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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란으로 1346개 검색됨

  • 초기 3D 그래픽의 미학, 인지적인 디지털 물성에 관하여

    2010년대를 중심으로 다시 반짝였던 포스트 디지털 담론에서 이어지는 미술 작업의 비쥬얼은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최신의 리얼한 그래픽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차라리 그들의 작업에서 나타난 비쥬얼적 특징은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중반까지 볼 수 있었던 낮은 품질의 3D 그래픽에 가까웠다. 이는 보다 리얼하고 현대적인 3D 그래픽 이미지를 미술 작가 개인이 구현하기에는 소요되는 자본과 기술의 한계가 따른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자면 적당한 수준의 3D 그래픽을 구현하는 데에 있어서는 굉장히 접근성이 용이해졌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그들은 로우-파이하고 한편으로는 레트로, 노스탤지어적인 기억과 선명함이 억압되는 특정한 디지털 이미지의 미학에 기대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 Back 02 GG Vol. 21. 8.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unhyung Ahn Active in the artist political party "Bad New Days" and in "Survey," a Marxist research institute. Recently, building on an interest in game media, undertakes critical writing on the politics of game media and on the systems of representation of in-game images, along with their attendant questions of subjectivity and ethics.

  • 게임을 산책하기(장려상)

    지난 5월 2일 민형배 국회의원이 대표발의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법률안”은 “가상공간에서의 가상인물을 통한 음란행위”를 성범죄로 규정하고 있다1).  물론 민형배 의원의 개정안은 현실의 성폭행 범주를 고스란히 옮겨와 메타버스 속 성범죄를 온전히 규정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이 개정안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메타버스라는 아바타를 신체의 확장으로 바라보며, 아바타의 경험이 실제 신체의 체험과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Back 게임을 산책하기(장려상) 07 GG Vol. 22. 8. 10. 지난 5월 2일 민형배 국회의원이 대표발의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법률안”은 “가상공간에서의 가상인물을 통한 음란행위”를 성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1) . 물론 민형배 의원의 개정안은 현실의 성폭행 범주를 고스란히 옮겨와 메타버스 속 성범죄를 온전히 규정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이 개정안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메타버스라는 아바타를 신체의 확장으로 바라보며, 아바타의 경험이 실제 신체의 체험과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메타버스 등의 용어로 불리는 가상공간을 쉽게 만나볼 수 있는 공간은 게임이다. 디지털 게임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는 가상의 공간 속에서 이동 및 탐험을 경험하는 것이다. 아타리의 게임 〈어드벤처〉(1979)의 이스터에그를 찾아내는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의 마지막 미션이 시사하듯, 게임이라는 경험의 본질은 공간을 탐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경험은 무엇인가? 앞서 언급한 메타버스 성범죄의 사례는 게임에서의 경험이 실제의 경험과 동등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MMORPG에서 타 유저와의 의사소통, 오픈월드 게임에서 마주하는 NPC와의 랜덤 인카운터 등은, 도시를 돌아다니는 현대인이 마주하는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발터 벤야민은 보들레르나 에드거 앨런 포 등 19세기 문필가의 작품을 분석하며, 대도시 군중의 모티프가 반복됨을 지적한다. 그는 이들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대도시 군중 속을 걷는 거리 산책자의 충격체험이 신문, 아케이드의 간판, 대중교통 등이 초래하는 대도시의 촉각적 경험과 충격으로 인해 발생했다고 분석한다 2) . 이는 변화하는 현대 파리의 모습을 보고 기억하는 산책자의 행위에 주목했던 보들레르의 관점이, 대도시 군중과 어깨를 부딪히며 나아갈 수밖에 없는 대도시의 산책자의 상황에 이르러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변화는 벤야민이 살아가던 1920~30년대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동시에 대도시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 가속화되고 있다. 어쩌면 벤야민이 말하던 충격체험은 대도시의 속도 속에서 삭제된, 폴 비릴리오의 말을 빌리자면 “속도에 의한 공간의 절멸”로 인해 사라지고 있는 경험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한 의미에서 디지털 게임이 구현하는 가상공간의 경험은, 삭제된 경험을 되살리는 것일 수 있다. 가상공간에서 서로의 아바타가 맞닿는 과정이 플레이어의 신체에 물리적인 충격을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디지털 게임은 인간에게 실제 살아가는 공간과 유사한 현실성의 공간을 제공한다. 이러한 디지털 공간의 현실성은 가상공간이 더 이상 실재가 아닌 가상이라 치부되며 실제의 열화된 버전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현실의 공간과 동등한 선상에 놓고 논의해야 할 필요성을 요구하게 된다 3) . 이러한 인식 속에서 게임이 제공하는 공간 경험은 신체가 느끼는 ‘정동적 놀람’의 상태를 동반한다. 게이머들이 〈레드 데드 리뎀션 2〉(2018) 속 아서 모건의 이야기에 동화되어 감동을 느끼거나,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2020) 속 엘리의 폭력적 복수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그러한 ‘정동적 놀람’ 상태의 대표적 예시다. 공간 경험에 기반한 정동적 놀람의 상태는 앞서 언급한 산책자의 충격경험과 유사하다. 앞서 언급한 예시를 이어가자면, 아서 모건의 여정을 함께한 플레이어의 경험은 광활한 게임 속 영토를 탐험하는 경험과 함께한다. 선형적인 구성의 내러티브를 따라가는 엘리의 여정을 함께하더라도, 그것은 게임 속 스테이지를 옮겨 다니던 이동의 경험이다. 다시 말해, 플레이어는 게임 속 플레이어블 캐릭터 혹은 아바타의 가상 신체를 통해 게임 속 공간을 돌아다니는 산책자가 된다. 그러한 산책자로서의 경험이 강조된 게임을 꼽자면 코지마 히데오의 〈데스 스트랜딩〉(2019)이 있겠다. 〈데스 스트랜딩〉은, 물론 전투가 존재하지만, 근본적으로 이동 자체에 초점을 맞춘 게임이다.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샘은 배송기사고, 멸망 이후의 미국 대륙을 횡단하며 생존에 필요한 물자를 이 쉘터에서 저 쉘터로 배송한다. 플레이어가 플레이하는 콘텐츠는 그러한 배송 자체다. 때문에 〈데스 스트랜딩〉의 핵심은 ‘배송하는 감각’을 재현하는 것에 있다. 디지털 게임이 게임기기의 입력장치를 통해 캐릭터의 움직임을 모방한다고 할 때, 〈데스 스트랜딩〉의 조작방식은 무거운 화물을 등에 짊어지고 움직이는 주인공 샘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체험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게임을 플레이하면 짊어진 화물의 중량에 따라 샘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플레이어는 그때마다 게임패드의 트리거 버튼을 알맞은 방향으로 눌러 샘의 무게중심을 잡아주어야 한다. 만약 무게중심을 잃은 샘이 넘어지게 된다면 짊어진 화물들이 쏟아지게 되고, 화물들을 다시 주워야 하는 것은 물론 화물이 데미지를 입게 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샘이 황량한 게임 속 세상을 걸어 다닐 때뿐 아니라, 바이크 등 탈것에 탑승하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플레이어는 샘을 통해 게임 속 세계를 산책하며 그곳을 경험한다. 게임패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는 물리적 경험은 게임이 지닌 가상공간 속에서의 체험을 강조한다. 물류를 배송하며 겪는 BT(Beached Things, 좌초된 것들)나 택배도둑 뮬(Mule)과의 전투, 시시각각 변화하는 기후에 따른 어려움 등은, 비록 벤야민이 정의한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일지라도, 일종의 충격체험을 플레이어에게 선사한다. 혹은 산책을 의도치 않은 게임 속에서 산책을 시도함으로써, 게임에 내재된 규칙을 전용하는 사례도 찾아볼 수 있다. 2021년 배틀로얄 게임 〈배틀그라운드〉(2017) 내에서 진행된 〈에란겔: 다크투어〉 퍼포먼스가 대표적인 예시다. 퍼포먼스는 온라인으로 접속한 다른 참가자들을 이끄는 리드 퍼포먼서로 게임평론가 이경혁, 디지털 스토리텔링 연구자 권보연, 기계비평가 이영준을 섭외하여 각기 게임을 잘 아는 원주민, 게임을 잘 알지만 다른 게임세계에서 이주한 이주민, 게임 자체를 모르고 완전히 낯설게 초대된 이방인 역할을 수행하게끔 하고, 게임방송 BJ를 섭외하여 퍼포먼스를 중계하였다. 〈배틀그라운드〉 속에서 리드 퍼포먼서 및 이들을 돕는 조교 역할을 수행하는 퍼포머들이 참가자들과 함께 게임 내의 지역인 ‘에란겔’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한다는 컨셉으로 퍼포먼스가 진행되었다. 〈에란겔: 다크투어〉의 메뉴얼은 "단 한 명의 생존자가 되기 위해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이"는 대신, "단지 총성을 멈추는 것만으로도 이 게임 공간 속에 의미가 풍부한 각종 오브젝트와 건물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 4) 이라며, 마치 몰락한 구 소비에트 연방의 어느 변두리를 연상케 하는 게임의 무대가 되는 가상공간 에란겔 섬에 대한 다크투어리즘을 제안한다. 참가자들은 플레이어가 아닌 관광객으로서 게임에 접속하고, 세 명의 리드 퍼포먼서가 진행하는 게임 내 강연의 청중으로, 다른 퍼포먼서 및 참가자들과 함께 게임의 가상공간을 산책하는 산책자로, 마지막에는 한자리에 모여 게임이 구현하는 동작의 한계 내에서 집단적인 의식의 춤을 추는 퍼포먼서로 참여하게 된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에란겔: 다크투어〉는 디지털 게임의 가상공간을 산책하고 관광함으로써 새로운 방식으로 그곳을 경험할 것을 제안한다. 세 리드 퍼포먼서의 강연은 기본적으로 디지털 게임이 그려내는 가상세계가 현실과 동떨어진 일종의 정서적 피난처나 단순한 유희공간이 아닌, 그것이 드러내는 이미지, 텍스트, 사운드, 규칙, 상호작용 등의 요소들을 통해 현실과 관계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령, 〈배틀그라운드〉가 묘사하는 가상공간이 지금의 모습이 되기 전에는 어떤 인류학적 장소였을 수 있다는 암시를 찾아내거나, 각기 다른 규칙이 존재하는 다른 가상세계 혹은 현실세계의 이야기를 에란겔의 상황과 중첩시키는 등의 방식을 택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게임을 전용하는 것은 보들레르가 말했던 산책자의 기억술을 대도시가 아닌 디지털 게임이라는 대안적 공간 안에서 소생시킨다. 또는 정말로 산책과 결합된 게임의 형태를 떠올려볼 수도 있다. 나이언틱이 개발한 〈포켓몬 고〉(2016)를 실행하면 구글맵(Google Map)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지도가 등장한다. 현실의 지리학을 고스란히 가져온 지도 위에 포켓스탑과 포켓몬 체육관이 표시되어 있고, 플레이어의 실제 위치는 스마트폰의 GPS를 통해 게임 내 캐릭터의 위치와 동기화된다. 〈포켓몬고〉의 지도는 아무런 지명, 건물명, 교통수단 정거장 등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 단지 텅 빈 지도 위에 공공시설, 역사적 장소, 공공성을 띠는 조형물 등이 포켓스탑의 형태로 등장할 뿐이다. 그것의 생김새마저 포켓스탑을 터치해야 등장하는 사진을 통해 볼 수 있다. 〈포켓몬 고〉의 플레이어는 평소라면 지나쳤을 장소에 게임을 위해 머무르게 된다. 이를 통해 익숙한 산책로, 등굣길, 출퇴근길은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게임의 공간은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접속 가능하지만, 게임의 가상공간 자체가 현실의 지리학을 따르는 덕분에 게임의 가상공간과 현실의 공간 사이의 위계가 무력화된다. 그럼으로써 〈포켓몬 고〉의 유저들은 새로운 지역 커뮤니티를 형성하기도 한다. 희귀한 몬스터를 사냥하고 포획할 수 있는 레이드나 인게임 재화를 얻기 위해 필수적인 체육관 점령 등 다수의 유저가 참여해야 하는 콘텐츠는 지역 별로 〈포켓몬 고〉 커뮤니티를 형성하게끔 유도한다. 굳이 오픈 채팅방 등을 통해 커뮤니티에 소속되어 있지 않더라도, 레이드나 체육관 점령 등을 위해 〈포켓몬 고〉를 켜고 산책하다 보면 다른 유저를 마주칠 수 있기도 하다. 그러한 상황을 발생시키는 것 자체가 〈포켓몬 고〉의 콘텐츠인 셈이다. 게임이 만들어내는 가상공간이 점차 현실의 공간과 위계를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소위 메타버스의 시대라 할 수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포켓몬 고〉의 사례는 그것을 물리적으로 입증하는 하나의 사례다. 더 나아가 정여름 작가의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2020)처럼 실제 공간 위에 덧씌워진 가상이라는 〈포켓몬 고〉의 컨셉을 영화와 미술 작업에 활용하는 것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 다시 처음 언급한 “성폭력 특례법 일부개정안” 이야기로 돌아가자. 게임의 가상공간 안에서 산책자로서 활동할 수 있다면, 그것에 따른 부작용 내지는 현실에 존재하는 차별 또한 가상공간에 존재한다는 의미다. 산책자, 그러니까 플라뇌르(flâneur)는 프랑스어 남성명사다. 이는 보들레르나 벤야민이 플라뇌르를 개념화하던 시기의 산책자는 주로 남성이었으며, 여성은 남성의 시선이 닿는 사물적 대상이거나 소득을 얻기 위해 길 위를 서성이는 성노동자였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로런 엘킨이 제시한 "도시를 걷는 여자들", 즉 여성명사 플라뇌즈(Flaneuse)는 그러한 개념어의 전복이다. “성폭력 특례법 일부개정안”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작금의 상황은 게임과 메타버스 내에서도 플라뇌르는 여전히 가능하지만 플라뇌즈는 아직 불가능함을 시사한다. 게임에서의 공간 경험이 현실에서의 경험과 점점 분간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아니, 굳이 분간할 필요 없이 제2의 자연으로 가상공간이 존재하는 상황에 가깝다.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벌어지는 게임 내 성폭력, 각종 차별과 혐오발언은 자유로운 산책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그러므로 게임 속 가상공간이 제공하는 경험의 질을 규명하는 것은 그곳의 성격을 직시함으로써, 이곳저곳에 산재한 문제를 해소하는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게임의 경험이 모두에게 평등한 것이 될 때, 모두가 동등하게 게임 속을 산책할 수 있을 때, 가상공간의 유토피아라는 허황된 꿈에 조금이나마 접근할 수 있다. 1) 국민참여입법센터 국회입법현황, https://opinion.lawmaking.go.kr/gcom/nsmLmSts/out/2115468/detailRP (2022.06.27 접속) 2) 발터 벤야민,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 『발터 벤야민 선집 4』, 최성만(역), 서울: 도서출판 길, 2010. 3) 오현주, 「디지털 게임 공간의 체험적 특성」, 홍익대학교 대학원 영상학과 박사논문, 2016. 4) <에란겔: 다크투어>에 관한 스테이트먼트, 매뉴얼 등은 다음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notion.so/03-20-21-14-00-15-00-2-4652d0e6c472438595a27e889dd55b7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비평가) 박동수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했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를 전공하고 있다. 영화에 관한 글을 주로 쓰고, 미술, 게임, 방송 등 시각문화 전반에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리고 있다. 영화평론가, 팟캐스트 [카페 크리틱] 진행자, 공동체상영 기획자이기도 하다.

