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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 수상작 발표

    2024년 진행된 제3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 수상작을 다음과 같이 발표합니다. < Back 제3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 수상작 발표 20 GG Vol. 24. 10. 10. 안녕하세요, 게임제너레이션입니다. 2024년 진행된 제3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 수상작을 다음과 같이 발표합니다. 기계장치의 우주 - 레인월드와 아우터와일즈의 불능감에 대해 (나원영) 크리퍼가 부수고 간 자리 (박정서) : 미술관이라는 공포 체험 (윤수빈) 게임으로부터의 선택, 선택으로부터의 풍경 (김성은) 이상 네 개 작품을 공모전 수상작으로 발표합니다. 수상작은 GG 20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응모해주신 많은 분들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게임제너레이션 드림.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제3회 게임비평공모전 심사위원장 심사평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이 올해로 벌써 세 번째를 맞이했다. 세 차례 모두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응모작들의 전반적인 수준이 계속 좋아졌다는, 어쩌면 뻔한 총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상향평준화라는 표현이 정확할텐데, 이는 ‘좋은 비평’의 요소에 대한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되었다는 징표이기도 하겠다. 응모작들의 평균적인 형식적 완성도가 높아졌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다. < Back 제3회 게임비평공모전 심사위원장 심사평 20 GG Vol. 24. 10. 10.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이 올해로 벌써 세 번째를 맞이했다. 세 차례 모두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응모작들의 전반적인 수준이 계속 좋아졌다는, 어쩌면 뻔한 총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상향평준화라는 표현이 정확할텐데, 이는 ‘좋은 비평’의 요소에 대한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되었다는 징표이기도 하겠다. 응모작들의 평균적인 형식적 완성도가 높아졌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다. 하지만 형식적 완성도가 높다고 모두 훌륭한 비평문이 될 수는 없다. 비평문이 단순 경험담이나 감상문과 구별된다는 것은 대부분 아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소화되지 않은 이론적 개념에 매몰되어 갈 길도 할 말도 잃은 글쓰기 역시 좋은 비평문이 될 수 없다. 게임 비평가는 게임 애호가와 게임 연구자의 중간에 서서 애정과 이론을 한꺼번에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이번 공모전에 출품된 48편 가운데 아쉽게 당선권에 들지 못한 글들 중 상당수는 거창한 문제의식으로 시작했으나 추상적인 과잉 개념 사이를 떠돌다가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채 엉거주춤 글을 닫은 경우들이었다. 다섯 명의 심사위원들이 개별심사와 집단 토론을 거쳐 최종 당선작으로 선정한 네 편의 비평문은—물론 완전하진 않지만—자기만의 분명한 시각을 유려하게 풀어가는 한 편 위와 같은 함정들을 잘 피한 수작들이었다. 각 당선작에 대한 간단한 심사평을 접수번호 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 평가는 다섯 심사위원의 의견을 종합하여 요약한 것이다. 나원영의 “ 기계장치의 우주 - 레인월드와 아우터와일즈의 불능감에 대해 ”는 무엇보다 게임에 대한 애정이 돋보이는 글이었다. 게임에 대해 잘 알고 많이 하는 저자가 즐겁게 쓴 흔적이 뚜렷했고, 독자로 하여금 비평문 속 게임에 대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글이라는 것도 강점이었다. 개념의 투박함이 아쉽고 친절하지 않은 글쓰기 방식도 마이너스 요인이었지만, 저자 나름의 시각이 분명하고 앞으로 좋은 비평가가 될 수 있는 잠재력 또한 높다고 판단했다. 박정서의 “ 크리퍼가 부수고 간 자리 ”는 인문학적 관심과 지식을 기반으로 하되 독창적인 시각으로 게임을 바라본 수작이었다. 많은 사람들에 의해 회자되고 비평 대상이 되었던 게임 <마인크래프트>를 신선한 관점에서 새롭게 접근했다는 점이 놀라웠으며, 제목의 압축성이 비평의 핵심 내용과 잘 조응한 글이기도 했다. 군데 군데 현학적 문장들이 독이성을 떨어트리는 점과 결론이 다소 흐지부지되었다는 점이 작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윤수빈의 “ 미술관이라는 공포 체험 ”은 보기에 따라 엉뚱한 비약으로 읽히기도 하고 독창적인 시각으로 보이기도 하는 흥미로운 글이었다. RPG 게임 과 전시회 <게르테나전>을 넘나들면서 시각성과 장소감을 게임에 연결지어 설명한 시도는 다른 글과의 분명한 차별성을 보인다. 반면 자신의 이야기를 깔끔하게 마무리하진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럼에도, 비평문의 기능 중 하나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훌륭한 비평문의 요소를 갖춘 글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김성은의 “ 게임으로부터의 선택, 선택으로부터의 풍경 ”은 게임에 대한 오랜 애정과 비평이라는 장르에 대한 이해도를 둘 다 보여준 좋은 사례이다. 문장과 문체 또한 유려하여 독이성이 높았다. 하지만 모범적인 구조와 내용이라는 긍정적 평가는 안전한 (비교)구도 속에서 전형적인 내용을 도식적으로 나열했다는 비판적 평가를 낳기도 한다. ‘제 4의 벽’ 개념적 도구로 삼은 <언더테일> 비평을 독창적이라 평가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글의 높은 완성도만으로도 당선작으로 선정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이상 네 편 외에도 딱 한 두 개의 흠결 때문에 당선작에 포함되지 못 한 응모작이 다수 있었다. 이 창의적이고 흥미로운 글들을 쓴 예비 게임 비평가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앞서 두 차례의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을 통해 이미 좋은 비평가들이 배출되었으나, 우리나라 게임 평론의 토양이 갑자기 비옥해졌을 리는 없다. 이번 3회 공모전을 위해 글을 썼던 저자들, 특히 당선의 영예를 안은 네 분의 새내기 비평가들은 앞으로도 게임 및 게임 비평, 그리고 게임 연구를 향한 애정을 잃지 않고 꾸준한 활동을 통해 우리나라 게임계 전반의 발전에 기여해주기를 기대한다. 제 3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 심사위원장 윤태진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세대학교 교수) 윤태진 텔레비전 드라마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지금까지 20년 이상 미디어문화현상에 대한 강의와 연구와 집필을 했다. 게임, 웹툰, 한류, 예능 프로그램 등 썼던 글의 소재는 다양하지만 모두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활동들”을 탐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몇 년 전에는 『디지털게임문화연구』라는 작은 책을 낸 적이 있고, 요즘은 《연세게임·이스포츠 연구센터(YEGER)》라는 연구 조직을 운영하며 후배 연구자들과 함께 여러 게임문화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 <발리언트 하츠>, 전쟁은 이기는 것이 아니다.

    작품이 1차 세계대전이라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전쟁의 경험을 표현하기 위해 던졌을 질문들처럼, 게임은 여전히 전쟁이라는 경험을 향해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들을 가지고 있는 매체다. < Back <발리언트 하츠>, 전쟁은 이기는 것이 아니다. 25 GG Vol. 25. 8. 10. 전쟁은 분명 가장 문명화된 야만이 아니겠는가. 이 막대한 규모의 전방위적 파괴 행위는 실상 비이성적이고 원초적인 욕망에서 기인하지만, 누구보다 절실하게 이성과 논리를 동원하는 영역이다. 파괴의 명분을 만들고 설득해야 하며, 더욱 강력한 파괴를 위한 기술을 개발해야 하고, 효과적인 파괴를 위한 전략과 전술을 연구해야 하는 모든 과정에서, 인류를 다른 동물과 구분한다는 이성과 논리는 줄곧 다른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원초적 욕망의 시중을 들어왔다. 때문에 전술가들은 으레 전쟁을 냉정하고 계산적인 영역이라 여겨왔지만, 오랜 세월 동안 인류가 이러한 비문명적인 파괴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애쓰며 이성과 논리라는 포장지를 사용해왔다는 역설은 전쟁을 흥미롭게 만드는 부분 중 하나다. 이러한 전쟁과 게임이 손을 잡은 것은 오래된 일이다. 처음부터 이성과 논리라는 포장지를 사용하기 위해 게임을 필요로 했던 것은 전쟁이었다. 인류는 테이블 위 게임판이 실제 전쟁의 현실을 대신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게임에는 논리적인 규칙이 있고, 이성적인 전략을 만들 수 있으며, 승리 또는 패배라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으니. 전쟁은 게임의 결과를 현실에도 적용할 수 있길 바랐고, 게임은 지금까지도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전략성이라는 영역의 유구한 전통을 얻었다. 그렇기에, 전쟁과 게임은 분명 교감하는 부분이 많을 수 있고, 전쟁을 다루는 게임이 전략성을 물심양면 활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거대한 지도 위에서 펼쳐지는 군사 전략 장르뿐 아니라, 개인의 눈으로 전장을 바라보는 FPS 장르 역시 플레이어가 전략성을 발휘할 것을 적극적으로 요구한다. 수치상으로 죽지 않을 만큼의 피해를 입고, 적 유닛을 제거하고, 효율적인 동선을 구상할 것. 이를 통해 달성되는 목표는 대개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또는 그렇게 믿으며 해당 임무를 플레이하는 것)이다. 묘사되는 상황이 아무리 혼란스럽고 격렬하더라도, 그 안에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행하는 행위는 꽤나 냉정하고 계산적이며, 이를 얼마나 잘 수행하는지에 따라 플레이어가 얼마나 유능하게 목표를 달성하는지 평가된다. 그렇다면 전쟁과 게임이 서로를 활용하는 이 고전적인 교감을 벗어났을 때, 전쟁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어떤 경험을 제공할 수 있을까? 목적: 어떻게 끌어들일까? 아무 OTT 플랫폼에 접속해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차례로 검색해 보자. 2차 세계대전이 전쟁 콘텐츠의 클래식, 대명사로 자리 잡은 반면, 1차 세계대전은 몇몇 명작을 남긴 사례를 제외하면 2차 세계대전만큼 많은 콘텐츠를 찾아보긴 힘들다. 서구 유럽을 벗어난 문화권에서는 2차 세계대전에 비해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다는 측면도 있지만, 콘텐츠로써도 2차 세계대전이 가진 비교적 편리한 이점이 있다. 명확한 악역과, 이에 근거한 명쾌한 당위성. 추축국으로 상징되는, 파시즘이라는 명확한 악당이 있는 2차 대전에 비해 1차 대전은 그 증오의 대상이 명확하지 않다. 각자의 민족과 국가를 수호한다는 당시의 명분은 자국민들에게 전쟁 참여를 독려할 수는 있었을지 몰라도, 한 세기가 지난 현대의 대중들에게 호소력을 갖진 못한다. 그러나 콘텐츠의 관객들에겐, 특히나 직접 행동해야 하는 플레이어들에게는 행동의 명확한 목적과 명분이 필요하다. <발리언트 하츠 Valiant Hearts>시리즈는 두 편에 걸쳐 1차 세계대전의 현장과 여기에 참여하는 병사들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플레이어에게 연합국 또는 동맹국 편에 서서 싸울 것을 주문하지 않는다. 대신 목적성이 결집된 하나의 구체적인 대상을 게임 초반에 제시하며 플레이어들에게 동기를 부여한다. 본 도르프는 독일군 지휘관이라는 위치 때문이 아닌, 그 인간 자체로 주인공들의 표적이 된다. 미국인인 프레디가 프랑스 군에 자원한 이유는 폭격으로 아내를 죽인 본 도르프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다. 프랑스 병사인 에밀이 본 도르프를 추적하는 이유는 독일군에서 복무하는 사위 칼을 찾기 위함이며, 벨기에 출신 수의대생이었던 안나는 본 도르프에게 납치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이들의 여정에 합류한다. 일종의 욕받이를 설정한다는,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방식으로 <발리언트 하츠>는 사실상 첫 시리즈 대부분의 분량 동안 플레이의 동력을 제공한다. 챕터가 끝날 때마다 본 도르프와 보스전을 치르기도 하고, 때로는 이리저리 먼 길을 돌아가면서도 본 도르프의 행방을 알아내고 그를 추격한다는 굵직한 목표가 내내 유지된다. 이는 플레이어들에게 자연스럽게 본 도르프에 대한 승리, 플레이어의 성향에 따라 더 나아가서는 그에 대한 승리를 곧 독일군 전체에 대한 상징적인 승리로 확장하는 대략적인 승리의 이미지를 그릴 수 있게 만든다. 역설적이게도, 이 과정에서 때로는 ‘대체로’ 아군인 프랑스군이 방해가 되기도 하고, ‘대체로’ 적군인 독일군이 친구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본 도르프가 필요한 이유는, 주인공들의 싸움이 전쟁 자체와 언제나 교묘하게 어긋나있는 상황에서, 플레이어에게 이 싸움에 참여할 다른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전장이라는 배경에서, 한 독일군 지휘관이 개인적 복수의 대상이라는 주요 적으로 설정되면서, 주인공들이 1차 대전 초기의 주요 전투와 사건들을 경험하고, 플레이어 역시 이 경험에 집중할 충분한 정당성을 제공한다. 그러나 마침내 본 도르프를 제거한다고 해서 주인공들의 영광스러운 승리로 게임이 끝나진 않으며, 종전까지는 2년이 남았고, 본 도르프를 추격한다는 희열이 무마해왔던 1차 대전의 민낯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본 도르프가 1편의 중후반에서 제거되지만, 전쟁의 진행에 영향을 미치진 않는다. 수단: 사람을 죽이지 않는 전쟁 게임 게임이 시작되고 첫 전투인 크루스네스에서, 에밀은 다른 병사들과 달리 소총이 아닌 부대 깃발을 들고 전선을 달린다. 프레디는 와이어 커터를 든 공병, 안나는 의료진, 칼은 탈영병, 조지는 사진작가, 제임스는 분대원들과 클라리넷을 연주하고, 에른스트는 잠수함 승조원으로 징집된 뱃사람이다. <발리언트 하츠>는 이런 주인공들의 시선에서 전쟁을 경험한다. 개인의 관점에서 전쟁의 경험이 서술될 때면, 플레이어는 이를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경험하곤 한다. 하나는 전투원 등의 입장에서 실제 전투에 참여하거나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하는 경우, 다른 하나는 민간인 등의 입장에서 전쟁에 영향을 미치진 못함에도 전쟁의 영향을 받는 삶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경우다. 위에서 언급한 7명의 주인공들은 분명한 전자에 속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이 공통적으로 결코 하지 않는 행위가 전투, 구체적으로는 살상이다. 사람을 죽이지 않는 전쟁 게임은 가능한가. 교육적인 목적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게임은 혼란스러운 전장의 한복판에서도 플레이어가 누군가를 죽이도록 두지 않는다. 플레이어가 격추하는 전투기는 천천히 지상으로 불시착하고, 기관총 포대 안에 수류탄을 던지면 적은 포대를 버리고 빠져나간다. 총기를 가진 캐릭터는 칼과 제임스뿐이지만, 그마저도 사용하는 일은 없다. 플레이어 캐릭터가 직간접적으로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는 경우는 시리즈에서 두 차례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바쿠아에서 수많은 독일군을 참호에 생매장하는 일에 기여했음을 깨달은 에밀은 수치심에 그간 받은 훈장들을 전부 불태우는 것으로 묘사되며, 니벨 공세에서 무리한 진격을 강요하던 지휘관을 의도치 않게 죽음에 이르게 한 후에는 항명으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사지가 잘린 시신들이 산처럼 쌓여있는 슈맹 데 담과 뫼즈-아르곤 공세에서도, 작품은 이 전쟁 게임에서 전투원으로 참여하는 플레이어의 살상 행위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겠다는 집요함을 고수한다. 앞서 말했듯 전쟁 게임과 전략성의 오랜 결부는 대개 플레이어에게 효과적인 승리라는 목표를 제안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 수와 등장 동선이 정해져 있는 적의 패턴을 파악해 처치하는 경험이 이 효과적인 승리에 반영된다. <발리언트 하츠>에는 이 핵심적인 경험이 빠져있다. 대신 플레이어가 적의 포격과 기관총탄이 빗발치는 참호에서 수행하는 대부분의 경험은 퍼즐을 풀고 함정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험이 향하는 목적은 대개 전투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전투를 무사히 통과해 생존, 그리고 탈출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플레이에서는 전선에서 공격을 피해 목표를 달성하는 행위를 목적으로 한다. 이 시리즈의 주인공들은 불가피하게 전쟁에 휘말린 민간인들이 아니다. 다들 나름의 이유로, 자의가 되었든 타의가 되었든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병사들, 전쟁을 수행하는 당사자들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적과의 교전이라는 역할을 기대받고 있는 이들의 목적, 그러니까 플레이어의 목적은 또다시 이 전쟁의 목적과는 교묘하게 어긋나있다. 결국, 이 전쟁을 벗어나는 데에 있다. 생존이라는 승리 플레르에서 프레디에 의해 마침내 패배했을 때, 본 도르프는(역시나 죽지 않고) 패전의 과오를 물어 ‘죽음보다 치욕스러운’ 경질을 당하며 전장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그는 히틀러처럼 이 싸움의 궁극적인 보스가 아니다. 그가 없다고 전쟁이, 독일군의 진격이 멈추진 않는다. 에밀의 손에 죽었던 무책임한 프랑스군 지휘관 역시 궁극적인 보스가 아니다. 에른스트에게 제임스가 탄 함선을 격침하라고 지시했던 잠수함 함장도, 조지가 추격했던 독일군 스파이도 궁극적인 보스가 아니다. 이 작품에서 7명의 인물들이 맞서 싸우는 궁극적인 보스는 내내 전쟁 그 자체다. 작품은 처음부터 자국 대중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참전국들의 목적-승전이라는 목표를 플레이어들이 따르게 할 의도가 없었고, 때문에 본 도르프라는 마중물을 마련했다. 그리고 이 미묘한 불합치가 이르는 최종 승리의 모습은, 전쟁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전쟁에 대한 승리다. 1편에서는 아들이 아프다는 소식에 집요하게 탈영을 시도하던 칼이 마침내 생 미엘로 돌아가 가족과 무사히 재회하는 모습이 승리다. 2편에서는 당연히, 안나가 여전히 전투가 벌어지는 전선을 뚫고 달려가 탑 위의 종을 울리며 전쟁이 끝났음을 모두에게 알리는 모습이 승리다. 연합국의 승리가 아니라, 종전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이, 그 소식이 들려올 때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이 작품에서 그리는 승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들은 반인륜적 악과 맞서 싸운다는 명분을 표명할 수 있었지만, 1차 세계대전의 연합국들 사이에서 강조되던 것은 보다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단위의 문제였다. 민족이라는 개념을 기반으로 막 형성되기 시작한 ‘국민’이라는 정서는 이 전쟁에서 민족의 자존심과 국가 수호를 위해 적에 맞선다는 목표의식을 만들었다. 그러나 결국 이 작품에서 민족과 국가를 수호한 공을 인정받아 수차례 훈장을 받고, 전쟁으로부터도 승리한 주인공들을 패배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국가, 공동체, 내집단이다. 작품은 자국인 프랑스 군사 법정에서 사형당한 에밀의 묘비, 종전 후 뉴욕에 돌아왔다가 인종차별주의자들의 공격으로 사망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프레디의 묘비 앞에서 마무리되며, 이것이 우리가 기려야 할 전쟁의 비극과 희생을 상징하는 장면이 된다. 전쟁을 위해 줄곧 강조되어왔던 국가와 민족의 가치가, 목숨을 걸고 이를 수호해왔던 두 사람을 배반한다.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1차 세계 대전은 이 두 장면에 담긴다. 작품의 프랑스어 원제인 의 ‘inconnu’가 담고 있는 뜻을 곱씹어 볼 만하다. 무명, 또는 낯선, 외부인. 프레디의 안나의 마지막 플레이어블 레벨은 전선이 아닌 뉴욕의 길 한복판이다. 전쟁 게임이 그리는 전선 풍경, 그 가능성 전쟁을 다루는 게임, 혹은 게임이 전쟁을 다루곤 한다는 속성은 종종 비난의 대상이 된다. 플레이어가 직간접적으로 살상을 수행한다는 측면과 그 비주얼은 미디어에서 폭력적인 게이머의 이미지를 소비할 때 애용되고는 한다. 때로는 전쟁의 잔혹성을 폭력적인 오락으로 소비한다고 평가받으며, 때로는 현실을 지나치게 극화하고 가벼운 놀이로 전락시킨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원거리 포격 정도를 넘어 초장거리에서의 원격 정밀 타격이 가능해진 현대전의 양상은 ‘비디오 게임처럼 사람을 죽인다’는 비유로 모두를 섬찟하게 한다. 그러나 사실 매체로서의 게임은 전쟁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플레이어가 직접 참여해 경험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매체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수만 명의 목숨을 손에 쥔 지휘관이 될 수도 있고, 직접 전장에 나서는 병사가 될 수도 있고, 원치 않은 전쟁을 견디기 위해 분투하는 평범한 시민이 될 수도 있다. 전쟁과 게임의 오랜 연결고리였던 전략성은, 특히나 지금과 같은 때에는, 전쟁의 경험을 그저 평면적이고 단순한 놀이로 치환하는 수단으로 쓰이진 않는다. 시인들이 아름다운 단어들로 인류 문명들의 위대한 전쟁에 찬사를 보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전 일어난 1차 세계대전은 많은 시인들의 생각을 바꾸었다. 윌프레드 오언이 아름다운 단어들로 엮어낸 전쟁의 야만은 이후 수많은 분야의 작품들이 전쟁의 의미를 되묻도록 만들었고, 게임 역시 다르지 않다. <발리언트 하츠>는 전쟁 게임의 전략성을 적에 대한 승리가 아닌 전쟁에 대한 승리라는 목표를 향해 겨누며, 이를 위해 함정을 돌파하고 동료들을 돕는 행위를 수행하게 만든다. 총을 겨눌 대상이 적 병사들이 아님을 알기에, 누군가를 죽이는 행위를 지시하지 않는다. 작품은 캐릭터의 공적과 무훈보다는 개인적인 감정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작품이 1차 세계대전이라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전쟁의 경험을 표현하기 위해 던졌을 질문들처럼, 게임은 여전히 전쟁이라는 경험을 향해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들을 가지고 있는 매체다. 이는 <21 Days>에서 이주 난민으로 생존해야 하는 21일이 될 수도 있고, <배틀필드 1 Battlefield 1>의 첫 챕터에서 플레이어 사망 시마다 병사의 이름과 생몰연도가 출력되며 다른 병사의 시점으로 넘어가는 연출일 수도 있고, <발리언트 하츠>에서 점점 사람이 줄어드는 제임스의 합주 풍경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전략성이라는 영역을 매개로 가장 전쟁과 닮아있던 게임이라는 매체가 다양한 요소들을 활용해 플레이어에게 제안할 수 있는 풍부한 경험이야말로, 비이성과 욕망을 감싸는 이성과 논리의 포장지를 벗겨낼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Tags: 1차세계대전, 어드벤처, 반전운동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이머) 박해인 게임에서 삶의 영감을 탐색하는 게이머. 게임의 의도와 컨셉을 전달하는 방식들을 분석하는 데에 관심이 많습니다.

