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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모전수상작] 기계장치의 우주: 〈레인 월드〉와 〈아우터 와일즈〉의 불능감에 대해

    2022년 만우절 주간, 레딧의 거대한 땅따먹기 픽셀아트 프로젝트인 r/place에서 <레인 월드 (Rain World, 2017)>와 <아우터 와일즈 (Outer Wilds, 2019)>의 서브 레딧끼리 자그마한 동맹을 맺었다. ‘아우터 와일즈 원정대’의 로고를 중앙에 두고 양 게임인 플레이어 캐릭터인 슬러그캣과 화로인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으로 예쁘게 공유된 캔버스를 보고 있자면, 임시적이거나 느슨하게 맺어졌을 몇몇 r/place 동맹들에 비해 두 게임 간의 연합이 제법 어울리게 느껴졌다. 어쩌면, 필연적일지도 모를 만큼? < Back [공모전수상작] 기계장치의 우주: 〈레인 월드〉와 〈아우터 와일즈〉의 불능감에 대해 20 GG Vol. 24. 10. 10. “난 신의 마음속에 있어. 하지만 여기가 거기란 걸 어떻게 알지?” - 듀나, 「두 번째 유모 [1] 」 들어가며 2022년 만우절 주간, 레딧의 거대한 땅따먹기 픽셀아트 프로젝트인 r/place에서 <레인 월드 (Rain World, 2017)>와 <아우터 와일즈 (Outer Wilds, 2019)>의 서브 레딧끼리 자그마한 동맹을 맺었다. ‘아우터 와일즈 원정대’의 로고를 중앙에 두고 양 게임인 플레이어 캐릭터인 슬러그캣과 화로인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으로 예쁘게 공유된 캔버스를 보고 있자면, 임시적이거나 느슨하게 맺어졌을 몇몇 r/place 동맹들에 비해 두 게임 간의 연합이 제법 어울리게 느껴졌다. 어쩌면, 필연적일지도 모를 만큼? 그러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범박하게 2D 플랫포머와 3D 어드벤처라 둘 수 있을 만한 형식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끼리는 엮을만한 공통점이 은근히 많았다. 이를 대표적으로는 양쪽에서 플레이어들이 주되게 맞닥뜨리고 불평하는 곤란들로 가장 분명히 확인할 수 있겠다. 간략한 튜토리얼을 제외하면 곧장 광막한 세계에 내던져 놓고 알아서들 돌아다니라는 불친절함. 초반에 명시되지 않아 잔뜩 헤매게 하고 시행착오 이후에서야 간신히 손에 잡히는 최종목표. 콧물 방울처럼 미끄러지는 슬러그캣과 술에 취한 듯 갈팡질팡하는 화로인 우주선 같이 초심자의 손에 영 익지 않는 조작감. 호전적인 포식자부터 불안정한 땅바닥까지 무참하게 들이닥치는 장애물. 그렇게 종종 부당하게 정도로 엄습하는 죽음 및 자연이라는 형태로 가차 없이 밀어붙여지는 시간제한. 읽기에 친숙하지 않다면 알아먹기 힘들거나 때론 철학적 뜬구름 잡는 듯 느껴지는 ‘고대인’ 관련 로어. 그리고 기타 등등. 달리 말하자면, 이 둘은 여러 겹에서 플레이어에게 불능한 감각을 가져다주는 게임들이다. 그렇지만, 바로 그런 면에서 두 작품에 무언가 플레이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글에서는 모의·제어·정보라는 세 주제어로 <레인 월드>와 <아우터 와일즈>가 어떻게 불능감을 활용하는지를 짚어보며, 무심한 세계의 작동법을 익히고 역사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양 게임만의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다루고자 한다. [2] 모의 가끔가다 보면 〈레인 월드〉와 〈아우터 와일즈〉가 통상적인 비디오 ‘게임’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생태계와 자그마한 태양계를 작동시키는 ‘시뮬레이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렇지만, 두 게임은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세상을 일대일로 복사한다기보다는 이를 바탕으로 상상된 허구적인 세계를 꽤나 그럴싸하게 말이 되는 법칙들로 모의하는 편이다. 이들 세계는 공교롭거나 당연하게도 SF적인 아이디어를 중추 삼아 만들어졌는데, 〈레인 월드〉는 ‘반복자’라고 불리는 거대한 슈퍼컴퓨터 구조물들이 한때 고대인들이 거주했던 지상으로 냉각 용수를 십몇 분마다 한 번씩 폭우처럼 쏟아붓는 세계에서 발생한 생태계를, 〈아우터 와일즈〉는 모종의 이유로 22분 만에 폭발하는 항성을 중심으로 여섯 개의 행성이 공전하는 직경 20km짜리의 태양계를 모의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 세계가 크고 작은 단위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바뀌는 중이며, 그 운동과 변화 모두가 엄밀히 지정된 경로를 따르지 않는 대신 특정 절차에 맞춰 세세히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게임 내 지역의 구조나 행성의 궤도라던가 중요한 NPC나 아이템의 위치 등은 전반적으로 고정되어 있으나, 특정 지역에서 도마뱀이나 지네 같은 생명체가 어디서 어떻게 나타난다거나 특정 행성에서 바다 어디에 떠 있는 섬들이 언제 토네이도에 휘말리는지 등은 분명히 정해져 있지 않기에 쉽게 예측할 수가 없다. 두 게임이 유난하게 ‘현실적’이거나 ‘진짜 같게’ 느껴진다면, 이 허구적인 세계가 현실을 (임의적인 오류의 가능성까지) 모의해 만들어진 곳이기 때문일 테다. 이때 두 게임이 각 세계에서 주되게 모의하는 것이란 다름 아니라 현실과 제법 가깝게 작동하는 일련의 법칙들이다. 〈아우터 와일즈〉에서 이는 주로 물리법칙으로, 화로인(의 우주선)은 작중의 무자비한 중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는지라 비행 중에 조금만 조종이 엇나가더라도 가까운 중력장에 휩쓸려 치명적인 충돌 사고를 일으키기가 일쑤다. 한편 〈레인 월드〉의 경우에는 (역시 무자비한 중력이 있다만) 수많은 생명체가 슬러그캣뿐만 아니라 서로끼리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가 유기적으로 구현되어 있어, 플레이어는 이 생태계의 일부가 되어 포식-피식 관계의 생물들이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다. 물론, 두 게임은 (이를테면 〈마이크로소프트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Microsoft Flight Simulator, 1982~)〉가 추구해 온 것만큼) 현실상의 법칙을 최대한 정밀하게 재현하기보다는 작중 세계에서 그럴싸하게 말이 될 정도까지만 이를 구현한다. 엄밀하지는 않아도 ‘핍진’할 모의를 통해, 플레이어는 생태계의 구조와 태양계의 법칙을 모의하는 세계를 체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조금만 숙달하면 그 구조와 법칙 또한 얼마 정도 파악할 수 있다. 달리 말해, (비디오 게임이 “실재하거나 상상된 물리적이고 문화적인 과정을 모의하는 복잡한 규칙” [3] 에 부합한다는 보고스트의 논의를 염두에 두면) 두 게임에서 물리법칙과 생태구조와 같은 “현실의 부분을 게임이 재현할 때, 의미 있는 특정 부분을 단지 포착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의 구조를 ‘모의’해서 해당 체계의 작동 방식, 즉 그것의 원리를 게임이 보여주는” [4] 셈이다. 여기서, 나는 두 게임이 생태계와 태양계의 법칙을 참조해 전반적으로는 정교하게 작동하는 세계를 보이는 와중에도 언제나 임의적인 돌발상황이 발생할 여지를 열어두기로 선택했다는 점에 집중하고 싶다. 그 덕에 플레이어는 두 게임의 세계와 특별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레인 월드〉와 〈아우터 와일즈〉의 모의된 세계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점은 이곳들이 굳이 플레이어의 적극적인 개입 없이도 잘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제작자들 또한 이를 어느 정도 이를 인지하고 있는 듯, 〈레인 월드〉의 사망 화면은 종종 슬러크캣이 불의의 사고로 죽어버린 이후에도 곧장 메인 메뉴로 넘어가지 않고 여전히 평소처럼 행동하는 생명체들을 지켜볼 수 있게 해주며 〈아우터 와일즈〉에서는 태양계로부터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행성들이 항성을 맴돌다가 초신성 폭발에 덮쳐지는 모습을 (화로인 또한 거기에 휘말려 죽기 전까지는) 그저 가만히 지켜볼 수가 있다. 종종 플레이어의 선택과 행동에만 반응하는 여러 비디오 게임 세계와 달리, 이러한 세계는 그런 플레이어를 상관하지 않거나 플레이어에게 상대적으로 무심한 채 모의된 법칙으로 운동하고 변화하는 셈이다. 이때, 플레이어에 대한 세계의 상대적인 무관심함은 종종 물리법칙과 생태구조에서 (우주선이 모래 기둥에 휩쓸린다거나 생물들의 난투극 한복판에 진입한다거나 등) 우연히 발생하는 사고와 허망한 죽음으로 이어지며 플레이어의 불능감을 키워주기도 한다. 즉 이들 세계는 플레이어가 굳이 방문해 상호작용하지 않더라도 늘 자기들만의 모의된 법칙에 따라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하며, 낙오된 슬러그캣이든 출항하는 화로인이든 간에 오로지 플레이어의 행위에 맞춰 움직이기 위해서만 제작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플레이어 없이도 복잡한 자동장치처럼 알아서들 모의되는, 어찌 보자면 “세계로부터 인간을 뺀 (...) 우리-없는-세계” [5] 에 가깝게 작동하는 두 게임의 세계는 플레이어를 행위자이기보다는 차라리 관측자의 위치로 빼둔다. 그렇기에 〈레인 월드〉와 〈아우터 와일즈〉의 세계를 방문하는 플레이어들이 종종 크나큰 불능감을 느끼는 이유는 (흔히 코스믹 호러의 이해·사유 불가함을 설명할 때 강조되는) 세계의 광대한 규모보다도, 특유의 모의 방식에서 자연스레 감지할 수 있을 세계의 무관심함 때문일 테다. 이곳들은 잘해봤자 미니어처 크기에 가깝지만, 그럼에도 플레이어는 모의된 법칙과 구조에 따라 움직이는 무심한 세계에서 종종 공포와 경이를, 혹은 양쪽 감정으로 갈라지기 이전의 압도되는 감각을 느낀다. 이렇게 무심하게 모의된 세계에서 플레이어가 느끼는 불능감을 가치 있는 플레이의 일부로 활용할 수 있다면, 과연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제어 〈레인 월드〉와 〈아우터 와일즈〉의 또 다른 공통점은 앞서 언급했듯 게임 초반부터 플레이어를 아무 목적 없이 야생에 거의 내버려두다시피 한다는 점이다. (〈아우터 와일즈〉에서는 화로인의 행성에서 비행 연습이라도 어느 정도 할 수 있다만, 〈레인 월드〉에서는 슬러그캣의 기초적인 조작법마저도 아주 간략히 알려줄 뿐이다). 초반에 분명한 최종목표를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두 게임은 세계 한복판에 던져진 플레이어에게 제어에 대한 불능감 또한 강력하게 만들어 낸다. 이때 제어의 불능감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의 플레이어가 위험천만한 세계를 뚫고 가게 한다는 점에서 특히 직격으로 작용할 테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두 게임을 플레이하는 가장 큰 재미는 플레이어가 슬러그캣 혹은 화로인으로서 자신의 조작법을 익힐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이 생태계와 태양계의 작동법 또한 알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조작법에 숙달해 가는 플레이어의 능력 및 심리가 불능(감)에서 차차 전능(감)으로 이동하며, 무심하게 모의된 이 세계에서 차차 숙련된 제어력을 얻어가는 분투의 경험이 두 게임을 진행하는 핵심적인 동기가 되는 셈이다. 전능한 제어의 재미란 우선 플레이어가 슬러크캣과 화로인(의 우주선)을 더욱 능숙하게 다루며 살아남는 데에서 일어나는데, 이러한 특성은 당연하게도 다른 게임에서 얼마든 발견할 수 있다. 그렇지만, 〈레인 월드〉와 〈아우터 와일즈〉는 플레이어가 조작과 생존에 숙련되어 가는 과정을 레벨 업이나 스킬 해금과 같이 전면적으로 수량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를 띤다. 슬러그캣이 공중제비를 날렵하게 돌고 화로인이 우주선을 안전하고 부드럽게 착륙할 수 있더라도, 여전히 다양한 생물에게 한 방에 잡아먹히고 큰 충격을 받으면 한 방에 골로 갈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게임적인 의미에서 ‘업그레이드’하지는 않는다. (기껏해야 〈레인 월드〉에서 식량을 든든히 채우고 피난처에서 휴식하면 다른 지역으로 입장하는 통행권으로 사용되는 ‘카르마’가 하나씩 올라가는 정도일까). 도리어, 주된 업그레이드는 캐릭터가 아닌 플레이어의 조작 기술과 쉽사리 수량화되지 않을 자기효능에서 일어난다. 그러니까,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자격증 취득 등이 요구되지 않는) 다양한 잔기술을 익혀나갈 때 종종 그리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이때 〈레인 월드〉와 〈아우터 와일즈〉의 모의적인 성질은 생태계의 구조와 태양계의 법칙을 모의하는 것을 바탕삼아 제어의 영역에서도 그러한 세계에서의 특정한 조작법 및 생존법을 모의하면서도 배가된다. 세계에서 움직이는 방법에 익숙해지는 과정은 자연스레 이 세계 자체에 익숙해지는 과정으로 이어져, 처음에는 위협적이고 낯설게만 느껴졌던 여러 생물과 행성은 최소한 친숙하고 때로는 감탄해 볼 만한 무언가가 되어가며 플레이어의 불능감을 차차 긍정적인 전능감으로 바꿔나간다. 모의된 세계 및 제어에 대한 플레이어의 불능(감)이 어떻게 조절되는지의 문제는 물론 게임의 행위성과 분투에 대한 응우옌의 논의를 주요하게 참조했다. 이를테면 현실상의 물리법칙과 생태구조를 그럴싸하게 말이 되도록 조형하면서도 임의적인 돌발상황 또한 종종 발생하도록 모의된 세계란 “능력과 장애물의 조합이 플레이어로 하여금 자기 행위성의 특정 부분에 (…) 집중하도록 압력을 가한” [6] 설계이며, 무심한 세계에서 플레이어가 느끼는 “무능력함을 유려하고 정확하게 묘사한 그림이자, 실천적 무능력으로 된 공포물” [7] 로서의 이들 게임에서 발생하는 ‘불화’를 제어의 숙달을 통해 차차 ‘합일’로 이끌어가는 과정이 곧 플레이어가 불능(감)에서 전능(감)으로 나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고 말이다. 우리가 〈레인 월드〉와 〈아우터 와일즈〉에서 슬러그캣과 화로인(의 우주선)을 조종하며 겪는 경험이란, 모의된 세계의 외관을 띤 채 플레이어의 행위성을 유동적이고 유기적으로 제한하는 규칙들로 이뤄진 정교한 세계에서 최대한의 제어력을 얻어나가려는 분투다. 그 무엇에도 익숙하지 않던 초반에는 그저 죽지만 않고 하나의 루프를 살아남거나 이동에라도 능숙해지는 게 최우선의 임시 목표였지만, 플레이어가 제어에 숙달하고 자율성이나 행위성을 얻어가며 전능해지는 과정에서 목표는 이 놀라운 세계 자체에 대한 탐구로 비약한다. 불능(감)에서 출발해 전능(감)에 도착하는 두 게임의 분투적인 특성은 이러한 기계장치의 우주를 플레이어가 제대로 알고 이해하는지를 증명해 나가는 하나의 시험대가 된다. 이야기를 조금 미루고 있었지만, 〈레인 월드〉와 〈아우터 와일즈〉가 크고 작은 시험을 거쳐 제어와 더불어 세계를 익혀나가기 시작한 플레이어에게 보상하는 특별한 방식이 빛나는 것도 이 덕일 테다. 정보 그러니까, 〈레인 월드〉와 〈아우터 와일즈〉에 ‘서사’가 있다면 이는 어떠한 이야기일까? 여담을 먼저 말하자면, 두 게임의 여러 기묘한 점 중 하나는 결말을 보는 최적화된 방법이 플레이어가 이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최초의 상태에서도 얼마든 실행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리고 조작법을 최소한으로 익히고 공략을 참조한다면) 당신은 두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특정 경로를 따라 〈아우터 와일즈〉에서는 십몇 분 만에 또 〈레인 월드〉에서는 몇십 분 만에 최종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세계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하고 불능할 뿐인 초반의 플레이어는 최적화된 경로는커녕 그를 따라 닿는 최종목표가 무엇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그 대신에, 두 게임에서는 앞서 설명했듯 불능했던 플레이어가 차차 전능한 행위성을 획득하는 분투의 여정 그 자체가 나름의 이야기가 된다. 더불어, 플레이어가 얻어가는 제어력에 이 세계에 대한 각종 정보를 보상하는 게임의 메커니즘은 세계의 조작법 및 작동법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거기에 깔린 ‘서사’까지도 서서히 밝혀나가며 이 세계에 숨겨져 있던 또 하나의 이야기를 드러낸다. 세계에 대한 정보는 사실 상대적으로 조금 더 친절한 〈아우터 와일즈〉에는 어느 정도 주어진 채 시작한다. 플레이어에게는 조종하는 화로인은 아주 오래전에 이 태양계에 거주했다가 멸종한 고대 종족인 노마이의 언어를 옮기는 새 번역기를 가지고 각종 행성의 유적지를 탐사하는 것이 일단의 목표로 제시되며, 여기에 태양이 왜 22분 만에 폭발하며 자신이 어쩌다가 이 타임 루프에 빠졌는지를 밝혀야 하는지도 우선의 목표로 추가된다. 〈아우터 와일즈〉의 행성 곳곳에 유기적으로 깔린 퍼즐들은 해결될 때마다 플레이어에게 노마이 언어로 쓰인 자그마한 정보 덩어리들을 보상한다. 진입할 수 없던 곳에 접근하는 방법부터 이 자그마한 태양계의 숨겨진 여러 비밀까지 다양하게 밝혀지는 정보들은 훌륭하게 도식화된 항해 일지에서 긴밀한 연결망을 만들어 나가며, 이는 플레이어에게 새로운 임시·단기 목표들을 끊임없이 제공하면서도 종래에는 하나의 거대한 지도처럼 합쳐지며 최종목표에 대한 청사진이 된다. 이러한 정보들의 체계야말로 〈아우터 와일즈〉의 크고 작은 이야기들을 구성하는 요소로, 분투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은 이 태양계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는 과정과도 중첩된다. 달리 말하자면, 〈아우터 와일즈〉에는 선형적인 내러티브와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몇 개의 ‘서사’들의 중첩되어 있다. 낯선 세계를 이해해 나가려는 플레이어의 분투 과정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인 만큼, 그저 배경이나 환경인 줄로만 알았던 세계가 얼기설기 얽힌 정보의 총합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는 과정 또한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곧 〈아우터 와일즈〉에서 플레이어가 겪는 업그레이드란 특정한 수치들이 누적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이 쌓여가는 형태로 이뤄지는 셈이다. 세계에 대한 제어권을 얻어가면서 정보를 얻고, 해당 정보를 짜맞춰 다음 목표를 설정하며 최종장에 다가가는 일련의 과정이 〈아우터 와일즈〉를 진행하는 핵심적인 설계라면, 〈레인 월드〉에서 이는 훨씬 간접적이고 느슨하게 제시되는 편이다. 이 세계 곳곳에 흩어진 진주알에는 반복자와 고대인의 기록과 역사가 적혀 있으며, 반복자들이 이 정보에 대해 표하는 반응까지 더하면 작중의 생태계가 이 모양 이 꼴이 되기 전까지 이 세계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전반적인 상이 이뤄진다. 무엇보다도 〈레인 월드〉를 정석적으로 플레이하는 동안에는 실제로 두 반복자에 방문해 그들의 말을 듣는 단계를 거쳐야 하기도 말이다. 이러한 정보는 〈아우터 와일즈〉에 비해 게임의 최종목표를 달성하고 이야기를 진행하는 데에 아주 필수적이지는 않은 편이지만, 어느새 작중의 온갖 생명체에 빠삭해지고 전능하게 생존할 수 있는 플레이어들에게는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로어’의 형태로 다가온다. 낙오된 슬러그캣이 잔혹하면서도 매혹적인 세계를 구석구석 누비며 세계의 과거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동안, 거대한 구조물인 줄로만 알았던 반복자들 또한 이 생태계와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일부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도 그들의 ‘서사’ 또한 플레이어에게 넌지시 전달된다. 이렇게 〈레인 월드〉의 세계를 차차 알아가는 과정에는 단순한 조작 및 생존 방법과 생태계의 여러 특성을 익히는 것 이외에도 파편 난 과거의 서사를 수집하는 과정이 추가되며, 이는 〈아우터 와일즈〉와 마찬가지로 플레이어에게 수량화된 업그레이드와는 조금 다르게 세계에 대한 지식을 쌓아가게 하는 과정에서 전능감을 부여한다. 플레이어 캐릭터가 오래된 폐허를 돌아다니며 잊힌 역사를 수집하는 과정을 어느 정도 공유하는 두 게임은 이 세계의 뒷이야기를 수집할 만한 서사 조각으로 제시해 플레이어 스스로 짜맞추게 하기에, 정보의 측면에서도 불능(감)을 전능(감)으로 바꿔나가는 방식을 활용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금, 이 또한 이른바 ‘환경적 스토리텔링’을 적극 활용하는 게임들에서 (때로는 〈시스템 쇼크 (System Shock, 94)〉같은 이머시브 심 장르와 엮어) 오랫동안 보아왔던 방식일 테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 두 게임 모두 특유의 모의법을 통해 플레이어에게 무심하게 작동할 뿐인 세계를 제시하며, 제어와 정보에 불능하며 불능감을 느끼는 플레이어가 이 세계를 다양한 층위로 익혀나가게 한다는 점에서 게임 내 세계와 특별한 관계를 맺을 테다. 그렇게 따져보자면 두 게임의 ‘서사’란 로어 조각의 형태로 곳곳에 산개한 과거사보다도, 차라리 이를 포함해 플레이어가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주어진 세계의 수많은 정보를 알아가는 플레이 과정 전체가 될 것이다. 한 차례의 플레이 주기 동안 그저 정신없이 살아남는 것에 급급하던, 물리법칙과 생태구조에 휘말려 우스운 슬랩스틱이나 끔찍한 호러를 연출하던, 어쩌면 새로이 얻은 정보들에 경이와 경외 또 경악을 느끼던 말이다. 적어도 이 세계의 아주 자그마한 구석이라도 아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면, 그 또한 하나의 근사한 이야기가 될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레인 월드〉와 〈아우터 와일즈〉는 무심하게 모의된 세계와 전능하게 익히기가 까다로운 제어, 그리고 서사를 조각내 만든 정보를 제각각의 불능(감)으로 묶어, 플레이어가 이 세계를 헤쳐가고 알아가는 과정 자체에서 끊임없이 크고 작은 이야기를 생산하는 ‘기계장치의 우주’일 테다. 나가며 작년에 〈레인 월드〉와 〈아우터 와일즈〉 그리고 두 게임의 DLC를 나란히 플레이하며 글감을 착상하고 올해 상반기에 〈튜닉 (Tunic, 2022)〉과 〈애니멀 웰 (Animal Well, 2024)〉을 플레이하며 이를 머릿속에서 굴리는 동안, 이들 게임(특히나 홍보상에서 꽤나 이목을 모았던 〈애니멀 웰〉)을 중심으로 단어 하나가 영어권 웹을 떠도는 광경을 보았다. ‘메트로브레이니아(metroidbrania)’라는 이 신종 장르명은 메트로배니아에 ‘브레인’을 추가한 말장난으로, 플레이어가 다양한 지역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맵을 탐사하면서 처음에는 진입 불가했던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능력 및 기술을 얻는 메트로배니아의 기본적인 설계에서 특히나 ‘두뇌’를 요구하는 요소가 강조되는 유형의 게임을 지칭한다. 이 ‘두뇌’란 물론 게임 내에 숨겨진 비밀과 작동법과 같은 정보에 대한 비유로, 기존 메트로배니아에서 플레이어가 특정 임무를 달성해야만 추가적인 이동 능력 및 기술을 획득하는 것에 비해 ‘메트로브레이니아’에서는 게임과 세계에 대한 특정 정보 자체가 바로 그러한 능력 및 기술이 되는 셈이다. 언급된 네 게임은 종종 그러한 ‘메트로브레이니아’를 대표할 만하고 어쩌면 새로운 장르로 묶일 수 있을 만한 게임으로 불리는 듯한데, 과연 이들 게임이 그렇게까지 지식 정보의 획득과 두뇌 훈련의 필요성만을 강조할까? 〈튜닉〉과 〈애니멀 웰〉 또한 (〈아우터 와일즈〉나 〈레인 월드〉와 비슷하게도) 각각 3D 어드벤처와 2D 플랫포머의 기본적인 틀을 바탕으로 그저 특정 정보의 획득뿐만이 아니라 플레이어의 조작과 탐험 (〈튜닉〉의 경우에는 전투) 또한 동등한 분투의 수단으로 취급하며 이들을 정교하게 엮는데 말이다. 이들 게임을 플레이하다 보면 머릿속을 떠돌기만 하던 정보 조각들이 문득 하나로 짜맞춰질 때의 쾌감, 모든 것이 전부 다 그럴싸하게 말이 되는 것만 같고 이 세계의 가려진 뒷면을 잠시 엿보고 온 듯한 짜릿함, 무엇보다도 이를 전부 알아먹은 스스로가 영리하게 느껴지는 전능한 기분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그렇다고, 〈레인 월드〉와 〈아우터 와일즈〉가 (미처 다루진 못했지만 〈튜닉〉과 〈애니멀 웰〉도) 오로지 두뇌와 지식만을 플레이의 중추로 삼지는 않았을 테다. 도리어 내가 여기서 즐긴 전능감이 어디서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찾아다니다 보니, 이 게임들이 모의와 제어와 정보와 같은 수많은 장치가 맞물리고 불능감을 연료로 사용해 플레이어에게 가장 효과적인 전능감을 제공하는 기계와 같다는 인상이 들었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알아가는 즐거움을 도무지 제어력을 발휘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으로만 느껴질 뿐인 현실이 아니라 알맞은 규모와 규칙으로 작동하는 허구에 실어 제시한다는 점에서, 이런 게임은 세계를 익혀나가는 법을 익혀나가도록 하는 연습 경기장이 된다. [1] 『두 번째 유모』, 알마, 2019, 301쪽. [2] 두 게임의 특성을 흥미롭게 확장한 DLC인 〈다운푸어 (Downpour, 2023)〉과 〈에코스 오브 디 아이 (Echoes of the Eye, 2021)〉는 아쉽게도 번외로 두고, 이 글은 본편에만 집중하겠다. [3] Ian Bogost, Persuasive Games: The Expressive Power of Vidoegames, MIT Press, 2007, p.35. [4] 옥선영, 「게임 속의 세계는 세기말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는가?」, 『한국게임학회 논문지』 통권 98호, 한국게임학회, 2021, 12쪽. 원문에서 simulate는 ‘모사’로 번역되었으나 여기서는 ‘모의’로 통일했다. [5] 유진 새커, 『이 행성의 먼지 속에서』, 김태한 옮김, 필로소픽, 2022, 13쪽. [6] C. 티 응우옌, 『게임: 행위성의 예술』, 이동휘 옮김, 워크룸프레스, 2022, 206쪽. [7] 응우옌, 같은 책, 177쪽.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비평가) 나원영 2016년에 웹진 [weiv]를 통해 대중음악 비평을 시작했고, 2022년 웹진 ma-te-ri-al을 통해 <대체 현실 유령>을 출간했다. 아무래도 작은 게임을 랩톱에서 짧게 하는 편이다. 계속됩니다.

