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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는 시뮬레이션의 꿈을 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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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5. 12. 10.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이라는 단어의 조합


‘미연시’라는 단어가 있다.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이란 게임 장르를 지칭하는 단어로 이 장르는 코어한 팬층이 존재하며 지금도 계속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게임의 “장르”가 대부분 그렇듯이 이 미연시 역시 엄밀하게 구분되어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많은 사람들이 게임의 장르를 구체적으로 분류하려고 시도를 했으며 대부분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는데, 비슷한 상황으로 “미연시”라는 장르에 대해서도 이 장르에 대해서 들었을 때 떠올리는 게임들이 각기 다를 가능성이 높다. 제작자가 “이것은 미연시입니다.” 라고 하면 미연시이고 아니다 라고 하면 미연시가 아니다 라는 무난한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먼저 미연시 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통용하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보고 싶다. 일본에선 이런 단어를 안쓰나요? 라는 의문점이 떠오를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일본에서는 연애시뮬레이션(恋愛シミュレーションゲーム) 이란 단어를 먼저 사용하였었으며 우리가 흔히 미연시라고 통칭하는 장르의 게임의 역사가 깊은 만큼 다양한 게임이 나왔기 때문에 요즘은 연애시뮬레이션보다는 해당 장르에서 발전된 다른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그 단어 역시 어덜트 게임(アダルトゲーム), 에로 게임(エロゲ), 걸 게임(ギャルゲー), 미소녀 게임(美少女ゲーム), 비주얼 노벨(ビジュアルノベル), 노벨 게임(ノベルゲーム)등 해당 장르를 포함하거나 가리키는 단어들이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고 사용된다. 근래에 커지고 있는 영어권 시장에서는 Dating Sim 이란 장르가 우리가 부르는 미소녀 연애시뮬레이션에 가장 가까운 것을 가리키는 단어가 될 것이다. 물론 이런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한국에서 부르는 “미소녀”와는 거리가 있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다시 미연시라는 장르로 돌아와 국내에서는 이러한 연애 이야기를 다루는 게임들을 미연시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분류는 장르적 구분이 엄밀하지 않다. 시뮬레이션이란 이름으로 캐릭터의 전투와 육성 시스템을 넣었지만 그 수준이 장식인 정도의 게임도 있을 수 있고, 야한 장면이 존재하는 게임이지만 그냥 야겜이라고 부르기 민망해서 미연시라고 부르는 게임들도 존재한다. 아니면 그냥 야한 장면이 없는 연애를 다룬 게임을 미연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미연시라고 부르는 게임에서 ‘미소녀’와 ‘연애’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시뮬레이션’은 미연시의 어떤 부분에서 찾아 볼 수 있을까. 이를 알아보기 위한 손쉬운 방식이라면 역시 그 뿌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미연시의 뿌리를 국내에서 찾아보자면 국산 PC 게임에서는 <캠퍼스러브스토리>(남일소프트, 1997), <부킹맨>(FEW, 1997), <스카드젬>(아트림미디어, 2001)등이 나올테고 온라인게임으로 넘어가면 NPC와 쌓아가는 시스템이나 호감도가 존재하는 현재의 캐릭터 뽑기 게임들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연애 대상으로서의 ‘미소녀’라는 단어를 제외한 연애 시뮬레이션으로 가면 <구운몽-어느 소녀의 사랑이야기>(네오앨리스, 2014)이나 <수상한 메신저>(체리츠, 2016)등을 언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근래에는 한동안 기세가 죽었다고 여겨지던 비주얼노벨 장르의 게임들이 주문형 게임 플랫폼을 중심으로 외산과 국산을 가리지 않고 활발하게 출시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사실 국내에서 국산 게임으로 미연시의 계보를 그리기는 힘든 부분이 있다. 꾸준히 한 장르를 제작하는 크리에이터가 드물고, 각각의 게임들이 국내의 다른 게임의 영향보다는 외산 게임의 영향을 받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장르에 한해서라면 그 뿌리를 일본으로 찾아가는 것이 맞다. 연애시뮬레이션의 뿌리 뿐만 아니라 일본의 성인게임은 서브컬쳐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여러 가지 문화코드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성인용 게임 안에 등장한 캐릭터의 원형이나 스토리텔링 방법론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거리가 많겠지만 지면이 부족할 가능성이 높고, 필자 역시 성인용 게임 전문가는 아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정리는 다른 지면, 다른 분에게 맡기고자 한다. 우선은 연애시뮬레이션이 시뮬레이션을 다루는 형식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해보자.