  • 게임적 리얼리즘: "제3의 시간"과 다이성(多异性)의 순간

    리얼리즘의 탄생은 근대 이래 과학주의의 확산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하지만 오늘날 디지털 문화의 다양성, 사회적 상호작용의 게임화는 리얼리즘과 과학주의 간 긴밀한 관계를 위협하고 있고, 이로 인해 우리는 리얼리즘이란 것에 대해 다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의 ‘게임적 리얼리즘(ゲーム的リアリズム)’ 이론은 그 안에 이론적 균열과 논리적 모순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로하여금 리얼리즘 내러티브라는 문제와 침묵하는 독자를 자율적인 행위자로 바꾸는 게이머 문제를 사고하도록 해주었다. < Back 게임적 리얼리즘: "제3의 시간"과 다이성(多异性)의 순간 12 GG Vol. 23. 6. 10. 게임적 리얼리즘: "제3의 시간"과 다이성(多异性) [1] 의 순간 游戏性现实主义:“第三时间”与多异性时刻 [2] 리얼리즘의 탄생은 근대 이래 과학주의의 확산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하지만 오늘날 디지털 문화의 다양성, 사회적 상호작용의 게임화는 리얼리즘과 과학주의 간 긴밀한 관계를 위협하고 있고, 이로 인해 우리는 리얼리즘이란 것에 대해 다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의 ‘게임적 리얼리즘(ゲーム的リアリズム)’ 이론은 그 안에 이론적 균열과 논리적 모순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로하여금 리얼리즘 내러티브라는 문제와 침묵하는 독자를 자율적인 행위자로 바꾸는 게이머 문제를 사고하도록 해주었다. 디지털 게임 속에서 리얼리즘적인 스토리 시간과 내러티브적 시간이 주도권을 잃어버리고, 읽는 시간 즉 ‘제3의 시간’, ‘노는’ 시간이 구해진 것이다. 실제 세계로부터의 신체적인 충동이 게임 행동의 핵심으로 전환되고, 리얼리즘 내러티브의 정신적 이끔이 게임적 리얼리즘의 감각적 이끔으로 대체된다. 행동을 주도하는 의미생성 방식이 그 핵심이 되는 것이다. 게이머는 더 이상 세계의 사물 뒤에 숨겨진 깊은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사람들의 육체가 존재하는 방식처럼 세계의 사물 자체에 놓이게 됐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리얼리즘 비디오게임의 디자인, 소비, 상벌, 인식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일종의 파노라마적인 지식의 환각을 제공하고, 다른 한편으로 게이머는 신체의 감각에 빠져 파노라마 지식 환각의 의미를 조각화, 껍데기화하는 것에 전념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비디오 게임 내러티브에서 게이머의 행동 중 어느 것도 상징적인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며, 불안정한 ‘다이성’을 나타나게 된다. 이제 가상현실은 메타스페이스에 도달하였고, 이곳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게임적 방식’으로 개인의 일상 경험에 몰입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경험은 이제 거짓이나 상상이 아니라, ‘리얼’이다. 즉, 인류의 지식에서 배제됐던 ‘게임’은 “자유의지”(Immanuel Kant), “심리상태의 경계”(Friedrich von Schiller), 혹은 “정력의 과잉”(Herbert Spencer)의 게임이 되고, 메타버스 시대에 새로운 지적 경험의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즉 “게임을 통한 지식 습득”이 아니라, “게임 자체가 지식”이 됐음을 가리킨다. 이에 따라 메타버스는 일상의 잉여로서의 ‘놀이’가 아니라, 삶 그 자체로 인류 일상의 이념을 변화시켰다. 세 가지 리얼리즘과 게임적 리얼리즘의 ‘캐릭터 독립(角色独立)’ 게임적 리얼리즘은 일본 연구자 아즈마 히로키가 창안한 개념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이 개념의 정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의 글이나 오오츠카 에이지(大冢英志)와의 대담을 통해 이 개념의 의미를 추론할 수 있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 동물화된 포스트모던>에서 아즈마 히로키는 세 가지 리얼리즘을 언급했다. 그는 오오츠카 에이지의 연구가 자연주의 리얼리즘과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이라는 두 가지 리얼리즘을 도출했다고 봤다. 자연주의 리얼리즘이 꼭 에밀 졸라(Émile Zola)로 대표되는 자연주의 유파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일본에서 라이트노벨이 등장하기 전에 존재했던 순수문학의 한 형태로서 ‘사소설(私小說)’을 지칭한다. 오오츠카 에이지에 따르면 사소설은 모두 상대적으로 안정적 발화 주체인 ‘나’를 갖고 있으며, ‘나’가 스토리의 논리와 구조에 따라 발화하는 소설이라고 언급한다. 한편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일본에서 새롭게 등장한 라이트노벨을 지향하는데, 이러한 종류의 소설에는 등장인물이나 캐릭터, 스토리, 플롯을 통제할 수 있는 안정적인 발화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라이트노벨의) 작가는 캐릭터 자체에 얽매이는데, 오타쿠들이 애정하는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책 속의 ‘2차원’ 캐릭터 자체가 이야기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라이트노벨은 사소설이 한 명의 ‘나’로 소설을 통제한다는 의식을 바꿔버렸다. 아즈마 히로키는 오오츠카 에이지의 두 가지 리얼리즘 구분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자연주의 리얼리즘이든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이든 작금의 현실을 완전히 드러내기에는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아즈마 히로키는 이 새로운 리얼리즘을 ‘게임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르면서 세 가지 리얼리즘의 분류를 완성했다. 그렇다면 게임적 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면 게임적 리얼리즘과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모두 ‘캐릭터’가 핵심이지만, 게임적 리얼리즘의 경우 캐릭터의 메타서사 기능(메타적 스토리성)에 기초한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핵심포인트는 여전히 “캐릭터 독립”이라는 것이다. 즉, 이야기(故事)는 플롯(情节)이나 현실 때문에 설정되는 게 아니라, 어떤 캐릭터를 위해서 설정되는 것이다. 독자들이 그 이야기를 읽는 이유는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감동적인 순간 때문이 아니라, 이야기 속 캐릭터의 삶과 상태를 느끼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캐릭터 독립이란 사실 캐릭터가 게임적으로 존재함을 가리키며, 이는 게이머나 독자가 자유롭게 캐릭터를 이용한 결과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아즈마 히로키가 말하는 ‘메타서사’를 구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게임 행위로부터 비롯된다. 곧 소위 게임적 리얼리즘이란 신체와 캐릭터 사이의 경계를 제거하고, 게이머/독자를 텍스트의 일원으로 만드는 방식——게이머/독자의 캐릭터화——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캐릭터’ 독립의 관점으로부터 설정되는 게임적 리얼리즘에서 중요한 측면을 망각하는데, 공교롭게도 ‘캐릭터 독립’은 독자가 읽고 소비할 수 있는 권력을 행사하는 결과라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독자가 캐릭터에 대해 특별한 애착을 갖기 때문에 스토리 설정의 내적인 동력이 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독자가 원하는대로 캐릭터를 위한 스토리를 설정할 수 있기 때문에 독자는 침묵하는 독서인이 아니라 ‘게임을 열독하는’ “게이머”가 된다. 따라서 ‘캐릭터 독립’은 읽는 행위의 문제를 지향하는데, 독자들이 이와 같은 캐릭터 독립을 원하기 때문에 캐릭터는 독립할 것이란 점이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텍스트에서 독자의 의지는 얼마든지 이야기의 의지(그것이 존재한다면)를 바꿀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적 리얼리즘은 사람과 캐릭터가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며, 즉 독자(게이머)가 캐릭터 속으로 완전히 녹아드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에서도 발생했지만, 가상현실 시대에는 더욱 전형적으로 변화했다. 가상현실 서사 [3] 에서는 인간과 캐릭터의 구별이 모호해졌다. 그들의 삶의 경계는 점차 통합되며, 이와 같은 인간과 머신의 공생은 새로운 캐릭터 의식을 낳았다. 근대 이후 과학적 진실에 대한 요구가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을, 내러티브 속 캐릭터의 ‘재생’에 대한 포스트모던 사회의 요구가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을, 가상현실 시대에 인간과 가상 캐릭터의 일체화가 게임적 리얼리즘을 만들어낸 것이다. 게임적 리얼리즘은 일종의 새로운 현실 경험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은 가상의 형식으로 실제의 신체적/정신적 경험을 창조하기 때문에 가상세계의 경험은 실제 생활 경험의 일부분이 될 수 있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뿌리는 바로 ‘게이머’ 자체다. 게이머는 캐릭터가 담고 있는 의미를 잠재적으로 구성하고, 실제 텍스트 활용의 과정에서 이와 같은 텍스트 활용 과정을 게임적 리얼리즘의 핵심으로 만들어버린다. 바로 여기서 게임적 리얼리즘은 단순히 장르(genre)나 형식(style)이 아니라, 가상현실 자체를 지향하는데, 이때 ‘게임적 리얼리즘’은 가상현실의 철학 이념과 스토리텔링의 규칙을 의미하게 된다. 여기서 ‘캐릭터 독립’이란 곧 읽는 행위의 문제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캐릭터 독립은 왜 발생할까? 그것은 독자가 이와 같은 독립을 원하기 때문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오타쿠의 2차원적 내러티브에서 캐릭터가 꼭 이야기에 속하는 것은 아니며, 자율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이야기가 결말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 역시 아니라는 점, 즉 라이트노벨에서는 캐릭터의 성격이 플롯에 우선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따라서 라이트노벨은 사소설과는 다르다. 사소설이 작가 중심적이라면, 라이트노벨은 독자 중심적이다. 캐릭터에 대한 독자들의 활용(물론 완전히 자유로운 활용은 아니다)은 캐릭터에게 자율적인 생명을 불어넣으며, 모든 캐릭터들은 각기 다른 사람들이 중복해서 활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자신을 바꾼다. “제3의 시간” : 사람의 게임, 게임을 즐기는 사람에서 게이머로 나아가 게임적 리얼리즘은 캐릭터의 독립을 통해 그동안 매체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던 독서 행위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사실 가상현실 시대의 비디오 게임 서사는 언제나 행동 주도로 이뤄지며, 인간과 캐릭터와의 간극이 가상현실 서사 속에서 사라지게 만든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메타버스적 ‘게임형태’는 인류 생존의 선형적 역사를 폭발시켜 현재진행형으로 변화시켰다. 전통적인 사실주의 서사는 이야기 발생 시간과 서사가 차지하는 시간으로 이뤄져 있다. 이것이 서사의 첫 번째 시간(이야기 시간)과 두 번째 시간(서사 시간)을 형성한다. 서사 시간은 문학의 핵심이며, 그것은 이야기 시간이 작품에 나타나는 방식을 제어한다. 상대적으로 리얼리즘 텍스트는 스토리텔링 시간과 스토리텔링 시간의 조화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는 반면, 모더니즘 텍스트는 오히려 서사 시간과 균형을 맞추는 데 더 많이 사용된다. 따라서 다니엘 벨(Daniel Bell) [4] 은 모더니즘의 특징은 현장성(거리의 소멸, eclipse of distance), 즉 독자로하여금 이야기꾼의 말버릇이나 말투가 독자에게 들리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전통 소설들은 대체로 이야기 시간과 서사 시간의 조합이다. 하지만 전통 서사에서 읽는 시간——이를 ‘제3의 시간’이라고 하자——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며, 사람들은 ‘제3의 시간’을 ‘제로 시간’ [5] 으로 가정한다. 그러나 반대로 게임적 리얼리즘은 ‘제3의 시간’을 위주로 하여 텍스트의 사용 활동(제1의 시간)과 텍스트의 서사 행동(제2의 시간)이 함께 새로운 ‘게임 행위’(제3의시간)를 구성한다. ‘제3의 시간’ 안에서 신체의 충동이 게임행위의 핵심으로 변화하고, 게임적 리얼리즘의 ‘주인공’이 ‘캐릭터’에서 ‘플레이어’로 바뀐다. 서사자로부터 ‘서사’의 핵심적 지위는 플레이어의 ‘플레이’로 바뀌게 된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세계의 사물 뒤에 숨겨진 깊은 의미를 탐구하지 않으며, 실제 삶에서 사람들의 신체가 존재하는 방식처럼 세계의 사물 자체에 놓이게 된다. 전통적인 텍스트에서 독자의 존재는 텍스트 입장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볼프강 이저(Wolfgang Iser)는 어떠한 이야기든 이상화된 암묵적 독자를 설정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암시적 독자(Der implizierte Leser)’ [6] 라는 관점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암시적 독자는 휴머니즘의 주체론적 환상을 더 많이 보여준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텍스트를 읽는 과정을 탐색했다. 그는 텍스트에 대해 “to be or to have”라는 질문을 던졌고, 그 위에 ‘쓰기 가능한 텍스트(writerly text)’의 범주를 제시했다. 하지만 ‘쓰기 가능한 텍스트’는 텍스트 의미의 틈새를 통해 구축되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읽기 행위에서 구현되는 것이 아니다. 바르트는 읽기를 일종의 성적 활동으로 간주하고, 그것의 은밀성만 강조했을 뿐 텍스트 읽기 자체에 주체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미학과 독자반응이론, 버밍엄 학파의 암호에 대한 강조를 수용하는 것은 사실 “텍스트 의미의 실현”이나 “텍스트에 대한 독자의 태도”에 중점을 두는 것이며, 제3의 시간이 서사 측면에서 제1의 시간이나 제2의 시간을 주도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독자, 관중 등은 ‘플레이어’와 같지 않다. 전자(독자)는 텍스트 뒤에만 나타날 수 있고, 후자(관중)는 텍스트 서사의 새로운 행동을 발현한다. 우리가 오직 게임적 리얼리즘 텍스트, 특히 비디오게임 텍스트 속으로 들어갈 때에만, ‘제3의 시간’은 완전히 구원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인류의 게임 발전은 세 가지 형태를 거쳤다. 최초는 낮에 사냥하고 밤에 사냥을 모방하는 ‘인간의 놀이’ 형태로 출현했다. 다음으로는 ‘놀이하는 인간’이 나타났는데, 프리드리히 폰 실러는 이를 두고 이질적 산업화 세계에서 게임을 통해 규율과 이질성에 저항하는 것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놀이란 곧 목적 없는 합목적성, 불규칙한 규율성, 자유의 상징(놀이 충동)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의 놀이’나 ‘놀이하는 인간’을 연구하지 않는다. ‘플레이어의 게임’, 즉 ‘플레이’를 핵심으로 하는 게임을 연구한다. 플레이란 텍스트를 즐기는 것이자 사용하는 것인데, 이는 곧 ‘제3의 시간’의 중심화를 형성한다. 이때 ‘플레이어’는 더 이상 텍스트 밖의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서사적 행동 속의 캐릭터라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전통 서사와 게임 서사는 매우 다르며, 후자는 전통 서사에 없는 ‘제3의 시간’ 서사를 만든다. 전통 서사는 독자들이 서사 시간을 통해 이야기 시간에 몰입하게 하고, 자신의 현실 시간을 잊게 한다. 따라서 전통 서사의 이야기 시간과 서사 시간이 긴밀하게 결합되어 이야기의 폐쇄성을 형성하고, 일단 이야기가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나고 독자의 읽는 시간은 껍데기가 된다. ‘독자’는 설정적인 캐릭터가 되고, 읽기란 개인의 생생한 삶의 경험을 착취하는 과정이 된다. 말하자면 전통 서사는 텍스트의 독서자/사용자를 구조적으로 배척한다. 게임 서사는 이와 반대인데, 그것의 심오함은 ‘제3의 시간’이 이야기 시간을 빌어 서사 시간을 소멸시켜버린다는 데 있다. 사람들이 완전히 현실로 돌아오게 하거나, 혹은 현실의 시간이 거대한 작용을 하도록 하는 것인데, 게임은 이야기 시간과 서사 시간이 끝날 때에야 비로소 진짜 시작된다. 가상현실 시대, 게임의 ‘제3의 시간’은 더욱 풍부하고 생동감 있게 변화했다. 첫째, 그것은 서사가 단순한 인과적 사슬을 따라가게 하지 않고, 대신 이야기에 몰입한 ‘행동자’에게 이야기가 벌어지는 공간적 상황을 느끼게 함으로써 이야기의 시간적 논리를 공간적 논리로 대체시킨다. 전통적인 이야기에서 인간과 이야기는 표현하고 표현되는 관계인 반면, 가상현실의 이야기 속에서 인간과 이야기는 함께 행동하는 관계가 된다. 즉 사람들이 이야기를 구동하며, 이야기가 사람을 인도하지 않는다. 둘째, 플레이어가 위탁한 ‘아바타’의 함의는 은유가 아니며, 유일무이한 개인의 완전한 대표 그 자체다. 따라서 게임 서사의 이야기는 ‘과거의 시간’을 다루지 않으며, 일종의 ‘현재진행형’이다. 플롯이 아니라 게임 캐릭터의 행동을 이끌어냄으로써 보다 넓은 상상력과 다양한 형태의 캐릭터 인생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게임 서사의 핵심은 게임 텍스트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게임을 진행하고 어떻게 게임 속에서 게임을 완성하느냐에 딸려 있다. 간단히 말해 오직 게임의 행동만이 독립적인 인간의 자유로운 태도를 설정——즉, 놀이가 인간의 모든 것을 구성한다——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인물의 운명은 더 이상 미리 짜여지지 않고 ‘사건화’된다. 여기서 가상현실 서사는 개개인이 자신만의 ‘작은 이야기’를 생성하고, 각각의 ‘작은 이야기’는 모두 결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침잠하는 사건이며, 영원히 ‘진행중’인 사건이란 점이 ‘제3의 시간’의 핵심이 된다. 그러니까 제3의 시간이란 영원히 일어나는 이야기를 가정한 시간이다. 분명히도 ‘제3의 시간’은 우리가 게임의 철학적 함의를 새로이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게임은 인간의 이성적 생활의 ‘평안함’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 끼워져 있는 의제이다. 게임이야말로 상징계와 상상계에 의해 완전히 정복될 수 없는 진실의 일부를 폭로한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게임이 철학적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이라는 사실이다. 19세기 이래 인류의 이성주의에 대한 강한 공감과 자제, 자율, 자각을 둘러싼 초자아적인 욕망은 게임의 사회정치적 함의를 배양해왔다. ‘게임’은 ‘게임 플레이를 하는 사람’의 통제력을 부각시킴으로써 이성주의 시대에 잠재된 ‘비인간화의 충동’, 즉 이질적인 노동규율에 완전히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려는 무의식적인 충동을 드러낸다. 여기서 ‘비인간화’란 인간의 탈인간화가 아니라, 사회 내에서 규정되는 방식보다 자신의 신체적 경험을 따르는 ‘인간화’, 즉 ‘비사회적 인간화’를 가리킨다. 전통적인 철학, 사회학, 인류학 연구 시야에서 ‘게임’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여전히 ‘면대면’의 인간 활동이며, 오늘날까지도 ‘게임’은 가상현실의 이야기 공간이다. 전통적 문화비평, 또는 미학 연구자의 관점에서 게임은 ‘서사’의 어떤 도움으로 껍데기를 구축하는 쾌감적 행동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게임은 일종의 ‘서사’로서 이야기의 시간적 단서들을 수정하고, 플레이어들의 게임 활동 중 ‘사건적 행동’의 문을 열어준다. 문화연구에서 ‘게임’(아케이드, 휘파람 부는 소년, 해변의 서퍼 등)은 청년 저항성의 표징이지만, 게임의 주이상스(jouissance) [7] 를 보지 못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불확실성에 대한 미련(결국 저항은 확실성을 내포한 행위이므로)이다. 문화연구에서 말하는 저항이란 어디까지나 확정적인 행위인데, 게임은 소환되지 않은 신체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경험이다. ‘ 다이성’의 순간과 플레이어로서의 나 제3의 시간에서 이야기는 이미 발생한 일(과거)에서 발생하고 있는 과정(현재진행)으로 바뀐다. 즉, 가상현실의 새로운 의미 표현의 물꼬를 튼 것(다의성, multi-paradox)이다. 이와 같은 다이성 속에서 ‘플레이어’가 함유하고 있는 뜻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 내가 보기에 메타버스로 대표되는 가상현실 시대에 게임적 리얼리즘의 ‘제3의 시간’은 다이성의 순간을 창조할 수 있다. 즉 여기서 다양한 가능성과 다양한 불가능성이 충돌의 순간을 교차하게 된다. ‘다이성’은 각종 모순과 역설의 동시발생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고정적 의미, 즉 역사적으로 안정적이고 통일적인 이해, 혹은 미리 결정된 플롯화 서사가 아니다. 일이 어떻게 발생할지 모르고 심지어 보고 싶지 않은 일이 발생하거나, 일어나길 바라는 일이 영원히 일어나지 않기도 한다. 전통 서사에서 이야기의 결말(이야기의 끝)과 엔딩(서사의 완료)은 따로 존재한다. 게다가 결과는 이미 일어났지만 엔딩이 여전히 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엔딩과 결말의 분립은 독자의 ‘제3의 시간’을 ‘규칙화’, ‘권력화’, ‘질서화’하겠다는 전통 서사의 야망을 보여준다. 비디오 게임 서사와 전통적인 서사는 정반대인데, 게임 중의 서사 시간과 ‘제3의 시간’은 교묘하게 접목되고 스토리텔링의 시간은 여기에서 보류된다. 따라서 많은 슈팅 게임들이 반전과 평화를 말하지만 서사 시간과 ‘제3의 시간’은 이야기 시간을 빼앗고 침잠하여, 플레이어들을 끊임없이 ‘제3의 시간’의 살육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엔딩이 일어나는 순간은 바로 ‘제3의 시간’의 반복적인 중첩이 이뤄지는 순간이며, 스토리에서 사망한 플레이어가 계속해서 플레이해야 게임의 의의가 진정으로 풀리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을 다룬 전략시뮬레이션 게임 ‘하츠 오브 아이언 4(Hearts of Iron IV)’는 “1936~49년 간 세계 어느 나라든 정치·경제·첩보·외교·전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쟁 기간의 판도를 확장할 수 있도록” 하는데, 많은 플레이어들은 히틀러를 선택해 전 세계를 점령하는 걸 선택한다……. 확실히 그것은 서사 시간과 스토리텔링 시간이 ‘제3의 시간’을 규율하는 게 아니라, ‘제3의 시간’이 독보적 시간이 됐음을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스토리가 어디에서 끝나느냐가 아니라, 플레이어가 어디에서 다시 시작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로 인해 플레이어의 선택권은 ‘제3의 시간’이 되며, 그것은 플레이어가 게임의 스토리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자신의 쾌락을 구축하는 것으로 구현된다. 다시 말해, 게임 스토리의 시간과 서사 시간 사이의 모든 의미는 ‘제3의 시간’을 활성화하는 것에 있다. 그렇기에 플레이는 ‘제3의 시간’을 진정으로 텍스트 주도의 시간으로 만들고, 플레이어는 다이성의 주체, 즉 홑따옴표만 있는 “‘나”가 되는 것이다. 홑따옴표 ‘나는 처음엔 실제 사람이지만, 그 후에는 게임 속 캐릭터이다. 다시 말해 ‘나는 ‘나와 캐릭터’의 융합체이며, 이는 플레이어의 정의를 구성한다. 즉 ‘나는 ‘제3의 시간’을 게임 속으로 갖고 들어가, 모종의 캐릭터와 융합된다. 이것이 바로 ‘게임 텍스트’를 전통 서사 텍스트와 다르게 만드는 부분이다. 전통적인 서사 텍스트는 작품을 시작하는 첫 글자부터 끝맺는 마지막 글자까지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책의 앞표지부터 마지막까지의 전체 내용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게임 텍스트는 소위 ‘과학 텍스트(算学文本)’ 즉 기술적 인터페이스 텍스트일 뿐만 아니라, 플레이어 캐릭터 텍스트 즉 ‘나의 텍스트’라는 두 번째 측면의 텍스트이기도 하다. 물론 게임 텍스트는 게임 제작사가 생산해낸 일부이며, 플레이어와 더불어 플레이를 할 때 ‘제3의 시간’을 가지고 게임 속으로 들어가 캐릭터가 융합된 부분의 모음이다. 다시 말해 게임 텍스트는 동적 텍스트, 즉 플레이의 과정으로서의 텍스트인 것이다. 그럼 플레이어는 무엇일까? 내가 보기에 플레이어는 하나의 ‘잉여인(空余人)’ [8] 이다. ‘플레이어’는 게임 진행 중에 역설적인 경험을 분출해냄으로써 일종의 ‘잉여인’의 얼굴을 보여준다. 조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은 <벌거벗음(Nudities)>의 ‘페르소나 없는 정체성’이라는 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개체가 순수하게 생물적인 비사회적 신분으로 귀결될 때, 그것은 각종 가면을 쓰고 인터넷상에서 제2, 제3의 삶을 살 수 있는 능력도 부여받는다.” 여기서 ‘나’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의 남아있는 부호로서의 신체인 플레이어 ‘나의 쾌락은 시비의 의의가 지배한다. 또 다른 텍스트를 맞닥뜨리면 ‘나는 곧 다른 얼굴이 될 수도 있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플레이어가 여전히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말하는 ‘이드(id)’, 즉 한 사람 마음 속 욕망의 쾌감을 깊숙이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태도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스나이퍼 엘리트(Sniper Elit)>에서 모든 플레이어는 살인자이지만 동시에 플레이어이기도 하다. 한데 게임은 이미 알고 있는 비밀을 모르는 척하는 방식일 뿐이다. 살인은 게임을 방불케 하지만 저격하는 쾌락으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통해 살인이라는 고통스러운 일과 즐겁게 지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좀 더 깊이 분석해보면, ‘플레이어’가 또 하나의 “역사적 현실의 국외자”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한편으로는 플레이어는 그 안에서 플레이의 가치를 점수나 장비, 등급을 통과해 창조하려고 노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가치의 표지물이 무의미한 행동(플레이)의 내적 뒷받침일 뿐, 플레이어의 플레이는 그런 가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강렬한 ‘씽킹 프롬 씽커(Thinking from Thinker)’를 보여준다. 그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동으로 허무에 대항하는 것이고,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아즈마 히로키의 게임적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은 다음의 측면에서 철저하게 개조됐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캐릭터 독립으로부터 독자의 욕구가 게임적 리얼리즘에 대한 환원적이고 규정적인 성질을 도출하고, 이를 통해 비디오 게이머들이 서사의 시간에 대항하는 이와 같은 행동을 ‘제3의 시간’이란 개념으로 보여줬다. 이 지점에서 플레이 행동은 해방됐으며, 게임적 리얼리즘은 일종의 불안정한 자아를 지향하고, 케릭터와 안정적 세계 사이에 항구적인 모순과 대립을 지향하게 됐다. 한 사람이 게임을 플레이하지 않을 때, 그의 심리 상태는 안정적이고 합리적이지만, 게임을 플레이하는 순간, 게임 속의 불안정한 ‘나로 변모할 수 있다. 그것은 살인의 쾌락, 돌격하는 용감함, 숨겨놓은 비열함, 죽은 동료들 가운데에서도 홀로 살아남았다는 기쁜, 그리고 전우를 구해냈다는 신성함 등을 아우른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과정에서 다이성의 자아가 이렇게 터무니없이 강림해오는 것이다. 바깥 세계에는 안정성에 대한 갈망이 있지만, 게임의 ‘제3의 시간’은 불안정성에 대한 갈망으로 구축되어 게임의 현실적인 역설을 형성한다. 게임 규칙에 대한 준수와 세계의 결핍을 플레이할 가능성에 대한 싫증 역시 역설적이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순간’은 바로 ‘다이성’의 순간이다. 이 세계는 플레이할 만한 것들이 결핍되어 있고,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규정된 동작을 따라야 하며, 이는 곧 ‘플레이’에 대한 주도적인 욕망을 품게 한다. 하지만 게임은 플레이할 수 있고, 규정적인 것에 대한 파괴이며, 동시에 규정성을 내재하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여러 역설들이 발생한다. 이 때문에 게임적 리얼리즘은 역설적인 현실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플레이어’의 얼굴은 ‘다이성’의 형태를 띠게 된다. 그것은 플레이어로서 규칙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자유롭게 플레이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한다. 그것은 ‘현실’을 이미지의 세계로 분해하고, 이미지 차원에서 주변을 맴도는 것을 지향한다. 또한 그것은 물질적인 원칙을 게임의 정신 활동 속에 포함시킨다. ‘타자와 나’를 수면 위로 부상시키고, 주체의 안정적인 함의를 제거하여 게임적 리얼리즘 속에서 생명력있고 불확실한 상태에 있는 ‘어떤 것’으로 변화시킨다. 플레이어의 이와 같은 불안정성 때문에 게임산업은 비로소 천편일률적 충돌을 극복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그것은 ‘비인간/폐인’이라는 의식을 고수하면서 인간의 역사적 활동에 대해 ‘현장에 내가 없는 척’ 가장하는 태도를 취해 가상현실 경험과 에고의 장벽에 빠져들게 한다. 디지털 세계의 파괴자로서 그것은 파괴력의 위대함을 부각시키고, 역사적 현실세계의 유령으로써 어둠 속에서 흔들리며 떨어질 것 같은(摇摇欲坠) 등불로 남겨져 있다. 그것은 침묵하고 있지만, 게임은 시끄럽게 울리기도 한다. 게임 세계가 닫히는 순간 그것은 크게 소리를 낸다. *본문출처 : 《난징사회과학(南京社会科学)》 2023년 제3기에 실린 본문은 1만3천 자로 이를 축약하였음. [1] 역주 : 원문의 ‘多异性’은 저자가 창안한 학술 어휘로 보인다. 영어로 하면 multi-difference 정도의 뜻을 갖는데, 이러한 의미를 정확하게 지시하는 한국어 어휘가 없어 한자 독음 그대로 직역했다. [2] 国家社科基金重大项目“虚拟现实媒介叙事研究”(21&ZD327) [3] 역주 : 국내에서 아즈마 히로키의 개념을 소개하는 텍스트들은 ‘작은 이야기’와 ‘커다란 이야기(거대서사)’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 글에서는 이를 각각 ‘故事’와 ‘叙事’로 구별하고 있다. 여기서는 원문의 故事는 ‘이야기’로, 叙事는 ‘서사’로 번역하였다. [4] 역주 : 다니엘 벨은 미국의 사회학자로, 《이데올로기의 종언(The End of Ideology)》(1960년)을 통해 포스트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이야기했고, 《탈산업사회의 도래(The Coming of the Post-Industrial Society)》(1973년)를 통해 '제조업 경제'에서 '과학기술에 기반한 경제'로의 전환을 전망했다.(위키피디아 참고) [5] 역주 : 이탈리아 작가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가 창안한 ‘ti con zero’를 지칭한다. 그의 단편소설집 <티 제로(ti con zero)>(1967) 속 단편들은 수학과 시적 상상력이 혼합된 시공간과 우주의 진화를 다룬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Le città invisibili)>(1972)은 기존 이야기들의 시간중심 서사를 무너뜨리고, 공간 중심의 서사를 펼친다. 독자들에게 일정한 권한을 주되, 그 안에서 여러 의미를 갖는 내용을 담아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위키피디아, amazon.com 등 참고) [6] 역주 : 볼프강 이저는 독일의 문학 연구자이자 비평가로, 독자반응비평 이론을 연구했다. 이저에 따르면, 구조화된 행위로서의 독자의 역할은 독자가 텍스트 구조를 상상 속으로 수렴하게 하여 텍스트 구조를 충족시키는 방법을 보여준다. 독자가 읽기 과정에 참여할 때 텍스트 구조가 연결되고 살아나며, 독자는 역사적 현실과 자신의 경험, 독자로서의 역할 수용 사이의 긴장 속에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7] 역주 : 저자는 라캉 이론을 통해 게임적 쾌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라캉에 따르면 주이상스는 강렬한 성적 쾌락인 동시에 쾌락원리 및 언어상징 너머의 전복(顚覆) 충동이다. 주이상스는 현실원칙을 파괴하기 때문에 결국 고통이 된다. 이때 주체는 분열적 상황에 빠지고, 대타자를 파괴하려는 강렬한 욕망을 포기하지 못한다. [8] 역주 : 원문의 空余(공여)는 ‘남아돌다’를 뜻한다. 여기서는 空余人을 ‘잉여인’으로 번역했다. Tags: 번역 예술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난카이대학 문학원 교수) 저우즈창, 周志强 (활동가, 작가) 홍명교 활동가, 작가. 사회운동단체 플랫폼C에서 동아시아 국제연대와 사회운동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를 썼고, <신장위구르 디스토피아>와 <아이폰을 위해 죽다>(공역) 등을 번역했다.

