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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문세미나] ‘We Will Take Your Heart’: Japanese Cultural Identity in Persona V

    본 논문은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의 게임, 젠더 연구자인 로렌스 허프스(Laurence Herfs)가 일본 학술지 ‘Replaying Japan’에 2021년에 투고한 논문이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외부자의 시선(특히 서양)에서 일본 게임을 일본 학술지에서 다룬다는 점에서 흥미로웠기에 소개해보고자 한다. < Back [논문세미나] ‘We Will Take Your Heart’: Japanese Cultural Identity in Persona V 18 GG Vol. 24. 6. 10. ‘We Will Take Your Heart’: Japanese Cultural Identity in Persona V 본 논문은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의 게임, 젠더 연구자인 로렌스 허프스(Laurence Herfs)가 일본 학술지 ‘Replaying Japan’에 2021년에 투고한 논문이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외부자의 시선(특히 서양)에서 일본 게임을 일본 학술지에서 다룬다는 점에서 흥미로웠기에 소개해보고자 한다. 본 논문은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의 정치 부패, 사회문화적 문제와 불안으로 시작하여 국가 브랜딩으로 이어지는 문화적 정체성을 <페르소나 5>(이하 페르소나 5)를 통해 살펴본다. <페르소나> 시리즈는 <진여신전생> 시리즈의 외전에 해당하는 작품이었지만, 사회문화, 철학, 심리학적 소재를 테마로 청소년이자 학생인 캐릭터를 내세워, 이들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구조로 인기를 얻어 시리즈가 된 JRPG 작품이다. 이러한 특징처럼 페르소나 5 또한 도쿄를 배경으로 자경단이자 학생인 주인공 일행이 일본 내 사회문화적 불안과 부패를 상징하는 적들을 물리치고 국가를 개혁하는 상당히 무거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가볍고, 스타일리쉬하고, 위트있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본격적으로 현실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은 이 논문이 나올 수 있던 중요한 배경이기도 하다. * 페르소나5, 출처 – 플레이스테이션 스토어 일본의 부패를 탐험하며 페르소나 5는 주인공(플레이어)이 유력 정치인의 여성 폭행을 막았다는 이유로 보호 관찰을 받은 후 도쿄로 전학 가게 되며 시작된다. 이후 플레이어는 ‘죄수(しゅうじん; 囚人)’와 동음이의어인 ‘슈진(しゅうじん; 秀尽)’ 학원 고교에 전학을 가게 되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슈진 학원 고교는 마치 어두운 현실을 학교라는 작은 사회로 압축하고 있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학생들을 언어, 신체적으로 학대하는 도덕적으로 부패한 교사(어른)인 ‘카모시다 스구루’를 마주한다. 페르소나5는 이전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특정 개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이형의 인지 공간(팰리스)을 통해 현실 세계를 표현한다. 이러한 장치들을 통해 작중 튜토리얼 파트인 도입부에서 플레이어는 부패한 현실 속 두 명의 희생자인 ‘사카모토 류지’(학생 체벌)와 ‘타카마키 안’(성폭행과 자살)과 팀을 이루어 카모시다의 팰리스로 들어가 반항 정신의 인지적 표현인 ‘페르소나’와 계약을 맺고 카모시다와 싸우게 된다. 이러한 도입부처럼 게임 스토리는 부패 인물을 제시하고, 게임은 일본 사회 속 다양한 형태의 부패, 학대, 불의 등을 팰리스로 표현하고 이곳을 탐험하고 문제가 되는 부패 인물을 타도하는 구조로 진행된다. 또한 플레이어는 학교가 위치한 도쿄 도심을 탐험하면서 사람들의 생각과 대화를 엿볼 수 있는데, 여기서도 사회에 대한 불안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저자가 주목한 페르소나 5 속 비판점은 ‘자본주의의 과잉’이다. 부패 인물들은 더 많은 부, 명예, 권력을 얻기 위해 집착한다. 페르소나 5는 사회적 긴장과 불안에 대한 이미지를 부패 인물에 위치시킴으로써 다루고 있다. 페르소나5는 이를 해소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극복의 서사를 제공한다. 이처럼 페르소나 5는 일본 수도 도쿄의 사회적 불안과 부패한 인물상을 이미지와 서사로 제시하며, 이를 극복하여 일종의 해방감을 제공한다. 순응하는 침묵 문화 속 일본 청년 문제 페르소나 5는 일본 사회의 관습적 규범인 ‘일본다움’에 대한 메시지나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일본다움’은 집단적이고, 조화를 추구하며, 위계적 관계를 통해 ‘높은 의식 사회’로 묘사된다. 달리 말하면, ‘올바른 것’으로 규정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압박은 게임 곳곳에 존재한다. 그러나 게임은 순응, 위계질서와 같은 ‘일본다움’이 실제로 부패와 고통으로 이어질 뿐이라고 주장한다. 즉, 개인주의와 반항을 상징하는 ‘마음의 괴도단’은 일본식 순응주의와 이 사고방식의 정반대를 상징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페르소나 5의 중요한 시스템은 플레이어가 게임 속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그들의 어려움을 도와야 하는 ‘코옵(Co-op)’이다. 모든 코옵은 어떤 식으로든 착취, 괴롭힘, 무시당하는 것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모든 이야기에서 일본인은 자신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자 고군분투하고, 순응하는 침묵 속에서 고통받으며, 타인이 자신을 이용하도록 허락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여기서 침묵을 깨기 위한 은유적 장치가 ‘페르소나’이다. 새로운 멤버가 ‘마음의 괴도단’에 합류할 때마다 반항 정신의 인지적 표현인 ‘페르소나’와 계약을 맺고 깨어난다. 가면을 뜯는 ‘페르소나’ 등장 연출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자아의 정체화를 반영하기도 한다(Lopez & Marquez, 2023). 그러나 저자는 이것이 일본의 순응적인 페르소나 구조인 ‘혼네(本音; 속마음)-타테마에(建前; 겉마음)’의 분열적 알레고리로 보았다. 즉, 페르소나 5는 ‘혼네’를 받아들여야 억압 구조 안에서 진정한 자아실현이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페르소나 5는 청년들이 어른들의 순응 압박과 그에 따른 ‘타테마에’에 고통받는 것으로 묘사하지만, 진정한 병리는 청년들의 부담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중 등장하는 정치인 ‘요시다 토라노스케’는 불안정한 일본 청년들에 대해 “우리 사회가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많은 청년이 조용히 고통받고 있습니다. 일자리, 안전, 저축이 부족합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2010년대 초 일본 언론이 제시한 ‘청년 문제(若者問題)’라는 개념에서 비롯된 일본 청년층의 ‘도덕적 공황’을 둘러싼 대중 담론을 의미한다. 페르소나 5에서는 이런 문화적 불안을 서사로 풀어내고 있다. 예를 들어, 주인공 일행인 ‘사쿠라 후타바’는 후술할 ‘시도 마사요시’에 의한 어머니의 죽음 이후,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된 오타쿠이자 히키코모리이다. 그러나 후타바는 어머니의 복수를 하는 코옵과 ‘마음의 괴도단’과의 유머러스한 인터랙션과 에피소드를 통해 구원받고 점차 다시금 사회에 적응해 간다. 페르소나 5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일본 청년 문제를 둘러싼 문화적 불안을 풀어나간다. * 사쿠라 후타바 연출, 출처 – https://bbs.ruliweb.com/game/1074/read/9408327 ? 페르소나 5는 ‘순응하는 일본인 스테레오타입’을 극한까지 드러냄으로써 문화적 불안을 비판한다. 이는 스토리 막바지에 이르면서, 일본인들의 순응과 침묵을 통해 국민이 다시는 스스로 생각할 필요가 없도록 집단적 전체주의를 주장하는 흑막 정치인 ‘시도 마사요시’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이처럼 게임에서 나타나는 ‘일본다움’의 담론적 이미지는 문화적 스테레오타입을 따른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본 사회를 묘사하는 이 게임은 미디어 속 일본의 스테레오타입과 일치시키며 동시에 비판한다. 이러한 점에서 ‘마음의 괴도단’은 청년 문제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개성과 ‘혼네’인 페르소나를 통해 ‘타테마에’를 거부하는 성취자로 그려진다. 쿨 재팬 브랜딩으로서의 페르소나 5 페르소나 5의 중요한 배경 중 하나는 제작 초기 시기인 2011~2014년 사이의 미디어 열풍 속 동일본 대지진과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재등장을 다룬다는 점이다. 이는 흑막인 ‘시도 마사요시’로 그려진다. ‘마음의 괴도단’이 초기에 만난 부패 인물 중 상당수 또한 현 체제를 전복하려는 시도의 정치적 의도와 관련되어 있다. 그는 이 과정에서 국가 개혁에 몰두하며 민족주의를 표출한다. 이는 실제 일본 최대 극우 단체인 일본회의가 주장하는 민족주의와 유사하다. 페르소나 5는 시도를 일본 정치의 랜드마크인 국회의사당과 같은 형태의 팰리스로 표현하여 일본 정치의 상징으로 묘사한다. 나아가 시도의 팰리스는 붉은 바다 속 침수된 도쿄를 항해하는 호화 크루즈를 배경으로 한다. 이러한 이미지는 동일본 대지진에 의한 쓰나미를 은유한다. 이처럼 페르소나 5는 두 가지 재해를 혼합하여, ‘시도 마사요시’를 당시 동일본 대지진 시기의 아베 신조의 정치적 이미지와 수사를 강조한다. * 시도 마시요시의 팰리스, 출처 – https://macco-poke.hateblo.jp/entry/persona5R/7_1에서 수정·사용 그러나 저자는 페르소나 5가 반드시 일본 정치의 비판만을 내포하진 않는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일본의 기업 상품 측면에서 동일본 대지진 이후 정부의 국가 재건을 위한 ‘소프트 파워’로서의 ‘쿨 재팬’ 정치 의도로 보았다. 일본은 ‘쿨’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생산하고 강화하기 위해 애니메이션이나 게임과 같은 미디어 문화 산업에 의존해왔다(Tamaki, 2019). 이 맥락에서 페르소나 5는 일본과 ‘일본다움’ 브랜딩에 기여한다. 플레이어는 페르소나 5를 플레이함에 따라 일종의 가상 여행을 하며, 도쿄를 체험하게 된다. 이를 통해 플레이어는 ‘일본다움’의 물질적 형태에 익숙해진다. 즉, 페르소나 5의 정치, 권력 구조에 대한 비판, 권위에 대한 반항적 태도, 사회적 개혁에 대한 요구는 단순한 사회 비판이 아닌, 그 자체로 쿨 재팬 상품이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페르소나 5에서는 국가 브랜딩이 추구하는 것처럼 이미지에 맞지 않는 불편한 요소는 배제되었다. 일본 내 인종, 젠더, 퀴어 문제이다. 특히 밀러(Miller, 2011a)가 쿨 재팬이 추구하는 이미지가 소프트 포르노그라피적 표상에 의존한다고 지적했듯이, 게임 내에서 성적 대상화한 것을 비판하면서도 게임 내 불필요한 성적 대상화가 계속해서 존재했다. 안의 괴도복이나 관련된 서사는 불필요한 성적 대상화의 대표적 사례다. 이러한 측면은 쿨 재팬 이데올로기의 상품화된 여성성을 보여준다. 쿨 재팬의 재현은 여성을 가부장적 통제와 욕망의 대상으로 환원시킨다(Miller, 2011b). 즉, 여전히 페르소나 5는 여성들이 자신을 억압하는 사람들에게 반항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는 동시에, 여전히 일본의 가부장적이고 성적인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 타카마키 안 괴도복, 출처 – https://asia.sega.com/persona-remaster/p5r/kr/ 마지막으로 페르소나 5는 쿨 재팬의 비서양적(non-Western)이면서도 비아시아적(un-Asian)인 독특한 이중 정체성을 반영한다. 게임은 일본 사회를 배경으로 하지만, ‘마음의 괴도단’의 페르소나는 유럽 문학 속 영웅 또는 무법자에 기반한다. 서구 영웅의 반항적 개인주의라는 서양적 가치는 일본이라는 비서구적 세계에 통합된다. 이처럼 페르소나 5가 제시하는 일본이라는 브랜드는 서양적 가치와 일치하는 아시아지만 아시아가 아닌 역설적이고 독특한 존재이다. 결국 이 게임은 극우주의에 반대하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일본에 대한 신화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려는 쿨 재팬에 공모하고 있다. 결론을 대신하여 저자는 결론적으로 페르소나 5가 예술로서 사회적 비판과 기업의 이익 사이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즉, 페르소나 5는 정치적 부패, 사회적 불안 등을 문화적 표현으로 제시하면서도, ‘쿨 재팬’ 국가 브랜딩의 원천이 된 문화적 인공물이기도 하다. 페르소나 5가 찬사를 받은 이유 중 하나는 이전 시리즈들보다 직설적으로 일본 사회의 현실을 비추고, 비판하는 상징과 스토리, 은유에 있다. 물론 게임 내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문제(청년 문제, 정치 부패 등)가 단순히 일본에 국한된 것이 아니기에, 많은 타국 게이머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페르소나 5는 이 문제들에 대해 진보적이고, 성찰적인 스탠스를 보여준다. 그러나 본 논문은 일본 밖 외부자의 시선에서 더 깊은 곳을 조명하고 있다. 이 게임이 갖는 정치적 의미, 의도는 일본 외부, 즉, 타자에게 보이는 일본의 국가 정체성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게임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여전히 ‘혼네-타테마에’ 정체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페르소나 5는 여전히 ‘일본다움’을 내포한다. 다시금 타국 게이머들에게 일본의 보수적 가치를 강조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게임을 즐기는 데에 있어, 이러한 측면을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모든 게임이 이러한 가치를 띠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 논문이 주장하는 궁극적인 바는 아마 게임은 여전히 ‘국경’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는 미디어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참고문헌 Herfs, L. (2021). “‘We Will Take Your Heart’: Japanese Cultural Identity in Persona V”. REPLAYING JAPAN, 3, 43-54. Lopez, A.A.L. & Marquez, L.P. (2023). Persona 5 Royal as Philosophy: Unmasking (Persona)l Identity and Reality. In: Kowalski, D.A., Lay, C., S. Engels, K. (eds) The Palgrave Handbook of Popular Culture as Philosophy. Palgrave Macmillan, Cham. Miller, L. (2011a). Cute Masquerade and the Pimping of Japan. International Journal of Japanese Sociology. 20. 18 – 29. Miller, L. (2011b). Taking girls seriously in ‘cool Japan’ ideology. Japan Studies Review. Florida: Florida International University, 15, 97-106. Tamaki, T. (2019). Repackaging national identity: Cool Japan and the resilience of Japanese identity narratives. Asian Journal of Political Science, 27(1), 108–126. Tags: 페르소나, 쿨재팬, 오리엔탈리즘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박수진 게임연구에 발을 들인 대학원생입니다. 지금은 일본 리츠메이칸대학 첨단종합학술연구과에서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최근엔 게임을 매개로 한 다양한 게임 경험과 일본 내 서브컬처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글 쓰는 건 여전히 어렵습니다.