     


미연시라는 장르의 탄생


장르란 이름의 미연시 탄생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일반적으로는 해당 장르명을 전면에 내세운 대표 사례들인 <두근두근 메모리얼>(ときめきメモリアル, KONAMI, 1994) 이나 동시기에 나온 <안젤리크>(アンジェリーク, KOEI, 1994) 정도를 이야기하겠지만, 이 두 게임 역시 일반적인 연애 시뮬레이션으로 인식되는 게임들의 역사의 흐름에서 앞부분이 아니라 중간에 위치해 있다. 그렇다 보니 연애를 주요 소재로 삼는 게임을 찾아보려면 좀더 앞의 역사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보통 일본 게임사를 살피는 시도는 가정용 콘솔 게임을 중심에 두곤 하는데, 지금까지도 시장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콘솔시장에 중심을 두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연애 게임의 계보를 살피려면 PC게임의 역사를 함께 확인해 봐야 한다.


80~90년대의 일본 개인용 컴퓨터 환경은 다른 나라의 개인용 컴퓨터 환경과는 크게 달랐다. 개인용 컴퓨터는 기본적으로 업무를 하기 위한 장비이고, 영어로는 일본어 업무를 처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로 개인용 컴퓨터 환경이 인해 일본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제규격으로 표준 언어 코드 체계가 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독자적인 언어코드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일본의 개인용 컴퓨터 환경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환경이 아니라 일본어 표시를 지원하는 독자규격 PC와 운영체제 소프트웨어가 갈라파고스처럼 독자적인 생태계를 형성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PC-88 / PC-98 이었다. 하지만 전세계에서 그랬듯이 개인용 컴퓨터로 업무만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개인용 컴퓨터로도 게임을 즐겼으며, 가정용 게임기처럼 개발킷이 따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컴퓨터 그 자체로도 소프트웨어 개발이 가능 했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게임을 만들 수 있었다. 이런 PC환경에서 만들어져 인기를 끈 게임들이 가정용 게임기로 이식되곤 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게임을 만들어 출시 할 수 있었던 점이다. 가정용 게임기 시장은 플랫폼 홀더가 게임의 출시를 강하게 관리했기 때문에, 게임을 자유롭게 출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개인용 컴퓨터 시장은 게임의 출시에 허락이 필요하지 않았는데 (물론 이후 심의단체가 생겨나면서 지금 시점에서 보기에 무모할 정도의 소재를 다룬 게임들은 안 나오게 된다.) 이러한 특징은 가정용 게임기에서는 다루기 힘든 소재의 게임들이 PC 게임 시장에 출시될 수 있게 만들었다.


     

성인 게임 등장


성인용 게임은 간단한 규칙에 야한 그림만 붙이면 만 있으면 쉽게 만들 수 있다는 인식이 있어 초기 게임 개발사들의 적잖은 시도들이 있었다. 그런 흐름 중에는 술자리에서 문란하게 노는 문화들을 컴퓨터 게임으로 옮기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에는 “야구권(野球拳)”이라는 놀이가 있는데, 단순한 가위바위보를 통해 진 사람이 걸치고 있는 옷을 하나씩 벗는 일종의 술자리 벌칙 게임이었다. 최초의 성인용 게임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주로 언급되는 것이 이 '야구권'을 컴퓨터용으로 옮긴 <허드슨의 야구권>(野球拳, HUDSON) , 1981(추정))이다.


허드슨은 2012년에 코나미에 인수되기 전까지도 유명한 게임 회사 중 하나였는데, <허드슨의 야구권>은 텍스트를 이용한 이른바 아스키 아트(ASCII Art)라고 부르는 트릭으로 여성을 화면에 그린 뒤, 가위바위보 게임에서 이기면 텍스트로 만들어진 야한 그림을 볼 수 있는 게임이었다.


