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언트 하츠>, 전쟁은 이기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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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5. 8. 10.
전쟁은 분명 가장 문명화된 야만이 아니겠는가. 이 막대한 규모의 전방위적 파괴 행위는 실상 비이성적이고 원초적인 욕망에서 기인하지만, 누구보다 절실하게 이성과 논리를 동원하는 영역이다. 파괴의 명분을 만들고 설득해야 하며, 더욱 강력한 파괴를 위한 기술을 개발해야 하고, 효과적인 파괴를 위한 전략과 전술을 연구해야 하는 모든 과정에서, 인류를 다른 동물과 구분한다는 이성과 논리는 줄곧 다른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원초적 욕망의 시중을 들어왔다. 때문에 전술가들은 으레 전쟁을 냉정하고 계산적인 영역이라 여겨왔지만, 오랜 세월 동안 인류가 이러한 비문명적인 파괴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애쓰며 이성과 논리라는 포장지를 사용해왔다는 역설은 전쟁을 흥미롭게 만드는 부분 중 하나다.
이러한 전쟁과 게임이 손을 잡은 것은 오래된 일이다. 처음부터 이성과 논리라는 포장지를 사용하기 위해 게임을 필요로 했던 것은 전쟁이었다. 인류는 테이블 위 게임판이 실제 전쟁의 현실을 대신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게임에는 논리적인 규칙이 있고, 이성적인 전략을 만들 수 있으며, 승리 또는 패배라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으니. 전쟁은 게임의 결과를 현실에도 적용할 수 있길 바랐고, 게임은 지금까지도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전략성이라는 영역의 유구한 전통을 얻었다.
그렇기에, 전쟁과 게임은 분명 교감하는 부분이 많을 수 있고, 전쟁을 다루는 게임이 전략성을 물심양면 활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거대한 지도 위에서 펼쳐지는 군사 전략 장르뿐 아니라, 개인의 눈으로 전장을 바라보는 FPS 장르 역시 플레이어가 전략성을 발휘할 것을 적극적으로 요구한다. 수치상으로 죽지 않을 만큼의 피해를 입고, 적 유닛을 제거하고, 효율적인 동선을 구상할 것. 이를 통해 달성되는 목표는 대개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또는 그렇게 믿으며 해당 임무를 플레이하는 것)이다.
묘사되는 상황이 아무리 혼란스럽고 격렬하더라도, 그 안에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행하는 행위는 꽤나 냉정하고 계산적이며, 이를 얼마나 잘 수행하는지에 따라 플레이어가 얼마나 유능하게 목표를 달성하는지 평가된다. 그렇다면 전쟁과 게임이 서로를 활용하는 이 고전적인 교감을 벗어났을 때, 전쟁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어떤 경험을 제공할 수 있을까?
목적: 어떻게 끌어들일까?
아무 OTT 플랫폼에 접속해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차례로 검색해 보자. 2차 세계대전이 전쟁 콘텐츠의 클래식, 대명사로 자리 잡은 반면, 1차 세계대전은 몇몇 명작을 남긴 사례를 제외하면 2차 세계대전만큼 많은 콘텐츠를 찾아보긴 힘들다. 서구 유럽을 벗어난 문화권에서는 2차 세계대전에 비해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다는 측면도 있지만, 콘텐츠로써도 2차 세계대전이 가진 비교적 편리한 이점이 있다. 명확한 악역과, 이에 근거한 명쾌한 당위성.
추축국으로 상징되는, 파시즘이라는 명확한 악당이 있는 2차 대전에 비해 1차 대전은 그 증오의 대상이 명확하지 않다. 각자의 민족과 국가를 수호한다는 당시의 명분은 자국민들에게 전쟁 참여를 독려할 수는 있었을지 몰라도, 한 세기가 지난 현대의 대중들에게 호소력을 갖진 못한다. 그러나 콘텐츠의 관객들에겐, 특히나 직접 행동해야 하는 플레이어들에게는 행동의 명확한 목적과 명분이 필요하다.