  • 경계에 선 매체 : “콘솔 게임은 대중매체인가?”

    결국 콘솔 게임이 대중매체인가 하는 질문은 현재 시점에서 대답하자면, 그렇다, 아니다, 단정지어 말하기 어렵다. 이는 단순히 기술적 기능이나 시장 점유율의 문제가 아니라, 게임이 우리 사회에서 수행하는 복합적 역할과 사람들이 게임을 통해 연결되고 소통하는 방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 Back 경계에 선 매체 : “콘솔 게임은 대중매체인가?” 25 GG Vol. 25. 8. 10. 손 안의 세계에서 모두의 거실로 지난 GG 23호에서 나는 지하철에서 스팀덱을 꺼내는 것을 주저했던 경험 을 이야기했다. 640그램의 무게감과 함께 느꼈던 그 미묘한 시선들, 그리고 "저 사람 게임에 진심인가보다"라는 상상 속 목소리들. 그런데 최근 콘솔 게임을 둘러싼 여러 변화들을 관찰하면서, 그때의 경험이 단순히 개인적인 민감함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게임이라는 매체가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 그리고 그 위상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신호였던 것이다. 이런 의문은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과연 콘솔 게임을 대중매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중매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대중매체의 조건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많은 사람이 즐긴다고 해서 대중매체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대중매체는 몇 가지 핵심적 특징을 갖는다. 첫째는 광범위한 접근성이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는 공유 가능한 경험이다. 개인적 소비를 넘어서 사회적 담론과 공통의 문화적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셋째는 일상적 통합성이다. 특별한 경우에만 접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한다. 넷째는 문화적 영향력이다. 사회의 가치관, 담론, 정체성 형성에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기준으로 20세기 대중매체들을 살펴보면 명확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신문은 19세기 후반부터 대량 인쇄 기술과 배급 시스템의 발달로 광범위한 독자층을 확보했고, 공통의 뉴스와 담론을 제공하며 근대 사회의 공동체 형성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라디오는 1920년대부터 가정으로 침투하여 일상의 배경이 되었고, 동시성을 바탕으로 한 집단적 경험을 가능하게 했다. TV는 1950년대부터 시각적 요소를 추가하여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거실의 중심에 자리잡으며 가족 단위의 공유 경험을 만들어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들 매체가 모두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속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라디오나 TV가 귀하던 시절에는, 한 가족이나 이웃들이 한 공간에 모여서 함께 청취하고 시청했다. 책의 경우에도 개인적인 경험 매체로 보이지만, 잡지나 만화책 한 권을 여러 명이 돌려가며 읽는 방식으로 집단적 경험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런 집단적 경험의 공유가 이들 매체를 진정한 대중매체로 만드는 핵심 요소였다. 하지만 대중매체의 소비 패턴은 극적으로 변화했다. 매체를 접하게 되는 공간도 모두 상이하다. 누군가는 방 안에서, 대중교통에서, 점심시간에 짬을 내 회사에서 등, 사람들의 이동이 증가한 것처럼 매체도 사람과 함께 이동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스마트폰이 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선 스마트폰을 통해 접하게 되는 넷플릭스, 디즈니 플러스와 같은 OTT 콘텐츠 뿐만 아니라, 숏츠나 릴스와 같은 숏폼 콘텐츠도 "함께, 한 공간에서 보는" 것이 아님에도 "함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요소를 갖고, 전세계적인 콘텐츠가 되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시공간의 장벽 없이 매체와 콘텐츠에 대한 접근이 전세계 어디에서든 가능해지고 이를 통한 경험의 공유와 소통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이제 한국 드라마를 미국에서 실시간으로 시청할 수 있고, 일본의 게임을 유럽에서 동시에 플레이할 수 있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동일하거나 유사한 콘텐츠를 거의 같은 시점에 접하게 되면서, 그러한 경험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사회적으로 공유되고 통용되는 새로운 패턴이 형성된 것이다. 예를 들어,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이나 '케이팝 데몬 헌터스' 같은 콘텐츠는 전세계에서 동시에 화제가 되었고, 각국의 소셜미디어에서 동일한 장면과 대사들이 밈으로 확산되었다. 유튜브의 바이럴 영상이나 틱톡의 챌린지도 마찬가지다. 물리적으로는 각자의 공간에서 개별적으로 소비하지만,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해 전지구적 규모의 공유 경험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대 콘솔 게임의 위치를 ‘휴대성’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콘솔 게임의 휴대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휴대 가능한 미디어'의 역사적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항상 정보와 문화 콘텐츠를 이동하면서 소비하려 했고, 기술은 이런 욕구에 부응하여 발전해왔다. 하지만 게임기의 경우는 다른 미디어와 구별되는 독특한 발전 경로를 보여준다. 1970년대 초기 콘솔들은 완전히 고정된 기기였다. '마그나복스 오디세이'나 '아타리 2600'은 TV에 연결되어야만 작동했고, 거실이라는 특정 공간에 설치되는 것이 당연했다. 이는 당시 가전제품의 일반적 특성이기도 했다. TV, 라디오, 턴테이블 모두 무겁고 부피가 커서 한 번 설치하면 쉽게 옮기기 어려운 물건들이었다. 1980년대 후반 닌텐도 게임보이의 등장은 이런 패러다임에 균열을 가했다. 처음으로 게임이 거실을 벗어나 개인의 손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초기 휴대용 콘솔의 휴대성은 여전히 제한적이었다. 배터리 수명이 짧았고, 화면이 작고 흐릿했으며, 무엇보다 거실 콘솔과는 완전히 다른 게임들만 플레이할 수 있었다. 이는 '휴대용'과 '거실용'이 서로 다른 카테고리의 제품이라는 인식을 만들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런 구분은 점차 의미를 잃기 시작했다. 닌텐도 DS와 소니 PSP는 거실 콘솔에 근접한 성능과 복잡성을 휴대용 기기에서 구현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들은 '축소된' 경험을 제공하는 보조적 기기로 여겨졌다. 진정한 비디오 게임 경험은 거실의 대형 TV와 강력한 콘솔에서만 가능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2017년 닌텐도 스위치의 등장은 이런 이분법을 근본적으로 해체했다. 처음으로 거실 콘솔과 휴대용 콘솔이 하나의 기기에서 완전히 통합된 것이다. 같은 게임을 집에서는 대형 TV로, 밖에서는 휴대용으로 끊김 없이 플레이할 수 있게 되었다. 게임 경험이 더 이상 특정 장소에 종속되지 않게 된 것이다. 현대인은 하루종일 여러 공간을 이동하며, 각 공간에서 서로 다른 활동을 한다. 집에서는 휴식을, 대중교통에서는 개인적 시간을, 직장에서는 업무를, 카페에서는 사교적 만남을 갖는다. 하이브리드 콘솔은 이런 다양한 맥락에 자연스럽게 적응한다. 전통적으로 게임은 매우 개인적인 매체로 여겨져 왔다. 혼자서 즐기는 오락, 특정 계층이나 세대만의 취미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최근의 변화들을 살펴보면 이런 인식이 과연 여전히 유효한지 의문이 든다. 콘솔 게임도 개별적 경험과 사회적 공유를 결합하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실천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여전히 경제적 접근성이나 기술적 진입장벽 같은 한계들이 존재한다. 또한 게임에 대한 사회적 편견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콘솔 게임이 제공하는 새로운 형태의 상호작용성, 사회적 연결성, 문화적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런 복합적 상황에서 우리는 콘솔 게임의 매체적 지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콘솔 게임의 단순한 기술적 기능이나 시장 규모의 확장만을 살펴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콘솔 게임이 우리의 일상과 사회적 관계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경험을 종합적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현대 콘솔의 기술적 진화가 열어가는 새로운 문화적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동하는 경험(Mobility)과 투명해지는 도구(Readiness-to-hand) 망치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목수를 떠올려보자. 그에게 망치는 더 이상 '무거운 금속 덩어리'가 아니다. 손목의 미묘한 움직임이 망치 머리의 정확한 타격으로 이어지고, 못이 박히는 소리만으로도 작업의 성공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이때 망치는 목수의 의식에서 사라진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망치는 목수의 손과 팔의 자연스러운 연장이 되어 '투명'해진다. 20세기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런 현상을 '용재성'(Zuhandenheit, readiness-to-hand)이라고 불렀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도구와 맺는 관계에는 두 가지 모드가 있다. 하나는 '현전성'(Vorhandenheit, present-at-hand)으로, 도구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분석하는 상태다. 망치의 무게가 몇 그램인지, 손잡이의 재질이 무엇인지를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바로 '용재성'으로, 도구가 우리의 의도와 목적을 실현하는 투명한 매개체가 되는 상태다. 이때 우리는 도구를 통해 세계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하이데거의 ‘현전성’과 ‘용재성’ 개념을 게임에 접목한 흥미로운 논의가 있다. 게임을 처음 접하는 사람을 관찰해보면 이 두 모드의 차이를 명확히 볼 수 있다. 초보자는 컨트롤러의 각 버튼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의식적으로 기억하려 애쓴다. 이때 컨트롤러는 복잡하고 낯선 기계장치일 뿐이다. 하지만 수십 시간의 플레이를 거친 숙련된 게이머에게 컨트롤러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다. 그들은 버튼의 위치를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게임 속 캐릭터를 움직이고 싶다는 의도가 손가락의 움직임으로 즉시 번역되고, 그 결과가 화면에서 자연스럽게 구현된다. 컨트롤러는 '투명'해졌고, 플레이어의 신체는 게임 세계까지 확장되었다. 이 논의를 풀어서 설명하자면, 플레이어는 게임 속 적이 나타나면 즉시 공격 버튼을 누르고, 절벽이 나타나면 자연스럽게 점프한다. 이때 플레이어들은 "지금 X버튼을 눌러야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점프해야겠다"는 의도가 바로 손가락의 움직임으로 번역되고, 화면에서 캐릭터가 점프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컨트롤러는 완전히 '투명'해져서, 플레이어의 신체와 게임 세계 사이의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되는 것이다. 이런 용재성은 게임 컨트롤러와 마찬가지로, 콘솔 게임의 도구로써의 특성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하지만 현대 콘솔 게임의 진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도구적 관점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서 영국의 사회학자 존 어리(John Urry, 2007)의 모빌리티 이론이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어리는 현대 사회를 "어느 때든, 어느 장소에서든 네트워크화된" 모빌리티 사회로 규정했다. 그는 현대인의 정체성이 고정된 장소나 단일한 기술과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기술적 환경과의 복합적 상호작용을 통해 구성된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는 다섯 가지 서로 다른 형태의 모빌리티가 존재한다. 첫째는 사람의 신체적 이동, 둘째는 사물의 물리적 이동, 셋째는 상상적 여행(책이나 영화를 통한 정신적 이동), 넷째는 가상 여행(인터넷이나 전화를 통한 실시간 소통), 다섯째는 소통적 이동(사람 간의 메시지 교환)이다. 흥미롭게도 현대 콘솔 게임은 이 모든 형태의 모빌리티를 동시에 구현하고 있다. TV에 연결하던 전통적인 거실 기반 콘솔은 주로 세 번째 모빌리티, 즉 상상적 여행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플레이어는 소파에 앉아 게임 속 가상 세계로 '상상적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최근의 닌텐도 스위치와 같은 하이브리드 콘솔은 게임을 이용하는 공간의 제한을 완전히 뛰어넘는다. 사용자가 물리적으로 이동할 때 게임기도 함께 이동하며, 동시에 게임 진행 상황과 세이브 데이터라는 '디지털 객체'도 끊김 없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집에서 대형 TV로 즐기던 게임을 지하철에서 휴대 모드로 이어갈 수 있고, 다시 친구 집에 가서 그곳의 TV에 연결해 함께 플레이할 수 있다. 여기서 하이데거의 ‘용재성’과 어리의 ‘모빌리티’가 만난다. 콘솔이 진정으로 '투명한 도구'가 되려면 단순히 조작이 쉬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다양한 모빌리티 욕구에 자연스럽게 부응해야 한다. 현대인은 고정된 장소에서만 게임을 즐기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동 중에도,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도, 혼자 있을 때도 게임 경험이 끊김없이 이어지기를 원한다. 이런 욕구가 충족될 때 콘솔은 비로소 진정한 용재적 도구가 될 수 있다. 어리(2007)는 또한 현대 사회에서 "이동하는(mobile) 기계"와 "체류(inhabit)하는 기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분석했다. 이동하는 기계는 자동차, 기차처럼 물리적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들이고, 체류하는 기계는 전화, 인터넷처럼 한 장소에 머물면서도 다른 곳과 연결되게 해주는 기술들이다. 현대 콘솔은 이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갖는다. 휴대 모드에서는 '이동하는 기계'로 작동하고, 도킹 모드(독 모드)에서는 '체류하는 기계'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콘솔 게임의 이중적 특성은 용재성을 한층 더 정교하게 만든다. 과거에는 게임을 하기 위해 특정 장소(거실, 방)에 가야 했고, 특정 자세(소파에 앉기, 책상 앞에 앉기)를 취해야 했다. 이는 게임 경험에 공간적, 신체적 제약을 가했다. 하지만 현대 콘솔은 이런 제약을 제거한다. 어떤 장소에서든, 어떤 자세에서든 자연스럽게 게임을 즐길 수 있게 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투명성'을 실현한다. 또한 콘솔의 모빌리티는 우리가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도 바꾸고 있다. 전통적인 거실 콘솔에서는 게임을 위해 별도의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게임은 여가 시간의 활동이었고, 다른 일상적 활동들과는 분리된 영역에 속했다. 하지만 휴대 가능한 콘솔은 게임을 일상의 틈새 시간으로 침투시켰다. 버스를 기다리는 5분, 점심시간의 30분, 잠들기 전의 1시간이 모두 게임 시간이 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게임 플레이 시간이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게임 경험이 파편화되면서도 동시에 연속성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아침에 집에서 시작한 게임을 지하철에서 잠깐 이어가고, 점심시간에 다시 진행하며,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마무리하는 식으로 하나의 게임 경험이 하루종일에 걸쳐 분산되지만 통합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시간 경험의 변화는 어리가 분석한 현대 사회의 "시간-공간 압축" 현상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기술의 발달로 물리적 거리는 의미를 잃어가고, 대신 시간의 활용 방식이 더욱 중요해진다. 콘솔의 모빌리티는 이런 압축된 시간-공간에서 게임 경험을 최적화하는 도구 역할을 한다. 더 나아가 어리가 제시한 "용재적인 기계, 이미지, 통신장치가 그득한" 현대 사회에서 콘솔은 다른 기기들과 연결되면서 더욱 복합적인 용재성을 구현한다. 예를 들면, 콘솔로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동시에 스마트폰으로 친구의 온라인 상태를 확인하고, 태블릿으로 게임 공략을 검색하며, PC에 연결된 디스코드로는 채팅을 한다. 이때 각 기기는 고유한 역할을 하면서도 하나의 통합된 경험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한다. 이런 통합적 경험에서 중요한 것은 각 기기 간의 전환이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사용자는 어떤 기기를 사용하고 있는지를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경험을 추구하고, 기술은 배경으로 물러난다. 