  • 즐기는 사람들을 지켜라 - 만화는 어떻게 멸시와 비하를 딛고 일어섰는가

    1972년 6월 29일 동아일보에선 “불량만화 화형식”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불량만화는 사회악의 근원이다”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운 ‘한국아동도서보급협회’는 서울 남산 야외음악당(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위치한 자리다!)에서 ‘어린이 악서 추방대회’를 열고 만화책을 모아 불태웠다. 이 단체는 만화를 두고 ‘유소년의 정서발달을 해친다’, ‘제대로 된 지식을 전달하지 못한다’, 그리고 ‘맞춤법과 띄어쓰기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주류의 시선에서, 당시 만화는 ‘악서’였던 셈이다. < Back 01 GG Vol. 21. 6.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aeMin Lee Has run the comics/webtoon review podcast "Webtoonista" since 2013. Received the Award of Excellence in the 2017 Korea Manhwa Contents Agency comics criticism competition and in the professional division of the 2019 Korea Creative Content Agency comics criticism competition. Has worked as an editor at the webzine "Webtoon Insight" since 2019. Reads comics, writes about them, and digs into the many things underlying the market built around comics. The novel Children of the Rune, StarLeague, the LCK, and countless webtoons made me who I am today.

  • [Editor's view] 게임비평공모전에 부쳐

    GG 7호는 제1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 수상작들을 중심으로 꾸몄습니다. 게임비평이라는 영역 자체가 사회 전반에서는 다소 낯선 부문일 수 있겠지만, 무려 93건의 응모작이 들어온 것을 보면서 적어도 게임에 대한 비평적 접근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심사 과정에서 가졌던 고민들과, 공모전과 GG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야기드리고자 합니다. < Back 07 GG Vol. 22. 8.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KyungHyuk Lee Game critic and researcher. Since 2015, he has made games his life's work—as a critic, examining how games relate to society, and as a researcher, exploring how games, as commodities, take their place within it. He is the author of Mario, Born in '81 (2017) and The Birth of In-Game Spending (2022), among other works, and has contributed to documentaries including EBS's Docuprime as well as columns across various outlets. He received his Ph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t Yonsei University for his research analyzing digital games as time-rights commodities.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lab Dragon Lab and serves as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 꿈으로서의 '쿠소게'

    "패미컴을 통해 초능력을 개발한다"라는 테마로 개발된 게임이 있었다. 1980년대 당시 일본의 초능력 붐 속에서 초능력자로 알려졌던 키요타 마스아키(清田益章; 통칭, 에스퍼 키요타)씨가 감수한 〈마인드시커〉라는 작품이다. 플레이 과정에서 조언자 격으로 등장하는 키요타씨의 지시를 받아 가며 게임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구성된 이 작품의 핵심 컨셉은 "실제로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였다. < Back 꿈으로서의 '쿠소게' 05 GG Vol. 22. 4. 10. * 이 글의 일본어 원문은 아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gamegeneration.or.kr/board/post/view?pageNum=1&match=id:108 초능력개발게임 〈마인드시커〉 "패미컴을 통해 초능력을 개발한다"라는 테마로 개발된 게임이 있었다. 1980년대 당시 일본의 초능력 붐 속에서 초능력자로 알려졌던 키요타 마스아키(清田益章; 통칭, 에스퍼 키요타)씨가 감수한 〈마인드시커〉라는 작품이다. 플레이 과정에서 조언자 격으로 등장하는 키요타씨의 지시를 받아 가며 게임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구성된 이 작품의 핵심 컨셉은 "실제로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였다. 필자도 이 게임을 옛날에 실제로 해본 적이 있다. 그렇지만 애초에 게임이 요구하는 과제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럼, 우선 투시를 해 봅시다"라든지, "예지를 해 봅시다"라는 식의 과제가 차례차례 나온다. 유감스럽게도 희미한 초능력조차도 간직하지 않고 있던(?) 필자에게는 초기 과제부터 이미 달성하기 곤란했다. 결과적으로 초능력 따위는 얻지 못했다. 〈마인드시커〉는 제대로 클리어할 수 없고, 제대로 즐기기도 어렵고, (아마도) 초능력을 개발하는 것조차도 할 수 없는 게임이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어느 것 하나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어느 것 하나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에는 특기할 만한 것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건 제작자와 플레이어의 게임에 대한 '꿈'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너무나 직접적인 꿈의 존재 방식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에 관해 이 작품만큼 쉽게 알 수 있는 작품은 드물다. 이 글에서는 이 '꿈'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다. 꿈의 장치로서의 컴퓨터 게임 〈마인드시커〉가 개발됐을 당시, 컴퓨터 게임이라는 문화가 한 때 맡고 있던 재미의 일부는 이런 것이었다. 즉, 사람들의 무한한 꿈을 실현시켜주는 기계라는 것이었다. 컴퓨터 속 캐릭터와 대전할 수 있다라거나 등장인물과 대화할 수 있다, 혹은 모니터를 향해 총을 쏘면 반응한다, 목소리를 입력하는 것이 가능하다와 같은 방식들. 지금은 당연히 여겨지는 이러한 것들은 1980년대에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급속도로 일상에 나타난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존재 방식이었다. '컴퓨터가 진화하면 게임으로 뭐든지 할 수 있게 된다'라는 무책임한 꿈을 많은 아이들이 믿었고, 게임 제작자는 그 꿈을 점점 현실에 구현해 나갔다. 이것이 1980년대의 패미컴이 히트하면서 게임이라는 미디어 자체가 많은 사람들의 끝없는 꿈을 어떤 의미론 무책임하게 맡아버릴 수 있던 시대의 풍경이었다. 물론 테크놀로지가 사람들의 '꿈'을 무책임하게 짊어진다는 구도 그 자체는 컴퓨터 또는 게임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사토 토시키(佐藤俊樹)는 정보사회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정보사회론 담론이 여러 번 동일한 꿈을 반복해 왔다는 것을 1996년에 지적한다(『노이만의 꿈, 근대의 욕망』 1996, 고단샤선서 메치에). 1970년대에도 꿈은 이야기되고, 1980년대에도 꿈은 이야기되고, 반복적으로, 반복적으로 '정보기술이 사회를 바꾼다'는 '신화'가 이야기되어 왔다고 한다. 사토는 도서관 안에 쌓여 있는 정보사회론을 논의하는 구도가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랐다고 한다. '컴퓨터가 어떻게 사회를 바꿔가는가'라는 담론이 성인이 사회에서 꾸는 꿈을 끝없이 확대시키는 장치였다면, 1980년대의 컴퓨터 게임은 아이가 놀이에 꾸는 꿈을 끝없이 확대시키는 장치였다고 해도 좋다. 1980년대 세계는 그 꿈의 소박함이라는 점에서 2022년 현재와 동떨어진 면이 있다. 물론 2022년 현재에서도 사람들은 AI에 과잉된 꿈을 걸고 좀 더 본격적인 VR 게임의 실현을 고대하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 꾸었던 꿈과는 아무래도 그 성격이 다르다. 누가 1980년대의 '쿠소게'의 담당자였는가? 무엇이 다른 것인가 하면, 터무니없는 꿈의 담당자가 도대체 누구였는가 하는 것이다. 1980년대의 전설적인 '쿠소게'를 만드는 것은 갓 올라온 신입이나 타업계의 아마추어에 한정되지 않았다. '쿠소게'의 담당자는 종종 게임업계의 중심 인물이었다. 〈마인드시커〉의 개발 프로듀서는 그 〈팩맨〉의 친부모라고 할 수 있을 이와타니 토오루(岩谷徹)가 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개발의 중심에 있던 스즈키 코지(鈴木浩司)는 그 후 1997년에 RPG의 존재 방식에 큰 파장을 던진 의 개발에 관여하여, 요즘 말하는 인디게임 문화의 선구자가 되는 작품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기도 하다. 게임업계의 핵심 인물이 '쿠소게'에 관여하는 구도는 드물지 않다. 미국의 가정용 게임기 시장의 붕괴(이른바 '아타리 쇼크')로 이어지는 원인의 일부가 된 '전설의 쿠소게'로서 이야기되는 』(Atrari 2600, 1982)의 개발 담당자 하워드 스콧 워쇼(Howard Scott Warshaw)도 당시 아타리 사의 스타 개발자였다. Atari 2600에서 가장 많이 팔렸다는 〈야스 리벤지(Yar’s Revenge)〉라는 타이틀의 개발자이다. 하워드 스콧 워쇼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힘껏 도맡아 를 만들었다. 참고로 일본의 1980년대의 대표적인 '쿠소게'인 〈타케시의 도전장〉은 요즘 말하는 오픈월드의 실현을 꿈꾸다 화려하게 실패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건 게임업계 내부가 아니라 탤런트인 비트 타케시가 한 소박한 아이디어였다. 그들은 컴퓨터 게임에서 사람들이 꾸고 있던 '꿈'을 떠맡고, 그리고 실패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너무나도 어처구니없고 미숙하고 조잡한 것이었다. 그리고 시대의 총아들이 어이없는 실패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게임업계 전체가 젊은 시대 특유의 특권을 부여받은 상황이라는 배경으로부터도 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어이없는 꿈을 가지고, 그것에 무모하게 도전하는 것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최종적으로 완성된 작품을 보면 이들의 시도와 결과는 불행한 프로젝트로 귀결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 2022년에서 보면 업계의 톱스타가 끔찍하게 어이없는 기획에 어이없는 예산을 들이며 어이없는 열정을 쏟는 것은 거의 볼 수 없는 풍경이 되었다. 물론 당치 않는 기획으로 흥행을 노리거나, 혹은 실패하는 프로젝트 자체는 지금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러한 기획에 톱 크리에이터가 처음부터 달라붙어서 거액의 예산이 들어간다는 것 자체는 게임개발 과정에서 리스크에 대한 인지가 과거보다 크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오늘날의 대규모 개발 프로세스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반복하지만 1980년대 '쿠소게'가 가진 '어리석음'은 개발자들의 무능함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미숙하고 유능한 사람들이 꿈을 쏟아붓은 프로젝트에 전력으로 임했던 흔적이 1980년대의 '쿠소게'이다. 새로운 것을 만드는 장치로서의 '쿠소게' 이토록 소박한 욕망의 발로를 통해, 대작을 만들려는 의지가 이제는 오히려 눈부시기까지 하다. '초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게임' 등과 같이 어처구니없는 것에도 정도가 있고, 1980년대에 대규모 오픈월드 게임을 만드는 것과 같은 야망도 너무나 무리였다. 이후 컴퓨터 게임이라는 세계 속에 떠도는 '꿈'을 맡는 하나의 절정으로 태어난 작품은 1999년 〈쉔무〉』(DC, 1999)였을 것이다. 〈쉔무〉는 또 하나의 현실 세계를 게임 속에 구현하려는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것 중 하나를 우직하게 실현하고자 했던 작품 중 하나다. 이 작품이 남긴 것은 적자뿐 아니라, 실패라고도 성공이라고도 말하기 어려운 강렬한 인상이었다. 지금의 오픈월드라고 불리는 작품의 상당수는 직간접적으로든 〈쉔무〉의 시행착오의 결과를 반영하여 만들어졌다. 컴퓨터에 사람들이 꾸는 '꿈'은 대부분 무책임한 것이다. 그건 종종 어리석거나 사기꾼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한 어리석음은 종종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기도 하고, 완성된 결과물이 웃음을 자아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사람들이 무엇인가에 웃을 때는 어떤 인식의 틀을 외부에서 메타시점으로 세우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꿈은 그 내부에 깔려 있을 때에 귀중하고, 그 외부에 나오면 때때로 웃음을 자아낸다. '꿈'을 꾼다는 것은 그 의미에서 우스꽝스럽다는 것이 숙명이라고 해도 좋다. 게임업계가 성숙해질수록, 웃어넘겨질수록, 어리석은 작품을 만드는 것은 최고의 톱 크리에이터의 일로서는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 결과 1990년대 후반이 되면서 보다 작은 게임 개발사가 과감한 '쿠소게'도, 단순히 개발력 부족에 의한 '쿠소게'도 그 양쪽 모두를 담당하게 되었다. 현대에는 광대하게 펼쳐진 인디게임 시장이 그 주력을 담당하고 있다. 우리는 웃을 만큼 어리석은 것을 만드는 것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새로운 것을 보고 싶어 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욕망과 웃을 만큼 어리석은 작품을 만들어 버리는 것은 표리일체 현상이다. 〈마인드시커〉를 켜고 오랜만에 놀다 보니 거기에 묻어 있는 우스운 듯한 바보스러움을 만나게 된다. 확실히 게임 자체는 바보같다. 그러나 이 게임은 동시에 빛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그 바보스러움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를 배후에서 느끼기 때문이다. 꿈을 꾸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아이 같은 설렘이 이 작품의 뒷면에 가로놓여 있다.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야말로 세계의 다양함과 풍요로움의 본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연구자) 이노우에 아키토, 井上明人 게임 연구자. 현재 리츠메이칸 대학 교수. 국제 대학 GLOCOM 조교, 칸사이 대학 특임준교수등을 거쳐 현재에 이른다. '게임이란 무엇인가'라고 하는 물음을 중심으로 하면서, 게임의 아카이브나, 게임을 응용한 사회적 과제의 해결에 관련되는 프로젝트 등에도 임하고 있다. (게임문화연구자) 박수진 게임연구에 발을 들인 대학원생입니다. 지금은 일본 리츠메이칸대학 첨단종합학술연구과에서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최근엔 게임을 매개로 한 다양한 게임 경험과 일본 내 서브컬처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글 쓰는 건 여전히 어렵습니다.

