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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에 선 매체 : “콘솔 게임은 대중매체인가?”
결국 콘솔 게임이 대중매체인가 하는 질문은 현재 시점에서 대답하자면, 그렇다, 아니다, 단정지어 말하기 어렵다. 이는 단순히 기술적 기능이나 시장 점유율의 문제가 아니라, 게임이 우리 사회에서 수행하는 복합적 역할과 사람들이 게임을 통해 연결되고 소통하는 방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 Back 25 GG Vol. 25. 8. 10. Tags: 콘솔, 스팀덱, PSP, 미디어, 하드웨어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Mimong Lee From childhood to now, always in the company of Nintendo games. A few months ago, bought a Steam Deck on installment and has been enjoying it to the fullest. Studied business administration at Kyung Hee University and cultural mediation at the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Yonsei University, and is currently a doctoral student in the Graduate School of Core Ethics and Frontier Sciences at Ritsumeikan University in Japan. Researches digital media content and culture, including games and webtoons.
- 합리적 트릭스터: 플레이어와 설계자 사이의 숙련화 게임
게임에 몰입한 플레이어에게 수지타산이나 합리성만큼 낯선 단어는 없을 것이다. 게임 플레이야말로 가장 비합리적인 행위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유용한 생산물을 안겨주지 않는다. 수많은 게이머들이 주변으로부터 ‘공부를 그렇게 했어봐라’ 는 말을 듣는 이유는 게임이 기본적으로 인생에서 효율적인 시간에 해당하지 않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인간의 노동은 삶의 여러 토대를 제공하지만, 게임은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일지언정 물질적인 도움을 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 Back 합리적 트릭스터: 플레이어와 설계자 사이의 숙련화 게임 18 GG Vol. 24. 6. 10. 게임에 몰입한 플레이어에게 수지타산이나 합리성만큼 낯선 단어는 없을 것이다. 게임 플레이야말로 가장 비합리적인 행위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유용한 생산물을 안겨주지 않는다. 수많은 게이머들이 주변으로부터 ‘공부를 그렇게 했어봐라’ 는 말을 듣는 이유는 게임이 기본적으로 인생에서 효율적인 시간에 해당하지 않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인간의 노동은 삶의 여러 토대를 제공하지만, 게임은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일지언정 물질적인 도움을 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인간의 다양한 행위 중에서도 가장 합목적적인 행위이면서 동시에 가장 비합리적인 행위가 곧 게임 플레이인 것이다. 열역학 법칙으로 보면, 게임은 엔트로피가 가장 높은 부문에 해당한다. 이처럼 모순적인 게임플레이의 위상은 ‘어떤 게임을 설계할 것인가’의 문제로도 이어진다. 예컨대 자동차를 만들 때 설계자는 물리학적 효율성에 온 힘을 기울이면 된다. 에너지 효율, 내구성 등이 우선이고 감성의 영역인 디자인은 그 다음에 온다. 그런데 게임의 설계자들은 이 둘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게이밍에서 절대적 효율성, 절대적 감성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두 행성 간의 중력이 균형을 이루는 라그랑주점을 포착하듯 플레이어와 설계자 사이에서는 치열한 두뇌 게임이 펼쳐지고, ‘설계적 효율성’ 과 ‘플레이의 효율성’은 복잡계의 영역으로 간다. 게임은 기본적으로 고도 노동 집약적인 산업과 밀접해 있기 때문에 특히 트리플A 게임은 이 라그랑주점을 찾는 노하우를 생산의 표준으로 만들고자 한다. 반면 플레이어들은 이 안정적인 균형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점으로부터 벗어나 예상치 못한 궤도를 탐험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영화나 방송 산업이 장르 문법이나 컨벤션을 활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게임플레이 자체가 이중적이고 모순적이기 때문에, 플레이어도 설계자도 틀에 박힌 수학적 질서도를 사랑하는 동시에 그것을 한편으로는 혐오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같은 플레이어와 설계자 사이의 긴장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최근 위기를 겪고 있는 유비소프트와 엔씨소프트의 게임들이다. <어쌔씬 크리드> 시리즈로 유명한 유비소프트는 ‘유비식 오픈월드’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글로벌 퍼블리셔다. 유비소프트에서 제작한 대다수의 게임들은 아주 비슷한 플랫포머 구간을 가지고 있는데, 게임 속 메인 진행에 간접적으로만 영향을 미치는 사이드 스토리를 수행하면서 플레이 시간을 늘리고 게이머로 하여금 나머지 공간을 탐색하도록 유도하는 파트다. 화려한 그래픽과 연출, 실감나는 전투 등으로 치장된 메인스토리 진행을 하다 보면 플레이어는 반드시 ‘유비식 오픈월드’를 마주하게 된다. 이 구간은 제작하기 쉽다. 심지어는 자사에서 같은 엔진으로 개발한 다른 게임의 프리셋과 소스, 레벨링 노하우를 가져다 쓸 수도 있다. 유비소프트에 ‘게임 제작의 테일러리즘’이라는 웃지못할 라벨이 붙여진 이유는 이처럼 플레이어들과의 치열한 라그랑주점 찾기를 2순위로 미뤄두고 도입한 개발 프로세스의 균질화가 게임의 매커닉과 플랫폼구간에서 노골적으로 현상되기 때문이다. 이러니 유비식 오픈월드에 익숙한 플레이어들은 플랫포머 구간에 들어서는 순간 한숨을 쉬며 1년차 예비군이 훈련장에 와서 으레 하듯이 뻔하고 관습적인 게임 플레이를 이어나간다. 똑같은 농담, 비슷한 목표와 성취, 하찮은 심부름, 좀 더 원활한 다음 페이즈 진행을 위한 아이템 수집 등…이 때부터 플레이를 지배하는 것은 치열함이 아니라 관성이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관성에 익숙한 존재다. 관성도 플레이의 중요한 요소다. 똑같은 던전에 들어가서 수십 번씩, 땅 짚고 헤엄치듯 한 손으로 클리어해나가는 플레이어들, 스피드런을 즐기는 사람들과 그것을 관음증처럼 지켜보는 게임 ‘시청자’들도 있다. 그러나 글로벌한 네트워크 속에서 게임플레이의 암묵지는 결국 지층처럼 켜켜이 쌓인다. 시간이 지나면서 관성은 악성이 된다는 이야기다. <어쌔씬 크리드> 에서도, <와치독> 에서도, <디비전> 에서도, <고스트리콘>에서도 똑같은 감각으로 비슷한 사이드퀘스트 구간을 헤매다 보면 설계자도 플레이어들도 반발하게 된다. 엔씨소프트의 게임들은 유비소프트와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실패하고 있다. 유비소프트가 개발 층위에서의 테일러리즘을 도입했다가 교착 상태에 빠졌다면, 엔씨소프트는 플레이 층위에서 포드주의를 도입했다가 과소소비라는 파국을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비슷비슷한 사이드퀘스트와 아이템 수집 등으로 이뤄진 유비식 오픈월드는 적당히 플레이하면서 넘기면 된다. 그런데 ‘리니지 라이크’ 게임들은 여기에 비즈니스 모델까지 더했다. 플레이어들을 처음부터 ‘린저씨’로 호명하고, 그들이 게임 설치에 앞서 두둑한 현금부터 준비할 것을 가정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관습적인 플레이가 뭔지를 먼저 끼워넣는 식이다. 패키지 관광객들을 싣고 하루에 수십 군데를 투어하지만, 그 장소들은 모두 협약을 맺은 곳이거나 쇼핑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들이다. 한국의 특성은 이렇게 성공한 한 선구적인 사례들을 후발 주자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카피한다는 데 있다. 이제 우리는 ‘리니지 라이크’의 모든 게임들에서 ‘유비식 오픈월드’와 같은 ‘한국식 과금 구간’을 본다. 심지어는 플레이타임이 어느 정도 되었을 때 현금결제 창이 뜰지도 플레이어들은 예측하게 된다. 엔씨를 포함해 그간 한국 게임사들이 ‘생산한’ 게임들은 이 문법을 따라 포드주의적 자동화까지 도입, 방치형 게임이나 자동사냥으로까지 진화했다. 이 게임들은 게임플레이의 관성과 새로움 사이의 경합, 개발자와 플레이어간의 합리적 두뇌게임을 제거하고 모든 것을 교환의 법칙으로 환원한다. 레벨업도, 좌충우돌도, 글리치도 어뷰징도 없는 세계 – 얼마나 매끄러운가? 그러나 이런 식의 포드주의는 필연적으로 ‘탈숙련화’를 야기한다. 노동의 탈숙련화가 아니라 개발의 탈숙련화, 플레이의 탈숙련화다. 개발자들은 새로운 기술과 엔진을 실험하지 못해 뒤처지고, 플레이어들은 다른 게이밍의 경험을 받아들이지 못해 도태된다. 포드주의가 야기한 문제, ‘탈숙련화’는 자본주의의 역설이자 자동화의 고질병이다. 포드사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어셈블리 라인에 완전 자동화 결합 시스템을 도입했고, 일시적으로 매출은 엄청나게 증대됐다. 대량의 노동자들은 해고되거나 회사를 떠났고, 공장에 남은 사람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자동화 기기 옆에서 빗질이나 허드렛일 따위를 하는 존재가 됐다. 그러나 탈숙련화가 진행되자, 역설적이게도 미국 전체 노동자의 삶이 위기에 빠졌다. 여기엔 두 가지가 있다. 포드 공장에 도입된 모델이 하나의 플랫폼이 되어 다른 제조업 부문에서도 우후죽순 도입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실업 상태가 되거나 비숙련 단순직종으로 이동, 자동화 공장에서 생산된 상품들이 시장에서 판매되지 않고 재고가 증가하는 역설이다. 숙련노동자들이 사라지자 생산 현장에서 공유되던 암묵지 노하우들도 사라졌고, 결국 미국의 완전자동화 산업은 일본의 반자동화 산업에 헤게모니를 내주게 되었다. 포드주의는 야심찬 자동화를 추구했지만 그로 인해 빈부 격차가 커지고, 노동자들의 삶이 불안정해질 뿐 아니라 공산품들의 품질도 떨어지는 결과를 야기했다. 유비나 엔씨의 제국이 조금씩 몰락하는 가운데, 게임 설계자들은 ‘탈숙련화’가 게임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현상임을 이제는 상기해야 한다. 경제적이고 수학적인 효율성은 게이밍에서 다각적으로 다뤄져야 한다. 플레이어는 합리적이면서 동시에 광기어린 사람들이고, 설계자들은 정교한 건축술을 구사하지만 동시에 베토벤의 영감으로 창조하기도 하는 입법자들이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들은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해 글리치를 찾거나, 최단시간 레벨업 경로, 보스 제거에 가장 효율적인 세팅을 찾아내고자 하지만 그 과정 자체는 능동적면서 복잡한 시행착오가 동반되어야 재미를 느낀다. <세키로>나 <다크 소울> 시리즈에 몰입한 사람들은 왜 10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손가락 관절염을 느끼며 한 보스를 붙잡고 소리를 질러댈까? 역사에 문외한인 <문명>의 플레이어는 왜 17세기에 스텔스기를 완성하는 세종대왕과 몇날 며칠 자웅을 겨루는가? 자학적인 성격이어서가 아니라 합리성을 향한 복잡성의 과정, 게이밍의 역학적 질서도와 복잡성이 교차하는‘에르고딕(ergodic)’에 탑승한 승객이어서이다. 그들은 열 시간이고 스무 시간이고 게임패드를 집어 던져가며 가장 어려운 난이도로 보스를 클리어한 다음, 이를 깨기 위해 동원한 다양한 전략과 방법, 세팅, 꼼수까지 자랑스럽게 소셜미디어나 유튜브에 자랑할 것이다. 이렇게 공유되고 축적되는 숙련 비법은 모든 플레이어들에 의해 재즈 스탠다드 음악 연주처럼 변주될 것이고, 개발자들도 이를 참고할 것이다. ‘숙련화’ 된 플레이어와 개발자들에 의해 긍정적 피드백(positive feedback) 루프가 완성된다. 게이밍이 훨씬 다양하고, 복잡하고, 기발한 방식으로 플레이어와 개발자 모두를 놀라게 하며 희열에 차게 만들고, 새로운 매커닉과 창의적인 구조가 만들어진다. 탈숙련화가 아니라 숙련화, 소외가 아니라 주체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유비식 플랫포머 승객’ 이나 ‘린저씨’들과 그들을 고객으로만 호명하는 개발사들에는 그런 피드백 루프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유비소프트와 엔씨 및 이들의 ‘탈숙련화’ 모델을 참조로 하는 모든 게임개발사들은 비즈니스 모델이나 제작효율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숙련된 플레이어들로부터 숙련된 플레이를 확보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잘 활성화된 게임은 당연히 <마인크래프트>다. 플레이어가 설계자가 되고, 설계자가 자신이 창조한 게임을 플레이한다. 노하우는 오픈소스 환경에서, 커뮤니티에서 공유될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전문가집단과 협업을 하거나 공동 프로젝트까지 한다. 숙련화된 설계자와 플레이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들은 모두가 ‘합리적 트릭스터’ 다. 우리는 합리적 트릭스터들이 최근 열광하는 숙련화 게임의 두 가능성을 주목해야 한다. 첫째로는 <스텔라 블레이드> 같은 게임이 전통적인 게임 서사와 미장센으로 뉴트로로 돌아오는 방식,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긴 하지만 생성AI를 활용한 게이밍의 등장이다. 이 두 시나리오 모두 테일러리즘이나 포드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산업 부문에서나 게이밍에서나 완전히 화려하게 자동화된 기술진보가 아니라 결국 합리적 효율성과 주체적 효능감 사이를 횡단하는 사람들, ‘합리적 트릭스터’들이 길을 여는 것을 본다. ‘트릭스터’의 감각을 상실한 게임의 설계자와 플레이어들은 더 이상 체스를 두지 못한다. 트릭스터는 질서를 가장한 혼돈을 창출하기 좋아하는 악당이고, 꾀를 내어 난제들을 교묘히 해결하는 것을 좋아하는 현자다. 게이밍은 수많은 트릭스터들이 머리를 맞대고 누가 누구를 어떻게 속일까, 황금율을 어떻게 파괴할까 고민하면서 자신들만의 라그랑주점을 찾아나가는 장이다. 문학이나 시네마에서는 이런 것들이 기만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 시네마의 관객은 종종 맥거핀을 찾아내고 실망하거나 핍진하지 못한 연출에 화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게이밍에서 좋은 설계자들은 재미를 만들어내기 위해 플레이어들을 어떻게 기만할지를 숙고한다. 플레이어들은 설계자의 주권을 깨트리는데서 희열을 느낀다. 게이밍은 플레이어와 설계자 사이의 탈숙련화 게임이 아닌 숙련화 게임을 통해 더 풍요로워지는 것이 아닐까? 확실히, 8비트 게임의 등장 이후 수십 년간 축적된 게이밍 경험은 유비식 오픈월드나 한국형 과금 게임에 종언을 고하고 있다. Tags: 오픈월드, 트릭스터, 포디즘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디지털 문화연구/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신현우 문화연구자, 문화평론가이며 기술비판이론과 미디어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게이밍, 인공지능, 플랫폼, 블록체인을 둘러싼 문화현상을 연구하며 서울과기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한다.
