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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프잇업의 플레이 분화에 놓인 '기계'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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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3. 4. 10.

편집자 주 - 이 글은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1990년대 이후 전자오락 문화의 변형에 대한 연구, 2023) 4장의 내용의 일부를 가져와 새롭게 재구성한 것입니다.  

앤서니 던에 따르면 전자제품의 사용자 친화적 인터페이스는 사용자들을 제품에 구현된 가치와 개념을 사용자들이 스스로 제품을 계속해서 사용하는 동안 학습시킨다. 이것이 전적으로 맞는 전제라고 가정한다면 게임도 마찬가지일까? 게임은 다른 전자제품들과는 다르다. 일반적인 상품은 그것이 완성되거나 완벽하게 조립된 것으로 제시된다. 하지만 소프트웨어로서의 게임은 완성된 상품이기도 하지만 그 소프트웨어가 제공하고자 하는 게임이라는 상품의 형태는 게이머의 ‘수행’이라는 행위에 의해서 각각의 게이머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체험된다. 소프트웨어로서는 완성된 상품이기도 하지만, 게이머가 게임을 수행하고 난 뒤에야 ‘게임’ 그 자체는 완성된다. 


그런데 게임이라는 것은 보통 비물질적인 무엇인가로 인지된다. 특히 개인용 컴퓨터와 콘솔게임기는 물론이고 스마트폰과 같이 모바일기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현재의 게임은 네트워킹을 기반으로 하기에 더욱더 비물질적인 것이라는 상상이 견고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게임의 수행이라는 것은, 그 어떤 게임이라도 신체와 게임을 연결해주는 인터페이스를 통해 매개되어야만 가능하다. 즉 인터페이스를 통해 게임의 소프트웨어와 게이머가 연결되지 않으면 게임이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처럼 게임은 그 물질적인 토대가 확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게임 수행(performance) 혹은 게임 플레이라는 물질적 차원의 행위가 가지는 힘에 주목해야한다. 인터페이스로서의 조작장치와의 상호작용은 게이머가 단순히 게임에 신호를 전달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자신의 신체의 움직임을 체험하는 동시에 그 움직임이 화면이라는 인터페이스를 통해 재현되는 것을 종합하여 게이머들의 신체에 각인되는 총체적 감성과 지성이 작동하는 행위이다. 즉 인터페이스를 매개로 이뤄지는 게이머의 게임 수행은 손과 몸으로 ‘사물’을 더듬으며 지혜를 얻는다는 제작(make) 행위와 연결되는 지점인 것이다.  


제작 문화(메이커 문화)에서 무언가를 직접 만들어보는 경험은 주요한 정치적 행위이다. 손과 몸으로 사물을 더듬어가며 지혜를 얻는 것은 사물의 속성을 파헤치고 그 안에 내재된 설계를 간파해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제작 문화의 차원에서 게임을 바라보려는 접근은 있어왔다. 흔히 모드(mod)라고 부르는 ‘플레이어 혹은 이용자에 의한 수정 및 변경’을 통해 게임을 변형시키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 ‘모드’라는 행위는 기술적 소양이 일정부분 쌓여있는 소수의 사람들만 가능한 게임 실천이라는 한계를 가진다. 게다가 모드행위에만 집중한다면 게임을 즐기는 평범한 게이머들이 수동적이며 그들의 게임 실천은 행위능력을 가지지 못했다라는 견해를 갖게 만들 위험성도 있다. 


제작문화라는 것이 손과 몸으로 사물을 더듬어가면서 사물의 속성을 파헤치고, 그 설계를 간파하는 것이라고 할 때, 게임 수행은 손과 몸을 이용해 게임기의 인터페이스를 더듬어가며 게임을 이해하는 제작 행위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일반 게이머들도 게임 수행을 통해 게임의 설계에 접근하고, 비판적 제작 혹은 해킹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행위를 할 능력이 있지 않을까? 이제부터 〈펌프잇업〉이라는 게임이 명확한 게임성을 갖고 있지 못했던 시기, 즉 하나의 게임기에서 다른 게임을 즐길 수 있었던 시기를 되짚어보며 확인해보도록 하자.