  • 게임 to 현실, 현실 to 게임: <게임의 사회학> 서평

    〈게임 사회학〉은 저자 스스로 그 빈칸을 채우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책이었다. 저자가 스스로 게이머들이 왜 이런 행동을 보였을지 이유를 추적하고 그 인과성을 검증하는 모델을 세우는 과정을 보였기 때문이다. 즉 정량적인 연구라도 연구 문제를 설계하고 모델에 어떤 변수를 채택하고 분석 결과를 해석하는 일은 다시 사람의 몫이다. 전통적인 사회과학이나 통계학 연구자들이 딥러닝을 학문으로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딥러닝 모델이 독립변수와 종속변수의 관계를 설명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 설명 가능한 인공지능(eXplainable AI) 필요성이 부각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XAI는 알고리즘이 왜 이런 결과를 내놓았는지 추적해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정량적인 연구와 정성적인 연구가 연결되는 지점이며, 앞으로 게임과 그 관련 데이터를 활용한 사회과학 연구가 가야할 길이기도 하다. < Back 게임 to 현실, 현실 to 게임: <게임의 사회학> 서평 10 GG Vol. 23. 2. 10. * 필자는 〈게임의 사회학〉 저자처럼 데이터 사이언스 방법론을 기반으로 인문사회과학 연구를 하는 연구자이다. 따라서 저자의 접근법(연구방법)에 좀 더 친숙하기 때문에 편향이 있을 수밖에 없는 점을 미리 인지하고 이 글을 읽어주셨으면 한다. 1. 완벽히 통제된 전수 데이터의 꿈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에게(특히 사회과학) 꿈같은 일은 자신이 검증하고자 한 가설이나 연구 문제에 딱 맞는 데이터를 구하는 것이다. 예컨대 부모의 소득과 수능점수의 인과관계를 밝히고자 한다면, 수능점수에 영향을 끼치는 모든 변수(체력, 지능, 인내력 등)를 ‘통제’하고 부모의 소득만 다른 수험생을 찾아야 한다. 쌍둥이를 찾아서 서로 다른 부모에게 입양 보내지 않는 이상 그런 데이터를 구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사회과학자들이 다루는 데이터는 늘 ‘표본’ 데이터이다. 데이터에는 늘 누락과 접근 불가능한 상황이 있으므로 전수 데이터는 만져볼 기회가 없다. 따라서 완벽히 통제된 전수 데이터는 꿈같은 말이다. 대신 사회과학자들은 늘 부족한(질적으로든 양적으로든) 데이터를 만회할 수 있는 여러 분석 방법론을 개발해왔다. 이른바 통계적 유의성(statistical significance)을 자신의 연구에서 목숨 걸고 사수하려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늘 부족한 데이터이지만 데이터에 맞는 분석 모형을 만들어 분석 결과의 유의함을 밝혀내는 일 말이다. 연구자들은 자신이 내놓은 분석 결과가 확률적으로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강건하게(robust) 지지하게 될 수 있게 부단히 노력한다. GPU 같은 컴퓨팅 파워의 대중화와 프로그래밍 언어와 각종 분석 소프트웨어의 발전으로 사회과학 연구자들은 지금까지 꿈이라고만 여겼던 초거대 데이터 세트를 연구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 서평에서 다룰 게임 파생 데이터가 아니더라도 소셜 미디어나 건강보험 공공데이터 등 수천만, 수억 건의 데이터를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다루기 시작했다. 빅데이터 기반의 사회과학 연구인 이른바 계산사회과학(Computational Social Science)의 출현도 이와 연관이 있다. 이런 제반 사항이 잘 갖춰졌는데도 사회과학 연구자들에게 게임 데이터는 여전히 낯선 영역으로 보인다. 〈게임의 사회학〉에서도 그 부분을 지적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2. 게임은 현실을 표상하는가? 현실이 게임을 표상하는가? 저자는 서문에서 게임 데이터 기반 사회과학연구가 이제 걸음마 단계임을 강조한다. 왜 아직 연구자들은 게임 파생 데이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지 않은가? 게임 데이터 역시 통제가 필요하고 전수 데이터를 모으기 힘든 점이 있지만 현실에서 수집을 상상하기도 어려운 데이터를 가상공간에서는 구해볼 수 있는 장점이 충분히 있다. 1) 하지만 내 생각엔 다음 세 가지 이유로 연구자들이 활용하기를 꺼리는 듯하다. 1) 디지털 공간에 존재하는 게임 데이터의 수집과 핸들링을 위해서는 코딩 같은 추가 연구 역량이 필요하다. 2) 이전에 전통적으로 다루던 설문조사 등의 데이터보다 훨씬 더 많은 대량의 데이터를 다루기 힘든 측면. 3)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특징은 게임이 인간 현실사회를 반영하는 공간인지 연구자들이 의심한다는 점이다. ‘게임을 하는 사람’이라는 데이터 자체의 선택 편향을 의심하는 연구자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필자가 책의 전반부에서 ‘게임 -〉 현실’이라고 명명한 것은 이러한 측면에서 매우 적확하다. 게임이라는 렌즈를 통해 현실을 바라보는 연구가 ‘게임 사회학’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의 후반부를 ‘게임 〈-〉 현실’이라고 배분한 것도 이와 연결된다. 이제 게임은 단순히 인간 사회의 작동 원리나 특징을 바라보는 교보재가 아니라 사회 현실과 게임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형태 역시 연구자들이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가상 세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인터넷 검색 엔진에 검색되지 않으면 세상에 없는 것으로 인식하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볼 때, 필자의 말처럼 이제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을 위해서는 반드시 게임을 들여다봐야 하는 시점에 도래한 것은 아닌가? 특히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건 당일 리니지의 아이템 거래도 그 수가 매우 줄었다는 부분 2) 에서 나 역시 게임이 현실과 분리되지 않고 그 둘이 연동돼 있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3. 계산사회과학의 한계와 객관성이라는 신화 다음으로 이 책은 사회과학이 중요하게 다루는 인간과 사회의 ‘행위’, ‘조직’, ‘경제 활동’, ‘범죄’, ‘호혜성’ 등의 개념을 게임 데이터를 가져와 정량적인 방법으로 잘 설명해냈다. 통계와 네트워크 분석, 더 나아가 기계학습 기반의 의사결정나무까지 여러 방법론이 소개됐다. 이러한 정량적인 방법론에 대해 연구자를 포함한 시민들은 그 자체로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라고 평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계산사회과학 연구가 주목 받는 이유도 연구의 객관성과 과학성이 질적인 연구에 비해 우월하다는 데 있다. 하지만 (빅)데이터 방법론은 전가의 보도가 아니며 정량적인 모델이 객관적이라는 평가도 과대평가 된 신화이다. 특히 요즘 각광 받는 딥러닝 기반의 분석 방법론은 전통적인 통계 모형보다 매우 성능이 뛰어나지만, 해당 모델이 내놓은 결괏값을 설명해낼 수 없는 블랙박스인 경우가 많다. 또한 데이터 수집과 전처리 과정에서 여러 연구자의 의도가 들어갈 수밖에 없기에 정량적인 연구는 객관적일 거라 믿는 태도도 위험하다. 데이터에 내재하는 편향성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에 인공지능에 내재한 여러 편향의 문제는 알고리즘 학습 때부터 내재한 것이다. 또한 계산사회과학이 내놓는 결과물은 해당 집단이나 개인의 가장 평균적인 면을 보여준다. 결국 분석과정에서 드러나지 않는 개인과 집단의 특이성은 배제되곤 한다. 4. 정량과 정성, 구별할 필요 없이 인문학은 거의 모든 사람이 기본적으로 정성적인 연구를 계속해왔기 때문에 구별이 거의 없지만 3) , 사회과학에서는 연구자를 구분할 때 ‘질방(질적인 방법)’ , ‘양방(양적인 방법)’으로 나누곤 했다. 나는 이제 이러한 구분은 의미가 희석될 것으로 생각한다. 〈게임의 사회학〉에서도 그 두 방법을 모두 활용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예컨대 게임 유저의 행동을 정량적인 방법으로 분석했을지라도 인터뷰나 민속지(Ethnography) 같은 전통적인 방법론으로 보완하였다. 결국 게임 데이터를 활용하는 연구자는 정량적인 분석을 시행하더라도 해당 게임에 참여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이해는 모델링으로 채우지 못하는 빈칸을 채우게 할 것이다. 〈게임 사회학〉은 저자 스스로 그 빈칸을 채우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책이었다. 저자가 스스로 게이머들이 왜 이런 행동을 보였을지 이유를 추적하고 그 인과성을 검증하는 모델을 세우는 과정을 보였기 때문이다. 즉 정량적인 연구라도 연구 문제를 설계하고 모델에 어떤 변수를 채택하고 분석 결과를 해석하는 일은 다시 사람의 몫이다. 전통적인 사회과학이나 통계학 연구자들이 딥러닝을 학문으로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딥러닝 모델이 독립변수와 종속변수의 관계를 설명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 설명 가능한 인공지능(eXplainable AI) 필요성이 부각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XAI는 알고리즘이 왜 이런 결과를 내놓았는지 추적해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정량적인 연구와 정성적인 연구가 연결되는 지점이며, 앞으로 게임과 그 관련 데이터를 활용한 사회과학 연구가 가야할 길이기도 하다. 1) 인간을 대상으로 삼는 학문이 윤리적 한계 때문에 부딪히는 여러 가지 예약을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48쪽). 2) 이 기간에는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2014년 4월 16일이 포함되어 있다. 다소 무리한 추측일 수도 있지만, 하필 그 전후 기간에 비해 유독 큰 폭의 하락이 있어서 그래프를 처음 봤을 때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중략) 게임은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한 경험이었다 (168쪽) 3) 최근 디지털 인문학(Digital Humanities)의 출현은 정량적인 인문학 연구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디지털인문학 연구자) 김병준 KAIST 디지털 인문사회과학센터 연구교수. 학부에서 문학을 사랑한 문학청년으로 국문학 공부했지만, 대학원에서는 자연어처리와 데이터 사이언스를 전공했다. 대량의 데이터와 정량적인 방법론을 활용한 디지털 인문사회과학 연구를 주로 한다. 가장 좋아한 인생 게임은 워크래프트 3, 주종은 오크. 아쉽게도 요즘엔 직접 게임을 할 시간이 없다.

