 작가의 위상 변화에 대한 토론이 끊이지 않는다. 이런 역동성이야 말로 문화의 핵심이다. * 〈판타스틱 4〉이슈 1. 우측 상단에 CCA 씰이 있다. 이렇게 창작자의 욕망, 문화를 향유하는 향유자의 열망이 끊임없이 충돌할 때, 문화는 빛을 발한다. 때로는 규제에 질문을 던지며 돌파구를 만들기도 하고, ‘판’ 밖의 돌팔매질에 창작자와 향유자가 함께 항의하기도 하고, 때론 서로를 질타하며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이런 행위가 가능한 중심에는 콘텐츠를 경험하고, 즐기는 사람의 존재가 있다. 어떤 콘텐츠가 ‘문화’로 여겨진다는 건, 이런 과정을 거쳐 제공자와 향유자의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았다는 걸 의미한다. 게임 역시 즐기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만화와 게임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만화는 그동안 개인 창작자가 주류였지만, 게임은 태생부터 기업이 개발하는 산업의 요소가 더 강했다는 점이다. 미국에서는 CCA의 사전검열을 피해 피 대신 불꽃이, 살점 대신 바위가 튀는 <판타스틱 4>를 만들어냈고, 한국에서는 시장이 사라지자 온라인 공간에서 창작을 이어간 작가들이 웹툰의 씨앗을 틔웠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게임’은 기업이 만들고, 기업은 이윤을 남겨야만 존속할 수 있다. 때문에 끊임없이 유혹에 시달린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정액제를 넘어 ‘가챠’로 불리는 뽑기를 만났고, ‘P2W(Pay to Win)’ 비즈니스 모델이라는 말에도 익숙해지게 됐다. 게임을 즐기는 사람, 게이머들은 이 과정까지도 어느정도 이해했다. 게임의 태생과, 내가 즐기는 게임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이 즐기는 건 단순히 게임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아니라, 게임이 주는 경험과 다른 유저와 협동-경쟁하며 느끼는 경험의 총합이다. 그동안 게임이 부당한 탄압을 받을 때 마다, 게이머들은 항상 게임 옆에 서서 비난을 받아냈고, 또 맞섰다. ‘내가 사랑하는 게임’을 지키기 위해서 게이머들은 목소리를 높여왔다. 게임은 문화다. 게이머에겐. 오늘날 게임이 처한 상황은 어떨까? 앞서 말한 것처럼, 게이머에겐 ‘게임은 문화’라는 말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나의 청소년기는 스타리그가, 20대는 LCK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 우리에게 게임은 나 혼자서 즐기는 놀이를 넘어 함께 열광하는 문화였다. 게임을 만화처럼 불태우는 시대는 지났다. 사회의 시선은 느리지만 변하는 중이다. 게이머들은 스스로 문화를 즐기는 법을 터득했다. 그리고, 이제 게이머들은 창작자들, 즉 게임사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블리자드의 ‘님폰없’ 사태, 한국의 트럭시위 릴레이를 보면 전세계적인 추세로 보인다. * 밈이 된 '님폰없'. 이제 게이머들은 ‘게임은 문화’라는 말이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 특히 대형 게임사들에겐 어떤 의미인지 말이다. 게이머들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우리가 즐기고 사랑할 수 있는 게임을 보여 달라”고 말한다. 오히려 게이머들이 ‘더 강한 규제’를 외치는 상황을, 얼마나 엄중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묻고 있다. 만화는 발전 과정에서 ‘독자’의 힘으로 핍박을 이겨냈다. 미국은 ‘수퍼히어로’ 장르로, 한국은 독자와 함께 성장했던 역사를 바탕으로 성장했다. 2000년과 2012년 사례, 화형식을 거쳐 MCU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심엔 독자가 있었다. 최근 웹툰계에 대두되는 플랫폼의 책임을 이야기하는 것 역시 ‘읽는 사람’을 존중하고, 플랫폼을 찾는 이유가 작품임을 생각하라는 의미다. 결국 창작자, 콘텐츠 제공자가 ‘즐기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으면, 문화라고 부르기 어렵다. 게이머들에게 게임은 부정할 수 없는 문화다. 게이머들은 게임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만화계의 2000년과 2012년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게임사들은 게이머들이 원하는, 즐길 수 있는 작품을 내기 위해 50년 전 마블처럼 고민하고 있을까? 게임은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다. 문화 콘텐츠로서 게임은, 이제 기로에 서 있다. [1] 손발을 잃고 할 말을 잃은 만화가들의 침묵시위, 중앙일보, 2000. 7. 23 https://news.joins.com/article/682613 [2] 웹툰자율규제 연령등급기준에 관한 연구, 한국콘텐츠진흥원, https://www.kocca.kr/cop/bbs/view/B0000147/1836747.do?searchCnd=&searchWrd=&cateTp1=&cateTp2=&useAt=&menuNo=201825&categorys=0&subcate=0&cateCode=&type=&instNo=0&questionTp=&uf_Setting=&recovery=&option1=&option2=&year=&categoryCOM062=&categoryCOM063=&categoryCOM208=&categoryInst=&morePage=&delCode=0&pageIndex=1#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만화평론가) 이재민 2013년부터 만화/웹툰 리뷰 팟캐스트 ‘웹투니스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2017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평론공모전, 2019년 콘텐츠진흥원 만화평론공모전 기성부문에서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2019년부터 웹진 ‘웹툰인사이트’에서 에디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만화를 읽고, 글을 쓰고, 만화를 중심으로 이뤄진 시장 저변의 많은 것들을 찾아보는 일을 합니다. 소설 <룬의 아이들>과 스타리그, LCK, 그리고 수많은 웹툰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 〈디스코 엘리시움〉 하나의 세계에서 태동하는 모순, 적대, 역설의 게임(장려상)

    그럼에도 비평적으로 찬사를 받으며 우뚝 선 ZA/UM의 개발자들은 이제 비디오 게임이야말로 21세기를 이끌어나갈 예술이라고 밝히는 데에 이르렀다. “타인의 기억에 남고 싶다면, 체계적으로 반감을 사야 합니다. 반감을 살 준비가 되었다면, 정말로 역사적인 기회를 얻게 됩니다.”3)는 말은 그들에게 매우 적절하지 않을까. < Back 〈디스코 엘리시움〉 하나의 세계에서 태동하는 모순, 적대, 역설의 게임(장려상) 07 GG Vol. 22. 8. 10. 하나의 세계라는 조건 속의 여정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지만, 그들이 바라는 꼭 그대로 역사를 형성해가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 스스로 선택한 환경 아래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곧바로 맞닥뜨리게 되거나 그로부터 조건 지어지고 넘겨받은 환경하에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은 악몽과도 같이 살아 있는 세대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카를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 〈디스코 엘리시움〉의 등장인물 〈디스코 엘리시움〉은 반세기 전 한때 공산주의 혁명의 파도가 엄습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난 혁명으로 풍비박산이 난 상태인 가상 국가 레바숄과 그 한 구역인 마르티네즈를 주 배경으로 한다. 탄광에서 일하며 벽화 페인트와 미술에 심취한 공산주의자 스컬 신디와 대기업 와일드 파인 사의 대사이자 초자유주의자인 조이스, 해리의 동료 킴 키츠라기를 순수 혈통이 아닌 이방인으로 취급하는 인종주의자 운전수와 미확인파시스트 개리, 왕정파로 공산주의자들과 맞서 싸웠던 노인과 마조프주의자로 연합군에 저항했던 탈영병, 밀매 혐의를 받으면서도 항만 노동조합 대표자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현실 권력을 움켜쥔 에브라트 등의 사민주의자, 클럽을 만드는 데 혈안이 된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 이곳은 화해 불가능한 NPC들, 성원들이 살아가며 서로에 필연적으로 적대, 모순, 역설 등을 낳을 수밖에 없는 세계다. 한 세계의 구성원들이지만 동시에 결코 엮일 수 없으며, 불화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 이미 손쓸 수 없을 만큼 초토화된 곳에서 매우 불안정하게 공존하고 있다. 여기서 대두되는 것은 이러한 캐릭터들이 놓인 세계를 구성하는 조건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육성해나가는 방식(능력치, 생각 캐비닛, 장비)에서 무엇을 추구하든, 어떤 피상적인 혹은 구체적인 사상과 이념을 가졌든, 아니면 그러한 것들에 전혀 관심이 없이 그냥 플레이하든 게임 진행에 문제는 없다. 인물들과의 상호작용과 주사위 판정에 따라 선택지와 이념 루트들이 부분적으로 변화하며, 게임에 대한 인상이 많이 달라지는 것은 맞다. 분명 〈디스코 엘리시움〉의 선택은 그 자체로 핵심적인 캐릭터 구축의 원동력이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게임 내 모든 활동은 플레이어가 공통으로 접촉하고, 대면하고, 공유하게 되는 한 세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디스코 엘리시움〉에서 플레이어는 전지적인 능력으로 세계를 뒤흔들고, 변형하는 일을 수행하지 못한다. 이는 곧 레바숄이라는 하나의 황폐한 세계를 플레이어의 주관적인 의지와 계획에 따라 마음대로 변화시키는 것이 게임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임에서 해리의 자아와 의식, 그리고 이를 조작하는 플레이어의 주관적인 의도가 세계에 그대로 반영되지는 않는다. 그러한 반영을 방해하고 좌절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주인공이 본인으로 다시 서는 과정에서 탐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계를 탐색하는 것은 플레이를 이어나가면서 분실한 신분증을 찾기 전까지 자신의 이름마저도 기억하지 못하는 해리 드 부아다. 주정뱅이 해리는 새로운 동료 킴 키츠라기와 함께 살인 사건을 조사해나감과 동시에 세계를 구성하는 NPC들에 접근하여 소통하거나 교감하며 세계를 탐색해나간다. 하지만 해리 또한 세계의 조건으로부터 독립된, 자유로운 인물이 전혀 아니다. 해리는 RCM 소속의 경찰로 권위를 위임받은 인물이다. 그 자신이 몸담은 RCM은 혁명 이후 연합 정부에 의해 국제 영역의 치안을 복구하고자 조직되었으며, 정치적으로 중립을 자처하고 있으나 치안을 유지하는 데 급급하다. 단지 설립이 허락된 조직에 불과한, RCM의 경찰이라는 조건을 해리와 플레이어는 이를 끊임없이 자각해나간다. 그렇기에 〈디스코 엘리시움〉에는 선택이 반영되는 결과의 다양성을 내세우며 세계로부터, 인물로부터 독립된 각각의 가능 세계들을 앞세우려 드는 멀티 유니버스, 멀티 엔딩은 존재하지 않는다. 흔히 동원되는 평행세계, 대체역사, 가상현실 같은 개념들 또한 성립하지 못한다. 여기에 독립된 각자의 다원적 세계들이란 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디스코 엘리시움〉은 결과에 도달하는 선택의 과정들에 활로를 열어젖힘으로써 게임을 통해 정식화된 공통의 세계 속에서 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행동하며, 살아갈 것인가에 있다. 그런 점에서 게임에서 선택지를 통하여 과정과 분기가 결정됨에도 그것이 세계를 뒤바꾸는 성공이나 실패의 특정한 루트를 창출하지 않는 것도 자연스러워진다. 일각에서는 네 개의 이데올로기를 가리키는 선택지를 골라서 특정 이념을 체화한 인물로 만들어도, 결국 같은 화면을 공유하며 세계의 결과는 차이가 없다는 점을 예로 들어 게임의 자유도를 비판하곤 한다. 그것은 적법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세계를 충실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던함과 포스트모던함, 표층과 심층의 이야기의 공존 “만약 새로운 정치 예술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진실에 집중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의 근원적 대상으로서의 다국적 자본이라는 세계 공간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현실을 돌파하여 이 세계 공간을 재현할 수 있는 지금껏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개인적·집단적 주체로서 우리 자신의 행동하고 위치를 다시 파악하기 시작하고, 현재 우리의 공간적·사회적 혼란에 의해 중화되어버린 투쟁하는 능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치적 형식이 어떤 식으로든 존재한다면, 그것의 소명은 사회적이고 공간적인 차원에서 전 지구적인 인식적 지도 그리기를 창안하고 투사하는 일일 것이다.”(프레드릭 제임슨,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 문화 논리〉) 앞서 〈디스코 엘리시움〉은 어떤 사상과 이념을 택하든 하나의 세계를 공유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는 분명히 동시대 유행하는 어떤 RPG, 오픈월드 게임들의 방향과는 확연히 다른, 이전 세기의 전유물 같은 인상을 준다. 플레이어들이 종종 문학 작품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거나, 한 문학평론가의 ‘게임이 되는 소설, 소설이 되는 게임 1) 이라는 말은 그것을 대변하는 의견일 것이다. * 도덕주의자 퀘스트에 등장하는 연합 군함 아처 먼저 인류의 가장 위대한 무결자로 불리는 '돌로레스 데이'라는 존재를 다시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게임에서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뤄지는 이 인물은 무결자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존재이고 도덕주의자들(=인문주의자)의 상징이며, 통치 시기에는 엘리시움에 있는 여러 이솔라를 발견했다. 레바숄 또한 이 돌로레스 데이 시절에 만들어진 식민지였다. 돌로레스 데이에 대한 숭배는 단순 종교적인 믿음이 아니라 일종의 법칙으로 여겨졌으며, RCM의 법규도 돌로레스 데이 시절에 만들어진 법에 기반을 둔다. 돌로레스가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은 경호원에게 총에 맞고 죽고, 돌로레스 데이의 시절이 돌연 막을 내린 이후 더는 이러한 세계의 질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엘리시움은, 레바숄은, 사회를 어떻게 질서화할 것인가에 대한 아이디어가 실패하고 이러한 구상 자체가 외부 세력에 의해 짓눌려버린 곳이다. 