<발리언트 하츠 Valiant Hearts>시리즈는 두 편에 걸쳐 1차 세계대전의 현장과 여기에 참여하는 병사들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플레이어에게 연합국 또는 동맹국 편에 서서 싸울 것을 주문하지 않는다. 대신 목적성이 결집된 하나의 구체적인 대상을 게임 초반에 제시하며 플레이어들에게 동기를 부여한다. 본 도르프는 독일군 지휘관이라는 위치 때문이 아닌, 그 인간 자체로 주인공들의 표적이 된다. 미국인인 프레디가 프랑스 군에 자원한 이유는 폭격으로 아내를 죽인 본 도르프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다. 프랑스 병사인 에밀이 본 도르프를 추적하는 이유는 독일군에서 복무하는 사위 칼을 찾기 위함이며, 벨기에 출신 수의대생이었던 안나는 본 도르프에게 납치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이들의 여정에 합류한다.
일종의 욕받이를 설정한다는,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방식으로 <발리언트 하츠>는 사실상 첫 시리즈 대부분의 분량 동안 플레이의 동력을 제공한다. 챕터가 끝날 때마다 본 도르프와 보스전을 치르기도 하고, 때로는 이리저리 먼 길을 돌아가면서도 본 도르프의 행방을 알아내고 그를 추격한다는 굵직한 목표가 내내 유지된다. 이는 플레이어들에게 자연스럽게 본 도르프에 대한 승리, 플레이어의 성향에 따라 더 나아가서는 그에 대한 승리를 곧 독일군 전체에 대한 상징적인 승리로 확장하는 대략적인 승리의 이미지를 그릴 수 있게 만든다.
역설적이게도, 이 과정에서 때로는 ‘대체로’ 아군인 프랑스군이 방해가 되기도 하고, ‘대체로’ 적군인 독일군이 친구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본 도르프가 필요한 이유는, 주인공들의 싸움이 전쟁 자체와 언제나 교묘하게 어긋나있는 상황에서, 플레이어에게 이 싸움에 참여할 다른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전장이라는 배경에서, 한 독일군 지휘관이 개인적 복수의 대상이라는 주요 적으로 설정되면서, 주인공들이 1차 대전 초기의 주요 전투와 사건들을 경험하고, 플레이어 역시 이 경험에 집중할 충분한 정당성을 제공한다. 그러나 마침내 본 도르프를 제거한다고 해서 주인공들의 영광스러운 승리로 게임이 끝나진 않으며, 종전까지는 2년이 남았고, 본 도르프를 추격한다는 희열이 무마해왔던 1차 대전의 민낯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본 도르프가 1편의 중후반에서 제거되지만, 전쟁의 진행에 영향을 미치진 않는다.
수단: 사람을 죽이지 않는 전쟁 게임
게임이 시작되고 첫 전투인 크루스네스에서, 에밀은 다른 병사들과 달리 소총이 아닌 부대 깃발을 들고 전선을 달린다. 프레디는 와이어 커터를 든 공병, 안나는 의료진, 칼은 탈영병, 조지는 사진작가, 제임스는 분대원들과 클라리넷을 연주하고, 에른스트는 잠수함 승조원으로 징집된 뱃사람이다. <발리언트 하츠>는 이런 주인공들의 시선에서 전쟁을 경험한다.
개인의 관점에서 전쟁의 경험이 서술될 때면, 플레이어는 이를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경험하곤 한다. 하나는 전투원 등의 입장에서 실제 전투에 참여하거나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하는 경우, 다른 하나는 민간인 등의 입장에서 전쟁에 영향을 미치진 못함에도 전쟁의 영향을 받는 삶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경우다. 위에서 언급한 7명의 주인공들은 분명한 전자에 속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이 공통적으로 결코 하지 않는 행위가 전투, 구체적으로는 살상이다.
