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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서 사랑이 재현되는 두 가지 형태 – 자기애와 애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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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4. 2. 10.



들어가며

     

비디오 게임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루는데 별로 적합하지 않은 매체라는 견해는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사랑을 테마로 하여 다른 예술 장르들은 작중 인물에 대한 감정 이입을 바탕으로 스토리텔링을 진행하는 반면, 게임의 경우 이러한 스토리의 진행 과정을 세분한 뒤 다양한 가능성을 지닌 형태로 만들어 플레이어가 직접 경험하게 만들어준다. 때문에 사랑을 테마로 하는 게임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하나의 운명적 사랑을 결정적 플롯으로 풀어내기보다는 플레이어가 사랑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직접 탐구하는 형태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90년대 이후 일본을 중심으로 제작된 수많은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하 미연시)들은 이 때문에 고정된 스크립트가 아닌 수많은 분기를 가진 가능태로서의 스크립트인 스크립톤이 다수 뭉쳐있는 형태로 개발된다. 이러한 미연시들이 풀어내는 사랑은 각각의 에피소드로만 보면 전형적인 ‘낭만적 사랑’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낭만적 사랑이 한 명의 주인공으로부터 여러 이성을 대상으로 한 복수적인 형태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90년대의 미연시들은 주인공의 바람둥이적인 기질을 성격적으로 반영하기보다는 차라리 기억상실을 시켜 매번의 사랑에 충실하도록 하는 다소 기형적인 스토리텔링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지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이머들이 이러한 형태의 기형성을 큰 거부감 없이 흡수하면서 게임을 즐겼다는 점이다. 게이머의 사랑에 대한 주체적 유연성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주지하다시피 우리는 낭만적 사랑이란 테마가 더 이상 별로 유효하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 극장가에서 정통 로맨스나 로맨틱 코미디 장르는 퇴조한지 오래이며, 사랑이란 현실 속에서 찾아야 할 존재라기보다는 불가능한 대상을 희망하는 판타지의 영역에 머무는 것으로 변해왔다. 회귀, 빙의, 환생을 통해 어떻게든 불가능한 대상과의 합일을 합리화 시키는 웹소설들이 한 발 더 나아간 극단적 서사를 보여준다면, 게임은 서사의 극단성보다는 서사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의 체험을 통해 실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플레이어에게는 사랑이 이루어지는 과정의 리얼리티나 현실성이 중요하다기보다는 그것을 일단 플레이어가 체험하는 것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이 때문에 비디오 게임에서 사랑의 재현은 플레이어의 체험을 절차적으로 재구성하는 형태로 개발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운명적이고 결정적인 플롯을 통한 감정 이입에는 다른 매체가 더 적합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개발자들은 게임 내에서 사랑의 재현을 독특한 형태로 변주시켜왔다. 특히 플레이어가 적극적으로 사랑을 투사할 대상을 다양하게 준비하는 것, 다시 말해 플레이어가 애착을 가질 대상을 다양하게 준비하는 것이 한 가지 방법론이라고 볼 수 있다. 블루아카이브의 김용하 PD가 NDC에서 일찍이 “모에론”을 통해 설파한 바 있지만1), 여동생계/동년배계/누님계로 3분화한 여성 캐릭터들은 그 어떤 성애를 가진 플레이어가 들어오더라도 하나 정도는 얻어걸릴 수 있는 보편성(?)을 획득하는데 주력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게임 개발자들은 낭만적 사랑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최근 경향을 반영하여 자기애를 투영할 수 있는 중성적이면서 목소리 없는 캐릭터와 커스터마이징 시스템을 고안해 내었다. <페르소나> 시리즈나 <젤다의 전설> 시리즈의 주인공은 특별히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대사도 매우 절제되게 발화하는데, 이는 미리 설정된 캐릭터에서 빚어질 수 있는 감정 이입을 최소화하고, 캐릭터는 나 자신으로 간주하는 일종의 자기애가 투여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커스터마이징 시스템 역시 캐릭터의 외양을 플레이어가 스스로 꾸밀 수 있도록 하면서 자기애를 부추긴다. 물론 플레이어에 따라 본인 모습과 유사하게 꾸미는 경우도 있고, 이상형의 이성을 상정하기도 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디자인하기도 하지만 이 캐릭터를 직접적으로 움직이면서 그러한 다양한 외관을 향한 감정이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향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자기애’와 ‘애착’라는 키워드를 바탕으로 최근 게임들에 재현된 사랑의 주체화 과정을 간단히 분석해 보고자 한다.