  • 여벌의 생명선_2인용 로컬 협동게임 속 목숨의 구도

    이혼을 결정한 부부 코디와 메이의 영혼은 부모의 이혼을 막고 싶은 딸 로즈가 빈 소원 때문에 조그마한 목각 인형에 씌게 된다. 자기들 나름의 추론을 거쳐서, 인형으로 전락한 부부는 딸의 눈물이 저주를 풀게 해주리라고 판단한다. 두 사람은 세계에 육박하게 거대해진 아이의 놀이방을 헤매면서, 로즈가 가장 좋아하는 코끼리 인형 큐티를 찾는다. 큐티를 망가뜨리면 속상한 아이가 눈물을 흘리게 되리라 믿으면서 말이다. < Back 여벌의 생명선_2인용 로컬 협동게임 속 목숨의 구도 24 GG Vol. 25. 6. 10. 이혼을 결정한 부부 코디와 메이의 영혼은 부모의 이혼을 막고 싶은 딸 로즈가 빈 소원 때문에 조그마한 목각 인형에 씌게 된다. 자기들 나름의 추론을 거쳐서, 인형으로 전락한 부부는 딸의 눈물이 저주를 풀게 해주리라고 판단한다. 두 사람은 세계에 육박하게 거대해진 아이의 놀이방을 헤매면서, 로즈가 가장 좋아하는 코끼리 인형 큐티를 찾는다. 큐티를 망가뜨리면 속상한 아이가 눈물을 흘리게 되리라 믿으면서 말이다. 부부는 미로를 헤매고 퍼즐을 풀고 미친 청소기와 싸우는 우여곡절 끝에 장난감 왕국의 여왕 큐티와 마주하게 된다. 자기를 해치려 들자, 큐티는 자신의 운명에서 도망치려는 헛된 발버둥을 치면서 넝마가 되어간다. 마침내 부부는 무력화된 인형을 절벽으로 끌고 가고, 합심해서 무저갱만큼 깊은 놀이방 바닥에 밀어 넣는다. 이 처형을 진행하기 위해서, 게임은 언제나 그래왔듯 두 사람분의 협동을 요구한다. 게임 디자이너 요제프 파레스(Josef Fares)가 설립한 헤이즐라이트 스튜디오의 <잇 테이크 투It Takes Two>는 2인용 로컬 협동게임이다. 온라인 멀티플레이 게임은 함께 게임을 할 플레이어를 자동으로 배정해 주지만, 로컬 협동게임은 자동 배정 기능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게임을 진행하기 위해 시작부터 두 사람의 플레이어가 필요하다. 따라서 2인용 로컬 협동게임은 친구나 연인,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게임으로서 기획된다. <잇 테이크 투>의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시큰둥한 부부인 것도, 어쩐지 불쾌하게 친근한 부부 상담가처럼 구는 하킴 박사가 여정의 안내자인 것도 기획에 어울리는 설정인 셈이다. 두 플레이어 모두 카메라를 자기 뜻대로 조작할 수 있도록 게임 화면은 자주 두 개로 분할된다. 가능한 이동의 양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3D 공간상에서 주목해야 할 퍼즐 요소 역시 다르게 주어진다. 두 플레이어는 자기 몫의 퍼즐을 풀기 위해 선제 되어야 할 행위를 요청하고 정보를 공유한다. 긴밀하고 상보적인 공조를 통해서만 그들은 닫힌 문을 열고 장애물을 뚫을 수 있다. 큐티를 처형장으로 끌고 가는 시퀀스 역시 이 공조로부터 예외가 아니다. 큐티는 마분지 로켓을 타고 도망치려다 추락하고 속절없이 인형 뽑기 통에 갇힌다. 화면은 분할되지 않고, 시네마틱으로부터 플레이 화면으로 분절 없이 자연스럽게 전환된다. 본래 두 손으로 조작하도록 만들어진 인형 뽑기 집게의 계기판은 플레이어의 아바타에 비해 너무 거대하다. 코디는 조이스틱을 조작하고, 메이는 방향키를 그 위에서 풀쩍풀쩍 점프하면서 버튼을 짓눌러야 한다. 큐티는 정형행동을 하는 동물처럼 빙글빙글 돌며 집게를 피하려 하고, 공황에 빠져 흐느낀다. 간신히 큐티를 집어 올리는 데 성공하면, 큐티의 다리는 인형 배출구에 걸려 버린다. 각자의 아바타가 큐티의 팔을 한 짝씩 쥔 상황에서, 플레이어들은 버튼을 연타해서 큐티를 잡아당긴다. 억지로 당겨진 인형의 한쪽 다리가 뜯겨 나간다. 발버둥 치는 큐티를 놓치지 않고 어떻게든 끌고 가기 위한 조작이 계속 진행된다. 큐티는 친구 로즈한테 도움을 요청하며 울부짖고, 기어서라도 탈주하려 몸부림치다 귀까지 잃는다. 코디와 메이는 플레이어의 조작에 인도되어 느릿느릿 지지부진하게 코디를 절벽으로 끌고 간다. 주인공들에 비하면 거대하지만 무력하고 취약한 코디의 몸은 공격성이 배제된 밀가루 포대와 같다. 코디와 메이는 몸서리치며 외친다. "이 일이 다 끝나면 우리는 상담을 받아야 해." 그들은 어쨌거나 함께 그 일을 해낸다. 부부는 영영 목각 인형으로 살 수는 없지 않냐는 합리적인 이유로 살해를 감행한다. 전문가와의 사후적인 상담을 통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처치하는 걸 고려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장난감과 레고 블록과 타일이 널브러진 세계에서, 플레이어 역시 "살아있고 소리 지르는" 생명을 죽이는 느린 협업을, 일치된 버튼 연타와 섬세한 조작을 강제 받는다. 이야기는 이후 당면한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는 데 급급하지 말고, 진정으로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이해해야 한다는 교훈으로 나아가긴 한다. 그렇지만 포로를 처형하는 과정을 연상시키는 충격은 교과서적인 메시지로 무마되기에는 지나치게 강렬하다. 자기 잇속만 따지는 어른들의 공모로서 협동의 기제가 나타나는 이 시퀀스는 속도감 있는 전환과 유쾌한 게임성을 갖췄다고 평가받는 <잇 테이크 투>에서 돌출적일 정도로 느리게, 긴 시간을 들여 전개된다. 그런데 게임의 줄거리는 마치 그 일이 일어난 적 없었다는 식으로 흘러간다. 결말부에서 주인공 부부는 여태까지의 반목이 없었다는 듯이 급작스럽게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를 도모한다. 그들은 로즈와 다시 화목한 가족으로 돌아간다. 식상한 결말이라면 식상한 결말일 것이다. 그런데 플레이어의 의식 속에선 절박하고 동물적인 생존의 갈구가 모두 실패하고 공포와 고통 속에서 떨다가 추락하는 봉제 인형 스너프가 여전히 어른거린다. 새된 어린아이 목소리로 말하는 유아적인 인형을 처분하기 위해 일치단결하는 시퀀스는 필요 이상으로 불쾌하고 잔혹한 농담으로 의도된 것만 같다.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가족적인 게임을 기대한 사람들에게서 평을 깎아 먹는 요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불쾌함까지 포함해서, <잇 테이크 투>의 농담은 게임 내의 협동 행위에 대해 흔히 이뤄지는 가치 평가에 대한 유의미한 재고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협동'은 게임이 폭력과 반사회성을 부추긴다는 혐의에 저항하며 게임을 변호하는 대항 무기로서 기능해 온 키워드다. 비디오 게임의 심리적 효과를 공정하게 다루려 노력하는 문헌들 다수가 게임이나 게임의 표면적 폭력성이 문제가 아니라 경쟁적 환경이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의견을 개진한다. 대표적으로 데이비드 이월슨 등이 진행한 연구는 피실험자에게 <헤일로Halo>와 같은 폭력적인 게임들을 경쟁적으로, 혹은 협동적으로 플레이하게 만든 결과, 협동적으로 플레이한 경우 오히려 사회적 의사소통이 활발해지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밝힌다. [1] 최근의 연구는 게임 내외로 이뤄지는 협동적인 상호작용을 일면적으로 긍정하기를 넘어서, 그것이 동질적이고 유독한 게임 커뮤니티를 형성할 때 발생하는 문제 역시 활발히 다룬다. 그렇지만 사회성의 함양과 관련하여 논의되는 '협동'은 대체로 팀플레이를 요구하는 온라인 멀티플레이 게임의 협동인 경우가 잦다. 그건 온라인 멀티플레이가 친분이 배제된 낯선 사람들이 임시로 팀을 이뤘을 때 목표 달성을 위한 의사소통을 어떻게 행하는지 살피는데 더 용이한 게임 문법을 갖추고 있고, 동시대의 게이머에게 온라인 멀티플레이 환경이 더 익숙하고 보편적이기 때문일 테다. 이런 멀티플레이 협동 게임의 재미는 현실과 다른 환경에서 새로운 사회적인 관계를 꾸리는 재미와 맞닿아 있지만, 2인용 로컬 협동 게임은 그 조건상 완전히 다른 제반에서 재미가 작동한다. 요제프 파레스는 2인용 로컬 협동 게임을 제작하는 의도가 "함께 스토리 경험을 공유하는 것"과 만난다는 걸 밝힌 바 있다. [2] 2인용 로컬 협동 게임이 가진 계보와 환경은 소위 "스토리 경험의 공유"에 방점이 찍힌다는 점에서 멀티플레이 상의 협동과 궤를 달리한다. 이 2인용 협동 비디오 게임의 역사는 이 인용 조종간을 갖춘 형태가 대부분인 아케이드 게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우리의 UX를 찾아서: 오락실 코옵을 추억하다"는 "서로의 캐릭터에 더 도움이 되는 버프 아이템(또는 무기)를 양보하는 미덕"과 "나는 살아남았지만 혼자 남아서 플레이하기 싫어 2p를 부활시키기 위해 선뜻 100원을 내"는 실천들이 뒤얽힌 아케이드 오락실을 회상한다. [3] 서로의 생명을 100원짜리 동전을 대신 지불해 기꺼이 상대의 목숨을 연장하는 협력의 동인은 기기가 변화하며 새로운 경향성을 띠게 된다. 콘솔로 옮겨간 2인용 협동 플레이는 필수가 아닌 선택 사항으로 제공되는 사례가 많다. 본래 싱글 플레이에 기반을 둔 게임에 두 사람이 함께 플레이할 수 있도록 아바타를 추가하는 식이다. <슈퍼마리오 브라더스>의 마리오와 루이지, <별의 커비 디스커버리>의 커비와 웨이들 디, <컵헤드>의 컵헤드와 머그맨, <컬트 오브 더 램>의 어린 양과 검은 염소가 대표적인 쌍일 테다. 2p 아바타는 자주 오리지널 주인공의 혈육이거나 절친한 친구이거나 상대의 보색을 띤 분신으로 설정된다. 두 캐릭터의 역할이 주인공과 보조자로 분명히 나뉠 수도 있고, 싱글 플레이 주인공과 복제 수준으로 유사한 능력과 기술을 공유하기도 한다. 이때 두 번째 플레이어, 2p의 경험은 조작 실력과 게임에 대한 이해도 등이 상대적으로 적은 플레이어 역시 아우를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놀이터가 아닌 비디오 게임에서 '깍두기'를 들이는 것과 유사하다. 2p 플레이는 필수로 강제되지 않는다. 그건 게임을 함께 경험하고 싶은 아이, 가족, 친구, 연인, 동생을 포함하기 위한 기능이다. 로컬 2인용 협동의 선택지는 그저 게임을 '시청'하는 게 아쉽고, 조작하고 놀고 고투하며 밀고 나가는 게임 경험을 공유하고 싶은 소망에 대한 응답으로 작동한다. 그로부터 2인용 협동 게임의 보편적인 생존 양상이 나타난다. 한 플레이어가 게임 오버를 맞이해도, 다른 플레이어가 살아남았다면 플레이는 계속된다. 마치 아케이드 게임에서 2p 플레이어를 위해 동전을 넣으면 계속 함께 플레이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두 사람이 동시에 게임 오버를 맞지 않는 이상 게임 오버를 맞은 이도 금방 부활할 수 있다. 시간적인 지연을 두거나 다음 스테이지까지 조작을 할 수 없는 식의 일시적인 페널티를 받을 뿐이다. 게임의 난이도에 따라서 페널티의 수준은 달라지지만, 2p 옵션에서 동반자로 인해 겪는 불편이나 다툼의 여지가 최소화된다는 점은 공통된다. 함께 게임을 하는 상대를 탓하며 얼굴을 붉히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2인용 협력 플레이에서, 두 사람의 플레이어는 서로에게 있어 여벌의 체력, 생명, 하트이며 게임 오버를 막는 보증이다. 그들은 분명 분리된 캐릭터를 조종한다. 그렇지만 플레이어는 두 개의 심장을 가진 듯이, 죽은 이후에도 상대를 통해 게임이 지속될 수 있음을 안다. 더불어 그 지속 가능성을 전략적으로 염두에 두고 협상한다. 나는 너보다 체력이 많이 달아서 금방 죽을 테니까, 더 공격적으로 근접전을 벌이거나 방어적으로 보조하겠다는 식으로 말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별의 커비 디스커버리>의 커비와 웨이들 디는 아이템을 먹어 획득할 수 있는 추가 '하트'를 뽀뽀로 상대에게 나눠 줄 수도 있다. 물론 여기서 주고받아지고 타협이 이뤄지는 건 생명이 아닌 생명의 은유고, 그 생명의 은유는 계속해서 가상의 시공간을 전개해 가고, 게임을 진행하고, 역경을 돌파하기 위해 필요한 권한 자체다. 두 플레이어에게 주어진 생명이 편리하게 유연한 공유물이란 점에서, 2p 협동 플레이는 연대책임을 강제하고 그 강제가 재미의 일부가 되는 멀티플레이 게임들의 방식과 대척점에 있다. 연대책임 멀티플레이의 가혹한 판본 중 하나인 <체인드 투게더Chained Together>와 대조해 본다면 차이는 더욱 극명하게 다가올 것이다. 다만 2p 협동 플레이의 선택이 극적으로 난도를 낮추거나 쾌적하기만 한 플레이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기본적으로 싱글 플레이를 위해 구성된 화면이기에 상대 아바타의 활달한 움직임 자체가 나의 이동과 조작에 가야 할 시선을 분산시키고 산만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헷갈리지 않게끔 두 캐릭터가 완전히 구별되는 색깔을 키 컬러로 가짐에도 불구하고 혼선은 일어난다. <컵헤드>와 같이 난전이 벌어지는 고난도 게임에선 협동플레이가 싱글 플레이보다 더 어렵다고 여겨진다. 2P의 선택지를 제공하는 비디오 게임이 대체로 횡 스크롤 혹은 탑다운 뷰 게임에 기반을 두는 시리즈인 까닭도 카메라의 주도권과 초점을 누가 가져가야 하냐는 문제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이다. <커비 디스커버리>는 카메라가 세 축으로 모두 움직일 수 있는 3D 환경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커비를 조작하는 이가 카메라의 조작 능력을 가지고, 플레이 영역에서 웨이들디가 벗어나면 자동으로 커비 곁에 소환되게 했다. 두 플레이어가 같은 화면을 바라보게 끔 하는 보이지 않는 불편한 강제력이 작동하고 있음을 플레이어는 실감할 수밖에 없다. <잇 테이크 투>와 마찬가지로, <웨이 아웃Way Out>, <스플릿 픽션Split Fiction>에서도 헤이즐라이트 스튜디오의 게임들은 분할 화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카메라의 주도권 문제를 해결한다. 이것은 이인 협력 플레이가 선택지이기를 넘어서, 시작부터 이인 협력 플레이를 위해 디자인된 구성이기에 가능하다. 두 게임에서 분할 화면이 줄곧 유지되는 건 아니다. 횡 스크롤과 탑다운 뷰를 동원해 2인용 협동 플레이에 친숙한 다종의 게임 문법을 참조하기도 한다. 그렇게 3D 공간 상의 퍼즐, 파쿠르, MMOPRG, 레이싱의 동사들이 대거 공존하는 협력 게임이 된다. 게임 오버의 기준은 위에서 소개한 2인 협력 플레이와 마찬가지로 두 플레이어의 아바타가 동시에 죽는 것이다. 다른 플레이어가 생존해 있다면, 내가 아무리 기가 막힌 실수를 해서 아바타를 죽이기를 반복하더라도 게임 오버는 일어나지 않는다. 매분 매초가 아슬아슬한 생존의 기로로 화하는 액션 시퀀스에선, 죽은 이가 부활하는 데 약간의 '쿨타임'이 요구된다. 남은 이는 그 쿨타임 시간 동안 홀로 살아남아서 게임 오버를 막을 수 있다. 사실 게임 오버 자체도 크나큰 실패로 의미화되진 않는다. 짧은 간격으로 이뤄지는 자동 저장이 플레이어를 게임 오버 거의 직전의 순간으로 되돌려 놓는다. 설령 둘이 나란히 죽는다 해도 다시 새로운 방식의 협동을 빠르게 시도해 볼 수 있다. 가상의 시공간을 전개해 가고 게임을 진행하고 역경을 돌파하기 위해서 필요한 권한, 정체되지 않고 움직여 가는 이야기의 생명은 이런 죽음과 부활의, 정지와 재생의 재빠른 교대를 통해서 힘을 얻는다. 그런데 이 교대는 서로가 생명선 손금의 연장이 되어주는 협력 플레이의 플레이어성 역시 변화시킨다. 어쩐지 일론 머스크를 닮은 사악한 출판사 사장이 불공정 계약으로 작가들의 머릿속에 있는 이야기를 뽑아내 XR로 재구성하겠다는 괴상한 계획을 펼친다는 배경에서 시작하는 <스플릿 픽션>를 살펴보자. 이 계획에 걸려든 상극의 성격, 상극의 취향인 두 여자 주인공 미오와 조이는 각자가 만든 픽션 속 사이버펑크 세계관과 판타지풍의 세계관을 함께 오가며 미래형 사무라이가 되거나 톨킨 풍의 판타지 마법사로 활약한다. 게임적인 숏폼의 릴레이를 구성하려는 듯이 카메라, 화면 분할, 조작 방식, 액션 양상은 쉴 새 없이 변화한다. 두 플레이어의 아바타는 단순히 시각적 일관성이나 유사성에 일치되지 않고, 협력의 두 축을 이루는 매개체로서, 위아래로 흔들어 움직일 수 있는 시소의 양 끝으로 인식된다. 우화를 연상케 하는 시퀀스 하나가 이것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조이가 어린 시절에 쓴 동화 속 세계에 미오와 조이는 귀여운 돼지가 된 채로 떨어진다. 한 돼지는 마법 방귀로 멀리 날아갈 수 있고, 다른 돼지는 목에 달린 스프링을 사용해 높이 튀어 오를 수 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는 마법 돼지 농장의 마법 돼지를 조작하며, 플레이어는 협력해서 퍼즐을 풀어나가야 한다. 집채만 한 거대 돼지나 날개 달린 돼지에 슬슬 익숙해지고 이 세계도 썩 나쁘지 않고 유쾌하단 걸 받아들일 무렵이면, 미오와 조이는 퍼즐 풀이 끝에 도착한 종착지에서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간다. 그 미끄럼틀은 사실 도축 공장의 기계로 이어진다. 두 돼지는 이제 식탁 위의 소시지가 되고, 불판 위를 구른 후 서로에게 케첩과 마요네즈를 칠해줘야만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다. "그래, 우리 자신을 굽지 않을 이유가 없지!" 플레이어의 조작을 통해 접시 위에 올라간 두 사람은 마침내 인간에게 먹힌다. 너는 나의 게임플레이를 지속하도록 해줄 지렛대이며 여벌의 심장이다. 나는 너의 게임플레이를 지속하도록 해줄 지렛대이며 여벌의 심장이다. "두 사람이 드는(It takes two)" 일이란 건, 두 사람이면 족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잇 테이크 투>에서, 갚아야 할 대출금과 이혼 문제와 독박 육아 및 출퇴근으로 닳을 대로 닳은 부부 코디와 메이는 토이 스토리를 연상시키는 동적인 무생물의 세계,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어린 딸의 환상 세계를 돌파해 간다. <스플릿 픽션>에서 출판 계약이 절실한 무명작가 미오와 조이는 자신들의 머릿속에 잠들어 있거나 폐기된 픽션의 세계를 돌파해 간다. 너와 나는 동격이지만, 그 외의 여타 존재자는 너와 나만큼 동격으로 부상하거나 하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와 나는 모든 걸 함께 감수할 수 있다. 우리의 놀이를 지키기 위해 희생 제의의 공범이 될 수도 있고, 우리의 놀이를 지속하기 위해 도축되고 먹히도록 서로를 부추길 수도 있다. 우리는 그로서 그토록 함께한다. 2인용 로컬 협력 게임의 상호 의존은 로맨틱하면서도 섬뜩해질 수 있는 폐쇄성을, 개인화되기보다 공모됨으로써 드러나는 폭력성을 도주로 없이 경험하는 환경을 이루기도 하는 것이다. 인형 살해와 돼지 자살을 다루는 두 개의 농담은 2p 로컬 게임의 협력 방식에 함축될 수 있는 폐쇄성과 폭력성을 까뒤집어 보인다. 이 분절적인 농담들은 협동 플레이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목숨' 개념을 통해 공동체에 대한 편안한 긍정으로 이어지기 쉬운 협동 개념이 그보다 복잡함을 드러내고 있다. 2인용 로컬 협동게임이 같은 화면을 바라보고 함께 떠들면서 게임을 하는 친근한 두 플레이어를 전제한 로컬 환경에서 대체로 진행됨을 고려해 상상하자. 전략적인 협력을 도모하던 대화가 끊긴다. 어색한 정적이 끼어든다. 황망한 웃음을 터뜨릴 수도 있다. 서로를 바라보면서 '어... 이게 대체 뭐지?' 하고 물어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이 이미 받아들이고 익숙해진 협동의 조작은 진행될 것이다. 게임의 진행을 위해 두 사람이 함께 필수적으로 겪고 공유해야 하는 "스토리 경험"이란 그러한 불편한 침묵과 괴리를 함께 감내하는 차원까지 이를 수 있는 것이다. [1] Ewoldsen D, Eno C, Okdie BM, Velez J, Guadagno R, et al. (2012) Effect of playing violent video games cooperatively or competitively on subsequent cooperative behavior. Cyberpsychology, Behavior and Social Networking 15: 277–280 [2] Regan, T., & Fares, J. (2025, February 18). ‘No micro transactions, no bullshit’: Josef Fares on Split Fiction and the joy of co-op video games. Tom Regan. The Guardian . Retrieved May 30, 2025, from https://www.theguardian.com/games/2025/feb/18/josef-fares-interview-split-fiction-coop-video-games . [3] 우리의 UX를 찾아서: 오락실 코옵을 추억하다 . 게임제너레이션 GG. (2022, October 10). https://www.gamegeneration.or.kr/article/14df370d-2dfd-4c3f-b711-79e58f3b5cc5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성훈 문학을 전공했다. 게임과 만화를 좋아한다. <심즈 4>는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 게임인데 1500시간 정도 했고 그게 수치스러운지 웃긴 건지 헷갈린다. 뚜이부치란 필명으로도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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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G Vol. 13 매년 여름 열리는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이 2회째를 맞았습니다. 새로운 필자들의 새로운 접근들을 소개합니다. <바이페즈(双相)>와 게임의 신체화 2022년 11월 중순, 랩시드(西山居SEED实验室, 시산쥐SEED실험실)에서 인큐베이팅한 중국산 공익게임 <바이페즈>가 정식 출시됨으로써, 국내 최초 게임 형식으로 양극성 장애[역주: 조울증]를 다룬 게임이 됐다. 조증과 우울증이 번갈아 나타나는 정신질환인 양극성 장애는 전 세계에 약 6천만 명의 환자가 있다. Read More [Editor's View] GG 13호는 1년만에 돌아온 게임비평공모전 수상작 특집입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많은 분들의 응모가 있었지만, 모든 글을 함께 읽을 수 없어 아쉬운 마음입니다. 첫 회 공모전과 달리 올해부터는 수상작 안에서 별도의 등급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최우수, 우수보다도 게임비평과 담론에 참여하는 사람의 존재가 더 우선이라고 생각한 결과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번 호 메인 테마에서 당선작 7편을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Read More [Interview] Bringing the sense of presence into esports – what and how: Yeong-seung Ham, Program Director at Riot Games. The feeling of being part of the crowd is a powerful experience. In traditional sports, this empowering moment is known as "hyeonjang-gam," which can be translated as the "feeling of presence." Despite technological advancements and high-speed internet that allow us to watch sports matches remotely from home, many fans still choose to visit the on-site venue to immerse themselves in the passion, sweat, tears, cheers, and chanting that cannot be fully transmitted through a screen. Some become fans of a sports team after experiencing an engaging moment at the stadium, chanting alongside a group of people. Even in esports, numerous fans have missed spectating digital game matches at physical on-site stadiums during the Covid-19 pandemic. Read More [공모전] 게임과 행위 원리 – 놀이와 협박 플레이어는 게임을 왜 플레이하는가? 이 질문은 노는 자가 왜 노는가라는 질문으로 대체될 수 있다. 최근의 논의들 중에는 게임을 예술로 ‘인정’받고자 어떠한 실용성이나 사회 · 정치적 참여 등에 기여한다며 생산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게임은 그러한 효용적 가치들을 충분히 발생시킬 수는 매체인 것으로 보이긴 한다. 그러나 그것이 플레이어가 게임을 왜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가 정말로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실천과 효용을 함양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500시간 동안 앉아 있는가? 재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Read More [공모전] 레벨 디자인을 넘어서 게임 관계자들에게는 상식적인 이야기겠지만, 게임에서 레벨 디자인은 게임이 담고자 하는 세계를 디자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유저가 어떻게 게임을 경험하고 반응할지 예측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세계가 어떤 주제를 담고 있는지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가령, 수많은 논쟁과 악습을 생산했음에도 <리니지2>(엔씨소프트, 2003~)의 레벨 디자인을 비난할 방법은 많지 않다. 물론 일부 플레이어로부터 <리지니2>의 레벨 디자인은 오늘날까지 게임업계의 악습으로 고착된 사행성 기반의 ‘착취적 BM’이 자라나는 초석을 제공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되려 엔씨소프트가 지난 10년간 ‘BM 연구’라는 그럴싸한 미명 아래에 범해온 운영 권력의 남용을 호도하는 지적에 가깝다. 그만큼 레벨 디자인은 게임 콘텐츠의 성패를 넘어, 게임 자체의 정체성과 존재 이유를 결정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Read More [공모전] 모바일 리듬 게임에서 ‘엄지러’를 선택하기-‘프로젝트 세카이 컬러풀 스테이지! feat.하츠네 미쿠’를 중심으로 ‘엄지족’이라는 신조어가 있었다. 2000년대 폭발적으로 보급된 스마트폰이 사회 전 분야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을 때였다. 엄지를 이용해 스마트폰의 화면을 누르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청년을 일컬어 ‘엄지족’이라 불렀다. M으로 시작하는 것에 착안해 이들 세대를 모바일 세대, M 세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도 그런 말을 쓰지 않는다. 모두가 ‘엄지족’이자 모바일 세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Read More [공모전] 모순된 세계의 충돌을 '다시' 그릴 때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미지를 좇는다. 이는 누군가에게는 두려움이고, 누군가에게는 믿음이다. 세상에는 언제나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며, 현재 우리가 가진 논리나 통용되는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진실이 존재한다는 믿음. Read More [공모전] 오디오 로그의 문학적 요소와 방법론 1993년 [시스템 쇼크]라는 비디오 게임이 발매되었다. 호러 성향의 던전 크롤러와 FPS 액션 간의 결합한 이 게임은 여러 지점에서 게임 서사 전달 방식에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했다. 바로 ‘오디오 로그’ 칭하는 음성 기록물이었다. 비디오 게임에 등장하는 오디오 로그는 기본적으로 필드 내 아이템으로 배치되어 있다. 오디오 로그가 있는 장소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실시간으로 기록하고, 이전에 있었던 사건을 회고하는 내용들로 이뤄져 있다. 플레이어가 오디오 로그를 읽기 시작하면 화면 좌측 아래엔 오디오 로그를 남긴 주인의 이미지가 뜨고, 중앙 아래에는 내용 텍스트가 뜬다. 스피커에서는 주인이 내용을 낭독하는 음성이 흘러나온다. Read More [공모전] 최종장과 변방_비디오 게임 속 공간적 한계의 실감 게임 세계의 종점에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이것은 어린이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무료 플래시 게임이 세상에 존재하는 비디오 게임의 전부인 줄 알았던 시절의 이야기다. 당시의 나는 커비와 똑 닮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플래시 게임에 빠져 있었다. 정식 게임판의 커비보다 이 안광 없는 가짜 “커비”와 먼저 면을 익혔다. 그때의 기준으로도 비춰봐도 결코 흥미진진한 게임은 아니었다. Read More [공모전] 현 시대의 택티컬 FPS 게임은 무엇을 담고 있는가: Ready or Not 비평을 중심으로 이 말은 ‘레드 스톰 엔터테인먼트’의 CEO이자 영국 해군 출신이기도 한 리틀 존스가 한 말이다. 90년대말 ‘레드 스톰 엔터테인먼트’에서 택티컬 FPS의 시초인 ‘레인보우식스’가 탄생한다. 톰 클랜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이 게임은 지금은 당연시되는 밀리터리 택티컬 FPS의 기본 공식들이 대부분 정립하여 FPS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었다 봐도 과언이 아니다. Read More [논문세미나] '스트리트파이터'는 무술martial arts인가? 그리고 그 운용기술, 다시말해 주어진 텍스트를 받아들이는 수용자의 관념과 자세에서 존스는 70년대 무술영화 붐과 2000년대 대전격투 게임이 같은 맥락에 선다고 분석한다. 오늘날 현대 격투기에서 사실상 중국 전통무술의 실전성은 파훼되었지만, 7-80년대에 이소룡 영화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동양무술은 북미에서 실제로 무술 도장의 붐을 이끌어냈고 수많은 청년들로 하여금 괴성을 지르며 신체를 움직이는 무술의 동작을 따라하게 만들었으며, 같은 맥락에서 EVO #37 이벤트 또한 동시대의 수용자들로 하여금 디지털화된 무술과 비슷한 무엇을 따라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Read More [북리뷰] 여성 게이머는 총을 쏠 수 있는가? 그리고 이 질문은 왜 중요한가? 이 책은 ‘여성 게이머는 총을 쏠 수 있는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에서 출발하여 게이머, 게임 캐릭터, 게임 산업 관련 종사자 앞에 ‘여성’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때 마주할 수밖에 없는 어려움과 불편함, 그리고 이런 문제들이 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해서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단순히 ‘이런 사례가 있고 그래서 나쁘다’는 식의 단편적인 나열이 아니라 앞서 밝힌 문제들이 어디에서부터 기인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면서 과연 지금까지 여성을 위한, 여성을 그린, 여성에 의한 게임이 존재하였는가에 대한 질문도 함께 던지고 있다. Read More [인터뷰] 창간 2주년, 우리는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 <게임제너레이션> 이경혁 편집장 인터뷰 그렇다면 독자들과 여러 필진이 함께 만들고 있는 게임 담론은 지금 어디까지 왔으며,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우리’의 읽고 쓰는 행위는 게임문화를 형성하고 변화시키는 사회적 실천이 되고 있는가? 창간 2주년을 맞아, GG의 이경혁 편집장과 평소에는 담지 못했던 웹진 자체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왔다. GG가 만들어졌던 배경이나, GG를 만드는 당시 상상했던 독자층 등의 비하인드 스토리들은 위와 같은 질문을 더욱 고민하게 할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Read More 심사위원장 총평 제 2회 게임 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에는 총 51편의 원고가 투고되었다. 작년에 비해 수적으로는 다소 줄어들었으나, 원고의 전반적인 질적 수준과 비평의 주제 및 소재의 다양성 측면에서는 큰 진전이 있었다. Read More

  • 시각장애인과 게임: 편견이라는 경계를 넘어

    반지하게임즈의 스토리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이후, 시각장애인의 게임 접근성에 대하여 당사자로서 이야기할 기회가 가끔 생기고 있다. 나는 게임을 좋아하지만 잘 하지 못하고, 현재 가지고 있는 직업도 게임과는 무관한 것이라서 사실 이런 기회가 생길 때마다 늘 조심스럽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평범한 시각장애인으로서 내가 경험한 게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시각장애인들이 더 폭넓게 게임을 즐기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역시 한 게이머의 입장으로 말해 보고자 한다. < Back 시각장애인과 게임: 편견이라는 경계를 넘어 04 GG Vol. 22. 2. 10. 반지하게임즈의 스토리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이후, 시각장애인의 게임 접근성에 대하여 당사자로서 이야기할 기회가 가끔 생기고 있다. 나는 게임을 좋아하지만 잘 하지 못하고, 현재 가지고 있는 직업도 게임과는 무관한 것이라서 사실 이런 기회가 생길 때마다 늘 조심스럽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평범한 시각장애인으로서 내가 경험한 게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시각장애인들이 더 폭넓게 게임을 즐기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역시 한 게이머의 입장으로 말해 보고자 한다. 인간이 오감 중 시각에 의존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고들 한다. 그래서인지 시각장애인의 게임 접근성에 대해서는 다른 장애 영역에 비해서도 그 논의가 더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90년대부터 시각장애인들도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90년대 중반에는 컴퓨터가 지금보다 훨씬 고가의 물건이었고, 컴퓨터의 기본적인 사용법부터 따로 강사 선생님에게 배웠었다.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쓰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기본적으로 화면에 출력되는 내용을 읽어 주는 기능을 활용한다고 보면 된다. 운영 체제에 따라 그 이름과 기능은 달라져 왔지만 기본 틀은 같다. 다시 컴퓨터를 배우던 초등학교 당시로 돌아와서, 그 당시 선생님께서 컴퓨터에 재미를 붙이고 익숙해지라는 의미에서 가르쳐 주신 간단한 게임이 내 인생 첫 게임이었다. 90년대에 시각장애인들이 주로 했던 게임들을 생각해 보면 음성을 들으며 할 수 있는 기억력 테스트 게임이나 숫자를 맞춰서 판정하는 야구 게임, 청기 백기 게임 같은 것들이었다. 그 외에 PC 통신을 다룰 줄 알던 사람들은 현재의 MMORPG 게임의 원형 중 하나가 되는 텍스트 머드 게임을 즐기기도 했는데, 초고속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비시각장애인들이 화려한 그래픽과 더 다양한 기능이 지원되는 다른 게임으로 떠나간 뒤에도 시각장애인들은 여전히 머드 게임을 활발히 즐기고 있다. 그 외에도 체스나 윷놀이, 트럼프 등 보드 게임이나 카드 게임을 PC로 이식한 게임들을 즐기기도 했는데, 오히려 윈도우즈 운영체제가 보편화되고, 모바일로 환경이 바뀌어 가는 과정에서 이러한 게임을 시각장애인들이 즐기기에는 더더욱 어려워진 것이 안타깝다. 스마트폰이 보편화되고, 애플에서 자사의 스마트폰인 아이폰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 낭독 기능인 보이스오버 기능을 기본으로 탑재하면서 시각장애인들도 스마트 시대에 발을 들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수많은 모바일 게임이 범람하는 가운데서도 시각장애인들이 즐길 수 있는 게임은 거의 없었다. 2010년대 이후에 시각장애인들이 즐길 수 있는 게임들은 대부분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개발된 오디오 게임이 주류를 이루었다. 소리를 듣고 적의 위치를 파악해 물리치는 대전 액션 게임이나 RPG부터 TCG 게임, 퍼즐 게임, 리듬 게임, 시뮬레이션 게임 등 그 장르도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이 게임들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외국 제작사에서 만드는 게임들이라 영어 정도만 지원할 뿐이라 플레이를 하다 보면 게임을 하고 있는지 듣기 평가를 하고 있는지 헷갈릴 지경이다. 게다가 시각장애인, 그 중에서도 PC 및 모바일에 익숙한 일부 사람들을 고객층으로 하다 보니 시장 규모가 작고, 그래서 만들어지는 게임들은 대부분 소규모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도 있다. 오디오 게임 외에 즐길 수 있는 게임들을 돌아보아도 그렇게 많지는 않다. 텍스트 위주로 플레이할 수 있는 웹게임이나 일부 모바일 게임인데 이마저도 대부분 영어 게임들이다. 번역기 돌린 수준이라도 한국어 지원을 해 주는 게임마저도 드문 실정이다. 사실상 2022년 현재 한국어로 시각장애인이 제대로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이다. 현재 서버가 살아 있는 텍스트 머드 게임들을 합쳐 보아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은 이유는 시각장애인이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이 적으니까 플레이 가능한 게임을 더 많이 만들어 달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오디오 게임 등은 여러 현실적 제약으로 인해 그 규모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답은 무엇일까? 나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법적, 제도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 현재 장애인들은 게임보다도 당장의 생존에 더 밀접한 생존권 문제와 씨름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게임 접근성 관련 논의는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 2021년도에 국회에서 장애인의 게임 접근성 관련 법안이 발의되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하태경 의원 "게임법에 장애인 접근성 향상 넣고 가이드라인 개발하자“ - 디스이즈게임 https://m.thisisgame.com/webzine/nboard/4/?n=123269 ) 장애인의 게임 접근성 문제가 당장 급한 건 아니지 않냐고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게임은 이미 하나의 문화 현상이다. 게다가 최근 떠오르고 있는 메타버스 또한 게임의 방식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장애인의 게임 접근성은 이미 생활의 문제가 되어 가고 있는 셈이다. 또한 다양한 게임들을 거쳐 오며 시각장애인들이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서는 불법과 탈법의 경계선을 줄타기해야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절감하곤 했다. 앞서 시각장애인이 한국어로 플레이 가능한 게임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적다고 언급했는데, 거기서 ‘정식으로’라는 말을 앞에 붙인다면 그 개수는 더더욱 줄어들게 된다. 정식으로 플레이를 할 수 없어 개인 개발자가 개발하는 비인가 접근성 모드를 활용하여 플레이하거나, 우연히 어느 정도 플레이는 가능하지만 일부 기능은 화면 낭독 기능으로 제대로 접근조차 되지 않아 현금 결제를 하고도 혜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기도 한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개발되는 오디오 게임들 중에서도 다른 유명 게임의 게임 방식 등을 거의 그대로 베껴 오는 경우들이 있다. 그런데 마냥 탓할 수만도 없는 것이 그런 방식으로라도 명성만 들어 보았던 유명 게임을 체험해 볼 수 있다는 게 게임을 좋아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강한 유혹이다. 또한 일부 게임의 비인가 접근성 모드를 플레이하다 보면 제작사 차원에서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답답한 마음이 들 때가 많기도 하다. 이러한 여러 문제들의 상당 부분은 장애인의 게임 접근성에 대한 논의를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이고, 적절한 법을 만드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법을 만들어 강제한다고 해서 상황이 바로 좋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게임 업계의 인식이다. 현재 시각장애인이 플레이 가능한 게임이 극단적으로 적은 이유는 물론 기술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시각장애인이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새로운 게임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법적, 제도적 장치 마련과 함께 뒤따라야 할 것은 인식의 변화이다. 시각장애인이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라, 시각장애인‘도’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실제로 소수이지만 그런 사례들이 존재하고 있다. 먼저 반지하게임즈에서 제작하고 있는 모바일 게임 〈서울 2033〉의 예를 들고 싶다. 〈서울 2033〉은 출시 당시에는 시각장애인의 플레이를 상정하지 않고 만들어졌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일부 용감한 시각장애인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플레이를 시도해 본 결과 관리해야 할 중요한 수치를 읽어 주지 않아 불편한 점이 있기는 했으나 어쨌든 기본적인 플레이 자체는 가능했다. 그래서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앱스토어에 리뷰를 남겼는데 제작사에서 적극적으로 나서 주셔서 지금까지도 접근성 관련 업데이트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반지하게임즈의 다른 텍스트 게임에도 아이폰의 보이스오버와 안드로이드의 토크백 접근성이 반영되고 있다. 사운드도 없고, 글도 많은데 시각장애인도 할 수 있는 모바일 인디게임서울2033 - 스브스뉴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5230699 〈서울 2033〉의 보이스오버 접근성 관련 개발은 우연에서 시작되었다. 〈서울 2033〉은 텍스트 기반으로 선택지를 고르면 그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는 방식의 게임이다. 즉, 복잡한 조작이 필요 없다. 개발 엔진도 일반적인 게임 엔진이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보이스오버로 어설프게나마 플레이가 가능해 개발사에 건의라도 해 볼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건의에 응답해 준 것은 결국 개발사의 의지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만약 반지하게임즈에서 시각장애인이 무슨 게임이냐며 무시했다면 지속적인 시각장애인 유저들의 플레이는 불가능했을 것이고, 나 또한 공모전에 참여해 스토리 작가로 활동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서울 2033〉의 보이스오버 접근성은 완벽하지 않고, 업데이트를 할 때마다 종종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관련 건의를 할 때마다 적극적으로 개선하려는 모습을 꾸준히 보이고 있기 때문에 시각장애인 유저들 사이에서 〈서울 2033〉은 여전히 활발하게 플레이되고 있다. * 〈서울 2033〉에 적용된 보이스오버 접근성 시연 영상. 또 한 가지 사례로 XYRALITY에서 개발한 모바일 게임 〈성주와 기사〉를 들 수 있다. 〈성주와 기사〉는 예전에 유명했던 웹게임인 〈부족전쟁〉과 비슷한 방식의 게임으로 자신의 성채를 키우고 그것을 바탕으로 주변 지역을 평정해 나가는 게임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다른 유저들과 동맹을 맺기도 하며 경쟁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런 방식의 게임은 지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니 시각장애인이 플레이하기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현재 나의 위치를 중심으로 거리를 제시하고, 좌표 개념도 있기 때문에 충분히 플레이가 가능하다. 〈성주와 기사〉의 사례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서울 2033〉과 같이 소설과 비슷한 형식의 스토리 중심 게임 뿐 아니라 다른 방식의 게임들도 발상을 조금만 전환한다면 충분히 시각장애인들도 플레이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도에 좌표 기능을 도입하고, 주요 지점이나 NPC의 위치를 알려 주는 것만으로도 할 수 있는 게임의 폭이 넓어지지 않을까, 이 게임은 방식이 간단해 보이는데 버튼에 보이스오버로 접근만 되어도 플레이가 가능할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한두 번 들었던 게 아니다. 실제로 시각장애인의 플레이를 상정하지 않고 만들어진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 동원되는 온갖 꼼수들을 보고 있자면 편견을 깨고 인식을 전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기술 발전이 언제나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는 것일까? 실제로 장애인들은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이전 시대보다 활발하게 사회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만 하더라도 지금 이 글을 쓰기 위해 화면 낭독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 반대급부로 너무나 빠른 기술 발전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는 약자들을 도태시키기도 한다. 무인 키오스크 앞에서 난감해하는 노인이나 장애인의 이야기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화려한 그래픽이 게임에 도입되기 이전, 텍스트 머드 게임이 주류이던 시절에 시각장애인 게이머들이 오히려 다른 비시각장애인 게이머들과 공감대를 더 많이 형성할 수 있었다. 엄청나게 비싼 슈퍼 컴퓨터 한 대보다 도로의 턱 높이를 낮추는 것이 휠체어를 탄 사람의 활동에는 훨씬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서울 2033〉이나 〈성주와 기사〉 같은 사례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바는 명확하다. 시각장애인, 나아가 장애인의 게임 접근성, 그보다 한 차원 더 나아간 장애인의 각종 권리를 신장하기 위해서는 기술 발전과 대규모 자본 투자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편견이라는 이름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 또한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내가 게임을 좋아하는 건지도 모른다. 게임 속 세계에는 편견도 제약도 없다. 어떤 역경이라도 게임의 규칙 안에서는 넘어설 수 있는 난관일 뿐이다. 지난 1년 동안 아주 조금이지만 게임을 만드는 현장을 엿보면서 게임을 만든다는 일은 굉장히 창조적인 에너지를 요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애인과 게임. 지금 당장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느껴지지만, 게임을 만드는 분들의 열정과 아이디어가 모인다면 언젠가 그 두 단어의 조합도 자연스러워지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반지하게임즈 스토리 작가) 강신혜 게임에 관심이 많은 시각장애인입니다. 현재 중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근무하는 동시에 반지하게임즈의 게임 스토리 작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 캣스모폴리틱스(Catsmopolitics): 고양이와 기계가 자본세 지구에 착륙하는 방법

