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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리뷰] 『유령』: 소설이 탈북민과 게임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하여

    두 영상이 유튜브 이용자들의 이목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하다. ‘탈북자’가 가상의 ‘평양’이지만 ‘김일성 동상’을 향해 총을 쏜다. 이때 시청자들이 호응하는 것은 게임 플레이 그 자체보다는 김일성 동상을 보자마자 총을 쏘는 탈북자의 모습이다. < Back [북리뷰] 『유령』: 소설이 탈북민과 게임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하여 04 GG Vol. 22. 2. 10. 소설 『유령』을 말하기에 앞서 2020년 초 유튜브 채널 〈CLAB〉에 영상 두 편이 올라왔다.1) 영상은 〈배틀필드4〉를 플레이하는 남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FPS 게임의 왕좌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임이 〈배틀필드〉 시리즈이긴 하지만 〈배틀필드4〉의 경우 2020년을 기준으로 무려 출시 7주년이 되어가는 게임이었다. 그런데도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남녀의 영상은 (이 글을 쓰는 지금 기준으로) 두 편 합쳐서 약 658,000회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두 영상이 유튜브 이용자들의 이목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하다. ‘탈북자’가 가상의 ‘평양’이지만 ‘김일성 동상’을 향해 총을 쏜다. 이때 시청자들이 호응하는 것은 게임 플레이 그 자체보다는 김일성 동상을 보자마자 총을 쏘는 탈북자의 모습이다. 그리고 2021년에는 ‘북한 인민’을 흉내 내는 스트리머와 실제 ‘탈북자’가 함께 〈배틀그라운드〉를 플레이하는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왔다.2) 세 편으로 구성된 이 시리즈 역시 약 86만 조회수를 달성했다. 이 영상은 사전에 기획된 것으로, 〈조충현〉 채널에서는 커뮤니티 공지를 통해 사전에 탈북자를 모집했다. “배틀그라운드 및 다른 여러 가지 게임들 탈북민스쿼드를 계획 중에 있습니다. 실제 새터민분들 중 배그 및 롤을 해보신 적이 있는 분들은 전자우편함으로 날래 보내주심 감사하겠슴다”라는 내용의 익살맞은 공지에서 운영자가 예로 들고 있는 게임은 “〈배틀그라운드〉, 〈롤〉, 〈카트라이더〉 등”이다.3) 그렇게 성사된 〈배틀그라운드〉 플레이 영상은 〈배틀필드4〉 영상보다 더 단순했다. ‘대한민국 코미디언’이 ‘탈북자’와 ‘문화어’를 쓰며 게임을 한다. 시청자들은 아슬아슬한 〈배틀그라운드〉 플레이 상황보다 코미디언 스트리머 ‘복남 동지’와 탈북자 게스트 ‘억철 동지’의 입담에 열광한다. 〈CLAB〉와 〈조충현〉 채널에 올라온 영상 모두 탈북자의 게임 플레이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두 채널의 영상을 보는 시청자들은 탈북자가 보여주는 게임 플레이에 큰 관심이 없다. 시청자들이 호응하는 것은 탈북자들의 입담과 그들이 보여주는 과감함이다. 여타 게임 스트리머들의 영상을 보는 시청자들이 스트리머의 게임 실력과 센스에 따라 영상 시청을 결정한다면, 탈북자들의 게임 플레이 영상에서 중요한 것은 게임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그들이 게임에 투영하는 경험인지도 모른다. 통일부가 집계한 국내 정착 탈북자의 수는 33,815명이다.4)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탈북자는 여전히 새롭고 낯선 존재이다. TV 미디어를 통해 노출되는 탈북자는 경직되어 있거나 작위적이다. 유튜브 영상 속 탈북자는 북한 출신이지만 ‘우리’와 비슷한 존재로 다가온다. 오히려 ‘진짜 북한 사람’이 맞는지 의심받는 ‘진짜 탈북자’가 되기까지 한다. 우선 『유령』을 의심하자, 그러니까 과연 분단과 탈북자란 강희진의 장편소설 『유령』은 오래된 소설이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시간을 기준으로 하면 벌써 낡아버린 소설일 수도 있다. 2011년 〈제7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으로 출간된 『유령』은 “탈북자들의 소외를 리니지 게임과 연결시켜 서술한 점이 신선하고 흥미롭다”는 평가를 받음과 동시에 “분단 상황과 가상현실 문제를 뒤섞고 가로지르며 역동적인 탈주를 보인” 것으로 이목을 끌었다.5) 심사위원이기도 했던 우찬제는 「분단 환경과 경계선의 상상력」을 통해 강희진의 첫 장편소설이 “탈북할 수밖에 없었던 북한의 정치적 경제적 사정, 탈북 이후 남한의 경제적 문화적 사정 등을 실감 있게 기술”하는 동시에 “단순한 탈북자들의 생리를 그린 것이 아니라 21세기 세계의 문제의식을 독특하게 구성해 놓고 있다”고 평한다.6) 즉 강희진의 『유령』은 2011년이라는 상황 속에서 새롭고 독창적인 ‘분단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비슷하게 고인환은 「탈북 디아스포라 문학의 새로운 양상 연구」를 통해 이응준의 ????국가의 사생활????과 강희진의 『유령』을 동시에 호명한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가상의 디스토피아 현실’을 그린다는 점일 것이다. 차이점은 ????국가의 사생활????이 가까운 미래의 통일된 상황을 상상한다면 『유령』은 2010년의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는 정도이다. 고인환이 『유령』에 주목하는 것은 “탈북자들의 삶에 무관심한 우리 사회의 냉혹함은 물론, 그들에 대한 “지나친 감정 몰입”으로 객관적 거리감을 유지하지 못하는 일방적 태도 또한 경계하고 있는” 작가의 태도이다.7) 고인환에 따르면 ““객관화된 대상”으로서의 탈북자는 ‘공감의 부재’와 “지나친 감정 몰입”을 창조적으로 지양(止揚)하는 과정에서 온전히 형상화될 수 있을 것”이고, 강희진은 『유령』을 통해 그것을 적절히 보여줬다.8) 이와 더불어 이경재는 “이주노동자나 결혼이민자 혹은 탈북자들을 무시와 모멸의 대상으로만 삼는 한국인의 식민주의적 (무)의식을 날카롭게 고발”하는 것으로 평가한다.9) 나아가 소설 속 “주인공의 부적응과 소외, 그리고 정체성의 혼란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탈북자들 모두에게 해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분석한다.10) 이것은 “이주민들이 한국 사회에서 배제되어 ‘벌거벗은 자’가 되어가는 현실을 재현하는 데 집중하는 소설”의 하나라는 입장이다.11) 재차 강조해야 할 점은 이 소설이 2011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이다. 2011년. 남북관계가 다시 냉각기에 접어들었던 바로 그 무렵, 대한민국 공해에서 군함이 격침당하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이후 처음으로 대한민국 영토가 적의 포탄에 유린당한 직후의 언저리, 그리하여 반공의 기치가 다시 하늘 높이 휘날리던 바로 그 시절, 그럼에도 2천 명 넘는 탈북자가 해마다 한국으로 유입되고 있던 상황. 아주 잠깐 탈북자 현황을 알아보자, 『유령』에 대한 이야기에 앞서 소설의 배경이 되는 2010년을 기준으로 한국으로 입국한 탈북자는 2만 명에 가까웠다. 2만 명의 탈북자가 의미하는 것은 2만 가지 이상의 사연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가운데 ‘탈북자’이자 ‘청년’이며 ‘게임중독자’로 묘사되는 『유령』의 주인공은 과연 ‘탈북자’를, ‘탈북 청년’을 대표하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인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한국문학에 없던 존재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인물을 상징적인 존재로 위치시킴으로써 생겨난 문제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 반공의 기치가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면서 가뜩이나 차별받던 탈북자들은 무시와 멸시의 존재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그나마 동정과 긍휼의 대상으로 상상되던 탈북자들이 이제는 간첩은 아닌지 의심해야 하는 대상으로, 사회의 골칫거리로 떠오른 것이다. 항상 겪어야 하는 간첩 의혹, 눈치를 봐야 하는 정착 지원 제도. 다수의 시선은 언제나 소수를 불안과 공포로 내몰 뿐이다. 다수는 소수의 존재가 성가신 정도(불편도 아니다)에 그치겠지만, 소수에겐 무엇 하나 사소할 수 없는 법이다. 2022년 현재 상황에서 이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오히려 간단하다. ‘탈북자’가 주인공인 이 소설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냉정한가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하는 까닭이다. 