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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공모전수상작] 게임은 어떻게 우리를 소외시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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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5. 10. 10.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까[1]'

     

소외

     

'소외'만큼 현시대의 인간상을 관통하는 단어가 있을까.


소외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인간 집단에서 배제되어 외로움을 느낀다는 뜻으로, 일상생활에서 소외라고 말하면 대체로 이를 의미한다. 반면 다른 하나는 철학 특히 마르크스가 주로 사용한 의미로, 한 인간이 특정 대상에 대한 주권을 상실하여 더 이상 주체로 있지 못 하고 오히려 그 대상의 객체로 전락해,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권리와 정체성이 외부 요소에 의해 좌우되는 상태를 뜻한다. 그런데 전자가 명확한 사회적 사건이라서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한 것과 달리, 후자는 개인 내부의 실존적 문제기 때문에 원인과 해법을 분별하기는커녕 그 존재조차 파악하기 어렵고, 그래서 인류 역사에서 오랜 기간 동안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서 '개인'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자리 잡자 자연스레 그 개인의 문제인 소외 또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됐다.

     

이후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그 학술적 사회적 중요성은 점점 커지더니, 소외란 -'그저 나쁜 상태'가 아닌- 인간 존재에 내재된 본성임이 밝혀졌다. 이는 곧 소외가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알아낼 열쇠 중 하나라는 의미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인간인 이상 결코 소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탓에 실존적 위기로써 소외가 다뤄진 지 근 2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소외에 시달리고 있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졌다. 사회가 다각화되고 새로운 기술과 위기가 등장함에 따라 전에 없던 소외가 생겨났고 수많은 이들이 일상적으로 소외를 겪게 됐다. 우리 내부에 자리 잡은 외부가 우리와 함께 커졌다. 자동차가 땅을 기어다니는 일개 행성도 이 정도인데, 수많은 우주선이 날아다니는 초거대 우주 정거장은 얼마나 심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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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정거장 청소부의 일기>

     

<우주 정거장 청소부의 일기>(이하 <청소부>)는 마치 소외를 게임화시켜 놓은 듯한 작품이다.


제목으로 알 수 있듯이 거대한 우주 정거장을 배경으로 한다. 그곳은 매우 번잡하고 발달한 곳이라서, 곳곳에서 값비싼 상품들이 거래되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능력을 얻을 수도 있는 기회의 땅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플레이어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면 플레이어는 그저 푸른 피부의 중성적인 청소부일 뿐이고, 땅에 떨어진 잡동사니를 주워 소각하거나 팔아서 번 푼돈으로 하루하루를 근근이 연명하는 게 할 수 있는 것의 전부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조차도 할 수 없다. 그녀가 버는 돈으로는 아무리 싼 식품도 버거우며 그렇다고 유사 식품을 사 먹으면 구토하기 일쑤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종족은 정기적으로 '성별을 구매'해야 하기에 또 돈을 써야 하는 데다가, 어쩌다가 빨간 완장을 찬 공권력을 만나면 돈을 빼앗기기도 한다. 그녀는 언젠가는 이 거지 같은 곳을 벗어나고자 성실하게 일하지만, 일 하면 일 할수록 오히려 더 가난해지기만 한다.

     

그런 주인공에게 더 큰 일이 닥치는데, 보물을 찾기 위해 들어간 지하 던전에서 저주에 걸려버린 것이다. 머리만 둥둥 떠다니는 해골이 나타나 자꾸 옆에서 소리를 지르는데 정말 죽을 맛이다. 설상가상으로, 이 저주를 풀려면 세 개의 석판 조각을 모아야 하는데 그 과정도 전부 너무나 무의미하고 피곤한 일들 뿐이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 했길래? 그녀에게는 이 모든 것이 말도 안 되고 불합리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가장 끔찍한 것은 따로 있으니, 바로 이 우주 정거장 그 자체다. 단언컨대 이 정거장을 설계한 작자는 인류에 대한 끝없는 악의를 가진 천재일 것이다. 도대체가 길을 맙소사 찾을 수가 없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요일명도 아무 단어나 조합해서 만든 듯한 각종 고유 명사도 낯설지만, 그중에서도 정거장 구조는 특히나 낯설어서 도저히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알 수 없다.


