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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임으로 관객에게 말걸기 -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관람기

    필자는 게임제너레이션으로부터 "북서울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전시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에 대한 게임전문가 관점에서의 리뷰"를 요청받았다. 고백하건대 필자는 게임전문가도, 미술애호가도 아니다. 그러니 여기서 잘못 주름을 잡았다가는 큰 코를 다칠 게 뻔했다. 하지만 북서울미술관은 필자의 집 앞이었던 데다, 고료의 유혹이 상당했다. 그렇게 흔쾌한 척 '퀘스트'를 수락했지만, 이 주제에 적당한 '레벨'인지 자문한다면, 부끄럽기  그지없다.  < Back 12 GG Vol. 23. 6. 10. Tags: 북서울미술관, 전시, 미술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aeseok Kim Worked for eight years as a reporter at ThisIsGame. Now handles external relations at a subculture startup. Loves editors and the power of cheat codes.

  • 〈디아블로〉 시리즈의 역사로 바라보는 블리자드의 변화

    2021년 2월 20일에 시작된 블리즈컨라인(BLIZZConline)의 분위기는 어수선하기만 했다. 2005년 10월 처음 개최된 블리즈컨은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이하 블리자드)가 자신들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는 팬들을 위한 축제로써 기획되었다. 하지만 지난 몇년간의 블리즈컨의 분위기는 분명 예전과 달랐다. 제작자와 게임 팬의 화합의 장이었던 블리즈컨이 끝나면 항상 팬들의 열화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지만, 최근 들어 함성은 잦아들고 작은 수근거림이 더 많이 들리기 시작했다. < Back 〈디아블로〉 시리즈의 역사로 바라보는 블리자드의 변화 02 GG Vol. 21. 8. 10. 2021년 2월 20일에 시작된 블리즈컨라인(BLIZZConline)의 분위기는 어수선하기만 했다. 2005년 10월 처음 개최된 블리즈컨은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이하 블리자드)가 자신들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는 팬들을 위한 축제로써 기획되었다. 하지만 지난 몇년간의 블리즈컨의 분위기는 분명 예전과 달랐다. 제작자와 게임 팬의 화합의 장이었던 블리즈컨이 끝나면 항상 팬들의 열화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지만, 최근 들어 함성은 잦아들고 작은 수근거림이 더 많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을 그저 지나가는 해프닝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직전 년도에 발매되었던 〈워크래프트 III: 리포지드〉는 그간 ‘블리자드 = 게임 제작의 명가’라는 평판에 물음표를 던져 주기 충분했고, 때문에 이런 어수선함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이런 전후 사정으로 코로나 시대에 열린 온라인 블리즈컨인 2021년 블리즈컨라인에 팬들은 큰 기대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행사에서는 기존 발표 신작( 〈오버워치 2〉, 〈디아블로 IV〉)에 대한 개발 중간 보고 형태의 정보가 있었고, 블리자드가 제작했던 초창기 인기작(〈락앤롤 레이싱〉, 〈길 잃은 바이킹〉, 〈블랙쏜〉)의 리메이크 버전에 대한 내용이 공개되었다. 그리고 오래된 블리자드 팬들을 들뜨게 만드는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디아블로 II〉의 리마스터 버전인 〈디아블로 II: 레저렉션〉이 올해 발매 된다는 이야기였다. 국내에서도 유명한 기업인이자 요리 연구가(이자 열성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플레이어)인 백종원씨가 〈디아블로 II: 레저렉션〉의 최초공개 트레일러에 남긴 댓글은 순식간에 이슈화가 되면서 이 게임의 무게감을 증명했다. *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NzG-4gDDazg 블리자드의 대표 IP 중 하나인 〈디아블로〉 시리즈의 첫 작품은 1996년 12월 31일 세상에 선보였다. 블리자드의 초기 협력사이자 합병 이후 블리자드 노스로 이름이 바뀐 콘도르에서 처음 제안했던 〈디아블로〉의 형태는 턴 방식의 로그라이크 게임이었다. 하지만 3 시간 동안 제작한 실시간 형태의 프로토타이핑을 거쳐 현재의 모습으로 만드는 것으로 변경되었고, 우리가 익히 아는 실시간 핵 앤 슬래시 형태의 액션 롤플레잉 게임인 〈디아블로〉가 세상에 선보이게 되었다. 출시 당시 다른 게임과 완전히 차별화되는 게임성과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 블리자드 최초로 도입된 베틀넷 시스템을 통한 협동 및 대결 플레이 같은 특별한 장점들은 〈디아블로〉를 그해 최고의 게임의 반열에 오르게 만든다. 북미 출시 이후 국내에서도 PC 통신 게임 동호회를 중심으로 게임에 대한 기대감이 점차 높아지고 있었으나, 당시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운영하던 게임물 심의 장벽에 가로막혀 꽤 오랜 기간 동안 국내 정식 발매가 되지 않는 일이 있기도 했다. 당시 〈디아블로〉 1의 국내 유통사였던 SKC는 몇 차례의 발매 연기 속에 일부 영상 장면 등을 삭제한 검열판으로 심의를 통과하여 청소년 이용불가 등급으로 게임을 발매하였다. * 출처: 컴퓨터 게이밍 월드 1997년 2월호 102 페이지. 〈 디아블로 〉는 잘해야 10만 부 팔릴 것이라 예상한 제작진의 기대를 가뿐하게 넘어 발매 첫 해 100만 부, 이듬해에는 전세계 200만 부 판매를 달성한다. 자연스럽게 후속편에 대한 이야기가 제작진 사이에서 논의되었다. 그리고 〈디아블로 1〉의 출시부터 3년이 지난 2000년 6월 29일 시리즈의 후속편인 〈디아블로 II〉가 발매되었다. 국내에서 〈디아블로〉는 게임 매니아들끼리 만 회자되는, 잘 만든 게임에 불과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이를 극복하기 위한 여러 방안 중 하나로 추진되었던 IT 인프라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투자와, 이를 통한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와 PC 방의 급격한 확산. 그리고 이러한 환경에 힘입어 그저 그런 컴퓨터 게임이 아닌 대한민국 대중 문화의 위치를 차지한 블리자드의 〈스타크래프트〉의 엄청난 성공으로 인해, 다음 작품으로 내 놓은 〈디아블로 II〉는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게임이 되어있었다. 이러한 관심을 입증하듯, 〈디아블로 II〉는 15만 부의 선주문을 받은 상태로 북미와 거의 동시 발매가 이루어졌다(당시 해외 게임이 국내 동시 발매하는 사례는 매우 드물었다). 하지만 이러한 초기의 관심과 달리, 새로운 대한민국의 전통 놀이로 취급되던 〈스타크래프트〉에 비해 〈디아블로 II〉의 인기는 금세 시들해 졌다(어디까지나 〈스타크래프트〉에 비교해서일 뿐이지만). 국내에서만 약 300만 부를 팔아 치운 〈디아블로 II〉는 운영 문제와 함께 경쟁작이라 할 수 있는 국산 대작 MMORPG 게임이 하나 둘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하는 사람만 하는’ 게임이 되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디아블로 II〉는 서비스 중이며 PC 방 점유율 순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 디아블로 II 〉 이후 블리자드는 〈워크래프트〉 IP에 기반을 둔 게임에 거의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새로운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인 〈워크래프트 III: 혼돈의 지배〉와 확장팩인 '얼어붙은 왕좌'가 각각 2002년과 2003년 출시되었다. 여기에 더해 2004년 11월 23일 서비스를 시작한 MMORPG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2021년 현재까지 총 8개의 확장팩을 출시하며 지금까지도 많은 유저를 보유하고 있는 블리자드의 대표 게임이 되었다. 이렇게 제작사로부터 외면 받은 줄 알았던 〈디아블로〉 시리즈에 대한 새로운 소식이 들려온 것은 2008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월드 와이드 인비테이셔널에서였다. 〈디아블로 3〉는 〈스타크래프트 II〉와 더불어 전세계 블리자드 팬들의 초 기대작이 되었다.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서울 왕십리역에서 진행된 전야제 행사에서 〈디아블로 3〉의 한정판을 구매하기 위해 전날 새벽부터 수천명의 사람들이 몰려들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많은 인원을 예상 못한 행사 주최측의 준비 미비로 그야말로 디아블로가 재림한 듯한 혼돈이 연출되었다. 각종 온라인 쇼핑몰에서의 소장판 판매도 판매 시작부터 쇼핑몰 서버가 다운되는 등의 혼란이 발생했다. 대한민국에서의 〈디아블로 3〉 한정판 대란은 또 다른 양상을 보이기도 했는데, 한정판을 사들여 웃돈을 더 받고 다른 사람에게 판매하는 사람들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디아블로〉 시리즈에 등장하는 종족인 네팔렘을 차용하여 만들어진 ‘되팔렘’이라는 단어는 인터넷 게시판 뿐만 아니라 이후 기성 언론에서도 공공연하게 쓰이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상은 이후 벌어진 쓰나미 같은 사태에 비하면 그저 지나가는 가랑비에 불과했다. 2012년 5월 15일, 〈디아블로 3〉를 구매한 게이머들은 게임을 실행하기 위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아이콘을 클릭했다. 하지만 그들을 반기는 건 Error 37 이라는 메시지 창 뿐이었고 정작 게임은 실행조차 되지 않았다. 사유는 이랬다. 불법 복제를 막고 경매장 등의 기능을 위해 야심 차게 도입했던 서버 인증 시스템이 몰려드는 사용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현상이 계속 발생한 것. 이 문제는 게임 발매 후 한 달이 다 되도록 해결이 되질 못했고, 결국 국내 지사인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코리아는 게임 환불을 결정한다. * Error 37, 서버 롤백, 계정 오류 같은 기술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경매장 시스템, 게임의 난이도 배치와 말도 안되는 아이템 드랍 시스템 등으로 인해 초창기 게임의 평가는 계속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리자드는 특유의 뚝심으로 게임의 문제점을 하나 하나 개선해 나가고, 핵심 기능 중 하나였던 경매장 시스템을 날려버리는 특단의 결정을 내리면서까지 결국 죽은 게임을 살려내는데 성공한다. 2015년 8월까지 전 세계적으로 3천만 부가 판매되는 기록을 달성하였다. 전작과 12년의 갭이 있었던 〈디아블로 3〉와 달리, 다음 후속작은 비교적 빠른(?) 6년만에 발표되었다. 2018년 11월 최초 공개된 〈디아블로 이모탈〉은 디아블로 시리즈 최초의 모바일 게임이란 점, 그리고 그리고 게이머들에게 반발이 심한 극단적인 부분 유료화 정책으로 유명한 중국 게임 개발사와의 협업으로 개발 중이라는 점 때문에 팬들의 많은 우려를 샀다. 다행이 얼마 전 진행된 알파 테스트에서 우려는 어느정도 씻겨진 상태이지만, 블리자드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비단 팬들 만이 아니었다. 블리자드에서도 이러한 분위기를 우려했을까? 새로운 차기작인 〈디아블로 IV〉의 제작을 공개하였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 출처: 〈디아블로 IV〉 공식 시네마틱 영상 | 세 명이 오리라 2021년 현재 〈디아블로 〉시리즈는 한 편이 신규 발매되었으며, 두 편의 신작이 개발 중에 있다. 과연 이 시리즈의 미래는 계속될 수 있을까? 블리자드는 신규 IP 제작에 매우 신중한 행보를 보여왔다. 회사의 대표 IP 인 〈워크래프트〉와 〈스타크래프트〉, 〈디아블로〉는 모두 20세기인 말인 1990년대 처음 대중에 선보였고, 21세기 들어 완전한 오리지널 신규 IP는 오버워치 하나에 불과하다. * 출처: 블리자드 홈페이지 . 이는 블리자드의 개발 스타일과 큰 연관이 있다. 블리자드의 개발자들은 혁신적이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낸 다기 보다는 기존의 게임 메커니즘을 철저하게 분해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이를 자신들이 충분히 만족할 때까지 다듬고 또 다듬는 방식으로 결과물을 만들었다. 여기에 시리즈를 계속해 가면서 자기 자신을 복제, 발전해 왔던 것. 이것이 블리자드의 스타일이다. 때문에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로부터 시작해 〈디아블로 II: 레저렉션〉으로 끝나는 블리자드의 클래식 프로젝트는 그간 블리자드가 보여줘 왔던 행보와 비슷하면서도 매우 동떨어져 있다. 이들의 장기는 기존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닌 기존 것에서 한 발 더 발전시켜 나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클래식 프로젝트는 찬란했던 시대의 흑백 사진을 컬러로 바꾸는데 급급하다는 인상이다. 블리자드의 얼음 폭풍이 점차 잠잠해지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비단 회사를 둘러싼 온갖 구설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실리콘 앤 시냅스라는 이름으로 1991년부터 시작된 블리자드는 올해로 30주년을 맞이했다. 블리자드의 미래를 함부로 예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의 색을 점차 잃어가는 게임 제작사를 바라보는 오래된 팬들의 마음은 어쩌면 안타까움 그 이상이 아닐까?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 개발자) 임현호 과거의 게임 개발 영웅들의 모험담을 쫓으며 게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게임 개발자. 매우 긴 기간 동안 대표, 기획자, 인디 게임 개발자, 프로젝트 매니저 등의 여러 타이틀을 달고 살았으나 게이머이자 게임 개발자로 불리길 희망하는 소시민.

  • 어린이를 위한 게임은 없다

    도발적인 제목을 들고 왔지만, 놀랍게도 필자는 어린이가 아니다. 더 놀랍게도 필자는 아직 2세가 없다. 당사자성이 없는 사람이 어린이와 게임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대단히 조심스러웠다. 게임제너레이션(GG) 편집장으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가정에 어린이가 있는 필자를 새로 구해보시는 게 어떠냐'라고 완곡하게 돌려 말했다. 편집장은 '어린이가 없는 입장이 보다 객관적'이라고 답했다. GG 편집진의 고약한 취미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Back 18 GG Vol. 24. 6. 10. Tags: 게임이용자, 유소년, PC방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aeseok Kim Worked for eight years as a reporter at ThisIsGame. Now handles external relations at a subculture startup. Loves editors and the power of cheat codes.

  • About GG | 게임제너레이션 GG

    게임문화재단이 만들고 (주)크래프톤이 후원하는 격월간 게임문화비평전문웹진. 게임비평 및 연구결과 수록. 게임문화 교양웹진, 게임 제너레이션 게임제너레이션은 한국 게임문화 담론을 선도해 나가고자 2021년 8월에 창간한 게임비평 전문 웹진입니다. 2개월에 한 번씩 GG는 동시대 디지털게임의 주요 주제를 선정해 다양한 시각에서 그 의미를 탐색하고 밝히고자 합니다. GG의 철학 GG는 오늘날 대중문화에서 디지털게임이 차지하는 영향력에 주목합니다. 우리는 디지털게임이 일상이 된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는 게임을 하는 이도 안하는 이도 게임으로부터 영향받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게임이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문화적 의미를 밝히는 것이 GG의 가장 큰 목적입니다. 현대 대중문화담론이 처한 위기는 무거움과 가벼움 양 쪽 모두를 딛고 있습니다. 학술적인 깊은 논의들은 대중적으로 널리 퍼지지 못하고 있으며, 널리 퍼지는 이야기들은 게임문화담론의 깊이를 품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GG는 '학술지보다 가볍게, 웹진보다 무겁게'라는 슬로건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보다 게임문화를 보다 무겁게 다루는 일이 충분히 대중적일 수 있다고 믿으며, 그러한 독자와 필자를 찾아내고 담론장에 유통하는 일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GG를 만드는 사람들 척박한 게임문화담론을 개척하는 일에는 많은 인력과 자원, 시간이 들어갑니다. GG는 게임문화재단에서 제작을 맡고 있으며, 그 후원을 (주)크래프톤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크래프톤의 후원은 전적으로 후원에 머무르며, 웹진 제작과정과 방향성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음을 원칙으로 합니다. 이러한 후원을 바탕으로 GG는 많은 게임연구자들과 협업하며 게임문화담론의 생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국내외를 망라한 젊고 명망있는 게임연구자들, 게임의 문화적 비평에 의지를 가진 비평가들이 GG와 함께합니다. 더불어 새로운 필진의 발굴을 위해 GG는 매년 1회 게임비평공모전을 주최, 동시대의 트렌드를 놓치지 않고자 노력중입니다. GG가 꿈꾸는 미래 한국은 게임문화에 있어 글로벌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는 곳입니다. 우리의 문화담론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들은 비단 한국어권에 머물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GG는 장기적으로 한국의 게임문화담론을 전세계와 공유하고자 하는 미래를 꿈꿉니다. 해외의 다양한 게임연구, 담론, 비평을 공유하고, 또 한국에서 생산된 논의들을 해외로 내보내는 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국을 넘어 전세계와 함께 디지털게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으로서의 GG를 우리는 상상합니다.