  • 동시대 레트로 게임 : ‘동시대’와 ‘레트로’의 불편한 공존에 관해

    우리의 동시대에는 그와 완전히 상반되는 현상, 즉 ‘레트로 스타일’이 존재한다. 포토 리얼리즘의 극단을 완성해 나가는 이 시기에 고전적인 픽셀 아트와 칩튠 사운드, 단조로운 게임 플레이로 구성된 게임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게임들은 우리의 보편 인식, 즉 기술 중심의 비디오 게임史에 입각해 보자면 이레귤러들로 봐야 할까? 그런데 그렇게 단정 짓기엔 ‘동시대 레트로 게임contemporary retro game’은 너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 Back 동시대 레트로 게임 : ‘동시대’와 ‘레트로’의 불편한 공존에 관해 24 GG Vol. 25. 6. 10. 비디오 게임은 기술 기반의 매체다. 이 사실은 그 어떤 관점으로도 부정할 수 없다. 전기와 디지털 신호가 없이는 작동할 수 없는 이 놀이는 고도화된 컴퓨팅, CGI, 물리적 입력 장치, 디스플레이 등의 기술과 불가분의 관계다. 그렇기에 우리는 비디오 게임의 역사와 디지털 기술의 발전사를 같은 선線 위에 위치시킨다. 확실히 매년 반복되는 ‘신작 게임’ 발표의 현장은 기술의 각축전처럼도 보인다. 특히 AAA로 위시되는, 고도의 예산이 투여된 게임들은 지난해의 기술적 성취를 상회하며 더 강력한 시각적 완성도를 자랑하며 우리는 그에 열광한다. 그런데 우리의 동시대에는 그와 완전히 상반되는 현상, 즉 ‘레트로 스타일’이 존재한다. 포토 리얼리즘의 극단을 완성해 나가는 이 시기에 고전적인 픽셀 아트와 칩튠 사운드, 단조로운 게임 플레이로 구성된 게임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게임들은 우리의 보편 인식, 즉 기술 중심의 비디오 게임史에 입각해 보자면 이레귤러들로 봐야 할까? 그런데 그렇게 단정 짓기엔 ‘동시대 레트로 게임contemporary retro game’ [1] 은 너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림 1. Steam에서의 복고풍(Retro) 태그와 픽셀 그래픽(Pixle Graphics) 태그의 출시량(위쪽)과 비율(아래쪽) 그래프. (출처 : steamdb.info ) Steam의 각 게임에 적용할 수 있는 태그 [2] 의 기준으로 살펴보자면, 2024년 발매된 복고풍(Retro) 태그를 가진 게임의 수는 2,266편이며 픽셀 그래픽(Pixel Graphics) 태그를 가진 게임의 수는 4,250편으로 집계된다. 2024년에 Steam에 발매된 게임의 수는 29,063편이며 각 태그의 비율은 약 7.8%와 14.6% 정도로 확인된다. 그보다 5년 전인 2019년에는 각각 678편(5%)과 777편(5.7%)이었다. 즉 5년 사이에 발매 수는 각각 약 4배와 6배 정도로 증가했으며 전체 발매 수 대비의 비율은 1.4배와 3배 정도로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3] 절대수뿐만 아니라 발매작 내에서의 비율도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특성’이 하나의 계열을 형성하고 있으며, 점차 그 범주를 늘려가고 있다는 근거가 된다. 말하자면 동시대 레트로 게임은 명백한 경향이자 현상이다. 따라서 이 현상은 우리의 기초적인 인식을 위배한다. 왜 기술의 발전과 함께 움직이는 비디오 게임의 역사가 이러한 반동적인 현상을 만드는가? 왜 게이머들은 점차 ‘레트로 스타일’의 게임에 관심을 늘려가는가? 향수 현상으로서의 레트로 스타일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게이머들이 점차 향수에 의존해 간다는 관점이다. 이는 게이머의 전체 연령층 상승이 가져온 경향으로도 볼 수 있다. Entertainment Software Association(ESA)에서 2021년 작성한 비디오 게임 산업 보고서 [4] 에 따르면 미국 게이머의 인구 비중은 18세 미만이 20%, 18~34세가 38%, 35세 이상은 통합 42%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이 통계에 의하면 20대 이하의 게이머들이 전체 수치에서 여전히 강세를 보이고 있으나, ‘중년 이상의 비디오 게이머’ 역시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비중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동기관의 2015년에 보고서 [5] 에서는 18세 미만이 26%, 18~35세가 30%, 36세 이상은 통합 44%로 집계되는데 전체적으로 18세 미만에서 18세 이상으로 분포가 옮겨가는 형태로 보인다. 절대수의 관점에서 보면, 미국 게이머의 전체 수치는 2015년은 1억 5천만이며 2021년에는 2억 2천만으로 약 1.5배의 상승을 보인다. 따라서 2015년에는 36세 이상의 게이머가 약 680만 명으로 추산, 2021년에는 약 950만으로 추산되기에 중년 이상의 게이머 절대수가 증가하는 추세인 것은 확실하다. 소위 말하는 ‘가벼운 게이머’, 즉 게임의 소비에 적극적이지 않은 사람의 증가를 의심해볼 수도 있다. 그러한 관점을 위해 ‘게임에 대한 적극적 소비자’에 대한 하나의 모델로 Steam 사용자의 분포 분석으로 옮겨갈 수 있다. 2024년 statista.com 이 수집한 자료 [6] 에 의하면 41%를 차지하는 가장 다수의 그룹은 20~29세로 집계되며, 그 뒤로 가장 큰 비중은 29%를 차지하는 30~39세 그룹이 차지하고 있다. 20세 미만의 플레이어 그룹은 5% 정도를 차지하며 40대의 15%, 50대의 7% 보다도 낮게 집계된다. 결국 이러한 도식은 과거의 게임 경험을 가진 채 성장하는 ‘자기 역사를 가진 게이머’가 증가하고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으로 연결된다. 30대 이후에 처음 비디오 게임을 접하는 인구보다는, 10대와 20대를 걸쳐 30대 이후에도 비디오 게임 플레이를 유지하는 게이머를 상상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의 ‘레트로 스타일 게임’에 대한 소구는 이러한 게이머들의 향수적 요청이라고 가정할 수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연구가 있다. 옥스퍼드 인터넷 연구소와 시러큐스 대학교 공공 커뮤니케이션 스쿨은 닌텐도 스위치 온라인의 게임 세션 기록을 통해 레트로 게임을 플레이한 플레이어가 대부분 자신이 10세 때 유행했던 게임을 자주 플레이했다는 연구 [7] 를 발표했다. 게임의 선택에 이러한 개인적 향수personal nostalgia가 개입되는 것이다. 많은 레트로게이밍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현상을 향수의 효과로 해석한다. 예를 들어 야코 수오미넨Jaako Suominen은 “레트로게이밍과 관련하여, 우리는 또 하나의 외래어를 사용할 수 있다. 노스탤지어이다.” [8] 라고 서술했으며, 데이비드 하이네만David Heineman은 “비디오 게임에서의 향수가 흥미로운 이유는, 재출시된 게임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플레이어가 정확히 같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9] 라고 쓴다. 물론 이들의 연구 방향은 어디까지나 동시대 레트로 게임을 소비하는 경향보다는 과거의 게임을 그대로 즐기는 레트로게이밍retrogaming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편이다. 하지만, 이 모든 면을 통틀어서 중년의 게이머들에게 있어 ‘향수’가 가져다주는 힘에 대해 공유하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향수가 작동하는 방식은 당연히 일정량 과거에 대한 낭만성을 기반으로 한다. 예를 들어 기술적 제약이 존재하던 과거가 상대적으로 더 높은 혁신의 가능성을 가졌다는 전제다. 카밀 비친스키Kamil Wyczynski는 그의 연구 보고서《Meanings of Retrogaming Consumption for “Millennial” and “Generation X” Men》에서 X세대와 밀레니얼 세대의 게이머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한 뒤, 그들이 레트로게이밍을 즐기는 이유를 9가지로 ㅡ 조악하게 설계된 제품 경험, 미완성 상태로 출시, 소비자 노동, 온라인을 전제로 한 설계, 온라인 멀티플레이 중심, 창의성의 결여, (하드웨어의) 계획된 노후화, 불공정한 경쟁 환경, 이윤을 위한 설계 ㅡ 로 정리한다. [10] 대체로 소비자 관점의 서술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확실히 ‘창의성의 결여’라는 대답은 존재감을 가진다. 연구 참여자 중 한 명은 이 문제에 대해 “80년대만 해도 게임들을 보면… 완전히 새로운 콘셉트였어요, 새롭고, 혁신적이고, 그러니까… 혁신이 있었죠. 그런데 지금은 그냥 똑같고 똑같은 게임들만 계속 나오는 것 같아요.”라고 답하고 있다. 또한 다른 참여자는 그럼에도 ‘인디 게임 개발자에게는 좋은 환경’이라는 답을 한다. 비친스키는 여기에 이렇게 첨언한다. “참가자들에 따르면, 이러한 소규모 회사들은 대형 게임 기업들보다 게임 제품을 설계할 때 더 많은 위험을 감수하려는 경향이 있다. 인디 개발자들은 오늘날의 레트로 게임들을 낳았던 초기 게임 산업의 환경을 모방하고 있다.” 즉, 동시대 레트로 게임은 게임이 더 창의적이던 ‘과거’를 충실히 모방하기 때문에 동시대의 다른 게임에 비해 더 창의적이라는 (향수 기반의) 평가를 받는다. 프랭크 보스맨Frank Bosman은 이러한 경향을 ‘비디오게임 낭만주의Videogame Romanticism’라고 정리하는데, 그의 정리에 의하면 이것은 ‘이는 과거를 기술적으로는 열등했을지 모르나, 문화적·사회적·정신적으로는 우리 시대보다 우월했던 시기로 이상화하는 방식’이다. [11] 향수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자들이 스베틀라나 보임Svetlana Boym가 규정한 두 가지 향수의 개념을 차용한다. 보임은 《The Future of Nostalgia》에서 향수를 두 가지 개념, 복원적 향수Restorative Nostalgia와 성찰적 향수Reflective Nostalgia로 구분한다. 이 둘은 Nostalgia라는 단어의 어원인 Nostos(귀향)과 Algia(그리움)로 그 근원이 분리된다. 즉 Nostos에 더 많은 기원을 두고 있는 복원적 향수는 과거의 것을 ‘마땅히 돌아가야 할 시간적 고향’으로 이상화/낭만화하는 경향을 말한다. 반면 Algia에 그 근원을 두는 성찰적 향수는 과거라는 시간과의 물리적 단절을 받아들이는 성향이다. 이 향수는 대상의 직접 재현을 요청하기보다는 현재라는 시간과의 거리감을 통해 과거를 인지하는 경향이다. 앞서 비친스키 연구의 참여자들이 보인 태도는 정확한 의미에서 복원적 향수를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태도를 동시대 레트로 게임 전체에 적용할 수 있을까? 맷 보이어Matt Boyer는 Game Developer에 게재한 글에서 동시대 레트로 게임(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네오 레트로 게임’)이 복원적 향수를, 과거의 게임을 그대로 즐기려는 경향인 레트로게이밍이 성찰적 향수를 드러낸다고 말한다. [12] 그의 논지에 따르면 레트로 스타일의 차용이란 이상화된 ‘과거의 스타일’을 재현하기 위한 방법적 동원이라는 것이다. 그는 특별히 어떠한 예시를 제시하진 않았으나, sebagamesdev의「파이트 앤 레이지Fight’n Rage」나 Hebi Lee의 「케이론즈 크립트Kharon’s Crypt」같은 게임들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이 두 게임은 단순히 픽셀 그래픽을 사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게임의 시각적 구성에서도 자신들이 ‘원본’으로 삼고 있는 게이밍 환경까지도 복원하려 한다. 예를 들어 「파이트 앤 레이지」는 CRT 모니터를 방불케 하는 필터와 화면의 곡면까지 재현하고 있으며, 「케이론즈 크립트」는 게임 화면의 외측에 ‘게임보이 컬러’의 외형까지 표시한다. 이것은 보이어가 함께 서술하고 있듯, 비디오 게임의 열렬한 플레이어가 개발자가 되며 발생한 현상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개발자’로서 가장 첨단의 기술을 필요로하기보다는 ‘추억의 게임’을 그대로 재현하려는 욕망을 보인다는 점에서 상당히 향수 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 2. CRT의 질감을 남겨놓은「파이트 앤 레이지」(왼쪽)와 게임보이 컬러를 연상시키는 구성의「케이론즈 크립트」(오른쪽). 하지만 보이어가 자신의 글에 차용하고 있는 마리아 B. 가르다Maria B. Garda는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진다. 그는 오히려 동시대 레트로 게임은 성찰적 향수에 해당한다고 논하며 「핫라인 마이애미Hotline Miami」, 「페즈Fez」,「FTL」, 「맥픽셀McPixel」을 예시로 든다. 그는 이 게임들이 단순히 과거의 형식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맥락에서 과거의 형식을 성찰하며 이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페즈」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회고의 감정이라기보다는, 향수라는 감정의 양식과 구조 자체에 대한 탐색으로 이해” [13]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페즈」가 재현하고 있는 것은 과거 그대로가 아니라 현재 플레이어가 과거의 형식을 보며 느끼는 ‘향수’ 그 자체라는 것이다. 비디오 게임에서 향수가 재현되는 방법 자체를 직접적으로 대상으로 삼기에, 가르다는 이러한 게임들은 전적으로 현대의 시기에서 ‘향수’라는 가능성을 조망하거나 탐구하는 것이라 분석하고 있다. 물론 하나의 현상을 어떠한 맥락에 모조리 대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동시대 레트로 게임이 모두 복원적 향수나 성찰적 향수에 포함된다고 쉽게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핵심은 ‘향수’ 그 자체에 있다. 게임 제작의 측면에서 보자면, 동시대 레트로 게임은 두 가지 의미에서 향수의 범주 안에 있다. 하나는 그것을 만드는 이들의 재현적 욕망이며, 이것은 많은 경우 복원적 향수에 가담한다. 또 하나는 그것이 만들어내는 창작적 환경, 이를테면 제한된 인력과 예산, 창의성의 발현을 위한 의도적 제한 등이 있다. 이는 많은 면에서 성찰적 향수에 속한다. 소비의 측면에서 본다면 많은 경우 복원적 향수에 속한다. Mossmouth의 「UFO 50」같은 게임은 ‘합팩’이라는 문화적 틀 없이 이해되기 어렵다. 「UFO 50」의 즐거움은 과거의 ‘불법복제판’을 상기시키는 관점에서 온다. 하지만 동시에, 「UFO 50」의 진지함이 과거의 ‘불법복제판’을 다른 방식으로 상기시키게 만든다면 이는 또한 성찰적 향수의 작용 안에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어찌 되든 동시대 레트로 게임은 ‘과거 없이’ 현존할 수 없는 존재들인 셈이다. 향수 바깥의 레트로 스타일 하지만 논의를 이렇게 좁혀서는 전부 설명할 수 없는 경향이 있다. 동시대 레트로 게임이 단순히 그것의 ‘향수’ 를 감지하는 게이머들에게만 어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수많은 동시대 레트로 게임이 원본으로 삼는 대상은 대체로 80~90년대의 8비트 또는 16비트 게임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게이머’로서의 역사를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이러한 전략은 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스타일이 하나의 현상처럼 퍼져나가고 있는 배경에는 분명, 향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른 작동들이 있을 것이다. Z세대를 대상으로 하는 비디오 게임 연구는 대체로 이들의 작동 배경에는 ‘간접 향수second-hand nostlagia’ 또는 ‘역사적 향수historical nostalgia’가 작동한다고 본다. 말하자면 일종의 양식화된 역사성 또는 그러한 형식에 대한 대행된 향수로서 과거의 게임을 탐구한다고 보는 것이다. 앞서 제시한 옥스퍼드 대학의 《Reliving 10 years old》에서도 이러한 해석이 발견되는데, 닌텐도 스위치 온라인의 클래식 게임을 플레이한 사용자 중 29%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단종된 콘솔의 게임을 플레이했다는 결과가 나온다. 연구자들은 이들의 게임 플레이는 개인적 향수가 아닌 역사적 향수의 작동이며, 따라서 향수란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를 상상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결론을 낸다. 물론 이는 설문의 결과에서도 나타난다. 영국의 프링글스는 올해 1월 레트로 게임기의 수리를 지원하는 Retro Console Clinic과 레트로 기기에 대한 약 2,000명을 대상으로 하는 설문 [14] 을 3gem과 동시에 진행했다. 이 결과에 의하면 Z 세대 설문자 중 24%가 레트로 게임 콘솔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이 설문에 참여자 중 74%가 이러한 ‘향수의 게임nostalgic games’이 더욱 편안함을 준다고 답한 것으로 집계된다. 하지만 이것을 전부 향수의 효과로만 치부하는 방법과 거리를 두는 관점들도 있다. 프랭크 보스만은 이러한 현상을 레트로게이밍과 구분되는 빈티지 플레이Vintage Play라고 정의한다. 그에 의하면 자신이 향유하지 않은 과거의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패션이나 다른 문화에서의 빈티지 소비와 유사한 경향이라는 것이다. 그는 트레이시 다이앤 캐시디Tracy Diane Cassidy와 해나 로즈 베넷Hannah Rose Bennett의 빈티지 개념을 그대로 차용해 “빈티지는 패스트패션의 부정적 이미지와 그 결과에 대한 대응 양식response이다.” [15] 라고 적는다. 말하자면 이러한 선택은 ‘가장 최신의’라는 형용사에 대한 일종의 반발로 작동한다. 물론 이때 그것에 대한 반발의 도피가 과거의 것이라는 점에서 일견 향수처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보스만은 이렇게 적는다. “이 현상은 향수라기보다는 빈티지에 가깝다. 슬로우 게이머들 역시 슬로우 쿠커들처럼,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시대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이상화된 버전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16] 앞서 언급한 프링글스의 설문에서 역시, 설문자 중 78%가 레트로 기기를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 ‘휴대폰의 시끄러운 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라고 답했다. 물론 지나치게 직접적인 대입은 불가능하겠으나, 여기에는 ‘현재의 기술’에 대한 일종의 저항적 의식이 완전히 부재하지는 않은 것 같다. 따라서 동시대 레트로 게임이 하나의 빈티지적 작용이라면 이것은 전적으로 패셔너블한 현상이다. 중년 이상의 게이머들과 달리, 젊은 게이머들에게 픽셀 그래픽스나 칩튠이 하나의 ‘대안적 스타일’로 여겨진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상 초고도의 포토 리얼리즘이 주는 어떠한 경외감은 현실적 문제로 인한 체감의 커브를 겪고 있다. 고도의 자본이 필요한 포토 리얼리즘이 체감적으로 진보하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예산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필요 예산의 증가’는 점차 그 폭을 넓히기 때문에 사실상 제공할 수 있는 시각적 경외는 점차 감소하는 그래프가 생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면에서 ‘기술의 투명화’, 요컨대 기술의 지나친 일상화가 해당 기술에 대한 경외를 저하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리도 이 일상 기술이 더이상 경외를 주지 못할 때, 그에 반하는 재래 기술이 그 효과를 가져가기도 한다. 음악에서의 바이닐, 영화에서의 애니매트로닉스나 스톱 모션에 대한 복귀된 경외가 그러한 경향이기도 하다. 도미닉 바트만스키Dominik Bartmanski와 이안 우드워드Ian Woodward는 자신들의 저서 《Vinyl : The Analogue record in the digital age》에서 “성공적인 문화적 도구는 제 기능을 수행하지만, 그 각각은 보다 깊은 만족을 주는 구체적인 경험의 집합을 수반한다. 우리는 ‘전적으로 실용성을 기반으로 형성된 일부 모더니즘 객체들이 유독 매력 없었던 것’도 알고 있다.” [17] 라고 적는다. 최고의 기술이 언제나 가장 아름답게 수용되지 않는 법인 셈이다. 그림 3. 픽소라마의 이미지로 만들어진 100피스 퍼즐(Heye) 이 관점에서 픽셀 그래픽스는 바로 이러한 궤도 안에 들어갈 수 있다. 16비트에서 32비트로 넘어오면서 일종의 ‘뒤쳐진’ 스타일로 여겨졌던 픽셀 그래픽스는 그것을 체감하는 역사 경험자에 한해서만 작동한다. 오히려 시간성이 무화된 시기에 이들은 병렬적 인식 위에 올라갈 토대를 갖는다. 1997년 결성한 eBoy의 「픽소라마Pixorama」 시리즈가 그 대표적인 예시다. 아이소매트릭 스타일의 픽셀 아트를 이용해 세계의 여러 도시를 그리는 이 시리즈는 그 결성이래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2017년에는 루이비통에 의해 《TOKYO BY EBOY - TRAVEL BOOK》를 발매하거나 꼼데가르송 컬렉션에서 드레스의 패턴으로 사용되었다. 픽셀 아트 스타일이 동시대의 예술적 방법론의 하나로 인지된다는 것은 이것이 어떠한 ‘뒤쳐진 양식’으로 인지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오히려 ‘비디오 게임’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시각적 기표는 여전히 픽셀 아트로 표현된다. 그림 4. 게임적 이미지를 위해 픽셀 아트를 차용한 ‘메가 커피’의 광고 이미지 엘리자베스 E. 거피Elizabeth E. Guffy는 자신의 저서 《Retro : The Culture of Revival》에서 ‘레트로’란 단순한 과거가 아닌 근대로서의 과거 또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회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한 이렇게 더한다. “레트로는 감속 또는 반대 추진력의 형식을 제공하며, 우리가 시공간 속에서 앞으로만 나아가려는 끊임없는 충동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레트로의 회고적 소환은, 아무리 그 자체가 ‘모던’하게 포장되었을지라도, 그 과거를 진정한 의미에서 지나가 버린 것으로 표시한다. 연속성을 강조하기보다는, 레트로는 우리를 이전 시대와 단절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우리가 우리 앞을 지나간 것들과 분리될 때, 레트로가 끌어당기는 반작용의 힘은 더욱 강력해진다.” [18] 말하자면 레트로가 가진 본질적 속성이란 ‘전진’ 혹은 ‘진보’라는 지향성에 반발하고 그 역동성을 재고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이먼 레이놀즈Simon Reynolds 역시 자신의 책 《레트로마니아》에서 이렇게 적는다. “한때는 전통에서 벗어나 혁신적인 음악을 (아티스트로서) 생산하거나 (소비자로서) 지원하던 사람들, 바로 그들이 지금은 과거에 가장 깊이 중독된 집단이다. 인구 통계상으로는 여전히 최첨단 계급이지만 이제 그 역할은 선구자나 혁신가가 아니라 큐레이터나 아카이브 관리자가 됐다. 전위avant-garde가 아니라 후위arrière-garde가 됐다.” [19] 이를테면 현존하는 동시대 레트로 게임에 대한 소비 의식에는 단순한 향수 이상의, 전진적 기술 현상에 대한 반대의 의식이 존재할 수도 있다. 앞서 말했듯, 더 이상 뛰어난 포토리얼리즘이 놀라움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블라스퍼머스blasphemous》의 어두운 스타일과 부드러운 프레임의 픽셀 그래픽스는 ‘장인 정신’ 같은 아날로그적 경외를 느끼도록 만든다. 동시대 레트로 스타일의 증가는 우리가 현재 느끼는 기술에 대한 감각적 정체를 확인시켜 주는 현상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비디오 게임의 역사를 다면화하기 하지만 이 즈음에 마지막으로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과연 이러한 ‘레트로 스타일’은 진정한 의미에서 귀환인가? 지금껏 이야기한 모든 전제는 비디오 게임에서의 레트로 스타일이 어떠한 극단적 단절이 있었던 것을 전제하고 있다. 말하자면 ‘레트로 스타일’은 (영화에서의) 무성 영화나 (음악에서의) 바이닐과 같은 존재인가? 《쥬라기 공원Jurassic Park》이 기술을 경유해 현재의 시기에 도래시킨 공룡과 같은 ‘멸종의 흔적’이라고 봐야 하는가? 이 전제에 대해서는 재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가 비디오 게임의 역사라고 말할 때, 그것은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가? 이것은 대체로 비디오 게임의 산업적 발전사, 그러니까 게이머들이 게임을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구매해서 플레이하는지’와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그 현장을 아케이드에서 PC나 콘솔로 옮겨가는 방식의 서술이 주를 이룬다. 초기 비디오 게임사에서의 주인공은 아케이드와 아타리이고, 그 뒤를 잇는 주인공들이 닌텐도와 세가라는 서술에 우리는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이 글을 시작할 때 했던 이야기와 연결되듯, 비디오 게임에서의 ‘산업화’는 ‘기술적 발전’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 이를테면 게임 콘솔의 역사는 전적으로 기술적 혁신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2세대 콘솔, 3세대 콘솔이라며 역사를 짚어나갈 때 우리가 지시하는 것은 그것과 연결된 기술적 지평이다. 그리고 이 속도에 극도의 가속도를 붙인 것은 명백히 소니다. 5세대, 그러니까 32비트 이후부터 가속화된 컴퓨터 그래픽스의 혁신, 그리고 그것을 대표할 소프트웨어로서의 「파이널 판타지 VII」이 가져다준 충격은 비디오 게임의 진보를 시각 표현의 영역으로 안치시켰다. 그래서 플레이스테이션 이후의 비디오 게임의 역사란 ‘얼마나 더 진보한 시각 표현’과 마주하냐의 역사와도 일치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관으로 봤을 때, 픽셀 그래픽스는 그 무덤으로부터 되돌아온 존재가 된다. 그런데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다. 이른바 5세대 콘솔과 공존하고 있었던 존재로서 ‘게임보이 컬러’를 자꾸 놓치고 있는 것이다. 1994년 발매된 플레이스테이션은 확실히 쇼크였으며 이 엄청난 기기는 전 세계에 1억 대의 판매고를 올린다. 하지만 그와 병렬된 시기로 1989년 발매된 게임보이와 1998년 발매된 게임보이 컬러 역시 합계 누적 1억 1천만 대의 판매고를 올렸다. 마찬가지로 이어진 6세대에도 플레이스테이션2는 전 세계 누적 1억 6천만 대, 게임보이 어드밴스는 전 세계 누적 8천만 대의 판매고를 올린다. 이 시기에 플레이스테이션2가 보인 수치가 압도적이긴 하나 게임보이 어드밴스가 역사에서 지워질 정도의 위상은 아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게다가 다음 7세대에서 닌텐도 DS가 전 세계 누적 1억 5천만대로 플레이스테이션3의 8천만 대보다 더 앞선 수치를 보인다. 물론 닌텐도 DS는 성능상 어느 정도의 3D 그래픽스를 출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도의 3D 그래픽스가 불가능한 점에 더해 대부분의 스튜디오가 게임보이 어드밴스의 개발 환경을 유지했던 덕에 많은 게임들이 여전히 픽셀 그래픽스의 스타일을 유지하며 발매되었다. 닌텐도의 휴대기기가 3D 그래픽스 중심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건 2011년 발매된 3DS부터다. 말하자면 이 직전까지 휴대기기는 픽셀 그래픽스를 중심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20] 흥미로운 사실은 2011년의 3DS로 휴대기기가 3D 그래픽스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 시점에《아이작의 번제The Binding of Issac》같은 레트로 스타일의 인디 게임이 태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마치 바톤터치가 이루어지듯, 픽셀 그래픽스의 역사는 단절 없이 유지되었다. 그림 5. GBA의「젤다의 전설: 네 개의 검」(왼쪽)과 NDS의「어드밴스 워즈: 듀얼 스트라이크」(오른쪽) 그러니까 우리는 비디오 게임의 역사 기술에서 무엇인가를 잊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픽셀 그래픽스로 대표되는 ‘레트로 스타일’은 그 명맥이 끊기지 않은채 하나의 계통을 이어오고 있었다. 앞서 말한대로 레트로 스타일은 ‘무덤에서 되돌아온’ 형식도 아니며, 바이닐 처럼 ‘무사귀환한 왕의 포맷’ [21] 도 아니다. 비디오 게임의 역사는 오히려 픽셀 그래픽스를 중심으로 하는 ‘다른 버전의’ 사관 집필이 가능하다. 비디오 게임의 통사에 있어 게임보이 어드밴스와 닌텐도 DS가 가지는 위상은 ‘언더그라운드’라고 부를 수 없다. 이들은 한번도 산업이라는 필드에서도 주류 바깥으로 밀려난 적이 없다. 픽셀 그래픽스는 ‘언제나’ 비디오 게임사의 주류를 함께해온 포맷이다. 다만 우리의 기초적인 인식, 즉 비디오 게임의 역사란 곧 ‘가장 진보한 기술을 다투는 각축장’이라는 사고 체계에 의해 눈이 멀어버렸던 건 아닐까. 우리가 얼핏 가지게 되는 비디오 게임史란 기술 중심주의에 함몰되기 쉽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이라는 통사를 고려할 때 이 내부에는 더 다층적이고 복잡한 기술적 요건들이 도사린다. 즉 우리는 플레이스테이션2~3와 게임보이 어드밴스가 웹에서 서비스된 플래시 게임과 피처폰용의 게임들과도 병렬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그렇지만 이들도 비디오 게임의 역사에서 하나의 영역을 만들고 (비록 일부는 끊겨버렸다 하더라도) 그 고유의 선형을 구성한다. 그림 6. 좌측 상단부터 「러브드」(플래시), 「레이디언트 히스토리」(NDS), 「갓 오브 워 3」(PS3), 「미니 게임 천국 5」(피처폰). 모두 2010년 발매된 게임들이다. 결국 ‘비디오 게임의 그래픽은 언제나 포토리얼리즘을 목표로 했다’는 서술에 대해서는 절반의 동의만 가능하다. 이런 분석은 아니메를 그 목표 지점으로 삼았던 80~90년대 일본 콘솔의 주류 스타일조차 설명하지 못한다. 비디오 게임에 있어 ‘기술’이란 (다른 모든 매체가 그러하듯) 다층적이고 다면적이며 다양한 형태로 유지되어 왔다. 그저 무엇인가가 그러한 사유에 잦은 연막을 작동시키는 것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레트로 스타일’이 과거에 대한 참조라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디오 게임에는 ‘과거’가 무한히 연장되는 힘이 있다. 그것은 흥미롭게도 비디오 게임이 기술 종속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러한 ‘과거’를 아직까지도 연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계속 플레이를 요청해 왔기 때문이다. ‘언제나 게임을 하고 싶다’는 욕망은 비디오 게임의 기술을 다층적으로 분화시켰고, 덕분에 비디오 게임의 ‘과거’는 언제나 현재화하며 유지될 수 있었다. 동시대 레트로 게임은 그러한 연장의 결과일 뿐, 결코 첨단 기술에 반하며 등장한 돌연변이나 이레귤러가 아니다. 이 연장 또는 생존, 혹은 유지야말로 비디오 게임이 가진 복잡한 생명력을 더 확고히 설명한다. 따라서 우리는 비디오 게임의 기술적 역사관을 본래의 형태로 수정할 필요가 있다. 비디오 게임은 ‘포토리얼리즘’ 또는 ‘오픈 월드’ 같은 기술적 첨단을 위해서만 달려온 것이 아니다. 비디오 게임은 기술 기반의 매체이기 때문에 오히려 다양한 기반의 기술을 역사의 층위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유지는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비디오 게임과 접촉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비디오 게임은 앞으로도,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그것이 ‘기술과 함께하는 한’ 끝없이 다양한 생태계로 살아남을 것이며, 우리의 기록은 결코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시간은 직선이나 더 나은 점진적 행진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존재하며 서로에게 관여하는 별자리와 같다는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의 의식 [22] 은 우리의 역사에도 유효할 것이다. [1] 페이레스 카얄리Fares Kayali와 조세프 슈Jusef Schuh는 《Retro Evolved: Level Design Practice exemplified by the Contemporary Retro Game》에서 ‘복고풍 감각과 현대적이고 집중력 있는 게임플레이의 조합’의 게임을 Contemporary Retro Game라고 명명한다. [2] Steam의 태그 기능은 유저에 의해서 직접 부여되는 시스템이다. 게임 개발자는 게임을 등록할 때 해당 게임에 속하는 태그를 설정하며, 페이지가 생성된 이후에는 유저들에 의해 자유롭게 태그를 추가할 수 있다. 단 게임와 무관하거나 부적절한 태그는 개발자에 의해 제거가 가능하며, 장기 존속하더라도 유저들의 투표에 의해 부절적한 태그는 노출되지 않는 방식으로 관리된다. [3] 앞서 설명한대로 태그는 유저들에 의한 자의적 관리 기능이기 때문에 게임이 발매된지 한참이 지나고나서 부여되는 경우도 가능하다. 이것을 고려할 때, 발매 당시 기준에서 개발자가 의도적으로 ‘복고풍’을 지칭한 경우는 더 적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발매된 지 시간이 지난 게임에 유저들이 ‘복고풍’을 붙이는 경향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4] 《2021 Essential Facts about the Video Game Industry》 (Entertainment Software Association, 2021) [5] 《2015 Essential Facts about the Video Game Industry》 (Entertainment Software Association, 2015) [6] Steam Statistics By Release, Sale, Demographics, Usage, Operating System, Revenue And Facts, (Pramod Pawar, Rohan Jambhale) https://www.coolest-gadgets.com/steam-statistics/ [7] 《Reliving 10 years old: Descriptive Insights into Retro Gaming》 (Nick Ballou/Nicholas David Bowman/Thomas Hakman/Andrew K Przybylski, Oxford Internet Institute/SI Newhouse School of Public Communications Syracuse University, 2025) [8] 《The Past as the Future? Nostalgia and Retrogaming in Digital Culture》(Jaako Suominen, 2007) [9] 《Public Memory and Gamer Identity: Retrogaming as Nostalgia》(David S. Heineman, 2014) [10] 《Meanings of Retrogaming Consumption for “Millennial” and “Generation X” Men》(Kamil Wyczynski, 2021) [11] 《Video Game Romanticism: On Retro Gaming, Remakes, Reboots, Game Nostalgia, and Bad Games》(Frank Bosman, 2023) [12] 《Video Games & Nostalgia: An Intertwined Relationship》(Matt Boyer, 2019) [13] 《Nostalgia in Retro Game Design》(Maria B. Garda, 2014) [14] https://www.kelloggs.co.uk/content/dam/europe/kelloggs_gb/pdf/The%20nostalgia%20is%20real%20Pringles%20launches%20NEW%20Retro%20Console%20Clinic%20as%2080%20percentage%20of%20Brits%20fall%20back%20in%20love%20with%2000s%20and%2090s%20tech.pdf [15] 《The Rise of Vintage Fashion and the Vintage Consumer》(Tracy Cassidy / Hannah Bennett, 2012) [16] 《Video Game Romanticism: On Retro Gaming, Remakes, Reboots, Game Nostalgia, and Bad Games》(Frank Bosman, 2023) [17] 《Vinyl : The Analogue record in the digital age》(Dominik Bartmanski/Ian Woodward, 2015) [18] 《Retro : The Culture of Revival》(Elizabeth E. Guffy, 2002) [19] 《레트로마니아》(사이먼 레이놀즈, 2014, 작업실유령) [20] 물론 소니의 7세대 휴대기기인 플레이스테이션 포터블은 소니의 고성능 정책을 이어받아 닌텐도 DS와는 차별화된 그래픽 전략을 보였다. 하지만 이 시기 대표적 휴대기기란 닌텐도 DS였다는 점에 이견을 두긴 어려울 것이다. [21] 《Vinyl : The Analogue record in the digital age》(Dominik Bartmanski/Ian Woodward, 2015) [22] 《It’s Art Historian Aby Warburg’s World. We’re Just Living In It》(Mattew Bowman, 2024) / https://artreview.com/its-art-historian-aby-warburgs-world-were-just-living-in-it/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평론가) 이선인 만화와 게임, 영화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합니다. MMORPG를 제외한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클리어가 라이프 워크입니다. 스팀덱을 주로 사용합니다.

