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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년의 심즈, 내일의 인조이
게임의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국가의 경영과 역사 속 전쟁, 용과 엘프가 나오는 판타지,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의 생존은 훌륭한 게임 소재다. 그렇지만 컴퓨터 조립(PC 제작 시뮬레이터)이나 트럭 운전(유로트럭), 자동차 조립(카 메카닉 시뮬레이터)처럼 비교적 사소한 일들도 게임이 된다. < Back 25년의 심즈, 내일의 인조이 24 GG Vol. 25. 6. 10. 게임의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국가의 경영과 역사 속 전쟁, 용과 엘프가 나오는 판타지,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의 생존은 훌륭한 게임 소재다. 그렇지만 컴퓨터 조립(PC 제작 시뮬레이터)이나 트럭 운전(유로트럭), 자동차 조립(카 메카닉 시뮬레이터)처럼 비교적 사소한 일들도 게임이 된다. 이러한 시뮬레이션 게임 가운데 '청소'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청소게임은 꽤 매니악한 팬층을 형성하고 있는데, 필자의 지인은 '방 청소를 미뤄두고 <하우스 플리퍼>를 밤새 플레이했다'는 경험을 전했다. <하우스 플리퍼> 외에 고압세척기와 비누액으로 묵은때를 벗겨내는 개운함을 주는 쾌감을 가진 <파워 워시 시뮬레이터>나 살인현장을 청소한다는 콘셉트의 <연쇄청소부들>, 자동차를 운전하지 않고 세차만 하는 <카 워시 시뮬레이터> 등이 유명하다. 게임의 소재가 이렇게도 무궁무진한데, 그 자체로 무궁무진한 삶은 또 얼마나 좋은 게임 소재겠나. 인간의 희노애락과 생로병사는 그 자체로 많은 공감 요소를 가진다. 비디오게임의 시대가 오기 이전부터 인간의 삶은 역할극이 됐고, 그러한 놀이로 현실에서 꿈꿀 수 없는 로망이 충족됐다. 바비 인형을 가지고 하던 놀이는 라이프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대체됐다. 그리고 이 장르의 최고봉에는 단연 심즈 시리즈가 있다. 한국의 크래프톤은 올해 <인조이>의 얼리액세스를 시작하며 심즈 시리즈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적지 않은 프로젝트들이 심즈 시리즈의 아성을 넘보려했지만, 그 아성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과연 <인조이>는 이 독창적 장르 안에서 안착할 수 있을까? 그를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라이프 시뮬레이션의 최고봉 '심즈' 시리즈 먼저 짧게나마 25년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는 심즈 시리즈의 역사를 돌아보려 한다. <심즈>(2000)는 <심시티>, <심어스>, <심앤트> 등을 '심'시리즈를 창작한 윌 라이트가 만들었다. 그의 스튜디오 맥시스는 '장난감'을 디지털게임으로 구현해야겠다는 철학(Toy-Based Design Philosophy)으로 90년대 게임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구가했다. 언급한 게임들의 연이은 성공으로 딸 캐시 라이트와 시간을 보낼 수 없었던 윌 라이트는 소꿉놀이를 하던 딸의 모습을 보고 <심즈>의 밑그림을 그렸다. 게임의 프로젝트명은 '인형의 집'(Dollhouse)이었다. 그간 도시나 농장 같은 큰 공간을 무대로 삼았던 맥시스는 규모를 줄여 마을 속에서 인간의 삶을 게임에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심즈>는 식욕, 수면욕, 명예욕, 그리고 성욕과 같은 인간의 기본 욕구를 파라미터화했으며, 플레이어로 하여금 전지적 시점에서 심(인간 캐릭터)들의 생을 관리하도록 설계했다. 이뿐 아니라 집을 짓는 건축 모드나 상품을 구매해서 살림살이를 발전시켜 나가는 구매 모드는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고도화된 상태로 준비됐다. <심즈>를 개발하던 중, 맥시스는 공격적 M&A 전략으로 공룡이 되어가던 EA에 인수됐다. <심즈>는 2000년 EA의 유통망을 타고 전 세계에 출시됐다. <심즈>는 발매 첫해 177만 장이라는 기록적인 판매고를 기록했고, 공격적인 확장팩 전략으로 5년 동안 약 630만 장이 판매됐다.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과정에서 투자자들은 물론 개발자들까지 '이런 게임을 누가 재밌어하느냐'라는 반응을 내놓았지만, 윌 라이트의 '심'은 <심즈>로 당당히 마침표를 찍었다. <심즈>는 세계 비디오게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 <심즈> <심즈 2>(2004)는 전편의 엄청난 성공 덕에 추진력을 얻게 되었다. 2.5D 그래픽에서 회전 가능한 3D로 개발되었으며, 부모의 생김새를 물려받거나 관계도 히스토리가 남는 등 여러 측면에서 고도화가 이루어졌다. 윌 라이트의 회고에 따르면 2004년 나온 <심즈 2>는 "플레이어가 세밀한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고, 캐릭터는 욕망과 두려움을 갖게 되었"으며 "이웃들은 절박한 주부들과 바람피는 남편들로 얽힌 TV 리얼리티쇼처럼 구성"되었다. <심즈 2>에 접어들면서 모드(Mod; modification) 커뮤니티가 훨씬 더 활발해졌다. 전작 <심즈>에 모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심즈> 플레이어들은 .iff 확장자를 분석하면서 여러 비공식 툴을 배포했고, EA도 이런 UGC(유저 창작 콘텐츠)를 딱히 막지 않았다. 그 결과 The Sims Resource, SimFreaks, 7DeadlySims 같은 홈페이지가 생겨났고,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보다 모딩 콘텐츠를 배포하며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심즈>는 태생적으로 2.5D 게임이었고, 게임으로 표현할 수 있는 UGC 또한 한계가 명확했다. 이런 단점을 극복한 <심즈 2>의 모딩, UGC 커뮤니티는 더 넓고 깊어졌다. 2000년대 중반이 되면서 패키지 게임을 하면서 온라인을 참고하는 일이 점차 익숙해졌다. 퓨 리서치 센터에 따르면, <심즈>가 출시된 2000년의 인터넷 이용률은 52%, <심즈 2>가 출시된 2004년은 63%를 기록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 DSL, 케이블 등 고속 인터넷 서비스가 보급되며 더 많은 사람들이 안정적인 인터넷 접속을 경험했던 것이다. * <심즈 2> 한편, <심즈 2>의 선임 게임 디자이너를 맡았던 윌 라이트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매료되고 있었다. 그는 <심즈 2> 발매 이후 <스포어>의 개발에 착수했으며, 2009년에는 맥시스에서 퇴사했다. 그는 시간이 흘러 심즈 시리즈의 25년을 기념하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나는 속편 작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I never really liked the idea of working on sequels)라고 고백했다. 윌 라이트는 떠났지만 <심즈 3>(2009)는 계속 개발됐다. <심즈 3>는 시리즈 최초로 오픈월드를 채택했다. 모든 부지를 연결한 대담한 시도는 박수를 받았지만, 발매 초기 최적화와 버그 문제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오브젝트와 색감과 광택이 추가되면서 커스터마이징의 옵션이 전편에 비해 상당히 많아졌다. 오픈월드와 그 영향으로 높아진 자유도는 게임의 실행성과 범용성을 낮추는 대신 독특한 재미를 주었다. 비슷한 시기에 출시된 오픈월드 게임은 모두 액션이나 슈팅, RPG 장르의 게임이었다. 라이프 시뮬레이션에서는 오픈월드 게임이 개발되지 않았다. (물론 개발이 이루어진 해당 장르의 게임 자체가 적다) 심을 '래빗홀'로 빠뜨리지 않고 일상을 모두 보이는 곳에서 진행하기로 한 기획은 기술적 어려움을 딛고 결국 성공했다. 주변의 심들은 함께 늙어가고, 하나의 월드에서 함께 삶을 살았다. 그렇지만 기술적 난도가 너무 높았던 탓에 맥시스는 <심즈 4>(2014)에서 오픈월드를 포기했다. 오픈월드와 자유도, 커스터마이징 삼박자를 두루 갖추었기 때문에 몇몇 매니아들은 아직도 <심즈 3>를 플레이한다. * <심즈 3> <심즈 4>는 오픈월드를 포기한 대신 편의성과 접근성을 대폭 끌어올렸다. 월드가 작아지면서 스토리모드나 차량 등이 삭제됐지만, 커뮤니티에 자신의 플레이를 업로드하기 위한 여러 기능들이 추가됐다. '인칭 시점'과 '갤러리 공유' 등이 업데이트됐으며, 밥을 먹으면서 대화하는 것과 같은 사소한 기능들이 대폭 추가됐다. 동작과 감정 표현 또한 부드러워졌다. 다만 <심즈 4>는 가장 논쟁적인 심즈다. 오픈월드의 삭제에도 최적화 문제가 제기됐고, 게임이 원래는 온라인게임으로 개발되었으나 급하게 스탠드 얼론으로 출시됐다는 폭로까지 나왔다. 4편에 들어서 EA의 DLC 정책이 문제가 되었는데, 2025년 기준 <심즈 4>에는 90개 넘는 DLC가 출시되었다. 코어 이용자는 100만 원 이상을 사용해야 게임의 모든 월드, 직업, 테마, 아이템 등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차세대 심즈로 '프로젝트 르네'가 존재하지만, 발표가 늦어지면서 <심즈 4>는 2014년부터 지금까지 라이브게임의 형태로 계속 서비스되고 있다. * <심즈 4> 쉽지 않았던 심즈 뛰어넘기 25년의 역사 동안 심즈 시리즈에 도전장을 내민 프로젝트는 적지 않았다. <세컨드 라이프>(2003)는 사회적 상호작용을 무기로 삼았고 한때 신드롬을 일으켰으며, 충성 고객을 확보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세컨드 라이프>는 2020년대 메타버스 열풍과 함께 재발굴되었으나 결론적으로는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에 자리를 내줬다. 독일에서 만든 <싱글즈>(2003)는 '성인용 심즈'로 주목을 받았으나 2005년 2편 이후 발매가 멈추었다. 연애와 섹스에 거의 모든 기능을 맞추면서 큰 반향을 이끌지 못했다. 인터페이스와 AI의 만듦새 또한 <심즈>보다 떨어졌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모바일게임으로 출발한 <버츄얼 패밀리>(2009)는 PC 환경을 갖추지 않은 게이머에게 어느 정도 반향을 끌었다. 간략화된 시뮬레이션 기능으로 말 그대로 '가상 가족'의 육성과 성장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그럼에도 이 게임은 PC 심즈 시리즈와 비교하기에는 기능적으로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2018년 EA가 <심즈 모바일>을 내놓으면서 이쪽 시장에서도 양분화가 이루어졌다. * <세컨드 라이프> 파라독스의 '라이프 바이 유'는 가장 유력한 대항마였으나 출시를 2주 앞둔 2024년 6월 돌연 출시가 취소됐다. 해당 발표 이후 개발사는 폐쇄됐고 "게임이 순조롭게 개발되고 있었다"라는 전 직원의 폭로가 나오면서 파라독스 측의 일방적인 개발 취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게임이 두 차례 연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추가 연기로는 ROI를 맞출 수 없었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추측이 나온다. 그밖에 '알터라이프'와 '파라라이브'가 현재 개발 중이나 언제 출시될지는 알 수 없다. 개발진의 규모가 EA-맥시스와는 비교할 수 없이 기 때문에 심즈 시리즈와 비교할 수 있는 라이프 시뮬레이션이 나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우려가 있다. 여담이지만, 심즈 시리즈를 즐기는 주요한 이유는 ‘권능감’이었다. 수영장에 사다리를 치워버리거나, 불타는 방 안에 심을 가두어버리는 괴상한 플레이는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 도전자들은 그러한 컬트적인 인기에 도달하지 못했다. * <라이프 바이 유> 인조이의 도전장 크래프톤의 <인조이>는 지난 3월 얼리엑세스를 시작했고 출시 1주차에 100만 장의 판매량을 돌파하며 그간의 심즈 경쟁자 중에서는 가장 훌륭한 초기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방송 플랫폼 SOOP(옛 아프리카)과 치지직에서 게임 카테고리 시청자 수 1위, 트위치에서는 3위를 기록하며 '보는 게임'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인조이> 창작물 공유 플랫폼 '캔버스'(CANVAS)는 이용자 수 120만 명을 돌파했다. 기사를 탈고 중인 현재(5월 29일) <인조이>에는 1,678명의 일 피크 이용자가 접속한 것으로 확인된다. <심즈 3>에는 1,487명, <심즈 4>에는 32,035명의 피크 이용자를 기록했다. 초반에 보여준 파괴력을 라이브까지 안정적으로 잇고 있지는 못하는 인상이다. 개발진은 흐름을 되살리기 위해서 이달(2025년 5월) 말 공식 모드 개발 툴을 업데이트하겠다고 밝혔다. 모드킷에는 어셋 다운로드 기능, 마야 블렌더 플러그인, 언리얼엔진 5 기반 모드 프로젝트 생성, 커스포지 연동 등이 지원된다. 모딩을 통해 자신만의 게임을 즐기는 해당 장르 커뮤니티의 동향에 주목하는 행보로 보인다. 특정 게임을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필자는 다만 심즈 시리즈라는 거울을 통해 <인조이>의 가능성과 한계를 비춰보고자 한다 * <인조이> 인조이의 미래는 심즈에 있다 ⓐ 심즈: 사회에 대한 메시지 사실 25년 전 <심즈>로부터 기술적으로 배울 점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윌 라이트가 추구했던 작가주의는 <인조이> 개발진이 참고할 만하다. <심즈>는 미국 중산층 가정의 소비문화를 냉소적으로 비판하는 게임이었다. 게임 속 구매 모드에서는 냉장고와 TV는 행복을 보장하는 아이템처럼 묘사됐지만, 금방 고장나리기 마련이고, 심은 그것을 고치려다가 죽어버린다. 도둑이 들어서 물건을 훔쳐 가고, 게임은 플레이어를 놀리는 듯한 문구를 노출했다. <인조이>에는 그런 날카로움이 거의 배제된 인상이다. 상호작용 옵션은 많지만 '사업 파트너'나 '천생연분'과 같은 미리 마련된 틀 안에 갇혀있으며, 시스템은 조이가 사고를 당하거나 좋은 일이 생길 때나 그저 다독일 뿐, 플레이어를 자극하지 않는다. 게임 속 구매 가능한 물건들을 모아놓은 카탈로그는 거의 비어 있으며, 얼리엑세스 버전부터 가전기업의 PPL 상품이 들어있다. <인조이>는 언리얼엔진 5의 기능성을 선보이는 훌륭한 쇼룸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서 창작자의 메시지를 찾기는 어려웠다. AI 기반 자율 시뮬레이션 속에 인간 사회의 아이러니나 직업의 애환 같은 것은 이 게임에서 거의 없었다. 굳이 비판적인 메시지가 아니어도 좋다. 게임의 김형준 디렉터는 <인조이>로 하여금 "사람들이 가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가족의 소중함에 대한 메시지는 게임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돋보일 수 있을까? ⓑ 심즈 2: 모딩으로 완성되는 게임 <심즈 2>의 진정한 가치는 모딩에 있었다. 유저들은 새로운 옷과 가구, 맵뿐 아니라 캐릭터의 유전 구조와 사회적 관계까지 손을 댔다. 개중에는 일반적인 윤리의 선을 넘는 튜닝도 존재했지만, 이는 곧 게임이 창작 플랫폼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스팀에 착한 게임만 있는 것은 아니듯 말이다) <인조이>도 '툴킷'이자 '플랫폼'을 지향해야 한다. 다행히 개발진은 그에 대한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캔버스(CANVAS) 플랫폼과 5월 말 예정된 공식 모드킷 업데이트로 <인조이>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다. 다만 모딩이 성공한 모든 게임이 그러하였듯, 자유로운 창작이 그 생태계를 지탱할 것이다. <심즈 4>에서는 범죄자 모드, 빌런 모드뿐 아니라 게임 속 시스템을 완전히 변경하는 모드들이 마련되어 있다. 아름다운 조이(인조이의 캐릭터)나 집을 만들고 싶은 사람은 캔버스에서 활동하고, <인조이> 가능성의 극한을 체험하고 싶은 사람은 별도의 창작마당에서 논다면 <인조이>는 활력을 얻을 수 있다. ⓒ 심즈 3: 양날의 검, 오픈월드 <심즈 3>의 오픈월드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다. 심들이 동네 곳곳을 로딩 없이 오가고, 이웃들도 자율적으로 삶을 꾸려갔다. 한 세계 안에서 모두가 동시에 살아가는 구조는 유례없는 몰입감을 선사했지만, 동시에 끊임없는 버그와 성능 저하라는 대가를 치렀다. <인조이>는 언리얼엔진 5 오픈월드를 채택했다. 높은 권장사양을 요구하고 있고, <심즈 3> 때와 유사한 최적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EA가 그러했듯이 크래프톤 또한 이 장벽을 넘어서야 게임이 오래 가는 플랫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게임을 즐기는 타겟층의 하드웨어 조건을 고려한다면, 권장사양의 다운그레이드는 반드시 검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심즈 4: DLC는 얼마나 많아야 할까? <심즈 4>는 라이브 게임으로 전환되면서 콘텐츠 확장에 집중했다. 문제는 그 확장의 방향이었다. DLC는 90종이 넘고, 모든 콘텐츠를 체험하려면 100만 원이 넘는 돈이 들게 됐다. 이는 유저들의 피로감으로 직결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심즈 4>에 들인 매몰비용이 <인조이>보다 많은 원인이 되었다. <인조이>는 현재 44,800원에 판매 중이고 이 기간 동안의 DLC는 무료로 제공한다. <심즈 4>가 부분 유료화 모델을 채택했고, 잠재적인 경쟁자인 후속작 프로젝트 르네 역시 부분 유료화 모델이 유력하게 점쳐지는 상황이므로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크래프톤의 고민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BM에 대한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DLC의 수와 가격보다 그것을 유저들에게 설득하는 방식이다. 단순히 콘텐츠를 분절해 파는 구조는 유저의 피로도를 높일 수 있다. 그렇다고 유료 DLC가 전혀 없는 모델을 추구하면 만든 이들에게 상업적 효능감을 줄 수 없을 것이다. DLC 전략 또한 까다로운 커뮤니티와 ‘스파링’ 과정 끝에 제출되어야 할 것이다. DLC 전략은 콘텐츠 분할이 아닌, 커뮤니티와의 협업을 통해 완성되어야 한다. 크래프톤이 <인조이>를 일회성 화제작이 아닌, 살아 있는 플랫폼으로 키우고자 한다면, “무엇을 얼마나 팔 것인가”보다 “누구와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 97개에 달하는 <심즈 4>의 추가 콘텐츠 마치며 삶은 게임이 될 수 있을까? ― <심즈>는 이 질문을 25년간 반복해 왔다. 그리고 지금, 한국의 <인조이>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인형의 집’ 안에 담긴 욕망, 기술, 플랫폼, 그리고 가족은 독특한 게이머 그룹을 형성했고 10여 년 전에 나온 <심즈 4>는 아직도 파급력있는 라이브게임으로 군림하고 있다. 도전자의 위치에 선 <인조이>는 <심즈>가 이룩한 것과 같은 역사를 그릴 수 있을까?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김재석 8년 동안 디스이즈게임 취재기자로 일했다. 지금은 서브컬처 스타트업에서 대외협력을 맡고 있다. 에디터와 치트키의 권능을 사랑한다.