  • 게임을 연구한다는 것 - 『크리티컬 워드 - 게임 스터디즈』가 던지는 질문들

    북유럽에서는 디자인 학부가, 북미에서는 영화학과가, 일본에서는 사회과학이나 이공계가 게임 연구를 주도하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그들은 문제가 아니라 가능성으로 본다. 이 책은 단순한 게임 연구의 용어사전이 아니다. 여기에는 일본 게임 연구 공동체가 지난 20년 동안 축적해온 고민이 농축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학문적 경계 위에 서 있는 한국 게임 연구자들 역시 공유하는 고민이기도 하다. < Back 게임을 연구한다는 것 - 『크리티컬 워드 - 게임 스터디즈』가 던지는 질문들 27 GG Vol. 25. 12. 10. 게임 연구, 어디에 속하는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게임 연구를 한다고 자기소개를 하면 돌아오는 반응은 대개 비슷하다. "게임 연구요? 그럼 코딩하시나요? 게임 개발 쪽인가요?" 게임을 연구한다는 말이 곧 기술 연구나 프로그래밍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물론 게임 연구에는 기술적 측면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미디어 연구, 문화 연구, 장르 연구, 철학이나 미학 연구 등 게임을 바라보는 지평은 다양하다. 그러나 '게임 연구'라는 말은 여전히 명확한 윤곽을 갖지 못한 채,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혼란은 비단 연구를 하지 않는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게임 연구자들 스스로도 게임 연구가 어느 학문 분과에 속하는지 명확히 답하기 어렵다. 게임 연구는 어디에 속하는가? 미디어학과 강의실, 컴퓨터공학과 실험실, 문화연구 세미나실 가운데 어느 곳이 그 자리가 될 수 있을까? 2025년 5월 일본에서 출간된 『クリティカル・ワード ゲームスタディーズ ― 遊びから文化と社会を考える』(이하 『크리티컬 워드 - 게임 스터디즈』)의 네 명의 편저자 – 이노우에 아키토(井上明人), 마츠나가 신지(松永伸司), 요시다 히로시(吉田寛), 마틴 로스(Martin Roth) – 는 이 질문에 명쾌한 답을 제시하는 대신, "게임 연구는 기존의 대학 분과나 학문 제도로는 수용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북유럽에서는 디자인 학부가, 북미에서는 영화학과가, 일본에서는 사회과학이나 이공계가 게임 연구를 주도하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그들은 문제가 아니라 가능성으로 본다. 이 책은 단순한 게임 연구의 용어사전이 아니다. 여기에는 일본 게임 연구 공동체가 지난 20년 동안 축적해온 고민이 농축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학문적 경계 위에 서 있는 한국 게임 연구자들 역시 공유하는 고민이기도 하다. 일본 게임 연구가 바라보는 지평 그렇다면 일본의 게임 연구자들은 게임 연구의 이 불안정한 위치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크리티컬 워드 - 게임 스터디즈』에서 서문을 통해 드러나는 일본 게임 연구의 현주소는 흥미롭다. 편저자들은 게임 연구가 "새롭고 영역횡단적인 학문"이기에 전체와 현위치가 보이지 않는 상황을 인정한다. 앞서 국가별로 게임 연구가 주도되는 학문의 영역이 다르다고 언급했듯, 이러한 지역적 편차는 게임 스터디즈가 아직 확립된 학문 분과가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게임이라는 대상 자체가 단일한 학문적 렌즈로는 포착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게임 제작에 요구되는 기능이 프로그래밍부터 영상, 시나리오, 세계관 설정, 사운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듯, 게임 연구 역시 문과도 이과도 아닌, 혹은 문과이면서 동시에 이과인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책의 구성에도 반영된다. 네 명의 편저자는 각기 다른 전문 분야와 배경을 가진다. 편저자들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각각의 연구자가 자신의 전문 분야 내에서 각자의 게임 연구에 임해도 좋다"며, 학문적 다원주의를 적극 옹호한다. 일본 게임 연구가 주목하는 것들 이러한 학문적 다원주의는 구체적으로 어떤 주제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을까? 그 답은 책이 다루는 주제들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책의 제1부 이론편은 '룰(Rule)', '미디어(Media)', '놀이(Play)', '픽션(Fiction)',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 '소셜(Social)', '인공물(Artifact)', '인터랙티비티(Interactivity)' 등 8개 핵심 개념을 다룬다. 주목할 점은 하나의 개념을 네 명의 편저자가 각각 다른 관점에서 해설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룰' 개념을 둘러싸고 "게임은 룰인가", "룰 개념의 다의성과 다양한 성질", "룰은 게임을 정의하는가"라는 세 가지 소제목 하에 서로 다른 시각이 제시된다. 이는 단일한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독자가 다양한 견해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형성하도록 유도하는 교육적 전략이다. 제2부 키워드편은 27개 항목으로 구성되며, 현재 게임 문화와 게임 연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주제들을 다룬다. 여기에 수록된 키워드들을 살펴보면, 현재 일본 게임 연구가 어떤 영역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드러난다. 이 항목들은 크게 다섯 가지 주제로 묶인다. 첫째, 기술적·물질적 기반 주제다. 'NFT', '에뮬레이션', '아카이브', '플랫폼' 같은 파트들은 게임을 단순히 의미의 텍스트가 아니라 특정한 기술적·경제적 조건 속에서 작동하는 미디어로 파악한다. 특히 아카이브와 에뮬레이션 파트는 게임의 보존과 접근성 문제를 다루는데, 이는 게임이 점점 더 '사라지는' 미디어가 되어가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개입이다. 플랫폼 개념은 게임이 중립적 공간이 아니라 특정한 권력 관계와 경제 구조 속에 배치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둘째, 사회문화적 쟁점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다. '젠더와 섹슈얼리티', '접근성과 장애의 표상', '게임 행동 장애(Gaming Disorder)' 같은 파트들은 게임을 둘러싼 정치성을 전면화한다. 젠더 파트는 게임 문화의 남성중심성과 배제의 구조를 분석하고, 접근성 파트는 장애인 게이머들의 경험이 어떻게 주변화되어왔는지를 다룬다. 게임 행동 장애 파트는 WHO의 질병 분류를 둘러싼 논쟁을 다루면서, 게임 플레이를 병리화하는 담론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는 게임이 단순한 오락을 넘어 광범위한 사회 현상과 맞물려 있음을 시사한다. 셋째, 플레이어의 창조적·전복적 실천에 대한 주제다. '게임 실황', 'UGC(User-Generated Contents)', '치트', '내비게이션' 같은 파트들은 게임이 개발자가 설계한 대로만 소비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게임 실황은 게임 플레이를 관람 가능한 퍼포먼스로 전환하는 실천이고, UGC는 플레이어를 공동 창작자로 위치시킨다. 치트는 게임의 룰을 의도적으로 위반함으로써 다른 종류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행위다. 이러한 항목들은 게임 연구가 '텍스트 분석'에서 '실천과 문화 연구'로 확장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넷째, 게임의 사회적 확장에 대한 주제다. '스포츠', '투어리즘',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 같은 파트들은 게임이 더 이상 오락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게이미피케이션은 업무, 교육, 건강관리 등 삶의 다양한 영역이 게임의 논리로 재편되는 현상을 가리키며, 투어리즘 파트는 <포켓몬 GO> 같은 게임이 실제 공간의 이동과 경험을 재조직하는 방식을 탐구한다. 스포츠 파트는 e스포츠의 부상과 함께 게임과 전통적 스포츠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는 현상을 다룬다. 다섯째, 메타적 성찰에 대한 주제다. '비평(Criticism)', '윤리(Ethics)', '역사 서술', '내러티브(Narrative)', '몰입' 같은 개념들은 게임을 연구하는 방법론 자체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윤리 파트는 게임 내 폭력 표현, 착취적 과금 모델, 개발 노동 조건 등 게임을 둘러싼 다층적 윤리적 쟁점들을 다룬다. 역사 서술 파트는 게임이 역사를 재현하는 방식과 그것이 갖는 정치적 함의를 탐구한다. 비평 파트는 게임 비평의 언어와 방법이 무엇인지, 게임을 평가하는 기준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묻는다. 제3부 북가이드편은 20개의 필독 문헌을 소개한다. 하위징아(Huizinga)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카이와(Caillois)의 『놀이와 인간(Man, Play and Games)』 같은 고전부터, 예스퍼 율(Jesper Juul)의 『하프 리얼(Half-Real)』, 이안 보고스트(Ian Bogost)의 『설득적 게임(Persuasive Games)』 같은 현대 게임 연구의 주요 저작까지 망라한다. 흥미롭게도 편저자들은 일본어 문헌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고 밝히는데, 이는 "일본 독자에게 익숙하지 않거나 접근이 어려운 외국어 문헌 소개에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의의는 어쩌면 내용보다 형식에 있을지 모른다. 서문에서 편저자들은 독자에게 "이 책을 도중에 내던지고 즉시 자신만의 게임 스터디즈를 시작해도 좋다"고 말한다. 동시에 "이 책에는 다양한 전문 분야와 연구 테마를 가진 많은 저자들이 다루는 현재진행형의 게임 스터디즈가 담겨 있으므로, 끝까지 읽는 것을 권장한다"고도 덧붙인다. 이는 게임 연구라는 아직 확립되지 않은 영역에서 학술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하는 게임 연구자들의 마음가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2000년대 이후 게임 연구 커뮤니티와 연구 서적이 서서히 쌓여 왔고, 이 책은 그 축적의 위에 서서 ‘입문용 지도’를 제안하는 위치에 있다. 이러한 모습은 일본의 게임 연구 씬뿐만 아니라 한국의 게임 연구 현장에서도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일본 게임 연구는 명확한 학문적 경계나 방법론적 합의가 부재한 상황을 문제로 보기보다, 오히려 가능성으로 전환하려 한다. "문과도 이과도 아니다", 기존 학문 제도의 바깥에 머물러 있다는 진단은 패배주의적 자조가 아니라, 새로운 학문적 실험을 위한 생각의 전환에 가깝다. 일본의 지형, 한국의 질문 사실 한국과 일본의 게임 연구 지형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일본에서는 미학, 철학, 미디어 이론, 기술사 등 인문학적이고 이론 지향적인 게임 연구 관점뿐만 아니라, 기술 개발 연구, 디자인학 연구가 서로 다른 영역에서 진행되며, 지역이나 대학별로 강조하는 학문 분과도 다르다. 한국 역시 커뮤니케이션학, 미디어학, 문화연구는 물론이고 게임 정책 연구, 산업 분석, 기술 연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접근이 공존한다. 두 나라 모두 게임 연구를 단일한 학문 체계 안에 정착시키기보다는, 여러 분과의 경계를 넘나들며 각자의 방식으로 게임이라는 대상을 탐구해왔다. 그렇다면 이 책이 한국 게임 연구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비교의 프레임을 제공한다는 데 있다. 한국과 일본의 게임 연구는 문화적 맥락과 제도적 환경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게임 연구는 어디에 속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 앞에서는 비슷한 방향성을 가지고 발전하고 있다. 젠더 담론, 게임 병리화 담론, 아카이브와 보존 문제, 플레이어 실천의 의미 등 한국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쟁점들을 일본 게임 연구가 어떻게 다루는지 살펴보는 일은, 우리 자신의 연구 지형을 새로운 각도에서 성찰하게 만든다. 『크리티컬 워드 - 게임 스터디즈』는 단순히 일본 게임 연구를 소개하는 책이 아니라, 한국 게임 연구자들에게도 "당신은 게임을 어떻게 연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진다고 볼 수 있다. 나가며 『크리티컬 워드 - 게임 스터디즈』는 완결된 지식 체계를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책은 게임 연구라는 영역이 여전히 형성 중이며, 다양한 관점들 사이의 긴장과 대화를 통해 성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게임 연구는 확립된 지식 체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갱신되는 탐구의 과정이며, 따라서 단일한 방법론이나 관점으로 고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게임 연구가 제도화된 학문 권위가 아니라 개방적이고 실험적인 지적 실천이어야 한다는 선언이다. 35개의 키워드와 20개의 필독서는 하나의 '정전'(正典, canon)이라기보다, 계속 수정되고 확장될 '잠정적 지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제시하는 비전이 순탄하게 실현되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게임 스터디즈가 기존 학문 제도에 수용되지 않는다는 진단은, 동시에 제도적 지원과 안정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학문적 다원주의는 지적 풍요로움을 약속하지만, 공통의 언어와 방법론이 부족해지는 위험도 함께 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한국 게임 연구에 중요한 참조점이 된다. 일본 게임 연구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현재 위치를 점검하고, 미래의 방향을 탐색하며, 동시에 새로운 참여자들을 초대한다. 한국의 게임 연구자와 게임 문화 연구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귀중한 비교 참조점이자, 우리 자신의 게임 연구 지형을 성찰하게 만드는 거울이 될 것이다. 우리는 게임을 어떤 학문적 렌즈로 바라보고 있는가? 국내 게임 문화의 고유성과 글로벌 게임 연구 담론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찾을 것인가? 『크리티컬 워드 - 게임 스터디즈』를 비롯해 다른 나라의 게임 연구 동향을 살펴보는 일은, 이 질문들을 다시 꺼내어 놓게 만드는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디어콘텐츠연구자) 이미몽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닌텐도 게임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몇 개월 전 스팀덱을 할부로 구매하여 열심히 즐기고 있습니다. 경희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선 문화매개를 전공했고, 현재는 일본의 리츠메이칸 대학교 첨단종합학술연구과 박사과정에 재학중 입니다. 게임과 웹툰 등 디지털 미디어 콘텐츠와 문화를 연구합니다.