- 온라인게임, 멀티플레이, 그리고 경쟁
한때는 ‘온라인 게임’이 곧 새로운 미래가 될 거라 믿던 시기도 있었다. 코로나19라는 이벤트까지 거친 후 지금 돌아보면 어떤가? 부분적으로 온라인 시스템을 수용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게임은 여전히 오프라인이 중심인 느낌이다. < Back 온라인게임, 멀티플레이, 그리고 경쟁 08 GG Vol. 22. 10. 10. 한때는 ‘온라인 게임’이 곧 새로운 미래가 될 거라 믿던 시기도 있었다. 코로나19라는 이벤트까지 거친 후 지금 돌아보면 어떤가? 부분적으로 온라인 시스템을 수용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게임은 여전히 오프라인이 중심인 느낌이다. 우리는 온라인에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첫째는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감각이다. ‘경쟁’을 유도하는 게임 시스템이라면 인간을 상대로 하는 편이 가장 재미있다. AI와 경쟁하는 것은 아무래도 흥미가 떨어진다. 가정용 게임기가 ‘2인용’ 컨트롤러를 동반해 등장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온라인을 활용한 FPS나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등도 이러한 맥락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경쟁’만이 이런 감각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협력해 공통의 과제를 달성하는 것 또한 게임을 ‘함께’하는 일의 묘미다. 온라인을 활용한 게임 자체는 PC통신 시대에 이미 등장했는데, 이른바 MUD(Multi User Dungeon) 게임이 그것이다. 오늘날에는 전세계 이용자들과 함께 목적을 달성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MMORPG들이 이 명맥을 잇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여러 사람이 공통의 과제를 해결한다는 사실 자체가 만들어내는 맥락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게 우리가 온라인 게임에 거는 두 번째 기대, 일상과는 분리된 또다른 공동체에 대한 감각을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이 하나의 공통 과제를 달성하려면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협력을 할 수 없는 상대와는 필연적으로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교류하고 협상하며 손을 잡았다가 다시 놓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 하나의 ‘사회’가 성립되고 작동하는 과정이 게임 내에서 재현되는 것이다. 게임 사회가 현실 사회와 분리돼있으므로, 이 안에서의 ‘나’ 역시 현실 사회와 분리돼있다. 따라서 ‘나’는 게임 안의 ‘아바타’에 대안적 자기상을 투영한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현실 사회에 대한 감각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게임 내 사회를 대한다. 따라서 게임과 현실은 형식상 분리돼있으나 내용적으로는 유사성을 가진다. 혹시 그렇지 않은 상태라 하더라도 ‘나’는 게임 내에서 ‘대안적 나’로 존재하기 위해 게임 내 법칙이 어느 정도 현실을 따르기를 희망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현실의 나’는 게임 시스템과 상호 교류하며 긴장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온라인 게임을 하면서 게임 내 세상이 현실처럼 부조리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게임 내의 현실 모사가 마치 ‘성경공부’ 같을 필요까지는 없다. 정확히 말하면 현실의 부조리는 게임 시스템에 어느 정도 실감이 날 만큼만 반영되어야 한다. 이용자가 감당할 수 없는 부조리조차 현실과의 유사성이라는 명목으로 게임에 재현되면 ‘대안적 나’를 게임 내에서 추구할 방법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온라인 게임의 이용자인 우리는 현실의 무엇에 대한 재현까지 용납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방식을 보면 이게 드러난다. 초창기 MMORPG의 설계자들은 게임 내 사회가 하나의 거대한 종합격투기 링처럼 여겨지기 보다는 대안적 사회로서 소비되기를 바랐다. 울티마 온라인이나 에버퀘스트와 같은 사례를 보면 그렇다. 초기 울티마 온라인의 경우 최대 7개의 부문 스킬에 대해서만 ‘그랜드 마스터’ 자격을 가질 수 있었다. ‘채광’, ‘낚시’, ‘벌목’과 같은 생산 기술부터 ‘검술’, ‘궁술’ 등의 전투 기술에 이르기까지, 전체 스킬의 종류는 50가지에 달한다. 이용자 입장에선 이 중 자기 캐릭터 컨셉에 맞는 스킬 7개 스킬만을 선택해야 하는 거다. 레벨을 올리면 ‘아바타’를 한도 끝도 없이 강화할 수 있는 현대 게임 디자인과는 다른 형태다. 지금의 기준으로 생각해 본다면 다른 사람과의 협동을 장려하고 레벨 올리고 사냥하는 것 외의 활동을 유도하는 것인데, 이용자는 결과적으로 ‘사회 구성원’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감당하게 된다. 과거 MMORPG 이용자들이 자기 경험담을 연재의 형식으로 올린 글이 인기를 얻었던 것도 이런 특성이 작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초창기 MMORPG의 형태는 어느새 우리에게 익숙한 경쟁 위주, 즉 자기 캐릭터를 강화하고 여기에 맞춘 컨텐츠를 소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형태로 변화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울티마 온라인류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이용자의 시스템에 대한 기대를 반영한 것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기대’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노력’에 상응한 ‘보상’이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노력’의 결과가 수치화 되어 정확히 측정되어야 한다. 즉, 온라인 게임 일부의 이러한 변화는 ‘현실의 자신’이 사회에 바라는 법칙이 게임 시스템 내에서도 작동하기를 바란 결과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대의 반영이 ‘게임의 재미’에 미친 영향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오늘날 게임을 대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태도는 ‘노력’과 ‘보상’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는 듯 느껴질 때가 많다. 어느 시점까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보상을 달성할 수 있는지를 알아 내야 남보다 빨리 ‘강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효율성’의 추구가 ‘재미’의 대부분을 뒤덮어버린 듯 보일 때가 많다는 것이다. ‘스타크래프트 최강 종족’에 관련한 밈은 이러한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테란, 프로토스, 저그 중 최강의 종족은 무엇인가 하는 논쟁은 긴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게 뭐든 제4의 종족, Korean이 최강이라는 결론에 이견이 없었던 때가 있었다. 이것은 한국인들이 스스로 ‘민속놀이’라고 말할 정도로 한국 내 스타크래프트 이용자 숫자가 많았던 때문이다. ‘고수’가 등장할 확률은 어느 나라든 낮지만 모수가 크면 절대적 숫자는 늘어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사회 전반과 제도에 대한 불신이 큰 한국 사회의 현실이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도 가능하지 않을까? 개발자가 유도한대로 정해진 시스템에 맞춰 플레이하는 게 아니라 규칙의 허점을 찾아내고 적극적으로 이를 활용하면서 경쟁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키는 방식에 한국인들이 특히 익숙했던 것 아니냐는 추론이다. 우리는 이미 스타크래프트 뿐만이 아닌 뉴스에서도 법제도를 교묘하게 악용한 사기꾼의 사례나 입시 제도를 둘러싼 논란 등에서 비슷한 예들을 마주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공적인 틀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확인된다. 한국이 각자도생의 ‘저신뢰 사회’라는 사실은 OECD의 설문조사나 해외 연구기관의 통계, 프랜시스 후쿠야마라는 학자의 주장 등을 통해 상당 부분 뒷받침 되고 있다. 비교적 최근인 2019년 영국의 싱크탱크 레가툼연구소가 발표한 ‘2019 레가툼 번영지수’를 보면 한국은 사회자본 부문에서 전체 167개국 중 142위를 기록했다. 간단한 검색만으로도 이런 근거는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나마 ‘경쟁’을 중심으로 하는 게임 장르에선 이러한 각자도생의 본능이 ‘재미’를 크게 훼손하지는 않을 수 있다. 정신적 피로를 안기는 ‘채팅’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러나 앞서 짚었듯 우리가 온라인 게임에 거는 기대가 현실의 부조리까지 전부 재현하는 건 아니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용자가 거의 모든 게임을 대하면서 나타나는 ‘효율성 추구’는 ‘경쟁’이 중심이 되지 않는 게임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재미의 폭을 제한하는 결과가 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런 종류의 게임에서는 ‘효율성 추구’가 게임과 현실의 벽을 무너뜨리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도 스펙 쌓기로 피곤한데 게임에서까지 그래야 하는가? 문제는,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온라인 게임의 특성상 뭘 만들어도 여기서 벗어나기는 어려워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각자도생의 현실 사회도 많은 사람들의 욕망이 이리 저리 조율돼 반영된 결과이다. 바로 그 사람들을 가상현실이라는 다른 시스템 안에 넣어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는 거다. 그렇다면, 경쟁을 위해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시스템의 반대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게임일까? 앞서 언급한대로 ‘대안적 나’를 추구할 수 있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경험을 가질 수 있는 게임이다. 남들과 경쟁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는 게임의 형식은 어떻게 가능할까? 오늘날 이 모델에 가장 가까워 보이는 게 ‘온라인 없는 오픈월드’이다. ‘오픈월드’의 핵심은 그것 자체가 현실과 분리된 또 다른 현실세계의 정밀한 모사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오픈월드’라면 그 안에서 다른 외부의 개입 없이도 이용자가 하고자 하는 모든 행위를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최대한도로 구현하기 위해 유명 오픈월드 게임들은 사실적 그래픽으로 넓은 세계를 묘사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물론 이런 것들은 외적 표현에 불과하다. 문제는 내용이다. 온라인 게임이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접속해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매일 새로운 사건과 드라마가 창출된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가 없는 오프라인 오픈월드는 어떻게 ‘사회’일 수 있는가? 수많은 ‘퀘스트’가 등장하는 식의 구성이 ‘오픈월드’의 필수가 된 건 이런 이유다.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출력할 수 있다면 그것 자체를 인공지능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튜링 머신의 아이디어와 유사한 결론이다. 이용자가 예측할 수 없고 언제나 새롭게 느낄 만큼의 수많은 사건이 등장한다면 그것은 ‘대안적 현실’과 구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는 이게 ‘오픈월드’의 한계를 규정짓는 요소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퀘스트’는 어디까지나 ‘퀘스트’일 뿐이다. 게임 내 사건이 더 이상 ‘사건’일 수 없다면, ‘오픈월드’가 ‘현실 사회’의 모사처럼 보일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런 점에서 역사적 인물, 사건 등 배경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또 하나의 타개책이 될 수 있다. 이를테면 ‘어쌔신 크리드 오딧세이’에서 우리는 결코 요구하는 바를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질문’의 방식으로 돌려 표현하는 소크라테스에게 ‘퀘스트’를 수주하면서 현실의 역사에 속해있다는 감각을 갖게 되고, 이것이 게임 내에서 ’사회’의 존재를 체감하는 또 하나의 요소로 작용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굳이 그 시대의 최강자가 되기 위한 최단 경로를 밟는 것에 몰두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중요한 어떤 인물이 되어 보면 되는 것이다. 물론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이런 저런 설정은 완전한 역사적 인물로의 몰입에 방해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어쌔신 크리드’가 그리는 세계에 완전히 녹아들기 위해서는 역사와 현실을 넘나드는 초현실적 액자 구성을 받아들여야 하고 외계인인지 뭔지 알 수 없는 고대인들의 사회를 둘러싼 갖가지 설정을 이해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어쌔신 크리드’는 이상적인 ‘오픈월드’를 구현하는데 전적인 노력을 쏟은 게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쨌든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현실과의 접점을 찾는 것으로 ‘오픈월드’의 ‘구멍’을 메꾸는 시도는 ‘효율성 추구’의 함정으로부터 게임을 구원하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다. 아예 이 대목에만 집중한 게임도 있다. ‘대항해시대’를 비롯해 역사 시뮬레이션 시리즈로 유명한 코에이의 ‘태합입지전’ 시리즈는 이런 경향을 잘 보여준 사례로 들 수 있다. 18년만에 리마스터 된 5편의 경우 장엄한 자연 환경의 묘사나 월드맵의 끝없는 물음표 같은 것은 없다. 이 게임은 철저하게 그림과 숫자로만 이뤄져있다. 그럼에도 게이머는 일본 전국시대를 살아가는 인물이 되어 주체적으로 역사에 개입하는 경험을 느낄 수 있다.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죽기 전에 아케치 미쓰히데를 제거한다든가, 그 전에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꾀하는 등의 대안역사적 시도를 해볼 수 있는데, 아예 이런 정치적 문제와는 관계가 없는 소시민으로서의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 미니게임으로 현실의 복잡한 문제를 상징화 해 대체한 시도는 따로 주제를 잡아 다뤄볼만한 기법이다. 이제 다시 애초의 문제의식으로 돌아와보자. ‘역사’를 설정으로 삼는 ‘오픈월드’를 통해 가상 사회와 현실의 접점을 만들고 그 안에서 대안적 시도를 허용하는 게임 디자인이 가능하다면, ‘현재’나 ‘미래’를 근거로 한 것도 동일한 효과를 거두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디스토피아를 소재로 한 ‘오픈월드’ 게임의 존재는 이 가능성을 시사한다.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에서, 혹은 각자도생의 현실에서 정말로 이용자가 원하는 삶은 무엇인지를 묻고, 모두에게 득이 되는 선택을 스스로 고안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면, 그게 ‘게임적 재미’로서 의미를 갖게 될 수 있다면, 그리고 게임을 만드는 이들이 그러한 과업에 지속적으로 도전할 수 있다면, 게임은 비로소 현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온라인 게임’의 어떤 이상이 기계적 효율성 추구의 굴레에서 벗어나 ‘오프라인’에서도 의미를 갖게 되는 가장 직선적이면서 또한 가장 어려운 방법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시사평론가) 김민하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시사평론가로 활동하지만 게임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게이머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냉소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돼지의 왕』이 있고,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우파의 불만』, 『트위터, 그 140자 평등주의』 등의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최근작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가 있다.