그것은 곧 이성, 합리, 질서 등을 내세운 근대가 좌초된 것이기도 하다. * 교회 안의 클럽 반면 서브퀘스트를 진행하면서 이와 대비되는, 이전의 시스템이 더는 기능 하지 못하는 근대 이후의 포스트모던한 감각으로 살아가는 듯한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과 마주할 수 있다. 이들은 최신의 아노딕 댄스 뮤직을 구현하는 행위에 전념한다. 훼손당한 돌로레스 데이의 벽 조각상이 안치되어있는 교회 안에 들어와 클럽을 만든다. 진중한 대화라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이들은 너무나 '소프트코어'한 세상을 '하드코어'하게 바꿔야 한다고 하거나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파시즘이든 무엇이든 거대한 이념과 사상들은 다 나쁘고 가치판단에는 별 관심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면서도, 대뜸 돌로레스 데이를 대량학살자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포스트모던'이라는 렌즈로 '오타쿠'와 현대 일본의 정신구조에 대한 분석하면서 이 개념을 축으로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게임을 하는 것'이 '사회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점을 탐구한 아즈마 히로키는 근대와 탈근대의 세계를 트리형, 데이터베이스형으로 분류한 바 있다. 근대의 트리형은 우리의 의식에 비치는 표층적인 세계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표층을 규정하고 있는 심층, 즉 커다란 이야기가 있다는 것에 반해 포스트모던의 데이터베이스형 세계에서 표층은 심층만으로는 결정되지 않고 그 읽어내기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디스코 엘리시움〉을 ’이야기하기‘의 방법으로도 볼 수 있다. 형사가 살인 사건의 진범을 잡는 표층과 기억을 잃은 자가 인물들과 소통하고 세계를 마주하며 다시 나아가는 심층의 이야기로서, 그리고 근대와 근대 이후의 감각이란 무엇인지에 관해서 말이다. 지나간 근대를 재료로 삼는 〈디스코 엘리시움〉에서 주인공 해리 또한 근대를 지나온 인물이다. 해리는 근대의 산물이라 여겨지는 인간의 재귀적인 자기 구성과 수정 능력을 통하여 세계와 마주하며 자신을 다시 찾아가며, 게임의 세계관도 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자기 자신을 누구로, 무엇으로, 어떤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사고해나가는 해리나 자신을 다소 철학적인 항만 노동자로 소개하며, ’나는 누구인가, 너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우리는 투쟁하는가‘식의 거시적인 담론을 나누는 걸 즐기는 편이라고 말하는 마냐나 같은 인물은 이와 같은 부류일 것이다. 그러나 아노딕 댄스 뮤직의 아이들에게는 이는 관심사도 아니다. “거대한 이야기와는 철저히 단절한 새로운 세대는 처음부터 세계를 데이터베이스로 인식하기 때문에 그 전체를 조망하는 시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 전체에 대한 특정 이야기의 공유화 압력의 저하, 다시 말해 '그 내용이 무엇이든 일단은 특정한 이야기를 모두가 공유해야 한다'는 메타 이야기적 합의의 소멸을 지적한 것이기 때문이다”(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이은미 옮김, 선정우 감수, 문학동네, 2007). 히로키식의 설명을 빌리자면, 트리형 세계 속에 작품의 심층적인 이념, 사회구조, 세계관으로 사고를 확장하는 것은 해리일 것이다. 반면 아노딕 뮤직의 아이들은 포스트모던 이야기구조, 데이터베이스형 모델을 추구하며, 근대의 커다란 이야기들이 실종된 채로 당장 본인들이 추구하는 아노딕 댄스 뮤직에 대한 파편적인 데이터베이스들로 자신들만의 세계와 이야기를 마음대로 만들어간다. 아이들과 상호작용하며 서브 퀘스트를 수락하고 진행하게 되면, 해리는 아노딕 댄스 뮤직에 맞춰 교회에서 춤사위를 벌인다. 한때의 찬란했던 신세대의 음악이라 불리던 디스코의 시절은 어느덧 저물고, 빈사 상태가 되었다. 해리는 새로운 세대의 아노딕 댄스 하드코어 음악을, ’돌로레스 데이‘의 조각상이 있는 교회 안에서 그렇게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디스코 엘리시움〉이 그저 옛 찬란했던 20세기의 근대적 이상을 복원하는 것에 착수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이를 찬미하는 게임인가. 모던의 자리에 자신을 위치시키면서 포스트모던을 부정하고, 아노딕 댄스 뮤직을 선도하는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에 조소하고 한탄하는 게임인가. 그렇지는 않다. 과거 기획의 실패, 우울, 좌절, 절멸, 절망, 패퇴, 패배주의, 허무주의 같은 것들이 내내 게임의 정서를 지배하는 듯한 종반부에는 극적인 반전들이 기다리고 있다. 인술린데 대벌레와 ’돌로레스 데이‘로 형상화한 도라, 그리고 탈영병 같은 존재들로부터 말이다. 해리(플레이어)는 탈영병을 마주하기 직전 꿈에서 자신의 오랜 결핍의 대상이었던 옛 연인이자 돌로레스 데이로 형상화된 도라를 마주하고, 이후 인술린데 대벌레를 만나 그 옛 연인을 이제는 잊고 극복하라는 충고를 받아들인다. 종반부에 예상치 못한 범인으로 대면하게 되는 탈영병 노인은 실패한 혁명의 잔여물이다. 탈영병 노인과 해리는 완전히 상반되는 궤적을 지닌다. 게임의 시작에서 해리는 연인 도라와의 결별을 중심으로 세상에 대해 환멸과 회의로 얼룩진 나머지 모든 권총으로 자살 소동까지 벌이며 세계와의 완전한 단절을 모색했던 자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도 자유를 찾지 못했다. 게임의 시작에서 모든 것에 절망하고 세계와 단절한 채로 자신을 고립시킨 해리가 개인으로 자유로워진 것은 외부 세계로부터 독립된 자생적 의식과 실천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자신이 추방되기를 기꺼이 자처했던 해리가 다시 세계와 마주한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 그는 근대의 상징과도 같았던 도라 혹은 이를 형상화한 돌로레스 데이를 떠나보내고 새 출발을 하게 된다. 모순적 세계의 성공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세상의 모순 때문이다. 모든 일과 사물과 사람에는 그것들을 지금의 상태로 만드는 무언가가 있고, 동시에 다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왜냐면 그것들은 발전해나가고 머물러 있지 않으며 못 알아볼 정도로 변한다. 지금 있는 것들 안에는 ‘아무도 모르게’ 다른 것, 그 이전의 것, 현재에 적대적인 것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베르톨트 브레히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다〉, 마성열 편역, 책읽는오두막, 2013) 〈디스코 엘리시움〉의 리드 작가 헬렌 힌드페레(Helen Hindpere)는 ’포스트 소비에트‘의 시기에서 자란 기이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레바숄이 마치 10년 전의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2) . 〈디스코 엘리시움〉은 그러한 경험들의 잔향이 당연히도 짙게 배어있다. 하지만 이는 에스토니아라는 동구권의 한 국가에서 소련의 몰락 이후의 시기를 직접 겪은 이들이 게임을 매개로 하여 그것의 실상에 관해 증언하는 역사물이 아니다. 가상적 공간을 주 무대로 하는 〈디스코 엘리시움〉은 실존적 무게로 다가오는 정치적 실재를 소환하기도 하지만, 역사를 그 자체로 재현하거나 규명하는 것을 자처하면서 이를 훈고학적으로 늘어놓으며 일련의 무용담, 음모론, 교훈극으로 소화하지 않는다. 일종의 미학적 구성물로 승화하는 셈이다. 이로부터 한 예술비평가를 떠올리게 된다. 동구와 서구를 모두 경험한 사람이면서 공산주의 붕괴 이후 서구 좌파들이 가지는 어떤 멜랑콜리나 채무감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람. 오늘날 우리가 사는 역사 이후의 시간이란 ‘최적의 사회질서에 대한 모색’이 이미 완수된 시대이며, 지금 중요한 것은 ‘앞서 일어난 혁명의 성과’를 현실 속에서 구현하는 현세적 실천이라고 말하는 보리스 그로이스다. 역자 김수환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코뮤니스트 후기〉라는 책을 소련을 회고하는 역사 에세이가 아닌, 철학적 성격의 사고실험을 수행하기 위한 미학적 구성물에 가깝게 구성한다. “만약 공산주의를 언어라는 매체로 사회를 번역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이 약속하는 것은 목가라기보다는 자기모순 속에 놓인 삶, 최대치의 내적 분열과 긴장의 상황이다”라고 말하며, 자기모순을 숨기지 않은 채로 그 모순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체제를 거론한다. 그것은 대립을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을 첨예화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세계에 내재한 모순과 분열, 적대를 숨기지 않고 그 모순 안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을 둘러싼 대립을 첨예화하는 〈디스코 엘리시움〉은 어쩌면 그와 매우 가까이 있는 것도 같다. RPG 캐릭터의 육성 방법으로 어느덧 암묵적으로 필수 사항이 된듯한 전투 시스템이 부재한 자리를 방대한 텍스트와 온갖 갈등, 모순, 역설, 적대로 얼룩진 세계관으로 채우는 〈디스코 엘리시움〉은 모두에게 어필할 게임이 아니다. 누군가에겐 따분하거나 거북하거나 섬뜩할 수도, 혹은 고양되거나 짜릿하거나 흥분되는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그럼에도 비평적으로 찬사를 받으며 우뚝 선 ZA/UM의 개발자들은 이제 비디오 게임이야말로 21세기를 이끌어나갈 예술이라고 밝히는 데에 이르렀다. “타인의 기억에 남고 싶다면, 체계적으로 반감을 사야 합니다. 반감을 살 준비가 되었다면, 정말로 역사적인 기회를 얻게 됩니다.” 3) 는 말은 그들에게 매우 적절하지 않을까. 게임 개발사 하나 제대로 없던 에스토니아라는 동구권의 한 국가에서, 소설가 출신으로 실패를 경험한 로버트 쿠르비츠 등을 위시하여 게임과는 전혀 상관없던 이들에게 말이다. 1) (인하영, 2021) 문학평론가, 「게임이 되는 소설, 소설이 되는 게임」, 『경향신문』, 2021.10.28https:// 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110280300115 2) 〈Masterclass: Helen Hindpere Talks About Writing Disco Elysium: The Final Cut〉, https://youtu.be/Xf_hU7IW5qs 3) 보리스 그로이스, 〈예술 작품이 된다는 것(Becoming the Artwork)〉, 2020, 부산현대미술관 《동시대-미술-비즈니스 :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질서들(Contemporary-Art-Business: The New Orders of Contemporary Art)》 https://youtu.be/W9Uu13m5JxI 참고문헌 카를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최형익 옮김, 비르투(VIRTU), 2012. (프레드릭 제임슨,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 문화 논리〉, 임경규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2)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이은미 옮김, 선정우 감수, 문학동네, 2007). (베르톨트 브레히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다〉, 마성열 편역, 책읽는오두막, 2013)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ACT! 편집위원) 김서율 진보적 미디어운동 연구저널 ACT!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영화를 중심으로 문화 전반에 관심을 두고 종종 글을 끄적이거나 기고해왔다. 현재는 구로구 노동자종합지원센터에서 일한다. 어느샌가 사회 운동에 뛰어들어 연구자와 활동가, 이론과 실천 사이에 단절된 통로를 고민하며 길을 모색 중이다.

  • 그들만의 게임 바깥에서 서성거리기 : 다크소울3과 ‘프롬갤’의 ‘요르시카 살해 전통’ (장려상)

    다크소울3은 나의 첫 패키지 게임이었다. 유튜브를 돌아다니다 이 게임을 소개하는 영상을 우연히 접했다. 고딕 건물이 빛바랜 색감과 얽혀드는 게임 속 광경이 매력적이었고, 그렇게 난생처음으로 스팀 게임이라는 걸 구매해 봤다. 무턱대고 시작한 게임은 참 까다로웠다. 알고 보니 다크소울은 어려운 난이도로 이름이 높은 타이틀이었다. 이 게임의 디자인은 다양한 함정이나 어려운 전투를 활용해 플레이어에게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부각한다.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죽고 화면에 떠오르는 'You Died' 문구는 일종의 밈이 될 정도였다. < Back 그들만의 게임 바깥에서 서성거리기 : 다크소울3과 ‘프롬갤’의 ‘요르시카 살해 전통’ (장려상) 07 GG Vol. 22. 8. 10. 1. 암호 설정 fromgall, 그곳의 ‘전통’ 다크소울3은 나의 첫 패키지 게임이었다. 유튜브를 돌아다니다 이 게임을 소개하는 영상을 우연히 접했다. 고딕 건물이 빛바랜 색감과 얽혀드는 게임 속 광경이 매력적이었고, 그렇게 난생처음으로 스팀 게임이라는 걸 구매해 봤다. 무턱대고 시작한 게임은 참 까다로웠다. 알고 보니 다크소울은 어려운 난이도로 이름이 높은 타이틀이었다. 이 게임의 디자인은 다양한 함정이나 어려운 전투를 활용해 플레이어에게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부각한다.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죽고 화면에 떠오르는 'You Died' 문구는 일종의 밈이 될 정도였다. 튜토리얼 보스인 '군다'를 9번의 시도 끝에 잡았을 때, 나는 완전히 기진맥진해지고 말았다. 동시에 짜릿한 흥분이 온몸을 내달렸다. 거듭된 죽음 끝에 쟁취해낸 승리는 퍽 달콤했다. 그렇게 맵을 순차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는데, 공략을 봐도 내 힘으로 온전히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했다. 그러던 와중 '프롬 소프트웨어 갤러리(이하 : 프롬갤)'라는 사이트를 방문했다 이곳에서는 프롬 소프트웨어 사가 발매한 다크소울3을 좋아하는 플레이어들이 머무르고 있었다. 이들은 fromgall이라는 통일된 서버 비밀번호를 설정해 까다로운 보스나 맵을 협력해줬고, ‘복지’와 같은 이름으로 이제 막 게임을 시작한 뉴비에게 각종 템을 지원했다. 별도의 가입 절차 없이 익명으로도 글을 업로드할 수 있다는 갤러리의 특성은 이제 막 게임이라는 걸 시작한 당시의 나에게 더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눈팅 끝에 익명으로 도움 요청 글을 작성하기도 했다. 댓글은 바로 달렸다. “그었음.” 나는 프롬갤의 게시글을 훑으며 게임 관련 새로운 정보를 발견하기도 하고, 타인의 기묘한 플레이를 보며 즐거움을 얻기도 했다. 그러는 한편, 특정한 게시글은 어떤 순간에서 내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오히려 분리감을 느끼게 했다. 프롬갤의 '전통'이었다. ‘어떤 한 집단에서 꾸준히 전해져 내려오는 행위’라는 전통의 사전적 의미를 환기하듯, 다양한 사람이 게임 내에서 유사한 행위를 수행하고 그것을 인증하는 형식으로 게시글을 작성했다. 