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블로〉 시리즈의 역사로 바라보는 블리자드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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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1. 8. 10.
2021년 2월 20일에 시작된 블리즈컨라인(BLIZZConline)의 분위기는 어수선하기만 했다. 2005년 10월 처음 개최된 블리즈컨은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이하 블리자드)가 자신들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는 팬들을 위한 축제로써 기획되었다. 하지만 지난 몇년간의 블리즈컨의 분위기는 분명 예전과 달랐다. 제작자와 게임 팬의 화합의 장이었던 블리즈컨이 끝나면 항상 팬들의 열화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지만, 최근 들어 함성은 잦아들고 작은 수근거림이 더 많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을 그저 지나가는 해프닝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직전 년도에 발매되었던 〈워크래프트 III: 리포지드〉는 그간 ‘블리자드 = 게임 제작의 명가’라는 평판에 물음표를 던져 주기 충분했고, 때문에 이런 어수선함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이런 전후 사정으로 코로나 시대에 열린 온라인 블리즈컨인 2021년 블리즈컨라인에 팬들은 큰 기대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행사에서는 기존 발표 신작(〈오버워치 2〉, 〈디아블로 IV〉)에 대한 개발 중간 보고 형태의 정보가 있었고, 블리자드가 제작했던 초창기 인기작(〈락앤롤 레이싱〉, 〈길 잃은 바이킹〉, 〈블랙쏜〉)의 리메이크 버전에 대한 내용이 공개되었다.
그리고 오래된 블리자드 팬들을 들뜨게 만드는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디아블로 II〉의 리마스터 버전인 〈디아블로 II: 레저렉션〉이 올해 발매 된다는 이야기였다. 국내에서도 유명한 기업인이자 요리 연구가(이자 열성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플레이어)인 백종원씨가 〈디아블로 II: 레저렉션〉의 최초공개 트레일러에 남긴 댓글은 순식간에 이슈화가 되면서 이 게임의 무게감을 증명했다.

*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NzG-4gDDazg
블리자드의 대표 IP 중 하나인 〈디아블로〉 시리즈의 첫 작품은 1996년 12월 31일 세상에 선보였다. 블리자드의 초기 협력사이자 합병 이후 블리자드 노스로 이름이 바뀐 콘도르에서 처음 제안했던 〈디아블로〉의 형태는 턴 방식의 로그라이크 게임이었다. 하지만 3 시간 동안 제작한 실시간 형태의 프로토타이핑을 거쳐 현재의 모습으로 만드는 것으로 변경되었고, 우리가 익히 아는 실시간 핵 앤 슬래시 형태의 액션 롤플레잉 게임인 〈디아블로〉가 세상에 선보이게 되었다.
출시 당시 다른 게임과 완전히 차별화되는 게임성과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 블리자드 최초로 도입된 베틀넷 시스템을 통한 협동 및 대결 플레이 같은 특별한 장점들은 〈디아블로〉를 그해 최고의 게임의 반열에 오르게 만든다. 북미 출시 이후 국내에서도 PC 통신 게임 동호회를 중심으로 게임에 대한 기대감이 점차 높아지고 있었으나, 당시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운영하던 게임물 심의 장벽에 가로막혀 꽤 오랜 기간 동안 국내 정식 발매가 되지 않는 일이 있기도 했다. 당시 〈디아블로〉 1의 국내 유통사였던 SKC는 몇 차례의 발매 연기 속에 일부 영상 장면 등을 삭제한 검열판으로 심의를 통과하여 청소년 이용불가 등급으로 게임을 발매하였다.

* 출처: 컴퓨터 게이밍 월드 1997년 2월호 102 페이지.
〈디아블로〉는 잘해야 10만 부 팔릴 것이라 예상한 제작진의 기대를 가뿐하게 넘어 발매 첫 해 100만 부, 이듬해에는 전세계 200만 부 판매를 달성한다. 자연스럽게 후속편에 대한 이야기가 제작진 사이에서 논의되었다. 그리고 〈디아블로 1〉의 출시부터 3년이 지난 2000년 6월 29일 시리즈의 후속편인 〈디아블로 II〉가 발매되었다.