    인종차별, 여성혐오, 소수자 차별, 장기화된 실업, 투기와 불평등, 전쟁과 극우정치가 만연한 오늘날 유일하게 아무에게도 미움 받지 않는 존재가 있다면 아마도 고양이일 것이다. 좌파도 우파도, 남성도 여성도, 베이비부머도 청년도, 무슬림도 카톨릭도 고양이를 사랑한다. 사람들은 기꺼이 골목길에 사료와 물그릇을 갖다놓으며, 고양이와의 사랑스런 일상을 촬영해 공유한다. 소셜미디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재는 인간이 아닌 고양이다. < Back 캣스모폴리틱스(Catsmopolitics): 고양이와 기계가 자본세 지구에 착륙하는 방법 08 GG Vol. 22. 10. 10.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인종차별, 여성혐오, 소수자 차별, 장기화된 실업, 투기와 불평등, 전쟁과 극우정치가 만연한 오늘날 유일하게 아무에게도 미움 받지 않는 존재가 있다면 아마도 고양이일 것이다. 좌파도 우파도, 남성도 여성도, 베이비부머도 청년도, 무슬림도 카톨릭도 고양이를 사랑한다. 사람들은 기꺼이 골목길에 사료와 물그릇을 갖다놓으며, 고양이와의 사랑스런 일상을 촬영해 공유한다. 소셜미디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재는 인간이 아닌 고양이다. 자연을 정복하고, 기계문명과 산업도시를 건설해 지구의 지배자로 거듭난 인간이지만 고양이 앞에서는 애정결핍 노예가 돼버린다. 오늘날 고양이는 신성불가침이라 할 수 있으며, 어쩌면 지구 역사상 유일하게 인간을 굴복시킨 생명체일지도 모른다. * 필자와 7년간 삶을 함께하고 떠난 고양이, 제리입니다. 이처럼 아낌없는 사랑을 받는 존재인 만큼, 고양이를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정도 남다르다. 고양이는 왜 고롱거리는 걸까? 고양이는 왜 발치를 맴돌며 머리를 비비는 것일까? 쥐나 벌레를 선물로 바치는 고양이의 심리는 무엇일까? 동물행동학자가 아닌 일반 사람(집사)들이 고양이의 언어를 이토록 이해하려고 애쓴 적은 지금까지 없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우화 속에서 의인화되지만, 고양이는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쉽사리 의인화되지 않는 존재다. 사람들은 고양이 행동에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고, 재해석하며, 고양이의 시각에서 사고하려고 든다. 고양이를 의인화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을 의묘화한다. 고양이의 시점에서 스스로를 굽신거리는 집사로 희화화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을 만났을 때 있는 힘껏 몸짓 발짓을 동원하는 노력과 비슷한 맥락이다.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나로부터 벗어나서 타자처럼 생각해 보는 것이다. 먼 곳에서 왔지만 가까워지고 싶은 존재, 친족이 되고 싶은 반려종으로서 고양이의 사회적 의미는 요즘 아주 의미심장하다. 〈스트레이〉는 이처럼 ‘고양이와 함께 되기’를 꿈꾸는 기묘한 심리를 투영한 게임이다. 고양이를 대상으로 다루는 게 아니라, 고양이가 되어보는 것이다. 고양이를 묘사한 문학·영화는 항상 있어왔고, 인기도 많았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고양이〉는 고양이의 시점에서 인간 사회를 묘사하며, 영화 〈내 어깨 위 고양이 밥〉은 진창에서 벗어나는 노숙자 ‘밥’과 가족이 된 길고양이의 실화를 다룬다. 이슬람 성전 쿠란에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예배 중 자신의 품에 기어들어와 잠든 고양이를 깨우지 않기 위해 자신의 옷소매를 자른 일화가 담겨 있다. 그러나 실제 고양이가 되어 발톱을 긁고, 점프하는 게이밍 경험은 그 이상이다. 〈스트레이〉는 고양이를 인간과 동등한 행위자의 관점에 위치시키면서, 객체라고 생각되는 비인간(고양이, 기계, 도시)들이 자아내는 사회적 관계를 SF의 형식 속에서 재배치한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고양이에게는 이름이 없다. 어디에서 왔는지, 가족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사실 이름이나 가족은 인간중심주의적 개념이며 비인간에게는 불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고양이의 관점에서 인간 세계관을 비평하고자 했던 나쓰메 소세키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첫 문장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생동하는 비인간의 세계 게임은 폐허가 된 도시를 기웃거리다 지하로 떨어진 고양이의 탈출 여정을 그린다. 플레이어는 철저히 고양이의 시점에서 공간을 탐색하고 길을 만들어 나가야한다. 인간의 감각, 인간적인 사고방식은 통용되지 않는다. 문을 지나가기 위해서 문고리를 돌리는 것이 아니라 문을 긁어서 누군가가 열게 만들어야 하며, 거리의 평면적 공간이 아닌 건물의 수직적 공간을 이동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어디든 네 발로 착지할 수 있는 능력을 선물 받은 고양이에게 인간의 2차원적 운동은 고루할 뿐이다. 이 이름 없는 고양이로 가장 빈번하게 발 디디는 곳은 환풍구, 파이프라인, 테라스 난간이다. 스파이더맨이 아닌 이상 인간은 이런 식으로 공간을 인식하지도, 이동하지도 않는다. 〈스트레이〉에서는 인간적인 감각을 최대한 제쳐놓고 사고해야 한다. 게임은 매우 정교한 레벨링을 통해 지하에서 지상으로 이어지는 수직 도시 스테이지를 설계했으며, 각 페이즈들은 철저히 고양이의 동선에 최적화되어 있다. * 〈스트레이〉에서 인간 지각 요소인 미니맵, 위치표시기, 체력바, 마커 등은 등장하지 않는다. 플레이어는 고양이의 시점에서 공간을 인식해야 하며, 사물과의 상호작용과 좌표를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다소 불편하지만 이러한 비인간 감각에의 연동은 고양이만 갈 수 있는 경로와 퍼즐풀이를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이 공간 이동 경험은 낯설고 신비롭다. 기존의 게임 문법과 다르게, 우리는 고양이의 눈높이에서 사물들을 바라봐야 한다. 시선을 넓게 던지고, 어딘가를 항상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내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미니맵이나 지도도 존재하지 않는다. 데카르트적 좌표계가 공간 인식의 준거가 되지 않으므로, 플레이어는 도시 곳곳의 후미진 공간까지 아주 면밀히 검토하고, 반복적으로 탐색하면서 고양이의 감각으로 경로들을 확보해야 한다. 지금까지 수많은 게임들에서, 소실점은 언제나 인간의 눈높이(혹은 총의 조준선)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왔기 때문에 처음에는 낯선 이물감이 든다. 길을 헤매고, 화면을 올려다보느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탓에 울렁거림을 느낀다. 그러나 이런 공간 디자인은 단순히 플레이어를 곤경에 빠트리기 위함이 아니라, 비인간 행위자로서의 경험을 재조직화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플레이어는 인간이라면 떠올리기 어려운 비밀 장소들을 발견하거나 문틈, 창살 사이를 비집고 다닐 수 있으며 수백 미터 아래를 가뿐히 뛰어내려 옆 건물로 이동할 수도 있다. 고양이의 입체적이고 아크로바틱한 운동 속에서 우리가 재발견하는 것은 탈인간적인 물질 감각이다. 무심히 지나친 타이어, 녹슨 드럼통, 콘크리트 쓰레기들은 역설적이게도 고양이가 유유히 지나다니는 길을 열어준다. 이를 통해 〈스트레이〉는 산업문명의 기초가 되는 기계와 도시를 반생태적인 독성 공간이면서 동시에 보잘 것 없는 쓰레기더미로 묘사하는 중의 문법을 도입한다. 미디어학자인 이안 보고스트(Ian Bogost)의 말을 빌린다면, 상징과 해석을 강조하는 문학과 다르게 탐색과 항해를 강조하는 게이밍의 ‘절차적 수사학(procedural rhetoric)’이 고양이의 행위성과 입체적인 도시 이동 경험을 중개하고 있는 것이다. 〈스트레이〉의 독창적인 디자인은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고양이와 함께 되기’ 경험을 극적으로 증폭시킨다. 수직적이고 기하학적인 공간으로 직조되어 있지만, 고양이가 자유롭게 도시 공간을 누비고 다니듯 플레이어는 손쉽게 고양이의 신체 행동과 동기화될 수 있다. 게임을 진행하기 위해 난해한 기믹이 동원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몇 가지 버튼만 적절한 타이밍에 누를 줄 안다면, 그리고 고양이의 관점에서 사고할 줄 안다면 누구든 이 생동하는 비인간 세계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스트레이〉는 과거 수많은 사람들이 즐겼던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게임(예컨대 인디아나 존스 게임 시리즈같은)의 담담한 재해석으로 여겨진다. 그렇다. 〈스트레이〉의 세계에는 오로지 비인간 행위자들만 존재한다. 인간은 기후 재앙으로 멸종한 지 오래고, 인간의 하인 노릇을 하던 로봇종인 ‘컴패니언’과 주인공인 고양이만이 살아남았다. 인간의 흔적은 폐허가 된 지하도시에 즐비한 기계장치들에 검붉은 녹으로만 남아 있다. 인공지능에서 개성을 획득한 ‘컴패니언’ 들은 인간의 사고와 관습을 흉내내기는 하지만 인간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말 그대로 새로운 생명체다. 읽을 수 없는 기계 언어로 쓰여진 간판들, 쓰러지고 부서진 건물들, 우스꽝스러운 복장에 외골수 행동을 하는 컴패니언들 속에서 제기되는 질문은 명쾌하다.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인간이 아닌 존재들은 무엇인가?’ 이다. 함께-되기의 캣스모폴리틱스(catsmopolitics) 비인간 존재들에 대한 실존적 질문은 인간의 실존을 묻는 까뮈의 〈이방인〉이나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처럼 난해하지 않다. 〈스트레이〉의 로봇종과 고양이, 그리고 고양이보그(catborg)인공지능 드론은 서로 돌보고 협생하는 관계다. 이 설정이야말로 게이밍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지적이고 영리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소형 드론 B-12는 플레이어(즉 고양이)에게 계속 자신을 깨우라는 신호를 보내며, 나중에는 플레이어를 돕는 보철물로 합류한다. 고양이 전용 웨어러블에 탑재된 B-12는 생동하는 비인간 세계와 소통하기 위해 고안된 기계신 같은 존재다. 어두운 공간을 비추고, 고양이가 수집한 아이템을 디지털화해서 저장하며, 컴패니언-고양이 간 소통이 가능하도록 기계언어 번역을 제공한다. 플레이어는 B-12로부터 지상으로 나갈 수 있는 퍼즐풀이 단서를 제공받지만, B-12가 위기에 처했을 때(과부하로 전원이 꺼지거나 기능이 정지되었을 때)는 거꾸로 구해내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 고양이, 컴패니언(로봇종), 인공지능 드론은 협생 관계이다. 드론은 웨어러블 디바이스로 고양이와 합체, 고양이보그(catborg)가 되어 플레이어의 진행을 돕는다. 게임 속 오브젝트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라이트를 비출 뿐 아니라 컴패니언의 기계언어와 고양이의 야옹 소리를 번역해 소통이 가능하도록 만든다. 인간이 떠난 지하도시의 거주자 컴패니언은 고양이에게 다양한 도구를 제공하거나 이야기를 들려주며 고양이가 지면으로 나가도록 돕는다. 한편 고양이(플레이어)는 컴패니언의 생존을 위협하는 박테리아 균체 저크(zurk)를 물리치도록 도움을 주게 된다. 비인간 행위자들 간의 ‘함께-되기(becoming with)’의 경험을 통해, 역설적으로 우리는 인간이 야기한 자본주의와 기술의 문제들을 탈인간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상상력을 펼친다. 고양이와 드론, 모든 유기체를 갉아먹는 균체인 저크(zurk)로부터 지하도시에 격리된 로봇종인 컴패니언들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서로 협력한다. 이 비인간-행위자들의 끈끈한 네트워크는 인간이 만들어낸 질서 바깥에서도 객체들만의 정치가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스트레이〉에서 이들의 실존을 위협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질서와 발명품들이다. 고양이와 드론, 그리고 로봇종의 여정을 가로막는 위협은 멸망한 인간이 고안해낸 것들이다. 기후재앙을 맞이한 인류는 탄소배출을 중단하는 대신 탄소를 먹어치우는 박테리아를 개발한다. 요즘의 기후위기 국면에 대응하는 각국 정부들을 보면 정말 개연성 있는 시나리오다. 물론 이 선택은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박테리아는 처음에는 플라스틱과 탄소를 먹어치우지만, 유기체를 다 먹어치운 다음에는 금속까지 먹어치우는 방향으로 진화해버린다. 저크(zurk) 균체가 된 박테리아는, 동물과 인간 뿐 아니라 기계생명체인 컴패니언들까지 집어삼키고, 그 결과 식량난으로 멸종한 인간에 이어 컴패니언들도 지하 방공호에 긴 세월 격리된다. 이들을 격리하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규율하는 존재는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경찰 로봇, 센티넬(sentinel) 들이다. 센티넬은 격리를 해제하자고 주장하는 인간들을 감시하고 훈육하는 용도로 개발된 로봇들이지만, 인간이 사라진 후에는 밖으로 나가려는 컴패니언들을 억압하는 권력-기계가 된다. 포스트휴먼니즘 철학자 도나 해러웨이가 비평하는 것처럼, 인간 중심주의가 자아낸 트러블(기후위기, 계급갈등, 프랑켄슈타인 과학)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비인간의 존재를 가로지르는 ‘함께-되기(becoming with)’가 전제되어야 한다. 〈스트레이〉는 그 방법들을 플레이어들의 퍼즐 풀이 속에 아주 적절히 풀어놓는다. 인류가 처한 트러블을 극복하기 위해 선택해야 하는 옵션은 ‘어떻게 인간을 구할 것인가’ 라는 고전적인 휴머니즘이 아니라 포스트휴머니즘, 즉 어떻게 ‘비인간과 함께할 것인가’의 주제의식이다. 그러려면 우리는 이 게임에서 고양이의 시각에서 사고해야만 했듯이, 사물의 관점에서 상호작용을 재구성해야 한다. 고양이, 로봇, 인공지능 뿐 아니라 균체, 건물, 뗏목, 전기, 라디오, 악기, 금고에 이르기까지 유기체와 무기체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함께-되기’가 요청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단순히 객체(비인간 행위자)가 되어 상호작용하는 경험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브뤼노 라투르가 지적하듯이, 중요한 것은 끈끈하게 연결된 이 비인간 행위성들 속에서 가능한 정치, 즉 인간과 사물이 동등하게 객체이자 행위자임을 상정하는 가운데 그 네트워크가 창발할 수 있는 잠재적 코스모폴리틱스(cosmopolitics)를 발견하는 것이다. 내가 이 게임의 매커닉을 두고 캣스모폴리틱스(catsmopolitics)라고 부르는 맥락은 바로 여기에 있다. 철학 이념으로서의 코스모폴리틱스는 아주 난해하고 사변적이다. 그런데 〈스트레이〉는 비인간인 동시에 인간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고양이의 행위성을 투사해, 함께-되기의 경험들을 퍼즐풀이 문법으로 수사하면서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선언한다. ‘캣스모폴리틱스’는 시네마나 문학에서는 달성되기 어렵겠지만, 〈스트레이〉 같은 게임에서는 고풍스럽고 위트넘치는 방식으로 플레이어들을 설득하게 된다. 그루브, 하모니, 에코, 고양이...펑크!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이 게임이 사이버펑크의 외형을 하고는 있으되 사이버펑크의 문법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 어원 자체가 다르다. 사이버펑크(cyberpunk)의 펑크는 거칠고, 단순하며 반항적인 하위문화인 펑크(punk, 메탈과 록)에서 온 것이지만 펑크(funk)는 깊이 있고 은은한 냄새, 그루브, 전자음과 리듬과 결부된 재즈적 무드에서 비롯된 것이다. 휘황찬란한 네온싸인의 거리와 녹슨 기계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가운데 고양이가 뛰노는 풍경은 아주 흥미롭지만, 〈스트레이〉는 권력의 감시와 대안적인 자유, 증강인간과 넷러너 등 사이버펑크의 전형적인 주제의식이 아니라 과학기술을 맹신하는 트랜스휴머니즘과 기후재앙 시나리오를 비판적으로 소묘한다. * 사이버펑크(cyberpunk)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본질은 그루브와 조화가 강조되는 에코펑크(echofunk)이다. 부드러운 플로우와 애시드 재즈, 기계와 고양이 간의 따뜻한 상호작용 속에서 생태적인 감각이 되살아난다. 버스킹을 하고, 식물을 키우고, 테크노 음악을 발굴하는 로봇종들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황폐한 지구를 떠날 궁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가 살고 있는 지구에 착륙하는 방법, 캣스모폴리틱스를 배우게 된다. 그런데 이 붓터치는 punk가 추구하는 강함(중독, 환각, 메탈, 가죽)이 아니라 funk의 부드러운 플로우 속에서 구현된다. 플레이어는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하는 공간, 혹은 이벤트가 벌어지는 페이즈에 들어설 때마다 펑키한 애시드 재즈를 접하게 되는데, 이는 급박한 긴장의 폭발 속에서 카타르시스를 꾀하는 기존 대중문화의 문법과는 정 반대의 성격이라 할 수 있다. 감미로운 펑키 무드는 오히려 긴장을 이완시키고 공간의 사물들을 여유있게 살펴보도록 만드는데, 이 때문에 플레이어는 오히려 느긋하게 고양이와 공간의 하모니를 맛볼 수 있게 된다. 음악 뿐 아니라 펑크가 집약되는 공간은 아주 힙하고 히피스러운 소품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플로우에 몸을 맡긴 채, 고양이를 움직여 이 사랑스러운 프랑스 애니메이션풍 미장센을 하나하나 음미하기 시작한다. 소파에 누워 잠을 잘 수도, 카펫 위에 꾹꾹이를 할 수도 있으며 TV와 라디오를 켜거나 끌 수도 있고, 냥점프와 냥펀치로 집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 수도 있다. 이 모든 행동은 느긋함을 유도하는 게임 매커닉과 펑키한 요소들(음악, 미장센)을 통해 조화되며, 느긋하게 진정된 상태가 아니면 좀처럼 되돌아보기 어려운 주제, 생태과 기술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게 된다. 우리의 친애하는 고양이가 가로되, 기술의 진보는 문명의 진보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스트레이〉는 고양이펑크인 동시에 에코펑크이며, 펑크가 구사하는 모든 느긋함의 미학을 플레이에 조화시키는 게임이다. 무엇보다, 〈스트레이〉의 캣스모폴리틱스 펑크는 인간의 자본주의 기술문명 자체가 프랑켄슈타인이 되어가는 현실, 즉 자본이 지구 지층을 뒤헤집는 자본세(capitalocene) 시대에 대한 가장 비판적이고 사변적인 우화다. 집도, 이름도 없는 고양이가 되어 귀여운 잔꾀를 펼치는 체험을 통해 우리는 지구에 안전하게 착륙하는 방법을 불현듯 깨닫게 될 것이다. 일론 머스크나 제프 베조스 같은 억만장자들은 화성으로 인류를 이주시키자, 태양계에 우주 콜로니를 만들자는 식으로 사람들을 현혹한다. 하지만 이렇게 사랑스러운 고양이들이 있는 지구를 어떻게 떠난단 말인가? 우리가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은 지구를 떠나는 방법이 아니라 지구에 착륙하는 방법이고, 고양이-기계-로봇이 서로 환대하는 모습에서 스스로와 타인을 돌보는 방법일 테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고양이는 이렇게 말한다. “태연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 깨달은 듯해도 사람의 두 발은 여전히 지면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디지털 문화연구/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신현우 문화연구자, 문화평론가이며 기술비판이론과 미디어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게이밍, 인공지능, 플랫폼, 블록체인을 둘러싼 문화현상을 연구하며 서울과기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한다.