많은 갤러들은 이에 긍정적으로 동조함으로써 긴 수명을 유지했다. 이 특정한 게시글은 일정한 포맷을 갖고 있다. 그 골자는 이러하다. 요르시카라는 이름의 NPC가 있다. 이 NPC는 '암월의 검'이라는 계약을 주관한다. 플레이어는 그와 계약을 맺고 특정 아이템을 모아 바쳐 보상을 얻는다. 아이템을 얻는 조건은 상당히 까다롭기 때문에 지난한 노가다를 요한다. 모든 노가다를 마쳐 보상을 다 얻은 플레이어는 요르시카를 (창의적으로) 죽인다. 2. “요르시카 야발련아 드뎌끝났다” 1) 프롬갤에 게시된 글을 바탕으로 이 온라인 커뮤니티의 전통 포맷을 한 번 살펴보자. “요르시카 야발련아 드뎌끝났다”는 글은 프롬갤의 전통의 요소를 모두 갖췄다. ‘드뎌(드디어) 끝났다’는 부사와 동사를 통해 작성자가 요르시카와 계약-서약자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는 장치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작성자는 NPC의 이름 뒤로 디시인사이드에서 욕설 ‘시발’을 변용한 ‘야발년’을 결합하여 이 인물에게서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낸다. 캡쳐된 게임 화면에서 작성자의 캐릭터는 ‘탐욕의 낙인’이라는 머리 장비를 장착하고 있다. 이는 캐릭터의 발견력 스탯을 올려주는 장비로, 아이템 노가다 작업에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상자를 뒤집어 쓴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캐릭터의 모습은 그 자체로 노가다 행위를 증빙해준다. 다크소울3에서 발견력 스탯을 증가시키는 장비는 제한적으로 존재하므로 공물 노가다에 뛰어든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외관은 전형적인 구석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스크린샷 속 캐릭터의 모습은 작성자와 유사한 경험을 겪은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표상이 된다. 작성자는 이제 막 암월의 검 노가다를 끝냈다. 공물 아이템 30개를 모아왔을 때 요르시카가 이를 보상과 교환하며 출력하는 특수 대사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왼쪽 하단의 UI는 작성자의 캐릭터가 장착하고 있는 장비를 보여주는데, 윗칸은 주문 아이템이 할당된 자리이다. ‘암월의 빛의 검’이라고 적힌 흰 글씨는 스크린샷 속에서 캐릭터가 대검에 인챈트하고 있는 기적의 이름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기적은 암월의 검 계약의 최종 보상이다. 작성자는 대사를 확인했으며, 노가다의 보상을 획득했다. 따라서 프롬갤의 전통이란 곧 게임 내 성취를 인증하는 자리이기도 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요르시카라는 NPC가 인게임에서 제공할 수 있는 물리적(인벤토리에 기입되는) 인센티브를 모두 취득했다. 이제 다른 동기가 개입하지 않는 이상 그와의 관계를 지속할 이유가 없다. 이에 그는 요르시카로부터 받아낸 기적을 살해에 직접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요르시카 어금니 꽉 깨물어라..’는 문장은 막 행할 폭력을 예고한다. 그는 자기 캐릭터가 암월의 빛의 검 기적을 대검에 바르는 순간적인 모션을 포착함으로써 역동성을 강화하며 이미지를 끝맺는다. 한편으로 NPC를 어떻게 창의적으로 죽였는지는 글의 매력을 판가름하는 요소가 된다. 이 글에서 인용한 게시글의 작성자는 오른손에 로스릭 기사의 대검으로 요르시카를 가격하려 한다. 그런데 UI를 자세히 살펴보면 대검의 이미지 우측 상단에 빨간 X자가 표시되어 있다. 이는 작성자의 캐릭터가 대검 아이템을 장비하기 위한 최소한의 스탯을 갖지 않았다는 알림이자 경고다. 요구치를 충족하지 않은 장비는 제 성능을 낼 수 없으며 미진한 피해를 준다. ‘일부러 데미지 낮춰서 더 때릴꺼라는 생각은 안하십니까? 당신’이라는 타 갤러의 댓글은 일견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작성자의 행위에 개연성을 부여해준다. 타인이 내러티브를 붙여 해석해줌으로써 작성자의 게시글은 전통의 계보에 안착하는 데에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즉 전통이란 프롬갤이라는 온라인 커뮤니티 내에서 축적된 일정한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구성원들의 웃음을 유발하는 발화 형식이라고 바라볼 수 있다. 3. 게임에서의 죽음 문제 여기서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살해 행위 그 자체가 아니다. 율이 게임 플레이를 두고 “플레이어가 게임 내부의 규칙과 상호작용 하면서 그 자신의 목표, 레퍼토리, 선호를 추구하는 것”이라 정의한 바 있듯, 게임은 플레이어의 직접적인 개입을 필요로 한다. 플레이어의 상호작용과 몰입을 강화하기 위한 요소로써 죽음은 적극적으로 활용되어 왔다. 죽음은 지속해오던 모든 상태 일체로부터 정지되는 것이며, 존재의 소멸을 의미하는 영원한 단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게임 속 죽음은 플레이어가 규칙을 이해하게 해주는 수단이 된다. 특히나 RPG 게임과 같은 장르에서는 길을 막는 적을 제거하면서 특정한 장소에 도달하는 것을 가장 기본적인 게임 메커닉으로 차용해 왔다. 플레이어가 경험한 죽음은 내부 규칙을 이해할 단초가 되며, 피드백을 거쳐 적을 성공적으로 살해할 경우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역량을 높인다. 게임에서의 죽음은 바로 이 지점에서 플레이어 개인의 폭력성·사회성에 대한 우려와 만나기도 한다. 화면 속이지만 누군가를 찌르고, 때리고, 살해하는 행위는 규범과 법률 속에서 자란 교양 시민과는 반대 선상에 놓인 행위로 이해된다. 게리 영은 이를 STA(Symbolic Taboo Activity)로 설명한다. 이는 가상에서는 가능한 행위이나 현실에서는 법과 도덕에 의해 금지되는 행위들이라는 것이다 2) . 그러나 플레이어의 행동 범주를 설정하는 절대적인 배경으로 게임의 규칙이 존재한다. 특정한 행위를 유도하는 일련의 규칙이 있는 이상 이를 개인의 비도덕성 문제로 환원하기는 어렵다는 측면이 존재한다 3) . 실제로 요르시카를 죽여야만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인 '요르시카의 성령'은 강력한 살해 동기로 작동한다. 이렇게 바라보았을 때 단순히 요르시카를 죽이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주로 플레이어 개인이 그 게임 세계 내부에 시선을 두고 플레이를 수행하고 완결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특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는 놀이가 일상생활과 분리된 그 고유의 질서를 갖는다는 ‘매직 서클’의 의미를 환기한다. 4. 여기 ‘나쁜 남자’가 있다 프롬갤 전통이 갖는 독특한 지점은 커뮤니티에 전시하여 공유하는 과정에 있다. 전시는 게임 밖의 세계에 위치한 청중을 동반한다. 독특한 플레이는 화제성을 갖기 마련이다. 디시인사이드 갤러리의 인터페이스는 경우에는 ‘추천’을 받아 ‘개념글’로 올라가는 구조를 통해 화제성을 수치화한다. 존 스튜어트 밀의 위해 원칙과 같이 보편적인 범주로 규정된 것 이상으로 발휘된 폭력이 심저에서 불쾌감을 자극할 때, 게시글 아래에 달린 경악성의 댓글은 그가 수행한 괴멸적인 플레이에 대한 긍정적인 피드백으로 즐길 수 있다. 니스는 “부도덕한 것으로 여겨지는 행위에 참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일종의 즐거움을 준다”고 이야기한다. 4) 이 ‘나쁜 남자’와 같이 규범을 위협하는 존재에 자기를 동일시할 수 있는 데서 즐거움은 증폭된다. 전시는 보다 많은 관객을 동원할수록 좋다. 그러한 목적성을 갖고 특정한 라인을 따라 행위를 수행하게 되면 갤러들은 익숙한 내용에 익숙한 반응과 익숙한 호의를 내비친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플레이가 따라가야 할 일종의 포맷이 생기는 셈이다. 그렇게 형성된 게시판 내의 놀이 형식에 맞추어 나의 플레이를 만드는, 게임의 매직 서클 내외부를 넘나드는 상호작용이 발생한다. 프롬갤이라는 공동체 내의 동력이 게임 내 플레이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요르시카 야발련아 드뎌끝났다”에서 작성자는 NPC를 폭행하기 위해 대검을 선택했다. 대검이라는 무기 종은 프롬갤 내부에서 특정한 상징성을 갖는데, ‘상남자’라면 마땅히 들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떤 무기로 플레이하는지에 따라 ‘게이’와 ‘진짜 남자’를 구분하는 발화를 프롬갤 내에서 목격할 수 있다. 게이와 상남자의 구분을 통해 프롬갤이라는 공동체가 공유하는 남성성에 대한 상상을 엿볼 수 있다. 이를테면 직검과 방패의 조합을 의미하는 ‘직방’은 이상적인 남성성을 갖추지 못한 ‘게이’와 동의어로 활용되는데, 이는 구르기를 통해 공격을 피하는 대신 방패로 막아내는 게 남자답지 못한 행위로 여겨지는 탓이다. 대검을 들기 위해서는 캐릭터가 양손으로 칼자루를 쥐어야 한다. 방패를 들지 않고서 자신의 체격을 훨씬 상회 하는 무기를 든 캐릭터는 그 자체로 공세적인 인상을 준다. 그는 비열하게 방패 뒤로 숨지 않는 ‘진정한 사나이’나 다름없다. 이는 수잔 제퍼드가 레이건 시대의 할리우드 남성 재현을 설명하기 위해 표현한 ‘하드 바디’를 떠올리게 한다. “지치지 않는, 근육질의, 무적의 남성 육체”에 대한 환상을 바탕으로 프롬갤은 “자신의 뜻을 남에게 강요하기 위해 강화된 몸”을 꿈꾼다. 5) 그러는 한편 암월의 검 계약은 플레이어를 노가다로 인도하며, 그는 희박한 확률이 그저 터지기만을 바라면서 주체성을 상실한다. 플레이어는 무력한 확률 앞에서 억울함을 환기한다. 프롬갤의 갤러들은 이를 남성 섹슈얼리티의 문제로 치환하여 요르시카를 정복함으로써 주체성을 되찾으려 한다. 게시글 작성자의 캐릭터는 대검을 들 수 없는 스탯임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소화하기 힘든 장비를 들기를 고수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프롬갤이라는 집단 내부에서 설정된 남성성의 환상을 입고서 요르시카를 살해한 셈이다. 5. 밈 앞에서 웃지 못할 때 이길호는 디시인사이드에서 발생하는 게시물이 끝없이 분화하고 변형되는 과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생산물은 하나의 갤러리 안에서 생산된다. 그것은 갤러들 사이의 관계에서 결과적으로는 어느 특정 갤러의 결과물로 도출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생산물의 소스는 명백히 다른 갤러에게 제공받았다. 그것은 여러 갤러들의 손을 거치면서 변형을 맞는다. 최종적으로 하나의 갤러가 일종의 ‘완성본’을 내놓는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매 순간 새로운 변형의 힘을 통과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미완성’이다.” 6) 이러한 갤러리 내 생산물의 분화 과정은 밈의 발생과 활용 방식을 닮아있다. 본래 밈이란 리처드 도킨스가 특정한 문화 요소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도입한 문화 유전자의 개념이나 온라인 생활에서는 달리 통용된다. 주로 밈이란 “특정한 이미지, 영상, 대사나 어휘 등이 유행하면서 퍼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7) 밈의 재미가 “공동의 이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며, 이에 밈이 호응을 얻은 것은 “개인주의 시대에 나타나는 하나의 증상”이라는 분석이 존재한다. 8) 밈이 생산되는 환경은 디시인사이드 갤러리와 유사해 보인다. 갤러들은 모여든 게시판에서 해당 주제를 갖고 말하기 위해 존재한다. 친목질을 배제한다는 엄격한 수평 관계를 유지하며 그저 한 개인으로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디시인사이드의 게임 게시판이 유머러스한 공간으로 여겨진다면 그것은 게임 플레이라는 공감대를 나누는 과정에서 타 갤러와 동질감을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유머란 곧 집단 내부에서 통용되는 규율이나 사고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프롬갤의 요르시카 살해 전통에서 유머를 느낀다면 그것은 어째서인가? 또 유머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전통이라는 밈에서 유머를 느낄 수 없는 것은 그 속에서 프롬 갤러들이 발화하는 여성 혐오의 의미가 자연스럽게 이들 공동체 내부에서 승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요르시카를 살해하는 게시글은 2016년 다크소울3이 발매된 이래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주 개념글로 올라갔다. 2022년 프롬 소프트웨어의 신작인 엘든링이 출시된 이래, 엘든링의 열기를 즐기는 지금의 시점에서 요르시카를 죽이는 전통은 이제 개념글에서 찾아보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프롬갤의 전통을 전통으로 만들어낸 동원을 상실하지 않은 이상, 새로운 전통이 태어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다만 밈이 될 정도로 화제성을 가진 플레이가 아직 전시되지 않았을 뿐이다. 나쁜 남자가 되기 위해 안달 난 프롬갤 앞에서, 나는 그저 서성거리고 있다. 1) 권천. “[일반] 똥3)요르시카 야발련아 드뎌끝났다.” 2021.11.28.등록. 2022.06.02.접속. 프롬소프트웨어 마이너 갤러리.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fromsoftware&no=2383063&page=1 2) Young, G. (2019). Enacting immorality within gamespace: Where should we draw the line, and why? In A. Attrill-Smith, C. Fullwood, M. Keep, & D. J. Kuss (Eds.), The Oxford handbook of cyberpsychology (pp. 588–608). Oxford University Press. pp. 589. 3) 미구엘 시카트. 김겸섭 역. 컴퓨터 게임의 윤리(n.p.: 커뮤니케이션 북스, 2014 4) Young, G. (2019). Enacting immorality within gamespace: Where should we draw the line, and why? In A. Attrill-Smith, C. Fullwood, M. Keep, & D. J. Kuss (Eds.), The Oxford handbook of cyberpsychology (pp. 588–608). Oxford University Press. pp. 600. 5) 수잔 제퍼드. 이형식 역. 하드 바디(n.p.:동문선, 2002) 6) 이길호. 우리는 디씨. (2012). 이매진: 서울. 82쪽. 7) 정지우. “무엇이 밈이 되는가”. 민음사. 릿터(32). 14쪽. 8) 이자연. “밈 검열, 그게 진짜이긴 해?”. 민음사. 릿터(32). 30쪽.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김규리 자기 소개 :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데스티니2를 오래 즐겨왔고, 다음 작인 마라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익숙한 게임이 주는 재미와 낯선 경험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보려 고민하고 있습니다.