게임의 공연성


1990년대 말부터 리듬게임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게임이 전지구적 유행을 하게 된다. 이는 1997년 일본 코나미라는 회사의 〈비트매니아〉의 출시 이후로 시작해 〈댄스댄스레볼루션〉의 대히트에 기인할 것이다. 한국에서는 〈펌프잇업〉이 크게 유행했다. 〈펌프잇업〉은 춤이라는 놀이가 게임에 매개되어 들어간 아케이드 게임이다. 리듬게임은 전자오락실을 일종의 공연장과 같은 분위기로 만드는 효과가 있었는데, 〈펌프잇업〉은 이런 게임의 공연성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전자오락실 업주들의 업주들은 이런 〈펌프잇업〉의 공연성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펌프잇업〉을 위시로 한 리듬게임의 유행에 따라 어두컴컴하던 전자오락실은 점점 환해지고, 외부에서도 〈펌프잇업〉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잘 지켜볼 수 있게 하려고 하였다. 또한 〈펌프잇업〉의 숙련도가 상당한 수준으로 올라가 있는 이용자에게 게임을 공짜로 즐길 수 있게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는데, 이는 일종의 광고 수단으로 사람들을 자신의 업장으로 유인하는 전략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퍼포먼스 혹은 프리스타일 플레이


게이머들은 게임 설계에 내장된 규칙에 따라 게임을 진행한다. 대다수가 알고 있겠지만, 〈펌프잇업〉의 규칙은 간단하다. 특정한 곡을 선택하면, 게임이 제공하는 리듬에 맞춰 화면에 표시되는 화살표(노트)에 맞춰 발판을 발로 밟는 것이다. 〈펌프잇업〉이 게이머들에게 요구하는 목표는 두 가지이다. 정확하게 발판을 밟아서 일정 점수를 획득하여 다음 단계로 진행하는 것이다. 두 번째 목표는 다음 단계로 진행하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고득점을 획득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게임이 게이머에게 제시하는 목표와 게이머들이 게임을 하고자 하는 목적이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다. 게이머들이 궁극적으로 게임을 하는 이유는 ‘재미’있기 때문일 것이다. 게임이 게이머에게 제시하는 목표를 완수해가면서 재미를 찾을 수도 있지만, 꼭 그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할 필요는 없다. 〈펌프잇업〉은 앞에서 이야기했듯 춤이라는 것이 매개되어 들어가 있는 공연성이 강한 게임이다. 숙련도를 쌓은 게이머들에게 〈펌프잇업〉의 플레이는 게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게임을 바라보는 구경꾼들에게 보여주는 ‘공연’이기도 했다. 


따라서 게이머들은 그들이 흔히 갤러리라고 칭하던 구경꾼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화려한 게임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고득점을 노리는 게임에서 구경꾼들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공연으로 변모하자 일정 점수를 획득해서 게임을 다음 단계로 진행시키는 규칙은 중요하지만, 고득점을 획득해야한다는 게임의 규칙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된다. 이렇게 〈펌프잇업〉은 춤을 추면서 구경꾼과 상호작용한다는 새로운 게임으로 변모해간다. 


이렇게 변화된 새로운 게임에서는 자신들이 구상한 안무를 위해 의도적으로 게임에서 밟으라고 강제하는 발판을 밟지 않아도 ‘게임오버’가 되지 않는 선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신들의 보여주고 싶은 안무를 위해 1P와 2P의 발판을 모두 이용하는 ‘더블 모드’가 선호되었다. 이렇게 되자 게임성이 변화하자 게임의 인터페이스를 이용하는 방식도 변화되었다. 게이머들의 안전을 위해, 또 정확하게 발판을 밟을 때 이용하라고 설치된 안전 바를 잡는 것은 추한 행동이 된다. 안전 바를 뛰어넘는다던가 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안무에 이용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안전 바는 자신들의 퍼포먼스를 제약하는 방해물로 인식되었다.  