사람을 죽이지 않는 전쟁 게임은 가능한가. 교육적인 목적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게임은 혼란스러운 전장의 한복판에서도 플레이어가 누군가를 죽이도록 두지 않는다. 플레이어가 격추하는 전투기는 천천히 지상으로 불시착하고, 기관총 포대 안에 수류탄을 던지면 적은 포대를 버리고 빠져나간다. 총기를 가진 캐릭터는 칼과 제임스뿐이지만, 그마저도 사용하는 일은 없다. 플레이어 캐릭터가 직간접적으로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는 경우는 시리즈에서 두 차례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바쿠아에서 수많은 독일군을 참호에 생매장하는 일에 기여했음을 깨달은 에밀은 수치심에 그간 받은 훈장들을 전부 불태우는 것으로 묘사되며, 니벨 공세에서 무리한 진격을 강요하던 지휘관을 의도치 않게 죽음에 이르게 한 후에는 항명으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사지가 잘린 시신들이 산처럼 쌓여있는 슈맹 데 담과 뫼즈-아르곤 공세에서도, 작품은 이 전쟁 게임에서 전투원으로 참여하는 플레이어의 살상 행위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겠다는 집요함을 고수한다.
앞서 말했듯 전쟁 게임과 전략성의 오랜 결부는 대개 플레이어에게 효과적인 승리라는 목표를 제안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 수와 등장 동선이 정해져 있는 적의 패턴을 파악해 처치하는 경험이 이 효과적인 승리에 반영된다. <발리언트 하츠>에는 이 핵심적인 경험이 빠져있다. 대신 플레이어가 적의 포격과 기관총탄이 빗발치는 참호에서 수행하는 대부분의 경험은 퍼즐을 풀고 함정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험이 향하는 목적은 대개 전투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전투를 무사히 통과해 생존, 그리고 탈출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플레이에서는 전선에서 공격을 피해 목표를 달성하는 행위를 목적으로 한다.
이 시리즈의 주인공들은 불가피하게 전쟁에 휘말린 민간인들이 아니다. 다들 나름의 이유로, 자의가 되었든 타의가 되었든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병사들, 전쟁을 수행하는 당사자들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적과의 교전이라는 역할을 기대받고 있는 이들의 목적, 그러니까 플레이어의 목적은 또다시 이 전쟁의 목적과는 교묘하게 어긋나있다. 결국, 이 전쟁을 벗어나는 데에 있다.
생존이라는 승리
플레르에서 프레디에 의해 마침내 패배했을 때, 본 도르프는(역시나 죽지 않고) 패전의 과오를 물어 ‘죽음보다 치욕스러운’ 경질을 당하며 전장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그는 히틀러처럼 이 싸움의 궁극적인 보스가 아니다. 그가 없다고 전쟁이, 독일군의 진격이 멈추진 않는다. 에밀의 손에 죽었던 무책임한 프랑스군 지휘관 역시 궁극적인 보스가 아니다. 에른스트에게 제임스가 탄 함선을 격침하라고 지시했던 잠수함 함장도, 조지가 추격했던 독일군 스파이도 궁극적인 보스가 아니다. 이 작품에서 7명의 인물들이 맞서 싸우는 궁극적인 보스는 내내 전쟁 그 자체다.
작품은 처음부터 자국 대중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참전국들의 목적-승전이라는 목표를 플레이어들이 따르게 할 의도가 없었고, 때문에 본 도르프라는 마중물을 마련했다. 그리고 이 미묘한 불합치가 이르는 최종 승리의 모습은, 전쟁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전쟁에 대한 승리다. 1편에서는 아들이 아프다는 소식에 집요하게 탈영을 시도하던 칼이 마침내 생 미엘로 돌아가 가족과 무사히 재회하는 모습이 승리다. 2편에서는 당연히, 안나가 여전히 전투가 벌어지는 전선을 뚫고 달려가 탑 위의 종을 울리며 전쟁이 끝났음을 모두에게 알리는 모습이 승리다. 연합국의 승리가 아니라, 종전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이, 그 소식이 들려올 때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이 작품에서 그리는 승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들은 반인륜적 악과 맞서 싸운다는 명분을 표명할 수 있었지만, 1차 세계대전의 연합국들 사이에서 강조되던 것은 보다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단위의 문제였다. 민족이라는 개념을 기반으로 막 형성되기 시작한 ‘국민’이라는 정서는 이 전쟁에서 민족의 자존심과 국가 수호를 위해 적에 맞선다는 목표의식을 만들었다. 그러나 결국 이 작품에서 민족과 국가를 수호한 공을 인정받아 수차례 훈장을 받고, 전쟁으로부터도 승리한 주인공들을 패배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국가, 공동체, 내집단이다.