  • [4회공모전수상작] 게임은 어떻게 우리를 소외시키는가

    소외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인간 집단에서 배제되어 외로움을 느낀다는 뜻으로, 일상생활에서 소외라고 말하면 대체로 이를 의미한다. 반면 다른 하나는 철학 특히 마르크스가 주로 사용한 의미로, 한 인간이 특정 대상에 대한 주권을 상실하여 더 이상 주체로 있지 못 하고 오히려 그 대상의 객체로 전락해,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권리와 정체성이 외부 요소에 의해 좌우되는 상태를 뜻한다. < Back [4회공모전수상작] 게임은 어떻게 우리를 소외시키는가 26 GG Vol. 25. 10. 10.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까 [1] ' 소외 '소외'만큼 현시대의 인간상을 관통하는 단어가 있을까. 소외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인간 집단에서 배제되어 외로움을 느낀다는 뜻으로, 일상생활에서 소외라고 말하면 대체로 이를 의미한다. 반면 다른 하나는 철학 특히 마르크스가 주로 사용한 의미로, 한 인간이 특정 대상에 대한 주권을 상실하여 더 이상 주체로 있지 못 하고 오히려 그 대상의 객체로 전락해,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권리와 정체성이 외부 요소에 의해 좌우되는 상태를 뜻한다. 그런데 전자가 명확한 사회적 사건이라서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한 것과 달리, 후자는 개인 내부의 실존적 문제기 때문에 원인과 해법을 분별하기는커녕 그 존재조차 파악하기 어렵고, 그래서 인류 역사에서 오랜 기간 동안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서 '개인'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자리 잡자 자연스레 그 개인의 문제인 소외 또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됐다. 이후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그 학술적 사회적 중요성은 점점 커지더니, 소외란 -'그저 나쁜 상태'가 아닌- 인간 존재에 내재된 본성임이 밝혀졌다. 이는 곧 소외가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알아낼 열쇠 중 하나라는 의미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인간인 이상 결코 소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탓에 실존적 위기로써 소외가 다뤄진 지 근 2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소외에 시달리고 있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졌다. 사회가 다각화되고 새로운 기술과 위기가 등장함에 따라 전에 없던 소외가 생겨났고 수많은 이들이 일상적으로 소외를 겪게 됐다. 우리 내부에 자리 잡은 외부가 우리와 함께 커졌다. 자동차가 땅을 기어다니는 일개 행성도 이 정도인데, 수많은 우주선이 날아다니는 초거대 우주 정거장은 얼마나 심각할까? <우주 정거장 청소부의 일기> <우주 정거장 청소부의 일기>(이하 <청소부>)는 마치 소외를 게임화시켜 놓은 듯한 작품이다. 제목으로 알 수 있듯이 거대한 우주 정거장을 배경으로 한다. 그곳은 매우 번잡하고 발달한 곳이라서, 곳곳에서 값비싼 상품들이 거래되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능력을 얻을 수도 있는 기회의 땅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플레이어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면 플레이어는 그저 푸른 피부의 중성적인 청소부일 뿐이고, 땅에 떨어진 잡동사니를 주워 소각하거나 팔아서 번 푼돈으로 하루하루를 근근이 연명하는 게 할 수 있는 것의 전부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조차도 할 수 없다. 그녀가 버는 돈으로는 아무리 싼 식품도 버거우며 그렇다고 유사 식품을 사 먹으면 구토하기 일쑤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종족은 정기적으로 '성별을 구매'해야 하기에 또 돈을 써야 하는 데다가, 어쩌다가 빨간 완장을 찬 공권력을 만나면 돈을 빼앗기기도 한다. 그녀는 언젠가는 이 거지 같은 곳을 벗어나고자 성실하게 일하지만, 일 하면 일 할수록 오히려 더 가난해지기만 한다. 그런 주인공에게 더 큰 일이 닥치는데, 보물을 찾기 위해 들어간 지하 던전에서 저주에 걸려버린 것이다. 머리만 둥둥 떠다니는 해골이 나타나 자꾸 옆에서 소리를 지르는데 정말 죽을 맛이다. 설상가상으로, 이 저주를 풀려면 세 개의 석판 조각을 모아야 하는데 그 과정도 전부 너무나 무의미하고 피곤한 일들 뿐이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 했길래? 그녀에게는 이 모든 것이 말도 안 되고 불합리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가장 끔찍한 것은 따로 있으니, 바로 이 우주 정거장 그 자체다. 단언컨대 이 정거장을 설계한 작자는 인류에 대한 끝없는 악의를 가진 천재일 것이다. 도대체가 길을 맙소사 찾을 수가 없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요일명도 아무 단어나 조합해서 만든 듯한 각종 고유 명사도 낯설지만, 그중에서도 정거장 구조는 특히나 낯설어서 도저히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알 수 없다. 고통과 스트레스 . 그게 <청소부>가 플레이어에게 주는 전부다. 세 가지 소외 이렇게 <청소부>는 '안티-어드밴처 장르'답게, 일반적인 어드밴처는 물론이고 보편적인 게임의 틀에서도 크게 벗어나 있다. 플레이어는 성장할 수 없고 활약할 수 없으며 극복하지도 못한 채, 그저 불가해한 원인에 의해 끊임없이 휘둘릴 뿐이다. 여느 게임과 달리 이 게임을 하면서 즐거움이나 재미를 느끼기는 어렵고 오히려 당혹감과 좌절감 그리고 무력감만 느껴질 뿐이다. 그렇다면 이 게임의 의의는 도대체 무엇일까? 명백하게도 <청소부>는 일종의 사회비판물을 지향한다. 실제로 개발자 브래드포드 호튼과 이소벨 샤샤는 게이머게이트를 비롯한 정치적 혐오나 가난한 청년들, 성 정체성 혼란 등의 사회적 문제와 모순들을 본 게임에 담아냈다고 말했다 [2] . 그러나 이에 대해서 일부는 동의하고 일부는 동의하지 않는데, 왜냐면 본 작품은 단순한 사회적 사례를 넘어 인간 본질에 대한 고찰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청소부>는 크게 세 가지 부분에서 플레이어를 소외시킨다. 첫째는 계급 에 의한 소외다. 플레이어는 생명 유지에 필요한 상품과 퀘스트 진행에 필요한 물건을 제외하고는 그 무엇도 구매하거나 얻을 수 없는데, 여기서 핵심은 -애초에 그것들이 게임 내에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고 구매하거나 획득할 수 있는데도 플레이어의 경제적 사회적 계급이 낮기 때문에 완전히 무관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가치 있는 상품을 홍보하는 찌라시라도 주인공에겐 또 하나의 소각할 쓰레기일 뿐이고, 수많은 우주선이 오고 가는 우주 정거장에서 살지만 어디로도 벗어날 수 없다. 플레이어 또한, 향락과 가능성이 가득한 곳에서 살지만 그 무엇도 갈망할 수 없고 그저 삥이나 뜯기는 존재에 불과하다. 플레이어의 권리와 욕구 그리고 정체성이 -그의 자유의지나 합리적 근거가 아닌- 오직 계급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일견 이는 자본주의의 문제로 보이지만 그보다는 인간 사회 자체의 한계라 보는 것이 옳다. 자연적 경제가 원인이든 인위적 정치가 원인이든, 사회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계급에 의한 소외가 있어왔다. 현대 대한민국에는 최고의 인프라를 가진 주거 시설이 즐비하지만 국민 중 다수는 평생을 일해도 그곳에 살 수 없다. 근현대 공산국가에도 안락하고 부유한 삶은 있었지만 이를 누릴 수 있는 이는 당과 가까운 사람들뿐이었다. 중세 봉건사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계급은 물질뿐 아닌 능력, 사상, 민족, 종교, 성별, 거주지, 직업 등 온갖 차이에서 발생해왔다. 따라서 아무리 평등해지고 계급 간의 벽이 낮아진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완전히 동일한 개체가 아닌 이상은- 인간 사회라면 어디든 계급에 의한 소외를 겪을 수밖에 없다. 둘째는 부조리 에 의한 소외다. 퀘스트라고 주어진 것들은 전부 영문을 알 수 없고 전혀 즐겁지 않은 것들 투성이다. 어째서 해골이 따라다니는지도 설명되지 않고 어째서 저주를 풀기 위해서 성인 서적을 사야 하는지 혹은 지하에 숨겨진 오브젝트를 찾아야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아홉 여신의 우상을 모으는 일은 정말로 아무런 단서가 없어서 우주 정거장 곳곳을 무식하게 돌아다녀야 하며, 심지어 마지막 퀘스트는 600 MC의 금액을 요구하는데 이를 벌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20일 넘게 노동만 해야 한다. 그 어떤 행운도 편법도 활약도 없다. 플레이어는 이유도 모른 채, 타인이 하라고 했기 때문에 혹은 운명이 그렇게 정해졌으니까, 괴롭고 무의미한 노동을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해야 한다. 더 어이없는 건 당초 목표인 우주 정거장을 벗어날 돈을 모았음에도 저주를 풀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그 돈을 저주를 푸는 데 써버린다는 사실이다. 플레이하는 입장에서는 참으로 비상식적이기 그지없지만 사실 현실의 우리들도 남 말 할 처지는 아니다. 비록 어느 날 눈을 떴더니 벌레가 됐다거나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소송을 당한 것은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부조리한 운명에 휘둘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탄생이 결정되고, 그 탄생 환경과 어렸을 적의 작은 선택이 인생 전부를 좌우한다. 성장한 후에도 그저 사회가 그렇게 만들어졌고 또 명령을 받았다는 이유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삶을 살고,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끝을 맞이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점은 어느샌가, 의문을 갖거나 거부하는 능력을 상실해 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문지기가 자신을 위해 문을 지키고 있었음에도 문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처럼, 우주 정거장에서 탈출할 수 있음에도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하느라 탈출을 망각한 주인공처럼, 방충망을 열어줬음에도 여전히 '방충망 너머에 밖이 있다'라고 굳게 믿고 방충망을 떠나지 않는 날벌레처럼, 우리는 우리가 만든 운명 속에서 소외당한다. 셋째는 위치 에 의한 소외다. <청소부>에서는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다. 여기서 위치는 정체성으로서의 위치와 공간으로써의 위치 모두를 의미한다. 먼저 정체성으로서의 위치는 정기적으로 성전환을 해야 하는 기믹이 대표적이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성별(로 상징되는 사회적 위치)을 꼭 가져야 한다는 것 자체도 그렇지만, 더 큰 문제는 그 성별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작중에 나오는 성별의 이름이라곤 'CROSSFIT'이나 'DIRT'나 'MEH' 같이 무작위로 정한 듯한 이름뿐이다. (이는 요일명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플레이어는 꼭 사회적 위치를 가져야 해서 식비를 아끼면서까지 위치성을 확보하지만, 정작 그 위치는 정말로 아무런 의미도 없다. 결과적으로 그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위치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그래서 자신이 의지하지도 추구하지도 않는 것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건 공간으로써의 위치다. 상대적으로 과소평가(?) 당했지만 본 작품에서 가장 끔찍한 건 단연코 길 찾기다. 상술했듯 악의적인 천재가 설계했는지, 길을 찾는 건 커녕 여기가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먼저 건물들 사이에서 유의미한 규칙성이나 차이를 찾을 수 없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너무 무작위라서 그 차이가 무의미하다. 둘째로 흔히 '디즈니 위니 Disney Weenie'라고 불리는, 어디서든 보이고 눈길을 끄는 구조물 [3] 이 거의 없다. 그나마 있는 구조물도 주변 건물이 다 높은 탓에 가려져서 볼 수가 없고, 그래서 플레이어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를 파악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는 살짝 스포일러인데- 가운데의 지구라트를 중심으로 매우 유사한 몇 개의 구역이 반복된다. 그런데 플레이어는 도중까지 이 사실을 알 수가 없기에 -상술한 이유 때문에 눈치채기 어렵다- 계속 돌아다녀도 매번 같은 곳으로 돌아오게 되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되고, 결국 전체 구조를 완전히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결국 이 모든 문제는 '유의미한 차이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결국 각 기표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기의가 아닌- 다른 기표와의 차이기 때문에, 차이가 상실되면 기표는 무화無化되고 그 아래에 숨겨져 있던 낯선 실재가 출현하게 된다. 자크 라캉의 '수집가 프레베르의 성냥갑 우화 [4] ', 앤디 워홀의 <캠밸 수프>, 게슈탈트 붕괴 현상, 리미널 스페이스의 반복된 이미지와 공간,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의 '엔들리스 에이트' 등도 마찬가지다. 모든 존재는 위치를 가져야만 하는데, 위치는 유의미한 차이에 의해서만 성립하기에, 끝없는 반복에 갇힌 존재는 위치를 상실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 소외에서 실존으로 의문은 해결되기는커녕 더 깊어진다. 본작이 소외의 결정체라는 건 알겠지만, 어떻게 그게 게임의 의의일 수 있는가? 그저 답답하고 괴롭기만 한 이 게임에 도대체 어떤 효용성이 있단 말인가? 분명 게임의 기본적인 목적은 재미를 주는 것임에도 <청소부>는 재미가 없다. 그러나 <청소부>에서 경험할 수 있는 그 모든 소외는 놀랍게도 재미의 훌륭한 재료가 된다. 왜냐면 우리는 실존할 때 재미를 느끼는데, 역설적이게도 소외는 실존의 단초 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소외의 반대로 하면 실존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소외를 이해할수록 우리는 인간에 대해 알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실존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의미다. 결국 소외와 실존 모두, 서로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인간의 본질일 뿐이기에. 생각해 보라, 소외란 자기 자신을 보장하던 무언가를 상실한다는 것인데, 애초에 다른 무언가에 의해 보장받는 상태 자체가 곧 그 무언가에 의한 소외 아닌가? 그렇다면 자신을 보장하던 것을 상실하는 것은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기회이며, 이는 곧 실존을 의미한다. 물론 인간인 이상 언제나 다른 무언가에 의해 보장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추구해야 할 것은 -언제나 독립되어 있는 완전한 상태가 아니라- 무엇에 보장받던 '그것은 그저 일시적 수단일 뿐 결코 영구적 본질이 아님'을 항상 인식하고 그럼으로써 자유의지를 잃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안락한 보장 상태에서 박탈당하는 사건, 즉 소외다. 특정한 직업이나 사유재산 같은 물질을 잃었을 때 진정한 자유가 가능해지고, 말도 안 되고 당혹스러운 상황에 쳐할 때 스스로에 의한 (그리고 대한) 성찰을 할 수 있게 되며, 고정된 좌표를 상실하고 위상적 비전체로 떨어질 때 비로소 자신의 위치를 직접 결정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런 얘기는 너무 두루뭉술하고 추상적일뿐더러 <청소부>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다른 예시를 들어야 한다. <킹덤컴 시리즈>나 <언더월드>같이 높은 자유도의 오픈월드 RPG가 재밌는 것은, 게임이 상당히 복잡한 데 비해 플레이어의 계급과 능력치가 낮은 탓에 초반에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지만(소외), 점차 성장하고 적응하다 보면 계급의 격차를 극복하거나 혹은 반대로 계급의 벽을 우회하여 자유롭게 활동(실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넷핵>이나 <슬레이 더 스파이어> 등의 로그라이크 '계열' 게임들은 실수 한 번으로 자신의 모든 걸 잃을 수 있지만(소외), 오히려 그렇기에 특정 빌드나 플레이 스타일에 구속되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할(실존) 수 있다. 마찬가지로 <스탠리 패러블>이나 <페이퍼 플리즈>와 같은 게임이 재밌는 것은, 처음에는 근거 없고 불합리한 명령이 부과되고 플레이어는 이를 따라야만 하지만(소외), 동시에 그것을 거부하고 반항하며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실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우터 와일즈>, <섹시 브루탈>, <포가튼 시티> 등의 타임 루프물은 훨씬 더 노골적이다. 이 게임들은 모두 플레이어의 의지와 무관하게 똑같은 사건이 영원히 반복되고 그래서 게임 내 모든 차이가 소멸하는 위기에 처하는데(소외), 이때 플레이어는 각종 활동과 추론을 통해 반복되는 연쇄를 끊고 차이(실존)를 다시 불러낼 수 있다. 이 게임들 속에서 플레이어들은 실제로 실존한다. <청소부>에서 경험한 소외가 진짜인 만큼, 이 게임들에서의 실존 또한 진짜다. 하지만 이 중에서도 소외의 효용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례는 단연코 <레인 월드>다. <레인 월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척박한 야생을 배경으로 하는 생존 플랫포머 게임으로, 플레이어는 끔찍한 조작감의 하얀 생물 '슬러그캣'으로써 살아남아야 한다. 이 세계의 생태계는 매우 유기적이고 적대적이어서 각양각색의 동식물과 현상이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데, 문제는 슬러그캣이 그 먹이 피라미드의 거의 밑 바닥이라 대부분의 생물이 천적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게임의 무대는 오래전에 멸망한 인류가 남긴 정체불명의 구조물과 그 위에 퇴적된 자연 지형이라 맵이 극도로 복잡한데, 목적지를 가르쳐주는 가이드도 거의 없어서 길 찾기는커녕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파악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정기적으로 내리는 어마어마한 양의 폭우는 피난처를 제외한 모든 공간과 그 위의 생물을 -물론 슬러그캣도- 집어삼켜 버리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죽지 않으려면 매일매일 벌레를 잡아먹고 피난처를 찾아야만 한다. 말 그대로 낯선 세상에 피투彼投되어 배타적 환경에 소외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째서 이렇게 디자인했을까? <언더월드>처럼 플레이어가 고통받기를 바랬던 것일까? 이에 대하여 <레인월드>의 개발자 요아르 야콥슨Joar Jakobsson은 ' 맨해튼의 쥐 ' [5] 라는 개념을 언급한다. 지하철에 살고 있는 쥐는 그 지하철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떤 의도로 만들어졌는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쥐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는 쥐에게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지하철을 마치 제 집처럼 돌아다니는데, 어쨌거나 쥐는 무엇이 자신에게 위험하고 유용하고 맛있는지를 알며 결국 중요한 건 그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쥐의 인식은 지하철을 건설하고 이용하는 인간들의 인식과 다르겠지만, 배부르기만 하다면 쥐에게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다. 그리하여 더 이상 지하철의 낯섦과 미지는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쥐의 방식과 세계관이 지하철을 가득 채운다. '맨해튼의 쥐'가 '쥐의 맨해튼'으로 역전되는 것이다. (개발자가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에서 유학했을 때의 경험도 이와 같은 맥락을 가진다) <레인월드>의 플레이어도 마찬가지다. 막 게임을 시작하면 알 수 없는 생물과 공간에 휘둘려 고통받을 뿐이지만, 점차 적응하면 할수록 뭐가 좋고 나쁘며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알게 된다. 여전히 그것들의 정체는 모르지만, 어떤 행동과 선택이 자신에게 득이 될지는 안다. 어느샌가 미로 같던 맵을 앞마당처럼 돌아다니게 되더니, 심지어는 자신을 잡아먹던 포식자까지 사냥할 수 있게 된다. 그야말로 피투성에서 기투로, 소외가 실존이 된 것이다. 게임만이 줄 수 있는 재미 이쯤에서 제목을 바꿔야 할 듯하다. 소외와 실존의 작동 원리가 완전히 동일하다면, '게임은 어떻게 우리를 소외시키는가?'라는 질문과 '게임은 어떻게 우리가 실존할 수 있게 해주는가?'라는 질문 또한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그리고 그 대답은 이미 둘러본 바 있다: 게임은 향유자가 직접 참여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매체기 때문이다. 영화나 소설 같은 미디어는 작품이 향유자에게 일방적으로 작용하고, 그래서 작중에서 소외나 실존이 아무리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하더라도 수신자의 입장에서는 아주 실감 나는 대리 체험에 불과하다. 반면 <청소부>에서는 플레이어가 직접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생존하기 위해 매일 쓰레기를 줍는 노동을 하는 것도, 비싸고 좋은 상품을 사려다가 단념하는 것도, 제대로 된 음식과 값싼 유사 식품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도, 상한 음식과 젠더 캡슐을 먹어야 하는 부조리에 얽매이는 것도, 불합리하고 지루한 퀘스트를 묵묵히 진행하는 것도, 이 모든 것을 매일 일기로 쓰는 것도 전부 플레이어의 몫이다. 그렇기에 좌절감과 무력감을 느낀 채 소외되는 것도 -주인공이 아닌- 플레이어 자신이다. 소외를 실존으로 승화시킨 게임들도 마찬가지다. 플레이어가 직접 실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능력과 자유의지를 발현해야 하지만, 이는 소외를 스스로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기에 먼저 소외를 직접 당해야 한다. 그리고 소외를 당하기 위해서는 부조리와 불합리에 휘둘려야 하는데, 이는 오직 플레이어가 직접 그 세계에 참여하고 맞부딪힐 때만 가능하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자신을 발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상실해야 하고, 자신을 상실하기 위해서는 먼저 거기에 자신이 있어야 한다'라고. 그렇기에 플레이어가 직접 소외당하고 실존하는 경험은 참여형 미디어인 게임에서만 가능하고, 마찬가지로 자유의지를 발현할 때만 느낄 수 있는 '실존적 재미' 또한 오직 게임의 전유물이다. (때로는 소외도 그 자체로 재미가 된다) 그런 점에서 <청소부>가 선사한 그 끔찍한 경험에는 제대로 의미가 있다. 게임이 실제로 플레이어를 소외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게임이 플레이어의 자유의지와 정체성에 관여할 수 있음을 의미하며, 이는 곧 게임이 플레이어를 실존하게 해줄 수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기 때문이다. 비록 <청소부> 자체는 두 번 다시 플레이하고 싶지도 추천하기도 힘든 게임이지만, 그 시도는 게임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때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자꾸 소외네 실존이니 반복하는데, 그렇다면 게임의 의의는 실존이라는 것인가? 실존이 재미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인가? 이는 정말로 바보 같은 질문이다. 왜냐면 실존이 곧 재미고 재미가 곧 실존 이기 때문이다. 분명 실존이라는 개념은 학술 용어로 자주 쓰이고 인간 존재에게 있어서 핵심적이기에, '오락'처럼 가벼운 개념과는 상반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오락도 인간의 일부고 오락에서 느끼는 재미 또한 그렇다. 재미 중에서는 크리쳐 100마리를 도살하거나 0.02퍼센트의 확률을 뚫고 상품을 얻는 재미도 있지만, 기존의 자신으로부터 해방되거나 미지 너머의 새로운 곳으로 도약하는 재미도 있다. 지금까지 계속 얘기했던 바로 그 재미 말이다. 그렇다면 실존이 재미있지 않을 이유는 무엇이고, 재미를 위해 실존하지 않을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니 인간 존재를 고찰하는 것과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중요하냐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어차피 둘은 게임 속에서 하나가 되니까. 분명 본 글의 의의 중 하나는 '게임이 인간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 탁월한 도구'임을 설파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실존과 재미가 본질적으로 같은 뿌리를 공유함을 증명하는 시도이기도 하며, 궁극적으로는 게임을 더욱 재밌게 만들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몰색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게임이 <청소부>와 같거나 영향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게임이 줄 수 있는 재미에는 실존적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외의 재미들도 모두 가치있고 필요하다. 게다가 실존적 재미는 기본적으로 소외를 전제하기 때문에 호불호가 크게 갈릴 수밖에 없다. 불친절함은 무력감으로 부조리함은 당혹감으로 불합리함은 불쾌함으로 이어지기 쉽다. 즐거워야 할 게임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싶은 사람은... 적어도 절반을 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소외당하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끊임없이 실존해야 한다. 왜냐면 그럴 때 인간 존재의 본질에 더 깊이 다가갈 수 있고, 오직 게임만이 개척할 수 있는 새로운 예술이 시작되며, 무엇보다 훨씬 짜릿하고 차원이 다른 재미를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게임이여, 계속해서 우리를 소외시켜다오. '방황해 보지 않으면 자각에 이르지 못하는 법이야' [6] [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317행 [2] https://www.vice.com/en/article/diaries-of-a-spaceport-janitor-asks-players-to-find-the-beauty-in-garbage/ [3] https://mouseplanet.com/the-origin-of-the-disneyland-wienie/5245/ [4] 자크 라캉, <세미나 7. 강의 8> (1960.01.20) [5] https://www.vice.com/en/article/rain-world-is-like-stalker-but-a-platformer-and-youre-a-rodent/ [6]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7847행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 류호준 게이머. 오락으로써의 게임도, 작품으로써의 게임도, 실험으로써의 게임도 모두 중시합니다.

