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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세미나] 디지털게임에 나타나는 알레아의 세 층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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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4. 4. 10.

1. 들어가며


어린 시절 자주 했던 놀이들을 생각해 보면 그 결과가 상당 부분 운에 좌우되지 않았나 싶다. 가위바위보에서 손을 내고 희비를 오가게 되는 순간이나 공기놀이하다가 손을 삐끗하는 찰나 등, 노력만으로는 이기기 어려운 때가 간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놀이들은 결과를 종잡을 수 없는 만큼 더 몰입하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때때로 단순한 놀이의 형태를 넘어, 내기나 겨루기와 같은, 다소 복합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놀이에 대한 속성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이들이 있는데, 바로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와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다. 이 중 하위징아는 오늘날 놀이와 유희를 논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이로 인식되며, 카이와는 하위징아의 놀이 개념을 보다 유형화해 계승한 인물로 언급된다. 이번 논문 세미나는 후자의 인물, 카이와가 명명한 개념에서 출발한다.


카이와의 놀이는 대체로 아곤(Agon), 알레아(Alea), 미미크리(Mimicry), 일링크스(Ilinx)로 분류된다. 이 네 가지 항목은 각각 경쟁, 우연(운), 모방, 현기증이라는 속성을 지닌다. 경쟁의 아곤은 축구나 권투 등 승부를 겨룰 수 있는 놀이를 말한다. 알레아는 사다리 게임, 제비뽑기로 설명할 수 있고 미미크리는 역할극을, 일링크스는 코끼리 코를 하고 빙글빙글 돈 뒤 느껴지는 혼란스러움이나 흥분감으로 예를 들 수 있겠다. 이 네 가지 외에도 루두스(Ludus)와 파이디아(Paidia)라는 개념이 있지만,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바로 운, 우연을 뜻하는 ‘알레아’다.


연구자인 임해량, 이동은은 알레아를 주술적 알레아, 시스템적 알레아, 영웅적 알레아 세 층위로 나누고, 그를 <하스스톤>의 일부 상황과 연결해 바라본다. 연구자들은 놀이가 가지는 우연성이 사행성 담론에 매몰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이것이 가지는 긍정적인 측면을 발굴해 내고자 한다. 즉 이 연구는 알레아를 새로이 탐색하려는 시도이다.


     

2. 카이와와 알레아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놀이는 다소 복합적인 형태를 보이는데, 그것이 우연성과 연결되었을 때 도박이나 사행성 관련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이 도출된다. 게임에서 마주하게 되는 우연성은 곧장 도박과 통하게 되는가? 어느 정도 우연성을 의지하게 되는 게임은 사행성에 연관될 수밖에 없는가? 그렇다면 알레아라는 개념은 결국 룰렛 머신 부류의 게임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가? 이에 연구자들은 알레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알레아는 규칙을 통해 승패를 겨루지만 놀이하는 자가 그 과정에 자신의 의지를 행사할 수 없는 놀이를 일컫는다. 알레아의 승패는 오로지 우연을 통해 갈리는 것이 특징이며 그 즐거움의 본질이란 우연이 선사하는 절대적 평등을 통해 서로의 운명을 겨루는 데 있다.”(66쪽)

     

‘우연이 선사하는 절대적 평등’이란 특권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겨루기로 했을 때, 그 승부에서 발생한 운만으로도 특권을 가지지 못한 자가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한 마디로 “우연이 선사하는 위험과 기회는 공정하게 분배”(66쪽)된다. 이것이 연구자들이 강조하는 알레아의 실질적인 속성이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알레아 논의는 카이와를 의존해 왔기에 상당히 저평가되어 온 감이 있다. 카이와에 의하면 알레아는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어렵고, 그로 인해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창조적인 역할로 거듭나기 힘들다. 특히 카이와는 알레아와 아곤을 모순적이면서도 결속적이라고 했는데, 그러면서도 알레아가 아곤보다는 보조적이라고 보았다(Caillois, 1967/2018). 이런 카이와의 주장은 사람에 따라 운의 힘이 달라지는, 어떠한 모순에 주목하면서 나타난다. 자수성가한 이에게는 큰 축복처럼 여겨지는 운이 날 때부터 권력자였던 사람에게는 부인 받게 되는 게 그 예다. 한 마디로 카이와는 운과 우연이 노력을 배제시키는 경향이 있고,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을 환상에 빠트린다고 본 것이다.

     


3. 알레아-우연이 가지는 의미


연구자들은 카이와의 의견에서 한층 더 나아가고자 한다. 이들은 카이와가 우연의 비창조적인 부분에만 주목했으며, 우연을 다층적으로 보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이를테면 우연은 고대 철학에서 부정적인 개념으로 인식되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긍정적인 의미로 변화하였다. ‘운명’과 ‘천운’을 비롯해, ‘천체’, ‘정의’, ‘징벌’, ‘미신’, ‘요행’, ‘행운’, ‘불행’, ‘행복’, ‘신’, ‘섭리’, ‘계시’, ‘기회’, ‘미래’, ‘가능’, ‘희망’, ‘기대’, ‘역설’, ‘반전’, ‘돌발’, ‘돌출’, ‘변수’ 등 역사의 흐름에 따라 다양화된 것이다(최성철, 2016).


