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에 불고 있는 게임업계 해고와 노조 설립 붐의 현장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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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5. 8. 10.
“정리해고 통보는 메신저로 왔고, 회사는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어요. 그 순간, 우리 팀은 단단히 결심했죠. 이제 우리가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요.”
2025년 초,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산하 ‘오버워치’ 개발팀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품질 관리(QA). 부서 수십 명이 예고 없이 해고되자, 남은 직원들은 단체 행동에 나섰다. 그리고 곧바로 ‘전 부서 대상(wall-to-wall)’ 노동조합 결성을 선언했다. 이는 미국 게임업계에서도 드문 일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프로젝트가 끝나면 가장 먼저 잘리는 존재였죠. 이젠 바꿀 때입니다.” 한 QA 테스터는 Polygon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2025년 현재, 미국 게임업계에는 이 같은 노동조합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특히 마이크로소프트 산하 스튜디오들이 중심에 있다. ‘엘더스크롤스’, ‘폴아웃’ 등으로 잘 알려진 제니멕스 미디어의 QA팀 300여 명은 이미 2023년 노조를 결성했고, 올해 6월 마침내 첫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협약에는 정당한 사유 없는 해고 금지, 연봉 인상, 원격근무 보장, AI 남용 금지 등의 조항이 포함됐다. 합의에 이르기까지 무려 2년에 걸친 교섭이 있었다.
이처럼 조직화 움직임이 활발해진 데는 뚜렷한 맥락이 있다. 2023년 이후, 테크와 게임업계 전반에서 진행된 대규모 구조조정이 방아쇠 역할을 했다. 일렉트로닉 아츠(EA), 유비소프트, 액티비전 블리자드 등 거의 모든 대형 퍼블리셔가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을 정리해고했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한 개발자는 “코로나 초기 정도만 해도 게임 업계는 최고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었고 그 누구나 게임업계에서 일한다고 하면 부러워했다”며 “당시 집에서 게임을 즐기던 사람들이 올려준 매출이 영원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고 매일 매일 불안감을 느낄 정도로 수없이 많은 동료다 잘려 나갔다”고 말했다.
이직 시장도 급격히 얼어붙었다. 게임업계에 꽤 긴시간 몸 담았던 필자의 링크드인에는 아직도 심심치 않게 올라오는 글이 있다. 1년 이상 구직을 하고 있고 이제는 실업수당도, 저축해놓은 돈도 떨어져서 정말로 절박하다는 글이다. 미시적인 체험을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전에 없이 재취업 기간이 길어지고 있다고 호소하는 모습을 많이 보고 있다. 이렇다 보니 당연히 노동조건에 대한 생각이 게임 노동자 사이에서 화두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만 노조가 생겨도 활동은 쉽지 않았다. 회사가 교섭에 지연 전술을 쓰며 기본적인 요구에도 몇 달씩 답변하지 않았다고 밝힌 노조도 있었다. 심지어 단체협약을 맺은 직후, 마이크로소프트는 제니멕스를 포함한 게임 부문에서 1900명을 정리해고하며 노조에 충격을 안기기도 했다. 위에서 설명한 블리자드 노조 역시 여러 노력을 했다. 노조 결성 이후 회사 측은 단체협약 교섭은 인정했지만, 교섭 대상자 범위를 제한하려 하거나, 회사 소속 변호사를 통해 위협적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목소리를 냈고, 실제로 성과도 얻었다. 제니멕스의 단체협약은 “게임업계 최초의 진정한 노사 합의”라는 평가를 받는다. 블리자드도 2025년 여름, QA 팀 일부와의 조건부 합의에 도달했고, AI 도구 사용에 대한 사전 동의 조항을 삽입하기로 했다.
여기에 AI라는 거대한 파도가 게임업계를 덮치고 있고 노동운동의 주요 갈등요소로 자리잡고 있다.음성 데이터 수십 시간을 학습시켜 만든 ‘AI 성우’나, QA 테스트를 자동화하는 툴들이 실제 일자리를 대체할 수 있다는 불안이 커졌다. SAG-AFTRA(배우조합)는 2025년 초 게임 성우 부문에서 파업을 예고했고, 결국 AI를 이용한 목소리 복제는 배우의 서면 동의 없이는 금지하는 조항을 계약에 포함시켰다.
회사의 대응은 제각각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겉으로는 “노조 결성에 중립적 입장”을 밝혔지만, 실제 교섭 과정에서는 지연 전술과 부분적인 협조만 보여주며 이중적 태도를 취했다. 세가 오브 아메리카는 2024년 자발적으로 노조를 인정하고 단체협약을 체결했지만, 직후 계약직 직원 61명을 해고해 거센 항의를 받았다. 반면, 일부 중소 개발사들은 “노조와의 협력은 경쟁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며 적극적인 교섭에 나서는 경우도 있었다.
2025년의 게임업계는 단순한 고용환경 변화가 아니라,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의 권리’에 대한 재정립이 시작된 해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더는 개발자가 익명의 톱니바퀴처럼 쓰이고 버려지는 구조를 당연시하지 않는 시대다. 그리고 그 변화는 현장 구성원들의 단호한 목소리에서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