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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하

김민하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시사평론가로 활동하지만 게임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게이머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냉소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돼지의 왕』이 있고,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우파의 불만』, 『트위터, 그 140자 평등주의』 등의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최근작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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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분명한 것은, 앞에서도 강조한 것처럼 이제 인류는 이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다루든 피할 수 없는 위협으로 다루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가끔은 망상하듯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가령 고타쉬는 현실의 누구인가? 우리 곁의 ‘황제’는 누구 혹은 어떤 것이며, 어떤 모습으로 당신을 현혹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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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절멸을 앞둔 위기 속에서도 ‘프로젝트 퓨리티’가 가능하든 그렇지 않든, 계속 노력할 것이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로 방사능 비가 내리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상기에 서술한 문제가 실제로 발생하거나 그것이 우려될 때, 인류는 블레이드 러너의 그 장면을 다시 떠올리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인류는 살아갈 것이고 또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오늘의 결정을 신중히 하고 혹시 다른 대안이 없는지 좀 더 찾아보자는 주장은 보편타당성을 갖게 된다. 그렇기에 우려나 악몽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남의 발언을 선동으로 규정하는 선동이 더 위험한 세상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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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어떤 선택지를 고르더라도 그 결과는 앞서 본 것처럼 미국 역사의 어떤 장면을 재현하는 것에 그칠 거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수 없는 듯 보이는 트럼프와 바이든의 미국 역시도 길게 보면 동일한 미국 역사의 반복에 불과하다. 바이든은 트럼프를 불러 들이고, 트럼프는 다시 바이든을 되살려 내며 끝도 없이 갈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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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실의 우리에게도 용과 같이 시리즈의 주인공 처럼 행동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휴가를 내서 관광지로 여행을 떠난 경우가 그렇다. 일상으로 돌아가 해결해야 할 여러 복잡한 난제를 머리 속에 넣고 있는 상태에서도 우리는 도쿄 신주쿠, 오사카 도톤보리, 오키나와, 후쿠오카, 삿포로, 나고야, 요코하마 등의 거리를 거닐고 지역 음식 등 문화를 경험하면서 하루종일 즐길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용과 같이 시리즈를 플레이하는 우리는 코로나19 시대에 일본 관광을 즐기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게 이 시리즈가 본질적으로 관광 게임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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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게임은 현실과 다르다. 게임을 통해 얻은 이러한 통찰을 현실에 적용한다고 하면 어떤 일이 가능할까? 회고적 평가를 전제하는 슬로건을 거부하는 것이 시작이다. 과거의 정상적 상태를 회복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원칙과 대안을 논하는 일이 필요하다. 과거 러시아가 지배한 영토가 어디든 우크라이나를 침공해도 되는 이유는 애초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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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온라인 게임’이 곧 새로운 미래가 될 거라 믿던 시기도 있었다. 코로나19라는 이벤트까지 거친 후 지금 돌아보면 어떤가? 부분적으로 온라인 시스템을 수용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게임은 여전히 오프라인이 중심인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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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에서 말하는 트리플A 게임만의 매력은 뭘까? 아무래도 화려한 그래픽과 사운드를 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현세대의 가장 앞선 기술을 다각도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포기하기 어려운 요소이다. 특히 게임 장르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게임-문법은 이미 앞세대의 게임에서 대개 구현이 완성된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트리플A 게임은 그것을 어떻게 규정하든 비주얼과 사운드라는 면에 방점을 찍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은 생산비 증가와 개발 기간의 장기화라는 어려움으로 이어졌다. 그러다보니 일각에선 ‘트리플A 포기론’까지 나올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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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게임애호가일 뿐인 입장에서 게임과 예술에 대해 생각하면 “게임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외침을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다들 아는대로 이러한 클리셰적 항변은 예술과 게임의 본질이나 실제로 게임이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는 조건 등을 따지는 것과는 큰 관계가 없다. ‘게임을 하는 나’에 대한 정당화 시도가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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