  • 게임의 로맨스가 진짜 사랑은 아니지만 중요해, CRPG의 로맨스

    하지만 예로부터 어떤 게임을 설명할 때 “야, 이 게임에서는 섹스도 가능해!!” 라고 하면 대체 얼마나 대단한 게임인지 저절로 호기심을 동하게 만들었듯, ‘연애’ 는 사람들을 흥분케하는 콘텐츠였다. < Back 게임의 로맨스가 진짜 사랑은 아니지만 중요해, CRPG의 로맨스 16 GG Vol. 24. 2. 10. 게임에 연애가 있다고 해서 모든 게임이 미연시인건 아니며 , 혹여 장르 불문 연애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사이드 콘텐츠 취급을 받곤 한다 . 하지만 예로부터 어떤 게임을 설명할 때 “ 야 , 이 게임에서는 섹스도 가능해 !!” 라고 하면 대체 얼마나 대단한 게임인지 저절로 호기심을 동하게 만들었듯 , ‘ 연애 ’ 는 사람들을 흥분케하는 콘텐츠였다 . * 뭐 이것도 로맨스라면 로맨스일까? 그리고 언젠가부터 RPG 들 , 특히 좀더 TRPG 원류의 감성을 추구하는 CRPG 들에서는 로맨스 옵션이 거의 필수적으로 여겨지게 됐다 . 특정 연애 루트를 지지하는 사람들끼리 다투는 정실 (?) 논쟁은 커뮤니티에서는 일상이다 . 어쩌다 이랬을까 . 세계를 구하고 악을 무찌르라고 있는 게임에서 사람들이 언제부터 연애만 하게 된걸까 . 하지만 재미있는 건 이런 게임에 로맨스 옵션이 들어간건 ‘ 모험 ’ 의 연장선에서 시작됐다는 점이다 . 과거 RPG 명가 바이오웨어의 게임들이 CRPG 시류의 중심으로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 비록 그들이 이 형태를 취한 최초는 아니라도 ), ‘ 발더스 게이트 2’ 이래로 로맨스 옵션에서도 하나의 메인스트림이 형성된다 . 그건 바로 기용 가능한 동료들과 지속적인 대화와 동료 퀘스트 같은 사이드 콘텐츠를 통해서 연대를 형성하고 , 그렇게 깊어진 연대에서 사랑이 피어난다 . 이처럼 CRPG 의 연애 , 로맨스 옵션이 기존의 미연시와 다소 다른 결을 띄는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동료 시스템의 연장선이기 때문이다 . 대체로 CRPG 의 로맨스란 어디까지나 핵심은 동료 퀘스트라는 매우 명확하고 달성 여부가 확실하게 가름나는 콘텐츠이며 , 여기에 양쪽이 연애가 가능한 지향일 경우 연애를 선택할 수 있는 형태를 띄고 있다 . 미연시의 연애는 오직 연애를 위해서 일종의 루트 공략 , 엔딩 공략 게임의 느낌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비중과 포인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이렇게 된 이유는 CRPG 의 토대가 TRPG 라는 점을 생각해볼 만 하다 . 기존에 현실에서 펼쳐지던 TRPG 는 동료가 진짜 사람이며 , 대체로 이미 친분이 있는 지인이었다 .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른 플레이어 캐릭터 간의 상호작용은 현실의 관계처럼 끈끈했고 , 상호 간에 영향을 미쳤다 . 하지만 최근 멀티플레이어가 활성화되기 이전의 CRPG 는 모두 오프라인 게임이었고 , 플레이어 캐릭터 외에 함께하는 동료들은 인공지능 AI 이제 스크립트 더미였고 , TRPG 수준의 상호작용의 활력을 제공하지 못했다 . 때문에 이렇게 게임을 함께하게 되는 동료 캐릭터를 더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사실적으로 느끼고 , 플레이어와 더 연대를 쌓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노력이 바로 동료 퀘스트를 위시한 컴패니언 시스템 일체라고 할 수 있다 . 즉 , 혼자서 게임을 하지만 외롭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 그래서 그러한 ‘ 인간적인 상호작용 ’ 을 플레이어 캐릭터와 동료 캐릭터 사이에 넣는다면 , 그 흐름이 인간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최종판인 연애로 흘러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 초기의 CRPG 들은 이런 부분의 배려가 부족한 편이었지만 , 서양 시장에서의 시류는 바이오웨어를 필두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 바이오웨어는 CRPG 메이커 중에서 이러한 동료와의 유대 , 그리고 연애 등 상호작용을 본격적으로 이끈 공신이라고 할 수 있겠다 . 단순히 함께 싸우는 전투원 1 에서 벗어나 동료에게도 숨겨진 이야기가 있고 , 이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개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다보면 자연스레 친밀해지고 , 그러다 이제 서로 성적 지향도 맞는다면 연애도 하는 … 그런 흐름이었다 . ‘ 매스 이펙트 ’ 시리즈는 이러한 동료 시스템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 그리고 가장 대중화시킨 주인공이었다 . 그러나 여기서 재미있는 문제가 생긴다 . 바로 동료로서 원하는 캐릭터와 연애 대상으로서 원하는 캐릭터가 다를 경우엔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만스러운 경험을 하게 된다는 점이었다 . 동료 시스템과 연애 시스템이 결합하고 이게 확대되는 과정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나온 문제였는데 , 바로 각 캐릭터의 성적 지향과 전투 캐릭터로서의 성능 , 두가지 요소에 기인했다 . CRPG 의 연애 시스템은 세이브로드 신공과 함께라면 절대 실패할 일이 없다 . 하지만 단 한가지 , 성적 지향에 따라 가능 / 불가능으로 나뉘는 케이스는 절대적인 벽이었다 . 현대적인 로맨스 옵션이 들어간 첫 CRPG 라고 할 수 있는 ‘ 발더스 게이트 2’ 는 주인공이 스토리상 고정된 인물이었고 , 성별 또한 남성으로 고정이었으니 이러한 문제가 없었다 . 하지만 본격적으로 동료 시스템과 연애 시스템을 널리 퍼트린 ‘ 매스 이펙트 ’ 시리즈와 동시기의 ‘ 드래곤 에이지 ’ 로 가면서 , 동성 연애 지향을 가진 동료들이 추가되며 이러한 경향이 생겨났다 . 이렇게 로맨스 옵션에 성적 지향이 추가된 건 게임이 보다 더 많은 취향과 환경의 사람들을 포용하고 게임 내에서 표현하기 위한 흐름에 따른 일이었다 . 플레이어가 직접 캐릭터가 되어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건 RPG 에선 상당히 중요한 키워드고 , 그러려면 먼저 플레이어 캐릭터가 성별을 비롯해 각 플레이어에 맞춰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해야 했다 . 이에 따라 동료들 , 연애 대상들이 각 지향과 취향에 맞게 분배되는건 당연한 일 . 재미있는 일은 플레이어 자신의 성적 지향과 좋아하는 캐릭터의 성적 지향이 맞지 않을 때 벌어지는데 , 자신이 게임 초기에 선택한 성별과 커스터마이징 때문에 특정 대상과 연애를 할 수 없게되고 , 이는 게임적인 관점에서는 이미 캐릭터 생성부터 특정 콘텐츠에 대한 접근이 제한된다는걸 의미했다 . 아무튼 이러한 현상 덕분에 플레이어들 대다수가 원하는 로맨스 대상이 아무래도 훨씬 머릿수가 많은 이성애자들을 위한 연애 대상이 아닐 경우 많은 이야기가 나오곤 했는데 , 대표적인 예시는 ‘ 사이버펑크 2077’ 의 주디 알바레즈다 . 주디 알바레즈는 주인공 V 의 핵심 조력자이자 이 게임의 초기단계에서부터 지속적으로 대외적으로 게임을 어필하는데 동원되어 온 일종의 얼굴마담이자 상징이었다 . 모든 플레이어들이 이 캐릭터와 연애를 하려고 달려들 건 분명했다 . 그런데 여기서 개발진은 한 번 비튼다 . 주디 알바레즈는 동성애자 캐릭터이고 , 남성 V 를 위한 이성애자 파트너는 다른 존재였던 것이다 . 때문에 이를 모르고 습관처럼 남성 V 로 게임을 시작한 , 남성 이성애자 플레이어들은 주디 알바레즈가 동성애자이며 , 한참 게임을 진행한 자신의 캐릭터로는 주디와 프렌드존을 넘지 못한다는걸 깨닫게 된다 . 여기서 그런 플레이어들이 취한 행동은 크게 두가지 . 커뮤니티에 원성을 쏟아내거나 여성 V 로 새 게임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 사실 이렇게 성적 지향으로 연애 대상을 나누는건 바이오웨어가 먼저였다 . 