  • 게임에서 고통과 피로는 어떻게 사회적 재현이 되어왔는가?: 게임의 스트레스 재현과 스토리지의 관계에 대한 간략한 역사

    고통과 피로로서 게임에서 재현한 스트레스는 UI를 통한 연장된 체현을 넘어 시뮬레이션으로 적극 활용된다. 이는 무엇보다 시뮬레이션으로서 높은 품질의 몰입을 제공하는데, 이러한 게임에 대한 감상과 이해는 어떤 세계로 그 시뮬레이션을 이해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로 이어진다. < Back 게임에서 고통과 피로는 어떻게 사회적 재현이 되어왔는가?: 게임의 스트레스 재현과 스토리지의 관계에 대한 간략한 역사 22 GG Vol. 25. 2. 10. 게임과 고통을 비평할 때 빠지지 않는 레퍼런스들이 몇가지 있다.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과 같은 책들이 그러하다. 이러한 레퍼런스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할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비평하는 것 역시 필요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의 역사는 뿌리깊고 도도하게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왔다. 무엇보다 비평으로 매만지기 어려운 수준으로 실재적인 현상이며,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없이 레퍼런스만을 빌려 주장을 펼치는 일은 인문학과 게임 비평을 풍성하게 만들기는커녕 비평의 빈곤을 야기할 수 있고, 심각한 경우 비평과 현상의 간극을 벌리는 맹아를 심는 일이 될 수 있다. 더불어 고통과 피로는 대중적으로 익숙하지만, 그 맥락과 역사는 중요도에 비해 상세하게 조명된 사례가 극히 적다. 조금 더 지면을 할해하고, 주장을 돌고 늘어뜨리더라도 인류를 훝어온 고통과 피로의 역사를 간단하게라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외재인(外在因)에 내재인(內在因)으로, 고통과 피로에 대한 이해의 역사 오랜 시간 인류는 고통과 피로를 외재적 요인에 의한 감정 변화로 믿어왔다. 물론, 그 믿음은 시대에 따라 변화해왔다. 동양(최소한 한글)에서 말하는 고통의 경우, 먹는 것으로 인한 감정의 변화를 배경으로 두었다고 여겨진다. 국립국어원 표준대국어사전은 고통을 ‘몸이나 마음의 괴로움과 아픔’으로 정의한다. 이때 의미의 중추를 이루는 ‘괴롭다’는 ‘고(苦)+롭다’를 어근으로 하고 있다. 苦(쓸 고)는 풀 초(艹) 부수를 사용하는 한자로, ‘(맛이) 쓰다’ ‘괴롭다’ 뿐만 아니라 ‘쓴맛’ ‘씀바귀’와 같이 먹는 것과 직접 연결되는 묘사를 뜻으로 가지고 있다. 즉, 고통의 괴로움은 무엇을 먹을 때 느끼는 쓴맛을 바탕에 둔 단어라 할 수 있다. 피로의 경우에도 외재적 요인을 변화의 원인으로 본다. 疲‘지칠 피’와 勞‘일할 노’가 합쳐진 피로는 ‘지칠 때까지 일한 상태’를 의미한다. 疲(지칠 피)의 부수가 질병을 의미하는 병질 염(疒)을 부수로 두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병들 때까지 일한 상태’라는 점에서 ①[지칠 때까지 일한 상태] ②[지칠 때까지 일할 수밖에 없는 상태] 정도로 여길 수 있다. 서양에서도 고통의 원인이 외부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믿어왔으며, 이를 언어화해왔다. 결과된 사건으로 인한 고통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는 Pain의 경우, ‘처벌 또는 범죄로 인한 고통 또는 손실’ 혹은 ‘신체적 또는 신체적 고통, 지속적이고 강하게 불쾌하거나 고통스러운 신체 감각’로 정의한다. Pain보다 범용적으로 사용되는 고통인 Suffer 또한 외재적 요인을 원인으로 하는 결과로 지칭하는 데 쓰인다. Suffer의 경우 ‘고통이나 괴로움 또는 해로움이 가해진 것, 고통이나 괴로움 또는 슬픔으로 따르게 된 것’으로 정의되는데, 가해지(inflicted)거나 따르게 된(submit) 것으로 인한 감정 결과라는 점에서 외재적 요인을 고통의 원인으로 지목한다고 볼 수 있다. Suffer의 경우에는 12~13세기에 기록된 사례들을 바탕으로 정의되어 전승된 것으로, 이 시기가 중세 후기라는 점에서 ‘to submit to god’과 같이 신의 의지 하에서 벌어진 필연적 우연의 증후로 고통을 이해했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 고통과 피로는 동서양 간에 필연과 우발 혹은 의지의 문제 등 작지 않은 차이를 가지고 있으나, 핵심적으로는 내재적 요인으로 인해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달리 말해, 인류는 고통과 피로가 내재적으로 발명되거나 발견되는 요인이 아니라고 믿어왔다. 더 나아가 넓은 의미에서는 그 이유가 외부에서 기인한 내부의 변화를 지칭한다는 것이다. 고통과 피로에 대한 이해는 관찰과 귀납을 바탕으로 현상을 이해한 근대의 20세기에 이르며, 스트레스라는 단어로 취합되는 경향을 보인다. 20세기에도 스트레스 역시 외재적 요인을 바탕으로 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으며, 이는 1936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내분비학 교수 한스 셀리에(Hans Selye, 1907~1982)가 네이처지에 개재한 「다양한 유해 자극으로 생긴 증후군(A syndrom Produced by Diverse Nocuous Agents)」이라는 기념비적인 논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외재에 대항하는 내재의 고통, GAS와 스트레스 *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 축 (출처: 위키피디아) 1936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내분비학 교수 한스 셀리에는 네이처지에 「다양한 유해 자극으로 생긴 증후군(A syndrom Produced by Diverse Nocuous Agents)」이라는 기념비적인 논문을 출판한다. 한스 셀리에는 위 논문에서 실험군 쥐들을 ‘한겨울에 옥상 지붕 위에 올려놓기’ ‘고의로 상처 내기’ ‘극심하게 더운 보일러실에 가두기’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유해 자극(Nocuous Agents)을 가한 뒤, 실험군 쥐에서 생긴 신체적 반응과 일반 쥐의 신체 반응을 비교 측정했다. 그 결과, 다양한 유해 고통을 가한 쥐들에게서는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연속 반응 과정이 공통적으로 관찰되었다. 이 과정은 유해 자극이 들어오면 뇌의 시상하부가 코르티코트로핀 방출호르몬(corticotropin-releasing hormone, ‘CRH’)을 분비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CRH는 뇌하수체로 이동해 부신겉질자극호르몬(adrenocorticotropic hormone, ‘ACTH’)으로 불리는 코르티코트로핀을 방출시킨다. 이때 ACTH는 혈관을 통해 부신으로 이동하여 코르티솔 등의 당질코르티코이드를 분비한다. 그리고 당질코르티코이드는 부신속질을 포함해, 체내로 퍼진다. 체내로 퍼진 당질코르티코이드는 지방세포에서는 지방산을 생산하고 근육세포에서는 단백질을 분해하게 만들어 포도당 대사를 높인다. 한편 부신속질에서는 아드레날린과 노르아드레날린을 분비해 혈압 상승과 심장 박동 증가에 관여하는 등 교감 신경이 지배하는 기관의 작용을 촉진한다. 이렇게 생산된 포도당과 빠르게 돌아가는 혈류들은 뇌 등으로 에너지를 공급하여 유해 자극에 대한 대항을 촉진하고 일시적인 에너지 대사를 높인다. 이는 과정은 ‘투쟁-도피 반응(Fight or Flight Response)’으로 불리며, 한스 셀리에는 이 과정의 연속을 ‘일반 적응 증후군(General Adaptation Syndrome)’이라고 발표한다. * GAS의 3단계 (출처: 위키피디아) ‘일반 적응 증후군(General Adaptation Syndrome, GAS)’은 크게 [경계(Alarm)→저항(Resistance)→소진(Exhaustion)] 3단계로 분류되지만, 한스 셀리에는 주요한 현상은 3단계인 소진에서 나타난고 보았다. 1단계와 2단계는 투쟁-도피 반응의 강도 차이가 있을 지언정 스트레스 자극에 반응해 신체 보호를 유지하려는 항상성이 주요한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1단계와 2단계 실험군 쥐의 경우 흉선・비장・임파선이 수축했으며, 체온이 내려가고 소화기가 손상되는 공통 반응을 보였으며, 그 후 48시간이 지나면 부신이 커지고 성장과 생식선이 위축되는 2단계 반응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러나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유해 자극에 노출된 실험군 쥐의 경우 소화계·심혈관계 장애를 비롯해 궤양・우울증 등을 보였다. 이는 만성적인 상태로 신체가 신체 보호를 포기하는 상태로 해석할 수 있는 결과였다. 특히 다양한 유해 자극에 대한 공통반응이라는 점에서 ‘만원 지하철’ ‘찜통 더위’ ‘살을 애는 추위’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게되는 고통과 피로를 ‘스트레스’라는 단어로 묶어서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한스 셀리에는 위 과정이 모두 자율 교감 신경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이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과정에 의한 것으로, 통제할 수 없는 외재인에 의해 발생된 신체의 반응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대신 한스 셀리에는 외재인을 우리가 어떻게 수용하냐에 따라 우리의 행복과 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즉, 변화하는 환경에 얼마나 잘 적응하느냐가 우리의 행복과 건강을 결정하는 요소라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이 주장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는 믿음이기도 하다. 누적된 내재의 피로, CSR과 사회 자본 * 셸쇼크를 겪고 있는 군인 (출처: 위키피디아) 한스 셀리에가 발표한 주장의 직관성만큼이나, 산업계는 발표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며 치료나 의료 활동에 한스 셀리에의 발표를 적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즉각적 반응에도 불구하고 한스 셀리에의 스트레스라는 개념은 처음부터 통용되진 않았었다. 오늘날 우리가 스트레스라고 부르는 개념이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양차 세계대전, 특히 세계 2차 대전의 그림자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양차 세계 대전은 대규모 사상자와 함께 급진적으로 많은 임상 데이터를 남겼는데, 그 중 하나가 전투 피로 반응(Comabat Stress Responce, ‘CSR’)에 관한 것이었다. 전투 피로(Combat Fatigue)로 불리기도 하는 CSR이란 전투 스트레스로 인해 전투 효율성을 감소시키는 다양한 행동을 포괄하는 급성 반응으로, 우선순위를 정하기 못하거나 느린 반응을 보이는 등 군사 작전의 누적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인 반응을 포괄한다. CSR는 세계 1차 대전에서 있었던 임상 데이터를 바탕으로 구축된 연구 분야다. 미국의 의료 장교 토마스 셀만(Thomas W. Salmon, 1876~1927) 등이 출판한 「영국군의 정신 질환 및 전쟁 신경증(셸쇼크) 치료와 구호」와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발전했으나, 이러한 자료들이 세계 2차 대전으로 인해 대규모 살육을 재현하기 전까지 올바르게 활용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일례로 셀만이 세웠다고 여겨지는 PIE원칙의 활동 등이 그러하다. PIE원칙은 ①사상자를 전투 소리가 들리는 전장에서 가까운 곳에서 치료 할 것(Proximity) ②즉각적 치료를 시행하되 특정 환자의 부상 완치를 기다리지 않을 것(Immediacy) ③모든 사람이 휴식과 보충을 거친 후 전선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도록 만들 것(Expectancy)을 요구한다. 그러나 PIE원칙은 휴식이 필요한 군인을 참호로 밀어넣는 근거로 활용되며 수많은 PTSD환자와 ‘비겁함을 보인다’는 이유로 즉결처형되는 피해자들을 양상했다. 세계 2차 대전에 이르러서야 스트레스라는 개념을 통해 ‘셸쇼크(Shell Shock)’와 같은 반응이 누적된 스트레스로 인한 것임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피묻은 경험을 통해 스트레스는 본격적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 의료 개념으로 통용되기 시작했으며, 학계에서 신호체계로 받아드려지던 스트레스 반응 또한 누적되면 실생활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영구적인 신체 손상을 줄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파급은 단순히 스트레스가 신체를 망가뜨린다는 데 그치지 않고, ‘외재인을 우리가 어떻게 수용하냐에 따라 우리의 행복과 건강을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을 뒤집어놓았다. 이는 오늘날 스트레스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일컫어지는 신경 내분비학자 로버트 새폴스키(Robert Morris Sapolsky, 1957~)에 의해 학제화 되었다. 새폴스키는 『왜 얼룩말은 위궤양에 걸리지 않는가(Why Zebras Don't Get Ulcers, 1994)』에서 원숭이와 같이 사회성을 가진 포유류를 연구하며, 사회성이 스트레스를 야기하는 요소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 로버트 새폴스키 새폴스키는 종교나 사회경제적지위(Social Economic Status, SES)와 같은 지수가 스트레스의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하며, 그 바탕에는 사회성을 가진 포유류가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을 발전시켜 온 진화적 경향이 있다고 지목한다. 간략하게 설명하면, 사회성을 가진 포유류들은 자신의 생존확률을 높이기 위해 구체적인 시공간과 상황에 대한 출처를 기억할 수 있는 일화기억(Episodic memory)을 발전시켜왔다. 그리고 나아가 일화기억의 누적을 통해 복잡한 통계적 규칙을 의미 기억(Sementic memory)으로 가공시키고, 이를 말 그대로 ‘육체화’ 시켜왔다. 스트레스는 이러한 생존 전략에 따른 육체화 시스템의 일종이다. 이는 사회성을 가진 포유류는 통제할 수 없는 외부환경에 대항하기 위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자율신경계를 진화시켜왔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스트레스라는 말이 된다. 즉, 인간은 통제할 수 없는 환경에 쉽게 노출되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스트레스 과정을 밟을 확률이 높아진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일화기억을 누적하여 의미기억으로 넘길 때 벌어지는 상상(Imagination)을 겪을 때도 동일하게 발생한다. 새폴스키는 이 과정에서 SES지수와 같은 사회성이 스트레스와 결합된다고 주장하며, 그 과정을 예시를 통해 설명한다. 우리가 부자 동네에서 원활한 치안 서비스를 제공받으며 산다면 카페에서 화장실 갈 때 노트북과 같은 고가품을 잃어버릴 염려를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가난한 동네에서 살기 때문에 치안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면, 카페에 노트북을 가져가는 것은 도난을 경험할 확률을 높이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기 위해 한국적인 상황으로 번안하면, 강남에 살면 좋은 교육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자녀가 높은 미래 가치를 얻을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에서 살지 못한다는 사실은 ‘남들이 자신의 가치를 높일 때, 나는 그럴수 없다’를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에 스트레스로 작동할 수 있다. 이는 상대적 가난이 스트레스를 높인다는 이야기가 된다. 자연히 비교가 쉽고 소통이 활발한 환경은 스트레스를 받을 확률 또한 높인다. 스토리징 시스템 역량에 따라 내재화된 시스템 지금까지 아주 거칠고 간략하게 고통과 피로가 어떻게 스트레스로 이해되었고, 스트레스에 대한 인지는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알아보았다. 그 과정을 한마디로 줄인다면 고통과 피로에 대한 인지와 이해는 외재인에서 내재인으로 변해왔다는 것이다. 컴퓨터 게임에서도 비슷한 과정이 일어나는데, 그 배경을 지목하자면 컴퓨터의 변화는 가소성(Plasticity)을 높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왔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가소성이 높다는 것은 복잡한 프로토콜 시스템을 완성해 왔다는 뜻이며, 더 깊게는 그 프로토콜은 (적정엔지니어링이라는 전제 하에) 대용량 스토리지에서 사용되기 때문에 대용량 스토리징이 가능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로 인간-컴퓨터 상호작용(Human–Computer Interaction, ‘HCI’)의 관점에서 고통과 피로의 재현은 컴퓨터 게임에서 스토리징 시스템의 역량이 높아질수록 내재적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였다. 게임 이야기를 하기 전에 아주 간략하게 스토리징의 역사를 훝으면, 스토리지는 인간의 힘을 빌리는 방식을 통해 (거의 완전히) 외재적으로 존재해왔으나, 점차 컴퓨터 시스템 안으로 내재화되며 비가시적으로 변해왔다. HCI의 관점에서 초기 컴퓨터의 스토리징은 인간의 수기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었다. 이는 최초의 컴퓨터로 호명되곤하는 애니악과 같은 경우에도 오늘날 컴파일링(Compiling)에 해당하는 과정에 인간이 동원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즉, 컴퓨터의 높은 추상 수준을 인간 언어로 표현하는 데에는 인간이 동원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점차 마그넷 테이프인 플로피 디스크와 같은 자기장 방식에서 광학 방식의 CD로 발전되며 차차 가소성을 높여갔다. 그리고 SSD와 같은 반도체 수준에 이르러서는 높은 수준의 가소성을 확보했다. 더불어 하드웨어 수준의 스토리지를 넘어서, 데이터센터 바탕의 클라우드 프로토콜 단계까지 제어할 수 있는 블록체인과 같이 소프트웨어 수준의 스토리지로 발전했다. 외재성을 빌린 형식적 고통, * 테니스 포 투 (출처: 위키피디아) 스토리지가 컴퓨터 시스템 안으로 내재화된 과정은 컴퓨터 시스템을 통해 기록을 외주화하여 인간의 피로를 줄이기 위한 시도였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기록이라는 인산의 피로가 컴퓨터 안으로 스토리지가 녹아들어갔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나, 한편으로는 컴퓨터의 시뮬레이션 역량을 높여온 결과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게임 역시 고통과 피로를 인간의 영역에서 시뮬레이션의 영역으로 옮기며 고통과 피로를 내재화하는 방식으로 변화해왔다. 게임의 고통과 피로는 초창기 게임들에서도 (굉장히) 옅은 방식으로라도 관찰할 수 있는 요소다. 그만큼 초창기 게임들에서는 스트레스의 영역에 있다고 정의하는 게 확실하지 않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추상성으로 고통과 피로를 재현했었으며, 초창기 게임에서 재현된 고통과 피로는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시 말해, 외재성을 통해야만 의미를 확보할 수 있는 수준으로, 고작해야 상징 수준의 고통과 피로를 재현한 셈이다. 이러한 상징으로는 승리와 패배라는 아주 기초적인 단위의 고통과 피로가 있었다. 종종 최초의 게임으로 지목되곤 하는 (1958)의 경우에 고통과 피로를 염두해두고 기획되었을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패의 개념은 명확했는데, 이는 게임의 디자인 자체가 테니스를 재현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는데, 는 원자력이 핵개발만으로 쓰이지 않으며, 평화로운 사용에도 기여할 수 있는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한 일종의 프로파간다로 제작된 매체였다는 점이다.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기획된 게임이었다는 말인데, 이는 를 디자인한 히긴보텀이 의식했든 하지 않았든 ‘놀이의 투기성’을 활용했다는 의미일 수 있다. ‘놀이의 투기성’이란 네덜란드의 인류학자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1945)의 『호모 루덴스』에서 소개되는 놀이의 본성 중 하나로, 하위징아에 따르면 사행성을 내포하는 투기는 단순히 금전적 사행성을 넘어 고대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에 등장한 운명을 결정하는 주사위 게임의 사례와 같이 주술적 의미를 바탕으로 한다. * IBM 305 RAMAC (출처: 위키피디아) 놀이의 투기성은 놀이의 4가지 원칙 중 하나인 강한 경쟁성과 쉽게 혼합될 수 있으며, 놀이의 이 두 가지 요소는 놀이의 참여자로 하여금 몰입을 강하게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 추측컨대 히긴보텀은 놀이가 가져오는 몰입효과를 겨냥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놀이의 투기성은 사행성이 내재한 것처럼 사적으로든 형이상학적으로든 손실이라는 고통을 창출할 수 있는 맹아이기도 하다. 따라서 가 승/패를 전제하고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UI를 통해 만들어진 가상의 경기장에서 승/패라는 일회적인 제로섬을 통해 고도로 추상적이며 형식적인 고통을 생산한다. 이는 일회적이라는 점에서 그 외재성이 더 강해지는데, 여기에는 보다 현실적인 문제들도 껴 있다. 최초의 하드디스크(HDD)로 불리는 IBM 305 RAMAC의 경우, 보조 저장장치임에도 1톤이 넘는 장치였다. 즉, 애초에 기록으로 결과를 누적시킨다는 개념 자체가 에는 심각한 오버엔지니어링이었을 수 있다. 누적과 고통의 현실적 재현, 헬스바 시스템과 그 후예들 * 퐁 (출처: 위키피디아) 을 통해 형식적 고통이 재현된 이후 게임은 고통을 누적시키는 방식으로 지 않았다. 이는 현실적인 문제로 여겨지는데, 를 계승하여 게임을 대중적으로 보급시켰다고 여겨지는 아타리의 (1972) 또한 만큼이나 간단한 그래픽과 규칙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역시 전용콘솔을 통해 보급되었다. 다만, 이를 단순히 스토리지의 용량과 크기 문제 등 하드웨어적인 문제만으로는 보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IBM이 8인치 플로피 디스크를 상업적으로 출시한 해는 1971년이며, 이때 생산된 플로피 디스크들이 IBM370의 부품으로 사용되었다치더라도 소량의 데이터를 이동시키는 방법으로 정착된 것은 1973년 즈음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보다는 가소성을 시스템에 프로토콜화 하는 방식에 있어서 편의성을 확보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 유의미한 HCI 가치를 창출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흔적은 이나 가정용으로 출시된 (1975)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당시 에 사용된 RAM을 포함해 회로 기판의 분석을 차치하더라도, 과 에서 재현되는 승/패의 형식적 고통은 이 재현한 것을 횟수로 누적하는 방식에 그쳤기 때문이다. 고통의 재현에 있어 혁신은 오히려 아타리의 <가라테>(1979)와 같이 격투 시스템을 가진 게임을 통해 진행되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격투를 통한 직접적인 가격의 고통을 기호적으로 재현하고는 있으나 원리적으로는 의 수준에서 멀리 떨어져있지 않다. 고통을 누적의 개념으로 바라본 사례는 ‘아타리 쇼크’를 2년 흘러보낸 뒤에야 이뤄졌다. 남코의 <드래곤 버스터>(1985)는 헬스바 시스템을 도입하며 누적된 스트레스를 게임에 내재된 UI의 형태로 구현하며 누적된 고통을 재현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혁신의 바탕에는 PC의 보급과 같은 사건들 역시 한 몫했을 것이다. * <스트리트 파이터2> 롱플레이 (출처: https://youtu.be/xI284D4y1q4?feature=shared ) 이러한 헬스바 시스템이 이용자에게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HCI로 활용이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스트리트 파이터2>(1991)부터다. <스트리트 파이터2>에서는 헬스바가 일정부분 줄어들면 패배를 뜻하는 K.O.가 깜빡이는 방식으로 시각적 요소를 통해 긴박감을 전달한다. 이러한 긴박성의 연출까지 오는 데에는 <페르시아의 왕자>(1989)와 같이 플레이 시간을 60분으로 제한하고 이를 “60 MINUTE LEFT”와 같은 경고문구를 통해 시간을 한정 자원으로 제시하는 등의 플레이 디자인의 발전 또한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다만, 게임 내에서 헬스바의 상태에 따라 K.O.