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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를 다시 지구로, 지금을 다시 지금으로 만들기: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를 즐기며
테라포밍(Terraforming)이라는 말을 점점 더 자주 듣게 된다. 특히 최근에는 기이한 행동으로 구설수에 오르는 자본가 일론 머스크(Elon Musk)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그가 화성을 테라포밍하는 것을 사업의 최종적인 목표로 여긴다는 이야기가 동시대 자본주의 세계의 신화처럼 전해진다. 테라포밍은 말 그대로 어떤 행성을 ‘지구의 형태로 만드는’ 작업을 말한다. 보통은 지구 바깥의 다른 행성을 지구처럼 만들어 인간이 이주하거나, 식민지로 삼기 위한 계획을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개념이다. < Back 지구를 다시 지구로, 지금을 다시 지금으로 만들기: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를 즐기며 05 GG Vol. 22. 4. 10. * 〈호라이즌〉 시리즈 전반에 대한 스포일러 요소가 있습니다. 지구를 지구로 만들기 테라포밍(Terraforming)이라는 말을 점점 더 자주 듣게 된다. 특히 최근에는 기이한 행동으로 구설수에 오르는 자본가 일론 머스크(Elon Musk)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그가 화성을 테라포밍하는 것을 사업의 최종적인 목표로 여긴다는 이야기가 동시대 자본주의 세계의 신화처럼 전해진다. 테라포밍은 말 그대로 어떤 행성을 ‘지구의 형태로 만드는’ 작업을 말한다. 보통은 지구 바깥의 다른 행성을 지구처럼 만들어 인간이 이주하거나, 식민지로 삼기 위한 계획을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개념이다. 테라포밍이라는 말은 1942년에 발간된 잭 윌리엄슨(Jack Williamson)의 SF소설 『충돌 궤도』(Collision Orbit)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 이후 1961년에는 저명한 천문학자인 칼 세이건(Carl Sagan)이 금성을 테라포밍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안하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뜬구름이었던 상상에는 조금씩 구체성이 부여되기 시작하였고, 그에 따라 문학과 영화 그리고 게임 등 다양한 방면의 창작물에서 활용되며 SF의 핵심적인 개념으로 자리 잡아 왔다. 생각해보면 테라포밍은 굉장히 식민주의적인 발상이다. 인간의 생존이나 욕망을 위해 지구 바깥의 행성을 인간의 공간으로 뒤바꾸는 것만큼 궁극적인 식민주의가 있을까. 실제로 테라포밍은 행성 간 자원개발 같은 문제와 함께 다루어지며 식민주의의 알레고리로 사용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영화 〈아바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테라포밍은 단순한 착취에서 나아가 어떤 생태계를 통째로 전환하는 것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인간중심성과 인간/자연 이분법의 극한에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지구 안의 생태계에서도 인간들은 수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데, 무려 지구 바깥의 다른 별을 ‘지구화’한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상상인가. 그러나, 여타 ‘-되기’의 문제가 그렇듯 테라포밍은 지구가 아닌 것을 지구로 만드는 일에 구체적인 형상을 부여하면서 그 자체로 ‘과연 무엇이 지구를 만드는가’하는 질문이 되기도 한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지구가 아닌 것이 지구가 될 수 있을까. 대체로 물과 에너지원의 존재, 인간이 숨 쉴 수 있는 대기 상태, 물질의 합성이 잘 일어날 수 있는 환경 등이 꼽힌다. 그러나 정말 그것이면 어디든 ‘지구의 형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이렇게 우리가 딛을 수 있는 땅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앞에서 〈호라이즌〉 시리즈의 세계관은 고유의 탁월한 설정으로 흥미로운 영역을 열어낸다. 〈호라이즌〉 시리즈를 거칠게 요약하면, 지구를 다시 테라포밍하는 것에서 비롯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유저 경험이나 그래픽에 대한 호평도 눈에 띄지만 〈호라이즌〉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은 세계관에 있다. 〈호라이즌〉 시리즈는 세계가 멸망한 이후의 세계를 다루는 소위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사이지만, 여러 방면에서 전형성을 크게 벗어난다. 고대와 미래가 이상하게 꼬여있는 새로운 인류의 모습을 그려내고, 무엇보다 자연과 로봇이 어우러진 생태계의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렇게 독특한 세계관은 지구가 완전히 파괴된 이후에 그것을 다시 복구하는 과정을 배경으로 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호라이즌〉의 세계관에서 지구가 멸망하기 시작한 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늘날 우리의 세계처럼 지구의 환경은 점점 더 악화되었고, 그에 따른 분쟁도 격화된다. 물론 그만큼 환경을 위한 기술도 거듭 발전했지만, 역시나 문제는 자본주의. 테드 파로라는 자본가는 유기물을 스스로 분해하여 에너지로 만들 수 있는 로봇을 개발하여 큰돈을 번다. 그러한 기술은 처음에는 생태와 융합을 지향하는 친환경적인 솔루션이었고, 망가져가는 지구 생태계에 희망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군사용 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본격화된다. 2050년대에 들어서면 파로 오토메이티드 솔루션사(社)의 군사용 로봇이 선진국 군대의 대부분을 대체한다. 인류는 전쟁을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군사용 로봇 시스템은 계속 발달하여 자체적으로 에너지원을 찾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인공지능을 통해 로봇들이 스스로 생산하고, 통제하는 일종의 생태적 네트워크를 조직하는 수준에 도달한다. 그렇게 고도로 발달한 로봇 시스템은 인간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하고, 결국 ‘파로 역병’이라고 불리는 결함이 확산되면서 로봇들은 끊임없이 개체 수를 늘려나가며 지구의 모든 유기물과 생명체를 자신의 에너지원으로 바꾸어 나간다. 인간들은 저항해보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지구 상의 모든 생명과 에너지원이 고갈되는 광경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상황. 테드 파로는 로봇들의 군사 목적 활용을 반대하며 퇴사했던 핵심 개발자 엘리자베스 소백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보안을 핑계로 로봇에 접근할 수 있는 코드를 제대로 구축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로봇들이 지구를 모두 파괴하기 전에 그들을 멈추는 방법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소백이 찾은 유일한 방법은 지구가 완전히 황폐화된 이후에도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즉 지구를 다시 테라포밍할 시스템을 갖추어 놓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지구를 포맷하는 것. 이것이 〈호라이즌: 제로 던〉에서 드러나는 ‘제로 던’ 프로젝트의 전말이다. * 테라포밍 시스템을 총괄하는 ‘가이아’의 홀로그램 모습. 그 프로젝트를 위해 전세계에서 모인 사람들은 지구의 멸망을 준비하며 지구를 다시 지구로 만들기 위한 알고리즘을 구축한다. 전체 테라포밍 시스템을 총괄하는 감정을 가진 인공지능 ‘가이아’를 중심으로 그리스 신들의 이름을 가진 9개의 하위 기능이 각각의 역할을 하며 지구를 다시 지구로 만드는 시스템이 계획된다. 1) 기본적인 세계관은 이 정도로 언급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2017년에 첫 출시된 〈호라이즌: 제로 던〉이 엘리자베스 소백의 복제인간인 주인공 에일로이의 탄생 비화와 이러한 세계관의 구조를 밝혀나가는 서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면, 신작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는 하데스 시스템의 오류로 문제를 일으킨 가이아의 테라포밍 시스템을 다시 복구하고, ‘제로 던' 당시에 방주를 타고 지구 바깥으로 피신했던 21세기의 고대인들과 조우하는 이야기가 핵심에 있다. 초반부에 백업된 가이아의 데이터를 찾으면, 가이아의 홀로그램과 관계를 맺으며 그의 하위 기능들을 복구해나가는 퀘스트를 통해 게임의 핵심적인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런데 지구의 명운을 짊어진 인공지능들이 모두 그리스 신들의 이름을 가졌다는 점이 계속 눈에 밟힌다. 이러한 설정뿐만 아니라, 〈호라이즌〉 시리즈 전반의 서구중심주의를 먼저 비판적으로 짚을 필요가 있다. 지구를 죽이고 살린 인물들과 모든 주요 사건이 모두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거나, 심지어 미국 서부의 IT자본들이 그 모든 것의 주체가 된다는 설정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또한 신생 인류 각 부족의 모습이나 풍습을 그려내는 방식에서는 전반적으로 오리엔탈리즘의 향기가 진하게 풍긴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을 입체적으로 견지하더라도 가이아가 흑인 여성의 이미지로 재현되었다는 점은 단순한 ‘PC 요소’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굉장히 흥미로운 지점이 될 수 있다. 가이아는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과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가 주장한 ‘가이아 가설’을 연상시킨다. 가이아 가설은 대기의 원소 구성이나 해양의 염분 농도가 오랜 시간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이 지구에 살고 있는 다종다양한 생물들의 영향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지구를 무생물적 기반이 아니라, 생물과 무생물이 복합된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보는 관점이다. 러브록은 지구를 가이아로 부르며 지구가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조정하는 지적인 생명체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이른바 에코페미니즘이라고 불리는 사상적 흐름의 기반이 된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가이아의 존재가 〈호라이즌〉의 세계관에서는 테크놀로지와 완전히 결합되어 있다는 점도 재미있는 지점이다. 자연을 총괄하는 여신이 인공지능 알고리듬이라는 설정은 독특한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기술과 자연의 이분법을 가로지르게 된다. 여기에서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은 신적인 존재와 실제로 구분이 되지 않는다. 나아가 그것은 생태계의 일부, 아니 생태계 그 자체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러한 설정에서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 『사이보그 매니페스토』의 “여신이 되기보다 사이보그가 되겠다”는 선언은 한 번 더 뒤집어지면서 전복적인 의미가 발생된다. 지금을 지금으로 만들기 이러한 요소 이외에도 〈호라이즌〉이 흥미로운 여성 서사인 이유는, 단지 주인공 에일로이가 여성이라는 점이나 에일로이가 태어난 노라 부족이 모계 사회라는 설정을 훨씬 초과한다. 2) 오히려 21세기 인류의 지식과 역사를 신생 인류에게 전달했어야 할 남신 아폴로의 이름을 딴 인공지능이 파괴된 상태로 리셋된 지구가 서사의 배경이라는 점이 더욱 근본적인 차이를 만든다. 생물학적인 이분법에서의 여성이 아니라, 남근적 대문자 역사와의 관계 속에서 여성적인 것의 위상을 고민해야 한다. 플레이어가 에일로이와 함께 탐험하는 세계는 고대(21세기)와 역사적 단절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고대의 사물들은 말 그대로 고고학적 사물이 된다. 푸코(Michel Foucault)는 『지식의 고고학』 등 텍스트를 통해서 고고학을 역사와 대별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역사는 세계를 선형적이고 논리적인 시간에 배치하는 작업이다. 또한 역사는 서술하는 주체의 관점에서의 질서이다. 그러나, 고고학은 땅에 파묻혀 있던 것을 갑자기 지금-여기에 튀어나오게 하면서 잘 정리되어 있던 역사적 배열을 깨뜨리곤 한다. 그렇기에 고고학적 사유에는 일종의 변증법이 작동하는 것이다. * 테낙스 부족이 신전으로 삼고 있는 과거의 전쟁기념관에서 포커스로 데이터를 발견했다. 설정에 따라 데이터 손상이 심한 경우에는 내용의 일부가 누락되곤 한다. 〈호라이즌〉 시리즈에서 플레이의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는, 에일로이가 관자놀이에 끼고 다니는 ‘포커스’의 활용이다. 일종의 AR기기인 포커스는 플레이어가 버튼을 누르면 주변 공간을 스캔하면서 기존과 다르게 볼 수 있도록 해준다. 낯선 공간에 진입하면 패드의 버튼을 연신 눌러대며 새로운 요소는 없는지, 혹은 유실된 데이터 포인트는 없는지 말 그대로 발굴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그렇게 발견되는 데이터 포인트의 정보들은 게임의 퍼즐 요소에 실질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게임 속 세계의 고대(플레이어 입장에서는 근미래인 21세기 중반)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자료들이다. 그것은 단지 읽을 거리를 제공할 뿐이지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이상하게 뒤틀리는 감각을 주어 흥미롭게 작동한다. 듀얼센스를 잡고 있는 플레이어의 시간에서 현재가 게임 속 에일로이의 시점에서는 고대가 되면서, 플레이어는 끊임없이 지금을 발굴하는 작업하게 된다.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에서는 북미 대륙의 서쪽으로 나아가면서 동부 출신인 에일로이 입장에서는 야만적이고 호전적인 종족으로 여겨졌던 테낙스 부족을 만나게 된다. 처음 그들이 등장했을 때, 현대식 군대 제식에서나 볼 수 있는 경례를 하는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이 성지로 삼고 있는 공간은 21세기의 전쟁기념관이었다. 그들은 그곳의 홀로그램 자료들을 기반으로 일종의 종교를 만들어 고대의 전사들을 섬기면서, 전쟁기념관의 프로파간다 영상들이 제시하는 이념에 맞추어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공간 이외에도 〈호라이즌〉에는 데이터가 보관된 서버룸이나, 일종의 시드볼트, 심지어 인류의 유산으로 여겨지는 미술품을 보관하고 있는 수장고가 등장한다. 결코 불가능한 영원성을 전제하면서 시간들을 하나의 지평에 물질적으로 모아내는 장소인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이례적인 위상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기도 하다. 이렇게 시간에 대한 감각을 꼬아내는 설정은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의 전개에서 가장 핵심적인 지점에서도 작동하는데, 가이아의 백업 데이터를 처음 발견하는 곳에서 플레이어는 정말로 뜬금없이 구 인류의 생존 세력을 마주하게 된다. 그들이 전작에서는 볼 수 없었던 엄청난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한 보호막을 입고 있기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활을 쏘는 것 밖에 없는 상황에서 플레이어는 엄청난 무력감을 느낀다. 플레이어를 당황시키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시간이 꼬여있어서 그들을 뭐라고 불러야할지도 헷갈린다. 비슷한 맥락에서 게임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퀜 부족은 에일로이처럼 포커스를 지니고 있어서, 고대의 데이터에 접속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소벡 박사와 똑같이 생긴 에일로이를 ‘살아있는 선조’(living ancestor)라고 부르기도 한다. 세계관 전반의 이렇게 꼬여있는 시간성을 통해 플레이어는 계속해서 지금이라는 시간을 다시 돌아볼 수 있다. * 지구로 돌아온 구 인류의 일원인 틸다 판 더 미어는 자신의 수장고에 고대 인류의 미술품을 보관하고 있었다. 이 설정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라익스미술관(Rijksmuseum)과 협업 프로젝트로 이루어졌다. 관련 링크: https://blog.playstation.com/2022/04/06/preserving-art-through-tildas-vault-in-horizon-forbidden-west/ 회복이 아닌 전복 SF, 특히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계관은 이렇게 지금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또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세계가 몽땅 망해버린 이후에도 이야기를 이어갈 누군가를 등장시킨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희망의 서사이기도 하다. 파국을 뜻하는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는 아무것도 없는 절멸을 뜻하지 않는다. 어원적으로 그것은 ‘아래로 뒤집다.’ 혹은 ‘반전’이라는 뜻과 통한다. 그러한 세계의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것은 사실 무언가 뒤집어져 쏟아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호라이즌〉의 서사도 인류에게 희망을 주고, 결국 인류는 승리할 것이라는 인간중심적인 감동을 주는 것일까. 한편으로는 그런 측면을 부정하기 어렵다. 홀로그램으로 과거의 라스베가스의 화려한 모습이 복원되는 장면 등을 극적으로 연출하고, 인류애를 자극하는 요소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라이즌〉의 세계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에일로이의 동료들과 그 시대의 인간들이 ‘우리’ 인간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의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우리 시대의 인간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들은 지구로 다시 돌아와서도 깽판을 치고 결국 복제인간인 주인공에게 죽임을 당한다. 에일로이와 동료들은 단지 시대적으로 우리 시대 이후의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복제인간이거나 대부분 인공지능 로봇에 의해 배양되어 태어난 말 그대로의 포스트-휴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호라이즌〉은 인류를 회복시키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인류를 전복시키는 이야기이다. 〈호라이즌〉은 이렇게 인간 너머의 인간들, 그러니까 인간이 아니기에 인간이라는 존재를 성찰하게 만드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이런 식으로 〈호라이즌〉은 같아 보이는 것의 다름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것, 지구이면서 지구가 아닌 것, 지금이면서 지금이 아닌 것. 지구를 다시 지구로 만드는 작업은 반복이지만, 차이를 가지고 있는 반복이 된다. 아니, 사실 차이는 반복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여기에서 시간의 문제는 특히 중요하게 작동한다. SF가 가지는 근본적인 가능성은 그러한 시간성에 있다. SF의 시간성은 순간적으로 우리의 지금을 돌아볼 수 있는 틈새를 만든다. 우리는 오직 미래를 통해서만 현재를 볼 수 있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가 아닌 존재들을 통해서만 우리를 돌아볼 수 있다. 1) 가이아의 하위 기능들의 역할을 간략히 정리한 메모를 덧붙인다. 미네르바는 인류가 멸종한 이후에도 파로의 로봇들을 멈추기 위한 코드 분석을 지속하여 결국 로봇들을 멈추는 역할을 하는 인공지능이다. 그렇게 미네르바가 군사용 로봇을 멈추면, 헤파이토스는 지구 곳곳에 소위 ‘가마솥’(cauldron)이라고 불리는 생산 시스템을 구축하고, 동물 형태의 생태적 로봇들을 만들어 지구에 순환 시스템을 복구한다. 동시에 아이테르는 대기를, 포세이돈은 바다를 정화하고, 데메테르는 토양을 복원하여 식물이 다시 생장하도록 돕는다. 아르테미스는 생체 동물들의 유전자를 복원하여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고, 엘리우시아는 인간의 유전자를 보관하고 있다가 생태계가 복원되면 인간을 배양하여 태어나게 만들고, 나아가 인큐베이팅까지 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다. 그렇게 다시 태어난 인간들은 정보와 지식의 아카이브인 아폴로를 통해 21세기 수준의 지식을 다시 복원하고, 무엇보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파로 역병’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공유한다. (사실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제로 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파로가 자신의 과오가 영원히 남는 것이 두려워 아폴로를 파괴해버렸기 때문이다. 지구의 테라포밍 이후에 다시 태어난 인류가 고대 문명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데스는, 테라포밍이 오류를 일으키는 것을 대비하여 이 모든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모든 것을 다시 초기화한 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2) 물론 〈호라이즌〉은 거대한 역사를 바탕으로 한 지구의 운명을 건 서사이고, 때로는 에일로이가 남성 영웅의 여성 버전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개는 플레이의 중요한 기점 곳곳에서 주어지는 대화의 선택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지점이다. 에일로이는 선형적으로 전개되는 서사의 인물이 아니라, 게임의 플레이어가 만들어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큐레이터, 미술비평가) 권태현 글을 쓰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예술계에서 활동하지만 쉽게 예술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것들에 항상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예술 바깥의 것들을 어떻게 예술 안쪽의 대상으로 사유할 수 있을지 탐구한다. 정치적인 것을 감각의 문제로 파악하는 관점에 무게를 두고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7000eichen@gmail.com )
- 하이파이 러쉬: 2023년의 깜짝 락스타를 놓치지 마시라