게임제작사도 자신들의 설계와는 다른 방식으로 게임이 이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설계를 고수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런 이용방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이는 〈펌프잇업〉이 전국적인 유행을 하자 게임 제작사가 개최한 전국대회가 어떻게 치러졌는지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심사위원들이 피플크루 막 이랬어요. … (중략) … 결국 비보이들이 심사위원을 봤어요. … (중략) … 심사도 일단 뭘 얼마나 멋있게 하던 간에 하다가 죽으면 탈락이에요. 그거는 확실했어요. 그 규칙은 있었어요. 하다가 죽으면 안 된다. 점수도 중요하긴 하죠. … (중략) … 그러니까 심사위원석에 있으면 이게 보여요. 이 사람이 딱 추고 있는 걸 보면 이 사람은 (춤)선이 있는 사람이다. 잘 춘다. 한눈에 확 들어오는 그런 사람들을 따로 체크를 해두죠.”


“이제 2회 대회 때 우승했을 때 상금 500만 원에 부상으로 컴퓨터 하나 그리고 안다미로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그런 자격 같은 것도 있었어요. … (중략) … 이제 조금 잘 하는 사람들한테 채보 작업5)을 맡겼어요. 그러니까 이제 춤추고 이렇게 좀 유명하고 잘하는 사람들한테 채보 작업을 맡겨서 (중략)” 



 명확한 심사기준은 오로지 ‘게임 오버’가 되지 않는 것이었고, 게이머들이 어떻게 춤을 추는가를 심사했다. 고득점이라는 〈펌프잇업〉에 내장된 규칙은 동점자 처리용 정도로만 사용되었다. 발판이라는 인터페이스는 게이머의 ‘발’의 움직임만을 요구했으나 게이머들은 발판이라는 인터페이스 위에서 자신의 ‘온 몸’을 이용해 게임을 적극적으로 즐겼고, 이런 게임 수행은 게임제작사에도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게임의 방향성을 변경시키는 비판적 제작 행위 혹은 해킹적 실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스테퍼들의 창조적이면서도 수동적인 플레이

 

〈펌프잇업〉에서 퍼포먼스 플레이만이 유행을 했던 것은 아니다. 일명 ‘스테퍼’라고 불린 집단도 존재했다. 이들 역시 게임기의 발판이라는 조작장치 위에서 발 뿐만 아니라 무릎, 손, 머리 등을 이용한다. 하지만 이들이 퍼포먼스를 펼친 이유는 퍼포머들과는 달랐다. 이들은 게임이 제공하는 난도로 표현되지 않을 만큼 더 높은 수준의 숙련도를 가지고 있음을 뽐내고 싶었던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퍼포머들은 같은 기계를 이용하지만 다른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즉 〈펌프잇업〉이라는 ‘무대’는 공유하지만 ‘다른 공연’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퍼포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멋’이지만 스테퍼들에게 중요한 것은 ‘점수’이다. 쉽게 발로만 누르는 것이 아니라 무릎, 손, 머리 등으로 발판을 누르면서 스스로 난도를 높였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점수를 획득하는 것을 통해 그들의 숙련도를 보여준다.  


게임이란 무릇 후속작이 나올 때마다 게임의 난도가 올라 신규 게이머들의 유입이 어려워진다는 경향이 존재한다. 채보 작업에 스테퍼들이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이런 경향이 급속도로 진행된다. 왜냐하면 스테퍼들에게는 난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특별히 안무를 짜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이 가능했으며, 어려운 채보를 진행하는 도중에 퍼포먼스를 구사하는 편이 자신들의 숙련도를 더욱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플레이는 난도를 높이기 위해서라는 측면에서는 창조적인 게임 수행이지만, 동시에 게이머 스스로가 게임의 재미를 능동적으로 찾기 보다는 게임이 제공하는 장애믈을 넘어서는 것에 의존한다는 점에서는 수동적인 플레이라 할 수 있다.  