- 농사 게임은 왜 힐링이 되었는가: 픽셀 농사와 진짜 밭 사이에서
평화로운 게임과 다르게, 현실은 훨씬 가혹했다. 노루망을 치지 않아서 상추 밭은 송두리째 사라져버렸다. 현실에서는 야생동물, 폭염, 장마, 해충 등 통제 불가능한 변수가 언제든 침입한다. 각종 병충해도 단 몇 주 사이에 농사를 완전히 무너뜨린다. 너무 덥거나 습하면 작물이 빠르게 상하고, 한 번의 폭우로 뿌리가 썩어버리기도 한다. 농부는 이러한 피해 요소들을 ‘기본값’으로 가정하고, 당연한듯이 울타리와 농약, 비료, 배수로 등 가능한 모든 대비책을 동원하여 농사를 유지하는 자세가 필수적이다. < Back 27 GG Vol. 25. 1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Leesun Park Studies games from a social perspective. Believes that games, as a tool, ultimately offer a way to explore what it means to be human. These days, mainly writing.
- QUOVADIS, 게임법 - 국회 안에서 바라본 게임법 진행의 경과와 미래
물론 전부개정안의 모든 내용이 정답이라는 것은 아니다. 발의하고 보니 보완해야할 부분들도 여럿 보였다. 특히 국내대리인지정제도는 더욱 강화해서 발의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부개정안에 빠져 있거나 부족한 부분들은 심사 과정에서 더 나은 방향으로 수정될 것이다. 또한 다른 게임법 일부개정안과도 병합심사되어 더 좋은 내용으로 고쳐질 것이다. 이를테면 확률형 아이템에 대해서는 컴플리트 가챠 규제 법안이나 이용자 권익보호위원회 규정 법안과 함께 병합심사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느릴지언정 멈추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꾸준히 내딛고 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국민의 꾸준한 관심은 국회를 일하게 한다. < Back 01 GG Vol. 21. 6.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DoKyung Lee My proudest achievement is having proposed and passed more game-related bills than anyone in the history of the National Assembly. But an even greater source of pride is landing the server-first kill on Lich King hard mode in WoW, and having played the shaman in RoMg, the famous Chaos clan...
- 누가 미국을 묻는다면 패드를 들어 GTA를 플레이하게 하라
이토록 GTA는 찬사와 공격, 열광과 거부를 동시에 받아왔다. 한편에서는 미국 사회를 가장 정확하게 묘사한 문화적 기록물로 평가받고,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도덕·질서에 대한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공격받았던 것이다. 2기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통치가 점입가경으로 치닫는 지금, 미국이라는 지리적, 문화적 배경 속에서 범죄에 대한 이야기를 쉬지 않고 꺼내온 GTA 시리즈가 지니는 의미는 남다르다 할 수 있겠다. < Back 28 GG Vol. 26. 2. 10. Tags: 락스타, GTA, 미국, 범죄, 느와르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aeseok Kim Worked for eight years as a reporter at ThisIsGame. Now handles external relations at a subculture startup. Loves editors and the power of cheat codes.
- 불투명한 인터페이스: 연결과 차단 사이
그렇다면 플레이어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도록 디자인된 ‘작동이 되지 않는’ 인터페이스는 그저 배경으로 남는 것일까? 이 질문에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게임 인터페이스의 분류 방법을 경유할 필요가 있다. < Back 22 GG Vol. 25. 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Wombat A freelancer who does odd jobs of all kinds. Interested, fittingly, in all kinds of odds and ends. With games, the interest runs especially deep.
- 22대 국회의원선거 공약이 말하는 대한민국과 디지털게임
민주주의 국가의 운영은 행정부만큼이나 입법부도 중요하다. 입법부를 구성하는 선거가, 쓰는 입장에서는 한창 진행중이고 읽는 입장에서는 투표 직전이거나 끝났을 것이다. 그리고 게임 또한 문화이자 산업으로서, 정치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비단 단속이나 규제의 의미만이 아니고 진흥과 지원의 의미로도 그렇다. 그리하여 윤석열 대통령의 게임 공약을 분석했던 시도에 이어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등장한 게임 관련 공약을 살펴본다. < Back 22대 국회의원선거 공약이 말하는 대한민국과 디지털게임 17 GG Vol. 24. 4. 10. 민주주의 국가의 운영은 행정부만큼이나 입법부도 중요하다. 입법부를 구성하는 선거가, 쓰는 입장에서는 한창 진행중이고 읽는 입장에서는 투표 직전이거나 끝났을 것이다. 그리고 게임 또한 문화이자 산업으로서, 정치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비단 단속이나 규제의 의미만이 아니고 진흥과 지원의 의미로도 그렇다. 그리하여 윤석열 대통령의 게임 공약을 분석했던 시도에 이어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등장한 게임 관련 공약을 살펴본다. 하지만 현재의 정국은 윤석열 행정부에 대한 중간 판단이라는 중대한 이슈가 중심에 있다. 영부인과 그 가족의 비위 의혹, 헌정사상 최초의 R&D 예산 대폭 삭감, 각종 복지와 지원 사업의 축소, 생활 물가 급속 상승 등의 다양한 문제가 의제로 올라오고 있으니 게임이 중요한 정책 공약의 대상이 되기가 힘들다. 그래서인지 거대 양당 외의 정당에서는 정당 정책으로 제시된 게임 공약이 없다. 기껏해야 개혁신당이 스포츠토토의 종목에 e스포츠를 넣겠다는 정도다. 이 말을 뒤집으면, 즉, 거대 양당은 게임 정책을 중앙당 공약에 끼워넣었다. 그리고 그 정책 공약은 e스포츠의 산업적 측면에 치중돼 있다. 여당, 국민의힘 국민의힘은 중앙당 공약과 지역당 공약 모두에 게임을 언급하고 있다. 방향성도 구체적이다. 가장 앞에 있는 것은 게이머의 공정한 게임 경험이다. 핵 사용자에 대한 처벌을 실효적으로 제정하겠다 하는데 어떤 법을 개정할 생각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구체적인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게이머의 경험에 공정 담론을 합한 첫 번째 초점은 국민의힘이 몇 년째 주력하는 담론의 적용이고, 다음은 e스포츠다. * 국민의힘의 ‘제22대 국회의원선거 중앙 공약집’ 중에서. 글로벌 대회의 국내 개최라거나 지역 균형 발전 같은 내용은 정상적인 정치 세력이라면 내세우는 내용인데다 추상적이니 일단은 넘어가자. 제도권 교육을 통해 게임과 e스포츠의 전문 인력을 양성한다는 내용은 구체적 내용은 없으나 국가 자격증 신설로도 읽힐 수 있는 내용이다. 어떻든 간에 교육 기관을 만들거나 지정해야 할 것이고, 강사 인력과 커리큘럼 제작이 필요할 것이다. 예산 근거가 되는 법과 주관하는 위원회도 만들어야 한다. 이런 내용이 없으니 중요도가 높은 공약은 아니다. 같은 현상이 지역 공약에서도 일어났다. 부산은 G-STAR의 개최 도시인지라 게임 도시 브랜드를 노리는 지자체인데, 부산 공약에서 게임이 차지하는 비중은 딱 한 문장이다. 부산에서 어떤 신산업을 육성할지에 대한 언급에서 윤석열 행정부가 관심을 갖고 있는 블록체인과 원전이 나올 때 함께 나온다. 다소 당황스러운 열거인데, 블록체인은 가상자산 열풍 속에서 투기 상품을 개발하는 기술에 갇혀있는 상태고, 원전은 글로벌 스탠다드에서 탄소 감축 방안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논란이 상당한 분야다. 게임이 ICT 산업 분야라는 이유로 이런 애매한 분야와 함께 묶이고 있다. * 국민의힘의 ‘제22대 국회의원선거 시도 공약집’ 중에서. 야당, 더불어민주당 더불어민주당의 시각도 산업 위주이고 e스포츠 위주이긴 하지만, 분류가 약간 다르다. 콘텐츠 산업의 성장 유지를 위한 정책에서는 음악 공연 등의 행사 산업에 세액 공제를 신설하겠다고 하는데, 여기에 e스포츠 대회 운영도 들어 있다. 그리고 이 공약은 다른 정책과 연결이 된다. 더불어민주당의 부산 지역 공약이다. 부산을 e스포츠 성지로 만들기 위해 국제대회 유치 같은 내용은 여당과 동일하지만 세액 공제와 연계되므로 조금 더 구체화된다. 또한 일시적 이벤트인 대회만이 아니라 기관과 관광 스팟을 만들 생각이다. e스포츠진흥재단 설립이라는 아이디어는 지원 창구를 일원화 최소한 체계화하겠다는 말이다. 여기에 레전드 선수 기념관 및 박물관, 즉 e스포츠 명예의 전당을 건립한다. e스포츠에게 역사의 권위를 주겠다는 구체적 발상이고, 장소 또한 윤곽을 제시했다. 부산 서부권이다. 이런 내용이 콘텐츠 산업과 관광 산업의 분류에 들어가 있으니, ICT 산업으로 바라보는 여당의 시각과는 약간 맥락이 다르다. * ‘제22대 총선 더불어민주당 온라인 정책공약집’ 중에서. 이 공약은 더불어민주당의 지역구 출마자의 공약이 중앙당 공약으로 들어온 경우다. 그 후보는 부산 사하구 을의 이재성 후보다. 부산 사하을 더불어민주당 이재성 이번 선거 2호 영입인재인 이재성 후보는 넷마블 이사와 NC소프트 전무를 거친 게임 기업인 속성을 갖고 있다. 특히 2009년, G-STAR가 벡스코로 이전할 당시의 게임산업협회 운영위원장이기도 했다. 당시의 이전 이유 중 하나는 e스포츠 경기의 기적적 성공인 2004년의 소위 ‘광안리 대첩’이었는데, 이재성 후보는 그 명맥이 끊겼음을 아쉬워하고 있다. 그래서 중앙당 공약에는 국제대회 유치라고만 적혀 있던 것이 후보의 공약에서는 다대포 해수욕장이라는 구체적 장소로 바뀐다. 이 공약은 다른 언론에서는 다대동을 아예 e스포츠 테마 시티로 조성한다는 단계로 발전하기도 한다. 또한 진흥재단 아이디어에 더하여 후보는 e스포츠 기술, 아마도 행정 메커니즘을 연구하는 연구소도 설립하겠다고 한다. 명예의 전당 공약과 세제 지원 공약도 있으니 중앙당의 e스포츠 공약을 디자인한 주체가 이재성 후보와 그 캠프임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이상의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서 입법 노동자인 국회의원이 할 일은 당연히 입법인데, ‘e스포츠 진흥에 관한 법률’을 개정할 것이라 한다. 전면 개정이라고 표현했으니 이미 밑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의미다. 반면 이렇게 밑그림과 구체적인 요소를 상정하고 있는 후보는 별로 없다. 이재성 후보와 비견될 후보는 서울 동작구 갑의 새로운미래 전병헌 후보다. 서울 동작갑 새로운미래 전병헌 3선 의원이자 청와대 정무수석이었던 전병헌 후보는 과거 KESPA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하지만 회장직 수행 중에 롯데홈쇼핑으로부터 후원금을 받는 과정이 석연치 않았고, 뇌물로 보이는 상품권을 가족 전체가 받았으며, 해외 출장비 횡령 혐의도 있는 등 복잡하고 커다란 비위 사실로 기소되었다. 판결은 일부만 유죄였지만, 그 일부로도 굉장히 무거운 형을 받았다. 뇌물 수수로 벌금 2천만 원,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업무상 횡령으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피선거권을 잃었고, 2022년 윤석열 대통령의 사면으로 피선거권이 회복되어 이번 선거에 출마했다. 후보 본인은 자신의 전과에 대해 많은 억울함이 있다고 말하고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해도, 일단 중형이 내려진 것은 사실이며, 게임계를 대변하는 대표 아이콘으로 통했던 그의 정치 커리어가 끝난 것도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반면 그런 약점과는 별개로, 과거 아이콘이었던 전병헌 후보의 게임 공약은 실하다. 