국내에서 〈디아블로〉는 게임 매니아들끼리 만 회자되는, 잘 만든 게임에 불과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이를 극복하기 위한 여러 방안 중 하나로 추진되었던 IT 인프라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투자와, 이를 통한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와 PC 방의 급격한 확산. 그리고 이러한 환경에 힘입어 그저 그런 컴퓨터 게임이 아닌 대한민국 대중 문화의 위치를 차지한 블리자드의 〈스타크래프트〉의 엄청난 성공으로 인해, 다음 작품으로 내 놓은 〈디아블로 II〉는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게임이 되어있었다. 이러한 관심을 입증하듯, 〈디아블로 II〉는 15만 부의 선주문을 받은 상태로 북미와 거의 동시 발매가 이루어졌다(당시 해외 게임이 국내 동시 발매하는 사례는 매우 드물었다).
하지만 이러한 초기의 관심과 달리, 새로운 대한민국의 전통 놀이로 취급되던 〈스타크래프트〉에 비해 〈디아블로 II〉의 인기는 금세 시들해 졌다(어디까지나 〈스타크래프트〉에 비교해서일 뿐이지만). 국내에서만 약 300만 부를 팔아 치운 〈디아블로 II〉는 운영 문제와 함께 경쟁작이라 할 수 있는 국산 대작 MMORPG 게임이 하나 둘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하는 사람만 하는’ 게임이 되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디아블로 II〉는 서비스 중이며 PC 방 점유율 순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디아블로 II〉 이후 블리자드는 〈워크래프트〉 IP에 기반을 둔 게임에 거의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새로운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인 〈워크래프트 III: 혼돈의 지배〉와 확장팩인 '얼어붙은 왕좌'가 각각 2002년과 2003년 출시되었다. 여기에 더해 2004년 11월 23일 서비스를 시작한 MMORPG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2021년 현재까지 총 8개의 확장팩을 출시하며 지금까지도 많은 유저를 보유하고 있는 블리자드의 대표 게임이 되었다.
이렇게 제작사로부터 외면 받은 줄 알았던 〈디아블로〉 시리즈에 대한 새로운 소식이 들려온 것은 2008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월드 와이드 인비테이셔널에서였다. 〈디아블로 3〉는 〈스타크래프트 II〉와 더불어 전세계 블리자드 팬들의 초 기대작이 되었다.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서울 왕십리역에서 진행된 전야제 행사에서 〈디아블로 3〉의 한정판을 구매하기 위해 전날 새벽부터 수천명의 사람들이 몰려들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많은 인원을 예상 못한 행사 주최측의 준비 미비로 그야말로 디아블로가 재림한 듯한 혼돈이 연출되었다. 각종 온라인 쇼핑몰에서의 소장판 판매도 판매 시작부터 쇼핑몰 서버가 다운되는 등의 혼란이 발생했다.
대한민국에서의 〈디아블로 3〉 한정판 대란은 또 다른 양상을 보이기도 했는데, 한정판을 사들여 웃돈을 더 받고 다른 사람에게 판매하는 사람들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디아블로〉 시리즈에 등장하는 종족인 네팔렘을 차용하여 만들어진 ‘되팔렘’이라는 단어는 인터넷 게시판 뿐만 아니라 이후 기성 언론에서도 공공연하게 쓰이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상은 이후 벌어진 쓰나미 같은 사태에 비하면 그저 지나가는 가랑비에 불과했다.