기라성 같은 게임이 대단히 많았기에 게임 업계 종사자들은 으레 올해를 풍년이라고 부르곤 했다. 올해는 한국에서도 과 <데이브 더 다이버>가 '쌍백만'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새로운 희망을 보여줬다. 대한민국 게임대상을 두고 두 게임이 경쟁했던 일화는 훗날에도 오래 기억될 만하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올해의 게임을 고르기 어렵다'라는 이야기가 나왔던 2023년. 리듬+액션 게임 <하이파이 러쉬>(Hi-Fi Rush) 또한 빠져서는 안 될 수작이다. < Back 하이파이 러쉬: 2023년의 깜짝 락스타를 놓치지 마시라 15 GG Vol. 23. 12. 10. 2023년은 풍년이었다. 기라성 같은 게임이 대단히 많았기에 게임 업계 종사자들은 으레 올해를 풍년이라고 부르곤 했다. 올해는 한국에서도 과 <데이브 더 다이버>가 '쌍백만'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새로운 희망을 보여줬다. 대한민국 게임대상을 두고 두 게임이 경쟁했던 일화는 훗날에도 오래 기억될 만하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올해의 게임을 고르기 어렵다'라는 이야기가 나왔던 2023년. 리듬+액션 게임 <하이파이 러쉬>(Hi-Fi Rush) 또한 빠져서는 안 될 수작이다. <하이파이 러쉬>는 '디 이블 위딘' 시리즈와 <고스트와이어: 도쿄> 등을 내놓으며 호러 게임의 일가를 이룬 탱고 게임웍스가 만들고, 모회사 베데스다 소프트웍스가 유통한 게임이다. 그간 개발사의 이력과는 결을 달리 하는, 보여주지 않은 플랫포머가 가미된 3D 리듬 액션 게임이다. 2023년 1월 26일에 벼락 같이 출시되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이 게임을 수식하는 데 있어 가장 먼저 따라오는 말은 바로 '벼락같은 출시'이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1월 26일(한국 시간) '엑스박스 & 베데스다 개발자 다이렉트'라는 이름의 온라인 쇼케이스를 열었다. 엑스박스과 제니맥스가 한 몸이 되면서 덩치가 커진 이 쇼케이스는 이른바 '엑스박스' 진영의 퍼스트파티 게임들에 대한 정보가 발표되는 자리이다. 이곳에서 탱고 게임웍스는 "게임패스에서 바로 지금 <하이파이 러쉬>를 플레이할 수 있다"는 도발적인 홍보 전략을 날렸고, 실제로 발표와 함께 게임패스에는 <하이파이 러쉬>가 추가되었다. MS, 베데스다는 물론 개발사까지 이 게임의 정체에 대해서 철저히 감춰왔기 때문에 그 전까지 <하이파이 러쉬>의 존재를 알던 외부인은 아무도 없었다. 코로나19의 여파로 현장 행사의 중량감이 줄어들며서 많은 개발사들이 온라인 쇼케이스나 론칭 트레일러, 온라인 유통망 페이지의 '찜하기' 등으로 자사 타이틀을 홍보해왔지만, 탱고 게임웍스는 '궁금하면 지금 가서 해보시라'는 놀라운 방법을 선택했다. 훗날 독일의 데브컴(devcom)과 한국의 지스타 컨퍼런스(GCON) 등에서 존 요하네스 디렉터가 술회한 바에 따르면, <하이파이 러쉬>는 회사에서도 소수 인원이 조용히 만들던 작은 규모의 프로젝트로 디렉터 자신이 기획, 스토리, 스크립트, 보스 디자인 등을 모두 책임지는 대신 프로젝트의 전권을 가져가는 형태로 개발되었다. 게임을 만들던 요하네스 디렉터와 개발진은 '이만하면 바로 선보여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라는 판단을 내리고, 그 어떠한 사전 마케팅 없이 게임을 '벼락같이' 출시한 것이다. * 독일 쾰른에서 열린 데브컴에서 게임의 개발기를 소개한 존 요하나스 <하이파이 러쉬> 디렉터 (출처: 디스이즈게임) '게임을 지금 바로 해보라'는 도발적인 마케팅은 리스폰 엔터테인먼트와 EA가 2019년 <에이펙스 레전드>를 내놓을 때도 펼쳐진 바 있다. 리스폰은 "전통적인 '타이탄폴' 후속작을 기대할 거라 예상했기에 게임을 비밀리에 출시하여 발표하자마자 바로 플레이할 수 있게 했다"며 "게임에 대한 예상 없이 직접 플레이해 보면 좋아하실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기습 출시의 배경을 밝혔다. 탱고 게임웍스도 이러한 종류의 "자신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그러나 속된 말로 게임이 '노잼'이었다면, <에이펙스 레전드>도 <하이파이 러쉬>도 별 다른 임팩트를 주지 못하고 사라졌을 터. 2019년의 <에이펙스 레전드>가 전에 없던 진보한 핑 시스템과 역할 구분을 통한 협동을 강조한 F2P 게임이었다면(그때 <배틀그라운드>는 유료였기 때문에 비교 우위가 있었다), 2023년의 <하이파이 러쉬>는 다음과 같은 강점이 있었기에 300만 명의 게이머를 매료시켰다. * 지난 8월 16일, 탱고 게임웍스는 <하이파이 러쉬>의 플레이어가 300만 명을 돌파했다고 소개했다. ⓐ 리듬게임과 스타일리시 액션의 조화: 게이머와 미디어가 이 게임을 높이 사는 가장 주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하이파이 러쉬>의 게임플레이는 매우 고도화되었다. '데빌 메이 크라이' 시리즈가 떠오르는 빠르고 화려한 스타일리시 액션을 음악의 비트에 정렬하면서 음악에 타이밍을 맞추는 액션을 선보였다. 리듬과 액션의 조화는 오랜 아이디어다. <젯 셋 라디오>(세가, 2000)에도 플레이어 캐릭터가 음악의 비트에 맞추어 도시를 달리며 그래피티를 그리는 모습이 나온다. 더 넓게는 모든 액션 게임은 어느 정도 리듬성을 띠는데, 게이머들은 패턴을 리듬으로 인식해 몬스터의 공격에 응수하곤 한다. 이른바 '소울'(다크소울) 류에도 플레이어들이 보스 몬스터를 상대할 때 '읏따읏따' 같은 리듬을 만들어 외우며 플레이하곤 한다. <하이파이 러쉬>는 한 발 더 나아가 게임의 거의 모든 요소를 음악에 조화시켰다. 차이의 움직임은 물론 맵의 조명, 조력자 808, 몬스터의 움직임까지 박자에 맞춰서 움직인다. 거의 모든 액션 파트에서, 챕터마다 보스마다 변화하는 BGM에 따라서 강력한 시청각(컨트롤러를 쓰면 촉각까지) 경험을 누릴 수 있다. 잘 설계된 레벨 디자인에 맞춰서 약 공격, 강 공격, 회피, 패링 등이 학습되고 진행에 따라서 게임이 요구하는 난도, 즉 음악의 빠르기와 복잡도 또한 올라간다. * 회피와 패링을 섞어 써야 하는 보스 페이즈. 역시 리듬에 따라 흘러간다. * 전반적으로 박자를 맞추는 재미가 있어서 ‘스타일리쉬’의 재미가 배가된다. 요하네스 디렉터는 강연에서 싱글 플레이 게임임에도 발생하는 필연적인 입력 지연 등의 문제로 플레이어의 액션을 게임 단에서 보정하는 '리듬 싱크로 시스템'을 도입했다고 설명한 적 있다. 그를 위해 음악을 하나하나 세부적으로 뜯어서 분석하고, 거기에 몬스터와 오브젝트를 모두 조율한 가운데, 플레이어의 움직임에 조금의 보정을 넣어주었다. 쾌도난마와 같은 직관적인 재미 속에는 잘 설계된 메커니즘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설령 리듬감이 좋지 않은 게이머라 하더라도 컨트롤러의 진동 반응이나 <크립토 오브 더 네크로댄서>에서 제공되는 것과 유사한 박자 노트의 도움을 받아 킥, 스네어, 심벌과 기타 연주를 즐길 수 있다. 심지어 리듬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도 클리어가 가능한 난이도가 있으니 박치라고 하더라도 도전할 가치가 충분하다. 게임에는 프로디지(The Prodigy)나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의 음악들이 수록됐다. 탱고 게임웍스가 만든 오리지널 BGM 또한 락에 대한 경의가 느껴지는 트랙들이 가득하다. 여담으로 필자는 아직도 <하이파이 러쉬>의 오피셜 사운드트랙을 즐겨 듣는다. https://youtu.be/f5H9S3JtBuo?si=JCfLG0StaSAF-8_w ⓑ 수준 높은 애니메이션 연출: <하이파이 러쉬>의 모든 리듬+액션은 미국 카툰 풍의 그래픽 위에서 작동한다. 개발진의 셀 셰이딩(Cel Shading) 결과물은 어떻게 했는지 궁금할 정도로 매끄럽고, 또 만화적이다. 색은 절제되지 않았지만 눈을 방해하지 않는다. 차이가 탐험하는 SF 월드 디자인 또한 탄성을 자아낸다. 보스를 처치할 때 나오는 '코믹스 장면'은 ‘내가 해결했어’ 같은 성취를 제공한다. 개인적인 평가를 조금 강하게 넣어 보자면, <하이파이 러쉬>의 컷씬을 그대로 잘라 붙이면 그대로 OTT에 실려도 될 정도이다. 필드에서 적을 찾을 때까지 플레이어는 맵 곳곳을 탐험하며 강화에 쓰일 아이템을 모으는데 이 파트 역시 즐길 거리로 꽉 차 있다. 역시 셀 셰이딩 처리가 된 로봇들이 돌아다니는 만화 같은 월드에서 주인공 차이는 레일을 타거나, 자석이 붙은 곳에 와이어를 발사하거나, 동료들을 소환해서 총을 쏘거나, 벽을 부수는 형태로 탐험을 이어 나간다. <하이파이 러쉬>는 3D 플랫포머 파트까지 촘촘하게 잘 구성됐다. * 만화적인 연출을 아낌 없이 넣었다 * 플랫포머 파트 역시 대단히 흥미롭다. * 눈이 번쩍 뜨이는 월드 연출. ⓒ 무난한 스토리라인과 유머 코드: 사실 <하이파이 러쉬>의 서사 구조가 대단히 독창적이지는 않다. 오른팔이 부러진 락스타 지망생 차이는 거대 기업 반델레이의 신체 개조 프로젝트에 참여해 로봇 팔을 얻고, 그 과정에서 우연히 뮤직 플레이어가 가슴에 장착된다. 이어 이들 기업이 세계를 지배하려는 악덕 기업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차이는 동료들과 함께 반델레이의 간부들을 무찌르거나 회유하면서 정의로 한 발짝씩 나아간다. 'SF 세계에서 거대 기업에 맞선다'라는 설정은 클리셰의 영역에 있을 정도이다. 그만큼 무난한 설정은 오히려 게임플레이에 잘 맞아떨어진다. 아울러 이러한 스토리라인은 앞서 설명한 셀 셰이딩 연출과 어우러지며 플레이어로 하여금 카툰네트워크의 만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뿐 아니라 여기에는 <하이파이 러쉬>까지 유머 코드 튀지 않게 어우러지는데, 차이는 스토리 내내 시종일관 기행을 벌이며 웃음을 자아낸다. '로봇과 대화를 시도'하거나 직접 대포알이 되어 적진의 심장에 날아가는 차이는 세상 천진난만하다가도 결말부에서는 '밴드 멤버'들과 함께 진정한 락스타로 거듭난다. 이 성장담은 훈훈한 맛이 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이나 <제노기어스>, <둠 이터널>의 패러디도 곳곳에 빛나고 있다. 귀여운 로봇 고양이는 어떤가? 차이의 조력자로 출연하는 고양이 808은 "엑스박스(진영)의 새로운 마스코트"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그전까지 엑스박스의 마스코트는 마스터 치프(헤일로)나 마커스 피닉스(기어스 오브 워)처럼 귀여움과는 거리가 먼 강력한 이미지의 전투 요원 아니었던가! * 이른바 ‘죠죠러’라면 잔조 파트가 분명 즐거울 터 (출처: Kakuchopurei 유튜브) * 그렇다. 리듬 게임은 너무 어렵다. 하지만 <하이파이 러쉬>는 타이밍을 잘 맞추지 못해도 노멀 엔딩이 가능하다. 정리하자면, 2023년 탱고 게임웍스와 베데스다, MS 엑스박스는 그 흔한 사전 마케팅이나 얼리 억세스 없이 유저와 평단의 찬사를 받는 리듬+액션 게임을 만들어 냈다. 훌륭한 카툰 랜더링과 유머는 덤이다. 아직도 <하이파이 러쉬>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했는가? 지금이라도 2023년의 깜짝 락스타를 놓치지 마시라. 유저들은 게임의 저렴한 가격 또한 <하이파이 러쉬>의 장점으로 꼽고 있다. 물론 엑스박스 게임패스 구독자라면 그냥 할 수 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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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약과 위계, 설계와 창출: 운영 시뮬레이션 게임은 어떻게 플레이어를 운영으로 유도하는가
운영 시뮬레이션 장르는 일견 무한한 자유 내지는 전능성을 보장하는 듯하면서도, 이걸 제약하는 방식으로 플레이어를 궁극적으로 세계의 설계와 창출이라는 거대한 목표로 유도할지 궁리하는 장르라 할 수 있다. < Back 제약과 위계, 설계와 창출: 운영 시뮬레이션 게임은 어떻게 플레이어를 운영으로 유도하는가 27 GG Vol. 25. 12. 10. 기본적으로 운영 시뮬레이션 게임은 시설의 설치와 건설, 관리를 중심으로 거시적인 운영과 통제를 이뤄가는 장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면, 개인 가게 운영 같은 예외적인 소재를 빼면 대다수 운영 시뮬레이션 게임은 전능성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게임을 출발한다는 점에 있다. 플레이어는 삼인칭 전지적 시점 아래 놓인 텅 빈 (또는 개발되지 않은) 공간에 건설 내지는 설치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 즉 운영 시뮬레이션 게임은 전지적 시점에서 전능성을 플레이어에게 부여하는 것으로, 게임의 전제를 성립한다. 이 시점의 주체를 설명하기 위해 게임은 종종 플레이어를 보통 지도자나 경영자로 칭하곤 한다. 하지만, 이 전능은 어느 정도 기만적이다. 운영 시뮬레이션 게임의 전지전능은 자유를 만끽하라고 부여하는 게 아니라, 설계와 창출이라는 과정과 목표를 달성하라고 부여하기 때문이다. 샌드박스 모드가 아닌 이상, 운영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일정한 서사와 목표를 부여한다. 그 다음 자본과 자원의 제약을 부여하고 게임이 다루는 ‘공간’을 효율적으로 설계해 운영하길 원한다. 이런 제약과 종속, 창출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운영 시뮬레이션 게임이 어떻게 무한한 자유에 목적과 형식을 부여해 난관을 설정하고 궁극적으로는 세계의 설계와 창출을 유도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숲과 나무, 두 시점 축 간의 제약과 쾌감 우선 운영 시뮬레이션의 시점을 짚어야 할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운영 시뮬레이션 게임은 일인칭 시점보다 삼인칭 시점으로 특정 공간 속 거대한 ‘흐름’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숲과 나무의 비유를 빌리자면, 나무를 상세히 배치해 숲으로 만들 능력을 요구하는 장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개별 나무를 보고 만질 수 있는 미시적인 시점이나 순간은 제한되는 데다 게임 디자인의 핵심에서도 벗어나 있다. 간단히 말해 이용객 (이 글에서 이용객은 운영 시뮬레이션 게임 전반에 등장하는 손님이나 거주민을 총칭한다)을 통해 일인칭 시점으로 자신이 설계한 공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체험’하는 건 가능하지만 - <심시티>나 <시티즈> 시리즈 같은 게임처럼 일인칭으로 체감하기엔 복잡한 소재적 한계로 (예를 들어 무수한 데이터를 연산 처리해야 하는 도시 운영) 일인칭 시점이 제한되는 경우도 있긴 하다. - 세계를 설계, 나아가 운영하려면 시점의 주체가 보이지 않는, 전지전능한 삼인칭 조감 시점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렇기에 운영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일인칭 시점을 제공하는 이용객은 플레이어와 무관한 NPC이다. 다시 말해 플레이어가 이용객 시점으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들은 플레이어의 주체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용객은 게임 내 인공지능이 조합한 취향과 생각, 욕구 수치에 맞춰 플레이어가 설계한 공간에 속해, 거대한 흐름의 일부로서 움직일 뿐이다. 장르 자체가 인간으로서는 게임 진행을 할 수 없고, 신이 되길 요구한다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대신 운영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이용객은 주체보다는, 객체이자 게임 내 평가 체계의 일부에 가깝다. NPC 인공지능인 ‘이용객’은 플레이어가 설계한 공간과 시설을 이용하고, 감상을 남긴다. 이 감상은 곧 평가 데이터로서 치환된 후 누적되어 총체적인 세계에 대한 평갓값으로 제시된다. 그렇기에 플레이어는 이 이용객이 어떻게 행동할지 전혀 개입할 수 없지만, 그들이 남기는 감상과 이런 감상이 뭉쳐 만들어지는 빅 데이터 표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신 운영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는 이용객을 위시해‘빙의’하듯이 시선을 빌어 자신이 설계해 운영하는 공간 속 흐름에 합류해 감상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감상하는 공간은 결국 플레이어 자신이 만든 세계이기 때문에 이런 감상과 미적인 만족감엔 궁극적으로는 자기애적인 성향도 띄게 된다. 관련 팬 커뮤니티에서 이뤄지는 소통 역시 이런 두 시선 축의 교차에 기반하고 있다. 자신이 만들어낸 공간의 아름다움을 (물론 이 아름다움엔 단순히 숭고미 이외에도, ‘홀로코스트 타이쿤’으로 대표되는 골계미 역시 포함된다) 삼인칭 조감 시점과 일인칭 관찰자 시점을 오가는 다양한 카메라-눈으로 영상과 스크린숏으로 포착한 후, 공유하는 방식으로 다른 팬들과 소통한다. 인정 욕구와 승인, 성취감이 거시와 미시 두 시선 축을 오가면서 이뤄진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운영 시뮬레이션 게임은 전지전능하며 거시적인 삼인칭 조감 시점을 기본으로 플레이어가 세계를 구축하도록 한 뒤, 세계가 작동하는 모습을 삼인칭 조감 시점과 동시에 수동적이며 미시적인 일인칭 이용객 시점으로도 볼 수 있게 한다. 이런 교차 속에서 게임은 빅 데이터로서 축적된 이용객의 감상/민원 표본을 수치로 치환해 플레이어가 운영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평가로 제시한다. 플레이어는 이 수치를 확인하면서 향후 운영을 어떻게 할지 판단하고 선택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운영 시뮬레이션 게임은 이 삼인칭과 일인칭 시점을 교차할 수 있도록 하면서 거시적 감각과 미시적 감각을 동시에 제공해, 플레이어가 설계한 세계를 체험케 하면서 (어느 정도 자기애적 성향도 있는) 미적 쾌감을 누리도록 한다. 시설의 위계와 조합 운영 시뮬레이션 게임이 가장 먼저 플레이어에게 설치하길 요구하는 건 바로 도로나 철도 같은 ‘접근 수단’이다. ‘심시티’나 ‘타이쿤’ 류 게임을 플레이하면 알 수 있지만, ‘접근 수단’을 건설하지 않으면 플레이어가 운영하는 공간은 작동하지 않는다. 이 접근성은 시설과 손님 간의 관계일 수도 있으며 (놀이공원 운영 시뮬레이션), 도시 내 다양한 개발 구역과 시설일 수도 있으며 (도시 운영 시뮬레이션), 도시 내부 및 도시/국가 간 교통 체계일 수도 있다. (교통 운영 시뮬레이션) 이렇게 시설에 접근할 수단이 마련되고 나면, 운영 시뮬레이션 게임은 시설 설계와 관리 단계로 넘어간다. 이 단계에서 게임은 설치할 수 있는 시설에 위계질서를 부여한다. 놀이공원 운영 시뮬레이션 게임은 이런 장르 내 시설 간 위계질서가 상징적이고 명징하게 드러내는 하위 장르일 것이다. 이 하위 장르를 대표하는 놀이기구로는 회전목마와 롤러코스터가 있다. 전자는 저자극 놀이기구를 대표하며 후자는 고자극 놀이기구로 대표한다. 하지만 이런 대표성과 별개로 게임 내 위계 차는 명확하다. 애당초 이 장르는 아예 ‘롤러코스터’를 게임 제목에 넣는 경향도 있기에 (<‘롤러코스터’ 타이쿤>, <플래닛 ‘코스터’>) 롤러코스터는 게임의 간판격이며 동시에 상당한 숙련 난이도를 요구하며 플레이어를 유혹한다. 반대로 회전목마는 롤러코스터보다 설치 비용도 저렴하고 간편하지만, 동시에 종합적인 수치 역시 롤러코스터보다 낮다. 장르 팬들 역시 아무리 회전목마를 선호하더라도 그것을 게임의 핵심으로까지 여기지 않는다. 설치 난도 면에서도 둘은 명백히 차이가 있다. 회전목마는 설치한 후 접근 수단을 깔아두는 것만으로도, 작동하며 즐거움 수치 역시 대체로 낮은 변화폭 속에서 균일하게 유지된다. 하지만 롤러코스터는 트랙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즐거움 수치가 천차만별로 변하기에 훨씬 더 공을 들이고 테스트로 확인해봐야 한다. 그렇기에 회전목마, 나아가 낮은 수치의 저자극 놀이기구들은 일종의 상징물이자 시나리오 초반 기반을 다지는 역할을 하지만, 가동 이후 운영에서는 유지 보수 이외엔 비중이 줄어들며, 플레이어 역시 롤러코스터 설계나 총체적인 운영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즉 운영 시뮬레이션 장르 내에서 ‘시설’은 게임으로서 현실의 시설 특성을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수치화해 위계를 부여하고 그 위계에 맞춰 설치하고 운영하길 요구한다. 물론 이 위계질서가 일방적인 상하 관계로만 단정 짓기엔 어렵다. 이런 일방적인 상하 관계를 지양하고 특색의 강조, 상성과 조화로 상승 효과를 내려는 시도 역시 장르의 중요한 어법이기 때문이다. 다시 놀이공원 운영 시뮬레이션 장르로 돌아가 보자. 롤러코스터는 훨씬 설치하는 과정이 복잡하고 놀이공원의 꽃으로 고수익을 보장하긴 하지만, 모든 이용객이 롤러코스터를 좋아한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심지어 롤러코스터 속에서도 다양한 종류가 있으며, 격렬도나 흥미 수치를 무조건 높게 나오게 설계한다고 해서 높은 인기로 직결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회전목마로 대표되는 저자극 놀이기구도 시간이 지날수록 비중이 줄어들긴 하지만, 수요가 아예 사라지진 않는다. 이런 복잡한 위계질서를 잘 보여주는 놀이기구가 있다면 바로 운송 시설이 있다. 운송 시설은 여러모로 롤러코스터와 대조되는 놀이기구다. 기본적으로 운송 시설/기구는 열차나 모노레일 등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롤러코스터처럼 ‘트랙’ 기반으로 설계된다. 하지만 총체적인 즐거움 수치 면에서는 롤러코스터보다는 확실히 밑에 있으며, 이 시설만으로는 정상적인 놀이공원 운영을 할 수 없다. 그 점에서 운송 시설/기구는 롤러코스터처럼 트랙 기반 놀이기구임에도 명백히 회전목마처럼 저자극 놀이기구에 속한다. 그렇다고 운송 시설을 잉여적이고 쓸모없는 놀이기구라 판단하기엔 성급하다. 분명한 역할이 부여되어 있기 떄문이다. 운송 기구는 탑승하는 이용객의 에너지 감소 수치를 절감하거나 멀리 떨어진 다른 구역으로 수송할 수 있다는 점에서 롤러코스터가 할 수 없는 걸 수행할 수 있다. 어떤 지점에서는 놀이기구이면서도 접근 수단에 가까운 양태를 띄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운송 시설의 이런 복합적인 면모는 상성 등 복잡한 개별 요소들이 얽혀 있으며, 어떤 소수 의견과 즐거움 이외의 수치들이 운영 시뮬레이션 게임의 변수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이점이 아닌 약점이나 제약으로 이런 위계질서에 복잡함을 부여하기도 한다. 이런 약점 위주로 변수를 구성하는 디자인은 놀이공원 운영보다는 도시 운영 시뮬레이션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디자인이다. 그렇기에 게임 속 시설들 역시, 이 시설이 과연 지금 플레이어가 운영하는 도시와 걸맞은지를 판단하도록 요구하는 약점/제약이 많다. 혐오 시설 및 환경 판정에 큰 영향을 미치는 오염 등급이라던가 특정 조건 (강가에만 설치할 수 있다던가)을 만족해야 설치할 수 있는 시설들이 대표적이다. 전반적으로 도시 운영 시뮬레이션 게임은 놀이공원 시뮬레이션 게임보다도 세계=도시 규모의 변화에 따라, 시설 활용도 역시 극적으로 변화하는 경향이 있어, 시설 확충이나 교체를 요구하는 경향이 짙다. 여기다 환경, 복지, 세금, 인프라 등 이용객 행복도 수치에 관여하는 변수가 많기에, 이 변수들 역시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규모의 비례에 따라 시뮬레이션 난이도가 올라가는 장르적 경향이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대신 도시 운영 시뮬레이션에서 시설 설치는 큼직한 인프라 위주로 이뤄지는 경향이 크다. 예를 들어 실제 도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주거, 상업, 산업, 사무 같은 경우 접근 수단 (대표적으로 도로)을 깐 후 밀도별 구역 타일으로 배치하면 자동적으로 개발된다. 이는 <트랜스포트 타이쿤>이나 같은 교통 운영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지만 (특히 후자 같은 경우 일본만의 특수성 때문에 하위 장르 간의 혼종적인 경향성도 띈다.), 좀 더 다루는 범위가 폭넓은 도시 운영 시뮬레이션에서 잘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도시 운영 시뮬레이션 같은 경우, 지형과 기후 같은 플레이어가 통제할 수 없는 상수나 돌발 별수가 자주 발생하기에 플레이어는 게임을 진행하면서 다층적으로 판단하고 보완할 능력이 필요하다. 즉 운영 시뮬레이션 장르에서 시설 간 관계는 일정한 위계가 있되 어떤 스펙트럼에 따라 위계와 활용 방식이 정해지며, 이 스펙트럼의 기준이 어떻게 구성되는가에 따라 전체적인 게임 방향성이 결정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운영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는 스펙트럼의 폭이 얼마나 넓으냐부터 시작해 스펙트럼 내 요소들이 어떤 위계를 띄느냐, 요소들의 조합이 어떤 효과를 내느냐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무한한(듯한) 자유를 길들여 경제 논리에 종속시키기 운영 시뮬레이션 장르는 일견 무한한 자유 내지는 전능성을 보장하는 듯하면서도, 이걸 제약하는 방식으로 플레이어를 궁극적으로 세계의 설계와 창출이라는 거대한 목표로 유도할지 궁리하는 장르라 할 수 있다. 이 제약은 시점의 제약부터 시작해 (‘만들어낸 세계를 미적으로 만끽하고 싶으면 전지전능한 삼인칭 조감 시점으로 돌아가서 설계해야만 한다’), 시설의 상성과 조합까지 (‘시설은 스펙트럼에 기반한 일정한 위계와 상성 관계가 있으며, 접근 수단과 함께 효율적으로 설계 및 베치해 이용객을 만족시켜야 한다.’) 곳곳에 퍼져있다. 물론 샌드박스처럼 제약 일부를 풀어주는 모드도 제공하지만, 그럼에도 큰 목표는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기에 샌드박스 모드를 플레이할 때도 플레이어는 제약에 맞춰서 세계를 가꿔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운영 시뮬레이션 게임은 특정한 세계 속 요소들이 어떻게 맞물려 들어가는지를 플레이어가 파악하고 따라주길 요청한다. 플레이어가 이런 요소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비효율적으로 운영할 경우, 게임은 플레이어가 설계와 창출에 실패했다고 판정한다. 반대로 제대로 파악해 창출이라는 목표에 도달했을 때 게임은 (자기애적 성향도 일부 포함한) 미적인 쾌감을 안기는 방식으로 보상을 준다. 운영 시뮬레이션 게임은 그 점에서 직접적인 자본 활용 이 외에도 자유를 제약하면서 어떤 창출 체계에 플레이어가 포섭되어 설계하길 요청하고, 상응하는 대가를 보상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경제의 논리와 미학에 충실한 장르라 할 수 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비평가) 이이환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이론과 전문사 졸업 후 영화•게임 비평 기고 활동중. 어드벤처 게임 좋아함. (antistar23@gmail.com )