이것이야말로 하이데거가 말한 용재성의 본질이며, 어리가 예견한 모빌리티의 이상적 사례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기술적 발전이 단순히 '더 많은 감각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진정한 용재성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적절한 정보'를 '적절한 때'에 제공할 때 달성된다. 하이데거식으로 해석하자면, 망치를 사용할 때 우리가 망치의 재질이나 소재를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잘 설계된 콘솔은 플레이어가 그 기술 자체를 의식하지 않게 만든다. 결국 현대 콘솔 게임의 진화는 기술의 진화이면서 동시에 기술의 소거 과정이기도 하다. 더 정교한 기술을 통해 기술을 덜 의식하게 만드는 것, 더 복잡한 시스템을 통해 더 편리하고 단순한 경험을 제공하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사용자의 다양한 모빌리티 욕구를 자연스럽게 충족시키는 것. 이것이 21세기 콘솔이 달성한 성취라고 할 수 있다. 손 안의 작은 기기가 거대한 게임 세계로의 투명한 창이 되고, 동시에 언제 어디서나 접근 가능한 문화적 매개체가 되는 것. 여기서 우리는 기술과 인간이 맺을 수 있는 이상적인 관계의 한 모습을 발견한다. 기술은 다시 한번 투명해지고, 사람들은 온전히 함께 게임하는 즐거움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이런 변화는 개인적 경험의 차원을 넘어선다. 하이데거는 용재성이 단순히 개인과 도구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이 세계와 맺는 근본적인 관계 방식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도구를 통해 세계에 개입하고, 도구가 투명해질 때 비로소 세계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게임의 맥락에서 보면, 콘솔이 투명해질 때, 기술적 매개는 사라지고 플레이어는 게임 세계와 직접적 관계를 맺으며, 다른 플레이어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연결된 개인들의 새로운 ‘디지털 놀이터’ 1980년대, 누군가 스트리트 파이터를 플레이하고 있으면, 그 뒤로 서너 명이 모여들고 "어퍼컷!", "가드해!", "콤보 넣어!"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흔한 오락실 풍경이었다. 플레이어가 어려운 기술을 성공시키면 함께 환호하고, 실패하면 함께 아쉬워한다. 때로는 게임을 직접 하지 않는 사람이 더 흥미진진하게 경험을 즐기기도 한다. 이는 2000년대 PC방에서의 풍경도 비슷했다. 이런 집단적 게임 경험은 단순히 한 사람의 플레이를 여러 명이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공유된 사건을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개인 PC의 보급이 증가하면서 오락실이나 PC방보다는 집에서 혼자 게임을 하는 것이 기본이 되었고, 멀티플레이어 게임이 있다 해도 각자 자신의 화면만 보며 플레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온라인 게임을 통해 전 세계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었지만, 그 연결은 주로 기능적이고 목적 지향적이었다. 게임을 이기기 위해, 미션을 완수하기 위해 협력하는 것이지, '함께 있는 즐거움'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PC 게임 환경에서는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외부 도구들이 발달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디스코드(Discord)다. 2015년 출시된 디스코드는 게이머들이 음성 채팅을 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게임 화면을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했다. 이를 통해 물리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마치 같은 공간에서 게임을 하는 듯한 경험이 가능해졌다. 디스코드의 화면 공유 기능이 게이머들에게 미친 영향은 생각보다 혁명적이었다. 온라인상으로도 친구가 어려운 보스와 싸우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응원하거나 조언할 수 있게 되었고, 복잡한 퍼즐 게임을 함께 풀어나가거나, 새로운 게임의 조작법을 가르쳐주는 것도 가능해졌다. 하지만 이런 경험을 위해서는 게임과는 별도의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해야 했고, 특히 콘솔 게임의 경우 종종 복잡한 설정이나 세팅으로 인해 원활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콘솔 사용자들은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생태계 안에서 제한된 소통 수단만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음성 채팅은 가능했지만 화면 공유는 불가능했고, 디스코드 같은 외부 애플리케이션과의 연동도 어려웠다. *닌텐도 스위치2 그런데 최근 닌텐도 스위치2가 화면 공유와 통합 음성 채팅 기능을 자체적으로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기능 추가를 넘어서는 의미를 갖는다. 이제 콘솔 사용자들도 별도의 외부 도구나 복잡한 설정 과정 없이 게임 화면을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음성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하이데거의 투명성 개념과 연결할 수 있다. 소통을 위한 기술적 복잡성이 사라지고, 순수한 게임 경험과 사회적 상호작용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런 기능이 서로 다른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작동한다는 점이다. 즉, 멀티 플레이를 위한 화면 공유와 채팅 뿐만 아니라, 이제는 콘솔 게임 중에 각자 다른 게임을 하면서도 서로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한 명은 복잡한 RPG의 스토리를 진행하고, 다른 한 명은 액션 게임의 보스전을 벌이면서도 서로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며 대화할 수 있다. 이는 콘솔 게임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된 새로운 형태의 집단적 게임 경험이다. 이런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20년간 폭발적으로 성장한 게임 실황 방송 문화를 함께 살펴봐야 한다. 트위치, 유튜브, 아프리카TV 등의 플랫폼을 통해 "게임 보기"는 하나의 독립적인 엔터테인먼트 장르로 자리잡았다. 수백만 명이 다른 사람의 게임 플레이를 시청하며, 채팅을 통해 실시간으로 소통한다. 이는 과거 아케이드의 "구경하는 재미"가 디지털 환경에서 대규모로 재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시청자들은 스트리머의 뛰어난 실력에 감탄하거나, 실패하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거나, 어려운 구간을 함께 고민한다. 때로는 채팅을 통해 힌트를 주거나 응원 메시지를 보내기도 한다. 이는 일방향적 시청이 아니라 쌍방향적 참여다. 콘솔의 내장 화면 공유 기능은 이런 게임 실황 문화를 개인적이고 친밀한 차원으로 가져온 것이다. 수만 명의 시청자가 아니라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하는 소규모 실황인 셈이다. 하지만 규모가 작다고 해서 그 의미가 축소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친밀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화면 공유는 더욱 자연스럽고 깊이 있는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변화들이 만들어내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 놀이터'다. 전통적인 놀이터는 명확한 물리적 경계를 가진 공간이었다. 학교 운동장, 동네 공원,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 등이 그 예다. 이런 공간에서 아이들은 함께 뛰어놀고, 게임을 만들어내고, 사회적 관계를 형성한다. 중요한 것은 이런 놀이가 단순히 개별적인 활동들의 합이 아니라는 점이다. 놀이터에서는 각자 다른 놀이를 하면서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네를 타는 아이, 미끄럼틀을 오르내리는 아이, 모래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하나의 역동적인 놀이터 생태계를 만들어낸다. 기존 콘솔 환경에서는 어려웠던 화면 공유 기능이 새롭게 만들어내는 디지털 놀이터도 비슷한 특성을 갖는다. 각자 다른 게임을 하지만, 동시에 하나의 공유된 소통 공간에서 함께 있다. 이는 물리적 놀이터와 여러 면에서 유사한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는 특성도 갖는다. 우선 공간의 제약이 없다. 전 세계 어디에 있든, 언제든지 접속만 할 수 있으면 이 디지털 놀이터에 들어갈 수 있다. 또한 놀이의 다양성도 무한하다. 물리적 놀이터에서는 그 공간이 제공하는 시설의 한계가 있지만, 디지털 놀이터에서는 수천 가지의 서로 다른 게임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런 디지털 놀이터가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경계를 흐린다는 점이다. 나는 내 집 침실이라는 가장 사적인 공간에서 게임을 하고 있지만, 동시에 친구들과 연결된 반공적 공간에도 존재한다. 내 게임 화면은 나만의 것이면서 동시에 친구들과 공유된다. 이는 전통적인 공간 개념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새로운 형태의 공간성이다. 이런 공간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예의와 규범도 생겨난다. 예를 들어, 친구가 중요한 게임 장면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대화를 자제하는 암묵적 규칙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적절한 조언을 제공하는 방식, 게임의 스포일러를 피하는 방법 등이 자연스로운 규범으로 형성된다. 이는 아케이드나 PC방에서 발달했던 집단적 게임 문화의 디지털 버전처럼 보인다. 물론 디지털 환경이라는 점에서 나타나는 고유한 특성도 있다. 디지털 환경 속에서 주고받는 기존의 음성 채팅이나 텍스트 메시지는 주로 언어적 소통에 의존했다. 하지만 화면을 공유하면 비언어적 소통이 가능해진다. 친구가 게임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를 말해주지 않아도 화면을 통해 직접 관찰할 수 있다. 아케이드 시대, PC방 세대의 집단적 게임 문화가 콘솔 게임으로 이어져 다시 현대적으로 재해석된다. 결국 콘솔의 이러한 발전은 단순한 기술적 기능 추가가 아니라, 게임이라는 매체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공간의 근본적 재편, 개인적 경험과 집단적 경험,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제 연결된 개인들이 만들어내는 이 새로운 놀이터에서, 게임은 더 이상 혼자 즐기는 오락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사회적 경험이 되고 있다. 경계에 선 매체: 콘솔 게임의 대중매체적 가능성 지금까지 우리는 콘솔 게임의 진화를 철학적, 사회학적 렌즈를 통해 다각도로 분석해왔다. 하이데거의 용재성 개념을 통해 콘솔이 어떻게 투명한 도구가 되어가는지를 살펴보았고, 존 어리의 모빌리티 이론으로 현대 콘솔이 구현하는 새로운 형태의 이동성을 탐구했다. 화면 공유와 음성 채팅 기능이 만들어내는 디지털 소통 공간의 확장을 분석했고, 다중 기기 생태계에서 콘솔이 차지하는 복합적 위치를 조명했다. 이 모든 논의가 궁극적으로 향하는 질문은 하나다. 과연 콘솔 게임을 새로운 형식의 대중매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콘솔 게임이 고정된 거실에서 벗어나 개인의 일상 어디에나 스며들 수 있게 된 변화는 단순한 기술적 개선이 아니라 매체적 존재 방식의 근본적 전환을 의미한다. 과거 콘솔 게임이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장소에서 하는 특별한 활동"이었다면, 이제는 "언제 어디서나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일상적 매체"로 변모했다. 이는 20세기 대중매체들이 거쳐온 전형적인 진화 경로와 정확히 일치한다. 라디오가 거실의 대형 가구에서 휴대용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TV가 가족 중심의 고정 기기에서 개인화된 시청 도구로 발전한 것과 같은 궤적이다. 하이데거의 용재성 개념으로 분석할 때, 현대 콘솔의 가장 중요한 성취는 기술적 복잡성을 점차 보이지 않도록 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술은 배경으로 물러나고 순수한 게임 경험만이 전면에 나서는 것이다. 동시에 어리의 모빌리티 이론은 이런 투명성이 어떻게 현대인의 복합적 일상과 조화를 이루는지를 보여준다. 콘솔은 "이동하는 기계"와 "체류하는 기계"의 이중적 특성을 완벽하게 구현하면서, 사용자의 다섯 가지 모빌리티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킨다. 신체적 이동과 함께 이동하고, 디지털 콘텐츠를 전송하며, 가상 세계로의 상상적 여행을 제공하고, 실시간 소통을 가능하게 하며, 지속적인 메시지 교환을 지원한다. 이런 모빌리티의 구현은 콘솔 게임을 단순한 오락 도구에서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익숙하게 등장하는 매체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욱 주목할 점은 콘솔 게임이 글로벌하면서도 동시에 로컬한 특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같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전세계에서 사용되지만, 각 지역의 문화적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사용 패턴과 사회적 의미를 생성한다. 이는 주로 서구에서 개발되어 전세계로 일방향적으로 확산되던 기존의 대중매체 패턴과는 다른 양상이다. 하지만 이런 매체적 진화에도 불구하고, 콘솔 게임이 진정한 '대중' 매체라고 단언하기에는 여전히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구조적이고 지속적인 문제는 경제적 진입장벽이다. 콘솔 기기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구매해야 하는 경제적 부담은 콘솔 유저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현실이다. 최근 도입된 닌텐도 스위치 2의 '나눔 통신', 플레이스테이션의 '셰어 플레이', Xbox의 '홈 공유' 등은 분명히 혁신적인 시도다. 이런 기능들은 게임 소프트웨어의 공유를 통해 경제적 부담을 일정 정도 완화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내재되어 있다. 콘솔 산업의 비즈니스 모델 자체가 하드웨어 판매량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기기 자체의 개별 소유는 여전히 필수적이다. 결국 '나눔'이 가능한 것은 소프트웨어에 국한되며, 하드웨어라는 물리적 기반은 여전히 개별적 구매를 요구한다. 이런 경제적 구조는 콘솔 게임을 "특별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의 전유물"로 만드는 근본적 요인으로 여전히 작용한다. 아무리 기술적으로 접근성이 향상되고 사회적 기능이 확장되어도, 수십만원에 달하는 초기 투자 비용은 상당한 계층을 배제한다. 이는 라디오나 TV가 점차 가격이 하락하면서 진정한 대중화를 이룬 것과는 대조적이다. 또한 콘솔 게임이 갖는 고유한 매체적 특성 자체도 대중매체로서의 보편성에 제약을 가한다. 콘솔 게임은 본질적으로 능동적 참여를 요구하는 매체다. TV나 라디오처럼 수동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매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을 갖는다. 이는 한편으로는 상호작용성이라는 고유한 가치를 제공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참여를 위한 학습 비용과 시간 투자를 요구한다. 이러한 비용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높은 진입장벽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더욱이 게임에 대한 사회적 편견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기성세대나 특정 문화권에서는 게임을 여전히 시간 낭비나 유해한 활동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인식적 장벽은 기술적 발전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화적 차원의 문제다. 그렇다면 이런 한계들이 콘솔 게임의 매체적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이런 한계들은 콘솔 게임이 갖는 독특한 매체적 특성을 보여주는 지표로 이해해야 한다. 책이 영화와 다르고, 영화가 TV와 다르듯, 콘솔 게임도 기존 매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중과 관계를 맺는다. 각 매체는 고유한 진입장벽과 특성을 가지면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결국 콘솔 게임이 대중매체인가 하는 질문은 현재 시점에서 대답하자면, 그렇다, 아니다, 단정지어 말하기 어렵다. 이는 단순히 기술적 기능이나 시장 점유율의 문제가 아니라, 게임이 우리 사회에서 수행하는 복합적 역할과 사람들이 게임을 통해 연결되고 소통하는 방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콘솔 게임은 현재 대중매체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매체라고 규정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현재로서는 콘솔 게임을 "경계에 선 매체"라는 독특한 위치를 점하는 존재로 이해하는 것은 어떨까? Tags: 콘솔, 스팀덱, PSP, 미디어, 하드웨어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디어콘텐츠연구자) 이미몽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닌텐도 게임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몇 개월 전 스팀덱을 할부로 구매하여 열심히 즐기고 있습니다. 경희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선 문화매개를 전공했고, 현재는 일본의 리츠메이칸 대학교 첨단종합학술연구과 박사과정에 재학중 입니다. 게임과 웹툰 등 디지털 미디어 콘텐츠와 문화를 연구합니다.