  • [Editor's View] 연결되고 재현되는 신체, 그리고 비평과 대중 사이를 잇는 가교로서

    사람으로 태어난 게이머에게 몸은 필요조건입니다. 게임 소프트웨어는 상호작용을 요구하며, 이에 대해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신체의 기능을 사용해 응답해야 합니다. 사람이 게임 안쪽에 재현되는 경우라면 신체의 중요성은 더 무거워집니다. 게임 속에 그려진 신체는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사람에 의해 조작되는 신체이며, 이 결과물들은 결국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신체를 사고하는 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 Back [Editor's View] 연결되고 재현되는 신체, 그리고 비평과 대중 사이를 잇는 가교로서 22 GG Vol. 25. 2. 10. 사람으로 태어난 게이머에게 몸은 필요조건입니다. 게임 소프트웨어는 상호작용을 요구하며, 이에 대해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신체의 기능을 사용해 응답해야 합니다. 사람이 게임 안쪽에 재현되는 경우라면 신체의 중요성은 더 무거워집니다. 게임 속에 그려진 신체는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사람에 의해 조작되는 신체이며, 이 결과물들은 결국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신체를 사고하는 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디지털게임 연구와 비평의 많은 부분들은 실제로 게임과 신체의 관계에 주목합니다. 크게는 두 가지, 게임 소프트웨어와 조응하는 게임 외부의 신체와 게임 소프트웨어 안에 재현되는 게임 내부의 신체가 그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신체는 게임과 맞닿으며, 디지털게임의 이해를 위한 여러 요소들 중 신체와 게임의 관계는 형태소에 가까운 수준으로 우리의 게임에 대한 이해를 구성합니다. 게임에 처음 신체가 그려지기 시작한 초창기 게임에서부터 이러한 신체에 대한 관찰과 재현, 연결은 이어져 왔습니다. 조이스틱이라는 장치의 출현, 게임 내 체력 바의 구현, 온라인게임에서의 피로도 문제 등은 결코 게임 안에 독립적으로 디자인된 요소가 아닌, 현실의 신체를 모사하고 재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결과물들입니다. GG 22호는 그렇게 중요하면서도 아직 우리가 깊이 살펴보지는 못한 주제인 게임과 신체의 관계를 재조명합니다. 게임과 신체라는 테마로 글들을 모아내는 과정은 다른 주제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사실 이미 많은 것들이 이야기된 상황이지만 이를 하나로 모아 좀더 깊게 탐구하는 과정만이 모자랐음을 깨닫습니다. 수많은 게임 - 신체 사이에 대한 연구결과들과 사유의 조각들이 존재했지만 이를 통합하고 함께 이야기하는 공간이 부족했다는 것은 게임제너레이션이 해야 할 일이 아직 한참 남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디지털게임은 이제 뉴미디어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대중화, 보편화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의 매체가 된 만큼이나 이제 게임에 대한 비평과 연구는 적지 않은 분량으로 쌓여갑니다. 다만 이미 축적된 전문 연구자들의 논의를 어떻게 대중사회로 끌어 오고, 이를 통해 게임 제작자와 플레이어 모두에게 새로운 변화의 동력을 제공하는 과정은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반성 속에 저희는 다음 호를 준비하겠습니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학술과 대중이라는 어느 순간부터 유리된 듯한 둘 사이의 간극을 좁힐 수 있는 가교로서 GG는 끝없이 둘 사이를 왕복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드림.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게임평론가이자 연구자. 2015년부터 게임을 업으로 삼아, 평론가로서는 게임이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을, 연구자로서는 상품으로서의 게임이 사회 안에 자리잡는 구조를 살펴본다. 『81년생 마리오』(2017), 『현질의 탄생』(2022) 등을 썼고, 〈다큐프라임〉(EBS)을 비롯한 다큐멘터리와 여러 매체 연재에 참여했다. 디지털게임을 시간권리상품으로 분석한 연구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게임연구소 '드래곤랩'대표를 맡고 있으며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 적정한 게임가격이란 무엇일까?