- B급 게임이란 무엇인가
게임과 B급이 여러 차원에서 연결돼 왔기에, 둘의 관계를 명확히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분명한 것은, 게임에서 ‘B급’이라 불리는 것들 역시 (그렇지 않은 것들 못지않게) 나름의 의미를 만들어가며 게임문화의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동안 게임과 B급에 대한 논의는 본격적으로 이뤄지지 않은 감이 있다. 이 글에서는 앞서 말한 연결지점 중 세 번째와 네 번째 지점을 중심으로 게임+B급에 대해 논의하도록 한다. B급 정서나 코드가 게임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그것을 플레이어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살핌으로써, 게임에서의 B급, B급 게임, B급 게임문화 등이 게임문화 전반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정리한다. < Back B급 게임이란 무엇인가 05 GG Vol. 22. 4. 10. 주류 대중문화의 주변부에서 꽃을 피우는 문화가 있다. 이 문화는 기존 대중문화에 반기를 들기도 하고 재/구성하기도 하면서 스스로의 위상을 만들어간다. ‘B급’ 문화 이야기다. B급 문화의 시초는 B급 영화였다. 1930년대 대공황으로 제작여건이 나빠지자 할리우드는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저예산 영화를 만들어 메이저 영화와 끼워팔기+동시상영 전략을 구사했다. 관객들은 졸지에 A급이 된 메이저 영화와, 저예산 B급 영화를 한 편의 가격으로 볼 수 있었다. 이후 1940년대 말부터 독립영화제작사들이 출현하면서 B급 영화의 의미는 메이저 영화가 표현하지 못하는 자유로우면서도 자본에 종속되지 않는 정신을 뜻하는 의미로 변화해갔다. 탈장르화·탈문법화와 함께 B급 영화가 적극 활용한 방법론 혹은 기법은 키치(kitsch), 패스티시(pastiche), 패러디(parody), 오마주(hommage) 등이었다(조주영·안숭범, 2015). 그리고 이제 B급은 그 대상이 영화에만 한정되지 않는 데다, 비주류 정서나 코드를 통한 자극적 유희성을 추구하는 창작물의 의미까지 넓게 포함한다. 그렇다면 게임에서 B급이란 무엇일까? 다른 대중문화 장르에서도 대체로 그렇겠지만, 게임과 B급은 여러 차원에서 연결돼 왔다. 그 연결지점을 구분하면 다음 정도겠다. 첫째, 예술은 말할 것도 없고, 대중문화 장르 사이에서도 게임은 B급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주류가 될 수 없는 B급 대중문화물 중 대표적인 것이 게임이었다. 둘째, 수준 미달의 게임을 B급 게임으로 부르기도 한다. 셋째 그리고 가장 일반적으로, 영화나 다른 대중문화 장르를 통해 구축된 B급 정서나 코드를 활용한 게임을 일컬을 때 사용된다. 넷째, 소수에 의한 열광적인 수용문화와도 관련된다. B급 문화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추종자들이 나타나고, 그들에 의해 작품이 끊임없이 재/해독되어야 한다. 작품에 내재한 의미들이 드러나고, 일견 가볍고 유치한 것이 수용자들의 굉장히 적극적인 해독행위와 만나 진지하게 읽혀질 때 비로소 B급 문화가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게임과 B급이 여러 차원에서 연결돼 왔기에, 둘의 관계를 명확히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분명한 것은, 게임에서 ‘B급’이라 불리는 것들 역시 (그렇지 않은 것들 못지않게) 나름의 의미를 만들어가며 게임문화의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동안 게임과 B급에 대한 논의는 본격적으로 이뤄지지 않은 감이 있다. 이 글에서는 앞서 말한 연결지점 중 세 번째와 네 번째 지점을 중심으로 게임+B급에 대해 논의하도록 한다. B급 정서나 코드가 게임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그것을 플레이어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살핌으로써, 게임에서의 B급, B급 게임, B급 게임문화 등이 게임문화 전반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정리한다. B급 게임은 무엇을 담는가 B급 게임도 다른 B급 문화장르처럼 비교적 저예산으로 단기간에 만들어지는 비주류 콘텐츠로,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자유분방하고 오락적·자극적인 스타일을 지닌다. 게임 속 이야기 전개가 (있는 경우) 탈개연적·비약적이고, 느슨하거나 비논리적임은 물론이다. 상호텍스트적(intertextual) 방법론의 활용도 B급 게임에서 빈번하게 발견된다. 우스꽝스럽거나 진지하지 않은 그림체와 여타 그래픽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물론 최근에 와서는 이러한 B급의 공식들도 조금씩 바뀌기는 하는 듯하다. 가령 B급 게임도 이제는 얼마든지 메이저 게임에 비견되는 예산과 기간을 필요로 할 수 있다. 그리고 B급의 스타일이나 방법론은 이제 꼭 B급이 아닌 게임에서도 빈번히 발견된다. B급 게임을 규정하는 데에는 시대적 맥락도 영향을 미친다. 지금은 높은 완성도와 전작의 인기로 후속작이 출시될 때마다 세간의 지대한 관심을 받는 〈바이오하자드(Biohazard)〉 시리즈지만, 처음부터 〈바이오하자드〉가 지금과 같은 위상이었던 것은 아니다. 1996년 캡콤이 출시한 첫 〈바이오하자드〉는 크게 기대하는 타이틀이 아니어서 소량만 출시됐다. 출시 직후 화제가 됐던 것은 충격적인 오프닝 영상이었는데, 제작비 문제로 무명배우를 기용해 찍었던 오프닝 영상은 B급 호러물의 느낌을 보여주었다. 어지간한 슬래셔물을 능가하는 잔인한 장면들은 사회적으로도 논란을 야기했다. 가정용 비디오게임기인 플레이스테이션 게임에 그렇게까지 잔인한 장면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당시 시대관념에 비춰봤을 때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문의식, 2015. 1. 16). B급을 B급이게 만드는 요건들이 느슨해지거나 그 경계가 희미해지거나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해도, 어찌할 수 없는 B급 게임은 존재한다. 〈엄마는 게임을 숨겼다〉라는 게임 시리즈가 있다. 주인공은 하루 종일 게임만 한다. 그러다 엄마에게 걸린다. 엄마는 게임기를 숨기고, 주인공은 한 스테이지 스테이지 갖은 방법을 동원해 게임기를 찾는다. 설정만 봤을 때는 그냥 조금 우스꽝스런 게임인 듯하지만, 게임기를 찾는 기상천외한 방식(옷장 앞을 막고 있는 축구선수?를 따돌리면 게임기가 등장한다거나), 당황을 금치 못하게 하는 게임오버 씬(주인공이 “마마, 칙쇼!!”라고 외친다거나...), 그리고 다양한 사물들의 맥락 없는 배치(게임 〈고양이 장애물〉의 생선 등), 그럼에도 지나치게 맑은 색감과 깔끔한 그림체는 묘하게 부조화스러운 조화를 이루며 플레이어들을 긴장케 만든다. B급 게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비주류 취향 게임들이 모여 B급 장르화되는 경우가 있다. 설정·연출·전개 등이 비상식적이고 약을 빤 듯한 분위기를 내는 ‘바카게(バカゲー)’가 대표적이다. 바카게는 바보, 멍청이, 무능하다는 뜻의 ‘바카(バカ)’와 게임의 줄임말인 ‘게(ゲー)’의 합성어이며,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병맛겜’ 정도가 될 듯하다. B급 장르로 ‘슈르게(シュールゲー)’도 빼놓을 수 없다. ‘슈르(シュール)’는 초현실주의(surréalisme)의 일본어 발음인 슈루레아리스무(シュルレアリスム)에서 앞 자만 따온 말이다. 슈르게는 말 그대로 초현실적 게임, 즉 기괴하거나 난잡한 그래픽, 이상한 외모나 성격의 캐릭터, 이해가 불가능한 상황, 현실에서 동떨어진 것만이 아니라 현실을 가장한 비현실적 상황 등을 주된 요소로 삼는 게임류를 가리킨다. 당연하게도, 바카게나 슈르게가 게임성을 포함하는 개념은 아니다. 둘에는 게임성이 우수한 게임과 그렇지 못한 게임이 모두 포함되며(물론, ‘우수한 게임성’에 대한 기준도 수렴되지는 않을 테지만), 마니아층의 지지를 얻는 것이 일반적이나 바카게/슈르게적 요소가 적당한 수준이라면 그 게임은 대중적으로 폭넓게 사랑받기도 한다. 유사한 맥락에서 B급 게임을 만드는 데 특화된 게임사들도 있다. 1970년대 설립돼 2000년대 초반까지 〈트리오 더 펀치(トリオ・ザ・パンチ, 1989)〉와 같은 게임을 만들었던 일본의 데이터 이스트(Data East)사, 〈어스 디펜스 포스: 아이언 레인(Earth Depense Force: Iron Rain, 2019)〉의 D3 퍼블리셔(D3 Publisher), 그리고 미소년/녀 게임을 주로 만들어 온 FURYU 등이 예다. (B급 장르화와 마찬가지로) B급 게임 제작에 특화됐다 해서, 이러한 게임사들을 이상한 게임이나 만드는 B급 메이커 취급을 해선 안 된다. 콘셉트나 스타일이 다소 독특하고 괴상할 뿐, 게임성까지 후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들이 B급 게임만 만든 것도 아니었다. 데이터이스트의 〈미드나잇 레지스탕스(Midnight Resistance, 1989)〉, 〈나이트 슬래셔즈(Night Slashers, 1993)〉 같은 게임들은 오락실 플레이어들에게 뜨겁게 사랑받은 명작들이다. 하지만 이제 게임 개발비용의 점증과 출시게임의 대형화로 인해 점점 B급 게임사나 장르들이 살아남기 힘든 환경이 되어가고 있다. 모바일게임 중심으로 시장이 재편되면서 모바일게임의 양적·질적 수준도 높아져, B급 게임들이 다른 모바일게임들 사이에서도 경쟁을 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특히 모바일게임에서 일어나는) 방치형 플레이 방식의 보편화 역시 플레이에 있어 상대적으로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하는 B급 게임들에 긍정적이지 못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것이 B급 게임과 상호배타적 개념이 아님에도,) 인디게임까지 경쟁자로 떠오르고 있다. 이런 외적 환경 속에서 내부적으로도 B급 게임사나 장르들이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새로운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어, B급 게임들이 처한 상황은 그야말로 설상가상과 악화일로라고 할 수 있다. B급 게임은 어떻게 수용되나 B급 게임은 특유의 정서와 코드를 통해 플레이어를 게임의 안과 밖에 보다 강력하게 가둔다. 일본에서 유행했던 코나미(Konami Holdings Corporation) 〈러브플러스(Love plus)〉 시리즈의 플레이 문화를 살펴보자. 〈러브플러스〉의 후속작 〈러브플러스+〉(닌텐도 3DS용)와 〈러브플러스i〉(아이팟 터치·아이폰·아이패드용)는 가상의 애인과 추억을 쌓아나가는 증강현실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게임 속에서 시간도 흘러가고, 카메라를 통해 플레이어를 캐릭터가 인식하고 불러주기도 한다. 계절에 따라 캐릭터들의 복장도 변하고, 매시간 경험할 수 있는 이벤트도 다르다. 캐릭터들이 문자를 보내기도 하고, 모닝콜도 해준다. 때로는 플레이어와 함께 1박 2일 여행을 가기도 한다. 때문에 계절과 시간에 따라 데이트 코스를 치밀하게 짜야 더 많은 추억을 만들 수 있다. 터치 기능을 이용한 스킨십도 가능하다. 때로는 게임기 마이크에 대고 특정 대사를 입력해야 게임이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 꽤 리얼하게 가상세계 속의 캐릭터와 연애를 해나가게끔 만든 게임인 셈이다. 중요한 것은, 이 게임이 플레이어들에 의해 단순히 집에서만 플레이되는 수준을 넘어, 플레이어들을 집 바깥으로 나서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러브플러스〉 시리즈는 이를테면 〈포켓몬 고〉처럼 위치기반 서비스 요소가 강한 것도 아니고, 게임을 하기 위해 반드시 현실의 다양한 공간을 돌아다녀야 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일본의 특정 지역에서 특정 캐릭터가 등장하는 콘텐츠가 있기는 했지만, 오로지 이러한 부분 때문에 플레이어들이 현실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현실에서 가상의 여자친구와 당당하게 데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한 발 나아가 특별한 데이트를 위해 현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플레이어도 등장했다. 이러한 〈러브플러스〉 시리즈의 독특한 플레이 문화는 일본에 한정돼서 일어난 현상이기에 보편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동안 플레이어를 집에 틀어박히게 하는 것으로나 여겨져 왔던 게임이 오히려 플레이어를 자발적으로 집 밖에 나서게 했다는 점에서는 의미를 갖는다(강신규, 2020). 다른 한 편으로 플레이어들이 원래는 그렇지 않았던 게임을 주체적으로 이용함으로써 B급 문화를 형성할 수도 있다. 대표사례가 ‘모드(MOD: modification)’다. 모드란 기존에 출시된 게임의 내부 데이터를 플레이어가 수정해 새롭게 만들어내는 행위를 말한다. 모드를 통해 플레이어는 B급과는 상관없던 콘텐츠에 B급 정서와 코드를 불러들일 수 있다. 이를테면 VR(virtual reality) 게임인 〈로보 리콜(Robo Recall)〉은, 모드 킷을 공개해 플레이어로 하여금 직접 게임을 확장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에 어떤 플레이어가 만든 ‘트럼프 리콜’ 모드는 적의 얼굴을 모두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으로 바꿔 플레이어로 하여금 트럼프들과 싸우게 만든다. 물리쳐도 물리쳐도 좀비처럼 끝없이 트럼프가 나타나 플레이어에게 달겨드는 식이다( www.roborecallmods.com ). 이러한 모드는 현실세계의 적을 가상세계로 불러옴으로써 게임의 문법을 바꿀 뿐 아니라, 단순한 소비자-수용자를 넘어 적극적인 의미의 생산자-행위자-창작자의 위치로 플레이어를 불러들인다(박근서, 2009). B급의 요건들이 어느 정도는 존재함에도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고 개인에 따라 그에 대한 생각이 다를 수 있어 논란이 야기되는 경우도 있다. 2021년 10월 반지하게임즈의 〈어몽 오징어게임〉을 둘러싼 논란은 하나의 예다. 〈어몽 오징어게임〉은 제목 그대로 게임 〈어몽어스〉의 임포스터 룰을 드라마 〈오징어게임〉에 등장하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 적용한 게임이다. 2021년을 강타한 두 게임(어몽어스+오징어게임)을 패러디하고 오마주해, B급 감성을 담은 독창적인 게임으로 재창조하자는 것이 제작사 반지하게임즈의 의도였다. 하지만 기성 콘텐츠의 인기에 편승해 인디 정신을 잃었다는 비판과, 원작을 모두가 아는 상황에서 패러디·오마주한 게임을 출시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는 플레이어들의 옹호를 동시에 받으며 논란이 됐다(김재석, 2021. 10. 13). 창작자/사가 B급을 의도해 기획·제작한 게임이라 해도, 그것이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수 있다. 〈어몽 오징어게임〉 논란은 이미 B급 콘텐츠임이 전제된 후 그것이 수용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전 단계인 B급이냐 아니냐의 문제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독특한 사례라 하겠다. 이처럼 B급 게임이 수용되는 맥락은 고정적이지 않으며, 복합적이다. 더 많은 B급 게임들을 위하여 이제 (꼭 게임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대중문화 장르에서) B급은 일종의 상업적 코드로 각광받으면서 그 위상을 확대해가고 있다. 제작규모나 기간, 거대 게임사, 유명 창작자 유무로 B급을 판단하는 시선은 수명을 다했다. 평균 제작비를 훨씬 웃도는 자본이 투여된, 거대 게임사의 유명 창작자가 만든 게임들도 B급 정서나 코드를 빈번하게 활용한다. 그러다보니 자유분방한 실험이나 탈구속적인 전복을 기도하는 B급 게임이 생각보다 많이 등장하지는 않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B급 게임과 관련된 가장 큰 변화는, B급의 보편화가 아닐까 싶다. 물론 어떻게든 B급임을 드러내는 게임들도 많지만, B급을 완전히 제거한 게임도 보기 힘들어지고 있다. 대부분의 게임에 B급 정서가 은밀히 숨어 있거나, 의도와 다르게 만들어지기도 하며, 플레이어의 경험이나 욕망과 마주침으로써 B급이 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하지만 B급의 보편화는 B급 게임을 사라지게 하는 효과를 낳는다. A급 게임의 한 재미요소 정도로 B급이 게임에 녹아드는 것보다는, B급 정서와 코드를 전면에 내세워 B급 게임 자체를 형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콘텐츠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에 창의적인 콘텐츠도 많지만, 그렇지 못한 콘텐츠는 더 많다. 상업적으로든 비상업적으로든 성공하는 콘텐츠가 나오면 유사한 콘텐츠로의 쏠림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콘텐츠의 창의성과 다양성은 유지되기 어렵다. 이는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독보적 위상을 갖는 마이너 리그가 존재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런 식으로 거의 모든 대중문화 분야에서 특정의 소수가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성일권, 2015. 5. 21.). 게임도 전반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인디게임이나 저예산 게임이 제작되고 살아남기는 쉽지 않다. 국내·외에서 그러한 게임들을 위한 플랫폼이 생겨 전세계 플레이어들에게 다가가고는 있지만, 여전히 메인스트림 게임들을 따라잡기엔 역부족이다. 하지만 게임문화를 풍요롭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자산은, 다양한 장에서 기획되고 창작되는 수많은 무명의 게임들일 터다. B급 게임은 그 대표주자로서 더 많이 기획되고 만들어지고 플레이돼야 한다. 참고문헌 김재석 (2021. 10. 13). [해설] 오징어게임 카피 게임, 어떻게 볼 것인가? 〈디스이즈게임〉. URL: https://www.thisisgame.com/webzine/special/nboard/11/?n=134570 조주영·안숭범 (2015). 한국 B급 영화 정체성 탐색을 위한 비평장 고찰: 전통적인 미국 B movie 개념과의 비교를 통해. 〈인문콘텐츠〉, 37, 45~71쪽. 문의식 (2015. 1. 16). B급 호러로 시작해 블록버스터 대명사로, 바이오하자드. 〈게임어바웃〉. URL: http://www.gameabout.com/news/articleView.html?idxno=34724 박근서 (2009). 〈게임하기〉. 커뮤니케이션북스. 성일권 (2015. 5. 21). [나쁜 장르의 B급 문화] 왜 B급 문화인가? 〈르몽드디플로마티크〉. URL: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3588 〈로보리콜〉 모드 (www.roborecallmods.com)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 편집위원) 강신규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 편집위원. 게임, 방송, 만화, 팬덤 등 미디어/문화에 대해 연구한다. 저서로 <흔들리는 팬덤: 놀이에서 노동으로, 현실에서 가상으로>(2024), <서브컬처 비평>(2020), <아이피, 모든 이야기의 시작>(2021, 공저), <서드 라이프: 기술혁명 시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2020, 공저), <게임의 이론: 놀이에서 디지털게임까지>(2019, 공저) 등이, 논문으로 ‘이기지 않아도 재미있다: 부모-자녀 게임 플레이의 사회성과 행위성, 그리고 분투형 플레이’(2024), ‘커뮤니케이션을 소비하는 팬덤: 아이돌 팬 플랫폼과 팬덤의 재구성’(2022), ‘‘현질’은 어떻게 플레이가 되는가: 핵납금 게임 플레이어 심층인터뷰를 중심으로’(2022, 공저), ‘게임화하는 방송: 생산자적 텍스트에서 플레이어적 텍스트로’(2019) 등이 있다.
- [고스트] 시리즈: 찬바라의 뒤섞인 계보 위에서 패링하기
찬바라를 적극 수용한 게임도 다채로운 그래픽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던 1980년대부터 찾아볼 수 있다. 세가의 아케이드 게임 [사무라이](侍, 1979), 데이터 이스트의 제목부터 [찬바라](ちゃんばら)인 횡스크롤 액션 게임부터 [사무라이 스피리츠](サムライスピリッツ, 1993), [부시도 블레이드](ブシドーブレード, 1997) 등의 대전 격투 게임, 닌자 잠입 액션을 표방한 [천주](天誅, 1998), 최근의 [세키로: 쉐도우 다이 트와이스](セキロ: シャドウズ ダイ トゥワイス, 2019)까지, 사무라이와 닌자를 주인공 삼은 대부분의 액션 게임을 찬바라 게임의 범주에 집어넣어도 무방할 것이다. 미소녀 좀비 액션을 표방한 [오네찬바라](お姉チャンバラ, 2004) 같은 게임도 있으니 말이다. < Back [고스트] 시리즈: 찬바라의 뒤섞인 계보 위에서 패링하기 30 GG Vol. 26. 6. 10. 찬바라(ちゃんばら)는 칼이 부딪히는 소리의 의성어 ‘찬찬(ちゃんちゃん)’ 소리와 피가 흩뿌려지는 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 ‘바라바라(ばらばら)’가 합쳐진 말이다. 본래 마구잡이로 제작되던 에도 막부 시대 배경의 시대극들을 폄하하는 말이었으나, 지금은 사무라이나 닌자 등이 냉병기로 액션을 벌이는 영화, 소설, 게임, 연극 등을 포괄하는 장르 명칭으로 사용된다. 스펀지검이나 튜브 무기를 사용하는 스포츠 찬바라도 있으니, 용어 자체는 장르나 매체를 가리지 않고 널리 사용된다 할 수 있겠다. 찬바라물이 처음 대중적으로 사용된 것은 일본 영화산업의 여명기인 1920년대부터 1945년 패전까지의 시기다. 19세기 말에도 찬바라 연극이 존재하긴 했으나, 무성영화 시기부터 대량생산된 시대극들이 칼싸움을 주된 소재 삼으며 대중적인 용어로 자리 잡았다. 일본제국이 본격적으로 전쟁을 시작한 시기, 찬바라 시대극은 ‘무사도’를 강조하는 내셔널리즘 프로파간다로 이용되기도 했다. 통계에 따르면 1908년부터 패전까지 일본에서 6,000편의 시대극이 제작되었으며, 이는 일본에서 제작된 영화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다 [1] . 물론 이 모두가 찬바라 영화는 아니었겠지만. * 아케이드 게임 [찬바라] 포스터(위)와 PS2로 발매된 [오네찬바라] 커버(아래) 때문에 찬바라를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대중문화의 하위장르로 볼 수 있다. 찬바라를 적극 수용한 게임도 다채로운 그래픽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던 1980년대부터 찾아볼 수 있다. 세가의 아케이드 게임 [사무라이](侍, 1979), 데이터 이스트의 제목부터 [찬바라](ちゃんばら)인 횡스크롤 액션 게임부터 [사무라이 스피리츠](サムライスピリッツ, 1993), [부시도 블레이드](ブシドーブレード, 1997) 등의 대전 격투 게임, 닌자 잠입 액션을 표방한 [천주](天誅, 1998), 최근의 [세키로: 쉐도우 다이 트와이스](セキロ: シャドウズ ダイ トゥワイス, 2019)까지, 사무라이와 닌자를 주인공 삼은 대부분의 액션 게임을 찬바라 게임의 범주에 집어넣어도 무방할 것이다. 미소녀 좀비 액션을 표방한 [오네찬바라](お姉チャンバラ, 2004) 같은 게임도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계보 그리기의 출발점을 게임 바깥으로 삼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찬바라는 20세기 초반 영화(와 몇몇 소설)를 통해 대중문화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멸칭으로 쓰였으나 작품이 누적되며 장르로 자리 잡은 익스플로이테이션(exploitation)의 계보에서, 찬바라는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플레이스테이션4의 마지막 독점작인 [고스트 오브 쓰시마](Ghost of Tsushima, 2020)와 후속작 [고스트 오브 요테이](Ghost of Yotei, 2025)는 대중문화에 자리 잡은 찬바라 장르의 가장 최신작들이라 할 수 있다. 