후보가 제시하는 공략 시장은 중국과 신남방 국가인데, 이는 지난 문재인 정권에서 아세안 정상 회의를 서울에서 열어 한-아세안 정상 회의의 형태로 만들면서, 신흥 경제 성장국들인 동남아시아로의 진출을 모색했던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전략을 세우고 진출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제도와 정책을 개발하는 용도로 e스포츠 연구기관을 설립해 씽크탱크로 사용한다. 이 부분은 이재성 후보와 발상이 같은데, 국제대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공약도 그렇다. 여러 가지 외부 요소까지 염두에 둔 것이 분명한 공약의 끝에는 지역 e스포츠 활성화라는 짤막한 언급도 있다. 현 윤석열 정권의 공약인 지역연고제를 떠올리게 한다. 전병헌 후보는 이렇게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이재성 후보의 그림과는 맥락이 다소 다르다. 어쨌든 이런 구상이 실현된다면 몇몇 지역에는 e스포츠 경기장이 필요해진다. 자기 지역구에 e스포츠센터나 경기장을 건설하는 공약을 한 후보들도 있지만 이재성, 전병헌 후보와 발을 맞추는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다양하지만 납작한 지역 공약 국민의힘으로 경기도 용인시 병 지역구에 출마한 고석 후보는 고등군사법원장을 했던 육군 준장, 즉 판사 장군이다. 현 정권의 공약을 염두에 뒀을 것이 분명한 용인 연고의 e스포츠 구단 창설을 공약했다. 같은 당으로 경기도 수원시 정 지역구의 이수정 후보는 유명한 범죄심리학자인데, e스포츠센터와 특성화 교육기관 설립을 공약했다. 센터에서 정확히 어떤 기능을 기대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교육기관 설립은 국민의힘 중앙당 공약의 내용이다. 센터 건립 공약은 3선 의원인 충주시의 국민의힘 이종배 후보 또한 공약했다. 국민의힘 경기도 평택시 갑의 한무경 후보는 글로벌 게임도시 조성을 공약했는데 추상적이기만 하여 가치 있는 공약이 되지 못했다. 더불어민주당 후보들도 비슷한 공약을 낸 후보들이 있다. 인천의 중구/강화군/옹진군 조택상 후보는 ‘2030 마린스카이 메가시티’라는 거대한 구상을 내놓으면서 생활스포츠타운과 게임복합문화영상 단지 조성을 끼워넣었다. 게임과 영상을 다루는 단지(complex)라고만 하여 전시 기능인지 경기장 기능인지 지원 센터 기능인지 알 수 없는 것은 이수정, 이종배 후보와 마찬가지다. 반면 고석 후보와 똑같이 고등군사법원장으로 육군 준장 예편한 3선 의원의 민홍철 의원은 경상남도 김해시 갑 후보인데, 지역 대학과 연계한 e스포츠 체육관 건립을 공약했다. 일단 체육관이니 경기가 가능하며, 대학과 연계한다는 것은 e스포츠 교육 기관을 인근 대학으로 지정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일정이 없을 때는 그 체육관을 대학의 실습 공간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추상성과 구체성이 동시에 만족된, 괜찮은 공약이다. 그러나 개발의 형태라는 점은 식상하기도 하다. 인천 계양구 을 후보이자 당대표이며 정부와 여당의 십자포화를 견뎌내고 있는 정국의 핵심, 이재명 후보 또한 얼마 전(심지어 원고를 마감한 후에!) 게임 공약을 발표했다. 온라인 커뮤니티 별 민심을 접수해 만들었다는 형식을 한 이 추가 공약들은, 예를 들면 자동차 커뮤니티인 보배드림에서 자동차 관련 정책 제안을 받았다는 식이었다. 게임 공약을 제안한 커뮤니티는 인벤닷컴. 이 공약의 제일 앞에는 게임 중독 근거법 개정이 있다. 통계법 22조를 개정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현재 질병코드 등재를 심사중인 민관협의체가 공회전하고 있는 것이 불안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행정 진행에 관해서는 분석을 한 적이 있다.) 인디게임을 취급하는 공공플랫폼을 활성화하는 것이 두 번째 공약이다. 인디게임의 판매와 제작 지원을 하려면 심사를 해야 하고, 그러자면 기준이 필요하므로 평가지표를 개발해야 하니 이것 또한 공약에 들어와 있다. 불공정한 게임 환경 철폐라는 공약은 얼핏 봐서는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뒷광고 규제라고는 하지만 인터넷 방송인과의 프로모션 콘텐츠까지 영향을 받을 것으로도 읽힌다. 일련의 이 공약들은 민심 청취라는 점에는 긍정적이지만 동시에 커뮤니티의 여론, 거기서도 일부 여론이 게임 정책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는 과대표의 우려도 존재한다. 게임이 산업일 뿐? 누군가는 충실하게, 누군가는 허술하게 게임 공약을 준비했으나 아쉬움이 큰 것은 어쩔 수 없다. 중앙당 공약은 거대 양당에만 그치고 있고, 공약을 낸 모두가 e스포츠, 그것도 산업의 측면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어쩔 수 없는 현실 정치의 속성이다. 당장 이재성 후보나 전병헌 후보가 산업 외 측면의 게임에 대해 어떤 비전을 갖고 있더라도 지역구 후보로 나온 이상은 그 비전을 노출하기가 어렵다. 지역구 국회의원은 중앙 정치인이지만 지역에서 당선되어야 하는, 사소하지만 중대한 모순 때문에 이들은 중앙 입법 공약보다 지역 개발 공약을 먼저 내놓아야만 당선 확률이 높아진다. 따라서 선거 공약에는 개발, 관광, 교육, 수출의 측면만 강조될 수밖에 없고 중앙당의 중앙 공약 또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유권자인 우리는 정치인이 공약으로 내놓는 한두 개의 단어를 보고 그 정치인의 방향성을 엿봐야 하는 어려운 게임을 하고 있다. 광안리 대첩을 재현하려는 이재성 후보나 한국 게임이 동아시아 시장 전체로 진출하는 꿈을 꾸는 전병헌 후보의 산업적 비전은 엿보았고, 노력한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지만 그 이상 혹은 그 외를 기대하는 것은 정말 무리일까.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덕질인) 홍성갑 프리랜서 작가. 이 직업명은 ‘무직’의 동의어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딴지일보에서 기자를 시작하여 국정원 댓글 조작을 최초로 보도했다. 평생 게이머로서 살면서, 2001년에 처음 게임 비평을 썼고 현재 유실된 것을 매우 기뻐하고 있다.
- 공포라는 감각, 낙차라는 설계도, 림보하는 질문 - <위니언 바이러스>에 나타난 호러 연출, 언캐니와 리미널 스페이스를 중심으로
영화 <언프랜디드:다크웹(2018)> 속 ‘다크웹’은 사이버 공간일 뿐임에도 그곳을 실제 존재하는 공간처럼 연출했다. 나룻배를 타고 벽마다 희미한 횃불이 붙은 좁은 동굴 통로를 따라 한참을 깊숙이 들어가야만 닿는 곳. 해당 장면은 앞서 나온 어떤 잔인하고 폭력적이던 장면보다 오싹한 공포감을 일으켰는데, 꼭 그 미지의 공간이 실제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엔딩 크레딧 이후 세트장은 철거되고, 배우들은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그 공간만은 계속 그곳에 남아 손짓하는 것 같았다. < Back 공포라는 감각, 낙차라는 설계도, 림보하는 질문 - <위니언 바이러스>에 나타난 호러 연출, 언캐니와 리미널 스페이스를 중심으로- 24 GG Vol. 25. 6. 10. ※ 아래 내용은 <위니언 바이러스>, <두근두근 문예부>, < KinitoPET >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Welcome to the playground [1] : 0과 1이 만들어낸 공간 Welcome to the playground, follow me Tell me your nightmares and fantasies 놀이터에 온 걸 환영해 날 따라와 너의 악몽과 환상에 대해서 말해줘 Sink into the wasteland underneath Stay for the night, I'll sell you a dream 지하의 황무지에 가라앉아 / 하룻밤만 지내 내가 너에게 꿈을 팔게 [2] * 영화 <언프랜디드:다크웹> 속 ‘다크웹’으로 묘사된 공간 영화 <언프랜디드:다크웹(2018)> 속 ‘다크웹’은 사이버 공간일 뿐임에도 그곳을 실제 존재하는 공간처럼 연출했다. 나룻배를 타고 벽마다 희미한 횃불이 붙은 좁은 동굴 통로를 따라 한참을 깊숙이 들어가야만 닿는 곳. 해당 장면은 앞서 나온 어떤 잔인하고 폭력적이던 장면보다 오싹한 공포감을 일으켰는데, 꼭 그 미지의 공간이 실제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엔딩 크레딧 이후 세트장은 철거되고, 배우들은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그 공간만은 계속 그곳에 남아 손짓하는 것 같았다. ‘믿’어야 작동하기에, 공포의 신화 다수는 힘을 잃었다. 러브크래프트가 언급했듯, 가장 강력하고 오래된 공포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와 관련된다. 역으로 말하면 폭로되고 정복된 공포는 더이상 공포로서 그 권능을 행사하지 못한다. <주술회전(2018)>, <체인소맨(2020)>과 같은 현대 이능 판타지물 속 빌런-저주 혹은 악마-의 힘이 사람들이 그것을 공포로서 ‘믿’는지 ‘안 믿’는지에 따라 비례 또 반비례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구태의연한 괴담과 귀신 혹은 과학으로 해명된 이상 현상은 우리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때문에 현대 콘텐츠들이 대체세계 혹은 SF로 서사적 배경을 옮겨가는 것은 당연한지 모른다. 이로 미루어볼 때, 미지의 공간이자 미개척지인 사이버 공간이 공포의 공간으로 설계되는 것은 효과적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필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공포의 공간으로서 사이버 공간을 개척해나간 게임은 다수 있다. 흔한 비주얼 노벨인 줄 알았던 <두근두근 문예부(2017)>는 연애 시뮬레이션의 외피를 배신하고 게임 중반부부터 그 노선을 호러로 급선회한다. 그 중심에는 프로그램과 현실세계 사이에 갇혀 플레이어에게 집착하다 못해 인터페이스를 넘나들고 프로그램을 조작하는 모니카란 캐릭터가 있다. 한편, 속 귀여운 시스템 비서인 줄만 알았던 ‘키니토 펫’은 사실 그곳에 오랜시간 갇혀 있던 존재였고, 더이상 혼자가 되기 싫어 플레이어를 그곳에 붙잡아 두려 기존 윈도우 시스템을 활용해 온갖 공포를 안겨준다. 그렇다면, 사이버 공간 속 공간이 실존한다는 가정을 하나의 설계도법으로 채택한 게임들은, 단지 ‘낯섦’의 그것이 인류 공포의 본질과 가장 맞닿아 있단 이유로만 그것을 채택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 공간은 몰락한 공포의 신화를 되살려낼 수 있는 미개척지로서의 의미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것일까. 어떤 ‘공간’에 대한 공포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 <위니언 바이러스(2024)>는 이에 대해 유의미한 답을 주었다. Liminal Space : 경계공간이란 공포 <위니언 바이러스>는 큰 틀에서, “위니언 키우기” 프로그램을 다운받은 유저-플레이어-가 일반 육성게임처럼 평화롭게 어린 다섯 위니언을 기르게 되지만, 바이러스로 인해 위니언이 죽거나 서로를 죽이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게 되고, 사실 그 뒤엔 더 큰 음모가 있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 “위니언 키우기” 플레이 화면 우선 게임은 우리에게 꽤 익숙한 상상력 ’생명을 가진 데이터’란 설정에서 출발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두근두근 문예부>, 과 같은 심리적 호러 게임에서뿐만 아니라, , 와 같은 SF적 질문을 던지는 게임과 영화에서도 빈번히 등장하는 상상력이다. 1966년 개발된 내담자 중심 상담 인공지능 일라이자(ELIZA)가 그 허술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그것을 인격체로 착각한 현상에서 유래한 ’일라이자 효과‘는 이런 상상력이 연출로써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증명한다. 