동료 시스템과 이를 뒷받침하는 로열티 퀘스트 , 그리고 동료와의 연애 선택지라는 요소를 가장 대중적으로 히트시킨 게임이기도 했던 ‘ 매스 이펙트 ’ 시리즈는 1 편에서는 모든 연애 대상이 이성애자였는데 단 하나의 예외가 존재했다 . 그건 아사리라는 종족적인 특성을 빌려 , 리아라 트소니를 양성애자로 설정한 것 . 이성애자 여성 애슐리 , 이성애자 남성 케이든에 양성애자 리아라가 존재하는 로맨스 옵션이었다 . 이는 아무래도 ‘ 선택 ’ 을 집어넣기 위한 것에 가까웠다 . 셰퍼드의 성별을 어떻게 고르더라도 결국 연애할 수 있는 대상이 한명이라면 , 호불호를 떠나서 내가 연애할 대상을 선택한다는 느낌을 줄 수 없었고 , 대상을 선택하는건 로맨스 옵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 시리즈에서 가장 큰 인기를 얻었고 , 또 가장 대표적인 혁신작이었던 ‘ 매스 이펙트 2’ 는 동료 시스템을 훨씬 크게 키움과 동시에 로맨스 옵션도 방대하게 늘어났다 . 그런데 여기서는 오직 이성애자만이 등장한다 . 한 성별 당 3 명의 연애 대상을 부여받았는데 , 2007 년 게임인 전작에서 양성애자를 등장시켰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후퇴 (?) 였다 . 그리고 3 편은 이 부분을 의식했는지 , 좀더 다양해졌다 . 각 성별마다 한명씩 동성애자 연애 대상이 추가됐고 , 1 편의 연애 대상인 3 명이 다시 들어왔다 .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조건이 좀 있기는 하나 한 성별당 4 명의 이성애자 , 1 명의 동성애자 , 1 명의 양성애자 연애 대상을 가지게 되었다 . 이 부분에서 가장 많은 성토를 받았던 게임은 바이오웨어의 ‘ 드래곤 에이지 : 인퀴지션 ’ 이었다 . 다른 게임에 비하면 동료의 수가 무척 많은 것도 아니었는데 이를 성적 지향 , 종족별로 배분하다보니 플레이어 캐릭터의 조건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연애 대상이 너무나 적었던 것 . 심지어 전투원이 아닌 동행 캐릭터들도 연애 대상으로 넣었음에도 이랬는데 , 그런 캐릭터들은 또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은 탓에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서 이 상황을 보자면 , 플레이어들이 CRPG 에서 얼마나 자기 자신을 플레이어 캐릭터에 이입하고 동시에 다른 등장인물에 얼마나 몰입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다 . 한편으로는 게임을 만드는 입장에서는 각 캐릭터의 성적 지향을 설정하는데에 있어서 굉장한 고민을 떠안게 됐다 . 어떤 연애 대상을 설계할 것인가 ? 어떤 성적 지향에 어떤 캐릭터를 배치할 것인가 ? 이는 단순히 고민을 떠나서 특정 성적 지향을 스테레오타입화 시키는 , 어쩌면 차별 또는 편견으로 비칠 수도 있는 위험을 내포했다 . 세상에 , 그냥 게임 캐릭터와 연애를 하고 싶은 것 뿐인데 이런 문제까지 신경써야 한다니 ! 그러나 , 여기서 ‘ 발더스 게이트 3’ 는 재미있는 해법을 제시했다 . 모든 동료를 연애 대상으로 , 동시에 모든 연애 대상 동료를 양성 모두 연애 가능으로 만든 것 . 너무나 간단한 , 어쩌면 무성의한 해법처럼 보이기까지 해서 맥이 풀리지만 오히려 한편으로는 아 ! 왜 다들 그 생각을 못했지 ? 하고 감탄할 법한 해법이었다 . 플레이어가 게임을 진행하지 않았는데도 , 오직 캐릭터 생성 단계만 지나도 접근 할 수 없는 콘텐츠가 생기는 셈이었던 이전의 이성애자 - 동성애자 중심의 로맨스 옵션이 , 그냥 그런 것 상관없이 모두를 양성애자 , 혹은 연애 대상으로 만든다는 기가막힌 해법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이었다 . 물론 , 이전에 이 방법을 쓰지 않은 이유는 명확했다 . 이성애자들에게 양성애자 동료가 과연 진정한 로맨스 옵션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 이게 가장 큰 의문거리였다 . 실제로 기존의 바이오웨어 게임들처럼 이성애자 / 동성애자 / 양성애자가 모두 존재하는 RPG 에서는 양성애자 캐릭터들은 보통 인기가 가장 없는 편이었다 . 하지만 흥미롭게도 , ‘ 발더스 게이트 3’ 에서는 이성애가 아닌 다른 성적 지향에 대한 반감이 강하기 마련인 인터넷 게임 커뮤니티에서도 이들 캐릭터가 양성애자라는 건 전혀 지적받지 않고 있다 . 오히려 게일 같은 캐릭터가 보여주는 양성애자로서의 면모 , 그리고 쉬운 로맨스는 일종의 밈화되어 혐오의 대상보다는 유머의 대상으로 더 가깝게 여겨지고 있다 . ‘ 발더스 게이트 3’ 의 로맨스 옵션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이유를 생각하다보면 , 기존 게임들의 로맨스 옵션은 일종의 스테레오타이핑으로 만들어진 대상이었고 , 성적 지향이 진정한 정체성 표현보다는 ‘ 제한 ’ 으로서 받아들여진 면이 더 컸다는걸 깨닫게 된다 . 기본적으로 각각의 캐릭터가 성적 지향에 맞추어 지나치게 스테레오타이핑 되어 있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 성적 지향에 따른 제한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이미 플레이어들은 캐릭터들을 만날 때 감정 선을 정리하고 진짜 캐릭터 대 캐릭터로서 교감하기 보다는 게임 콘텐츠로서의 기능적인 측면에 주목하게 된다는 것이다 . 그리고 이 점에서 , 오히려 모든 캐릭터가 성별과 상관없이 연애를 할 수 있다는 부분은 일종의 게임적 허용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 . 고리타분한 성적 지향에 따른 분배와 이런저런 고려는 치우고 , 그냥 넌 이 동료가 가장 마음에 들어 ? 그럼 얘랑 끝까지 가봐 . 라는 간단하고 쉬운 게임적 허용으로 게임 내 로맨스에 대한 문제가 해결된 것 . 즉 , 바이오웨어식 로맨스의 한계는 오히려 로맨스 옵션에 맞추어 각 캐릭터를 너무 세분화하고 , 카테고리로서 분화시켜 배치한 점에서 왔다 . 그 순간부터 오히려 플레이어들은 캐릭터 그 자체보다는 자신이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인가를 생각한다 . 어쩌면 현실의 연애의 어려움을 어느정도 반영한 것 같기도 하다 . 그냥 내가 좋다고 되는건 아니지 않는가 . 하지만 ‘ 발더스 게이트 3’ 의 동료들은 모두가 연애가 가능하고 , 특정 성별 지향을 대외적으로 강조하지도 않는다 . 사실 이들을 양성애자라고 하는 것도 연애 가능성이라는 콘텐츠 기능적인 측면에서 그런 것이지 , 각각의 캐릭터가 모두 양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묘사되지도 않는다 ( 그래서 앞서 ‘ 양성애자 ’ 라는 표현이 아니라 ‘ 연애 가능 ’ 이라고 했다 ). 그러니 좀 더 정확하게는 로맨스 옵션에 성별의 제한이 없다고 하는게 맞을 것이다 . 현실이라면 정말 쉽지 않은 이야기지만 , 이건 ‘ 게임 ’ 이니까 . 즉 , 오히려 게임의 애정과 연애를 적당히 게임이라는 선 안에 두고 그 안에서 게임적 편의성을 취한 결과 , 플레이어들이 가장 만족하는 로맨스 옵션이 만들어지게 된다 . 그 과정이 상당히 재미있다 . 바이오웨어는 오히려 로맨스 옵션을 발전시켜나가면서 지나치게 현실의 연애를 고려했던건 아닐까 ? 어디까지나 우리가 게임 상에서 이루고 싶었던 건 지고한 순애가 아니라 , 일종의 그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인정받는 증표였던건 아닐까 ? 즉 , 여러 과정을 거쳐서 변화해오기는 했지만 CRPG 에서의 로맨스란 말그대로 게임을 하면서 외롭지 않기 위해 탄생했고 , 이것이 플레이어가 어떠한 ‘ 인정 ’ 을 받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임은 변하지 않는다 . 비록 스크립트 덩어리와의 연애가 현실에서 동료와의 상호작용 만큼 깊고 무한하지는 않더라도 , ‘ 함께 모험한 동료 ’ 와 또 하나의 사적인 그랜드 피날레를 장식한다는 점에서 소중한 건 마찬가지다 .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이명규 게임 기자(2014~), 글쓴이(2006~), 게이머(1996~)