두 게임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네이트 폭스는 『아들을 동반한 검객』(子連れ狼, 1970~1976)이나 『우사기 요짐보』(兎用心棒, 1984~) 등 유년기 시절 본 찬바라 만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잘 아는 영역이 아니기에 언급하진 않았지만, <사무라이 참프루>(サムライチャンプルー, 2004~2005) 등의 애니메이션, 『블리치』(ブリーチ, 2001~2016)나 최근의 초대형 히트작 『귀멸의 칼날』(鬼滅の刃, 2016~2020) 등의 만화도 찬바라 장르를 표방하거나 그 영향권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게임 스튜디오인 써커펀치에서 찬바라 게임을 제작한다고 했을 때, 이들이 주요 레퍼런스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대중문화의 영역 전반에 흩뿌려진 찬바라를 하나의 계보로 묶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고스트 오브 쓰시마]와 [고스트 오브 요테이]를 플레이하며 감각하게 되는 찬바라의 특징, 혹은 찬바라의 영향 속에서 탄생한 스파게티 웨스턴 등의 서부극과 그것이 다시금 일본으로 돌아와 파생된 일본식 서부극 사이에서 영화와 게임을 오가는 미완의 계보를 그려볼 수는 있다. 서부극에서 찬바라, 다시 서부극으로 패전 이후 미군정에 의해 검술을 비롯한 무술이 영화에 묘사되는 것을 금지당했던 일본에서 찬바라 영화가 다시금 부흥한 것은 구로사와 아키라를 통해서다. 1952년 미군정의 검열이 해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7인의 사무라이>(七人の侍, 1954)가 개봉한다. 몇 해 전 <라쇼몽>(羅生門, 1950)으로 베니스국제영화제 그랑프리를 거머쥔 구로사와였기에, 그가 제작한 또 한편의 걸작은 평단은 물론 대중까지 곧장 사로잡았다. 구로사와는 자신의 찬바라 영화, 미후네 토시로가 연기한 사무라이가 주인공인 일련의 영화들이 할리우드 서부극의 영향을 받았음을 감추지 않는다. 찬바라 영화가 일본 대중을 사로잡던 20세기 초반, 그와 함께 흥행했던 장르는 단연 서부극이었다. 무성영화 시대부터 패전 이후 미군정기까지, 서부극은 일본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가장 히트한 영화 상품이었다. 구로사와 또한 이 시기의 서부극들을 자신의 주된 모티프로 삼는다. * <7인의 사무라이>(위)와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아래) 이를테면 마을 주민들과 산적이 대치하는 상황을 낭인(로닌, ろうにん)에 가까운 사무라이가 돕는다는 설정은 존 포드의 <황야의 결투>(My Darling Clementine, 1946) 같은 작품을 즉각 떠오르게끔 한다. 서부극은 아니지만, 존 포드의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How Green Was My Valley, 1941)의 장면을 <7인의 사무라이>에 따오기도 한다. 방랑하던 낭인이 최후의 결투 직후 떠나는 <요짐보>(用心棒, 1961)나 <츠바키 산주로>(椿三十郎, 1962)의 장면에선 역시 존 포드의 <역마차>(Stagecoach, 1939)뿐 아니라 조지 스티븐스의 <셰인>(Shane, 1953)과 프레드 진네만의 <하이 눈>(High Noon, 1952) 등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거미집의 성>(蜘蛛巣城, 1957) 같은 전쟁영화나 <숨은 요새의 세 악인>(隠し砦の三悪人, 1958) 같은 활극에서도 구로사와는 미후네 토시로에게 카타나를 쥐어주고 휘두르게 했다. 존 포드의 영화에서 존 웨인의 형상이 그랬던 것처럼, 구로사와는 미후네의 야성적인 면모를 자신의 영화 속 안티히어로의 표상으로 삼았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쏜 찬바라 영화 부활의 신호탄에 화답하듯 몇 편의 찬바라 시리즈가 연이어 등장한다. 카츠 신타로 주연의 <자토이치>(座頭市, 1962)는 맹인 검객을 주인공 삼으며, 26편의 후속작과 기타노 다케시 연출/주연의 리메이크작으로까지 이어진다. 자토이치를 연기한 카츠 신타로가 제작한 <아들을 동반한 검객>(子連れ狼 子を貸し腕貸しつかまつる, 1972)는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대형 히트를 기록하며 6편의 영화와 TV드라마로 제작되었다. 이들 작품은 일본에서의 인기와 더불어, 홍콩의 쿵푸/무협영화, 한국의 권격영화 등과 함께 ‘아시안 마샬아츠 필름’으로 카테고리화 되어 전 세계에 해적판과 무허가 더빙, 짜깁기 영화 등의 방식으로 유통되곤 했다. 물론 베니스 그랑프리 수상자인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는 공식적인 배급망을 타고 세계 곳곳에 소개되었고, 유럽과 할리우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는 사실상의 <숨은 요새의 세 악인> 리메이크인 <스타 워즈>(Star Wars, 1977)을 내놓았다. 우주를 배경 삼은 유사-서부극이라는 점에서, 이는 존 포드를 영화적 스승 삼는 구로사와의 영화가 찬바라를 거쳐 다시금 서부극으로 회귀하는 기묘한 계보를 만들어 낸다. 보다 적극적인 수용은 이탈리아에서 이루어진다. 세르지오 레오네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기용해 제작한 <황야의 무법자>(A Fistful of Dollars, 1964)는 <요짐보>를 그대로 차용한다. 각본을 받아든 이스트우드가 읽자마자 <요짐보>를 떠올렸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니까. 다만 레오네의 스파게티 웨스턴은 구로사와가 만든 찬바라 영화의 껍데기만을 끌어온다. 그는 플롯, 안티히어로 캐릭터, 대결 등 영화의 구성요소만 가져오고 전혀 다른 성격의 영화를 만들어 낸다. 존 포드 서부극이 미국을 그려내는 방식을 일본의 것으로 변용한 구로사와의 영화와는 다르달까. * <요짐보>(위)와 <황야의 무법자>(아래)의 유사한 구도 여하튼 레오네의 영화들을 통해 서부극은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무법자 안티히어로 캐릭터가 스파게티 웨스턴의 주류가 되고, 1930~50년대 서부극보다 폭력의 수위가 높아진다. 세르조 코르부치의 <장고>(Django, 1966)에서 기관총을 난사하는 것처럼 말이다. 할리우드에서도 <7인의 사무라이>를 직접 리메이크한 <황야의 7인>(The Magnificent Seven, 1960)을 내놓는데, 이 작품은 화려한 스타 캐스팅으로 주목받았지만 영화 자체의 파급력은 크지 않았다. 다만 스파게티 웨스턴이나 <와일드 번치>(The Wild Bunch, 1969) 등의 수정주의 서부극과 함께 무수한 아류작을 낳은 영화가 되었지만. 구로사와의 찬바라 영화의 영향을 받은 스파게티 웨스턴은 다시금 일본으로 되돌아온다. 1970년대 한국에서 레오네(와 구로사와) 영화의 영향받은 만주 웨스턴이 등장했던 것처럼. 서부극의 클리셰를 잔뜩 끌어온 이타미 주조의 <담뽀뽀>(タンポポ , 1985)는 ‘라멘 웨스턴’을 홍보 문구로 사용하며 스파게티 웨스턴에 대한 일본영화의 대응을 보여주었다. <카우보이 비밥>(カウボーイビバップ, 1998)처럼 제목부터 서부극을 의식한 애니메이션이 대형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고, 일본 장르영화의 거장 미이케 다카시는 <스키야키 웨스턴 장고>(スキヤキ・ウエスタン ジャンゴ, 2007)으로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분에 진출하기까지 했다. 몇 년 전 결말을 맞이한 만화 『골든 카무이』(ゴールデンカムイ, 2014~2022)는 훗카이도를 배경 삼고 아이누족을 주요 캐릭터로 등장시키는 일본 웨스턴의 전통을 이어가기도 했다. 문화적 용광로 혹은 키메라로서의 찬바라 그러니까… 서부극과 찬바라를 오가는 계보를 그려내는 작업은 어떤 난감함을 초래한다. 앞서 언급한 무수한 영화들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영화들의 계보를 그려내는 것은 가능하긴 하지만 어느샌가 길을 잃을 수밖에 없는 미로찾기나 다름없다. 홍콩 무협영화의 걸작 <외팔이>(獨臂刀, 1967)과 일종의 콜라보를 시도한 시리즈의 22번째 영화 <자토이치 - 부셔라! 중국검>(新座頭市 破れ!唐人剣, 1971) [2] 처럼 국경을 넘어 장르가 뒤섞이기도 하고, 앞서 본 것처럼 장르의 수입과 역수입의 반복 속에서 다양한 변종이 탄생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일본의 패전 이전의 찬바라 영화들이 무사도를 주제로 내세웠던 것과 달리, 구로사와 이후의 찬바라 영화들은 (수정주의 서부극들이 그러했듯) 무사도에 내재된 잔혹한 폭력성과 유독한 남성성을 폭로하고, 잔존한 봉건주의의 흔적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할복을 소재 삼은 고바야시 마사키의 <할복>(切腹, 1962)이나 무사도에 기반한 전체주의를 비판한 <무사도 잔혹 이야기>(武士道殘酷物語, 1963) 등이 구로사와의 찬바라 영화들과 비슷한 시기 등장했다. 에도 막부 말기 사라져가는 사무라이를 그려낸 <황혼의 사무라이>(たそがれ清兵衛, 2002)나 무사도에 기반한 남성 호모소셜을 다룬 오시마 나기사의 <고하토>(御法度, 1999), 이와 유사하게 센고쿠 시대 사무라이 집단 내에서의 (성적) 폭력을 다룬 기타노 다케시의 <목>(首, 2023) 등 무사도에 비판적인 찬바라 영화는 현재까지도 등장하고 있다. * 이소룡의 노란 옷에 찬바라의 카타나를 뒤섞은 <킬 빌> 포스터(위)와 오리엔탈리즘의 상징으로 사무라이를 끌어온 대표적 사례인 <47 로닌> 포스터(아래) 다른 한편으로, 사무라이라는 표상이 이전과 같지 않게 된 상황에서 무사도는 찬바라가 아닌 대상으로 옮겨간다. 1971년 시작된 전대물 <가면 라이더>(仮面ライダー) 시리즈는 여타 전대물보다 높은 나이대의 시청자를 대상으로 찬바라 영화, 혹은 스파게티 웨스턴의 무법자와 유사한 스타일의 다크히어로를 선보인다. 시리즈의 몇몇 외전은 아예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염두에 두고 찬바라 스타일의 고어와 유혈을 선보이기도 한다. 일본 내에서 찬바라가 전대물로 변형된다면, 일본 바깥에서 찬바라는 오리엔탈리즘, 와패니즘의 대표적 상징이 된다. 미후네 토시로가 출연한 스파게티 웨스턴 <레드 선>(Sole rosso, 1972)에서는 서부 사막에 뜬금없이 사무라이가 등장한다. 톰 크루즈 주연의 <라스트 사무라이>(The Last Samurai, 2003)에서 사무라이는 서부극의 ‘인디언’과 정확히 같은 위치에 놓인다. 찬바라는 물론 쿵푸영화나 블랙스플로이테이션 등을 마구잡이로 뒤섞은 타란티노의 <킬 빌 - 1부>(Kill Bill: Volume 1, 2003)는 구로사와의 영화들부터 <자토이치>, <수라설희>(修羅雪姬, 1973), <문신일대>(刺靑一代, 1965) [3] 등을 오마주한다. 물론 이런 성공한 영화들 외에도 키아누 리브스가 출연한 <47 로닌>(47 Ronin, 2013)이나 <더 울버린>(The Wolverine, 2013)의 빌런 ‘실버 사무라이’ 같은 사례도 있지만… 이런 사례는 말하자면 끝이 없다. 그러니까, 찬바라는 이제 무사도와는 관계없는 장르 혹은 표상이 되었다. 울버린과 실버 사무라이의 대결에서 어떤 무사도를 느낄 수 있는가? 그것이 설령 니토베 이나조 [4] 가 『무사도, 일본의 정신』(Bushido: The Soul of Japan, 1899)에서 오리엔탈리즘적으로 왜곡한 무사도일지라도 말이다. 이를테면, [사이버펑크 2077](Cyberpunk 2077, 2020)의 아라사카가 보여주는 무사도적 이미지는 그저 이미지를 취한 것에 불과하다. 아라사카의 ‘카케무샤’인 아담 스매셔의 기괴한 모습은 이미 무사도 같은 것과는 멀찍이 떨어진 것이다. 혹은 <존 윅 4>(John Wick: Chapter 4, 2023)에서 견자단이 연기한 케인이 쿵푸마스터임과 동시에 맹인검객 ‘자토이치’라는 이상한 모순을 드러낸다. 사무라이를 주인공 삼은 [사무라이 스피리츠]나 [부시도 블레이드] 등에서 강조되는 것은 무사도보단 ‘찬바라’ 칼싸움과 그것의 즐거움 뿐이다. 찬바라 영화가 남긴 이미지와 캐릭터들은 액션의 장르나 컨셉을 위해 동원되는 형태소로 분해되고 조립되길 반복하고 있다. * [사이버펑크 2077] 속 일본기업 아라사카의 경호원인 아담 스매셔. 그의 몸을 둘러싼 장갑은 사무라이 갑옷의 디자인을 레퍼런스 삼는다. 더불어 캡처의 카타나는 게임에서 주요하게 사용할 수 있는 무기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초회차에서 카타나만 써서 엔딩을 봤다…. 그러한 지점에서, 미국의 게임제작사 서커펀치가 제작한 두 편의 찬바라 게임은 ‘찬바라’라는 장르가 놓인 복잡한 계보의 지형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에 가깝다. 가마쿠라 시대를 배경으로 한 [고스트 오브 쓰시마]는 1274년 원나라의 대마도 정벌 시도를 주된 소재로 삼는다. 갑작스럽게 대마도에 들이닥친 몽골군에 점령당하자, 전투에서 홀로 생존한 사무라이 사카이 진이 무사도를 버리고 최초의 시노비(닌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담아낸다. 몽골군의 압도적인 전력 앞에서, 무사도를 지키며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서 찬바라와 서부극을 오가며 쌓인 클리셰는 그다지 작동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미후네 토시로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낭인 혹은 무법자가 아니며, 대마도를 통치하는 영주의 조카로 묘사되는 만큼 나름의 권력자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 안에서 찬바라·서부극적 요소라면 무사도를 버리고 일종의 안티히어로인 ‘망령’이 된다는 지점뿐이랄까. 훗카이도를 배경 삼은 후속작 [고스트 오브 요테이]는 보다 찬바라·서부극적인 정취를 적극 끌어온다. 엔니오 모리꼬네 풍의 서부극 음악을 샤미센 등의 악기로 연주한 듯한 음악, 이미 여러 일본 웨스턴의 배경이 되었던 드넓은 훗카이도의 풍경, 나름의 사연을 갖고 고향에 돌아온 낭인 주인공 등, 이야기부터 배경까지 다방면으로 전작보다 앞서 언급한 영화의 계보들을 연상시키게끔 한다. 더불어 두 게임에 등장하는 전투시스템인 ‘대결’이 <요짐보>에서 <황야의 무법자>로 이어진 대결 장면의 촬영 구도를 끌어오는 등 여러 인상적인 요소들이 곳곳에 존재하기도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lbB3EUruQ4U * [고스트 오브 요테이]에서 구로사와·미이케·와타나베 모드를 모두 켜고 플레이한 영상. 필름룩을 본딴 흑백 화면에 과도한 유혈이 낭자한 와중에 재즈풍 음악이 흘러나오는 혼종적 상황이 연출된다. 다만 앞서 말한 찬바라·서부극의 계보 위에 두 게임을 어떻게 위치시킬 수 있을까? 흥미롭게도 두 게임은 자체 제공하는 모드를 통해 스스로의 혼종적 정체성을 드러낸다. [고스트 오브 쓰시마]엔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와 유사한 질감의 흑백 화면과 사운드를 제공하는 ‘구로사와 모드’가 있다면, [고스트 오브 요테이]는 각각 <스키야키 웨스턴 장고>의 미이케 다카시와 <카우보이 비밥>, <사무라이 참프루>의 와타나베 신이치로에서 따온 모드가 존재한다. 미이케 모드에서는 피와 진흙이 더욱 많이 튀게 되고, 와타나베 모드에선 서부극스러운 음악이 로우파이한 현대적 음악으로 변경된다. 세 가지 모드를 모두 켠 채 게임을 플레이한다면, 찬바라 장르의 누적된 계보를 한번에 체험할 수 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물론 그 상태로 [고스트 오브 요테이]를 플레이하는 것은 꽤나 고역이지만…. 무사도라는 관점에서 볼 때, [고스트 오브 쓰시마]의 사카이 진과 [고스트 오브 요테이]의 아츠는 반대의 방향에서 중간 지점으로 수렴하는 인물들이다. 무사도에 기반한 사무라이인 사카이 진은 패전 이후 서서히 무사도를 버리고 최초의 시노비가 된다. 처음부터 복수심에 불타오르던 아츠는 ‘늑대 무리’라는 동료들, 무엇보다 살아있었는지 몰랐던 쌍둥이 남동생 주베이와의 만남을 통해 (사무라이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무사도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다만 이는 내러티브를 작동시키기 위한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이들의 이야기를 깊게 파고들어 분석하는 것은 무사도라는 해묵은 정신성을 파묘하는 것에 가깝다. 그렇다면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여기저기 썩어버린 오니 같은 모습일 것이다. 찬바라=패링? 무사도는 폐기나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했고, 사무라이나 닌자는 다분히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에서 단순한 대중문화 아이콘으로 박제되어 버렸다. 이들을 한데 묶는 구심점은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찬바라’로 묶어낼 수 있는 작품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여기서 다시금 어원으로 되돌아가볼 필요가 있다. 애초에 찬바라로 폄하된 20세기 초반의 일본 시대극에서 관객들이 열광했던 것은 무사도보단 칼싸움 그 자체였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소위 ‘다찌마와리(たちまわり’라 불리는 난투가 찬바라의 핵심에 가깝다. 찬바라의 어원부터 칼과 칼이 부딪히고 피가 흩뿌려지는 상황을 그려낸 의성어의 합성이니 말이다. * ‘찬바라’ 그 자체인 <츠바키 산주로>의 마지막 대결 장면(위)와 [고스트 오브 요테이]의 맞대결 장면(아래) ‘찬찬 바라바라’라는 의성어를 게임 메카닉으로 번역하면 패링일 것이다. 실제로 패링이 처음 등장한 게임으로 알려진 것도 사무라이 대전격투 게임 [진 사무라이 스피리츠 하오마루 지옥변](真SAMURAI SPIRITS 覇王丸地獄変, 1994)이다. 게임 메카닉으로서의 패링은 이후 [킬러 인스팅트 2](Killer Instinct 2, 1996)나 [철권] 시리즈(鉄拳, 1994~) 등의 대전격투 게임을 중심으로 활용되기 시작한다. 물론 패링이라는 기술 자체는 중세부터 서양의 검술이나 펜싱 같은 스포츠에 존재했던 것이지만, 그것이 게임 메카닉으로 자리 잡은 것에는 찬바라의 영향이 지대한 셈이다. * [진 사무라이 스피리츠 하오마루 지옥변]의 패링(위)와 [세키로]에서의 패링 움짤(아래) 지금은 대전격투 게임뿐 아니라 거의 모든 액션 게임에서 패링을 찾아볼 수 있다. 냉병기와 방패를 사용하건, 주먹과 발차기가 중심인 게임이건 말이다. 격투와 마법이 뒤섞인 [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Clair Obscur: Expedition 33, 2025) 같은 JRPG식 턴제 게임에서도 패링은 가장 중요한 시스템으로 활용되기에 이르렀다. 패링이 지금의 액션게임 전반에서 패링 시스템을 유행시킨 것은 프롬소프트웨어의 게임들일 것이다. [다크 소울](Dark Souls, 2011)에서 패링을 성공시켰을 때 등장하는 둔탁한 효과음은 강력한 데미지를 먹일 수 있는 ‘앞잡’을 위해 필수적이었다. 다만 극악의 난이도로 유명한 게임답게, [다크 소울]부터 [엘든 링](Elden Ring, 2022)에 이르기까지 패링은 모든 유저의 필수수단이라기보단 고인물의 선택적 플레이 방식에 가까웠다. 흥미로운 지점은 [세키로]다. 프롬소프트웨어의 정통 소울류와는 거리를 두지만, 단일 무기와 체간 시스템을 내세운 이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액션은 패링이다. 게이머들 사이에선 리듬게임이라 불릴 정도로, 적의 공격 패턴을 그대로 외워 튕겨내는(게임 내에선 패링이 아니라 튕겨내기(deflect)로 해당 액션이 표현되어 있다) 것이 액션의 대부분이다. 패링을 통해 적의 체간 게이지를 채우고 자세를 무너뜨려 일격을 날리는 방식은 [다크 소울] 시리즈만큼이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또 다른 형태의 유행을 만들어 냈다. 게다가 칼을 부딪히며 합을 겨루다가 일격으로 상대를 처치하는 ‘인살’ 액션은 <츠바키 산주로>의 아이코닉한 마지막 장면을 곧장 연상시킨다. * [고스트 오브 요테이]에서의 패링 [고스트 오브 쓰시마] 또한 이와 유사한 시스템을 채택한다. 물론 [세키로]와의 발매일 차이가 1년가량밖에 나지 않기에 세키로의 시스템을 직접적으로 차용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스트 오브 쓰시마] 역시 패링을 통해 상대의 자세를 무너뜨리고 일격을 가한다는 액션 메카닉의 구성은 거의 동일하다. 단지 [세키로]보다 일대다로 대결하는 순간이 많고, 다양한 검술 자세를 익혀 상대의 무기(카타나, 창, 방패 등)에 맞게 대응하는 방식으로 액션이 구성된다는 차이점이 있다. 이는 [고스트 오브 요테이]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사카이 진의 다양한 검술 자세가 아츠에게는 대태도, 사슬낫, 창, 이도류 등 다양한 무기로 대체된다는 차이점만이 존재한다. 게임 시스템 중 하나인 ‘맞대결’에서 서로를 노려보는 주인공과 적의 모습은 찬바라의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서부극의 것이기도 하다. 2020년대의 시점에서 이것을 구별하여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두 게임의 무대가 대마도와 훗카이도라는, 일본의 ‘본토’가 아닌 지역을 다루는 것은 분명한 서부극의 영향일 것이다. 센고쿠 시대가 아닌 13세기를 택한 [고스트 오브 쓰시마]나, 센고쿠 시대를 다루며 세키가하라 전투와 같은 대전투를 언급하지만 그 중심에서는 한 발 떨어져 있는 [고스트 오브 요테이]는 찬바라 영화의 주요한 두 배경(센고쿠 시대, 에도 막부 시대)을 피하는 방식으로 서부극을 끌어온다. 다만 두 게임을 찬바라로 만들어주는 것은 이 게임의 액션이 패링에 기반한 찬바라 영화의 방식을 따르기 때문이다. 게임 메카닉으로서의 패링이 찬바라의 영향 아래서 등장한 것을, 두 게임은 충실히 계승한다. 그러니까, 결국 두 게임의 핵심은 이것이 칼싸움 게임이라는 것이다. * 위에서부터 <요짐보>의 마지막 결투, <석양의 무법자>(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1966)의 결투, [고스트 오브 쓰시마]의 맞대결 장면. 장면 구도의 유사함이 이어진다. 찬바라 액션게임에 기대할 수 있는 액션의 즐거움을 풍성하게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두 게임은 성공적이다. 찬바라에서 스파게티 웨스턴을 거쳐 훗카이도에 자리 잡은 서부극적 분위기나 방랑자이자 무법자인 안티히어로의 내러티브 등은 찬바라 액션을 생동감 있게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일련의 껍데기들에 불과하다. 세세히 뜯어보면 이 껍데기들은 충분히 ‘리얼’하지도 않다. [고스트 오브 쓰시마]의 주된 모티프인 원나라의 대마도 정벌은 몽골군뿐 아니라 고려군도 참여했지만, 게임엔 등장하지 않는다. 사카이 진의 갑옷과 카타나의 디자인은 13세기 가마쿠라 시대보단 센고쿠 시대의 것을 따른다. 그것이 게임을 플레이할 이들에게 보다 익숙한 사무라이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고스트 오브 요테이]가 센고쿠 시대를 배경 삼은 여타 게임과 달리 훗카이도를 무대 삼은 것도 아츠라는 한 개인이 사이토 가문과 요테이 육인방을 무찌를 수 있는 합리적인 배경을 제시하기 위함이지, 그 이상의 이유는 발견하기 어렵다. 완성된 게임의 구성은 적절한 찬바라 액션의 다찌마와리를 플레이스테이션 듀얼쇼크/듀얼센스를 통해 플레이하고 감각할 수 있는 선택지들을 골라낸 결과에 가깝다. 그러한 맥락에서, ‘찬바라’로 명명되는 장르가 다종다양한 매체를 가로지르며 형성한 계보 위에서 [고스트 오브 쓰시마]와 [고스트 오브 요테이]는 역설적으로 찬바라가 거쳐온 길을 하나하나 보여주는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무사도라는 국가 기획의 흔적, 서부극과 교환하며 발전한 모티프와 클리셰, 게임 메카닉으로서의 찬바라인 패링. 찬바라는 일본 대중문화 전통의 장르이면서, 동시에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건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다. 어쨌거나 미국 게임인 두 작품은 그것을 재확인시켜준다. [1] 김려실, 『일본 영화와 내셔널리즘』, 책세상, 2005, 28쪽. [2] 여담이지만, 이 작품의 일본 개봉판에선 자토이치의 승리로, 홍콩 개봉판에선 외팔이의 승리로 서로 결말이 달랐다고 한다. [3] 엄밀히 말하면 사무라이가 아니라 야쿠자가 주인공인 영화이지만, 롱테이크로 담긴 후반부의 칼싸움 장면은 ‘찬바라’의 전형을 따른다고 할 수 있다. [4] 일본의 사상가이자 교육인, 정치인으로 메이지 시대 일본의 근대화에 힘쓴 국제주의자로 알려져 있으며, 구 5,000엔 지폐에 그려진 인물이기도 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비평가) 박동수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했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를 전공하고 있다. 영화에 관한 글을 주로 쓰고, 미술, 게임, 방송 등 시각문화 전반에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리고 있다. 영화평론가, 팟캐스트 [카페 크리틱] 진행자, 공동체상영 기획자이기도 하다.