    흔히들 스팀 라이브러리를 두고 하는 농담에는 ‘옛날에는 게임을 사서 안 했고, 요즘에는 게임을 사서 안 한다’는 말이 있다. 오랜 불법복제가 만연했던 시대를 지나 ESD플랫폼으로의 전환을 맞은 PC게임 이용자들은 한때는 게임에 돈을 내지 않았고, 지금은 돈을 써 놓고도 막상 플레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흥미롭게 뒤튼 말이다.  < Back 적정한 게임가격이란 무엇일까? 09 GG Vol. 22. 12. 10. 흔히들 스팀 라이브러리를 두고 하는 농담에는 ‘옛날에는 게임을 사서 안 했고, 요즘에는 게임을 사서 안 한다’는 말이 있다. 오랜 불법복제가 만연했던 시대를 지나 ESD플랫폼으로의 전환을 맞은 PC게임 이용자들은 한때는 게임에 돈을 내지 않았고, 지금은 돈을 써 놓고도 막상 플레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흥미롭게 뒤튼 말이다. 라이브러리를 차고 넘치게 만들, 사람의 24시간으로는 미처 다 플레이할 수 없을 정도의 타이틀을 ESD플랫폼에서 구매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만큼 게임을 구매하는 데 드는 비용이 실제 플레이가 가능한 여가시간을 한참 넘을 정도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확실히 ESD플랫폼이 보편화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게임 타이틀의 가격은 싸졌다고 볼 수 있는 부분들을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게임 가격이 정말 싸졌다고 말하기는 또 어렵다. 이른바 AAA급 게임 타이틀의 가격은 정규발매를 기준으로 한다면 늘 천천히 오르고 있고, 디럭스판이나 한정판 같은 경우에는 이제 10만원을 훌쩍 넘어가는 모습도 보기 어렵지 않다. 싼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비싼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게임의 적정한 가격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한 편의 디지털게임 제작에는 적지 않은 인력과 자원이 들어가고, 적정한 가격은 제작자에겐 충분한 수익을 안겨줌으로써 더 나은 게임의 발전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하고 이용자에겐 자신의 게이밍을 더욱 즐겁고 풍성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좋은 게임을 만족스러운 가격에 이용할 수 있게 해 주는 합의점이기 때문이다. 게임유통에서 정규가격을 짚는 일의 어려움 지나온 게임의 발전사를 더듬어보면 애초부터 게임의 정가라는 것이 매우 자의적이고 유동적인 무엇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케이드 오락실은 동전 한 개에 일정한 도전횟수를 제공받는 방식으로 일련의 정가 시스템을 구축했지만, 이는 플레잉타임이라는 기준으로 살펴보면 플레이어의 숙련도에 의해 가치의 변동이 크게 일어나는 방식이기도 했다(아마도 오래된 게이머들은 동네 고수가 오락실 주인에게 동전 하나 받고 쫓겨나는 장면들을 목격했을 것이다). 아케이드 게임 하나를 클리어하기 위해 필요한 금액은 사람마다, 게이머의 숙련도마다 다르게 잡히곤 했다. 물론 모든 게이머가 특정 게임을 클리어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는 점도 생각해볼 지점이긴 하다. 그나마 콘솔, PC의 패키지 기반 유통체계에서는 정가라는 지점이 도드라질 수 있었다. 롬팩 한 개, 디스켓 한 장에 담긴 소프트웨어의 가격은 대체로 고정되었고, 플레잉타임과 무관하게 패키지 하나에 얼마라는 대략의 평균가격대가 존재했다. 하지만 온라인 유통이 보편화되는 시대에 들어 패키지 방식의 정가는 상설할인에 가까운 대규모 할인 시스템 속에서 다시 또 요동치기 시작했고, 최근 들어서는 구독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다시금 애매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온라인/모바일 시대 이후 보편화된 부분유료결제에 이르면 이제 게임의 정가를 논하기 어려운 처지에 이른다. 같은 게임을 같은 시간 플레이해도, 숙련도의 높고 낮음을 제해도 이제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의 소비금액대가 같은 게임을 둘러싸기 때문이다. 똑같이 우마무스메를 해도 한달에 100만원을 쓰는 사람과 무과금 이용자 사이에서 우리는 이 게임의 정가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먼저 짚고 가야 할 전제는 정가와 적정비용이 다르다는 당연한 사실이다. 한 사람이 게임에 얼마를 쓰는 것을 적절하다고 판단하는가는 정가의 문제가 아니라 적정비용의 문제다. 오락실에 갈 때 얼마만큼의 동전을 들고가는가는 개별 게임에 넣는 동전의 액수에 대한 총합으로 결정되는 문제이지 개별 투입동전의 단가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정가는 무엇이느냐는 이야기는 그래서 적절한 소비금액이 얼마인가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생산 – 유통 – 소비 과정에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교환의 시너지를 이루며 상생할 수 있는 가격이 어디에 형성되느냐는 질문이 된다. 물론 이 또한 개별 소비자들의 적정 소비비용에 의해 영향받을 수 있겠지만, 우선순위는 생산자 – 소비자 사이에 맺히는 전통적인 가격에 의한 교환관계의 문제에 잡힌다. 이런 전제를 들고 이야기를 더 풀어나갈 때 짚어야 할 또 하나의 전제는 단일재화로 유통되지 않는 오늘날의 디지털게임 유통방식에 관한 문제다. 게임은 과거 아케이드의 등장 이래 대여 서비스(아케이드) – 재화의 구매(가정용 콘솔과 PC) – 대여 서비스(서버-클라이언트 중심의 온라인/모바일게임)을 거치며 재화 혹은 용역의 입지를 그때그때 바꿔온 바 있었다. 구매와 대여라는, 아주 뭉뚱그리자면 서로 다른 이 두 유형의 게임 소비 방식이 서로 엇갈리고 또 공존해 있는 현실에서 정가라는 문제를 다루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여기에 수시로 존재하는 할인이벤트와 구독 문제까지를 포함한다면 사실상 게임에서 ‘정가란 무엇이다’, 혹은 ‘게임의 정규가격은 다음의 요소를 고려해 결정할 수 있다’는 단언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장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생산자가 자신이 판단하기에 적정한, 다시말해 산정한 기간 안에 제작비를 회수하고 적정한 이윤을 낼 수 있는 바운더리 안에서 이용자 수와 객단가를 제시하고, 제시된 가격에 소비자가 구매와 이용으로 반응하는 시장결정을 통해서만 짚을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굳이 이 어려운 일을 생각해보자고 제안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정가 문제를 생각해야 하는 이유 한국 소비자물가지수는 총 480개의 재화와 용역에 대한 실가격을 조사해 물가상승률을 알아보기 위한 지표로 삼는 지수다. 여기에는 오락 및 문화라는 카테고리로 총 47개의 항목이 들어가는데, 악기, 컴퓨터 및 컴퓨터 수리비, 영화관람료, 서적, 여행비 등이 포함된다. 갈수록 게임이용률이 늘어가고 있다는 조사가 적지 않고, 또 한 게임에 몇 억을 쓰는 일이 각종 미디어를 통해 보기 드물지 않은 사례로 나타나고 있는 상황에서 정작 게임이용료는 소비자물가지수에는 아직 포함되지 않은 상황이다. 그나마 유관한 항목이라면 아마도 PC방이용료 부문과 온라인콘텐츠 이용료일 것이지만, 이 또한 게임부문 물가의 정확한 반영이라고 이야기하기 어려움은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게임이 정말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미디어이자 일상의 여가로 자리잡았다고 이야기하려면 그에 따른 여러 후속조치들이 뒤따라야 한다. 각종 제도의 정비와 인프라 구축은 비단 게임문화의 발전과 확산 뿐 아니라 게임이 동시대의 유의미한 여가이자 문화활동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프라 측면에서의 정비에는 게임의 소비에 대한 경제적 고찰도 포함된다. 한 달에 사람들은 게임에 얼마만큼의 비용을 쓰는지, 최고값은 얼마이고 최저값은 얼마인지와 같은 기초조사는 이미 게임이용자 실태조사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중이지만, 이것이 비단 게임에 머무르지 않고 좀더 보편적인 경우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앞서 예로 든 소비자물가지수와 같은 지표에의 산입이다. 영화관람료와 TV, 휴대용멀티미디어기기가 항목으로 들어있는 상황에서 게임소프트웨어 가격의 이슈 또한 이제는 포함되어야 할 필요를 맞은 시대다. 단지 게임값을 물가에 연동시킨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게임이 사회적, 시장적 측면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이제 각종 지표에 포함하여 반영해도 될, 아니 이제는 포함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는 이야기다. “게임의 적정한 가격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은 그런 차원에서 의미지어진다. 적정가격을 묻는 일은 게임이용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에 머물지 않고, 여가와 문화라는, 산업화 시대를 지나 정보화 시대로 진입한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 갈수록 비중을 키워나가는 카테고리 안에서 다른 요소들과 관계맺는 게임의 좌표를 향한 질문이다. 다른 여가/문화생활에 비해 게임가격은 어떠한가? 여러 문화생활 중 게임에 비용을 쓰는 이유는 상대적으로 다른 매체나 여가에 비해 어떤 소구점이 있었는가? 이러한 질문은 단지 커뮤니티 게시판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이제 사회를 바라보는 여러 관점 안에 포함되어야 할 질문이 되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게임의 정가라는 질문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정가가 무엇인지를 쉽게 정의내릴 수는 없지만, 정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필요한 많은 조건과 변수들을 질문 앞에서 고민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과도한 현질이 가져오는 폐해이야기할 때나, 이름뿐인 ‘프리 투 플레이’의 허상을 짚을 때나 결국 이야기는 ‘그래서 게임에 정가라는 건 뭔데?’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가격 이상으로, 우리는 ‘적정한 정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시대를 맞았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게임평론가이자 연구자. 2015년부터 게임을 업으로 삼아, 평론가로서는 게임이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을, 연구자로서는 상품으로서의 게임이 사회 안에 자리잡는 구조를 살펴본다. 『81년생 마리오』(2017), 『현질의 탄생』(2022) 등을 썼고, 〈다큐프라임〉(EBS)을 비롯한 다큐멘터리와 여러 매체 연재에 참여했다. 디지털게임을 시간권리상품으로 분석한 연구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게임연구소 '드래곤랩'대표를 맡고 있으며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 BIC 2022 탐방기

    9월 1일부터 9월 4일 까지 부산역 근처 부산항 국제전시 컨벤션센터에서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인디게임 행사가 열렸다. 부산 인디 커넥트 페스티발이다. 올해로 8번째를 맞은 이 행사는 코로나로 인해 2020년 은 완전 비대면으로, 2021년엔 사전선정자만 오프라인으로 참여할수 있게 한정적으로 열렸다. 코로나가 완저히 종식되지는 않았지만 사회적 거리두기가 점진적으로 해제되면서 3년만에 완전 오프라인으로 열린 셈이다. < Back BIC 2022 탐방기 08 GG Vol. 22. 10. 10. 부산인디커넥트 페스티발이 오프라인으로 돌아왔다. 9월 1일부터 9월 4일 까지 부산역 근처 부산항 국제전시 컨벤션센터에서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인디게임 행사가 열렸다. 부산 인디 커넥트 페스티발이다. 올해로 8번째를 맞은 이 행사는 코로나로 인해 2020년 은 완전 비대면으로, 2021년엔 사전선정자만 오프라인으로 참여할수 있게 한정적으로 열렸다. 코로나가 완저히 종식되지는 않았지만 사회적 거리두기가 점진적으로 해제되면서 3년만에 완전 오프라인으로 열린 셈이다. 판데믹 이전에 마지막으로 열렸던 2019년 행사는 부산항 국제전시 컨벤션센터로 옮겨서 시작한 첫번째 행사였다. 이전에는 부산 영화의 전당 야외에서 행사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장소로 옮긴 BIC페스티발은 전자기기가 중심이 되는 게임 시연 행사가 야외에서 진행되면서 생기는 많은 문제점이 해소되면서 앞으로의 발전이 기대되는 상황이었지만 2020년 12월부터 코로나가 전세계에 유행할지 누가 알았을까. 부산항 이전의 행사에는 참여를 한적이 없어 2015년의 부산 문화 콘텐츠 컴플렉스의 좁지만 뜨거운 분위기나 2018년 까지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야외에서 벌어지는 날씨와의 전쟁 같았던 행사는 전해듣기만 했었고 2019년의 컨퍼런스와 함께 진행된 행사를 보면서 미리 올껄! 이란 후회와 함께 좀 더 자주 찾아올 결심을 했었더란다. 결국은 3년만에 행사를 찾아오게 되었다. 첫인상이라면 역시 어떻게 도착하는가 일텐데 부산항 국제 컨벤션센터는 부산역이랑 가깝지만 그 사이에 큰 도로가 있고 도보가 정비되어있지 않아 짧은 직선 거리에도 불구하고 교통이 편하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2022년에는 부산역에서 부산항까지 구름다리가 생겨서 매우 쾌적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마지막 부산항과 구름다리의 연결 부분이 공사중이라 구름다리만으로는 행사장에 도착할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보로 10분이면 행사장에 도착할수 있다는 점은 큰 약점이 해결된 느낌을 주었다. * 아스티 호텔 27층에서 찍은 부산역과 부산항을 연결해주는 구름다리 행사장 구성도 변화가 있었다. 2019년 행사에서는 전시공간 두개중 한 공간만 사용하고 나머지 공간은 컨퍼런스로만 사용했기 때문에 좀 더 밀도가 높고 좁은 분위기였지만 이번엔 컨퍼런스는 중앙의 트인 공간에서 진행하고 양 쪽 홀을 모두 전시에 사용하면서 상대적으로 쾌적한 관람이 가능했다. 관람자수는 2019년에 비해 더 많았지만 인구밀도는 상대적으로 낮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편 이런 행사장의 분리는 행사장이 복도와 공간이 분리되어있어 미처 문을 놓친 경우 행사장이 두개라는 것을 인지 못했던 경우도 있어 앞으로는 개선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 BIC 페스티벌 행사장. 가장 사람이 많은 토요일 오후 행사장의 분위기는 BIC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새로울게 없겠지만 지스타같은 다른 대형 게임행사와는 다른 분위기를 보여준다. 대형 행사가 게임을 보여준다에 가깝다면 BIC 페스티벌이 주는 행사의 경험은 좀 더 체험에 가깝다. 대형 게임행사에서는 대형 부스에서 도우미들이 몇십대가 늘어져있는 체험 공간에서 같은 게임을 AAA 신작을 해보고 큰 화면으로 게임 트레일러를 구경하는 곳이라면 BIC에서는 작은 부스에서 대부분 게임들을 플레이 하며 게임 플레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게임을 도와주는 도우미 대신 개발자들이 매의 눈으로 플레이하는 관람객들을 살펴보며 게임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다른 사람들이 플레이하면서 어떤 문제들이 발생한는지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가끔은 부담스러울 때가 있을 정도이다. B2B관이 아니면 외국인을 찾아보기 힘든 다른 행사와도 분위기가 좀 다르다. 눈에 확 띄는 외국인들도 있지만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온 개발자들도 자연스럽게 행사장에서 영어로 게임을 권하는 것도 BIC만의 독특한 분위기다. 로컬 행사이지만 글로벌 행사인 것이다. * 많은 부스에서 개발자가 직접 게임에 대해 설명해준다. 사진은 천궁 부스. 당신이 개발자라면 인디게임을 만들때 애로사항에 대해 묻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을 꼽는다. 주류 게임과 벗어나서 자신만의 게임을 만드는 것은 힘드고 외로운 일이다. 그래서 다른 인디게임 개발자들과 만나서 자신들의 게임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은 매우 소중하다. 그런 점에서 BIC는 그러한 개발자들에게는 매우 소중하고 필요한 행사다. 하물며 한국 밖의 개발자들과도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는 드물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게임을 보여주고 상대방의 게임을 보면서 의견을 주고 받을수 있는 자리가 드물다보니 개발자들의 파티 참여도도 높은 편이다. 비즈니스 데이 첫째 날은 행사장의 분위기가 뭔가 맞지 않았는지 지속되지 않았지만 둘째 날의 인디라 파티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정말 많은 개발자들이 뜨거운 분위기로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코로나 이후 이정도 규모의 개발자가 모였던 것은 처음이 아니었을까. 인디 게임 개발자에게 BIC는 아무래도 놓칠수 없는 자리가 될 것이다. * 인디라 행사 당신이 개발자의 팬이라면. 코로나가 전세계를 뒤덮기 직전에도 오프라인 게임 행사에 대해서 비관적인 의견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지금도 그렇다. 코로나 덕분에 취소되는 행사들에 대해서 “명예로운 죽음”이다. 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을 정도이다. 코로나로 인해 진행되지 못하던 행사들이 다시 오프라인으로 진행되면서 그동안 못한 외부활동에 대해 복수하려듯이 몰려나오는 관객들 덕분에 당분간은 오프라인 행사의 시대가 끝났다는 이야기는 들어가겠지만 여전히 대형 게임사들이 자체 행사를 준비하고 신작 공개들이 꼭 게임쇼에서만 진행되지 않으면서 게임쇼의 새로운 매력을 개발하지 못하는 이상 이러한 흐름은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인디게임 행사는 그 분위기가 좀 다르다. 게임회사와 이용자간의 상호신뢰는 무너진 지 오래고 열성 팬을 가지고 있는 게임회사들은 굳이 다른 팬들까지 신경을 써야하는 게임쇼보다는 단독행사를 통해 팬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굳이 행사장에서 까지 트럭을 보고 싶지 않은 회사들은 앞으로는 참가 여부에 대해 고민해야 할지도 모른다. 인디게임을 둘러싼 분위기는 AAA게임과는 사뭇 다르다. 인디게임의 수익모델이 대형 게임사의 약탈적이라고 부를수 있는 부분유료화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개발사와 직접 부대끼는 작은 규모의 팬덤 덕분일 수도 있다. 좋아하는 개발자를 직접 만나서 게임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기회가 흔하지 않다는 것을 감안하면 어떤 개발자의 팬이고 그 개발자가 자신의 게임을 들고 BIC에 참여한다면 놓칠수 없는 기회가 될 것이다. 게다가 오면 다른 인디게임들도 많다. 새로운 게임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큐레이팅된 게임들을 오프라인으로 볼 수 있는 장소는 그만큼 좋아하는 게임을 새로 만날 기회를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오프라인 행사가 가지고 있는 장점은 다른 것도 있다. 게임에서 특히 눈을 끌었던 〈MORSE〉는 키보드나 게임패드로도 진행에 무리가 없지만 실제 모스 부호 송신기로 게임을 즐기는건 국내에선 BIC 외에선 힘들었을 것이다. 터틀크림의 〈RP7〉도 마찬가지다. 직접 만든 7개의 스틱이 달린 컨트롤러는 역시 행사장 외에서는 체험할 수 없는 독특한 경험이다. 이 경험들은 아마도 실제 게임을 구매해도 개인적으로는 하기 힘들 다는 점에서 오프라인의 경험이 특히 아쉬워진다. * 좌: MORSE와 함께 전시된 모스 송신기 우: RP7 전용 컨트롤러 로컬의 글로벌 행사 BIC 참여작들은 더 이상 국내에 한정되어있지 않다. BIC 수상작들이 도쿄 게임쇼의 센스 오브 원더 나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을만큼 BIC의 문을 두드리는 해외 인디게임들도 많아졌다. 이번 BIC의 특징으로 PC게임의 강세를 꼽는 사람들도 있다. 도쿄 게임쇼에서도 비슷한 평가가 있었는데 스팀에서 도쿄 게임쇼 페이지가 생겨나기도 했다. 스팀에서는 게임 행사들이 있을 때 행사 참여작들만 모아서 보여주는 특설 페이지들을 만들어주기도 하는데, 최근엔 독일 게임스컴이나 일본 도쿄게임쇼 페이지가 있었다. 이번 BIC 참여작들 중에서도 스팀에 이미 판매중인 게임들이 상당수 전시되어있어서 스팀에 BIC 특집 페이지가 있었어도 좋았을텐데 아쉬움이 있지만 몇 년 안으로는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든다. 한국에는 다 비슷비슷한 게임만 있다고 외치는 사람들도 이곳에 오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 모두들 생존을 위해 글로벌로 나가야 한다고 외치지만 로컬이란 지지대가 있느냐 없느냐는 주어지는 기회의 숫자의 차이를 만들 것이다. BIC를 지지대 삼아 다른 나라의 인디게임 행사를 참여하는 게임도 나올 수 있고 이를 기반으로 성장하는 게임개발자들도 생겨날 수 있다. BIC는 한국에선 부분유료화 모바일 게임만 살아남을수 있다는 편향된 시장에서 새로운 시도로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에게 버틸 수 있고 더 새로운 시장으로 나갈 수 있는 항구가 될 수 있는 행사가 아닐까 싶다. 이런 행사가 항구에서 열리는 것도 재미난 우연일 것이다. BIC페스티벌 2022는 행사에 대한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드는 행사였고 꼭 필요하고 한 번쯤은 와봐야 하는 행사가 아닐까 싶다. 누구나 여기서 자신이 좋아할 수 있는 게임을 발견하길 희망한다. ** 이 글의 필자는 BIC 컨퍼런스 강연자로, 행사진행간 숙박지원을 받았음을 알립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개발자, 연구자) 오영욱 게임애호가, 게임프로그래머, 게임역사 연구가. 한국게임에 관심이 가지다가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것에 취미를 붙이고 2006년부터 꾸준히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고 있다. 〈한국게임의 역사〉, 〈81년생 마리오〉등의 책에 공저로 참여했으며, 〈던전 앤 파이터〉, 〈아크로폴리스〉, 〈포니타운〉, 〈타임라인던전〉 등의 게임에 개발로 참여했다.