고통과 스트레스. 그게 <청소부>가 플레이어에게 주는 전부다.



세 가지 소외

     

이렇게 <청소부>는 '안티-어드밴처 장르'답게, 일반적인 어드밴처는 물론이고 보편적인 게임의 틀에서도 크게 벗어나 있다. 플레이어는 성장할 수 없고 활약할 수 없으며 극복하지도 못한 채, 그저 불가해한 원인에 의해 끊임없이 휘둘릴 뿐이다. 여느 게임과 달리 이 게임을 하면서 즐거움이나 재미를 느끼기는 어렵고 오히려 당혹감과 좌절감 그리고 무력감만 느껴질 뿐이다. 그렇다면 이 게임의 의의는 도대체 무엇일까?


명백하게도 <청소부>는 일종의 사회비판물을 지향한다. 실제로 개발자 브래드포드 호튼과 이소벨 샤샤는 게이머게이트를 비롯한 정치적 혐오나 가난한 청년들, 성 정체성 혼란 등의 사회적 문제와 모순들을 본 게임에 담아냈다고 말했다[2]. 그러나 이에 대해서 일부는 동의하고 일부는 동의하지 않는데, 왜냐면 본 작품은 단순한 사회적 사례를 넘어 인간 본질에 대한 고찰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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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부>는 크게 세 가지 부분에서 플레이어를 소외시킨다.


첫째는 계급에 의한 소외다. 플레이어는 생명 유지에 필요한 상품과 퀘스트 진행에 필요한 물건을 제외하고는 그 무엇도 구매하거나 얻을 수 없는데, 여기서 핵심은 -애초에 그것들이 게임 내에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고 구매하거나 획득할 수 있는데도 플레이어의 경제적 사회적 계급이 낮기 때문에 완전히 무관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가치 있는 상품을 홍보하는 찌라시라도 주인공에겐 또 하나의 소각할 쓰레기일 뿐이고, 수많은 우주선이 오고 가는 우주 정거장에서 살지만 어디로도 벗어날 수 없다. 플레이어 또한, 향락과 가능성이 가득한 곳에서 살지만 그 무엇도 갈망할 수 없고 그저 삥이나 뜯기는 존재에 불과하다. 플레이어의 권리와 욕구 그리고 정체성이 -그의 자유의지나 합리적 근거가 아닌- 오직 계급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일견 이는 자본주의의 문제로 보이지만 그보다는 인간 사회 자체의 한계라 보는 것이 옳다. 자연적 경제가 원인이든 인위적 정치가 원인이든, 사회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계급에 의한 소외가 있어왔다. 현대 대한민국에는 최고의 인프라를 가진 주거 시설이 즐비하지만 국민 중 다수는 평생을 일해도 그곳에 살 수 없다. 근현대 공산국가에도 안락하고 부유한 삶은 있었지만 이를 누릴 수 있는 이는 당과 가까운 사람들뿐이었다. 중세 봉건사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계급은 물질뿐 아닌 능력, 사상, 민족, 종교, 성별, 거주지, 직업 등 온갖 차이에서 발생해왔다. 따라서 아무리 평등해지고 계급 간의 벽이 낮아진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완전히 동일한 개체가 아닌 이상은- 인간 사회라면 어디든 계급에 의한 소외를 겪을 수밖에 없다.

     

둘째는 부조리에 의한 소외다. 퀘스트라고 주어진 것들은 전부 영문을 알 수 없고 전혀 즐겁지 않은 것들 투성이다. 어째서 해골이 따라다니는지도 설명되지 않고 어째서 저주를 풀기 위해서 성인 서적을 사야 하는지 혹은 지하에 숨겨진 오브젝트를 찾아야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아홉 여신의 우상을 모으는 일은 정말로 아무런 단서가 없어서 우주 정거장 곳곳을 무식하게 돌아다녀야 하며, 심지어 마지막 퀘스트는 600 MC의 금액을 요구하는데 이를 벌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20일 넘게 노동만 해야 한다. 그 어떤 행운도 편법도 활약도 없다. 플레이어는 이유도 모른 채, 타인이 하라고 했기 때문에 혹은 운명이 그렇게 정해졌으니까, 괴롭고 무의미한 노동을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해야 한다. 더 어이없는 건 당초 목표인 우주 정거장을 벗어날 돈을 모았음에도 저주를 풀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그 돈을 저주를 푸는 데 써버린다는 사실이다.


