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은 그곳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 게임 속 여성 캐릭터들의 모험에 대하여
02
GG Vol.
21. 8. 10.
게임을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모험가가 된다. 평범한 일상을 벗어난 주인공이 되어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고 숨겨진 비밀을 파헤쳐 나가며 때로는 자신 안의 영웅적 면모를 깨워 세상을 구하기도 한다. 플레이어는 게임 속 세계 곳곳에 산재된 난제를 해결하는 모든 여정에 기꺼이 뛰어들며 게임을, 모험을 이어왔다. 게임과 모험은 그 궤적을 함께하며 게임을 경험하는 친숙한 방법론을 구축해왔다. 게임의 역사 자체가 일종의 모험기처럼 계속해서 쓰여지는 것처럼도 보인다. 이 글은 ‘게임’이라는 오래된 모험기를 다른 방향에서 펼쳐 본다. 거꾸로 펼친 모험기는 모험의 바깥에서 주인공의 모험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여인들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모험 서사 속 여성의 위치를 묻는 질문에 여성은 본래부터 ‘그곳(there)’에 있으며 영웅이 도달하려는 곳 그 자체라고 대답했다. 그곳은 이를테면 영웅의 영광스러운 업적의 끝으로 모험의 종착지이자 그를 위한 보상이 기다리는 곳이다. 이 보상은 물질적인 부나 명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그에게 구출되길 간절히 기다리는 여인이 있다. 어떤 모험은 그곳에 붙잡혀 간 여인을 찾아 떠나면서 시작되기도 한다. 그는 영웅의 모험 동기이면서 동시에 승리를 거둔 이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되는 셈이다. 고전 게임 ‘동키콩’ 속 레이디가 그러하듯, 게임 속 수 많은 여인들이 게임의 목표이자 최종 보상이 되어 그곳을 지켰다. 그들은 모험의 시발점 혹은 목적지로 설정되지만 결코 이야기의 중심이 될 수는 없다. 게임의 서사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경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자 모험의 이정표가 될 뿐이다. 스스로는 모험을 떠날 수 없어 악당의 탑에 갇혀 구출되기를 기다려야만 한다.
* 피치공주.
모험의 바깥에 자리한 여성 캐릭터로 ‘슈퍼 마리오 시리즈’의 피치공주를 빼놓을 수 없다. 1985년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로 피치공주는 수많은 시리즈에서 납치를 당하고 마리오가 영웅으로 거듭나는 수 많은 여정 끝에서 구출되기만을 기다렸다. 시리즈가 이어지며 실질적인 지도자 역할을 수행한다거나 다양한 능력을 지녔다는 설정이 생겨났지만 스토리의 전개를 위해서는 아무 의심없이 납치 당하고 구해지고 있다. 그렇게 구해진 피치공주는 마리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마리오의 볼에 입을 맞춘다. 피치공주의 키스는 무사히 모험을 마치고 자신을 구해준 남성-주인공을 위한 보상으로서 여러 타이틀에서 반복되며, 남성-영웅과 납치된 여인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붙잡힌 여인’의 대표 명사인 피치 공주도 단독 주인공으로 모험을 떠난 적이 있다. ‘슈퍼 프린세스 피치’(2005)에서 피치공주는 납치된 마리오와 루이지를 구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이 작품은 시리즈의 외전으로 제작되어 기존 시리즈와는 다른 점이 두드러지는데, 우선은 ‘여자아이들도 즐길 수 있도록’ 상당히 쉬운 난이도로 제작되었으며 ‘감정 액션’이라는 새로운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감정 액션’은 희로애락이라는 4가지 감정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기술로, 극적이고 풍부한 감정 표현이 게임의 무기가 되었다. 피치공주는 상징과도 같은 풍성한 분홍 드레스를 입고 울고 웃고 화내며 맵을 활보했다.
닌텐도의 또 다른 공주, ‘젤다의 전설’ 시리즈의 젤다는 수동적인 ‘공주’ 캐릭터로 시작했지만 점차 새로운 캐릭터성을 보여주고 있다. 젤다는 세상을 구할 핵심적인 힘을 지닌 캐릭터지만 그 힘 때문에 적대 세력의 주요 타겟이 되는 일이 빈번했다. 시리즈가 전개되면서 ‘시간의 오카리나’(1998)나 ‘바람의 지휘봉’(2002)에서는 링크를 돕는 주요 조력자로도 등장했지만 ‘공주’로서 모험에 동참하지는 못했다. 두 작품에서 젤다는 남성으로 변장하거나 해적으로서 모험에 동참하여 활약하지만, 공주로서의 정체를 드러내자마자 납치당하거나 위험하다는 이유로 모험에서 배제된다. 또한 변장한 젤다는 짙은 피부와 활동적인 복장으로 자신을 감추다가 공주로서 정체를 드러내면 피부톤이 밝아지고 화려한 드레스로 환복한다. 마리오와 루이지를 구하고자 떠난 피치공주가 분홍 드레스를 벗어 던지지 못했 듯, 그들의 모험은 ‘공주다운’ 복장에 제한되었다.