동 시기에 나온 코에이의 <나이트라이프>(ナイトライフ, KOEI, 1982)가 최초의 성인용 게임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는데, <나이트라이프>는 게임이라기보다는 성행위의 체위를 알려주는 일종의 교양 소프트웨어였기 때문에 게임으로 보기 힘들다는 의견도 있다. 개발사 이름이 익숙하실 텐데 '그 코에이인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삼국무쌍> 등으로 유명한'그' 코에이가 맞다.

     

초창기의 이러한 시도들 이후 PC게임 소프트웨어 시장에는 성인용 소프트웨어가 무수히 쏟아졌다. 야한 장면을 모아놓은 사진집 소프트웨어나 간단한 퍼즐 게임을 풀면 야한 사진을 볼 수 있는 게임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초기 게임들이 단순한 포르노에 가까운 사진집들이었다면, 이후에는 좀더 스토리텔링에 무게를 둔 성인용 어드벤처 게임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일본의 어드벤처는 미국의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와는 다른 형태로 발전했는데, 미국 어드벤처 게임들이 포인트 앤 클릭, 텍스트 직접 입력 인터페이스 중심의 게임이었다면 일본의 어드벤처 게임들은 화면 안에 캐릭터가 나오고 선택지가 등장하는 형태로 발전한다.


성인용 게임을 분류하는 사람들이 일컫는 '코에이 성인용 게임 3부작'이 있는데, 앞서 언급한 <나이트라이프>와 함께 <단지처의 유혹>(団地妻の誘惑, KOEI, 1983), <네덜란드 아내는 전기 뱀장어의 꿈을 꾸는가>(オランダ妻は電気ウナギの夢を見るか?, KOEI, 1984)에 이르러서는 좀 더 게임스러워지고 설정도 복잡해 진다. <단지처의 유혹>은 주인공이 여성과 관계를 가지는 보상이 주어지는 형태이긴 했으나, 장면 자체는 자체 규제를 거쳐 직접적으로 행위가 묘사되지는 않았다. 게임 화면은 당시 유행하던 3D 던전 게임의 인터페이스에 기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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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지처의 유혹> 플레이 장면

     

1980년대의 성인용 게임은 야한 이미지를 보상의 개념으로 제공하는 게임들이 많았으며, 이야기가 중심이고 야한 이미지는 덤인 정도의 어드벤처 게임, 혹은 성인용 비디오를 컴퓨터로 옮긴 시도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어드벤처 게임들은 선택지를 통해 플레이어가 게임을 진행하는 형식이었고, 이런 형태의 진행은 게임의 시나리오에 플레이어가 개입하여 결과가 바뀌긴 했지만 이러한 게임들을 시뮬레이션으로 인식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성인용 게임 중에 본격적으로 시뮬레이션으로 인식하게 되는 게임들은 이후에 등장한다.



연애를 시뮬레이션하다


연애시뮬레이션의 초기 형태를 띤 게임으로 <도쿄 난파 스트리트>(TOKYOナンパストリート, ENIX, 1985) 가 주로 언급되는데 이 게임 제목에 등장하는 난파(ナンパ)라는 단어는 남성이 여성에게 교제 혹은 성행위를 목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뜻하며 헌팅이라는 표현으로 번역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단어라 부가 설명을 덧붙이자면 일반적으로 호쾌한 혹은 불량스러운 남성을 지칭하는 일본의 표현인 경파(硬派 – 코우하로 발음)와 그 반대편에 있는 여성을 밝히는 남성을 지칭하는 연파(軟派 – 난파로 발음)라는 단어가 존재했는데 여기서 난파라는 단어가 여성을 꼬시는 행위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변했다고 인식하고 있다. 요즘으로 치자면 “여미새”정도로 번역할 수 있지 않을까. (경파에 대한 용례는 가까운 예로 인기있는 고전게임 시리즈인 <열혈경파 쿠니오군> 시리즈를 떠올릴 수도 있다. 난파는 후술할 동급생의 실행 파일명이기도 하다.)