플레이하는 입장에서는 참으로 비상식적이기 그지없지만 사실 현실의 우리들도 남 말 할 처지는 아니다. 비록 어느 날 눈을 떴더니 벌레가 됐다거나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소송을 당한 것은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부조리한 운명에 휘둘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탄생이 결정되고, 그 탄생 환경과 어렸을 적의 작은 선택이 인생 전부를 좌우한다. 성장한 후에도 그저 사회가 그렇게 만들어졌고 또 명령을 받았다는 이유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삶을 살고,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끝을 맞이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점은 어느샌가, 의문을 갖거나 거부하는 능력을 상실해 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문지기가 자신을 위해 문을 지키고 있었음에도 문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처럼, 우주 정거장에서 탈출할 수 있음에도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하느라 탈출을 망각한 주인공처럼, 방충망을 열어줬음에도 여전히 '방충망 너머에 밖이 있다'라고 굳게 믿고 방충망을 떠나지 않는 날벌레처럼, 우리는 우리가 만든 운명 속에서 소외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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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는 위치에 의한 소외다. <청소부>에서는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다. 여기서 위치는 정체성으로서의 위치와 공간으로써의 위치 모두를 의미한다. 먼저 정체성으로서의 위치는 정기적으로 성전환을 해야 하는 기믹이 대표적이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성별(로 상징되는 사회적 위치)을 꼭 가져야 한다는 것 자체도 그렇지만, 더 큰 문제는 그 성별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작중에 나오는 성별의 이름이라곤 'CROSSFIT'이나 'DIRT'나 'MEH' 같이 무작위로 정한 듯한 이름뿐이다. (이는 요일명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플레이어는 꼭 사회적 위치를 가져야 해서 식비를 아끼면서까지 위치성을 확보하지만, 정작 그 위치는 정말로 아무런 의미도 없다. 결과적으로 그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위치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그래서 자신이 의지하지도 추구하지도 않는 것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건 공간으로써의 위치다. 상대적으로 과소평가(?) 당했지만 본 작품에서 가장 끔찍한 건 단연코 길 찾기다. 상술했듯 악의적인 천재가 설계했는지, 길을 찾는 건 커녕 여기가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먼저 건물들 사이에서 유의미한 규칙성이나 차이를 찾을 수 없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너무 무작위라서 그 차이가 무의미하다. 둘째로 흔히 '디즈니 위니 Disney Weenie'라고 불리는, 어디서든 보이고 눈길을 끄는 구조물[3]이 거의 없다. 그나마 있는 구조물도 주변 건물이 다 높은 탓에 가려져서 볼 수가 없고, 그래서 플레이어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를 파악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는 살짝 스포일러인데- 가운데의 지구라트를 중심으로 매우 유사한 몇 개의 구역이 반복된다. 그런데 플레이어는 도중까지 이 사실을 알 수가 없기에 -상술한 이유 때문에 눈치채기 어렵다- 계속 돌아다녀도 매번 같은 곳으로 돌아오게 되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되고, 결국 전체 구조를 완전히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결국 이 모든 문제는 '유의미한 차이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결국 각 기표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기의가 아닌- 다른 기표와의 차이기 때문에, 차이가 상실되면 기표는 무화無化되고 그 아래에 숨겨져 있던 낯선 실재가 출현하게 된다. 자크 라캉의 '수집가 프레베르의 성냥갑 우화[4]', 앤디 워홀의 <캠밸 수프>, 게슈탈트 붕괴 현상, 리미널 스페이스의 반복된 이미지와 공간,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의 '엔들리스 에이트' 등도 마찬가지다.