시리즈의 주인공이 아니었던 이들은 시작부터 모험의 가장 바깥으로 떠밀려버리거나 주인공들의 영웅성을 돋보이게 할 역할로만 한정되어 ‘수동적 공주’라는 전형성 안에서 맴돌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야 젤다는 세계를 구할 모험의 핵심적인 존재로서 설정이 확고해지고 있다. 가장 최근 소개된 후속작 트레일러에서는 긴 금발 머리와 드레스를 입은 익숙한 공주의 모습이 아닌 짧아진 머리에 모험가 복장을 한 젤다를 확인할 수 있다. 비로소 오랜 시간 링크의 모험을 지켜보던 젤다도 새로운 모험에 돌입하고 있다.
* 사무스 아란.
한편 일찍이 모험을 나선 여성 캐릭터도 있다. 1986년 닌텐도에서 출시한 ‘메트로이드’ 시리즈의 주인공 사무스 아란은 강화 슈트를 입고 우주를 종횡하는 현상금 사냥꾼이다. 개발진들은 강화 슈트 속의 전사가 여성이라면 더 멋지지 않겠냐는 아이디어에서 ‘메트로이드’의 주인공을 여성으로 설정했다고 밝혔다. 처음 발매된 ‘메트로이드’에서 사무스 아란의 외모는 강화 슈트로 인해 드러나지 않으며 게임에서도 그의 성별을 추측할 단서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게임을 좋은 성적으로 클리어하면 엔딩에서 사무스 아란은 헬멧을 벗어 강화 슈트 속 전사가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며 플레이어에게 ‘파격적인’ 반전을 선사했다. 더 좋은 성적으로 클리어하게 되면 레오타드나 비키니와 같이 노출이 심한 복장까지 볼 수 있었다. 복과묵하고 강인한 우주 전사도 게임이 끝난 뒤에는 ‘팬서비스’라는 명목으로 자신을 드러냈다. 이러한 ‘팬서비스’는 시리즈에서 전통처럼 계속되었다.
* 라라 크로프트.
사무스 아란이 마케팅의 일환으로 고의적으로 성별을 숨겨 화제성을 노렸다면, 여성으로서 강한 파급력을 보인 캐릭터로는 단연 라라 크로프트가 꼽힐 것이다. 라라 크로프트는 ‘툼 레이더’의 주인공으로 1996년 처음 등장하여 높은 인기를 얻으며 최근까지도 다양한 매체를 통해 변주되고 있다. 초기 라라 크로프트는 독립적이고 야망있는 캐릭터로 설정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90년대의 ‘걸 파워’ 유행도 맞물려 있다. 제작 초반에는 남성을 주인공으로 염두에 두었지만, 설정을 여성으로 바꾸면서 수동적이지 않고 강하면서 동시에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로 수정되었다. 하지만 기획 의도에서 당당한 여성상을 추구한 것과는 별개로 실제로 라라 크로프트는 ‘섹스 심벌’로서의 이미지로 홍보되거나 소비되어 왔다. 여러 버전을 거치면서 많은 변화 있었지만 라라 크로프트를 떠올리는 상징적인 복장은 첫 작품에서의 쌍권총과, 민소매, 짧은 반바지를 입은 모습이다. 초반에는 기술의 한계로 인해 어색한 폴리곤 덩어리로 구현되었음에도 비현실적인 볼륨감이 두드러지며, 민소매와 반바지 차림은 자유로운 활동성보다도 몸매를 과하게 드러내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성적 대상화도 구체화되어 노출도가 높은 코스튬이 제공되거나 바스트 모핑이 도입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성적 대상화된 육체가 아닌 한 인물로서의 라라 크로프트에 주목하기 위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플레이어들이 게임 내에서 라라의 복장을 바꾸거나 누드로 만드는 모드를 제작하거나 모드로 새롭게 연출된 라라 크로프트의 모습을 공유하는 등 캐릭터를 소비하는 방식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사무스 아란과 라라 크로프트는 분명히 모험의 중심에 있지만 이들이 플레이되는 방식, 보여지고 소비되는 방식은 다른 ‘전통적인 영웅’들의 행보와는 크게 다르다. 남성 유저가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게임 시장 특성상 여성 캐릭터들은 ‘캐릭터’가 아닌 ‘여성’에 방점이 찍힌 채로 탄생하고 소비되고 플레이되었다. 여성 캐릭터의 모험에는 게임 속 세계의 위험천만한 장애물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넘어서야 하는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역경이 더해져 왔다.