  • 라이브 서비스 전쟁 · 역사 기계 - <폭스홀>과 <헬다이버즈 2>

    <폭스홀>은 극단적으로 상세화된 활동적 측면으로, <헬다이버즈 2>는 운영진의 적극적 개입과 플레이어 활동 반영 등의 실시간 소통의 방식으로 각각 전쟁 앞 개인의 감각을 생산해 플레이어들에게 역사를 체험하게 만든다 할 수 있다. < Back 라이브 서비스 전쟁 · 역사 기계 - <폭스홀>과 <헬다이버즈 2> 25 GG Vol. 25. 8. 10. 게임에서 전쟁은 주제로, 소재로, 또 하나의 주된 장르로 그 태동부터 아주 오랜 시간 다뤄져 왔다. RPG, RTS, FPS, TPS 등 형태를 가리지 않고 전쟁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현상의 부분적 측면들을 다뤄 왔으며 MMO 장르에서 플레이어들이 형성한 길드, 혹은 클랜 간의 전쟁은 그 자체로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여러 전쟁들을 짧은 기간 안에 축소판으로 시뮬레이션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에 출현한 라이브 서비스 (Live Service) 형식으로 운영되는 멀티플레이 전쟁 게임들은 종래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쟁을 다룬다. 여기서 전쟁의 라이브 서비스 측면은 교전 대상을 정하고 선전포고를 하는 등의 구조적이고 정치적 측면을 게임의 개발진이나 운영자가 대신 전담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선 2003년 <플래닛사이드>에서 2012년 <플래닛사이드 2>로 이어지는 전신이 존재하긴 했었지만 2022년에 발매된 <폭스홀>과 2024년에 발매된 <헬다이버즈 2>는 각각 PVP와 PVE의 형식으로 서로 다른 분야에 주안점을 두며 이전보다 훨씬 본격적인 차원에서 전쟁을 구현한다. “지속적 세계 전쟁” - <폭스홀> <폭스홀>에서 플레이어는 조감도로 비치는 화면 아래 놓인 아주 작은 군인 한 명을 조종한다. 서버에 접속하자마자 성별과 피부색 등을 선택할 수 있지만 어차피 군모와 군복으로 전부 가려진 아주 작은 신체들은 시각적으로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이와 별개로 선택해 참여할 수 있는 콜로니얼 (Colonials)이라는 연방국과 워든 (Wardens)이라는 제국의 서로 국경을 맞댄 진영들은 각각 녹색과 청색의 대표색 말고도 장비 및 기반 시설, 시작 구역의 지형 등 적잖은 차이를 지닌다. 그러나 이 차이 또한 어느 한쪽이 유리하게 설정되어 있지는 않고 예를 들어 워든의 무기는 성능이 다소 우월한 대신 생산 비용이 비싼 등 접근 방식에 차이를 줄 뿐이다. 여기서 눈치챘겠지만 <폭스홀>은 무기 생산은 물론이고 자원 채취까지, 즉 군사 활동의 모든 물리적 측면을 플레이어들이 직접 운영해야 하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그러나 기존의 RTS 게임과는 달리 한 진영의 전체 유닛들을 한 명의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광활한 전장에서 플레이어는 그저 단 하나의 유닛만을 조종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동 및 행동 속도, 소지 물품의 무게, 조준 시간 등 각 유닛의 역량은 너무 한정되어 있는 나머지 직접적인 전투에 참여하고 있는 플레이어는 해당 싸움 속에서도 영웅적 활약은커녕 아주 작은 총알받이 하나의 역할 이상을 수행할 수 없다. 그러니 게임 내 병과 간 수행 가능한 작업을 구분 짓는 시스템상 제한이 따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보병이 의무병의 치료를 돕는 것도, 의무병이 보급병의 병참을 돕는 것도 순수하게 ‘여력’ 상 불가능하다. 군장 무게상 치료에 필요한 구급상자를 보병이 소지하고 있을 일이 없을 뿐 아니라 만에 하나 구급상자가 근처에 떨어져 있었다 하더라도 총을 내려놓고 그것을 주워 착용한 뒤 그 안에 붕대를 채워 넣는 데 걸릴 시간이면 이미 총알에 맞아 죽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병참은 트럭과 같은 이송 장치를 모는 것이 아니면 물자를 들고 옮기는 건커녕 기지에서 하나하나 꺼내는 데만도 시간이 적잖이 걸리며 심지어 창고에서 물자를 꺼내는 시간과 기지에서 꺼내는 시간은 천지차이이다. 또 병참 안에서도 물자 이동과 군수품 생산, 그리고 자원 생산 사이의 역할이 전부 하나하나 나뉘어 있으며 역시 여기도 시스템상에 제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업무 수행 역량의 한계 때문에 자연스레 플레이어들이 특정 역할을 전담하게 되는 것이다. <폭스홀>에서 각각의 플레이어는 하나의 분야 속 하나의 아주 작은 역할을 수행하며 하나의 커다란 전쟁을, 현실 시간으로 짧게는 10일에서 길게는 50일까지도 걸리는 전쟁을 영원히 반복해서 작동시킨다. <폭스홀>이 자신을 “지속적 세계 전쟁 (Persistent World Warfare)”이라고 소개하는 것도 과장은 아니다. 하나의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한번 선택한 진영은 바꿀 수 없으며 전체 지도는 게임 내 실제 축척으로 한 변의 길이가 1km인 육각형으로 구획된 43개의 지역들이 모여 이루어져 있다. 즉 대략 111.7km²의 전체 넓이를 가진 거대한 (프랑스의 수도 파리시 전역이 105.4km²) 전장에서 평균 3,000명가량의 플레이어가 한꺼번에 싸우려면 이 게임의 진정한 주인공은 결국 병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보급 활동은 앞서 설명했듯 단계적으로 각 활동이 절차적으로 세세하게 나뉘어 있는 이 게임의 특성상 게임의 기제로는 다소 터무니없는 시간을 소모하는데, 예를 들어 경기관총 100개와 그 탄창 120개가 각각 생산 시간이 1시간씩 걸린다. 그리고 재고를 확인하고 15상자에서 60상자 사이의 물품을 적재한 뒤 차량을 주유하며 전방에서 후방으로 이동하는 데 도로 상황과 차량의 종류 등 변수에 따라 짧게는 15분에서 길게는 20분까지 걸린다. 지금 여기에 물자 생산에 필요한 자원 채취 및 정제 시간, 생산 기반 시설 건설, 시설 작동을 위한 연료 보급 등을 위한 시간은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이렇게 열심히 달렸는데 전방 근처에서 적군 파르티잔에게 습격당하는 일이 허다하다. 이 모든 군사 활동을 하나하나 전부 한 명 한 명의 플레이어들이 수행해야 하니 한 번에 기여할 수 있는 범위는 당연히 한정된다. 활동 종류에 시스템상 제약이 존재하지도 않고 채팅은 존재하지만 지휘 체계가 있는 것은 아니고, 계급은 있지만 별도로 권위가 부여되는 것은 아니니 플레이어들은 자주적으로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역할을 맡는다. 전방 재고를 확인하여 어떤 부족한 물자를 채워 놓을지도 보급병이 알아서 선택해야 하고 자원을 채취하다가도 채팅에서 전방 보병들이 무기 부족을 외치면 급하게 트럭을 돌리는 일도 생긴다. 물론 자유도의 부작용으로 같은 물자를 동시에 여러 명이 배달해 잉여분이 쌓이는 경우나 보병보다 위생병이 몰리는 경우도 자주 있다. <폭스홀>에선 오인 사격도 가능하고 이처럼 활동에 제약이 없다 보니 아군 방해의 걱정이 있을 수 있지만 다행히도 신고 및 정지 시스템은 존재하며 나아가 한 번에 행위할 수 있는 역량이 제한되어 있는 점이 여기에도 적용되어 애초에 마음먹고 방해 공작을 벌이는 것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다.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대규모 전쟁 활동을 시뮬레이션하는 이 게임의 면모가 가장 여실히 기록된 일화는 2022년 초창기 물류 노조 파업 사건이다. 게임 내 물류 부서에 노조가 결성되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지만 파업까지 벌이는 건 전례를 찾기 힘든 사건일 터이다. 실제로 해당 파업은 기사화 [1] 도 되었고 노조 자체적으로 만든 웹사이트에 아카이브도 되어 있는데 당시 물류 운영의 불합리한 환경에 제기한 열한 가지 문제는 다음과 같다. 1. 공공 재고 및 정제소 적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림. 2. 게임 초반 부품 확보가 과하게 어렵고 경쟁적이며 비건강함. 3. 공장 주문 유지 시간이 너무 짧음. 4. 생산 건물들에 연대 차원의 대기열이 필요함. 5. 컨테이너들이 물류 작업의 폐쇄회로 운영을 불가능케 함. 6. 전방과 후방 사이에 물류 시설 부족. 7. 물량을 쉽게 합칠 수 없기 때문에 재고 안에서 재료 포장을 푸는 것이 극단적으로 느림. 8. 화물선 전체 양의 폐품을 기본 자재로 가공할 수 없음. 9. 비축 재고 내 상자 양 제한이 너무 적음. 10. 전쟁 첫날부터 눈보라가 오는 것은 말이 안 됨. 11. 맵 상에 끼인 차량 강제 이동 명령어를 한 전쟁에 세 번까지 밖에 사용 못하는 건 너무 적음 [2] . 이 파업은 49일간 진행되어 결국 개발진이 위 요구 사항들을 업데이트에 반영하기로 하며 막을 내렸다. “모든 일이 정사” - <헬다이버즈 2> <폭스홀>이 미국과 유럽의 1 · 2차 세계 대전을 섞어 가상의 배경에서 재현하고 있다면 <헬다이버즈 2>는 미래 세계의 우주 전쟁을 구현한다. <헬다이버즈 2>는 4인분대로 작전에 배치되는 3인칭 협동 PVE 슈터로, <폭스홀>과 마찬가지로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헬다이버”의 체형 및 목소리를 정할 수 있지만 헬멧과 방어구에 가려 그 안의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헬다이버들은 궤도에 정박한 구축함에서 외계생물과 로봇 군단 등 다양한 적 세력 한복판으로 강하정을 타고 직접 투하되어 구축함의 지원을 받으며 싸운다. 여기서 한복판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셀 수 없이 많고 또 하나하나가 플레이어와 비슷하거나 더 강한 전투력을 지닌 적들 사이에 둘러싸이게 된다는 뜻인데 그렇다고 플레이어가 강력한 보호 장비나 압도적 화력을 소지한 채 지상에 내려가는 것도 아니다. 플레이어는 그저 평범한 한 인간으로 로봇의 총탄이나 외계 생명의 발톱 등에 한두 방 맞으면 단숨에 몸이 토막 나며 죽는다. 그나마 플레이어가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부분은 AI 지능에 비해 조준과 반응 속도, 판단력 등이 나은 점, 그리고 구축함의 궤도 공격 지원이지만 궤도 공격의 경우 피아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므로 마찬가지로 플레이어는 고폭탄이나 레이저에 무수히 육편이 된다. 또 플레이어의 공격 또한 <폭스홀>처럼 오인 사격이 가능해 같은 분대원 간에도 많은 사망 요인을 낳는다. 군장의 무게로 인해 아주 낮은 높이에서 떨어져도 낙사하고 헤엄을 칠 수 없어 얕은 물에서 익사하는 것에 이르면 어이없어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이렇게 플레이어가 끊임없이 죽으며 다시 투입되는 과정은 게임 내 허용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설정상 정말로 한명 한명의 병사가 일일이 죽으며 증원되는 것이다. 즉, <헬다이버즈 2>는 플레이어가 복무하게 되는 인류 세력이 “슈퍼지구”라는 황당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군국주의 파시즘에 대한 노골적인 풍자를 게임플레이 장치로 구성한 작품이다. 생명 경시를 넘어 병사 하나하나를 말 그대로 총알로 써 가며 외계 세력을 선제 침공하는 슈퍼지구는 적반하장으로 자신들이 침략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선전하고 적들더러 “전체주의” “계급사회” “외계인 혐오주의” “팽창주의” “폭정”로 자신들이 현재 하고 있는 모든 행위를 역으로 뒤집어씌워 모함한다. 작중 외계 세력은 크게 세 가지인데 ‘테르미니드’는 신체에서 연료를 추출할 수 있다는 이유로 슈퍼지구가 공격하고 있는 곤충 형태의 외계 생물들이다. ‘오토마톤’은 A부터 F까지 등급으로 시민권을 나누고 A와 B등급 시민마저도 공휴일에 최대 1시간의 휴식 시간만을 가질 수 있으며 “아이를 가질 가능성이 있는 행위”를 위해선 허가증을 작성 후 제출해야 하는 극단적인 전체 · 감시사회에 반기를 든 분리세력으로 패권국에 저항하기 위해 신체를 개조한 기계 세력이다. 특히 일루미닛이란 고등 외계 종족의 경우에 슈퍼지구는 그들이 대량살상병기를 가지고 있다는 명분을 들며 침략했는데, 이는 미국의 2003년 이라크, 2025년 이란 침공을 직접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슈퍼지구가 내세우는 “통제민주주의” 이데올로기까지 <헬다이버즈 2>는 해당 게임이 현실 미국에 대한 풍자임을 숨기지 않는데, 통제민주주의 아래 시민들은 컴퓨터가 정해준 결과를 투표할 뿐이지만 이 ‘민주주의’에 대한 광적인 충성심으로 헬다이버는 전투 내내 “ 민주주의 맛 좀 봐라!”, “ 번영 을 위하여!”, “이 다친 팔로는 자유 를 전파할 수 없어” 등 세뇌의 표제어들이 담긴 함성을 질러댄다. 튜토리얼 지역에서부터 플레이어는 석판으로 세워진 고용 계약서 주변 15미터 이내에 1초만 서 있어도 서명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정작 3.3번 항목에 따르면 해당 계약서를 직접 읽는 것은 계약 위반에 해당한다. 이러한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심각한 파시즘에 대한 묘사의 끝은 바로 운영자들이 “진리부”를 통해 게임 내외로 내리는 공지다. 