- Inside BIC 2021- 감염병 시대의 인디게임페스티벌 참관기
부산행 전날, 병원에 들러 코로나 PCR 진단검사를 받았다. 부산인디커넥트 페스티벌(BIC Festival)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입구에서 PCR 음성 확인증(혹은 백신 접종 완료증)을 제시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작년 BIC-2020은 전 세계적인 코로나감염병 상황으로 인해 온라인으로만 진행되었지만, 올해는 철저한 방역 절차 아래 오프라인에서도 행사가 개최되었다. 이렇듯,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는 지금 이 시대의 대표적인 정서를 하나 꼽아보자면 ‘불안’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감염자가 내 주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혹은 모르는 사이에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다닐 수 있다는 불안감이 어딜 가든 짙게 깔려 있다. < Back Inside BIC 2021- 감염병 시대의 인디게임페스티벌 참관기 02 GG Vol. 21. 8. 10. 부산행 전날, 병원에 들러 코로나 PCR 진단검사를 받았다. 부산인디커넥트 페스티벌(BIC Festival)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입구에서 PCR 음성 확인증(혹은 백신 접종 완료증)을 제시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작년 BIC-2020은 전 세계적인 코로나감염병 상황으로 인해 온라인으로만 진행되었지만, 올해는 철저한 방역 절차 아래 오프라인에서도 행사가 개최되었다. 이렇듯,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는 지금 이 시대의 대표적인 정서를 하나 꼽아보자면 ‘불안’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감염자가 내 주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혹은 모르는 사이에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다닐 수 있다는 불안감이 어딜 가든 짙게 깔려 있다. 이런 혼란스러운 시대에 게임은, 그 중에서도 인디 게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떠안은 채 9월 9일 부산으로 향했다. 서면 e스포츠 경기장에 도착해 PCR 확인 스티커를 받고, 온도체크와 QR 체크인을 완료한 후, 전시장의 게임 부스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나에게는 이 모든 과정이 올해 BIC-2021 행사의 일부로 기억되었다. BIC 페스티벌은 전 세계 40여개국에서 참여하는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글로벌 인디게임 축제다. 2015년에 처음 개최된 이후, BIC 참가작들은 창의적인 게임 메커니즘을 시도 하거나 더 이상 시장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요소를 과감하게 도입하면서 게임의 표현양식을 확장시켜 왔다. 2010년대 후반부터는 상업적인 요소를 추구하는 참가작도 많이 늘었지만, 여전히 다양한 실험적인 게임들이 선보여지는 자리다. 안전한 성공의 공식만을 답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디 게임은 불안을 기꺼이 감내하는 사람들의 게임이기도 하다. 나아가 불안은 게임의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한 필연적인 요소다. 게임 연구자 예스퍼 율(Jesper Juul)은 플레이어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 게임은 지루한 게임이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언제든지 실패할 수 있다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가지고 게임을 플레이한다. 성공 여부를 알 수 없다는 불안함을 즐거움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게임인 것이다. 물론 게임에서 우리는 실패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그러나 게임에서의 실패는 그다지 무겁지 않다. 많은 경우, 사람은 게임에서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금방 털어낼 수 있다. (당신이 가챠 게임에 엄청난 액수를 낭비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 점에서 게임은 실패와 불안에 대한 면역을 길러주는 백신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이 글에서는 이번 BIC-2021의 참가작 들 중 일부를 현재의 코로나 상황과 연관 속에서 리뷰해보고자 한다. 전세계적인 감염병 유행이라는 초유의 상황 속에 이번 BIC-2021 참가작들을 맥락화해서 기록해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글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게임 페스티벌의 특성상 완성된 게임이 아닌 데모버전의 게임들을 짧은 시간동안 플레이 해 보았다는 점을 미리 밝힌다. 〈건택틱스〉 -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의 선택을 과거에는 사람이었던 존재가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인간성을 상실하고 다른 사람을 공격한다. 공격받은 사람은 또 다시 감염자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한다. 좀비 감염병이 창궐한 상황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 아군과 적군이 뚜렷하게 나뉘지 않는다. 누구나 좀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포 더 던〉, 〈배틀LIVE〉, 〈페이티드 얼라이브〉, 등, 감염에 대한 공포를 형상화하는 좀비가 등장하는 게임을 올해 참가작 중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귀여운 캐릭터 디자인의 〈건택틱스〉가 눈길을 끌었다. 3*3의 사각형 안에서 캐릭터 카드를 이동시키며 좀비와 싸우거나 피하거나를 매 순간 선택해야 하는 좀비 서바이벌 카드 게임이다. 제한된 칸 안에서만 이동해야하기 때문에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전략적인 사고가 중요하다. 사실 이 게임에서 ‘좀비’는 끝없이 몰려오는 적을 상징할 뿐, 아무리 많은 좀비를 처치하더라도 좀비 아포칼립스 상황이 해결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좀비를 없애면 새로운 좀비 카드가 생산되어 필드에 나타나고, 다음 스테이지를 해금하면 더 강력한 좀비들이 나타난다. 게임 속 상황은 일견 절망적으로 보인다. 몇 달이면 코로나가 없었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믿었지만 1년 넘게 확진자 수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지금 우리의 상황 같기도 하다. 하지만 〈건택틱스〉를 플레이하다보면 불안과 긴장 속에서도 최선의 선택을 하고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스테이지에서 패배하더라도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 필드에서 주은 코인으로 캐릭터의 능력을 향상시켜 더 나은 조건으로 다시 도전할 수 있다. 어쩔 때는 좀비에게 포위당해 맨몸으로 싸워야 하는 일도 생기지만, 그런 불안함 또한 이 게임을 스릴 있는 것으로 만드는 즐거움 중 하나다. * 〈건택틱스〉 플레이 화면. 〈디바이스0101〉 - 고립의 공포 낯선 방에서 눈을 뜬다. 모든 문은 잠겨있다. 플레이어는 숨겨진 아이템을 찾고 퍼즐을 풀어서 방을 탈출해야 한다. 복고풍 도트 그래픽과 퍼즐요소가 가미된 미스터리 어드벤처 게임이다. RPG메이커 제작툴을 이용해 만들어진 〈디바이스0101〉은 과거에 유행하던 방 탈출 게임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주인공이 기억을 잃은 이유, 다른 가족들의 행방,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 등, 초반부 스토리가 흡입력이 있어 완성이 기대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한편, 외부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로 표상되는 위험이 존재하며 별장 내부에 고립되어 있는 게임 속 상황은, 오늘날 바이러스의 전파를 최소화하기 위해 집에 머무르는 요즘 우리의 모습과도 맞닿아있는 것도 같다. * 〈디바이스0101〉 플레이 화면. 〈셔터냥〉, 너와 나를 이어주는 카메라 〈셔터냥〉은 길을 잃은 고양이가 카메라를 이용해 소녀에게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따뜻한 분위기의 플랫포머 게임이다. 마우스 왼쪽 클릭을 하면 고양이가 머리에 쓴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오른쪽 클릭을 눌러 찍은 사진을 맵에 배치할 수 있다. 다양한 오브젝트들을 복제해 그 위를 점프하고 이동하는, 제작자들이 ‘카메라 액션’이라고 이름 붙인 창의적인 게임 메커니즘이 돋보인다. 마찬가지로 카메라가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는 게임으로 이 있다. 플레이어는 액션 영화를 촬영하는 배우이자 카메라가 되어, 건물들 사이를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배우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야 한다. 혼자 플레이할 때는 왼손 키보드로 배우를 이동하는 동시에 오른손 마우스로는 카메라를 조종하고, 두 사람이 플레이하는 경우에는 각각 키보드-배우와 마우스-카메라를 담당해 플레이하면 된다. 카메라 화면 밖으로 배우의 모습이 완전히 벗어나면 게임 오버다. 왼손과 오른손의 조화, 배우를 조종하는 사람과 카메라를 조종하는 사람의 협동이 요구되는, 창의적이면서도 컨트롤 난이도가 있는 게임이다. 두 게임에서 게임 화면 속 ‘카메라’ 화면이 등장한다는 점이 인상 깊다. 모니터 속에 또 다른 화면이라는 점에서 두 게임 모두 메타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으며, 그것이 독특한 게임 컨트롤 메커니즘과도 연관되어 있어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이 때 각각의 카메라는 두 존재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셔터냥〉에서는 소녀와 고양이가 만날 수 있도록 매개해주는 역할을, 에서는 카메라와 배우의 협동을 이끌어낸다. 교실문이 잠기고, 많은 기업들은 비대면 출근을 시행하는 비대면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영상 통화나 화상 채팅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을 유지하고 있다. 〈셔터냥〉과 은 이 같은 매개된 연결감각이 반영된 게임들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셔터냥〉 플레이 화면. * 〈Ready Action〉 플레이 화면. 〈더웨이크〉 -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혼수상태에 빠진 한 남자가 일기장을 남겼다. 일기장은 남자의 거짓말을 암호로 바꾸어 기록해주었다. 〈레플리카〉와 〈리갈던전〉에 이어 ‘죄책감 3부작’을 마무리하는 개발자 소미(Somi)의 신작 〈더웨이크〉이다. 플레이어는 일기장의 암호를 해독해 나가며 남자의 과거 기억들을 따라가게 된다. 일기장의 주인인 남자는 어린 시절 형제와 어머니를 버리고 떠난 아버지를 혐오하면서도 연민하며, 자신이 아버지와 같은 전철을 밟을까봐 두려워하기도 한다. 이런 모순된 감정을 남자는 “거짓”되었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어쩌면 내 삶은, 이 한 문장이 전부였구나, 싶다. ‘내가 하는 말은 거짓말이다.’“ 게임은 언뜻 한 남자의 개인적인 일생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동시에 ‘기록’의 문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기도 하다. 진실은 때로는 모순되며 논리적이지도 않다. 사건은 생략되고, 누락되거나, 혹은 강조되면서 여러 방식으로 비춰질 수 있다. 누락되어서 읽히지 않았던 암호가 해독된 후, 일기는 조금 더 복합적인 진실을 보여준다. 먼 훗날 우리는 코로나19 판데믹을 어떻게 기록하고 기억하게 될까? 배달 플랫폼, 게임, 메타버스 산업의 성장을 촉진했지만, 동시에 청소년들의 학업 성취도를 낮추고 소중한 학창 시절 추억을 쌓을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렸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성공적인 방역 관리 체계를 보여주었지만, 사람들이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 주거 격차가 문제로 떠올랐다. 이런 2021년을 우리는 나중에 어떻게 떠올리게 될까?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김지윤 연세대학교에서 언론홍보영상학과 인류학을 공부하고,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를 전공했다. 부족한 실력으로 게임을 하다가 게임의 신체적 퍼포먼스에 관심을 갖게 되어 게임 연구를 시작했다. 여성 게이머의 게임 플레이 경험을 분석한 석사학위 논문을 써서 2020년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학회 우수 학위논문상을 받았다. 현재 미국 시카고대학 영화·미디어학과 (Cinema and Media Studies) 박사 과정에서 게임문화를 전공하고 있다.
- 방치형게임, 누가 어떤 마음으로 운영할까? 〈어비스리움〉운영진 인터뷰
스마트폰이 상용화되면서 일상의 많은 것이 컴팩트해졌다. 손안의 기기는 지갑이 되기도 하고 영화를 찍는 촬영 장비가 되기도 한다. 게임 또한 스마트폰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다양한 갈래를 보이고 있는데, 방치형 게임이 그중 하나다. ‘지금부터 당신의 수족관이 시작됩니다.’라는 말과 함께 시작되는 〈어비스리움〉은 외로운 산호석이 친구를 찾아 힐링한다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아무것도 없던 산호석 주변에 각종 물고기와 산호가 늘어나는 모습은 한 사람의 사회적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느낌마저 든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유저가 힘들여 움직이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 Back 방치형게임, 누가 어떤 마음으로 운영할까? 〈어비스리움〉운영진 인터뷰 03 GG Vol. 21. 12. 10. 스마트폰이 상용화되면서 일상의 많은 것이 컴팩트해졌다. 손안의 기기는 지갑이 되기도 하고 영화를 찍는 촬영 장비가 되기도 한다. 게임 또한 스마트폰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다양한 갈래를 보이고 있는데, 방치형 게임이 그중 하나다. ‘지금부터 당신의 수족관이 시작됩니다.’라는 말과 함께 시작되는 〈어비스리움〉은 외로운 산호석이 친구를 찾아 힐링한다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아무것도 없던 산호석 주변에 각종 물고기와 산호가 늘어나는 모습은 한 사람의 사회적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느낌마저 든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유저가 힘들여 움직이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방치형 힐링 게임’이라는 타이틀로 세상에 나온 〈어비스리움〉. 〈어비스리움〉이 외로운 산호석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플레로게임즈의 최덕수 팀장, 장연정 사원과 이야기해보았다. Q. 〈어비스리움〉을 모르는 분들을 위해 간략하게나마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어비스리움〉은 올해 7월에 5주년을 맞은 게임입니다. 현재 시장에서 ‘힐링게임’이라는 키워드로 불리고 있고요. 성장 압박을 심하게 받지 않고 원할 때 켜두기만 해도 힐링 되는 형태의 게임이라고 많이들 얘기합니다. 서비스하는 입장에서는 힐링을 강요하기보다는 예쁘고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게임이 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Q. ‘방치형 힐링 게임’이라는 게 나름 선구적인 포지션입니다. 회사나 직원의 관점에서 장기적으로 발전 가능하다는 확신이 있었는지요. A. 네. 회사 차원에서는 〈어비스리움〉을 하나의 IP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핀오프 작품도 이미 두 개 낸 상태고요. 앞으로도 내놓을 수 있을 거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관을 확장해나갈 가능성을 계속해서 살피는 중이에요. Q. 콘텐츠로써의 게임은 이용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가 가장 중요할 것 같습니다. 5년 동안 고객들에게서 받은 피드백 중 기억에 남는 게 있을까요? A. SNS에 스크린샷 찍은 걸 포스팅해 주는 유저들이 종종 있어요. 하나같이 저희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예뻐서 항상 감탄하면서 보고 있습니다. 〈어비스리움〉 물고기 도감을 운영하는 유저들도 있는데 그 포스팅도 즐겁게 보고 있고요. 또, 대부분의 게임사가 그렇지만 저희는 매달 업데이트를 하거든요. 이 업데이트를 진행했을 때 꼭 예상을 뛰어넘는 유저들이 있어요. 한 달 치 콘텐츠를 준비했는데 세 시간 만에 완료한다던가.(웃음) 피드백이라고 말하기 어려울진 모르겠지만 유저들의 이런 플레이를 기쁘게 지켜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Q. 이번 호의 테마는 ‘보는 게임’입니다. 그 ‘보는 게임’ 안에서도 ‘방치형 게임’을 찾아오게 됐는데요, 〈어비스리움〉을 운영하시는 입장에서 ‘방치형 게임’은 뭐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A. 사실 〈어비스리움〉을 ‘유저들이 방치하도록 만들어야지’ 하고 운영하는 건 아닙니다. 물론 보는 즐거움을 위해 위젯처럼 시계가 나온다거나 하는 식으로 더 보기 좋게 만드는 건 있는데요, 따지고 보면 방치형 게임 전반의 플레이 스타일인 것 같아요. 우선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하나의 콘텐츠를 길게 늘여놓은 걸 ‘방치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장 폭 자체가 크진 않은데 숫자를 길게 늘여놓고 일종의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거죠. 그게 방치 게임들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게임성이라고 봅니다. 별개로 〈어비스리움〉은 단순 방치에서 그치지 않는 형태의 콘텐츠들도 추가하는 중이에요. 그래서 방치형 게임 그 자체를 즐기는 유저들과 업데이트하고 세 시간 이내에 완수하는 유저들 모두에게 선택지를 줄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Q. ‘방치형 게임’이라는 단어를 사람마다 다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 같긴 합니다. 사실 ‘방치형 게임’은 소위 ‘진정한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로부터 공격받는 포지션이기도 하죠. ‘방치형 게임은 진정한 게임이 아니다’라는 의견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A. 그들이 말하는 ‘진정한 게임’이라는 건 대부분 콘솔게임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저 역시 그런 입장이거든요. 모순적이죠.(웃음) 이건 제 개인적인 경험인데, 굉장히 조작감이 많은 게임이 있었어요. 그런데 리텐션의 측면이라든가 매출 지표적인 측면에서 성적이 좋지는 않았어요. 고정 유저층이 있긴 했지만, 지금 모바일 게임에 요구되는 목소리는 그런 게 아닌 것 같았습니다. 조작하는 맛이 있는 게임을 바라는 유저와 아닌 걸 선호하는 유저가 양립하는 건 맞지만요. Q. 그럼 ‘진정한 게임’이라는 건 비판적인 목소리 크기 차원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네요. 그렇잖아도 저는 그게 항상 궁금했거든요. 왜 아직도 커뮤니티는 콘솔 쪽만 활발하고 모바일 게임 쪽은 아닌가. 혹시 이거에 관해 의견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A. 제가 게임 서비스하면서 그런 목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게임 조작하는 건 재밌는데 너무 피곤해.’ 그래서 원래 의도는 아니었지만, 오토 기능이나 한 번에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계속 넣을 수밖에 없었어요. 커뮤니티에서 의견이 잘 나오지 않는 건 그런 유저 경향도 다소 반영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Q. 그럼 질문을 확장해보죠. 예쁜 물고기들이 오가는 수족관을 디지털 액자처럼 보여줄 수 있는 뭔가가 있다고 상상해볼게요. 그러면 그것과 〈어비스리움〉은 어떤 차이를 갖고 있을까요? A. 내 폰 안에 들어있는 내 어비스리움은 내 고유의 아이디가 박혀있는 뭔가로 인지되는 것 같다고 생각해요. 유튜브 같은 데서 캡처된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과 내 수조 안에 무언가를 넣는 건 또 다른 측면이거든요. 그래서 디지털 액자보다는 어비스리움 쪽이 ‘내 소유’라는 인식이 강하지 않나 싶어요. ‘이 게임 안에 들어가 있는 이 수조는 온전한 내 거다.’라는 전제가 깔리는 거죠. Q. 지금 말씀에서 어떤 힌트를 얻은 느낌이네요. ‘방치형’이라는 장르 안에는 ‘소유’라는 개념이 대단히 크게 들어가는 거 같습니다. A. 맞습니다. 그리고 방치형 게임이 예전에는 ‘스트레스 없는 빠른 성장’으로 많이 나왔는데 요즘 나오는 것들을 보면 주로 달고 있는 부제가 ‘키우기’예요. 그런 부분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걸 키운다.’라는 열망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남들이 보면 다 똑같은 캐릭터고 성장하는 폭도 같지만 다른 사람이 만렙을 찍은 것과 내가 찍은 건 다르니까요. Q. 말씀해주시는 중간에 ‘키우기’라는 키워드가 나왔어요. 어떻게 보면 게임 역사 속에서 ‘키우기’라는 건 전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무언가였죠. 그런데 ‘전투가 빠진 성장’이라고 하면 그게 무슨 재미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A. 전투를 통해 얻게 되는 건 결국 경험치라는 수치잖아요? 그 수치로 캐릭터 레벨업을 시키고 다른 무언가를 계속 달성해나가는 거고요. 