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스팀펑크적 제작 기술
24
GG Vol.
25. 6. 10.
예술 매체는 현실을 모사한다. 인간의 문명사는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낸 역사다. 우리는 도구의 동물이다. 심지어 우리가 만든 가상 세계 속에서도 인간은 무언가를 만든다. 축약되고 변형된 형태로 모사한 것이지만 어쨌든 만든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와우>)는 전투가 메인 컨텐츠인 MMORPG 게임이다. 세부적으로는 테마파크 유형이다. 작중의 세계에서 유저는 온갖 다양한 활동을, 현실의 그것을 모사한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초나 광물을 채집할 수 있고, 낚시를 할 수 있고, 전투와 낚시를 통해 얻은 재료로는 요리를 할 수 있다.
요리 외에도 만들 수 있는 것은 많다. 전문기술이라는 분류에는 채집과 제작 두 가지 종류의 기술이 있는데, 유저는 두 가지를 선택해 배울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채집 기술 하나를 배우고 이 채집 재료를 이용하는 제작 기술 하나를 배우지만, 채집 둘 혹은 제작 둘을 배우는 경우도 있다. 약초를 채집했다면, 이를 재료로 사용하는 연금술과 주문각인을 고려해봄직하다. 채광 기술을 배웠다면, 광석을 이용하는 대장기술, 기계공학, 보석세공 등이 어울린다.

이런 제작 기술은 마법이나 전투 능력 등의 기술과는 성격이 다르다. 즉발 효과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물건, 즉 아이템을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영구적인 장비일 수도 있고 쓰면 사라지는 소모품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제작품은 전투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적거나 아예 없기도 하다. 캐릭터가 착용하는 장비나 능력치를 일시적으로 올려주는 아이템 같은 경우는 전투에 도움은 되지만 절대적인 수준은 아니다. 반면 기계공학으로 만들어 일시적으로 활공을 할 수 있게 하는 글라이더 같은 아이템은 전투와는 거의 무관한 단순 장난감이다.
예는 더 들 수 있다. 연금술을 배워 만들 수 있는 비약과 영약, 회복 효과를 주는 물약, 무기를 일시 강화하는 대장기술의 숫돌과 무게추, 주문각인으로 만드는 레이드에서의 버프 아이템인 반투스 룬 같은 것은 전투를 돕지만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다. 기계공학으로는 전투 중에도 부활을 쓸 수 있는 아이템을 만들 수 있다. 있으면 좋지만 없다고 해서 공략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 보석세공 기술로 만들 수 있는 아이템 ‘보석 맞추기’를 사용하면 타일 매칭을 미니게임으로 플레이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게 전부다.
물론 몇몇 클래스는 제작 기술이 아니어도 아이템을 만들어낼 수 있다. 마법사는 마법으로 음식을 만들 수 있고, 흑마법사는 생명석이라는 회복 아이템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아이템은 제작 기술로 만든 아이템과 달리 영구적이지 않아서 게임에서 로그아웃하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린다.
캐릭터가 사용하는 마법과 전투 기술은 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즉시적이고 직접적으로 효과를 낸다. 버프를 주는 마법을 쓰면 버프가 생기고, 데미지를 주는 기술을 쓰면 적에게 데미지가 들어간다. 직업 기술의 효과는 즉각적이다. 제작 기술의 효과는 아이템이라는 매개체를 만들어 효과를 미래로 유예시킨다.
둘 다 체계화가 되어 있고 둘 다 캐릭터가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보다는 차이점을 더 많이 찾을 수 있다. 제작 기술만의 특징은 결과의 일부를 예상할 수 없다는 점이다.
<판다리아> 확장팩에서는 가죽세공과 대장기술의 일부 항목 또한 비슷했다. 대부분의 레시피는 전문가 NPC에게서 배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때는 다른 제조를 하면 그 결과로 배우는 레시피들도 생겼다. 이때의 연금술은 아예 모든 레시피를 배우는 것이 다른 레시피 제조의 결과로 배우는 방식이었는데, 무엇을 배우게 될지는 랜덤이라 예상할 수 없었다.
특히 기계공학에서는 이 점이 도드라진다. 전력선과 같은 기계공학의 전투 부활 아이템은 실패 가능성이 있다. 몇몇 기계공학 아이템은 낮은 확률이지만 폭발하여 캐릭터를 하늘 높이 날려보내거나 큰 데미지를 주기도 한다. 용군단 확장팩부터 연금술에 적용된 ‘실험’이라는 메커니즘은, 실험에 성공하면 새로운 레시피를 배우게 되지만 실패하면 빈사 상태로 만드는 데미지를 입게 된다. 연금술의 실험이라는 요소는 위험부담을 전제하는 것이다.