  • Computer games and art: the practice of deepening our gameplay experiences

    The question ‘are computer games art?’ is not a productive one if there is the expectation that there can be a reasonable answer to it without some questioning of the question itself. I will explain why this is so and make the case that we would be better served by thinking about the ‘aesthetic experiences’ that playing computer games may foster as opposed to their categorization as art or as non-art. < Back Computer games and art: the practice of deepening our gameplay experiences 12 GG Vol. 23. 6. 10. The question ‘are computer games art?’ is not a productive one if there is the expectation that there can be a reasonable answer to it without some questioning of the question itself. I will explain why this is so and make the case that we would be better served by thinking about the ‘aesthetic experiences’ that playing computer games may foster as opposed to their categorization as art or as non-art. One may well ask: ‘are artworks not synonymous with inculcating aesthetic experiences?’ The answer to this can only be ‘of course’ yet the qualification here is that we have to be precise about the kinds of ‘experiences’ in question. If we expect computer games to be able to convey complex states of interiority encountered by a protagonist grappling with a gamut of emotions, then we would potentially be comparing the game to works of literature and philosophy (and judging it as such). The orientation that I suggest is, moving away from preoccupations of artistic status towards scrutinizing experience can potentially shift our attention away from pining for the acceptance of computer games into the fold of high culture – a dubious aim at best – to focusing on deepening our gameplay experiences. This aim of deepening aims to have us become more attentive to our experiences and to then demand games that push the boundaries of existing experiences. ‘Aesthetics’ and ‘experience’ Computer games are multimedial works. In this respect, we might call them Gesamstkunstwerks (total works of art) made through collaborations of skilled individuals that go beyond the confines of a single medium. When we play them, we can focus on the experience as a whole or attune ourselves more narrowly to, for example, the visual representations, the animation, the level design, the dialogue, the musical score, etc. The notion of ‘experience’ that I have mentioned can be brought out via existing understandings of the concept of ‘aesthetics’ (or the ‘aesthetic’), which is a polyvalent one. Western aesthetics has generally demarcated aísthēsis (perception from the senses as well as discernment through them) from noesis (purely intellectual apprehension or the application of reason). ‘Aesthetics’ is often taken expansively to encompass the overlapping concepts of: ‘sensation’, or what presents itself to our sensory experiences in general; ‘perception’, where the activity of the viewer is crucial to the mode in which the object is apprehended or perceived; and ‘judgment’, in which aesthetic judgments are characterized by their not being mediated by the application of concepts or reason. ‘Game aesthetics’ may be taken to connote a degree of distinctiveness to computer games, digital games, or videogames. It can be taken in terms of the experience of gameplay: ‘how it feels to play a game’; playing games can be said to yield particular kinds of experiences or perceptions through the senses, which can be studied with an aesthetic focus. The philosopher John Dewey consistently made the case for seeing continuity between so-called ‘high’ culture and popular culture. Dewey thought that what was to be avoided was the human creature divided against itself, which happens when our capacities (emotional, intellectual, sensory) are not be allowed to work naturally in conjunction with one another but are instead compartmentalized or separated from each other. This occurs as soon as we think about the realm of ‘art’ as separate from the sphere of ‘life’. It happens as soon as we assume that aesthetic experiences are only to be had when we enter into the designated space of the art gallery or the opera house (and not outside of them). To do this is to leave behind all our other experiences to languish as non-aesthetic, or even to assume that they are merely ‘instrumental’ – geared towards and reducible to a direct end like earning a wage, cleaning the house, keeping fit, having a conversation with friends, and that there is nothing else to them. The potential richness of improving our immediate experiences, of integrating aesthetic experiences into individuals’ vital interests and lives would therefore be missed. This is not to put the blame at the feet of artists or curators or critics; it is not to say that there are not works in the art world that are not contributing to the deepening of our experience – there certainly are. Yet it is also the case that there are real financial interests in play that want to keep the art world as separate. Preserving its power of categorical consecration, its ability to bestow the symbolic status of ‘this is art’, is to keep the current ordering of the world. Built into the question ‘are computer games art?’ are many key assumptions. These assumptions are arguably hostile to our developing fine-grained attentiveness to the actual experiences of gameplay. The first assumption concerns how the concept of ‘art’ is deployed with the supposition that either some works are ‘art’ or they are not. This is a binary categorization that can stifle further questioning. Secondly, there is the invocation of ‘computer games’ as a single category, which does little to help us parse the very different sorts of gameplay available even within a single genre. Finally, there is the assumption that computer games are like (most) other artworks in that they are identifiable objects or works. In this framing, the value is thought to reside more in the expression of artistic insights into the work by the developer and less in the process of what the player brought to the gameplay in order to enliven the experience in the greatest possible way for them. When players report that a game like Dark Souls (2011, FromSoftware) helped them to battle depression, it is the psychological state (together with the dedication) that the player brought with them that, in a concatenation of player and game via a lengthy process, produced an experiential transformation in the player. Critics applying aesthetic criteria The film critic Roger Ebert caused controversy when, in 2005, he claimed that video games, which, by their nature require player choices, could not attain the stature of art, since serious art like film and literature all require authorial control. Although he later stated that it was foolish to deny that all games could not ever be art even in principle, his position arguably concretized a perspective that is held by many – that computer games are juvenile, unsophisticated, geared towards immediate gratification, saturated with bombastic visual effects, quantified so as to preclude ambiguity, pandering to vulgar emotions. I am less interested here in dissecting Ebert’s arguments or in mounting counter-arguments (others have already done this) than in pointing out the nature of the claim itself. It is a claim that in order for games to seriously contend for the status of art, they must become like other accepted art forms. For some, this is so uncontroversial as to go without saying. Even for some philosophers of computer games, it has been a difficult position to escape. Grant Tavinor is a philosopher of the arts. His writings have largely focused on the ontological issue of whether computer games can be deemed to be art. He has consistently held that this can be answered in the affirmative but has always severely qualified it so that only a subset of video games are properly considered art. His approach has been to turn to existing definitions of art – to analyse the extent to which computer games do or do not satisfy their conditions – yet to do so without championing any single theory. This is accomplished by taking the ‘cluster theory’ approach which posits a list of aesthetic properties; a computer game is deemed to be a work of art if it instantiates a sufficient number of these attributes. In his 2009 book, The Art of Videogames, Tavinor cites on page 177 the cluster definition given by aesthetician Berys Gaut, which had stated that the following properties counts toward something’s being a work of art (and the absence of which counts against its being art): (1) possessing positive aesthetic properties, such as being beautiful, graceful, or elegant (properties which ground a capacity to give sensuous pleasure); (2) being expressive of emotion; (3) being intellectually challenging (i.e., questioning received views and modes of thought); (4) being formally complex and coherent; (5) having a capacity to convey complex meanings; (6) exhibiting an individual point of view; (7) being an exercise of creative imagination (being original); (8) being an artifact or performance which is the product of a high degree of skill; (9) belonging to an established artistic form (music, painting, film, etc.); and (10) being the product of an intention to make a work of art. Tavinor emphasises that Gaut is not necessarily committed to these ten conditions in their particularity, only that they are the kind of conditions that should make up a successful cluster account of art. Clearly, Tavinor appears to share the view that such existing cluster theories are broadly correct in their articulation of such conditions, even if they reserve the right for themselves to make revisions on finer points. The application of this approach leads him to preclude games that have been recognized as classics, such as Space Invaders (1978, Taito) and Red Dead Redemption (2010, Rockstar San Diego), from artistic status. This is because they only have very partial overlap with the cluster theory. About Red Dead Redemption, Tavinor says the following in a chapter in the Routledge Companion to Game Studies (p.60): Red Dead Redemption is frequently and justly held up as a high point of recent game art, but even in this game the drama and narrative is a rather derivative and often ham-fisted approximation of the Western genre; treated as a film, it is firmly B grade. It is an unexceptionable statement that the narrative, characterization, acting, and writing found in video games are often of poor quality. Moreover, it is difficult to find a single instance where these aspects reach the heights of refinement they do in the confirmed arts. In other words, Red Dead Redemption appears to be judged primarily with regard to its ‘narrative, characterization, acting, and writing’. These elements can be more easily accommodated in cluster theories than may be the case with the feel or the rhythm of the gameplay experience as a product of its ‘interactivity’ (or some other framing of its distinctive qualities). Thus, although Tavinor believes that computer games should be treated, as a form of art, on their own terms, and not simply seen as derivative forms of pre-existing types, the reality of his applying a cluster theory amounts exactly to applying a list of qualities that come from extant theories of art. As such, these qualities were formulated in a cultural and historical milieu in which the candidacy of computer games as art, or even as capable of fostering experiences worthy of aesthetic consideration, were not genuinely entertained. Tavinor’s philosophical methodology determined the result. Are artists who work with games interested in gameplay? It is not just existing philosophical frameworks that have had a hard time with making sense of the experience of gameplay. The art world has tended to exhibit computer games by presenting them in the neutral context of a historical overview, which sidesteps the issue of the qualities of their gameplay. The first UK exhibition to show games was Game On: the History and Culture of Video Games at the Barbican Art Gallery in 2002. The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also took a historical approach in 2012 with The Art of Video Games, featuring games from Combat (1977) to LittleBigPlanet 2 (2011). Alternatively, other strategies include foregrounding commonly understood aspects of games such as the playable avatar, the premise of inhabiting a virtual world, or the representational aspects of games. The American artist Cory Arcangel is known for his conceptual focus on the visual aspects of computer games. His works rank amongst the most widely known ‘game-related art’, having been exhibited at the Museum of Modern Art, the Whitney Museum and the Museum of Contemporary Art – Chicago. One of Arcangel’s most celebrated pieces is his Super Mario Clouds, a video installation of the 1983 game Super Mario Bros. modded so as to be stripped of everything except the cyan sky and white 8-bit clouds game clouds drifting across it. There is no Mario, no koopa troopas, no goombas. Gameplay has been exorcised in favour of visual contemplation. In a similar vein, Arcangel’s 2011 exhibition at the Barbican called Beat the Champ, an installation that featured fourteen bowling games (from the 1970s to the 2000s) in chronological order, precluded gameplay( https://www.barbican.org.uk/whats-on/2011/event/cory-arcangel-beat-the-champ) . As the viewer walks through the space, the sounds that the encounter are not ones of bowling ball striking pins but the whir of ‘gutter balls’ as each of the games has been programmed by Arcangel so that the bowler does not score a single point. Thus, the gallery goer encounters the kind of authorial control lauded by Ebert. They are confronted with the audio-visual dimensions of failure in bowling games, designed to elicit a series of subsequent reflections. But when seen in terms of the experience of gameplay, it is a determined failure that is shorn from social and gaming context that would give failure meaning. The presence of the consoles themselves at the exhibition – the gameplay on show are not mere recordings – further underscores your inability to play the games themselves. This is an inability to experience the tensions and anxieties involved in the gameplay, the dance of fingers on buttons, the acclimatization to gaming rhythms, the inevitable frustrations, and the judgment of which game might offer the most compelling gameplay and why this may be so. It goes without saying that the artwork here is what Arcangel did with the games and how he displayed them. As with Super Mario Clouds, the claim to art lies in the conceptual and the visual aspects of the display – a language familiar to the art world. It is most certainly not the games themselves. The embodied challenges of the gameplay as an experience also do not feature. * Image from: https://coryarcangel.com/shows/beat-the-champ Robbie Cooper’s installation Immersion (2008), on the other hand, does take gameplay as a point of interest. It documented the embodied reactions of users of digital media across the world( https://www.scienceandmediamuseum.org.uk/what-was-on/robbie-cooper-immersion) . A prominent component of this consists of children playing computer games. The high-definition video capture of the players’ faces (the camera is in the position of the screen so the players seems to look directly at us) gives us the impression that we can peer into the moment-by-moment mental states of the players. Although we cannot see the changing displays, we are able to draw correspondences between the sounds emanating from the game and the players’ facial expression and bodily postures. One girl is playing the fighting game Tekken 5: Dark Resurrection(2005, Namco). There are sounds accompanying the special effects as blows connect, as well as the grunts and yowls of the characters. We can piece together the unfolding action, since anyone who has played Tekken will remember which moves trigger which sounds. We see Cooper’s subjects’ bodily, emotional, and cognitive sense-making in process, how the action has been enacted by the player and how it then affects the player in the machinic loop between player and game that is gameplay. Yet while Cooper is able to bring our attention to the complexity of the players’ experiences in question here and how they are bound up with their bodily being in the world, he is not able to shed any further light on them. He holds up a mirror but does not comment. * Image from: https://robbiecooper.com/project/immersion Indie game makers have pushed our gaming experiences by challenging existing gaming conventions, by having us see what has been normalized within genres as accepted practice by players and developers to fit a model of ‘good gameplay’. Thus, they offer their commentaries on what has gone stale in the status quo of game design and what else we might have instead, what alternatives experiences are possible. Of course, larger developers have also done this; my contribution here is not to attempt a history of such innovations. There are innumerable indie examples to draw from here, and they have all been discussed at length by others elsewhere so I will keep this very short. Undertale (2015, Toby Fox) forced us to confront our own assumptions around the RPG genre by underscoring that what we thought was the only way in any situation might not in fact be the only one (and may indeed not be the only way for gameplay to occur); Braid (2008, Number None) opened up avenues for considerations of time-based mechanics, for thinking about causation that has influenced many other games; The Stanley Parable (2013, Galactic Cafe) riffed on choice and freedom through the limits of replayability in order to question how freedom in games might ultimately be rather limited; Getting Over It With Bennett Foddy (2017, Bennett Foddy) tested the player’s relationship with themselves – whether they were able to ‘get over it’ or whether they were entrapped to exact unforgiving expectations on themselves for the sake of their own egos or self-identification as ‘hardcore gamers’. These and other games have provoked reflection on the gameplay experience. My point, however, is certainly not that we should await such thoughtful offerings and to pin all expectations of claims to artistic status and aesthetic experience on them. A deepening of the gameplay experience The Deweyan project called for an integration of art and life, which is something that is only possible when we are able to, as a community, bring the attention that we might reserve for art to everyday life. This is no small challenge. In this essay, I have been talking about the gameplay ‘experience’ and the need to deepen it. The best way to do this is for every individual to direct their attention to their own gaming experiences and to hone their ability to do so. This would be in keeping with the Deweyan idea of fostering a community of human beings that do not have their capacities divided into compartments corresponding to social norms. I can attempt to sketch out some general aspects of gameplay experience which are shared across a range of games, acknowledging that these descriptive generalizations are only pale shadows of the specific experiences that individuals actually have under specific circumstances: there is the joy in seeing our gradual skill-development as we internalize the game mechanics and come to act and respond in accordance with principles that we have inferred, which are also principles that we adapt over time; there is the strategic appraisal of different choices and the speculation over their possible outcomes; there is the strain in the exercise of memory in which pieces of information are selectively recalled or forgotten as they become relevant or obsolete; there is the intelligent but non-conscious focusing of attention to some moving stimuli and not others, a keeping track of the complex and ever-shifting landscape of moving opportunities and threats; there is an appreciation for the ebb and flow of the gameplay, for periods of rest and moments of being on the brink of loss or victory; there is a keenly honed spatial and temporal awareness applicable to specific contexts such as certain levels, where the action of a split-second condenses some possibilities and severs others; and finally, there is the pleasure in the ability to act automatically, intuitively, masterfully, in serene moments where control is both relinquished and yet exercised. It is the case that we can often be amnesiac with respect to our gameplay experiences. We play the game, relegating the experience to that of mere ‘fun’ in our own head, and then learn to forget about it afterwards. This is because we have not attempted to apply the aesthetic perspective to what we do not think is ‘art’. Alternatively, we might think about gaming only as a form of training to get better or of beating a challenge, measuring value by our progress in this respect. Instead, we might take time to mull over the contours and textures of our gameplay experiences, considering how they unfolded, how they are developing, how they might have been different, and what about them succeeded or failed to captivate us (and why). The demands of gameplay can of course make such reflections, in the moment of play, difficult. With greater proficiency in the game this becomes easier over time. Such accomplishment (both in the game and in attending to our experience) takes practice. As the philosopher of habit, Clare Carlisle has remarked, our attentiveness to thoughts, physical sensations and emotional responses can catch habit in the act and can lead to the cultivation of a connoisseurial sensitivity. Through this practice, we might come to a more refined understanding of the aesthetic value of gameplay experiences, in their complexity, and thus a deepening of our experience that will cascade into a greater appreciation of what games can potentially offer. Tags: english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Game Researcher) Feng Zhu Dr Feng Zhu is Lecturer in Games and Virtual Environments in the Department of Digital Humanities, King’s College London. He is interested in computer gameplay as a site from which to explore the intersection of power, subjectivity, and play. His research focuses on computer games and how we habituate ourselves through gameplay. In particular, it concerns forms of gameplay as longitudinal self-fashioning that may inculcate ambivalent forms of reflexivity and attention, some of which may be read in terms of an aesthetics of existence. (게임연구자) 나보라 게임연구자입니다. 게임 플레이는 꽤 오래 전부터 해왔지만, 게임학을 접한 것은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 우연히 게임 수업을 수강하면서였습니다. 졸업 후에는 간간히 게임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연구나 저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게임의 역사>, <게임의 이론>, <81년생 마리오> 등에 참여했습니다.