저희 게임 같은 경우에는 전투는 빠졌지만 산호석이라는 캐릭터를 성장시킵니다. 그리고 이 산호석이 성장하면 ‘생명력’을 계속 뱉어내는데, 이 생명력은 RPG로 비유하자면 경험치나 재화랑 마찬가지예요. 그런 맥락에서 생명력은 곧 전투의 결과물과 같으니, 그게 ‘보는 게임’ 나름의 재미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Q. ‘성장’이라는 것도 파고들면 어려운 개념이죠. 많은 사람이 빠른 성장을 원하지만 정말로 빠르게 성장하면 할 게 없어지는 상황이 초래되기도 하고요. ‘어디서 어디까지가 적절한 성장인가’가 늘 애매한 것 같습니다. 실제 운영하시는 입장에서는 성장 밸런스를 어떻게 맞추려고 하시나요? A. 일단 성장이라는 것 자체가 PC 온라인 게임 시절이랑 많이 달라진 것 같긴 합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극단적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게임이 없었거든요. 처음 자동 전투가 들어왔을 때도 ‘이게 무슨 재미야’라는 의견이 주류였는데 지금은 그걸 다 하고 있죠. 그래서 저희도 이 부분이 항상 숙제처럼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이게 단순히 저희 게임만의 문제도 아니고 또 모바일 게임만의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람마다 추구하는 재미 영역이 다르니까 느긋하게 방치형으로 즐기는 유저도, 업데이트 몇 시간 만에 확 크는 유저도 있는 거겠죠. 그 사이를 찾아서 모든 유저들이 업데이트 텀 동안 즐길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긴 한데, 유저들의 성향이 극단을 달리는 현상 자체는 어쩔 수 없는 추세 같습니다. Q.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게요. 〈어비스리움〉의 물고기들을 눌러보면 응원의 메시지가 나옵니다. 테이블 위 화초처럼 볼 수 있으면서도 응원의 메시지가 나오는, 이런 것들이 〈어비스리움〉이 추구하는 ‘힐링’이 아닐까 싶은데 혹시 ‘힐링’ 이외에도 특별히 전하고자 하는 게 있으신지요. A. 〈어비스리움〉 시리즈의 모든 스토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키워드가 우정과 애정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방치형이기에 힐링이다.’라는 걸 넘어서, 게임의 키워드 자체를 유저들에게 전달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푸시 메시지에서도 응원의 의미를 담으려 노력하고 있고요. Q. 듣다 보니 같은 힐링 계열이지만 게임과는 또 다른 영역인 명상 앱도 생각이 나네요. 〈어비스리움〉이 명상 앱과는 어떤 차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A. 유저들이 게임을 즐겁게 플레이하는 것뿐만 아니라, 캐릭터들이 던지는 메시지를 통해서 어떤 위로 같은 걸 받길 원하고 있어요. 메시지를 작성하는 저희도 스스로를 위로하는 측면이 없잖아 있고요. ‘위로’라는 부분에서 어느 정도 차이를 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Q. 그러면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서, 아까 〈어비스리움〉이 디지털 액자 같다고 이야기했었는데 캔버스로 보면 또 어떤 시각일까요? 그러니까 미술 작품으로 이해해보면 어떠냐는 거죠. A. 이 게임이 미술 작품으로서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고민은 한 적이 없어 잘 모르겠습니다. ‘동세대에 같은 감성을 공유하는 제작진들이 스스로가 감동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콘텐츠를 생산해내는 구조다’ 정도로 답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작품적인 걸로 보자고 하면 너무 거창한 느낌이라. 그래도 굳이 이야기해보자면, ‘그냥 내 감정에 공감해주길 바라.’라고 무겁지 않은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해요. 커뮤니티에 글을 쓰는 것처럼요. 예술도 여러 종류 있겠지만, ‘미술’이라는 단어에 깔린 거창한 것들과는 확실히 거리가 느껴지긴 합니다. 물론 그런 식으로 해석 가능한 측면도 있겠지만 의도 자체는 동세대의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동세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게임인 게 크고요. 그렇게 해서 녹여낸 감성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거라 믿고 있습니다. Q. 〈어비스리움〉이 작품을 만드는 도구가 되는 거로 생각해보시는 건 어떠신지요. A. 그런 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샌드박스 같은 느낌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내가 힐링 받을 수 있는 물고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물고기를 꺼내놓고 그 풍경을 즐기는 걸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Q. 그런 힐링을 ‘내가’ 이뤄냈다고 하는 게 핵심이 되는 것 같습니다. 미술을 할 줄 모르더라도 어느 정도 원하는 느낌을 낼 수 있고,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즐거움이 SNS 사진 공유를 하게 만드는 바탕이 되는 것 같고요. A. 네. 저희가 따로 안내는 안 했는데요, 사실 동일한 종류의 작은 물고기를 여러 마리 생성해두면 무리 지어 움직입니다. 그 풍경을 보면서 신기하다, 재밌다 하는 유저들도 많거든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도 그런 데서 나오는 게 아닐까 합니다. 이런 부분을 확장해서 보자면 말씀 해주신 거랑 같은 거죠. Q. 그런 물고기에 대해 다루려면 모든 제작진이 어류 도감 같은 레퍼런스를 많이 보시겠네요. A. 많이들 보고 있긴 합니다. 최근에는 범위를 넓혀서 포유류까지 보고 있습니다. Q. 도감 말고도 따로 특별히 참고한다거나 영감을 받는 부분이 있으신가요? A. 저희가 매 업데이트 때마다 테마를 다르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업데이트 콘텐츠를 꾸릴 때마다 참고할만한 데이터가 너무 없다는 것에 부딪히곤 해요. 업데이트가 잦은 편이다 보니 더 그렇죠. 그래서 어류 자체에만 집중하지 않고 매달 눈에 띄는 예쁜 거, 지금 트렌드가 되는 어류, 포유류, 새 같이 여러 가지를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Q. 인터뷰를 하면 할수록 ‘방치형 게임’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짧게 짧게 플레이되던 기존의 게임들과는 다르게 느릿한 시간 속에서 느껴지는 안온한 감각도 있는 것 같고요. A. 키우기 게임의 경우에는 만렙이 되면 환생하거나 옷을 갈아입히는 것처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잖아요? 그게 일반 RPG에서는 전투 한 번 끝난 거랑 마찬가지거든요. 다른 게임은 그런 식으로 하루면 끝날 걸 방치형은 며칠 더 늘여놨으니 기술적으로 방치될 수밖에 없죠. 그래도 그렇게 방치함으로써 느껴지는 어떤 편안함이 분명 존재하는듯합니다. 맞는 말씀 같아요. Q. 어떻게 보면 이 이야기는 현대인의 시간관, 놀이, 여가와 엮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방치 게임이 다른 놀이, 다른 게임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을 오히려 없애는 경향이 있지 않나 우려도 드네요.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A. 이 게임을 플레이하고 저 게임을 플레이한다고 해서 방치형 게임을 하지 않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서로 다른 형태의 놀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제 경우에도 다른 게임을 하고 있어도 옆에서는 방치형 게임이 계속 돌아가고 있거든요. 다른 게임 하다가 죽으면 어비스리움 한 번 보고.(웃음) 그래서 이 둘은 완전한 별개의 놀이가 아닐까 합니다. 사람들한테 ‘너 온라인 게이머니, 모바일 게이머니, 콘솔 게이머니.’ 이런 식으로 물어본다면 적어도 두 개 이상은 말하지 않을까 싶고요. Q. 제가 모바일 게임 관련 인터뷰하면서 흥미롭게 본 게 있는데, 드라마를 보면서 게임을 병행하는 경우가 대다수더라고요. 드라마 시청 시간을 침범하지 않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모바일 게임, 방치형 게임은 굉장히 안정적인 게임이 되는 것 같습니다. A. 아까도 한 이야기지만, 모바일 게임에 관해서 ‘무슨 게임 하는데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요.’라는 말을 종종 듣곤 합니다. 이게 다르게 표현하자면 ‘모바일 게임에 이 정도로 시간을 쓰고 싶지 않다.’, ‘이 정도로 조작하고 싶지 않다.’일 수도 있거든요. 그 방면에서 방치형 게임이 요구하는 것과 패키지 게임이 요구하는 건 다를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모바일 게임에서 패키지 게임 같은 게임성을 요구하는 이들은 방치형 게임을 하지 않겠죠. 그 때문에 안정적이라는 인상이 드는 게 아닐까 싶어요. Q. 그럼 이제 마지막 질문을 던지면서 마무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어떤 게임을 만들고 싶으십니까. A. 장연정 사원: 〈어비스리움〉은 시간을 쪼개 짬짬이 플레이해 주시는 분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짧은 시간 안에서도 힐링이 될 수 있는 게임을 계속 만들어가고 싶고요. 〈어비스리움〉이 일상 속 작은 휴식 같은 게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최덕수 팀장: 개인적으로는 지금 〈어비스리움〉 시스템이 조금 복잡하지 않나 싶습니다. 구체화가 되어있는 건 아니지만 우선 고령자가 봤을 때 글자가 잘 보이도록 만들고 싶고요.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고 심플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백구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관해 관심 갖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비주얼 노벨 올 클리어에 열을 올리는 중입니다.
- : 공포의 세계에서 배회한다는 것
선형적 서사에 있어 반복은 매혹의 대상이 아니다. 그 세계에서 무한한 반복이란 오직 탈출해야 할 환경에 불과하다. 이야기들은 그 사실을 붙잡고는 ‘사실 진짜 생은 반복의 바깥에 있어’라고 끝없이 주장한다. <팜 스프링스>가 흥미로웠던 것은 두 주인공이 일시적으로나마 반복에 매혹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결국 탈출의 의지가 발생하고, 두 사람은 또다시 ‘진짜 삶’과 마주하기 위해 바깥으로 탈출한다. < Back : 공포의 세계에서 배회한다는 것 15 GG Vol. 23. 12. 10. "에너지 상자에 갇힌 거예요. 3.2초 만에 상자에서 탈출하면 타임 루프에서 나갈 수 있어요." (...) "현실 세계로 뭐하러 돌아가요? 죽음과 가난과 괴로움 가득한 세상인데. 그나마 여기에선 함께할 수 있잖아요." (...) "여긴 진짜가 아니에요. 여기서 하는 모든 건 의미가 없다고요." <팜 스프링스>(맥스 바바코우, 2020) 선형적 서사에 있어 반복은 매혹의 대상이 아니다. 그 세계에서 무한한 반복이란 오직 탈출해야 할 환경에 불과하다. 이야기들은 그 사실을 붙잡고는 ‘사실 진짜 생은 반복의 바깥에 있어’라고 끝없이 주장한다. <팜 스프링스>가 흥미로웠던 것은 두 주인공이 일시적으로나마 반복에 매혹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결국 탈출의 의지가 발생하고, 두 사람은 또다시 ‘진짜 삶’과 마주하기 위해 바깥으로 탈출한다. 이러한 사실은 명백히 운명적이다. 말하자면 선형 서사는 언젠가 종말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무한한 반복은 불가능하다. 예외적인 상황이라고 해봐야 작품 외적인 활동, 관람자가 다시 읽기 혹은 되감기-다시 재생을 시도할 때 정도다. 로라 멀비는 영화에서의 이러한 지향이 영화의 운명임을 논한 적이 있다. 장 뤽 고다르의 1963년 작 <작은 병정>에 나온 대사(“영화는 1초에 24번의 진실이다.”)를 뒤집은 제목의 저서 『1초에 24번의 죽음』에서, 멀비는 서사 영화는 암전이라는 죽음을 향해 달려 나간다고 저술한다. “서사의 정지, 비유기체적인 형태로 돌아가는 비유로서의 죽음은 마치 스틸 프레임과 죽음의 결합이 이야기의 죽음으로 용해되는 것처럼 (...) 영화로 확장된다.”(『1초에 24번의 죽음』, 로라 멀비, 현실문화, 2007) 필름이 모두 돌아가면 그곳에 도사리는 것은 아무것도 투사되지 않는 검은 장막이다. 여기에 도사리는 것은 죽음의 이미지뿐이다. 이때 매체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것이 담지하는 서사 역시 죽음과 마주한다. 아니 오히려, 이것은 서사를 다루기 때문에 그 활동이 정지한다 봐도 무관하다. 서사는 시작하는 곳과 멈춰 서는 곳을 결정하는 지시로서의 제약이다. 더 이상 세계가 변혁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서사의 운동은 끝난다. 그것이 행복한 결말이든 불행한 결말이든 그것은 서사의 죽음이나 다름없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논의를 그대로 비디오 게임에 적용할 수 없다. 게임은 반복의 매혹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초기의 아케이드 비디오 게임에 있어서 ‘결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무한히 루프 하는 게임들(이를테면 타이토의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목표는 그 안에서 무한히 생존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비디오 게임에서의 ‘끝’은 ‘죽음’과 현상적으로 연결되었다. 이것은 지시적 죽음이 아니라 진짜 의미에서의, 세계 내부에서의 죽음을 뜻한다. GAME OVER는 멀비가 지정한 의미에서 암전-죽음과 연결된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이 지시된 ‘끝’을 담지하면서부터 상황은 변모한다. 여기서 끝은 두 단위로 분화된다. 하나는 GAME OVER로 표상되는 죽음의 끝=암전, 그리고 또 하나는 CLEAR로 표상되는 완결화된 끝이다. 때로 (특히 고전적 아케이드 게임들은) CLEAR를 GAME OVER라는 기표로 표기하긴 하지만, 그 누구도 양자를 동일한 결말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때 CLEAR가 GAME OVER와 대비되는 존재라고 한다면 이것은 명백히 암전에 대비되는 존재로서 ‘표백’에 위치한다. (‘깨끗이 한다’는 의미의 CLEAR와 표백은 마치 운명 된 짝처럼 들어맞기까지 한다.) 표백의 결말은 엄밀히 말해 서사와 등치되지 않으며, 정확히는 게임이 추구하는 목표(objective)와 결부한다. 하지만 서사는 목표를 지시하기 가장 적합한 형식이다. 이를테면 캡콤의 <파이널 파이트>는 범죄조직 매드 기어가 시장의 딸을 납치했다는 컷씬으로부터 시작되고, 인질이었던 제시카가 연인 코디와 함께 떠나는 컷씬으로 종결된다. <파이널 파이트>를 플레이하는 동안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인질 제시카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매드 기어의 야욕을 꺾는다면 게임이 전제하는 목표를 해결했다는 사실과 함께 목표와 연결되는 서사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이 인지는 정확히 이 게임이 여기서 ‘끝’났다는 사실을 이해시킨다. 여기서 더는 새로운 것이 없다. 물론 플레이어에 따라서는 다른 캐릭터를 사용하거나 혹은 조금 색다른 플레이 방식을 시험해 보거나 아니면 다른 친구와 함께 해보기 위해 반복해서 게임을 플레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플레이어에게 한 번 표백의 결말(=CLEAR)이 찾아왔다는 사실은 지울 수 없다. 이 사실은 코디가 제시카와 함께 돌아가는 장면을 본 그때에 명백해진 것이다. 브라이언 업튼은 게임의 플레이어를 세 가지 분류(목표 중심적 플레이, 일관 중심적 플레이, 종결 중심적 플레이)로 나눈다. 이때 종결 중심적 플레이를 ‘서사주의적 의제’로 분류하며 이들의 목표란 ‘향후의 행동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지는 지점에 이르는’ 것이라 말한다. (『플레이의 미학』, 브라이언 업튼, 에이콘, 2019) 비디오 게임이 고도화되고 다수의 서사적 매개를 담지하게 되면서 일관 중심적 플레이는 대체로 표백의 결말(=CLEAR)을 향한 목표의식과 등치되었다. 이것은 표층적 단위에서의 하나의 끝, 더 플레이한다고 해도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표백’적 목표 지정이다. 물론 한 번의 CLEAR로 서사의 진위를 모두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고, 촘촘한 변곡점들 탓에 다른 방향의 서사를 즐기기 위해 루프를 감행하는 경우도 충분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들 모두 완전히 표백시키기 위한 반복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따라서 서사가 있는 비디오 게임 플레이를 암전과 표백이라는 관점에 놓고 정리한다면, 플레이어가 상정하는 완전한 표백을 위해 수없는 암전을 거쳐 가는 구조가 된다. 이때 암전은 부정적이며 불완전한 결말로서의 장애가 된다. 좀 더 명백히 하자면 표백은 매혹하지만, 암전은 매혹하지 않는다. 설령 몇 번의 루프를 더 반복하고자 하는 플레이어라고 하더라도 그가 원하는 것은 추가적인 표백일 뿐 추가적인 암전은 아니다. 이러한 게임 언어에서 암전을 향하는 충동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로그라이크 : 암전 충동과 표백 충동의 충돌 지점 다만 로그라이크(혹은 로그라이트)는 이 두 개의 충동이 다른 상관관계를 보인다. 이 장르는 절차적 생성, 캐릭터의 영구적 죽음이라는 두 기조를 통해 수많은 플레이를 생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는 매회의 플레이에서 마주하게 되는 장애와 다뤄야 하는 기술이 일정량 상이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말하자면 플레이어가 한 번의 암전을 경험한 뒤, 다시 게임의 내부에 들어가면 직전의 암전과 차이 있는 경험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물론 이전의 경험으로부터 학습한 지식은 의미 있게 작동하지만 때로는 그러한 것들로는 돌파하기 난해한 국면이나 상황과도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한 번의 표백에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로그라이크는 자신이 무한히 다른 가면을 쓸 수 있다는 사실로 플레이어를 유혹하기 때문이다. 로그라이크에서의 모든 플레이는 업튼이 규정하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뛰어드는 ‘눈먼 점프’와 같으며, 플레이어들은 ‘눈먼 점프’의 연속이기 때문에 즐긴다. 따라서 로그라이크는 암전의 충동을 가지는 장르다. 이 장르가 매혹의 무기로 휘두르는 무한성이란 캐릭터가 죽음을 맛봐야 작동시킬 수 있다. 플레이어는 로그라이크의 적극적 참여자가 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죽음을 스스로 즐겨야만 한다. 캐릭터의 영구적 죽음이라는 고통을 감내하며 획득해 낸 지식을 시험하기 위해, 또다시 ‘죽을 수도 있는’ 세계로 직접 뛰어드는 것이다. 특히나 이러한 암전의 지식을 수치화시키는 로그라이트는 더욱더 죽음에 능동성을 준다. 플레이어에게는 임시적 강화와 영구적 강화라는 두 개의 트랙이 존재한다. 한 번의 플레이에서 경험한 임시적 강화는 죽음과 함께 모조리 사라지지만, 그 플레이의 결과물은 영구적 강화의 재료가 된다. 이때 영구적 강화의 재료를 획득하는 방법은 캐릭터가 ‘죽는 것’이다. (혹은 게임에 따라서는 지정된 시간 동안 무사히 생존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이러한 형식의 대표 격인 <뱀파이어 서바이버즈>를 떠올려 보자. 이 게임은 지정된 시간 동안 살아남더라도 결국 사신 형태의 캐릭터가 나타나 캐릭터를 죽여버리고, GAME OVER의 결말을 남긴다. 이후 등장한 <뱀파이어 서바이버즈>의 유사 게임들은 대체로 이런 경우의 죽는 결말을 제거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로그라이크는 언제 ‘표백’되는가? 그저 암전의 충동으로 가득 찬 게임이라면 플레이어가 이 루프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한가? 그런데 공교롭게도, 로그라이크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로그>에도 공식적으로는 엔딩이 존재한다. 지하 22층 이하의 층에서 “Amulet of Yendor”를 습득한 뒤 다시 지상층으로 올라오면 화면에 성공을 축하하는 텍스트가 출력된다. 게임이 표백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물론 플레이어가 다시금 지하 던전에 내려가겠다 마음먹는 순간 이전과는 다른 구조의 던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플레이어가 <로그>에서 ‘표백의 결말’에 도달했다는 사실은 변화하지 않는다. 어떤 이에게는 이 표백의 경험이 게임의 종료 시점일 수 있다. 한편, 그러한 플레이어에게는 이전까지 경험했던 암전은 매혹의 대상임과 동시에 장애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설령 암전의 충동을 느끼는 플레이어에게도 그 충동을 유지하기 위한 장기적인 동력이 필요했을 수 있다. 표백의 충동은 이러한 장기적인 동력에 영향을 준다. 하지만 그러한 플레이어들은 표백의 충동을 해결한 뒤에도 암전의 충동을 느끼며 다시 뛰어들 수 있다. 로그라이크 내부에서 표백과 암전은 서로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지만, 하나의 충동이 다른 충동을 소멸시키지는 않는다. 두 충동은 생생한 형태로 그곳에 자리 잡고 있다. 로그라이크와 서사의 문제 따라서 로그라이크에는 두 개의 결말 충동(암전과 표백)이 충돌하는 장르다. 플레이어들은 경험과 지식의 양을 늘리기 위해, 또한 그렇게 습득한 경험과 지식을 다시 활용하기 위해 끝없는 죽음(=암전)을 바란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게임들과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완결(=표백)에 이르기 위한 과정과도 같다. 이때, 앞서 말했듯이 표백을 지향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서사주의적 의제’에 해당한다. <로그>의 케이스도 게임이 제공하는 서사적 완결과도 일치한다. 하지만 암전 충동이 끝없이 들끓는 로그라이크에서 서사를 선형적으로 진행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 로그라이크는 순환의 바깥으로 나가기를 일정량 거부시키는 장르이지 않은가. 로그라이크에서의 체험은 결코 선형적인 감각으로 치환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시작된 뒤, 끝이 나기 전까지 같은 자리를 뱅글뱅글 돌아간다. 결국 이것을 하나의 거대한 완결 서사로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순환 그 자체를 선형적 서사의 내부에 집어넣을 수밖에 없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암전의 보상물로서 표백으로의 진행을 꾸준히 제공하는 <하데스>일 것이다. 이 게임에서는 표백에의 충동은 보상으로만 존재하기에 암전의 충동을 건드리는 일은 없다. 따라서 양자는 서로를 위배하지 않은 채 점진적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또는 이나 <서울 2033>처럼 암전에의 도전이 서사 형식의 텍스트로 진행되는 방식이 있다. 이들은 로그라이크 게임들이 매번의 플레이에서 던지는 장애물과 도전을 서술의 방식으로 치환한다. 상황이 텍스트로 주어지고, 플레이어는 자신에게 부여된 선택지를 탐색하고 결정함으로 그 결과를 확인한다. 다만 이러한 방식이 하나의 선형적 서사를 완전히 이룰 수 있는지는 의문이 따른다. 모든 파편화된 상황들은 그저 단기적인 판단능력을 요하는 인카운터에 지나지 않는다. 개별의 상황 내에서는 특정한 인과가 발생하지만, 상황과 상황 사이에서의 인과는 작동하지 않는다. 선형 서사라는 것은 거시적 관점에서의 구조화된 모델을 뜻한다. 