모든 존재는 위치를 가져야만 하는데, 위치는 유의미한 차이에 의해서만 성립하기에, 끝없는 반복에 갇힌 존재는 위치를 상실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

     

     

소외에서 실존으로

     

의문은 해결되기는커녕 더 깊어진다. 본작이 소외의 결정체라는 건 알겠지만, 어떻게 그게 게임의 의의일 수 있는가? 그저 답답하고 괴롭기만 한 이 게임에 도대체 어떤 효용성이 있단 말인가?


분명 게임의 기본적인 목적은 재미를 주는 것임에도 <청소부>는 재미가 없다. 그러나 <청소부>에서 경험할 수 있는 그 모든 소외는 놀랍게도 재미의 훌륭한 재료가 된다. 왜냐면 우리는 실존할 때 재미를 느끼는데, 역설적이게도 소외는 실존의 단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소외의 반대로 하면 실존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소외를 이해할수록 우리는 인간에 대해 알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실존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의미다. 결국 소외와 실존 모두, 서로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인간의 본질일 뿐이기에.


생각해 보라, 소외란 자기 자신을 보장하던 무언가를 상실한다는 것인데, 애초에 다른 무언가에 의해 보장받는 상태 자체가 곧 그 무언가에 의한 소외 아닌가? 그렇다면 자신을 보장하던 것을 상실하는 것은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기회이며, 이는 곧 실존을 의미한다. 물론 인간인 이상 언제나 다른 무언가에 의해 보장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추구해야 할 것은 -언제나 독립되어 있는 완전한 상태가 아니라- 무엇에 보장받던 '그것은 그저 일시적 수단일 뿐 결코 영구적 본질이 아님'을 항상 인식하고 그럼으로써 자유의지를 잃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안락한 보장 상태에서 박탈당하는 사건, 즉 소외다.


특정한 직업이나 사유재산 같은 물질을 잃었을 때 진정한 자유가 가능해지고, 말도 안 되고 당혹스러운 상황에 쳐할 때 스스로에 의한 (그리고 대한) 성찰을 할 수 있게 되며, 고정된 좌표를 상실하고 위상적 비전체로 떨어질 때 비로소 자신의 위치를 직접 결정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런 얘기는 너무 두루뭉술하고 추상적일뿐더러 <청소부>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다른 예시를 들어야 한다.

     

<킹덤컴 시리즈>나 <언더월드>같이 높은 자유도의 오픈월드 RPG가 재밌는 것은, 게임이 상당히 복잡한 데 비해 플레이어의 계급과 능력치가 낮은 탓에 초반에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지만(소외), 점차 성장하고 적응하다 보면 계급의 격차를 극복하거나 혹은 반대로 계급의 벽을 우회하여 자유롭게 활동(실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넷핵>이나 <슬레이 더 스파이어> 등의 로그라이크 '계열' 게임들은 실수 한 번으로 자신의 모든 걸 잃을 수 있지만(소외), 오히려 그렇기에 특정 빌드나 플레이 스타일에 구속되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할(실존) 수 있다. 마찬가지로 <스탠리 패러블>이나 <페이퍼 플리즈>와 같은 게임이 재밌는 것은, 처음에는 근거 없고 불합리한 명령이 부과되고 플레이어는 이를 따라야만 하지만(소외), 동시에 그것을 거부하고 반항하며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실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우터 와일즈>, <섹시 브루탈>, <포가튼 시티> 등의 타임 루프물은 훨씬 더 노골적이다. 이 게임들은 모두 플레이어의 의지와 무관하게 똑같은 사건이 영원히 반복되고 그래서 게임 내 모든 차이가 소멸하는 위기에 처하는데(소외), 이때 플레이어는 각종 활동과 추론을 통해 반복되는 연쇄를 끊고 차이(실존)를 다시 불러낼 수 있다.