나아가 ‘탈북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소설을 과연 분단문학 혹은 디아스포라 문학이나 다문화 문학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 다시 물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탈북자를 끊임없이 ‘탈북자’라는 따옴표 속에 가둠으로써 생기는 왜곡과 굴절의 문제이며, 탈북자라는 지칭을 통해 그들을 계속해서 대한민국의 외부로 내몰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 의심하자 『유령』을, ‘탈북자’가 아닌 ‘탈북자 됨’에 대하여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탈북자에 대한 시선 중에 하나가 ‘미리 맞이한 통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 그 표현은 좌절되고 실패하였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유령』이 결코 그러한 현실에 대한 ‘고발’이 아니라는 점이다. 2011년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유령』이 묘사하고 있는 탈북자-북조선의 모습은 현실과 괴리가 있다. 오히려 『유령』이 그리고 있는 탈북자-북조선은 대한민국이 상상하는 ‘탈북자 됨’ 또는 ‘북조선 됨’의 재생산은 아닌지 의심해야 한다. 내가 갈 곳은 방송국이 아니라 리니지 세계다. 이번에 그 속으로 들어가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다. 귀환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바깥 세계로 나온다면 영원히 폐인으로 살아야할지 모른다. 한 달이고, 두 달이고, 1년이고, 2년이고 머물 것이다. 내게 리니지는 환상이 아니다. 그곳은 현실이다(325쪽). 위 인용은 『유령』의 결말 부분이다. 소설 속 주인공의 문제는 무엇하나 해결된 것이 없다. 그나마 ‘개명 신청’이 받아들여진 것이 주인공 ‘나’가 해결한 유일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소외와 차별, 무시와 멸시, 좌절과 낙담 속에서 ‘탈북자’인 주인공의 도피처는 온라인 게임 〈리니지2〉이다. 게임 속 주인공의 아바타-캐릭터 ‘쿠사나기’는 영웅이다. 혈맹의 군주인 동시에 혁명의 선봉에 섰던 전사이다. 다만 소설의 도입에서 ‘나’가 스스로 되뇌이듯 “육이오 전쟁 이후,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틀어 한반도에서 일어난 가장 위대한 혁명이었던 바츠 해방전쟁에 참여한 전사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영웅에게도 현실은 냉혹한 법이다.”(11쪽) 현실이 아닌 가상, 현실보다 더 냉혹한 세계에서야 탈북자는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증명한다. 더욱이 ‘나’의 주변에 있는 탈북자들은 하나같이 고난과 고통 속에 살아간다. 노숙자이거나, 룸싸롱 접대부거나, 대딸방 핸플녀거나, 고아거나, 과부거나,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살거나, 마약에 찌들거나. 북조선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가와 상관없이 남한에서 살아가는 인생은 기구하기만 하다. 『유령』 속 탈북자는 그래서 ‘유령’이 된다. 그리고 『유령』을 읽는 독자들은 ‘탈북자 됨’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요즘은 탈북자에게 주는 정착금이 얼마 되지 않아 환상은 더 빨리 깨진다. 탈북자들이 컴퓨터 게임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169쪽). 작가는 『유령』 속의 인물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틈틈이 현실에 대한 ‘고발’도 멈추지 않는다. 문제는 그 고발의 잘못됨이다. 2010년을 기준으로 2만 명, 2022년을 기준으로 3만 명의 탈북자 가운데 몇이나 컴퓨터 게임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지 의심해야 한다. 마치 지원금이 줄어서 탈북자가 힘들어졌다는 진술을 의심해야 한다. 돈이 없어서 현실을 피해 가상 세계로 뛰어든다는 시선을 의심하고 타파해야 한다. 하지만 독자는 『유령』을 읽는 동안 그러한 의심으로부터 차단된다. 작가는 그만큼 단호하고 당당하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 늘 당하는 배신, 게임 속에서는 그런 일이 없으리라 믿었다”(52쪽)는 주인공의 목소리는 의심하지 말자. 다만 게임이라고 다를 게 없다는 것을 탈북자인 주인공은 몰랐을 것이다. 엄연히 말하자면 게임과 현실은 다르다. 하지만 게임이라고 현실과 다르지 않다. 그러한 게임과 현실의 경계에 대하여 한 선학은 다음 인용의 멋진 문장을 새겨놓았다. 어쩌면 한국 사회의 온라인 게임 열풍은 현실과 게임 사이의 이질감이 적다는 점에서 비록되는 것이 아닐까? 온라인 게임의 사건은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에서 발생한다. 허구의 캐릭터들은 가상의 육체와 현실의 영혼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 속 모든 현상은 사회를 투영한다. 하지만 게임은 현실의 의미망 속에서 만들어지는 동시에 현실의 의미망을 끊임없이 벗어난다. 그것이야말로 게임이 가진 탈주의 힘이다. 12) ‘게임’을 대하는 『유령』의 태도, 무엇이 그렇게 문제 이 소설의 또 다른 문제는 결코 게임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소설 시작부터 “온라인 게임을 정신없이 하다가 영양실조로 죽은 사람도 있다”(10쪽)고 적는다. 주인공을 상담하는 의사는 “이런 식으로 살다간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16쪽)다고 조언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온라인 게임 속으로 들어가 폐인이 되는 데는 이틀이면 충분하지만 폐인을 탈출하는 데는 한 달 이상이 걸린다”(117쪽)고 고백한다. “게임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언제든지 벗어날 수 있지만 결코 빠져나올 수 없다. 공포에 대한 갈망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게임은 진짜 공포다.”(236~237쪽) 결국 “게임이, 그놈의 게임이 재밌지도, 자신에게 맞지도 않는데도 계속해 그것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동안 들인 시간과 돈, 공들여 온몸을 바쳐 쌓아올린 레벨 때문이다.”(280쪽) 하지만 정말 그럴까? 결국 유저는 언젠가 게임을 떠난다. ‘못 떠나는’ 유저는 없다. 안 떠날 뿐이다. “유저가 어떤 게임을 떠나는 것은 게임이 지겨워지는 순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13) 이것은 게임에 대한 무례이다. “산업적 담론에서 게임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첨단 IT 산업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문화적 담론에서는 사람들을 중독시키는 마약으로 묘사된다.”14) 강희진의 소설 『유령』은 게임을 ‘마약’으로 치부한다. 그렇다보니 〈리니지2〉만의 사건이 아닌 현실에서도 이목을 사로잡인 ‘바츠 해방전쟁’ 역시도 『유령』에선 도구적으로 소모될 뿐이다. (진짜 의미가 조금씩 밝혀지고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독재에 맞선 민중의 봉기, 독재를 물러나게 한 성공한 혁명, 혁명 뒤에 인간이 그렇듯 욕망에 점철되어 내분을 맞은 집단, 독재자의 귀환과 혁명 세력의 몰락. 그 자체로 소설이 될 수 있는 ‘바츠 해방전쟁’은 실제 ‘붉은혁명’이라는 혈맹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탈북자 중심의 혈맹 ‘뫼비우스의 띠’가 만들어지고, 〈적기가〉를 무르는 내복단이 등장하고, 해방전쟁이 혁명전쟁으로 묘사되면서 현실에선 낙오자일 뿐인 탈북자가 최전선에서 무기를 휘두르는 용맹한 전사가 되는 무대로 된다. 이때의 문제는 실제 벌어졌던 〈리니지2〉의 ‘바츠 해방전쟁’의 진의는 사라지고 ‘탈북자의 영웅 신화’로써 각색된 ‘바츠 해방전쟁’만 전면에 남는다는 점이다. 아래 인용에서 보여주는 ‘바츠 해방전쟁’이 벌어지던 즈음에 대한 상황을 기억해야 한다. 〈리니지2〉의 스토리 세계에는 현실 역사의 ‘민중 계층’에 비유될 수 있는 계층이 존재한다. 통계 자료를 보면 40레벨 이하의 캐릭터들로 규정되는 이 민중계층은 2003년 11월 25일 현재 전체 〈리니지2〉 플레이어의 85.9%를 차지한다. 한편 55레벨에서 75레벨 사이의 캐릭터이면서 지배혈맹에 소속되어 있는, 현실 역사의 ‘군사 귀족 계층’에 비유될 수 있는 계층 역시 뚜렷이 존재한다. 