  • 오래된 코옵에 관한 소고

    맥락의 큰 단절이라 할만한 흐름은 스마트폰, SNS, 유튜브 시대에 이르러 왔다. 이 시기 인터넷은 초연결의 시대에 도달한 후 마치 압력이 가득한 풍선이 뻥 터지는 것처럼 되었다. 원심력이 강화되면서 개별화, 파편화, 탈맥락화가 인터넷 문화의 핵심이 되었다. < Back 오래된 코옵에 관한 소고 28 GG Vol. 26. 2. 10. 새해도 되고 하였으므로 다소 감상적으로 접근해보려고 한다. 주제는 ‘코옵(co-op)’이다. 코옵이 뭘까? 단지 게임 설계를 이르는 말에 그칠 것은 아닌 듯 하다. 의미를 따지다 보면 게임을 매개로 한 전반적 활동 전체로 의미가 확장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나는 1982년에 태어났다(사정이 있어 공식적으로는 1983년생으로 살고 있다). 동시대를 살아온 또래들이 갖고 있는 어릴적 게임의 추억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첫째는 혼자 컴퓨터로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나 던전 RPG 같은 종류의 게임에 몰두한 경우다. 둘째는 콘솔을 활용해 혹은 오락실에서 최소 두 명 이상의 동료와 함께 게임을 한 경험이다. 나도 그렇다. 루카스 아츠사가 만든 컴퓨터용 어드벤처 게임에 몰두하면서도, 롬 카트리지를 후후 불어가며 ‘현대컴보이’를 붙들고 몇 시간씩 앉아있곤 했다. 그때는,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가난한 집이어도 재믹스, 패미컴, 알라딘보이 등의 콘솔 게임기를 갖추고 사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어떻게든 아이를 키워내야 했던 부모들의 고충이 반영된 풍경이었던 것 같다. 아주 어릴 적에는(5~6세 정도 였던 것 같다) 어머니가 동전을 쥐어주고는 오락실에라도 가라며 등을 떠민 일이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되도록 밖에 나가고 싶어하지 않는 성미였다. “나가 놀아”란 말을 아주 많이 들었던 기억이다. 하나 있는 아들이 밖에 나가 놀지 않고 집 안에서 계속 징징대기만 하니 어머니도 지쳤을 것이다. 뭐,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동전 몇 개를 들고 동네 형(형이래봐야 6~7세였을 것이다)과 함께 오락실로 향했다. 역시 비행기 게임이 눈에 들어왔다. <테라 크레스타>였을 것이다. 이전에 부모님을 따라 어쩌다 가게 된 다방 테이블 게임기에서 접해본 일이 있는 게임이다. 그때는 그런 게 있었다. 어른들이 권해서 조이스틱을 잡아 보기도 했는데, 금방 게임오버 되었다. * 칵테일형 테이블 게임기. 일본과 미국 등에서도 대중화 됐던 물건이다. 국내의 경우 사진의 것보다 조악한 형태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출처: [ https://ultimatepopculture.fandom.com/wiki/Arcade\_cabinet](https://ultimatepopculture.fandom.com/wiki/Arcade_cabinet) 그러므로, 모처럼이니 도전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당당하게 동전을 넣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곧 게임오버 됐다. 이번에는 동네 형 차례다. 바톤 터치. 하지만 형아도 초짜인 것은 마찬가지다. 몇 차례 번갈아 가며 게임오버 화면을 보다가 마지막 동전을 넣었는데, 갑자기 일군의 무리가 나타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초등학생(그 때는 국민학생이다)들이었을 거다. 그들 중 하나가 말했다. “비켜, 여기는 내 자리야.” 이미 동전을 넣었지만 힘 센 녀석이 자기 자리라는데 다른 방법은 없고… 물러났다. 더 남은 동전은 없고, 아쉬운 마음에 데모 플레이가 돌아가고 있는 다른 머신 앞에 앉아서 게임을 하는 흉내를 냈다. 오락실 주인이 나타나 그만 집에 돌아가라고 했다. 집에 돌아와 이 얘기를 하니 어머니는 그저 웃었다. 이것이 내 인생 최초의 (실패한) 코옵 경험이다. 사실 어머니가 “오락실에라도 가라”고 한 것은, 그로서는 파격 제안이었다. 오락실은 게임애호가 외의 어른들에게 탈선과 불법의 장소처럼 여겨졌다. 당시의 오락실은 여럿이 함께 게임을 즐기며 서로의 실력에 대하여 냉정하게 평가하고, 충고를 하고, 때로는 그 평가와 충고를 다소 물리적인 방식으로도 하고, 게임과 그 이후 소통을 통해 서로의 성격을 확인하며, 그러다 친구도 되고 사이가 돈독해지는 등, 그 시대 게임-청소년 문화 한 축을 형성하고 유통한 대표적 공간이었다. 그러나 어떤 부분에서 일탈의 현장이 아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에, 당시 게임애호가가 아닌 부모 입장에서 가라고 권할만한 곳은 못 된다는 게 상식이었다. 그런 시각에서 볼 때 부모 입장에서 보다 안전한 선택은 가정용 게임 콘솔을 구비하는 것이었다. 물론 ‘학습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로 컴퓨터를 구매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다소 비용이 많이 들었다. 그 컴퓨터가 MSX인 경우는 외양부터 설득력이 조금 떨어졌다. * 키보드에 떡하니 롬 카트리지를 삽입하는 공간이 있다. 실제로는 여러 용도로 쓸 수 있었으나, 그래도 롬 카트리지란 곧 게임이었다. 부모님이 ‘현대컴보이’를 사왔을 때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당연하게도 <슈퍼마리오 브라더스>와… <슈퍼마리오 브라더스 3>의 왜인지 모를 일본판 패미컴용 카트리지가 컨버터와 함께 번들로 들어 있었다. 슈퍼마리오 3는 지금도 최애 게임으로 꼽는다. 대표적으로 알려진 꼼수의 상당수를 당시 혼자 몰두해서 알아냈다고 하는 작은 자부심을 갖고 있다. 지금도 가끔 그리워지면 다양한 버전으로 플레이한다. 당시 어머니는 하루 1시간으로 게임 시간을 제한했다. 그러나 친구나 친척이 놀러와서 2인용으로 게임을 같이 한다면, 그건 좀 예외였다. 부모 입장에서 볼 때, 자식이 혼자 게임에만 집착하고 있으면 그건 문제로 보이지만, 안전한 가정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게임을 소재로 교우활동을 하겠다는 것을 제한할 이유는 크지 않았던 거다. 그 시절의 게임엔 대개 2인용 설계가 많았다. 굳이 그런 설계가 아니어도 되는데 많이들 그랬다. 왜였을까? 오락실의 경쟁 문화가 이식된 것이겠지만, 당시 게임 산업이 내가 했던 것과 같은 경험을 염두에 두면서 ‘가정’이라는 키워드를 겨냥한 측면도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추측한다. 그때 게임기는 어쨌든 아이들을 겨냥한 것이었고, 구매력은 부모가 갖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게임이 몇 인용이든, 코옵 기능이 있든 없든 사실 상관은 없었다.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왔던 것처럼, 나도 다른 집에 놀러가는 일이 많았다. 나는 ‘현대컴보이’를, 친구는 ‘패밀리 컴퓨터’를 갖고 있는데도 같은 게임이 돌아가는 것에 신기해 한 기억도 있다. 초등학교 4~5학년 즈음 친구가 된 은호는 부러운 녀석이었다. ‘현대 슈퍼 컴보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서운 형들과 마주칠 각오를 하고 오락실에 가야 할 수 있던 <스트리트 파이터2>가 돌아가는 게임기다(그게 꼭 같지 않다는 것은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기회가 될 때마다 은호네 집에 가서 즐겼다. <동킹콩 컨트리>를 할 때에 특히 신이 났다. 그러나 이 때는 역시 게임기 주인이 갑… 그러니까 사적 소유에서 비롯되는 권력이라는 세상의 엄혹한 규칙을 체감한 시기이기도 했다. 은호가 갑자기 <파이널 판타지> 같은 롤플레잉 게임을 하겠다고 나오면 그저 뒤에 앉아서 구경을 하거나 응원을 보내는 신세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언제 다른 게임 하나 생각하면서…. 은호가 <메탈맥스2>를 하면서 길을 막고 있는 개를 비키게 하기 위해 개사료 아이템을 선택하던 광경이 아직도 기억난다. 여기서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이 있을 수 있다. 한글 게임이 아니잖는가? 초등학생이 일본어를 알았을리는 없고, 게임잡지의 공략집을 봐야 했다. 그렇다. 은호네는 게임-인프라가 아주 풍부했다. 왜냐면 그에게는 나이 차이가 좀 나는 형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 형이 <메탈맥스2>를 하면 은호는 뒤에서 구경을 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스스로의 처지를 정당화 해보려고도 했다. 사실 안 보이는 데에선 은호도 힘들거야. 체구도 작고 하니까 말이지. 뒤에서 구경한 경험을 말하자면 다운이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초등학교 5학년 즈음에 친구가 된 다운이는 386 컴퓨터를 갖고 있었다. 그의 집에 가서 <커맨더 킨>, <둠> 같은 게임을 2인용 게임 느낌으로 번갈아 가면서 했다. 죽으면 내 차례가 오는 것이다. 문제는 다운이가 <프린세스 메이커 2>를 실행할 때였다. 그건 도저히 둘이서 할 수 있는 게임은 아니다. 그러나 다소 무의미한 토론을 해가면서 <프린세스 메이커2>를 둘이서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물론 내 역할은 별로 도움 안 되는 조언과 감탄을 내뱉는 정도로 제한되었지만. 이렇게 돌아보니 코옵의 경험이라는 것은 게임 설계의 문제라기 보다는 전반적 시대상의 반영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에는 코옵의 형태가 새로워지기 시작했다. ‘게임방(PC방을 이렇게들 부르기도 했다)’에 가서 다들 <스타크래프트>를 하기 시작했던 거였다. 온라인 게임을 굳이 모여서 한다는 것은 논리로만 보면 비합리적인 일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각 가정에서 접속한 인터넷 품질 등의 기술적 문제를 고려하면 역시 PC방에 모이는 게 합리적이다. 이것 말고 문화적 요인도 있다. 앞서 잠시 언급한 오락실 문화가 PC방에서 재현된 것이다. PC방에서 게임애호가들은 경쟁하고, 서로의 실력을 평가하고, 싸우고, 친해졌다. 가끔 군것질도 함께 하면서. 대학생이 되자 대한민국은 인터넷 강국이 되었다. 물론 여전히 PC방의 존재감은 강력했다. 방학이 되면 PC방에 초등학생들이 넘쳐나게 될테니 걱정이란 우스개가 유행할 정도였다. 그러나 집에서 온라인으로 코옵의 경험을 대체하는 경우가 자연스럽게 늘어난 것도 이 때다. 김대중 정부가 정보통신 중시 정책을 펼친 결과다. 나는 퀘이크3 엔진을 활용한 <울펜슈타인: 에너미 테리토리>라는 FPS 게임에 열광했다. 이 게임은 오늘날의 <오버워치>와 비슷한 느낌으로, 각자 특성이 다른 클래스 중 하나를 각자가 알아서 선택해 공동으로 목표를 달성하도록 돼있다. 엔지니어가 벽을 폭파할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는 동안, 중화기를 다루는 클래스들이 이를 방어하고 위생병이 뒤를 받쳐 주면서 비밀요원이 적의 후방을 교란하는, 그런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 각 클래스가 요구하는 게임 센스가 다르다 보니 게이머 개인의 적성이 중요했고, 그래서 누가 무슨 클래스를 선택하느냐가 관건이 되었다. 가령 이 바닥에서 명저격수로 이름을 떨친 ‘부림’님이 접속하면, 다른 사람들은 되도록 거기에 맞춰서 나머지 클래스를 구성하는 것이다. * 설치한 다이너마이트는 상대팀 엔지니어가 해체할 수 있었다. 물론 해체하기 직전 타이머가 다 돼 폭사할 수도 있었기에, 실제로 손에 땀을 쥐어야 했다. 이런 방식으로, 목표 달성을 위해 팀웍을 맞춰야 했기에 유저들끼리 IRC 채팅창이나 따로 마련된 커뮤니티에서 사이가 돈독해지는 효과도 있었다. 집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싫어하던 내가 온라인에서 결성된 팀에 가입해 ‘정모’라고 불렀던 오프라인 모임에도 나갈 정도였다. 물론 이 내에서 여러 사건 사고도 있었지만 사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의 반영이었고, 기본은 오프라인의 경험이 온라인으로 옮겨 갔을 뿐이라는 느낌이었다. 오프라인에서의 코옵 경험을 온라인에서 대신 하는 것일 뿐이란 거다. 이 시기 전반적 인터넷 문화가 그랬다. 온라인이 더 넓고 더 다양한 사람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줬고 이것이 독자적인 온라인의 문법과 문화를 만들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여전히 오프라인과 연결돼있는 상태였다. 또, 이 시기 인터넷 문화에는 이전 PC통신 문화의 흔적도 여러모로 남아 있었다. 게임 문화에도 비슷한 도식을 적용할 수 있다. 이전 단계 문화와의 연속성이 맥락으로서 존재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때까지 코옵의 경험은 오프라인과 온라인 사이를 개념적으로 연결한 활동으로 가능했다. 맥락의 큰 단절이라 할만한 흐름은 스마트폰, SNS, 유튜브 시대에 이르러 왔다. 이 시기 인터넷은 초연결의 시대에 도달한 후 마치 압력이 가득한 풍선이 뻥 터지는 것처럼 되었다. 원심력이 강화되면서 개별화, 파편화, 탈맥락화가 인터넷 문화의 핵심이 되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취향을 통해 자신만의 타임라인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다들 소비자로서 듣고 싶은 것을 듣고 보고 싶은 것을 보며, 말하고 보여주는 사람 역시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고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제 부모들은 ‘보육’의 측면에서 게임을 활용하더라도, 더 이상 2인용이 기본인 콘솔 게임기를 아이에게 사주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이 훨씬 효과적인 도구이다. 물론 여기에 코옵은 없거나 아주 희미하다. 게임애호가 소년 소녀들은 친구집에 놀러가서 함께 게임을 하기 보다는 자기 집에서 네트워크를 활용해 게임을 즐긴다. 이 경험에 디스코드 등을 통한 소통에 근거한 활동이나 온라인을 통해 새로 알게된 사람들과의 코옵이 없지는 않지만, 과거와 비교할 때 ‘인스턴트’화 된 면이 크다. 서로 간의 접속이 쉽게 되고 쉽게 끊긴다. 앞서 서술한 나의 경험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글의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코옵’의 의미를 크게 잡으면 더욱 그렇다. 굳이 친구집에 가서 게임을 한다고 해도 환경의 변화로 선택이 제한적이다. 어디까지나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슈퍼마리오 브라더스>를 대체할 게임이 떠오르지 않는다. 오락실은 거의 멸종했다. 어깨 너머로 게임기 주인의 플레이를 구경하며 침을 삼켰던 아이들은 이제 게임 유튜버의 방송 화면을 보며 게임을 간접 체험한다. 오히려 게임 내 캐릭터들이 자기들끼리, 마이클과 프랭클린과 트레버가 코옵의 경험을 나누는 세상이다. 여럿이 모여 게임을 경험한다는 컨셉을 하드웨어 설계에까지 반영하면서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닌텐도가 거의 유일해 보인다. ‘라떼는~’ 하려고 꺼낸 얘기는 아니다. 세상이 변했다면 변한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시대에는 이 시대에 맞는 해법이 늘 있는 것이다. 다들 잘 하고 있겠지. 그러나 그래도 영포티 아저씨는 가끔 생각한다. 내가 자랄 때는 게임이 나름대로 훌륭한 사회화 도구가 됐던 것 같기도 한데…. 새로운 세대의 코옵 도구라고 볼 수 있을 <로블록스>에서 최근 일어난 몇 가지 사건(윤 어게인 시위 등)을 떠올리며 괜히 시사적인 데로도 생각이 간다. 그렇잖아도 에코챔버니 확증편향이니 하는 시대가 아닌가. 이 시대의 매체가 그런 효과를 만들어 냈다면, 게임이라고 그런 흐름에서 자유로울 리가 있겠는가? 그러고보니 어떤 나라에선 청소년의 소셜미디어 사용을 금지한다고 한다. 그런 일이 대세가 되면 다시 슈퍼마리오의 시대가 올까? 아니면 더 강력한 백래쉬(?)가 예상치 못한 광경을 만드는 결말로 가는 것일까? 괜한 걱정인가? 역시 나이를 먹은 것일 게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시사평론가) 김민하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시사평론가로 활동하지만 게임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게이머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냉소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돼지의 왕』이 있고,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우파의 불만』, 『트위터, 그 140자 평등주의』 등의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최근작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가 있다.