  • ‘공포’와 ‘놀이’로서의 비장소 : <8번 출구>를 포착하기

    현대의 공포는 흐른다. 곧, 어디서든 틈입한다. 일찍이 공포라는 키워드 하에 내포되어 온 스테레오 타입화된 형상들―가령 괴물, 귀신, 살인마, 악마 등―만으로 이 정서의 출처는 설명되지 않는다. 해당 공포는 좀 더 내밀한, 혹은 하이퍼객체와 같은 유동성을 발휘하기에 우리는 이 공포를 ‘앎’의 영역으로 안배하기에 항상 실패한다. < Back ‘공포’와 ‘놀이’로서의 비장소 : <8번 출구>를 포착하기 19 GG Vol. 24. 8. 10. 1. 유동하는 공포의 교집합은‘어디’인가 현대의 공포는 흐른다. 곧, 어디서든 틈입한다. 일찍이 공포라는 키워드 하에 내포되어 온 스테레오 타입화된 형상들―가령 괴물, 귀신, 살인마, 악마 등―만으로 이 정서의 출처는 설명되지 않는다. 해당 공포는 좀 더 내밀한, 혹은 하이퍼객체 [1] 와 같은 유동성을 발휘하기에 우리는 이 공포를 ‘앎’의 영역으로 안배하기에 항상 실패한다. 바우만은 인간이 극심한 공포를 느끼는 순간은 그것이 불분명할 때, 위치가 불확정할 때, 형태가 불확실할 때, 포착이 불가능할 때, 이리저리 유동하며, 종적도 원인도 불가해할 때라고 토로한다 [2] . 그리고 “공포에서 벗어나, 공포의 온상인 무지에서 해방된 세계”로 나아가야 했을 근대(이성)의 희망이 단지 “길고 긴 우회로에 불과했음”을 지적하면서, 오히려 유동적 근대의 환경이 인간의 일생 전체를 다각적인 공포 속에 몰아넣게 되었음을 설파한다 [3] . 우리는 나날이 불어나는 ‘불확실한’ 공포를 동반자 삼아 ‘불확실한’ 삶을 영위하는 유목민이 되어서는, 이 유동하는 공포를 ‘명명하는(내지는 개념화하는)’ 일로부터도 한계를 느껴왔다. 다만 유동성으로 말미암아 ‘미지의 것’으로 한계 지었던 공포에 대하여, 그 윤곽을 포착할 수 있는 주요한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공간 [4] ’에 다름없지 않을까. 공간 자체가 공포의 대상으로 집약될 때, 우리에게는 식별 불가능했던 공포를 잠시나마 직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공간은 직접 경험과 추상적 사고라는 양극단을 가진 연속체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인식가능하기 때문이다 [5] . 그리고 현대인으로서 공간에 대한 공포란 어쩌면 시간에 대한 공포보다 ‘몰입’을 해내게 되는 공포일지도 모른다. 예컨대 푸코의 진단―오늘날의 불안은 확실히 시간보다는 공간에 훨씬 더 근본적으로 관련된다고 믿는다―은 아직까지도 유효한 것이다 [6] . 실제로 우리는 육박하는 시간의 흐름보다 ‘지금-여기’의 내가 머물고 있거나 머물렀던 곳의 으스스함에 대해, 더 나아가 그곳에서의 ‘나’의 존재에 대해 더 기민하게 반응하고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상대성이나 추상성이 강한 시간의 공포와 달리, 객관적 지표로서의 구획을 실마리로 지닌 공간의 공포는 인간(들)에게 있어 크고 작은 교집합을 이루게 될 가능성을 둔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현재 유동하던 공간의 공포가 과연 어떤 공동의 지점을 발생시키고 있는가, 즉 ‘어디에서’ 고이고 있는가에 대한 탐색이 될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어디에서’의 문제는 서브 컬처계에서, 특히나 게임의 영역에서 창발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8번 출구>는 바로 이 ‘어디’에 대한 확증의 재현에 다름 없다. 이를테면 소위 ‘유동하는 공포’란 것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흘러들어와 있었고, 이를 포착한 사람들에 의해 그 공포가 어떤 식으로 ‘고임’을 이루며 특정 공간으로서 구축되거나 변용되고 있는지. <8번 출구>는 호러 게임 특유의 점프 스케어를 연발하지 않으면서도, 이런 공간 자체에 압축된 공포만으로 플레이어들을 압도하는 식이다. 사실 게임 자체의 구성은 단순하다. 끝없이 펼쳐진 지하도에서, ‘8번 출구’에 도달할 때까지 소위 ‘이상 현상’이라 불리는 지점을 찾아 탈출에 성공하면 된다. 길게는 60분, 짧게는 2분 남짓으로까지 클리어가 가능하며 특유의 무한 반복 구조로 인해 형식만 놓고 본다면 플레이어 입장에서 다소 ‘심심한’ 게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불특정 다수가 이 게임(의 정체성인 공간)을 두려워하고, 플레이하고, 급기야는 그에 매혹된다. 어디선가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논)픽션의 ‘어디’에 대해. 우리는 어째서 집단적인 공포와 몰입을 이루게 되는 것일까. 2.‘비장소’라는 호러 : ‘인간(성) 없음’의 장 <8번 출구>의 배경이 되는 공간은 지하도이다. 지하도는 일반적으로 ‘북적이는 익명의 사람들’이 ‘스치듯’ 교차하고 통행하는 곳이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오제에 따르면 이러한 공간은 정체성의 장소, 관계의 장소, 역사의 장소로서의 특질을 갖는 ‘인간적(인류학적) 장소’와 다른, ‘비장소(non-place)’로서 구분되는 곳이다. 장소가 정체성과 관련되며 관계적이고 역사적인 것으로서 규정될 수 있다면, 정체성과 관련되지 않고 관계적이지 않으며 역사적인 것으로 정의될 수 없는 공간은 비장소가 되는 셈이다 [7] . 지하도를 비롯하여 공항, 고속도로, 대형 쇼핑몰, 멀티플렉스 영화관 등이 이러한 비장소로서 지목될 수 있다. 오제는 사람보다 텍스트나 이미지에 의한 매개가 중심이 되는 이러한 비장소의 요소―물리적•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해당 장소를 단지 스쳐지나가는 곳으로 인식하게 만드는―의 작용이 해당 공간에서 요구하는 ‘승객’이나 ‘소비자’, ‘운전자’와 같이 익명의 다수에 의해 공유되는 단일한 정체성을 생성해 냄을 거론한다 [8] . 그리고 이러한 비장소와 이용자들의 일시적인 ‘계약 관계’를 통해 비장소 안에서의 ‘나’의 존재는 ‘행인’과 같은 다소 안정적인 익명성으로서 포섭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8번 출구>에서는 이러한 비장소가 ‘호러’가 된다. 그 이유를 꼽자면, 이때의 ‘비장소’에는 플레이어인 ‘나’를 제외한 최소한의 ‘인간(성)’ 자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비장소’ 자체가 ‘인간-인간’ 간의 직접 경험이나 교류에 대한 느슨함을 전제하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체험해온 비장소는 ‘대중’ 자체가 경유하는(해야만 하는) 공간으로서 인지되어 왔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비장소는 누구나 그곳을 지나칠 수 있다는 ‘공적 공간’의 지위로서 건설되고 이해된다. 비장소에서 인간은 ‘동존하며 교차하기’라는 공공의 역할을 암묵적으로 약속하고, 그 약속을 공동으로 수행함으로써 비로소 해당 공간에서 ‘이용자’라는 역할을 획득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비장소에 단독자로서 남게 되었을 때, 공적인 행보에 능숙했던 우리는 이 공간에서의 갑작스러운 사적 행보에 불안을 느낀다. 인간(성)들 사이에서의 익명성이라는 ‘보호막’은 사라지고, 어느새 끊임없이 증식하는 공간과 불명료한 ‘나’만이 대면하게 된다. 이때의 ‘나’는 ‘익명’으로서의 ‘나’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장소의 바깥에서의 ‘나’의 정체성도 아닌 ‘모름’이라는 공포를 내면화할 수밖에 없는 ‘나’가 된다. 물론 지하도의 복도를 돌 때마다 우리는 ‘중년 남성’의 형상을 띤 NPC의 출현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인간성이 결여된, 움직이는 메트로놈과 다를 바 없다. 그는 해당 공간 내 플레이어(나)의 탈출 욕구나 공포에는 관심이 없다. 게임 내 ‘루프’의 루즈함을 덜기 위한 오브젝트로서, ‘중년 남성’은 인간의 편이 아닌 ‘공간의 일부’로서 기능함에 가깝다. 실제 비장소에서 ‘나’에게 가해지는 위해는 인간(성)에 의해 구호받을 수 있지만, <8번 출구>의 지하도에는 그럴 만한 인간된 타자가 없다. 붉은색 물이 밀려오고, 액자에 귀신이 생기고, 안내판이 뒤집히는 등 예측 불허한 ‘이상 현상’만이 랜덤으로 ‘나’를 덮친다. 어쩌면 <8번 출구>는 익명성에 묻히는 순간 동반되는 비장소성으로부터의 고독, 곧 익명성에 지나치게 안주할 경우 언젠가 어떤 인간(성)으로부터도 구호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공포를 여과 없이 재현해 낸 ‘있을 법한’ 평행 공간의 현현일지도 모른다. 3. ‘리미널 스페이스’라는 밈 : ‘영속적인 현재’에서의 놀이 이처럼 <8번 출구>를 비롯한 ‘호러’된 비장소의 재현 시도들은 해당 게임이 출시된 2023년 이전부터, 북미 커뮤니티 레딧(Reddit)이나 트위터와 같은 웹 공간에서 굵직하게 출몰해 왔으며, 현재까지도 그에 대한 대중들의 ‘몰입’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8번 출구> 자체의 모티브이면서 ‘호러화된 비장소’가 밈(meme)이 된 형태를 총칭해 온 개념이 바로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이다. 리미널 스페이스는 1909년부터 ‘리미널리티(liminality)’라는 학술적 개념을 중심으로 존재해 왔으며, 건축이나 미술 등의 분야에서 차용되다가, 이후 2010년을 전후로 하여 웹공간을 순환하는 ‘인터넷 밈’의 일환으로 점층적으로 대중들 사이에서 출몰한 바가 있다. 이때 ‘리미널’은 ‘문간방(threshold)’ 또는 ‘경계’를 나타내는 라틴어 ‘리멘(Limen)’을 어원으로 두고 있으며 [9] , 인류학자 아놀드 판 헤네프(Arnold van Gennep)가 제시한 ‘통과의례 [10] ’의 3단계 구분―①분리(separation) ②전이(transition) ③재통합(re-aggregation) [11] ―의 중간단계인 ‘전이’의 단계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문화 인류학자 빅터 터너(Victor Turner)는 이러한 일상적인 문화•사회의 상태와, 어떤 상태를 형성하고 시간을 경과시키며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구조적인 지위를 정해가는 과정 사이의 ‘문턱에 있음(리미널리티)’의 상태를 보다 발전시켜 문화적 변화의 전반적인 국면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로 확장시키기도 했다 [12] . 그리고 이런 ‘문턱됨’에서 비롯된 ‘리미널 스페이스’란 사적공간과 공적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진 [13] , 하나의 장소 또는 다른 장소도 아닌, 하나의 분야 또는 다른 분야도 아닌, 그들 사이에서(in-between)의 제3의 공간(thirdspace)을 지칭하는 용어라는 뜻으로 정의될 수 있다 [14] . '밈'으로서 대두된 리미널 스페이스에는 ‘문턱에 있음’ 상태의 비장소를 출처 삼은 이미지들이 지배적이다. 여기에 동반된 감각은 대개 ‘공포’로, 이때의 ‘리미널 스페이스’는 <8번 출구>의 지하도와 같이 친숙한 공간으로 보이지만 어쩐지 낯선 위화감과 두려움을 지닌다. 대부분 인적이 없고 시간대가 불명한 이미지의 정보값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대표적으로 텅 빈 건물 복도, 호텔 로비, 끝없이 이어지는 새벽의 어느 국도, 영업이 끝난 쇼핑몰의 내부 등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15] . 그러나 유튜브 스트리머들의 <8번 출구> 플레이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해당 공간을 과연 ‘공포’의 대상으로만 수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숙고가 필요하다. 판 헤네프는 일찍이 이러한 ‘문턱된’ 상태가 적용된 시간을 ‘실험’과 ‘유희’가 넘쳐 흐르는 ‘미술적인 시간’으로 파악하면서, 현실 사회의 구조적인 여러 활동들을 ‘직설법’이라 한다면 사회 문화적인 과정에 있어서의 ‘리미널리티’란 마치 ‘가정법’과도 비슷하여 현실적이고 직설법적인 구조에 반격을 가하는, 일종의 사고•언어•상징•메타포에 대한 ‘놀이적인 창조’의 가능성을 담지하는 ‘가정법적인 시간•공간’이 될 수 있음을 긍정하기도 한 바가 있다 [16] . 그리고 이의 연장선상으로서 우리는 ‘밈’된 리미널 스페이스의 이면에도, 일종의 ‘놀이’로서 대중을 견인하는 측면이 존재함을 추측해 볼 수 있다. <8번 출구>에 대두되는 리미널 스페이스(내지는 비장소)의 경우, 표면적으로 그것은 게임이라는 형식상 어느 정도 ‘거리-두기’가 가능한 공포에서 오는 유희를 염두에 두고 있다. 다만 그 심층에는 ‘영속된 현재’에 대한 놀이의 감각을 즐기는 플레이어의 정서가 개입되어 있기도 하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하는 ‘현재성’의 지배는 본디 비장소의 특질로, 리미널 스페이스는 이때의 ‘현재성’을 영구히 늘어뜨리는 마력을 지닌다. 결정적으로 이와 같은 요소는 불분명한 과거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자유하고자 하는 현대인의 욕망을 건드리는 구석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문턱된 상태’를 이미지나 게임과 같은 매체로서 창조한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오래 머물지 못하고 경유할 뿐인 비장소의 현재성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며, 그에 따른 자극에도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로제 카이와에 따르면 규칙과 놀이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지만, 놀이의 원천에는 근본적인 자유―쉬고 싶은 욕구이며 아울러 기분전환 및 변덕스러움의 욕구―가 있으며, 이런 자유는 놀이의 필수 불가결한 원동력이 된다 [17] . 곧, <8번 출구> 역시 해당 공간 내에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한 어느 정도의 규칙(e.g. “이상 현상을 발견하면 즉시 되돌아가세요.”)이 존재하긴 하지만, 플레이어가 진입하는 리미널 공간 특유의 ‘영속된 현재’에는 공포만으로 포섭하기 어려운 ‘놀이’의 욕망, 그로 인한 자유로의 (불)가능성이 혼융되어 있다. 4. 공간은 행위자가 된다 공간은 힘이 세다. 개중 비장소는 유동하는 공포의 교차점이자, 몰입할 수 있는 놀이로서의 가능성이 결집된 곳으로, 이를 활용한 ‘리미널 스페이스’라는 밈이 게임의 세계에서 각광 받고 있는 것 또한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이 불안과 매혹의 비장소는 게임 내에서 현실과 사이버 공간을 횡단하며 대중들을 끌어들이고, 마침내 ‘인간-공간’의 지위 설정에 대한 역전까지를 가능케 한다. 기존 체계에의 인간이 언제나 공간을 생성하고 존립하게 하는 존재였다면, 비장소성을 담지한 리미널 스페이스에서, 오히려 역동적으로 행위하는 쪽은 공간인 셈이다. 이를테면 <8번 출구>의 경우 인간(플레이어)에게 주어진 수행성이 오직 앞뒤로 걷거나 달리는 일에 그쳤다면, ‘지하도’라는 비장소는 그 자체로 각종 ‘이상현상’을 일으키며 인간보다 더욱 스펙터클한 움직임과 변화를 보여주는 식이다. 이 공간은 더 이상 우리에게 익숙하던 객체가 아니며 거꾸로 우리를 응시하고 새로운 관계 속으로 던져버린다 [18] . 그 안에서 인간은 공포로서 압도당하는 한편, 놀이로서 유희하는 복합적인 감각을 지닌다. 이때의 감각에는 비장소성에서 기인한, 근대적 개인들의 내밀한 신경증 같은 것이 동반되어 있다. 결국 게임 내 리미널한 비장소에 대한 ‘공포’와 ‘몰입’의 요인 탐색에 착수하는 일로부터. 우리는 게임의 사회학이 아닌, 게임을 시발점으로 둔 사회학의 단초까지를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궁극적으로 게임은 인간의 복합적인 내면이 투영된 공간, 곧 ‘어디’의 가능태를 탄력적으로 선취하는 사회적 기술로서 긍정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1] 티모시 모튼이 주장한 개념. 시공간에 너무나 거대하게 (hyper-) 퍼져 있어서 인간의 인식을 벗어나는 객체(-object)로, 모튼은 이 하이퍼객체의 특성을 점성(viscosity), 용해성(molten-ness), 비국지성(non-locality), 초차원성(phased-ness), 간객관성(interobjectivity)의 다섯 가지로 명명한다. [2] 지그문트 바우만, 함규진 옮김, 『유동하는 공포』, 산책자, 2009, 11쪽. [3] 위의 책, 12-16쪽 참조. [4] 본고에서는 장소와 공간에 대한 논의에 대하여, 양자 모두 어떠한 물리적 지점이나 위치에 인간의 삶과 실천 행위가 누적되며 특정한 의미가 부여된 곳으로서의 위상을 지님을 전제한다. 다만, 정적이고 안정적이면서 지역성에 기초하여 생활세계에 부착되는 대상으로 장소를 이해하는 논의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추상적이면서 그 자체의 유동성과 역동성을 강조하는 것을 공간에 관한 논의의 특징으로 구분해 둔다. (정헌목, 「전통적인 장소의 변화와 '비장소(non-place)'의 등장」, 『비교문화연구』 제19집 제1호, 서울대학교 비교문학연구소, 2013, 116쪽 참조.) [5] 에드워드 렐프, 김덕현, 김현주, 심승희 옮김, 『장소와 장소상실』, 논형, 2005, 39쪽. [6] 미셸 푸코, 이상길 옮김, 『헤테로토피아』, 문학과지성사, 2023, 48쪽. [7] 마르크 오제, 이상길, 이윤영 옮김, 『비장소』, 아카넷, 2017, 97쪽. [8] 정헌목, 앞의 글, 119쪽. [9] 조대원, 임종엽, 「리미널 스페이스의 특성과 건축적 응용 및 재현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 학술발표대회 논문집』 계획계 제23권 제1호, 대한건축학회, 2003, 279쪽. [10] 빅터 터너, 이기우, 김익두 옮김, 『제의에서 연극으로』, 현대미학사, 1996, 208쪽 참조. 이 ‘통과의례’는 모든 문화 유형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어떤 사회 문화적인 상태나 지위에서 다른 상태나 지위로 옮겨갈 때, 이를테면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처녀에서 기혼녀로, 아이에서 부모로, 유령에서 조상의 영혼으로, 질병에서 건강으로, 평화에서 전쟁으로, 또는 그 반대로, 곤궁에서 부유로, 겨울에서 봄으로 옮겨갈 때, 그 지표나 매개”로서 이것은 나타나고 있다. [11] 위의 책, 209쪽 참조. 판 헤네프는 통과의례의 3단계를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① (일상 사회생활로부터의) 분리(separation). ② (문지방을 뜻하는) 주변 혹은 전이역(轉移域, transition): 이때 제의의 당사자는 제의 이전의 생활양식과 이후 생활양식의 ‘중간상태’에 빠진다. ③ 재통합(re-aggregation): 이때 다시 제의적인 과정을 통해 세속적인 집단으로 되돌아오는데, 의례의 당사자는 제의 참가 이전보다 더 높은 상태로 이행하며, 의식이 변하고, 이전과는 달라진 사회적 존재가 된다. [12] 위의 책, 207-208쪽. [13] 조경진, 한소영, 「역공간(Liminal Space) 개념으로 해석한 현대도시 공공공간의 혼성적 특성에 관한 연구」, 『한국조경학회지』 39권 4호, 한국조경학회, 2011, 53쪽. [14] 조대원, 임종엽, 앞의 글, 280쪽. [15] 정지돈, 『스페이스 (논)픽션』, 마티, 2022, 39쪽. [16] 빅터 터너, 앞의 책, 208쪽. [17] 로제 카이와, 이상률 옮김, 『놀이와 인간』, 문예출판사, 1996, 57쪽. [18] 신지연, 이승빈, 김영대, 『이제 공간에 주의하십시오』, 영남대학교출반부, 2023, 28쪽.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정찬미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학문합니다. 서브컬처의 애호가이자 관망자. 시대를 사유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론들을 추적하는 중입니다.