게임을 플레이한 뒤 서사를 인식한다는 것은, 자신의 플레이 경험 내에서 하나의 서사 모델로 응축할 수 있는 경험들을 선별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개별의 경험들은 그것이 선형적으로 나열될 수 있는 일종의 연결점(nod)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그것이 바로 고전적 의미에서의 플롯이 된다. 이나 <서울 2033> 등의 파편화된 텍스트들은 하나의 모델로 응축되지 않을뿐더러, 동일한 이벤트가 반복되면 서사적 가치도 상실한다. 플레이어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담지하는 서술된 내용이 아니라 개별의 선택지가 가져다주는 혜택 혹은 페널티다. 물론 이 작품들에 있어서 이런 구성이 특별히 문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로그라이크의 순환 구조 내 장애물들을 의도해서 텍스트 적 형식으로 치환해 놓은 것뿐, 하나의 거시적이고 강렬히 직조된 드라마를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로그라이크의 양립되는 결말 충동을 기반으로, 경험 내부에 고전적 서사를 집어넣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증명할 뿐이다. 또 다른 예시로서는 비주얼 노벨 로그라이크를 표방하는 <노베나 디아볼로스>가 있다. 악마에 의해 단절된 마을에 고립된 주인공은 다섯 명의 여성 중에서 누가 악마인지를 밝혀낸 뒤, 인간인 캐릭터와 함께 마을을 빠져나와야 한다. 매 플레이마다 누가 인간 캐릭터인지 무작위로 설정되며, 그들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는 사건 현장 기록 역시 무작위로 배치된다. 이는 표백 충동의 내부에 변수를 작동시킨다는 점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도전이지만, 한 번의 플레이를 끝낸 뒤에는 서사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사건이 표백화되어 버린다는 약점이 있다. 이를테면 마을로 진입하는 장면, 각 인물과 조우하는 장면, 악마에게서 현 상황을 설명받는 장면 들은 두 번 이상 조우할 가치를 느끼기 어려운 요소들이다. 결국 플레이어가 원하는 것은 ‘특정 인물이 인간일 때 서사가 어떻게 변화하는가’에 국한되며 이는 명백히 암전 충동을 배제한다. 따라서 게임은 플레이어의 표백 충동을 돕기 위해 거시 서사만을 확인시키는 ‘엔딩 모드’를 탑재해 이러한 충동을 제어한다. 하지만 그 순간 <노베나 디아볼로스>는 로그라이크가 가지는 양립된 충동 개념에서 크게 벗어난다. ‘공포의 세계’에서 배회한다는 것 폴란드의 pantastaz가 제작한 는 2020년에 얼리 억세스를 시작해, 2023년 10월에 정식 출시 되었다. 일본의 공포 만화가 이토 준지의 아트와 러브크래프티안적 세계관, 20세기 후반 일본의 도시 전설적 서사를 규합해 2-bit 레트로 스타일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구축한 본 게임은 그 분위기만으로도 상당히 많은 관심을 받았다. 스팀의 소개 페이지에는 ‘괴물과의 턴제 전투, 가차 없는 선택으로 만들어지는 지옥 같은 로그라이트 RPG’라고 소개된 만큼 본 작품의 장르를 로그라이트로 규정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말하자면 역시 표백과 암전의 두 충동 사이에서 진동하는 게임이라는 의미다. 2023년 11월 기준 게임의 평가는 7,599개의 평가를 통해 매우 긍정적으로 표시되고 있지만, 평가의 면면을 살펴보면 게임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부정적 평가를 남기고 이탈한 플레이어들을 꽤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UI의 불친절함이나 지나치게 부적절한 난이도를 지적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게임이 예상과는 다르다는 지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특히 게임이 제공하는 이야기들이 지나치게 편린적이라 하나로 응축되지 않는다는 평가들은 매우 흥미로운 측면이 있다. 의 메커니즘은 기본적으로 테이블 탑 보드게임 <아컴 호러>의 디지털 스탠드 얼론 버전에 가깝다. 이를테면 행동에 따른 강제 이벤트, 능력치를 기반으로 하는 성공과 실패의 체크, 한 번의 게임 플레이에 배정되는 초월적 신의 존재, 캐릭터의 자원으로 양분되는 체력과 이성의 존재가 그러하다. 하지만 사실상 로그라이트 장르로서의 진행 양상은 큰 틀에서 을 연상시킨다. 플레이어는 랜덤하게 배정되는 5개의 ‘미스터리’를 돌파하여 마을 등대를 열 열쇠를 모아야 한다. 최종적으로는 등대에 들어가 사악한 존재의 부활을 막는 것이 목적이다. 이 최종적으로 엔딩을 보기 위해 총 8개의 ‘섹터’를 진행해야 하는 것과 5개의 ‘미스터리’를 진행해야 한다는 것은 게임 진행의 절차성에서 연결된다. 개별의 미스테리(=섹터)에서는 진행을 위해 맵이 제공되며, 플레이어는 맵에서 자신의 다음 이동 경로를 눌러 행동을 수행한다. 특별한 능력이 있는 장소(=상점 등)에서 필요한 행동을 할 수도 있고, 장소를 탐색해 벌어지는 이벤트를 해치우고 미스터리의 마무리를 향해 나아갈 수도 있다. 무엇을 하든 사악한 존재의 부활을 알리는 ‘파멸’ 게이지가 상승하며 이 게이지가 100%가 된다면 게임은 실패한다. (이는 의 추격과 유사한 메커니즘이다.)다만 의 섹터와 의 미스터리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섹터는 아무것도 제약하지 않는 공간이다. 물론 해당 공간에 대한 기초적인 규정은 존재하며, 그 규정을 통해 등장하는 이벤트의 속성이 달라지긴 하지만 각 섹터 간의 개념적 차이는 없다. 섹터는 플레이어가 활약할 수 있는 ‘너른 공간’이며, 그 공간을 한 번 거쳐 갔다고 해서 무엇인가 ‘표백’되는 일은 없다. 하지만 의 미스터리는 명백히 서사적인 개념이다. 미스터리는 도입의 서사, 진행을 위해 거쳐야 하는 장소들의 순서, 그리고 플레이어의 행동에 따라 달라지는 몇 가지 엔딩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미스터리는 공간화된 개념이 아니다. 전적으로 선형적 서사의 개념이며 이는 곧 ‘표백’이 가능하다는 의미가 된다. 물론 동일한 미스터리라고 해도 반복해서 도전할 때의 양상은 달라진다. 미스터리를 진행하기 위해 선택하는 ‘탐색’ 행동은 무작위적인 사건들을 가지고 오며, 이나 <서울 2033>과 마찬가지로 선택과 판정을 통해 결과가 도출된다. 하지만 앞서 이 두 게임의 형식을 통해 이야기한 바 이러한 인카운터 이벤트들은 하나의 노드로 연결되는 선형적 경험이 아니다. 따라서 이는 미스터리의 시작과 끝을 규정하는 인트로와 엔딩의 늘어선 노드의 배열에 들어가지 않는다. 말하자면 여기서 미스터리를 하나의 응축된 서사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무작위 인카운터들은 모두 탈각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문제는 미스터리는 어디까지나 표백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미스터리는 통상 2~4개의 엔딩을 가지고 있으며 대체로는 A 엔딩이 가장 이상적인(그러나 모든 것이 깔끔하게 해결되지는 않는) 결말이다. 플레이어가 한 번 A 엔딩으로의 길을(혹은 플레이어에 따라 해당 미스터리의 모든 엔딩을) 확인한다면, 해당 미스터리를 통섭하는 선형적 서사를 향한 욕망을 잃어버리고 만다. 즉 그 시점에서, 미스터리는 이미 ‘표백’되어 버린 셈이다. 플레이어가 이미 특정한 엔딩을 향하는 방법을 완전히 체득하고 나면 더 이상 이 미스터리는 매혹의 힘을 드러내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는 미스터리가 기초적으로 품고 있는 서사적 개념 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작위적 인카운터가 더 중요해진다. 그렇다, 오히려 암전의 충동이 더 강력해지는 것이다. 를 플레이할 수록, 무엇인가 잃어버리는 감각과 마주한다. 강력한 아트의 힘과 모호함으로 사람을 빨아들이는 미스터리들의 내용이 존재하지만, 게임의 플레이가 반복을 이룰 때마다 매혹의 힘을 점차 잃어만 간다. 그런데 애초에 본래의 미스터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본질이 감추어져 있는 일종의 퍼즐이며 그 매혹은 진위를 알고 싶다는 호기심에서 나온다. 미스터리는 가장 강력히 표백의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개념이며 따라서 표백에 의해 가장 빠르게 힘을 잃어버린다. 미스터리야말로 구조화된 서사의 형태를 가장 강력히 요구하는 포맷이다. 따라서 우리는 무한히 미스터리에 붙잡혀 있을 수 없다. 무한히 마주쳐야 하는 암전의 충동 앞에서 미스터리는 쉽사리 힘을 잃는다. 는 스스로가 가진 메커니즘으로 인해 가장 강력한 매혹의 힘을 퇴진시켜 버리고 마는 기이한 게임이다. 물론 공포의 매혹과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불안을 하나로 규합하는 것은 매우 훌륭한 실험이다. 하지만 빠져나올 수 없다는 불안은,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희망이 전제되었을 때 더 강력히 기능한다. 에 무엇인가 부재한 게 있다면 바로 그 희망인지도 모른다. 미스터리들이 너무나 빠르게 표백되어 버린 세계에서 하염없이 헤매는 것은 오히려 불안하지 않다. 어쩌면 그 세계에 영원히 반복하길 바랐던 기대의 작용이, 오히려 이 ‘공포의 세계’로부터 쉽사리 빠져나오게 만든 것은 아닐까.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평론가) 이선인 만화와 게임, 영화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합니다. MMORPG를 제외한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클리어가 라이프 워크입니다. 스팀덱을 주로 사용합니다.
- [Editor's view] 선언을 넘어선, 실천으로서의 게임문화
매우 급박하게 변하는 것 같지만 그 기저에 흐르는 도도한 맥락을 놓치지 않고자 하는 것이 〈게임 제너레이션〉의 목표다. 첫 호에 배부를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꾸준히 그리고 우직하게 그 길로 가고자 한다. 동시대의 교양으로서, 혹은 지금 시대의 가장 뜨거운 놀이로서 게임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앞으로 이어질 의 모든 이야기일 것이다. < Back [Editor's view] 선언을 넘어선, 실천으로서의 게임문화 01 GG Vol. 21. 6. 10. 디지털게임은 이제 뉴미디어라고 부르기엔 다소 민망한 나이가 되었다. 처음 등장한 것으로도 거의 반세기에 달하는 이 매체는 그러나 그 발전과 변화의 폭이 너무 넓어 초창기와 지금을 비교하면 도대체 어디까지를 공통점으로 봐야 할 것인지 난감할 지경의 다양성을 만들어 왔다. 지금까지도 게임이란 무엇인가 라는 정의를 쉽게 내리기 어려운 이유다. 등장 이래 조금씩 저변을 넓혀 온 게임은 이제 모바일 네트워크 시대에 이르러 서브컬처가 아닌 대중문화의 일환으로서 거론되기 시작했다. 설령 그것이 단순한 산업적 규모에 대한 찬사이건, 혹은 디지털게임이 만들어 낸 기존의 매체와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사고와 감정에 접근하는 방법에 대한 동경이건 간에 이제 게임은 대중문화의 프레임 밖에 두기 어려운 존재감을 확보했다. <게임 제너레이션>은 먼 훗날 최초의 게임 세대로 일컬어질 수 있을 바로 이 시대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자 시작된 잡지다. 게임이라는 매체를 만나 변화하기 시작한 인간의 삶과 생각, 행동이 다시 또 게임에 반영되는 과정 전반을 살피며 우리의 관심사는 게임을 넘어 게임하는 인간을 향한다. 게임을 곱씹어 거기에 비춰지는 우리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에의 탐색이 〈게임 제너레이션〉의 가장 큰 목표다. <게임 제너레이션>은 총 세 개의 섹션으로 구성된다. 매 호마다 선정되는 ‘집중기획’을 통해 동시대 게임 담론의 주요 주제들을 깊은 호흡으로 검토하고, 빠르게 나타나고 사라지는 흐름을 ‘TRENDS’에서 놓치지 않도록 주시한다. 마지막으로 ‘ARTICLES’에서 오늘날 게임에 대한 비평과, 게임개발자 및 게이머라는 사람에게 묻는 인터뷰로 게임과 게이머라는 게임문화의 근간을 맨손으로 훑으며 우리 시대의 게임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이 ‘문화로서의 게임’을 손쉽게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그 말이 현재로서는 다분히 공허한 선언에 그치는 것은 아닌가 우려한다. ‘게임은 문화다’라고 선언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게임을 문화의 틀 안에서 바라보고 사고하며 이를 공론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일일 것이다. <게임 제너레이션>의 창간과 도전은 그런 실천을 통한 실험이며, 창간호의 기획도 그러한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문화로서의 게임'이라는 대주제를 두고 먼저 고민한 것은 다른 선배격의 매체들이 겪어 온 과정이었다. 영화와 만화라는 두 매체가 표현양식에서 서브컬처를 지나 대중매체로 변화해 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지점들은 없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한송희, 이재민 두 평론가의 글에서 찾아보고자 했다. '문화'라는 말을 굳이 강조해야 하는 지금 게임의 상황은 어떤 사회적 배경에서 나타나는지에 대한 고민은 이정엽 교수가 고민의 결과로 가져왔다. 문화매체 성립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비평의 영역은 어떤 과정을 거쳐오고 있는지, 앞으로 어디로 가야할 지에 대한 고민을 담은 강신규 박사의 글도 적지 않은 인사이트를 제공한다. 동시에 같은 고민을 다른 지역에서 하고 있는 북미의 게임연구자 Mia Consalvo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동시대적 공통요소는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하고자 했다. TRENDS에서는 현재 가장 뜨거운 단어들의 현황을 살펴보고자 했다. 2021년 7월 다시한번 불타오른 셧다운제 이슈와 함께 게임 관련법들에 대한 관심이 재부상했는데, 수 차례 여러 가지 입법 발의는 뉴스에 나왔지만 실제로 입법되었는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실제 국회에서 게임법 관련 업무를 수행하는 이도경 비서관이 현업의 시각에서 관련 내용을 정리해 주었다. 게임 플레이와 콘텐츠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결제양식에 최근 불고 있는 새로운 변화인 구독형 결제는 어떤 변화와 가능성을 내포하는지를 홍성갑 기자가 점검했고, 비즈니스 워드로 2021년 하반기 중심에 선 메타버스라는 말이 게임과 갖는 유사성으로부터 시작되는 메타버스 게임에 대한 관심이 품고 있는 실체와 허상을 분리하고자 하는 고민을 김재석 기자가 담아냈다. 디지털게임에 대한 다양한 비평을 담는 Articles 코너에서는 비평이나 평론의 형식을 정의하지 않고 다양한 관점의 글들을 모아보고자 했다. 〈리그 오브 레전드〉의 전장 구성이 갖는 원근법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김얼터 작가의 글은 시각예술의 측면에서 게임디자인에 접근하는 흥미로운 관점을 보여준다. 2021년 상반기 트럭시위 사태로 화제가 되었던 〈로스트아크〉난민사태에서의 '난민'을 본격적으로 해석하고자 한 오영진 평론가의 도전은 실제 게이머들의 위상을 생각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스탠스들에 대한 고민을 안겨준다. 2021년 GOTY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는 〈잇 테이크 투〉를 살피는 이명규 기자의 시선은 코옵이라는 보기 드문 형태의 플레이를 이해하는 단초들을 제공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도 정작 '초딩 게임'이라는 선입견에 강하게 묶여 있는 〈로블록스〉의 의미는 박이선 연구자의 정리를 통해 좀더 뚜렷해진다. 야쿠자 게임으로만 알려져 있던 〈용과 같이〉에 접근하는 시사평론가 김민하의 글은 이 게임을 '관광 게임'으로 정의하며 일본이라는 현실배경과 게임의 연계를 되새기게끔 한다. 게임텍스트 뿐 아니라 사람으로도 이뤄지는 것이 게임문화다보니 매 호에서는 항상 사람을 향한 인터뷰를 포함하고자 했고, 첫 호에서는 두 사람을 만났다. 인디게임 개발자 somi는 스스로의 작품들을 '죄책감 3부작'이라고 부르며 연결성을 부여하고, 이는 게임에서의 작가론을 가능케 하는 점이다. 작가로서의 의미를 가능케 하는 somi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동시에 세계 최대 e스포츠를 운영하는 라이엇게임즈 코리아의 진예원 PD를 만나 한국 e스포츠의 현황과 미래에 대해 현업의 시각에서 느끼는 바를 받아적고자 했다. 격월로 정리하는 이슈들은 아무래도 시기마다 적절한 대응이라기보다는 좀더 긴 호흡에서 한국의 게임문화를 곱씹는 결과물로 자리할 것이다. 긴급한 소식에 대한 논의는 다른 여러 매체와 커뮤니티에 맡기고, 우리는 숨을 고를 때 비로소 보이는 문제들로 시선을 던지고 말을 걸고자 한다. 기획회의 내내 이야기했던, '웹진보다 무겁게, 학술지보다 가볍게'라는 기조는 주제와 소재, 톤까지를 아우르는 우리의 슬로건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글을 찾아 읽을 독자가 있을 거냐고 반문하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없으면 때로는 독자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도 잡지의 힘이자 의무이기도 했음을 잊지 않는다. 매우 급박하게 변하는 것 같지만 그 기저에 흐르는 도도한 맥락을 놓치지 않고자 하는 것이 〈게임 제너레이션〉의 목표다. 첫 호에 배부를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꾸준히 그리고 우직하게 그 길로 가고자 한다. 동시대의 교양으로서, 혹은 지금 시대의 가장 뜨거운 놀이로서 게임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앞으로 이어질 의 모든 이야기일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자아와 투쟁하던 이야기로 세상을 구하게 만드는 방법 - 헬블레이드 2: 세누아의 전설
가상의 인물을 창조하고 묘사하는 것은 때로 놀라울 만큼 쉽다. 뛰어난 지능을 가진 천재나, 비현실적인 실력을 가진 전사를 만들 수도 있다. 어떤 문제도 간단히 해결할 수 있고,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곤란함은 그들의 비범함 앞에서는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 Back 자아와 투쟁하던 이야기로 세상을 구하게 만드는 방법 - 헬블레이드 2: 세누아의 전설 21 GG Vol. 24. 12. 10. 가상의 인물을 창조하고 묘사하는 것은 때로 놀라울 만큼 쉽다. 뛰어난 지능을 가진 천재나, 비현실적인 실력을 가진 전사를 만들 수도 있다. 어떤 문제도 간단히 해결할 수 있고,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곤란함은 그들의 비범함 앞에서는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일상적인 세계 속의 이례적인 인물이든, 이례적인 세계 속 일상적인 인물이든, 이들의 능력과 서사는 우리의 상상과 언어가 허락하는 한에서 필요한 만큼 설정될 수 있다. 아무리 극단적이고 허황되더라도. 여기엔 이들이 창조된 인물이기에 가지는 편리한 이점들이 있다. 이들이 가진 능력의 이면을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 뛰어난 능력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 그 능력을 얻으며 걸어오는 길은 어땠는지, 어떤 부침을 거쳐 지금의 자리에 올랐고, 때이른 지위와 성공의 대가는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지. 이를 ‘구태여’ 설명하는 것은 이들의 서사를 간혹 다채롭게 만들어줄 부차적 이야깃거리로 소비된다. 대개의 영웅 이야기에서는 영웅들의 뛰어난 능력과 업적을 칭송하며, 이를 한층 낭만적으로 만드는 필수적인 요소는 바로 그 행보에 놓인 고통과 좌절이다.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운 경험과 사건은 순수한 백지 또는 기초적인 도덕주의자의 상태에 머물러있던 인물을 영웅으로 만든다. 이 고통은 마치 '훈장 같은' 흉터로 남아 영웅을 더욱 빛나고 고귀한 존재로 장식한다. 고통과 좌절을 겪은 영웅은 마침내 이를 극복하고 더 성장, 발전한다. 고통이 남긴 트라우마는 영웅의 의지와 용기 앞에서 무력화되고, 더 이상 그를 번민케 하거나 괴롭히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은 숭고한 영웅 이야기의 일부지만, 이 길이 때로는 어둠과 추악함을 내포하고 있으며, 매 순간 어떤 대가를 견뎌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세누아의 전설: 헬블레이드 IISenua’s Saga: Hellblade II(2024, 이하 전설)>이 직시하는 것은 이 지점이다. 전작인 <헬블레이드: 세누아의 희생Hellblade: Senua’s Sacrifice(2017, 이하 희생)>은 세누아가 겪는 개인적인 문제들을 부차적인 이야깃거리가 아닌 서사의 핵심으로 다루며, 그녀가 이 문제들을 해결하고 스스로를 구해보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자신의 내면을 여행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그리고 뒤이은 <전설>에서는, 이 세누아가 타인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외부 세계로의 여행을 묘사하겠다 선언한다. 시작부터 끝까지 주인공의 고통을 파고들며 논하던 작품이, 이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논하는 주인공을 논해보겠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의 고통을 어떻게 묘사하고 활용할 것인가? 그녀가 이 유산을 끌어안고 여정을 떠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POV: 세누아의 시선으로 보는 현실과 비현실 한 켈트 전사가 죽은 연인을 되살리기 위해 저승으로의 여정을 떠난다. 이것이 <희생>의 기초적인 로그라인이다. 게임을 실행하고 얼마 되지 않아, 당신은 세누아가 몇 가지 문제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목소리를 듣고, 존재하지 않는 형상들을 본다. 그녀를 학대한 아버지로부터 지속적으로 심어진 부정적 자기 인식과 죄책감이 그녀의 내면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마지막 전투가 다가올수록 당신은 서서히 깨닫는다. 이 여정은 죽은 연인을 되살리는 여정이 아닌, 세누아가 스스로 짊어진 죄책감과 고통으로부터 일어서기 위한 여정이다. <전설>에서 시작되는 여정은 <희생>과는 정반대의 방향을 따른다. <희생>에서 헬이라는 가상의 공간으로 홀로 떠났던 세누아는 이제 그녀의 민족을 침략한 노스먼의 땅이라는 현실의 공간으로 향한다. 더 이상의 침략을 막고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라는 현실적인 대의도 가졌다. 자신의 과거와 개인적인 상실에서 기인한 고통에 맞섰던 세누아는 이제 그녀의 칼날을 내면에서 외면으로 돌려, 외부 세계에서 타인들을 괴롭히는 세상의 고통에 맞서려 한다. 그리고 게임을 실행한 당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떻게 <전설>이 시리즈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전혀 다른 방향성의 이야기를 시도하려 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익숙한 목소리의 해설자가 당신을 반긴다. 세누아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던 목소리들은 여전히 그녀의 귓전을 맴돌고 있다. 아버지 진벨의 망령은 잊을만하면 나타나 세누아를 덮친다. 그리고 그녀를 무너뜨리는 가장 큰 적은 여전히 그녀 자신이다. [그림 1] * 전작에서처럼 세누아의 과거와 진벨의 망령에서 비롯된 비현실적 공간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해설자, 목소리들, 진벨의 망령은 <희생>의 전반에 걸쳐 플레이어에게 세누아의 내면을 묘사했다. 명백하게도 세누아 본인의 생각과 직관을 상징하는 이 요소들은 <전설>에서도 역시나 내밀하고 자세하게 작동하며, 세누아가 맞닥뜨리는 모든 상황과 그녀의 모든 행동 및 선택에 반응하고, 평가하고, 주석을 단다. 세누아가 마주하는 모든 현실 또는 비현실의 세계는, 플레이 내내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 그녀의 내면을 풀이하는 이 장치를 통해 다듬어져 묘사된다. 