가 깜빡이는 형태로 가소성을 적극적으로 시스템 안으로 끌고 들어오며 피로의 누적과 고통을 엮는 방식의 스트레스를 제시하며 대중적인 호응을 얻은데 <스트리트 파이터 2>의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피로의 누적과 고통을 엮어 게임의 플레이 디자인에 가소성을 추가하는 방식은 가소성 스토리지가 어느 정도 완성된 PC들이 가정에 보급이 완료되어가며 더 각광받기 시작한다. <블러디 로어>(1997)의 경우에는 공격과 피해가 어느 정도 누적되면 동물로 캐릭터를 변신시킬 수 있는 수화 시스템으로 가소성을 내재화하기도 했다. 이렇게 특정한 값이 누적된 결과, 높은 공격성을 갖추게 되는 형태의 가소성 내재는 스트레스를 단순히 손상의 성질로 보는 것이 아닌, 변화의 성질로 해석했다는 데에서 독창성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의 현대적 사례로는 프롬소프트의 <세키로: 새도우 다이 트와이스>(2019)의 체간 시스템을 생각해볼 수 있다. <세키로>의 체간은 캐릭터의 현 상태와 피해의 누적과 방어 정도 등을 상세하게 고려하여 GAS로 해석할 수 있을 정도의 핍진성 높은 스트레스를 재현한다. * <세키로> 체간 시스템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fV_dJx5TRTQ ) <토탈워>, 예측하는 유닛과 스트레스 경험으로서 HCI <세키로>와 같이 플레이어 캐릭터(유닛)의 상태를 고려하여 스트레스를 플레이에 내재한 사례는 21세기 초반부터 대중화 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세가의 <토탈워>시리즈(2000~)를 생각해볼 수 있다. <토탈워>시리즈에는 사기(Moral) 시스템이 내재되어 있는데, 물론, <토탈워> 초기작인 <쇼군: 토탈워>(2000)의 경우, 사기가 떨어지면 깃발의 색이 변하며 패주(敗走) 등으로 결과가 구현되는 스트레스 재현의 양상을 보인다. <쇼군>에서 독특한 점은 처형을 통해서 사기를 충전할 수 있게 시스템화 해놓았다는 점이다. 이는 전장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교육을 재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나름의 윤리를 새우는 행위를 플레이에 직접 재현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게임 내에서 사건에 따라 사회성을 구성할 수 있다는 것으로, 사기 시스템을 통해 유닛이 처벌이라는 교육을 통해 미래에 대한 예측을 학습했다고 여기는 HCI로 볼 수도 있다. <토탈워>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미디블: 토탈워>에 이르면, 사건에 따른 사회성 구성이 더욱 구체화 된다. <미디블>에서는 포로의 몸값을 받는 것을 통해 사기가 충전되기도 하는데, 이는 경제적 가치를 확인하는 사건이 사기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토탈워>는 내재된 가소성에 따라 단순히 게임의 UI요소를 변경시키는 것이 아닌, 스트레스를 시뮬레이션 플레이할 수 있게 구현해 높은 수준의 HCI를 구성해간다. 더불어 높은 수준으로 구현된 HCI는 당대 전쟁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들을 보다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들고, 이를 통해 당시를 상상하게 만드는 경험을 제공한다. 이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데 내지된 스트레스 시스템을 통해 <로마2 : 토탈워>를 지나치게 플레이어블하게 만든 점, 그리고 그 직후 <토탈워: 아틸라>처럼 내지된 스트레스 시스템을 내러티브를 풀어내는데 적극 활용했을 때 그 체험이 크게 다르다는 점은 곱씹어볼만한 감상을 제공한다. 이처럼 고통과 피로로서 게임에서 재현한 스트레스는 UI를 통한 연장된 체현을 넘어 시뮬레이션으로 적극 활용된다. 이는 무엇보다 시뮬레이션으로서 높은 품질의 몰입을 제공하는데, 이러한 게임에 대한 감상과 이해는 어떤 세계로 그 시뮬레이션을 이해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로 이어진다. 이는 게임의 이용자가 게임에 내재된 스트레스 시뮬레이션을 통해 어떤 사회를 구성하느냐로 귀결될 수 있다. 특히 나 <리니지>와 같은 복잡한 MMORPG의 경우, (본지에서는 분량과 허락된 시간 상 패키지로 제한하여 언급된 타이틀들과 달리) 보다 생생한 가상의 SES를 구성하며 게임 내에서 체험하는 장소와 사건에 대한 해석을 의도치 않았던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를 위해서는 (통계라도 다루면 다행인) 사회학의 차원이 아닌, 심도있는 의료학적 이해와 폭넓은 컴퓨터 공학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분명 고되고 지난하며 큰 보상을 바랄 수 없는 작업이겠으나, 넓은 확장성이 기대되는 만큼 많은 관심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1] “Punishment, penalty, suffering or loss inflicted for a crime or offence.” Oxford English Dictionary, s.v. “pain (n.1), sense 1.a,” September 2024, ( https://doi.org/10.1093/OED/3543292423 ) [2] “Physical or bodily suffering, a continuous, strongly unpleasant or agonizing sensation in the body” Oxford English Dictionary, s.v. “pain (n.1), sense 3.b,” September 2024, ( https://doi.org/10.1093/OED/9428204415 ) [3] “To have (something painful, distressing, or injurious) inflicted or imposed upon one; to submit to with pain, distress, or grief.” Oxford English Dictionary, s.v. “suffer (v.), sense I.1.a,” September 2024, ( https://doi.org/10.1093/OED/7485489281 .) [4] Thomas W. Salmon,(1917). 「The Care and Treatment of Mental Diseases and War Neuroses ("Shell Shock") in the British Army」 ( https://archive.org/details/caretreatmentofm00salmrich/page/8/mode/2up ) [5] H. Matson (2016). 「The treatment of “shell shock” in World War 1: Early attitudes and treatments for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and combat stress reaction」 ( https://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abs/pii/S0924933816023981 ) [6] 국내에는 『스트레스: 당신을 병들게 만드는 스트레스의 모든 것』(사이언스북스)로 번역되어 있다. [7] Tristan Donovan(2010). 『Replay : the history of video games』 ( https://archive.org/details/replayhistoryofv0000dono ) [8] Edwin Zschau.(1973). "The IBM Diskette and its Implications for Minicomputer Systems". ( https://ieeexplore.ieee.org/document/6536793 )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원) 이현재 경희대학교 K컬쳐・스토리콘텐츠연구소, 리서치앤컨설팅그룹 STRABASE 뉴미디어・게이밍 섹터 연구원. 「한류 스토리콘텐츠의 캐릭터 유형 및 동기화 이론 연구」(경제·인문사회연구회) 「글로벌 게임산업 트렌드」(한국콘텐츠진흥원) 「저작권 기술 산업 동향 조사 분석」(한국저작권위원회) 등에 참여했다. 2020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부문, 2021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평론부문 신인평론상, 2023 게임제네레이션 비평상에 당선되어 다양한 분야에서 평론 활동을 하고 있다.

  • [Editor's View]

    0과 1을 기반으로 한 계산을 딛고 서는 매체이지만 디지털게임 역시 다른 매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감정을 다룬다. 우리는 수시로 사랑은 계산가능한 감정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이 익숙한 관용구는 사랑을 다루는 연산장치인 디지털게임 앞에서 조금 곤혹스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 Back [Editor's View] 16 GG Vol. 24. 2. 10. 0과 1을 기반으로 한 계산을 딛고 서는 매체이지만 디지털게임 역시 다른 매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감정을 다룬다. 우리는 수시로 사랑은 계산가능한 감정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이 익숙한 관용구는 사랑을 다루는 연산장치인 디지털게임 앞에서 조금 곤혹스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GG 16호는 게임이 다루는 사랑을 둘러보고자 했다. 서로 다른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감정과 행위로서의 사랑, 혹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엮여 나타나는 사랑, 때로는 매체 자체에 대해 이용자가 갖는 감정으로서의 사랑과 같이 게임과 사랑이라는 테마는 한 두 가지로 뭉뚱그리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양태로 나타나곤 한다. 이른바 연애 게임이라고 불리는 장르는 사랑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애착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컬렉션 중심의 게임들은 사랑의 어떤 면을 포착하는가? 가족이라는 개념은 게임 안에서 어떻게 그려지는가와 같은 질문에 다채로운 관점의 탐구들이 대답하고자 나섰다. 한편으로는 계량화, 수량화되는 감정에 대한 우려를, 한편으로는 새로운 매체에서 기존의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더 넓고 다양한 사랑을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을 동시에 품는 것이 아마도 디지털게임의 사랑일 것이다. 사랑이라는 말이 메마른 낙엽마냥 바스라지는 듯한 기분이 드는 시절일수록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다시금 곱씹어볼 필요를 느낀다. 게임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이 사람을, 그리고 우리가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게임에서 사랑이 재현되는 두 가지 형태 – 자기애와 애착

    캐릭터에 대한 애착(attachment)은 단순한 사랑의 방식이 아니다. 여기에는 애착의 대상인 캐릭터가 절대 연애의 주체성을 드러내서는 안 되며, 플레이어를 만족시킬만한 일러스트와 계량화된 수치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포함된다. < Back 게임에서 사랑이 재현되는 두 가지 형태 – 자기애와 애착 16 GG Vol. 24. 2. 10. 들어가며 비디오 게임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루는데 별로 적합하지 않은 매체라는 견해는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사랑을 테마로 하여 다른 예술 장르들은 작중 인물에 대한 감정 이입을 바탕으로 스토리텔링을 진행하는 반면, 게임의 경우 이러한 스토리의 진행 과정을 세분한 뒤 다양한 가능성을 지닌 형태로 만들어 플레이어가 직접 경험하게 만들어준다. 때문에 사랑을 테마로 하는 게임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하나의 운명적 사랑을 결정적 플롯으로 풀어내기보다는 플레이어가 사랑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직접 탐구하는 형태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90년대 이후 일본을 중심으로 제작된 수많은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하 미연시)들은 이 때문에 고정된 스크립트가 아닌 수많은 분기를 가진 가능태로서의 스크립트인 스크립톤이 다수 뭉쳐있는 형태로 개발된다. 이러한 미연시들이 풀어내는 사랑은 각각의 에피소드로만 보면 전형적인 ‘낭만적 사랑’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낭만적 사랑이 한 명의 주인공으로부터 여러 이성을 대상으로 한 복수적인 형태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90년대의 미연시들은 주인공의 바람둥이적인 기질을 성격적으로 반영하기보다는 차라리 기억상실을 시켜 매번의 사랑에 충실하도록 하는 다소 기형적인 스토리텔링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지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이머들이 이러한 형태의 기형성을 큰 거부감 없이 흡수하면서 게임을 즐겼다는 점이다. 게이머의 사랑에 대한 주체적 유연성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주지하다시피 우리는 낭만적 사랑이란 테마가 더 이상 별로 유효하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 극장가에서 정통 로맨스나 로맨틱 코미디 장르는 퇴조한지 오래이며, 사랑이란 현실 속에서 찾아야 할 존재라기보다는 불가능한 대상을 희망하는 판타지의 영역에 머무는 것으로 변해왔다. 회귀, 빙의, 환생을 통해 어떻게든 불가능한 대상과의 합일을 합리화 시키는 웹소설들이 한 발 더 나아간 극단적 서사를 보여준다면, 게임은 서사의 극단성보다는 서사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의 체험을 통해 실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플레이어에게는 사랑이 이루어지는 과정의 리얼리티나 현실성이 중요하다기보다는 그것을 일단 플레이어가 체험하는 것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이 때문에 비디오 게임에서 사랑의 재현은 플레이어의 체험을 절차적으로 재구성하는 형태로 개발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운명적이고 결정적인 플롯을 통한 감정 이입에는 다른 매체가 더 적합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개발자들은 게임 내에서 사랑의 재현을 독특한 형태로 변주시켜왔다. 특히 플레이어가 적극적으로 사랑을 투사할 대상을 다양하게 준비하는 것, 다시 말해 플레이어가 애착을 가질 대상을 다양하게 준비하는 것이 한 가지 방법론이라고 볼 수 있다. 블루아카이브의 김용하 PD가 NDC에서 일찍이 “모에론”을 통해 설파한 바 있지만 1) , 여동생계/동년배계/누님계로 3분화한 여성 캐릭터들은 그 어떤 성애를 가진 플레이어가 들어오더라도 하나 정도는 얻어걸릴 수 있는 보편성(?)을 획득하는데 주력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게임 개발자들은 낭만적 사랑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최근 경향을 반영하여 자기애를 투영할 수 있는 중성적이면서 목소리 없는 캐릭터와 커스터마이징 시스템을 고안해 내었다. <페르소나> 시리즈나 <젤다의 전설> 시리즈의 주인공은 특별히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대사도 매우 절제되게 발화하는데, 이는 미리 설정된 캐릭터에서 빚어질 수 있는 감정 이입을 최소화하고, 캐릭터는 나 자신으로 간주하는 일종의 자기애가 투여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커스터마이징 시스템 역시 캐릭터의 외양을 플레이어가 스스로 꾸밀 수 있도록 하면서 자기애를 부추긴다. 물론 플레이어에 따라 본인 모습과 유사하게 꾸미는 경우도 있고, 이상형의 이성을 상정하기도 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디자인하기도 하지만 이 캐릭터를 직접적으로 움직이면서 그러한 다양한 외관을 향한 감정이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향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자기애’와 ‘애착’라는 키워드를 바탕으로 최근 게임들에 재현된 사랑의 주체화 과정을 간단히 분석해 보고자 한다. 2. 페르소나와 자기 치유의 메커니즘 - <페르소나> 시리즈 아틀러스 사의 <페르소나> 시리즈는 <여신전생> 시리즈의 스핀오프 형태로 1996년부터 출시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인기 시리즈 게임이다. <여신전생> 시리즈가 염세적인 아포칼립스 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악마들과의 다툼을 다룬 판타지 게임이라면, <페르소나> 시리즈는 <여신전생> 시리즈로부터 많은 설정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악마와의 다툼을 캐릭터 내면의 문제로 치환시킨다. 또한 학원물 형태로 진행되면서 <여신전생> 시리즈에 비해 훨씬 더 밝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 게임에서 ‘페르소나’는 C.G.융의 분석심리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임과 동시에 게임 속 캐릭터의 내면에 응축된 억압된 자아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게임에서 페르소나는 캐릭터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신을 실체화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 <페르소나 4>의 주인공 스케치 이 시리즈에서 주인공은 늘 구체적인 이름이 정해져 있지 않고(미디어 믹스 형태로 만들어진 애니에서는 주인공의 이름이 구체화되기는 한다), 다른 캐릭터들이 화려한 성우진의 목소리로 꾸며지는 반면 주인공의 목소리는 전면화되지 않는다. 왜 이렇게 주인공 캐릭터를 중성화하고 목소리를 넣지 않는가에 대한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어느 누가 플레이를 하더라도 주인공을 마치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각 작품마다 줄거리는 좀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페르소나> 시리즈의 주인공은 스스로의 페르소나를 각성한 이후 주변 인물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들의 내면을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게 된다. 예를 들어 <페르소나 4>에서 주인공은 아마기 유키코라는 같은 반 여학생의 페르소나와 마주치게 된다. 이나바 시의 고급 여관집 외동딸인 유키코는 여관의 차기 후계자로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으며, 학교에서도 정숙한 모범생으로 통하고 있다. 그러나 성격이 굉장히 내성적이어서 같은 반 친구 치에를 제외하면 다른 사람과 잘 대화를 하지 않는 소극적인 면모도 보인다. 유키코에게 여관을 물려받아야 하는 정해진 운명은 질곡과 억압으로 작용하여 그녀는 역헌팅을 하러 다니는 유키코 공주로 TV속에서 등장한다. <페르소나 4>에서 TV는 특정한 캐릭터의 본성이 드러나는 가상의 무대로 주인공이 TV 속으로 들어가 문제가 발생한 캐릭터의 본성이 만들어 낸 가상의 공간 속에서 그와 다투게 된다. 유키코의 공주의 성에서 그녀의 본성을 해방시키면 그녀는 자신이 억눌러왔던 어두운 측면을 인정하고 페르소나를 각성시키게 된다. * <페르소나 4> 아마기 유키코의 캐릭터 일러스트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형태의 페르소나 각성 과정이 다양한 인물 군상을 통해 여러 번 반복된다는 점이다. 유키코보다 보다 명랑쾌활한 치에나 화려한 아이돌 활동 속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바라봐주길 바라는 리세, 겉으로는 덩치가 크고 불량한 캐릭터이지만 동성애 기질이 있고 섬세한 측면이 있는 칸지, 하드보일드한 남자 탐정을 동경하는 나오코 등은 게임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타자이지만 실제로 그 중 하나 정도는 실제 플레이어의 삶과 유사한 측면을 발견할 수 있는 “나”의 면모들이기도 하다. 그들의 트라우마가 주인공을 통해 치유되는 과정을 극복해내고 친구들과 관계가 심화되면서 플레이어는 마치 자신의 트라우마가 조금씩 치유되는 것 같은 느낌을 맛보게 된다. <페르소나> 시리즈를 둘러싼 이러한 자기 치유의 메커니즘은 비디오 게임의 매체적 특성과도 제법 잘 어울린다. 비단 <페르소나> 시리즈뿐만 아니라 다른 게임에서도 이러한 형태의 다양한 인물군을 제시하고 그 중 마음에 드는 캐릭터와 연결되게끔 하는 방식은 상당히 자주 사용된다. 이러한 과정은 겉으로는 플레이어의 이상형 찾기로 귀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과정 속에 상당한 자기 치유 과정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는 금세기를 전후하여 소설의 독자와 영화의 관객이 게임의 플레이어로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타인과의 사랑을 갈망하기보다는 자기애를 더욱 내면화하는 과정 속에서 유저들의 주체성이 변화해 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3. 계량화된 사랑과 수치화된 외모 – 수집형 게임의 메커닉 사실 <페르소나 시리즈>는 일반적인 게임에 비하면 상당히 고도화된 스토리텔링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에, 일반적인 게임의 사랑 재현 양상이라고 간주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특히 최근작 <페르소나 5>에서는 악인처럼 설정된 가면 속 주인공이 타락과 구원을 반복해가는 과정을 통해 일종의 피카레스크 식 구성을 선보이기도 하는 등 스토리텔링 과정에 고심한 면모를 보여준다. 모든 게이머가 고급스런 스토리 전개 과정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게임 개발자들은 스토리의 전개 과정을 간소화시키고 량화시킨다. * <우마무스메> 캐릭터의 일러스트와 능력치 개발자 입장에서는 고전적인 형태의 낭만적 사랑이 퇴조한 시기를 채운 자기애의 투사 과정을 굳이 떠올릴 필요가 없다. 이미 자기애 세대의 플레이어들은 카드 한 장에 그려진 일러스트와 능력치만으로 캐릭터를 평가할 준비가 되어 있다. 카드 뒷면에 구구절절 적힌 캐릭터의 전사(前史)는 읽지 않아도 무방한 거추장스러운 것이 된다. 본래 게임에 사용되는 카드는 다양한 배경과 상징을 내재화한 게임 내용물이지만, 그것이 도구적으로만 활용될 때 이는 수치화된 의미를 넘어서지 못한다. <우마무스메>나 <포켓몬>으로 상징되는 수집형 게임의 메커닉에는 복잡한 스토리를 대체하는 일러스트와 캐릭터의 상성, 능력치, 기술 등의 수치적 특성만으로도 그 본질이 치환될 수 있다는 믿음이 내재되어 있다. 캐릭터에 대한 애착(attachment)은 단순한 사랑의 방식이 아니다. 여기에는 애착의 대상인 캐릭터가 절대 연애의 주체성을 드러내서는 안 되며, 플레이어를 만족시킬만한 일러스트와 계량화된 수치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포함된다. 즉, 게임 내에서 플레이어가 가지는 애착의 대상은 살아있는 주체적 인간보다는 캐릭터에 가까운 무언가로 정의되게 된다. 아즈마 히로키 식으로 말하자면 그 캐릭터의 외양은 특정한 형태의 모에적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에 의해 조합되며, 그 캐릭터의 능력치는 적절한 비즈니스 모델을 유발할 수 있을 정도로 희소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수집형 게임을 플레이 할 때 우리는 언제나 산뜻한 기분으로 카드들을 뽑고 포켓몬을 수집할 수 있게 된다. 말의 외양만 보고 모든 플레이어가 그 말에 애착을 가질 가능성은 줄어드니, 모에화된 여성 캐릭터를 달리게 하면서 손쉽게 애착을 형성하는 과정 속에서 플레이어는 매우 손쉽게 애착을 형성할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은 매우 간편하며, 매우 감사하게도 명목상 무료이다. 그러나 그 애착 과정을 좀 더 극대화하기 위해 억만금을 투자하더라도 카드로부터 구체적인 사랑을 얻게 되지는 못할 뿐이다. 1) http://ndcreplay.nexon.com/NDC2014/sessions/NDC2014_0015.html#k%5B%5D=%EA%B9%80%EC%9A%A9%ED%95%98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교수) 이정엽 순천향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게임 스토리텔링과 게임 디자인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인디게임 페스티벌인 부산인디커넥트페스티벌 창설을 주도하고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다.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인디게임 행사인 Independent Games Festival(IGF) 심사위원이기도 하다. 저서로 『디지털 스토리텔링』(공저, 2003), 『디지털 게임, 상상력의 새로운 영토』(2005), 『인디게임』(2015), 『이야기, 트랜스포머가 되다』(공저, 2015), 『81년생 마리오』(공저, 2017), 『게임의 이론』(공저, 2019), 『게임은 게임이다: 게임X생태계』(공저, 2021) 등이 있다.

