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되기 전에, 현실의 주인이 될 각오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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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3. 6. 10.
오로지 게임애호가일 뿐인 입장에서 게임과 예술에 대해 생각하면 “게임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외침을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다들 아는대로 이러한 클리셰적 항변은 예술과 게임의 본질이나 실제로 게임이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는 조건 등을 따지는 것과는 큰 관계가 없다. ‘게임을 하는 나’에 대한 정당화 시도가 핵심이다. 하지만 이게 생산적 의미를 가지려면 게이머 스스로가 ‘인정투쟁’을 넘어 게임과 예술의 본질에 가 닿는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예술이 예술일 수 있는 조건은 뭘까? ‘비평 가능한가’를 기준으로 제시해본다면 어떤가? 가령 “예술을 논한다”고들 하는데, 그게 뜻하는 바는 뭔가? 모나리자든 벽에 붙여 둔 바나나든 뭐든 ‘얼마나 팔렸느냐’, ‘쓸모가 있느냐’를 넘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의 가치평가를 둘러싼 논의가 가능하다는 것 아니겠는가? 만약 “예술을 논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게임을 논한다”고 할 수 있다면, 게임을 예술의 일종이나 그 비슷한 뭔가로 취급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렇다면 게임이 게임일 수 있는 조건은 뭘까? 게임이라는 매체의 가장 큰 형식적 특징은 ‘인터랙티브’에 있을 것이다. 물론 ‘인터랙티브에 기반한 게임이 아닌 것’들도 세상엔 많이 있다. ‘인터랙티브’를 게임만의 고유한 특징으로 볼 순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인터랙티브 하지 않은 것’을 게임이라 정의하는 것은 어렵다. 무언가가 게임이기 위해서는 선택이든 조작이든 입력이든 어떤 수단을 통해서건 사용자의 행위가 게임을 통해 형성된 공간 내 사건을 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게임은 일반적으로 불특정다수의 사용자 즉 대중을 전제한다. 대중이 매체를 통해 가상적 환경의 변화를 경험하고 거기에 적응하도록 한다. 즉, 예술의 그것에 비견될만한 것으로서 게임 비평의 정수는 그 게임이 무엇을 통해서 어떤 세계의 변화를 사용자에게 경험하게 하느냐,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그리고 그게 현실 인식의 무엇으로 이어지느냐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닌텐도의 최근 신작인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더 킹덤’은 상당히 인상적인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전작에서 오픈월드의 물리엔진을 응용력을 발휘해 활용하도록 한 것에 ‘조나우 기어’라는 장치를 더해 ‘놀이’로서의 재미를 배가시켰다. 널판지에 팬과 배터리, 조종기를 달고 물에 띄우면 간이 보트로 활용할 수 있어 체력 소모 없이도 강을 건널 수 있다는 식이다. 기구를 만들고 불을 피워 하늘을 날 수도 있다. 이 덕에 퍼즐의 난이도가 하락했다는 지적도 있지만, 게이머 입장에서 당장 눈 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할 수단을 보다 쉽고 다양하게 고려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상당히 의미있다.
‘오픈월드’를 표방한 게임이라도 게이머의 사용자 경험은 제작자가 그어 놓은 선 밖으로 벗어날 수 없다. ‘오픈월드’ 또한 가상의 환경에 불과한 탓에 제작자가 설계된 영역 밖으로 사용자가 나가는 것까지 보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보통 이러한 한계는 지형지물의 배치나 ‘보이지 않는 벽’ 등을 매끄럽게 배치하는 것으로 사용자 경험의 훼손을 자연스럽게 최소화 하는 포장을 거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더 킹덤’은 이러한 ‘포장’을 훨씬 더 그럴듯하게 해내고 있다. ‘조나우 기어’들의 등장에 더해 천장을 뚫고 올라가는 ‘트레루프’ 능력의 존재는 ‘오픈월드’의 한계를 상정하지 않은 듯한 인상을 준다. 아주 조그만 부분이라도 천장에 해당하는 부분을 게이머가 찾아낼 수만 있다면 하나로 이어지는 구조물의 꼭대기까지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기에, 애초에 제작자가 어느 정도 의도한 대로 움직이도록 해야 할 ‘레벨 디자인’ 단계에서 고려해야 할 바가 대단히 많아 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실제로 게임을 해보면 모든 천장을 다 뚫고 올라갈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조나우 기어’로 만든 비행기 역시 일정 거리 이상 날아가면 사라지게 설계된 등의 한계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앞서의 수단을 통해 사용자가 게임으로 형성된 세계에 대한 훨씬 더 강한 개입력을 확보한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는 점은 누구나 놀라워할만한 대목이다.