사실상 플레이어들은 변함없이 세누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며, 작품의 초점은 세누아의 여정 자체가 아닌, 여정을 겪는 세누아의 내면에 맞춰져 있다. 떨쳐내지 못한 어둠을 동력으로 찾아가는 이정표 세누아의 새로운 여정은 분명 세상을 구원하는 영웅의 여정이다. <희생>에서 겪었던 여정과는 달리,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매 성취를 입증하고 평가받는다. 어떤 문제를 얼마나 해결해 무엇을 얻어냈는지가 중요해지며, 대개 이런 여정의 경우 감정이 논해지는 순간들은 마치 베일을 들추듯 제한된 장면에서의 특별한 기회로 허락된다. 그러나 <전설>은 상술했던 수단을 통해 여정의 매 순간 세누아의 내면을 플레이어에게 들려주는 것에 상당한 공을 들인다. 고통으로 얼룩진 과거를 뒤로한 채 영웅이 되어가는 인물의 내면을 관찰할 기회가 되는 것일까? 세누아가 노스먼의 땅에 도착하자마자 진벨의 망령이 그녀에게 말한다. ‘전부 두고 온 줄 알았느냐’고. 그녀가 벗어났다고 생각한 악몽이 다시 등장할 때마다, 세누아는 어김없이 타격을 입는다. 사람들이 죽거나 다칠 때마다 세누아는 자신을 탓한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저주받은 아이라고 세뇌하면서 시작된 이 비합리적인 죄책감은 여전히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한다. 더 이상 인신공양을 할 필요가 없게끔 거인을 물리치겠다고 외치는 순간에도, 역시나 인신공양으로 신을 달랬던 아버지에게 배웠던 것을 떠올리며 확신을 잃는다. 세누아가 거인을 물리칠 때마다, 사람들이 그녀를 신뢰한다. 그녀의 능력에 대한 평판이 쌓이고 새로운 동료가 생긴다. 영락없는 성취와 성장의 순간이지만, 목소리들은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는 세누아의 내면을 들려준다. 아우구스트르가 말 한 마디 할 때마다, 목소리는 그녀를 신뢰할지 불신할지를 끊임없이 논한다. 은신족은 세누아를 시험할 때마다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들을 집요하게 공략하고, 세누아는 매번 이 함정에 걸려든다. 그러나 이 문제들을 극복하는 것은, 이 작품에서 그녀가 이뤄내야 하는 최종적인 성취로써 묘사되지 않는다. 이 문제들은 극복할 수도, 물리칠 수도 없다. 지난번 닥친 어둠에서 살아남았어도, 이번에 닥친 어둠 역시 두렵긴 매한가지다. 작품은 세누아가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모습이 아닌, 이 문제들을 가진 상태의 세누아, 이 문제들에 익숙한 세누아가 여정을 수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이 땅의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감각, 내면의 의심, 불안과의 끊임없는 투쟁, 발목을 잡히는 감각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노스먼의 땅에서 거인들의 실체를 알아채는 순간, 세누아는 공포가 만든 거짓에 지배당했던 익숙한 경험, 이를 꿰뚫어 보기 위해 싸워야 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이곳의 사람들이 자신처럼 진실을 되찾을 수 있도록 안내한다는 자신만의 사명을 찾아낸다. * 야른비에른 숲 레벨은 세누아와 같은 문제들을 겪게 된 동료들을 안내하며 숲을 빠져나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더 나아가 <전설>은 이 지점에 세누아가 최종적인 성취를 달성할 수 있는 해답을 심어둔다. 그녀가 내면에서 겪었던 문제들, 그녀가 <희생>에서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맞서야 했던 문제들이 외면으로 끌려 나오자, 결코 죽일 수 없다는 거인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세누아만의 무기로 벼려진다. 이해와 공감의 전략적 무기화 세누아는 자신의 동족을 고통스럽게 하는 근원을 제거하기 위해 침략자들인 노스먼의 땅으로 향한다. 그러나 처치해야 할 적이라고 생각했던 노예 상인에게서, 한때 저승으로 가는 여정에서 자신을 잠식했던 어둠의 싹을 발견한다. 이 순간 그는 더 이상 세누아가 물리쳐야 하는 잔혹한 괴물이 아니라, 어떠한 이유로 그녀가 과거에 걸었던 길을 걷고 있는 연약한 인간이 된다. <전설>은 세누아가 맞닥뜨려야 하는 현실적인 외부 세계를 묘사함과 동시에, 세누아의 앞에 펼쳐진 여정의 모든 요소들에 세누아가 본인을 투영할 수 있는 측면을 만든다. 토르게스트르는 그녀처럼 억압적인 아버지의 그림자에 갇혀있고, 파르그림르는 그녀처럼 특별한 직관과 시선을 가졌으며, 아우구스트르는 그녀처럼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싸운다. 사람들은 고통과 두려움에 빠져있으며, 세누아는 이 땅에 만연한 도탄의 감각에 익숙하다. 그녀는 자신이 맞닥뜨리는 모든 상황에서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다. 그리고 자신이 그 과거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도 떠올린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여전히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는 세누아는 이 여정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 앞서 말했듯, 작품 전반에 걸쳐 그녀의 여정을 추동하는 것은 그녀가 극복하지 못한 이 문제들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녀가 이 문제들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이 그녀의 여정에 이정표가 되어준다. 학살당한 이들의 고통을 잊지 못해 노스먼의 땅으로 향한 세누아는 어둠의 싹을 품고 있는 노예 상인을 이해하고, 자신이 찾던 고통의 근원이 따로 있음을 알아챈다. 마침내 진정한 근원을 마주하게 된 세누아는 이들조차 고통에서 태어난 존재임을 이해하고, 이들을 해방시킴으로써 여정을 완수한다. 이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최종적인 적들은 이 땅에 살고 있는 3명의 거인들이다. 신들에게 버림받은 노스먼의 땅에서 사람들을 두려움과 고통으로 지배하고, 바다 건너 세누아의 동족에게까지 공포를 퍼뜨리는 악의 근원이다. 그리고 세누아가 이 고통의 근원을 제거하는 방법은 그녀의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닌, 거인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 작품에서 등장하는 보스전은 보스를 처치하는 것이 아닌 보스의 문제를 이해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은신족은 세누아에게 거인들의 사연을 들려줄 때, 이들의 고통을 초래한 사회적 배경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가 아닌, 사람들이 상처받았고, 공포를 느꼈고, 각박해졌고, 호전적으로 변했음을 설명한다. 이는 작품 내에서의 특정한 상황이 아닌, 현실에서의 어떤 상황에서든 벌어질 수 있는 통상적인 문제들로 그려지며, 세누아가 임무를 수행하는 방식 - 이해와 공감을 작동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최소한의 맥락을 제공하는 서술이다. 이를 통해 은신족은 그녀만이 이해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진다.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없었던 일퇴이가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는가? 자신이 초래한 죽음들에 대한 샤우바리시의 죄책감을 이해할 수 있는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끝없는 힘을 탐했던 고디의 집착을 이해할 수 있는가? 이들을 거인으로 만든 고통의 근원들을 찾아 나서는 전후에는 세누아가 느꼈던 동일한 고통의 경험이 병치된다. 연인과 이웃들을 지키지 못했던 분노,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느꼈던 죄책감, 그리고 거인을 물리치는 구원자라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집착. 결코 죽일 수 없는 거인들을 해방하고, 거인에 대한 두려움에 압도된 사람들을 해방시켜 고통의 근원을 뿌리뽑는 이 임무는, 여전히 자신의 문제들을 극복하지 못한 세누아만이 발휘할 수 있는, 고통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라는 능력을 통해 완수된다. 너무나 뛰어난 나머지 스스로 상처 입을 정도로 치명적인 이 약점은, 그녀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게 만드는 서사적 열쇠로 사용된다. 전작이라는 뼈대에 영웅 서사의 살을 붙이다 <희생>이 주인공 세누아가 겪는 내적 고통을 중심 소재로 다루고 있었다면, <전설>은 동일한 주인공으로 하여금 현실적인 과업을 수행하게끔 만든다. 이 상반된 방향의 서사에서 작품은 늘 주인공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서사를 경험하는 당사자의 입장이라는 일관된 시각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작품은 전작에서 서사의 중심이었던 여러 문제로부터 세누아를 극적으로 해방시킨 채 지나간 과거의 요소로 치부하지 않고, 도리어 이를 활용해 타인마저 고통으로부터 구원하는 서사를 꾸려나간다. 고통을 잘 알고 있기에,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인물. 이해와 공감은 작품에서 단순한 메시지가 아닌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전략으로써 사용된다. 사태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파악하고, 칼로는 상대할 수 없는 거인을 쓰러뜨릴 수 있는, 세누아만이 발휘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전략이다. 가상의 인물을 창조하고 묘사하는 것은 때로 놀라울 만큼 쉽다. 이들이 가진 능력의 이면을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전설>은 이를 설명할 뿐 아니라, 이와 무관해 보이는 목표를 가진 서사의 뼈대로 활용하는 방법을 찾아낸다. 사실, 단순히 전작의 묘사적 장치들을 작품의 전반에 걸쳐 삽입하는 것, 그것만으로 전작에서 형성한 정체성을 지키는 동시에 새로운 방향의 서사를 만들어나갈 수 있겠는가. 세누아의 고통을 직시해야 했던 이들은, 세누아 뿐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이머) 박해인 게임에서 삶의 영감을 탐색하는 게이머. 게임의 의도와 컨셉을 전달하는 방식들을 분석하는 데에 관심이 많습니다.
- 합리적 트릭스터: 플레이어와 설계자 사이의 숙련화 게임
게임에 몰입한 플레이어에게 수지타산이나 합리성만큼 낯선 단어는 없을 것이다. 게임 플레이야말로 가장 비합리적인 행위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유용한 생산물을 안겨주지 않는다. 수많은 게이머들이 주변으로부터 ‘공부를 그렇게 했어봐라’ 는 말을 듣는 이유는 게임이 기본적으로 인생에서 효율적인 시간에 해당하지 않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인간의 노동은 삶의 여러 토대를 제공하지만, 게임은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일지언정 물질적인 도움을 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 Back 합리적 트릭스터: 플레이어와 설계자 사이의 숙련화 게임 18 GG Vol. 24. 6. 10. 게임에 몰입한 플레이어에게 수지타산이나 합리성만큼 낯선 단어는 없을 것이다. 게임 플레이야말로 가장 비합리적인 행위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유용한 생산물을 안겨주지 않는다. 수많은 게이머들이 주변으로부터 ‘공부를 그렇게 했어봐라’ 는 말을 듣는 이유는 게임이 기본적으로 인생에서 효율적인 시간에 해당하지 않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인간의 노동은 삶의 여러 토대를 제공하지만, 게임은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일지언정 물질적인 도움을 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인간의 다양한 행위 중에서도 가장 합목적적인 행위이면서 동시에 가장 비합리적인 행위가 곧 게임 플레이인 것이다. 열역학 법칙으로 보면, 게임은 엔트로피가 가장 높은 부문에 해당한다. 이처럼 모순적인 게임플레이의 위상은 ‘어떤 게임을 설계할 것인가’의 문제로도 이어진다. 예컨대 자동차를 만들 때 설계자는 물리학적 효율성에 온 힘을 기울이면 된다. 에너지 효율, 내구성 등이 우선이고 감성의 영역인 디자인은 그 다음에 온다. 그런데 게임의 설계자들은 이 둘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게이밍에서 절대적 효율성, 절대적 감성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두 행성 간의 중력이 균형을 이루는 라그랑주점을 포착하듯 플레이어와 설계자 사이에서는 치열한 두뇌 게임이 펼쳐지고, ‘설계적 효율성’ 과 ‘플레이의 효율성’은 복잡계의 영역으로 간다. 게임은 기본적으로 고도 노동 집약적인 산업과 밀접해 있기 때문에 특히 트리플A 게임은 이 라그랑주점을 찾는 노하우를 생산의 표준으로 만들고자 한다. 반면 플레이어들은 이 안정적인 균형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점으로부터 벗어나 예상치 못한 궤도를 탐험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영화나 방송 산업이 장르 문법이나 컨벤션을 활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게임플레이 자체가 이중적이고 모순적이기 때문에, 플레이어도 설계자도 틀에 박힌 수학적 질서도를 사랑하는 동시에 그것을 한편으로는 혐오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같은 플레이어와 설계자 사이의 긴장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최근 위기를 겪고 있는 유비소프트와 엔씨소프트의 게임들이다. <어쌔씬 크리드> 시리즈로 유명한 유비소프트는 ‘유비식 오픈월드’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글로벌 퍼블리셔다. 유비소프트에서 제작한 대다수의 게임들은 아주 비슷한 플랫포머 구간을 가지고 있는데, 게임 속 메인 진행에 간접적으로만 영향을 미치는 사이드 스토리를 수행하면서 플레이 시간을 늘리고 게이머로 하여금 나머지 공간을 탐색하도록 유도하는 파트다. 화려한 그래픽과 연출, 실감나는 전투 등으로 치장된 메인스토리 진행을 하다 보면 플레이어는 반드시 ‘유비식 오픈월드’를 마주하게 된다. 이 구간은 제작하기 쉽다. 심지어는 자사에서 같은 엔진으로 개발한 다른 게임의 프리셋과 소스, 레벨링 노하우를 가져다 쓸 수도 있다. 유비소프트에 ‘게임 제작의 테일러리즘’이라는 웃지못할 라벨이 붙여진 이유는 이처럼 플레이어들과의 치열한 라그랑주점 찾기를 2순위로 미뤄두고 도입한 개발 프로세스의 균질화가 게임의 매커닉과 플랫폼구간에서 노골적으로 현상되기 때문이다. 이러니 유비식 오픈월드에 익숙한 플레이어들은 플랫포머 구간에 들어서는 순간 한숨을 쉬며 1년차 예비군이 훈련장에 와서 으레 하듯이 뻔하고 관습적인 게임 플레이를 이어나간다. 똑같은 농담, 비슷한 목표와 성취, 하찮은 심부름, 좀 더 원활한 다음 페이즈 진행을 위한 아이템 수집 등…이 때부터 플레이를 지배하는 것은 치열함이 아니라 관성이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관성에 익숙한 존재다. 관성도 플레이의 중요한 요소다. 똑같은 던전에 들어가서 수십 번씩, 땅 짚고 헤엄치듯 한 손으로 클리어해나가는 플레이어들, 스피드런을 즐기는 사람들과 그것을 관음증처럼 지켜보는 게임 ‘시청자’들도 있다. 그러나 글로벌한 네트워크 속에서 게임플레이의 암묵지는 결국 지층처럼 켜켜이 쌓인다. 시간이 지나면서 관성은 악성이 된다는 이야기다. <어쌔씬 크리드> 에서도, <와치독> 에서도, <디비전> 에서도, <고스트리콘>에서도 똑같은 감각으로 비슷한 사이드퀘스트 구간을 헤매다 보면 설계자도 플레이어들도 반발하게 된다. 엔씨소프트의 게임들은 유비소프트와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실패하고 있다. 유비소프트가 개발 층위에서의 테일러리즘을 도입했다가 교착 상태에 빠졌다면, 엔씨소프트는 플레이 층위에서 포드주의를 도입했다가 과소소비라는 파국을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비슷비슷한 사이드퀘스트와 아이템 수집 등으로 이뤄진 유비식 오픈월드는 적당히 플레이하면서 넘기면 된다. 그런데 ‘리니지 라이크’ 게임들은 여기에 비즈니스 모델까지 더했다. 플레이어들을 처음부터 ‘린저씨’로 호명하고, 그들이 게임 설치에 앞서 두둑한 현금부터 준비할 것을 가정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관습적인 플레이가 뭔지를 먼저 끼워넣는 식이다. 패키지 관광객들을 싣고 하루에 수십 군데를 투어하지만, 그 장소들은 모두 협약을 맺은 곳이거나 쇼핑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들이다. 한국의 특성은 이렇게 성공한 한 선구적인 사례들을 후발 주자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카피한다는 데 있다. 이제 우리는 ‘리니지 라이크’의 모든 게임들에서 ‘유비식 오픈월드’와 같은 ‘한국식 과금 구간’을 본다. 심지어는 플레이타임이 어느 정도 되었을 때 현금결제 창이 뜰지도 플레이어들은 예측하게 된다. 엔씨를 포함해 그간 한국 게임사들이 ‘생산한’ 게임들은 이 문법을 따라 포드주의적 자동화까지 도입, 방치형 게임이나 자동사냥으로까지 진화했다. 이 게임들은 게임플레이의 관성과 새로움 사이의 경합, 개발자와 플레이어간의 합리적 두뇌게임을 제거하고 모든 것을 교환의 법칙으로 환원한다. 레벨업도, 좌충우돌도, 글리치도 어뷰징도 없는 세계 – 얼마나 매끄러운가? 그러나 이런 식의 포드주의는 필연적으로 ‘탈숙련화’를 야기한다. 노동의 탈숙련화가 아니라 개발의 탈숙련화, 플레이의 탈숙련화다. 개발자들은 새로운 기술과 엔진을 실험하지 못해 뒤처지고, 플레이어들은 다른 게이밍의 경험을 받아들이지 못해 도태된다. 포드주의가 야기한 문제, ‘탈숙련화’는 자본주의의 역설이자 자동화의 고질병이다. 포드사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어셈블리 라인에 완전 자동화 결합 시스템을 도입했고, 일시적으로 매출은 엄청나게 증대됐다. 대량의 노동자들은 해고되거나 회사를 떠났고, 공장에 남은 사람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자동화 기기 옆에서 빗질이나 허드렛일 따위를 하는 존재가 됐다. 그러나 탈숙련화가 진행되자, 역설적이게도 미국 전체 노동자의 삶이 위기에 빠졌다. 여기엔 두 가지가 있다. 포드 공장에 도입된 모델이 하나의 플랫폼이 되어 다른 제조업 부문에서도 우후죽순 도입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실업 상태가 되거나 비숙련 단순직종으로 이동, 자동화 공장에서 생산된 상품들이 시장에서 판매되지 않고 재고가 증가하는 역설이다. 숙련노동자들이 사라지자 생산 현장에서 공유되던 암묵지 노하우들도 사라졌고, 결국 미국의 완전자동화 산업은 일본의 반자동화 산업에 헤게모니를 내주게 되었다. 포드주의는 야심찬 자동화를 추구했지만 그로 인해 빈부 격차가 커지고, 노동자들의 삶이 불안정해질 뿐 아니라 공산품들의 품질도 떨어지는 결과를 야기했다. 유비나 엔씨의 제국이 조금씩 몰락하는 가운데, 게임 설계자들은 ‘탈숙련화’가 게임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현상임을 이제는 상기해야 한다. 경제적이고 수학적인 효율성은 게이밍에서 다각적으로 다뤄져야 한다. 플레이어는 합리적이면서 동시에 광기어린 사람들이고, 설계자들은 정교한 건축술을 구사하지만 동시에 베토벤의 영감으로 창조하기도 하는 입법자들이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들은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해 글리치를 찾거나, 최단시간 레벨업 경로, 보스 제거에 가장 효율적인 세팅을 찾아내고자 하지만 그 과정 자체는 능동적면서 복잡한 시행착오가 동반되어야 재미를 느낀다. <세키로>나 <다크 소울> 시리즈에 몰입한 사람들은 왜 10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손가락 관절염을 느끼며 한 보스를 붙잡고 소리를 질러댈까? 역사에 문외한인 <문명>의 플레이어는 왜 17세기에 스텔스기를 완성하는 세종대왕과 몇날 며칠 자웅을 겨루는가? 자학적인 성격이어서가 아니라 합리성을 향한 복잡성의 과정, 게이밍의 역학적 질서도와 복잡성이 교차하는‘에르고딕(ergodic)’에 탑승한 승객이어서이다. 그들은 열 시간이고 스무 시간이고 게임패드를 집어 던져가며 가장 어려운 난이도로 보스를 클리어한 다음, 이를 깨기 위해 동원한 다양한 전략과 방법, 세팅, 꼼수까지 자랑스럽게 소셜미디어나 유튜브에 자랑할 것이다. 이렇게 공유되고 축적되는 숙련 비법은 모든 플레이어들에 의해 재즈 스탠다드 음악 연주처럼 변주될 것이고, 개발자들도 이를 참고할 것이다. ‘숙련화’ 된 플레이어와 개발자들에 의해 긍정적 피드백(positive feedback) 루프가 완성된다. 게이밍이 훨씬 다양하고, 복잡하고, 기발한 방식으로 플레이어와 개발자 모두를 놀라게 하며 희열에 차게 만들고, 새로운 매커닉과 창의적인 구조가 만들어진다. 탈숙련화가 아니라 숙련화, 소외가 아니라 주체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유비식 플랫포머 승객’ 이나 ‘린저씨’들과 그들을 고객으로만 호명하는 개발사들에는 그런 피드백 루프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유비소프트와 엔씨 및 이들의 ‘탈숙련화’ 모델을 참조로 하는 모든 게임개발사들은 비즈니스 모델이나 제작효율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숙련된 플레이어들로부터 숙련된 플레이를 확보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잘 활성화된 게임은 당연히 <마인크래프트>다. 플레이어가 설계자가 되고, 설계자가 자신이 창조한 게임을 플레이한다. 노하우는 오픈소스 환경에서, 커뮤니티에서 공유될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전문가집단과 협업을 하거나 공동 프로젝트까지 한다. 숙련화된 설계자와 플레이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들은 모두가 ‘합리적 트릭스터’ 다. 우리는 합리적 트릭스터들이 최근 열광하는 숙련화 게임의 두 가능성을 주목해야 한다. 첫째로는 <스텔라 블레이드> 같은 게임이 전통적인 게임 서사와 미장센으로 뉴트로로 돌아오는 방식,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긴 하지만 생성AI를 활용한 게이밍의 등장이다. 이 두 시나리오 모두 테일러리즘이나 포드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산업 부문에서나 게이밍에서나 완전히 화려하게 자동화된 기술진보가 아니라 결국 합리적 효율성과 주체적 효능감 사이를 횡단하는 사람들, ‘합리적 트릭스터’들이 길을 여는 것을 본다. ‘트릭스터’의 감각을 상실한 게임의 설계자와 플레이어들은 더 이상 체스를 두지 못한다. 트릭스터는 질서를 가장한 혼돈을 창출하기 좋아하는 악당이고, 꾀를 내어 난제들을 교묘히 해결하는 것을 좋아하는 현자다. 게이밍은 수많은 트릭스터들이 머리를 맞대고 누가 누구를 어떻게 속일까, 황금율을 어떻게 파괴할까 고민하면서 자신들만의 라그랑주점을 찾아나가는 장이다. 문학이나 시네마에서는 이런 것들이 기만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 시네마의 관객은 종종 맥거핀을 찾아내고 실망하거나 핍진하지 못한 연출에 화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게이밍에서 좋은 설계자들은 재미를 만들어내기 위해 플레이어들을 어떻게 기만할지를 숙고한다. 플레이어들은 설계자의 주권을 깨트리는데서 희열을 느낀다. 게이밍은 플레이어와 설계자 사이의 탈숙련화 게임이 아닌 숙련화 게임을 통해 더 풍요로워지는 것이 아닐까? 확실히, 8비트 게임의 등장 이후 수십 년간 축적된 게이밍 경험은 유비식 오픈월드나 한국형 과금 게임에 종언을 고하고 있다. Tags: 오픈월드, 트릭스터, 포디즘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디지털 문화연구/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신현우 문화연구자, 문화평론가이며 기술비판이론과 미디어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게이밍, 인공지능, 플랫폼, 블록체인을 둘러싼 문화현상을 연구하며 서울과기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한다.