  • 혼례-귀신-사랑 : <종이혼례복> 시리즈와 ‘중국식 공포’의 유행

    최근 중국 내 추리 게임에는 ‘중국식 공포’가 유행하고 있다. <페이퍼돌스>(纸人; 리치컬쳐, 2019)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回门; 핀치게임즈, 2021)은 청나라 말기와 중화민국 초기의 오래된 저택에 들어가 결혼과 장례, 장례용 종이인형, 풍수 등 민속을 바탕으로 스릴 넘치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 Back 혼례-귀신-사랑 : <종이혼례복> 시리즈와 ‘중국식 공포’의 유행 15 GG Vol. 23. 12. 10. ※ 역자 설명 : 이 글에서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 안 역주로 부기했다. 미주는 필자가 참고한 텍스트 출처이다. 최근 중국 내 추리 게임에는 ‘중국식 공포’가 유행하고 있다. <페이퍼돌스>(纸人; 리치컬쳐, 2019)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回门; 핀치게임즈, 2021)은 청나라 말기와 중화민국 초기의 오래된 저택에 들어가 결혼과 장례, 장례용 종이인형, 풍수 등 민속을 바탕으로 스릴 넘치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음양항아리>(阴阳锅; 폴레스타게임즈, 2022)와 <누나의 북>(阿姐鼓; 폴레스타게임즈, 2023)은 지역 특색이 담긴 민간설화를 선정해 플레이어가 탐험할 수 있는 공포 공간을 설정한다. 도시의 기이한 현상과 춘절 [역주: 중국의 설 연휴] 의 귀신을 연결한 <홍콩실록>(港詭實錄; GHOSTPIE, 2020)과 산속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가족 멸종 사건을 조사하는 <파이어워크>(烟火; Shiying Studio, 2020)는 올해 처음 출시되는 게임이다. 세기말의 ‘초자연적 열풍’을 다룬 <삼복>(三伏; Shiying Studio, 2020) 역시 이 카테고리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다. ‘중국식 공포’는 새로운 하위 장르 또는 미학이 된 듯 하다. 이러한 유형의 게임들에 대한 플레이어들의 높은 평가 중 하나는 의심할 여지없이 “중국인을 겁주는 방법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중국인이다”일 것이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하트비트플러스가 개발한 <종이혼례복> 시리즈는 2021년 첫 출시 이후 <종이혼례복2: 장령촌>(纸嫁衣2奘铃村), <종이혼례복3: 원앙의 빚>(纸嫁衣3鸳鸯债), <종이혼례복4: 붉은실의 엉킴>(纸嫁衣4红丝缠), <지옥의 꿈: 사후세계 극장>(无间梦境:来生戏) 등의 속편을 6개월에 한 게임 간격으로 출시하며 큰 호평을 받고 있다. 이 게임들은 ‘혼제(婚祭)’를 테마로 하는데, 각각 한 커플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종이 신부’가 되는 운명에 맞서 싸우고, 최종적으로 공포를 이겨내 진정한 사랑의 승리를 완성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다섯 게임들은 서로 연결되어 세기에 걸친 스토리 라인을 형성하고 있으며, 전작인 <13호 병동>(13号病院)과 함께 독특한 ‘종이혼례복 유니버스’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종이혼례복> 시리즈는 성공적인 미니 추리게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심플한 UI와 순수한 터치 플레이가 경이로운 걸작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종이혼례복> 케이스를 통해 ‘중국식 공포’의 핵심 요소인 “중국인을 겁주는 방법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중국인”의 핵심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해 보고자 한다. * 다섯 편의 시리즈, '종이 혼례본 유니버스'를 구성하다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공포(Unheimlichkeit) 개념은 독일어 heimlich에서 유래했다. ‘heimlich’는 친숙하고 친밀하다는 뜻인데, 여기에 부정 접두사를 붙인 ‘unheimlich’는 원래 뜻을 분명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heimlich’의 특수한 경우인 ‘익숙했던 것이 갑자기 낯설어지다’는 의미로 해석돼 주체가 순수하게 두려움(fear)이 아닌 오싹(creepiness)한 느낌을 갖게 한다. [1] 따라서 ‘공포’는 통상적인 경험으로는 식별할 수 없는 이상, 기존 질서 내부의 어긋남 [원문의 핵심 개념 错置을 모두 ‘어긋남’으로 번역함] 이다. 예를 들어 공포장르 속에서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않은 좀비, 조타수도 없이 파도를 헤쳐 나아가는 유령선 등이 그것이다. 영화 <샤이닝>(The Shining)에서 문틈으로 흘러넘치는 핏물, 복도 끝의 쌍둥이 역시 경험이나 질서를 뛰어넘는 어긋남으로 평범해 보이는 산꼭대기 호텔을 공포영화의 명장면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런 의미에서 <종이혼례복>은 ‘공포’라는 개념에 가장 잘 어울리는 시각적인 이미지로, ‘인간’이라는 속성을 가진 장례용 종이인형을 소재로 삼는다. 이들은 외모는 비슷하지만 팔다리가 뻣뻣하고 표정이 이상하며, 종종 과장된 얼굴 화장을 한다. 무생물이었던 종이 인형은 어두운 게임 장면에서 번쩍이며 게이머들과 친근한 ‘점프 스케어(jump scare)를 한다. 이를 통해 제작진은 중국식의 특색을 살린 ‘유물(類物)’인 장례용 종이 인형을 세팅했다. 예를 들어 <종이혼례복 1>의 주인공 닝쯔푸(宁子服)가 저승 혼례식(冥婚) 현장에서 발견한 종이 요리는 정상 음식의 외관을 정교하게 모방하면서도 차갑고 무미건조해 화장 [원문에서 烧祭는 종이돈 태우기 같은 풍습보다는 화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같은 오싹한 연상을 유발한다. * ‘유물’의 종이 묶음 제물 그러나 '공포'의 핵심은 잘못된 시각적 이미지보다는 상식과 이상, 경험과 어긋남의 관계에 있다. 거의 모든 ‘중국식 공포’ 게임에는 현대적 개체의 전근대적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s)’ [ 미셸 푸코가 정의한 개념으로, ‘다른’을 뜻하는 ‘heteros’와 ‘장소’를 의미하는 ‘topos’의 합성어. “사회 안에 존재하면서 유토피아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실제로 현실화된 유토피아인 장소들” ] 에서의 어긋남과 과학 패러다임에서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어긋남이 포함되어 있다. <종이혼례복> 시리즈에서 또 다른 높은 어긋남은 앞의 두 가지의 불안정 구조를 깨뜨린다. 그것은 로맨스 신화와 이성의 어긋남이다. 결혼: 형성되는 건 아무 것도 없고(无物之阵), 망령은 돌아온다 婚:无物之阵,幽灵复返 [루쉰은 자신의 '무물지진(无物之阵)' 개념이 권위주의 통치의 산물이자 민중의 열등감을 드러내는 것이라 여겼다.] <종이혼례복> 시리즈는 현대도시에 살던 주인공들이 갑자기 세상과 단절된 ‘산골마을’로 내동댕이쳐진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곳은 모든 마을 사람들이 ‘혼제’를 신봉하는 장령촌이나 봉건적 가부장이 점거한 말수촌(末水村)이 될 수도 있고, 혹은 살아남은 이가 아무도 없거나 귀신의 기운이 넘치는 익창진(益昌鎭)이 될 수도 있다. 이곳들은 현대사회와 거리가 멀고 교통이 불편하며 통신신호가 사라지고 역사의 흐름에서 벗어나 고집을 부리며 오래된 신앙과 의식을 이어가는 헤테로토피아이다. 플레이어는 주인공들의 시각을 통해 완전히 낯설기만한 스릴러 놀이터가 아니라 익숙한 듯하지만 마주하기 어려운 ‘무물지진(无物之阵)’—반복적으로 출현하는 죽음의 상징물들(관, 향초, 종이돈 등)]—이 정돈되지 않은 현대 이전의 역사, 틈만 있으면 파고드는 집단적 무의식을 가리킨다. 물론 조작해 현대적 공간을 하루아침에 이화시켜 ‘귀신을 불렀다’는 것이다.동네 입구 조화, 이웃집 할아버지의 혼백이 깃든 아파트, 길가의 장사용품점……현대적 공간을 떠도는 전근대적 자투리 조각은 ‘익숙한 물건의 낯설게 하기’라는 원칙에 더 부합하고, 오싹한 느낌을 더 잘 만들어낸다. 물론 이 게임은 때때로 역으로 작동해 현대성의 공간을 하룻밤 사이에 낯설게 하여(异化) "유령을 초대”한다. 주거단지(小区) 입구의 화단, 이웃의 영혼이 깃든 주거용 건물, 거리의 장례용품 가게 ......등등은 현대성의 공간에 떠다니는 전근대의 잔재이며, 이는 “익숙한 것의 낯설게 하기”의 원칙에 더 부합하고 소름 끼치는 느낌을 줄 가능성이 더 크다. * 모든 이야기의 근원지는 장령촌 <종이혼례복 2: 장령촌>에서는 이러한 무물지진의 구축 과정을 의도적으로 추적한다. 어려서부터 ‘종이 신부’로 발탁된 여주인공 타오멍옌(陶梦嫣)은 ‘혼제’의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홀로 장령촌으로 돌아와 지상의 궁궐에서 마을의 역사를 파헤친다. 이와 동시에 <종이혼례복> 시리즈를 관통하는 세계관은 당나라 현장 스님이 경을 취하여 장령촌을 지나다가 자신이 지은 구장진경(九藏真经) [아홉 편의 숨겨진 불교 경전] 가운데 육장(六藏)이 이교(异教) [주류적인 종교와는 다른 종교] 적인 컬트임을 발견하고, 작별 인사를 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이를 소각해달라고 당부한다. 마을 사람들은 제멋대로 경전을 남기면서 ‘육장(六藏)’을 ‘육장(六葬)’ [여섯 번의 장례] 으로 왜곡한다. 이에 따라 마을 이장을 종교적인 리더로 삼아 정기적으로 의식을 주관하고 적령기 여성이 사신(适神)에 제사를 지내는 ‘혼제’ 의식이 탄생하게 된다. 희생된 여성에겐 종이로 묶인 제사물품과 같이 ‘종이 신부’란 별명이 붙었는데, 이것이 바로 게임 타이틀 ‘종이혼례복’의 유래다. 흥미롭게도 게임은 ‘육장보살(六葬菩萨)’ [게임 속 캐릭터] 신앙을 현장 취경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억지로 갖다붙인다. 심지어 당나라 적인걸(狄仁杰)이 악신에 제사를 지낸 걸 말끔히 제거했던 기록까지 그럴듯하게 가미하고 있다. 현장법사 캐릭터는 역사적 인물(실존하는 불교의 고승)과 전설적 캐릭터(신마소설의 주인공) [신마소설은 신, 귀신, 요괴 등을 주제로 한 한자문화권 고전 소설을 가리킨다] 의 이중적인 성격을 겸비하고 있기 때문에 출처를 추적하는 데 있어 진짜같기도 하고 가짜같기도 한 효과를 낸다. 당나라 때부터 천여 년간 이어져 온 오랜 관습은, 애써 시간의 깊이를 늘리고 거짓의 숭고함을 만들어, 기나긴 전현대 역사 속에서 공간 내부의 질서—원래 그랬다면 그게 맞는 것이라는—를 구축했다. 번잡한 의식(무엇을 해야 하는지)과 엄혹한 금기(무엇을 해선 안 되는지)가 질서의 하나된 양면을 이루고, 집단적 무의식의 ‘무물지진’을 점차 흔들기 어렵게 만든다. 의심할 여지 없이 철저한 상례로 굳어질 때까지 말이다. 그 사이에 잘못 들어가게 된 개인과 관행 하의 집단은 어긋남과 충돌을 만든다. 닝쯔푸나 양샤오핑 등 질서에 도전하는 외래자, 타오멍옌, 쭈샤오홍(祝小红) 등 반향식의 ‘종이 신부’는 역대 게임 주인공들이 관례에 편입되지 못하고 타자로 전락해 배척당하거나 교살당할 수밖에 없다. ‘중국식 공포’ 게임의 이질적 공간은 미래로 가지 않고 필연적으로 과거로 돌아간다. 주인공들은 에얼리언의 침입이나 터미네이터 사냥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육장보살 역시 크툴루(Cthulhu) 같은 냉혹한 우주의 신이 아니라, 아득한 별빛을 통해 인간의 생사를 굽어본다. ‘중국식 공포’의 귀신들은 제사상 위의 감실 상자[龛笼; 동양 사원에서 신령이나 부처 등의 상을 올려놓은 작은 상자] 안에 반듯하게 앉아, 감도는 향불을 사이에 두고 발원(發願)과 고충(诉苦)을 듣고, 평범한 사람들과 약간의 지전(纸钱)이나 억울하게 뒤집어 쓴 조금의 빚을 시시콜콜하게 따진다. 그렇게 무물지진 안 모든 이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모든 것을 마음에 두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반복적인 우화는 구체적인 서사 차원으로 정착되어 ‘혼제’ 의식의 세 요소인 귀신, 제물을 바치는 사람, 제물의 끌어당김과 격추 등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다. 일반적 격식에 따르면 귀신은 역사를 기원하고 집단적으로 추앙받는 이질적인 힘이며, 제사를 올리는 사람에게 공정한 거래를 약속하는 원칙이며, 제사를 올리는 자는 경전과 악당의 기능을 담당하여 제물을 박해하는 대가로 거래를 성사시킨다. 제사물품인 ‘종이 신부’와 그 애인은 이질적 공간을 벗어나 현대 문명으로 돌아와 자기 구원을 완수해야 한다. 하지만 돌아온 귀신들은 오히려 <종이혼례복>의 이야기가 이러한 격식을 벗어나게 한다. 최고신으로 여겨지는 ‘육장보살’은 “만물이 묻히면 모두 그의 관할이 된다”는 ‘거대한 능력’을 보여주기는커녕, 무물지진을 타파하기로 결심한 주인공들에 의해 여러 차례 목이 비틀어 끊어짐으로서 플레이어들의 입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시리즈 전체의 진정한 악역 캐릭터 네모리는 제사물품의 자리를 차지했던 ‘유령’이다. 마을 촌장으로부터 마을에 유해하다는 단언받고,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그녀는 현대 대학교육을 통해 작은 산골마을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곤 다시 돌아와 육장보살 신앙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되었고, 자신을 새로운 귀신으로 만들 때까지 계속해서 새로운 제사물품을 찾으며 의식을 완성해나간다. * 종이혼례복 시리즈의 진정한 악역 녜모리 이는 일찍이 ‘육장보살’ 역시 정전을 장악한 현장법사에 의해 추방되고 관가에 의해 토벌된 ‘유령’이었지만, 암암리에 천 년을 떠도는 악신이 된 것임을 일깨워준다. 그것은 그녀와 같이, 혹은 전현대의 파편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끊임없이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무물지진’이 완전히 깨질 때까지 그들은 끊임없이 실패하지만, 영원히 계속해서 그 실패를 반복할 것이다. 귀신: 말로도 안 되고, 배척해서도 안 된다 鬼:不可言说,不可摈弃 우리가 ‘중국식 공포’ 게임의 첫번째 어긋남으로 현대적 개체와 전근대적 이질적 공간의 어긋남을 지목한다면, 중국에서 공포 장르 서사는 전근대적인 문예작품 속에서 대응물을 찾기 힘들다는 역설적인 사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요재지이>(聊斋志异)[청나라 시대 포송령이 지은 8권 491편의 지괴소설집으로, 신선과 요괴의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음] 등의 지괴서사(志怪故事) [위진남북조 시대에 유행한 기괴한 이야기 소설집] 속 꽃요괴는 기본적으로 “깜짝 놀라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지 않으며, <서유기> 같은 신마소설 속 삼계 체계 [불교에서 삼계란 윤회의 세계를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으로 구분한 것을 가리킨다] 는 권력사회의 복사판으로, 사람 마음이 귀신보다 무섭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그밖에 신선과 요괴 이야기 등 설화집이나 필담집 역시 보통 현대 독자들에게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을 주진 않는다. 다시 말해 ‘중국식 공포’는 직접적으로 인용할 수 있는 ‘중국식’ 텍스트도 없고, 전현대사의 완벽한 이식도 아니다. ‘공포’는 현대화의 산물이며, 주류이데올로기—어쩌면 ‘과학’—에서 주변화되어 남은 잉여이다. 토마스 쿤(Thomas Samuel Kuhn)은 <과학혁명의 구조> 에서 현대과학의 진로는 본질적으로 낡은 패러다임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체하는 혁명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른바 ‘패러다임(paradigm)’은 과학 연구 분야에서 공통적으로 따르는 어떤 패턴으로, 이 분야의 합리적인 문제(무엇을 연구할 것인가)와 방법(어떻게 연구할 것인가)을 규정하여 법칙, 이론, 기구 등을 포함해 정립한 일관된 과학 전통을 형성한다. 과학이 물질 세계에 대한 수수께끼 풀기 게임이라면, 패러다임은 게임의 규칙과 무엇이 ‘미스터리’가 될 자격이 있는지를 창안한다. 이에 대해 쿤은 ‘상자’라는 비유를 제시한 바 있다. “이런 활동은 패러다임이 제공하는 미리 만들어놓은 경직된 상자에 자연을 처넣으려는 것 같습니다. 기존 과학의 목적은 새로운 유형의 현상을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상자에 채워지지 않은 현상은 종종 완전히 무시되고 새로운 이론을 발명하는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이 새로운 이론을 발명하는 것도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 하지만 이러한 신앙 패러다임으로 인한 제약은 과학 발전에 꼭 필수적입니다.” [2] 현대 과학은 수백 년의 발전을 거쳐 ‘신화’로 분류되는 다른 패러다임을 대체하는 새로운 ‘신화’가 됐다. 새로운 신화의 서사 공간이 매우 넓고, 말과 전망이 유달리 아름다워 현대적인 개인이 상자의 사면 장벽을 쉽게 홀시할 수 있다. 하지만 상자 밖의 사물은 여전히 존재하며,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 패러다임에 포함될 수 없는 현상은 언어구조에서 '도깨비', '풍습', '전통' 또는 그밖에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것과 가리키는 것 사이의 어긋남에 무관하게 무엇이라 말할 수 없게 만든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정리 또는 판별할 수 없으므로 배제할 수 없다. <종이혼례복4: 붉은실의 엉킴>에서 장천루이의 민속학 전공이라는 배경은 고등교육과 과학은 상자 안의 모든 것을 해결하지만 공포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자조적인 자기 인식이다. * 민속학 연구생 장천루이(张辰瑞)의 자조 하지만 <종이혼례복> 제작진은 그런 자조에 만족하지 않고 상자의 경계를 반복적으로 넘나들었다. 과학적 패러다임과 전근대의 뒤얽힘은 엉뚱한 효과를 낳았다. 화재경보기로 인해 연소된 지전 더미, 복사기로 복사된 부적…… 각종 ‘물리적 귀신 퇴치’ 수단은 플레이어들로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시리즈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뒤얽힘’은 음과 양을 통하게 하는 두 개의 매개인 불과 핸드폰이다. 둘은 겉으로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인다. 전자는 제물을 태우는 풍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양에서 음으로 옮겨지는 것은 본질적으로 상징적인 투사이며, 제사물품은 화염 속에서 재로 변하지만 다른 가치 영역에서는 오랫동안 지속된다. <종이혼례복>의 주인공들은 흔한 지전이나 종이인형은 물론, 귀신과 통화할 수 있는 종이로 만든 핸드폰까지 불태운다. 현대 과학기술 장비가 버젓이 제사물품의 대열에 오르자 플레이어들은 “원래 현지에 사업자가 있나? 그럼 누구에게 전화요금을 내야 하지?”라며 경탄을 금치 못했다. 후자는 다음과 같은 설정을 기반으로 육안으로 귀신에 쉽게 속고 무심한 기계만이 위장을 간파할 수 있다. 그 때문에 휴대폰 카메라는 주인공이 귀신을 정확하게 잡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과학기술의 눈으로 상자 밖의 공간을 응시하는 것 역시 일종의 어긋남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익숙한 것의 낯설게 하기”는 오싹함을 유발하지는 않는다. 두 매개 모두 통일된 전제를 숨기고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바로 현대적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과학은 궁극적으로 불가해한 것을 해명하고 정복하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 음양을 소통하는 두 가지 매개체: 불과 휴대전화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이리저리 뛰어도, <종이혼례복>의 결말은 패러다임 속으로 돌아온다. 헤테로토피아의 모든 요괴들은 진기한 꽃(奇花) 명타란(冥陀兰)이 일으키는 환각이다. ‘작은 산골마을’은 필연적으로 현대 문명에 의해 재발견되고 청산되며 수용된다. 무고한 사람은 구출되고, 악한 자는 법의 처벌을 받게 된다. 주인공들은 탈출에 성공하거나, 일시적으로 (귀신을) 격퇴하지만 실제 ‘공포’—‘중국식 공포’는 결코 핏대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를 이겨본 적은 없다. 아무리 무서운 괴물이라도 핏대를 세우면 공격할 수 있고 소멸할 수 있는 대상이며 이때 두려움은 화력 부족에서 비롯된다. ‘중국식 공포’는 피와 살이 없는 몸이라 애석하게도 <무간몽경: 내생희>의 마지막 예고편에서 역대 주인공들이 힘을 합쳐 ‘무물지진’이 아닌 악역 녜모리를 물리치려 한다. 상자 안에서 주인공들은 잠시나마 자신이 무적이라고 믿지만, 이중으로 엇갈린 위치는 오직 사랑의 신화에 의해서만 메워지게 된다. 사랑: 로맨스 신화,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 情:浪漫神话,至死不渝 “사랑이 죽었다”는 요즘, <종이혼례복>의 역대 주인공들은 희귀한 사랑 신화의 독실한 신도들로, 플레이어들은 이들을 ‘로맨티스트 싸움꾼’이라며 농담삼아 부른다. 백중날[음력 7월 15일] 귀신문을 뚫고 아내를 구한 닝쯔푸, “정 때문에 목숨까지 버리는” 량샤오핑(梁少平), ‘원앙 빚(鸳鸯债)’을 대신 갚고 악당과 함께 죽은 왕자오통(王娇彤), 서로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장천루이와 추이완잉(崔婉莺), 그리고 전생과 현생, 재연과 인연을 이어온 쉰위앙펑(荀元丰)과 타오멍옌 등이 그들이다. 여기서 각 커플의 성이나 이름은 모두 고전문학 속 고전적인 애정 텍스트인 <요재지이의 섭소천>(聊斋志异之聂小倩), 양축전설(梁祝故事) [중국 동진시대부터 1,700여 년 동안 민담으로 전해져 온 4대 애정소설 중 하나] , <교홍기>(娇红记) [명나라 맹잔순(孟称舜)이 쓴 희곡] , <서상기>(崔莺莺待月西厢记) [원나라 왕실보(王实甫)가 1295~1307년 무렵에 쓴 허구 잡문] , <요재지이: 소취>(聊斋志异之小翠) [청대 소설가 포송령이 여우 귀신의 이미지를 빌어 쓴 소설] 등에 대응한다. 혼의 이탈과 나비가 되는 것, 치료 등 줄거리 역시 위 고전작품들에 오마주를 뉘앙스가 뚜렷하다. 이 텍스트들의 공통점은 사랑이란 하나하나의 개인이 만들어낸 낭만적 기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에 있다. “산 자는 죽을 수 있고, 죽은 자는 살 수도 있다”(<모란정 牡丹亭>에서 인용)는 말처럼, 사랑이 깊어지면 인간과 귀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가문의 편견을 산산조각낼 수 있다는 것은 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개인은 현대 주체의 사유에 가까운 방식으로 봉건적인 예법과 도덕에 선전포고를 한다. 설령 선전포고가 항상 무기력하더라도, 설령 최종 결말은 두 집안의 사회 지위·경제 형편이 걸맞아[门当户对] 함께 살게 되거나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함께 화를 입어[玉石俱焚] 함께 죽는 것으로 끝날지라도, 설령 과도하게 낭만적이어서 실현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전근대적인 배경에서 그들은 여전히 경전 말씀에서 벗어나 도리를 위반하는 해로운 서적으로 폄하받으며, 올바른 사람이라면 읽어선 안 되는 것으로 취급받는다. * 《무간몽경: 내생희》(无间梦境:来生戏)의 주인공 커플 애정 신화의 합법화는 지난 2세기에 걸친 현대화 과정의 산물이기도 하다. “애정 신화는 사실 하나의 배다리처럼 유럽 문화를 현대와 개인으로 건너가 개인주의 담론의 중요한 초석 중 하나가 됐다. 하지만 동시에 애정 신화는 낭만주의의 테마 중 하나로서 시종일관 광기나 비이성/반이성적 함의를 항상 담고 있다. 따라서 일종의 파괴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 일대일로 이뤄지는 현대의 배타적 사랑은 ‘개체’와 ‘여성’의 탄생을 전제로 성과 사랑, 육체와 정신의 통합과 순결을 원칙으로 한다. 즉, 약수가 삼천리를 뻗어 흘러도[弱水三千; 아무리 많은 상대가 있어도], 그/그녀가 아니면 안 된다. 녜모리가 쌍둥이 동생 녜모치(聂莫琪)를 훔쳐서 기둥을 바꾼 후, 닝쯔푸는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 했고, 그녀가 아니면 안됐기에 수많은 난관을 거쳐 녜모치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해야 했다. 량샤오핑의 아무것도 따지지 않는 사랑은 어린 시절부터 장령촌에서 자란 쭈샤오홍을 일깨웠다. 같은 죽음이라고 하더라도 제사물품대 위에 놓인 ‘종이 신부’가 되는 것보다는 족쇄를 풀고 나비가 되어 추락하는 것이 낫다. 낭만 신화가 신화인 이유는 사랑이 이성적 계산의 범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인이 계급, 이익, 나아가 생사를 초월하도록 재촉한다. 높은 사람은 ‘고귀한 배신’을 결심하고, 낮은 사람은 무릎을 치켜들어 ‘나는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한다’를 단호히 던져버리고, ‘나는 어떻게 하겠다’고 함성을 지른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사랑은 ‘공포’와 같은 구조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것들은 모두 상자 바깥에 있다. 사랑은 <종이혼례복>의 주인공들이 행동하는 최대 동인이다. 게임은 첫 작품에서 ‘순애보에 빠진 싸움꾼’이 약혼녀를 구한다는 단일한 시점에서 남녀 주인공들이 서로를 구한다는 두 가지 시점으로 바뀌어 고정된다. 그리고 오마주를 표하는 고전 텍스트들처럼 두 개체의 기적을 짙게 그려낸다. 과학과 자본이 만연하고 개인의 감정이 함께 시들어가는 시대에 현대 이성에 대한 최고의 어긋남으로 충족되는 사랑의 신화만 남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안에 담긴 전복적 역량은 무물지진을 돌파하고 우리에게 절대 사로잡히지 말라고 격려한다. 왜냐하면 죽어서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공포’는 싸워서 이길 수 없지만, 진정한 사랑은 결국 충분하다. 죄를 지으면 사랑에 빠지게 되고, 남녀가 치정에 빠지게 한다. ‘중국식 공포’의 핵심적인 어긋남은 현대 개인의 두 눈으로 응시하면서도 직시할 수 없는 전근대적 잔재다. 사후 결혼, 종이인형, 오래된 신앙, 잔혹한 의식, 우매한 마을 사람들…… 죽음의 기호들이 널려 있는 헤테로토피아에서, 집단 무의식이 굳어져 무물지진을 만들고, 과학상자 밖의 침묵은 익숙했던 일상의 흉악한 틈새를 드러내며 '중국인이 중국인을 놀라게 하는' 이기(利器)로 변모한다. <종이혼례복> 플레이어들이 공포게임에서 사랑을 감상하는 데 열중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도 일찍이 낯선 신화로 전락한 지 오래됐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부디 오호(五湖) [오월지방의 호수] 의 밝은 달과 인내심이 원앙의 빚을 갚게 하기를.” [4] [1] 탕메이신(唐梅欣)의 《恐惑概念的演变——从弗洛伊德、海德格尔到拉康 프로이드와 하이데거에서 라캉으로의 공포 개념의 변화》, 2021년 우한대학(武汉大学) 석사학위논문 참고. [2] 토마스 쿤 저, 진우룬(金吾伦)·후신허(胡新和) 역, <과학혁명의 구조>, 베이징대학출판사, 2003년 [3] 다이진화(戴锦华), <电影批评(第二版)>, 베이징대학출판사, 2015년 [4] <종이혼례복 3: 원앙의 빚>의 서문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Researcher) 徐佳(서가) (활동가, 작가) 홍명교 활동가, 작가. 사회운동단체 플랫폼C에서 동아시아 국제연대와 사회운동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를 썼고, <신장위구르 디스토피아>와 <아이폰을 위해 죽다>(공역) 등을 번역했다.