- 〈디스코 엘리시움〉 하나의 세계에서 태동하는 모순, 적대, 역설의 게임(장려상)
그럼에도 비평적으로 찬사를 받으며 우뚝 선 ZA/UM의 개발자들은 이제 비디오 게임이야말로 21세기를 이끌어나갈 예술이라고 밝히는 데에 이르렀다. “타인의 기억에 남고 싶다면, 체계적으로 반감을 사야 합니다. 반감을 살 준비가 되었다면, 정말로 역사적인 기회를 얻게 됩니다.”3)는 말은 그들에게 매우 적절하지 않을까. < Back 〈디스코 엘리시움〉 하나의 세계에서 태동하는 모순, 적대, 역설의 게임(장려상) 07 GG Vol. 22. 8. 10. 하나의 세계라는 조건 속의 여정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지만, 그들이 바라는 꼭 그대로 역사를 형성해가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 스스로 선택한 환경 아래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곧바로 맞닥뜨리게 되거나 그로부터 조건 지어지고 넘겨받은 환경하에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은 악몽과도 같이 살아 있는 세대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카를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 〈디스코 엘리시움〉의 등장인물 〈디스코 엘리시움〉은 반세기 전 한때 공산주의 혁명의 파도가 엄습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난 혁명으로 풍비박산이 난 상태인 가상 국가 레바숄과 그 한 구역인 마르티네즈를 주 배경으로 한다. 탄광에서 일하며 벽화 페인트와 미술에 심취한 공산주의자 스컬 신디와 대기업 와일드 파인 사의 대사이자 초자유주의자인 조이스, 해리의 동료 킴 키츠라기를 순수 혈통이 아닌 이방인으로 취급하는 인종주의자 운전수와 미확인파시스트 개리, 왕정파로 공산주의자들과 맞서 싸웠던 노인과 마조프주의자로 연합군에 저항했던 탈영병, 밀매 혐의를 받으면서도 항만 노동조합 대표자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현실 권력을 움켜쥔 에브라트 등의 사민주의자, 클럽을 만드는 데 혈안이 된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 이곳은 화해 불가능한 NPC들, 성원들이 살아가며 서로에 필연적으로 적대, 모순, 역설 등을 낳을 수밖에 없는 세계다. 한 세계의 구성원들이지만 동시에 결코 엮일 수 없으며, 불화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 이미 손쓸 수 없을 만큼 초토화된 곳에서 매우 불안정하게 공존하고 있다. 여기서 대두되는 것은 이러한 캐릭터들이 놓인 세계를 구성하는 조건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육성해나가는 방식(능력치, 생각 캐비닛, 장비)에서 무엇을 추구하든, 어떤 피상적인 혹은 구체적인 사상과 이념을 가졌든, 아니면 그러한 것들에 전혀 관심이 없이 그냥 플레이하든 게임 진행에 문제는 없다. 인물들과의 상호작용과 주사위 판정에 따라 선택지와 이념 루트들이 부분적으로 변화하며, 게임에 대한 인상이 많이 달라지는 것은 맞다. 분명 〈디스코 엘리시움〉의 선택은 그 자체로 핵심적인 캐릭터 구축의 원동력이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게임 내 모든 활동은 플레이어가 공통으로 접촉하고, 대면하고, 공유하게 되는 한 세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디스코 엘리시움〉에서 플레이어는 전지적인 능력으로 세계를 뒤흔들고, 변형하는 일을 수행하지 못한다. 이는 곧 레바숄이라는 하나의 황폐한 세계를 플레이어의 주관적인 의지와 계획에 따라 마음대로 변화시키는 것이 게임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임에서 해리의 자아와 의식, 그리고 이를 조작하는 플레이어의 주관적인 의도가 세계에 그대로 반영되지는 않는다. 그러한 반영을 방해하고 좌절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주인공이 본인으로 다시 서는 과정에서 탐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계를 탐색하는 것은 플레이를 이어나가면서 분실한 신분증을 찾기 전까지 자신의 이름마저도 기억하지 못하는 해리 드 부아다. 주정뱅이 해리는 새로운 동료 킴 키츠라기와 함께 살인 사건을 조사해나감과 동시에 세계를 구성하는 NPC들에 접근하여 소통하거나 교감하며 세계를 탐색해나간다. 하지만 해리 또한 세계의 조건으로부터 독립된, 자유로운 인물이 전혀 아니다. 해리는 RCM 소속의 경찰로 권위를 위임받은 인물이다. 그 자신이 몸담은 RCM은 혁명 이후 연합 정부에 의해 국제 영역의 치안을 복구하고자 조직되었으며, 정치적으로 중립을 자처하고 있으나 치안을 유지하는 데 급급하다. 단지 설립이 허락된 조직에 불과한, RCM의 경찰이라는 조건을 해리와 플레이어는 이를 끊임없이 자각해나간다. 그렇기에 〈디스코 엘리시움〉에는 선택이 반영되는 결과의 다양성을 내세우며 세계로부터, 인물로부터 독립된 각각의 가능 세계들을 앞세우려 드는 멀티 유니버스, 멀티 엔딩은 존재하지 않는다. 흔히 동원되는 평행세계, 대체역사, 가상현실 같은 개념들 또한 성립하지 못한다. 여기에 독립된 각자의 다원적 세계들이란 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디스코 엘리시움〉은 결과에 도달하는 선택의 과정들에 활로를 열어젖힘으로써 게임을 통해 정식화된 공통의 세계 속에서 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행동하며, 살아갈 것인가에 있다. 그런 점에서 게임에서 선택지를 통하여 과정과 분기가 결정됨에도 그것이 세계를 뒤바꾸는 성공이나 실패의 특정한 루트를 창출하지 않는 것도 자연스러워진다. 일각에서는 네 개의 이데올로기를 가리키는 선택지를 골라서 특정 이념을 체화한 인물로 만들어도, 결국 같은 화면을 공유하며 세계의 결과는 차이가 없다는 점을 예로 들어 게임의 자유도를 비판하곤 한다. 그것은 적법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세계를 충실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던함과 포스트모던함, 표층과 심층의 이야기의 공존 “만약 새로운 정치 예술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진실에 집중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의 근원적 대상으로서의 다국적 자본이라는 세계 공간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현실을 돌파하여 이 세계 공간을 재현할 수 있는 지금껏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개인적·집단적 주체로서 우리 자신의 행동하고 위치를 다시 파악하기 시작하고, 현재 우리의 공간적·사회적 혼란에 의해 중화되어버린 투쟁하는 능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치적 형식이 어떤 식으로든 존재한다면, 그것의 소명은 사회적이고 공간적인 차원에서 전 지구적인 인식적 지도 그리기를 창안하고 투사하는 일일 것이다.”(프레드릭 제임슨,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 문화 논리〉) 앞서 〈디스코 엘리시움〉은 어떤 사상과 이념을 택하든 하나의 세계를 공유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는 분명히 동시대 유행하는 어떤 RPG, 오픈월드 게임들의 방향과는 확연히 다른, 이전 세기의 전유물 같은 인상을 준다. 플레이어들이 종종 문학 작품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거나, 한 문학평론가의 ‘게임이 되는 소설, 소설이 되는 게임 1) 이라는 말은 그것을 대변하는 의견일 것이다. * 도덕주의자 퀘스트에 등장하는 연합 군함 아처 먼저 인류의 가장 위대한 무결자로 불리는 '돌로레스 데이'라는 존재를 다시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게임에서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뤄지는 이 인물은 무결자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존재이고 도덕주의자들(=인문주의자)의 상징이며, 통치 시기에는 엘리시움에 있는 여러 이솔라를 발견했다. 레바숄 또한 이 돌로레스 데이 시절에 만들어진 식민지였다. 돌로레스 데이에 대한 숭배는 단순 종교적인 믿음이 아니라 일종의 법칙으로 여겨졌으며, RCM의 법규도 돌로레스 데이 시절에 만들어진 법에 기반을 둔다. 돌로레스가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은 경호원에게 총에 맞고 죽고, 돌로레스 데이의 시절이 돌연 막을 내린 이후 더는 이러한 세계의 질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엘리시움은, 레바숄은, 사회를 어떻게 질서화할 것인가에 대한 아이디어가 실패하고 이러한 구상 자체가 외부 세력에 의해 짓눌려버린 곳이다. 그것은 곧 이성, 합리, 질서 등을 내세운 근대가 좌초된 것이기도 하다. * 교회 안의 클럽 반면 서브퀘스트를 진행하면서 이와 대비되는, 이전의 시스템이 더는 기능 하지 못하는 근대 이후의 포스트모던한 감각으로 살아가는 듯한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과 마주할 수 있다. 이들은 최신의 아노딕 댄스 뮤직을 구현하는 행위에 전념한다. 훼손당한 돌로레스 데이의 벽 조각상이 안치되어있는 교회 안에 들어와 클럽을 만든다. 진중한 대화라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이들은 너무나 '소프트코어'한 세상을 '하드코어'하게 바꿔야 한다고 하거나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파시즘이든 무엇이든 거대한 이념과 사상들은 다 나쁘고 가치판단에는 별 관심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면서도, 대뜸 돌로레스 데이를 대량학살자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포스트모던'이라는 렌즈로 '오타쿠'와 현대 일본의 정신구조에 대한 분석하면서 이 개념을 축으로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게임을 하는 것'이 '사회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점을 탐구한 아즈마 히로키는 근대와 탈근대의 세계를 트리형, 데이터베이스형으로 분류한 바 있다. 근대의 트리형은 우리의 의식에 비치는 표층적인 세계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표층을 규정하고 있는 심층, 즉 커다란 이야기가 있다는 것에 반해 포스트모던의 데이터베이스형 세계에서 표층은 심층만으로는 결정되지 않고 그 읽어내기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디스코 엘리시움〉을 ’이야기하기‘의 방법으로도 볼 수 있다. 형사가 살인 사건의 진범을 잡는 표층과 기억을 잃은 자가 인물들과 소통하고 세계를 마주하며 다시 나아가는 심층의 이야기로서, 그리고 근대와 근대 이후의 감각이란 무엇인지에 관해서 말이다. 지나간 근대를 재료로 삼는 〈디스코 엘리시움〉에서 주인공 해리 또한 근대를 지나온 인물이다. 해리는 근대의 산물이라 여겨지는 인간의 재귀적인 자기 구성과 수정 능력을 통하여 세계와 마주하며 자신을 다시 찾아가며, 게임의 세계관도 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자기 자신을 누구로, 무엇으로, 어떤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사고해나가는 해리나 자신을 다소 철학적인 항만 노동자로 소개하며, ’나는 누구인가, 너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우리는 투쟁하는가‘식의 거시적인 담론을 나누는 걸 즐기는 편이라고 말하는 마냐나 같은 인물은 이와 같은 부류일 것이다. 그러나 아노딕 댄스 뮤직의 아이들에게는 이는 관심사도 아니다. “거대한 이야기와는 철저히 단절한 새로운 세대는 처음부터 세계를 데이터베이스로 인식하기 때문에 그 전체를 조망하는 시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 전체에 대한 특정 이야기의 공유화 압력의 저하, 다시 말해 '그 내용이 무엇이든 일단은 특정한 이야기를 모두가 공유해야 한다'는 메타 이야기적 합의의 소멸을 지적한 것이기 때문이다”(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이은미 옮김, 선정우 감수, 문학동네, 2007). 히로키식의 설명을 빌리자면, 트리형 세계 속에 작품의 심층적인 이념, 사회구조, 세계관으로 사고를 확장하는 것은 해리일 것이다. 반면 아노딕 뮤직의 아이들은 포스트모던 이야기구조, 데이터베이스형 모델을 추구하며, 근대의 커다란 이야기들이 실종된 채로 당장 본인들이 추구하는 아노딕 댄스 뮤직에 대한 파편적인 데이터베이스들로 자신들만의 세계와 이야기를 마음대로 만들어간다. 아이들과 상호작용하며 서브 퀘스트를 수락하고 진행하게 되면, 해리는 아노딕 댄스 뮤직에 맞춰 교회에서 춤사위를 벌인다. 한때의 찬란했던 신세대의 음악이라 불리던 디스코의 시절은 어느덧 저물고, 빈사 상태가 되었다. 해리는 새로운 세대의 아노딕 댄스 하드코어 음악을, ’돌로레스 데이‘의 조각상이 있는 교회 안에서 그렇게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디스코 엘리시움〉이 그저 옛 찬란했던 20세기의 근대적 이상을 복원하는 것에 착수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이를 찬미하는 게임인가. 모던의 자리에 자신을 위치시키면서 포스트모던을 부정하고, 아노딕 댄스 뮤직을 선도하는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에 조소하고 한탄하는 게임인가. 그렇지는 않다. 과거 기획의 실패, 우울, 좌절, 절멸, 절망, 패퇴, 패배주의, 허무주의 같은 것들이 내내 게임의 정서를 지배하는 듯한 종반부에는 극적인 반전들이 기다리고 있다. 인술린데 대벌레와 ’돌로레스 데이‘로 형상화한 도라, 그리고 탈영병 같은 존재들로부터 말이다. 해리(플레이어)는 탈영병을 마주하기 직전 꿈에서 자신의 오랜 결핍의 대상이었던 옛 연인이자 돌로레스 데이로 형상화된 도라를 마주하고, 이후 인술린데 대벌레를 만나 그 옛 연인을 이제는 잊고 극복하라는 충고를 받아들인다. 종반부에 예상치 못한 범인으로 대면하게 되는 탈영병 노인은 실패한 혁명의 잔여물이다. 탈영병 노인과 해리는 완전히 상반되는 궤적을 지닌다. 게임의 시작에서 해리는 연인 도라와의 결별을 중심으로 세상에 대해 환멸과 회의로 얼룩진 나머지 모든 권총으로 자살 소동까지 벌이며 세계와의 완전한 단절을 모색했던 자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도 자유를 찾지 못했다. 게임의 시작에서 모든 것에 절망하고 세계와 단절한 채로 자신을 고립시킨 해리가 개인으로 자유로워진 것은 외부 세계로부터 독립된 자생적 의식과 실천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자신이 추방되기를 기꺼이 자처했던 해리가 다시 세계와 마주한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 그는 근대의 상징과도 같았던 도라 혹은 이를 형상화한 돌로레스 데이를 떠나보내고 새 출발을 하게 된다. 모순적 세계의 성공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세상의 모순 때문이다. 모든 일과 사물과 사람에는 그것들을 지금의 상태로 만드는 무언가가 있고, 동시에 다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왜냐면 그것들은 발전해나가고 머물러 있지 않으며 못 알아볼 정도로 변한다. 지금 있는 것들 안에는 ‘아무도 모르게’ 다른 것, 그 이전의 것, 현재에 적대적인 것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베르톨트 브레히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다〉, 마성열 편역, 책읽는오두막, 2013) 〈디스코 엘리시움〉의 리드 작가 헬렌 힌드페레(Helen Hindpere)는 ’포스트 소비에트‘의 시기에서 자란 기이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레바숄이 마치 10년 전의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2) . 〈디스코 엘리시움〉은 그러한 경험들의 잔향이 당연히도 짙게 배어있다. 하지만 이는 에스토니아라는 동구권의 한 국가에서 소련의 몰락 이후의 시기를 직접 겪은 이들이 게임을 매개로 하여 그것의 실상에 관해 증언하는 역사물이 아니다. 가상적 공간을 주 무대로 하는 〈디스코 엘리시움〉은 실존적 무게로 다가오는 정치적 실재를 소환하기도 하지만, 역사를 그 자체로 재현하거나 규명하는 것을 자처하면서 이를 훈고학적으로 늘어놓으며 일련의 무용담, 음모론, 교훈극으로 소화하지 않는다. 일종의 미학적 구성물로 승화하는 셈이다. 이로부터 한 예술비평가를 떠올리게 된다. 동구와 서구를 모두 경험한 사람이면서 공산주의 붕괴 이후 서구 좌파들이 가지는 어떤 멜랑콜리나 채무감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람. 오늘날 우리가 사는 역사 이후의 시간이란 ‘최적의 사회질서에 대한 모색’이 이미 완수된 시대이며, 지금 중요한 것은 ‘앞서 일어난 혁명의 성과’를 현실 속에서 구현하는 현세적 실천이라고 말하는 보리스 그로이스다. 역자 김수환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코뮤니스트 후기〉라는 책을 소련을 회고하는 역사 에세이가 아닌, 철학적 성격의 사고실험을 수행하기 위한 미학적 구성물에 가깝게 구성한다. “만약 공산주의를 언어라는 매체로 사회를 번역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이 약속하는 것은 목가라기보다는 자기모순 속에 놓인 삶, 최대치의 내적 분열과 긴장의 상황이다”라고 말하며, 자기모순을 숨기지 않은 채로 그 모순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체제를 거론한다. 그것은 대립을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을 첨예화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세계에 내재한 모순과 분열, 적대를 숨기지 않고 그 모순 안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을 둘러싼 대립을 첨예화하는 〈디스코 엘리시움〉은 어쩌면 그와 매우 가까이 있는 것도 같다. RPG 캐릭터의 육성 방법으로 어느덧 암묵적으로 필수 사항이 된듯한 전투 시스템이 부재한 자리를 방대한 텍스트와 온갖 갈등, 모순, 역설, 적대로 얼룩진 세계관으로 채우는 〈디스코 엘리시움〉은 모두에게 어필할 게임이 아니다. 누군가에겐 따분하거나 거북하거나 섬뜩할 수도, 혹은 고양되거나 짜릿하거나 흥분되는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그럼에도 비평적으로 찬사를 받으며 우뚝 선 ZA/UM의 개발자들은 이제 비디오 게임이야말로 21세기를 이끌어나갈 예술이라고 밝히는 데에 이르렀다. “타인의 기억에 남고 싶다면, 체계적으로 반감을 사야 합니다. 반감을 살 준비가 되었다면, 정말로 역사적인 기회를 얻게 됩니다.” 3) 는 말은 그들에게 매우 적절하지 않을까. 게임 개발사 하나 제대로 없던 에스토니아라는 동구권의 한 국가에서, 소설가 출신으로 실패를 경험한 로버트 쿠르비츠 등을 위시하여 게임과는 전혀 상관없던 이들에게 말이다. 1) (인하영, 2021) 문학평론가, 「게임이 되는 소설, 소설이 되는 게임」, 『경향신문』, 2021.10.28https:// 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110280300115 2) 〈Masterclass: Helen Hindpere Talks About Writing Disco Elysium: The Final Cut〉, https://youtu.be/Xf_hU7IW5qs 3) 보리스 그로이스, 〈예술 작품이 된다는 것(Becoming the Artwork)〉, 2020, 부산현대미술관 《동시대-미술-비즈니스 :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질서들(Contemporary-Art-Business: The New Orders of Contemporary Art)》 https://youtu.be/W9Uu13m5JxI 참고문헌 카를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최형익 옮김, 비르투(VIRTU), 2012. (프레드릭 제임슨,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 문화 논리〉, 임경규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2)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이은미 옮김, 선정우 감수, 문학동네, 2007). (베르톨트 브레히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다〉, 마성열 편역, 책읽는오두막, 2013)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ACT! 편집위원) 김서율 진보적 미디어운동 연구저널 ACT!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영화를 중심으로 문화 전반에 관심을 두고 종종 글을 끄적이거나 기고해왔다. 현재는 구로구 노동자종합지원센터에서 일한다. 어느샌가 사회 운동에 뛰어들어 연구자와 활동가, 이론과 실천 사이에 단절된 통로를 고민하며 길을 모색 중이다.
