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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 AI, 그리고 <발더스 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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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3. 12. 10.

올해는 <발더스 게이트 3>의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랜만에 돌아온 CRPG의 부활과 같은 분위기에 많은 올드 게이머들이 환호했다. 전투 시스템 등에서는 <발더스 게이트>의 이전 시리즈작보다는 라리안 스튜디오의 전작 <디비니티: 오리지널 씬 2>을 떠올리게 만들긴 하지만, 뭐 어떤가. <발더스 게이트> 시리즈가 정식 넘버링을 달고 돌아왔으면 그만이다. 열정적인 일부 게이머들이 자체 한글화에 나서 많은 한국 유저들도 불완전한 한글 상태에서나마 게임을 즐길 수 있었고, 결국 공식 한국어 지원 소식이 전해지는 데에 이르렀다. 굉장한 일이다.


<발더스 게이트 3>는 게이머가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만 따지자면 거의 모든 것을 갖춘 게임이다. CRPG 장르의 팬들이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다양한 문제 해결 방식의 구현은 기본이다. 이게 아름다운 그래픽과 성우들의 열연으로 장식돼있다. 불행한 흡혈귀부터 전작에 등장했던 미니어쳐 거대 우주 햄스터의 절친까지, 흥미로운 동료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들 각자의 스토리를 함께 경험하는 것은, 물론 스토리상 다소 빈 구멍이 있는 듯 느껴지는 대목도 있지만, 어찌됐든 요즘 말로 ‘뽕이 차오르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발더스 게이트> 시리즈는 D&D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기에 현실 세계와의 접점이 거의 없어보이지만, 그럼에도 창작과 그것을 비평하는 방법론의 차원에서 보면 현실과의 접점에 주목하면서 작품의 이해를 넓히는 방식이 유효할 때도 있다. 소위 외재적 비평이라는 것인데, 게임의 훌륭한 점을 나열하거나 기대에 못 미쳤던 점을 짚어내는 것보다도 이런 방법을 택하는 게 이번에도 좋을 것 같다. 다만, 이런 방식의 접근은 ‘작품을 경험하고 나서 이런 면도 생각해보자’는 차원이지 ‘작자의 의도는 실은 이거였다’는 식의 퀴즈풀이를 하자는 게 아니라는 점을 먼저 강조하는 바다.


<발더스 게이트>의 첫 작품은 1998년에 나왔고 2편의 마지막 확장팩이 나온 것은 2001년이다. 중간의 리메이크판 등을 빼면 22년만(얼리억세스를 포함한다면 19년만)에 정식 후속작이 등장한 셈이다. 그 20여년의 세월은 작품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들 사이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발더스 게이트 3>의 흥미로운 점은 서사의 중심에 일리시드가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과 동료들은 일리시드 올챙이에 감염됐으며 이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모험을 시작한다. 이게 계기이며 명분이다. 일리시드 올챙이에 감염되지 않았다면 모험은 시작되지 않았을 거고, 동료들이 서로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감염’인가? 만일 작품이 2019년 이전에 나왔다면 우리가 받는 인상은 이후와 달랐을 거다. 그러나 이 작품은 2019년 이후에 나왔으므로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을 겪은 입장에서 ’감염’에 대한 느낌은 각별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일리시드 올챙이는 호흡기 질환이 아니고 비말 혹은 에어로졸 입자에 의해 전파되지 않으며, 어찌됐건 전염되지 않는다. 일리시드 올챙이 감염은 오직 마인드 플레이어가 인위적으로 올챙이를 집어 넣을 때만 일어난다. 게다가 주인공들이 겪고 있는 일은 보통의 일리시드 올챙이 감염이 아닌 네더릴 마법에 의해 조작된 감염이다. 이런 면에서는 오히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발원지 논란, 중국 기원론 등을 둘러싼 논란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중국의 네더릴 마법에 의해 조작이 된 것일까?