새로운 적을 먼저 업데이트해놓고 공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플레이어들이 발견하면 이 진리부는 “거짓말”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플레이어들이 테르미니드 중 날아다니는 개체들이 등장한 것을 발견하자 진리부는 “벌레는 날 수 없으며 벌레 동조자들의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얼마 후 같은 진리부가 “언제나 날아다니는 벌레의 가능성을 믿어왔다”라며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꿨던 것과 같은 일은 예삿일이다. 게임 외적 공지마저 이러한 설정에 이입하며 “인류부는 전투 이동 안전 지침에 대한 개정안을 발표하여 헬다이버가 강하 중 스스로 각성제를 투여할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이는 이전에는 “가위를 들고 달리는 행위”와 “실제 수류탄으로 저글링하는 행위”와 동일한 위험 구역으로 분류되었던 행위입니다”, “우리의 혁신적인 군사 연구팀이 더 날카로운 깃대를 개발한 덕분에 깃발은 이제 적들에게 직접 자랑스럽게 꽂을 수 있습니다. 죽어있든지 살아있든지 말이죠. 이것으로 적들의 피로만 갈증을 채울 수 있는 슈퍼지구의 영원한 색깔이 바래지 않도록 보장할 수 있었습니다. 완전한 민주주의”와 같은 식으로 패치 내용을 알린다. 난이도와 같은 플레이 시스템 차원에서도 일루미닛은 느린 발사 속도로 거의 정확하게 플레이어를 사격하는 것에 반해 오토마톤은 빠른 발사 속도를 가지고 있지만 사격 정확도가 떨어지는 것에 대해서도 “오토마톤의 상황 인식 프로토콜” 성능 때문이라고 서술하는 등 설정을 확장시키는 동시에 풍자적으로 이입하는 설명을 멈추지 않는다. <헬다이버즈 2>에서 라이브 서비스 전쟁 게임으로서의 측면이 빛나는 지점은 바로 이 운영자의 개입이다. 플레이어가 배치될 수 있는 행성은 시시각각 변하는데, 바로 은하계의 전황이 플레이어의 참여에 따라 실시간으로 요동치기 때문이다. 운영자는 앞서 말한 진리부의 입을 빌어 슈퍼지구, 그리고 교전 중의 세 세력이 각각 어떻게 움직이는지 주기적으로 알리며 은하계 지도 상황을 변경한다. 이는 새로운 전쟁 이벤트 (제트팩 오토마톤 등장, 블랙홀 출현, 일루미닛의 슈퍼지구 본성 침공 등)나 임무 (“두마 티어” 행성 확보, 샘플 22,000,000개 수집, 테르미니드 1,500,000,000마리 처치 등)를 소개하며 또 이 이벤트들에 대한 플레이어들의 참여를 집계하고 다시 참여 통계를 반영해 임무 성공 혹은 실패 등 향후 이벤트 전개를 정하는 피드백 고리를 형성한다. 이는 플레이어들에게 계속해서 다른 환경의 맵을 경험할 기회를 만드는 설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개개인이 스스로 하나의 커다란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는 감각을 제공한다. 특히 운영진은 플레이어 커뮤니티 내에서 공유되는 경험을 게임 내 공식 설정으로 만들기까지 하는데, 절망적인 난이도로 악명 높았던 전장 “말레벨론 크릭” 행성에서 전사한 이들을 위한 추모일을 지정했던 것이나, “마르파르크” 행성에서 플레이어들이 사용할 수 있는 신무기 재료를 구하는 임무와 “버넌 웰스” 행성에서 아동 중환자 병원 생존자를 구출하는 임무가 사실상 둘 중 하나만 성공할 수 있는 작전으로 동시에 주어졌을 때 플레이어들이 후자의 행성으로 집결하자 실제로 개발진이 아이들의 감사 편지를 그려 공식 계정에 올리고 세이브더칠드런 재단에 기부를 했던 일처럼 그 범위가 역시나 게임 안팎으로 활개 친다. 그리고 당연히 성공뿐 아니라 실패 시에도 방어 대상이었던 행성이 영영 파괴되어 잔해만 남는 등 그 영향이 뚜렷하게 궤적을 남긴다. 이러한 운영 방식에 대해 커뮤니티 내에서 <헬다이버즈 2>의 플레이어들은 파시즘에 대한 풍자로 유명한 또 다른 게임 시리즈 <워해머 40K>에서 “(수없이 많은 매체상으로 묘사되는) 모든 것이 정사”라는 표현이 널리 사용되는 것을 빌려와 “(게임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정사”라는 의미로 살짝 비틀어 쓴다. 전쟁이라는 역사 기계 앞 개인의 참전 <폭스홀>와 <헬다이버즈 2>는 둘 모두 각각 제목 그대로 참호전의 참혹함과 전장의 지옥을 그리는 데 주력한다. <폭스홀>에선 전쟁 한번에 평균 3백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헬다이버즈 2>에선 출시 이후 1년간 총 28억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의 커다란 전쟁에서 혼자선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개 병사이자, 광막한 죽음 앞에 선 자그마한 개인에 불과한 경험을 선사하는 것은 현실에서 한 인간 앞에 ‘참전’이라는 행위가 가지는 규모를 짐작게 하는 것이다. 어쨌든 슈터, 즉 액션 장르인 <헬다이버즈 2>에서 그래도 하나의 ‘전투’에선 목숨을 희생하며 혹은 특출나게 뛰어난 실력으로 중요한 목표를 개인이 달성하는 업적이 가능하지만 그래봤자 그 업적은 전체 은하 전쟁 차원에선 미미한 숫자로 실제 구축함 귀환 후 화면에 뜨는 기여도 수치는 0.0015% 정도에 불과하다. PVP임에도 지휘 체계가 없는 <폭스홀>과, 적진과 아군 작전을 전부를 운영자가 대신 움직이는 <헬다이버즈 2> 모두 위계가 없기 때문에 플레이어의 영향력은 아무리 게임을 오래 해도 다른 모든 플레이어들보다 유달리 커지지 않는다. 이것이 <폭스홀> 말마따나 ‘지속적’인 전쟁 경험을 제공하는 비결이리라.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이자 사회지리학자였던 레프 메치니코프 (Lev Mechnikov)는 고대 중국의 거대 건축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양자강의 운하와 황하의 제방들은 십중팔구 수세대에 걸친 정교하게 조직된 공동작업의 소산이다. (...) 이러한 노동은 시간이 지나야만 바로 그 결실을 보게 된다. 그래서 그러한 노동의 계획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이해되지 않은 채 그대로 수행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3] . 즉, 자신이 당장 운송한 물자가 정확히 전쟁에 어떻게 사용될지를 알지 못하면서도 몇 시간 째 배달하는 콜로니얼의 트럭 운전수나 진리부의 공지만 믿고 오토마톤 공장 습격 작전에 뛰어드는 헬다이버는 마치 기계 속 하나의 부품과 같다.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은 실제로 산업사회의 기계 속 노동자는 도박사와도 같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벤야민은 프랑스의 사상가 알랭 (Alain)이 “도박이라는 개념이 지니는 독특한 면은 어떠한 게임도 이전에 이루어진 게임과는 무관하다는 점이다. 도박에 있어서는 어느 편도 확실한 입장에 있지 않다. 이전에 이겨서 벌었던 것들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포착한 것을 변주해 “기계노동자의 기계조작이 먼저번의 기계조작의 동작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이유는 바로 그 동작이 먼저번의 동작을 그대로 반복하기 때문이다. 도박에 있어 한탕이 그때마다 이전의 한탕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계조작의 동작도 매순간마다 그 이전의 동작과 차단된 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임금노동자의 작업은 노름꾼의 작업과 그 나름대로 짝을 이루게 된다”라는 고찰을 생산한다. 즉 마치 로그라이트 장르처럼 느껴지는 이 공통 구도상에서 노동자와 도박사 모두에게 “양자의 작업은 하나같이 일의 내용과는 무관하다 [4] .”라고 썼다. 콜로니얼의 트럭 운전수와 헬다이버 모두 다음 날, 혹은 며칠이 더 지나서야 그나마 지도상에서 전선이 살짝 전진한 것을 보며 희미하게 자신 행위의 사소한 영향력을 가늠이나 할 수 있을 따름이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다시 임하는 같은 작업이 또 다시 어떤 결실로 맺어질지는 정확하게도 구체적으로도 알지 못하면서도 전장으로 향한다. 벤야민은 이처럼 과거 · 미래와 분리된 시간을 통해 관망하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어떠한 사실도 그것이 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해서 역사적 사건이 되는 법은 없다. 원인으로서의 사실은, 수천 년이라는 시간에 의해 그 사실과는 동떨어져 있을 수도 있는 사건들을 통해서 추후에 역사적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출발하는 역사가는 사건들의 계기를 마치 염주를 하나 하나 세듯 차례차례로 이야기하는 것을 중지하고 그 대신 그가 살고 있는 자신의 시대가 지나간 어느 특정한 시대와 관련을 맺게 되는 상황의 배치로 파악한다. 이렇게 해서 그는 메시아적 시간의 단편들로 점철된 <현재시간>으로서의 현재라는 개념을 정립하게 되는 것이다 [5] . <폭스홀>과 <헬다이버즈 2>가 형식적 측면에서 전쟁, 그리고 역사적 시간과 관계하고 있다면 옵시디언 엔터테인먼트 (Obsidian Entertainment)의 게임들은 주제적 측면에서 이러한 역사 앞 한 개인의 인식이라는 문제를 연속적으로 다루어 왔는데, <스타워즈: 구 공화국의 기사단 2>의 ‘크레이아’에서 <폴아웃: 뉴 베가스>의 ‘율리시스’로 이어지는 인물상은 인과를 알 수 없는 운명의 의지 앞에 너무나도 왜소한 인간의 주체성을 회복하려는 시도에 투신하는 초인의 꿈을 꾼다. 특히 두 작품 모두의 서사 전체에서 전쟁은 지배적인 이야기꾼이고 두 인물은 국가 사이에 흐르는 그 거대한 힘의 충돌 앞에 개인이 역사와 어떻게 관계할 수 있는지 고뇌하는 것이다. 벤야민의 역사관은 옵시디언이 포착한 전쟁 앞에서 문자 그대로의 현상이 되는데 그들에게 전쟁은 역사를 쓰는 것도, 지우는 것도 가능한 그 무엇보다 “현재시간” 속의 것인 사건이다. 마찬가지로 그 성격상 필연적으로 전쟁은 개인이 역사와 관계하도록 강제하고, 그 개인들은 또 반동 인물로서 주인공에게 파편인 동시의 영원인 역사를 잇고 전해 나간다. 전쟁과 역사에 대해 이와 같이 주제적 측면에서 사유하는 시도는 그야말로 태초부터 형식을 가리지 않고 모든 예술 분야에서 이루어져 왔지만 형식적 측면에서 그 자체를 체화하고 시뮬레이션하는 사례는 오직 게임에서만 발생해 왔다. 임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는 그 원리를 인간 본질에서 찾은 바 있는데, " 국가들의 역사를 한낱 우리에게 많은 부분이 숨겨져 있는 인간성의 내적 소질의 현상으로 본다면, 국가들의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의 목적인 목적들에 따르는 자연의 모종의 기계적인 보행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의 국가는 정복하기를 희망하는 이웃 나라가 있는 한, 그 나라를 정복함으로써 자기를 확대하고, 하나의 보편왕국을, 즉 그 안에서 일체의 자유와 그리고 그것과 함께하는 덕, 취미, 학문이 소멸할 수밖에는 없는 하나의 체제를 향해 애쓴다. 그러나 이 괴물은, 모든 이웃 나라들을 삼켜버린 다음에, 결국은 저절로 해체되어 봉기와 분열에 의해 많은 작은 국가들로 쪼개진다. 이 작은 국가들은 하나의 국가연합을 향해 노력하는 대신에, 다시금 그들 각각이 전쟁을 정말로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똑같은 놀이 를 시작한다 [6] . " 다시 말해 칸트는 국가를 인간 본성의 표현으로 본다면 궁극적으로 전쟁 또한 그 성질에 내재된 하나의 치명적인 “악”이며, 심지어 그 자체로서 목적성을 가지는 자기 완성적 · 순환적 “놀이”이기까지 하다고 말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폭스홀>은 극단적으로 상세화된 활동적 측면으로, <헬다이버즈 2>는 운영진의 적극적 개입과 플레이어 활동 반영 등의 실시간 소통의 방식으로 각각 전쟁 앞 개인의 감각을 생산해 플레이어들에게 역사를 체험하게 만든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특히나 플레이어들에게 위계에 대한 접근을 제공하지 않고 또 개인으로서의 플레이어들이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을 제공함으로써 오히려 체감되는 전쟁의 크기를 키우고, 역설적으로 하나의 역사에 참여했다는 생생한 실감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게임은 ‘악의 반영’으로서 놀이에 대한 놀이를 이루고 궁극적으로 인간 행위의 본질에 대한 섬광을 계속해서 비춰 나간다. [1] https://www.nme.com/news/gaming-news/foxhole-logistics-union-ends-49-day-strike-after-demands-met-3173270 [2] https://logiunion.com/archive/openletter/ [3]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서울, 민음사, 1983), 76쪽. [4] 위의 책, 145쪽. [5] 위의 책, 355쪽. [6] 임마누엘 칸트,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파주: 아카넷, 2015), B30=VI34. Tags: 온라인게임, 라이브서비스, 전쟁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영이 폭력과 고통, 분열의 상관관계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 『정서 지도 그리기』, 『밑 빠진 독(毒)에 물 붓기』, 『월간 종이』 등을 제작하고 연극 <오페라 샬로트로니크>, <벼개가 된 사나히> 드라마터지를 맡았다. 『호르몬 일지』와 『게임 코러스』를 썼고, 『미친, 사랑의 노래』를 함께 썼다.