  • 유보된 이야기와 넓어진 유희공간- <용과 같이 8>

    이 글에서 다루는 <용과 같이>는 전통적으로 자유도가 높은 게임으로 취급되진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카무로쵸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공간이 수두룩하고, 선형적인 이야기 속에서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으며, 무수한 미니게임이 게임의 공간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 < Back 유보된 이야기와 넓어진 유희공간- <용과 같이 8> 17 GG Vol. 24. 4. 10. <용과 같이 8>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게 돼?” 작년 한 해 무수한 게임 스트리머가 내뱉었던 말이다. <발더스 게이트 3>의 기상천외한 전략, 프랜차이즈를 다시 한번 쇄신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원더>, 전작의 아성을 매혹적인 자유도의 시스템으로 돌파한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킹덤>, 유사-포켓몬들을 잡아 노동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고기와 가죽 등으로 해체(!)까지 할 수 있었던 <팰월드>…. 이것은 (상당히 자의적으로 해석 가능한) 게임의 자유도가 소위 ‘갓겜’이 되기 위해 중요한 기준 중 하나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해진 내러티브를 어떠한 방식으로 따라갈 것인가, 특유의 직선적 구조를 어떻게 달릴/우회할 수 있는가, 게임의 메인 플롯을 우회하며 즐길 수 있는 유희도구가 존재하는가. * <용과 같이 8> 플레이 화면 이 글에서 다루는 <용과 같이>는 전통적으로 자유도가 높은 게임으로 취급되진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카무로쵸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공간이 수두룩하고, 선형적인 이야기 속에서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으며, 무수한 미니게임이 게임의 공간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 게이머가 택할 수 있는 자유도란 스토리를 진행할 것인지, 100% 클리어를 목표로 모든 미니게임을 정복할 것인지 정도였다. <용과 같이 제로>에서 <용과 같이 6: 생명의 시>까지 7편의 정식 넘버링에서 키류 카즈마의, 그리고 <용과 같이 7: 빛과 어둠의 행방>의 새로운 주인공 카스가 이치반의 이야기를 따라온 게이머들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쫓아가는 것 이외의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이 기나긴 시리즈가 게임들에게 제공해주는 하나의 자유가 있다. 바로 키류/카스가의 이야기를 한없이 유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카무로쵸/이진쵸 등 시리즈의 배경이 되어 온 공간은 단순히 신주쿠와 요코하마의 재현을 넘어 무수한 놀거리로 가득한 유희공간이다. 가라오케나 아케이드, 장기와 포커 등 다른 게임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는 미니게임부터, 포켓 서킷이나 곤충여왕 메스킹, ‘물장사’처럼 일본과 야쿠자라는 특징을 살린 콘텐츠까지, 물론 그에 대한 평가나 호불호는 갈리겠으나 각각의 미니게임이 그 자체로 단독 게임이라는 인상을 줄 정도로 다양한 놀거리를 제공해준다. 8편에 이르러서 본편 바깥의 콘텐츠는 더욱 큰 분량을 갖는다. 전편의 ‘야쿠몬 도감’은 수집한 야쿠몬으로 경쟁할 수 있는 ‘야쿠몬 배틀’로 진화하였고, 하와이라는 새로운 배경에 걸맞은 음식을 배달하는 ‘크레이지 딜리버리’, 본편의 지역을 벗어난 섬에서 진행되는 ‘쿵더쿵 섬’과 같은 다양한 서브 콘텐츠가 등장한다. * <용과 같이 8>의 ‘쿵더쿵 섬’ <용과 같이>의 무수한 놀거리들이 무언가의 패러디다. 우리는 게임을 플레이하며 이를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용과 같이 8>에만 한정해보자면, ‘야쿠몬 배틀’은 <포켓몬스터>의, ‘쿵더쿵 섬’은 <모여봐요 동물의 숲>의, ‘크레이지 딜리버리’는 <크레이지 택시>의 패러디에 가깝다. 제작사인 SEGA가 보유한 IP를 넘어선 패러디의 대상들은, 한편으로 <드래곤 퀘스트>의 영향을 숨기지 않는 전편에서부터 조금 더 본격화된다. 물론 앞선 시리즈에서 기타노 다케시나 후쿠사쿠 긴지 등의 거장이 연출한 일본 야쿠자 영화의 대표작들을 직간접적으로 인용해온 사례가 있지만, 카스가 이치반이 주인공을 맡은 두 시리즈에선 패러디와 인용의 대상이 ‘내수용’을 벗어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한 지점에서 <용과 같이 8>을 플레이하다보면 다른 의미의 “이게 돼?”를 외치게 된다. 첫 문단에서 짧게 언급한 <팰월드>가 어떤 논란을 불러일으켰는지 떠올려보자. 게임이 발매되자마자 <포켓몬스터>와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러스트> 등 여러 게임을 ‘표절’했다는 논란이 들끓었고, 다양한 반응이 쏟아져 나왔다. 물론 여기서 <팰월드>가 표절인지 아닌지, 혹은 그 게임이 만들어진 방식이 윤리적인지 등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포켓몬스터>, <모여봐요 동물의 숲> 등의 컨셉을 거의 그대로 들여온 <용과 같이 8>의 서브 콘텐츠에 관해서 표절 논란은 없었다. 시리즈 대대로 진지한 톤의 메인 스토리와 B급 감성의 서브 콘텐츠를 다른 게임을 플레이한다는 인상을 줄 정도로 분리시켰기 때문일까? 혹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가 판타지 RPG 게임 속 몬스터들에 버금가는 (캠피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과장된 이미지들이기 때문일까? * <용과 같이 8>의 ‘야쿠몬 배틀’ 잠깐 언급한 것처럼 <용과 같이> 시리즈, 특히 카스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7, 8편의 경우 서브 콘텐츠가 메인 스토리를 지연할 자유를 제공하는 요소로써 작동한다. 전작들의 포켓 서킷이나 물장사가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거나 서브 스토리를 보기 위한 수단에 가까웠다면, 야쿠몬 배틀이나 쿵더쿵 섬은 그것을 넘어 독자적인 시스템을 지닌 게임 속 게임에 가깝다. 물론 이들을 통해 메인 스토리 진행을 위한 돈이나 강화 아이템을 습득할 수 있지만, 두 서브 콘텐츠는 메인 스토리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진행되는 플롯을 지니고 있으며 심지어 상호보완적인 시스템을 갖추기까지 했다. 이를테면 수집한 야쿠몬을 쿵더쿵 섬의 노동력으로 삼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훈련 및 강화한 야쿠몬을 배틀에 활용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이는 <드래곤 퀘스트>를 비롯한 JRPG의 전통을 <용과 함께>의 전투 시스템에 녹여내면서 등장한 새로운 렌즈, 즉 턴제 전투에 돌입함에 따라 카스가의 관점에서 ‘몬스터’로 변하는 적들의 모습과 조금 더 강하게 결부된다. 전작들에서 단순히 ‘길거리 양아치’나 ‘술 취한 회사원’과 같은 식으로 명명되었던, 길거리 인카운터로 마주치는 적들은 '자칭 마법사', '장난꾸러기 코코넛', '시티 웜'과 같은 이름으로 바뀌었다. 카스가의 눈으로 보게 된 <용과 같이>의 세계는 한편으로 선혈이 낭자한 야쿠자의 세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모험으로 가득한 게임적 가상으로 가득한 세계다. 키류의 실시간 전투가 ‘야쿠자’라는 소재가 주는 폭력의 쾌감을 강조했다면, 카스가의 턴제 전투는 카스가의 규칙을 받아들인 동료들과 형성한 일종의 ‘매직 서클’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야쿠몬 배틀이나 쿵더쿰 섬처럼 명백히 다른 게임의 시스템을 차용한 서브 콘텐츠를 정당화할 수 있다. 카스가의 <용과 같이>는 더 이상 야쿠자의 세계를 진지하게 묘사해낼 수 없는 게임 외적인 어려움(2010년대 이래로 야쿠자의 수는 급격히 감소하는 추세다)을 다분히 게임의 방식으로 풀어낸다. ‘야쿠자 대해산’으로 마무리된 7편과 언더커버 요원으로 암약하는 키류의 이야기를 다룬 <용과 같이 7 외전: 이름을 지운 자>를 떠올려본다면, 8편의 이야기는 배신과 의리 사이를 맴도는 전형적인 야쿠자 이야기로 지속될 수는 없다. 때문에 시리즈가 눈을 돌린 곳은 게임 그 자체이며, 8편은 그간 시리즈가 쌓아둔 에셋을 재료 삼은 온갖 게임의 혼성모방으로 완성되었다. 그것이 이 게임에 가져다준 거대한 유희공간은 기존에 “자유도가 높다”라는 평가를 받았던 게임들과는 다른 양상의 자유도를 선사한다. * <용과 같이 8>의 ‘엔딩노트’ 메인 스토리를 끝없이 유보하는 <용과 같이 8>의 자유에는 혼성모방적 서브 콘텐츠 이외의 것도 포함된다. 친어머니를 찾아 나선 카스가의 이야기에서 출발하는 이야기이지만, 어쨌거나 이 게임은 카스가와 키류를 모두 주인공으로 채택했다. 6편에서 일단락되었던 키류의 일대기는 7편 외전에서 잠시 다른 방향으로 선회한 뒤 본작에서 다시 전개된다. 게임 중반부부터 키류가 암에 걸려 죽어간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이야기는 카스가가 이끄는 하와이 그룹과 키류가 이끄는 이진쵸 그룹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이 시점부터 새로 해금되는 서브 콘텐츠가 있다. 바로 키류의 ‘엔딩노트’다. 엔딩노트는 키류를 간호하던 난바가 지난 삶을 정리해보라고 조언하는 장면을 통해 해금된다. 마치 <레드 데드 리뎀션 2>의 아서 모건이 무법자들로 가득한 서부극의 시대가 끝나감을 알리며 죽어간 것처럼, 키류 카즈마는 야쿠자의 시대가 끝나감을 자신의 몸으로 드러내듯 죽음을 향해 간다. 키류는 이진쵸와 카무로쵸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난 삶을 회상하고, 종종 간단한 전투가 벌어진 뒤 이전 시리즈의 장면이 엔딩노트에 기록된다. 여기에는 본편 넘버링 이외에도 <용과 같이 유신!>이나 <용과 같이 OF THE END>과 같은 외전 또한 꿈의 형태로 포괄된다. 이윽고 누군가 키류를 찾아오는데, 시리즈 전체를 키류의 이야기에 함께 해온 형사 다테 마토코다. 키류는 다테와 함께 전작들에서 함께 해온 인연들을 마주한다. 이 과정을 통해 포켓 서킷 파이터나 의사 에모토부터 시리즈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하루카까지, 그간의 시리즈를 수놓은 등장인물과 재회하게 된다. 이 재회는 키류의 것만이 아니다. 지난 20년 동안 <용과 같이>를 플레이하며 키류의 여정을 쫓아온 게이머들 또한 키류의 엔딩노트 위에 자신의 추억을 포개어 놓을 수 있다. * <용과 같이 8> 속 키류의 죽음과 관련된 장면 이경혁은 게임제너레이션 16호에 수록된 글 “ '이코'에서 '갓오브워'까지: 사랑의 대상과 게이머의 나이듦에 대하여 ”를 통해 스탠드얼론 게임에서 다뤄지는 서사가 게이머와 함께 나이듦을 지적한다. 로스 산토스를 누비는 범죄자는 중년의 위기를 겪고, 혈기 왕성했던 크레토스는 사춘기의 아들을 이해해야 하며, 이혼와 육아는 GOTY 수상작의 중심 소재가 되었다. 게임의 주인공이 죽는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찾아볼 수 있었다. 다만 그것이 늙음과 질병, 한 시대의 종언과 함께 이야기되는 것은, 이경혁의 지적처럼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된 스탠드얼론 게임 유저들의 연령과 연동되며 발전한다. 어느덧 20년의 역사를 지는 프랜차이즈가 된 <용과 같이>가 키류의 마지막(일지 아닐지는 아직 모르지만)을 그려내는 방식은 시리즈의 한계와 나이듦을 직면하는 것과 같다. 규모의 확장과 한계의 쇄신이라는 이중의 임무를 지닌 <용과 같이 8>은 우리에게 게임의 주역들과 한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한다. 메인 스토리를 유보하면서 카스가와 놀고 키류를 추억할 거대한 놀이공원, 이로써 <용과 같이>라는 게임의 경계는 한층 넓어졌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비평가) 박동수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했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를 전공하고 있다. 영화에 관한 글을 주로 쓰고, 미술, 게임, 방송 등 시각문화 전반에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리고 있다. 영화평론가, 팟캐스트 [카페 크리틱] 진행자, 공동체상영 기획자이기도 하다.