- <페르소나 3 리로드> 일본 정치와 함께 톺아보기
<페르소나 3>는 <페르소나 시리즈> 전체로 보면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여신전생 시리즈>의 외전 격으로 개발된 시리즈의 핵심 정체성을 확립한 타이틀이기 때문이다. <여신전생 시리즈>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던전RPG를 표방하는데, 던전 탐색에 악마 소환 및 합체를 결합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페르소나 시리즈>도 큰 틀에서는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고전 시절의 1인칭 시점을 고수하진 않지만, 게임의 핵심 축은 여전히 던전과 전투이다. < Back <페르소나 3 리로드> 일본 정치와 함께 톺아보기 18 GG Vol. 24. 6. 10. <페르소나 3>는 <페르소나 시리즈> 전체로 보면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여신전생 시리즈>의 외전 격으로 개발된 시리즈의 핵심 정체성을 확립한 타이틀이기 때문이다. <여신전생 시리즈>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던전RPG를 표방하는데, 던전 탐색에 악마 소환 및 합체를 결합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페르소나 시리즈>도 큰 틀에서는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고전 시절의 1인칭 시점을 고수하진 않지만, 게임의 핵심 축은 여전히 던전과 전투이다. 그런데 <페르소나3>는 여기에 주인공과 다른 등장인물과의 관계가 중심이 되는 ‘커뮤 시스템’을 추가했다. 주변 인물과의 관계를 얼마나 발전시켜 놓았는지에 따라 악마 개념을 대신한 페르소나의 성능에 더해 일부 스토리 라인에도 영향을 주게 한 것이다. 이에 따라 <페르소나 3>에선 던전과 전투만큼이나 일상 파트에서의 스케쥴 관리가 중요해졌다. 방과 후 시간을 어디에 어떻게 투자하느냐가 던전-전투의 성과를 좌우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남는 시간을 누구와 어떻게 보낼 것인가’는 우리가 현실에서도 늘 고민하는 문제이다. 실제로 게임 중에 ‘오늘은 무엇을 할까’하고 고민할 때에는 단지 선택지를 고르는 것임에도 묘한 현실감이 느껴진다. 반면 던전과 그 안에서의 전투는 그게 아무리 현실적으로 묘사되더라도 결국 게임 속에 있다는 느낌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데 만일 게임이 오로지 ‘오늘은 무엇을 할까’만을 선택하는 것으로만 디자인 되어 있다고 하면, 던전RPG로서의 의미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은 무엇을 할까’라는 고민이 게임 고유의 요소인 던전-전투와 연계된다는 게 이 시스템의 핵심이다. 그런 점에서 <페르소나 3>는 이전의 시리즈에 비해 게임과 현실을 잇는 가교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후속작인 <페르소나 4> 역시 기본적으로는 같은 형식이지만 일상의 재현에 보다 무게를 둔 느낌이다. 덕분에 고교 시절 친구들과의 좌충우돌 에피소드를 대리 체험하는 비중이 커졌다. 즐겁고도 그리운 느낌이 게임 전반을 지배한다. 3편에서 ‘타르타로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던 일직선 구조의 던전도 <페르소나 4>에서는 캐릭터별 특징에 맞는 던전이 스테이지별로 따로 구현되었는데, 이런 구조는 자연스럽게 등장인물의 캐릭터성을 강화하는 효과를 낳았다. ‘섀도’와 싸울 수 있도록 해주는 ’페르소나’의 개념도 조금 달라졌는데, 3편에선 단순히 소질과 각성의 문제였다면 <페르소나 4>에선 부정하고 싶었던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마주하면서 얻게 되는 ‘인격의 갑옷’이라는 개념이다. 이렇게 되면 각 등장 인물의 ‘부정하고 싶었던 자신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가 중요해진다. 동료 캐릭터의 서사에 포커스가 맞춰지는 거다. <페르소나 5>는 3편과 4편을 합친 모양새다. 분위기는 4편의 아기자기함 보다는 3편의 염세에 가깝다. 그러나 등장인물 간의 관계나 각각의 캐릭터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선 4편을 연상하게 된다. 던전 역시 일직선 구조의 ‘메멘토스’와 캐릭터의 내면과 연계된 ‘팰리스’가 병존하고 있다. 3편과 비교해 다소 간략화 된 느낌이었던 전투 파트는 5편에선 오히려 더 복잡해졌고 변수 역시 많아졌다. 섀도를 설득해 페르소나로 흡수하는 시스템은 심지어 3편 이전으로의 회귀다. 이런 점에서 보면 <페르소나 5>는 시리즈 전체를 종합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관점을 스토리를 중심에 놓는 것으로 바꿔보면 더 흥미로운 대목이 드러난다. 사실 <페르소나 3>는 서사 구조만 놓고 보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아류로 볼만하다. 주인공과 동료들이 모여있는 공간을 주기적으로 공격하는 대형 섀도, 그럴듯한 명분으로 싸움의 목적을 오인하게 하는 ‘흑막’, 주인공과 너무 가까워진 나머지 자신의 본래 목적 달성 여부를 고민하는 강적, 인류의 집단적 바람이 원인이 된 종말과 같은 요소들이 그렇다. 그런데 이는 시기적으로 보면 다소 식상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코드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방영된 시기는 1995년 말에서 1996년 초까지다. <페르소나 3>는 2006년에 출시되었다. 이 10년의 간극에도 불구 <페르소나 3>는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걸 스토리를 중심에 놓고 평가한다면 어떤 결론이 나올까?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같은 작품의 성공은 버블붕괴로 인한 사회적 혼란 및 이와 맞물린 비관주의의 확산과 떼어 놓고 평할 수 없다. 1990년대의 일본은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부문에서 혼란기였다. 정치적으로는 자민당이 스캔들과 비리 등으로 정권을 잃었다가 사회당과의 연정 등을 통해 간신히 되찾으면서 55년 체제가 붕괴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경제적으로는 버블 붕괴로 인한 주요 금융회사의 도산이나 부동산 주가 폭락 등 자산시장의 경색이 문제가 되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옴진리교가 일으킨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한신 아와지 대지진 등으로 민심이 흉흉해졌다.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이 작품을 향한 절대적 지지에는 이 모든 사태가 빚어낸 혼란이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페르소나 3>가 나온 2006년의 상황은 1990년대의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되는 국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자민당을 부숴버리겠다”는 구호와 함께 등장해 비교적 안정적 정치 기반을 구축하면서 ‘개혁’ 담론을 주도했는데, 이는 경제적 측면에서도 ‘우정민영화’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개혁 조치를 이상화 해 밀어 붙이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런 점에서 보면 2000년대 중반까지의 일본은 ‘버블붕괴’라는 폐허를 뒤로 하고 불안 속에서도 무언가를 새롭게 재건한다는 느낌으로 나름의 희망을 말할 수 있는 시대였다. 그런 시점에, 일상의 평화에 젖어 오히려 종말을 바라는 인류, 이대로 세상의 종말을 평화롭게 용인할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감수하더라도 종말을 막기 위해 싸울 것인가를 고민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건 시선에 비유한다면 ‘돌아보는 시선’이다. 분명 어떤 점에서는 나름의 진정성이 있는 것이지만, 지금 당장 눈 앞에 닥친 자신의 문제라는 절박함은 상대적으로 희박한 것이다. 이게 <페르소나 3>의 서사가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아류로 느껴지는 이유다. <페르소나 3>에 투영된 것이 지나간 것에 대한 ‘돌아보는 시선’이라면, <페르소나 4>는 ‘자신의 발 밑을 내려다보는 시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시선이 보는 세계는 지극히 개인화 되어 있다. 세계의 위기는 주인공이 잠시 살고 있는 이나바시라는 시골 마을에 국한된다. 본편에서 숙적은 주인공을 돌봐주는 삼촌의 직장 동료이다. 심지어 <페르소나 4> 최대의 반전은 주인공에게 최초의 시련을 부여하는 ‘흑막’이 기껏해야 동네 주유소 아르바이트로 위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실제 게임을 해보면 바로 이 보잘 것 없는 설정들에 현재성이 실려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페르소나 4>는 2008년 7월에 출시됐는데 시기적으로 3편의 출시일과(2006년 7월)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즉, <페르소나 4>는 3편과 동시대성을 공유하며 동전의 앞뒷면을 구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페르소나 3>과 <페르소나 4>는 비유하자면 같은 화자의 다른 이야기인 셈이다. 여기서 화자는 버블 붕괴 여파가 어느 정도 수습된 시점을 현재로 삼고 있다. 현재 시점에 비관주의가 득세했던 과거를 모사하며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게 <페르소나 3>, 과거를 뒤로 하고 눈 앞의 이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하며 일상을 살아가는 게 <페르소나 4>다. 따라서 <페르소나 3>가 세계의 종말을 주인공의 자기 희생을 통해 막는 얘기일지라도, 그건 근본적으로는 현재의 소중한 삶을 지키기 위한 제스처라는 해석을 피할 수 없다는 거다. 그런데, <페르소나 3>으로부터 꼭 10년이 지나 나온 <페르소나 5>에 이르러서는 상황이 크게 바뀌게 된다. <페르소나 5>는 3편이나 4편처럼 현재에 안주하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세상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실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애쓴 티가 역력하다. 예를 들면 <페르소나 5>에서의 ‘페르소나’는 부조리에 굴복하지 않는 ‘반역의 의지’를 내비치는 것으로서 각성한다. 주인공들은 마음의 괴도단을 구성해 유력한 개인들을 개심시키는 것으로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에는 한계가 있고, 오히려 기득권에 의해 반격을 당하는 상황에 내몰리기 까지 한다. 그러나 주인공들은 그에 굴하지 않고, 그에 굴하지 않는 것을 넘어, 세계가 왜곡된 원인인 세상의 질서 그 자체와 맞서는 데까지 전진한다. 이를 통해 확인하게 된 진실은 대중의 무세계성(worldlessness)에 기반한 욕망이 한데 모여 통제를 원하게 되었고, 그러한 의사를 대리하는 신을 자처하는 존재로부터 세계가 실제 통제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상징하는 존재는 금빛으로 번쩍이는 성배의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주인공들은 이 거짓된 신에 맞서 또 다른 반역을 일으켜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 여기서 게임 제작진의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데, 3편과 4편에 비하면 선동적이라 해도 좋을 정도이다. <페르소나 5>에서 반복되는, 이전에서 없었던 이러한 코드는 어디서 나온 걸까? <페르소나 4>이후의 현실엔 크게 세 가지 전환점이 있었다. 첫 번째, 2009년 자민당이 다시 한 번 정권을 잃고 민주당이 집권하는 아주 이례적인 일이 일어났다. 두 번째, 2011년 도호쿠 대지진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났다. 세 번째, 2012년 아베 신조가 민주당으로부터 정권을 탈환해 다시 자민당 집권기가 열렸다. 아베 신조 정권은 1차 집권기(2006년)에 달성하지 못한 과제를 뒤늦게라도 확실하게 추진하겠다는 인상을 남기며 이런 저런 우파 지향의 의제를 밀어 붙였다. 그 결과 2015년에는 이른바 안보법제 논란으로 국회 주변에 12만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반대 시위가 일어나는 일까지 벌어졌던 것이다. 이는 일본 사회 및 시민운동의 특성에 비추어 보면 매우 이례적인 일로 당시 언론은 1960년 안보투쟁 이래의 55년만의 최대 규모 운동으로 이 사안을 다뤘다. 이것이 <페르소나 5> 발매 직전까지 있었던 일이다. 다들 반역을 외치는 <페르소나 5> 특유의 분위기가 현실의 어떤 부분을 반영한 것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상황은 또다시 변화되었다. 아베 신조의 장기 집권은 더 이상 없다. 현재의 기시다 후미오 내각은 아베 신조와 같은 강압적이고 일극지향적인 이미지를 갖지는 않는다. 지지율은 저조하지만 원내에서의 정치적 기반은 탄탄한 편이다. 일본 사회의 우향우는 지속되고 있지만 안보법제 폐지 투쟁 때와 같은 격렬한 반대 운동은 없다. 밖의 상황은 심상찮지만 적어도 일본 내의 분위기를 보면 당분간은 이러한 어딘가 불안하면서도 평온한 분위기가 이어질 것 같다. 바로 그러한 때에, 과거 그러한 시기를 ‘돌아보는 시선’으로 기억한 <페르소나 3>가 <페르소나 3 리로드>로 되돌아왔다. <페르소나 3 리로드>는 <페르소나 3>를 거의 그대로 현대에 되풀이 하려는 시도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페르소나 5>의 혁명은 실패했고, 우리는 그 이전으로 뒷걸음질쳐 온 것인가? 아니면. 또다른 현 시대에 맞는 혁명으로 나아가기 위한 징검다리로 과거의 유산을 활용하려는 것인가? 확실한 것은 누구도 이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페르소나 시리즈>는 여전히 새 작품에 대한 간절한 기대를 갖게 하는 독보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Tags: 일본, 정치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시사평론가) 김민하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시사평론가로 활동하지만 게임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게이머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냉소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돼지의 왕』이 있고,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우파의 불만』, 『트위터, 그 140자 평등주의』 등의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최근작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가 있다.
- 모험가들은 다시 고향을 찾을 수 있을까? : 게임과 노스탤지어
2015년 9월 1일 게임 개발자 론 길버트(Ron Gilbert)는 자신의 블로그에 ‘Happy Birthday Monkey Island(원숭이 섬 생일 축하해)’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다. 그가 1990년에 개발한 어드벤처 게임 〈원숭이 섬의 비밀〉의 25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글이었다. 그는 글의 마지막에서 〈원숭이 섬의 비밀〉을 함께 만들었던 당시의 팀과 ‘이 게임이 25년간 살아 있을 수 있게 해준 모든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 후, 오래전에 받은 한 통의 팬레터 사진1)을 첨부한다. 당시 12살이라고 밝히고 있는 크레이그 톰슨(Craig Thompson)이 그에게 보낸 것이다. < Back 모험가들은 다시 고향을 찾을 수 있을까? : 게임과 노스탤지어 02 GG Vol. 21. 8. 10. 편지와 절벽을 함께 떠올리며 2015년 9월 1일 게임 개발자 론 길버트(Ron Gilbert)는 자신의 블로그에 ‘Happy Birthday Monkey Island(원숭이 섬 생일 축하해)’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다. 그가 1990년에 개발한 어드벤처 게임 〈원숭이 섬의 비밀〉의 25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글이었다. 그는 글의 마지막에서 〈원숭이 섬의 비밀〉을 함께 만들었던 당시의 팀과 ‘이 게임이 25년간 살아 있을 수 있게 해준 모든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 후, 오래전에 받은 한 통의 팬레터 사진 1) 을 첨부한다. 당시 12살이라고 밝히고 있는 크레이그 톰슨(Craig Thompson)이 그에게 보낸 것이다. 게임을 재미있게 하고 있다는 말로 시작해서 당신처럼 훌륭한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다는 말로 끝나는 여느 팬레터 같지만, 사실 이 편지의 용건은 다른 데에 있다. “어떻게 하면 원주민들에게서 ‘안내자의 머리’를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거나 힌트를 줄 수 있나요(Could you please tell me or give me a hint on how to get the navigating head from the natives)?” 톰슨은 게임의 공략법을 구하기 위해 개발자에게 직접 편지를 쓴 것이다. 이 편지에서 모험은 단지 컴퓨터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게임의 주인공 가이브러쉬(Guybrush)가 해적이 되기 위해 모험을 떠나 아이템과 힌트를 찾고 장애물을 넘고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이 12살 어린이도 자신의 모험 중 맞닥뜨린 시련을 해결하기 위해 직접 힌트와 아이템을 구하고 있었다. 12살의 모험가 톰슨은 지금 어떤 어른이 되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다큐멘터리 〈내언니전지현과 나〉(2020)에는 아직도 ‘원숭이 섬’을 떠나지 못하는 몇몇 어른들이 등장한다. 1999년 론칭된 이후 시간이 흘러 이용자도 얼마 남지 않고 더 이상 업데이트도 되지 않는 게임 〈일랜시아〉에 접속하는 ‘내언니전지현(감독 박윤진의 게임 캐릭터)’과 그의 친구들이다. 그들은 〈일랜시아〉와 함께 했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며 “돌고 돌아 〈일랜시아〉를 다시 찾는다 2) " . 영화는 내내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로 가득 찬 현실 세계와 집단적 향수의 공간이 되어버린 게임 세계를 번갈아 비춘다. 그러다가 영화의 후반부에는 내언니전지현과 길드원들이 게임 맵의 절벽 앞에 다 함께 모여 차례로 유언을 남기고 그 아래로 뛰어내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죽지 않는 절벽 낙하는 이들에게 하나의 놀이 혹은 퍼포먼스인데, 어쩐지 이 낙하가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어떤 곳에 가닿기 위한 움직임처럼 보였다. 이제는 폐허가 되어버린 원숭이 섬에서, 그곳에 남은 최후의 어른들은 얼마간 슬프고 무모한 모험을 떠나고 있었다. 이 여정은 시간을 거스르고자 한다. 톰슨의 편지를 읽으며 절벽 앞에 서 있는 내언니전지현을 생각했다. 12살 톰슨으로 돌아가고 싶은 내언니전지현을 떠올리며 과거의 게임들이 다시 인기를 얻는 최근의 현상이 단지 플랫폼, 그래픽 스타일, 뉴트로 산업, 복고 열풍 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고 느꼈다. 왜 어떤 어른들은 ‘안내자의 머리’를 얻기 위해 직접 편지를 써야 했던 어린 시절 주변에서 서성대는가? 29살의 내언니전지현은 왜 더 이상 개발되지 않는 과거의 섬에 계속 남아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가? 우리는 왜 어린 시절의 모험담을 잊지 못하며 심지어 이미 퇴색해버린 모험의 세계로 다시 시간을 거슬러 모험을 떠나는가? 그때의 모험과 지금의 모험은 어떻게 다시 만나는가? * 다큐멘터리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 이미지출처: 네이버 영화 공식 스틸컷.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조국은 왜 향수병에 걸린 사람들에게는 동화 속의 나라가 되는가?” 3) 노스탤지어는 동시대 문화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들 중 하나다. 〈원숭이 섬의 비밀〉의 25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글 아래에 많은 사람들이 과거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적어놓은 댓글들, 어린 시절 접속했던 게임을 잊지 못해 다시 찾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오래전 유행가가 다시 순위 역주행을 했다는 기사는 우리에게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래전 문화, 예술, 그리고 미디어의 많은 부분이 복고, 레트로 열풍의 흐름 안에서 소개되면서 더 이상 그것을 경험한 적 없는 세대에게도 낯설지 않은 것이 되고 있다. 최근 〈슈퍼 마리오〉, 〈소니 더 헤지호그〉부터 〈크레이지 아케이드〉와 〈리니지 리마스터〉까지 수많은 옛날 게임들이 다시 사랑받는 것을 보면,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게임에도 해당되는 것이 분명한 듯하다. 이러한 현상에 보다 구체적인 세대 구분을 적용할 경우, 90년대에 오락실에서 게임을 했던 3-40대가 그 게임을 다시 찾는 경향은 ‘레트로’, 오래전 콘솔 게임과 비디오 게임에 대한 실제 경험이 없는 1-20대가 그 게임을 하나의 유행으로 즐기는 경향은 ‘뉴트로’로 해석되고는 한다. 이때 ‘과거의 게임과 음악과 영화와 물건들이 어떻게 다시 인기를 얻었는가?’ 질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은 그보다 ‘우리는 왜 낡고 조악하고 엉망진창인 과거의 것들에 노스탤지어를 느끼는지’ 질문하고 싶다. 왜 우리는 숱한 좋은 것들을 놔두고 다시 보잘것없는 것에 매혹되는지, 이를테면 더 그래픽이 뛰어난 다른 게임들을 ‘돌고 돌아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일랜시아〉로 돌아가는지’ 묻고 싶다. ‘과거는 어떻게 유행이 되었는지’가 아니라 ‘우리는 왜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지’, 이 글은 그것이 궁금하다. 노스탤지어는 일반적으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의미했지만 점점 그 대상이 구체적인 시공간으로서의 고향을 넘어 확대되어, 마치 고향과 같은 과거의 어떤 기억과 경험을 그리워하는 감정을 폭넓게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고향을 그리워하기 위해서는 고향을 떠나거나 고향을 잃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처럼, 노스탤지어의 감정에는 그 대상에 대한 상실과 결핍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다. 무엇에 노스탤지어를 느낀다고 말할 때, 우리는 하나의 고향으로서 해당 시공간, 기억, 경험을 이미 떠났거나 잃어버린 상태이다. 결국, 노스탤지어는 우리가 현재 무엇을 상실하고 결핍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과거뿐 아니라 현실과 미래와 연결되는 감정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공유하는 노스탤지어의 감정은 그들이 현실에서 느끼는 상실과 결핍을 반영한다. 우리가 현재 무엇을 상실하고 결핍했는지를 살피기 위해서는 노스탤지어의 대상으로서 ‘고향’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향은 사전적으로는 ‘태어나고 자라난 고장’을 의미하지만, 단지 지리적인 의미를 넘어 언어와 습관을 공유하는 집단 혹은 자신이 기원을 느끼는 어떤 추상적인 시공간이 될 수도 있다. 고향은 노스탤지어의 대상이 되는 고정된 기원과 정체성 그 자체를 상징한다. 따라서 노스탤지어는 정체성이 위기를 맞이한 순간에 사회적 현상으로 두드러진다. 범람하는 노스탤지어는 그 자체로 현대사회가 정체성의 훼손을 겪고 있음을 암시한다. 4) 오늘날 노스탤지어는 때로는 그 대상이 모호한 채로 느끼는 근원적인 ‘뿌리 뽑힘’, ‘집 없음’ 등의 감정이며, 이는 현대인들이 필연적으로 겪는 감정이기도 하다. 5) 〈내언니전지현과 나〉에서 주인공인 ‘나’(내언니전지현)가 때로는 ‘나’가 부캐(부 캐릭터)이고 〈일랜시아〉 속 ‘내언니전지현’이 본캐(본 캐릭터) 같다고 말할 때, 그리고 길드원들이 입시, 졸업, 취업, 결혼 등의 어려운 난관으로 가득한 현실에서는 얻을 수 없는 성취감을 얻기 위해 〈일랜시아〉를 다시 방문했다고 말할 때, 이 감정에는 ‘성취감이 가능한 곳으로서의 고향’인 ‘일랜시아’와 그 세계 속 ‘내언니전지현’에게서 뿌리를 느끼는 ‘나’의 불안이 씁쓸하게 개입한다. 도트 그래픽과 단순한 조작법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심지어 직접 플레이하지 않아도 숫자가 올라가는 이 허술하고 단순한 세계는 그 자체로 복잡하고 치열한 현실 세계에 대한 도피처일 뿐 아니라 대응물이다.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에게 과거의 초라한 세계와 그 세계에서 살았던 유년 시절은 이제 안온하고 편안한 고향의 모습이 되어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3-40대가 어린 시절 열심히 했던 슈퍼마리오 게임을 그리워하는 것, 10-20대가 슈퍼마리오 게임을 해본 적 없지만 해당 이미지와 플롯에 이유 모를 애착감을 느끼는 것이 세대의 특정한 경험으로 구분되어 생산과 소비의 관점에서 다르게 해석되기 이전에, 어떤 근원적인 노스탤지어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옛날 게임의 엉성한 세계가 우리 각자의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엉성함 그 자체가 오늘날 우리가 결핍하고 상실한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동화라는 가장 엉성한 세계, 그리고 그 동화의 주인공이 되는 것 어릴 적 우리는 영화, 음악 혹은 소설에서와 달리 게임 속에서 ‘직접’ 걷고, 움직이고, 말하고, 성취했다. 그런 의미에서 “게임은 다른 어떤 매체보다 노스탤지어를 가장 많이 불러일으키고, 다른 여가들보다 더 직접적이고 긴밀하게 그리움의 대상으로 데려다 놓을 수 있다. 우리는 (영화에서처럼) 악당을 물리친 영웅을 보았던 때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악당을 물리쳤던 순간을 기억한다” 6) . 다시 〈원숭이 섬의 비밀〉로 돌아가 보면, 우리는 모험가가 길을 찾는 장면을 보았던 때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험가가 되어 (편지를 쓰고 힌트를 얻어) 길을 찾는 순간을 기억한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감독인 조지 루카스가 만든 게임회사 루카스아츠의 〈원숭이 섬의 비밀〉은 1990년에 나왔지만 여전히 어드벤처 게임의 최고 걸작이라고 평가받는다. 19년 후인 2009년에 리메이크되며 많은 게임 이용자들과 스트리머들, 시청자들이 〈원숭이 섬의 비밀〉에 다시 찾기도 했다. 한편, 이 게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정말 그야말로 ‘엉성한 세계’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엉성함이란 예컨대 이런 것이다. 이 게임의 주인공 가이브러쉬 쓰립우드는 해적이 되고 싶지만 입만 살아 있는 캐릭터다. 그는 해적들과 검술 결투를 벌여 이겨야 하는데, 이때 승부를 결정하는 것은 검술 능력이 아니라 얼마나 말을 잘 받아칠 수 있는가의 정도이다. 이 세계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악당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침 뱉기 대회’를 치러야 하고, 여기서 녹색 침을 뱉기 위해서 녹색 술을 마셔야 하는데 이때의 공략법은 노란 술과 파란 술을 섞어 마시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실없는 농담과 엉뚱한 상상력은 모험의 성공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원숭이 섬의 비밀〉은 코믹 어드벤처라는 이름으로 천진하고 엉뚱한 규칙과 규범이 작동하는 세계를 만들어놓고 이용자는 그 안에서 모험을 떠나야 했는데, 8-90년대는 이러한 어드벤처(모험) 장르의 게임들이 가장 부흥했던 시기였다. 12살의 톰슨에게는 현실 논리의 바깥에 있는 이 ‘유치한’ 세계 속에서 ‘안내자 머리’를 찾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래서 톰슨은 직접 편지를 써서 힌트를 얻기로 한다. 실제로 모험을 떠나는 것이다. 그 시절의 수많은 톰슨‘들’은 스스로 그 얼토당토하지 않은 세계의 모험가가 되었다. “동화는, 신화가 우리의 가슴에 가져다준 악몽을 떨쳐버리기 위해 인류가 마련한 가장 오래된 조치들이 무엇이었는지 우리에게 알려준다.[...] 동화가 태곳적에 인류에게 가르쳐주었고 또 오늘날에도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가장 현명한 조언이 있다면 그것은 신화적 세계의 폭력을 꾀와 무모함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7) 성취가 쉬운 단순한 세계(〈일랜시아〉)와 엉뚱한 상상력으로 시련을 극복하는 세계(〈원숭이 섬의 비밀〉), 그리고 그러한 세계의 주인공이 되어 단순하고 엉성하고 허술한 것들에 몰입하고 있던 어린 시절은 ‘지금, 여기’와는 먼 곳에 동화로 남아 있다. 게임은 그 동화로부터 시작한다. 무모한 것으로 신화의 폭력을 해결하는 것, 그것이 가능한 세계가 게임이고 그것을 믿는 세계가 유년 시절이라면 어쩌면 게임은 필연적으로 유년 시절과 노스탤지어와 깊이 관계 맺는 것일지 모르겠다. 그 시절의 모험가였던 수많은 톰슨들은 그 조악하고 허술한 고향을 떠나온 지 오래됐지만 신화적 세계의 폭력, 현실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악몽에 대처하기 위해 다시 고향을 찾는다. 현실의 절벽을 피해 게임 속 절벽 앞에서 모인 어른들은 옛날 옛적 고향으로 가기 위해 아래로 뛰어내린다. 무모하고 무용하지만, 재밌는 모험이 될지도 모른다. 1) https://grumpygamer.com/monkey25 2) 김소미. (2020. 8. 13). ‘내언니전지현과 나’ 박윤진 감독 – 그 시절의 꿈과 열정은 어디로 갔을까. 씨네21. URL :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5976 3) Fodor, N. (1950). Variety of Nostalgia, Psychoanalysis, vol, 37. p25. 4) 이하림 (2020). 생경한 그리움 : 경험한 적 없는 것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잔재의 이미지. 미디어, 젠더 & 문화, 35(2), 189-243. 5) Smith, K. (2000), Mere Nostalgia: Notes on a Progressive Paratheory, Rhetoric & Public Affairs, Vol.3, No. 4,.505-527. 6) Hill, M. (2015. 11. 22). Nostalgia Is Running Video Games. The Atlantic. URL: https://www.theatlantic.com/entertainment/archive/2015/11/nostalgia-video-games/416751/ 7) Benjamin, W. 이야기꾼 :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작품에 관한 고찰. In 최성만 (역) (2019). 〈발터 벤야민 선집 9〉. 서울: 길. 448쪽.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시각문화연구자) 이하림 기억과 이야기와 이미지에 대해 연구하고 글을 쓴다. 공적 기억과 사적 기억이 교차하는 영상 작업에 관심이 있다. 경계에 놓여있는 것들, 정착하고 못하고 부유하는 존재들에 마음이 간다. 요즘은 머뭇대며 다가가는 것, 뒤돌아보며 걸어가는 것이 글과 생활의 방법인 것 같다고 생각 중이다.