  • 모험은 그곳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 게임 속 여성 캐릭터들의 모험에 대하여

    게임을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모험가가 된다. 평범한 일상을 벗어난 주인공이 되어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고 숨겨진 비밀을 파헤쳐 나가며 때로는 자신 안의 영웅적 면모를 깨워 세상을 구하기도 한다. 플레이어는 게임 속 세계 곳곳에 산재된 난제를 해결하는 모든 여정에 기꺼이 뛰어들며 게임을, 모험을 이어왔다. 게임과 모험은 그 궤적을 함께하며 게임을 경험하는 친숙한 방법론을 구축해왔다. 게임의 역사 자체가 일종의 모험기처럼 계속해서 쓰여지는 것처럼도 보인다. 이 글은 ‘게임’이라는 오래된 모험기를 다른 방향에서 펼쳐 본다. 거꾸로 펼친 모험기는 모험의 바깥에서 주인공의 모험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여인들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 < Back 모험은 그곳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 게임 속 여성 캐릭터들의 모험에 대하여 02 GG Vol. 21. 8. 10. 게임을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모험가가 된다. 평범한 일상을 벗어난 주인공이 되어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고 숨겨진 비밀을 파헤쳐 나가며 때로는 자신 안의 영웅적 면모를 깨워 세상을 구하기도 한다. 플레이어는 게임 속 세계 곳곳에 산재된 난제를 해결하는 모든 여정에 기꺼이 뛰어들며 게임을, 모험을 이어왔다. 게임과 모험은 그 궤적을 함께하며 게임을 경험하는 친숙한 방법론을 구축해왔다. 게임의 역사 자체가 일종의 모험기처럼 계속해서 쓰여지는 것처럼도 보인다. 이 글은 ‘게임’이라는 오래된 모험기를 다른 방향에서 펼쳐 본다. 거꾸로 펼친 모험기는 모험의 바깥에서 주인공의 모험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여인들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모험 서사 속 여성의 위치를 묻는 질문에 여성은 본래부터 ‘그곳(there)’에 있으며 영웅이 도달하려는 곳 그 자체라고 대답했다. 그곳은 이를테면 영웅의 영광스러운 업적의 끝으로 모험의 종착지이자 그를 위한 보상이 기다리는 곳이다. 이 보상은 물질적인 부나 명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그에게 구출되길 간절히 기다리는 여인이 있다. 어떤 모험은 그곳에 붙잡혀 간 여인을 찾아 떠나면서 시작되기도 한다. 그는 영웅의 모험 동기이면서 동시에 승리를 거둔 이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되는 셈이다. 고전 게임 ‘동키콩’ 속 레이디가 그러하듯, 게임 속 수 많은 여인들이 게임의 목표이자 최종 보상이 되어 그곳을 지켰다. 그들은 모험의 시발점 혹은 목적지로 설정되지만 결코 이야기의 중심이 될 수는 없다. 게임의 서사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경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자 모험의 이정표가 될 뿐이다. 스스로는 모험을 떠날 수 없어 악당의 탑에 갇혀 구출되기를 기다려야만 한다. * 피치공주. 모험의 바깥에 자리한 여성 캐릭터로 ‘슈퍼 마리오 시리즈’의 피치공주를 빼놓을 수 없다. 1985년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로 피치공주는 수많은 시리즈에서 납치를 당하고 마리오가 영웅으로 거듭나는 수 많은 여정 끝에서 구출되기만을 기다렸다. 시리즈가 이어지며 실질적인 지도자 역할을 수행한다거나 다양한 능력을 지녔다는 설정이 생겨났지만 스토리의 전개를 위해서는 아무 의심없이 납치 당하고 구해지고 있다. 그렇게 구해진 피치공주는 마리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마리오의 볼에 입을 맞춘다. 피치공주의 키스는 무사히 모험을 마치고 자신을 구해준 남성-주인공을 위한 보상으로서 여러 타이틀에서 반복되며, 남성-영웅과 납치된 여인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붙잡힌 여인’의 대표 명사인 피치 공주도 단독 주인공으로 모험을 떠난 적이 있다. ‘슈퍼 프린세스 피치’(2005)에서 피치공주는 납치된 마리오와 루이지를 구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이 작품은 시리즈의 외전으로 제작되어 기존 시리즈와는 다른 점이 두드러지는데, 우선은 ‘여자아이들도 즐길 수 있도록’ 상당히 쉬운 난이도로 제작되었으며 ‘감정 액션’이라는 새로운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감정 액션’은 희로애락이라는 4가지 감정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기술로, 극적이고 풍부한 감정 표현이 게임의 무기가 되었다. 피치공주는 상징과도 같은 풍성한 분홍 드레스를 입고 울고 웃고 화내며 맵을 활보했다. 닌텐도의 또 다른 공주, ‘젤다의 전설’ 시리즈의 젤다는 수동적인 ‘공주’ 캐릭터로 시작했지만 점차 새로운 캐릭터성을 보여주고 있다. 젤다는 세상을 구할 핵심적인 힘을 지닌 캐릭터지만 그 힘 때문에 적대 세력의 주요 타겟이 되는 일이 빈번했다. 시리즈가 전개되면서 ‘시간의 오카리나’(1998)나 ‘바람의 지휘봉’(2002)에서는 링크를 돕는 주요 조력자로도 등장했지만 ‘공주’로서 모험에 동참하지는 못했다. 두 작품에서 젤다는 남성으로 변장하거나 해적으로서 모험에 동참하여 활약하지만, 공주로서의 정체를 드러내자마자 납치당하거나 위험하다는 이유로 모험에서 배제된다. 또한 변장한 젤다는 짙은 피부와 활동적인 복장으로 자신을 감추다가 공주로서 정체를 드러내면 피부톤이 밝아지고 화려한 드레스로 환복한다. 마리오와 루이지를 구하고자 떠난 피치공주가 분홍 드레스를 벗어 던지지 못했 듯, 그들의 모험은 ‘공주다운’ 복장에 제한되었다. 시리즈의 주인공이 아니었던 이들은 시작부터 모험의 가장 바깥으로 떠밀려버리거나 주인공들의 영웅성을 돋보이게 할 역할로만 한정되어 ‘수동적 공주’라는 전형성 안에서 맴돌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야 젤다는 세계를 구할 모험의 핵심적인 존재로서 설정이 확고해지고 있다. 가장 최근 소개된 후속작 트레일러에서는 긴 금발 머리와 드레스를 입은 익숙한 공주의 모습이 아닌 짧아진 머리에 모험가 복장을 한 젤다를 확인할 수 있다. 비로소 오랜 시간 링크의 모험을 지켜보던 젤다도 새로운 모험에 돌입하고 있다. * 사무스 아란. 한편 일찍이 모험을 나선 여성 캐릭터도 있다. 1986년 닌텐도에서 출시한 ‘메트로이드’ 시리즈의 주인공 사무스 아란은 강화 슈트를 입고 우주를 종횡하는 현상금 사냥꾼이다. 개발진들은 강화 슈트 속의 전사가 여성이라면 더 멋지지 않겠냐는 아이디어에서 ‘메트로이드’의 주인공을 여성으로 설정했다고 밝혔다. 처음 발매된 ‘메트로이드’에서 사무스 아란의 외모는 강화 슈트로 인해 드러나지 않으며 게임에서도 그의 성별을 추측할 단서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게임을 좋은 성적으로 클리어하면 엔딩에서 사무스 아란은 헬멧을 벗어 강화 슈트 속 전사가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며 플레이어에게 ‘파격적인’ 반전을 선사했다. 더 좋은 성적으로 클리어하게 되면 레오타드나 비키니와 같이 노출이 심한 복장까지 볼 수 있었다. 복과묵하고 강인한 우주 전사도 게임이 끝난 뒤에는 ‘팬서비스’라는 명목으로 자신을 드러냈다. 이러한 ‘팬서비스’는 시리즈에서 전통처럼 계속되었다. * 라라 크로프트. 사무스 아란이 마케팅의 일환으로 고의적으로 성별을 숨겨 화제성을 노렸다면, 여성으로서 강한 파급력을 보인 캐릭터로는 단연 라라 크로프트가 꼽힐 것이다. 라라 크로프트는 ‘툼 레이더’의 주인공으로 1996년 처음 등장하여 높은 인기를 얻으며 최근까지도 다양한 매체를 통해 변주되고 있다. 초기 라라 크로프트는 독립적이고 야망있는 캐릭터로 설정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90년대의 ‘걸 파워’ 유행도 맞물려 있다. 제작 초반에는 남성을 주인공으로 염두에 두었지만, 설정을 여성으로 바꾸면서 수동적이지 않고 강하면서 동시에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로 수정되었다. 하지만 기획 의도에서 당당한 여성상을 추구한 것과는 별개로 실제로 라라 크로프트는 ‘섹스 심벌’로서의 이미지로 홍보되거나 소비되어 왔다. 여러 버전을 거치면서 많은 변화 있었지만 라라 크로프트를 떠올리는 상징적인 복장은 첫 작품에서의 쌍권총과, 민소매, 짧은 반바지를 입은 모습이다. 초반에는 기술의 한계로 인해 어색한 폴리곤 덩어리로 구현되었음에도 비현실적인 볼륨감이 두드러지며, 민소매와 반바지 차림은 자유로운 활동성보다도 몸매를 과하게 드러내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성적 대상화도 구체화되어 노출도가 높은 코스튬이 제공되거나 바스트 모핑이 도입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성적 대상화된 육체가 아닌 한 인물로서의 라라 크로프트에 주목하기 위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플레이어들이 게임 내에서 라라의 복장을 바꾸거나 누드로 만드는 모드를 제작하거나 모드로 새롭게 연출된 라라 크로프트의 모습을 공유하는 등 캐릭터를 소비하는 방식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사무스 아란과 라라 크로프트는 분명히 모험의 중심에 있지만 이들이 플레이되는 방식, 보여지고 소비되는 방식은 다른 ‘전통적인 영웅’들의 행보와는 크게 다르다. 남성 유저가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게임 시장 특성상 여성 캐릭터들은 ‘캐릭터’가 아닌 ‘여성’에 방점이 찍힌 채로 탄생하고 소비되고 플레이되었다. 여성 캐릭터의 모험에는 게임 속 세계의 위험천만한 장애물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넘어서야 하는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역경이 더해져 왔다. 모험을 떠나는 여성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도 모험의 장벽이 되어왔다. 2014년 발매된 ‘어쌔신 크리드 : 유니티’에는 최대 4인까지 함께할 수 있는 협동 미션이 도입되었는데, 여성이나 유색 인종으로 커스터마이징 할 수 있는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아 많은 비판이 있었다. 당시 디렉터 알렉스 아만시오는 초기에는 여성 암살자도 계획되었으나 “2배의 애니메이션, 목소리, 영상 소스”를 제작하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컸기에 “여성 캐릭터를 삭제”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반발은 #womenaretoohardtoanimate라는 해쉬태그를 통해 공유되었다. *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이 사건 이후로 ‘어쌔신 크리드’는 플레이가능한 몇 명의 여성 캐릭터를 선보였다. ‘어쌔신 크리드 : 신디케이트’(2015)의 이비는 쌍둥이 남매 제이콥과 함께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했고, ‘어쌔신 크리드 : 오리진’(2017)의 아야는 주인공 바예크의 아내이자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였다. 이비는 마스터 암살자가 될 만큼 유능하고 아야는 ‘어쌔신 크리드’ 세계관의 핵심 집단인 ‘형제단’을 창설했다는 설정이 있지만, 실제 게임에서는 이들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는 대폭 축소되고 홍보 아트에서도 이들의 존재는 두드러지지 않는다. 주인공의 성별을 선택할 수 있었던 ‘어쌔신 크리드 오디세이’(2018)조차 홍보에서는 공식 캐논인 카산드라보다 알렉시오스가 주력으로 등장했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 여성캐릭터가 단독 주인공으로 등장한 건 외전인 ‘어쌔신 크리드 3 : 리버레이션’(2012) 뿐이다. 그리고 2020년 블룸버그를 통해서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이러한 행보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이슈는 ‘어쌔신 크리드’의 제작사 유비소프트 내의 성추행, 성차별적 구조와 권력 남용에 대한 집단 소송 건이었다. 그리고 이 고발에는 2018년에 ‘어쌔신 크리드 : 오디세이’가 단독 여성 주인공으로 개발될 예정이었으나, ‘여성 주연 게임은 팔리지 않는다’라는 고위층의 주장에 의해 주인공의 성별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출시되었다는 폭로도 함께 실려 있었다. ‘어쌔신 크리드’를 해 본 유저라면 다음의 문장이 익숙할 것이다. “이 가상 시나리오는 다양한 종교, 성적 성향 및 성 정체성을 가진 다문화 팀에서 기획, 개발, 제작하였습니다.” 다양성을 명시한 문장 너머에는 넘을 수 없던 현실이 가로막고 있었다. 게임을 만들어내는 게임 바깥의 차별적인 문화가 실제 게임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 사례다. 갖은 고난과 난제에 부딪히면서도 여성 캐릭터들의 모험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비욘드 굿 & 이블’의 제이드 (2003),’ ‘미러스 앳지’의 페이스 (2008),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 의 맥스 (2016), ‘호라이즈 제로 던’ 의 에일로이 (2017), ‘하프-라이프 : 알릭스’의 알릭스(2020)까지, 이들은 더 이상 탑에 갇힌 공주가 아니라 스스로 뛰쳐나와 자신만의 모험을 이끄는 모험가다. 여성 캐릭터들의 모험의 양상이 다양해지면서 동시에 주변의 이야기도 더욱 복잡다단해지고 있다. 때때로 유의미한 시도와 전진하지 못하는 입장이 반복되기도 하며, 어떤 성취는 또 다른 도전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모험가는 난제를 해결할 또 다른 가능성을 품고 다시 여정에 오른다. 모험의 본질은 닥쳐오는 장애물을 피하지 않고 세계를 마주하는 것이다. 현실과 타협하느라 고정관념에 얽매인 사고를 뛰어넘어서 새로운 상상으로 돌입하는 일이다.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는 게임 속 세계에서 기대하는 것은 그런 가능성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전시 기획자) 서다솜 큐레이터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종종 전시를 기획하거나 글을 쓰고 주로 게임을 한다. 큐레이터 게임 동호회 'Mods'의 멤버다.

  • e스포츠 25년, 그 좌충우돌의 역사

    초창기 e스포츠는 열악한 환경에서 탄생했다. 1999년 처음 중계된 제5회 하이텔배 KPGL(Korea Professional Gamers League) 당시에는 방송국 지원이 없어 탁구대에 천을 씌워 경기 테이블과 중계석으로 사용했으며, 경기복 두 벌을 출전 선수들이 돌아가면서 입었다. < Back e스포츠 25년, 그 좌충우돌의 역사 23 GG Vol. 25. 4. 10. 다른 그 무엇도 아닌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며 시작된 2000년은 한국이스포츠협회(이하 협회)의 전신인 ‘21세기 프로게임협회’가 창설되고 전문적인 리그대회가 한참 생겨나던 시기였다. 당시 e스포츠는 젊은 남성층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인기를 얻던 문화 콘텐츠였지만, 기성세대에게는 그저 유치하고 심지어 병리적인 사회 현상으로 여겨지곤 했다. 어느 누구도, 심지어 당시 게임을 플레이하던 프로게이머조차도 e스포츠가 이렇게 커다란 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e스포츠는 치열하게 대결하며 전략과 열정을 공유하던 게이머 공동체에서 시작되었으나, 산업의 성장과 함께 e스포츠의 정체성도 변화되어 갔다. 연구자와 산업 관계자 각자 e스포츠에 대해 다른 정의를 내리지만, 모두가 동의하는 지점은 e스포츠가 기존 산업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나갔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미디어학자인 허친스(Brett Hutchins) 는 e스포츠가 미디어와 스포츠, 컴퓨터 게임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하이브리드 산업이라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게임과 e스포츠 문화를 연구하는 테일러(T.L.Taylor) 는 e스포츠가 텔레비전, 게임, 인터넷 그리고 온라인 네트워크의 융합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e스포츠는 그 전부터 존재했던 미디어·문화 산업의 울타리 안팎을 넘나들며 다른 그 무엇도 아닌 e스포츠만의 정체성을 획득하기 시작했다. 어느 하나로 규정하기 힘든 e스포츠의 혼종성은 게임 산업의 빠른 생애주기, 플랫폼의 전환 등 변화의 순간마다 과감한 결단을 통해 변화에 적응하고자 노력한 결과이다. 그래서 e스포츠는 매순간 위기와 함께 했다. 짧은 호황기를 누리다가도 돌발적인 변수로 인해 다시금 어려움을 맞닥뜨렸다. 불안정한 기반 위에서 내가 즐기고 있는 이 리그와 종목이 언제 무너지거나 중단될지 알 수 없기에 팬들은 늘 불안감을 품은 채 선수와 팀을 응원한다. 그렇기에 e스포츠가 무엇인지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보다는 그 변화의 흔적을 그저 따라가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 공교롭게도 대한민국에서 e스포츠가 시작된 시점으로 여겨지는 1999년은 내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e스포츠의 역사를 훑는 일은 나의 성장기를 되짚어 보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 글은 한 명의 팬으로서, 그리고 이 산업과 함께 자라온 동시대인으로서 e스포츠 문화의 궤적을 따라가 보려는 짧은 기록이다. 초기 e스포츠의 도약과 제도화 초창기 e스포츠는 열악한 환경에서 탄생했다. 1999년 처음 중계된 제5회 하이텔배 KPGL(Korea Professional Gamers League) 당시에는 방송국 지원이 없어 탁구대에 천을 씌워 경기 테이블과 중계석으로 사용했으며, 경기복 두 벌을 출전 선수들이 돌아가면서 입었다. 좁은 방 하나에서 선수들끼리 함께 자거나 PC방에서 생활하는 일이 빈번했다. 게임 자체에 대한 사회 전반의 부정적 인식과 신생 산업의 불안정한 기반에도 게임에 대한 열정으로 버티던 게이머와 산업 관계자들은 2000년 말 붕괴한 닷컴 버블로 인해 한 차례 무너져 내렸다. KPGL, PKO, KIGL과 같은 초기 스타크래프트 리그는 빠르게 폐지되었고 우후죽순 생겨나던 게임대회 주최사 역시 자취를 감추었다. 게임만 해서 먹고 산다는 목표는 당시로서는 허황된 꿈에 가까웠다. 많은 선수들이 다른 직업을 겸하여 생활하거나 게이머 경력을 통해 게임 관련 회사에 취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 때문에 선수들의 프로 수명은 짧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 최초의 프로게이머로 인정받는 신주영, 한국통신(Korenet) CF를 촬영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이기석, 지금은 방송인으로 더욱 유명한 기욤 패트리 등이 이 시기에 짧은 인기를 누린 게이머들이었다. 그리고 2003년부터 게임 방송사를 중심으로 한 차례의 도약이 이루어졌다. 대표적으로 온게임넷과 MBC 게임(당시 이름은 geMBC)이라는 두 케이블채널은 기존의 대회 주관 업체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메꾸며 방송 중심의 게임리그 시스템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1대1 대결이던 기존 대회 형식에 더해 팀 단위의 리그를 새로 만들면서 그와 함께 대기업의 재정지원을 받는 프로팀이 등장한다. 임요환, 최연성의 SKT와 강민, 홍진호, 박정석의 KT는 스타 플레이어를 중심으로 팀을 꾸리며 통신사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이러한 구도는 단순히 팬들의 즐거움을 넘어 기업이 홍보를 위해 전면에 나서 팀을 만들고 자본을 투자하여 리그의 판을 키운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특히 광안리에서 진행된 2004년 스카이 프로리그 결승전(한빛 스타즈 vs SKT T1)에는 10만여 명의 관중이 몰려 상징적인 순간을 만들어냈고, 2005년 So1 스타리그 결승전(임요환 vs 오영종)은 역대 최고 시청률을 갱신하는 등 스타리그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당시 기사에서 SK텔레콤 T1은 팀 창단만으로 150억 원이 넘는 홍보 효과를 봤다고 전해지며 리그를 후원한 신한은행 역시 300억 원이 넘는 홍보효과를 거뒀다고 평가한다. 이를 기점으로 2006년까지 대기업팀의 적극적인 창단이 이루어졌다. * [2004년의 광안리 대첩(출처: https://home.kepco.co.kr/kepco/front/html/WZ/2023_09_10/sub1_4.html )] 특히 협회에 의해 2005년부터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에 대한 본격적인 제도화가 이루어졌다. 협회 공인 대회에서 입상한 선수는 준프로게이머의 자격을 얻게 되고, 매년 진행되는 드래프트 제도를 통해 특정 팀에 소속되면 프로게이머가 되는 식이었다. 또한 각 팀 내에서도 연습생을 10여명 내외로 육성하며 선수 인력의 재생산을 위해 힘쓰기 시작했다. 오늘날 대기업 구단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e스포츠 아카데미의 국내 모델이 이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프로게이머는 점차 많은 게이머와 청소년들이 꿈꾸는 어엿한 직업으로 자리잡았다. 한 차례의 위기 그리고 라이브 스트리밍 플랫폼의 등장 그런데 이때부터 커진 파이 를 둘러싸고 산업 행위자들 사이의 치열한 힘 싸움이 시작된다. 2007년 협회와 양 방송사 사이의 중계권료를 둘러싼 논란이 발생했고, 2010년에는 블리자드와 협회, 방송사 간 지적재산권 소송이 이어졌다. 그 전까지 게임사가 협회와 방송사의 IP 활용을 암묵적으로 승인하는 형식이었다면, 이제는 e스포츠 산업의 생산과 유통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초창기 e스포츠 리그의 제작과 주최, 방송을 도맡아 하며 독점적인 권한을 수행하던 방송사는 이 시기부터 서서히 힘을 잃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힘 싸움에 더해 스타크래프트 승부조작 사건까지 벌어지며 스타크래프트 리그뿐 아니라 e스포츠 산업 전반에 큰 타격을 입힌다. 다른 한편에서는 2011년 한국에서 서비스를 시작한 리그 오브 레전드가 서서히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이후 2013년, 넓게 보면 2016년까지 국내 e스포츠 산업은 과도기를 거치게 된다. 당시 나를 포함한 청소년들은 이러한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하고 또 적극적으로 수용하던 세대였을 것이다. 당장 PC방에서 친구들과 하던 게임이 스타크래프트에서 리그 오브 레전드로 바뀌었고, 당시 보급되기 시작한 스마트폰을 통해 아프리카 TV를 보는 것이 또래 문화가 되었다. 교실에서 남자 아이들 사이에 유행하던 밈(meme)은 ‘날아오르라 주작이여’에서 ‘이걸 나진이’로 옮겨갔다. 페이커(Faker)가 미드 마이를 썼다느니 미드 리븐을 썼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경기 다음날 아침부터 화제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아프리카 TV와 트위치, 유튜브 게이밍과 같은 라이브 스트리밍 플랫폼의 등장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스트리밍 플랫폼은 ‘보는 게임’ 문화의 대중화를 이끌며 산업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매체였는데, e스포츠 역시 마찬가지여서 수용자층을 하드코어 게이머에서 캐주얼 팬으로까지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더불어 전현직 프로게이머가 스트리밍 플랫폼에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선수와 팬 사이의 온라인 소통의 기회도 확대되었다. 라이브 채팅을 통한 정동의 공유는 기존의 TV라는 일방향적 정보 제공을 넘어 실시간 상호작용에 기반한 능동적인 콘텐츠 소비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테일러는 라이브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e스포츠가 단순히 스포 츠가 아니라 복합적인 미디어 엔터테인먼트에 가까워졌다고 분석했다. 스트리밍 플랫폼의 또 다른 장점은 방송사에서 여러 사정으로 인해 제한적으로만 방영할 수밖에 없던 다양한 종목의 리그를 중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전까지 어렵게 찾아보아야만 했던 해외 리그나 철권, 워크래프트 3와 같이 한국에서 대중적 인기를 얻는 데 실패한 종목의 국내 리그도 인터넷 스트리밍을 통해 챙겨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인터넷 스트리머 중심의 게임 대회가 인기를 끌고 아마추어 게이머 대상의 리그 역시 스트리밍 플랫폼으로 중계가 가능해지면서 풀뿌리 리그와 자생적 e스포츠 생태계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즉 스트리밍 플랫폼의 발전은 한편에서는 전 세계 팬들과 실시간으로 연결되는 국제화의 흐름을 만들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지역과 소규모 리그에도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며 e스포츠 문화의 저변을 넓혀주었다. e스포츠의 황금기 스트리밍 플랫폼의 발전에 힘입어 e스포츠 산업은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폭발적인 성장이 이루어졌다. 2015년부터 2019년까지 국내 e스포츠 산업규모는 연평균 17.9%의 성장률을 보였으며 국제적으로는 매년 30.7%의 고속 성장이 진행되었다. 경기장 역시 양적·질적 확장이 이루어져 2016년 OGN e스타디움이 개장한 이후 2018년에는 LOL 파크와 VSG 아레나가, 2020년에는 아프리카TV 콜로세움, V.Space 아레나, 부산·광주 e스포츠 경기장이 연이어 개장했다. 프로게이머 평균 연봉 역시 2018년 50% 넘게 뛴 데 이어 2019년에는 80%나 상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경제적 성장과 함께 두드러진 건 기술의 발전이었다. 대표적으로 e스포츠 관전 및 연출 기능이 개선을 거듭하면서 e스포츠는 거대한 스펙타클 이벤트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초창기 스타크래프트 리그의 관전 및 연출 기능은 옵저버의 수동 조작과 선수 얼굴 클로즈업이 전부일 정도로 기초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해설진은 경기 시작 전이나 직후 맵 위에 마우스로 그림을 그리면서 바둑처럼 맵을 설명하고 각 선수의 전략을 예상했다. 선수의 미네랄과 가스 보유량, 인구수를 보여주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지난 ‘EVER 스타리그 2007’이었다. 반면 2010년대에 들어 게임사가 리그를 자체적으로 운영하려는 의욕을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관전 및 중계 모드의 기능을 대폭 개선하면서 보다 직관적이면서도 극적인 시청을 가능하게 했다. 2015년부터 LCK에서는 스포트라이트 카메라 기능을 통해 게임 화면을 3D 애니메이션처럼 연출할 수 있게 되었고 2018년에는 한국에서 개최된 월즈 무대에서 가상 걸그룹 K/DA의 증강현실 무대를 꾸몄다. 같은 해 OGN에서는 VR을 통한 배틀그라운드 경기 생중계가 국내 최초로 시도되었다. 이 같은 실험적 시도는 비록 모두 상용화되지는 않았더라도, 그 당시 기술의 발전과 e스포츠 산업 전반에 만연하던 낙관을 반영한 산물이었다. * 리그오브레전드 2018 월드 챔피언십 K/DA 오프닝 세레머니 영상 다시, 겨울을 나는 e스포츠 그러나 최근의 e스포츠 산업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또 한 번 어려움을 맞이하게 되었다. 당장 e스포츠 게임단과 게임 대회 운영사들의 누적된 적자가 문제되었다. 특히 젠지 e스포츠의 CEO인 아놀드 허(Arnold Hur)는 2023년 ‘e스포츠의 겨울’을 주장하며 지속 가능한 산업 생태계를 만들어야 함을 역설했다. 또 라이엇 게임즈나 블리자드, 일렉트로닉 아츠(EA)와 같이 게임과 e스포츠 업계를 지탱하는 게임사들이 2024년 들어 줄줄이 구조조정과 해고를 단행하며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위기를 초래한 내부적·외부적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지나치게 빠른 성장과 명확한 비즈니스 모델의 부재를 그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특정 종목에 편중되어 있는 산업 구조 역시 산업의 안정화를 저해하는 요인이다. 이에 게임사와 구단은 나름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LCK는 2020년부터 폐쇄형 프랜차이즈 리그 [1] 로 전환했으며 FC 온라인 슈퍼챔피언스 리그 역시 2025년부터 리그 프랜차이즈화를 시도하고 있다. 반대로 오버워치 리그는 프랜차이즈 및 연고제를 2024년부터 폐지하고 개방형 리그 시스템으로 개편했다. 다른 한편 2023년 정식출시한 게임 이터널 리턴은 국내 최초로 지역 연고 풀리그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e스포츠 구단 역시 참여 종목 다양화와 함께 아카데미 설립, 국내외 대학과의 활동 연계, 팬덤 마케팅 활성화 등의 노력을 통해 안정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금의 e스포츠는 빠르게 달려온 궤도를 잠시 조정하는 또 하나의 과도기를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거처럼 갑작스럽게 닥친 위기에 무너지기보다, 이제는 산업 전체가 변화의 국면을 인식하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방안을 차분히 모색하고 있다. 다가올 e스포츠의 모습, 그리고 그것을 즐기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질지는 모두가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러나 e스포츠는 처음부터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다. 스포츠이자 게임이고, 방송이자 오락이며 문화인 이 복합적 정체성은 위기의 순간마다 유연하게 적응하며 스스로를 재정의하는 힘의 원천이었다. 스타크래프트 리그가 무너졌을 때도, 방송사가 사라졌을 때도, 플랫폼이 전환되었을 때도 e스포츠는 멈추지 않았다. 누구도 이 산업이 여기까지 올 줄 몰랐듯, 지금의 과도기 역시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시 한번 자신을 재구성할 시간, 본질을 점검할 기회일지 모른다. 아직도 춥고 눈이 내리는 날씨이지만, 곧 봄이 올 것이다. 변화의 속도에 익숙한 e스포츠가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따뜻한 봄을 맞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 Hutchins, B. (2008) Signs of meta-change in second modernity: The growth of e-sport and the World Cyber Games. New Media and Society, 10(6): 851-869. - Taylor, T. L. (2018) Watch me play : Twitch and the rise of game live streaming, Princeton, New Jersey : Princeton University Press. - 박건하. (2004) 게이머들의 PC방 문화와 프로게임리그의 형성에 관한 연구. 연세대학교 대학원 문화학협동과정 석사학위논문. - 이용범. (2020) 동북아시아 e스포츠 현황에 대한 기초연구 1: 정동(affect)의 실각, 한국 e스포츠 10년사. <한국게임학회 논문지>, 20권 2호. 61-73. - 정헌목 (2009) ‘스타’ 게이머 팬클럽을 통해 본 e-스포츠 팬덤의 형성과정과 특성. <비교문화연구>, 15권 1호. 51-95. - 진예원. (2022) 이스포츠의 기술성(technicity) 분석을 통해 본 포스트디지털 문화 연구.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미디어문화연구전공 석사학위논문. [1] 프랜차이즈 모델은 리그에 소속되는 팀을 고정하여 이 팀들이 강등이나 해체의 위험 부담 없이 수익 창출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모델을 의미한다. 반대로 개방형 모델은 리그 참가 및 탈퇴가 상대적으로 용이하기에 리그 소속팀이 자주 바뀌며, 승강제를 도입해 경쟁을 보다 치열하게 만들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프로야구 KBO 리그는 프랜차이즈 모델, 프로축구 K리그는 개방형 모델을 적용하고 있다. Tags: e스포츠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연구자) 박여찬 e스포츠를 포함한 보는 게임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를 전공 중입니다.