     


2. 페르소나와 자기 치유의 메커니즘 - <페르소나> 시리즈

     

아틀러스 사의 <페르소나> 시리즈는 <여신전생> 시리즈의 스핀오프 형태로 1996년부터 출시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인기 시리즈 게임이다. <여신전생> 시리즈가 염세적인 아포칼립스 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악마들과의 다툼을 다룬 판타지 게임이라면, <페르소나> 시리즈는 <여신전생> 시리즈로부터 많은 설정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악마와의 다툼을 캐릭터 내면의 문제로 치환시킨다. 또한 학원물 형태로 진행되면서 <여신전생> 시리즈에 비해 훨씬 더 밝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 게임에서 ‘페르소나’는 C.G.융의 분석심리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임과 동시에 게임 속 캐릭터의 내면에 응축된 억압된 자아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게임에서 페르소나는 캐릭터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신을 실체화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   <페르소나 4>의 주인공 스케치

     

이 시리즈에서 주인공은 늘 구체적인 이름이 정해져 있지 않고(미디어 믹스 형태로 만들어진 애니에서는 주인공의 이름이 구체화되기는 한다), 다른 캐릭터들이 화려한 성우진의 목소리로 꾸며지는 반면 주인공의 목소리는 전면화되지 않는다. 왜 이렇게 주인공 캐릭터를 중성화하고 목소리를 넣지 않는가에 대한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어느 누가 플레이를 하더라도 주인공을 마치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각 작품마다 줄거리는 좀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페르소나> 시리즈의 주인공은 스스로의 페르소나를 각성한 이후 주변 인물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들의 내면을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게 된다.


예를 들어 <페르소나 4>에서 주인공은 아마기 유키코라는 같은 반 여학생의 페르소나와 마주치게 된다. 이나바 시의 고급 여관집 외동딸인 유키코는 여관의 차기 후계자로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으며, 학교에서도 정숙한 모범생으로 통하고 있다. 그러나 성격이 굉장히 내성적이어서 같은 반 친구 치에를 제외하면 다른 사람과 잘 대화를 하지 않는 소극적인 면모도 보인다. 유키코에게 여관을 물려받아야 하는 정해진 운명은 질곡과 억압으로 작용하여 그녀는 역헌팅을 하러 다니는 유키코 공주로 TV속에서 등장한다. <페르소나 4>에서 TV는 특정한 캐릭터의 본성이 드러나는 가상의 무대로 주인공이 TV 속으로 들어가 문제가 발생한 캐릭터의 본성이 만들어 낸 가상의 공간 속에서 그와 다투게 된다. 유키코의 공주의 성에서 그녀의 본성을 해방시키면 그녀는 자신이 억눌러왔던 어두운 측면을 인정하고 페르소나를 각성시키게 된다.

     

* <페르소나 4> 아마기 유키코의 캐릭터 일러스트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형태의 페르소나 각성 과정이 다양한 인물 군상을 통해 여러 번 반복된다는 점이다. 유키코보다 보다 명랑쾌활한 치에나 화려한 아이돌 활동 속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바라봐주길 바라는 리세, 겉으로는 덩치가 크고 불량한 캐릭터이지만 동성애 기질이 있고 섬세한 측면이 있는 칸지, 하드보일드한 남자 탐정을 동경하는 나오코 등은 게임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타자이지만 실제로 그 중 하나 정도는 실제 플레이어의 삶과 유사한 측면을 발견할 수 있는 “나”의 면모들이기도 하다. 그들의 트라우마가 주인공을 통해 치유되는 과정을 극복해내고 친구들과 관계가 심화되면서 플레이어는 마치 자신의 트라우마가 조금씩 치유되는 것 같은 느낌을 맛보게 된다. <페르소나> 시리즈를 둘러싼 이러한 자기 치유의 메커니즘은 비디오 게임의 매체적 특성과도 제법 잘 어울린다.