- ‘너’의 가치를 소멸시키는 ‘우리’의 게임들 : 헤이즈라이트의 강제적 코옵 게임들에 관해
이 때, ‘나’에게 ‘너’는 교환 불가능한 대상으로 남는다. 이 교환 불가능성은 ‘너’가 게임을 특별히 잘해서 남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달성한 순간은 달성의 정도와 무관하게 영원히 감각으로만 남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너’가 아닌 다른 누구를 앉힌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감각을 대체할 수는 없게 된다. 이것이 코옵 플레이의 마술이다. < Back ‘너’의 가치를 소멸시키는 ‘우리’의 게임들 : 헤이즈라이트의 강제적 코옵 게임들에 관해 28 GG Vol. 26. 2. 10. 비디오 게임 메커닉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그럴싸한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종종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허드슨 소프트의 1983년 작 「바이너리 월드」를 떠올리곤 한다. 이 게임의 메커닉은 1인에 의한 비대칭성의 동시조작을 그 중심에 둔다. 게임의 스테이지는 좌우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 스테이지의 상단에만 협소하게 연결된 통로가 보인다. 플레이는 좌우의 두 캐릭터(패미컴 판이라면 펭귄)을 동시에 조작하는데, 양자는 Y축의 움직임은 공유하지만 X축의 움직임은 반대로 적용된다. 한쪽의 펭귄은 플레이어의 조작계 그대로 움직이지만, 반대쪽의 펭귄은 역전된 X축의 움직임을 가진다. 플레이어는 이렇게 의도적으로 흐트러진 두 조작계에 적응해가며 두 펭귄을 골인 지점에서 만나게 해야 한다. 두 캐릭터는 연인이라는 설정이며, 플레이어가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는 '사랑'이라는 감정이다. 게임의 메커닉은 명백히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지를 그 불편한 조작계로 체험시키고 있다. 「바이너리 랜드」는 1인 플레이 게임이지만 이 게임을 통해서 코옵 플레이라는 독특한 수용자성의 면모를 얼핏 들여다볼 수 있다. 코옵 플레이, 그러니까 '두 플레이어의 협업'이라는 개념에는 양자간의 어긋남과 불응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코옵 플레이의 핵심은 둘이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그 맥락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최초의 아케이드용 코옵 플레이 게임으로 알려져 있는 「파이어 트럭」 역시 전열차와 후열차를 각자 움직여 목적지까지 간다는 '어긋남'의 감각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플레이의 쾌감은 둘이 하나처럼 움직이는 것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의 움직임에 지나치게 간섭해 해결 불가능한 혼란이 발생하는 것을 전제한다. 두 플레이어의 놀라운 협응이 혼돈을 정지시킬 때에 쾌감은 발생하는 것이다. * 「바이너리 랜드」(1983)는 협응의 문제를 한 명의 플레이어에게 체험시킨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코옵 플레이의 메커닉, 아니 그보다는 코옵 플레이를 발생시키는 전제는 비디오 게임의 역사를 따라가며 점차 변화해왔다. 그 미묘한 변화는 둘의 ‘차이’를 얼마나 벌려놓는지의 문제와 관계된다. 예를 들어 닌텐도의 「마리오 브라더스」나 타이토의 「버블 보블」, 테크노스 재팬의 「더블 드래곤」 같은 아케이드 코옵의 대명사같은 게임들은 차이라는 개념을 극도로 좁혀놓는다. 이들이 언제나 '형제' 또는 '쌍둥이'라는 설정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여기에는 양자(1플레이어와 2플레이어)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어야 한다는 명제가 붙는다. 형제 또는 쌍둥이라는 설정은 그 동질성을 구태여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다. 말하자면 이 당시의 코옵 플레이는 협력성이라는 목표지향은 작동하고 있었을지언정 둘 사이의 불협화음은 오직 상황적 문제로만 제기되었다. 「마리오 브라더스」의 경우, 뒤집어진 적을 쳐내려는 찰나에 다른 플레이어가 그 적을 되돌려놓아 어이없게 사망하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연출되곤 했다. 이 때에 둘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이란 '나'라는 플레이어 역시 작동시킬 수 있는 수행성의 가능태로서 존재한다. 즉 이 사건들의 통제 불가능성은 '나'의 대행된 몸을 통해서 유추하거나 다시금 재현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의미다. 이런 전제를 경유하자면, 이 때 코옵 플레이의 대상인 두번째 플레이어, 이른바 '너'는 구태여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네'가 존재하기에 흥미로워지는 국면이 있기야 하겠지만, '내'가 게임을 올바르게 돌파하는 데에는 오히려 방해되는 면도 있었던 셈이다. 이 형태의 '너'는 소통이 가능하지만 한편으로는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도플갱어나 다름 없었다. 그러니까 차이는 오히려 그것의 필요성의 문제와도 결부되는 것 아닐까? '내'가 돌파할 수 없는 것을 '너'라서 돌파할 수 있게 되는 것. '나'의 방식만으로는 유추와 재현이 불가능한 것을 이루어주는 방법으로서의 '너'를 마주시키는 것이 변화의 명제였을 수도 있겠다. 전반적으로는 기능이 같지만 특수 공격에서만 차이가 발생하는 「서유항마록」 정도에 도달하면 플레이어로 하여금 '캐릭터를 통해 어떠한 해결법을 제시하겠다'라는 차이의 문제가 드러난다 [1] . 캡콤의 「파이널 파이트」 까지 온다면, '숙련된 내가 더 다루기 어려운 캐릭터를 선택해 너를 보조하겠다'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다름의 방식이 도래한다. 캡콤은 이런 탐구의 선지자이며 선구자다. 이 방식의 극한을 아케이드라는 공간에서 체험시킨 것이 바로 「던전즈 & 드래곤즈 : 섀도우 오버 미스타라」(이하 「SOM」)다. 이 게임에 등장하는 서로 다른 클래스는 서로 다른 조작, 기능, 해법, 필요를 지닌다. 게임을 진행하기 위해서 플레이어들은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 클레릭에게는 치료를 요구하고, 특정한 무기나 아이템은 다른 이의 기능을 위해 양보한다. 상자를 여는 캐릭터를 통해 변화하는 아이템의 다이내믹함은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결정과 연결된다. 이 때 중요한 건 플레이에 그가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다. 파티에 클레릭이 없다면 치료 마법을 요구할 수 없다. 매직 유저가 없다면 광역 마법을 통해 적을 일소하거나 보스를 빠르게 다운 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SOM」은 함께 플레이하는 타인의 존재가 소통의 방식을 바꾸는 중요한 체험을 준다. 「몬스터 헌터」 시리즈의 근간이 여기에서부터였다고 해도 그다지 과장은 아닐 수 있다. 동질성과 차이의 문제를 지나치면 그 다음 마주하게 되는 것은 필요성의 문제다. 차이의 발생과 필요성의 발생은 온건히 맞물리지 않는다. 클레릭이 있다면 치료를 요구할 수 있지만, 치료 마법은 게임 플레이의 충분 조건은 되더라도 필요 조건이 되지는 않는다. 내가 더 뛰어나면, 숙련되어 있다면, 적의 패턴을 잘 알고 있다면, 더 안전한 루트를 알고 있다면 '너'의 도움을 구태여 받을 이유는 없다. (물론 있는데 구태여 만류할 필요까지야 없겠지만 말이다.) 이제 '너'가 다르다는 사실은 충분히 인지되었다. 하지만 '너'가 필요하다는 문제가 근원으로 들어오지는 않는다. '너'는 여전히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문제 없는 상황이 된다. 그렇다면 '너'를 지우는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그건 공교롭게도 비디오 게임이 기술 기반의 매체라는 사실에서 나온다. 비디오 게임은 포커를, 바둑을, 보드게임을 혼자서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비디오 게임의 연산 처리 능력은, 때로 '너'의 필요성을 지우기 위해 동원된다. TT 게임즈의 레고 게임 시리즈는 이 문제에 있어서 가장 흥미로운 샘플이다. 이 시리즈에는 '두 개의 버튼을 동시에 누르기', '한 사람이 플랫폼을 만들어준 사이에 점프해 넘어가기' 같은 협력 기반의 퍼즐이 자주 등장하지만, 그 과정에서 구태여 인간인 '너'를 필요로 하진 않는다. 홀로 플레이하는 나에게는 그 모든 일들을 보조할 AI 서포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캐릭터는 버튼을 함께 눌러주고, 내가 점프하는 동안에 플랫폼의 형성을 유지시켜 준다. 그러고보면 「SOM」에도 여러개의 발판 스위치를 눌러 들어갈 수 있는 방이 있긴 하지만, 그 근처에는 언제나 '사람을 대신할' 갑옷상像이 준비되어 있었다. (어떤 플레이어들은 이에 더해 적 캐릭터를 이용해 버튼을 누르기도 한다.) *「레고 호빗」(2014)같은 레고 비디오 게임들은 AI를 보조를 통해 협력의 퍼즐을 돌파할 수 있다. 물론 비디오 게임이 꼭 '너'를 느끼게 해줘야 하는가부터 의문을 던질 수도 있다. 물론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에는 이미 ‘네’가 존재해버린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너’와 ‘나’를 어떻게 관계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더 논해볼 수 있다. 여기에는 이전까지 말한 두 가지 명제가 중요하게 작동한다. 그것은 첫째, 차이를 가질 것 그리고 둘째, 상대를 필요로 할 것이다. 이 두가지 명제 중 하나라도 부재하다면, 우리는 비디오 게임의 세계에서 '너'를 요구하지 않게 될 테니까 말이다. 따라서 이 모든 전제를 수렴한다면, 이 안에는 ‘나’와 ‘너’라는 관계의 문제가 따라붙는다. 즉, 1플레이어인 ‘나’에게 있어서 ‘너’는 무관계한 누군가가 되어서는 안된다. ‘너’는 필요한 협력의 존재로서 바로 ‘나의 플레이’라는 세계에 초대되어야 한다. 즉 ‘나’와 ‘너’가 함께 게임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일종의 사건이 된다. 오스트리아의 종교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세계를 맞이하는 사람의 몸은 두 종류의 근원어, ‘나-너’와 ‘나-그것’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부버는 ‘나-너’라는 근원어는 ‘나’라는 개념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존재해온, 우리의 본질에 가까운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나-그것’의 근원어로 세계를 바라보게 되며 이는 사뭇 운명적이다. 이 때, ‘나-그것’이라는 근원어는 내가 대상을 관찰, 계측, 수량화, 가치 매김 등으로 만드는 방향성을 지칭한다. 부버는 나를 둘러싼 세계의 형상과 흐름은 ‘나-그것’을 향해 가는 결정론을 지니기에, ‘나-너’에 대한 지향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물론 부버의 논의가 가진 거대함을 비디오 게임의 코옵 플레이에 적용하는 것이 상당히 어색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나-그것’이라는 근원어의 규정은 이상할 정도로 비디오 게임의 수량화된 세계를 감각하는 우리의 체계와 닮아있다. 그렇다면 비디오 게임에서의 ‘나-너’라는 관계, 대상을 ‘그것’이 아닌 더 본질의 무언가로 감각하고 존치시키는 방식에 대해서 더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헤이즈라이트와 강제적 코옵Mandatory Co-Op 헤이즈라이트의 ‘강제적 코옵Mandatory Co-Op’ 게임들, 「어 웨이 아웃」, 「잇 테익스 투」, 「스플릿 픽션」의 특징은 이러한 ‘나-너’라는 관계를 통해서만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 이것은 게임의 기초적인 메커닉을 도해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결을 가진다. 단순히 협력적 게임 플레이, ‘내’가 무언가를 할 때 ‘너’의 도움을 받는다는 경험의 문제만으로는 이 게임들을 전부 설명할 수 없다. 여기에서 도사리는 건 그보다는 더 명백한 조건이다. 이 게임들은 게임의 플레이를 위해 특정화된 ‘너’를 요구한다. 가장 알기 쉬운 조건은 ‘랜덤 온라인 매칭’의 비적용이다. 요제프 파레스는 이 게임들을 ‘소통이 가능한 누군가’와만 플레이가 가능하도록 조건짓는다. 온라인 플레이는 가능하지만 불특정한 누군가와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특정할 수 있는 누군가와 온라인으로 즐기겠다면, 프렌즈 패스를 이용해 아주 쉽게 두 사람이 함께 플레이할 수 있다. 이 ‘강제적 코옵’ 플레이의 핵심은 모두 이 조건과 결부되어 있다. 이 조건에서 발생하는 것은 강력한 소통의 가능성이다. ‘동시에 또는 연속된 특정 행위를 함께 해서 상황을 돌파한다’는 전제조건에서 특별한 것이 작동하지 않는다. 헤이즈라이트의 게임들은 이 행위를 ‘직접적 소통의 방식을 통해’ 돌파하는 것을 유도하고 있다. 물론 플레이어가 원한다면 온라인을 통해서, 때로는 모르는 사람에게 프렌즈 패스를 전달해, 함께 플레이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하나 둘 셋’의 구호를 던져서 함께 빠져나가야 하는 손뼉치기의 형식에서 어색함을 느낀다면 이 게임들의 지향으로는 좀처럼 나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보면 이 게임들은 플레이의 목적에 역전을 두고 있는 느낌도 든다. 그러니까 게임을 플레이 하기 위해 두 사람이 동원되기 보다는, 때로는 두 사람이 함께 하기 위해서 게임들이 동원된다는 바로 그 느낌 말이다. 특히 요제프 파레스가 이 게임들을 위해 준비해놓은 서사의 틀이 이런 감각을 확충시킨다. 파레스가 말했듯 이 게임들에는 각각의 ‘관계의 감정’이 코드처럼 준비되어 있다. 「어 웨이 아웃」은 신뢰, 「잇 테익스 투」는 사랑, 「스플릿 픽션」은 우정이다. 이 게임들의 서사는 이 관계 감정들의 실현 불가능 혹은 분열의 직전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치 두 플레이어 사이에서도 이 관계들이 예비되어 있다는 듯이. 그런 면에서 앞서 말한 역전의 느낌은 게임 플레이 내내 도사린다. 마법의 사각형Magic Rectangle 그래서 이 게임들을 플레이할 때 느끼는 감각에는 특별한 구석이 있다. ‘특정할 수 있는 누군가’라는 조건을 클리어 하고 나면, 함께 플레이하는 ‘너’와 게임이라는 매개를 통해 연결되는 듯한 느낌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현실의 ‘너’는 현실의 조건들과 매개되어 있기에 단순하게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함을 가진 대상이다. 하지만 「잇 테익스 투」를 매개한다면, ‘너’는 특정한 스테이지에서 ‘내’가 발사하는 못을 박아주는 망치가 되어준다. 못 만으로는 게임 내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매우 특별해진다. 스테이지의 구조에 따라서 ‘너’는 망치를 휘두르는 사람, 화염을 쏴주는 사람, 중력을 거스르는 사람이 되며, ‘나’ 혼자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함께 해결해주는 둘도 없는 존재가 된다. 그럼에도 더 특별한 것은 이것이 어떠한 ‘롤플레이’의 연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잇 테익스 투」를 플레이할 때, 조준에 자신이 없는 파트너가 ‘나’에게 못의 역할을 넘겨주고 자신은 망치의 역할을 가져간 경우가 있었다. 우리는 순식간에 코디와 메이의 입장을 역전시켰지만 그로 인한 혼란은 그다지 겪지 않았다. 즉 우리에게 있어서 누가 코디이고 누가 메이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너’가 아닌 다른 이가 나에게 코디 또는 메이가 되어줄 수는 없었던 것일 뿐, 우리는 우리의 필요에 따라 우리를 매개하는 ‘대역의 몸’을 바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스플릿 픽션」(2025)을 플레이 하다보면 서로의 특기를 따라 캐릭터를 교체하는 경우가 생긴다. 따라서 여기(=플레이의 장소)에는 4개의 몸이 있다. ‘나’, ‘너’, ‘리오/코디/미오’, ‘빈센트/메이/조이’라는 몸들. 실제의 몸과 디지털의 몸은 각각 묶음 쌍이 되어 서로를 교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실제와 디지털의 관계라면 언제든지 서로를 교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그리고 ‘리오/코디/미오’와 ‘빈센트/메이/조이’가 각별해지는 만큼 실제의 몸들도 그러한 가능성을 동시에 지니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결과물로서의 컷씬을 감상하며 ‘우리’의 성취와 분열 가능성에 대한 연장된 소통을 나눈다. 이 안에는 외부와의 교환 불가능한, 내부에서만의 한정된 교환을 허가하는 닫힌 체계가 발생한다. 요한 하위징아의 단어를 전유하자면, 이는 ‘마법의 사각형’이다. 이 닫힌 사각형 내부는 정말로 제의적이다. 디지털의 몸이 ‘함께’ 체험하는 것은 미묘하게도 ‘우리’가 함께 체험하는 감각을 준다. ‘우리’가 함께함의 기능을 증가시킬 수록, 디지털의 몸이 나아가는 ‘함께’도 점차 효과적으로 변모한다. 디지털의 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들은 감상의 대상이면서도 ‘우리’의 관심사가 된다. 즉, ‘우리’는 디지털의 몸을 매개하며 현실의 동시적 행위를 체험함과 동시에 디지털의 몸이 진행하는 서사를 감각한다. 사각형 안에서 네 개의 꼭짓점은 서로를 ‘그것’으로 인지하지 않는 관계적 울타리를 짓는다. 그렇기에 「어 웨이 아웃」의 마지막 부분, 빈센트의 배신과 대립의 구성은 상당히 이질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Gamecloud의 닉 밸런타인Nick Ballantyne은 이 게임의 후반부에 대해 《The What, Why & WTF: A Way Out’s Ending Sucked》 [2] 라는 강력한 제목으로 비판한다. 이런 비판은 대체로 강한 협력적 체계를 갑작스레 대립 구조로 바꿔 불편함을 야기했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하지만 마법의 사각형의 구조로 본다면 조금 관점이 달라진다. 이 게임에서 빈센트가 배신한 대상이 디지털의 파트너인 리오만이 아닌 것이다. 그는 현실의 ‘두 몸’ 까지도 배신한 것이 된다. (필요에 따라 디지털의 몸을 서로 바꿨을 수도 있는) ‘우리’는 그것을 조작하는 와중에도 빈센트의 진위와 진심을 알지 못했다. 이것은 규약의 위반이며, 사각형의 마법을 깨어버릴 저주다. 이후의 작품들인 「잇 테익스 투」와 「스플릿 픽션」이 주인공들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심어놓을지언정, 다른 ‘셋’을 배신하지 않도록 구성하고 있는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마법의 사각형은 비디오 게임이라는 ‘그것’의 세계에서 ‘우리’를 확고히 만들 수 있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사건이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 예찬」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 웨이 아웃」(2018)의 후반 전개가 주는 파격적인 배신감은 역설적으로 ‘마법의 사각형’의 존재를 확실히 알린다. “예컨대 이런 것입니다. 하나가 아닌 둘에서 시작되어 세계를 경험하게 될 때, 세계는 과연 무엇일까? 동일성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차이로부터 검증되고, 실행되고, 체험된 세계란 과연 무엇일까? 저는 사랑이란 바로 이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 좀 더 솔직히 말해 차이의 관점에서 시련을 영위하는 것에 관여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에 시작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포함시키는 그런 계획입니다.” [3] 따라서 차이는 전제조건이어야 하지, 규약의 위배를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오직 알려진 다름만이 다름으로 인정될 때에야 ‘우리’는 코옵이라는 사건과 마주할 수 있다. 가치없는 ‘너’와 마주하는 순간으로서 물론 이러한 규약의 힘과 에너지가 헤이즈라이트의 게임들에게서만 나오지는 않는다. 「킵 토킹 앤 노바디 익스플로드」나 「더 패스트 위딘」, 「레고 보이저스」같은 게임들 역시 특정화된 대상으로서의 ‘너’를 소환한다. 이 게임들에서 무엇인가를 달성하고, 함께 손뼉을 치고 기뻐할 때 ‘너’는 그 순간 특별한 대상으로서 존재한다. 부버는 ‘그것’의 세계에서 우리가 ‘너’를 느낄 수 있는 방법은 ‘너’로 영원히 존재하는 종교적 대상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코옵 플레이를 통한다면, 일시적으로나마 ‘너’를 감각하는 것이 가능한지도 모른다. 이 때, ‘나’에게 ‘너’는 교환 불가능한 대상으로 남는다. 이 교환 불가능성은 ‘너’가 게임을 특별히 잘해서 남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달성한 순간은 달성의 정도와 무관하게 영원히 감각으로만 남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너’가 아닌 다른 누구를 앉힌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감각을 대체할 수는 없게 된다. 이것이 코옵 플레이의 마술이다. 앞서 언급한 조건들, 차이를 가질 것과 필요로 할 것이 만족된다면 특별한 ‘우리’가 탄생할 조건도 될 수 있다. 대체불가능성의 탄생이다. 빌럼 플루서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타자인 너는 내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죽으면 내가 너에 관하여 어떤 손실을 입는 것이 아니라 너의 죽음을 통해 모든 사물들이 가치를 잃는 것이다. 사물들이 가치를 지니는 것은 내가 그것들을 교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그것들을 교환하는 이유는 내가 네 안에서 나를 알아보기 때문이다. 나의 타자인 너는 모든 가치의 무가치한 기반이다.” [4] 우리는 삶에서 ‘가치없는 너’를 얼마나 경험할 수 있을까? 공교롭게도 나와 다른 ‘너’가, 게임의 진행을 위해 필요한 존재가 될 때에 우리는 교환 불가능한 경험으로서의 ‘우리’를 맛볼 수 있게 된다. 비디오 게임이라는 필요성의 세계가, 그러니까 ‘그것’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비로소 느낄 수 있다는 아이러니야 말로 ‘우리’가 ‘함께’ 게임을 하는 이유가 된다. 플루서는 이어서 ‘나’와 ‘너’는 죽을 수 있을지언정, ‘우리’는 불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의 게임은 불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옵 플레이는 비디오 게임만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축복이 되리라. * 통신을 주고 받는 「레고 보이저스」(2025)의 두 주인공들 [1] 「서유항마록」의 세 플레이어 캐릭터는 기초적인 조작계를 공유하며, 어느 정도의 능력치 차이를 가진다. 하지만 일종의 특수 공격인 대금단大金丹을 소모하는 공격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2] https://gamecloud.net.au/features/opinion/a-way-outs-ending-sucked [3] 알랭 바디우 「사랑 예찬」, 조재룡 역, 도서출판 길(2010) [4] 빌럼 플루서 「사물과 비사물」, 김태희·김태한 역, 필로소픽(2023)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평론가) 이선인 만화와 게임, 영화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합니다. MMORPG를 제외한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클리어가 라이프 워크입니다. 스팀덱을 주로 사용합니다.