  • 모든 게임의 확률은 여전히 주사위다

    비록 이제는 멀티코어를 활용하거나 별도의 알고리즘, 하드웨어를 이용해 진정한 의미의 난수를 디지털에서도 생성할 수는 있지만, 여전히 그 벽은 높다. 주사위라면 단 몇백원 만에 유의미하게 재미를 느낄 수 있는 확률놀음을 할 수 있는데, 그 이상의 것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 Back 모든 게임의 확률은 여전히 주사위다 17 GG Vol. 24. 4. 10. 주사위 ? 이제 퇴물 아닌가 ? 개인적으로 주사위라는 물건 자체를 매우 좋아한다 . 워낙 게임용으로 많이 써서도 있지만 , 주사위라는 물건 자체가 상징하는 ‘ 행운 ’ 의 느낌이 좋기도 했다 . 기본적으로 오프라인의 게임들은 주사위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한다 . 인생게임의 룰렛 같은 다른 도구들도 있지만 , 범용적으로 게임을 불문하고 적용되는 것들은 대부분 주사위 , 그리고 카드 묶음이다 . 특히나 TRPG 와 미니어처 워게임 같은 보다 클래식한 쪽은 주사위의 영향력이 굉장히 짙다 . 게임을 확률과 선택의 문제라고 압축한다면 주사위는 아주 오랫동안 , 어쩌면 게임이라는 개념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그 핵심을 책임지고 구축해온 존재다 . 우리에게 보통 가장 익숙한건 정육면체 주사위지만 , 필요에 따라 많은 주사위가 만들어지고 쓰여왔다 . 가장 작은건 정사면체 , 거기서 정육면체 , 정팔면체 , 십면체 , 정십이면체 , 실질적으로 쓰이는 것 중 가장 큰건 정이십면체다 . 많은 게임들은 이중 하나의 주사위를 위주로 구성되어 있지만 , 이중 여러가지 주사위를 동시에 쓰는 경우도 있다 . 이럴 경우 각각의 주사위는 단일 주사위로 창출할 수 있는 확률의 가짓수에 따라서 그 특성에 맞는 용도로 쓰인다 . 이들은 쉽게 각각의 면 개수를 토대로 d4, d6, d8, d10, d12, d20 으로 표현된다 . 이중에서 가장 익숙한건 역시 d6 과 d20 이다 . d6 은 가장 전통적인 주사위이고 , d20 은 요즘 TRPG 의 트렌드인 주사위다 . 널리 알려진 비디오 게임 ‘ 발더스 게이트 3’ 도 , 그리고 그 기반이 되는 ‘ 던전 앤 드래곤 ’ 최신판도 d20 을 기반으로 한다 . 하지만 이 모든 게임들을 그저 ‘ 주사위를 굴린다 ’ 하나로 공통되게 묶기에는 저마다의 게임이 주사위를 이용하는 방법은 세세한 면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 그로 인해 벌어지는 양상도 꽤 다르다 . TRPG 와 테이블탑 미니어처 게임 , 그리고 ‘ 아캄 호러 ’ 등으로 유명한 TRPG 의 형태를 빌린 보드 게임의 주사위 굴림은 기본적으로 스테이터스를 기반으로 한 게임을 위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스테이터스들이 분명한 이점 또는 패널티가 되어주되 , 이것이 고정값이 아니도록 하기 위해서 스테이터스를 기반으로 각 주사위들이 정해진 범위 내에서 이를 보정하는 역할을 맡은 셈이다 . 이런 개념에서 Roll for XX, Beat XX 라는 용례가 파생된다 . 즉 , 기본적으로 TRPG 나 미니어처 게임 , 이 방식을 채용한 보드 게임들의 기본 작용은 수치 대 수치의 싸움이다 . 타겟이 되는 수치가 있고 , 해당 수치에 대응되는 자신의 스테이터스 + 주사위 굴림값이 이를 넘겨야 하는지 , 이보다 낮아야 하는지 , 이상인지 이하인지 같은 목표 수치가 정해진다 . Roll for XX 는 그 XX 라는 수치를 목표로 굴린다는 뜻이며 , Beat XX 는 XX 를 초과한 값이 나와야만 한다는 뜻이다 . 이런식으로 주사위 굴림은 어떤 목표값을 가지게 되고 , 여기서부터 확률과 그 중간값 등을 계산할 수 있게 된다 . 이런 주사위 굴림이 가장 직접적으로 , 또 많이 쓰이는건 근현대적인 게임이라는 개념의 원류 중 하나인 워게임 , 그리고 그 워게임을 체계화하고 보다 재미와 흥미 위주로 변화시킨 테이블탑 미니어처 게임과 TRPG 다 . 국내에서 TRPG 뿐만 아니라 테이블탑 미니어처 게임은 정말 희귀한 취미이지만 , 필자는 그런 취미를 접하면서 여러가지 용례의 주사위를 써보곤 했다 . 흥미로운 건 주사위라는 확률 체계가 가지는 한계를 저마다의 게임이 뛰어넘는 방식이었다 . 주사위는 분명 시인성이 좋고 쓰기 편한 등 여러 장점도 있었지만 한계가 명확한 방식이기도 했으니까 . 가장 많이 플레이했던 미니어처 게임 ‘ 워머신 & 호드 ’ 의 경우 2d6(d6 주사위 두개 굴림 ) 이 거의 모든 대면 굴림의 기본이었는데 , 주사위 한 개가 아닌 2d6 이 기본이 됨으로서 가지는 이점은 확률 중앙값이 아주 명확하다는 점이다 . 최소가 2, 최대가 12 이므로 7 이 정확히 가장 나올 확률이 높은 중앙값이 된다 . 즉 , 이를 기반으로 플레이어들은 수많은 대면 굴림에 맞추어 게임을 준비할 때 7 이라는 주사위값을 기준삼아 전체적인 확률을 계산을 하게 된다 . 주사위 굴림에서 나오는 기본 확률이 게임 전체의 확률을 제어하는 것이다 . 여기에 가장 낮은 확률인 2 와 12 에 각각 펌블 ( 확정적인 실패 ) 와 크리티컬 ( 설명이 필요한가 ?) 를 부여함으로서 낮은 확률에서 생기는 변수를 추가한다 . 반면에 d20 주사위를 쓰게 되면 1 에서 20 까지의 숫자가 각각 똑같은 확률로 나오게 된다 . 즉 , 요구값에 따라 확률이 정직하게 비례 / 반비례하게 된다는 뜻이다 . 이 점에서 직접 대조할 수 있는건 2d6 과 d12, 또는 20 면체를 개조한 d10 인데 , 2d6 은 정확하게는 11 개의 가짓수가 나오는 셈이긴 하지만 ( 최소값이 1+1=2 이므로 ) 전체적인 확률의 가짓수 자체는 비슷하다 . 그러나 확률의 분포상 7 이 나올 확률이 1/6 으로 가장 높으며 6 과 8 은 5/36, 5 와 9 는 1/9 이런식으로 점점 확률이 우산형태로 낮아진다 . 그러므로 비슷하게 10 가지 정도의 확률수를 사용하는 게임에서는 각각 다른 주사위를 채용함에 따라 다른 플레이 양상을 이끌어낼 수 있다 . 2d6 을 쓴다면 전체적으로 게임에서 7 을 중앙값으로 하여 성공 확률이 훨씬 더 높으므로 평균적인 성능치를 쉽게 형성할 수 있다 . 반면에 d10 이나 d12 등을 사용한다면 균등한 확률 분포를 이용해 굴림에 요구하는 값이 낮을수록 성공 확률도 높아지는 식으로 보다 스탯 베이스의 강세를 이끌어낼 수 있다 . 이러한 각각의 주사위 값의 종류 , 그리고 주사위 굴림의 방식에 따라 게임마다 굴림의 양상이 조금씩 달라짐에도 , 매개로 하는 주사위라는 방식 자체가 매우 직관적이기 때문에 덕분에 플레이어들은 다소 복잡할 수 있는 확률과 그 확률들의 분포를 상당히 직관적으로 바라보고 계산할 수 있게 된다 . 워해머 40k, 워머신 & 호드 , 인피니티 , 서로 다른 세 미니어처 워게임의 주사위 놀음 이런 확률 특성에 따라 , 으레 비슷한 게임방식을 띄는 미니어처 게임들도 서로 다른 감각을 가지곤 했다 . 국내에서 가장 인지도 있는 테이블탑 미니어처 게임은 단연 ‘ 워해머 40k’ 이고 , 그 다음으로는 필자가 가장 많이 플레이했던 ‘ 워머신 & 호드 ’, 그리고 ‘ 인피니티 ’ 정도가 있다 . 이 세개의 게임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주사위를 사용한다 . 일단 ‘ 워해머 40k’ 와 ‘ 워머신 & 호드 ’ 는 d6 기반이고 ‘ 인피니티 ’ 는 d20 기반이다 . 그렇다면 앞의 둘과 뒤의 하나의 차이는 당연히 클텐데 , 앞의 둘은 같은 주사위를 쓰는데 어떻게 차이가 있는가 ? 하는 부분이다 . ‘ 워해머 40k’ 가 다른 미니어처 게임과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 개별 유닛의 확률 디테일을 좀 떨어트리는 대신 대단위 전투에 적합한 방식을 골랐다는 점이다 . 이는 다른 메인스트림 미니어처 게임과 비교하면 크게 체감할 수 있는데 , ‘ 워해머 40k’ 는 대부분의 경우 하나의 유닛에 1 개를 초과하는 주사위를 잘 쓰지 않게 된다 . 그러나 ‘ 워머신 & 호드 ’ 는 기본 대면 굴림이 대부분 2d6 이고 한판의 스케일 자체가 훨씬 작은 편이다 . 전체적인 스케일로 보자면 ‘ 워해머 40k’ 는 기본적으로 최소 수십 , 많게는 100 단위의 유닛을 굴리는 게임이고 , ‘ 워머신 & 호드 ’ 는 많아야 20~30, ‘ 인피니티 ’ 는 그보다 더 작게 돌릴 수도 있다 . 따지자면 ‘ 워머신 & 호드 ’ 와 ‘ 인피니티 ’ 는 스커미시 게임이라고 부르는 좀더 소규모 스케일의 게임이다 . 이런 게임적인 특징 , 그리고 주사위의 사용법은 전반적으로 비슷한 게임임에도 분명한 차이를 만든다 . 미니어처 게임 , TRPG 등의 전투는 결국 스테이터스와 스테이터스 간의 주사위 대면 굴림이다 . 모든 캐릭터와 유닛은 스테이터스와 각종 특수한 규칙이 적힌 시트가 있기 마련이고 이게 게임의 원천이 된다 . 쓰이는 주사위 값에 따라 각 게임이 취하는 스테이터스의 평균값은 당연히 달라진다 . ‘ 워해머 40k’ 는 아머 관련 수치 같은 일부를 제외하면 캐릭터의 기본 능력은 한자릿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 그건 전체 게임이 캐릭터별로 하나의 주사위를 굴리는걸 기본 기조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 명중률을 결정하는 WS, BS 라는 스테이터스가 존재하는데 , 여기에 적힌 숫자는 d6 을 하나 굴려서 그 이상이 뜨면 명중한다는 뜻으로 낮을수록 좋다 . 당연히 최소 및 최대치는 주사위 하나의 값에 제한되므로 , 2 에서 6 까지 있을 수 있다 . 수치가 4 일 경우 명중률이 50% 가 되니 , 가장 평균적인 값인 셈이다 . 스테이터스상으로 상대의 회피 수치가 존재하는 게임이 아니므로 이 하나의 굴림만 통과하면 맞는 아주 간단한 방식이다 . 반면에 2d6 을 기반으로 하는 ‘ 워머신 & 호드 ’ 와 d20 을 기반으로 하는 ‘ 인피니티 ’ 는 스테이터스 값과 명중시키는 공식이 다르다 . 같은 명중률을 볼 때 , ‘ 워머신 & 호드 ’ 의 명중률인 MAT, RAT 는 기본 수치에 2d6 을 굴려 나온 값이 상대의 회피수치인 DEF 이상이 나와야 명중한다 . 이런 방어 스탯의 활용은 ‘ 워해머 40k’ 에도 방어력이나 세이브 개념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 ‘ 인피니티 ’ 는 기본적으로 상대의 수치와 상관없이 유닛의 명중률인 CC, BS 을 d20 굴림으로 성공하면 되는 식이지만 , 여기서는 직관적인 스테이터스를 위해 스테이터스 이하가 나와야 한다 . 즉 여기서는 스테이터스가 높을수록 성공률이 높다 . 또한 ‘ 워머신 &’ 호드 ’ 의 DEF 처럼 회피에 대응하는 값은 없으나 각종 모디파이와 특수룰로 상대의 명중률을 일괄적으로 낮추는 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 한편으로는 ‘ 워해머 40k’ 에는 재미있는 주사위도 있다 . 그건 바로 숫자가 아닌 화살표와 불스아이가 그려진 주사위다 . 보통 스캐터 다이스라고 하는 이 주사위는 포격을 할 때 얼마나 빗나가는지 또는 정확하게 명중하는지를 결정하는 주사위다 . 포격을 선언한 뒤 이 주사위를 던져서 불스아이가 나오면 목표한 지점에 명중하지만 , 화살표가 나온다면 포격 지점을 중심으로 주사위가 가리키고 있는 그 화살표의 방향으로 빗나가게 되며 , 빗나간 거리를 측정하기 위해 또다른 숫자 주사위를 던진다 .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 세개의 게임은 한눈에 보기에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플레이하게 된다 . ‘ 워해머 40k’ 를 플레이하는 걸 보게 된다면 단연 눈에 들어오는 건 한명의 플레이어가 준비해 놓은 수십개의 d6 주사위다 . ‘ 워해머 40k’ 는 기본적으로 분대 단위로 기동하기 때문에 한 번에 다회의 , 많게는 수십번의 공격을 가하는 것도 종종 일어나며 그래서 한번에 스무개 서른개씩의 주사위를 던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분대의 스테이터스는 동일하기 때문에 , 그렇게 한꺼번에 던진 후 굴림을 통과한 주사위만을 건져내 개수를 새고 그만큼의 명중탄을 상대에게 분배하면 되는 것이다 . 반면에 ‘ 워머신 & 호드 ’ 에서는 훨씬 세밀하게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 또한 2d6 이기에 확률 분포가 다른 만큼 평균적으로 7 이라는 확률 중앙값에 더 크게 의존하며 , 특유의 강화 시스템으로 부스트라는걸 사용한다 . 부스트는 쉽게 말해 자원을 소모해 주사위를 하나 더 굴리는 것이다 . 2d6 을 굴릴걸 3d6 굴리는 식 . 게임 특유의 세세한 스테이터스 분배상 이 수치가 크게 다가올 수도 있다 . ‘ 인피니티 ’ 는 d20 을 사용하기 때문에 확률의 분포가 넓고 , 동시에 게임의 근간 자체가 강력한 몇몇의 정예 유닛과 이를 보조하는 전열 보병의 자원 분배 형식을 띄기 때문에 스테이터스에 따른 유닛의 차이가 상당히 크게 다가온다 . 이처럼 , 분명 같은 주사위를 굴리고 주사위에는 어떤 변형도 가해지지 않았음에도 굴리는 상황 , 굴리는 방식 , 적용하는 룰 등에 따라서 각각의 주사위 굴림의 느낌이 천차만별로 달라지게 된다 . 전자적인 작동 없이 난수를 생성하기 위한 장치는 여럿 고안되었지만 주사위는 여전히 그중에서도 가장 쓰기 편하며 공정하다 . 주사위는 그 어떤 작동부도 없는 단순한 조각품인데 반해 룰렛 같은 경우는 회전축이 있는 구동장치여야 하고 , 카드는 셔플이라는 한계 때문에 항상 확률이 동일하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 주사위도 물론 정입방체라 하더라도 각인에 따라 면의 무게가 달라지는 등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다른 장치에 비하면 매우 사소하고 , 또한 각인을 파내는 양을 동일하게 맞춤으로서 조절할 수 있는 문제다 . 그리고 이는 상당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 ‘ 주사위 굴림 ’ 만이 주는 감성적인 만족감 , 그리고 재미가 있다 . 필자를 포함해 미니어처 게이머들이 공을 들였던 부분 중 하나는 자신만의 주사위를 만들거나 수집하는 것이었다 . 이쪽의 유명 회사로 Chessex 가 있는데 여기서 각자 원하는 크기 , 디자인의 주사위들을 사모아서 용도별로 쓰는게 일반적이었다 . 이는 플레이어 간의 주사위 굴림 혼동을 줄인다는 실용적인 목적도 있었고 , 무엇보다 ‘ 운 ’ 에 관해서라면 당연히 붙게되는 일종의 미신 , 어떤 주사위를 쓰면 수치가 잘 붙더라 하는 등의 이야기도 있었다 . 결국 오프라인 게이밍에서의 주사위는 그게 실질적인 최선의 방책이면서 동시에 감성적인 만족감을 주는 방식이기에 그렇게 오랫동안 주류로 자리잡아왔다고 설명할 수 있다 . 사실 전자 뇌는 진정한 난수를 만들 수 없어요 그렇다면 비디오 게임에서는 어떨까 ? ‘ 발더스 게이트 ’ 같은 직접적으로 TRPG 의 주사위 시스템을 가져온 게임들이 아닌 다른 게임들은 어떻게 독자적인 확률 체계를 만들어낸 걸까 ? 그 근간이 물리적인 도구의 1/n 이 아닌 직접적으로 난수를 생성하는 방식이기에 , 디지털 비디오 게임에서의 확률은 언뜻 보면 주사위와는 전혀 무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 하지만 좀더 파고들면 , 결국 비디오 게임도 이 주사위의 확률놀음의 지대한 영향 하에 있다는걸 새삼 느끼곤 한다 . 일단 가장 먼저 짚어볼 점은 , 본래 디지털 프로세서는 진정한 의미의 난수 생성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 기본적으로 프로세서는 오직 입력된 값을 계산하여 출력하는 구조 그 자체이다보니 입력되지 않은 랜덤한 값을 뽑아낼 수는 없는 것 . 이 때문에 많은 난수 생성기는 일정한 난수표를 가지고 조작자 = 플레이어가 입력할 때 생기는 이런저런 변수들 ( 입력 타이밍 , 순서 등등 ) 을 가지고 그에 대응하는 난수표에 있는 값을 뽑아주는 것이다 . 그래서 보이기에는 난수처럼 보이지만 , 사실은 플레이어가 그 때마다 조금씩 자기도 모르는 다른 디테일로 정해진 값을 불러내는 셈이다 . 즉 , 난수표 = 주사위의 전체 눈 값 , 출력값 = 주사위를 굴려 위로 향한 면의 값으로 볼 수 있는 것 . 난수표는 그저 모수가 좀 많이 큰 주사위라고 할 수 있다 . 주사위 또한 던지는 위치 , 패턴 , 스냅의 방식 등으로 어느 정도 확률을 통제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처럼 , 재미있게도 이 난수표를 가지고 특정값을 유도해내는 것도 유사한 느낌을 준다 . 이러한 문제들이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것들이 이를 테면 과거 ‘ 몬스터 헌터 ’ 시리즈에서 ‘ 랜덤한 ’ 결과물을 뱉어내는 연금술의 시드값을 파악해내어 다음에 나올 연금 결과물을 알게 해주는 치트엔진 같은 것이다 . ‘ 몬스터 헌터 : 월드 ’ 의 마카 연금은 캐릭터마다 고유의 연금술 시드가 있었고 , 치트엔진을 설치하고 몇 번 연금을 해주면 치트엔진이 그 캐릭터의 시드를 알아내고 , 원하는 아이템이 몇번째 순서에 있는지 알려주었다 . 사실 , 정말 많은 게임들이 이 방식을 채용하고 있고 , 그때마다 항상 벌어지는 사태이기도 하다 . 단순히 기술적인 방식 뿐만 아니라 구조적인 면에서도 주사위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 MMORPG 에서 많이 사용되는 캐릭터 전투 로직 중 하나로 프록 (PROC) 방식이 있다 . 프록은 간단하게는 기술 시전시 일정 확률로 더 강한 공격을 하거나 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방식을 말한다 . 플레이어들은 일명 로또 딜이라고 부르는 그 방식이다 . 하지만 대부분의 프록에 쓰이는 확률을 보면 그 수치는 상당히 상징적이다 . 50%, 33%, 25%, 10% 처럼 발동 확률을 몇분의 일 , 이런식으로 쉽게 치환할 수 있는 수치를 가지는게 보통이다 . 즉 , 이미 디지털 게임에서는 100 분위로 표시하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주사위의 1/n 방식을 따르고 있는 셈이다 .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일단 일반적으로 사람이 한 눈에 보고 발동 확률을 계산하고 DPS 의 상승 기대값을 쉽게 치환할 수 있을 정도의 수치는 결국 주사위에서 많이 쓰이는 십수분의 일 정도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 수치의 값이 지나치게 낮아도 , 만약 그 확률이 나뉘지 않는 소수로 되어 있거나 한다면 더더욱 계산은 어려워진다 . 물론 게임 상의 각종 수치들은 밸런스를 위해 조정될 수 있는 유동값이지만 , 대체로 프록 직업들의 밸런싱은 프록 확률보다는 그 위력과 발동 방식 개선 위주로 이루어지는게 주요 추세다 . 이 확률을 건들게 되면 플레이어들은 또다시 복잡한 계산을 돌려야만 하니까 . 결국 디지털 프로세서를 이용한 비디오 게임은 무한대의 확률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 그걸 활용하는 건 결국 사람이기에 사람이 인지하기 쉬운 범위 내에서만 쓰이게 된다는 이야기다 . 한편으로는 이 프록 방식이 다름 아닌 주사위 굴림 게임에서의 ‘ 크리티컬 ’ 방식을 완전히 똑같이 채용한 개념이기에 더더욱 그렇게 보이는 면이 있다 . 여기까지 생각하다보면 , 시대가 많이 발전했음에도 주사위라는 방식과 체계를 이용하는게 오히려 가장 공정하고 효율적인 확률놀음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 비록 이제는 멀티코어를 활용하거나 별도의 알고리즘 , 하드웨어를 이용해 진정한 의미의 난수를 디지털에서도 생성할 수는 있지만 , 여전히 그 벽은 높다 . 주사위라면 단 몇백원 만에 유의미하게 재미를 느낄 수 있는 확률놀음을 할 수 있는데 , 그 이상의 것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 즉 , 주사위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방식을 불문하고 거의 모든 난수 생성의 기초 형태이면서 , 사람이 놀이에서의 확률 사용을 인지하도록 하는 , 일종의 기초 언어와도 같은 개념이다 . 물리적으로도 개념적으로도 주사위는 확률 놀음에서 대체되기 힘들다 . 그 아성을 위협할 수 있는 건 카드묶음이 거의 유일할 정도다 . 심지어 디지털 환경에서는 카드묶음도 앞서 말한 방식 그대로 난수표 그 자체가 되기에 , 주사위와 동일한 방식을 취하는 셈이다 . 어쩌면 보드 게임 , TRPG, 테이블탑 미니어처 게임 등 오프라인 게임에서 주사위를 던질 때 느껴지는 그 긴장감이 독보적인 이유는 그 어느 난수 생성보다 가장 공정하고 , 가장 진실된 방식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너무 억지 같은가 ? 당신도 단 한 번이라도 주사위 굴림에서 다이스 갓의 은총을 받아보게 된다면 조금은 다르게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 정말 날 것의 주사위 굴림 , 그걸 한 번쯤 체험해 보시는건 어떠실지 .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이명규 게임 기자(2014~), 글쓴이(2006~), 게이머(1996~)