'여성을 꼬셔서 에로틱한 상황을 연출해 야한 이미지를 본다' 라는 게임이 기존에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일정 금액을 가지고 특정 장소로 이동하여 캐릭터를 만나 이야기 속에서 선택지를 골라 데이트 중 여성의 호감도를 얻고 야한 상황을 연출하는 것에 이어 결혼까지 가는 흐름은 이후 나오는 연애시뮬레이션 게임 구조의 기초가 여기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TOKYO 난파 스트리트>의 개발사 에닉스 역시 일본 게임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친숙한 이름인데, 스퀘어를 합병하여 스퀘어 에닉스로 사명을 바꾼 그 에닉스이며, 개발협력에는 호리이 유지가 올라가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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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 난파 스트리트> 플레이 장면

     

성인용 게임들은 이후에도 활발히 나왔는데, 그다지 의미 없는 선택지들과 수위 높은 야한 장면이 연출되는 단순한 어드벤처 게임부터 나름 미스테리처럼 스토리를 가지고 있지만 야한 장면이 존재하는 이야기 중심의 어드벤처 게임들이 있었다. 이런 어드벤처 장르의 게임 외에도 퍼즐게임이나 테이블 게임에서 승리하면 상대방 여성이 옷을 벗는 연출로 야한 장면을 “보상”의 감각으로 제공하는 게임들이 꾸준히 나왔는데, 점차 RPG나 시뮬레이션 같이 굳이 야한 장면이 필요 없는 장르의 게임에서도 미소녀와 성인용 이미지를 추가한 다양한 장르의 성인용 게임들이 나오는 흐름을 맞는다.


성인용이 아니더라도 미소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다양한 장르의 게임들도 나타났다. 인기있던 성인용 게임들이 이미지의 수위를 낮춰 가정용 게임으로 이식되는 경우들도 존재했다. 이 무렵의 게임 중 특히 주목할 부분은 육성 시뮬레이션 장르의 게임들이다. 장르의 시발점이자 대표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1991년 작 <프린세스 메이커>(プリンセスメーカー, Gainax, 1991)는 어린 고아를 딸로 삼아 10년간 키우는 게임으로 어떻게 육성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파라미터가 변동하며 이를 통해 다양한 엔딩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인기를 끌었다.


<프린세스 메이커>의 개발자인 아카이 타카미는 게임 개발 회고에서 자신은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 전투보다 부하 육성이 더 좋았었고 이것으로 게임을 만들고자 했는데, 사내에서 여성의 일생을 다루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어 딸을 키우는 게임을 만들게 되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프린세스 메이커>의 특징은 파라미터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직업을 가지게 되는 직업 엔딩과 별개로 게임의 진행과 능력치에 따라 바뀌는 결혼 엔딩이 따로 존재했다는 점이다. 연애에 대한 시뮬레이션이라 부르기는 어렵지만 플레이의 결과로 만들어진 수치에 따라 연애의 결과가 나온다는 점은 주목해볼 만 하다.


국내에도 소개되었던 뒤이어 나온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 <탄생>(誕生 〜Debut〜, Headroom/NEC Avenue, 1993) 이나 <졸업>(卒業, Headroom/Japan Home Video, 1992) 같은 게임들은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의 숫자가 늘었다. <프린세스메이커>와 <탄생>, <졸업> 모두 직접적인 성 묘사가 없었지만 플레이어와의 결혼과 같은 엔딩이 존재하는 것처럼 여성 캐릭터 - 플레이어 관계에 대한 묘사가 연애 혹은 유사 연애로 들어가고 있어 이후 미소녀 게임들에 영향을 준 바 있다.

     


     

그리고,

1992년 <동급생>(同級生, elf, 1992)이 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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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급생> 커버 이미지

연애 어드벤처로 분류되어 있는 게임이긴 하지만 연애시뮬레이션으로 분류되기도 하는 이 게임의 인기와 영향력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졸업>과 <탄생>의 원화를 담당했던 타케이 마사키가 디자인한 캐릭터들은 지금까지의 게임과 달리 다양한 구도와 맥락의 이벤트 씬 을 추가해 캐릭터의 설득력을 늘려 나갔고, 게임의 시스템 역시 매우 높은 자유도를 갖도록 디자인되었다.