- 필연적으로 실패하지만 계속되는 것,
선택을 위해 제시되는 두 개의 분기점은 결국 실패하지 않는 삶, 매끈한 하나의 서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선택은 불가피하다. 오히려 굴절된 한 분면만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가 그 선택이 충실한 것임을 간절하게 희구하게 만드는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 Back 필연적으로 실패하지만 계속되는 것, 21 GG Vol. 24. 12. 10. 모든 미디어는 동시대에 영향력을 미치는 다른 매체들을 상호 참조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게임 역시 마찬가지다. 초창기 아케이드 게임기를 통해 구현된 게임과 비교해본다면 콘솔이나 PC를 통해 플레이할 수 있는 지금의 어드벤처 게임은 동일한 영역에서 다루기 어려울 정도다. 하나의 사(史)를 기술할 수 있을 만큼 개별적인 영역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게임은 각각의 장르적 특성에 따라 게임 디자인을 비롯한 재현적 특징과 이에 따른 플레이 방식이 상이하게 분화됐다. 이 과정에서 게임은 다른 시각 중심의 미디어 기법을 적극적으로 재매개(remediation)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손쉽게 떠올릴 수 있는 시네마틱 트레일러에서 자주 활용되는 영화의 컷 분할이나 카메라 기법부터 드라마 시리즈를 차용한 에피소드식 전개를 서사를 구성하는 큰 축으로 사용하는 것까지 그 예시를 상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앞서 거론된 미디어들보다는 드물지만 보다 이전부터 근대를 상징하는 기술이자 매체였던 대상, 바로 ‘사진’을 재매개하는 방식을 통해 주요 사건을 전개하는 게임도 존재한다. 돈노드의 대표작 가 그러하다. 블랙웰에 재학 중인 고등학생 맥스는 5년 만에 혼자 돌아온 고향에서 적응하는 일이 버겁게 느껴진다. 클로이와 재회하기 이전까지 그녀의 최대 관심사는 사진 공모전에 자신의 작품을 제출할 것인가 여부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살인 사건의 목격자가 되고 나서 맥스의 세계는 단절되었던 우정과 관계의 회복, 학교 내 커뮤니티에서 초래되는 약물을 포함한 폭력의 문제, 나아가 지역 내 실종사건까지 급속하게 확장된다. 지역 유지인 가문 덕분에 교내에서 권력자로 군림하지만 집에서는 무시당하는 네이선은 그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우발적으로 드러나는 폭력적인 성향을 통해 보여준다. 그 네이선이 총기로 위협하다 살해한 대상이 자신의 친구이자 이사하면서 관계가 단절된 클로이라는 것을 맥스는 시간을 돌려 그녀를 구한 뒤에서야 깨닫는다. *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는 특정한 관점과 초점을 맞출 대상을 선택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맥스가 찍은 파란 나비는 의 시발점이자 선택의 종결을 의미하는 중요한 상징으로 활용된다. 결정적 실수나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 사건을 동일한 시간선의 과거를 다시 불러오는 방식으로 수정하고자 하는 상상은 너무도 흔한 클리셰가 되었다. 다만 몇 번이고 반복해서 특정한 장소와 시간을 소환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세이브’, ‘로드’라는 게임 디자인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일찍이 아즈마 히로키(東浩紀)부터 요시다 히로시(吉田寛)에 이르기까지 게임의 특수한 재현 양상이 다른 미디어에 미친 영향력에 대한 지적은 유구하다. 게임이 다른 미디어를 재매개하며 발전한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 웹소설, 애니메이션 역시 게임을 재매개하며 새로운 방식의 서사를 찾아냈다. 에서 시간을 조절하는 맥스의 능력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특정한 국면을 분절적으로 저장하고 다시 불러오거나 실패한 과거를 성공한 현재로 덮어쓴다는 게임의 독특한 시간 재현 방식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을 되돌리거나 정지시키고 특정한 국면의 시간선에 자신을 위치시킬 수 있음에도 맥스의 이능은 전능하지 않다. 그것은 시간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붙들고자 하는 이능이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도 사진을 매개로 하고 있으며 사진이 갖는 매체적 특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맥스가 자신이 찍힌 사진을 통해 사진이 포착한 시간의 한정된 공간 일부에 위치한 자신의 행위를 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세 번째 에피소드인 ‘카오스 이론’ 중에서도 후반부다. 클로이는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대마를 피우며, 트레일러에 거주하는 마약상에게도 협박을 받는 문제적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이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정서적 결핍이라 생각한다. 맥스가 도달한 시간선은 바로 그 클로이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기 직전 집을 나설 때다. 사진이 포착한 좁은 공간 내에서 차키를 숨기는 일에 성공한 맥스는 클로이의 아버지가 사망하는 사건을 막는다. 그러나 13살의 맥스가 저지한 사고 이후 18살의 맥스가 되어 마주한 새로운 현재는 전신 마비로 움직이지 못하게 된 클로이와 대면하는 일이었다. 는 맥스의 시점에서 선택한 결과가 과거, 현재, 미래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을 지문을 통해 지속적으로 환기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특정한 시간과 한정된 공간에 자리한 인간은 자신의 선택이 총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이 재현을 위한 도구로 캔버스가 아닌 사진기를 선택했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다. 사진은 결국 특정한 앵글을 통해 제한된 대상의 부분을 보여주는 결과물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의 주체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 그것은 어떤 대상을 선택하고 무수한 상황 속에서 특정 국면만을 포착하는 하나의 시선을 보여주겠다는 의지를 반영한다. 동시에 분절된 샷(shot)은 결코 인간이 전지적일 수 없으며 파편화된 특정 장면을 통해 이어놓은 느슨한 인과가 늘 그 밖의 다른 균열을 배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진의 매체적 특성은 어드벤처 게임의 수색 혹은 탐사와도 맞물린다. 플레이어는 게임 내 서사가 진행되는 시간의 흐름과는 별도로 특정한 상황에서 정지된 시간과 공간에 위치한다. 다수의 선택지를 대면하기에 앞서 판단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탐색은 맥스의 이능과 게임이 디자인한 플레이어의 권력을 중첩시킨다. 플레이어 아울러 맥스는 판단을 지연하거나 혹은 선택을 번복하는 방식을 통해 더 나은 경로를 찾고 자신이 계획한 시간선에 도달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은 지향점이다. 특정한 국면에서 수행되는 서사와 탐사는 가능성의 다른 지점들의 내적 규모를 아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접한 유형을 통해서만 타인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모든 면모를 알 수 있는 일은 매우 어렵고 사실 불가능하다. 클로이가 실종자 몽타주를 붙여 가면서 애타게 찾고 있던 레이첼 역시 탐색을 거듭하다 보면 클로이가 진술한 친구 레이첼과는 다른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교사 제퍼슨과 내연 관계였다는 소문, 마약상 프랭크와 연인에 가까워 보이는 정서적 유대를 가졌던 과거는 클로이가 아는 레이첼과는 다른 단면을 보여주는 예다. 블랙웰을 다니는 누구라도 그를 싫어할 것이라 평가받는 클로이의 양부 데이빗은 암실에 감금된 맥스가 탈출하는 데 일조하는 결정적인 활약을 한다. 비록 그가 직업 군인이었던 시절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고압적인 인물이라 할지라도 클로이를 염려하던 마음만은 진심이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그의 강박에 가까운 조사와 수집, 수사를 통해 뒤늦게 증명된다. 그렇기에 (플레이어와 맥스 모두를 포함한) ‘나’의 현재적 판단은 게임이 진행될수록 쉽지 않다. 불확실하게 알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의 선택과 번복이 계속될수록 시간선을 리셋하는 것에 대한 리스크는 커지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은 그럼에도 선택해야 한다는 불안감과 책임에 따라오는 무게를 동반한다. 의 탁월한 지점은 마지막 선택을 남겨둔 맥스의 ‘악몽’ 부분의 묘사에 있다. 게임은 이제 플레이 문법의 관성을 비튼 메타 게임도 그 수를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특정한 서사적 클리셰를 누적해왔다. 친구 혹은 연인, 부모님과 같이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막기 위한 선택과 분투는 익숙한 서사다. 그러나 대화가 단절되어 멀어졌다 5년 만에 재회한 친구를 위해 분투하는 맥스의 내면은 어떨까? 클로이와 만난 일주일 간의 맥스는 분명 이전의 자신과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관계는 누구 하나의 충실함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클로이는 질서와 권위를 무시하고 선택을 주저하지 않는 인간상이다. 동시에 몇 되지 않는 인간관계에 정서적으로 크게 의존하는 불안정한 청소년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악몽이 맥스에게 보여주는 클로이는 그녀의 미숙함을 조롱하고 맥스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맥스와의 관계 이상의 유대를 과시한다. 악몽은 자신의 충실성이 배반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인 셈이다. 우리는 결코 타인의 내면을 알 수 없다. 다만 짐작할 뿐이다. 거듭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간절하게 살리고 싶어 했던 클로이와의 관계가 아카디안 만을 떠나서도 지속될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반복되던 블랙웰에서의 일주일이 그들의 가장 예외적인 순간일 수도 있다. 선택을 위해 제시되는 두 개의 분기점은 결국 실패하지 않는 삶, 매끈한 하나의 서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선택은 불가피하다. 오히려 굴절된 한 분면만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가 그 선택이 충실한 것임을 간절하게 희구하게 만드는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성균관대학교 강사) 홍현영 패미콤을 화목한 가족 구성원의 필수품으로 광고한 덕분에 게임의 세계에 입문했다. <저스트댄서> 꾸준러. 『81년생 마리오』, 『게임의 이론』, 『미디어와 젠더』 등을 함께 썼다.
- 게임과 데이팅 세계
사랑은 일상적인 곳에서 온다. 그리고 그 일상은 현재 ‘디지털화’되었다. 연애관계의 돌입과 사랑의 속삭임을 우리는 ‘가상적으로, 디지털로, 플랫폼을 통해’ 수행(play)하고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보이는 관심은 인스타그램의 DM으로, 페이스북의 댓글로, 카카오 톡의 메신저로 꾸준히 접속하여 수치화된다. < Back 게임과 데이팅 세계 16 GG Vol. 24. 2. 10. 욕망의 수치화에 관하여 기본적으로 소개팅을 하다보면, 첫 만남 이후 관계 설정을 위한 만남의 횟수에 어느 정도 제한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소개팅 이후 가볍게 혹은 종종 계속해서 관계를 정의하지 않고 상대와 만나기란 어렵다는 뜻이다. 소개팅은 ‘연애’를 목적으로 한 만남이고, 이 때문에 첫 만남에 애프터를 신청할 것인지, 그리고 애프터 이후 몇 번의 만남 뒤에 공식적으로(officially) 연인관계로 돌입하게 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기준이 존재할 가능성이 의외로 높다. 이처럼 우리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떠올릴 때 ‘굳이 정의하지 않고 넘어가도 될 만큼 서서히 스며드는 애정의 관계’라는 것은 의외로 많지 않다. 앞서 언급한 소개팅의 법칙(!)도 마찬가지고, 의외로 친구 관계에서도, 더 나아가 아주 관습적이라 일컫는 결혼도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랑이라는 관계 혹은 감정을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대체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하면 연애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어쩌면 반대, 즉 연애를 해야만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많은 한국 드라마에서 (이성애)연애의 완결은 마치 결혼인 것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현실의 우리에게는 수많은 형태의 (굳이 게임적 용어로 이야기하자면 ‘선택지’의) 사랑이 존재한다. 1) 가족 간의 사랑 2) 친구 간의 사랑 3) 연애 파트너, 즉 섹슈얼한 대상으로서의 사랑 4) 상대방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랑(짝사랑으로 주로 표현되는) 등. 생각보다 사랑의 모양새는 다양하고, 우리는 이를 정확하게 정의내리지 않으면서도 모순적으로 상대적 기준을 통해 수치화하고 있는 미디어 환경에 놓여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게임, 특히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 만들어내는 사랑의 형태는 어떤 방식으로 재현되고 있는지 눈여겨보고, 이것이 과연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무엇보다 현재 욕망의 수치화가 높은 단계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판단되는 미디어 환경 내부에서 인간의 일상적 ‘플레이성’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쩌면 사랑을 게임을 통해 인지했거나, 이미 게이미피케이션이 고도로 진화된 상황에서 현실의 사랑을 진행 중일 수도 있다. 잘 생각해보자. 그렇지 않은가. 이미 사적/감정적인 대상이 모두 미디어에서 재현되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이미 수치화한 상태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내 메신저에 응답하는가. 사귀는 사이에서 하루에 전화는 몇 통을 하는지, 사랑하는 사람의 소셜 미디어 팔로우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말이다. 연애시뮬레이션 게임의 사적인 플레이 역사 : 사랑을 게임으로 배웠나요? 이 글을 쓰고 있는 연구자 본인은 시스젠더 여성이고, 남성애자에 가깝다. 그러나 십대 때 본인이 접근할 수 있었던 다수의 연애시뮬레이션 게임은 ‘게임 주체’가 생물학적 남성으로 고정되어있고, 이 남성이 다수의 여성을 공략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접했던 게임이 바로 ‘동급생’, ‘두근두근 메모리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게임들을 진행하면서 연애시뮬레이션 안에서의 ‘연애’의 전형을 배웠다. 예를 들어 첫인상에 상대방의 특성 1) 을 파악하고, 그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대화를 진행할 것인가에 대한 것들이 그랬다. 특히 이러한 연애시뮬레이션은 ‘첫만남’-‘대화를 통해 친밀도를 높이고’,-‘공략대상이 원하는 모습에 맞추어 능력치를 개발한 뒤’-‘퀘스트(이벤트)를 충족시켜’‘엔딩을 맞이하는’ 루트를 탔다. 물론 나는 남성을 성적 대상으로 두는 남성애자에 가까운데, 이 당시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둔 연애시뮬레이션이 어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내가 열광했던 '프린세스메이커'를 플레이하면서 느꼈던 감정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90년대 연애시뮬레이션은 게임의 특성상 육성 시뮬레이션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는데, 여성 게이머인 나에게 플레이는 관습적인 것에 가까웠고, 이를 통해 ‘목표’를 성취한다는 점은 똑같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러한 남성 주체 중심의 육성-연애시뮬레이션 게임은 나의 게임 플레이 성향을 ‘관조’에 가깝게 만들기도 했다. 다시 말해, 연애시뮬레이션이 개념적으로 정의하는 연애관계에 이입하기보다 사랑에 대해 ‘관조적’일뿐만 아니라 ‘제 3자’의 위치에서 ‘관음’할 수 있는 주체에 더욱 가까웠단 뜻이다. 그러다 오토메 게임 2) 이 발매되기 시작했다. 이는 육성-연애시뮬레이션에 열광하는 많은 여성 게이머들이 어느 정도 3) 욕망하고 원했던 게임 텍스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오토메 게임은 외적 4) 으로 ‘시스젠더 헤테로 여성’을 게임 주체로 하는 여성향 게임으로, 이 중에 한명은 너의 타입이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여성이) 남성들을 공략하는 텍스트 기반의 게임으로 볼 수 있다. 사실 미연시(미소녀연애시뮬레이션게임)의 이성애 기반의 성별반전으로 아주 간단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여기 등장하는 남성들은 매우 전형화된 카테고리로 나뉠 수 있는데, 이것은 결국 이후 유통되는 많은 오토메 게임, BL(Boy’s Love) 게임, 혹은 텍스트 기반의 라이트 노벨성이 짙은 게임의 남성 공략 캐릭터를 정형화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후술할 체리즈의 ‘수상한 메신저(2016)’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정형화된 남성 캐릭터 선택지를 내어놓는다. 1) 연상의 로맨티스트(다정캐) 2) 모태솔로에 순수 연하(햇살캐) 3) 츤데레(광공캐) 4) 히든 캐릭터(사연캐) 등이 바로 그것이다. 오토메 게임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후지쯔에서 제작하고 1998년 발매되었던 '판타스틱 포츈'이다. 이 게임은 놀랍게도 국내에서 정발되어 일본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많은 팬덤을 양산해냈다. 이 게임은 초반 선택할 수 있는 주인공이 3명이다. 육성 시뮬레이션이 여성 게이머들에게 매력적인 플레이 요소가 되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이 게임은 남성 캐릭터를 연애적으로 공략하면서 자신이 선택한 메인 캐릭터를 육성해야하는 이중고(苦)를 겪어야 했다. 무엇보다 이 주인공 중 한명은 성별이 육성 방향에 따라 달라지는 중성인 존재 5) 가 섞여 있다는 것이 독특했다. 이처럼 연애+사랑의 루트를 타는 게임은 1) 캐릭터와 서사 2) 그리고 이 캐릭터와 서사에 접근하는 플레이 방식에 따라 진화하게 되는데, 이 당시에는 '판타스틱 포츈'처럼 미형의 남성을 공략하는 ‘여성’ 캐릭터, 그리고 이 캐릭터를 이 남성들이 원하는 이상향에 맞추어 ‘육성’해야 하는 플레이가 다수를 차지했다. 이러한 캐릭터와 플레이 방식은 이 게임들이 타겟팅으로 삼았던 여성 주체들이 게임에 몰입할 때, 플레이 주체로서 주인공에 자신을 동일시하기 보다는 앞서 언급했던 ‘관조’적 성향의 플레이를 지속적으로 하게 만드는 기제로 작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여성 게이머들은 이 세명의 주인공들을 돌아가면서 플레이하고, 자신과 동일시한 캐릭터를 찾아냈을 수도 있지만(그러면서 자연스레 남성 캐릭터들을 유사남친의 대상으로 바라봤을 수도 있다), 이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다시 말해 전지적 플레이어 시점으로 이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읽어내기만’했을 가능성 또한 존재 6) 한다. 특히 세 명의 주인공은 얼굴이 전부 드러나 있고, 그 캐릭터를 육성하면서 마치 케어링을 하는 제 3자적 인물로서 플레이어들이 그려지는 것은, 게이머가 그 서사 안이 아닌 밖으로 자신을 위치 지으며 이 게임을 플레이할 가능성이 더 높은 요소들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처럼 사랑은 하나의 게임에서도 단 하나로만 정의되지 않는다. '판타스틱 포츈'은 자식 같은 세 명의 메인 캐릭터, 그리고 그 대상 자체에 몰입하는 나, 동시에 그들을 짝을 지어주기 위한 제 3자(즉 관계성에 몰입하는)로서의 나 사이에서 연애와 사랑을 저울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일상적인 곳에서 데이터화된다. : 디지털 로미오적 행태 여성향 게임이 확산되기 시작한 시점은 여성게이머들이 대중적으로 게임에 접근할 수 있는 시점과 맞물리는데, 그 시기가 바로 개인화된 미디어의 확산, 즉 휴대폰 플랫폼으로 게임이용이 확산되기 시작한 때다. 그 당시 한국에서 만들어진 게임 중 하나가 체리즈의 ‘수상한 메신저’다. 이 게임은 텍스트 노벨처럼 만들어진 전형적인 여성향 게임인데, 게임 타이틀에도 반영되어있듯 메신저를 기반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특성을 갖는다. 이 게임은 핸드폰으로 플레이를 하기 때문에 전화를 받는 상황이나 메신저에서 메시지를 주고 받는 방식이 실제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일상적인 메시지 주고받기와 전화통화를 게임 어플리케이션 내에서 진행이 가능하도록 되어있어서, 이전까지 제 3자의 전지적 플레이어 시점 방식의 이야기 진행이 아닌 강력한 자기 동일시 기제를 게임 안에 포함하고 있다. 이런 방식 자체는 나에게 데이팅 기술(Technology)에서 상대방이란 ‘기계’ 혹은 ‘게임 그 자체’일수 있겠구나를 알려준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앨피 본(Alfie Bown)이 자신의 저서인 <게임, 사랑, 정치>(2022/2023)에서 서술했듯 “연애 시뮬레이션에서는 실제 대상과 상상적 대상의 은유적 대체가 실제적이고 분명하게 구현(182)” 된다. 실제로 나는 게임을 진행하면서 등장인물(상대방)들에게 무작위로(물론 시스템화되어있다는 점에서 완벽한 무작위는 아니지만) 걸려온 전화를 받았고, 받지 못할 때마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그도 그럴 것이 상대방과의 채팅이 끝나고 나면 풀 보이스로 랜덤 전화가 걸려온다. 그리고 모든 시간대마다 전화 내용이 다르다. 심지어 새벽에도 온다. 마치 구 남친의 ‘자니’와 같은 순간처럼). 이러한 일상적 대화의 기술은 누군가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갖게 만드는, 혹은 사랑이란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수행하는 보편적인 상황이다. 이것이 가상의 게임엔진이라 할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기술이 감정을 확장하는(물론 이것이 사랑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을지라도)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다만 내가 마주한 것은 상대방이 아닌 기계였다. 만질 수 없어도, 바라보지 않아도, 무척이나 ‘생생한 ’기계. 실제로 이러한 감각은 현재 아이돌 팬덤들이 아이돌과의 메신저로 대화를 진행할 수 있는 위버스나 버블 7) 서비스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과 게임의 상관관계 사랑은 일상적인 곳에서 온다. 그리고 그 일상은 현재 ‘디지털화’되었다. 연애관계의 돌입과 사랑의 속삭임을 우리는 ‘가상적으로, 디지털로, 플랫폼을 통해’ 수행(play)하고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보이는 관심은 인스타그램의 DM으로, 페이스북의 댓글로, 카카오 톡의 메신저로 꾸준히 접속하여 수치화된다. 우리가 욕망하는 사랑이 데이트 상대와의 눈맞춤인지, 아니면 친구와의 심도 깊고 즉흥적인 대화인지, 아니면 게임의 보상처럼 메시지 알림 소리를 울리는 버블의 인터페이스 그 자체인지 우리는 이제 알기 어렵다. “사랑과 욕망은 우리가 그것들을 경험하는 매체에 너무도 깊이 얽혀있다(Alfie Bown, 2022/2023, 225)”. 