가령 ‘운명’ 속 우연은 본래 신의 의지를 설명하기 위한 요소였다. 따라서 인간은 신을 의심할 수 없고 그저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즉 우연과 함께하는 ‘운명’은 신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며 인간을 신에게 속박하는 요소였다. 그러나 우연은 근대에 들어서면서 해방을 불러오는 ‘자유’의 의미도 띠게 되었다. 한 마디로 진리(운명)를 거스르는 상징에서 언젠가 자유를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긍정적인 가능성으로 자리 잡았다는 이야기다. 그 결과 우연은 ‘운명’과 ‘자유’라는, 다소 상반된 두 개념에 깃들게 되었다.


그렇다면 카이와가 이야기한 알레아는 운명과 자유 중 어떤 부분에 더 가까웠을까? 연구자들은 두 개념 모두 그렇다고 설명한다. 카이와가 서술한 우연이 부정적인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는 데에서 ‘운명’이 나타나지만, 결국 알레아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점에서 ‘자유’도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물론 투쟁과 경쟁을 의미하는 아곤이 ‘자유’라는 개념에 훨씬 근접할 수 있겠으나, 연구자들은 알레아를 아곤으로부터 독립시키고자 하였다. ‘운명’을 곧 ‘통제’로 단정해 온 이제까지의 알레아 논의를 ‘자유’가 공존하는 개념으로 확장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알레아를 세 층위로 나누면서 드러난다.

     


4. 알레아의 세 층위와 <하스스톤>


1) 주술적 알레아


연구자들은 알레아의 세 층위를 주술적 알레아, 시스템적 알레아, 영웅적 알레아로 이름 붙였다. 그리고 이 세 층위를 <하스스톤>에서 마주할 수 있는 상황들로 설명한다. 여기서 첫째로 주술적 알레아란 ‘주술’이라는 단어에서 추측할 수 있듯, 어떠한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존버(존나 버티기)’라는 말을 간단한 예시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주술적 알레아는 신에 대한 의구심을 죄악시했던 중세 기독교 인식(최성철, 2016)을 계승해, 승리를 위한 노력이나 적극성을 생략시킨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면에서 주술적 알레아의 핵심을 맹신과 더불어 “어떠한 개연성과 상관없이 누구든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비이성적 즐거움”(70쪽)이라고 정리한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주술적 알레아의 힘이 현대에 들어서면서 약해졌다고 언급한다. 과학을 기반으로 한 이성적 가치관은 현대인들을 변화시켰고, 이들이 맹목적인 믿음을 갖고 놀이하는 일도 적어지게 된 것이 이유다. 이에 연구자들은 순수한 의미의 주술적 알레아는 사라졌지만, 알레아 그 자체에 잠재된 주술성이 플레이어에 따라 발현될 가능성은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스스톤>은 주술적 알레아를 발현시킬 가능성이 있는 게임이다. 연구자들은 ‘무작위 효과 카드’를 사례로 드는데, 이 카드들은 범용성이 낮고 불안정하다는 단점을 안고 있다. 다만 이 중 일부는 역전의 열쇠로써 사용된다. 여기서 연구자들이 지목한 카드는 ‘난투’다. 난투 카드는 ‘무작위 하수인 하나를 제외한 모든 하수인을 처치’하는 효과가 있어서 승기를 다시 잡기 위해 애용되곤 한다. 연구자들이 주술적 알레아와 난투 카드를 함께 이야기한 것도 그 때문이다. 난투 카드를 통해 승리할 수 있길 바라는 상황이 종종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듯 주술적 알레아는 역전을 바라는 이들로부터 재현된다.


     

2) 시스템적 알레아


자본주의 체제가 성장하게 된 17세기는 화폐 사용이 활발해지고 개인과 사회 모두가 격변했던 때다. 투기, 도박 등이 대중적 공간에 나타나기도 한 이 시기는 알레아의 상업화도 함께 이루어졌다(Reith, 2006). 이후 19세기에 활성화된 카지노는 알레아의 변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카지노에 설계된 교묘한 시스템이 사업자들에게는 막대한 이득을 안겨주고, 그 안의 플레이어들에게는 자신이 ‘놀이’를 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곳의 알레아는 믿음이라는 것이 침투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시스템화 되어있다. 이런 시스템적 알레아는 ‘우연이 선사하는 절대적 평등’이 아닌, 플레이어와 사업주 간의 수직적 관계를 상징한다.