  • [Editor's View] 작동하는 세계를 곱씹는 놀이로서의 시뮬레이션

    장르로서의 시뮬레이션은 무엇인가? 를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자면, 저는 그것을 엄밀히 정의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다소 의문입니다. 시뮬레이션이라는 말은 애초에 모든 장르의 디지털게임에 녹아있는 원천 요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2025년 GG의 마지막 테마로 선정된 시뮬레이션이라는 단어에 대해 우리는 개념어로 접근하기보다는 경험적으로 접근하고자 했습니다. < Back [Editor's View] 작동하는 세계를 곱씹는 놀이로서의 시뮬레이션 27 GG Vol. 25. 12. 10. 장르로서의 시뮬레이션은 무엇인가? 를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자면, 저는 그것을 엄밀히 정의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다소 의문입니다. 시뮬레이션이라는 말은 애초에 모든 장르의 디지털게임에 녹아있는 원천 요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2025년 GG의 마지막 테마로 선정된 시뮬레이션이라는 단어에 대해 우리는 개념어로 접근하기보다는 경험적으로 접근하고자 했습니다. 이번 호는 게임분야에서 활용되는 시뮬레이션이라는 말의 여러 의미를 다각도로 탐색합니다. 아무래도 중심은 장르로서의 시뮬레이션을 표방한 게임들에 대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애초에 편집회의에서는 "왜 '미연시'에 시뮬레이션이 붙지?"와 같은 고민들이 오가곤 했습니다. 게임 제작자와 플레이어들은 왜 어떤 게임 디자인을 두고 시뮬레이션이라고 부르는가? 다른 매체들에서는 같은 고민을 하지는 않는가와 같은 개념들이 이번 호 기획의 기저에 깔려 있는 생각들이었습니다. 시뮬레이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여러 게임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자동화 시뮬레이션, 체험형 시뮬레이션, 운영과 연산의 재현이라는 디자인 그 자체, 혹은 그 디자인을 통해 재현된 무엇이 놀이로서의 순간과 놀이 이후의 삶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지를 고민하고자 했습니다. 더불어 올해부터는 게임제너레이션 필진들과 함께 하는 연말결산을 진행해 보기로 했습니다. GGOTY라는 조금은 유머섞인 이름으로 시작하지만, 한국어로 된 게임비평지가 전무한 상황에서 이 작은 시작이 몇년 뒤 어떻게 자리잡을지는 저도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GG는 미약하게나마 시작했지만, 어느새 햇수로 5년차를 맞이하며 적어도 비평담론에의 시도가 짧은 일회성에 그치지 않았음까지는 증명했습니다. 2021년에 처음 만들었던 1호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GG도 많은 변화들을 거쳤겠지요. 앞으로의 미래도 예상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이 흐름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내년 한 해도 GG와 함께 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드림.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스스로 움직이는 게임: 방치형 게임에서의 플레이들

    “게임을 한다”라고 하면 무슨 이미지가 떠오를까? 컴퓨터 앞에 앉아 역동적으로 게임을 즐기는 모양새를 “게임을 한다”라고 칭하던 시절이 있었다. “타닥타닥”(키보드), “딸깍딸깍”(마우스), “삐걱”(의자). PC방이라면 “웅성웅성”까지. 사람들은 기계 앞에 올곧이 앉아서 게임에 몰두한다. 누가 봐도 게임을 하는 모습은 티가 났다. 그래서 게임을 할 때 방, 거실, 피시방, 플스방 같이 분리된 공간으로서 게임의 장소가 중요했고, 사람들은 게임을 하기 위해 그곳에 방문을 해야 했다. < Back 스스로 움직이는 게임: 방치형 게임에서의 플레이들 03 GG Vol. 21. 12. 10. “게임을 한다”라고 하면 무슨 이미지가 떠오를까? 컴퓨터 앞에 앉아 역동적으로 게임을 즐기는 모양새를 “게임을 한다”라고 칭하던 시절이 있었다. “타닥타닥”(키보드), “딸깍딸깍”(마우스), “삐걱”(의자). PC방이라면 “웅성웅성”까지. 사람들은 기계 앞에 올곧이 앉아서 게임에 몰두한다. 누가 봐도 게임을 하는 모습은 티가 났다. 그래서 게임을 할 때 방, 거실, 피시방, 플스방 같이 분리된 공간으로서 게임의 장소가 중요했고, 사람들은 게임을 하기 위해 그곳에 방문을 해야 했다. 그 풍경은 바뀌고 있다. “게임을 한다”를 상상하면 이제는 여러 이미지가 떠오른다. 모니터 앞에 앉아 몰두하는 장면도 있지만,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모습도 있다. 그 스마트폰은 손에 붙어있기도 하지만, 책상 한쪽에 덩그러니 놓여있기도 한다. 플레이어가 일이나 학업에 바빠 터치를 할 수 없는 상황에도 스마트폰 화면 안에는 스스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다. 심지어 대중교통 속 인파에 꽉 끼어 팔을 움직이지 못할 때도, 눈을 감고 밤에 잠을 청할 때도 게임은 혼자서 돌아간다. ‘자동’과 ‘방치’라는 이름 아래서. 2020년, 모바일 게임 매출 순위 3위에 갑자기 오르면서 이목을 끌었던 게임이 있었다. 릴리스 게임스의 〈AFK 아레나〉이다. AFK(Away From Keyboard)라는 단어가 들어간 이 게임은, 제목 그대로 플레이어의 부재를 허용한다. 자동과 방치를 적극적으로 표방하는 게임. 앱스토어에 등록된 모바일 게임 홍보문구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손가락 하나로 지배", "접속하지 않아도 저절로 강해지는"이라는 말들이 눈에 띈다. 이 게임은 특히 자신을 “바쁜 현대인을 위한 게임”이라고 소개한다. 지상파와 유튜브에도 게임 광고가 송출되었는데, 광고는 게임의 다양한 ‘맛’을 거론하며 ‘손 떼는 맛’을 게임의 새로운 스타일로 소개한다. “게임은 뭐니 뭐니 해도 손맛이라고? 이제 모두들 손 떼! 하루 종일 메어있지 않아도, 가끔씩만 만져줘도, 보는 맛, 뽑는 맛, 키우는 맛, 깨는 맛이 최고! 게임은 원래 이 맛이야.” 모바일 게임에서 자동 기능은 이제 없으면 허전한 존재가 되었다. 보조적 장치가 아닌 주요 장치가 된 것이다. 2013년 모바일 게임 〈몬스터 길들이기〉는 자동 타격, 자동 이동 기능을 게임에 도입했다. 모바일에서 캐릭터 조작이 힘들기 때문에 전투 메커닉의 일부를 자동 실행되도록 한 것이다. 캐릭터의 수집과 성장이 더욱 중요해졌고, 플레이어의 조작은 전투에서 스킬 실행 정도로 한정되었다. 이후 이 게임은 매출과 평가에서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으면서 모바일 플랫폼에서 RPG의 가능성을 보인 사례가 된다. 그리고 일종의 모바일 RPG 템플릿이 생성된다. 모바일 게임을 이용하는 틈새 시간과 맞물리는 단편적 구조가 정착되었고, 이동과 타격, 스킬 사용 전반을 모두 최적 알고리즘으로 자동화하여 플레이어의 조작 스트레스를 낮추었다. 2010년대 중반부터는 ‘방치형 게임’이라고 불리는 장르가 새로운 플레이 장르로 자리 잡았다. 피시 플랫폼에서 클리커(clicker) 게임, 아이들(idle) 게임으로 불리던 이 장르는 가만히 있어도 재화가 자동으로 증가하는 것이 특징이다. 플레이어는 재화가 더욱더 빠르게 쌓일 수 있도록 전략적으로 시스템을 성장시키고, 자원을 순환시킨다. 부재중 동안 재화가 증식하는 속도를 높여라. 이러한 투자 행위는 금융 자본을 다루는 〈어드벤처 캐피탈리스트〉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비슷한 장르의 〈중년기사 김봉식〉, 〈오늘도 환생〉, 〈거지 키우기〉, 〈어비스리움〉 등 국내 개발사의 방치형 게임은 길게는 5년이 넘도록 단단한 팬층을 확보하고 있다. 그런데도 많은 게이머는 방치되고 자동 진행되는 게임을 보며 “이것이 게임인가” 하는 반응을 보인다. 실시간 조작을 우선시하는 게임의 일반적 범주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이러한 게임을 즐기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다. 온라인 담론에서 쉽게 보이지 않을 뿐이다. 같은 장르의 신규 게임들이 매일 앱스토어에 출시되고 있다. 화면을 실시간으로 쳐다보고, 캐릭터를 직접 움직여야만 게임일까? 어찌 보면 “게임을 한다”는 의미가 그동안 너무 좁았던 것일 수도 있다. 면밀히 들여다보면, 자동 진행되고 방치되는 게임은 플레이어의 행동을 마냥 박탈하지 않았다. 다른 행동으로 변화했다는 것이 포인트. 나는 이러한 게임들에 주목하고, 자동화된 알고리즘이 어떻게 새로운 게임 플레이를 만들어내는지, 그리고 플레이어들은 어떤 감각을 느꼈는지 알아봤다. * 사진: 〈AFK 아레나〉 자동화된 게임들 나는 자동 전투, 방치형 게임이라고 불리는 장르의 게임들을 모두 합쳐 ‘방치’ 문화의 게임으로 묶었다. 물론 게임은 모두 달랐지만, 플레이어가 부재한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방치된다는 사실은 같았다. 자동화된 게임의 양상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방치되는 시간을 기준으로 간헐적 방치, 장기적 방치, 항시적 방치로 묶었다. 우선 간헐적으로 방치되는 게임은 여러 개의 스테이지로 분기가 형성된 것이 특징이다. 하나의 스테이지는 1분에서 3분 정도로, 일과의 틈새 시간에 짧게 즐길 수 있다. 전투 화면에 동영상 재생 기능이 도입된 것이 특징인데, 전투가 진행되는 속도에 배속을 높여 빠르게 넘어가거나 정지 버튼을 눌러 캐릭터의 상황을 점검하기도 한다. 또다른 범주인 장기적 방치는 짧게는 몇 분에서 길게는 몇 시간까지 게임을 켜두어야 하는 것이 특징이다. 스마트폰을 끄거나 다른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면 게임이 정지한다. 따라서 배터리 소모가 필수적이며, 화면 보호 모드를 켜두거나 피시 화면에 게임을 연결해 플레이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항시적 방치의 분류에서 게임은 가입한 이래로 캐릭터가 무한하게 전투를 하고 아이템을 수집한다. 게임은 항상 진행되고 있으며, 플레이어는 접속하여 게임 진행에 가속 운동을 한다. 물론 이러한 게임들도 너무 오래 플레이어의 부재를 허용하진 않아서 최대 24시간이 지나면 더는 진행되지 않게 하기도 한다. 이렇게 임의로 세 개의 큰 카테고리를 분류했지만, 사실 이들 사이는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으며 서로의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쿠키런: 킹덤〉에는 수 분 내로 끝나는 스테이지가 있으나, 동시에 최대 8시간까지 초당 몇 개의 속도로 지속해서 재화가 발생하는 '풍요의 샘'이 있다. 〈AFK 아레나〉도 마찬가지로 두 시스템을 동시에 가진다. 게임에서 구현된 것과 별개로, 플레이어에 따라서 스타일이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항시적으로 방치되는 〈꿈의 마을〉에 길게 접속해 오랫동안 플레이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쿠키런: 킹덤〉 일과에 녹은 게임의 시간 게임이 스스로 가동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잠을 자는 시간에도 직장에서 일을 하는 동안에도 게임을 하게 되었다.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노동 시간은 게임을 방치해두기 좋은 시간인데, 사람들은 업무 책상 위에서 스마트폰을 충전기에 연결하고 화면 보호 모드를 켜두거나 화면 밝기를 낮추어 게임이 계속 진행되도록 했다. 이는 주어진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여러 행위를 동시에 하는 멀티태스킹에 속한다. 게임을 켜둔 상태에서 유튜브를 보거나, 회사에서 업무를 처리하거나, 자기 계발을 하거나, 집안일이나 식사를 같이하기. 시간을 이중으로 사용하여 조금이라도 가치를 더 창출하려는 의지다. 아무 쓸모 없는 시간이 될 수 있는 묵묵히 일하거나 머리를 말리거나 양치하기, 빨래하기, 대중교통 이동할 때 게임을 켜두면 또 하나의 생산물이 발생하는 것이다. “밤에 게임을 켜 놓고 자요. 충전기를 끼고 켜 놓고 자면, 아침에 일어났을 때 콘텐츠가 쌓여있거든요. 핸드폰 보고 처리하고, 화장실 가서 씻습니다. 출근 지나서 제일 먼저 김봉식 다시 켜서 충전기에 꽂아 넣고요. 퇴근 후에 운동하고, 샤워하고 컴퓨터 하거나 영상을 보는데, 한 쪽에 김봉식을 켜놓고 15분에서 많게는 20분에 한 번씩 다시 봐줍니다.” 방치되는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생각을 덜 빼앗는다. 즉, 집중, 몰입, 관심이라는 인지적 자원을 덜 사용하면서 절약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높은 몰입을 요구하며 인지 자원을 빼앗는 게임은 중독적이라고 보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하루 종일 업무를 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소소하게 플레이 할 수 있는 게임. 그 게임은 나의 일상을 잡아먹지 않는다. 다양한 게임 중에서 자동화된 플레이의 게임들은 너무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은 세상에서 나타나는 여가 실천이다. '게임하기'의 변화: 기계 관리자로서 플레이어 사람들은 게임을 "돌려놓는다"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이러한 표현은 보통 기계를 다룰 때 쓰는 말이다. 오랜 시간 방치했던 게임에 복귀하여 "쌓여있는" 것들을 "처리"하고 "정리"한다는 점 역시도, 게임 진행을 일종의 과업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았다. 마치 세탁기나 식기세척기처럼 기계에 힘든 일을 맡기고 일정 시간 뒤 작업이 완료되면 결과물을 획득하는 것처럼, 알고리즘에게 게임을 맡기고 일정 시간 뒤의 결과물을 확인하는 지금의 자동화된 게임 양상은 인간의 정신적 유희 활동으로 게임을 정의하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고찰을 일으킨다. 오늘날 방치되는 게임에서 인간은 아바타 당사자가 아닌, 기계의 관리자로서 위치가 변화했다. 다시 말해, 기계를 조작하는 일과 기계가 가져온 결과물을 재배치하는 일이 게임하기가 된 것이다. 기계에게 명령을 내린 플레이어는 이제 직접 고단한 일을 하지 않고, 일을 하고 있는 게임을 지켜보는 관리자가 되었다. 게임 〈고양이 식탁〉은 고양이들이 방문하는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끝없이 방문하는 고양이 손님에게 주문을 받고, 바닥을 청소하는 등의 일을 한다. 처음에는 직접 화면 터치를 통해 이러한 응대를 모두 처리해야 하지만, 어느 정도 게임의 메커니즘이 익숙해졌을 즈음 플레이어는 게임에서 거리가 멀어져 관리자가 되기 시작한다. 레스토랑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직접 처리하지 않고 그 일을 처리할 직원 캐릭터를 배치하며, 그 캐릭터가 일을 밀리지 않고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 역할로 변모하는 것이다. 플레이어는 캐릭터에 몰입하는 위치에서 벗어나고 기계 행위자인 캐릭터(알고리즘)를 관리하는 위치가 되었다. 캐릭터와의 거리는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당사자에서 제3자가 되며, 게임 상황을 관망하게 된다. 여기에서 보기로서의 게임하기가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관리자이자 시청자, 양육자, 혹은 수학자 이렇게 변화한 역할에서 발생하는 감각은 어떤 게임을 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어떤 이는 '게임 방송 시청'과 비슷하다고 답했다. 나의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화려한 전투 장면을 즐거이 감상하는 것이다. 전투가 끝나면, 다음 방송이 재생되듯 다음 전투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하물며 캐릭터가 도중에 사망하기라도 하면, 장면에 감정이입 하면서 탄식을 보였다. 또 다른 집단은 자동 전투하는 캐릭터를 0과 1로 이루어진 데이터 조각에 불과하다고 언급하면서, 캐릭터 군단과 인간 플레이어 본인과의 거리가 멀어 이입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을 냉정하게 드러냈다. 캐릭터와 거리가 계속 멀어지다 못해 무덤덤한 관찰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반면 눈앞에서 성장하는 캐릭터를 자식이나 반려동물로 느끼는 부류도 있었다. 〈중년기사 김봉식〉을 즐기는 플레이어는 캐릭터가 자신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거리감은 있지만, 오랜 시간 애정을 가지고 키운 반려동물과 같은 존재라고 언급했다. 이는 과거의 육성 게임기 〈다마고치〉와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귀여운 캐릭터가 알 모양의 기계 안에서 플레이어의 보살핌을 받고 자라는 다마고치는, 배설물을 치우거나 잠을 잘 때 불을 꺼줘야 하는 생물학적 리듬을 표방한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가 행복하고 건강을 유지하도록 플레이해야 했고, 디지털 반려동물로 여기면서 캐릭터에게 정서적으로 가까움을 느꼈다. "더 멋진 기계 관리자"가 되는 일로 플레이어의 지향점이 설정되기도 했다. 게임 커뮤니티에서 많은 유저들은 캐릭터 육성법을 공유한다. 이들은 도표를 그려 수치를 분석하고, 각 선택에 따르는 최적의 효율을 찾는다. 이러한 행위를 띠어리크래프트(theorycraft)라고 부르는데, 2000년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커뮤니티에서 유저들이 게임 세계의 작동 연산을 밝혀 더 좋은 플레이를 하도록 실천한 것으로 기록된다. 띠어리크래프트를 즐기는 유저는 관리자가 된 동시에 최적의 루트, 최적의 성장법을 찾아 수학자가 된 것과 같은 즐거움을 느낀다. 이렇듯, 게임은 자동화된 시스템으로 방치를 허용하고, 사람들은 방치 행위를 일상에 녹여낸다. 과거 피시 온라인 게임에서 불법으로 규제했던 자동 플레이가 모바일 게임으로 오면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5분, 1시간, 24시간 등 원하는 시간을 선택하여 방치할 수 있는 오늘날 자동과 방치의 게임들은 마치 여가 시간을 채우는 상품의 여러 가짓수를 제공하는 듯싶다. 이제 플레이어는 기계 관리자로서, 게임 기계가 잘 굴러가도록 보살핀다. 같은 관리자라도 요란하게 전투하는 캐릭터를 지긋이 감상하는 사람들, 감정 이입하는 사람들, 혹은 감정 없이 냉정하게 대하는 사람도 있지만, 친밀성을 가지고 '반려 캐릭터'로 보는 경우, 게임 내 메커니즘을 간파하고 그 수를 이해하는 것에 충실한 나머지 수학자가 되어버린 관리자도 존재하기도 한다. 아직 모바일 MMORPG에서 제한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인공지능이 적극적으로 도입이 되면, 여태까지 말한 '관리'의 속성이 다르게 변할 수도 있다. 정해진 기능을 마냥 수행하지 않는 캐릭터가 나타날까? 그것이 어떤 방향이든, 게임하기의 범위를 확장할 것 만은 확실하다. *이 글은 필자의 석사논문 〈플레이어 없는 게임들: 모바일 게임의 ‘방치’ 문화 연구〉에 기반하여 작성된 글입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박이선 사회적인 관점에서 게임을 연구합니다. 게임이라는 도구를 통해 결국 인간을 탐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은 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 게임결제문화의 25년 변화가 드러내는 온라인게임의 특이점