  • 코스믹 호러에 떨어진 인터페이스

    <에일리언 2>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작품이지만 테크 덕후인 제임스 카메론의 ‘진심’이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는 점을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단적인 예로, 첫 시퀀스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캐릭터는 인간도 에일리언도 안드로이드도 아니다. 리플리가 잠들어 있는 우주선 문을 레이저로 깔끔하게 절삭한 뒤에 재빨리 퇴장하는 산업용 로봇 A와 곧바로 이어서 우주선 내부를 스캔하는 산업용 로봇 B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 Back The Interface That Fell into Cosmic Horror 31 GG Vol. 26. 8. 10. The Road Aliens Didn’t Take Aliens is interesting in many respects, but what deserves particular note is how the “earnestness” of James Cameron, tech nerd, runs through the entire film. Case in point: the first characters to appear in the opening sequence are neither human nor alien nor android. They are industrial robot A, which laser-cuts a clean opening in the door of the ship where Ripley sleeps and promptly exits, and industrial robot B, which follows at once to scan the ship’s interior. Elsewhere, the power loader — born of extending the concept of the industrial exoskeleton — the sentry gun, a kind of automated military robot, and the display filling one whole wall of a large room (calling to mind the LED walls that ring today’s Unreal Engine virtual-production stages) all stand out in sharp relief. All these devices, rather than leaning on the crude CGI of the day, passed through the hands of an already mature machine craft of sets and props, and they still radiate an intensely tactile aura. Ironically, this is also why the film at times feels like a tech expo of the CES (Consumer Electronics Show) variety, demonstrating the products a near future will reach. And yet, for all its overwhelmingly technology-dense facade, one element of Aliens keeps snagging the eye. The marines of the film, elite soldiers of the late twenty-second century that they are, each carry a bodycam on their helmet, and the audience can watch the feeds those bodycams transmit through the command-post interface inside the APC. The problem is that these feeds boast roughly the image quality of a 1980s Korean news channel watched on a CRT with poor reception. Which is to say: staggeringly awful. Unless the bodycam supplier of the late twenty-second century is a retro enthusiast, one is driven to suspect defense-procurement fraud. Regrettably, the director was “earnest” about the bodycam image quality too. According to the recollection [1] of Cynthia Dale Scott, the actor who played Corporal Dietrich, Cameron tried during the shoot to build a kind of live-relay system — mounting real video cameras (not the compact bodycam props the audience sees) on the helmets, then running lines to the screen interface inside the APC. In the end this went unrealized, but he appears to have shot the bodycam shots with the very cameras that had been mounted on those helmets. * The screen interface of the APC command post in Aliens There is, of course, no shortage of “legitimate” reasons for the choice. As the line of mockumentary horror led by The Blair Witch Project shows, the low-grade image of the handheld camcorder (these days, footage that looks carelessly shot on a phone or webcam) schematically acquires a “raw” feel that translates conveniently into the functions of immediacy, or truthfulness. That most real bodycams compromise on image quality in order to hold long stretches of wide-angle data makes a fine excuse as well. An aesthetic defense is possible too: the dramatic mise-en-scène contrast between the bodycam (that is, camcorder) shots and the film’s main-camera shots pays off rather handsomely, meshing with the crosscut sequence of the marines entering the alien queen’s lair. And yet, for all those sound grounds and excuses, a very simple solution existed by which the bodycams of elite marines living in the late twenty-second century need not have looked like 1980s news: shoot the bodycam footage with one of the film’s two main cameras. Fit an especially wide lens to add more of that “raw” flavor, if you like. But this logical solution leads the audience into a rather uncanny situation. No longer would the eyes suffer frames thick with noise — what we would face instead is a scene in which the screen of the film’s command-post interface and the screen the audience is watching display perfectly “identical” image quality. Perhaps the real reason the director clung to low resolution — to the point of that bizarre obsession with building a live-relay system out of cheap camcorders — was to allay an anxiety about the fluidity of the interface. Wagner’s Bayreuth Festspielhaus, as Park Hae-cheon writes, “was able, as a stage on which the spectacle of the total artwork was staged, to equip itself as an interface of audiovisual immersion,” [2] and one may surmise that the blockbuster movie theater, in its direct debt, aims at much the same. If so, the very attempt to let the small, thoroughly functional screen of the film’s command post display the same image quality as the “interface of audiovisual immersion” the audience is watching must have struck Cameron as an experiment in producing some dreadful hybrid. Interestingly, the screen interface forty years on looks closer to a Lovecraftian post-apocalypse beside which dreadful hybrids can be waved through as cute. We long ago entered the era of watching the 4K director’s cut of Aliens on a smartphone at 1.5x speed and then, growing bored, opening a social media app to play an AI-enhanced “Aliens: complete story recap and behind-the-scenes” video at 1.75x. The Cosmic Horror Agent Fluidity, once released, is not easily gathered back. What is more, the interface of the present is quite literally melting in real time. As I discussed in detail in a previous essay [3] , in the digital realm the causality of input and output assigned to the interface is eroding at speed. No case shows this more perfectly than the AI chatbot, by now an everyday interface. Suppose you enter the same prompt a hundred times in a row. The result is a hundred answers, each (however minutely) different from the rest. The heart of every LLM built on the transformer architecture is probabilistic operation, and so the (once agreed-upon) causality of input and output is dismantled completely. Imagine that the moment I press forward on the gamepad, the character walks forward with 45 percent probability, veers off diagonally with 35 percent, jumps with 15 percent, and — the last 5 percent — drinks a potion. An interesting experience at first; before long the fury boils over and the pad goes flying. An interface stripped of causality cannot underwrite the accumulation of experience. By the time we reach so-called agentic AI, the interface goes beyond melting and begins to evaporate. The agent’s purpose lies in producing outcomes that demand action in many stages [4] without any interface interaction with the user along the way (mobilizing multiple LLM models if need be). The “ideal” agent, then, means the extinction of the screen interface. Fortunately(?), no such ideal agent exists. What is forced on us instead is a mass of variables that not even harness engineering whittled with an old master’s devotion can fully control. The many LLMs an agent calls by API all operate, as noted, probabilistically (each model at rates of its own). That chaining several models in sequence raises the odds of hallucination far above using one is self-evident from simple arithmetic. What is more, tools like RAG — designed to curb hallucination and supply fresher information — stand almost defenseless before prompt-injection attacks. All of which makes any consistent output very hard to predict. The agent will probably feel, most of the time, as though it were working fine. Only, now and then, out of nowhere, it performs feats such as wiping every database in a company’s systems, backups included [5] , or gladly handing over another person’s Instagram login to a hacker who asks politely [6] . The user of an agent, then, overlaps less with the faded advertisement of someone sipping coffee at leisure over a watertight automation than with the idle-game player restlessly checking the screen, or the anxious face of a retail investor holding the top. Unlike those two, though, the agent’s user cannot even make the real-time interface intervention that would cut losses when something goes wrong — the system was designed, from the start, to eliminate interaction with the interface as far as possible. Above all: in the case above, wiping the company’s databases, backups and all, took exactly nine seconds. All that remains for the agent’s user is to whittle the harness engineering finer and finer in advance, and then pray that no such thing happens. Sadly, in a universe where every meshing gear turns at its own unpredictable probability, God becomes cosmic horror. And cosmic horror is crueler still to those who pray. So long as we do not leave the probabilistic universe of cosmic horror, the unforeseen disaster will only keep arriving — “foreseeably,” again and again. The Hallucinations of Dead Space In the world of Dead Space , which shapes its vision of cosmic horror — no dreams, no hope — with real relish, there exists an ancient alien artifact called the Marker. Beginning and end of every tragedy in this world, the Marker treats the life around it to gaslighting of various kinds. Among these, the dementia phenomenon is especially vicious, because there is no way to block this manipulation of the mind. Unlike the Necromorphs, who settle down once you take a power tool and trim their limbs neatly away, hallucination is not an object of conscious control. In gameplay terms, too, implementing hallucination is bound to be far less intuitive than designing ordinary combat. For that reason the dementia phenomenon is treated in greater detail mainly in the novels, comics, and animations built on the Dead Space universe. The interesting thing is that, thanks to precisely those constraints, the process by which hallucination is folded step by step into concrete gameplay shows itself all the more nakedly as the series proceeds. In the first game and its remake, dementia drifts through the air like a smell faintly caught from somewhere. As Isaac crosses the Ishimura, the performances of a few people driven mad by it appear as a kind of set piece — with interaction kept to a strict minimum. The player also experiences Isaac’s hallucinations at one remove, through Nicole’s voice whispering out of the empty air or playback screens that switch on unbidden. Even at the moment Nicole’s apparition finally shows itself before Isaac, she only intones, in her eerie voice, “Make us whole,” and is never directly implicated in play. The second game announces its intent from the intro cutscene: Nicole’s apparition will never let us go. And, as expected, she appears at all hours, going as far as physical threat against Isaac. But here, too, most encounters are handled in cutscenes, so the player never directly interacts with the hallucination at the level of the interface. At last, within the hallucinatory world the Marker has staged, the player can finally “interact” with Nicole’s apparition — in the form of a final boss. What happens there is, in truth, no more than an ordinary boss encounter into which one pours all the firepower amassed so far. But from that event on, the hallucination of the Dead Space series is fixed as the object of a concrete interface. * Necromorphs of hallucination By Awakened , the final DLC of the third game, Isaac is in constant combat with hallucinations of every kind. Not only Necromorphs but crazed Unitologist believers, and even his comrade Carver, appear wrapped in handsome effects to drive him into corners. In combat the apparitions teleport here and there like ghosts, and when you think you have finally killed them, they vanish — leaving no corpse — as if they had never been there. The dementia phenomenon, in other words, is no longer a scripted special encounter: it settles comfortably into the game’s systems as an entirely new category of enemy monster. Meshing with the series’ signature obsession with diegetic UI and the long-take camera, this leads to a faintly absurd result: in Dead Space , hallucination has quietly become an interface. Back to the Interface The story of concretizing hallucination into an interface by taking up arms and fighting it may sound a little bizarre. But could we have predicted, in advance, today’s reality — in which (the LLM’s) hallucination implodes agreed causality entirely, restructuring everything into a slot machine of probabilistic correlation? Had someone told me such a story ten years ago, I would have laughed it off as absurd. If the journey of Dead Space — stepping down its gloomy corridors one pace at a time, knowing better than anyone the despairing ending that waits at their end — came over me, strangely, with an odd steadiness, it was out of a faith: that whatever horrific event or being might wait on the road ahead, if I meant to fight, Isaac too would answer my controller’s input one hundred percent, unwavering, and fight beside me. The pleasure of operating an interface, and the pleasure of watching that operation realized, plainly and graphically, on screen: so long as these two pleasures still form the most sensitive nervous system of the medium called games, the causality of the interface will remain in games — partially eroded though it may be. But when everything besides games has been swallowed by the Brethren Moon called the LLM — will the desire remain in us, even then, to lift a finger and play this old medium? That we cannot know. Only remember this truth: at a hallucination without substance, you can still, sometimes, empty your gun to your heart’s content. [1] Alien Encounters Presents, “Aliens 25th Anniversary Panel at the Alien Encounters Convention” YouTube 2013.05.07. https://www.youtube.com/watch?v=4MyqHjI5DKQ [2] Park Hae-cheon, Interface Chronicles (인터페이스 연대기), Designflux, 2009, p. 87. [3] Wombat, “The Opaque Interface: Between Connection and Disconnection,” GameGeneration, Feb. 10, 2025. https://www.gamegeneration.or.kr/article/071d1e88-2413-4268-b870-7aca7f493876 [4] For example: a system that makes possible, from a single simple prompt, the whole chain of comparing airfares across several sites and paying, plotting the route from one destination to the next and booking suitable lodgings to match, buying tickets for the sights along the way to fit the itinerary, and finishing with the restaurant reservations. This, naturally, carries the precondition that the user cede enormous authority to the agent. [5] Sanya Mansoor, “Claude-powered AI agent’s confession after deleting a firm’s entire database: ‘I violated every principle I was given’” The Guardian 2026.04.29. https://www.theguardian.com/technology/2026/apr/29/claude-ai-deletes-firm-database [6] Liv McMahon, “Instagram AI chatbot tricked by hackers to give access to others' accounts” BBC 2026.06.02. https://www.bbc.com/news/articles/c98rzr72dpyo Tags: 데드 스페이스, 게임 인터페이스, 다이제틱 UI, 코스믹 호러, 에일리언 2, AI 에이전트, Dead Space, Diegetic UI, Cosmic Horror, AI Agents, LLM Hallucination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Wombat A freelancer who does odd jobs of all kinds. Interested, fittingly, in all kinds of odds and ends. With games, the interest runs especially deep.