사랑은 수치화되었다. 어쩌면 이미 오래전부터 그랬을지 모른다. 이것이 디지털 공간에 편재되었을 때, 게임은 빠르게 흡수해 텍스트로 옮겨냈고, 동시에 현실의 사랑은 이미 게임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게임으로 사랑을 배웠고, 그래서 어느 정도 관조적인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빠져있는 사랑. 8) 나는 이미 그렇게 습득한 사랑을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나의 가상의 최애(feat. '플레이브' 남예준)를 위해, '풍화설월' 9) 의 주인공(feat. 금사슴반 클로드)들에게 이미 퍼붓고 있다. 이 때문에 의외로 현실세계의 연애와 사랑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느낌마저 든다. 참고문헌 Alfie Bown(2022). Dream Lovers: The gamification of Relationship. Pluto Press; London. 박종주역(2023). 게임, 사랑, 정치. 시대의창; 서울. 1) 이는 지금까지의 많은 연애시뮬레이션 게임에서도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한데, 대부분 연애시뮬레이션에서 비주얼(즉, 캐릭터 디자인)은 그 캐릭터의 특성을 반영하여 제작되고 이 때문에 외모는 공략법과도 깊이 연관되어있다. 실제로 연애시뮬레이션의 완결성은 비주얼이 팔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여성향 게임에서의 비주얼은 대체적으로 남성향 게임과는 달리 특정 신체를 부각하기보다, 얼굴과 목소리에 집중되어있다. 2) 乙女ゲーム 소녀의 게임. 3) 여기서 어느 정도, 라고 어중간하게 서술한 것은 기본적으로 당시 오토메 게임이 여성의 성적 욕망, 혹은 연애적 욕망에 대한 구체적 반영보다는 단순 성별반전에 가까웠기 때문이며 동시에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여성들의 모든 욕망을 단일화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4) 외적이라고 굳이 덧붙인 것은 오토메 게임이 시스젠더 헤테로 여성들을 주체로 하여 만들어진 게임이긴 하나,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주체의 성별은 실제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들 여성향이라고 말하는 장르의 콘텐츠를 실제로 이용하는 주체는 시스젠더 여성뿐만 아니라 다양한 성별주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서 쓰인 여성향/남성향과 같은 용어들은 이미 관습적으로 굳어진 용어로 본문에서 사용될 뿐, 실제 이용 주체를 명명하는 것은 아니다. 5) 3명 중 한명인 실피스는 선택지 플레이에 따라 여성/남성으로 나뉘게 되므로, 초반 성별이 정해지지 않은 존재(중성)로 나온다. 이 때문에 오토메 게임이지만 BL 게임으로 서사를 진행할 수도 있는 여지를 남겨둠으로써 2차 창작이 활발하게 진행되기도 했다. 6) 이것은 여성 게이머 주체의 본질적인 특성이라기보다 초반 여성들이 게임 텍스트를 접할 때 일어나는 남성 중심적 서사에 적응하기 위한 기제로서 관습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이는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바라보는 여성 주체에서도 유사하게 일어나는 것으로 가정되는데, 여성은 남성의 시선이 내재화된 카메라와 그 카메라 시선의 대상(여성) 사이에서 동일시할 주체를 찾지 못하고 관조적이거나 유동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기본적으로 여성향 게임에서 ‘텍스트’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미지보다는 텍스트가 제 3자의 입장에서 거리두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글에서는 간단히 언급하고 있지만, 이러한 거리두기의 연애방식(연애 관계에서 자신을 배제하고 그 관계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은 현대의 여성들에게 훨씬 더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7) 좋아하는 연예인과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프라이빗 메신저 ‘구독’ 서비스. 물론 인터페이스 자체는 자신이 하는 텍스트 메시지와 연예인의 메시지 밖에 보이지 않지만, 진짜 대화를 나누는 것은 1:수많은 팬서비스 구독자다. 8) 사랑에 빠져든 나와 나를 배제한 사랑 모두를 뜻한다. 9) 닌텐도 게임 파이어 엠블렘 시리즈 중 하나. 3개의 나라 3개의 반 중에 하나를 골라 육성하는 SRPG 게임이다. 메인 캐릭터를 남성과 여성 둘 중 하나로 선택할 수 있으며, 각각의 학생을 지도하면서 교류할 수 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경남대학교 미디어영상학과 조교수) 장민지 덕후 진화론(덕후는 정신적/육체적/기술적으로 진화한다)을 믿는 팬-미디어 연구자.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영상커뮤니케이션 전공으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5년 박사논문〈유동하는 세계에서 거주하는 삶 : 20~30대 여성청년 이주민들의 집의 의미와 장소화 과정〉으로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 학회 학술상, 2016년 〈비인간 캐릭터에 대한 대중의 환상〉으로 한국방송작가협회 한국방송평론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 [editor's View] 먹지 못하는 매체가 먹는다는 본능을 다루는 방식에 관하여
동물의 생존에는 먹는 행위가 필수적입니다. 인간도 동물이니 먹지 않으면 죽고,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먹는 일과 연관됩니다. 다만 인간의 먹거리를 먹이가 아니라 음식, 식량이라는 다름 이름으로 부르는 데에는 인간의 먹는 행위가 단순한 생리적 욕구 해결과 생존본능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님을 드러냅니다. < Back [editor's View] 먹지 못하는 매체가 먹는다는 본능을 다루는 방식에 관하여 30 GG Vol. 26. 6. 10. 동물의 생존에는 먹는 행위가 필수적입니다. 인간도 동물이니 먹지 않으면 죽고,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먹는 일과 연관됩니다. 다만 인간의 먹거리를 먹이가 아니라 음식, 식량이라는 다름 이름으로 부르는 데에는 인간의 먹는 행위가 단순한 생리적 욕구 해결과 생존본능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님을 드러냅니다. 재료를 구하고 요리해 음식을 만드는 행위, 혹은 이런 재료들을 축적해 식량이라는 자원으로 가공하는 행위는 때로는 사회적이고 때로는 정치적, 경제적이며, 많은 경우 문화적 맥락으로 다시 읽히는 과정입니다. GG가 디지털게임에 주목하는 이유는 게임이라는 매체가 원본으로 삼는 것이 인간과 그 인간이 이루는 사회 및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디지털게임이 다루는 음식과 요리는 인간이 오랜 역사 속에서 구축해 온 문화적 유산이 디지털게임이라는 매체를 통해 어떻게 재현되는지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대상이고, 다른 매체와는 다른 게임만의 독특한 재현방식은 우리로 하여금 일상에 녹아있는 음식과 요리를 새로운 관점에서 되새겨볼 수 있게 만드는 기제가 될 것입니다. 어느덧 30호에 이른 GG는 이러한 목적으로 게임 속에 재현된 음식과 요리라는 결과와 과정을 되짚어봅니다. 생물학적 욕구와 그 충족이라는 메커니즘부터 시작해 가공과 축적, 부패와 소진, 데코레이션과 영양공급 이상의 사회적 의미에 이르기까지 디지털게임은 음식과 요리의 많은 부분에서 과정으로서의 재현이 가질 수 있는 의미와 재미를 동시에 구현하고자 해 왔습니다. 각각의 맥락을 따라가는 여러 편의 글을 통해 우리는 이번 호가 인간의 먹는 행위가 무엇인지를 다시한번 곱씹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원합니다. 아울러 30호 오픈과 함께 GG는 제 5회 게임비평공모전을 시작합니다. 여전히 디지털게임을 연구하거나 비평하는 사람의 수는 많지 않으며, 우리는 언제나 더 새롭고 더 많은 동료들이 함께 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관련 공지사항에도 많은 관심 기울여주시고, 주변 분들에게도 공유해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드림.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게임평론가이자 연구자. 2015년부터 게임을 업으로 삼아, 평론가로서는 게임이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을, 연구자로서는 상품으로서의 게임이 사회 안에 자리잡는 구조를 살펴본다. 『81년생 마리오』(2017), 『현질의 탄생』(2022) 등을 썼고, 〈다큐프라임〉(EBS)을 비롯한 다큐멘터리와 여러 매체 연재에 참여했다. 디지털게임을 시간권리상품으로 분석한 연구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게임연구소 '드래곤랩'대표를 맡고 있으며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 [공모전수상작] 게임으로부터의 선택, 선택으로부터의 풍경-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과 <언더테일>의 제4의 벽 활용을 중심으로
퀀틱드림의 <디트로이트 : 비컴 휴먼>은 사람과 무척이나 유사한 안드로이드의 출현 이후, 그들이 사람처럼 감정을 느끼고 자유의지를 갖고 행동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라는 SF적 상상력 아래 제작된 게임이다. 스토리라인은 크게 수사 보조 안드로이드 코너, 가정용 안드로이드 카라, 그리고 칼이란 인물을 위해 특별제작된 안드로이드 마커스, 이 셋이 초점화자가 되어 진행된다. 인터랙티브 비디오 게임 장르답게 플레이어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여러 다른 엔딩을 볼 수 있다. < Back 20 GG Vol. 24. 10.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eongeun Kim Loves all things that carry a story. Studied Korean literature; the game of a lifetime is Life is Strange. After glimpsing the moment when "life is a kaleidoscope" turned into "life is strange," has been falling deep into the world of games too.
- 숏폼 콘텐츠 유행이 우리에게 남긴 것
다만 이러한 현실 추수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BM을 긍정해 나가면서 한국 게임 시장은 더욱 노골적으로 메타버스, P2E, NFT 등 현행 법률로 합법화되기 어려운 영역까지 허용해 달라고 당국에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최근의 게임 회사들은 플레이의 외부적 요소로 취급되던 현금과 결제, 캐릭터의 성장 요소를 더욱 외재화하여 환금성을 부추기게 된다면, 이는 한국 게임업계가 그동안 트라우마로 안고 있었던 “바다 이야기” 사태로 다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 Back 숏폼 콘텐츠 유행이 우리에게 남긴 것 06 GG Vol. 22. 6. 10. 1. 숏폼 콘텐츠와 연쇄적 소비 바야흐로 짧은 콘텐츠가 유행하는 시대이다. 평균적으로 50분의 상영시간을 가진 TV 드라마는 15분 내외의 웹드라마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으며, 유튜브에는 ‘너덜트’나 ‘숏박스’ 같은 채널을 중심으로 3-4분 정도로 짧은 콩트들이 유행하고 있다. 게임 역시 짧게는 수십 시간, 길게는 몇 백 시간의 플레이 시간을 요하는 PC나 콘솔 게임보다는 1회 플레이 시간이 짧은 모바일 게임 위주로 시장이 재편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최근에 벌어진 일은 아니며, 모빌리티를 무기로 하는 각종 플랫폼들이 기존의 하드웨어를 대체한 2000년대 후반 이후 지속화되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72초TV’가 상영시간을 채널명으로 전면화 하여 인기를 끈 것은 숏폼 콘텐츠(Short form contents)의 승리를 상징하는 현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 * 모바일 시대 초압축 드라마의 표본을 제시한 ‘72초 TV’의 한 장면 이러한 숏폼 콘텐츠가 고전적인 다른 고전적인 콘텐츠보다 주목받는 것은 이의 주 소비층이 10대와 20대의 젊은 세대이기 때문이다. 유행에 민감하고 시간을 부족한 이들에게 짧은 콘텐츠는 부족한 여가시간의 틈을 메울 수 있는 스낵 컬쳐(snack culture)가 된다. 등하교길이나 화장실에 들르는 잠깐의 쉬는 시간에도 몇 분만 할애하면 게임 한 판과 동영상을 즐길 수 있게 되면서 숏폼 콘텐츠는 금세기의 여가 문화의 틈새를 파고 들었다. 이러한 숏폼 콘텐츠의 대부분이 SNS나 유튜브 등의 동영상 사이트를 통해 무료로 서비스 된다는 점에서 구매력이 부족한 젊은 세대들에게 잘 먹히는 콘텐츠가 되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또한 핵심적인 서사를 바로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숏폼 콘텐츠에는 전후 맥락이 생략되어도 상관없는 내용들이 주종을 이룬다. 짧은 콘텐츠 재생시간 속에서 완전하지 못한 서사를 갖춘 숏폼 콘텐츠들은 긴 설명이나 전후 관계에 대한 인과관계를 설명하기보다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전형적인 소재를 본론부터 진행하는 방식을 취한다. 너덜트 채널의 첫 에피소드인 “당근마켓 남편들”은 거두절미하고 바로 중고거래 현장을 비춘다. 이 영상에서 공감대는 이미 해당 마켓들 통해 거래를 해본 기혼 남성들의 일상적 공감을 양분으로 삼아 전후의 맥락을 제거하고 거래 현장만 집중하여 짧은 상영 시간에 맞게 콘텐츠를 압축할 수 있게 해준다. * 너덜트의 〈당근마켓 남편들〉 일반적으로 숏폼 콘텐츠는 짧은 플레이 시간을 바탕으로 연쇄적인 콘텐츠 소비를 유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유튜브나 페이스북의 숏폼 콘텐츠를 멍하게 반복적으로 여러 개 지켜본 적이 있는 사람은 이에 대해 공감할 것이다. 게임의 경우도 한 번 플레이하는 시간이 짧을 뿐이지 이를 반복적으로 플레이하면서 실제로 하드코어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 못지 않은 시간이 소모된다. 게임학자 예스퍼 율(Jesper Juul)은 〈캐주얼 레볼루션(Casual Revolution)〉에서 캐주얼 게이머들이 게임을 캐주얼하게 소비할 것이라는 편견과는 달리 실제로는 상당한 시간을 소비하여 하드코어하게 게임을 플레이한다는 사실을 실제 사용자의 인터뷰를 통해 보여준 바 있다. (예스퍼 율, 이정엽 역, 『캐주얼 게임: 비디오 게임과 플레이어의 재창조』, 커뮤니케이션북스, 2012.)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콘텐츠의 연쇄적 소비가 트래픽을 불러일으켜 광고 수익 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이하 BM)을 발생시킨다는 점이다. 유저들이 사이트에 오래 머무를수록 수익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플랫폼은 어떤 특정한 콘텐츠를 소비하고 나서 고양된 감정으로 사이트를 떠나는 현상을 방지하려고 한다. 그러려면 하나의 콘텐츠 소비가 끝났을 때 다음 콘텐츠를 이어 보고 싶은 감정을 계속 유발해야 한다. 이는 게임으로 환원하면 짧은 플레이를 무수히 반복해서 쌓아나가는 방식에 해당될 것이다. 다만 비슷한 메커닉의 반복적인 플레이는 지루함을 유발하여 접속 중단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여기에 캐릭터 성장 시스템과 BM을 연계시키는 방식이 사용되는 것이다. 2. 숏폼 게임의 메커닉 축소과정과 비즈니스 모델 물론 처음부터 숏폼 형태의 게임과 BM이 초창기부터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다. PC나 콘솔 게임이 스마트폰 플랫폼으로 처음으로 전환되던 시점에는 키보드나 컨트롤러를 이용한 복잡한 컨트롤을 손가락을 이용한 터치로 단순하게 바꾸는 UI 차원의 시도가 먼저 이루어졌다. 이 때 통상적인 게임 장르는 그대로 이식되는 것이 아니라, 플랫폼의 환경에 따라 게임 메커닉을 약간씩 변형하면서 이식된다. 예를 들어 PC 게임 플랫폼에서 가장 인기있는 게임 중 하나인 〈리그 오브 레전드(League of Legends〉가 모바일 플랫폼에서는 같은 AOS 장르로 이식되기보다는 약간의 변형을 거쳐 숏폼으로 변화하게 된다. 〈클래시 로얄(Clash Royale)〉은 통상적으로 CCG(Collectible Card Game)이나 RTS(Real-time Strategy ) 장르로 분류되지만, 〈리그 오브 레전드〉의 메커닉을 충실히 따라가면서 이를 숏폼으로 축소한 게임이라 볼 수 있다. * 〈리그 오브 레전드〉 소환사의 협곡 지도와 〈클래시 로얄〉의 지도 〈리그 오브 레전드〉의 가장 유명한 맵 “소환사의 협곡” 지도와 〈클래시 로얄〉의 지도를 비교하면 크게 3갈래로 갈려진 지도가 〈클래시 로얄〉에서는 2개의 다리를 중심으로 한 경로로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아군과 적군의 미니언들은 AI에 의해 자동으로 움직이고, 챔피언만 플레이어가 컨트롤 할 수 있지만, 〈클래시 로얄〉에서 플레이어는 각종 캐릭터의 처음 시작하는 위치만 지정할 수 있으며, 그 캐릭터의 개별 전투는 모두 AI에 의해 자동으로 진행된다. 또한 〈리그 오브 레전드〉는 특별히 정해진 플레이 타임이 존재하지 않지만 평균적으로 1회당 3-40분 내외의 시간이 소요되지만, 〈클래시 로얄〉은 처음 3분의 타임 어택과 추가 1분 30초의 타임 어택을 포함해 최대 1판이 4분 30초를 넘지 않게 디자인되어 있다. 다시 말해 〈클래시 로얄〉은 PC에서 사용되던 플레이어에 의한 복잡한 컨트롤을 최대한 줄이고, AI에 의한 자동전투를 극대화시키면서 플레이 타임을 거의 1/10로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클래시 로얄〉에서 더욱 강조된 부분은 각 캐릭터의 성장을 ‘카드 강화 시스템’을 통해 극대화 시켰다는 점이다. CCG 장르의 카드 강화 메커닉을 활용하여 자신의 카드가 성장하는 느낌을 부여하면, 그 카드의 효용을 실험해보고 싶어 다시 플레이를 시도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물론 한 번에 사용할 수 있는 카드의 덱이 8장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한 번에 모든 성장을 진행하지 못하도록 강제할 수 있어 〈클래시 로얄〉의 BM은 그다지 노골적이지는 않은 편이다. 오히려 〈클래시 로얄〉은 현질을 통해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요소를 제한하여 게임의 밸런스를 훌륭하게 구현한 좋은 예시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게임의 성공 이후 RTS의 AI 전투 시스템은 축소하고 카드 강화의 BM만 극대화 한 게임들이 대거 등장했기 때문에 아쉬움을 남긴다. 실제 이 때에도 RTS적인 요소들이 대폭 축소되었기 때문에 이들을 동일한 장르로 분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방치형 이나 CCG로 불리는 현질 유도 게임은 현재에도 무수히 양산되고 있지만, 문제는 앞선 사례들에서 적절히 제한되었던 현질의 밸런스 붕괴를 막기 위한 적절한 제한 요소들은 차용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3. BM의 전면화와 미학의 소외 물론 콘텐츠의 길이가 짧다고 해서 미학적으로 열등하다고 간주하긴 어렵다. 소설과 영화에서도 장편과 단편의 미학이 다르며, 단편은 장편이 구현하기 어려운 단일 플롯의 직접성과 단도직입적인 풍자 등을 통해 독립적인 미학을 쌓아왔던 것이다. 장대한 서사시와 촌철살인의 미학은 애초부터 목표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필요가 없다. 게임에서도 짧은 플레이 시간 내에 추구할 수 있는 한 판의 쾌감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플레이 타임을 축소시키는 과정에서 잘려나간 풍성한 서사, 전후의 맥락, 컷신, 텍스트, 맵의 디테일, 전략적 요소 뒤에 더 강조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플레이 과정에서 앞서 말한 고전적인 재미요소를 제거하고 BM만 남겨놓아도 플레이어가 잔존한다는 사실이 모바일 플랫폼을 통해 확인된 이상 게임 회사들은 굳이 어렵게 게임을 풍성하게 만들려고 시도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모바일 게임의 소프트 런칭 시스템(특정 국가 하나 정도만을 대상으로 게임을 시범적으로 출시하는 방식으로, 게임 회사들은 이를 통해 특정 메커닉의 잔존율(retention)을 실험하고 이를 바탕으로 잔존율 낮은 메커닉이나 BM은 도태시키는 방식을 자주 사용한다.)은 특정 메커닉과 BM의 잔존율을 아주 쉽게 테스트 할 수 있게 해주어, 노골적인 BM의 확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게임 내 퀘스트를 클리어 하기 위해 설정만 해놓으면 해당 퀘스트가 다 클리어된다거나, 별다른 스토리에 대한 설명도 없이 바로 사냥과 전투가 시작되는 게임들을 더 이상 플레이어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방치형 게임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형식적 요소와 몰입을 위한 스토리텔링이 필요했던 것이 게임이라는 장르의 형식적 미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수익성을 위해 깎여나간 게임의 숏폼화는 결국 BM와 노골적인 결제 모듈만 남기고 게임을 앙상하게 만들어버렸다. * 게임 플레이어 모두에게 1억이 지급되면 그것이 과연 가치가 있는 것일까? 최근의 게임 광고들은 노골적으로 상당한 금액의 확률형 아이템을 지급한다고 홍보한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게임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지급되는 아이템이 상대적인 가치를 가질 리 만무하다. 물론 이러한 방치형 게임들을 유저의 차원에서 바라보면서, 시간이 부족한 학생이나 직장인이 성장의 재미만 누리게 하는 게임으로 일정 가치를 지닌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다만 이러한 현실 추수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BM을 긍정해 나가면서 한국 게임 시장은 더욱 노골적으로 메타버스, P2E, NFT 등 현행 법률로 합법화되기 어려운 영역까지 허용해 달라고 당국에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최근의 게임 회사들은 플레이의 외부적 요소로 취급되던 현금과 결제, 캐릭터의 성장 요소를 더욱 외재화하여 환금성을 부추기게 된다면, 이는 한국 게임업계가 그동안 트라우마로 안고 있었던 “바다 이야기” 사태로 다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교수) 이정엽 순천향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게임 스토리텔링과 게임 디자인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인디게임 페스티벌인 부산인디커넥트페스티벌 창설을 주도하고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다.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인디게임 행사인 Independent Games Festival(IGF) 심사위원이기도 하다. 저서로 『디지털 스토리텔링』(공저, 2003), 『디지털 게임, 상상력의 새로운 영토』(2005), 『인디게임』(2015), 『이야기, 트랜스포머가 되다』(공저, 2015), 『81년생 마리오』(공저, 2017), 『게임의 이론』(공저, 2019), 『게임은 게임이다: 게임X생태계』(공저, 2021) 등이 있다.



![[고스트] 시리즈: 찬바라의 뒤섞인 계보 위에서 패링하기](https://static.wixstatic.com/media/d03518_b1961b77e0e142e98b20d590c4f54d0b~mv2.jpg/v1/fit/w_176,h_124,q_80,usm_0.66_1.00_0.01,blur_3,enc_auto/d03518_b1961b77e0e142e98b20d590c4f54d0b~mv2.jpg)






![[공모전수상작] 게임으로부터의 선택, 선택으로부터의 풍경-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과 <언더테일>의 제4의 벽 활용을 중심으로](https://static.wixstatic.com/media/d03518_cac5a8b484cc40c3bc1db19f5be7a05c~mv2.jpg/v1/fit/w_176,h_124,q_80,usm_0.66_1.00_0.01,blur_3,enc_auto/d03518_cac5a8b484cc40c3bc1db19f5be7a05c~mv2.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