  • 쿨타임과 숨고르기

    숨고르기가 중요한 이유는 지속에 있다. 게임은 승패가 분명하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재미있지만, 이겼을 때만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과정이 충분하다면 지는 것도 재미있을 수 있다. 게임에서 승리하는 것을 우선시한다면 패배는 게임을 지속하는 것을 방해하며, 다른 게임을 선택할 때 이길 수 있느냐를 가장 염두에 두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게임에 흥미를 느끼는 동안 지더라도 다시 도전하고, 다른 게임을 선택할 때 자기만의 취향과 기준으로 고를 수 있다. 숨고르기는 게임을 ‘잘하는’ 것뿐만 아니라 ‘잘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 Back 쿨타임과 숨고르기 21 GG Vol. 24. 12. 10. 자투리 시간은 과연 남는 시간일까 ‘자투리 시간’이 사회적 화두였던 적이 있다. “일과(日課) 사이에 잠깐씩 남는 시간”이라는,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인지 특정할 수 없는 시간이 때론 무언가를 더 이룰 수 있는 기회로, 때론 어떻게 보낼 것인지 모색해야 하는 과제로 여겨졌다. 자투리 시간을 언급한 신문기사를 통해서도 시기에 따라 다른 맥락으로 읽혔음을 파악할 수 있다. 1983년에 대학가를 중심으로 전자오락실이 성행하고 있음을 다룬 기사에서는 대학생들이 남는 시간을 보내는 새로운 방식으로 게임을 즐기고 있다고 소개한다. 십여 년 뒤인 1994년도에는 점심시간을 취미나 자기계발을 위해 사용하는 젊은 회사원들이 늘고 있다는 기사가 있다. 이들은 점심시간을 “직장상사를 ‘모시고’ 식사하면서 잡담을 나누는 ‘한가한 시간’이 아니라, 바쁜 생활 중에도 자신을 계발하고 취미를 살리는 ‘황금의 자투리시간’으로 여긴다고 소개한다. 그로부터 10년 사이 자투리 시간은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성격이 되었다. “(입시를 위해)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한자와 영단어를 외우는 것이 쌓이면 학습량이 제법 될 것”이라는 칼럼은 허투루 보내는 시간을 최소화 해야 성취를 이룰 수 있을 정도로 경쟁적인 분위기를 시사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무엇이 좋은 삶인가에 대한 사회적인 토론과 성찰 없이 일단 더 나은 삶을 살려면 남들보다 노력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메시지로 개인에게 책임을 돌린다. 19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한국사회에서 강렬히 자리했던 자기계발에 대한 욕구(혹은 강요)는 자투리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에 대한 개인의 선택을 압박했던 셈이다(청소년의 수면권 보장을 근거로 게임 셧다운제를 추진하면서 청소년의 심야 학습에 대한 보호에 대한 반론에는 딱히 응답하지 않았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모두가 자투리 시간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마지막 퍼즐로 여겼던 것은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휴대전화로 자투리 시간에 모바일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지그시 ‘염려’하는 기사도 있다. 무선 인터넷과 스마트 디바이스가 대중화되면서 자투리 시간을 보내는 방법의 선택지가 늘었다. 장소에 관계 없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늘어나면서 자투리 시간의 경계도 불분명해졌다. 순서를 두고 차례차례 진행되던 일들이 여러 갈래에서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잠깐씩 남는 시간’이라는 것이 불분명해지면서 남는 시간에 하던 일이 시간을 내서 하는 일이 된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자투리 시간을 보내는 방식도 무엇을 할지 떠올리는 것 대신 무엇을 먼저 할지 선택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2015년에 ‘스낵 컬쳐’라는 이름으로 짧은 시간 동안 즐길 수 있는 컨텐츠가 유행하고 있다는 기사는 개인의 자투리 시간을 점유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자투리 시간은 개인이 주체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게 된 걸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2024년도 기사들은 여러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해 현금처럼 활용할 수 있는 포인트를 모으는 ‘앱테크’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과, 스마트 미디어 사용 시간을 제한하고 숏폼 시청 대신 책을 읽는 등 일부러 자극적인 콘텐츠와 거리를 두는 ‘도파민 디톡스’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소개한다. 자투리 시간을 ‘남김 없이’ 소비하도록 유도하는 환경 속에서 개인들이 일상의 균형과 더 나은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 쿨타임, 시간과 시간 사이에 놓인, 선택해야 하는 게임 플레이 중 행동과 다음 행동 사이의 시간인 쿨타임은 자투리 시간과 두 가지 면에서 유사하다. 첫째, 시간과 시간 사이에 있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자투리 시간이 하루의 어떤 과업과 그다음 과업 사이에 있는 시간이라면 쿨타임은 게임 중의 어떤 행동과 그다음 행동 사이에 있는 시간이다. 분량은 각기 다르지만 시작과 끝은 정해져 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의 범주에 제약이 따른다. 둘째,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스스로 선택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투리 시간의 맥락이 시기와 상황에 따라 달라졌음에도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는 꾸준히 당사자의 몫이었다. 쿨타임도 마찬가지다. 게임의 성격이나 설정된 조건에 따라 상황은 다르지만 그 시간동안 무엇을 할 것인지는 게이머의 선택에 달려있다. 그렇다면 쿨타임은 어떻게 보내야할까? 게이머의 선택인 만큼 정답은 없지만 쿨타임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따져 보는 것이 이 질문에 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는 쿨타임을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반드시 활용해야 하는 전략적인 요소로 여겨 쿨타임에 과연 선택의 여지가 있을까 하는 반문에 대한 나름의 답도 될 것이다. 먼저 살펴볼 것은 쿨타임은 왜 (하필) ‘쿨’타임이냐는 것이다. ‘핫’(hot)과 ‘콜드’(cold) 사이를 뜻하는 ‘쿨’(cool)은 유무형의 멋짐을 표현하는 문화적 맥락의 의미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쿨타임이 ‘쿨다운’(cooldown)을 차용한 표현임을 고려하면 쿨타임의 ‘쿨’은 차갑고 서늘하며 침착하다는 사전적 의미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특정한 기술이나 아이템만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을 방지하거나 캐릭터 능력의 균형을 유지하는 등 쿨타임이 게임에서 플레이가 과잉 또는 과열되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과도 부합한다는 점에서 쿨의 사전적 의미와도 연결된다. 여전히 궁금하긴 하다. 쿨타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가 균형과 침착함이라면, ‘쿨’말고 다른 표현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핫과 콜드 사이에는 ‘웜’(warm)도 있고, 중간 혹은 완화한다는 의미의 ‘모더레이트’(moderate)나 균형 잡힌이라는 의미의 ‘밸런스트’(balanced)도 있다. 차분함을 뜻하는 ‘논살란트’(Nonchalant)나 냉정함을 뜻하는 ‘상프루아’(Sangfroid)는 왠지 어감도 좋다. 그런데 이 단어들에 ‘타임’을 붙이면 나름대로 약어를 만들어 입맛을 살려봐도 여전히 ‘쿨’만 못하다. 이렇게 느끼는 건 ‘쿨’이 게임 말고도 일상적으로 다양하게 쓰이기 때문일 것이다. 문화적 맥락도 있긴 있는 셈이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쿨타임이라 부를 수 있느냐다. ‘로딩’도 쿨타임이라 할 수 있을까? 처음 게임을 시작할 때, 장소나 레벨이 전환될 때, 목표 달성을 실패해 체크/세이브 포인트로 다시 돌아가거나, 리스폰되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쿨타임에 해당할까? 로딩은 게임 플레이 자체가 유보되는 반면 쿨타임은 특정 행위만 제한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고, 이로 인해 로딩은 게임 전략의 일부로 활용될 수 없다는 점에서 쿨타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쿨타임의 초점을 다음 행동을 할 수 있는 순간, 즉 쿨타임이 종료되는 시점인 ‘쿨하게 다운된 상태’에 두는 것이다. 그런데 초점을 쿨하게 ‘다운되어가는’ 과정으로 옮기면 로딩도 쿨타임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 〈피파〉 시리즈의 로딩 또는 대기 화면에서 플레이 연습을 할 수 있다거나, 레이싱, 대전 액션 게임 등에서 스테이지 종료 후 하이라이트 장면을 보여준다거나, 로딩 화면에서 게임에 대한 각종 정보나 팁을 제공하는 것은 게임 전략의 일환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라도, 이어질 다음 플레이를 준비한다는 점에서 쿨타임의 기능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로딩은 게임이 다음 단계를 연산하는 과정이지만 이 시간동안 게이머는 특정한 동작을 연습하거나 미리 조작해보면서 워밍업을 하거나, 앞서 잘한 혹은 잘하지 못한 플레이를 되새기거나 복기하고, 게임에 대한 정보를 숙지하면서 이제 이어질 플레이를 어떻게 할지 구상할 수도 있는 것이다. a tempo, 자기만의 페이스로 이처럼 균형과 침착함을 추구하는 쿨타임의 범위를 로딩까지 포함한다면 쿨타임을 게임 플레이 중 숨을 고르는 시간으로 표현할 수 있다. 숨고르기에는 여러 가지가 포함될 수 있다. 앞서 사용한 스킬을 다시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또는 유닛 생산이 마무리되어서 추가 생산을 지시할 수 있을 때까지 ‘벼르는’ 것도 숨고르기가 될 수 있다. 앞서 플레이한 내용을 만족스러워하거나 불만족스러워하며 어떤 부분을 잘 했거나 그렇지 않았는지 복기하는 것도 숨고르기가 될 수 있다. 게임이나 환경에 따라 다르지만 로딩에 걸리는 시간동안 가만히 있는 것도 (물론) 숨고르기가 될 수 있다. 이 모든 행위들이 게임 플레이와 플레이 사이를 잇기 때문이다. 승리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쿨타임에 할 수 있는 행위의 범위가 ‘이기려면 해야만 하는 행위’로 좁혀지겠지만, 게임을 플레이하는 즐거움을 목적으로 한다면 쿨타임에 무엇을 할 것인지는 ‘자기만의 페이스’(my own pace)에 따라 게이머 스스로 정하기 나름인 것이다. 숨고르기가 중요한 이유는 지속에 있다. 게임은 승패가 분명하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재미있지만, 이겼을 때만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과정이 충분하다면 지는 것도 재미있을 수 있다. 게임에서 승리하는 것을 우선시한다면 패배는 게임을 지속하는 것을 방해하며, 다른 게임을 선택할 때 이길 수 있느냐를 가장 염두에 두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게임에 흥미를 느끼는 동안 지더라도 다시 도전하고, 다른 게임을 선택할 때 자기만의 취향과 기준으로 고를 수 있다. 숨고르기는 게임을 ‘잘하는’ 것뿐만 아니라 ‘잘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다시, 쿨타임은 어떻게 보내야 할까? 무엇을 선택하든 자기만의 페이스에 따라 게이머 스스로 정하면 된다. 게임에서 쿨타임이 마련된 것은 게임 디자인적인 배경 때문이었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는가는 게이머에게 달렸다. 게임의 쿨타임은 해당 게임을 안정적으로 (그리고 오래) 플레이하는 환경을 구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게이머가 플레이하는 게임은 그 게임말고도 더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쿨타임을 두고 치킨을 먹는 것은 치킨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인 것처럼 게임에서의 쿨타임도 게임을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시간일 필요가 있다. 하여 나는 쿨타임에 숨고르기 말고도 ‘관조’도 함께이길 바란다. 게임을 하고 있음을, 할 게임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더해진다면 지금 하고 있는 게임과 앞으로 하게 될 게임이 더 큰 기대와 재미를 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투리 시간에 부러 밖으로 나가 볕을 쬐고 산책하는 것이 일상을 더 윤택하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사회학자) 강지웅 연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전문연구원. 〈게이머즈〉를 비롯한 여러 게임매체에서 필자로 활동했다. 저서로 〈게임과 문화연구〉(공저), 〈한국 게임의 역사〉(공저)가 있다.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에서 게임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게임이 삶의 수많은 순간을 어루만지는, 우리와 동행하는 문화임을 믿는다.