“옛날에는 이제 그거(퍼포먼스)를 하면서 위에서 멋있게 하고 그런 것들이 먹히는 시대였잖아요. 지금은 사실 그런 게 이제 잘 통용되지 않는 세상이 온 거죠. 펌프라든가 그런 것도 그때 당시에는 대중적으로 사람들이 그런 걸해도 괜찮다는 분위기가 있었으니까 사람들이 구경하고 했지만, 요새는 글쎄요.” 


퍼포머와 스테퍼들이 가지고 있는 게임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은 경합을 했고, 결국 스테퍼들이 지배적인 게이머 집단이 되었다. 퍼포머들의 공연은 조금씩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취급받기 시작했고 게임기에 손상을 가하는 옳지 못한 행위로 간주되기까지 되었다. 스테퍼들이 바라는 대로 〈펌프잇업〉은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게임에서 무수히 쏟아지는 노트들에 대응해서 발을 이용에 입력하는 게임, 즉 본래의 〈펌프잇업〉이 강제하는 고득점을 얻는 것이 중요한 게임으로 또다시 변경되었다. 


* 초창기 〈펌프잇업〉의 채보.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DK8GyszjmUg&t=53s 에서 캡쳐.


인터페이스와 신체의 결합의 효과


〈펌프잇업〉은 한때 추한 행위로 여겨졌던 안전 바를 부여잡고 일반적 인간의 신체적 능력을 벗어난 빠른 발놀림, 즉 피지컬을 요구하는 게임으로 변했다. ‘온 몸’을 이용해 게임이 강제하는 규칙에서 벗어난 다른 의미들을 생산하는 게임 수행은 어려워졌다. 이제 게이머들은 안전 바를 두 팔로 움켜쥐고 자신의 몸을 기계와 연결시킨다. 이렇게 기계와 연결된 게이머가 게임을 수행하기 위해 이용하는 것은 자신의 다리 뿐이다. 춤이 매개된 온 몸을 이용하던 놀이는 전자오락기의 인터페이스에 자신의 몸을 연결해서 고정시키고 ‘다리’만을 사용한다. 


더 이상 나뉘어질 수 없는 의미의 개인(indivisual)으로 존재했던 게이머들은 이제 나뉘어질 수 있는 가분체(divisuals)라는 것이 된다. 〈펌프잇업〉의 발판이라는 인터페이스는 과거나 현재나 모두 살아있는 인간 게이머의 발동작을 요구했으나, 과거에는 숙련도가 쌓였다면 게임의 규칙을 벗어나 창조적으로 새로운 의미생산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펌프잇업〉은 온몸을 움직이며 발판이라는 인터페이스와의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상체를 인터페이스에 연결하고 고정한 뒤 자신의 몸에서 ‘상체와 하체를 분리’시킨다.  


이렇게 상체는 게임기의 일부가 되고, 신체에서 분리된 하체는 게임을 수행한다. 하체의 게임 수행은 이전처럼 무언가를 표현한다기보다는 자신의 신체를 얼마나 잘 제어하는지를 보여줄 뿐이고 게임에 입력되고 수치화되는 하체의 움직임만이 중요해진다. 게임을 잘 하기 위해서는 자기 신체의 역량을 증진, 즉 피지컬을 계발해야한다. 얼마나 잘 계발했는가는 게임 화면이라는 인터페이스에 점수와 등급으로 나타나고, 이것을 통해 다른 게이머들과 경쟁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춤이라는 의미 생산의 요소는 〈펌프잇업〉이라는 게임에서 희미해진다. 한때 두 가지 차원에서 즐길 수 있던 〈펌프잇업〉은 명확한 게임성을 가진 하나의 게임으로 수렴되었다.


제품의 디자인이 품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학습할 것인가? 아니면 제품의 설계에 내장된 행위유발성에 저항하여 방향성을 재설정 할 것인가? 이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당신이 게임과 연결되는 인터페이스를 어떻게 활용하면서 플레이하는가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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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문화연구자)

문화인류학과 문화연구를 전공하고, 현재 청계천기술문화연구실과 한양대학교글로벌다문화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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