* 연금술 실험이 실패했을 경우의 예시 (필자의 캐릭터 중 하나)
<용군단> 확장팩부터 적용된 다른 요소도 있다. 전문 기술에만 적용되는 전용 스탯이 생겼다. 이로 인해 채집할 때는 확률에 의해 재료를 더 많이 채집하거나 희귀 재료를 추가로 채집하거나 할 수 있다. 제작 기술에서는 일정 확률로 재료를 적게 소모하거나, 아이템이 하나가 아닌 여럿이 제작되거나 한다. 예상 외의 추가 성과라는 형태로 ‘예상 외 요소’가 늘어났다. 이는 전투용 기술에 흔히 따라붙는, 치명타를 달성했을 때 추가 데미지와 같은 요소와는 성격이 다르다. 전투 기술의 예상 외 요소는 긍정적 효과를 제공하는 것이고, 부정적 효과를 제공하는 경우엔 반드시 예상할 수 있도록 한다. 반면 제작 기술은 긍정적 효과와 부정적 효과 모두 확률을 따른다.

* 전문기술 스탯 4종류 중에서 지혜는 재료를 덜 소모하는 확률을 결정하고 복수 제작은 결과물이 더 많이 나올 확률을 결정한다.
기계공학에도 연구라는 요소가 최근 들어왔다. 소정의 재료를 소모해 연구 결과를 쌓고, 이를 소모해 새로운 레시피를 배우는 형태다. 물론 배울 레시피 후보는 랜덤하게 정해지기 때문에 예상할 수가 없다. 이 경우에는 예측 불가능 요소 외에도 이전 성과를 쌓는 적층 구조를 전제하고 있다.
예측 불가능 요소가 존재하는 것은 해당 분야가 완전히 파악되어 철저히 분류화가 되지 않았다는 설정을 시사한다. 현실의 자연과학과 공학은 밝혀내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 여전히 있다. 와우의 제작 기술이 전투 기술과 달리 예상 외의 결과를 낳는 요소가 다수 있는 것은 이런 현실을 게임의 확률 체계를 통해 모사한 결과다. 이전 성과의 일부를 다음 성과로 끌어가는 적층 구조 요소는 현실의 기술 발전이 반드시 이전 세대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을 모사한 결과다. 예술 매체는 현실을 모사하기 때문이다.
반면 현실의 모습을 모사하지 못한 혹은 모사하지 않은 부분도 있다. 현실의 기술은 그것이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개인보다는 팀의 연구로 발전을 하고, 나아가 팀과 팀의 피드백 및 협업으로 진보한다. 줄여 표현하면 학계가 진보를 이끈다.
하지만 게임 내에서는 체제 전체를 이끄는 진보라는 것을 구현하기가 매우 어렵다. 존재하는 레시피를 숨겨둘지언정, 유저가 새로운 레시피를 만들게 한다는 아이디어는 실현된 적이 없다. 제작 기술에 존재하는 레시피는 어디까지나 제작사가 제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과 현실과 같은 의미의 발전은 존재하지 않고, 유저는 이미 완성된 테크트리에서 숙련도를 쌓아 올리는 학생으로서만 기능한다.
물론 새로운 레시피를 만들어내지는 못해도 실험과 연구를 통해 몰랐던 레시피를 배워나가는 것은 충분히 기술의 적층성을 반영한 형태일 수 있다. 또한 기계공학으로 만드는 탈것처럼 들어가는 재료의 규모가 많은 아이템의 경우엔, 기계공학 외의 다른 제작 기술이 만들어내는 재료 아이템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이는 서로 다른 기술의 수평적 협업을 구현한 요소다.
반면 이런 협업 제작품의 경우에도 결국 유저 개인으로 수렴한다는 한계는 존재한다. 최후에 오토바이, 비행기, 로봇 등 현실이라면 산업계 하나가 필요한 결과물도, 조립해내는 기계공학 유저는 한 명일 뿐이다. 이 형태에는 엄밀히 말하면 개인만이 존재한다. 홀로 아이언맨 수트를 제작한 토니 스타크의 서사가 떠오른다.