  • GDC 2023 탐방기: 기술과 트렌드의 변화로부터 일어난 흐름들

    길었던 팬데믹의 터널이 끝나고 게임쇼에도 봄이 돌아왔다. 물론 모든 게임쇼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며칠 전 발표되었던 E3 2023의 취소 소식은 게임 업계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보스턴에서 3월 말에 열린 PAX EAST는 GDC 2023과 비슷한 시기에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B2C 부분에서 흥행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필자 역시 4년 만에 GDC를 찾았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2020년부터 2022년 GDC에 모두 등록했었다. 다만 온라인으로 열렸던 2020년과 2021년에는 참석이 불가능했고, 작년은 패스를 등록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온라인으로 관람할 수밖에 없었다.   < Back GDC 2023 탐방기: 기술과 트렌드의 변화로부터 일어난 흐름들 11 GG Vol. 23. 4. 10. 길었던 팬데믹의 터널이 끝나고 게임쇼에도 봄이 돌아왔다. 물론 모든 게임쇼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며칠 전 발표되었던 E3 2023의 취소 소식은 게임 업계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보스턴에서 3월 말에 열린 PAX EAST는 GDC 2023과 비슷한 시기에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B2C 부분에서 흥행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필자 역시 4년 만에 GDC를 찾았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2020년부터 2022년 GDC에 모두 등록했었다. 다만 온라인으로 열렸던 2020년과 2021년에는 참석이 불가능했고, 작년은 패스를 등록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온라인으로 관람할 수밖에 없었다. 올해 GDC 2023에서는 기존에 제공하던 온라인 중계를 막대한 비용 문제로 거의 중단하고 오프라인 중심으로 다시 돌아왔다. 공식 홈페이지 통계상으로는 28,000여명의 업계 관계자가 방문했다고 하는데, 이는 작년 GDC 2022의 12,000명가량과 비교하면 2배 이상을 기록한 셈이다. 이는 팬데믹 이전 2019년의 GDC 참가자 29,000명에 거의 근접한 수치이다. 실제 참가한 개발자들 얼굴에서는 Covid-19의 영향을 느끼기 어려웠다. 대다수의 참가자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았고, 즐겁게 서로를 대면하면서 식사하고 담소를 나누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다만 처음 패스를 받는 과정에서 백신 접종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가 추가되어 예년보다 매우 긴 패스 수령 줄이 이어졌다. * GDC 2023 기간 중 패스를 수령하기 위해 늘어선 긴 줄 팬데믹 기간과 그 이후의 GDC는 과연 무엇이 달라졌을까?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팬데믹 기간 중에 게임업계에서 일어났던 AI, Web3(메타버스, 블록체인 등) 등의 기술적인 변화와 흐름을 이해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GDC는 월요일과 화요일에 열리는 특정 주제 중심의 서밋과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열리는 메인 컨퍼런스로 양분되어 왔다. 그간 서밋은 인디게임, 내러티브, 게임 교육, 로컬라이제이션, 시리어스 게임, 스마트폰/태블릿 게임, 과금 제도, VR/AR 등 게임 디자인과 관련한 주제들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올해 GDC 2023 서밋은 내러티브나 인디게임, 게임 교육 같은 전통적인 서밋이 어느 정도 남아있긴 했지만 많은 부분들이 기술 중심 서밋으로 대체되었다. AI, Web3, F2P, 퓨처 리얼리티(구 VR/AR), 온라인 게임 테크놀로지, 툴, 비주얼 이펙트 등 수많은 기술 중심 서밋들이 작년과 올해 새롭게 생겨났고, 이는 모두 팬데믹 이후 새롭게 부상한 게임 업계의 다양한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중 AI 서밋이 가장 많은 개발자들을 불러 모았으며, 자연어처리, 행동 패턴 설계 같이 AI의 전문 영역을 넘어 게임 배급과 유통 부문까지 AI의 영향력이 확장될 수 있음을 확인한 해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과거에 비해 한국 게임 개발자들이 GDC를 많이 방문했으며, 발표 횟수도 늘었다. 이번 GDC에서 가장 적극적인 포지셔닝을 보여준 한국 게임회사는 위메이드였다. 작년에도 위메이드의 장현국 대표는 발표를 진행했으며, 올해는 아예 메인 스폰서 자격으로 Web3 서밋 키노트 스피치를 담당했다. 작년 GDC에서 장현국 대표는 위믹스 생태계에 100종 이상의 게임이 온보딩 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결과적으로 말해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올해까지 위믹스 플레이에는 25종의 게임이 각기 다른 토큰노믹스를 가진 채로 게임을 서비스 중이다. 아직 절반의 성공에도 이르지 못했지만, GDC 엑스포 장에는 엄청난 크기의 위메이드 부스가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그러나 메인 스폰서의 화려한 위용 뒤에 느껴지는 조급함을 감출 수는 없었던 것 같다. * GDC 2023 메인 스폰서로 이름을 올린 위메이드 최근 10여 년간 거의 매해 GDC에 참여하거나 최소한 온라인으로 컨퍼런스에 참가해 온 필자는 한국 게임 개발자가 한국 게임회사 소속으로 비즈니스 모델이나 로컬라이제이션을 제외한 게임 디자인 영역에서 GDC 발표를 진행한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예외가 있다면 2018년 〈PUBG〉의 사례 정도라고 할 수 있다. 2017년 말 스팀에 〈PUBG〉가 출시될 당시에는 한국 게임회사에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가까운 비즈니스 모델로 PC 게임 플랫폼에서 판매 1위를 달성했다는 것이 정말 예외적인 사례로 취급받았던 시기였다. 물론 그 이후로도 이러한 사례가 자주 나온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처럼 GDC에서 한국 게임사들의 발표가 거의 예외없이 게임 비즈니스 모델로 귀결되고, 게임 디자인이나 내러티브, 창의성에 초점을 맞추지 못한다는 것은 이제 공공연히 알려진 불편한 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 GDC 2015에서 〈룸(Loom)〉에 관한 클래식 게임 포스트모템을 진행하고 있는 브라이언 모리아티(Brian Moriarty) 한편으로 올해 GDC에서 느끼게 된 또 하나의 변화는 전통적인 게임 디자인 분야의 위상이 갈수록 축소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게임 업계 내에서 아이디어 발상과 메커닉 개발에 치중하는 컨셉 디자인의 분야가 점점 시스템 기획이나 레벨 디자인 등으로 축소되어 버린 것도 한몫 할 것이다. IGF 파이널리스트에 올라온 소수의 창의적인 게임 일부를 제외하면 인디게임으로 엑스포에 전시된 상당수는 익숙한 장르를 그대로 답습하거나 약간의 변주만을 거친 경우가 많았다. 컨퍼런스에서도 게임 디자이너들이 즐겨 찾았던 포스트모템(postmortem) 강연들이 대거 축소되어 아쉬움을 안겨주었다. 2010년대 GDC에서는 최소 4-5회 정도의 클래식 게임 포스트모템 강연이 진행되었다. 올해에는 단 하나 반다이 남코 사의 CTO인 노부히코 모모이가 진행하는 〈다마고치〉의 클래식 게임 포스트모템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컨퍼런스 1주일 정도를 남겨놓고 개발자의 개인 사정으로 취소되었다. 인디 게임 포스트모템도 서밋 기간 중 보통 4-5회, 메인 컨퍼런스 기간 중에 2-3회 정도 열리는 것이 관례였으나 올해에는 거의 열리지 않거나 기술 중심 세션으로 대체되었다. 때문에 정식 클래식 게임 포스트모템은 아니었지만 〈별의 커비〉 시리즈 30주년을 맞아 해당 시리즈의 여러 측면을 회고하는 “The Many Dimensions of Kirby” 강연이 반사적인 인기를 누렸다. HAL 연구소의 쿠마자키 신야와 카미야마 타츠야가 출연한 이 강연을 보기 위해 강연장을 몇 바퀴 돌 정도의 긴 줄이 늘어섰으며, 예정 시간을 30분 넘긴 이후에야 모두 입장이 가능할 정도로 큰 인기를 모았다. 커비 캐릭터의 비정형성과 공중 부양, 몬스터를 빨아들인 후 외양과 스킬이 변화하는 전통적인 메커닉의 고안 과정이 개발 과정에서 산출된 다양한 컨셉 아트와 함께 제시되어 눈길을 끌었다. 그 외에는 1인 개발자 제임스 와들(James Wardle)이 출연한 “‘Wordle’: One Year Later”의 포스트모템이 인기를 끈 강연이었다. 그는 이 게임을 뉴욕타임스에 매각하여 7자리 숫자의 달러 수익을 거두었지만, 수익을 위해 게임 개발을 했던 것은 아니라고 언급하여 큰 박수를 받았다. * 〈별의 커비〉 30주년을 기념한 GDC 2023 강연 이런 몇몇 예외적인 사례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의미의 게임 디자인 강연과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가 GDC에서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점점 게임 개발이 분업화되어가고, 모바일 게임 중심으로 광고를 통한 수익화가 하나의 공식으로 자리잡으면서 게임 디자인이나 메커닉의 개선을 통한 컨셉 디자인의 영역이 갈수록 축소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인디 게임 개발사들 역시 이제는 대형 퍼블리셔나 VC로부터의 투자 과정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면서, 인디스러운 스타일만 유지한 채 인기 장르의 게임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내러티브와 비주얼만 바꾸어 기존 게임을 모방하는 케이스가 많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점점 자기복제가 만연화 되어가도 이를 합리화하기에만 급급한 인디 게임 분야의 돌파구를 찾아보기 위해 방문했던 올해의 GDC였지만, 미국 인디 게임 씬에서도 뾰족한 해답은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인디 게임 씬은 그간 외부에서 투입되는 자본의 단맛을 보면서 외연을 키워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제는 AA급 게임과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인디 스타일 게임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어려워졌으며, 완성도가 높은 인디 게임들은 점점 스타일리시한 AA급 정도의 게임을 지향하고 있다. 올해 IGF를 심사하면서도 느낀 사실이지만, 많은 심사위원들이 거칠면서도 날것을 보여주는 저예산 인디보다는 세련된 스타일의 AA급 인디게임을 더 높은 위치로 보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올해 GDC는 여느 해보다 복잡한 심정을 안고 행사장을 떠나게 되었다. 이런 필자를 배신하지 않는 것은 샌프란시스코의 맛있는 클램 차우더와 샤도네이 와인 한 잔 뿐이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교수) 이정엽 순천향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게임 스토리텔링과 게임 디자인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인디게임 페스티벌인 부산인디커넥트페스티벌 창설을 주도하고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다.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인디게임 행사인 Independent Games Festival(IGF) 심사위원이기도 하다. 저서로 『디지털 스토리텔링』(공저, 2003), 『디지털 게임, 상상력의 새로운 영토』(2005), 『인디게임』(2015), 『이야기, 트랜스포머가 되다』(공저, 2015), 『81년생 마리오』(공저, 2017), 『게임의 이론』(공저, 2019), 『게임은 게임이다: 게임X생태계』(공저, 2021) 등이 있다.

  • 그들만의 게임 바깥에서 서성거리기 : 다크소울3과 ‘프롬갤’의 ‘요르시카 살해 전통’ (장려상)