높은 레벨이 되어 세력이 있는 혈맹에 들어가면 멋진 무기에 좋은 옷을 입고, 아름다운 성에서 살며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낮은 레벨의 군소 혈맹원들은 수시로 공격당해 죽고 들판에서 혈맹 모임을 가진다. 사냥터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없기 때문에 레벨을 높일 수 있는 기회도 적다. 이러한 계층 분화는 레벨 차이에 따른 이해관계의 상충을 가져와 혈맹 전쟁의 확산을 막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하략)15) 하고 싶었던 『유령』에 대한 이야기, 탈북자와 게임(하기) 앞에서부터 조금씩 해왔던 이야기지만 소설 『유령』에서 ‘탈북자’가 〈리니지2〉라는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현실에서 겪는 좌절을 가상의 게임 세계에서는 겪지 않아도 된다. 현실에서 주인공 ‘나’는 무시와 멸시의 존재지만 〈리니지2〉의 혈맹 군주인 ‘쿠사나기’는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다. “현실에서 죽었다가 깨어나도 맛볼 수 없는 것이 있다. 게임의 세계에서만 펼쳐지는 낯설고 특별한 체험이다.”(53쪽) 여기서 말하는 ‘특별한 체험’이란 단순히 가상의 게임 세계에서 겪는 이벤트 그 이상일 것이다. 현실과 달리 게임 속 세계에선 ‘힘’이 곧 ‘권력’이다. 자신을 탈북자가 아니라 조선족이라 속여야 할 만큼 탈북자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졌다. 탈북자가 온라인 게임 속의 영웅처럼 취급받던 시절도 있긴 했지만 그것은 이미 오래전이다(58쪽). 탈북자들이 목숨을 걸고 체제를 탈출하여 대한민국을 찾아오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낙오와 좌절, 무시와 멸시, 천대와 모욕을 위해 “북한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남쪽으로 온 것이 아니다.”(164쪽) 하지만 자유를 찾아, 진정한 낙원을 찾아 대한민국을 찾은 탈북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순전히 자본주의일 뿐이다. “그래서 가끔 자신도 탈북자라면 좋겠다는 황당한 소리를”(167쪽) 실없이 듣고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에서 태어나 자본주의에서 성장하여 자본주의 속에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탈북자는 ‘치트(Cheat)’일 뿐이다. 그래서 한국인은 탈북자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탈북자를 극도로 경계하거나, 탈북자를 혐오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태어나면서부터 겪어야 했던 경쟁에서 자유로운 존재. 학력도 주거도 쟁취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학력을 위해 돈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현실은 어쩌면 오히려 한국인이 갖는 낙심의 근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소설 속 탈북자들은 현실의 삶과 다르게 영웅이 될 수 있는 〈리니지2〉로 모여드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탈북자임을 숨겨야 하고, 탈북자임이 드러나는 순간 온갖 모욕을 견뎌야 한다. 그렇지만 게임에서는 탈북자임을 굳이 숨길 이유도 없고, 탈북자임이 드러나도 모욕을 각오할 필요가 없다. 게임 속 가상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힘’과 ‘권력’, 즉 레벨이다. 하지만 집단에서 벗어나 ‘솔플(solo play)’을 즐기는 유저의 상황은 좀 다르다. 저는 탈북 노숙자 한 사람의 주민번호를 빌려 아이디를 등록하고 본격적인 사냥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리니지에서 제가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제가 다른 인물들을 죽일 때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리니지 안에서 칼을 마구 휘둘렀습니다. 어떤 날은 밤새도록 잠도 자지 않고 사냥을 다니며 닥치는 대로 죽이고 피를 보았습니다. 때로는 제가 희생될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더 짜릿한 쾌감을 느꼈습니다(318쪽). 소설 속 중년 여성 탈북자(‘정주 아줌마’)에게 〈리니지2〉는 어떤 도피의 공간이기보다 본능적인 유희의 공간이었다. 다만 ‘정주 아줌마’가 즐기는 게임의 방식, 〈리니지2〉를 플레이하는 태도는 상당히 위험천만하다. 현실 세계에서 게임에 들이미는 ‘악’의 잣대에 가장 부합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주 아줌마’야 말로 『유령』 속 어떤 탈북자들보다 게임에 충실한 인물일 것이다. 아니, 게임의 정해진 규칙마저 뛰어넘는 존재다. “RPG의 스토리텔링은 플레이어의 모험이 단순한 성장과 이동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교묘하게 감춘다. 이야기는 캐릭터의 성장을 위한 표지판이다. 그리고 이 길을 벗어난 플레이어는 성장이 제대로 되지 않는, 일종의 성장통을 겪게 된다.”16) 하지만 ‘정주 아줌마’는 스토리텔링을 벗어나고도 카타르시스를 느낄 뿐이다. ‘게임하기(gaming/playing)’를 통해 오히려 게임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석연찮은 『유령』, 의심의 끈을 끝까지 소설 속 탈북자에 대한 묘사에 수시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소설의 편의를 위해 설정된 탈북자들의 출신 배경을 곧이곧대로 믿어선 안 된다. 그렇다고 소설에 장치된 인물의 설정을 모두 거짓이라 여길 필요도 없다. 교묘한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독자는 극심한 스트레스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을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탈북자라고 해서 무엇인가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더 중요한 것은 ‘북한 출신’이라는 이상한 표현이다. 황해도, 평안도, 강원도, 함경도, 자강도, 양강도 (여기에 더하자면 평양직할시) 출신이 있을 뿐이다. 그래도 『유령』 속 탈북자들은 출신이 명확하다. 무산, 정주, 평양. 하지만 각각의 출신 배경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무책임하다. 소설을 읽는 내내 경험해야 하는 불편함은 탈북자의 탈북자 됨이 끊임없이 강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탈북자는 성공해선 안 되고, 성공의 기회도 잡아선 안 되고, 중독의 삶을 살아야 하며, 소외된 채로 몸부림치거나 체념해야 하며, 남성은 폭력과 무기력의 양극단 중에 하나를, 여성은 성적 대상화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 운명이고 숙명이며 주어진 생인 것처럼 묘사한다. 『유령』은 게임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부정한다. 주인공 ‘나’를 제외한 소설 속 모든 인물이 현실과 게임을 구분한다. ‘나’와 함께 〈리니지2〉에서 혈맹 활동을 했던 다른 탈북자들도 게임과 현실은 별개의 삶이라는 걸 안다. 주인공보다 더 극심한 삶을 사는 인물들조차 소설에서 제시하는 최후의 선택지가 게임 속은 아니다. 더 나락으로 떨어지더라도, 혹은 더 이상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발버둥을 치는 것이다. 그럼에도 주인공에게 “리니지는 환상이 아니다. 그곳은 현실이다.”(325쪽) 소외된 존재들의 사연을 드러내기 위한 소설로 생각한다면 『유령』은 썩 나쁘지 않은 작품이다. 하지만 소외된 존재들을 또 다른 틀로 가둔다는 점에서 『유령』은 썩 좋은 소설이라고 보기 어렵다. 탈북자가 등장하고, 탈북자 청년이 고뇌한다. 하지만 그것은 분단 현실이 아닌 자본주의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탈북자를 다문화의 범주로 넣는 순간 탈북자는 대한민국 국민이 될 수 없다. 그저 영원히 이방인으로 존재할 뿐이다. 탈북 이전의 삶까지만 디아스포라이다. 탈북으로 인하여 고향을 떠났기 때문에 이산(離散)이라 생각하는 것은 디아스포라에 대한 무책임이다. 2022년 『유령』을 읽어야 하는 독자가 있다면 이런 잔소리를 남기고 싶다. 끊임없이 의심하라. 소설 속 탈북자의 정체를 의심하고,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게임에 대해 의심하라.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학연구자) 이예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북한문학이 아닌 조선문학 연구자를 표방하지만, 주류문학 말고 비주류로 일컬어지는 대중‧통속‧장르 및 기타 등등 애호가가 되었다.