그런데 이런 것보다는 코로나19와 인류의 미래에 관한 담론과 연관지어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가령 코로나19가 등장한 초창기 식자들은 인류가 더 이상 지금까지 살던 대로 살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앞다투어 강조했다. 마스크 착용과 재택근무는 일상이 될 거고, 팬데믹은 주기적으로 찾아올 것이며, 자유무역과 세계화는 퇴조가 불가피해 고립주의와 자국우선주의의 시대가 다시 도래한다는 거였다. 세계가 어디로 갈지 모르는 불확실성의 시대 속에 먼저 희생되는 것은 취약계층일테니 사회구조를 지금과 같은 경쟁위주로 유지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을 내놓는 학자들도 있었다.


이런 논의를 일리시드화와 연관지어 생각해보자. <발더스 게이트 3>의 중반부에 정체를 드러내는 ‘황제’는 자신이 일리시드화 됐다는 걸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캐릭터이다. 주인공들에 음모에 맞설 수 있는 여러 기회를 제공하는 인물인 ‘황제’는 후반부에 가서는 문제 해결을 위해 주인공이나 주요 동료들의 반(半)일리시드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외양의 변화만 일부 감수하면 특별한 이득을 여러가지로 얻게 돼 다양한 측면에서 유리해진다는 것이다. 주인공들은 최종전 직전의 선택에서 ’황제’와 결별할 수 있지만 이 경우 주인공과 새롭게 우군으로 합류하는 기스양키 오르페우스를 포함한 누군가가 일리시드화 되는 일을 감수해야 한다.


작중 인물들이 반복 강조하듯 일리시드화는 불가역적 변화이며 ‘나’를 잃고 완전히 다른 존재로 거듭나는 일이다. 일리시드화로 가장 많은 개인적 이득을 얻을 수 있는 동료인 칼라크는 일리시드 상태에서도 앞으로의 희망을 얘기하지만, 성우의 연기는 이전과는 완전히 딴판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즉 ‘감염’은 어떤 불가피한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맞닥뜨리는 것이다.


<발더스 게이트 3>의 주인공들은 대체적으로 ‘감염’으로 인한 변화에 적응하거나 그것을 수용하기 보다는 ‘감염’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추구했고 그것을 쟁취했다. 그것은 현실의 우리도 마찬가지다. 물론 ‘감염’으로 인한 생채기를 치유하고 거기에 대응하는 것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게임의 안과 밖, 양쪽 모두가 그렇다.


이게 최선의 선택인지에 대한 의문은 다소 남아있다. 그러나 또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변한 것은 있다는 것이다. 이전으로 돌아갔다고는 하지만 ‘감염’을 겪으면서 <발더스 게이트 3>의 주인공들은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거나, 자신을 억압하는 것을 넘어서는 등 한 단계 더 성장했다. 그렇게 성장한 주인공 혹은 그들의 서사를 이어받는 누군가는 ‘감염’보다 더 어려운 시험을 견디면서 또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갈 거고, 그들과 모험을 함께하는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될 거다. 그게 아마 앞으로 또 언젠가 나올 <발더스 게이트 4>가 현실과 관계맺는 방식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다.


<발더스 게이트 3> 서사의 중심에 일리시드가 위치하면서 연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모티프는 인공지능과 관련한 것이다. 일리시드는 일종의 군체를 이루고 있으며 이들 집단의식의 중심에 있는 것은 엘더브레인이다. 엘더브레인은 경향적으로 자신의 제국 건설과 이를 위한 정복 사업을 위해 움직인다. 3명의 악신으로부터 선택된 자들은 네더스톤으로 엘더브레인을 조종해 일리시드를 지배할 수 있게 됐고, 이를 통해 각자의 목적을 이루려 한다.