고정된 이벤트들이긴 하지만 플레이어는 2D로 이루어진 도시의 지도에서 자신의 시간과 자금을 관리하며 여성과 이벤트를 진행하고 최종적으로 야한 이미지를 볼 수 있었으며, 반대로 매일 방에서 침대를 클릭하면서 잠만 자면서 아무것도 안하고 게임의 엔딩을 보는 것도 가능할 정도로 자유도가 높은 게임이었다. 이렇다 보니 한정된 시간과 자금으로 최대한 많은 여자와 관계를 맺는 파고드는 공략을 하는 이용자도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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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근두근 메모리얼> PC엔진 버전의 커버

     

초반에 이야기했듯이 1994년엔 본격적으로 연애시뮬레이션이란 장르를 표방한 <두근두근 메모리얼>이 등장했다. 성인용 게임이 아니라 전연령으로 발매되었으며 PC용이 아니라 가정용 게임기인 PC엔진용으로 출시되었다.


<두근두근 메모리얼>은 이후 다른 게임기로 이식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이 게임의 장르명은 연애시뮬레이션이긴 했지만 개발자의 인터뷰를 살펴보면 여성과의 연애보다는 학창생활을 시뮬레이션하는 것에 가까웠다. 게임의 목표가 게임안에 등장하는 다양한 여성중 한 명을 선택해 연애를 하는 것이었지만 그를 위해 본인의 파라미터를 성장시켜야 하는 육성시뮬레이션적인 요소가 강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 게임은 대 히트를 쳤고, 등장하는 히로인 캐릭터들 역시 크게 인기를 끌며 100만단위의 판매량을 달성했다. 이전의 미소녀를 대상으로 한 연애 게임들이 PC 시장을 중심으로 판매되어 큰 히트작으로 알려지더라도 판매량이 10만단위였던것을 생각하면 이 수치는 굉장히 큰 수치였으며 100만단위의 판매량을 만들어낸 연애를 소재로 한 첫번째 게임이 되었다. 이후 연애를 그리지 않더라도 이러한 시뮬레이션 장르에 미소녀가 나오는 다양한 게임들이 가정용 게임기로 출시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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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젤리크> 패키지 아트

     

미소녀란 이름을 앞에 붙일 수는 없지만 1994년 코에이에서는 여성 플레이어를 대상으로 한 연애시뮬레이션 게임이 나왔다. <안젤리크> 역시 스스로를 연애시뮬레이션으로 분류하였으며, <두근두근 메모리얼>과는 달리 <안젤리크>는 배경을 판타지로 옮기고 주인공 여성 캐릭터는 여왕후보로 다른 후보와 경쟁하며 수호성들의 도움을 받아 행성을 육성해서 여왕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당시 개발 상황에 관한 인터뷰를 들여다보면 시나리오만으로는 게임성이 충분하지 않아 여왕 후보 2명을 두어 경쟁시키고, 수호성과 협력하여 행성을 발전시킨다는 건설운영 시뮬레이션 시스템을 추가해 완성된 형태가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안젤리크>가 가진 연애시뮬레이션으로서의 성격은 연애 자체를 시뮬레이션했다기 보다는 연애 요소를 가진 시뮬레이션 게임이란 의미에 가까웠을 수도 있겠다.

     


시뮬레이션에서 이야기로


<두근두근 메모리얼> 이후 다양한 육성 시뮬레이션이 미소녀를 다루며 많은 게임이 나왔지만 전반적으로는 성인용 게임보다는 미소녀를 다룬 다양한 게임이 더 주목받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Leaf”사의 게임들이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전의 어드벤처 게임들이 캐릭터와 배경, 스탯이 보이는 3D 던전 게임 느낌의 게임화면을 바탕으로 작은 대사창에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형태였다면, Leaf의 <시즈쿠>(雫, Leaf, 1996), <키즈아토>(痕, Leaf, 1996)는 성인용 게임에서도 캐릭터와 스토리에 비중을 좀 더 주며 화면의 전체를 덮는 형태의 이야기를 전달하게 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러한 미연시 장르의 게임이 본격적으로 읽는 게임으로 변화함을 보이는 상징적인 변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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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Kanon>, 대사창 중심의 게임 진행과 우 <Fate S/N>의 화면을 덮는 게임 진행

     

한편 트루 엔딩이란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인데, 단순히 히로인을 선택해서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으로 끝이 아닌, 개발자가 제시한 진정한 결말이라는 것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후 스토리에 중심을 둬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Key사의 <카논>(Kanon, Key, 1999)이나 <클라나드>(CLANNAD, Key, 2004), 등이 등장하고 연애를 다루지는 않지만 <슈타인즈게이트>(STEINS;GATE, 5pb, 2009)에서는 트루엔딩에 도달하기 위한 반복 플레이를 루프라는 형태로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이처럼 미연시에서는 게임 속 여성 캐릭터와 자신과의 이야기를 즐기는 것이 아닌 게임 안에서 전체 캐릭터의 이야기를 모두 본 후 전체 이야기의 진정한 결말에 도달하는 형태의 어드벤처가 일반적인 형태가 되어갔다.