  • 게임비평의 쓸모

    게임 비평 역시 앞서 언급한 시의성이나 대규모 자본과의 관련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글의 형식은 게임 비평일 수밖에 없다. 자기 스스로에 대해 자문하지 않는 존재는 점차 자기 합리화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으며, 이는 현재 한국 게임이 처해 있는 다양한 위기들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 Back 게임비평의 쓸모 20 GG Vol. 24. 10. 10. 비디오 게임을 둘러싼 많은 글들이 존재한다. 리뷰, 공략, 기사, 논문, 비평 등 그 형식도 다양하다. 이러한 글들은 모두 게임 산업이 굴러가는 맥락과 결부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게임 구매와 소비에 관한 패턴이 이 글들의 형식을 규정해주는 좋은 구분점이 된다. 비단 글뿐만 아니라 유튜브나 트위치 등에 올라가는 영상들도 맥락은 모두 유사하다. 게임 리뷰는 게임 전문 웹진이나 유튜브 게임 채널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유형으로 기본적으로 그 전제는 구매 가이드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 게임을 살까 말까 고민하는 게이머들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형태의 리뷰를 참고하는 경우가 많다. 모든 리뷰가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리뷰들은 통상 별점과 같은 평가 기준을 두고 있다. 이는 게이머들이 구매 과정에서 겪는 고민을 손쉽게 정리해줄 수 있는 정량화 툴이다. 업계에서 말하는 좋은 게임 리뷰는 해당 게임의 장점과 단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게이머의 구매 고민을 줄여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게임 리뷰는 시의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제 막 출시된 신작만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게임 리뷰를 올려서 연명하는 매체들은 가장 시의성 있는 게임만을 골라 이를 빠르게 평가하여 게이머들의 주목을 끌어야 한다. 그래야 게이머들이 모여 웹진의 트래픽도 올리고 이를 통해 광고도 수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임 공략은 리뷰와는 달리 주로 이미 해당 게임을 구매한 게이머들을 대상으로 한다. 해당 게임의 기본 조작법부터 시작하여 스토리 전개, 보스 공략법, 팁 등을 상세히 서술하는 것이 특징이다. 게임 공략 글은 과거 인터넷이 보급되기 이전 게임 전문 잡지에 수록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인터넷의 보급과 유튜브 같은 영상 채널에서 라이브로 실시간 공략 등이 이루어지면서 한국에서 비디오 게임 전문 잡지는 <게이머즈> 정도만이 남아 있다. 게임 공략은 리뷰와 마찬가지로 신작 위주의 시의성 있는 작품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해당 작품에 대한 가치 평가가 거의 없거나 있더라도 매우 건조하고 짧게 서술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해당 글을 읽을 독자는 이미 게임을 구매했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공략이 구매 가이드의 역할을 더 수행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게임 공략은 점점 종이 매체에서 웹진 형태를 거쳐 유튜브 같은 영상 플랫폼 위주로 대체되고 있다. 스틸 컷 이미지와 텍스트 밖에 넣을 수 없는 종이 매체와 글, 이미지, 영상 모두를 넣을 수 있지만 게임 기사는 게임 업계 전반에 일어나는 현황이나 사건 등을 사실 위주로 알리는 글을 뜻한다. 기사 역시 대체적으로 시의성 위주로 작성되는 경우가 많으나, 때에 따라서는 특정한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루는 비평적인 특집 기사가 수록될 때도 있다. 또한 게임 리뷰나 공략과는 다르게 게임 업계 전반에 대해 논평하는 메타적인 기사들도 존재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일부 게임 기사는 게임 리뷰와 공략이 논하지 못한 업계 전반의 상황이나 현안을 다룰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글들의 경우 대부분 외부 필진의 칼럼 형태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고 실제 기자들이 쓰는 기사들은 대체적으로 기자의 논평이 생략된 팩트 위주의 단신으로 작성되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 게임 논문은 주로 게임 학계에서 활동하는 교수나 연구자, 대학원생 등이 게임과 관련한 학술적인 연구 결과를 수록한 글이다. 시의성이 있지 않고 특정 주제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을 시도한다는 점, 메타적인 비평도 허용된다는 점에서 게임 논문은 게임 비평과 유사한 측면이 존재한다. 그러나 학술 논문은 기본적으로 다른 연구로부터 더 발전된 측면을 기존 참고문헌의 인용과 분석, 비판을 통해 증명하여야 된다는 점에서 게임 비평과 차이가 있다. 또한 게임 논문은 학술지마다 정해 놓은 글의 스타일과 인용 및 주석 방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게임 비평에 비해 상당히 딱딱하게 진행된다. 비평은 일종의 문예적인 창작이기 때문에 평론가의 표현적 재능이 필요하고 이는 문장과 스타일에서 자유로운 창작으로 이어질 수 있는 여지를 두게 된다. 그러나 학술 논문에서는 이러한 개인의 창작적 표현을 허용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비평과 구분된다. 이에 비해 게임 비평은 앞선 세 부류의 글처럼 시의성과 관련 없이 작성될 수 있다. 당연히 게임 비평 역시 현재 당장 출시된 게임을 논평하면서 시의성을 갖출 수도 있으나, 이럴 경우 비평이 갖추어야 할 작품으로부터의 ‘비평적 거리’를 만족하지 못할 수 있다. 비평(批評)이란 주로 예술 작품의 분석을 통해 그 가치를 논하는 작업인데, 이는 상당 기간 면밀한 관찰과 분석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 또한 게임 비평에는 해당 게임을 분석하기 위한 특정한 시각이나 분석방법론이 동원되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방법론은 분석 텍스트에 해당되는 게임을 논자의 독창적인 시선으로 분석하게 만드는 도구인 셈인데, 이러한 분석 방법론을 자신의 글에 적용하여 특정한 게임 텍스트를 비평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소양을 갖추기 위해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이 때문에 게임 비평은 업계의 시의성으로부터 분리되는 경우가 많지만, 보다 면밀하게 해당 게임이나 사회적인 현상을 둘러싼 반응을 관찰할 수 있는 여유와 비평적 거리를 갖출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에서의 비평은 비단 게임뿐만 아니라 문학이나 영화 등 다른 예술 분야에서도 평론가의 글이 갖추어야 할 질적인 완성도 관리를 위해 등단(登壇)이라는 제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게임 분야는 이러한 제도적 특성이 다소 미비한 측면이 있지만, 문학 쪽에서 기성 문예지나 신문에 비평을 게재하기 위해서는 신춘문예나 문예지의 공모전에 당선되어 일종의 자격을 갖추어야만 한다. 드물게 유명 문인이 신인을 문예지에 추천하여 그 글이 문예지에 두세 차례 기고가 되면 추천 완료라는 형태로 등단한 문인들도 있다. 전 세계에서 한국과 일본만이 지닌 독특한 제도인 이 등단이라는 제도는 이처럼 일정한 자격을 갖춘 이들을 문인으로 대접하고, 이렇게 모인 문인들의 모임을 문단(文壇)이라 불렀다. 문단은 프로 작가와 아마추어 작가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작동해 왔을 뿐만 아니라, 문인들이 스스로에게 사회적 권위를 부여하는 일종의 의식으로 작용해 왔다. 문제는 이러한 문단이나 평론가 그룹의 자의식이 과도하게 작용하거나 리뷰와 구분되지 않는 행태를 보이면서 스스로를 상업적인 올가미에 빠져들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한국 문학 평론은 문단 내부로만 서로 읽어주고 평해주는 일종의 게토화에 빠져 있다. 수많은 문예지가 나오고 있고 거기에 다수의 문학 평론이 실리고 있지만 일반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지는 오래이다. 영화 평론은 기존의 영화 주간지들이 판매부수가 줄거나 폐간되면서 입지가 좁아진 지 오래이다. 또한 예전 송능한 감독이 <세기말>이라는 영화를 통해 “자네는 자네 마누라한테도 별을 주고 그러나? 마누라 얼굴은 두 개 반, 젖퉁이는 별 세 개. 사랑하는 대상이라면 신중해야지. 영화를 밥그릇으로 보니까 함부로 별을 주고 그러는 거 아냐? 천박한 짓이야. 그런 짓 하지 마.”라고 일갈했듯이 평론의 정체성을 지닌 채로 자본의 흐름에 따른 리뷰 위주로 글쓰기를 자행해 온 평론가들의 이중성 때문에 그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온 적도 있었다. 게임 분야에서 비평과 관련된 단체들은 대체로 이러한 공모전 제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 한국에서 게임 비평을 명시적으로 내세우는 거의 유일한 매체인 ‘게임제너레이션’도 창간 첫 해부터 게임 비평 공모전을 열고 있으며, 예전 2008년부터 2012년까지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5회에 걸쳐 주관했던 게임비평상 역시 공모전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정부기관과 기업의 후원으로 진행되었던 게임비평상은 그 공모전을 뚫고 나온 게임평론가들이 지속적으로 글을 실을 수 있는 매체나 지면을 확보하지 않은 채 진행되었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등단한 평론가가 활동하기 위해서는 우선 매체나 지면이 필요한데, 그 당시 존재했던 게임 매체들은 주로 게임 리뷰와 기사, 공략 위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신인 게임평론가들의 글이 실릴 사회적 기반을 갖추지 못했다. 그 당시 게임비평상을 수상했던 이들 중에는 필자의 수업을 들은 제자들이나 학계의 선후배들이 꽤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현재 전업 게임평론가로 활동하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그 당시의 한국 게임업계와 학계 혹은 평론계가 게임평론을 사회적으로 인정할만한 제도적 장치와 인프라를 갖추지 않은 채 이러한 글들을 산발적으로 소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또 한편으로는 2000년대 후반 정도까지 한국 게임업계에서 제작해 온 게임들이 굳이 진지한 게임 비평의 대상이 될 필요성이 많지 않았다는 점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주최 게임비평상의 비평들을 메타적으로 분석한 전경란 교수의 논문 <게임비평에 대한 연구 : 게임비평 텍스트의 메타분석적 접근>에 따르면 그 수상작 30편 중 한국 게임을 주요 분석 대상으로 쓴 평론은 4편에 불과하다. <마그나카르타 2>, <타이니 팜>, <애니팡>, <아이 러브 커피> 등이 그 게임들인데, 이 중 <마그나카르타 2>를 제외한 다른 게임들은 페이스북이나 모바일 플랫폼에서 소비되었던 플랫폼과 게임 소비 패턴의 변화를 주로 다루고 있는 글이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다시 말해 소셜 게임과 모바일 게임으로서의 변화가 가져온 게임 유저 층의 확대라는 차원을 제외하면 2000년대 후반까지 한국 게임 중 비평적 사고가 필요했던 게임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이다. 신인 게임 평론가 대부분이 해외 게임에서 스토리텔링이나 인터랙션 구조, 테마의 사용이나 게임적인 수사학을 분석할 거리를 찾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현재 진행 중인 게임제너레이션의 게임 평론상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에서 게임 평론이 자생하기 어려운 지점을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게임 평론이 아직 필요하다고 믿는 이유는 게임이 단순한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매체로 거듭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한국 게임은 인디게임을 중심으로 사회적으로 문제적 이슈들을 게임 내의 테마로 본격적으로 다루면서, 게임도 대사회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인디게임 개발자 Somi의 죄책감 3부작이나 최근 신작 <미제사건은 끝내야 하니까>와 같은 작품이 다룬 정치권력과 개인 양심의 충돌, 제주 4.3사건의 비극성에 초점을 맞춘 <언폴디드> 시리즈,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삶을 재조명한 <페치카> 등 사회적 임팩트를 주고자 하는 소셜 임팩트 게임들이 속속 출시되고 있다는 점은 게임 비평만이 다룰 수 있는 분석적 조망을 필요로 한다. 또한 최근 들어 게임 업계를 둘러싼 다양한 환경의 변화는 이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할 비평적 시선이 필요함을 역설해준다. 게임 기사와 리뷰를 주로 실어 온 게임 웹진들은 아무래도 광고에 매출의 상당 부분을 의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이 때문에 국내 게임 대기업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최근 들어 게이머들이 단순한 소비자에서 벗어나 트럭 시위와 같은 적극적인 의사 표현을 개진하면서 주체성을 갖춘 존재로 거듭하고 있다거나, 확률형 아이템과 같은 게임 규제가 신설되거나 전반적인 게임 비즈니스 모델이 변모하고 있는 문제와 관련하여 업계와 객관적인 거리를 확보한 비평적 시선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매체들은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데에 소극적이거나 외부 필진을 통해 칼럼을 게재한 뒤 본지의 입장과 관련 없다는 진술을 넣는 정도로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게임 비평 역시 앞서 언급한 시의성이나 대규모 자본과의 관련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글의 형식은 게임 비평일 수밖에 없다. 자기 스스로에 대해 자문하지 않는 존재는 점차 자기 합리화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으며, 이는 현재 한국 게임이 처해 있는 다양한 위기들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게임 비평은 현재 시점에서 한국 게임업계에 가장 부족하고 필요한 영역이라고 보인다. 한국 게임비평은 한국 게임이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맞아야 할 백신인 셈이다. 물론 기존의 문학이나 영화 평론이 걸어갔던 게토화나 리뷰화의 전철을 슬기롭게 피해나가야 하기도 한다. 그 어려운 길을 가는 이들을 묵묵히 응원하고 싶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교수) 이정엽 순천향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게임 스토리텔링과 게임 디자인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인디게임 페스티벌인 부산인디커넥트페스티벌 창설을 주도하고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다.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인디게임 행사인 Independent Games Festival(IGF) 심사위원이기도 하다. 저서로 『디지털 스토리텔링』(공저, 2003), 『디지털 게임, 상상력의 새로운 영토』(2005), 『인디게임』(2015), 『이야기, 트랜스포머가 되다』(공저, 2015), 『81년생 마리오』(공저, 2017), 『게임의 이론』(공저, 2019), 『게임은 게임이다: 게임X생태계』(공저, 2021) 등이 있다.