이런 요소는 사용자 경험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전작인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부터 새로 시작된 젤다의 전설 시리즈는 본질적으로 멸망한 세계를 재건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계를 재건하기 위해 서는 우선 그 세계의 주인이 되는 일이 필요하다. 집 청소를 예로 들어 보자. 내가 가진 예산의 한도 내에서 알맞은 청소용구 구매를 계획하고 실행한 후 그 도구로 청소를 하고 성과를 스스로 평가하는 것은 집 주인의 일에 가까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로지 제공된 청소도구를 활용해 구체적인 지시사항을 따르며 청소를 해야 한다면 그것은 집 주인의 경험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대개의 게임은 아무리 ‘오픈월드’를 표방한다 하더라도 후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킹덤’은 최소한 전자에 가까워진 느낌을 주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게임이 주는 사용자 경험은 ‘세계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형식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분명히 그렇지만 ‘이야기’로 보면 좀 다르다. 자연럽게 생길 수 있는 의문을 두루뭉술하게 넘어 간다. 눈 앞에서 바닥을 뚫고 나오는 주인공에 잠시 놀라기만 할뿐 곧바로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듯 무덤덤한 게임 내 등장인물의 존재 등이 그렇다. ‘게임적 허용’을 고려하더라도, 외양과 생태가 판이하게 다른 민족 간의 갈등이나 이해관계의 충돌이 묘사될 법도 한데, 잘해야 몇 번 튕기는 게 전부고 대개는 다들 속없이 주인공을 기꺼이 도와주기로 한다. 1차원적 감동이 있긴 하지만 현실과의 괴리는 크다.
아마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첫째, 닌텐도는 ‘온 가족의 닌텐도’이다. 지위와 자격을 얻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를 감수하는 중세 정치를 묘사한 ‘크루세이더 킹즈 3’의 패러독스 인터랙티브가 아니다. 소년 소녀들의 세계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둘째, 이게 일본의 방식이다. 불편한 얘기는 뒤에서 하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는 누구나 수긍할만한 아름다운 얘기를 남기길 원한다. 되도록이면 문제를 직면하거나 직시하지 않으려 한다. 최근의 한일관계 개선 논의에서 논쟁거리로 등장하는 과거사에 대한 태도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오해하지 마시라. 일본이 불편한 주제를 오로지 외면만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온 가족의 닌텐도’의 이면에는 가히 세계 최대 수준이라고 볼만한 성인물 시장과 PC-98시리즈 등 자체 규격 컴퓨터 시절 성인용 어드벤처 게임 범람의 역사가 있다. 즉, 불편한 얘기를 하는 공간은 따로 있다. 하지만 거기가 ‘닌텐도’의 ‘젤다의 전설 시리즈’ 일 수는 없다는 거다.
그럼에도 이 얘기를 덧붙이는 건 ‘이야기’에 해당하는 요소까지 ‘주인이 되는 경험’에 결합시킬 수 있었다면 비평적으로 더 나은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으리라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이야기’로부터 발생하는, 그러니까 우리가 실제로 살면서 겪을 법한 갈등을 뭔가 방법을 강구해 해결해 나갈 수 있다면? 현실에서도 ‘조나우 기어’와 오른팔 능력에 비할만한 뭔가를 찾아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 나가자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현실엔 이미 ‘조나우 기어’와 오른팔 능력이 존재한다. 그것을 문제 해결을 위해 사용하자며 머리를 맞대자고 말하는 사람이 극소수일 뿐이다. 그나마 일본과 같은 ‘게임 선진국’이 만든 게임을 소재로 한다면 최소한 이런 얘기는 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인 한국의 게임 이슈를 생각하면 슬퍼진다. 코인과 결합한 수익 모델 얘기라든가, 여성 캐릭터의 신체 부위라든가, 사기나 다름없는 사건과 같은 얘기들만 떠오르지 않는가? 이것이야 말로 다들 주인이 되기를 거부하는 현실의 반영이다. 대개의 정치 사회와 관련된 이슈에서 이러한 풍경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똑같이 펼쳐지고 있다. 날이 갈수록 그 정도가 더 심해지는 느낌이다. 예술로 인정받고 싶다는 우리의 욕망은 이러한 현실의 주인이 될 각오를 하고 있는가? ‘무엇이 어떤 것을 통해 예술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일단 그 각오가 된 다음에야 가능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