- One Hundred Pounds of Bear Meat: Educational Games and the Lasting Legacy of The Oregon Trail
Writing about The Oregon Trail has become its own genre at this point. So much has been published on MECC’s classic game that all the clever references to dysentery, one of the many afflictions the player characters will experience on their journeys, have already been used. This is a testament to the game’s legacy and its lasting presence that bridges gaming culture and mainstream American popular culture. < Back One Hundred Pounds of Bear Meat: Educational Games and the Lasting Legacy of The Oregon Trail 06 GG Vol. 22. 6. 10. - You can see the korean version of this article in here: https://gamegeneration.or.kr/board/post/view?pageNum=1&match=id:124 Writing about The Oregon Trail has become its own genre at this point. So much has been published on MECC’s classic game that all the clever references to dysentery, one of the many afflictions the player characters will experience on their journeys, have already been used. This is a testament to the game’s legacy and its lasting presence that bridges gaming culture and mainstream American popular culture. The game has had such an impact on American youth of the 1980s that ‘The Oregon Trail Generation’ has been used to describe the first generation of people who grew up with videogames present in their classrooms. This article revisits The Oregon Trail and idea of the The Oregon Trail generation, and considers why the game has resonated with players for decades. A Brief History of the Oregon Trail and The Oregon Trail The actual Oregon Trail, after which the game is named and themed, was a road used by American settlers migrating west to Oregon, California and Colorado from the 1840s until the completion of the transcontinental railroad in 1869. David Dary estimates that at its height, the road was used by at least 250,000 people, mostly families, who traveled for over four months across perilous terrain to reach their new homes. Unsurprisingly, this was a dangerous undertaking and according to the National Historic Oregon Trail Interpretive Center, at least 20,000 people died while traveling the trail. The story of the migrants and the trail became a crucial piece of American history taught in schools and celebrated in literature, films, and eventually in The Oregon Trail game. The Oregon Trail has had several iterations. Developed by Don Rawitsch, Bill Heinemann and Paul Dillenberger, the earliest version of The Oregon Trail developed out of a board game Don Rawitsch designed to teach westward migration to his own classroom. The game was then picked up by MECC, a Minnesota-based educational game developer, where the original designers converted the game into a text-adventure computer game that was distributed among Minnesota schools in 1975. The game first saw success in Minnesota and was later sold in schools across the United States with the help of a partnership between MECC and Apple, who were pushing to get their Apple II computer system into every American school. As the Apple II successfully worked its way into the fabric of the American education apparatus, The Oregon Trail was reworked for this new pervasive computer system in 1985 and became the version of the game that would be redistributed across American schools in a range of formats. Since then, the game has become a full-on brand with even more iterations in addition to contemporary board and card games. For this article I will focus on the 1990 version of the game. Playing The Oregon Trail In The Oregon Trail you assume the role of a family of travelers, and beginning in the town of Independence, Missouri, you attempt to traverse the long road across America to Oregon City. You begin by choosing an occupation, either a banker, a carpenter, or a farmer, who will have a set amount of funds with which to purchase oxen to pull the cart, clothes to shield yourself from the elements (or more likely to be stolen off your back by thieves), bullets for hunting, rations for survival, and wagon parts to repair the unavoidable damage your vehicle will take. Bankers will have the most funds but gain the fewest points, while farmers have the least, but are rewarded with tons of points for completing the game successfully. After choosing your occupation, the game asks you to name your party of five travelers. This is an exercise in cruelty, as whatever party you bring into existence here will be ground down through all manner of torment on their (likely doomed) journey West. Part of the magic of The Oregon Trail is its facade as an innocuous educational game with pleasant colors and a sprinkling historicity in its early screens. This illusion quickly gives way soon after Matt the shopkeeper takes your money in exchange for 3 yoke of wandering oxen that will surely ferry your family to their grave. * Playing The Oregon Trail, 1991 As you depart Independence you are given information about the weather, your stock of rations, the health of your group, and the distance to the next landmark on your trip. You’re able to choose how many miles you travel per day, and how many rations you consume, all the while experiencing the dire effects of travel in the wilderness upon the bodies of your party. Monitoring the health of your party seems to be the core mechanism of the game, but there is often little to be done for the many afflictions and events that besiege your travelers besides resting when you reach an outpost and making sure you don’t run out of food. The most famous single line of the game is without a doubt “You have died of dysentery,” which has become a popular meme that reflects the likelihood that your party will perish. If we consider what this means for the game in our cultural memory, it is both an educational game and an oddly compelling misery simulator. On my recent playthrough of the game I was robbed by thieves twice, afflicted by cholera and measles, bitten by snakes, and all the children broke their legs, and this was only a fraction of the misfortune that befell my group. If your group perishes you are met with a gravestone adorned with pithy text that essentially taunts you to try again, and many players did just that despite how hopeless the game could seem. Upon running out of rations you will need to gather your bullets and your rifle and go on the hunt. In the version of the game I played you could hunt squirrels, deer, buffalo, and bears. Hunting is represented by a minigame where rocks and shrubbery block the path of your bullets from hitting animals that pass across the screen. Smaller animals provide very little meat, but buffalo and bears provide tons of meat, of which you can only ever carry one hundred pounds back to the wagon. If you want to feed your family for the journey and you are anything but a wealthy banker, you will need to spend a substantial amount of time hunting, and the travelers might die anyway. While the gamified struggles of the travelers are the strongest associations with the game, you also pass by artistic renditions of landmarks across the trail as an engagement with geographical Americana. You trade and speak with other travelers and Indigenous Peoples along the trail, although unsurprisingly the history presented here is grounded in Americentric tropes that don't reflect the reality of American settlement. Katharine Slater notes that “Although various editions of The Oregon Trail seem to make an effort to move beyond explicit stereotypes, the game nevertheless perpetuates a racist narrative that privileges the ethos of white settlement through its refusal to engage directly with the genocidal consequences of westward expansion.” Had The Oregon Trail done a better job of conveying the details of what settlement and settlers did to Indigenous Peoples, it probably wouldn’t have ended up in schools in the first place. Part of the game’s reach was its appeal to a settler-colonial curriculum. While some of this is speculation, it is clear The Oregon Trail is not a particularly accurate or nuanced historical document, and yet the game became the poster child for educational games and continues to resonate with players. It has also become synonymous with a generation. The Oregon Trail Generation The concept of ‘The Oregon Trail Generation’ is a challenging one. The term refers to people who were born between 1977 and 1985, also labeled as ‘Xennials,’ a ‘micro-generation’ between Generation X and Millennials.’ This ‘micro-generation’ is so named because they grew up as computers were passing into the mainstream, particularly through the presence of homeroom computers or computer labs in schools that were often bundled with copies of The Oregon Trail. In practice, ‘The Oregon Trail Generation’ is a bit troubling as a label because the association with age, technological emergence, access, and aptitude doesn’t reflect how technology made its way into homes and schools from 1970 through to the 2000s. There were plenty of people from Generation X who developed technical competencies with the technology (and many who in fact designed the technology in the first place), and there were also many homes and schools that weren’t equipped to effectively expose students to these technologies until well into the Millennial generation. While the temporal parameters of The Oregon Trail Generation don’t really work, the term does point to students who grew up with educational games in the classroom as having a different experience than what came before. It is more accurate to think of the ‘The Oregon Trail Generation’ as a group that is parallel to Xennials but not limited to the same temporal boundaries. They should primarily be defined as the students or even independent Generation X learners who had regular exposure to educational games in the classroom or in their personal lives. In this sense we’re referring more to people who grew up accustomed to educational games as a part of the overall process of engaging with the world, of which The Oregon Trail was a fundamental part for many learners, although it was far from the only game in this genre to make a lasting impact. What was it about The Oregon Trail and other popular educational games like The Carmen Sandiego series (Broderbund, 1985), or for my classmates and I, Cross Country Canada (Ingenuity Works, 1986), that produced such strong feelings and positive memories about these kinds of games? When I was growing up it was not uncommon to rush to the one computer in the back of the classroom to play Cross Country Canada, another The Oregon Trail-inspired educational game, if we had spare time in class. As young learners we were compelled to play: we were actively anticipating learning geography by playing a game that allowed us to traverse Canada’s highways. It wasn’t just something we were doing because we were in school and it was expected of us, it was part of our days that we looked forward to. * Driving Canada's Highways in Cross Country Canada, 1986 Going back to The Oregon Trail, why might this be? Does The Oregon Trail represent history well? Not particularly: it retreads familiar tropes of the settling of the American West, including extremely dated representations of Indigenous Peoples - but like many other games branded with the ‘educational games’ label, it also provided a level of attachment to the material that can’t be overlooked. The cultural legacy of this game, despite its reputation for producing challenge, misery, and digital dysentery, is one of pop culture presence and fond remembrance among those who played it. This is partly because The Oregon Trail and its educational game offspring provided a sensory connection to a curriculum-safe rendition of topics that were so often off-putting to students because the delivery mechanisms of dusty chalk and hard-to-read projected acetate sheets simply did not work for all kinds of learners. Traditional modes of teaching can produce a familiar experience despite what subject was being taught, and for many students they weren’t as compelling as naming our family and sending them to their untimely end on the long trail west. The Oregon Trail stands out because at the time it was central to a new way of learning - a break in the routine - that added color, drama, and choice to an often rote learning routine. So why haven’t educational games reached the same heights culturally since The Oregon Trail? Well for one, the technology of some classrooms has increased substantially, and the classroom PC isn’t as novel a teaching tool as it once was. What’s more, at the time of The Oregon Trail’s rise, far fewer people were playing games or had games in their home, so educational games had far less competition from mainstream games and were more impressive as an experience. As time passed the kinds of educational games that school boards purchased were severely outclassed aesthetically and in playability by the games young people had at home. In some cases we were left playing games from the early 1990s in classrooms in the early 2000s. Other educational games did leave a mark on students but they weren’t first, nor were they implemented at the same time as a large-scale technological advancement in education across the United States with the introduction of the Apple II. The Oregon Trail was the right game at the right time, but it also resonated with those who played it. It has become emblematic of the many educational games that came after, as the aesthetic and design choices became prominent across other games. It is not a perfect historical document, but as a learning tool it drew students in to play the game and engage at least a little with the subject, and there is no doubt that culturally we have held onto fond memories of the experience. Much like the game’s limit on one hundred pounds of bear meat, as learners and players we could only carry a small piece of what the game provided for us, and in this case a substantial portion of what we carried were memes about dysentery. But that doesn’t mean that The Oregon Trail didn’t succeed as an educational game. Games like The Oregon Trail are just one component of our educational journey that build our interest in particular topics or allow us to explore subjects in ways other media cannot. But all the elements of our learning: our teachers, our books, our study habits, are what get us even further down our own perilous trails.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Game Researcher) Marc Lajeunesse Marc is a PhD candidate in Concordia University's department of communication studies in Montreal, Canada. Marc’s research focuses on toxicity in online games. He is driven to understand toxic phenomena in order to help create more positive conditions within games with the ultimate hope that we can produce more equitable and joyful play experiences for more people. He has published on the Steam marketplace and DOTA 2, and is a co-author of the upcoming Microstreaming on Twitch (under contract with MIT Press). (Game Researcher) Bora Na I'm a game researcher. I've been playing games for a long time, but I happened to take a game class at Yonsei University's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fter graduation, I sometimes do research or writing activities focusing on game history and culture. I participated in , , and so on.