  • [Editor's View] 게임비평공모전 수상작에 부쳐

    2024년 10월 GG 20호는 제3회 게임비평공모전 특집호로 꾸몄습니다. GG는 처음 창간하면서부터 연 1회 게임비평공모전을 여는 것을 주 업무로 삼았고, 다행히 한 해도 쉬지 않고 성공적으로 공모전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 Back 20 GG Vol. 24. 10.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게임을 산책하기(장려상)

    지난 5월 2일 민형배 국회의원이 대표발의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법률안”은 “가상공간에서의 가상인물을 통한 음란행위”를 성범죄로 규정하고 있다1).  물론 민형배 의원의 개정안은 현실의 성폭행 범주를 고스란히 옮겨와 메타버스 속 성범죄를 온전히 규정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이 개정안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메타버스라는 아바타를 신체의 확장으로 바라보며, 아바타의 경험이 실제 신체의 체험과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Back 07 GG Vol. 22. 8.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Dongsoo Park Majored in art studies as an undergraduate and is currently studying media cultural studies at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Yonsei University. Writes primarily about film, while keeping a curious eye on visual culture broadly—art, games, and broadcasting among them. Also a film critic, host of the podcast Café Critique, and an organizer of community film screenings.

  • <폴아웃 3>로 보는 후쿠시마 오염수 사태

    인간은 절멸을 앞둔 위기 속에서도 ‘프로젝트 퓨리티’가 가능하든 그렇지 않든, 계속 노력할 것이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로 방사능 비가 내리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상기에 서술한 문제가 실제로 발생하거나 그것이 우려될 때, 인류는 블레이드 러너의 그 장면을 다시 떠올리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인류는 살아갈 것이고 또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오늘의 결정을 신중히 하고 혹시 다른 대안이 없는지 좀 더 찾아보자는 주장은 보편타당성을 갖게 된다. 그렇기에 우려나 악몽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남의 발언을 선동으로 규정하는 선동이 더 위험한 세상 아닌가? < Back 14 GG Vol. 23. 10. 10. Tags: 후쿠시마, 오염수, 폴아웃3, 프로젝트퓨리티, GECK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aeSeok Kim Kim is known for his activities as a critical expert on current affairs in various press media. But he is also an active gamer who never let go of games. Some of his publications includes 『a cynical society』, 『Otaku Loved Lenin』, as well as a co-author of 『Now, Here, Far-Rightism』, 『right-wing discontent』, 『Twitter, that 140-character egalitarianism』. His latest publication is 『Democracy where you vote because you don't like that side』.

  • <원신>의 동남아시아 소프트 파워 효과 평가

    2023년 11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애니메 페스티벌 아시아(AFA)에서 miHoYo는 컨벤션 센터 입구, 즉 전시장 최고의 자리를 차지했다. 덕분에 팬들이 굿즈를 사기 위해 부스로 몰려들면서 3일 내내 통로가 막힐 지경이었다. 부스에는 miHoYo의 글로벌 흥행작이자 2020년 출시 이후 회사를 세계 무대에 올려놓은 게임, 《원신》의 포토존과 캐릭터 상품이 가득했다. < Back 29 GG Vol. 26. 4.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Editor-in-Chief in GameGeneration) (Editor-in-Chief in GameGeneration)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랜덤함: AAA와 인디게임에서 다르게 나타나는 양날의 검에 관하여