모험을 떠나는 여성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도 모험의 장벽이 되어왔다. 2014년 발매된 ‘어쌔신 크리드 : 유니티’에는 최대 4인까지 함께할 수 있는 협동 미션이 도입되었는데, 여성이나 유색 인종으로 커스터마이징 할 수 있는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아 많은 비판이 있었다. 당시 디렉터 알렉스 아만시오는 초기에는 여성 암살자도 계획되었으나 “2배의 애니메이션, 목소리, 영상 소스”를 제작하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컸기에 “여성 캐릭터를 삭제”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반발은 #womenaretoohardtoanimate라는 해쉬태그를 통해 공유되었다.
*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이 사건 이후로 ‘어쌔신 크리드’는 플레이가능한 몇 명의 여성 캐릭터를 선보였다. ‘어쌔신 크리드 : 신디케이트’(2015)의 이비는 쌍둥이 남매 제이콥과 함께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했고, ‘어쌔신 크리드 : 오리진’(2017)의 아야는 주인공 바예크의 아내이자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였다. 이비는 마스터 암살자가 될 만큼 유능하고 아야는 ‘어쌔신 크리드’ 세계관의 핵심 집단인 ‘형제단’을 창설했다는 설정이 있지만, 실제 게임에서는 이들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는 대폭 축소되고 홍보 아트에서도 이들의 존재는 두드러지지 않는다. 주인공의 성별을 선택할 수 있었던 ‘어쌔신 크리드 오디세이’(2018)조차 홍보에서는 공식 캐논인 카산드라보다 알렉시오스가 주력으로 등장했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 여성캐릭터가 단독 주인공으로 등장한 건 외전인 ‘어쌔신 크리드 3 : 리버레이션’(2012) 뿐이다.
그리고 2020년 블룸버그를 통해서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이러한 행보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이슈는 ‘어쌔신 크리드’의 제작사 유비소프트 내의 성추행, 성차별적 구조와 권력 남용에 대한 집단 소송 건이었다. 그리고 이 고발에는 2018년에 ‘어쌔신 크리드 : 오디세이’가 단독 여성 주인공으로 개발될 예정이었으나, ‘여성 주연 게임은 팔리지 않는다’라는 고위층의 주장에 의해 주인공의 성별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출시되었다는 폭로도 함께 실려 있었다. ‘어쌔신 크리드’를 해 본 유저라면 다음의 문장이 익숙할 것이다. “이 가상 시나리오는 다양한 종교, 성적 성향 및 성 정체성을 가진 다문화 팀에서 기획, 개발, 제작하였습니다.” 다양성을 명시한 문장 너머에는 넘을 수 없던 현실이 가로막고 있었다. 게임을 만들어내는 게임 바깥의 차별적인 문화가 실제 게임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 사례다.
갖은 고난과 난제에 부딪히면서도 여성 캐릭터들의 모험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비욘드 굿 & 이블’의 제이드 (2003),’ ‘미러스 앳지’의 페이스 (2008),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 의 맥스 (2016), ‘호라이즈 제로 던’ 의 에일로이 (2017), ‘하프-라이프 : 알릭스’의 알릭스(2020)까지, 이들은 더 이상 탑에 갇힌 공주가 아니라 스스로 뛰쳐나와 자신만의 모험을 이끄는 모험가다. 여성 캐릭터들의 모험의 양상이 다양해지면서 동시에 주변의 이야기도 더욱 복잡다단해지고 있다. 때때로 유의미한 시도와 전진하지 못하는 입장이 반복되기도 하며, 어떤 성취는 또 다른 도전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모험가는 난제를 해결할 또 다른 가능성을 품고 다시 여정에 오른다. 모험의 본질은 닥쳐오는 장애물을 피하지 않고 세계를 마주하는 것이다. 현실과 타협하느라 고정관념에 얽매인 사고를 뛰어넘어서 새로운 상상으로 돌입하는 일이다.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는 게임 속 세계에서 기대하는 것은 그런 가능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