  • 시각장애인에게 지하철역은 미로 던전이다 - <사운드스케이프> 제작사 오프비트 황재진 대표

    지난 11월 29일 개최된 ‘버닝비버 2024’는 인디게임 창작자들의 다양한 열정과 실험정신을 드러내기 위해 열린 인디게임 컬처&페스티벌이다. 사흘간 총 83개의 인디게임 부스가 열리고 1만여 명의 관람객이 참여한 이 행사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작품 중 하나는 <사운드스케이프>다. 시각장애인 편의시설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한 이 게임은 전맹 시각장애인의 경험을 구현한 탈출 게임으로, 게임의 독특한 시각화 방식과 그 속에 담긴 사회적 메시지로 인해 호평을 받았다. 그간 유사한 컨셉의 게임이 소수 있었지만 특히 대학생으로 구성된 팀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이는 더욱 새롭다. < Back 22 GG Vol. 25.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isu Kim Studies a range of fields—culture and knowledge, space, and the academic field. Also interested in the history of games and the lives of gamers.

  • [인터뷰] EBS ‘다큐프라임-게임에 진심인 편’ PD-자문위원의 코멘터리 대담

    지난 10월 10일, EBS에서 만든 게임 다큐멘터리 〈게임에 진심인 편〉이 게이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다. (참조: https://youtu.be/5LWXpmdV_BU) 일반적인 게임 다큐멘터리처럼 게임의 산업적 측면을 강조하지 않고 게임의 본질과 가치를 다루고 있으며, 트렌디한 연출에서부터 방송 직후 유튜브에 즉시 공개한 것까지, 제작과정과 유통과정 모두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공개된 유튜브의 댓글에는 ‘제작자가 게임에 진심’이라는 시청자들의 호평이 잇따랐다.   < Back 09 GG Vol. 22. 1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Dowon Seo Studies culture in pursuit of a more interesting life. Curious about a wide range of cultural domains, including games, religion, and film.