  • 실패한 혁명의 잔여물로서의 디스코 음악:〈디스코 엘리시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혁명이라는 단어는 상당부분 고난과 실패의 의미로 다가온다. 게임이 다룬 파리코뮌 혹은 그 이후의 러시아 혁명, 가깝게는 중동에서의 혁명과 홍콩의 우산혁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혁명들이 실패했고 민중들은 다시 고난의 상황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그 모든 역사 속 실패한 혁명의 잔해를 딛고 사는 사람들이며, 디스코라는 음악 또한 60년대의 실패가 낳은 아쉬움과 침잠의 흔적일 것이다. 게임 〈디스코 엘리시움〉이 굳이 실패한 혁명의 도시를 배경으로 삼아 디스코라는 흘러간 장르를 꺼내붙이는 이유는 이 게임의 주제가 살인사건이 아닌 ‘실패한 혁명의 역사’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 Back 실패한 혁명의 잔여물로서의 디스코 음악:〈디스코 엘리시움〉 04 GG Vol. 22. 2. 10. - 이 글에는 게임 〈디스코 엘리시움〉의 중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게임을 플레이해보지 않은 독자들의 주의를 요합니다. - 2019년 출시되어 큰 화제를 불러모았던 롤플레잉 게임 〈디스코 엘리시움〉은 제목만으로는 게임의 형식이나 내용을 유추하기 어려운 게임이다. 가상의 세계인 엘리시움 속의 번화와 퇴보가 겹쳐진 항구도시 레바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어느 알코올중독 부패경찰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는 게임에서 디스코라는 말이 들어가는 이유를 찾기는 쉽지 않다. 게임에서 디스코는 주인공의 다소 뒤떨어지는 감각을 묘사하는 듯 보인다. 현실세계에서처럼 디스코는 레바숄 안에서도 흘러간 옛 추억, 레트로에 가까운 감성으로서의 음악과 문화로 나타난다. 중년 형사는 이따금 흥에 겨워 자신의 전성기를 함께 했던 디스코 음악을 즐기며 추억하지만, 동시대의 음악은 게임 속 어떤 이벤트에서 드러나듯 디스코의 시절을 지나버린 어떤 흐름이다. 그저 주인공의 세대를 드러낼 정도로만 쓰인 것으로 보인 가벼운 소재로서의 디스코는 그런데 왜 게임 제목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까? 엘리시움이라는 말이 어떤 평원, 세계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 게임의 제목은 마치 ‘디스코의 세계’로 들리기도 한다. 왜 쇠락한 항구의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이 게임의 제목에는 디스코가 들어갔을까? 혁명이 실패한 도시, 레바숄 〈디스코 엘리시움〉의 중심 무대인 레바숄의 항구 마르티네즈 광장 어느 벽에는 총알자국이 잔뜩 남은 흔적이 있는데, 플레이어가 상상력을 동원할 경우 이 벽에 혁명가들을 세워놓고 총살한 흔적을 되살릴 수 있는데, 파리코뮌의 흔적으로 남은 ‘혁명투사의 벽’을 재현한 경우다. 게임 속 레바숄은 도시 국가고, 해양 속 군도로 이루어진 엘리시움 세계 전체에서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로 크게 번영한 곳이었다. 항만노조의 힘이 매우 강했던 이 도시국가에서는 갈수록 급격하게 벌어지는 빈부격차와 같은 문제가 불거지며 대규모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는데, 이 혁명은 레바숄 내부적으로는 성공했지만 국제 무역중심지로서 갖는 레바숄의 중요성을 인지한 외세 열강이 적극적으로 군사력을 투사해 혁명을 무력으로 제압함으로써 혁명은 3일천하에 머무르고 만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세계적 무역중심지가 대규모 혁명에 의해 해방구로 변하고, 그 해방구를 외세 열강이 무력으로 진압한 결과가 번영과 낙후가 공존하는 게임 속 레바숄의 현재 모습이다. 제국주의 시대의 혁명이었던 파리코뮌은 실제로도 파리 시민들의 성공한 혁명을 외세가 개입해 무너뜨린 역사다. 〈디스코 엘리시움〉의 배경은 실패한 혁명이 남긴 잔해로 그려진다. 왕당파와 공화파로 나뉘어 싸우던 왕년의 용사들이 늙어 공놀이를 함께 하고, 혁명의 중심이었던 항만노조는 정부군과 타협하며 새로운 억압기구로 기능하기도 하는, 실패한 혁명의 도시로 레바숄은 플레이어에게 다가온다. 70년대를 풍미한 디스코 플레이어는 게임 중반부에 어느 폐허가 된 교회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놀고 있는 한 무리의 젊은이들을 만난다. 마약을 심하게 빨고 하드코어 음악에 절어 있는 이 청년들과의 대화에서 플레이어는 주인공이 매우 디스코를 사랑하는 인물임을 알게 된다. 실패한 혁명의 도시라는 배경 위에 얹은 한물 간 음악으로서의 디스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현실의 디스코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0세기의 7-80년대를 장식한 대중음악장르인 디스코는 디스코테크Discotheque를 어원으로 삼는다. 영어로는 레코드 라이브러리Record library로 번역 가능할 이 프랑스어는 특히 댄스 음악으로서 크게 부흥했는데, 그 이전의 댄스홀이 주로 라이브 밴드와 함께 하는 공간이었던 반면 디스코는 녹음된 음반을 틀어 놓고 그 음악에 맞춰 춤을 출 수 있는 공간으로서 의미지어졌다.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구현할 수 있는 댄스홀로서의 디스코테크는 등장 초기 미국에선 주로 슬럼과 같은 주변부 지역에서 번성했고, 고고나 지터버그(지루박) 같은 댄스 음악을 밀어내며 서서히 주류 댄스음악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디스코는 1970년대 중반에 이르면 대중적인 인기로 절정에 달하는데, 이 무렵을 상징하는 영화가 존 트라볼타 주연의 〈토요일 밤의 열기〉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인간 남성 춤으로도 유명한 존 트라볼타의 디스코 댄스는 1977년 디스코의 절정 시대를 보여주는 아이콘으로 남은 바 있었다. 이러한 디스코 인기는 한국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오늘날 ‘디스코텍’이라고 부르는, 그리고 심지어는 독특한 용법으로 달라진 ‘콜라텍’이라는 특유의 무도장을 가리키는 무언가로 나타났다. 그 와중에 유흥가 출입이 안되는 10대들을 위한 ‘롤라장’이라는 공간 또한 술을 빼고 롤러스케이트만 넣었을 뿐이지 사실상 디스코 음악으로 공간을 가득 채운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오늘날 80년대 디스코 컴필레이션 음반 이름이 ‘추억의 롤라장’임을 생각해보자.) 침잠하는 개인, 무너지는 풍요, 그리고 디스코 1977년 정점을 찍은 디스코 열풍은 서서히 시들해지는데, 1979년에는 아예 ‘디스코 폭파의 밤’이라는 폭동까지 일어나며 서서히 한물 간 음악으로 취급받기에 이르렀다. 60년대 말 무렵 시작되어 80년대까지의 전성기를 겪은 이 장르의 부흥과 몰락은 여러 모로 동시대의 사회상과 떨어뜨려 생각하기 어려운 지점들을 보여준다. 디스코 붐이 일었던 1970년대 미국 경제는 서서히 둔화된 성장세를 나타내고 있었다. 2차대전의 여파로 대활황이 일어났던 미국 경제는 60년대를 끝으로 황금기를 마무리하고 있었는데, 1974년에 이르면 오일쇼크라는 이슈를 맞으며 미국 공업이 주춤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고유가 시대를 맞으며 대배기량, 저연비의 미국 자동차는 일본과 같은 신흥공업국에서 뽑아내는 고연비 고효율 차량에게 시장을 내주기 시작했으며, 이는 미국 공업의 심장이었던 디트로이트와 같은 도시들의 몰락에 일조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공업노동자들의 삶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고숙련 노동자 중심의 자동차공장들이 문을 닫고, 풀타임 정규직으로 일하던 이들은 세차장이나 패스트푸드점의 파트타임 잡으로 일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노조의 결속력은 약해지고, 일자리의 전반적인 질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과거 60년대와는 사뭇 다른 흐름들이 나타났는데, 68혁명으로 대변되는 변혁을 향한 거시적이고 사회적인 요구들이 강했던 시기를 살아가던 히피의 시대가 저물기 시작한 것이었다. 