이 게임들 속에서 플레이어들은 실제로 실존한다. <청소부>에서 경험한 소외가 진짜인 만큼, 이 게임들에서의 실존 또한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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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중에서도 소외의 효용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례는 단연코 <레인 월드>다. <레인 월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척박한 야생을 배경으로 하는 생존 플랫포머 게임으로, 플레이어는 끔찍한 조작감의 하얀 생물 '슬러그캣'으로써 살아남아야 한다. 이 세계의 생태계는 매우 유기적이고 적대적이어서 각양각색의 동식물과 현상이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데, 문제는 슬러그캣이 그 먹이 피라미드의 거의 밑 바닥이라 대부분의 생물이 천적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게임의 무대는 오래전에 멸망한 인류가 남긴 정체불명의 구조물과 그 위에 퇴적된 자연 지형이라 맵이 극도로 복잡한데, 목적지를 가르쳐주는 가이드도 거의 없어서 길 찾기는커녕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파악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정기적으로 내리는 어마어마한 양의 폭우는 피난처를 제외한 모든 공간과 그 위의 생물을 -물론 슬러그캣도- 집어삼켜 버리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죽지 않으려면 매일매일 벌레를 잡아먹고 피난처를 찾아야만 한다. 말 그대로 낯선 세상에 피투彼投되어 배타적 환경에 소외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째서 이렇게 디자인했을까? <언더월드>처럼 플레이어가 고통받기를 바랬던 것일까? 이에 대하여 <레인월드>의 개발자 요아르 야콥슨Joar Jakobsson은 '맨해튼의 쥐'[5]라는 개념을 언급한다. 지하철에 살고 있는 쥐는 그 지하철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떤 의도로 만들어졌는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쥐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는 쥐에게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지하철을 마치 제 집처럼 돌아다니는데, 어쨌거나 쥐는 무엇이 자신에게 위험하고 유용하고 맛있는지를 알며 결국 중요한 건 그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쥐의 인식은 지하철을 건설하고 이용하는 인간들의 인식과 다르겠지만, 배부르기만 하다면 쥐에게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다. 그리하여 더 이상 지하철의 낯섦과 미지는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쥐의 방식과 세계관이 지하철을 가득 채운다. '맨해튼의 쥐'가 '쥐의 맨해튼'으로 역전되는 것이다. (개발자가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에서 유학했을 때의 경험도 이와 같은 맥락을 가진다)


<레인월드>의 플레이어도 마찬가지다. 막 게임을 시작하면 알 수 없는 생물과 공간에 휘둘려 고통받을 뿐이지만, 점차 적응하면 할수록 뭐가 좋고 나쁘며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알게 된다. 여전히 그것들의 정체는 모르지만, 어떤 행동과 선택이 자신에게 득이 될지는 안다. 어느샌가 미로 같던 맵을 앞마당처럼 돌아다니게 되더니, 심지어는 자신을 잡아먹던 포식자까지 사냥할 수 있게 된다. 그야말로 피투성에서 기투로, 소외가 실존이 된 것이다.

     

     

     

게임만이 줄 수 있는 재미

     

이쯤에서 제목을 바꿔야 할 듯하다.


소외와 실존의 작동 원리가 완전히 동일하다면, '게임은 어떻게 우리를 소외시키는가?'라는 질문과 '게임은 어떻게 우리가 실존할 수 있게 해주는가?'라는 질문 또한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그리고 그 대답은 이미 둘러본 바 있다: 게임은 향유자가 직접 참여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매체기 때문이다. 영화나 소설 같은 미디어는 작품이 향유자에게 일방적으로 작용하고, 그래서 작중에서 소외나 실존이 아무리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하더라도 수신자의 입장에서는 아주 실감 나는 대리 체험에 불과하다.

     

반면 <청소부>에서는 플레이어가 직접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생존하기 위해 매일 쓰레기를 줍는 노동을 하는 것도, 비싸고 좋은 상품을 사려다가 단념하는 것도, 제대로 된 음식과 값싼 유사 식품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도, 상한 음식과 젠더 캡슐을 먹어야 하는 부조리에 얽매이는 것도, 불합리하고 지루한 퀘스트를 묵묵히 진행하는 것도, 이 모든 것을 매일 일기로 쓰는 것도 전부 플레이어의 몫이다. 그렇기에 좌절감과 무력감을 느낀 채 소외되는 것도 -주인공이 아닌- 플레이어 자신이다.