    디지털게임의 결제수단과 결제방식은 오늘날 게임계 이슈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단순히 신작 타이틀과 DLC, 시즌패스의 가격과 가성비 논란부터 시작해 최근에는 인게임 아이템의 가성비 문제, 이용자간 거래 문제, 그리고 확률형아이템 문제에 이르기까지 게임 분야의 핫 이슈 상당수는 게임의 결제와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다. < Back 게임결제문화의 25년 변화가 드러내는 온라인게임의 특이점 23 GG Vol. 25. 4. 10. 디지털게임의 결제수단과 결제방식은 오늘날 게임계 이슈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단순히 신작 타이틀과 DLC, 시즌패스의 가격과 가성비 논란부터 시작해 최근에는 인게임 아이템의 가성비 문제, 이용자간 거래 문제, 그리고 확률형아이템 문제에 이르기까지 게임 분야의 핫 이슈 상당수는 게임의 결제와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다. 가격과 결제방식이 이슈의 중심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몇 가지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다. 첫째는 어떤 식으로든 디지털게임은 이제 경제규모와 산업적 측면에서 더 이상 무시할 만한 수준의 덩치가 아니라는 것이며, 둘째는 이러한 이슈를 통해 터져나오는 이용자들의 불만이 단순한 가격의 문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게임 플레이라는 이용행위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매체와 비교해 보면 좀더 흥미롭다. 우리는 책이나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나 음악을 두고 이와 같은 논쟁을 벌이지는 않는다. 매체마다 물론 다양한 결제방식에 의해 유통되므로 이를 단순화하는 것은 무의미하겠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게임계에서 일어나는 결제방식의 문제는 대단히 독특하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를테면 DLC와 같은 방식은 책과 같을 수 있을까? 물론 1권을 봐야 2권을 살 수 있다는 점에서 책이나 웹소설 같은 매체와 유사한 부분은 있겠지만, 연작 시리즈 중에 3권만 사 볼 수 있다는 것과 아예 구매시에 “이 DLC는 원본 프로그램을 필요로 합니다”로 제한되는 경우가 같지는 않다. OTT 드라마를 보는 와중에 이야기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주인공의 장비를 돈을 내고 강화하는 것은 가능한가? 어쩌면 이는 오늘날의 디지털게임을 다른 매체와 구분지을 수 있는 주요한 특징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같은 온라인게임이지만, 2000년대와 지금의 결제가 다른 두 가지 포인트 하지만 이런 특징은 ‘오늘날의’ 디지털게임에만 국한된다. 21세기의 서막을 알렸던 25년전의 게임들이 가지고 있었던 소비와 유통, 결제의 방식을 되짚어보면, 디지털게임의 특수성이 초기부터 있었던 것이 아닌 결제수단의 발전과 변화로부터 기인했음을 볼 수 있다.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된 온라인게임 붐은 2000년대부터는 본격화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바람의나라>, <리니지>와 같은 정액제 온라인 게임들이 소수의 전유물로서가 아니라 대중적인 붐을 타고 있었으며, <스타크래프트>는 직접 소프트웨어를 구매해서 소유하고 플레이하기보다는 한국에서는 PC방이라는 공간의 중개를 통해 공용공간에서의 시공간대여라는 방식으로 플레이되었다. 이는 온라인 이전 시대와 간단히 구분할 수 있는 변화인데, ‘재화에서 용역으로’라는 말로 눙쳐볼 수 있다. 온라인 인프라가 확장되면서 게임 소프트웨어는 재화에서 용역으로 상품의 속성을 변경했다. 한 번 구매하면 영구히 소유권을 가질 수 있었던 시기와 달리 서버 위에 소프트웨어가 올라가 있는 형태로 온라인게임이 작동하면서 게임 이용은 이용권한을 일정 비용을 지불하고 부여받는 형태로 변화했다. 이를 20세기 게임과 21세기 게임이라고 구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비스 이용의 형태로 보편화된 2025년의 디지털게임을 단순히 서비스 이용이라고만 부르기에는 또 2000년대와는 굉장히 다른 양식들이 자리잡은 상태다. 나는 여러 변화 중에서도 특히 두 가지의 주목할 만한 변화에 집중하고자 한다. 가장 먼저 지적해볼 수 있는 부분은 정액제에서 부분유료로의 서비스 결제방식 변화다. 2000년대 초반의 온라인 기반 게임들은 정액제를 주력으로 삼았다. 90년대 TELNET을 기반으로 운영되었던 <단군의땅>, <쥬라기공원>과 같은 MUD게임들이 사용시간당 요금을 부과했던 종량제 형태였다는 점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한국의 경우 PC방이 대중적 게임공간으로 자리잡으면서 이는 B2B형태로도 자리잡았는데, 이용자가 PC방에서 온라인게임을 즐기는 경우에도 이용자는 PC방에 종량제 방식의 이용요금을 지불하지만 PC방은 온라인게임 회사에 사용시간만큼의 금액을 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마트폰 기반의 게임들이 게임산업의 과반을 차지하게 된 오늘날 정액제 기반의 요금은 과거만큼의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며, 그 자리는 부분유료결제에 내주었다. 무료로 진입할 수 있지만 게임 플레이 속에서 일정한 패널티를 부과받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결제가 요구되는 형식이 2025년 게임 결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세부적인 측면으로 들어가면 그 안에서 광고시청, 아이템결제와 같은 방식들이 존재하지만, 거시적으로는 이용자들로 하여금 물리적으로 동일한 시간당 요금을 부과하는 방식에서 개별사용자마다 필요하다고 여기는 가치만큼의 요금을 결제하는 형태로 변화했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중요한 변화로는 현금 기반 P2P거래의 감소세를 짚어볼 수 있다. 아이템, 캐릭터 등을 이용자 사이에서 거래하는 현금 기반 P2P거래에 대해서는 더 길게 할 이야기가 많지만, 여기서는 지난 25년 사이에 P2P거래가 발생했고, 이 거래에 대해 게임사들은 점차 개인간의 거래를 개인 – 게임사 간의 거래로 대체하고자 하는 흐름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만을 다루려 한다. 싱글플레이 게임에서는 불가능했을 개인간 현금 아이템 거래는 온라인게임 환경이라는 전제가 들어서면서부터 가능해졌고, 실제로 등장한 것은 각 플레이어들로부터 발생한 수요와 공급으로부터였다. 단순화해서 이야기하자면 이는 크게 게임시간이 부족한 플레이어와 게임시간이 넉넉한 플레이어 사이의 시간교환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온라인게임 서버 안에 게임플레이의 결과물이 경험치, 레벨, 아이템 등으로 누적되는 상황에서 이 플레이의 잔여물들은 게임 플레이의 진척에 있어 과거 싱글플레이 시절에는 플레이어의 몸에 쌓이던 숙련도를 서버에 시간축 중심의 데이터로 쌓아낸 결과물로써 숙련도를 대체하는 효과를 낸다. 다시말해 게임에 들인 시간이 많아질수록 게임 내의 성취가 더욱 빠르고 효율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그러나 게임시간이 부족한, 이를테면 주5일 정시출퇴근을 해야 하는 이들로 대표되는 게이머들은 이를 효과적으로 축적하지 못하고, 대신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지만 가처분소득이 적은 게이머들과 현금 – 플레이시간의 맞교환을 이뤄내고자 한다. 그 결과물이 현금기반 아이템 거래이며, 이는 온라인게임의 성립 이후 최초에는 게임 내 재화로만 교환되던 아이템거래를 현금이라는 일반 매개를 통한 교환으로 이끌어냈다. 그러나 2025년의 온라인게임을 들여다보면 현금기반의 아이템거래는 과거보다 게임사에 의해 강하게 제한되는 흐름을 볼 수 있다. 이는 제한이라기보다는 시간 – 현금의 맞교환을 통한 이윤의 축적을 플레이어 개인이 아닌 게임사가 가져가고자 하는 흐름이 반영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개인간의 거래가 불가능하도록 아이템은 귀속, 기간제와 같은 형태로 변경되었으며, 이를 통해 부족한 시간을 현금으로 구매하고자 하는 이용자들의 거래처는 다른 이용자에서 게임사로 바뀌어 왔다. 교환가능해진 놀이시간의 대두 언급한 두 가지 사례의 공통점은 시간과의 연관성이다. 부분유료결제의 보편화는 정액제라는 동일한 시간단위 과금을 플레이어마다 다른 플레이시간의 가치에 따라 선택적으로 결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제시했고, 현금기반 P2P거래는 현금 – 시간의 맞교환이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이윤이 게임사가 이를 회수하려고 할 만큼 오늘날의 게임산업에서 거대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어떤 면에서 서비스로서의 디지털게임이 지난 25년간 결제 측면에서 겪은 변화는 플레이시간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거래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 시도의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치경제학적 문제에서 시간의 개념은 그동안 노동시간이라는 지점에서 두텁게 논의되어 온 바 있다. 하지만 게임 플레이 시간을 포괄하는 놀이시간, 혹은 여가시간은 체계화되기보다는 노동시간과 병행하며 인간의 시간계를 구성하는 요소 정도로 다뤄져 온 바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온라인 기반 디지털게임의 플레이 시간은 오랜 변화 속에서 이제 독특한 개념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놀이시간이 축적되어 더 나은 놀이를 위한 아이템과 같은 도구로 변환되고, 이는 충분한 플레이시간을 투여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현금을 주고 구매할 의향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온라인 게임의 등장 전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놀이시간의 양적, 질적 전회와 교환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점은 21세기 첫 사반세기를 보낸 뒤 우리의 온라인게임 속에서 오늘날의 게임 현상을 특정할 수 있는 특이점으로 드러난다. Tags: 플랫폼, 산업, 결제, 정치경제학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지연시간을 두고 벌이는 개발자와 이용자의 개선과 적응

    현대 게임 서버의 개발자들은 0.3초 지연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게임 서버를 개발한다. 이부분을 명시적으로 정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0.2초~0.5초에서 지연이 발생했을 때도 자연스럽게 게임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설계해야 한다는 부분은 경험을 통해서나 혹은 선배 개발자들의 조언을 통해 이어져 내려오기도 한다. < Back 지연시간을 두고 벌이는 개발자와 이용자의 개선과 적응 21 GG Vol. 24. 12. 10. 우리가 흔히 빛의 속도라고 부르는 표현이 있다. 요즘은 빛의 속도를 뛰어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완전히 잡혀서 SF를 다루는 콘텐츠에서도 실제로 빛의 속도를 뛰어넘는 속도를 내는 우주선 같은 것은 나오지 않는 시대가 되었는데, 그러다보니 실제 빛의 속도가 몇인가를 굳이 외우고 사는 사람들도 적은 편이다. 검색을 해보면 빛의 속력은 진공 상태에서 299,792,458 m/s 인데 우리가 흔히 알기 쉽게 비교하는 서울과 부산 간의 거리로 이것을 생각하면 1초에 460번정도 왕복할수 있는 셈이다. 조금 더 거리를 늘려보자. 서울의 정확한 지구 반대편의 위치를 고르라면 아마 바다 위가 될 테고, 그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는 부에노스 아일레스일 것이다. 부에노스 아일레스까지의 거리는 약 20000km 정도이고, 빛으로는 1초에 7.5번정도 왕복할 수 있다. * 서울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까지의 거리. 1초에 지구를 7번 반 돌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인간의 입장에서는 엄청 빠른 속도임에 분명하지만 어? 빛이란게 생각만큼 안빠른데? 싶은 생각도 든다. 쉽게 생각해보자. 여러분이 게임을 하는데 현대적으로 요구하는 모니터의 프레임레이트(초당 뿌려주는 화면의 개수)는 60fps 일테고, 고사양 게임용 디스플레이라면 144fps 일 것이다. 144fps 라면 프레임이 전환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프레임당 6.94ms 이고, 빛이 서울과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왕복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0.133ms 이다. 대략 19프레임 정도가 지나간 셈이다. 물론 이것은 아주 이상적인, 서울과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지구 표면을 지나는 가장 가까운 선으로 연결하고 진공 상태의 빛의 속도로 정보가 전달되었을 때 걸리는 시간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서울과 부에노스 아이레스 사이에서 통신을 할 때는 설령 광섬유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 거리가 최단거리도 아닐 뿐 더러 여러 가지 중계기, 광섬유가 아닌 통신망 등을 거치며 발생하는 손실에 의해 이론상의 시간 안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이런 부분은 게임을 만드는데 중대한 장애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점점 컴퓨터의 속도가 발전하면서 이러한 시간을 줄이는 것이 더욱 중요해지는 경향도 나타난다. 게임을 정의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정보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정보의 흐름 관점에서 게임을 보면 이는 물리적인 입력이 가상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다시 플레이어의 감각으로 전달되는 순환 구조이다. 