혁명과 반전, 평화를 외치던 이들은 갑자기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고 비즈니스맨으로 자리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를 지켜본 70년대 여피들의 아랫 세대, 청년세대들에게 그들은 그저 입으로만 혁명을 외치다 주류질서로 편입한 꼰대로밖에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비해 여유롭지 못하게 변한 세상 속에서 개인은 더욱 원자화되었고, 70년대의 20대는 거시적인 사회 변화에의 요구와 같은 쪽보다는 좀더 개인의 삶을 향해 파고들기 시작했다. 록의 시대가 저물고 디스코의 시대로 넘어가는 흐름은 사회경제적인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혁명과 디스코 1970년대에 일어난 경제사회적 변화와 청년노동조건의 변화는 디스코의 발흥과 무관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이야기는 게임 〈디스코 엘리시움〉에서 다뤄진다. 대규모 혁명이 일어났지만 처절하게 실패한 상황 속에서 중년이 된 주인공은 실패한 혁명의 시대에 디스코를 들으며 자라난 세대였고, 이제는 그런 디스코마저도 한물 간 시대로서의 현재를 살고 있는 인물이다. 게임 속의 레바숄이 실패한 혁명의 공간이고, 그 속에서 디스코가 유행했다 사라졌다는 설정은 혁명과 음악의 관계를 실어낸 설정이다. 혁명과 음악의 관계는 제작사의 국적인 에스토니아의 배경을 통해서도 이해된다. 발트3국 중 하나인 에스토니아는 2차대전 이후 소련에 병합된 국가였지만 소련의 압제에 고통받으며 독립을 꾸준히 요구해온 역사를 가지고 있는 국가였고, 1989년 8월에는 에스토니아 – 라트비아 – 리투아니아를 잇는 600km가 넘는 인간띠를 만들며 다함께 노래를 부르는 이른바 ‘노래혁명’이라는 사건을 연출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혁명과 음악이라는 이 독특한 관계가 게임 안에 구현된 배경으로 짐작해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디스코 엘리시움〉의 디스코는 게임의 주제와 동떨어진 장식으로서의 소재가 아니라 사실상 게임이 다루는 세계의 중심에 자리하는 소재다. 디스코는 실패한 혁명 이후 개인으로 침잠하기 시작한 이들의 시대를 장식했던 음악이었고, 주인공은 그런 실패한 혁명의 뒷세대로서 젊음을 보냈지만 이제는 그나마도 역사의 뒤안길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사람이었다. 여전히 실패한 혁명의 잔재가 가득한 그늘진 도시에서 그렇게 혁명이라는 열정은 주인공과 동시대인들에게 식어버린 과거의 무엇으로만 비춰질 수 있었을 것이다. 혁명은 실패하지만, 그것이 The End는 아니다 그러나 게임은 독특한 퀘스트를 통해 반론을 제시한다. 서브퀘스트 중 하나였던 환상의 생물, 인슐린데 대벌레가 함께하는 엔딩에서다. 애초에 있을 것 같지 않던 환상의 생물인 거대 대벌레를 추적하는 퀘스트는 마치 무지개를 좇는 듯한 불가능한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 같지만, 게임의 최후반부에서 실제로 등장해버리는 인슐린데 대벌레의 존재와 메시지는 혁명과 디스코라는 주제를 묶어내는 결정적인 장면을 보여준다. 실패한 혁명이라고 여겨지던, 인류가 자신의 삶과 세상을 바꾸기 위해 목숨까지도 걸었던 그 무언가들이 정녕 모두 실패한 것으로만 치부할 수 있는 것인가?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던 인슐린데 대벌레를 직접 보게 되는 게임 최후반부의 장면은 우리가 혁명이라고 부르는, 인류가 영원히 가 닿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추구해 온 그 어떤 것과 그 실패의 과정들이 정녕 무의미한 것인가를 되물어버린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혁명이라는 단어는 상당부분 고난과 실패의 의미로 다가온다. 게임이 다룬 파리코뮌 혹은 그 이후의 러시아 혁명, 가깝게는 중동에서의 혁명과 홍콩의 우산혁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혁명들이 실패했고 민중들은 다시 고난의 상황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그 모든 역사 속 실패한 혁명의 잔해를 딛고 사는 사람들이며, 디스코라는 음악 또한 60년대의 실패가 낳은 아쉬움과 침잠의 흔적일 것이다. 게임 〈디스코 엘리시움〉이 굳이 실패한 혁명의 도시를 배경으로 삼아 디스코라는 흘러간 장르를 꺼내붙이는 이유는 이 게임의 주제가 살인사건이 아닌 ‘실패한 혁명의 역사’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신비동물 탐사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무언가를 평생동안 추구해가는 노부부와, 이야기의 끝에 환상처럼 등장해버리는 대벌레의 존재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마찬가지로 환상종으로 여길 수 있을 혁명이라는 실패와 좌절의 역사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질문한다. 〈디스코 엘리시움〉은 그래서 실패한 혁명의 잔여물로서의 우리 시대에 대한 물음이 된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게임평론가이자 연구자. 2015년부터 게임을 업으로 삼아, 평론가로서는 게임이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을, 연구자로서는 상품으로서의 게임이 사회 안에 자리잡는 구조를 살펴본다. 『81년생 마리오』(2017), 『현질의 탄생』(2022) 등을 썼고, 〈다큐프라임〉(EBS)을 비롯한 다큐멘터리와 여러 매체 연재에 참여했다. 디지털게임을 시간권리상품으로 분석한 연구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게임연구소 '드래곤랩'대표를 맡고 있으며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 비디오 게임이라는 강신술의 세계에서(장려상)

    미래의 비디오 게임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구차한 물음에 수많은 미디어들은 상당량 유사한 패턴으로 반응한다. 이를테면 어니스트 클라인의 소설이자 해당 작품을 영화화한 작품 〈레디 플레이어 원〉은 육체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아바타 캐릭터로 이루어진 초대형 MMORPG라는 형태로 구현되는데, 지금 시점에서는 구태의연한 표현에 가깝다. 1994년 방영을 시작한 〈기동무투전 G 건담〉에서도 이미 플레이어의 육체를 트레이싱해 반응하는 아케이드 대전 액션 게임이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가 주장하는 미래의 비디오 게임은 통상 플레이어 육체의 즉시적 피드백, VR을 기반으로 하는 가상세계의 확립, 대체 육체가 활동할 수 있는 사이버 스페이스적 환경이라는 3개의 요소를 고정된 표징처럼 다루는 경향이 있다.  < Back 비디오 게임이라는 강신술의 세계에서(장려상) 07 GG Vol. 22. 8. 10. 미래의 비디오 게임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구차한 물음에 수많은 미디어들은 상당량 유사한 패턴으로 반응한다. 이를테면 어니스트 클라인의 소설이자 해당 작품을 영화화한 작품 〈레디 플레이어 원〉은 육체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아바타 캐릭터로 이루어진 초대형 MMORPG라는 형태로 구현되는데, 지금 시점에서는 구태의연한 표현에 가깝다. 1994년 방영을 시작한 〈기동무투전 G 건담〉에서도 이미 플레이어의 육체를 트레이싱해 반응하는 아케이드 대전 액션 게임이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가 주장하는 미래의 비디오 게임은 통상 플레이어 육체의 즉시적 피드백, VR을 기반으로 하는 가상세계의 확립, 대체 육체가 활동할 수 있는 사이버 스페이스적 환경이라는 3개의 요소를 고정된 표징처럼 다루는 경향이 있다. 이 세가지 요소가 주장하는 것은 플레이어와 캐릭터의 일체화된 움직임으로 정확히 환원된다. 이러한 미디어가 보통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면, 진보된 기술이 플레이어와 캐릭터라는 두 육체간에 발생하는 근원적인 ‘막(barrier)’을 제거해 줄 것이라는 상상에서 기인한 셈이다. 이는 역으로 그러한 막의 제거, 그러니까 일체적 경험을 제공하는 게임이 마치 ‘루두스적 이데아’로 인지되는 경향이 있음을 시사한다. 손가락으로 조작하는 컨트롤러, 플레이어와 캐릭터의 시점과 시간성의 분리 등은 기술이라는 한계로 인해 구현하지 못하는 일체화의 우회적 시뮬레이션에 그친다는 인식이다. 