    다크소울3은 나의 첫 패키지 게임이었다. 유튜브를 돌아다니다 이 게임을 소개하는 영상을 우연히 접했다. 고딕 건물이 빛바랜 색감과 얽혀드는 게임 속 광경이 매력적이었고, 그렇게 난생처음으로 스팀 게임이라는 걸 구매해 봤다. 무턱대고 시작한 게임은 참 까다로웠다. 알고 보니 다크소울은 어려운 난이도로 이름이 높은 타이틀이었다. 이 게임의 디자인은 다양한 함정이나 어려운 전투를 활용해 플레이어에게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부각한다.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죽고 화면에 떠오르는 'You Died' 문구는 일종의 밈이 될 정도였다. < Back 그들만의 게임 바깥에서 서성거리기 : 다크소울3과 ‘프롬갤’의 ‘요르시카 살해 전통’ (장려상) 07 GG Vol. 22. 8. 10. 1. 암호 설정 fromgall, 그곳의 ‘전통’ 다크소울3은 나의 첫 패키지 게임이었다. 유튜브를 돌아다니다 이 게임을 소개하는 영상을 우연히 접했다. 고딕 건물이 빛바랜 색감과 얽혀드는 게임 속 광경이 매력적이었고, 그렇게 난생처음으로 스팀 게임이라는 걸 구매해 봤다. 무턱대고 시작한 게임은 참 까다로웠다. 알고 보니 다크소울은 어려운 난이도로 이름이 높은 타이틀이었다. 이 게임의 디자인은 다양한 함정이나 어려운 전투를 활용해 플레이어에게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부각한다.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죽고 화면에 떠오르는 'You Died' 문구는 일종의 밈이 될 정도였다. 튜토리얼 보스인 '군다'를 9번의 시도 끝에 잡았을 때, 나는 완전히 기진맥진해지고 말았다. 동시에 짜릿한 흥분이 온몸을 내달렸다. 거듭된 죽음 끝에 쟁취해낸 승리는 퍽 달콤했다. 그렇게 맵을 순차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는데, 공략을 봐도 내 힘으로 온전히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했다. 그러던 와중 '프롬 소프트웨어 갤러리(이하 : 프롬갤)'라는 사이트를 방문했다 이곳에서는 프롬 소프트웨어 사가 발매한 다크소울3을 좋아하는 플레이어들이 머무르고 있었다. 이들은 fromgall이라는 통일된 서버 비밀번호를 설정해 까다로운 보스나 맵을 협력해줬고, ‘복지’와 같은 이름으로 이제 막 게임을 시작한 뉴비에게 각종 템을 지원했다. 별도의 가입 절차 없이 익명으로도 글을 업로드할 수 있다는 갤러리의 특성은 이제 막 게임이라는 걸 시작한 당시의 나에게 더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눈팅 끝에 익명으로 도움 요청 글을 작성하기도 했다. 댓글은 바로 달렸다. “그었음.” 나는 프롬갤의 게시글을 훑으며 게임 관련 새로운 정보를 발견하기도 하고, 타인의 기묘한 플레이를 보며 즐거움을 얻기도 했다. 그러는 한편, 특정한 게시글은 어떤 순간에서 내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오히려 분리감을 느끼게 했다. 프롬갤의 '전통'이었다. ‘어떤 한 집단에서 꾸준히 전해져 내려오는 행위’라는 전통의 사전적 의미를 환기하듯, 다양한 사람이 게임 내에서 유사한 행위를 수행하고 그것을 인증하는 형식으로 게시글을 작성했다. 많은 갤러들은 이에 긍정적으로 동조함으로써 긴 수명을 유지했다. 이 특정한 게시글은 일정한 포맷을 갖고 있다. 그 골자는 이러하다. 요르시카라는 이름의 NPC가 있다. 이 NPC는 '암월의 검'이라는 계약을 주관한다. 플레이어는 그와 계약을 맺고 특정 아이템을 모아 바쳐 보상을 얻는다. 아이템을 얻는 조건은 상당히 까다롭기 때문에 지난한 노가다를 요한다. 모든 노가다를 마쳐 보상을 다 얻은 플레이어는 요르시카를 (창의적으로) 죽인다. 2. “요르시카 야발련아 드뎌끝났다” 1) 프롬갤에 게시된 글을 바탕으로 이 온라인 커뮤니티의 전통 포맷을 한 번 살펴보자. “요르시카 야발련아 드뎌끝났다”는 글은 프롬갤의 전통의 요소를 모두 갖췄다. ‘드뎌(드디어) 끝났다’는 부사와 동사를 통해 작성자가 요르시카와 계약-서약자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는 장치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작성자는 NPC의 이름 뒤로 디시인사이드에서 욕설 ‘시발’을 변용한 ‘야발년’을 결합하여 이 인물에게서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낸다. 캡쳐된 게임 화면에서 작성자의 캐릭터는 ‘탐욕의 낙인’이라는 머리 장비를 장착하고 있다. 이는 캐릭터의 발견력 스탯을 올려주는 장비로, 아이템 노가다 작업에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상자를 뒤집어 쓴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캐릭터의 모습은 그 자체로 노가다 행위를 증빙해준다. 다크소울3에서 발견력 스탯을 증가시키는 장비는 제한적으로 존재하므로 공물 노가다에 뛰어든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외관은 전형적인 구석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스크린샷 속 캐릭터의 모습은 작성자와 유사한 경험을 겪은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표상이 된다. 작성자는 이제 막 암월의 검 노가다를 끝냈다. 공물 아이템 30개를 모아왔을 때 요르시카가 이를 보상과 교환하며 출력하는 특수 대사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왼쪽 하단의 UI는 작성자의 캐릭터가 장착하고 있는 장비를 보여주는데, 윗칸은 주문 아이템이 할당된 자리이다. ‘암월의 빛의 검’이라고 적힌 흰 글씨는 스크린샷 속에서 캐릭터가 대검에 인챈트하고 있는 기적의 이름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기적은 암월의 검 계약의 최종 보상이다. 작성자는 대사를 확인했으며, 노가다의 보상을 획득했다. 따라서 프롬갤의 전통이란 곧 게임 내 성취를 인증하는 자리이기도 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요르시카라는 NPC가 인게임에서 제공할 수 있는 물리적(인벤토리에 기입되는) 인센티브를 모두 취득했다. 이제 다른 동기가 개입하지 않는 이상 그와의 관계를 지속할 이유가 없다. 이에 그는 요르시카로부터 받아낸 기적을 살해에 직접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요르시카 어금니 꽉 깨물어라..’는 문장은 막 행할 폭력을 예고한다. 그는 자기 캐릭터가 암월의 빛의 검 기적을 대검에 바르는 순간적인 모션을 포착함으로써 역동성을 강화하며 이미지를 끝맺는다. 한편으로 NPC를 어떻게 창의적으로 죽였는지는 글의 매력을 판가름하는 요소가 된다. 이 글에서 인용한 게시글의 작성자는 오른손에 로스릭 기사의 대검으로 요르시카를 가격하려 한다. 그런데 UI를 자세히 살펴보면 대검의 이미지 우측 상단에 빨간 X자가 표시되어 있다. 이는 작성자의 캐릭터가 대검 아이템을 장비하기 위한 최소한의 스탯을 갖지 않았다는 알림이자 경고다. 요구치를 충족하지 않은 장비는 제 성능을 낼 수 없으며 미진한 피해를 준다. ‘일부러 데미지 낮춰서 더 때릴꺼라는 생각은 안하십니까? 당신’이라는 타 갤러의 댓글은 일견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작성자의 행위에 개연성을 부여해준다. 타인이 내러티브를 붙여 해석해줌으로써 작성자의 게시글은 전통의 계보에 안착하는 데에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즉 전통이란 프롬갤이라는 온라인 커뮤니티 내에서 축적된 일정한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구성원들의 웃음을 유발하는 발화 형식이라고 바라볼 수 있다. 3. 게임에서의 죽음 문제 여기서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살해 행위 그 자체가 아니다. 율이 게임 플레이를 두고 “플레이어가 게임 내부의 규칙과 상호작용 하면서 그 자신의 목표, 레퍼토리, 선호를 추구하는 것”이라 정의한 바 있듯, 게임은 플레이어의 직접적인 개입을 필요로 한다. 플레이어의 상호작용과 몰입을 강화하기 위한 요소로써 죽음은 적극적으로 활용되어 왔다. 죽음은 지속해오던 모든 상태 일체로부터 정지되는 것이며, 존재의 소멸을 의미하는 영원한 단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게임 속 죽음은 플레이어가 규칙을 이해하게 해주는 수단이 된다. 특히나 RPG 게임과 같은 장르에서는 길을 막는 적을 제거하면서 특정한 장소에 도달하는 것을 가장 기본적인 게임 메커닉으로 차용해 왔다. 플레이어가 경험한 죽음은 내부 규칙을 이해할 단초가 되며, 피드백을 거쳐 적을 성공적으로 살해할 경우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역량을 높인다. 게임에서의 죽음은 바로 이 지점에서 플레이어 개인의 폭력성·사회성에 대한 우려와 만나기도 한다. 화면 속이지만 누군가를 찌르고, 때리고, 살해하는 행위는 규범과 법률 속에서 자란 교양 시민과는 반대 선상에 놓인 행위로 이해된다. 게리 영은 이를 STA(Symbolic Taboo Activity)로 설명한다. 이는 가상에서는 가능한 행위이나 현실에서는 법과 도덕에 의해 금지되는 행위들이라는 것이다 2) . 그러나 플레이어의 행동 범주를 설정하는 절대적인 배경으로 게임의 규칙이 존재한다. 특정한 행위를 유도하는 일련의 규칙이 있는 이상 이를 개인의 비도덕성 문제로 환원하기는 어렵다는 측면이 존재한다 3) . 실제로 요르시카를 죽여야만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인 '요르시카의 성령'은 강력한 살해 동기로 작동한다. 이렇게 바라보았을 때 단순히 요르시카를 죽이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주로 플레이어 개인이 그 게임 세계 내부에 시선을 두고 플레이를 수행하고 완결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특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는 놀이가 일상생활과 분리된 그 고유의 질서를 갖는다는 ‘매직 서클’의 의미를 환기한다. 4. 여기 ‘나쁜 남자’가 있다 프롬갤 전통이 갖는 독특한 지점은 커뮤니티에 전시하여 공유하는 과정에 있다. 전시는 게임 밖의 세계에 위치한 청중을 동반한다. 독특한 플레이는 화제성을 갖기 마련이다. 디시인사이드 갤러리의 인터페이스는 경우에는 ‘추천’을 받아 ‘개념글’로 올라가는 구조를 통해 화제성을 수치화한다. 존 스튜어트 밀의 위해 원칙과 같이 보편적인 범주로 규정된 것 이상으로 발휘된 폭력이 심저에서 불쾌감을 자극할 때, 게시글 아래에 달린 경악성의 댓글은 그가 수행한 괴멸적인 플레이에 대한 긍정적인 피드백으로 즐길 수 있다. 니스는 “부도덕한 것으로 여겨지는 행위에 참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일종의 즐거움을 준다”고 이야기한다. 4) 이 ‘나쁜 남자’와 같이 규범을 위협하는 존재에 자기를 동일시할 수 있는 데서 즐거움은 증폭된다. 전시는 보다 많은 관객을 동원할수록 좋다. 그러한 목적성을 갖고 특정한 라인을 따라 행위를 수행하게 되면 갤러들은 익숙한 내용에 익숙한 반응과 익숙한 호의를 내비친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플레이가 따라가야 할 일종의 포맷이 생기는 셈이다. 그렇게 형성된 게시판 내의 놀이 형식에 맞추어 나의 플레이를 만드는, 게임의 매직 서클 내외부를 넘나드는 상호작용이 발생한다. 프롬갤이라는 공동체 내의 동력이 게임 내 플레이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요르시카 야발련아 드뎌끝났다”에서 작성자는 NPC를 폭행하기 위해 대검을 선택했다. 대검이라는 무기 종은 프롬갤 내부에서 특정한 상징성을 갖는데, ‘상남자’라면 마땅히 들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떤 무기로 플레이하는지에 따라 ‘게이’와 ‘진짜 남자’를 구분하는 발화를 프롬갤 내에서 목격할 수 있다. 게이와 상남자의 구분을 통해 프롬갤이라는 공동체가 공유하는 남성성에 대한 상상을 엿볼 수 있다. 이를테면 직검과 방패의 조합을 의미하는 ‘직방’은 이상적인 남성성을 갖추지 못한 ‘게이’와 동의어로 활용되는데, 이는 구르기를 통해 공격을 피하는 대신 방패로 막아내는 게 남자답지 못한 행위로 여겨지는 탓이다. 대검을 들기 위해서는 캐릭터가 양손으로 칼자루를 쥐어야 한다. 방패를 들지 않고서 자신의 체격을 훨씬 상회 하는 무기를 든 캐릭터는 그 자체로 공세적인 인상을 준다. 그는 비열하게 방패 뒤로 숨지 않는 ‘진정한 사나이’나 다름없다. 이는 수잔 제퍼드가 레이건 시대의 할리우드 남성 재현을 설명하기 위해 표현한 ‘하드 바디’를 떠올리게 한다. “지치지 않는, 근육질의, 무적의 남성 육체”에 대한 환상을 바탕으로 프롬갤은 “자신의 뜻을 남에게 강요하기 위해 강화된 몸”을 꿈꾼다. 5) 그러는 한편 암월의 검 계약은 플레이어를 노가다로 인도하며, 그는 희박한 확률이 그저 터지기만을 바라면서 주체성을 상실한다. 플레이어는 무력한 확률 앞에서 억울함을 환기한다. 프롬갤의 갤러들은 이를 남성 섹슈얼리티의 문제로 치환하여 요르시카를 정복함으로써 주체성을 되찾으려 한다. 게시글 작성자의 캐릭터는 대검을 들 수 없는 스탯임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소화하기 힘든 장비를 들기를 고수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프롬갤이라는 집단 내부에서 설정된 남성성의 환상을 입고서 요르시카를 살해한 셈이다. 5. 밈 앞에서 웃지 못할 때 이길호는 디시인사이드에서 발생하는 게시물이 끝없이 분화하고 변형되는 과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생산물은 하나의 갤러리 안에서 생산된다. 그것은 갤러들 사이의 관계에서 결과적으로는 어느 특정 갤러의 결과물로 도출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생산물의 소스는 명백히 다른 갤러에게 제공받았다. 그것은 여러 갤러들의 손을 거치면서 변형을 맞는다. 최종적으로 하나의 갤러가 일종의 ‘완성본’을 내놓는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매 순간 새로운 변형의 힘을 통과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미완성’이다.” 6) 이러한 갤러리 내 생산물의 분화 과정은 밈의 발생과 활용 방식을 닮아있다. 본래 밈이란 리처드 도킨스가 특정한 문화 요소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도입한 문화 유전자의 개념이나 온라인 생활에서는 달리 통용된다. 주로 밈이란 “특정한 이미지, 영상, 대사나 어휘 등이 유행하면서 퍼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7) 밈의 재미가 “공동의 이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며, 이에 밈이 호응을 얻은 것은 “개인주의 시대에 나타나는 하나의 증상”이라는 분석이 존재한다. 8) 밈이 생산되는 환경은 디시인사이드 갤러리와 유사해 보인다. 갤러들은 모여든 게시판에서 해당 주제를 갖고 말하기 위해 존재한다. 친목질을 배제한다는 엄격한 수평 관계를 유지하며 그저 한 개인으로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디시인사이드의 게임 게시판이 유머러스한 공간으로 여겨진다면 그것은 게임 플레이라는 공감대를 나누는 과정에서 타 갤러와 동질감을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유머란 곧 집단 내부에서 통용되는 규율이나 사고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프롬갤의 요르시카 살해 전통에서 유머를 느낀다면 그것은 어째서인가? 또 유머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전통이라는 밈에서 유머를 느낄 수 없는 것은 그 속에서 프롬 갤러들이 발화하는 여성 혐오의 의미가 자연스럽게 이들 공동체 내부에서 승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요르시카를 살해하는 게시글은 2016년 다크소울3이 발매된 이래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주 개념글로 올라갔다. 2022년 프롬 소프트웨어의 신작인 엘든링이 출시된 이래, 엘든링의 열기를 즐기는 지금의 시점에서 요르시카를 죽이는 전통은 이제 개념글에서 찾아보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프롬갤의 전통을 전통으로 만들어낸 동원을 상실하지 않은 이상, 새로운 전통이 태어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다만 밈이 될 정도로 화제성을 가진 플레이가 아직 전시되지 않았을 뿐이다. 나쁜 남자가 되기 위해 안달 난 프롬갤 앞에서, 나는 그저 서성거리고 있다. 1) 권천. “[일반] 똥3)요르시카 야발련아 드뎌끝났다.” 2021.11.28.등록. 2022.06.02.접속. 프롬소프트웨어 마이너 갤러리.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fromsoftware&no=2383063&page=1 2) Young, G. (2019). Enacting immorality within gamespace: Where should we draw the line, and why? In A. Attrill-Smith, C. Fullwood, M. Keep, & D. J. Kuss (Eds.), The Oxford handbook of cyberpsychology (pp. 588–608). Oxford University Press. pp. 589. 3) 미구엘 시카트. 김겸섭 역. 컴퓨터 게임의 윤리(n.p.: 커뮤니케이션 북스, 2014 4) Young, G. (2019). Enacting immorality within gamespace: Where should we draw the line, and why? In A. Attrill-Smith, C. Fullwood, M. Keep, & D. J. Kuss (Eds.), The Oxford handbook of cyberpsychology (pp. 588–608). Oxford University Press. pp. 600. 5) 수잔 제퍼드. 이형식 역. 하드 바디(n.p.:동문선, 2002) 6) 이길호. 우리는 디씨. (2012). 이매진: 서울. 82쪽. 7) 정지우. “무엇이 밈이 되는가”. 민음사. 릿터(32). 14쪽. 8) 이자연. “밈 검열, 그게 진짜이긴 해?”. 민음사. 릿터(32). 30쪽.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김규리 게임이 이야기를 경험시키는 방식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것저것 기웃거리다가 최근에는 <마라톤>을 플레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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