현대 디지털 게임에서 나타나는 시스템적 알레아의 대표적인 예로는 랜덤박스가 있다. <하스스톤>은 카드 팩이 곧 랜덤박스다. 연구자들은 이 랜덤 카드 팩이 카지노의 수익 창출과 유사한 모습을 띤다고 분석한다. 철저히 수익 창출을 목적으로 하기에 좋은 아이템이 나올 확률은 낮고, 플레이어에게는 ‘놀이’라는 환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랜덤 카드 팩은 개선된 성능의 아이템이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돼서, 승률이 중요한 플레이어는 특히나 끊어내기 어렵다.


언급한 것처럼 랜덤박스는 여타 게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시스템적 알레아가 속속들이 침투해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알레아가 사행성과 도박만을 뜻한다는 오해로도 이어진다.


     

3) 영웅적 알레아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투쟁하는 영웅적 알레아는 고대 시절부터 ‘내기’의 형태로 명맥을 이어왔다. 내기는 특히 17~19세기의 기득권 사회에서 잘 이용됐는데, 이는 내기가 가치를 부여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던 탓이 크다. 내기(betting)가 가치 부여의 수단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도박(gambling)과 달리 뛰어난 판단과 노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이것을 19세기에 발표된 쥘 베른의 소설, <80일 간의 세계일주>를 통해 설명한다. 해당 소설 속에서 전개되는 내기는 선택(guessing)과 증명(proving)이라는 단계를 거친다. 이 선택과 증명은 극복해 내기만 하면 세상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절차로 기능한다. 이걸로 짐작할 수 있는 영웅적 알레아의 핵심은 ‘자유의지를 기반 삼아, 운명에 저항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가?’다.


<하스스톤>에서 영웅적 알레아가 잘 드러나는 건 모험모드다. 이 모드는 한 번 죽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로그라이크 형식을 띠는데, 플레이어가 각각의 난이도와 도전 방식을 ‘선택’하고 이를 클리어함으로써 가치를 ‘증명’해 낼 수 있다. 이런 영웅적 알레아는 단순히 승리하거나 클리어하는 걸 넘어, 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다양한 가치에 중심을 둔다.


     

5. 나가며


물그릇에 기도하는 심정으로 게임을 하고, 랜덤박스에 지른 큰 금액을 재밌었으니 됐다며 합리화하고, 어려운 게임을 클리어하면서 스스로의 가치가 향상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아마 대부분의 게이머라면 이런 경험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 그래서 주술적 알레아, 시스템적 알레아, 영웅적 알레아에 대한 내용은 개념적으로 접근하지 않아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다만 현대 디지털 게임에 알레아가 형성될 자유도가 존재하는지 고민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몰입해 있을 때는 잊게 되는 사실이지만, 사실 게임은 정해진 설정을 기반으로 동작한다. 이는 시스템적 알레아에서 언급된 카지노의 체계와 동일하다. 반면 주술적 알레아와 영웅적 알레아는 본래 무엇 하나 정해진 것이 없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에 운을 걸면서 나타난 개념이다.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떠오른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게임 공간 안에서, 주술적 알레아와 영웅적 알레아는 결국 시스템적 알레아에 귀속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다시 말해 게임에는 제작자들의 계산과 기술이 개입되어 있는데, 두 알레아의 가치를 순수하게 누릴 수 있느냐는 소리다. 물론 연구자들도 두 알레아를 한정된 사례에만 적용하긴 했으나, 그래도 게임이 애초 만들어진 세계, 자본에 의해 통제되는 세계라는 점에서 맹점이 드러난다. 이를테면 오락실 기기에 코인을 추가하는 행위나 모바일 게임에서 이루어지는 캐릭터 육성 등에도 시스템적 알레아의 흔적은 남는다.


그러면 게임 안의 알레아들은 시스템적 알레아에 귀속되는 방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걸까? 본문에 서술되지는 않았지만, 연구자들은 관람적 알레아라는 개념을 결론부에 언급한다. 관람적 알레아는 게임 스트리밍이나 e스포츠 방송을 관람할 때 발현된다. 이 알레아는 타인을 매개로 하기에 상당히 간접적이다. 즉 게임을 즐기면서도 시스템적 알레아에 귀속될 확률이 낮다. 이러한 측면에서 관람적 알레아를 주목할 필요성을 함께 제시하고 싶다.


연구자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처럼 우연성에 관한 논의는 상당히 좁은 의미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게임이라는 매체와 알레아에 대해 더 많은 토론이 오가면 사행성이나 도박 담론에 치우치지 않는, 순수한 ‘우연놀이’ 또한 논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참고문헌


Caillois, R. (1967). Les jeux et les hommes. 이상률 (역) (2018). <놀이와 인간>. 서울: 문예출판사.
Reith, G. (2005). The Age of Chane: Gambling in Western Culture. New York: Routledge
최성철 (2016). <역사와 우연>. 서울: 도서출판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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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문화연구자)

융합예술과 문화연구를 공부했습니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관해 관심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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