하지만 이는 비디오 게임이라는 매체에 대한 잘못된 신화에서 기인한 인식이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비디오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 캐릭터와의 일체화에 대해 끝없는 미끄러짐을 경험한다. 요컨데 처음 게임 컨트롤러를 잡아본 사람의 행위를 감상할 때에, 우리는 캐릭터의 움직임을 끝없이 트레이싱하려는 이상한 율동성을 구경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게임에 익숙해질 때가 오면 그러한 율동은 금새 사라지고 마는데, 이는 어떠한 허들을 넘어가는 순간에 자신과 캐릭터가 분리된 육체라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많은 게이머들에게 여전히 골칫거리로 분류되는 3D 멀미의 경우 또한 이런 미끄러짐의 정확한 예시가 된다. 3D 멀미의 주요 골자는 플레이어와 캐릭터의 감각을 하나로 융합시켰을 때-요컨데 두 육체가 하나인 것으로 다룰 때- 양자가 느끼는 감각의 틀이 어긋남에 따라 발생한다. 공교롭게도 많은 경우 3인칭 모드로 변경하면 해소된다는 점에서 우리의 육체는 캐릭터와의 분리에 더 편안함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애당초 2D 플랫포머의 안정적인 플레이 감각이 이러한 모든 문제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주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랍 풀롭Rob Fulop의 그 유명한 문장, “그는 나예요. 마리오는 하나의 커서입니다.He’s me. Mario is a cursor.”에서 오직 후자의 문장만을 취할 생각이다. 마리오는 커서이며, 그렇기에 내가 아니다. 하지만 플레이어의 명령(command)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을 통해 하나의 총체적 현실을 도출하는 매체에서 양자의 연결을 무시한다는 것은 비교적 간단하지 않다. 때문에 두 육체간의 일체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일정량 불가능한 문제다. 여기서 부정해야 하는 것은 두 육체가 완전한 합일을 지향한다는 목적론적 요청이다. 플레이어와 캐릭터는 확실히 일체화한다. 단, 그것은 완전한 합일을 지향하지 않는다. 애당초 플레이어와 캐릭터는 완전히 다른 감각, 시점, 정보들로 게임 내부의 세계를 바라본다. 그런 점에서 둘은 근본적으로 완전히 일체화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예를 들어 일련의 대전 액션 게임들은 상당히 단순한 현실-적과 나라는 일대일의 상황-만을 시뮬레이트하며, 플레이어는 캐릭터가 설정적으로 ‘숙달했을 것’이 당연한 동작들을 발생시키기 위해 특정한 조작을 필요로 한다.. 플레이어가 동작과 그 속성을 더 많이 익힐수록 캐릭터 역시 자신의 숙달성을 더 돋보이게 표출할 수 있기에 둘은 다소의 일체성을 지닌다. 하지만 여기서 양자간에는 완전히 다른 정보의 값을 갖는다. 플레이어는 캐릭터의 좌측면에서 상황을 바라보며-이를 통해 두 인물 간의 거리에 대해 객관적 정보를 얻는다-, 자신 뿐만이 아닌 ‘상대편 캐릭터’의 체력과 기력이라는 정보를 모두 확인할 수 있다. 게임 내부의 현실에서는 결코 가시화될 수 없는 정보다. 그 외에도 RPG의 레벨, 장비의 전투력, 스테이터스 이상이나 각 스킬의 수치화된 정보 역시 결코 캐릭터들의 현실에선 정량화될 수 없는 정보값들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플레이어와 캐릭터가 일체의 위계를 형성한다는 결론으로 연결된다. 요컨데 플레이어는 캐릭터에 비해 월등히 초월적 존재이며 그러한 초월성을 가지지 못한 캐릭터와 분리된 채 현존한다. 물론 이 초월성이 영속적 전능성을 말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플레이어는 유대교적 신성이 아니라 그리스적 신성에 가깝다. 소위 말하는 갓 게임(God Game) 조차도 그 권능은 명백한 한계를 지닌다. (피터 몰리뉴의 〈파퓰러스〉나 〈가더스〉가 이러한 사실을 명백히 해준다.) 때문에 그 권능의 표출을 위해서는 권능을 현현할 그릇이 필요하며, 많은 경우 이는 캐릭터의 역할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게임의 영웅들은 플레이어라는 초월적 신성을 담기 위한 그릇, 단어 그대로의 ‘아바타(Avatar)’로 기능한다. 플레이어-캐릭터의 관계는 부분적 혹은 일시적 일체화이며 이는 강신(降神)의 메커니즘으로 이해한다면 오히려 더 명확해진다. 공교롭게도 조지프 캠벨은 영웅을 ‘신의 세계에 뛰어들어 현실의 대안을 찾아 돌아오는 자’로 규정하고, 전근대 종교에서 무당들이 행하던 사회적 역할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피력한다. 그런 의미에서 게임의 캐릭터들은 게임 내적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플레이어라는 신성에게 일시적으로 몸을 빌려주는 강신술사(Channeler)에 더 가까운 존재인 셈이다. 이러한 사실을 게임 내 컷씬(Cut-Scene)의 문제에 대입해보면 흥미롭게 읽힌다. 컷씬은 플레이어로부터 명령권을 회수하는 불능의 시간이며, 때문에 캐릭터는 충분히 자아를 되찾은 듯 행동한다. 많은 비디오 게임 플레이어들은 이 컷씬에서 캐릭터가 너무 쉽게 죽어버린다는 사실을 종종 지적하는데(게임 내부에는 명백히 회복이나 부활의 시스템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시적 권능의 해제로부터 발생한 일이라고 상상한다면 납득할 수 있는 문제가 된다. 캐릭터의 초월성은 오로지 초월적 존재-플레이어-의 강신을 이어나가고 있을 때에 국한된다. 죽음이란 필멸자의 문제이며 애석하게도 불멸자의 위치는 오직 플레이어에게만 허용된 위치인 것이다. 절벽에 떨어진 마리오가 지정된 숫자만큼 다시 체크 포인트로 되돌아올 수 있는 건, 그 시간동안 플레이어라는 초월자에게 그 몸을 맡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디오 게임의 세계는 근본적으로 관념론적일 수 밖에 없다. 물론 각각의 게임 캐릭터들은 그들이 플레이어를 받아들이는 정도에 있어 어떠한 차이를 보이는데, 크게 상이하다 말할 만큼 세분화되지는 않는다. 그러한 관점에서 캐릭터를 다음과 같은 유형화가 가능하다. 1-신성(Deity) : 갓 게임, 건설/경영 시뮬레이션, 전략 시뮬레이션 등의 장르에서 발생하는 유형이다. 플레이어는 게임을 진행하는 와중에 특별한 아바타를 필요로하지 않는다. 플레이어는 게임에서 제공하는 권능을 육체의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다. 2-피그말리온 아바타(Pygmalion Avatar) : 캐릭터의 커스터마이징 기능을 탑재한 일부의 게임들에서 발견되는 유형이다. 단 이 유형에서의 핵심은 인물의 조물성 그 자체라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캐릭터의 위치가 공백임을 전제한다는 점으로 특징된다. 말하자면 이 유형의 아바타는 캐릭터의 생성과 동시에 그 육체가 세계에 출현한다는 뉘앙스를 강하게 준다. 다수의 MMORPG의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이에 해당한다. 3-퍼펫 아바타(Puppet Avatar) : 이 유형은 피그말리온 아바타와는 달리 그 존재가 이미 세계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게임의 진행 시간 전체에서 꽤 밀도 높은 ‘자아의 공백’ 상태가 유지된다. 캐릭터는 말을 하지 않거나, 혹은 정확한 대화의 내용이 생략된 커뮤니케이션을 진행한다. 말하자면 게임의 세계가 플레이어라는 신성을 강림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직조해낸 ‘비어있는 몸’에 가까운 존재다. 초기 아케이드 게임에서부터 〈드래곤 퀘스트〉 스타일의 JRPG까지 비교적 초기 게임에서는 보편적인 유형이었다. 4-샤먼 아바타(Shaman Avatar) : 이 유형은 서사적인 관점에서 명백한 자아를 갖추고 있다. 게임의 플레이 시간의 대부분 플레이어에게 육체를 내어주지만, 주체적으로 발언이 가능하다. 때로는 완전히 육체의 권리를 되찾아 일시적인 행위를 행한다.(컷씬) 플레이어는 이 육체가 허용하는 시점에 한해서만 그 육체를 점거하고 명령을 내릴 수 있다. 때문에 이 유형의 플레이어는 특히 자주 관객의 시점으로 게임을 지켜보게 된다. 내러티브 중시의 게임들에는 일상적인 유형이다. 물론 이러한 구분이 모든 게임의 일체화의 패턴을 포용하지는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요컨데 피그말리온 아바타 혹은 퍼펫 아바타 수준의 게임들도 때로는 ‘말하지 않는 컷씬’이라는 독특한 패턴을 통해 자아의 수복을 진행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그들은 자아가 비어있기 때문에 언어를 잃었다기 보다는, 과묵한 존재라는 특정한 캐릭터리티로 설명되기도 한다. 