일라이저 효과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프로그래밍으로 짜여진 알고리즘이라는 것을 망각하게 하고, 그에게 영혼을 부여하게 하고, 애착하게 만들며, 결국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 다만, <위니언 바이러스>는 친숙함으로써의 일라이저 효과를 넘어 공포를 연출하는 하나의 장치로써 그 효과를 활용한다. 컴퓨터 뒷세계에 놓인 구식 CRT 모니터는 위니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위니언은 디지털 환경에서 사는 데이터 형태의 생명체이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행복감과 우울감을 느끼며, 육체 또한 지니고 있어 다치거나 죽기도 한다. 그러니 부디 위니언을 데이터가 아닌 생명체로서 존중해주길 바란다고. 노이즈 낀 소리, 불길한 단조 bgm, 검은 배경에 강조되는 암시와 같은 특정 붉은 단어의 이 컷신은 플레이어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복선이 된다. * 게임은 여러 테마를 동원해 플레이어에게 위니언이 ‘생명체’임을 강조하고 환기한다. 바이러스에 의해 정신과 육체가 잠식되어버린 픽스(Fix)의 해리성 장애와 사이코패스적 행동은 다섯 어린 위니언들이 겪는 비극의 단초가 된다. 호전적이던 평소의 성격이 극단적 부정성으로 반전된 픽스는 가장 밝았던 아이온(I-on)을 표적 삼아 폭력성을 표출한다. 때리고 할퀴는 것을 넘어서, 감정적으로 몰아붙여 협박하거나 스토킹하고, 그것도 모자라 재생이라는 위니언의 육체적 특질을 악용해 식인이란 만행을 저지른다. 가장 약하게 태어난 디버그(Debug)의 여린 마음을 또 다른 타깃으로 삼은 픽스는 디버그의 자해 습관을 약점 삼고 다른 위니언들의 목숨을 인질 삼아 가스라이팅을 일삼는다. 이도 성에 차지 않는지 픽스의 폭주는 죽은 아이온의 시체를 인터페이스 너머 점프스케어로 매달아 전시하는 사건으로 결국 정점을 찍는다. 난도질당한 피범벅의 시체, 이등신 도트 안에 들어있던 실제 같은 장기들. 호러 게임이 으레 그러듯 그것들은 플레이어가 진저리칠 만큼 끔찍하고 고어하게 연출된다. 이제 위니언은 더이상 우리가 알던 16bit의 귀여운 그들이 아니다. * 아이온의 희생과 그것을 잔인하게 전시하는 연출 알록달록한 16bit의 외피가 울컥 토해낸 뜨끈 물컹한 내용물에 플레이어는 단지 ’호러’란 두 글자로는 채 다 설명될 수 없는 기이한 공포감을 느낀다. 귀여운 도트 이등신 안에 들어차 있는 실제와 같던 육체의 흔적은 현실 속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참담할 만큼 정교하게 재현된 감정적 폭력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 신체적 폭력과 훼손, 살인 행위는 현실의 어떤 사건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단지 영혼이 있음 직한 존재로 상정했던 것과 달리 소름 돋을 만큼 적확히 우리와 닮은 지점에서 플레이어는 섬뜩함을 느낀다. 닮았을 뿐 같지 않은 완전한 타자로서의 거리감으로부터 비롯된 애착은 이제, 우리에게 내제되어 있지만 늘 외면하고 억누르고자 했던 끔찍한 부분으로서 범람해온다. 이 잔혹한 유사성은 멀미와도 같은 섬찟함을 선사한다. 낯선 것에서 느끼는 억압됐던 익숙한 것의 귀환, 언캐니[Uncanny(운하임리히, Unheimlich)] [3] 이다. 뜨끈한 내용물의 매끈한 외피들이 존재하는 공간은 특히 주목할만하다. <위니언 바이러스>의 공간은 차원이라는 지표로 크게 2D 공간과 3D 공간으로 양분된다. 2D 공간은 플레이어가 “위니언 키우기”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표면적 공간이며, 3D 공간은 그 프로그램 너머인 내 PC, 쓰레기통, 그리고 코딩됐지만 나타나지 않은 잠재적 공간이다. 서사진행의 주요부분을 차지하는 내 PC 즉, 프로그램 ‘뒷세계’는 무한한 복도와 그에 파생되는 무한한 문들로 이루어져 있다. 간혹 한 구석에 CRT 모니터가 존재하거나 벽지 구성이 바뀔 뿐 공간은 림보한다. 그곳엔 복도를 오가거나 문을 여닫는 존재도, 어딘가로 향하기 위해 복도를 통과하거나 문을 여닫을 목적도, 처음과 끝 출발지와 종착점이라는 시간개념도 모두 부재하는 곳이다. * 0과 1이 만들어낸 경계공간 이 공간은 <이스케이프 더 백룸(2022)>이란 게임 속 공간과 무척 닮아있는데 이는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란 공간 구성적 미학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경계 혹은 문턱을 뜻하는 리미널리티(Liminality)에서 파생된 이 개념은 경계공간에서 느끼는 방향감각의 상실과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모호한 감각을 내포한다. 친숙한 공간에서 느껴지는 부재와 상실, 그로부터 오는 괴리감과 위화감은 <위니언 바이러스> 속 잠재공간의 특질이다. * <이스케이프 더 백룸> 속 리미널 스페이스 단지 데이터의 정렬뿐으로 이해된 공간은 가볍게 전복되며 그것만의 사이버 공간을 펼쳐 보인다. 그곳은 버려진 잉여 데이터와 사체들이 겹겹이 쌓여 분진을 일으키는 공간이며, 무한히 파생되고 인과가 뒤섞인 문과 복도를 지닌 미로 공간이다. 0과 1의 코드가 물적 콜라주로 산재한 해체적 공간이며, 코드 오류(Bug)가 아닌 벌레(Bug)가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의 공간이다. 부재와 해체를 설계 문법으로 채택한 이 공간은 0과 1을 넘어선 그것만으로 작동하는 기호적 공간 [4] 을 직조해낸다. 물론 플레이어는 합리적 이성으로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다. 이 공간은 그저 컴퓨터 언어로 프로그래밍 된 데이터들이 모니터의 액정패널을 통해 투사되는 것일 뿐이라고. 다만 그렇게 몇번이고 되뇌도 이 공간은 공포의 동력이자 권능으로서 작동한다. 편편하고 매끈한 2D의 공간에서 불완전하고 까끌거리는 3D 공간으로 내던져지는 기시적인 틈의 감각. 그것의 논리만으로도 작동하고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인 공간을 직조해낸 어떤 세계의 재림. 시뮬라크르 [5] 의 세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Happy ever after : 아이러니적 벡터의 추동 다소의 희생이 있었지만 <위니언 바이러스>는 좋은 결말을 맞이한다. 디버그와 보는 픽스의 기억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픽스에 대한 오해를 풀게 된다. 최초 바이러스였던 시스템 위니언도 비지트(Bizit)라는 자신의 원래 이름과 기억을 되찾는다. 이후 부모 위니언으로서 다섯 어린 위니언들에게 저지른 폭력을 반성하고 삭제를 받아들이게 되며, 비대해진 뇌만 남은 감옥과도 같은 공간에서 풀려나게 된다. 돌연변이 양자 위니언 생산을 위해 육성 프로그램이란 탈을 쓴 불법 프로그램 “위니언 키우기”를 배포했던, 그렇게 위니언 무한 생산과 개조, 살육을 반복했던 WIN-S는 수사대상이 되었다. 남아있던 그리드와 보는 위니언 수사대에 안전하게 인계되어 국가 보호 아래 유능한 위니언으로 자라게 될 것이다. 행복했던 다섯 위니언의 한때가 엔딩 크레딧으로 올라간다. 에필로그는 모든 비극이 시작되기 전 어린 위니언들이 쓴 애정어린 메일이 플레이어에게 도착하며 마무리된다. 더해서 이스터 에그인 픽스의 암호문구(I love my friends)를 보면 눈물을 훔치지 않을 수 없다. 말 그대로 너무 많은 일이 있었지만 역경을 딛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이다. * 감동적인 엔딩 일러스트 <위니언 바이러스>의 매끈하게 메워진 닫힌결말은 전형적인 마스터 플롯을 따르고 있다. 무너진 질서의 회복, 권선징악, 성장서사로 짜여진 이 플롯은 플레이어에게 서사적 완결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플레이를 마친 우리는 무언가 꺼림직한 기분, 미완되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다시 말해, 홀가분하게 ‘Happily ever after.’라 외칠 수 없다. 게임은 이미 완결됐으며 기대 층위의 종결을 완수했다. 서사는 더이상 ‘더 읽기’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6] . 다만, 이 엔딩이 끝이 아닐 거야-라는 반응이 다수 포착되는 커뮤니티의 반응처럼 우리는 그저 감각할 뿐이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위니언 바이러스>에서 플레이어가 느끼는 무력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수많은 상황적 가짓수와 엔딩 기점으로 파생되는 인터렉티브 비디오 게임의 선지와 달리, <위니언 바이러스>의 선지는 표현만 다를 뿐 하나의 상황과 엔딩만을 허락한다. 때문에 플레이어의 행동반경은 극히 제한적이고 엔딩에 대한 일말의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 하나의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운명론적 귀결을 목도할 수 밖에 없는 데서 오는 무력감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위니언 바이러스>의 서사는 그정도로 완벽하게 닫혀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위니언 바이러스>가 공포를 설계하는 연출문법은 기대 층위의 종결을 이루어낸 서사를 애써 열어젖히며 ‘더 읽기’를 권유한다. 우리와 끔찍하리만큼 닮은 그가 그곳에 계속 살아 있을 것만 같다 [7] . 프로그램 너머 무한히 림보하는 세계가 여전히 존재할 것 같다. 인터페이스 너머로 내민 손과 구조를 요청하며 내지른 그 목소리는 마치 이곳을 향해 뻗어있는 것만 같다. 여전히 그곳에 존재할 것 같은 위니언들과 지금 이 순간도 림보하며 스스로를 직조해내는 컴퓨터 뒷세계. 무력하게 닫힌 운명론적 결말은 우리를 ‘덜 읽기’로 안내했지만, 바로 이 공간이, 기이한 공포감과 기호로 지어 올려진 0과 1의 공간이 우리에게 ‘더 읽기’를 권하며 손짓한다. 그렇게 닫힌 서사를 활짝 열어젖히며 그 틈을 벌리고 폭로하며 완결을 지연시킨다. 이처럼 공포의 서사와 공포적 연출은 <위니언 바이러스>란 하나의 게임 안에 조화로운 구성으로 녹아있지만, 그것이 가진 종결 층위에서의 힘은 정면으로 대치한다. 이런 낙차를 만들어내는 아이러니적 벡터는 경계공간 속 실재의 균열을 추동한다 [8] . 최초의 의도성이 어찌 되었든, 그것은 현실에서 비현실로 미끄러지는 감각을 기민하게 포착해내는 우리의 감각적 센서를 툭 켜버린 셈이다. Your Reality [9] : 재현과 해체로서의 게임 But in this world of infinite choices / What will it take just to find that special day? 하지만 이 무한한 선택지의 세계 속에서 / 어떻게 해야 그 특별한 날을 찾을 수 있을까? And if this world won't write me an ending / What will it take just for me to have it all? 이 세계가 나에게 결말을 주지 않는다면 / 그냥 전부 다 내 것으로 만들면 어떻게 될까? [10] 아주 먼 과거부터 존재했던 서사에 대한 욕망, 좀더 명확하게는 서사의 종결성에 대한 욕망은 미완으로부터 달아나고자 하는 인류의 오랜 욕망과 맞닿아 있다. 전통적 서사라 함은 늘 완결성을 보장해왔다. 시련이 있기에 성장이 있고, 타락한다면 추락할 것이며, 혼돈은 질서를 약속한다. 따라서 하나의 매끈한 플롯은 유기적으로 꿰어낼 수 없는 체험들과 종결이 결여된 카오스적 실재에 대한 필사적 질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완결성을 서약하는 전통적 서사와 달리 실재 세상은 무의미성과 미완의 틈으로 가득 차있다. 앞서 말한 ‘Happily ever after.’를 후련하게 외치지 못한 그 감각이 바로 그것이다. 낙차는 필연적으로 해체를 수반한다. 구조의 틈이 폭로된 순간 그것의 허물어짐은 멈출 수 없다. 영화 <인셉션(2010)>에서 꿈을 자각하는 순간 애써 설계한 광활한 꿈 공간이 산산이 붕괴 되는 장면처럼. 이로 미루어본다면 <위니언 바이러스>는 설계하는 동시에 해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게임은 기이하도록 우리와 닮은 위니언이란 존재를 만들어내고, 0과 1의 벽돌을 쌓아 경계공간을 지어 올린다. 