  • Why is the Korean Console Market Size so Small? - A Retrospective of Korean Console Games

    I have a vague memory of a time when I was in upper elementary school, sometime in the early 90's or so, but I can’t recall the exact year. I had gotten a "gaming console". I think I won it in a magazine giveaway. Given the age, I can assume what model it was, but I can only make an assumption. I also do not recall the exact model.  < Back Why is the Korean Console Market Size so Small? - A Retrospective of Korean Console Games 11 GG Vol. 23. 4. 10. You can see the Korean version of this article at this URL: https://gamegeneration.or.kr/board/post/view?match=id:58 I have a vague memory of a time when I was in upper elementary school, sometime in the early 90's or so, but I can’t recall the exact year. I had gotten a "gaming console". I think I won it in a magazine giveaway. Given the age, I can assume what model it was, but I can only make an assumption. I also do not recall the exact model. The reason my memory is so fuzzy is simple: I only played with that console a handful of times. The ROM packs had either a single collection of games or none at all, so the minigames on the internal ROM were all there was. The reason, of course, was my parents. I wasn't kept from playing it, but buying a new ROM pack was out of the question, and the very act of connecting it to the TV at home was frowned upon. I had no concept of what a cable was, or why there were so many wires, and I needed an adult to show me how to connect all the right wires, but my parents actively refused to take on that role. To play the console I had to go over to a friend's house, and while their parents would help me connect everything, I wouldn’t say that they looked comfortable doing it. With no games to play and nowhere to play them, the first game console of my life naturally disappeared into a closet and was completely forgotten. I imagine that the gamers who grew up in the '80s and '90s probably shared a similar experience. As a result, console games only make up a small percentage of the South Korean gaming market today. According to the 2020 White Paper on Korean Games, the percentage is 4.5%, but 1.4% of this is taken up by arcade games, which virtually barely remain in existence. This is a far cry from North America's 38.4%, Europe's 37.5%, and South America's 19.1%, as well as the 2022 global ratio of 25.2%. In Asia, console games accounted for a mere 8.7% of the market, in large part likely due to South Korea's small console market. PC and mobile games, on the other hand, account for 25.7% and 54.1% in Asia, respectively, a stark contrast to the rest of the world. * 2020 White Paper on Korean Games, p. 668 The reason for this can be traced back to its humble beginnings in the 80s and 90s. It's a sad story of a market that started small and never experienced the momentum of hegemony experienced by arcades and PC and mobile. Let's go back to those sad days for a moment. The first game console that was sold in South Korea was the Otron TV Sports. It was a console with built-in games, just like the American "Pong" console, and was initially priced at 29,500 won, and later reduced to 198,000 won. In comparison, in 1977, the average monthly salary of a worker was 69,000 won. It was a price that was far from market formation or popularization, so it didn’t mean much apart from the fact that it was the first of its kind. Due to the price, console gaming in Korea never really took off in the era of the family Pong and Atari, and in the '80s, Nintendo was brought to the forefront. However, the idea of Nintendo being imported into South Korea, a country with strong anti-Japanese sentiment at the time, was out of the question. Instead, PC games on the 8-bit MSX platform were imported in the early 80s as a substitute. Even then, they were a luxury, and as of 1982, less than a thousand units were imported into Korea. By the late 80s, South Korea had succeeded in hosting the Asian Games and the Olympics, and the pride from those achievements were through the roof. Naturally, the anti-Japanese sentiment had subsided somewhat, and with Daewoo Electronics releasing its own console called the Zemmix in 1985, much of the unfamiliarity with the new culture that was gaming had dissipated. Still, public sentiment made it difficult for Japanese companies to set up local subsidiaries, so domestic corporations imported consoles under different names. Only then did relevant gaming consoles begin emerging. Samsung imported and marketed the SEGA Master System under the name “Game Boy” which became a hit. Hyundai then imported Nintendo's NES, the North American version of the Nintendo Entertainment System, and released it as the “Hyundai Comboy”. Thus, the pioneering of the Zemmix, Game Boy, and Combo formed the market. However, this market was not large-scale enough to be called a mass market. While it was a huge success, and was well-known enough for the masses to be aware of its existence, it was a market centered around enthusiasts. This much was evident based on the individual price of each console. * Daewoo’s Zemmix advertisement, priced at 70,000 KRW. (approx. 53 USD today) * Samsung’s Game Boy advertisement, priced at 119,000 KRW. (approx. 91 USD today) * Hyundai’s Comboy advertisement, priced at 139,000 KRW. (approx. 106 USD today) * The prices of console game titles in the latter half of 1992. Therefore, the cost of console games also had to be accounted for on top of the cost of the gaming console itself. With the year 1990 as the standard, these were times when the starting salaries for secondary school teachers and businessmen for large companies were less than 600,000 won. The wealth gap grew from this point on, making it a bit difficult to use 1.5 million won as the benchmark for the average monthly wage of the working class. Nevertheless, unlike with the Otron from a decade earlier, these prices were ‘a bit overwhelming but still manageable.’ In addition, the hegemony of the gaming market was slowly but surely shifting from arcades to PCs. The PC was actually a competitor to the gaming console, despite costing anywhere from 1 million KRW up to 2 million KRW at the time. In fact, they were actually holding their own weight in the competition against gaming consoles priced under 200,000 won. PCs held the advantage with the context that they were ‘preparing for the technological future’ and could be used in various ways for ‘education.’ Unlike the multifunctional PCs, consoles only offered the gaming feature, rendering even the relatively lower cost to be pointless. Furthermore, the biggest difference between consoles and PCs was the space that they took up. In general, a console belonged in the living room, and a PC in the bedroom. Gaming consoles require to be connected to a TV. The TV is a family-shared media, and so belongs in the living room. Usage of the living room TV was determined by the parents, so the children had to fight for the right to play their console games in the living room. In addition, students of that time had to study late in the night, and thus were often unable to spend time in the living room at all. On the off chance that they could, it was difficult to negotiate for TV time in the living room when their parents had just gotten home from work. But with a PC, the space becomes the room, and you don't have to contend with the usage of the living room. Once you were done studying at night, or if your parents were watching TV, you could just head into your own room. The fact that copying and distributing game software was much easier than copying console ROM packs probably also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the spread of PC gaming. In the narrative of the transition from playing games in arcades to playing games at home, North America and Europe were different. The distribution rate of the PC was much faster than it was in Korea, so the perception that PCs were multifunctional rather than just used for gaming was already widespread. Essentially, the PC was already a part of the parents’ generation. Their children did not have after-school study programs nor late-night studying, and the parents already had the PC as one of their leisurely options, meaning they could afford to cede some of the power of the living room to their children. Plus, parents became cognizant of the role that consoles played as caretakers. They figured, if they gathered a few of the neighborhood kids in the living room, ordered them a pizza and gave them the game console, they could sneak out for a night at the movies downtown. Korean parents, on the other hand, had their grandparents, other parents, or late-night studying to be the caretaker, and so had no reason to give console games a glance. However, this is less the case in Europe than in North America, which can be explained by the average living space. In North America, where the residential space is much larger, having a console in the living room was no problem; but in Europe, you had to consider it first before making that change. Eastern Europe, in particular, is a former communist region with a high threshold for importing game consoles, a product of the capitalist camp. It also had a smaller living space than the rest of Europe did, which is why it has the lowest console market share. The only exception to this interpretation is the United Kingdom, where English is the native language and so is less mentally distant in regard to American culture. * While from 2014, this data helps us gather that the average residential space in North America and Australia is greater than that of Europe (especially in Russia, the eastern part of Europe.) In 1990, South Korea had an average of 62.94 square feet of living space per household, similar to Denmark in this graph, but for the cultural reasons mentioned above, they did not take advantage of this space. Therefore, we can say that North America and Western Europe saw a shift in gaming hegemony from arcades to consoles to PCs, while Korea and Eastern Europe went straight from arcades to PCs. Given the status of gaming arcades in these countries, we can summarize the narrative in terms of space. In North America and Western Europe, it's downtown to the living room, then the living room to the personal room. In Korea and Eastern Europe, it’s straight from neighborhoods to personal rooms. The narrative of these spaces is now shifting to being ‘directly in your hands’ with the concept of ‘mobile’ platforms, but the context of these spaces goes beyond that. Whether it's a glitzy downtown gaming center in North America and Europe or a dingy neighborhood arcade in Korea, arcades are public spaces built for gaming, so they naturally build a sense of community. Think of all the times you went to your local arcade to watch your friends play and play against other players from other neighborhoods. We could describe arcades as being "socially-friendly gaming spaces". When this gaming space transitions into the private space of the living room, the social aspect fades, but it doesn't disappear. Someone can watch you play games, you can converse with someone while playing, and/or you can play together, all in the living room. Console gaming is a solitary medium, but it's also a great offline social medium. When the gaming space shifted to the personal room, the social aspect became much less important. The room is a strictly private space, which is why it's possible for Korean parents to have their kids playing PC games while the parents can watch TV. The word PC stands for personal computer, after all. So, before the advent of online gaming, gaming in Korea was a one-person media, back when "playing games together" meant each person held a joystick/pad at a separate arcade/console cabinet. You could describe this as both offline anti-socialization + online socialization. The antisocial nature of PC gaming has been brought down to console levels due to the proliferation of the internet. In the case of internet cafes, it was like reverting the room’s space back to an arcade, and the “arcadeification” of StarCraft was an especially huge historical pivot in Korea. It was socially offline when you went to play StarCraft at an internet cafe with a group of friends, but it could also be done online as well. In other words, Korea’s internet cafe culture has diluted the offline, antisocial nature of PC games, but has also developed the social, online nature due to the expansion of infrastructure, and the result is no more than a reinforcement: You do not have to meet people in-person to play MMORPGs together. And so, society’s perception of games changes. In North America and Europe, where the market share is close to 40%, the offline-social view of gaming is still somewhat alive, such as when you invite friends over to play Halo. The fact that one of the slang terms for video games in American English is “nintendo games” is a testament to Nintendo's historical influence, but it also indirectly demonstrates that the social aspect of consoles is deeply woven into the perception of gaming in English-speaking societies. In Korea, on the other hand, after exiting the arcade, you go straight to your room. The perception of offline socialization is almost non-existent. Two characters that illustrate a stark difference are Thor and Koo Kyung. In the movie, Avengers: Endgame, Thor is presented as a gaming addict who plays Fortnite together in the living room with his friends. On the other hand, Koo Kyung, the main character in the Korean drama Inspector Koo, is a gaming addict, but plays MMORPGs alone in her own home. She interacts with her guildmates through the game, but is a reclusive loner otherwise in the world outside. The difference between Thor’s living room and Fortnite, and Koo Kyung’s own room and MMO role-playing game, is the distinct characteristic of Korean gaming – the lack of consoles. * Thor has become disconnected from society, but he still plays his games together with his friends. This can be seen as a remnant of the faintly offline social nature of consoles. * Koo Kyung has also become distanced from society, but unlike Thor, only she exists in her offline space. This can be seen as society’s perception of online, socially-oriented PC games. This historical context, or difference in experience, is where the difference between the social perception from outside of gaming and the gaming that consumers experience looking out from the inside comes from. The number of Korean console games being extremely low does not simply and one-dimensionally mean that fewer games are made for this platform, but also that fewer games that can be used for offline socialization are produced and consumed. Another way to put it is that games made or distributed in South Korea are made with online socialization as the primary, or even sole assumption. And now, we approach the year of 2022. The hegemony of gaming has progressed in the order of arcade, console, then PC, and is currently transitioning into mobile platforms. The offline space for mobile is incredibly narrow because that space is in the palm of your hand, and it's more offline-antisocial than PCs are. Looking at this transition, you can imagine a graph where offline socialization continues to fade and online socialization grows in importance. So, are the weight of the times shifting to be completely online-social? This is a memory from a few years ago. One of my exes was hooked on the augmented reality game, Pokémon GO. They had to meet up with people in order to capture and trade for more Pokémon, and would even occasionally meet up with people from the community near their house to move in groups together around the neighborhood. This was the point where online socialization became offline socialization. Despite having the “look and feel” of a traditional online game, Pokémon GO was bringing people together to play, leaving plenty of room for interpretation as a mobile arcade or mobile internet cafe on the streets. Looking back, I remember seeing celebrities traveling from city to city to play Pokémon GO, with fans chasing them along the way. This was one of the marketing points of the Nintendo Switch. It's a console that's both stationary and portable, so two players who meet offline can play together by connecting their consoles. This proves that the mobile platform actually hides an aspect of offline-socialization. It's a paradox that makes it the first platform to facilitate offline contact because it's portable. It's phenomenally convenient compared to lugging a game console or PC to a friend's house to play together offline. Throw in the possibility of augmented reality (AR) games, and the social aspect of mobile gaming has the potential to guarantee a solid place in society. But can the offline-social aspect of Korean games, which has been missing since the arcade era due to the absence of console games, make a dramatic comeback? Can something beyond the social activities that Pokemon GO fostered be created? That answer lies in the imagination of developers and how users utilize it.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Freelancer Journalist) Sung Gap Hong a freelance journalist. I suspect that this occupational name is synonymous with 'unemployed'. Starting his journalist career at the Ddanji Ilbo, he was the first to report on the manipulation of NIS comments. Recently, I succeeded in losing weight through exercise for the first time in my life, and I fell ill praising the trainers who coach the exercise. (Translator) Esther Yum

  • 적정한 게임가격이란 무엇일까?

    흔히들 스팀 라이브러리를 두고 하는 농담에는 ‘옛날에는 게임을 사서 안 했고, 요즘에는 게임을 사서 안 한다’는 말이 있다. 오랜 불법복제가 만연했던 시대를 지나 ESD플랫폼으로의 전환을 맞은 PC게임 이용자들은 한때는 게임에 돈을 내지 않았고, 지금은 돈을 써 놓고도 막상 플레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흥미롭게 뒤튼 말이다.  < Back 적정한 게임가격이란 무엇일까? 09 GG Vol. 22. 12. 10. 흔히들 스팀 라이브러리를 두고 하는 농담에는 ‘옛날에는 게임을 사서 안 했고, 요즘에는 게임을 사서 안 한다’는 말이 있다. 오랜 불법복제가 만연했던 시대를 지나 ESD플랫폼으로의 전환을 맞은 PC게임 이용자들은 한때는 게임에 돈을 내지 않았고, 지금은 돈을 써 놓고도 막상 플레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흥미롭게 뒤튼 말이다. 라이브러리를 차고 넘치게 만들, 사람의 24시간으로는 미처 다 플레이할 수 없을 정도의 타이틀을 ESD플랫폼에서 구매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만큼 게임을 구매하는 데 드는 비용이 실제 플레이가 가능한 여가시간을 한참 넘을 정도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확실히 ESD플랫폼이 보편화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게임 타이틀의 가격은 싸졌다고 볼 수 있는 부분들을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게임 가격이 정말 싸졌다고 말하기는 또 어렵다. 이른바 AAA급 게임 타이틀의 가격은 정규발매를 기준으로 한다면 늘 천천히 오르고 있고, 디럭스판이나 한정판 같은 경우에는 이제 10만원을 훌쩍 넘어가는 모습도 보기 어렵지 않다. 싼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비싼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게임의 적정한 가격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한 편의 디지털게임 제작에는 적지 않은 인력과 자원이 들어가고, 적정한 가격은 제작자에겐 충분한 수익을 안겨줌으로써 더 나은 게임의 발전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하고 이용자에겐 자신의 게이밍을 더욱 즐겁고 풍성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좋은 게임을 만족스러운 가격에 이용할 수 있게 해 주는 합의점이기 때문이다. 게임유통에서 정규가격을 짚는 일의 어려움 지나온 게임의 발전사를 더듬어보면 애초부터 게임의 정가라는 것이 매우 자의적이고 유동적인 무엇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케이드 오락실은 동전 한 개에 일정한 도전횟수를 제공받는 방식으로 일련의 정가 시스템을 구축했지만, 이는 플레잉타임이라는 기준으로 살펴보면 플레이어의 숙련도에 의해 가치의 변동이 크게 일어나는 방식이기도 했다(아마도 오래된 게이머들은 동네 고수가 오락실 주인에게 동전 하나 받고 쫓겨나는 장면들을 목격했을 것이다). 아케이드 게임 하나를 클리어하기 위해 필요한 금액은 사람마다, 게이머의 숙련도마다 다르게 잡히곤 했다. 물론 모든 게이머가 특정 게임을 클리어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는 점도 생각해볼 지점이긴 하다. 그나마 콘솔, PC의 패키지 기반 유통체계에서는 정가라는 지점이 도드라질 수 있었다. 롬팩 한 개, 디스켓 한 장에 담긴 소프트웨어의 가격은 대체로 고정되었고, 플레잉타임과 무관하게 패키지 하나에 얼마라는 대략의 평균가격대가 존재했다. 하지만 온라인 유통이 보편화되는 시대에 들어 패키지 방식의 정가는 상설할인에 가까운 대규모 할인 시스템 속에서 다시 또 요동치기 시작했고, 최근 들어서는 구독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다시금 애매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온라인/모바일 시대 이후 보편화된 부분유료결제에 이르면 이제 게임의 정가를 논하기 어려운 처지에 이른다. 같은 게임을 같은 시간 플레이해도, 숙련도의 높고 낮음을 제해도 이제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의 소비금액대가 같은 게임을 둘러싸기 때문이다. 똑같이 우마무스메를 해도 한달에 100만원을 쓰는 사람과 무과금 이용자 사이에서 우리는 이 게임의 정가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먼저 짚고 가야 할 전제는 정가와 적정비용이 다르다는 당연한 사실이다. 한 사람이 게임에 얼마를 쓰는 것을 적절하다고 판단하는가는 정가의 문제가 아니라 적정비용의 문제다. 오락실에 갈 때 얼마만큼의 동전을 들고가는가는 개별 게임에 넣는 동전의 액수에 대한 총합으로 결정되는 문제이지 개별 투입동전의 단가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정가는 무엇이느냐는 이야기는 그래서 적절한 소비금액이 얼마인가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생산 – 유통 – 소비 과정에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교환의 시너지를 이루며 상생할 수 있는 가격이 어디에 형성되느냐는 질문이 된다. 물론 이 또한 개별 소비자들의 적정 소비비용에 의해 영향받을 수 있겠지만, 우선순위는 생산자 – 소비자 사이에 맺히는 전통적인 가격에 의한 교환관계의 문제에 잡힌다. 이런 전제를 들고 이야기를 더 풀어나갈 때 짚어야 할 또 하나의 전제는 단일재화로 유통되지 않는 오늘날의 디지털게임 유통방식에 관한 문제다. 게임은 과거 아케이드의 등장 이래 대여 서비스(아케이드) – 재화의 구매(가정용 콘솔과 PC) – 대여 서비스(서버-클라이언트 중심의 온라인/모바일게임)을 거치며 재화 혹은 용역의 입지를 그때그때 바꿔온 바 있었다. 구매와 대여라는, 아주 뭉뚱그리자면 서로 다른 이 두 유형의 게임 소비 방식이 서로 엇갈리고 또 공존해 있는 현실에서 정가라는 문제를 다루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여기에 수시로 존재하는 할인이벤트와 구독 문제까지를 포함한다면 사실상 게임에서 ‘정가란 무엇이다’, 혹은 ‘게임의 정규가격은 다음의 요소를 고려해 결정할 수 있다’는 단언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장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생산자가 자신이 판단하기에 적정한, 다시말해 산정한 기간 안에 제작비를 회수하고 적정한 이윤을 낼 수 있는 바운더리 안에서 이용자 수와 객단가를 제시하고, 제시된 가격에 소비자가 구매와 이용으로 반응하는 시장결정을 통해서만 짚을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굳이 이 어려운 일을 생각해보자고 제안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정가 문제를 생각해야 하는 이유 한국 소비자물가지수는 총 480개의 재화와 용역에 대한 실가격을 조사해 물가상승률을 알아보기 위한 지표로 삼는 지수다. 여기에는 오락 및 문화라는 카테고리로 총 47개의 항목이 들어가는데, 악기, 컴퓨터 및 컴퓨터 수리비, 영화관람료, 서적, 여행비 등이 포함된다. 갈수록 게임이용률이 늘어가고 있다는 조사가 적지 않고, 또 한 게임에 몇 억을 쓰는 일이 각종 미디어를 통해 보기 드물지 않은 사례로 나타나고 있는 상황에서 정작 게임이용료는 소비자물가지수에는 아직 포함되지 않은 상황이다. 그나마 유관한 항목이라면 아마도 PC방이용료 부문과 온라인콘텐츠 이용료일 것이지만, 이 또한 게임부문 물가의 정확한 반영이라고 이야기하기 어려움은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게임이 정말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미디어이자 일상의 여가로 자리잡았다고 이야기하려면 그에 따른 여러 후속조치들이 뒤따라야 한다. 각종 제도의 정비와 인프라 구축은 비단 게임문화의 발전과 확산 뿐 아니라 게임이 동시대의 유의미한 여가이자 문화활동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프라 측면에서의 정비에는 게임의 소비에 대한 경제적 고찰도 포함된다. 한 달에 사람들은 게임에 얼마만큼의 비용을 쓰는지, 최고값은 얼마이고 최저값은 얼마인지와 같은 기초조사는 이미 게임이용자 실태조사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중이지만, 이것이 비단 게임에 머무르지 않고 좀더 보편적인 경우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앞서 예로 든 소비자물가지수와 같은 지표에의 산입이다. 영화관람료와 TV, 휴대용멀티미디어기기가 항목으로 들어있는 상황에서 게임소프트웨어 가격의 이슈 또한 이제는 포함되어야 할 필요를 맞은 시대다. 단지 게임값을 물가에 연동시킨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게임이 사회적, 시장적 측면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이제 각종 지표에 포함하여 반영해도 될, 아니 이제는 포함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는 이야기다. “게임의 적정한 가격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은 그런 차원에서 의미지어진다. 적정가격을 묻는 일은 게임이용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에 머물지 않고, 여가와 문화라는, 산업화 시대를 지나 정보화 시대로 진입한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 갈수록 비중을 키워나가는 카테고리 안에서 다른 요소들과 관계맺는 게임의 좌표를 향한 질문이다. 다른 여가/문화생활에 비해 게임가격은 어떠한가? 여러 문화생활 중 게임에 비용을 쓰는 이유는 상대적으로 다른 매체나 여가에 비해 어떤 소구점이 있었는가? 이러한 질문은 단지 커뮤니티 게시판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이제 사회를 바라보는 여러 관점 안에 포함되어야 할 질문이 되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게임의 정가라는 질문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정가가 무엇인지를 쉽게 정의내릴 수는 없지만, 정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필요한 많은 조건과 변수들을 질문 앞에서 고민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과도한 현질이 가져오는 폐해이야기할 때나, 이름뿐인 ‘프리 투 플레이’의 허상을 짚을 때나 결국 이야기는 ‘그래서 게임에 정가라는 건 뭔데?’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가격 이상으로, 우리는 ‘적정한 정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시대를 맞았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한국 게임비평의 궤적과 방향