이는 비디오 게임이 가지는 양상이 복잡해짐에 따라 플레이어의 개입이라는 패턴 역시 지나치게 다면화된 탓이다. 그런데 여기서 묘한 문제의 제기가 가능해진다. 비디오 게임 플레이가 신성한 외적 자아(플레이어)와 강신을 바라는 육체(캐릭터)의 합일의 결과라고 한다면, 이 때에 강신을 주도하는 것은 누구인가. 물론 강신이란 기본적으로 그것을 바라는 술사가 신의 허락을 취득하였기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하지만 이미 허락이 완료되었다면 이후 현상을 주도하는 것은 강신술을 다루는 술사의 몫이 되어버린다. 때문에 비디오 게임에서의 두 주체간의 주도권이란 매우 복잡한 양태로 발전된다. 캐릭터의 육체에 명령을 내리는 건 외적 자아인 플레이어이지만, 그러한 명령을 적극적으로 세계 내부에 소환하는 것은 캐릭터의 의지에 가깝다. 이 관념론적 개념을 현실의 언어로 다시 해석한다면, 플레이어는 어떠한 외삽(Mod 등)이 작동하기 전 까지는 게임 디자이너가 준비한 육체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는 의미가 된다. 때문에 종종 비디오 게임에 있어서는 원치 않는 자아와 원치 않는 육체라는 이중의 트러블이 발생하기도 한다. 불응하는 신성, 〈라스트 오브 어스 2〉 먼저 원치 않는 자아, 강신의 결과를 의도적으로 거부하려는 신성의 몸부림에 가장 근접한 예는 너티독의 〈라스트 오브 어스 2〉(이하 〈라오어2〉)일 것이다. 이 게임은 수많은 이슈를 표층으로 가져오며 순식간에 태풍의 눈으로 작동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문제가 바로 게이머 집단과 평단이라는 양자간의 가시화된 충돌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물론 그러한 일이 다른 예술의 영역에서는 일상화된 문제라고 해도 말이다. 〈라오어2〉의 양 집단간 균열에 있어서 핵심을 정치적 공정성에 관한 해석 정도로 묶는 것은 문제를 지엽적으로 만든다. 사실 이 게임의 서사와 메시지는 수정주의 이후 웨스턴으로 수십번 반복된 헤묵은 것인데, 오직 그것을 양 인물에 대한 대리 체험으로 전달한다는 면에서만 특별하다. 플레이어는 서로간에 증오를 가진 두 인물-앨리와 애비-의 플레이를 번갈아 반복하면서 양자간의 입장을 밝히는 구조로 가지고 있다. 이 게임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은 갑자기 달려들어 별 수 없이 칼로 찔러 죽였던 한마리 개가, 이후 애비와의 공놀이를 위해 다시 등장하는 파트이다. 게임적으로 설정된 소규모 안타고니스트가 상호반응이 가능한 대상이었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되었을 때에 디자이너가 상정하는 이상적 구조가 대번에 파악되기 때문이다. 혹자는 여기서 개를 죽이지 않는 선택지를 삽입함으로써 플레이어가 맞이하게 될 정신적 충격을 완화할 수 있게 되기를 요청하곤 하지만, 아마 내가 시간을 돌려 최초의 플레이로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개를 죽이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라오어2〉의 플레이 구조에 어떠한 탁월함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구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단 이 탁월함이란 어떠한 명백한 전제를 요청하고 있다. 이 게임의 핵심과 접촉하려면 플레이어가 두 인물 모두와 ‘일체화’해야만 한다. 이 평행한 구조의 두 서사는 두 인물 모두의 입장을 체험의 형태로 제공하며, 두 인물이 가진 상이함와 동일성을 인지시키기 위해 구축되어 있다. 때문에 플레이어는 적극적으로 두 인물과 일체화해야 하는데 〈라오어2〉의 작동은 많은 경우(특히 게이머 집단들의 경우에) 이 지점에서 정지한다. 바로 신성한 자아의 적극적인 불응이다. 이 게임을 기다려온 많은 플레이어들, 그러니까 전작 〈라스트 오브 어스〉의 주인공 조엘과 ‘일체화’를 겪었던 신성들은 감정적으로 애비라는 육체를 밀어낸다. 앞서 말했듯 플레이어라는 신성은 그리스적 신성이며, 그 초월성과 더불어 매우 감정적인 존재로 특화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프로듀서라는 강신술 메커니즘의 설치자에 의해 선택의 여지가 없이 앨리/애비라는 육체로 강림하지만 그들의 감정은 이러한 강신술의 결과를 수용하지 못한다. 때문에 육체의 활동은 정확한 경험으로 치환되지 못하고 그 시점에서 정지하거나(게임을 그만 두거나), 불편한 기억으로 남는다(게임을 계속 진행하거나). 이 합일이라는 현상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조건 중 하나를 만족해야 한다. 첫째, 조엘이라는 육체와의 합일을 감정적 문제로 남기지 않는다. 둘째, 그 합일의 기억을 의식적으로 잊을 수 있다. 셋째, 혹은 모든 합일을 흐릿하게 바라본다. 즉, 강림의 정도를 의식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애석하게도 플레이어가 가지는 초월성이란 캐릭터에 대비해 상대적인 위치에서 그럴 뿐이다. 개별의 플레이어는 자신의 삶에서 결코 초월적이지 못하기에 이러한 조건의 내부에 들어가는 것은 극히 간단하지 않다. 때문에 〈라오어2〉의 메커니즘은 부분적으로 실패를 겪는다. 이 실패의 연유는 극히 간단하다. 닐 드럭만은 앞서 언급했던 ‘완벽한 일체성의 신화’로 게임의 메커니즘을 바라본다. 말하자면 플레이어는 게임을 플레이 하는 것만으로 완벽하게 일체화하며, 스스럼없이 그 체험을 추종한다는 전제로 게임을 만들어낸 것이다. 때문에 신성이 육체에 불응할 것이라는 상상을 가지지 못한 채 현상을 바라본다. 그가 이를 윤리적 부재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 역시 이러한 사실에 기준한다. ‘당연한 합일’을 이루고도 이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지성의 문제(실제로 그는 그러한 뉘앙스의 트윗을 게시했다.)이거나 윤리의 문제일테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러한 자연스러운 일체화의 신화는 환상에 불과하다. 비디오 게임의 세계에서 신성한 자아와 육체가 빈번히 불화한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커다란 실수다. 이는 완벽하지 않은 강신술의 가장 주요한 사례가 된다. 거부하는 육체, 〈라이브 어 라이브〉 하지만 때로 육체가 순수한 자아를 되찾기 위해 신성을 거부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슈퍼패미콤으로 발매된 스퀘어의 RPG 〈라이브 어 라이브〉(이하 〈LAL)는 이러한 보기 드문 현상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샘플이다. 본 게임의 8번째 시나리오인 ‘중세편’은 퍼펫 아바타의 유형으로 플레이어와 관계를 가지는데, 앞선 7개의 시나리오가 샤먼 아바타였다는 사실과 비교하자면 꽤나 흥미로운 변경점이다. 이 ‘중세편’은 전적으로 에닉스의 RPG 〈드래곤 퀘스트〉의 패러디이다. 왕과 공주, 마왕, 용사 등의 표상 조합을 통해 플레이어는 자연스럽게 〈드래곤 퀘스트〉의 세계를 상상하게 되며, 주인공 올스테드가 자아가 비어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화룡점정을 맺는다. 앞선 시나리오들과의 차이에 불구하고 의문 없이 플레이할 수 있는 것 역시 이러한 장치의 배치에 기인한다. 〈LAL〉은 철저하게 장르 중심적 시나리오를 제공하기에 중세편의 장치 역시 〈드래곤 퀘스트〉의 컨벤션을 따를 뿐이라 굳게 믿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중세편의 종반에 모든 사건을 겪은 올스테드는 퍼펫 아바타의 한계를 스스로 깬다. 그는 자신의 입을 통해 처음으로 ‘내 이름은 오디오, 마왕 오디오다!’라는 선언을 던진다. 퍼펫 아바타의 특성이 자아의 공백이라는 것을 전제한다면, 이 장면은 의도적으로 비워져있던 육체가 자아를 ‘생성해낸’ 장면으로 해석된다. 올스테드는 그 순간 자신의 육체를 점거하던 외적 자아(플레이어)를 밀어내고 그 위치에 자신의 자아를 안치시킨다. 플레이어가 일체화를 거부했던 〈라오어2〉와 반대의 역학이다. 올스테드는 비어있는 육체라는 정체성을 깨부수고 신성한 자아와의 합일을 스스로 거부한다. 때문에 이렇게 태어난 마왕 오디오는 9번째 시나리오 ‘통합편’에서 보스로 등장한다. 이 놀라운 반전은 얼핏 보면 서사적 구축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러톨로지적 관점으로는 결코 해석해낼 수 없다. 이 구성에는 캐릭터와 플레이어의 관계라는 근본적 역학에 대한 질문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올스테드의 각성이 왜 놀라운가? 단순히 그의 수동성이라는 설정을 반전시켰기 때문인가? 