그 기호 자체만으로도 작동하는 기호의 세계는 마치 어딘가에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공간의 재현, 아틀란티스를 연상시킨다. 동시에 <위니언 바이러스>는 그에 뒤따르는 기이한 공포감과 부재가 종결된 서사성과 맞부딪히며 아이러니적 벡터를 만들고, 그 동력은 지어 올려진 아틀란티스를 스스로 해체 시킨다. 그것은 마침표 대신 반점을, Happily ever after 뒤에 물음표를 붙이게 한다. 플레이어는 플레이란 체험을 통해 0과 1로 지어진 경계공간을 건설해내는 동시에 허무는 주체가 된다. 이는 필히 종결된 미완이란 모순적 체험을 가능케 하고 ‘더 읽기’란 행위로 이어진다. 닫힌 동시에 열어 젖혀졌기에, 우리는 서사와 연출로 구성된 게임, 플레이란 체험 전반, 그리고 그 둘의 사이를 씨실과 날실로 엮어내며 독자적으로 핍진한 어떠한 궤적을 덧그려내는 체험에 참여하게 된다. 디버그와 보는 정말로 안전히 보호받고 있을까. 희생된 아이온과 픽스 그리고 디버그는 위니언들의 내세로 갔을까. 어떤 다른 어린 위니언은 여전히 버그에게 쫓기며 그 으스스한 뒷세계를 계속 림보하고 있지 않을까. 비지트가 개조된 끔찍한 그 모습은 인격체를 수단화하는 현대사회와 단적으로 너무 닮아있는데. 게임 속 세계가 지금은 존재하지 않더라도 곧 존재하게 되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 곁에 어떤 위니언은 또 어떤 뒷세계는 이미 도래한 것이 아닐까. 질문은 상이하더라도 그것은 지연되는 완결성이란 하나의 줄기로 모인다. 종결과 미완이 꼬리잡기하듯 서로가 서로를 뒤따르지만, 끝내 닿지 못하고 미끄러지고 마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서사와 연출의 낙차를 통해 <위니언 바이러스>가 가능케 한 이런 일련의 체험을 가히 ‘차연적’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11] . Spinning glove [12] : 무한히 덧그려 나아가는 물음 완결성(完結性)과 미완성(未完性)은 낙차를 만든다. 그리고 그런 벡터의 대항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닌, “생각하” [13] 게 한다. 질문 층위의 열림은 하나로 고정되는 것이 아닌 생동하는 에너지의 흐름에 가깝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서사의 첫 희생양이자, 양자 위니언으로서 그 모든 가능성을 안고 있던 ‘아이온(I-on)’의 이름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그 이름의 유래에 대해선 다양한 의견이 있고 화학에서의 이온(Ion)과 양자 컴퓨터 스마트업의 아이온큐(IonQ)가 그 예이다. 화학 분자로서 이온(Ion)의 의미로 보면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 매개자이자 전이자, 변화의 축이란 의미에서 서사적 역할과도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실제 아이온의 죽음으로 인해 서사는 급물살을 탄다. 한편, 과학과는 거리가 느껴지는 다른 유래의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은 ‘아이온(Aion[Αἰών])’이란 그리스 신화 속 우주와 영원의 신이다. 아이온(Αἰών)의 시간은 선형적으로 흘러가는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과 대비되며 영원히 끝나지 않고 순환하는 시간을 의미한다. 그것은 서사를 인과로 조직해내는 시간이 아닌 존재 전체를 감싸고 맴도는 시간-아닌-시간이다. 즉, ‘아이온((Αἰών)의 시간’은 차연하는 시간성을 의미한다. 어떤 것도 완전히 시작되지도 끝나지도 않은 시간. 그 안에서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해석은 지연되며 서사는 열리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다른 위니언들의 이름을 읽어본다면 어떨까. 픽스는 ‘수리하다(fix)’라는 관점에서, 최초 바이러스인 시스템 위니언의 난폭함을 바로잡고 그 부당한 현실을 수리하기 위해 디버그 대신 자신이 희생되는 것을 택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선택은 오히려 희생의 고리와 죄책감으로 인한 비극을 고착화하고 앞당기는 계기가 되어버렸다. 이 세상을 수리하고 고쳐내 다시 ‘다섯 위니언들이 행복하게 지내던 평화로운 시간’에 영원히 ‘고정(fix)’되는 걸 가장 간절히 바랐던 픽스이지만, 그 바람은 오히려 가장 큰 비극으로 돌아왔다. * 빨간색 픽스로 시작해 반시계방향으로, 디버그, 보, 그리드. 가장 가운데는 노란색 아이온. 픽스가 ‘고정(fix)’한다면 디버그는 ‘해체(debug)’한다. 프로그래밍 중 발생한 오류를 찾아 수정하는 디버깅(debugging)에서 유래한 그 이름은 뜻대로, 이 비극의 실타래를 푸는 데에 디버그가 전면으로 내세워진다. 다만 시간은 디버그를 기다려주지 않았고 결국 디버그는 몸과 마음을 대가로 바쳐야 했다. 위니언은 감정을 가진 존재였기에, 디버그는 죄책감으로 난도질당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픽스라는 고정값과 디버그라는 해체값이 그렇게 덧셈과 뺄셈의 과정을 거쳐, 서사는 0이란 균형의 국면을 맞는다. 이후 남은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위니언이자, 최종 생존자로서의 위니언은 그리드(Grid)와 보(Bo)이다. 격자무늬, 신경망의 알고리즘과 같은 ‘규칙(Grid)’으로 읽히는 그리드는 0으로 돌아온 세계를 다시 규칙으로 지어올리는 암시를 떠올리게 한다. 주변값을 기반으로 추정해 자연스럽게 채워 넣는 ‘보간법’에서 유래한 보의 이름은 틈을 메꾸어내는 암시를 떠올리게 한다. 무너진 규칙을 세우고 틈을 메꾸는 행위. 이 흐름은 앞서 언급한 닫힌 서사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아이온-픽스-디버그-그리드와 보라는 순서로 보자면, 아이온-그리드와 보는 전적으로 대비 된다. 이름의 축으로도 설명될 수 있듯, <위니언 바이러스>는 낙차를 만든다. 그렇기에 그 기이함과 부재의 경계공간이 선사한 공포라는 순간적 감각은 질문이라는 영속적인 감각, 즉 아이온적 감각으로 우리에게 도착하게 된다. 질문이란 관점에서, 제목 자체가 질문의 형식을 가진 지브리의 2023년 작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언급하고 싶다. 제목이 발표된 순간 사람들은 그것이 가지는 어조 탓에 어떤 교조적인 교훈이 담겼을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개봉 후, 지브리의 전작들과 달리 조금 난해 하다는, 해석의 여지가 다양하다는 반응과 함께 제목은 그 자체로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단 반응으로 바뀌었다. 애니메이션은 정형화된 답이 아닌 각자의 답을 관객에게 물었다. 꼭 바이트 상 존재하긴 하지만 화면상에 표시돼 존재하지는 않는 Null 값처럼. 질문에 대한 답은 비어 있었다. 작품 속 마지막 장면, 마히토는 환상을 빠져나왔음에도 그 세계를 기억하고 있다. 현실-환상-현실 구조의 마스터 플롯에서는 금기시되는 일이다. 이에 마히토를 환상 속으로 이끌었던 매개자 왜가리는 “혹시 뭐 가져온 것이 없”냐고 묻는다. 그에 마히토가 주머니에서 저쪽 세계에서 가져온 돌을 꺼내 보이자, 왜가리는 그것을 “강력한 부적”이라고 칭하면서도 “다행히 힘센 돌은 아니니까, 점점 잊을거고, 그거면 돼.”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돌”은 저쪽 세계에서의 서사는 종결됐지만 그 세계를 계속 기억하도록 하기에 미완의 서사와 그 맥락을 같이한다. 그리고 그것이 “강력한 부적”인 까닭은 지연된 질문은, 그리고 계속해 지연될 질문은 이제 그 자체로 열린 채 생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왜가리에게는 안타깝게도 마히토는 “점점 잊”는 것이 아닌 환상과 현실 그리고 그 잔여를 기억하고 또 품으며 열려있는 텍스트로서, 질문으로서 그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 질문으로서의 무너뜨림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는 문을 열어준다. 게임은 서사와 연출, 체험과 그 체험을 나누는 담론이 유기적으로 흘러 오가는 매체이다. 그 모든 것은 플레이어 한 명 한 명의 직접적이고 실감 나는 체험으로 이루어지기에 그 층위가 만들어내는 색채는 여타 다른 매체보다 다채로울 수밖에 없다. 시대와 함께 나아가며 그것을 충실히 흡수하기도, 때론 재치 있는 전복을 해내기도 하는 역동성은 분명 플레이어와 개발자들을 설레게 하는 힘일 것이다. 따라서, 지금도 무수한 층위를 만들어나가고 있을 게임들은 우리에게 묻는다.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에게 답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물을 수 있는 공간을 활짝 열어 보일 뿐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엔딩 곡 속 ‘세계’를 의미하는 ‘Globe’ 앞에 붙은 수식어 ‘Spinning’처럼. 아이온의 시간 속에서 지연되는 물음으로. 질문으로서의 질문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려나가”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자 전부이고 최선이라는 듯. 우리는 그렇게 게임이라는 체험적 감각을 덧그려 나가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ㅁ [1] ost “Playground” 가사 일부 [2] 악몽과 환상이 뒤섞인 공간-자운-으로의 초대 서곡으로 쓰인 이 곡은 마치 어떤 공간 속으로 플레이어를 초대하는 게임의 초대장과도 닮아있다. 게임이 초대하는 그곳은 놀이터이자 꿈이며 0과 1로 지어진 공간이다. [3] 유진월, <비바리움>의 부조리한 세계와 출구 없는 삶의 공포 : 언캐니와 그로테스크를 중심으로, 횡단인문학(9), 2021, p216. [4] 박치완, 『이데아로부터 시뮬라크르까지』, HUINE(2016). p.90. [5] 위의 책, p.114-115. [6] 독자는 텍스트를 주도적으로 읽기 시작할 때 그것을 향한 힘을 필연적으로 행사하게 되는데, 그 형태는 ‘덜 읽기’와 ‘더 읽기’로 크게 나뉜다. ‘덜 읽기’는 서사 속 존재하는 내용을 취사선택하는, 해석적 종결을 짓고자 하는 욕망과 관련돼있다. 한편, ‘더 읽기’는 마스터 플롯에 의해 촉발된 정동이 드러낸 틈을 자발적으로 메우고자 하는 행위로, 그것을 해명하고자 하는 욕망과 관련되어 있다. - H.포터 애벗, 『서사학 강의』, 문학과 지성사(2008), p.169-177. [7] 실제로 게임의 중반, 평화롭던 분위기가 점점 호러로 발돋움할 무렵, 위니언 상식을 설명하는 화면과 별개로 “WE ARE ALIVE HERE”라는 보이스가 겹쳐지며 플레이어를 놀라게 한다. [8] 마르틴 하이데거, 『예술 작품의 샘』, 한충수 역, 이학사(2022), p.93. [9] 마찬가지로 경계공간이란 설정을 사용한 <두근두근 문예부>의 엔딩 곡. 처음부터 끝까지 음성 없이 텍스트로만 진행된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직 모니카만’의 목소리를 해당 곡에 입혀지는 보이스를 통해 들을 수 있다. [10] 플레이어를 향한 모니카의 집착적 애정이 드러나는 곡이지만, 이는 무수한 선택을 반복할 수 있는 게임과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플레이어의 현실세계(your reality)의 ‘차이’를 인정하고 플레이어를 떠나보내며 스스로 게임 데이터를 모두 지워나가는 모니카의 선택 또한 드러나는 곡이다. [11] 이조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해체주의 인식론과 선」, 禪學(23), 2009, p335. [12]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엔딩 곡 영어 제목. 원제는 지구본(地球儀). [13] H.포터 애벗, 『서사학 강의』, 문학과 지성사(2008), p.126-129.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 김성은 이야기가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합니다. 국문학을 공부하였으며 인생 게임은 . ‘인생은 요지경’이 ‘인생은 낯설어’로 변화한 순간을 엿본 뒤로 게임이란 세계에도 푹 빠져있는 중입니다.