  • [인터뷰] 북미 게임연구자 Consalvo, 한국과 북미의 게임문화를 말하다

    콘살보 교수와의 이번 인터뷰는 게임에 대한 인문사회학적 고찰에 있어 필수적인 게임학의 현재를 진단해보는 한편 북미의 상황에 대해 들어봄으로써 이 시점, 여기에서 고민해볼 만 한 지점들을 모색하고자 기획하였다. 실시간 인터뷰가 어려운 현재 여건상 이 인터뷰는 이메일로 진행되었음을 밝힌다.  < Back [인터뷰] 북미 게임연구자 Consalvo, 한국과 북미의 게임문화를 말하다 01 GG Vol. 21. 6. 10. 게임학(Game Studies)은 게임에 대한 인문사회학적 연구를 통칭하는 연구 분야다. 2000년대에 들어와 게임이 산업적으로 뿐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영향력이 크게 확장되면서 서구권에서는 게임학 분야가 본격적으로 발전되기 시작했다. 이번에 창간호 기념 인터뷰를 하게 된 캐나다 콘코디아대학교(Concordia university)의 미아 콘살보 교수(Mia Consalvo) 또한 비슷한 시기에 게임학 연구에 발을 들여놓은 후 꾸준하게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게임연구자다. 게임의 문화적 측면에 특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콘살보 교수는 개발사에서 규정해 놓은 방식 외의 게임플레이 및 그로부터 파생된 산업과 문화에 대한 논의가 인상적이었던〈Cheating: Gaining Advantage in Videogames(2007)〉을 비롯해서 관용적으로 '일본의 침공'이라 불리는 - 타이토의 〈Space Invader〉가 북미 시장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일본의 게임들이 대거 유입되었던 현상에 대한 비유적 표현 - 일본 게임의 북미 시장 진입과 번성을 둘러싼 다양한 맥락을 추적한 〈Atari to Zelda: Japan’s Videogames in Global context(2016)〉, 그리고 오늘날 게임문화 내에서 게임의 정통성을 두고 벌어지는 논박을 관찰하고 문화적 함의를 고찰한 〈Real Games: What’s legitimate and What’s not in Contemporary videogame(2019)〉 등을 저술하였다. 콘살보 교수와의 이번 인터뷰는 게임에 대한 인문사회학적 고찰에 있어 필수적인 게임학의 현재를 진단해보는 한편 북미의 상황에 대해 들어봄으로써 이 시점, 여기에서 고민해볼 만 한 지점들을 모색하고자 기획하였다. 실시간 인터뷰가 어려운 현재 여건상 이 인터뷰는 이메일로 진행되었음을 밝힌다. 질문: 콘살보 교수님,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이왕이면 게임과의 개인적인 인연을 중심으로요 . - 어렸을 적 동네 피자 레스토랑에서 가족들이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릴 때 매장 내에 설치되어 있던 아케이드 게임기로 <팩맨> 같은 게임을 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것이 게임에 대한 첫 기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가시간에 간간이 이런 식으로 게임을 접하다가, 1년쯤 뒤에는 부모님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저와 여동생에게 아타리 2600 콘솔과 <스페이스 인베이더> 게임을 사주셨어요. 언제 어디서든 원할 때마다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정말 신이 났는데, 게임을 플레이하고 싶을 때면 텔레비전 수상기에 콘솔을 연결해야 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 이후 종종 게임을 즐기곤 하면서, PC로도 <7번째 손님>이나 <미스트> 같은 게임도 플레이를 했지요. 이후에 1999년이 되어 제가 밀워키에 있는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첫 강의를 하게 되었을 때, 한 학생이 일본 게임을 소개해줘서 흥미를 가지게 됐어요. 그래서 플레이스테이션과 게임 여러 개를 구매하게 되었는데, 특히 <파이널 판타지 9>을 열심히 플레이 했습니다. 이후 그 학생과 저는 게임에 대한 논문을 몇 편 접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치팅(cheating)과 게임에 대한 제 연구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죠. 콘살보 교수가 답변 말미에 언급한 연구작업이란 저서 『 Cheating: Gaining Advantage in Videogames』를 의미한다. 그 외에도 일본 게임에 대한 경험은 이후 또 다른 저서인 과도 연결되고 있다. 이어서 팬데믹 상황으로 인한 근황에 대해서 질의하였다. 질문: 작년은 우리 모두에게 힘든 한 해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게임은 언택트 여가활동으로 많은 주목을 받기도 했죠. 선생님께서도 게임을 플레이하셨는지요? 플레이하셨다면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게임이 있을까요? 코로나 팬데믹은 어떤 식으로 선생님의 게임 생활에 영향을 미쳤을까요? Consalvo: 작년 한 해는 정말 힘든 시간이었고, 게임은 시간을 때우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만나고 창의적인 활동을 하고 겨루고 긴장을 푸는 등 여러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저도 작년에 꽤 많은 게임을 플레이했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거의 싱글플레이 위주로 게임을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하는 방식으로 게임을 활용하지는 않았습니다(그렇지만 몇몇 친구들과 <디아블로>를 플레이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적은 있습니다). 가장 재미있게 플레이했던 게임은 롤플레잉 게임 <디스코 엘리시움>이었어요. 스토리와 메카닉 디자인 뿐 아니라 목표를 달성하는데 있어 전투 일변도에서 벗어나 다양한 기술들을 제공했다는 점이 매우 좋았습니다. 또 가장 감동적이었던 게임으로는 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가 스텔라라는 이름의 소녀가 되어 망자들을 배에 태워 사후세계로 무사히 인도하는 게임입니다. 망자들이 사후세계로 떠나기 전 플레이어는 그들과 함께 여러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는데, 이로써 망자들은 마침내 자신의 죽음과 생의 종결을 받아들이게 되죠. 정말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게임이에요.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자신의 페이스에 맞춰 진행할 수 있고요, 주어진 퀘스트들은 게임의 분위기와 주제와 아주 잘 어우러집니다. 스토리, 아트, 사운드, 음악 등등 모든 것이 다 훌륭합니다. 가끔 슬프기도 하지만, 재밌고 신나는 일도 있지요. 저는 동료들과 함께 이 게임에 대한 논문을 썼고요, 7월 초에 열릴 Games for Change festival에서도 이 게임에 대한 발표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이와 같은 답변을 콘살보 교수의 학술 활동의 기반이 직접 플레이한 경험에 놓여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저서 에서 보여준 북미 게이머 커뮤니티 및 그 문화에 대한 심도 있는 통찰력의 근간이 바로 그 지점에 있었던 것이다. 눈여겨 볼 만한 지점이라 생각된다. 이어서 콘살보 교수의 학술적 관심사와 북미권의 게임 현황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질문: 교수님께서는 주로 게임문화에 대한 연구를 해오셨는데요, 그래서 북미의 게임문화에 대해서 여쭙고 싶습니다. 한국의 경우 게임의 산업적 발전 수준에 비해 그 문화적 위상은 상당히 낮은 편입니다. 예를 들어 WHO가 게임이용장애에 질병코드를 부여한다는 결정이 이루어졌던 시점에 한국 게임업계와 게이머 커뮤니티는 "게임은 문화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대대적인 캠페인에 나선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노력에 비해 실질적인 효과는 별로 없었습니다. 게임에 대한 오랜 편견의 벽이 여전히 견고했던 것이죠. 그래서 관련 업계와 학계는 이러한 상황을 바꿔보고자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북미의 경우에도 1990 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발생했던 일련의 학교 총기난사 사건으로 말미암아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게임의 역사나 문화에 대한 논문이나 저서들이 연달아 발간되고 있는 걸 보면 북미 사회에서 게임에 대한 인식에 모종의 변화가 있는 것 아닐까 생각됩니다.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Consalvo: 1990 년대에 비하면 북미에서 게임은 확실히 보다 분화의 일부로서 수용되고 있는 분위기라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찍혀있던 낙인을 완전히 털어냈다고 할 수는 없지요. 언급하신대로 이 낙인은 총기난사 사건과 연관되는데, 최근 몇년 간 그러한 대규모 총기난사 사건이 별로 발생하지 않았어요. 팬데믹 영향으로 학교가 운영되지 않았으니까요. 오히려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좋은 방법으로서 게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지요. 팬데믹 상황이 지난 후 사회가 원상복귀 되어도 이러한 변화가 지속될 지 흥미롭게 두고 볼만한 부분입니다. 제 생각에 현재 북미에선 그 어느 때 보다 많은 사람들이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가운데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게이머'라고 인식하지 않지만 그걸로 충분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든 <콜 오브 듀티> 최신작을 플레이하든 게임을 하는 것에 대한 인식 자체에 이미 많은 변화가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전통적으로 북미의 게임에 대한 편견은 한국의 그것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강력한 편이다. 게임 및 게임을 플레이하는 아케이드 같은 장소들에 대해 공중위생적으로나 사회문화적으로나 깨끗하지 못하다는 낙인이 강력하게 찍혀있었기 때문이다. 다소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미국 메사츄세츠주의 마쉬필드라는 도시에서는 2014년에서야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이 허용되었을 정도다(물론 법적으로 금지되어있었다고 해서 이 지역 사람들이 수십년간 전혀 게임을 하지 않았을 거라 단정하기는 어렵다. 중요한 사실은 1982년 해당 법령이 시작된 이래 1994년과 2011년 두 번에 걸쳐 게임 금지 법령을 뒤집으려 했지만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스스로를 게이머라고 인식하지 않는 보통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게임을 하고 있다는 콘살보 교수의 관찰은 분명 게임이 대중적인 일상에 스며들었다는 방증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콘살보 교수는 팬데믹 후에도 비슷한 분위기가 이어질 지에 대해서는 살짝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면서도 대체로 팬데믹 현상이 게임이 대중화되는데 있어 유효한 변인이 되고 있다는 의견을 보였는데, 한국에서는 팬데믹과 게임 간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일지에 대해 고민해보게 되는 부분이었다. 게임의 이용시간이나 결제액수는 늘었지만, 그것으로써 하나의 여가활동으로서 대중성을 획득한 것으로 볼 수 있을까. 이어서 북미 게임학 연구의 현황에 대해서도 질의하였다. 북미권의 게임학 연구는 한국 연구자의 입장에서 볼 때 부러운 면이 없지 않은데, 왜냐하면 한국의 경우 2010년대 이후 인문사회학적 게임연구의 동력이 크게 떨어진 반면, 북미권에서는 꽤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질문: 이번에는 북미 게임문화 연구 현황에 대해서 말씀 나눠보겠습니다. 우선 한국의 상황에 대해 말씀드려보자면, 제가 대학원에서 처음으로 게임학 연구라는 것을 접했던 2000년대 초중반은 <리니지>나 <미르의 전설> 같은 게임들이 한국 뿐 아니라 중국 등에서도 많은 인기를 얻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이에 고무된 정부가 게임 부문에 대한 투자를 늘리면서 관련 연구분야에 대한 지원도 확대하였지요.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저도 이 때 정부 지원으로 DiGRA 같은 국제 학술 컨퍼런스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오면서 학계 - 특히 인문사회학 분야 - 에 대한 지원이 크게 줄었고, 이후 인문사회학적 게임연구는 정체되고 있는 분위기 입니다. 또한 학부에서 게임 전공을 제공하는 경우도 많긴 하지만, 대개는 실용적인 기술을 가르치는데 그치고 있습니다. 인문사회학적 게임학에 대한 커리큘럼을 제공하는 대학원은 극소수구요. 관련 학술지들 또한 산업/기술적인 분야를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한국에선 현재 인문사회학적 게임연구의 구심점이 없는 셈이지요. 한편, 제 기억으론 오픈형 온라인 게임연구 저널 Gamestudies.org가 2001년에 개설되었고, 전문학술지 Games & Culture는 200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는데, 제 생각엔 이러한 학술지들이 영미/서구권에서 게임학 연구의 중요한 구심점이 되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관련 부문에서 학술서 출간도 활발하구요(예를 들어 MIT Press의 플랫폼 시리즈나 플레이풀 씽킹 시리즈 등). 그래서 제 생각엔 서구/영미권의 게임학 부문은 꽤 잘 운영되고 있는 듯한데, 교수님 생각은 어떠실지 궁금합니다. Consalvo: 인문사회학적 게임연구는 지속적으로 성장세인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지원을 구하는 것은 언제나 힘든 일이지요. 대학은 여전히 양적 연구를 하는 연구자를 원하고 있고, 미국의 경우 여러 펀딩 에이전시들, 특히 금전적으로 큰 지원을 해줄 수 있는 에이전시들이 사회과학이나 양적 접근을 선호합니다. 그러니까 질적 연구 또는 인문학적 연구를 하는 것이 가능하긴 하지만, 대개의 경우 좀 더 힘이 든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캐나다의 경우 상황이 조금 나은 편인데, 대부분의 공적 펀딩 에이전시들과 여러 대학들이 인문학적 연구에 호의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향이 유지되길 바랄 뿐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갈수록 보다 많은 연구자들이 DiGRA나 Game Studies.org 같은 곳(주: 게임 전문 학술 대회나 학술 저널)에 참여하기 보다는, 자신들이 속한 학문 분야의 학술 저널에서 활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연구자들이 테뉴어를 받거나 진급해야 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납득이 가는 현상이긴 한데, 다른 한편으론 게임학 연구들이 갈수록 고립되어가는 현상일수도 있겠습니다. 게임에 대한 고유한 학문 영역의 필요성에서 기인했던 게임학 연구는 현재 다양한 분야에서 다소 산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반드시 게임학 연구의 정체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 오히려 게임에 대해 연구하는 분야가 다양해지면서 양적/질적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임 전문 학술 저널이나 컨퍼런스 보다는 각자 개별적으로 소속된 연구 분야에서 게임을 연구하는 경향이 학계에 소속된 연구자들의 진급과 연관이 있다는 현실은, 게임학 연구 분야의 식민화를 염려했던 초기 게임학 연구자들의 우려가 상기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이미 구축된 이론이 탄탄한 타 분야에서 게임을 연구함으로써 연구의 질적 향상이 고양될 수는 있겠지만, 그 중심축이 '게임'에 놓여있는 게임 고유의 연구 영역이 구심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게임 연구는 늘 타 학문 영역의 주변부에 머물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콘살보 교수의 지적은 게임학의 미래와 관련해서 고민해볼 만 한 문제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업계와 학계간 소통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져보았다. 한국에서는 학문적 성취 - 특히 인문사회학적 연구 - 가 업계가 게임을 만들고 판매하고 관리하는데 있어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드문데, 북미에서는 어떠한 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Consalvo: 업계와 학계간의 소통과 교류가 분명히 있긴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날 게임업계는 굉장히 크고 다양하기 때문에 소위 "업계"가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한 것을 배우고 인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가 바로 GDC 같은 곳인데, 저의 경우 지난 몇년 간 참석을 하지 못했습니다. 캐나다에선 일부 연구자들이 업계 종사자들과 작업적으로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도 한데, 개발사들이 즉각적으로 필요한 기술을 제공하는 컴퓨터 그래픽이나 AI 개발분야에 비하면 그와 같은 교류나 관계는 항상 소수인 편이죠. 근본적으로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지만, GDC와 같은 행사가 업계와 학계간 소통에 있어 중요한 매개가 될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국내에서도 지스타나 NDC 등의 행사가 있는데, 이런 기회를 통해 업계가 보다 다양한 학계와의 '스킨십'을 넓혀갈 필요성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다음으로는 좀 욕심을 내서 한국의 게임에 대한 북미인들의 인식에 대해 물어보았다. "두 유 노우 BTS?"" 같은 류의 질문으로 받아들여 질까봐 조심스러웠는데, 이 질문은 사실 한국의 게임에 대한 외부자의 시선을 통해 우리 자신을 좀 더 넓은 시각에서 바라보자는 취지에서 던진 질문이었다. 질문: 이번 질문은 한국의 게임에 대한 북미권의 인식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외부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니까요.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2000년대 초중반은 한국의 온라인게임 붐이 서구에서 화제가 되곤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아직 온라인 플랫폼이 글로벌하게 구축되어 있던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죠. 서구에서 한국을 찾아온 몇몇 연구자나 기자 등이 24시간 게임방송만 내보내는 게임 전문 방송 채널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스타크래프트>를 무슨 캐주얼 게임 마냥 즐기고 있는 PC방 같은 곳을 보면서 신기하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한국인들이 게임을 하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였지만, 한국이 게임으로 글로벌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이 때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로부터 이십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는데요, 그래서 한국의 게임산업과 문화가 국경 바깥에선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Consalvo: 제가 명확하게 그 과정을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여기(북미)에서 한국의 게임문화와 관련해서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것은 아마도 e스포츠의 인기일 것입니다. e스포츠의 기원이 북미인지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나 <리그 오브 레전드>같은 게임으로 e스포츠가 엄청나게 성장한 것을 확실해 보입니다. 이는 국제적인 경기를 통해 한국인 플레이어들의 뛰어난 기량(과 보다 긴 역사)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졌습니다. <스타크래프트> 같은 게임은 그러한 측면에 분명 많은 기여를 했지요. e스포츠가 한국의 게임과 게임문화에 대한 지속적인 주목을 끄는 분야 중 하나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불행한 일이지만 이러한 부분은 한국인 플레이어들에 대한 인종 차별 사건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e스포츠 분야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들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연구로 이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사실 게임의 역사에 있어 한국의 비중이나 영향은 아직까지 제대로 연구된 바가 없다. 분명한 사실은 2000년대 들어와 온라인 플랫폼의 비중이 가파르게 증가하는 가운데서 한국의 게임이 세계 게임 산업과 문화에서의 비중을 크게 늘려왔다는 것이지만, 이에 대한 담론이 늘 국내에서만 맴도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한 가운데 e스포츠가 서구/영미권에서 한국과 관련하여 많이 회자되는 부문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인종차별의 문제가 e스포츠 관련 연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콘살보 교수의 진단은 북미인(이자 게임문화 연구자)의 시각이었기에 가능한 부분일 것이다. 이는 한국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e스포츠 분야이기에, 북미(를 비롯한 서구)권에서 e스포츠가 인종차별 문제를 진단하고 극복 방안을 논의할 수 있는 영역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또한 e스포츠과 관련해서 종주국 논쟁 등 다소 국수주의적인 성격을 띄거나 산업적 가능성에만 한정되는 국내 게임 담론에 있어, 콘살보 교수의 제안은 게임 문화 연구의 측면에서 e스포츠의 역할(또는 가능성)을 짚어준 것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다시 일상적인 질문으로 돌아와 한 명의 게이머로서 콘살보 교수의 게임플레이와 북미 게임 이슈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다. 질문: 딱딱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 게이머로서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여쭙고 싶습니다. 저도 한 때는 밤새도록 동료들과 아제로스를 누비곤 했습니다만, 최근에는 야심차게 시작했던 X박스 게임패스 구독을 정지해야 했습니다. 도대체 플레이할 시간이 나질 않더라구요. 명색이 게임연구자인데, 제 일상 속에 게임을 배치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거죠.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Consalvo: 저의 경우 게임플레이는 비정기적으로 이루어지곤 합니다. 몇 주에 걸쳐 매일 같이 수시간을 게임을 플레이할 때도 있고, 다른 때에는 전혀 못하기도 해요. 제 스케줄과 하고 싶다는 동기 여부에 따라 달라지죠. 현재 저는 지난 해에 출시된 DLC를 플레이하기 위해 를 다시 플레이하는 중입니다(저는 롤플레잉 게임팬인데, 이 게임의 개발자들은 제가 진짜 좋아하는 시리즈인 <폴아웃>을 만들었던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스토리 중심의 도 플레이 중인데, 여기서 플레이어는 안드로이드가 되어 다른 안드로이드들을 조사해서 일탈자를 색출하고 그들을 불량품으로 처리할 지 결정해야 하죠. 저는 윤리적 딜레마를 다루는 게임에 관심을 가지고 있구요,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새롭게 다루는 게임들을 접하는 게 즐겁습니다. 한편 한 명의 게이머로서 북미에서 벌어지고 있는 게임 관련 이슈 중에서 어떤 것에 관심이 있을지 궁금했다. 질문: 북미의 게이머로서 가장 흥미로운 이슈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한국의 경우엔 랜덤박스가 아주 큰 이슈입니다. 게임사들이 확률 공개에 미온적으로 대응하면서 게이머들이 트럭시위를 벌일 정도였지요. 미국에서는 어떤가요? Consalvo: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랜덤박스 문제가 이슈가 된 적 있지만, 특히 많은 이목이 집중되었던 문제는 에픽과 애플 간에 벌어졌던 다툼이었습니다. 두 거대 기업이 보다 많은 수익 비중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가운데 누가 진짜 피해를 보고 있는지 확실히 파악하기는 어려운 이슈였죠. 작년 같은 경우에 게임과 관련해서 가장 많은 주목을 끈 문제는 팬데믹 동안 게임을 통해 사회성을 어떻게 증대시킬 수 있을 것인가였어요. 그 전에는 온라인게임에서 벌어지는 각종 유해한 상황들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요. 이제 마지막 요청입니다. 이제 막 시작된 저희 게임 제너레이션을 위해 한 마디 부탁드리겠습니다! Consalvo: 새롭게 창간된 게임 제너레이션의 창창한 앞날을 기원합니다! 오늘날 우리 삶의 필수적인 요소로서 게임에 접근하는 시각이 증가하는 건 언제나 신나는 일입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연구자) 나보라 게임연구자입니다. 게임 플레이는 꽤 오래 전부터 해왔지만, 게임학을 접한 것은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 우연히 게임 수업을 수강하면서였습니다. 졸업 후에는 간간히 게임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연구나 저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게임의 역사>, <게임의 이론>, <81년생 마리오> 등에 참여했습니다.

  • 노년게이머에에게 경외와 동료애를 - 그레이게이머 연구의 필요성에 대하여

    <리그 오브 레전드>가 처음 들어와 국내에서 조금씩 바람을 일으키던, 아직 프로씬은 만들어지기 전이었던 그 시절 전국구 고수로 이름을 떨치던 사람 중에는 ‘황충아리’라는 게이머가 있었다. 챔피언 ‘아리’ 장인으로 유명한 그였지만 ‘아리장인’ 보다 그는 ‘황충아리’로 더 이름을 떨쳤는데, 이유는 그가 노장 게이머였기 때문이었다. ‘삼국지연의’에서 노장 캐릭터로 유명한 황충의 이름이 그에게 붙었지만, 그의 당시 나이는 겨우 30대 중반이었다. < Back 노년게이머에에게 경외와 동료애를 - 그레이게이머 연구의 필요성에 대하여 02 GG Vol. 21. 8. 10. 나이들면 게임하기 어려운가? <리그 오브 레전드>가 처음 들어와 국내에서 조금씩 바람을 일으키던, 아직 프로씬은 만들어지기 전이었던 그 시절 전국구 고수로 이름을 떨치던 사람 중에는 ‘황충아리’라는 게이머가 있었다. 챔피언 ‘아리’ 장인으로 유명한 그였지만 ‘아리장인’ 보다 그는 ‘황충아리’로 더 이름을 떨쳤는데, 이유는 그가 노장 게이머였기 때문이었다. ‘삼국지연의’에서 노장 캐릭터로 유명한 황충의 이름이 그에게 붙었지만, 그의 당시 나이는 겨우 30대 중반이었다. 일반적인 사회문화에서라면 창창한 나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시원치 않을 30대 중반이 ‘황충’이라는 별명을 달고 살게 되는 곳이 게임공간이다. 이는 편견이나 농담이 아니라 일정 부분 사실에 가깝다.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임요환 선수가 갓 제대했을 즈음 이야기한 목표가 ‘30대에도 프로게이머로 살아남겠다’ 였고, 수많은 프로게이머들이 20대 중반만 지나도 신체적인 한계를 느낀다며 은퇴를 선언하는 경우를 우리는 심심치 않게 보곤 한다. 이렇게 보면 게임이라는 매체는 확실히 젊은이들의 공간인 것 같다. 그러나 또 고개를 돌려 보면 꼭 피지컬만이 게임의 전부는 아니라는 점도 생각해봐야 한다. <심시티>를 하는 데 동체시력과 반사신경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아니 심지어 신체적인 반응능력이 정말 좋아야 하는 <철권> 의 영원한 황제 ‘무릎’ 배재민 선수는 2021년 기준으로 36세고, <스트리트 파이터>로 EVO 2003에서 전설적인 명경기를 만들어냈던 우메하라 다이고는 올해 나이로 마흔을 넘겼지만 여전히 현역 게이머로 활동중이다. 격투 게임과 RTS 같은 장르 안에서의 피지컬 문제를 일일이 따지기는 어렵겠지만, 디지털게임이 상당부분 신체적인 능력치를 요구하는 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모든 게이머가 나이가 들었다고 게임으로부터 멀어진다고만 보기도 어렵다. 그레이게이머의 두 가지 의미 전자오락이라는 이름으로 디지털게임 문화가 한국에 처음 등장한 1970년대 말로부터 계산해보면 어느새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80년대 오락실에서 동전 하나로 몇 시간을 쓸 수 있을지를 고민하던 꼬마 아이들은 이제 중장년의 나이가 되었고, 20대에 담배연기 자욱한 오락실 안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갤러그>로 시간을 때우던 청년들은 어느새 노년의 초입에 접어들었다. 1980년대 오락실에 앉아있던 20세 청년인 1960년생은 올해부터 60세를 넘기며 인구통계학적으로 노년의 범주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반세기라는 시간의 흐름은 한동안 우리에게 일종의 고정관념이었던 어떤 부분에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게임은 애들이나 하는 무언가라고 생각했던 순간은 어느새 훌쩍 지나가버렸다. 노년 세대라면 그저 ‘하여간 요즘 것들은 게임 같은거나 하고’라고만 영원히 말할 것 같았지만, 이제는 <테트리스>와 <팩맨>, <갤러그>를 즐기던 오락실 세대가 노년의 범주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중장년을 생각한다면 이 변화는 좀더 성큼 우리에게 다가온다.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가 출시되었을 때 아이들에게 빌드오더를 가르치는 부모와, 과거의 추억으로 <리니지>에서 혈맹 뛰던 이야기를 나누는 4-50대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만나보는 시대를 맞았다. 그레이게이머greygamer라는 말의 첫 번째 의미는 그렇게 게임과 함께 나이를 먹어 온, 좀더 경의를 붙여 표현하자면 ‘인류 최초의 디지털게임 세대’라고 일컬을 수 있는 어떤 세대를 담는다. 초창기 디지털게임의 역사를 문헌이 아니라 자신의 플레이로 겪은 노년 세대의 등장은 노년층을 이른바 ‘겜알못’으로 부를 수 있는 시기가 끝나감을 보여주는 단서다. 그리고 이는 게이머라는 구분이 더 이상 특정 연령, 특정 세대만의 경험을 기준으로 한 구분이 아니라 전연령대에 걸친 보편적인 경험이면서도 동시에 시대별로 그 양상을 매우 뚜렷한 차이로 갖게 되는 어떤 문화 전반을 통한 구분으로 옮겨가게 만드는 흐름이다. 그레이게이머라는 말이 가진 첫 번째 의미가 이른바 레트로 세대를 가리키는 과거 경험을 향했다면, 두 번째 의미는 디지털 네트워크와 모바일 시대가 열어낸 새로운 환경으로부터 보편화를 시작한 게임저변의 확장으로부터 만들어진 또다른 변화를 향한다. 지하철 안을 둘러보면 이제 쉽게 스마트폰을 꺼내 게임을 하고 있는 노년층을 발견할 수 있는 시대다. 게임하는 노년의 배경은 반드시 유년기의 게임경험을 전제로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뒤늦게 잡아보게 된, 이제는 시대의 필수품이 된 스마트폰으로부터 손쉬운 게임으로의 접근성을 얻게 된 이들 또한 게이머의 이름을 달 수 있게 되었고, 그로부터 두 번째 의미로서의 그레이게이머가 출현한다. 2020년에 코로나 팬데믹 이후의 게임문화연구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직접 심층인터뷰를 통해 만난 노년층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노년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정착하기 시작한 디지털게임 문화의 일면을 보여준 바 있었다. 은퇴한 노년 여성이 주시청자를 이루는 평일 저녁의 지상파 텔레비전 일일연속극 시청은 이제 게임플레이와 섞이기 시작했다. 인터뷰 대상자는 텔레비전을 켜 놓고 TV는 귀로만 들으며 스마트폰으로 간단한 퍼즐 게임을 즐기곤 했다. 어차피 드라마의 진행은 큰 줄기를 벗어나지 않으니 귀로 상황만 들으며 게임에 집중하다가, 드라마에서 중요한 장면이 나오면(대부분의 드라마는 이런 순간에 시청자로 하여금 집중을 유도하기 위해 별도의 음악을 깔거나 배우의 대사톤이 높아지는 등의 포인트를 만들곤 한다) 비로소 눈을 스마트폰에서 텔레비전으로 옮기는 식이었다. 그레이게이머의 존재는 그래서 유년기의 경험을 가진 1세대 게이머로서, 동시대의 게이머로서 나타난다.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산업적으로나 유의미할 수 밖에 없는 이들의 존재는 그러나 현재의 게임담론 하에서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어쩌면 지금의 게이머들보다 더 치열하게 게임했을 그 세대는 정말 이제는 게임과 담쌓고 지내는 것일까? 백발이 성성한 사람이니 당연히 게임을 모를 것이라고 전제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정말 제대로 된 판단인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게이머라는 집단을 너무 좁게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노년 게이밍에 대한 이해는 아직까지 부족하다 노년 게이머의 양적, 질적 증대가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에 대한 인식, 그리고 산업과 제도의 변화는 아직까지 잘 나타나지 않는 편이지만, 서구권에서는 2010년대부터 게이머 노년화에 관한 주목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게임은 젊은 사람들만의 매체라는, 그래서 노년층은 아예 거론되지 않는 고정관념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연구(Facer & Whitton, 2010), 실제로 늘어나고 있는 노년 게이머에 비해 그에 대한 사회적 관심, 산업과 제도의 변화는 크게 뒤쳐지고 있다는 지적(Quandt & Grueninger, 2009)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들 연구 또한 결국 서구권에서도 노년 게이머가 잘 조명되지 않고 있는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점에서 한국이나 서구권 모두 상황은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일부 연구들은 노년 게이밍이라는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는 실제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들과도 유사한데, 이를테면 노년의 게임하는 이유를 치매예방과 같은 신체노화에 대한 기능적 대안으로만 바라보거나(Schutter & Brown), 자녀세대와의 교감만을 위한 용도로 활용된다고 보거나(Pearce, Lee) 하는 기능주의적 접근들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다. 이는 단지 비노년이 노년의 게이밍을 ‘두뇌 트레이닝’의 일환으로 인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노년층 스스로도 ‘늙지 않으려면 고스톱이라도 쳐야지’라고 마음먹는 모습까지를 포함한다. 그러나 이런 기능주의적인 접근만이 실제로 노년층의 게임하는 이유를 다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한국에서도 노년 게이밍에 대한 접근은 주로 기능주의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치매예방을 위한 게임개발과 플레이, 독거노인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게임과 같은 방식은 그러나 한편으로는 게이머라는 큰 범주로부터 노년 게이머를 매우 타자화된 대상으로 분리시켜버리는 시선으로 굳어질 수 있는 우려를 내포한다. 나이가 들어 예전만큼의 반응속도를 낼 수 없어 <다크소울>이 어렵다 할지라도 그가 여전히 <저니>를 하고 있다면,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을 클리어하고 감상에 젖어 있다면, 혹은 과거 동네 오락실에서 <갤러그> 하이스코어 1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본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굳이 우리는 특정 기능의 향상을 위해서만 게임을 만지는 사람으로 분류해야 하는 것인가? 경의와 동료애를 동시에 품을 수 있는 노년 게이머에의 이해를 위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이라는 매체는 보거나 듣는 것만으로도 가능한 수용양식을 넘어 반응이라는 행위를 요구하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기에 분명한 접근에의 장벽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은 사실이다. 2012년에 <리그 오브 레전드>를 곧잘 하던 나는 이제는 방송경기의 리플레이를 봐도 한타싸움이 어떻게 마무리되는지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신체나이에 직면했다. 그러나 그런 장벽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임이 반드시 높은 반사신경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진정한 의미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게이머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음을 생각할 때가 되었다. 아니 다른 의미로라면 오히려 과거 레트로 게임 시절에는 동네 오락실을 휘어잡았을지도 모를, 왕년의 용사들에 대한 경의를 가져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플레이를 통해 완성되는 디지털게임의 경험은 단지 특정한 프로그램을 보존한다고 해서 후대에 그 경험이 온전하게 복원되는 것은 아님을 우리는 여러 고전게임의 리마스터를 통해 겪은 바 있다. 그런 경험을 가진 이들과 함께 그들의 게임경험을 이야기하고, 그 시절의 게임과 플레이어에 일련의 존경을 표하는 것이 ‘치매예방 게임’을 하는 세대로 바라보는 것보다 오히려 노년 게이머를 제대로 이해하는 방식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같은 시대에 살면서 같은 게임을 하고 있는, 인종과 성별로의 구분과 마찬가지로 나이를 통해 누군가를 대상화하려는 어떤 흐름을 넘어서서 게이머로서의 동료애를 품을 수 있는 대상으로 그레이게이머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 점점 더 늘어날 노년층 게이머에 대한 이해와 그로부터 시작될 변화들을 미리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 게이머라면 함께 플레이할 노년 게이머를 이해해야 하고, 게임사라면 늘어나는 노년 게이머들에게 필요한 게임과 인터페이스를 고민해야 하며, 정부와 공공단체라면 변화하는 게임문화 향유층에 필요한 제도와 인프라를 생각해야 할 시기다. 최초의 레트로 게임을 경험한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일 것이다. 디지털게임이 본격적으로 대중문화의 범주에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제 이 매체가 보편적인 모두에게 다가갈 수 있는 매체가 되었다는 의미다. 이 보편성에는 인종과 젠더, 계급과 장애유무 뿐 아니라 연령대라는 요소도 넘어설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보편 대중문화로 외연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노년 게이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한 이유다. * 기네스북 공인 세계 최고령 비디오게임 유튜버 하마코 모리. 2019년 89세로 등재되었다. https://www.guinnessworldrecords.com/world-records/457124-oldest-videogames-youtuber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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