  • 메타버스, 호흡을 고르고 냉정하게 바라보면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이 “메타버스가 오고 있다”고 발언했다. 에픽게임즈 CEO 팀 스위니도 10억 달러 규모 투자를 유치하고 메타버스를 핵심 비전으로 언급했다. 마크 저커버그는 "향후 5년 후에 페이스북을 메타버스 회사로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펄어비스와 텐센트도 메타버스를 주요 아젠다로 언급했고, 지난 NDC에서도 넥슨 김대훤 부사장이 “더이상 게임 회사, 게임 산업이라는 말을 쓰지 말자” 제안했다. 다분히 메타버스를 의식한 발언이다. < Back 메타버스, 호흡을 고르고 냉정하게 바라보면 01 GG Vol. 21. 6. 10. 바야흐로 오늘날 게임업계의 키워드는 메타버스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이 “메타버스가 오고 있다”고 발언했다. 에픽게임즈 CEO 팀 스위니도 10억 달러 규모 투자를 유치하고 메타버스를 핵심 비전으로 언급했다. 마크 저커버그는 "향후 5년 후에 페이스북을 메타버스 회사로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펄어비스와 텐센트도 메타버스를 주요 아젠다로 언급했고, 지난 NDC에서도 넥슨 김대훤 부사장이 “더이상 게임 회사, 게임 산업이라는 말을 쓰지 말자” 제안했다. 다분히 메타버스를 의식한 발언이다. 게임지에서 일하는 필자도 하루에도 몇 통씩 메타버스 관련 보도자료를 받는다. 오전에만 한국콘텐츠진흥원, 버추얼휴먼,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 그리고 에픽게임즈 코리아로부터 '메타버스'라는 키워드가 담긴 보도자료를 받아서 읽었다.그래서 대관절 메타버스란 무엇인가? 보도자료는 대답이 없다. 메타버스는 최근 만들어진 개념어가 아니다. 접두어 메타(Meta)에 세상을 의미하는 유니버스(Universe)가 합쳐진 메타버스는 ‘초월적 세상’ 정도로 읽을 수 있다. 영문 위키피디아는 메타버스를 "유저간 공유되는 영구적인 3차원 가상 공간을 현실 세계와 연결해 만들어진 미래의 인터넷" [1] 이라고 정의한다. 한국에 메타버스를 알리는 데 앞장서는 김상균 강원대 교수는 “디지털 미디어에 담긴 세상, 디지털화된 지구” [2] 라고 썼다. 최근 뜨는 용어로 부각된 메타버스를 완전 부정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메타버스가 약속하는 것이 ‘새로운 세상’이라는 들썩임에 동조하기 어렵다. 메타버스가 대단하다고 여겨지는 이유의 대부분은 이미 게임이라는 미디어가 제공하고 있어서 ‘새로운’ 감각을 받지 못했다. 또 과문한 탓에 아직 게임과 메타버스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결정적 단서를 찾지 못했다. 게임이라는 매체는 오래전부터 디지털 세상에서 유저간 공유되는 3차원 가상 공간을 제공해왔다. 어쩌면 게임이야말로 메타버스의 프로토타입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오늘날 메타버스를 아젠다로 삼은 기업들은 대부분 게임사이거나 게임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젠슨 황은 GPU와 메타버스 플랫폼 <옴니버스>를, 팀 스위니는 언리얼엔진과 <포트나이트>를, 마크 저커버그는 오큘러스 헤드셋과 <호라이즌>을 팔아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업계가 그간 게임이라고 호명하던 대상을 달리 불러야 할 까닭은 되지 않는다. 필자는 다소 확정적으로 오늘날 메타버스라는 마케팅 용어가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다고 주장한다. 유행어가 모이는 메타버스… 과연? 이런 와중에 ‘초월적 세상’의 화폐를 NFT, 대체 불가능 토큰으로 삼으려는 시도가 상당히 활발하다. 현재 생태계에서 메타버스는 기업들이 자사 콘텐츠에 기존 화폐가 아닌 NFT를 도입하기 유리하도록 활용되고 있다. 일찌감치 블록체인 사업에 뛰어든 위메이드는 <미르4> 글로벌 버전의 NFT 결제를 지원할 예정이다. 네이버제트가 서비스 중인 <제페토>는 ‘메타버스 플랫폼’으로 다른 유저와 만나 점프, 슈팅, 라이딩 게임을 할 수 있다. 현금으로 구입할 수 있는 인앱 재화가 있고, 페이팔 계정을 통해 재화를 현금으로 인출할 수 있다. 현행 게임법은 사행성을 띤 게임물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제페토>는 제재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네이버제트는 <제페토>가 게임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가상세계 플랫폼의 법적정의를 분명히 하고 게임과 구분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3] 고 제안했다. 메타버스라는 단어가 유행하기 훨씬 이전 일이다. 게임 생태계 일각에서는 게임산업진흥에 관한 법률(이하 게임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답을 찾으려는 이들이 있었다. 법에 가상세계를 어떻게 제도에 담을지에 관한 논의를 제대로 시작하지 않은 가운데 몇몇 사람들은 2021년 메타버스라는 방패를 들고 섰다. 그리고 필자는 <제페토>와 뒤에 살펴볼 <세컨드라이프> 의 지향점은 유사하다고 본다. 규제 당국은 암호화폐와 관련한 룰이 없어 난감하다. 스카이피플은 거래소 없이 자율등급을 받아서 게임을 연 뒤 게임 밖 NFT 거래소를 열어 아이템을 판매할 수 있게 했다. 그렇게 <파이브스타즈>는 15세 등급으로 운영됐고, 거래소 운영을 확인한 게임물관리위원회는 게임의 등급분류를 취소시켰다. (6월 23일 스카이피플은 행정처분 집행정지 가처분 소송에서 승소했다. [4] ) 7월 국회에서는 디지털 자산에 대한 가격을 암호화폐로 사고파는 것이 합당한지를 놓고 토론회가 열렸다. 이렇게 메타버스의 이름 아래 몇 년 동안 업계에서 유행했던 개념들이 하나로 모이고 있다. 메타버스는 VR과도 밀접하다. 전진수 SK텔레콤 메타버스 컴퍼니장은 “VR도 메타버스로 가는 여정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이 말을 듣고 VR에 대한 업계의 회의가 떠올랐다. 정부는 실감형 콘텐츠를 미래 먹거리로 보고 적잖은 공적 자원을 투자했다. 정부는 작년 실감형 콘텐츠 육성에만 1,500억 원을 투자했지만 모두가 기억하는 K-실감형 콘텐츠는 없다. 그런데 조사에 따르면, 2019년 연간 매출액 10억 원 미만인 VR 관련 회사가 68.7%다. 이 중 ‘1억 원 이상 3억 원 미만’이 23.4%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100억 원 이상 매출 기업은 전체 조사대상 중 6.3%, 4개 업체에 불과했다. [5] VR은 언젠가 크게 뜰 수 있고, 메타버스 콘텐츠의 톱니바퀴가 되겠지만, 오늘날 언급되는 장밋빛 전망은 대중이 실제로 콘텐츠를 받아들이는 수준보다 훨씬 높은 곳에 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누구를 위한 ‘초월적 세상’인가? 가장 우려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 있다. 메타버스를 건설하려는 사람들이 사용자 생각은 얼마나 하고 있냐는 것이다. 메타버스 IP의 소유권은 기업이 가지고 있다. 페이스북, 애플, 아마존,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MS) 같은 기업이 철저하게 소유권을 가지는 ‘초월적 세상’에서 유저들은 계속 행복할 수 있을까? 이윤 창출을 지상과제로 삼는 기업들이, 돈이 안 돼서 메타버스를 ‘섭종’한다면 메타버스에 진심이던 사람들은 세상을 잃어버리게 된다. 블리자드는 2018년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 공식 e스포츠 리그를 즉각 폐지해버린 적 있다. 비록 그 수가 주도적인 e스포츠보다 적었지만, 선수와 팬들은 하루아침에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던 대상을 잃어버린 것이다. 메타버스의 최우수 사례로 알려진 <마인크래프트>의 청소년 이용 불가 사태도 비슷하게 볼 수 있다. 세간에 알려진 바와 같이 바뀐 MS의 정책에 의해 미성년 회원들이 게임이 즐길 수 없게 되었다. 10년 넘게 유지 중인 셧다운제의 비합리성과 별개로 MS는 이 사건이 공론화되기 전까지 미성년자들을 차단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아울러 콘텐츠 산업은 흥행 산업이다. AR이 뜰 것 같았지만 널리 성공한 콘텐츠는 <포켓몬 GO> 하나였던 것처럼, 우후죽순 등장하는 메타버스 콘텐츠가 모두 성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간혹 <제페토>에서 <로블록스>로 또 <마인크래프트>로 디지털 국경을 넘나드는 정력적인 유저층도 존재하겠지만, 장기적으로 기업이 원하는 그림은 아닐 것이다. 게임이 메타버스의 프로토타입이라면, 넷마블의 스토리 플랫폼 〈BTS 유니버스 스토리〉가 모든 메타버스가 뜰 수 없다는 주장의 적절한 근거가 될 것이다. 사용자들은 그저 IP가 좋아서, 홍보모델의 팬이라는 이유로 그 콘텐츠에 애착관계를 가지고 오래도록 붙잡지 않는다. [6] 코로나19가 끝나도 메타버스에서'만' 만나시겠습니까? 한편 코로나19를 극복하려는 여러 모색은 세간의 메타버스 인플레이션을 부추겼다. 건국대 총학생회는 가상 캠퍼스를 만든 뒤 그곳에서 축제를 진행했고, 트래비스 스콧은 <포트나이트> 안에서 가상 콘서트를 열었다. BTS 멤버들도 <메이플스토리>와 <서든어택>으로 아미와 만남을 가진 적 있다. <마인크래프트>로 졸업식을 연 일본 초등학생 사례도 있다. 이러한 이벤트는 메타버스의 사례로 자주 호출되지만, 코로나19로 발생된 제약을 극복하려는 대체재 성격이 강하다. 건국대 학생들에게 코로나19가 종식된 이후에도 메타버스 축제를 열자 한다면 과연 기뻐할까? 코로나19가 끝난 뒤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뮤지션을 언택트로만 보려고 할까? 이전부터 뮤지션들은 인터넷으로 팬들과 소통하지 않았나? 또 <마인크래프트>로 졸업식을 연 학생들은 분명 귀엽고 독창적인 시도를 했지만, 알려진 총인원은 8명으로 그리 많지 않다. 인류는 코로나19와 그로 빚어진 고난을 반드시 극복해야 하고, 조금씩 그 길로 가고 있다. 그렇다면 코로나19 이후로도 우리는 언택트 라이프를 이어나갈까? 필자가 봤을 때, 판데믹은 온라인 소통의 이점을 재확인해주었을 뿐이지,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전격 이주하는 출발점은 아니다. 이미 많은 전문가가 메타버스는 현실의 삶을 완벽히 대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코로나19로 만나지 못해서 매일 밤 <클럽하우스>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 결국에는 ‘이 시국’을 뚫고 만났다는 유의 사례는 상당히 많다. “코로나 사태에도 붐비는 클럽과 헌팅포차”를 보면 알 수 있듯 “인간은 신체를 가졌기에 (중략) 지난 5천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모이는 경향은 크게 바뀌지 않을 것” [7] 이다.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수백만 년의 진화에 의해 만들어진 생화학적 체제의 지배를 받는다.” [8] 코로나19 이후에도 우리는 실제 만남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더 많은 토론이 메타버스의 밸류에이션을 바로 매길 수 있다 메타버스라는 신조어에 대한 토론도 부족하다는 인상이다. 독자들에게 묻고 싶다. <배달의민족>, <요기요> 등 배달 어플리케이션으로 음식을 주문하고 평점을 남기는 것도 메타버스라고 할 수 있을까? 에 국순당 주점 광고를 하는 게 메타버스인가? 어디까지가 메타버스이며, 메타버스와 게임의 차이는 무엇인가? 아직 메타버스에는 규범적, 기술적 의미에 대한 정의가 부족하다. 미국의 린든 랩에서 2003년 서비스를 시작한 <세컨드 라이프>는 가상세계에서 자신의 아바타를 통해 유무형의 가치를 실현시키고, ‘린든 달러’를 현금화 할 수 있도록 열어놓았다. 당시 <세컨드 라이프>가 게임인지 소셜미디어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이 토론은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대두와 함께 사그라들었다. 단일 플랫폼의 온라인 시뮬레이션보다는 라이프의 영토를 온라인 그 자체로 확대하는 것이 좋았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세컨드 라이프>를 소셜미디어가 아닌 게임으로 분류하는 것이 중론이다. 물론 메타버스가 일반화된 미래에 <세컨드 라이프>를 메타버스의 원류로 분류할 지도 모른다. 2007년, <세컨드 라이프>는 한국에서도 공식 서비스를 진행한 적 있다. 당시 문화관광부, 정보통신부, 여성가족부 3개 부처가 한 자리에 모여 <세컨드 라이프>를 어떻게 볼지 회의를 연 적 있다. 지난한 논의 과정을 생략하고 결론만 보자면, 린든 화폐의 환전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린든랩은 한국 공식 서비스를 2009년에 마쳤다. 이와 별개로 <세컨드 라이프>의 접속자 규모는 감소했다. 앞으로 우리가 메타버스의 벨류에이션을 매길 때 <세컨드 라이프> 사례는 참고할 만하다. 어떤 장벽이 작용했나, 사용자들은 어떻게 반응했나, 기업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앞서 살펴본 <제페토> 문제를 볼 때도 함께 비춰봄직하다. 마치며 메타버스에 ‘기회의 땅’이나 ‘골드러시’ 같은 수식어가 붙은 보도를 본다. 이것이야말로 일종의 은유가 아닐까 한다. 19세기 금을 따라 서쪽으로 ‘러시’한 개척민 중 성공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개중에는 지하 깊은 곳에서 금을 캤다고 착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착각한 사람들이 캤던 것은 금이 아니라 유황과 철을 화합한 파이라이트, 황철석이었다. 진짜로 금이 나와서 대박이 터진 곳도 있었지만, 금이 동나자 이내 유령 도시가 되어버렸다. [9] 1821년, 스코틀랜드의 탐험가 그레거 맥그레거는 항해에서 돌아와 중앙아메리카의 포야이스라는 나라의 왕이 되었다며 ‘기회의 땅’ 포야이스의 국채를 사라고 홍보했다. 비옥한 토양에 사금이 물처럼 흐르는 곳이라며. 그러나 포야이스 같은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10] 한 시장 조사 업체는 메타버스의 2025년 시장 규모가 2,800억 달러(약 315조 원)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지난달 기획재정부, 문화체육관광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공동으로 메타버스 TF를 꾸렸다. 언론과 시장은 메타버스에 대한 부푼 꿈으로 가득하다. 메타버스가 진정 잘 나가기 위해서는, 이런 매운 사례도 한 번쯤 봐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사족으로 붙여봤다. [1] 방승언, 「미래의 인터넷? '메타버스 게임', 거품일까 아닐까?」, 디스이즈게임, 2021.5.20. [2] 김상균, 「메타버스」, 플랜비디자인, 2020, p.23 [3] 한국콘텐츠진흥원, 「가상세계산업 관련법 개정 및 진흥법 제정방안 연구」 (2011) [4] 김한준, 「스카이피플 '파이브스타즈', 게임위에 집행정지 가처분 승소」,지디넷코리아, 2021.6.24. [5] 한국콘텐츠진흥원, 「2020 가상현실 게임사업체 실태조사」 [6] 김재석 「BTS 유니버스 스토리, 흥행 저조의 이유는?」, 디스이즈게임, 2020.10.7. [7] 유현준, 「공간의 미래」, 을유출판사, 2021, p.13 [8]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김영사, 2015, p.544 [9] https://ko.wikipedia.org/wiki/%EA%B3%A8%EB%93%9C_%EB%9F%AC%EC%8B%9C [10] https://en.wikipedia.org/wiki/Gregor_MacGregor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김재석 8년 동안 디스이즈게임 취재기자로 일했다. 지금은 서브컬처 스타트업에서 대외협력을 맡고 있다. 에디터와 치트키의 권능을 사랑한다.

  • The Coevolution of Arcade Games, Gamers, and Interfaces

    As such, interfaces may evolve to accurately construct the ideals projected on the design, but that design can easily change based on coincidental chance. The modified interface also brings about transformation to one’s gameplay itself, and this change in gameplay can change the experience provided by the game, thus bringing about an effect that makes the game itself feel different. Therefore, the interface is not merely a simple input device nor a factor that does not bring any fundamental changes to the game, but rather is the very hardware that constitutes the game and simultaneously the “physicalized” mechanical object connected to the gamer. The interface does not evolve or progress according to the game’s design; it lies in the process of ever-changing co-evolution while interacting with the game, the gamer, and all environments tied to the self. < Back 10 GG Vol. 23.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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