하지만 소수의 천재가 기술 분야를 선도하는 이야기는 에디슨/테슬라 시절의 서사이며, 사실 그때도 상당 부분 허구였고, IT 분야의 초기 시절에나 살펴볼 수 있다. 기술 분야가 개창된 초기에는 한두 천재가 이끌어가지만, 산업이 성립한 후에는 집단과 집단의 협업 및 경쟁이 발전을 주도하는 것이 역사다. 게다가 학문 분야의 적층화가 많이 진행되어 복잡해지면, 일개 개인은 모든 분야를 섭렵할 수가 없다. 인간의 두뇌에는 용량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리지널 시절 <와우>의 연금술에는 분야 특화가 존재했다. 물약, 비약, 변환의 세 영역으로 나눠서 일정 숙련도 이상에서는 ‘대가’라는 이름으로 특화를 선택할 수 있었다. 같은 시기의 대장기술 또한 무기 대가와 방어구 대가로 나뉘었다. 가죽세공 또한 세 가지의 대가 전문화가 있었다. 이렇게 전문 분야를 선택하면 선택한 전문 분야에서는 같은 양의 재료로 더욱 많은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각 분야만이 배울 수 있는 심화된 레시피도 존재했다.
기계공학 또한 오리지널부터 <판다리아> 확장팩까지의 시간 동안 두 가지의 분화 트리를 갖고 있었다. 고블린과 노움의 경쟁 컨셉이 있었는데, 에디슨과 테슬라의 직류 대 교류 싸움을 연상시키는 형태였다. 고블린 기계공학과 노움 기계공학의 분류는 다른 제작 기술의 대가 전문화처럼 각각의 분야만 배울 수 있는 레시피가 따로 있었다. 폭탄류는 고블린 기계공학에서 배울 수 있고, 독특한 효과를 내는 장비는 노움 기계공학으로만 배울 수 있는 식이다.

이런 차별화된 세부 테크트리는 나름 분과 학문 혹은 숙련공을 모사한 결과다. 앞서 살펴본, 제작의 주체가 유저 개인으로 집중되는 모습의 천재적 기술자 서사와 합쳐 보면 근대적 기술 발전의 초기 시절이 떠오른다. 천재적 개인의 시대에서 세분화된 분과 학문의 시대로 전환되던 그 시기, 르네상스부터 세계대전에 이르는 시대다. SF 중에서 스팀펑크 장르는 이런 ‘근과거’의 기술적 특징을 중심 소재로 사용한다.
이 특성 때문에 <와우> 내에서 기계공학을 비롯한 제작 기술은 옅은 향수를 동반하고 있다. 스팀펑크 특유의 이 정서는 현대인이 실제로는 살아보지 않았지만 현 기술 문명의 근간을 이루던 시기를 재조직한 세계를 대할 때 발현된다. 이는 <와우>가 독보적인 몰입도를 이룩한 데에 도움이 되었을 수 있다. 비록 게임 내 서사와 설정을 보면 호드가 소형 핵무기를 사용하고 얼라이언스가 지하철을 운행하고 드레나이가 우주를 항행하는 등 미래형 SF가 중세형 판타지와 결합해 있지만, 그런 식으로 융합되어 있는 다수의 요소 중에는 ‘살지 않은 고향에 대한 향수’를 만들어내는 스팀펑크가 있다.

*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 스팀펑크는 증기기관과 톱니바퀴가 공학의 중심이던 시절의 기술을 가져온다. SF지만 과거를 다룬다.
그리고 스팀펑크에서 가져와 재조직한 시절의 기술 발전이란, 현재도 그렇지만 현재보다 월등하게, 위험을 수반하는 진보였다. 고블린과 노움처럼 기술에 대한 대책 없는 낙관성이 있었고, 연금술의 연구 실험 시스템의 실패 폭발처럼 안전 대책은 취약했다. 이를 요약하는 이미지는 연구실에서 혼합물을 섞다가 폭발을 일으키는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모습이다.
예술 매체는 현실을 모사하지만 렌즈를 거친다. <와우>는 전문 기술 중에서 제작 기술의 체계를 잡으면서 스팀펑크의 시대인 근과거, 기술 발전 초기의 세계관을 구현했다. 변인과 결과에 대한 완전한 파악이 되지 않아 부작용이 생길 수 있는 기술, 아직 탐험 중이기에 위험 요소가 존재하는 측면의 기술, 기술 요소가 개인에게로 수렴되어 천재적 개인이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던 시절의 기술, 점차 분화가 쌓여가면서 다른 분야와의 협업과 이전 연구의 계승이 중요해지기 시작한 기술. 현재의 분업화, 조직화, 체계화된 연구는 좀 더 안전하고 세련되게 발전했지만 스팀펑크의 묘한 낭만은 없다. 그 낭만의 편린은 게임 안에서 살짝 맛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