이 구조는 일견 컴퓨터 운영체제에서 익숙한 권한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네더스톤으로 엘더브레인을 통제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루트 권한을 탈취한 것이다. 주인공들은 악신으로부터 선택된 자들에게 네더스톤을 빼앗아 권한을 다시 탈취해 엘더브레인의 통제권을 취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즉, 이 이야기의 기본 구도는 루트 권한을 누가 갖느냐의 싸움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가서 밝혀지는 것은 엘더브레인은 이미 네더스톤의 수신기 역할을 하는 카서스 왕관을 장악해 네더브레인으로 진화한 상태이며, 주인공들이 3악신의 선택된 자들로부터 네더스톤을 탈취하는 것도 네더브레인이 만든 ’위대한 설계’의 일부일 뿐이라는 점이다. 이를 앞서 권한 구조에 비유한다면, 루트 권한을 탈취당한 시스템이 자기가 알아서 루트 권한 수복을 위한 계획을 실행했다는 얘기가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인공지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 주제가 자연스럽게 인공지능으로 넘어갈 수 있다면, 그건 우리가 현실에서 이미 관련된 일을 보고 들었기 때문이다. 가령 최근의 오픈AI 사태는 어떤가? CEO인 샘 올트먼이 쫓겨났다가 복귀하는 과정은 인공지능이 우리 삶을 지배하는 디스토피아가 더 가까이 다가온 세상을 경험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보도에 의하면 이 갈등의 핵심은 일반인공지능의 개발 속도를 둘러싼 이견이라고 하는데, 물론 보도되지 않은 여러 맥락이 더 있겠지만 이런 주제를 현실의 사건을 다룬 뉴스에서 보는 세상이 벌써 왔다는 사실에 대해선 놀라움을 표할 수밖에 없게 된다.


물론 일반인공지능이란 무엇이고 그게 무엇을 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엄밀한 차원에서 각자 제각각의 정의를 내놓고 있는 수준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인공지능-디스토피아가 당장 눈 앞에 도래한 상황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을 둘러싼 인간 사이의 갈등은 현재진행형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공지능이 사람이 지시하지 않은 일을 스스로 판단해 이행한 결과로 인류가 위기에 빠지는 사건은 아직도 아주 먼 미래에나 일어날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걸 걱정하는 일은 현재의 일이 된 것이다.


<발더스 게이트 3>의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이 문제에 대한 영감은 어떻게 보면 단순하다. 해결책은 역시나 ‘황제’가 제시하는데, 앞서 언급한 일리시드화가 그것이다. 네더브레인은 일리시드이므로 능력이 모자라는 인간으로 대항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일리시드에는 일리시드로 대항해야 한다. 인공지능에 비유해 말하면 문제적 인공지능에 대항하는 ‘우리 편’ 인공지능을 활용해 문제적 인공지능의 권한 탈취 시도를 무력화시켜야 한다는 거다. ‘황제’는 그 자신을 네더브레인에 대항하는 일리시드, 즉 ‘우리 편’의 인공지능으로서 네더스톤 즉 루트권한의 양도를 요구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발더스 게이트 3> 속 이야기 내내 ‘황제’를 바라보며 주인공들이 느끼는 의구심 그 자체이다. ‘황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일리시드인 ‘황제’를 과연 믿을 수 있는가? ‘우리 편’ 인공지능은 언제까지 인간의 편인가? ‘우리 편’ 인공지능은 과연 문제적 인공지능으로 진화하는 일이 없는가?


<발더스 게이트 3>는 적어도 이 의구심에 대해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황제’는 주인공들이 편들어 주지 않으면 상대방에 붙고, 편들어 주면 배신하지 않는다. 결국 주인공 일행의 선택과 책임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현실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현실의 인공지능을 둘러싼 갈등은 단순히 권한의 문제가 아닌 복잡한 정치사회적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주제는 <발더스 게이트 3>가 아닌 다른 게임으로 논하면 더 분명해질 것이다. 그건 다음 기회에 해보기로 하겠다.


적어도 분명한 것은, 앞에서도 강조한 것처럼 이제 인류는 이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다루든 피할 수 없는 위협으로 다루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가끔은 망상하듯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가령 고타쉬는 현실의 누구인가? 우리 곁의 ‘황제’는 누구 혹은 어떤 것이며, 어떤 모습으로 당신을 현혹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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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평론가)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시사평론가로 활동하지만 게임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게이머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냉소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돼지의 왕』이 있고,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우파의 불만』, 『트위터, 그 140자 평등주의』 등의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최근작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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