이렇게 적어놓으면 굉장히 단순해 보이지만 학교에서 배웠던 컴퓨터의 구성요소들을 생각해보자. * 컴퓨터의 3요소: 입력장치, 처리장치, 출력장치. 우리가 보통 디지털 기기에서 즐기는 형태의 게임이 돌아가는 기계는 거의 다 이런 형태다. 입력, 출력, 처리 장치가 분리되어있는 경우도 존재하고 게임기처럼 입력장치(게임패드), 처리장치(각종 프로세서, 등등), 출력장치(스피커, 스크린)가 합쳐져 있는 경우도 존재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기기들의 시간은 사람의 신경반응속도를 제외한다면 게임에 미치는 시간적인 영향은 대부분 CPU의 처리속도와 저장매체의 통신속도 정도다. 턴제 게임이라면 문제가 없다. CPU플레이어들의 수많은 행동들을 계산하는 것도 이용자들은 기꺼이 기다려주기도 한다. RTS라면 이러한 문제점에 대비하기 위해 게임 안에 등장하는 유닛의 숫자를 제한한다. 유닛 수가 너무 많아저셔 각 유닛에 대한 처리가 CPU에 부담을 주거나 화면에 많은 유닛이 등장하면서 GPU의 처리시간이 늘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게임 개발자가 겪는, 특히 줄일 수 있다면 가장 줄여야만 하는 시간이라는 장애물은 어떤 것일까. 대표적인 부분은 로딩과 랙이다. 물론 개발 작업에 사용해야 하는 시간부터 이용자가 게임에 참여해 놓고 화장실에 가는 시간까지 수많은 시간들이 게임에 영향을 끼치지만 프로그래머가 컨트롤해야 하는 시간들은 이 부분이고 최대한 없는 것처럼 숨겨야 게임의 경험이 부드러워지는 부분이 바로 로딩과 랙이다. 좀 더 과거로 돌아가보자. 우리가 흔히 저장 아이콘으로 기억하는 디스크만 하더라도 나왔을 무렵에는 기존에 사용하던 카세트 형식의 자기 테이프보다 데이터를 읽어오는 속도에서 굉장한 우월함을 보였다. 당시 게이머들은 30분~1시간씩 데이터 로딩을 기다려가면서 게임을 해왔는데 게이머는 사실상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고 프로그래머들은 그 느린 데이터를 가져오는 속도, 한정된 용량등을 최대한 활용하여 성능을 내도록 수많은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사용해왔다. 하지만 온라인게임이라면 이 문제는 좀더 복잡해진다. 여기에 인체 신경의 반응속도까지 고려한다면 더 복잡한 상황이 벌어진다. 만약 온라인 게임 서버 등이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나의 행동에 피드백할 수 있는 또다른 플레이어 B 가 존재한다면? 실제로 명확한 수치는 아니지만 플레이어 A 가 한 행동이 플레이어 B 에게 도달하는데까지 걸리는 시간들을 쭉 나열해보자. * 데이터의 흐름에 걸리는 시간들 플레이어 A가 모니터에서 상황을 인식하고 (13ms), 고민한다음 (100ms), 손으로 입력한후(200ms), 키보드로부터 컴퓨터가 입력을 받아(1ms), 공유기로 신호를 보내고 (0.5ms), 인터넷으로 신호를 전달해서 (30ms), 게임서버로 보내진후 (30ms), 서버에서 처리를 한 후 다시 인터넷으로 신호를 보내서 (30ms), 상대방의 공유기에 신호가 도달하고 (30ms), 공유기에서 PC로 (0.5ms), 게이밍PC에서 모니터로 (10ms), 사람의 눈이 모니터에서 신호를 확인할 때까지 걸리는 (13ms)까지. 판단과 반응속도에 걸린 시간 300ms를 제외하면 158ms 정도 시간이 걸린다. 이건 그냥 그럴수 있다는 것이고 사실 인터넷은 여러 레이어를 통해서 연결이 진행되기 때문에 실제 시간은 이것보다 훨씬 많이 걸릴 뿐더러 컴퓨터 사양, 네트워크 환경, 서버와의 거리, 사람의 컨디션 등으로 이 수치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다만 이 수치를 아무리 줄여도 결국 중간 단계가 늘어날수록 딜레이는 생겨날 수 밖에 없다. 이 과정을 정보의 흐름이라고 생각해보자. 만약 우리가 게임의 데이터 처리에 있어 사용자의 모든 입력을 반영해야 한다면, 그리고 이렇게 만든 한국의 게임을 아르헨티나의 한국 게임을 사랑하는 청년이 플레이한다면 어떤 과정을 겪게 될까? 게임 서버가 사용자의 입력에 반응할 때까지 0.13초 정도가 필요하다. 이는 144Hz환경으로 환산한다면 19프레임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는 빛의 속도로 통신한다는 가정 하에 이루어진 계산이고 실제 현실에서는 앞서 언급한 여러 이유로 대략 0.3초 정도의 지연이 발생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조차 사실은 가장 낙관적인 계산이기도 하다. 만약 정말 서버가 유저의 입력을 기다려서 처리를 해야 한다면 우리는 한번의 처리를 0.3초에 한 번씩밖에 할 수 없고, 이는 1초에 3번밖에 계산을 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게임이 정보의 흐름이라면 결국 이 흐름의 속도는 이용자가 게임을 하는데 느끼는 핵심적인 경험의 요소 중 하나가 된다. 턴제 게임이라면 어떻게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실시간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게임들이라면 이러한 데이터 지연 시간 문제는 플레이에 큰 장애를 만들 수 밖에 없다. 격투게임, RTS, MMORPG, 액션게임, 많은 게임들은 이러한 이유로 온라인상의 멀티플레이로 구현하기 힘들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게임 개발자들은 결국 이를 극복하고 온라인상에서 플레이어에게 지연이 느껴지지 않는 수준의 구현을 이루어냈다. 현대 게임 서버의 개발자들은 0.3초 지연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게임 서버를 개발한다. 이부분을 명시적으로 정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0.2초~0.5초에서 지연이 발생했을 때도 자연스럽게 게임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설계해야 한다는 부분은 경험을 통해서나 혹은 선배 개발자들의 조언을 통해 이어져 내려오기도 한다. 과거에 이런 네트워크 지연으로 발생하는 게임의 버그들은 모든 기계장치가 모여있는 작업환경에서는 잘 발생하지 않아서 출시 시점에서야 몸으로 겪는 경우들이 많이 발생했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지연 처리의 중요성이 개발과정에서 부각되며 언리얼 엔진의 데디케이티드 서버부터 iOS의 에뮬레이터까지 게임 실행 차원에서 네트워크 지연에 대해 처리할 수 있는 일종의 에뮬레이션을 제공하는 경우들도 등장했다. 정보전달 속도라는 물리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개발자들은 다양한 해결책을 고안하고 있다. 가장 쉬운 방법은, 그냥 기다리는 것이다. 네트워크에서 지연이 발생했다면 그냥 동기화가 될 때까지 플레이어를 기다리게 만드는 방법도 존재한다. 모두가 다 같이 게임의 정지상태를 기다려줄 수 있는 참을성만 존재하면 괜찮다. 옛날 편지로 바둑을 두시던 분들 정도의 참을성이라면, 그리고 그런 게임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실시간으로 움직여야 하는 게임들이라면 아무래도 이러한 기다림은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게임 개발자들은 어떤 사람들의 대답이 늦어져도 게임이 계속 돌아가게 만드는 방법들을 계속 적용하고 있다. 일반적인 방법은 예측이다. 게임 프로그램이 이용자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이다. 예측을 해낼 수 있다면 네트워크 딜레이가 1초가 있어도 괜찮다. 컴퓨터가 1초 후의 이용자의 움직임을 예측했다면 1초후에 보여줄 것을 미리 계산해서 보여주는 것으로 게임 안에서의 흐름은 완전하게 동작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컴퓨터는 완벽한 예언가가 아니다. MMORPG나 액션게임을 하다가 만약에 상대방의 컴퓨터가 이동속도보다 빠르게 이동하는 부분을 겪었다면 컴퓨터가 예언을 실패한 것이다. 컴퓨터는 상대방의 이동을 예측해서 재현했지만 실제 결과가 달라졌기 때문에 나중에 입력된 실제 행동에 맞춰 미리 재현했던 부분과의 차이를 억지로 맞추는 것이다. * 캐릭터의 동기화. 갑자기 이동시키거나 보간해서 미끄러듯이 맞추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전격투에서는 이런 시간의 문제가 특히 많이, 깊게 발생한다. 과거의 격투게임의 대전은 오락실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지거나, 혹은 같은 기기에서 두 개의 게임패드가 붙어 이루어졌다. 네트워크 레이턴시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환경이었지만 격투게임의 이용자들은 자신의 입력을 가장 빠르게 게임에 입력하기 위해서 자신의 반사신경과 사고를 다듬는 것은 물론, 프레임 레벨에서 이루어지는 게임의 메커니즘을 파고들기도 했다. 이는 실제 게임의 입력 프레임과 처리 프레임, 그것이 모니터에 출력되는 프레임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한데, 1프레임 단위로 기술의 승패가 결정되는 대전 격투게임의 세계에서는 이런 상황까지 분석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하지만 오락실이란 공간이 시대의 변화에 못 버티고 점차 사라지는 환경에서 많은 대전격투게임들의 대전이 네트워크라는 가상의 공간으로 올라오면서 네트워크 레이턴시는 격투 게임 개발자들에게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왔다. 초기에는 네트워크 레이턴시 대응에 익숙하지 않아 나쁜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현대 대전 격투게임에 이르면 네트워크 대전 지원이 필수 요소로 인식되면서 기술과 꼼수 두 측면에서 모두 괄목할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격투게임에서 주로 이용되는 부분은 롤백이다. 흔히 롤백 넷코드라고 불리는 이러한 기능은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움직임을 컴퓨터가 미리 예측해서 해당 부분을 미리 보여줌으로써 게임이 실시간으로 빠르게 전달되고 있다는 “느낌”을 이용자에게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입력을 예측하는데 실패했다면 컴퓨터는 어떻게 이를 처리할까. 몇프레임 뒤로 게임을 롤백해버린다. 이런 대응을 위해 애니메이션 단위에서 몇 프레임이 뒤로 돌아가도 어색하지 않도록 아트 단위에서 작업하는 게임들도 존재하며, 어떤 게임들은 기술 발동의 애니메이션 시간에 조금 여유를 둬서 네트워크를 동기화할 시간을 벌기도 한다. 입력이 들어가자마자 발동되는 잡기 기술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MMORPG도 비슷하다. 게임들의 캐스팅(주문시전) 시간에는 서버와의 통신 시간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기능들이 일정부분 들어있다. 플레이어와 서버, 혹은 다른 플레이어 사이에서 주문의 결과를 동시에 나타나고 처리하기 위해서는 동기화 문제가 중요해지며, 이는 네트워크 레이턴시를 어떻게 숨길 것인가와 직접적으로 연관되기 때문이다. 많은 MMORPG가 논타겟팅이 아닌 타겟팅인 부분도 같은 이유에서다. 논타겟팅으로 진행을 한다면 타겟이 위치한 좌표가 서버와 플레이어의 컴퓨터 사이가 같은 시간 동일하게 나타나야 하는 동기화 문제가 중요해지며 이 이유는 플레이어가 실제로 자신의 공격 범위 안에 들어왔다고 생각하고 기술을 시전했을 때 기술의 성공 유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네트워크 지연을 숨기기 위해 게임의 디자인 측면에서 약점을 숨겨버리는 경우도 존재한다. 특히 즉시 기술이 발동하는 부분은 한번에 보내는 데이터의 양부터 속도까지 여러 가지 영향을 받는 요소이기 때문에 MMORPG에서는 한번에 많은 스킬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스킬을 사용했을 때 쿨타임 후에 동작하는 부분부터 타겟팅 문제, 플레이어 캐릭터의 상호 충돌 판정 제거와 같은 부분은 게임 서버의 개발 난이도를 낮추는 요소들이다. 물론 과감하게 여러 트릭과 기술력으로 문제점을 정면돌파하는 경우들도 존재한다. 만 명이 넘어가는 공통 월드의 MMORPG, 100명이 한 레벨에서 경쟁하는 FPS나, 4안 멀티가 가능한 벨트스크롤 액션게임 등은 그 전까지는 네트워크 환경에서 힘들다는 평가를 받던 도전을 트릭과 기술력으로 돌파했다고 보아도 괜찮을 것이다. 한편, 숨길 수가 없는 네트워크 지연은 앞서 말했듯이 강력하게 숨겨버린다. 예를 들어 게임 캐릭터의 위치는 조금 달라도 이용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결제한 금액이 틀리는 건 문제의 차원이 다르며, 보안 문제 역시 존재한다. 이러한 영역에서의 시간 지연은 강렬한 연출로 가려버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대 캐릭터 수집 가챠 게임의 캐릭터 뽑기에서 초반에 기대감을 연출하는 화려한 애니메이션은 이용자의 소비를 유도하는 강렬한 후킹 요소이기도 하지만, 서버와의 통신시간을 감추는 트릭이기도 하다. 드물게 준비된 연출 시간보다 반응에 시간이 더 많이 소요될 경우 문이 열리거나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지 않고 계속 이펙트가 돌아가는 연출을 본 사람들도 존재할 것이다. 네트워크 레이턴시가 아니라 데이터가 오가는 레이턴시 역시 개발자들에게는 주요하게 뛰어넘어야 할 벽들이다. 오픈월드는 특히 이 문제가 도전적으로 다가오는 장르인데, 오픈월드 내의 이동속도에 걸리는 제한 등은 이러한 하드웨어 한계로부터 기인한다. 오픈월드에서 빠른 속도로 이동했을 때 게임 월드의 로딩이 늦어진다면 이미 플레이어가 목표지점에 도착한 후에 건물이 생겨나던가 NPC가 생겨나는 것을 보아야 하기 때문에 이것 또한 개발자들에게는 극복해야하는 요소들이다. 블리자드의 <월드오브 워크래프트>는 이러한 로딩에 대한 요소를 레벨 디자인적인 요소로 해결하였다. 스톰윈드나 오그리마, 언더월드, 썬더 블러프의 입구는 한번에 도시 내부가 다 보일 수 없도록 통로를 크랭크 형태로 디자인함으로써 플레이어가 도시 내부에 들어가는 동안 도시 내 환경 요소들의 로딩을 마무리하기 위한 트릭 중 하나다. * 스톰윈드 정면. 도시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구에서 직진하는 대신 좌우의 크랭크식 통로로 꺾어져 들어가야 하며 이 시간동안 컴퓨터는 도시를 로드한다. 출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클래식 사이트. 지연시간 문제를 아예 강력한 기계적인 성능으로 메꿔버리는 경우도 존재한다. 플레이스테이션 5부터 게임기에서는 SSD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게임 로딩의 주요한 병목이 되는 디스크로부터 데이터를 읽어오는 시간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다. 게임 개발자들이 다양한 프로그래밍, 디자인 기술을 통해 시간지연 문제에 대응해 온 것 이상으로, 게이머들 또한 로딩과 랙을 중요하게 다루며 대응하고 발전해 온 바 있다. 최적화된 게임 플레이를 원하는 이용자들은 최대한 로딩을 적게 보기 위한 방법을 하고 실험하고 도입하고 있다. 특히 격투게임의 경우는 레이턴시를 프레임 단위로 계산하며 게임을 진행하는 것이 고수들 사이에는 일반적이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처럼 다인 참여형 대규모 레이드가 주요 콘텐츠인 게임에서도 게이머들은 자신의 DPS를 높이기 위해 스킬과 스킬 사이의 입력에 시간적인 손실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게임 서버와 클라이언트 사이의 시간에 대해서 끊임없이 연구한다. 개발자 입장에서 가장 황당한 경우는 네트워크 레이턴시가 존재할 때만 발생하는 틈을 노리는 기술들을 네트워크 대전에서 사용하는 경우일 것이다. 정상적인 네트워크 레이턴시라면 기술이 막혀야 하는 상황에서 레이턴시로 인해 클라이언트에서 기술이 막히기 전에 한번 더 기술을 사용하는 이런 특수한 사례들을 이용자는 성공률이 낮다고 하며 사용하지만, 개발자 입장에서는 네트워크 레이턴시, 즉 랙이 존재해야만 들어가는 기술을 사용하는 사례를 보며 네트워크 레이턴시조차 개발자들의 의도를 벗어나 사용하는 이용자들의 행동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게임 개발자에게 지연시간은 넘어서야 할 장애물이지만 게이머들에게는 이조차 자신이 이용할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개발자들은 이 장애물을 없애거나 줄이기 위해 싸우고, 이용자는 현실적인 랙에 적응하고 이용해가면서 디지털게임은 계속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개발자, 연구자) 오영욱 게임애호가, 게임프로그래머, 게임역사 연구가. 한국게임에 관심이 가지다가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것에 취미를 붙이고 2006년부터 꾸준히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고 있다. 〈한국게임의 역사〉, 〈81년생 마리오〉등의 책에 공저로 참여했으며, 〈던전 앤 파이터〉, 〈아크로폴리스〉, 〈포니타운〉, 〈타임라인던전〉 등의 게임에 개발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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