     

<선택지의 선택사>에서 저자 시모쿠라 바이오는 로컬 플래그와 글로벌 플래그라는 개념을 이야기한다. 선택지 기반 어드벤처 게임들은 선택지에 따라 플래그라 부르는 게임 시나리오의 조건 스위치를 켜고 끄는데, 로컬 플래그가 한 시나리오 안에서만 동작하고 그 밖에서는 동작하지 않는 플래그라면 글로벌 플래그는 게임 전체에서도 관리되는 조건을 가리킨다. 이를 통해 어드벤처 게임들은 트루 엔딩같은 개념이나 엔딩을 봐야 열리는 다른 시나리오를 다루는 플래그를 글로벌 플래그로 분리하고 있다.


이러한 글로벌 플래그는 <당신과 그녀와 그녀의 사랑>(君と彼女と彼女の恋。, Nitroplus, 2013)이나 <두근두근 문예부>(Doki Doki Literature Club!, Team Salvato, 2017) 처럼 메타픽션을 연출하려면 반드시 필요하며, 미소녀 연애시뮬레이션 게임이 선택지를 통한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작가가 제시하는 엔딩이 중심이 되고 플레이어는 캐릭터를 좋아하는 형태로만 남게 되는 시스템을 만든다.

     

결국 미연시의 “시뮬레이션”부분은 각 게임들은 시뮬레이션이란 단어를 자의적으로 다뤄왔다고 밖에 할 수 없겠다. 그 시뮬레이션은 학창 시뮬레이션일 수도, 전략 시뮬레이션일수도, 육성 시뮬레이션의 그것이었을 수도 있었지만 그 게임 안에 연애는 존재하였고, 이러한 연애요소들은 지금도 캐릭터 게임에서 유사한 시스템으로 제공되고 있다.


하지만 시뮬레이션에 대해 이렇게 접근해 볼 수도 있다. 미연시 시스템을 플레이어 캐릭터의 스탯 달성 여부로 연애 성공을 판단하는 방식과, 플레이어의 선택을 플래그로 관리하는 방식으로 나누는 것이다. 이 중 스탯을 관리해서 연애를 달성하는 게임만이 엄밀하게 연애를 시뮬레이션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키메키 메모리얼>이 등장한 이후 30년동안 한국에서 게임 안의 캐릭터와의 연애를 그린 게임들을 미연시라고 불렀던 이유는 그것이 캐릭터의 수치를 성장시키는 것이든, 시나리오 라이터가 준비한 이벤트를 보며 선택을 하는 것이든 본인이 선택한 선택지를 통해 캐릭터와의 연애가 진행되는 상황을 시뮬레이션으로 받아들였던 시기가 존재하였었던 것이 아닌가 라고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 연애시뮬레이션이란 장르는 플레이어가 캐릭터와 유사 연애를 즐기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게 되었다. 현대의 미연시에서 플레이어들은 시나리오 라이터가 제시하는 트루 엔딩까지, 게임이 준비한 모든 이야기를 읽어 나간다. 그리고 게임이 끝난 뒤에는 게임 바깥에서 캐릭터를 소비한다. 결국 시뮬레이션이란 단어는 흔적기관으로만 남아 이 장르를 지키고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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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개발자, 연구자)

게임애호가, 게임프로그래머, 게임역사 연구가. 한국게임에 관심이 가지다가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것에 취미를 붙이고 2006년부터 꾸준히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고 있다. 〈한국게임의 역사〉, 〈81년생 마리오〉등의 책에 공저로 참여했으며, 〈던전 앤 파이터〉, 〈아크로폴리스〉, 〈포니타운〉, 〈타임라인던전〉 등의 게임에 개발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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