2012년 5월 15일, 〈디아블로 3〉를 구매한 게이머들은 게임을 실행하기 위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아이콘을 클릭했다. 하지만 그들을 반기는 건 Error 37 이라는 메시지 창 뿐이었고 정작 게임은 실행조차 되지 않았다. 사유는 이랬다. 불법 복제를 막고 경매장 등의 기능을 위해 야심 차게 도입했던 서버 인증 시스템이 몰려드는 사용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현상이 계속 발생한 것. 이 문제는 게임 발매 후 한 달이 다 되도록 해결이 되질 못했고, 결국 국내 지사인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코리아는 게임 환불을 결정한다.

* Error 37, 서버 롤백, 계정 오류 같은 기술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경매장 시스템, 게임의 난이도 배치와 말도 안되는 아이템 드랍 시스템 등으로 인해 초창기 게임의 평가는 계속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리자드는 특유의 뚝심으로 게임의 문제점을 하나 하나 개선해 나가고, 핵심 기능 중 하나였던 경매장 시스템을 날려버리는 특단의 결정을 내리면서까지 결국 죽은 게임을 살려내는데 성공한다. 2015년 8월까지 전 세계적으로 3천만 부가 판매되는 기록을 달성하였다.
전작과 12년의 갭이 있었던 〈디아블로 3〉와 달리, 다음 후속작은 비교적 빠른(?) 6년만에 발표되었다. 2018년 11월 최초 공개된 〈디아블로 이모탈〉은 디아블로 시리즈 최초의 모바일 게임이란 점, 그리고 그리고 게이머들에게 반발이 심한 극단적인 부분 유료화 정책으로 유명한 중국 게임 개발사와의 협업으로 개발 중이라는 점 때문에 팬들의 많은 우려를 샀다. 다행이 얼마 전 진행된 알파 테스트에서 우려는 어느정도 씻겨진 상태이지만, 블리자드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비단 팬들 만이 아니었다. 블리자드에서도 이러한 분위기를 우려했을까? 새로운 차기작인 〈디아블로 IV〉의 제작을 공개하였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 출처: 〈디아블로 IV〉 공식 시네마틱 영상 | 세 명이 오리라
2021년 현재 〈디아블로 〉시리즈는 한 편이 신규 발매되었으며, 두 편의 신작이 개발 중에 있다. 과연 이 시리즈의 미래는 계속될 수 있을까?
블리자드는 신규 IP 제작에 매우 신중한 행보를 보여왔다. 회사의 대표 IP 인 〈워크래프트〉와 〈스타크래프트〉, 〈디아블로〉는 모두 20세기인 말인 1990년대 처음 대중에 선보였고, 21세기 들어 완전한 오리지널 신규 IP는 오버워치 하나에 불과하다.

* 출처: 블리자드 홈페이지 .
이는 블리자드의 개발 스타일과 큰 연관이 있다. 블리자드의 개발자들은 혁신적이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낸 다기 보다는 기존의 게임 메커니즘을 철저하게 분해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이를 자신들이 충분히 만족할 때까지 다듬고 또 다듬는 방식으로 결과물을 만들었다. 여기에 시리즈를 계속해 가면서 자기 자신을 복제, 발전해 왔던 것. 이것이 블리자드의 스타일이다.
때문에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로부터 시작해 〈디아블로 II: 레저렉션〉으로 끝나는 블리자드의 클래식 프로젝트는 그간 블리자드가 보여줘 왔던 행보와 비슷하면서도 매우 동떨어져 있다. 이들의 장기는 기존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닌 기존 것에서 한 발 더 발전시켜 나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클래식 프로젝트는 찬란했던 시대의 흑백 사진을 컬러로 바꾸는데 급급하다는 인상이다. 블리자드의 얼음 폭풍이 점차 잠잠해지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비단 회사를 둘러싼 온갖 구설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실리콘 앤 시냅스라는 이름으로 1991년부터 시작된 블리자드는 올해로 30주년을 맞이했다. 블리자드의 미래를 함부로 예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의 색을 점차 잃어가는 게임 제작사를 바라보는 오래된 팬들의 마음은 어쩌면 안타까움 그 이상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