소외를 실존으로 승화시킨 게임들도 마찬가지다. 플레이어가 직접 실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능력과 자유의지를 발현해야 하지만, 이는 소외를 스스로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기에 먼저 소외를 직접 당해야 한다. 그리고 소외를 당하기 위해서는 부조리와 불합리에 휘둘려야 하는데, 이는 오직 플레이어가 직접 그 세계에 참여하고 맞부딪힐 때만 가능하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자신을 발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상실해야 하고, 자신을 상실하기 위해서는 먼저 거기에 자신이 있어야 한다'라고.


그렇기에 플레이어가 직접 소외당하고 실존하는 경험은 참여형 미디어인 게임에서만 가능하고, 마찬가지로 자유의지를 발현할 때만 느낄 수 있는 '실존적 재미' 또한 오직 게임의 전유물이다. (때로는 소외도 그 자체로 재미가 된다)

     

그런 점에서 <청소부>가 선사한 그 끔찍한 경험에는 제대로 의미가 있다.


게임이 실제로 플레이어를 소외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게임이 플레이어의 자유의지와 정체성에 관여할 수 있음을 의미하며, 이는 곧 게임이 플레이어를 실존하게 해줄 수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기 때문이다. 비록 <청소부> 자체는 두 번 다시 플레이하고 싶지도 추천하기도 힘든 게임이지만, 그 시도는 게임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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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자꾸 소외네 실존이니 반복하는데, 그렇다면 게임의 의의는 실존이라는 것인가? 실존이 재미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인가?


이는 정말로 바보 같은 질문이다. 왜냐면 실존이 곧 재미고 재미가 곧 실존이기 때문이다. 분명 실존이라는 개념은 학술 용어로 자주 쓰이고 인간 존재에게 있어서 핵심적이기에, '오락'처럼 가벼운 개념과는 상반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오락도 인간의 일부고 오락에서 느끼는 재미 또한 그렇다. 재미 중에서는 크리쳐 100마리를 도살하거나 0.02퍼센트의 확률을 뚫고 상품을 얻는 재미도 있지만, 기존의 자신으로부터 해방되거나 미지 너머의 새로운 곳으로 도약하는 재미도 있다. 지금까지 계속 얘기했던 바로 그 재미 말이다. 그렇다면 실존이 재미있지 않을 이유는 무엇이고, 재미를 위해 실존하지 않을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니 인간 존재를 고찰하는 것과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중요하냐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어차피 둘은 게임 속에서 하나가 되니까.


분명 본 글의 의의 중 하나는 '게임이 인간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 탁월한 도구'임을 설파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실존과 재미가 본질적으로 같은 뿌리를 공유함을 증명하는 시도이기도 하며, 궁극적으로는 게임을 더욱 재밌게 만들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몰색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게임이 <청소부>와 같거나 영향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게임이 줄 수 있는 재미에는 실존적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외의 재미들도 모두 가치있고 필요하다. 게다가 실존적 재미는 기본적으로 소외를 전제하기 때문에 호불호가 크게 갈릴 수밖에 없다. 불친절함은 무력감으로 부조리함은 당혹감으로 불합리함은 불쾌함으로 이어지기 쉽다. 즐거워야 할 게임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싶은 사람은... 적어도 절반을 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소외당하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끊임없이 실존해야 한다. 왜냐면 그럴 때 인간 존재의 본질에 더 깊이 다가갈 수 있고, 오직 게임만이 개척할 수 있는 새로운 예술이 시작되며, 무엇보다 훨씬 짜릿하고 차원이 다른 재미를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게임이여, 계속해서 우리를 소외시켜다오.

     

     

     

'방황해 보지 않으면 자각에 이르지 못하는 법이야'[6]

     




[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317행
[2] https://www.vice.com/en/article/diaries-of-a-spaceport-janitor-asks-players-to-find-the-beauty-in-garbage/
[3] https://mouseplanet.com/the-origin-of-the-disneyland-wienie/5245/
[4] 자크 라캉, <세미나 7. 강의 8> (1960.01.20)
[5] https://www.vice.com/en/article/rain-world-is-like-stalker-but-a-platformer-and-youre-a-rodent/
[6]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7847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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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머. 오락으로써의 게임도, 작품으로써의 게임도, 실험으로써의 게임도 모두 중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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