- [논문세미나] From geek masculinity to Gamergate: The technological rationality of online abuse
이 논문은 온라인 커뮤니티와 플랫폼을 중심으로 자행되는 사이버 폭력의 배경을 밝히기 위해 우선 기술 또는 게임로 정체성을 유지하는 오타쿠 남성성이 있음을 짚어낸다. < Back [논문세미나] From geek masculinity to Gamergate: The technological rationality of online abuse 16 GG Vol. 24. 2. 10. 2014년 미국에서 ‘게이머게이트(Gamergate)’라고 불리는 희대의 사건이 발생했다. 특정 게임 개발자에게 온라인 상 집단 공격이 쏟아졌고 가해 집단은 ‘게이머’로 표상되는 익명의 온라인 플랫폼 이용자들이었다. 이들이 목표물로 삼은 대상은 여성이었으며 “저 XX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게임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심리가 그들의 공격 속에 숨어있었다. 2023년 말, 한국에서 게이머게이트와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 대형 게임 회사의 게임 홍보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한 여성 애니메이터가 남성을 비하하는 특정 표식을 애니메이션 안에 의도적으로 심었다며 온라인 이용자들이 집단적 공격을 가한 ‘뿌리 사태’가 바로 그것이다. 2014년의 미국의 게이머게이트와 2023년의 한국의 뿌리 사태는 10년의 시차가 발생하지만 온라인 커뮤니티 이용자들이 여성 게임 업계 종사자를 향해 다양한 방식의 폭력을 가했다는 면에서 비슷한 점이 있다. 두 사건을 함께 놓고 바라볼 수 있을까? 이번 논문 세미나에서 다룰 논문은 “오타쿠 남성성에서 게이머게이트까지: 사이버 폭력의 기술적 합리성(From geek masculinity to Gamergate: The technological rationality of online abuse)”이다. 저자는 게이머게이트 사건처럼 사이버 폭력이 발생한 배경에 *오타쿠 남성성이 있음을 짚고, 트위터나 포챈 같은 온라인 플랫폼이 사이버 폭력을 상당 부분 조장했음을 논문을 통해 밝히고 있다. *오타쿠 남성성이라고 번역한 개념의 원제는 ‘Geek Masculinity’다. ‘Geek’은 한국어로 보통 괴짜라고 해석된다. 따라서 ‘괴짜 남성성’이라고 번역 할 수 있으나 한국에서는 특정 대상에 집착하고 사회적으로 폐쇄성을 보이며 온라인 커뮤니티에 매몰된 사람들을 오타쿠라고 왕왕 부르기 때문에 그 의미를 살리기로 했다. 게이머게이트의 시작 게이머게이트 사건의 배경에는 2013년의 게임 가 있었다. 우울증 환자가 겪는 어려움을 1인칭 시점에서 담아낸 텍스트 기반 게임으로, 여성 게임 개발자 조이 퀸(Joey Quinn)이 개발했다. 퀸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게임의 서사를 구성하면서 다른 우울증 환자들이 이 게임을 통해 삶에 도움을 얻기를 희망했다. 게임은 유명 배우 로빈 윌리암스의 자살 소식과 같은 날 스팀에서 발매되어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고 게임 매체에서 기사로 다뤄지기도 했다. 하지만 온라인 커뮤니티 포챈(4chan)에서는 환영 받지 못했다. 포챈 이용자들은 게임 발매 이후 개발자 조이 퀸을 비난하는 담론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게임은 마치 소설을 읽듯 단조로운 구조를 가졌기 때문에 ‘진정한 게임’이 될 수 없었다. 게다가 게임에서 표현하는 우울증은 사실 여성들의 문제이자 개인의 무능력으로 인한 것이 아니냐는 논조도 있었다. 커뮤니티 이용자들은 퀸의 게임이 당시 게임업계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자 이를 부정적으로 보면서 게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게임 발매 1년 뒤인 2014년, 포챈에 올라온 하나의 글로부터 문제가 촉발됐다. 이 글은 퀸과 과거 연인 관계였다고 주장하는 애론 조니가 작성한 것으로, 퀸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내용이었다. 퀸이 자신을 두고 바람을 폈는데 그 대상은 게임 평론가였고, 퀸은 자신이 여성이라는 점을 게임 업계에 악용하여 게임이 실제 수준보다 높게 평가 받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 글은 원래 포챈에 올라오기 전 다른 웹사이트에 처음 게재되었다. 하지만 게시판 관리자로부터 검열되어 빠르게 삭제되었고 조니는 퀸에 대한 비난 담론이 이미 있었던 포챈으로 자리를 옮겨 글을 재업로드한 것이다. 게임계 사이버 폭력의 대명사가 된 ‘게이머게이트’ 사실 이 주장은 조니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 사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실이건 아니건 커뮤니티 이용자들에게 그 여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커뮤니티는 퀸을 게임 업계를 망치려 한 악인으로 지목했다. 이어 퀸을 향한 비난 및 조롱이 담긴 글들이 빠르게 생산되고 또 재생산 되었다. 집 주소와 연락처 같은 신상 정보는 윤리의식 없이 무차별적으로 유통되었다. 걷잡을 수 없는 집단 사이버 폭력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포챈에서 시작된 폭력의 흐름은 다른 곳으로 일파만파 번져나갔다. 에잇챈(8chan)과 같은 타 온라인 커뮤니티나 레딧(Reddit), 트위터(Twitter)로 퍼져갔다. 포챈과 에잇챈은 특히 ‘오타쿠’(geek) 성향의 ‘남초’ 커뮤니티들로 알려져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신상 정보가 노출된 퀸에게 자살 권유, 강간 협박, 살해의 위협이 이어졌다. 퀸은 친구들이 있는 안전한 곳으로 거주지를 옮기기도 했으며 이러한 신상 털기와 신변 위협은 퀸 뿐만이 아니라 퀸 주변의 게임 개발자나 사태를 비판하는 평론가들, 더나아가 게임 업계 내 여성과 소수자 전반에게 가해지면서 수많은 피해자를 낳았다. 이 사건이 ‘게이머게이트’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배경에는 애덤 볼드윈이라는 극우 성향의 미국의 배우가 있다. 그는 트위터를 중심으로 우파 정치 메시지를 전파하는 인물 중 하나였는데, 과거 1970년대 미국 정부에서 조직적으로 사실이 은폐된 ‘워터게이트’(watergate) 사건의 이름을 따와 게임계에서도 일부 종사자들로 인해 사실이 은폐되고 있다며 #gamergate 라는 해쉬태그를 트위터에 처음 만들었다. 그리고 좌파 성향의 페미니스트로 인해 위협이 발생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추가했다. 이에 동조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트위터에서 게이머게이트 해쉬태그를 달고 무분별한 악플을 일삼고 심지어는 ‘십자군 전쟁’ 밈 이미지에 이입하면서 피해자들과 이들에 동조하는 일반인들까지 집단적으로 괴롭혔다. 온라인 커뮤니티발 대규모, 연쇄, 집단 사이버 폭력 사태였던 게이머게이트는 온라인 대안 우파의 세력 확산에 불을 지피면서 결론적으로 2016년 트럼프가 당선된 배경 중 하나로 꼽히게 된다. 기술을 취해 남성성을 획득한 오타쿠들 오늘날 게이머게이트와 같은 사이버 폭력(online abuse)은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사회적 문제이다. 이에 따라 논문은 이러한 사이버 폭력이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밝히기 위해 컴퓨팅 기술의 발전 과정 속에서 나타난 ‘오타쿠 남성성’에 주목한다. 우선, 논문에서는 초기 컴퓨터가 여성의 도구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세계 대전 당시, 복잡한 계산을 수행하기 위해 개발된 컴퓨터를 주로 여성 과학자들이 다뤄왔다. 전후에도 단순 반복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인식이 지속되어, 컴퓨팅 분야에서는 낮은 임금으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주로 종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으로 컴퓨터는 전문가들이 다루는 도구로 변모하게 되었고, 1960년대 들어서는 남성 공학자들의 전유물로 간주되었다. 1980년대에는 컴퓨터와 게임을 소유 및 정복하는 이미지가 남성 문화에 적합하다고 대중문화를 통해 여겨지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남성성은 힘이 세다거나 건장한 외모, 사교적인 태도 등으로 여성들에게 호감을 얻는 것으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컴퓨팅 분야에서 기술적 능력을 가진 경우에는 예외가 될 수 있었다. 프로그래머나 컴퓨터 엔지니어 중에서 대인관계나 공감성 면에서는 부족할 수 있지만 기술적 능력을 갖춘 사람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다. 실리콘 밸리 신화에서는 사회성이 부족하거나 괴팍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도 성공적인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게임과 같은 기술 문화, 온라인 문화에 능숙한 오타쿠(논문에서는 ‘geek’)들은 자신의 입지를 지켜내기 위해 기술 지식과 적성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는 것이 논문의 분석이다. 논문에 따르면, 이러한 오타쿠 문화는 전통적인 남성성을 대신하여 기술이라는 대안적 루트를 통해 남성성을 획득하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만약 게임이나 인터넷 문화 같은 기술의 영역에 남성적 정체성을 흔드는 다양한 사용자가 나타난다면, 침범하지 못하도록 방어하고 유지시키는 목적에서 기술 문화가 위협을 받게되면 공격적인 충동이 발생할 수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폭력을 더 키운 것은 ‘플랫폼 기술’ 온라인 플랫폼들의 소통 문화와 상호작용 메커니즘은 폭력적이고 격렬한 교류를 초래했지만 사용자를 타인의 학대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제공하지 않았다. 게이머게이트 사건에서 포챈과 에잇챈이 주요 무대 및 자료 생산장으로 부각되었다. 익명 사용자로부터 작성된 글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되며, 빠르게 댓글이 달리고, 밈이 전파되지만 이전에 작성된 글을 손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작성자가 내용에 책임감을 지지 않는 구조가 근본적으로 있다. 트위터는 자신의 트윗에 대한 다른 사용자의 답글을 삭제할 수 없게 하며 논쟁이 쉽게 발생할 수 있도록 설계 되었다. 따라서 자료를 신속하게 유통하는 유통망이자 집단적이고 연쇄적인 공격을 허용 할 수 있었다. 물론 트위터에는 부당한 대우에 맞서고 이름을 밝히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지만, 평판, 고용, 사용자의 심리적 건강에 큰 피해를 입히는 대량 표적 공격의 수단으로도 사용되었다. 그런데 게이머게이트 사건은 논란을 이용하여 이익을 취하는 측에 의해 한 층 더 복잡해진다. 극우 저널리스트 마일로 야노풀로스(Milo Yiannopoulos)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게이머게이트를 옹호하며 중요한 존재로 부상했다. 그는 여성 게임 평론가인 아니타 사키시안(Anita Sarkkesian)을 모욕하는 유튜브 동영상으로 유명세를 얻었는데, 이 영상은 핵심 메시지는 게이머게이트였고 사키시안을 향한 모욕을 정당화하고 있었다. 동영상은 수백만 회 시청을 기록하며 광고 수익을 창출했고, 그는 후원 플랫폼인 페트리온 계정을 운영하면서 거액의 후원도 받았다. 이러한 개인뿐만 아니라 게이머게이트의 트래픽으로 다양한 플랫폼과 소셜 미디어가 수익을 얻는 비즈니스 모델이 추가로 작동하여 논란은 더욱 잔혹하게 진행되었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기술적 합리성’ 개념을 통해 1964년에 인간과 기계, 기술은 독립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기술 또한 사회가 만들어낸 요소로, 특정 장치나 도구를 넘어서 사회적 관계, 사고와 행동의 패턴이 모두 기술에 포함된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기술은 사회적 관계를 재생산하며 사회적인 도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포챈과 같은 온라인 커뮤니티나 트위터와 같은 소셜 미디어 서비스는 이러한 기제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고, 더 이상 자유분방하고 중립적인 유틸리티가 아닌 합리성에 의해 젠더 불평등을 유지시킨 것이다. 게이머게이트를 통해 바라보는 뿌리 사태 이 논문은 온라인 커뮤니티와 플랫폼을 중심으로 자행되는 사이버 폭력의 배경을 밝히기 위해 우선 기술 또는 게임로 정체성을 유지하는 오타쿠 남성성이 있음을 짚어낸다. 만약 다른 정체성이 기술 영역을 침범했을 때 오타쿠 남성성은 그에 대한 방어 기제로서 공격적인 충동 반응을 보이는데, 이러한 양상이 온라인 상에서 당사자를 향한 허위 소문 유포, 모욕, 조롱, 신상 털기, 신변 위협 등의 폭력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투명한 공론장이라는 신화에 둘러싸인 온라인 플랫폼들은 사실상 폭력을 더 키우는 존재였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존재하는 사이버 폭력의 상황에서 합리성의 원칙에 의해 왜곡된 의견을 재생산하는데 일조 하기도 하고, 공격을 용이하게 하고, 비즈니스 모델을 접목시켜 이익을 취하기도 했다. 논문을 통해 적용하면, 2023년의 한국의 ‘뿌리 사태’는 남성을 비하하는 표식이 게임 애니메이션마다 교묘하게 숨겨져 있다고 믿는 음모에 휩싸인 한국 오타쿠 남성성 주체들이 일으킨 사이버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애니메이션을 초 단위의 프레임으로 슬라이스 하여 캐릭터의 움직임이나 화면의 구름 표현에서 집게 손가락 모양을 어름풋이 끼워 맞추는 허무한 주장들은 오타쿠 남성성의 근간을 유지해주는 게임이 다른 정체성으로부터 위협을 받는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애니메이터는 10년 전 미국의 피해자들과 똑같은 수법으로 비난과 모욕을 받고, 개인 정보를 노출 당하고, 고용과 신변의 위협을 받는 꼴이었다. 비록 음모가 상대적으로 빠르게 해소되어 더 큰 폭력으로 더해지진 않았지만 애니메이터를 고용했던 사업체는 평판에 위협을 받고 금전적인 피해를 떠안게 되었다. 다만 뿌리 사태에서 하나 더 짚고 갈 점은, 폭력을 더 키운 기반이 포챈이나 트위터가 아닌 원청을 준 게임사였다는 점일 것이다. 물신주의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유저 이탈의 두려움 때문에 사실 관계 확인보다는 폭력의 편에서 설 수밖에 없던 그들의 대처는, 과거의 논문이 다 짚어내지 못한 새로운 해석점을 요구하고 있다. 참고문헌 Salter, M. (2018). From geek masculinity to Gamergate: The technological rationality of online abuse. Crime, Media, Culture, 14(2), 247-264.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연구자) 보라무 사회적인 관점에서 게임을 연구합니다. 게임이라는 도구를 통해 결국 인간을 탐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은 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스팀펑크적 제작 기술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와우>)는 전투가 메인 컨텐츠인 MMORPG 게임이다. 세부적으로는 테마파크 유형이다. 작중의 세계에서 유저는 온갖 다양한 활동을, 현실의 그것을 모사한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초나 광물을 채집할 수 있고, 낚시를 할 수 있고, 전투와 낚시를 통해 얻은 재료로는 요리를 할 수 있다. < Back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스팀펑크적 제작 기술 24 GG Vol. 25. 6. 10. 예술 매체는 현실을 모사한다. 인간의 문명사는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낸 역사다. 우리는 도구의 동물이다. 심지어 우리가 만든 가상 세계 속에서도 인간은 무언가를 만든다. 축약되고 변형된 형태로 모사한 것이지만 어쨌든 만든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와우>)는 전투가 메인 컨텐츠인 MMORPG 게임이다. 세부적으로는 테마파크 유형이다. 작중의 세계에서 유저는 온갖 다양한 활동을, 현실의 그것을 모사한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초나 광물을 채집할 수 있고, 낚시를 할 수 있고, 전투와 낚시를 통해 얻은 재료로는 요리를 할 수 있다. 요리 외에도 만들 수 있는 것은 많다. 전문기술이라는 분류에는 채집과 제작 두 가지 종류의 기술이 있는데, 유저는 두 가지를 선택해 배울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채집 기술 하나를 배우고 이 채집 재료를 이용하는 제작 기술 하나를 배우지만, 채집 둘 혹은 제작 둘을 배우는 경우도 있다. 약초를 채집했다면, 이를 재료로 사용하는 연금술과 주문각인을 고려해봄직하다. 채광 기술을 배웠다면, 광석을 이용하는 대장기술, 기계공학, 보석세공 등이 어울린다. 이런 제작 기술은 마법이나 전투 능력 등의 기술과는 성격이 다르다. 즉발 효과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물건, 즉 아이템을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영구적인 장비일 수도 있고 쓰면 사라지는 소모품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제작품은 전투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적거나 아예 없기도 하다. 캐릭터가 착용하는 장비나 능력치를 일시적으로 올려주는 아이템 같은 경우는 전투에 도움은 되지만 절대적인 수준은 아니다. 반면 기계공학으로 만들어 일시적으로 활공을 할 수 있게 하는 글라이더 같은 아이템은 전투와는 거의 무관한 단순 장난감이다. 예는 더 들 수 있다. 연금술을 배워 만들 수 있는 비약과 영약, 회복 효과를 주는 물약, 무기를 일시 강화하는 대장기술의 숫돌과 무게추, 주문각인으로 만드는 레이드에서의 버프 아이템인 반투스 룬 같은 것은 전투를 돕지만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다. 기계공학으로는 전투 중에도 부활을 쓸 수 있는 아이템을 만들 수 있다. 있으면 좋지만 없다고 해서 공략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 보석세공 기술로 만들 수 있는 아이템 ‘보석 맞추기’를 사용하면 타일 매칭을 미니게임으로 플레이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게 전부다. 물론 몇몇 클래스는 제작 기술이 아니어도 아이템을 만들어낼 수 있다. 마법사는 마법으로 음식을 만들 수 있고, 흑마법사는 생명석이라는 회복 아이템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아이템은 제작 기술로 만든 아이템과 달리 영구적이지 않아서 게임에서 로그아웃하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린다. 캐릭터가 사용하는 마법과 전투 기술은 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즉시적이고 직접적으로 효과를 낸다. 버프를 주는 마법을 쓰면 버프가 생기고, 데미지를 주는 기술을 쓰면 적에게 데미지가 들어간다. 직업 기술의 효과는 즉각적이다. 제작 기술의 효과는 아이템이라는 매개체를 만들어 효과를 미래로 유예시킨다. 둘 다 체계화가 되어 있고 둘 다 캐릭터가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보다는 차이점을 더 많이 찾을 수 있다. 제작 기술만의 특징은 결과의 일부를 예상할 수 없다는 점이다. <판다리아> 확장팩에서는 가죽세공과 대장기술의 일부 항목 또한 비슷했다. 대부분의 레시피는 전문가 NPC에게서 배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때는 다른 제조를 하면 그 결과로 배우는 레시피들도 생겼다. 이때의 연금술은 아예 모든 레시피를 배우는 것이 다른 레시피 제조의 결과로 배우는 방식이었는데, 무엇을 배우게 될지는 랜덤이라 예상할 수 없었다. 특히 기계공학에서는 이 점이 도드라진다. 전력선과 같은 기계공학의 전투 부활 아이템은 실패 가능성이 있다. 몇몇 기계공학 아이템은 낮은 확률이지만 폭발하여 캐릭터를 하늘 높이 날려보내거나 큰 데미지를 주기도 한다. 용군단 확장팩부터 연금술에 적용된 ‘실험’이라는 메커니즘은, 실험에 성공하면 새로운 레시피를 배우게 되지만 실패하면 빈사 상태로 만드는 데미지를 입게 된다. 연금술의 실험이라는 요소는 위험부담을 전제하는 것이다. * 연금술 실험이 실패했을 경우의 예시 (필자의 캐릭터 중 하나) <용군단> 확장팩부터 적용된 다른 요소도 있다. 전문 기술에만 적용되는 전용 스탯이 생겼다. 이로 인해 채집할 때는 확률에 의해 재료를 더 많이 채집하거나 희귀 재료를 추가로 채집하거나 할 수 있다. 제작 기술에서는 일정 확률로 재료를 적게 소모하거나, 아이템이 하나가 아닌 여럿이 제작되거나 한다. 예상 외의 추가 성과라는 형태로 ‘예상 외 요소’가 늘어났다. 이는 전투용 기술에 흔히 따라붙는, 치명타를 달성했을 때 추가 데미지와 같은 요소와는 성격이 다르다. 전투 기술의 예상 외 요소는 긍정적 효과를 제공하는 것이고, 부정적 효과를 제공하는 경우엔 반드시 예상할 수 있도록 한다. 반면 제작 기술은 긍정적 효과와 부정적 효과 모두 확률을 따른다. * 전문기술 스탯 4종류 중에서 지혜는 재료를 덜 소모하는 확률을 결정하고 복수 제작은 결과물이 더 많이 나올 확률을 결정한다. 기계공학에도 연구라는 요소가 최근 들어왔다. 소정의 재료를 소모해 연구 결과를 쌓고, 이를 소모해 새로운 레시피를 배우는 형태다. 물론 배울 레시피 후보는 랜덤하게 정해지기 때문에 예상할 수가 없다. 이 경우에는 예측 불가능 요소 외에도 이전 성과를 쌓는 적층 구조를 전제하고 있다. 예측 불가능 요소가 존재하는 것은 해당 분야가 완전히 파악되어 철저히 분류화가 되지 않았다는 설정을 시사한다. 현실의 자연과학과 공학은 밝혀내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 여전히 있다. 와우의 제작 기술이 전투 기술과 달리 예상 외의 결과를 낳는 요소가 다수 있는 것은 이런 현실을 게임의 확률 체계를 통해 모사한 결과다. 이전 성과의 일부를 다음 성과로 끌어가는 적층 구조 요소는 현실의 기술 발전이 반드시 이전 세대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을 모사한 결과다. 예술 매체는 현실을 모사하기 때문이다. 반면 현실의 모습을 모사하지 못한 혹은 모사하지 않은 부분도 있다. 현실의 기술은 그것이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개인보다는 팀의 연구로 발전을 하고, 나아가 팀과 팀의 피드백 및 협업으로 진보한다. 줄여 표현하면 학계가 진보를 이끈다. 하지만 게임 내에서는 체제 전체를 이끄는 진보라는 것을 구현하기가 매우 어렵다. 존재하는 레시피를 숨겨둘지언정, 유저가 새로운 레시피를 만들게 한다는 아이디어는 실현된 적이 없다. 제작 기술에 존재하는 레시피는 어디까지나 제작사가 제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과 현실과 같은 의미의 발전은 존재하지 않고, 유저는 이미 완성된 테크트리에서 숙련도를 쌓아 올리는 학생으로서만 기능한다. 물론 새로운 레시피를 만들어내지는 못해도 실험과 연구를 통해 몰랐던 레시피를 배워나가는 것은 충분히 기술의 적층성을 반영한 형태일 수 있다. 또한 기계공학으로 만드는 탈것처럼 들어가는 재료의 규모가 많은 아이템의 경우엔, 기계공학 외의 다른 제작 기술이 만들어내는 재료 아이템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이는 서로 다른 기술의 수평적 협업을 구현한 요소다. 반면 이런 협업 제작품의 경우에도 결국 유저 개인으로 수렴한다는 한계는 존재한다. 최후에 오토바이, 비행기, 로봇 등 현실이라면 산업계 하나가 필요한 결과물도, 조립해내는 기계공학 유저는 한 명일 뿐이다. 이 형태에는 엄밀히 말하면 개인만이 존재한다. 홀로 아이언맨 수트를 제작한 토니 스타크의 서사가 떠오른다. 하지만 소수의 천재가 기술 분야를 선도하는 이야기는 에디슨/테슬라 시절의 서사이며, 사실 그때도 상당 부분 허구였고, IT 분야의 초기 시절에나 살펴볼 수 있다. 기술 분야가 개창된 초기에는 한두 천재가 이끌어가지만, 산업이 성립한 후에는 집단과 집단의 협업 및 경쟁이 발전을 주도하는 것이 역사다. 게다가 학문 분야의 적층화가 많이 진행되어 복잡해지면, 일개 개인은 모든 분야를 섭렵할 수가 없다. 인간의 두뇌에는 용량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리지널 시절 <와우>의 연금술에는 분야 특화가 존재했다. 물약, 비약, 변환의 세 영역으로 나눠서 일정 숙련도 이상에서는 ‘대가’라는 이름으로 특화를 선택할 수 있었다. 같은 시기의 대장기술 또한 무기 대가와 방어구 대가로 나뉘었다. 가죽세공 또한 세 가지의 대가 전문화가 있었다. 이렇게 전문 분야를 선택하면 선택한 전문 분야에서는 같은 양의 재료로 더욱 많은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각 분야만이 배울 수 있는 심화된 레시피도 존재했다. 기계공학 또한 오리지널부터 <판다리아> 확장팩까지의 시간 동안 두 가지의 분화 트리를 갖고 있었다. 고블린과 노움의 경쟁 컨셉이 있었는데, 에디슨과 테슬라의 직류 대 교류 싸움을 연상시키는 형태였다. 고블린 기계공학과 노움 기계공학의 분류는 다른 제작 기술의 대가 전문화처럼 각각의 분야만 배울 수 있는 레시피가 따로 있었다. 폭탄류는 고블린 기계공학에서 배울 수 있고, 독특한 효과를 내는 장비는 노움 기계공학으로만 배울 수 있는 식이다. 이런 차별화된 세부 테크트리는 나름 분과 학문 혹은 숙련공을 모사한 결과다. 앞서 살펴본, 제작의 주체가 유저 개인으로 집중되는 모습의 천재적 기술자 서사와 합쳐 보면 근대적 기술 발전의 초기 시절이 떠오른다. 천재적 개인의 시대에서 세분화된 분과 학문의 시대로 전환되던 그 시기, 르네상스부터 세계대전에 이르는 시대다. SF 중에서 스팀펑크 장르는 이런 ‘근과거’의 기술적 특징을 중심 소재로 사용한다. 이 특성 때문에 <와우> 내에서 기계공학을 비롯한 제작 기술은 옅은 향수를 동반하고 있다. 스팀펑크 특유의 이 정서는 현대인이 실제로는 살아보지 않았지만 현 기술 문명의 근간을 이루던 시기를 재조직한 세계를 대할 때 발현된다. 이는 <와우>가 독보적인 몰입도를 이룩한 데에 도움이 되었을 수 있다. 비록 게임 내 서사와 설정을 보면 호드가 소형 핵무기를 사용하고 얼라이언스가 지하철을 운행하고 드레나이가 우주를 항행하는 등 미래형 SF가 중세형 판타지와 결합해 있지만, 그런 식으로 융합되어 있는 다수의 요소 중에는 ‘살지 않은 고향에 대한 향수’를 만들어내는 스팀펑크가 있다. *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 스팀펑크는 증기기관과 톱니바퀴가 공학의 중심이던 시절의 기술을 가져온다. SF지만 과거를 다룬다. 그리고 스팀펑크에서 가져와 재조직한 시절의 기술 발전이란, 현재도 그렇지만 현재보다 월등하게, 위험을 수반하는 진보였다. 고블린과 노움처럼 기술에 대한 대책 없는 낙관성이 있었고, 연금술의 연구 실험 시스템의 실패 폭발처럼 안전 대책은 취약했다. 이를 요약하는 이미지는 연구실에서 혼합물을 섞다가 폭발을 일으키는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모습이다. 예술 매체는 현실을 모사하지만 렌즈를 거친다. <와우>는 전문 기술 중에서 제작 기술의 체계를 잡으면서 스팀펑크의 시대인 근과거, 기술 발전 초기의 세계관을 구현했다. 변인과 결과에 대한 완전한 파악이 되지 않아 부작용이 생길 수 있는 기술, 아직 탐험 중이기에 위험 요소가 존재하는 측면의 기술, 기술 요소가 개인에게로 수렴되어 천재적 개인이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던 시절의 기술, 점차 분화가 쌓여가면서 다른 분야와의 협업과 이전 연구의 계승이 중요해지기 시작한 기술. 현재의 분업화, 조직화, 체계화된 연구는 좀 더 안전하고 세련되게 발전했지만 스팀펑크의 묘한 낭만은 없다. 그 낭만의 편린은 게임 안에서 살짝 맛볼 수 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덕질인) 홍성갑 프리랜서 작가. 이 직업명은 ‘무직’의 동의어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딴지일보에서 기자를 시작하여 국정원 댓글 조작을 최초로 보도했다. 평생 게이머로서 살면서, 2001년에 처음 게임 비평을 썼고 현재 유실된 것을 매우 기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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