- 몰입은 정말 즐거움의 중심에 있는가? - 칙센트미하이의 flow를 다시 생각하다
2021년에 출간된 는 바로 그 생략을 지적한다. 제목을 한글로 옮기면 “몰입에 반하여”가 되듯, 이 책은 몰입 이론의 무분별하고 무비판적인 사용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관건은 몰입 이론의 옳고 그름을 판정하자는 것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이론을 충분히 재검토해서 이 개념이 어떤 맥락에서 등장했고, 어떤 가치를 전제하며, 사회적으로 어떻게 작동해왔는지를 추적한다. 몰입의 반대나 해체가 아닌 재검토에 가깝다. < Back 몰입은 정말 즐거움의 중심에 있는가? - 칙센트미하이의 flow를 다시 생각하다 28 GG Vol. 26. 2. 10. 주변을 잊게 만드는 경험, 몰입 게임을 하다보면 어느새 훌쩍 지나간 시간에 놀랄 때가 있다. 행동 하나하나 의식하기보다 자연스럽게 게임의 흐름에 몸을 맡기듯 즐기게 되는 순간. 항간에 ‘시간 순삭’ 게임이라고 평가되는 <뱀파이어 서바이버즈>나 <문명> 시리즈의 리뷰에서는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아침이 됐다”는 글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모든 게임이 그런 경험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은 게임을 즐기며 빠져드는 경험을 겪는다. 이를 설명할 때 자주 사용되는 개념으로 ‘몰입’ 또는 ‘플로우(flow)’가 있다. 몰입이란 하나의 활동에 깊이 빠져든 상태에서, 자기 의식이 옅어지고 시간과 공간 감각이 약화되는 순간을 가리킨다.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1990년에 베스트셀러 (국내 번역: 몰입, FLOW)를 통해 이 이론을 대중적으로 확산시켰다. 정의만 놓고 보면, 사람들이 게임하면서 푹 빠졌던 감각은 “몰입 상태에 있다”로 설명된다. 한창 긍정심리학과 자기계발 열풍이 있을 때, 몰입 이론은 자기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필승 전략으로 소개됐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게임 분야에서 이 게임이 “왜 재미있는지”를 설명하는 분석 틀이자 “잘 만든 게임은 이렇게 만들어야한다”는 설계 규범으로 자주 쓰인다. 게임 디자인, 게임 경험 분석, 게이미케이션, 게임 연구 등 학계 및 산업계 전반 종사자라면 알아야 할 ‘기본 지식’ 중 하나다. Against Flow, 몰입에 반하여 사실, 이론이 널리 쓰인다고 해서 충분히 검토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몰입의 조건‘이라는 말의 요약본만이 체크포인트처럼 여기저기 떠돌며 이론의 효용만 강조되고, 조건이 딛고 있는 전제는 생략된 것이 오늘날의 실정이다. 충분한 검토 없이 우리는 몰입이라는 개념을 그저 ‘좋은 것’으로만 전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론이 탄생한 역사적 배경과 주변의 사상적 맥락을 살피면, 몰입 이론은 그렇게 밝은 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무색무취의 중립성을 띠고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실제 사용되는 현장에서는 이러한 검토가 자주 생략된다. 2021년에 출간된 는 바로 그 생략을 지적한다. 제목을 한글로 옮기면 “몰입에 반하여”가 되듯, 이 책은 몰입 이론의 무분별하고 무비판적인 사용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관건은 몰입 이론의 옳고 그름을 판정하자는 것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이론을 충분히 재검토해서 이 개념이 어떤 맥락에서 등장했고, 어떤 가치를 전제하며, 사회적으로 어떻게 작동해왔는지를 추적한다. 몰입의 반대나 해체가 아닌 재검토에 가깝다. 이 글은 가 던진 문제의식을 발판으로 삼아, 몰입 이론을 다시 들여다보려 한다. 이론의 정합성보다는 게임 학계와 산업계에서 이론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쓰여왔는지를 점검해보고자 한다. * , MIT Press (2021)** 이론의 시작: 인간을 성장시키는 즐거움에 대한 질문 몰입 이론은 처음부터 성공한 게임의 비밀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은 절대 아니었다. 이론을 제시한 칙센트미하이는 1960년대 후반, 인간이 언제 자신의 활동을 즐겁고 의미있게 경험하는지를 탐구하고자 했다. 그는 등산가, 체스 플레이어, 화가, 무용수, 운동선수 등이 다양한 활동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보상이 없어도 활동 그 자체에 깊이 빠져드는 경험을 묘사했고, 행동에 대해 의식하지 않게 되었으며, 배고픔이나 위험에 대한 감각까지 잊어버리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1971년 칙센트미하이는 이 경험을 ‘몰입’이라는 모델로 개념화하여 논문으로 제시했다. 몰입의 영어명은 행동이 끊기지 않고 흐르는 듯한 감각을 비유한 ‘플로우(flow)’이며, 또 다른 영어 단어인 immersion과는 차이가 있다. 몰입 이론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요소는 ‘실력’과 ‘도전‘이다. 실력은 개인이 현재 보유한 수준이고, 도전은 목표가 요구하는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몰입은 이 두 수준이 서로 균형을 이룰 때 발생한다. 만약 실력보다 도전이 낮으면 지루함을 느끼고, 반대로 실력이 도전보다 높으면 불안과 좌절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 균형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다. 지속적으로 상호 조정되어야 한다. 실력이 향상되면 도전의 수준도 함께 상승해야 몰입이 유지된다. 칙센트미하이는 몰입 상태가 인간을 성장시키는 즐거운 과정임을 밝혔다. 이 설명은 단순하면서도 설득력을 가지며 이후 다양한 분야에 ‘즐거움의 정치학’이라는 명칭으로도 확산되었다. 이론의 성격: 마르크스주의의 대안? 그렇다면 칙센트미하이는 왜 이러한 이론을 주창하게 되었을까? 그가 몰입에 탐닉하게 된 배경에는 그의 개인사가 깊게 얽혀 있다. 그는 1934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2차 세계대전을 정면으로 겪었다. 그의 가족은 모두 전쟁을 피해 헝가리로 가게 되었고, 비극적으로 소련이 헝가리를 점령하면서 그 여파로 칙센트미하이의 가족들이 소련군에 의해 죽거나 수용소에서 행방불명되는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그는 어린 시절을 “무의미하고 잔혹하고 혼란스러웠다”라고 기억한다. 칙센트미하이는 난민 수용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체스를 배우게 되었다. 그런데 고도의 집중을 필요로 하는 체스를 두는 순간, 그는 자신의 주변에 펼쳐지는 전쟁의 혼란을 잊어버리는 신기한 경험을 깨닫게 된다. 그에게 체스는 세계의 붕괴 속에서 내면을 되찾는 방식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어린 시절 전쟁에서의 경험은 이후 그의 학문적 관심으로 이어지게 된다. 칙센트미하이는 소련으로부터 삶이 무너졌기에 소련이 추구하던 사회 변혁 사상에도 반감을 갖게 된다. 사회가 인간의 의식을 규정한다는 관점에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고, 나아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으로 이어졌다. 1967년 칙센트미하이의 초기 저작을 살펴보면,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사회가 인간의 의식을 규정한다고 한 것에 그가 개탄하면서, 계급의식과 혁명의 사회적 흐름에서 자아를 해체하지 말고 오히려 개인적 의식을 강화해야 비로소 연대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개인의 의식이 약화될수록 사회적 연대 역시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몰입은 ‘소외’를 다루는 방식으로 등장한다. 소외란 마르크스주의에서 노동자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신의 노동의 결과와 자기 자신, 타인으로부터 분리되는 상태를 뜻한다.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해소하지 못하는 소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몰입 이론을 생각했다. 몰입 이론에서 소외는 외부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에서 해결 가능하며, 혁명 없이도 삶에 몰입함으로써 소외를 완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사회 변혁이 반드시 개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가 비판한 것은 마르크스주의만이 아니었다. 인간을 그저 반응 기계처럼 보는 행동주의, 인간의 행위를 무의식과 욕망의 산물로 해석하는 정신분석학, 그리고 개인을 구성하는 외부적 힘을 밝혀내는 일에 중심을 두는 20세기 철학 전반의 흐름이 그에게는 의식의 몰락처럼 보였다. 칙센트미하이는 의식이 만들어내는 개인 행위성의 힘을 되찾고자, 여러 사상들과의 긴장 속에서 몰입 이론의 정치적 성격을 형성하게 된다. 이런 배경을 고려하면, 몰입 이론은 단순한 심리 상태 설명으로만 보기 어렵다. 그가 직접겪었던 경험에 대한 증명이며, 개인의 의식이 사회적 조건에 의해 규정된다는 관점에 대한 반박이자, 소외의 문제를 다시 배치하려는 시도였다. 몰입은 즐거움을 설명하는 개념이기 이전에, 개인이 세계와 맺는 관계를 재구성하려는 하나의 입장이었다. * TED 강연 <몰입, 행복으로 향하는 비밀>(2008) 중 칙센트미하이. 출처: https://www.ted.com/talks/mihaly_csikszentmihalyi_flow_the_secret_to_happiness 이론의 재배치: 자본주의 그리고 게임 칙센트미하이가 1970년대 처음 이론을 주장했을 때와 달리 시간이 흐르며 이론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의 여러 저작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TED 강연은 성공적으로 확산되었다. 몰입은 긍정심리학과 자기계발 담론에 빠르게 흡수되면서, 어느새 개인의 ‘성장’과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방법으로만 이야기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몰입은 자본주의 안에서 작동하는 심리학 이론의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몰입이 약속하는 것은 더 많은 행복, 더 많은 에너지, 더 많은 성취이다. 칙센트미하이는 저서 <굿 비즈니스>에서 몰입을 통해 노동자의 만족과 생산성을 동시에 높일 수 있다고 관리자에게 제안하며, 사회 변혁의 대안으로 개인의 행위성을 되찾고자 했던 초기 구상은 결과적으로 더 깊은 몰입과 더 많은 성과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몰입은 삶을 재구성하는 태도라기보다 성과를 관리하는 기술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게임 산업에서도 이런 개념 전환은 그대로 반복된다. 몰입은 이용자의 게임 플레이 시간을 늘리고, 이탈을 줄이며, 소비를 지속시키는 효과적인 개념이다. 많은 게임 디자이너들은 앞서 살펴본 이론적 배경이나 문제의식 없이 몰입을 게임 디자인의 핵심 원리로 제시한다. 경험을 설명하던 개념은 어느새 경험을 통제하는 기준으로 바뀌어버렸다. 그 결과 몰입은 게임 디자이너에게 하나의 실천 규범으로 기능하고 있다. <림월드>의 제작자 타이난 실베스터는 몰입을 좋은 게임 경험의 기반으로 규정한다. 몰입이 깨지면 경험 전체가 무너진다고 말하면서, 나쁜 게임이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몰입이 깨져서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평가한다. 에픽 게임즈와 유비소프트에서 UX 전문가로 있었던 셀리아 호든트 역시 그의 저서 <게이머의 뇌>에서 몰입 이론의 실력-도전 난이도 곡선을 제작 프레임워크로 언급한다. 그리고 “몰입 파괴자”, 예를 들면 불공평한 죽음과 실패, 화면의 정지, 너무 긴 카메라 워크나 컷신은 이 개발자가 반드시 피해야 할 존재라고 강조한다. 이런 담론은 해외뿐 아니라 국내 게임 개발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산업의 관점에서 플레이어가 게임에 더 오래 머물고, 주의를 게임 외부로 돌리지 않는 상태는 매우 이상적이다. 집중이 유지될수록 다음 콘텐츠와 다음 상품을 제안하기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몰입은 즐거운 경험의 조건인 동시에, 소비를 지속시키기 위한 환경 조건이다. 이론의 현재: 스스로 난이도를 고치는 게임 게임 산업이 점차 발전하면서 몰입 이론은 게임 시스템 설계까지 직접적으로 적용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동적 난이도 조정(DDA, dynamic difficulty adjustment)이다. DDA는 플레이어가 좌절하거나 지루해지기 전에 난이도를 조정해 몰입 상태를 유지하려는 설계 방식이다. 플레이어가 선택을 통해 능동적으로 조정하거나 시스템이 자동으로 조정하는 방식이 있다. 어느 방식이든 공통된 목표는, 플레이어가 자신의 실력 수준과 도전이 균형을 이루는 자신만의 ‘플로우 존’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게임의 시스템은 플레이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집하고 분석한다. 그 결과에 따라 적의 수, 이동 속도, 공격 빈도 같은 요소들이 자동으로 조정된다. 고전적인 예로 <스페이스 인베이더>에서 적의 수가 줄어들수록 남은 적의 움직임이 빨라지는 구조를 들 수 있다. 현대의 게임들은 이보다는 복잡한 방식으로 여러 변수를 동시에 조정하고 있다. 중요한 점은, DDA는 자연스럽게 작동해야하며 플레이어는 이 변화를 체감하지 못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플레이어가 게임에 맞춰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한 채 자신의 성장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DDA가 깊은 곳에서 몰래 작동할수록 플레이어는 자신의 실력 향상의 환상을 믿게 된다. DDA는 몰입 이론에 크게 의존하며 발전해왔다. 문제는 DDA가 지향하는 바가 즐거움을 생성하기보다 좌절과 지루함을 사전에 제거하는 데에 맞춰졌다는 점이다. 게임 산업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임 중단, 접속 종료, 환불 등을 방지하기 위해, 몰입 이론은 위험 관리 수단이다. 이 구조는 궁극적으로 몰입을 중독의 방향으로 향하게 할 수밖에 없다.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지속적으로 ‘맞춰진’ 경험을 제공하고, 그 과정에서 긍정적인 감각만을 반복적으로 강화한다. 반대로 현실에서는 그런 일들이 쉽게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현실에서의 일들이 더 거칠고 불편하게 느껴지며, 게임에 몰입하는 동안 현실의 불안이나 우울을 잊게 된다. 하지만 잠시 잊혀질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몰입이 끝났을 때 다시 마주하는 것은 잠시 뒤로 밀어두었던 현실이다. 흥미롭게도 칙센트미하이는 자신의 연구에서 게임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놀이를 통해 몰입을 설명할 때 든 예시는 주로 체스였다. 1990년대 이르러서야 게임을 몰입의 사례로 간단하게 언급하지만, 그마저도 텔레비전 시청을 비판하는 맥락이었다. 그는 무비판적으로 텔레비전 시청에 빠져드는 상태를 경계했고, 마찬가지로 게임에 무비판적으로 빠져있는 사람들은 그가 꿈꿨던 이상적인 개인의 성장형 몰입의 상태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이야기는 쏙 빠지고 난이도 곡선만이 남아서 업계를 떠돌고 있다. 이론의 비판적 소비를 위하여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을 통해 개인이 소외를 극복하고 삶의 활동을 재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한편 동시에 그는 여러 저작에서, 몰입이 중독이나 자기중심적 소비, 현실 회피로 변질될 수 있는 위험한 자원이라는 점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한 외과 의사 이야기를 예로 들었는데, 수술하는 일을 즐겼던 의사는 자신의 일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휴가를 못 즐기고 수술해볼 수 있는 다른 병원을 휴가지에서 찾아다녔다는 것이다. 몰입은 어떤 경우에 고립을 초래하여 자아 내부에만 집착하게 되는 부작용을 낳는다. 칙센트미하이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문제는 몰입이 좋은가 나쁜가를 가르는 데 있지 않다. 어떤 맥락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는가가 더 중요하다. <플레이의 미학>을 쓴 브라이언 업튼은 몰입이 매력적인 요소이지만 필수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실력과 도전을 두 축으로 한 매끈한 그래프 바깥에서도, 즐거움은 당연하게 발생할 수 있다. 가끔 그 어긋남 자체가 경험의 핵심이 되기도 한다. 숙련을 극한으로 끌어올릴 때까지 좌절을 지속하거나, 아예 몰입을 깨뜨릴 목적의 게임은 무수히 많다. 나아가 는 거리두기를 통해 몰입을 깨는 게임, 몰입을 통해 오히려 현실의 성찰을 이끌어내는 게임 등 다양한 경험의 양상을 여러 사례로 보여준다. 우리는 이론이 단편적으로 소비되는 현 상황을 되돌아보고, 비판적 소비로 도약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몰입 이론이 굳어져 사용되는 방식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이 책은 참고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할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박이선 사회적인 관점에서 게임을 연구합니다. 게임이라는 도구를 통해 결국 인간을 탐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은 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 [인터뷰] 게임연구학회의 새로운 도전, DiGRA-K 윤태진 학회장
024년 3월, 세계 최대 게임 연구 단체인 '디그라(DiGRA; Digital Games Research Association)'의 한국지회(디그라 한국학회)가 설립되었다. 디그라 한국학회는 영미권과 유럽, 남미 등에 이어 18번째로 설립된 지회로서, 게임 연구의 학제적 접근과 현장과의 연결성을 지향하고 후속세대 지원, 국제교류 및 협력연구 등의 활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분과를 뛰어넘는 학술교류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상대적으로 미진했던 국내 게임 연구 분야에 있어, 다양한 업계 현장과 학계를 포괄하고자 하는 새로운 형태의 학회가 만들어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Back 21 GG Vol. 24. 12. 1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Jisu Kim Studies a range of fields—culture and knowledge, space, and the academic field. Also interested in the history of games and the lives of gamers.