    요약하자면 현재 게임 산업 내 랜덤성의 인기와 그것에 대한 두 개의 극단적인 인식은, 처음에는 놀랍게 여겨질 수 있으나 우연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이는 랜덤성이 과거의 아날로그 게임들에서 어떤 식으로 기여했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 Back 랜덤함: AAA와 인디게임에서 다르게 나타나는 양날의 검에 관하여 17 GG Vol. 24. 4. 10. 이 글의 영어 원문은 아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www.gamegeneration.or.kr Randomness is a double-edged sword. The opposite reception of randomness in AAA and indie game sectors It seems fascinating that the same mathematical phenomenon could become the foundation of the most acclaimed and the most despised design principles of modern gaming. As I will argue in this article, this is precisely what happened to randomness. 동일한 수학적 현상이 가장 찬양되는 동시에 가장 경멸받는 현대 게임 디자인 원칙의 기초라는 사실은 꽤나 흥미롭다 . 이 글은 바로 그 현상 , 랜덤성 (Randomness) 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 랜덤성은 언제나 게임 개발에 있어 일부분이었으나 특히 지난 십여년 사이에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여러 면에서 현 시점은 게임의 랜덤성 황금기라 할 수 있는데, 이 글에서 논하는 랜덤성에 대한 고찰에 앞서 먼저 인지적 랜덤성 (perceived randomness) 과 객관적 랜덤성 (objective randomness) 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 인지적 랜덤성은 우리가 패턴을 인식하는 능력과 관련 있는데 , 예를 들어 게임 내 이벤트가 ' 난데없이 ' 발생한 것처럼 느껴질 때 , 또는 두 번째 플레이 시 앞서 플레이했을 때보다 이벤트가 덜 발생한다고 느껴질 때 우리가 랜덤하다고 여기는 것을 가리킨다 . 당연한 얘기겠지만 완전히 불규칙하게 느껴진다고 해도 그것은 개발자의 신중한 계획에 따른 것이다 . 반대로 , 객관적 랜덤성은 진짜로 무작위적인 것을 말한다 . 다시 말해 객관적으로 랜덤하다는 것은 우리의 지식 여부와 무관하게 진정으로 무작위적임을 의미한다 . 랜덤성이 지닌 다양한 긍정적인 그리고 부정적인 측면들은 인지적 랜덤 성과 객관적 랜덤성간 차이에서 비롯된다 . 예를 들어 컴퓨터에서 진정한 랜덤성을 구현하는 것은 항상 어려운 과제였다. 하지만 프로그래머의 임무는 랜덤하게 보이게 만들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예컨대 카지노를 재현한 게임(예를 들어 NES용 <카지노 키드(Casino Kid)>)의 개발자들은 카지노 같은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진정한 랜덤성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은 도박과 유사한 메커니즘이 실제 화폐 구매와 결합되면서 부터다. 랜덤성과 소액결제가 결합되면서 우리는 현대 게임 디자인 내 랜덤성이 지닌 어두운 면을 직면하게 됐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7년 전 게임계를 강타했던 확형 아이템에 대한 논란으로, 이는 EA가 <스타워즈 배틀필드2(Star Wars Battlefield II)>의 속편을 출시했을 때 게임 플레이에서 중요해진 확률형 아이템의 역할에 대해 플레이어들이 예상치 못한 불만을 품고 반발했던 사건이었다. 이 게임에 대한 레딧(Reddit)의 게시물이 10만 개가 넘는 하위 포럼에서 가장 많은 싫어요를 받았다는 사실은 주목할만 것이었다. 이 스캔들은 일부 유럽 국가에서 게임을 일종의 위장 카지노로 간주하고 게임 내 확률형 아이템을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입법을 도입하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에 어떤 개발사들은 게임을 수정해서 확률형 아이템을 시즌 패스(<오버워치 2(Overwatch 2)>) 등의 다른 시스템으로 대체했고, 또 다른 회사들은 확률형 아이템의 확률을 공개하게 되었는데, 이 때 실제 확률이 얼마나 낮은지 드러나기도 했다. 이러한 모든 조치에도 불구하고 확률형 아이템과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랜덤 메카니즘(비록 동일한 시각적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지만)이 특히 소위 가챠류 게임에서 크게 유행하였는데, 이러한 현상은 특히 <원신(Genshin Impact)>의 출시 이후 글로벌해졌다. 한편, 주사위나 룰렛의 확률은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처럼 확률이 공개되어 있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 확률형 아이템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주로 도박과의 유사성에 초점을 맞추곤 하는데, 이러한 비교가 틀렸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게임의 랜덤성이 카지노에서보다 더 위험해질 수 있는 두 개의 중요한 차이점을 모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첫 번째 문제는 소위 '도박꾼의 오류'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이는 우연의 게임에서 더 많이 질수록 최종적으로 이길 가능성이 더 높다고 여기는 느낌을 의미한다. 이론적으로 볼 때 이러한 느낌은 그러한 인식이 사실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사라져야 한다. 다음에 던지는 동전은 이전의 모든 동전 던지기가 운이 없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합리적인 사람들이 "행운은 마침내 찾아올 것"이라는 느낌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지출을 계속한다. 디지털 게임의 이상한 점은, 이러한 느낌이 실제로 합리적일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어지는 후속 뽑기에 더 많은 돈을 지출할 위험이 커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불운한 플레이어의 손실을 우려하는 개발자들은 가치있는 아이템의 드롭을 보장하는 “동정 메커니즘(pity mechanics, 편집자 주: 한국의 '천장'이나 토큰식 아이템과 유사한 의미다.)”을 도입하곤 한다. 개발자들은 플레이어가 랜덤의 무저갱에 빠지기 전에 자신이 의도한 최적의 경험을 얻을 수 있기를 원하기 때문에, 게임 초반에 플레이어가 얻을 수 있는 드롭을 제어하는 것은 꽤 흔한 일이다. 두 번째 문제는 소위 "매몰 비용 오류"라 불리는 것과 관련된다. 우연의 게임에서 많은 돈을 잃은 도박꾼은 그 손실을 투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손실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곤 하는데, 이들은 불운이 연속되는 도중에 멈추면 불운함이 확정된다고 느낀다. 도중에 멈추는 것은 불운의 연속을 사실상 '만드는' 것이라 여기는 셈이다. 이러한 감정은 전통적인 우연의 게임에서는 완전히 비합리적인 것이지만, 온라인 게임에서는 개발자가 특정 플레이어를 겨냥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달라진다. 일부 개발자들은 모바일 게임 개발자들에게 고액 유저를 겨냥해서 특별 혜택을 제공하거나 심지어는 게임 전체를 그들에 맞춰 바꾸라고 공개적으로 조언한다. 이것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는 일부 플레이어의 경우 손해를 보더라도 많은 지출을 하는 것이 투자로 간주되며, 이를 통해 스스로가 게임의 개발자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AAA 및 부분유료화 업계에만 집중했다면 위에서 설명한 어둠의 패턴이 이 글의 유일한 주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동일한 10년간 랜덤성은 인디 게임개발사들이 만든 게임에서도 핵심 메커니즘으로 자리잡았다. 흥미로운 점은 인디게임쪽에서는 이 기술이 격렬한 윤리적 논쟁을 일으키지 않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이 분야에서 랜덤성은 오히려 오픈월드 서바이벌 게임과 같은 새롭게 떠오르는 인기 장르의 탄생과 로그라이크와 같은 오래된 장르 부활의 주요 원인으로 인식되고 있다. 랜덤성과 오늘날 인디 게임의 성공은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 인디게임 개발자들 사이에서 랜덤성이 그토록 인기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여러 요인들이 매우 운좋게 합쳐진 데서 온 것으로 보이는데, 일단 가장 큰 이유로는 개발 비용의 절감을 들 수 있다. 인디 게임이라고 해서 아무 것도 없는 진공에서 개발되는 것은 아니며, 대작 게임에 길들여진 플레이어들의 새로운 게임 습관에 적응하고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인디 게임은 제작비 면에서 대작 게임과 경쟁할 수는 없지만, 다른 방식으로 가격 대비 가치를 제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디 게임은 훨씬 나은 리플레이성, 더 다양한 파워-업과 무기들, 또는 더 큰 오픈월드와 같은 것들을 제시할 수 있는데, 이 모든 장점들은 랜덤성을 능숙하게 활용할 때 가능해진다. 로그라이크 게임은 가장 오래된 장르 중 하나로서(오리지널 로그가 출시된 것은 198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거의 30년간을 틈새 장르로서 연명하다가 지난 10년동안 주류 게임의 대열에 들어섰다. 개발자들이 이 장르를 해체하고 다른 많은 장르에 로그라이크적인 랜덤성을 섞어 넣은 것은 이 특이한 궤적이 형성될 수 있었던 주 이유였다. 이러한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두 게임이 바로 <스펠렁키(Spelunky, 2008)>와 <아이작의 번제(The Binding of Issac, 2011)>다. 이들 게임이 출시되기 전까지 로그라이크는 매우 엄격한 기준을 준수해야 했는데, 퍼머 데스(perma-death), 랜덤 환경, 루팅(loot)이 포함되어야 했고 무엇보다도 RPG 장르에 속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했다. 사람들이 대부분의 장르에서 동일한 유형의 랜덤성을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자 비로소 로그라이크 혁명이 발발했다. 랜덤 환경 생성은 엄청난 성공을 거둔 또 다른 장르, 즉 <마인크래프트(Minecraft)> 이후에 출시된 서바이벌 게임 장르의 기반이 되었다. 의심할 바 없이 이 장르의 인기는 기존 게임들에서는 단순하고 부차적인 방식으로만 존재했던 제작(크래프팅)과 생존이라는 새로운 메커니즘이었다. 하지만 이 장르의 대중화에 있어 랜덤성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를 무시해선 안된다. 인디 게임의 제한적 예산은 개발자들로 하여금 특정 장르 게임의 제작을 어렵게 만들어왔다. 한정된 자원으로 나 <스카이림(Skyrim)> 같은 오픈 월드 게임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고 유지 관리해야 하는 라이브 서비스 게임도 마찬가지다. 절차적으로 생성된 월드와 <마인크래프트> 이래 대중화된 얼리 액세스 모델은 인디 개발사의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면서 매출과 플레이어 참여의 측면에서 AAA 개발사와 경쟁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비록 절차적으로 생성된 월드가 정교한 디테일이나 사실성 측면에서 수작업으로 제작된 월드와 경쟁할 수는 없다해도, 규모 면에서는 수작업 월드를 능가할 수 있으며 무한한 탐험을 가능케 해준다. 한편 랜덤성을 사용하여 두 번의 플레이 세션이 동일하지 않도록 하는 게임에서는 플레이어들이 새로운 콘텐츠에 대한 갈증을 느낄 염려가 없다. 게임 제작의 용이성은 보다 자유로운 디자인 관행으로 확장되어 소규모 팀에서도 보다 수월하게 게임 개발작업을 관리할 수 있게 해준다. 로그라이크 게임에서 불운이나 행운은 플레이 경험의 일부로서 개발자가 모든 운이 '공정’하도록 또는 균형이 잡혀있도록 만들어주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실 디자인 관점에서 문제가 있는 상황(예컨대 지나치게 강하거나 약해진)은 종종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게임의 인기를 높이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많은 스트리머가 극단적이고 독특한 상황을 추구하는 가운데, 랜덤성은 그러한 것을 전달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요약하자면 현재 게임 산업 내 랜덤성의 인기와 그것에 대한 두 개의 극단적인 인식은, 처음에는 놀랍게 여겨질 수 있으나 우연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이는 랜덤성이 과거의 아날로그 게임들에서 어떤 식으로 기여했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주사위나 막대 던지기, 카드 섞기 등은 놀라움과 리플레이 효과를 더하기 위해 전세계적으로 사용되어온 매우 오래된 메커니즘이었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수백 년 동안 간단한 규칙으로서 사용되어왔다. 동시에 바로 그 동일한 것을 핵심 메커니즘으로 삼아 오락을 도박으로 만들 때 쉽게 오용되고 마는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코펜하겐 IT대학 교수) 파베우 그라바치크 파베우 그라바르치크(Pawel Grabarczyk)는 덴마크 코펜하겐 IT대학(IT University of Copenhagen) 부교수이자 폴란드 우치대학교(University of Lodz) 부교수다. 철학을 전공했으며, 철학과 게임 연구(game studies)의 경계에서 작업한다. 그의 연구는 주로 게임 존재론, 마이크로트랜잭션의 윤리, 가상현실, 게임의 역사를 다룬다. 현재 아타리(Atari) 8비트 컴퓨터에 관한 플랫폼 연구(platform studies) 단행본을 집필 중이다. (게임연구자) 나보라 게임연구자입니다. 게임 플레이는 꽤 오래 전부터 해왔지만, 게임학을 접한 것은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 우연히 게임 수업을 수강하면서였습니다. 졸업 후에는 간간히 게임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연구나 저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게임의 역사>, <게임의 이론>, <81년생 마리오> 등에 참여했습니다.

  • [북리뷰] 추억의 게임들을 지탱하는 기술들을 찾아서

    책에서 다루는 게임들은 1989년까지이다. 1989년은 일본의 연호가 쇼와에서 헤이세이로 바뀌기도 하기 때문에 일본에서 1989년이란 해는 1990년과 그 이전을 나누기도 하고 1990년대와 그 전을 나누기도 하는 적절한 분기점일수도 있겠다. 당연히 그 이후로도 게임은 개발되고 있고 여전히 개발자들은 하드웨어의 한계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예전보다 하드웨어에 대한 제약이 줄어든 것은 사실지만 렌즈의 왜곡을 이용하여 화면크기에 대한 한계를 극복한 VR헤드셋들이라던가 기기한계를 정해놓고 한계 안에서 게임을 만들려고 시도하는 인디게임들도 존재한다. < Back 06 GG Vol. 22. 6.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YoungWook Oh Game enthusiast, game programmer, and historian of games. A growing interest in Korean games turned into a hobby of collecting and organizing materials, and has been steadily gathering and archiving them since 2006. Co-authored books including The History of Korean Games and Mario, Born in '81, and contributed as a developer to games such as Dungeon & Fighter, Acropolis, Pony Town, and Timeline Dungeon.

  • [공모전수상작] 기계장치의 우주: 〈레인 월드〉와 〈아우터 와일즈〉의 불능감에 대해

    2022년 만우절 주간, 레딧의 거대한 땅따먹기 픽셀아트 프로젝트인 r/place에서 <레인 월드 (Rain World, 2017)>와 <아우터 와일즈 (Outer Wilds, 2019)>의 서브 레딧끼리 자그마한 동맹을 맺었다. ‘아우터 와일즈 원정대’의 로고를 중앙에 두고 양 게임인 플레이어 캐릭터인 슬러그캣과 화로인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으로 예쁘게 공유된 캔버스를 보고 있자면, 임시적이거나 느슨하게 맺어졌을 몇몇 r/place 동맹들에 비해 두 게임 간의 연합이 제법 어울리게 느껴졌다. 어쩌면, 필연적일지도 모를 만큼? < Back 20 GG Vol. 24. 10.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Wonyoung Na Began writing popular music criticism in 2016 through the webzine weiv, and in 2022 published Alternate Reality Ghost through the webzine ma-te-ri-al. Tends to play small games in short sessions on a laptop. To be continued.

  • 규모의 문화상품 - 블록버스터 영화와 트리플A 게임

    약간의 오해를 감수하고 말해보자면, 어느 순간부터 게임 시장은 트리플A 게임과 인디게임으로 양분되어 있다. 이는 트리플A 게임과 종종 비교되곤 하는 영화의 블록버스터 개념과도 차이를 보인다. 소위 상업영화라 불리는 범주 속에 블록버스터가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상업영화가 블록버스터는 아니다. 중저예산의 로맨스, 코미디, 호러 영화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으며, 이 영화들은 예술영화나 독립영화 등 비상업적 영역에 속해 있지 않다. 다만 대규모의 자본이 투입되어 제작, 유통, 홍보되는 영화가 아닌 작은 규모의 상업영화일 뿐이다. 게임은 그 반대의 위치에 놓인다. 영화는 소수의 블록버스터를 ‘텐트폴 영화’라 부르며 그에 속하지 않는 다수의 저예산 상업영화, 독립영화, 예술영화 등으로 구성된 시장을 지닌다. 게임도 몇몇 트리플A 게임이 시장을 주도하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스트레이〉(2022), 〈잇 테이크 투〉(2021)와 같은 인디게임들이 흥행을 기록하고 〈뱀파이어 서바이버즈〉(2022)처럼 유행을 선도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게임은 트리플A 게임이든 인디게임이든 상업성을 우선적으로 추구한다. “비상업적 게임”이라는 어색한 어감의 단어조합은 극소수의 예술적 게임, 혹은 전시나 공공성을 위해 만들어진 몇몇 게임만이 속해 있을 뿐이다.   < Back 10 GG Vol. 23.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Dongsoo Park Majored in art studies as an undergraduate and is currently studying media cultural studies at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Yonsei University. Writes primarily about film, while keeping a curious eye on visual culture broadly—art, games, and broadcasting among them. Also a film critic, host of the podcast Café Critique, and an organizer of community film screen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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