비단 <페르소나> 시리즈뿐만 아니라 다른 게임에서도 이러한 형태의 다양한 인물군을 제시하고 그 중 마음에 드는 캐릭터와 연결되게끔 하는 방식은 상당히 자주 사용된다. 이러한 과정은 겉으로는 플레이어의 이상형 찾기로 귀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과정 속에 상당한 자기 치유 과정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는 금세기를 전후하여 소설의 독자와 영화의 관객이 게임의 플레이어로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타인과의 사랑을 갈망하기보다는 자기애를 더욱 내면화하는 과정 속에서 유저들의 주체성이 변화해 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3. 계량화된 사랑과 수치화된 외모 – 수집형 게임의 메커닉

     

사실 <페르소나 시리즈>는 일반적인 게임에 비하면 상당히 고도화된 스토리텔링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에, 일반적인 게임의 사랑 재현 양상이라고 간주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특히 최근작 <페르소나 5>에서는 악인처럼 설정된 가면 속 주인공이 타락과 구원을 반복해가는 과정을 통해 일종의 피카레스크 식 구성을 선보이기도 하는 등 스토리텔링 과정에 고심한 면모를 보여준다. 모든 게이머가 고급스런 스토리 전개 과정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게임 개발자들은 스토리의 전개 과정을 간소화시키고 량화시킨다.

     

* <우마무스메> 캐릭터의 일러스트와 능력치    

     

개발자 입장에서는 고전적인 형태의 낭만적 사랑이 퇴조한 시기를 채운 자기애의 투사 과정을 굳이 떠올릴 필요가 없다. 이미 자기애 세대의 플레이어들은 카드 한 장에 그려진 일러스트와 능력치만으로 캐릭터를 평가할 준비가 되어 있다. 카드 뒷면에 구구절절 적힌 캐릭터의 전사(前史)는 읽지 않아도 무방한 거추장스러운 것이 된다. 본래 게임에 사용되는 카드는 다양한 배경과 상징을 내재화한 게임 내용물이지만, 그것이 도구적으로만 활용될 때 이는 수치화된 의미를 넘어서지 못한다. <우마무스메>나 <포켓몬>으로 상징되는 수집형 게임의 메커닉에는 복잡한 스토리를 대체하는 일러스트와 캐릭터의 상성, 능력치, 기술 등의 수치적 특성만으로도 그 본질이 치환될 수 있다는 믿음이 내재되어 있다.


캐릭터에 대한 애착(attachment)은 단순한 사랑의 방식이 아니다. 여기에는 애착의 대상인 캐릭터가 절대 연애의 주체성을 드러내서는 안 되며, 플레이어를 만족시킬만한 일러스트와 계량화된 수치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포함된다. 즉, 게임 내에서 플레이어가 가지는 애착의 대상은 살아있는 주체적 인간보다는 캐릭터에 가까운 무언가로 정의되게 된다. 아즈마 히로키 식으로 말하자면 그 캐릭터의 외양은 특정한 형태의 모에적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에 의해 조합되며, 그 캐릭터의 능력치는 적절한 비즈니스 모델을 유발할 수 있을 정도로 희소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수집형 게임을 플레이 할 때 우리는 언제나 산뜻한 기분으로 카드들을 뽑고 포켓몬을 수집할 수 있게 된다. 말의 외양만 보고 모든 플레이어가 그 말에 애착을 가질 가능성은 줄어드니, 모에화된 여성 캐릭터를 달리게 하면서 손쉽게 애착을 형성하는 과정 속에서 플레이어는 매우 손쉽게 애착을 형성할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은 매우 간편하며, 매우 감사하게도 명목상 무료이다. 그러나 그 애착 과정을 좀 더 극대화하기 위해 억만금을 투자하더라도 카드로부터 구체적인 사랑을 얻게 되지는 못할 뿐이다.




1) http://ndcreplay.nexon.com/NDC2014/sessions/NDC2014_0015.html#k%5B%5D=%EA%B9%80%EC%9A%A9%ED%9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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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순천향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게임 스토리텔링과 게임 디자인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인디게임 페스티벌인 부산인디커넥트페스티벌 창설을 주도하고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다.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인디게임 행사인 Independent Games Festival(IGF) 심사위원이기도 하다. 저서로 『디지털 스토리텔링』(공저, 2003), 『디지털 게임, 상상력의 새로운 영토』(2005), 『인디게임』(2015), 『이야기, 트랜스포머가 되다』(공저, 2015), 『81년생 마리오』(공저, 2017), 『게임의 이론』(공저, 2019), 『게임은 게임이다: 게임X생태계』(공저, 202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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