- [인터뷰] 척박한 사회에 다정함을 심고 있는 당신을 위해: 인디게임 개발자 somi
그가 돌아왔다. ‘죄책감 3부작’으로 한국 인디게임씬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던 인디게임 개발자 somi가 <미제사건은 끝내야 하니까>라는 제목의 신작으로 돌아왔다. < Back [인터뷰] 척박한 사회에 다정함을 심고 있는 당신을 위해: 인디게임 개발자 somi 16 GG Vol. 24. 2. 10. 그가 돌아왔다. ‘죄책감 3부작’으로 한국 인디게임씬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던 인디게임 개발자 somi가 <미제사건은 끝내야 하니까>라는 제목의 신작으로 돌아왔다. 2016년도 <레플리카>를 시작으로 <리갈 던전>, <더 웨이크>까지 이어지는 ‘죄책감 3부작’은 그동안 여러 호평과 비평 사이에서 우리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안겨주었다. ‘게임과 사회의 관계는 어떻게 맺어질 수 있는가?’부터 시작해서 ‘게임의 완성도와 자본의 상관관계’까지. 물론, 이러한 고민거리에 대한 답은 게이머 각자가 다르게 내릴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구조화되지 않은 인디게임씬에서 작은 씨앗을 심고 있는 그의 행보는 귀하다. 그래서 더더욱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가려는 somi를 만나고 싶었다. 이경혁 편집장: 사실 ‘죄책감 3부작’이라는 이름 때문에 저는 이 시리즈가 끝났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번 작품도 죄책감을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번 작품은 어떻게 분류가 될까요? 죄책감 4부작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somi: 저는 개인적으로 ‘죄책감 3부작’은 3부작으로 마무리를 했고, 이번 게임은 조금 결이 다르다고 생각을 해요. 제가 게임을 대하는 관점이 조금 달랐거든요. ‘죄책감 3부작’을 만들 땐 ‘게임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메시지’를 중점으로 게임을 만들었고, 그걸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에 조금 더 주목했어요. 그리고 게임에서 표현하는 세계도 저나 제 주위의 사람들,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겪은 일들을 중심으로 구성을 했죠. 그러니까 하나의 사회를 투영하는 창처럼 게임을 만들었던 거예요. 그런데 이번 게임은 완전히 저와 분리된 게임이라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고, 순수하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자 했어요. 그래서 기존의 ‘죄책감 3부작’과는 조금 차이를 두고 있는 작품이라고 저는 스스로 생각하고 있어요. 이경혁 편집장: 그래도 게이머들은 ‘죄책감 3부작’과의 연계성을 떠올릴 것 같은데요. 가령, 이번 작품의 주인공이 전경이잖아요. <리갈 던전>의 전경이 나이 든 상태인 거죠? somi: 글쎄요. 그건 뭐 판단하시는 플레이어에게 맡기고요. (웃음) 사실 딱히 그 인물이 나이 들어서 이렇게 되었다고 만들고자 했던 것은 아니에요. 다만, 저는 그냥 제가 만들었던 등장 인물에게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주고 싶었어요. 제가 만들었지만 굉장히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친구들, 아니면 스스로의 선택이든 플레이어의 선택이든 이를 통해서 악인으로 만들어졌던 인물들. 그런 등장 인물들에게 ‘너도 이런 인생을 다시 살 수 있지 않겠니’라고 새로운 삶을 선물해주고 싶었어요. 서원이도 그렇고, 전경도 그렇고요. 이경혁 편집장: 어떻게 보면 등장 인물에 대한 애정이 좀 묻어나는, 일종의 ‘인물에 대한 스핀오프’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somi: 네. 맞아요. 이경혁 편집장: 그런데 사실 <리갈 던전>은 플레이에 따라서 스토리 진행이 달라지잖아요? 그러면 이른바 전작의 진 엔딩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부분으로 연결되지 않을까요? somi: 사실 <리갈 던전>의 스토리도 플레이하는 방식에 따라 워낙 다른 모습을 가질 수 있으니까, 그중 어떤 엔딩이 지금 작품과 연결성이 있을지, 아니면 연결성이 전혀 없을지 등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이번에 내신 <미제사건은 끝내야 하니까>가 스팀에서 압도적 긍정을 찍고 있는데요. somi: 처음이에요. 그래서 다소 어안이 벙벙합니다. 이경혁 편집장: 아, 이전 작에서 많이 받으셨을 줄 알았는데, 처음이시군요. 그런데 이렇게 좋은 평가가 이어지는 작품에 대해 앞으로 해외 번역 버전을 늘릴 계획은 없으신가요? somi: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간체), 영어 이렇게 총 4개 국어를 지원하고 있는데요. 다만, 번역에 조금 어려움이 있어요. 이전 <레플리카>의 경우에는 팬 베이스로 번역을 다 열어놨거든요. 그런데 번역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게임이 주는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서 고민이 되긴 해요. 특히 제가 만든 게임은 거의 텍스트 기반이다 보니, 번역 과정이 너무 어렵거든요. <리갈 던전>의 경우에는 일본에서 <그노시아>라는 게임을 만든 Petit Depotto라는 스튜디오가 있는데요. 거기에서 게임을 만드시는 두 분이 <리갈 던전>을 플레이하시고 게임이 너무 좋다며 번역을 해 주시고, 일러스트도 그려주셔서 그 버전으로 재출시가 되었어요. 덕분에 일본에서도 인기를 얻게 되었죠. 이런 좋은 번역가를 만나는 것이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저희 GG의 이전 인터뷰에서, 크레딧에 항상 문학 작품들을 넣으시는 지점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요. 이번 작품은 어떤 문학 작품이 가장 주요한 레퍼런스로 작용했을까요? somi: 사실 거창한 의미를 가지고 레퍼런스를 넣는다고 하기엔 민망하고요. 제가 책을 좋아하다 보니 게임을 만드는 가운데 읽고 있는 책이 있을 건데, 그 책 중에 기억나는 문구를 게임에 넣고 있어요. 그러니 ‘게임을 만드는 중간에 이걸 읽고 있었구나’ 이렇게 생각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웃음) 이번에 레퍼런스에 넣은 작품은 김연수 작가의 <너무나 많은 여름이>라는 소설집인데, 김연수 작가를 제가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요. 거기서 이런 대목이 나와요. “타인에게 이유 없이 다정할 때, 비로소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만들어지고, 삶의 플롯이 바뀔 수 있다.” 이 게임의 기반이 되는 생각과 상통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을 해서, 이 문구를 작가의 말에도 넣고, 크레딧에도 넣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비단 레퍼런스뿐만 아니라, 저는 somi님 작품이 항상 문학적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한편으로 게임을 지금까지 만들어오신 입장에서 게임과 문학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인디게임을 만들 때, 게임의 스토리를 위해서 문학적 지식이 필요할까요? somi: 게임의 스토리가 가지는 완성도나 참신함을 평가할 때, ‘한 편의 소설을 읽은 것 같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이 표현은 한편으로 게임이라는 장르가 독자적인 예술의 영역으로 아직 인식되지 못했기 때문에 사용되는 표현이라고 생각을 해요. 게임이라는 장르는 스토리와 게임성이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장르잖아요? 그런 지점에서는 문학적 지식이나 스토리라는 개념을 별도로 떼어놓기보다, 게임이라는 장르가 가지는 특성들을 최대한 많이 활용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저는 책 읽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지만, 그것만으로 좋은 게임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그런데 이번 게임이 1월에 나왔잖아요? somi님 작품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BIC(부산인디커넥트페스티벌) 같은 시상식에 출품하기에는 다소 불리할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걸립니다. somi: 제가 게임 개발 외의 현업이 따로 있는데, 최근에 오롯이 게임 개발에 좀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맞아서 그 시기에 맞춰 게임을 만들고자 했어요. 다른 어워드나 게임쇼 일정은 고려하지 않고, 제 일정에 맞췄던 거죠. 이경혁 편집장: 어떻게 보면 전업 개발자가 아니시기에 일어난 일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somi님께서 스스로 생각하시기에 투잡을 유지하는 방식의 장단점은 무엇이 있을까요? somi: 일단 제 개인적으로는 창작의 자유로움이 큽니다. 물론, 절대적 시간이 부족하고, 일상이 빡빡하지요. 그런데 역설적으로 일탈의 창구가 있다는 점이 커요. 가령, 직장에서는 창작 욕구를 발현하기가 어려운 지점들이 있잖아요? 그런 과정에서 저만의 창작 욕구를 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이 큰 장점입니다. 다만, 게임 업계에 완전히 뛰어들지 못한 사람으로서 가지게 되는 스스로의 거리감이나 어려움들이 있어요. 누군가는 생존을 위해 게임을 만드는데, ‘너는 그렇지 않은 지점이 있지 않냐’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지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판매 실적이나 리뷰와 같은 지점에서 자유롭게 제가 만들고 싶은 게임을 만드는 환경이 주어지는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말씀하신 지점에서 대형 프로젝트가 아니라, 1인 작가이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어드벤티지도 있을까요? 예를 들어, somi님의 게임을 보면서 스튜디오를 차리고 게임을 만드시면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을지 궁금했는데, somi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somi: 저도 어려울 것 같아요. 단순히 게임 안의 메시지가 강한지 강하지 않은지를 떠나서, 게임의 플롯을 만들고, 게임 메카닉을 짜고, 그 안에 어떤 그래픽 요소를 넣을지, 음악을 어떤 식으로 배치할지 이런 모든 작업이 저의 일관된 의도 하에 진행이 되고 있는데, 대규모 협업을 한다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제가 게임을 만드는 방식이 처음부터 완전한 기획서를 만들어놓고 a부터 z까지 기획해놓은 상태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고, 때로는 부분부분 생각나는 아이디어들을 만들어놓고 그것들을 조합하는 방식을 즐겨 사용해요. 그 안에서 새로운 가지가 나오고, 그 가지에서 다시 또 게임의 형태를 갖춰 나가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게임이 만들어지는데, 그런 것들이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사실 저는 그래서 외주를 맡기는 것도 엄청 힘들어해요. 지난번에 <리갈 던전>에서 <그노시아>의 그래픽 디자인을 하시는 코토리 씨께서 일러스트를 만들어주셨는데, 캐릭터들이 너무 이쁘고 이를 통해 사람들의 몰입도가 달라졌어요. 그래서 이번에 게임을 만들 땐 등장 인물들에게 얼굴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해서, 픽셀 아티스트분들을 찾아봤는데요. 제가 어떤 방식으로, 어떤 상황에, 어떤 표정을 짓는 일러스트를 넣을지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해놓은 게 아니고, 대사를 쓰다 보면 이렇게 한번 그려봤다가 수정했다가 하는 과정이 반복되다 보니 외주를 맡길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결국 또 저 혼자 그리게 된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이번 작품의 경우에는 구성이 치밀하다는 호평이 자자한데요. 이번 작품도 작은 조합들을 배합하시는 방식으로 구성하신건가요? 아니면 전반적인 큰 구성을 먼저 해두신걸까요? somi: 사실 그 방식은 게임을 만들 때마다 다른데요. 어떤 게임은 문장 하나를 가지고 시작했던 경우도 있고, 필요한 문장들을 겹치다 보니까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졌던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이번 게임은 처음부터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을 해서 만들었어요. 그래서 처음에 플롯부터 짜서 이야기를 시작했죠. 특히, ‘미제사건으로 남겨달라’는 실종 아동 아버지의 대사로 시작하는 것이 최종적으로 이 게임의 감동이나 재미를 더 배가시킬 것이라고 생각하고 만들었어요. 이경혁 편집장: 독자분들께서 읽으시고, 게임의 마지막이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해하실 것 같은데요. 마지막으로 <미제사건은 끝내야 하니까>에 대해 간단히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somi: 작가의 말에도 적은 내용인데요. 결국 이 게임을 플레이하시는 분들이 최종적으로 가져가시게 될 이야기일 것 같아서 이야기를 드리자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시대가 각자도생, 약육강식의 방식을 강요하고, 당연시하잖아요? 그리고 분노와 혐오를 부추기고 있는데, 그 안에서 하루하루를 견디면서 살아가고 있는 대다수의 선량한 시민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될 수 있는 게임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고, 소통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여러분들이 틀린 게 아니고 응원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게임이라고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디어문화연구자) 서도원 재미있는 삶을 살고자 문화를 공부합니다. 게임, 종교, 영화 등 폭넓은 문화 영역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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