작품은 자국인 프랑스 군사 법정에서 사형당한 에밀의 묘비, 종전 후 뉴욕에 돌아왔다가 인종차별주의자들의 공격으로 사망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프레디의 묘비 앞에서 마무리되며, 이것이 우리가 기려야 할 전쟁의 비극과 희생을 상징하는 장면이 된다. 전쟁을 위해 줄곧 강조되어왔던 국가와 민족의 가치가, 목숨을 걸고 이를 수호해왔던 두 사람을 배반한다.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1차 세계 대전은 이 두 장면에 담긴다. 작품의 프랑스어 원제인 <Soldats Inconnus>의 ‘inconnu’가 담고 있는 뜻을 곱씹어 볼 만하다. 무명, 또는 낯선, 외부인.

프레디의 안나의 마지막 플레이어블 레벨은 전선이 아닌 뉴욕의 길 한복판이다.
전쟁 게임이 그리는 전선 풍경, 그 가능성
전쟁을 다루는 게임, 혹은 게임이 전쟁을 다루곤 한다는 속성은 종종 비난의 대상이 된다. 플레이어가 직간접적으로 살상을 수행한다는 측면과 그 비주얼은 미디어에서 폭력적인 게이머의 이미지를 소비할 때 애용되고는 한다. 때로는 전쟁의 잔혹성을 폭력적인 오락으로 소비한다고 평가받으며, 때로는 현실을 지나치게 극화하고 가벼운 놀이로 전락시킨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원거리 포격 정도를 넘어 초장거리에서의 원격 정밀 타격이 가능해진 현대전의 양상은 ‘비디오 게임처럼 사람을 죽인다’는 비유로 모두를 섬찟하게 한다.
그러나 사실 매체로서의 게임은 전쟁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플레이어가 직접 참여해 경험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매체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수만 명의 목숨을 손에 쥔 지휘관이 될 수도 있고, 직접 전장에 나서는 병사가 될 수도 있고, 원치 않은 전쟁을 견디기 위해 분투하는 평범한 시민이 될 수도 있다. 전쟁과 게임의 오랜 연결고리였던 전략성은, 특히나 지금과 같은 때에는, 전쟁의 경험을 그저 평면적이고 단순한 놀이로 치환하는 수단으로 쓰이진 않는다.
시인들이 아름다운 단어들로 인류 문명들의 위대한 전쟁에 찬사를 보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전 일어난 1차 세계대전은 많은 시인들의 생각을 바꾸었다. 윌프레드 오언이 아름다운 단어들로 엮어낸 전쟁의 야만은 이후 수많은 분야의 작품들이 전쟁의 의미를 되묻도록 만들었고, 게임 역시 다르지 않다. <발리언트 하츠>는 전쟁 게임의 전략성을 적에 대한 승리가 아닌 전쟁에 대한 승리라는 목표를 향해 겨누며, 이를 위해 함정을 돌파하고 동료들을 돕는 행위를 수행하게 만든다. 총을 겨눌 대상이 적 병사들이 아님을 알기에, 누군가를 죽이는 행위를 지시하지 않는다.

작품은 캐릭터의 공적과 무훈보다는 개인적인 감정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작품이 1차 세계대전이라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전쟁의 경험을 표현하기 위해 던졌을 질문들처럼, 게임은 여전히 전쟁이라는 경험을 향해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들을 가지고 있는 매체다. 이는 <21 Days>에서 이주 난민으로 생존해야 하는 21일이 될 수도 있고, <배틀필드 1 Battlefield 1>의 첫 챕터에서 플레이어 사망 시마다 병사의 이름과 생몰연도가 출력되며 다른 병사의 시점으로 넘어가는 연출일 수도 있고, <발리언트 하츠>에서 점점 사람이 줄어드는 제임스의 합주 풍경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전략성이라는 영역을 매개로 가장 전쟁과 닮아있던 게임이라는 매체가 다양한 요소들을 활용해 플레이어에게 제안할 수 있는 풍부한 경험이야말로, 비이성과 욕망을 감싸는 이성과 논리의 포장지를 벗겨낼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