    세계 최초의 게임잡지는 1981년 영국에서 발간된 <컴퓨터와 비디오게임(Computer & Video Games: CVG)>이다. 2004년부터 온라인으로만 발행되다, 2015년에는 온라인사이트까지 폐쇄하고, (www.gamesradar.com)로 리디렉션됐다. Gamesradar+는 여전히 기대작이나 신작 리뷰, 업계동향뿐 아니라 알찬 내용의 작품비평을 제공해 주고 있다. 한국에서 게임잡지가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약 10년 뒤인 1990년대 초반이다. 1980년대 PC 보급시기와 맞물려 닌텐도(Nintendo)의 ‘패미콤(Famicom)’을 국산화한 ‘현대 컴보이’가 소개됐다. 이후 세가(Sega)의 16비트 ‘메가 드라이브(Mega Drive)’를 삼성전자가 국내버전으로 바꾼 ‘수퍼 겜보이’가 발매되고, 콘솔게임에 대한 관심 급증이 게임전문잡지의 탄생을 추동했다. < Back 한국 게임비평의 궤적과 방향 01 GG Vol. 21. 6. 10. 1. 세계와 한국 최초의 게임잡지 세계 최초의 게임잡지는 1981년 영국에서 발간된 <컴퓨터와 비디오게임(Computer & Video Games: CVG)>이다. 2004년부터 온라인으로만 발행되다, 2015년에는 온라인사이트까지 폐쇄하고, ( www.gamesradar.com )로 리디렉션됐다. Gamesradar+는 여전히 기대작이나 신작 리뷰, 업계동향뿐 아니라 알찬 내용의 작품비평을 제공해 주고 있다. * 〈CVG〉(왼쪽)와 〈Gamesradar+〉(오른쪽) 한국에서 게임잡지가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약 10년 뒤인 1990년대 초반이다. 1980년대 PC 보급시기와 맞물려 닌텐도(Nintendo)의 ‘패미콤(Famicom)’을 국산화한 ‘현대 컴보이’가 소개됐다. 이후 세가(Sega)의 16비트 ‘메가 드라이브(Mega Drive)’를 삼성전자가 국내버전으로 바꾼 ‘수퍼 겜보이’가 발매되고, 콘솔게임에 대한 관심 급증이 게임전문잡지의 탄생을 추동했다. * <게임월드> 창간호 한국 최초의 게임잡지는 1990년 8월에 발간된 <게임월드>로 알려져 있다(조기현, 2012, 58쪽). 이어 <게임뉴스>(1991), <겜통>(1992), <게임챔프>(1992), <게임정보>(1993) 등이 발간되면서 게임잡지들의 각축전이 시작됐다. 당시 플레이어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정보는 신작소개나 발매일정, 공략이었지만, 게임잡지는 게임의 긍정적 면모나 문화적 성격을 부각하는 기사를 싣는 등 게임 인식전환에도 신경 쓰는 모습을 보였다. 게임을 분석할 필자를 모집해 그들의 글을 싣거나(1992년 <게임월드>, 1993년 <게임정보> 등), 미국이나 일본 게임저널의 기사를 번역하거나(1994년 <게임채널> 등), 게임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글들을 연재(1996년 박병호의 <경향신문> 연재, 1999년 박상우의 <시네21> 연재 등)하는 등, 유사비평 혹은 비평의 초기형태라 할 수 있는 시도들이 다양하게 이뤄진 것 역시 특기할 부분이다. 2. 번들 CD에 집중했던 PC게임 잡지들 1990년대 중반부터 PC게임이 급격히 성장함에 따라 대부분의 게임잡지들도 PC게임에 집중했다. 당시 잡지들의 대표적 특징으로 번들(bundle) CD 제공을 들 수 있다. 초기 번들 CD는 시류지난 게임의 재고털이를 위해 제공된 것으로, 플레이어들에게 호응을 얻고 산업전반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게임잡지의 판매부수를 결정하는 주된 변수로 자리매김했다. 경쟁심화 속에서 잡지사들은 고전 명작게임 위주로 제공하던 번들 CD에 조금씩 최신작을 담게 됐다. 1980년대 게임잡지들이 차별화된 게임정보와 공략을 내세워 고정 독자층을 확보·유지했다면, 1990년대 게임잡지들은 번들 CD로 독자층을 나눠 먹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신작을 유치하기 위한 잡지사들의 과도한 경쟁은 번들 CD 구매비용의 증가로 이어졌고, 이는 잡지사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이후 PC게임 복사가 확산되고, 네트워크 환경발달과 함께 온라인게임이 태동하면서 PC게임 시장은 내리막길을 걷는다. 동시에 게임잡지에도 시련이 찾아왔다(김득렬, 2012. 1. 4.). 3. 종이잡지에서 웹진으로 종이잡지에서 웹진으로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약 10년간 이어온 게임잡지 역사는 2000년대 들어 비디오게임 및 PC게임 산업과 함께 쇠퇴했다. 게임잡지는 힘을 잃어 갔지만 게임 산업은 새로운 성장동력을 얻게 되는데, 온라인게임의 인기가 그것이다. 게임잡지들도 이에 편승해 온라인 기반 게임관련 잡지들로 변모해 갔다. 그러나 전문적인 게임비평보다는 상대적으로 다소 가벼운 비평, 게임 자체와 공략에 대한 정보제공, 부록 중심이었던 게임잡지는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자리를 내주면서 대부분 폐간됐다. 인터넷의 발달은 기존 출판잡지에 좌절과 시련을 부여했지만, 플레이어들에게는 오히려 정보 공유와 전달을 가속화하는 기반으로 작용했다. 물론 플레이어들이 게임정보를 걸러내 원하는 것만 소화하기는 쉽지 않았다. 보다 전문적인 접근에 대한 수요도 모두 채울 수는 없었다. 이는 방대한 게임정보를 체계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채널을 찾는 계기로 작용했고, 게임웹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김득렬, 2012. 1. 4). 2021년 6월 기준 오프라인을 통해 발간되고 있는 게임전문지로는 <게이머즈(Gamer’z)>가 유일하다. 물론 온라인상으로는 <인벤>, <게임메카>, <디스이즈게임>, <포모스>, <게임조선>, <게임포커스>, <데일리게임>, <게임어바웃>, <게임동아>, <경향게임스>, <더게임스> 등 많은 게임웹진이 존재한다. 하지만 <게이머즈>뿐 아니라 다른 웹진들도 여전히 전문적인 비평보다는 리뷰와 공략 중심의 정보제공에 치중하고 있다. 4. 게임비평 확산을 위한 여러 시도들 오히려 게임의 안과 밖을 보다 꼼꼼히 들여다보려는 시도는 게임전문지가 아닌 다른 공간을 통해 더 활발히 이뤄져 왔다. 물론 그조차도 전문성과 안정성을 가진 것이라 보긴 어렵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런 시도가 지속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문, 영화 잡지나 기타 대중문화 잡지, 컴퓨터 잡지 등이 게임비평에 종종 지면을 할애하긴 했지만, 단편적인 기획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민간재단인 게임문화재단에서 2012년 3월부터 월간지 <게임컬처(Game Culture)>를 발간, 업계나 학계 등에서 활동하는 편집진들을 활용해 양질의 게임 관련기사와 비평을 게재했으나, 2012년 12월호를 마지막으로 폐간 수순을 밟았다. 한편, 게임비평의 궤적을 살핌에 있어 ‘게임비평공모전’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게임에 대한 인문·사회학적 관심을 증대시켜 문화적·학술적 가치를 제고한다는 취지 아래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콘텐츠진흥원, NHN(주), 더게임스가 공동 주관하여 2008년부터 ‘게임비평상’을 제정했다. 전경란(2013)은 2008년부터 2012년까지 게임비평공모전에서 가작 이상의 상을 받은 30편의 비평들을 분석, 비평들이 게임의 다양한 측면에 관심을 두고 있지만, 그 영역 및 접근방식은 제한적이라는 결론을 도출한 바 있다. 게임의 내용과 형식적 특징, 즉 게임 플레이에서부터 게임 구조, 게임 세계 등을 중심으로 고루 비평을 행한 반면, 기존의 문화 장르를 분석하기 위한 이론과 방법론을 적용한 탓에 제반 게임 현상을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공모전은 아마추어 게임비평가들을 발굴하고 게임비평 저변을 확대한 국내 최초의 시도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2012년 제5회를 끝으로 더 이상 개최되지 않고 있다. * 제1회 게임 비평상 공모전 포스터 비평가들의 단행본 작업도 의미가 적지 않다. 박상우의 <게임, 세계를 혁명하는 힘(2000)>과 <게임이 말을 걸어올 때(2005)>, 이상우의 <게임, 게이머, 플레이: 인문학으로 읽는 게임(2012)>, 이경혁의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인문학협동조합 조합원들의 <81년생 마리오: 추억의 게임은 어떻게 세상물정의 공부가 되었나?(2017)>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경유해 게임이 우리 일상과 사회·문화에서 갖는 의미를 비교적 새롭게, 다각도로 포착했다는 장점을 갖는다. 하지만 상호참조 없이 본격 비평서임을 자처하며 게임인문학에 대한 다분히 기초적인 논의(특히, 내러톨로지나 루돌로지와의 연관 속에서)를 유사하게 반복하고 있다는 점, 이후 보다 발전적이면서 지속적인 작업으로 연결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은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 * (왼쪽부터) 박상우, 이상우, 이경혁, 인문합협동조합의 게임비평서 현재진행형이라 아직 그 성과를 말하기엔 이른 감이 있지만, 게임비평에 대한 주목할 만한 시도들이 있다. 이경혁은 2014년 11월 미디어 비평지 <미디어스>에 게임비평 ‘Play the Game’의 연재를 시작으로, 여러 온라인신문, 게임사 블로그, 잡지 그리고 <국방일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를 통해 비평작업을 하고 있다. 개별 게임 텍스트에서부터 한국 게임문화의 역사적 유물로서의 오락실과 e스포츠(e-Sports), 게임산업, 플레이/어, 게임을 둘러싼 부정적인 담론, 그리고 게임 텍스트에 담긴 사회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논의범위 또한 넓다. 2021년 6월 기준 비슷하게 활동하는 비평가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그가 보일 행보에 귀추가 주목된다. 5. 게임비평의 문제점 한국 게임비평의 외재적 문제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게임에 대한 강한 규제와 부정적 담론 확산으로 산업이 위축됨에 따라 게임비평이 활성화될 수 있는 토대도 척박해졌다. 강한 규제와 부정담론은 게임을 ‘나쁜 것’,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든다. 둘째, 게임전문지가 다수 존재함에도 전문적인 비평을 행하고 있지 못하다. 해외는 상황이 크게 다르다. 영국의 ( www.pcgamer.com )나 미국의 <컴퓨터 게이밍 월드(Computer Gaming World)>( computergamingworld.com )과 같은 게임전문지는 단순한 리뷰나 공략보다 심층적인 정보나 비평을 제공한다. 게임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이뤄지는 웹진 <코타쿠(Kotaku, kotaku.com )>, 개발자와 연구자들이 게임 제작취지와 게임에 대한 비평, 연구결과 등을 게재하는 <가마수트라(gamasutra)>( www.gamasutra.com )등도 전문적인 게임비평공간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물론 국내외의 게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나 플레이어의 성향, 게임에 대한 비평토양 등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한국 게임전문지들이 보이는 리뷰나 공략에의 지나친 집중은 전문지들이 주된 광고주인 게임 퍼블리셔나 게임사들의 홍보매체로 전락한 것 아니냐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게 만든다. 내재적 측면의 문제점으로는 게임만이 가진 텍스트적 특징으로 인한 비평의 어려움을 꼽을 수 있다. 기호와 서사로 구성되기 때문에 다른 문화장르와 유사한 것 같지만, 게임은 독특한 향유구조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 향유구조가 텍스트 자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게임은 사전에 모두 제작된 상태로 향유자에게 제공되는 다른 문화장르와 달리 플레이어가 그것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불완전한 텍스트인 채로 남는다. 플레이어는 불완전한 게임 텍스트에 참여해 게임과 상호작용하는 주체이며, 플레이어의 참여는 곧 완전한 텍스트로서의 게임을 가능하게 만드는 필요조건이다. 때문에 게임에서는 창작주체와 수용주체의 구분이 애매해진다. 게임 텍스트는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다. 이는 게임이 단순히 알고리즘의 구현물이 아니라 플레이어에게 스토리 및 허구적 상황을 경험하게 하는 서사 환경을 지님을 의미한다(강신규, 2016). 따라서 게임비평은 텍스트 자체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어떤 경험이 제공되는지, 경험이 이뤄지고 나면 다음 플레이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등까지를 논의 범위에 포함(김연희, 2012. 12. 12)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게임은 플랫폼별·장르별로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갖는 경우가 많아 그것을 비평하는 데 하나로 모으기 어려운 다양한 관점과 방법들이 요구된다. 다른 문화장르들이 ‘봐야’ 알 수 있는 것이라면 게임은 ‘해 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게임전문가나 수준급의 플레이어라 해도 접해 보지 않은 게임을 비평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게임은 전문가 수준의 정보와 지식을 가진 향유자들이 너무 많은 문화 장르이기도 하다. 게임을 하려면 대체로 같이 즐길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크게는 장르나 플랫폼, 작게는 개별 타이틀에 따라 향유 공동체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경험 제공’이라는 특성은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정보를 공유하고 평가하는 것이 게임 플레이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한다. 요컨대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들은 다른 사람의 플레이나 관련 정보를 ‘접하고’ 그것을 다시 게임‘하는’ 데 활용한다(강신규·채희상, 2011). 직접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이 다른 누구보다도 더 많은 정보와 경험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 정보와 경험 바깥에 위치하거나 안으로 깊이 들어와 있지 못한 게임비평 주체가 그것을 온전히 읽어 내기 어려운 이유다. 6. 게임비평의 조건들 ‘게임비평’이란 게임의 가치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작업을 말한다. 이 때 ‘비평’은 기존의 문학, 미술, 음악, 무용, 연극, 영화 등의 비평에서 사용하는 개념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하지만 각 비평이 그런 것처럼, 게임비평 역시 다른 비평들과 다를 수밖에 없다. 비평의 대상과 조건에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때문에 게임비평의 조건을 살피기 위해서는 비평 일반조건과 게임의 변별적 특성을 반영한 조건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또, 비평의 조건은 고유하게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비평대상의 형질변화와 비평에 요구되는 역할에 따라 다르게 구성되는 것이다. 비평하는 사람에 따라 비평조건에 대한 인식이 다를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그 조건에 대해 최소한의 합의 가능한 지점들을 모색하는 일은 가능할 듯하다. 1) 비평의 일반조건 기본적으로 비평은 비평주체(비평가), 비평대상(넓은 의미의 작품), 창작주체(제작자/창작자/작가), 수용주체(향유자/수용자/독자)라는 네 요소를 필요로 한다. 창작주체에게는 창작에 피드백을 주는 반응으로 작용하고, 수용주체에는 수용 선택여부나 수용방법 등을 알려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 비평이다. 비평주체는 비평을 통해 비평대상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확인해볼 기회를 얻는다. 비평주체/대상, 창작/수용주체가 비평을 구성하는 기본요소들이라면, 비평의 조건으로 다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비평은 감상문 수준을 넘어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둘째, 비평가에 대한 공인절차고 요구된다. 셋째, 전문학술지, 일간지, 잡지, 웹진 등 비평이 발표될 매체가 필요하다. 매체는 비평활동의 안정성을 보장하고, 신뢰할만한 것이어야 한다(김봉석·박정숙·박기수·한상정, 2015. 5. 8). 세 조건은 각각 비평의 전문성, 안정성, 지속성과 관련된다. 이를 종합했을 때, 비평이란 ‘비평주체가 신뢰할 만한 매체를 발표공간으로 삼아, 비평대상과 관련된 사안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을 한 뒤 평가를 내리는 전문적인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무엇보다 비평의 힘은, 대상이 지닌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열어주는 수준을 넘어 그것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지닌 사회적 함의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해나가는 과정에서 나온다. 게임비평도 마찬가지다. 게임이 주는 단순한 즐거움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기능과 게임이 보일 수 있는 비전을 이야기하고, 나아가 그것을 통해 일상의 변화와 시대흐름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비평은 비평대상의 성취를 읽어내고, 그런 읽기를 통한 생생한 인식을 사회로 확산하는 작업인 셈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 전제들이 요구된다. 먼저, 게임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토론을 위한 비판적 풍토를 조성한다. 다음으로, 게임과 게임비평을 지지하고 체계화한다. 마지막으로, 개인 혹은 사회의 게임 향유경험을 이해할 수 있도록 비판적 도구·해석·평가를 제공한다. 2) 변화의 고리와 게임비평 하지만 비평의 일반조건은 게임비평이 당면한 상황과는 꽤 거리가 있다. 특히, 한국에서 게임비평은 느슨하게 형성돼 있고, 기존의 예술·문화장르에서처럼 고정된 형태로 제도화돼 있는 수준까지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비평은 대상이 무엇이 됐든 본질적으로 유연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게임과 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게임비평이라면, 그것은 게임의 변화, 그리고 사회의 변화에 따라 출렁거리는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게임 개념도 계속 재구성된다. 메타버스(metaverse) 시대 게임은 온라인게임 태동 이전 게임과 다를 수밖에 없다. 기존 예술이나 문화장르에 비해 접근성이 높고 폐쇄성이 강한 게임문화의 경우, 전문가 집단의 체계적인 비평이 형성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개별 게임의 향유가 향유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관련된다는 점도 게임비평의 제도적 형성을 어렵게 하는 큰 요인 중 하나다.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게임비평은 없는 게 아니라 어쩌면 너무 많은 곳에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도화된 비평이 미미할 뿐, 제도 바깥의 비평열기는 그야말로 상상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전통적 관점에서 제도화된 비평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게임비평은 그야말로 ‘넘쳐난다’. 블로그,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 소셜 미디어 등 온라인 공간을 기반으로 게임비평을 자처하는 작업들이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다. 다양한 플랫폼과 디바이스를 통해 게임 향유경험이 축적되고 그로 인한 일정 수준의 커뮤니티가 형성됨으로써 플레이어들은 이제 전문가 수준의 정보와 지식을 갖게 됐다. 이는 플레이어들을 준 비평가로 만드는 계기가 됨과 동시에, 플레이어들을 골고루 만족시킬 만한 고유의 비평체계가 이뤄지기 어려운 이유가 되기도 한다. 적극적인 향유=비평을 통해 비평의 저변이 넓어졌다거나 비평이 민주화됐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상황은 게임비평의 수준을 떨어뜨리고 그 정체를 모호하게 만든다. 기존 예술·문화 장르의 비평 장(場)이 이미 제도화된 전문적 비평영역과 온라인을 중심으로 새롭게 구성된 아마추어 비평영역 사이의 갈등과 연대가 교차하는 역동적 공간이 되고 있다면, 제도화된 비평영역의 부재로 인해 가뜩이나 분명하지 않았던 게임비평의 정체는 더욱 불분명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게임비평의 조건과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연결된다. 기존의 비평개념으로는 작금의 현상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과연 전문적인 비평을 위한 체계를 마련하는 일이 게임담론의 생산주체가 되는 일, 그리고 게임발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능동성을 발휘하는 일로 기능할 수 있을까? 제도화돼 있지 않다면 그 자체로 가능성이 될 수는 없을까? 비평의 민주화를 통해 제도권 내 비평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낯선 상상력을 발굴할 여지가 열리게 된 것은 아닐까? 이 질문들에 대해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제도화되지 않은 비평의 장에서 쏟아지는, 이른바 ‘중심 없는 주변부’의 비평들을 규정하는 조건이 새롭게 구성돼야 한다. 비평의 장 자체를 흔드는 변화 속에서 비평과 비평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것보다, 새로운 조건 마련을 통해 비평의 외연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게임 향유자는 수동적으로 비평을 소비하던 역할에서 벗어나, 온라인 공간을 통해 능동적으로 비평을 생산·배포·공유하는 새로운 비평주체로 인식될 필요가 있다. 그들이 비평을 행하는 온라인 공간 역시 해당 공간에 들어오는 비평독자들이 비평을 읽고 소감을 밝히는 새로운 비평의 장이자 역동적인 비평공간으로 자리매김한다. 남은 것은 그들의 비평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비평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냐의 문제다. 하지만 애초에 ‘고급/좋은’ 비평과 ‘저급/나쁜’ 비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전통적 비평이 추구해온 것처럼 고급독자만을 위한 전문적 의미의 비평만이 비평은 아니다. 게임의 특성, 그리고 그 향유자를 감안한다면 전통적 비평개념의 수정 혹은 확장은 필연적이다. 그 명확한 기준과 범위를 제시하는 일은 더 이상 전문가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성질을 지니며, 비평주체와 독자 간 갈등과 연대 속에서 성립한다. 물론 그럼에도 그 과정에서 비평 고유의 목적과 역할은 지켜져야만 한다. 그것이 아니면 비평이 존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강신규, 2016). 7. 게임비평이 나아갈 방향 그렇다면, 게임비평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까? 첫째, 독창적인 이론과 방법론의 발굴이다. 게임비평만을 위한 이론과 방법론을 찾는 일이 쉽지 않음에도, 게임이 처한 현실과 그것을 둘러싼 사회 맥락에 가 닿을 수 있도록 하는 비평이론과 방법론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비평대상이 다르면 비평의 언어도 달라져야 한다. 게임이 가진 고유속성에의 천착을 통하 스스로의 정체와 역할을 구성했을 때, 비로소 게임비평의 변별성이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정신분석 비평, 마르크스주의 비평, 여성주의 비평, 신비평, 독자반응 비평, 구조주의 비평, 해체 비평, 신역사주의와 문화 비평, 레즈비언·게이·퀴어 비평 등 텍스트를 풍성하고도 심도 깊게 살필 수 있는 기존의 비평이론과 방법론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게임의 미학 안에서 통합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함께 이뤄져야 함은 물론이다. 게임 플랫폼이나 장르에 따라 비평을 세분화·전문화함으로써 전체 비평의 틀을 다지는 일도 고려해볼 만하다. 매체전환(media transformation)과 미디어믹스(media mix)가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새로운 비평의 양식이나 형식을 발굴하는 일 역시 매우 중요하다. 둘째, 비평의 역할 재/정립이다. 흔히 발견되는 비평의 자의식 부재, 해설이나 주례사 비평으로의 쏠림은 비평의 역할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데 기인한다. 비평은 비평대상을 흡수하거나 투과시키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 시선과 함께 배출하거나 반사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평의 주된 역할은 ‘먹음’이 아니라 ‘되먹임’이다. 비평주체와 대상 사이에 이뤄지는 되먹임의 반복을 통해 비평을 둘러싼 주체가 공진화(coevolution)하는 것이 비평의 효과다. 하지만 게임비평의 역할은 여기서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특정 텍스트에 대한 치밀한 해독에서, 장 내 주요 행위자들이 직면한 문제들, 그리고 해당 장에 제기되는 도전과 응전의 방향성들을 보다 긴 호흡으로 치밀하게 조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향후 게임비평이 창작주체와 수용주체가 형성하는 문화의 변화를 탐구하는 동시에, 기민하게 변화하는 텍스트들의 정립상과 사회적 활용, 그리고 산업으로서 게임이 당면하고 있는 변화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구체적인 전망과 대비책을 마련하고, 이를 두껍게 읽어내는 역량까지 배양해야 함을 시사한다. 비평이 이차적인 글쓰기로서의 지위에 만족하는 한, 비평이 비평대상을 이끌어가는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게임비평은 텍스트를 넘어 텍스트화되지 않은 현실에까지도(물론 게임과의 관계 속에서)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게임비평의 역할은, 비평으로서 타개해나가야 할 문제와 게임적 사회와 삶에 대한 반성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그것과 함께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문제까지 폭넓게 다루는 것이다. 셋째, 제도권/비제도권을 막론하고 이제 비평논의에 대해 있어 요구되는 것은 ‘총체적’ 통합의 불가능성 혹은 불필요성에 대한 인식이다. 비평과 비평 아닌 것, 비평공간과 비평공간 아닌 곳, 비평가와 비평가 아닌 사람 사이를 구분하는 선은 수명을 다했다. 전문가 수준의 향유자, 전문가에게 없는 경험치를 지닌 향유자, 어디서나 격전이 벌어지는 비평공간, 기존의 정형화된 비평을 넘어서는 비평이 넘쳐난다. 더 이상 서로를 구분하는 선 자체가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게임비평이 나아갈 방향 논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돼야 한다(강신규, 2021). 하지만 문제는 게임비평에 잘 된 비평과 그렇지 못한 비평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게임비평을 할 줄 모른다는 말은, 더 정확히 지적하자면 잘된 비평을 쓸 줄 모른다는 말이다. 비평을 할 바에야 잘 된 비평을 쓰고 싶은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처음부터 그런 비평을 쓰는 일은 쉽지 않다. 처음부터 잘 된 비평을 쓰려고 하는 욕망은 내내 문제가 된다. 하나의 창조적 작업임에도 창조하는 즐거움보다 결과만 탐하게 되어, 남의 것을 모방하게 되고, 얻어들은 지식을 체계없이 나열하게 되고, 허황되게 꾸미게 되는 것이다. 나만의 게임경험과 그 경험과정에서 얻게 된 지식들이 잘된 비평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비평이 잘된 비평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전통적인 것이든 새로운 것이든 먼저 나름의 체계와 전문성을 갖춰야만 한다. 다른 비평에 대한 필요이상의 냉소함도 지양할 필요가 있다. 비평의 총체적 통합이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든 비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니라, (어디서든, 그리고 그게 누구든) 타인의 비평을 주의 깊게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자신의 관점이 지닌 타당성을 물으면서, 타인과 자신의 비평에 새로운 의미를 덧입히려는 노력이다. * 이 글은 저자의 저서 <서브컬처 비평(2021)> 내용을 중심으로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참고문헌 강신규 (2016). 하위문화 비평의 궤적과 방향: 만화·애니메이션·게임비평을 중심으로. <문화과학>, 85호, 128~158. 강신규 (2021). <서브컬처 비평>. 커뮤니케이션북스. 강신규·채희상 (2011). 문화적 수행으로서의 e스포츠 팬덤에 관한 연구: 팬 심층인터뷰 분석을 중심으로. <미디어, 젠더 & 문화>, 18호, 5~39쪽. 김득렬 (2012. 1. 4). 게임잡지 연대기 2부–게임잡지 몰락에서 웹진탄생까지. <게임메카>. URL: http://www.gamemeca.com/feature/view.php?gid=125137 김봉석·박정숙·박기수·한상정 (2015. 5. 8). [좌담회] 우리 만화 비평을 말한다: 만화 담론의 현재와 비평의 길찾기. <크리틱엠>. URL: http://criticm.com/?p=734 김연희 (2012. 12. 12). 게임의 러브레터, 게임비평. <사이언스타임즈>. URL: http://www.sciencetimes.co.kr/?p=110623&post_type=news&news-tag= 박상우 (2000). <게임, 세계를 혁명하는 힘>. 씨엔씨미디어. 박상우 (2005). <게임이 말을 걸어올 때>. 루비박스. 이경혁 (2016).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 로고폴리스. 이상우 (2012). <게임, 게이머, 플레이: 인문학으로 읽는 게임>. 자음과모음. 인문학협동조합 (2017). <81년생 마리오: 추억의 게임은 어떻게 세상물정의 공부가 되었나?>. 요다. 조기현 (2012). 해외 게임기의 한국 상륙. 윤형섭·강지웅·박수영·오영욱·전홍식·조기현. <한국 게임의 역사> (52∼63쪽). 북코리아. 전경란 (2013). 게임비평에 대한 연구: 게임비평 텍스트의 메타분석적 접근. <한국게임학회 논문지>, 13권 3호, 19~30쪽. <미디어스> ‘Play the Game’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431) (computergamingworld.com) (www.gamasutra.com) (www.gamesradar.com) (kotaku.com) (www.pcgamer.com)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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