중세편 시나리오 자체에 도사리는 배신의 서사 때문인가? 가장 중요한 장치는 올스테드가 말을 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올스테드가 왜 말을 ‘하지 않는가’에 대해서도 답을 내어야 하는 구조다. 때문이 이 장면이 플레이어-캐릭터라는 분화된 자아-육체의 역학으로 환원되는 것이며, 캐릭터 자아의 공백은 오직 루두스적 목적에 복무하는 장치이다. 이 장면은 결코 서사적 동학의 결과물이라 말할 수 없다. 〈LAL〉의 이 사건이 가져다주는 효과는 두가지다. 첫째, 플레이어-캐릭터라는 이분화된 구조를 분명히한다. 그 둘이 분리되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이 이벤트는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둘째, 또한 플레이어의 권능을 무력화한다. 플레이어는 영구적으로 조종자라는 권능을 박탈 당하고(사실 마왕이 된 올스테드를 컨트롤할 수 있는 새드 엔딩의 선택지가 존재하기는 한다. 하지만 여기서의 그는 퍼펫 아바타가 아니라 샤먼 아바타로 기능함으로써 박탈의 기능을 일정량 유지한다.), 강신술의 압력을 통해 스스로의 손으로 그 마왕을 해치우는 길로 내몰린다. 플레이어는 자신의 초월성에 대해 의심을 가진 채 게임의 남은 부분을 진행해야 한다. 말하자면 〈LAL〉은 초월적 권능을 가시화한 뒤 그 한계를 시험한다. 〈LAL〉은 플레이어 초월성에 대한 일정량의 실험이다. 물론 이는 소위 말하는 게임 시스템에 관한 실험은 아니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서사적인 실험도 아니다. 차라리 이는 마르쿠스 가브리엘이 「예술의 힘」에서 언급한 신실재론적 예술론의 개념에 가깝다. 게임이라는 콤포지션이 그 수용자와 어떤 장(場)을 이루는지 확고히 하려는 실험이라는, 매체 그 자체에 대한 실험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정신과 육체는 더욱 불화해야 한다. 비디오 게임은 완전한 합일이라는 신화로부터 가급적 빨리 탈피해야 한다. 곤살로 프라스카가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비디오 게임」에서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언급하듯이 비디오 게임과 소격효과는 훌륭한 한쌍이다. 반응하기 때문에 몰입에 근간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관계를 간소화한 맥락의 도출이다. 비디오 게임의 메커니즘은 두 육체가 근본적으로 불화한다는 사실을 직시할 때 더 확고히 작동한다. 그렇다면 비디오 게임의 의미망은 결코 합일의 신화에 있지 않을 것이다. 〈바이오 쇼크〉에서 합일의 거짓이 폭로될 때에 비로소 의미망이 작동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정신(플레이어)과 육체(캐릭터)는 더욱 불화해야 한다. 그것만이 의미의 오작동을 멈추고, 우리에게 사유의 기쁨을 가져다 줄 지름길일 수 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평론가) 이선인 만화와 게임, 영화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합니다. MMORPG를 제외한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클리어가 라이프 워크입니다. 스팀덱을 주로 사용합니다.

  • 판단하고 행동하는 효율의 <피크민 4>

    프라스카를 포함한 루돌로지스트 관점에서의 분석대로 비디오 게임은 일종의 시뮬레이션이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디지털digital의 시뮬레이션이라는 점이 핵심이다. 본질적으로 비디오 게임은 세계를 어느 정도 계산 가능한 것digit으로 치환해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비디오 게임의 세계는 숫자로 치환된 현실을 가진다. 이것은 디지털 게임에 있어 불변의 조건이다. < Back 18 GG Vol. 24. 6. 10. Tags: 피크민, 감각, 시뮬레이션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Sunin Lee Writes and lectures freely across comics, games, and film. A lifework: clearing every Final Fantasy title except the MMORPGs. Mainly plays on the Steam Deck.

  • 콘솔게임 시장으로 진입하는 한국 게임산업을 바라보며

    자주는 아니고 진지하지도 않지만 가끔 닌텐도 스위치 구매를 후회할 때가 있다. 최근 2년 넘게 스위치를 제대로 가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오직 개인적인 게임 취향 탓이다. 무거운 테이스트에 충분한 핍진성을 통해 몰입감이 있는 게임을 선호하는데, 밝은 테이스트에 캐주얼한 게임이 많은 닌텐도가 잘 맞지 않음을 너무 늦게 즉 스위치 구매 후에 깨달았다. < Back 콘솔게임 시장으로 진입하는 한국 게임산업을 바라보며 11 GG Vol. 23. 4. 10. 자주는 아니고 진지하지도 않지만 가끔 닌텐도 스위치 구매를 후회할 때가 있다. 최근 2년 넘게 스위치를 제대로 가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오직 개인적인 게임 취향 탓이다. 무거운 테이스트에 충분한 핍진성을 통해 몰입감이 있는 게임을 선호하는데, 밝은 테이스트에 캐주얼한 게임이 많은 닌텐도가 잘 맞지 않음을 너무 늦게 즉 스위치 구매 후에 깨달았다. 그래도 주기적으로 향후 출시 예정 타이틀을 둘러 보기는 한다. 콘솔은 어린 시절부터의 로망이었고(이 쓸데없는 개인사는 과거 칼럼인 ‘왜 한국 콘솔시장은 작을까? - 한국 콘솔게임에의 회상’ 의 도입부를 참조하면 좋다) 이왕 산 스위치이니 어떻게든 활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얼마 전 ‘베요네타 3’이 출시되어 실로 오랜만에 스위치를 켜보았다. 예정 신작 리스트를 볼 때마다 확인하는 부분은 한국어화가 되어 있는가이다. 영어여도 게임 진행을 할 수는 있는 정도의 어학 능력이 있긴 하나, 즉각적으로 독해가 가능한 모국어를 따라갈 수준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산 콘솔 게임이 적은 것은 많이 아쉬운 부분이다. 그래서 ‘더 코마’가 스위치로 발매되었을 때 즐거웠던 기억은 오래 남아 있다. 한국 게임의 콘솔 점유율이 낮은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앞서 링크한 과거 칼럼에서 분석했던 바, 한국은 다양한 사회문화적 요소로 인해서 당시 청소년이었던 게임 유저들이 거실의 권력을 가져가지 못했다. 대신 자기 권력이 작동하는 ‘방’에서 가능한 PC 게임이 가정 내 게임의 헤게모니를 가져갔다. 그 결과 약하지만 확실한 오프라인 소셜의 콘솔 게임보다 확고한 온라인 소셜의 PC 게임이 주류가 되었고, 오프라인 소셜의 성격이 지배적인 아케이드(PC방 포함) 게임의 전통은 역설적 오프라인 소셜 기능을 가진 모바일로 계승되었다. 이것이 모바일-콘솔 우선의 세계 여타 시장, 특히 북미 및 유럽 시장과 모바일-PC 우선의 한국 시장의 차이를 낳은 원인이며 과정이었다. (이제 저 과거의 글을 읽을 이유가 없어졌다!) 스위치 구매를 이따금 회의하는 가운데, 요즘은 PS5 구매를 고민하고 있다.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와 같은 PS 독점의 트리플A 게임을 하고 싶기 때문인데, 스위치의 전례가 있다 보니 출시작과 출시 예정작을 면밀히 훑고 있다. 즐길 게임이 최소 두 자릿수는 있어야 저 돈이 아깝지 않을 테니까. 그러다 보면 괜히 살 마음 없는 엑스박스의 출시작 리스트도 보게 된다. 호기심엔 답이 없다. 이 지점에 오면 눈에 들어오는 경향성이 있다. 각 콘솔의 출시 예정작 중에서 한국산 게임들의 비중이 점차 늘어난다. NC소프트의 ‘쓰론 앤 리버티’, 넥슨의 ‘데이브 더 다이버’, ‘카트라이더 드리프트’, ‘퍼스트 디센던트’ 등에 넷마블이 유명 원작을 바탕으로 제작하는 ‘나혼자만 레벨업’ 등이 눈에 띈다. 여기에 네오위즈 작품인 ‘P의 거짓’, 위메이드의 ‘나이트크로우’, 개인적으로는 내 안의 변태를 깨우는 그래픽이라 위험작으로 분류한 시프트업의 ‘스텔라 블레이드’ 등등까지. 여기에 ‘크로스파이어: 시에라 스쿼드’와 같은 콘솔 기반의 VR 게임들까지 합하면 숫자와 무게감은 더욱 늘어난다. 전통적으로 콘솔 진출에 소극적이었던 한국 게임사들이 대대적인 도전을 하고 있다. 2022년 한국 게임 시장에서 콘솔 게임이 차지하는 비율은 유저의 이용률로 볼 때 17.9%에 불과하다. 이를 세계 전체 게임 시장으로 확장해보면 시장 규모 대비 1.7%다. 자본 규모로는 1조 원 가량에다 5% 정도 비중의 작은 시장이다. 한국이 미국-중국-일본에 이어 세계 게임 시장의 7.6%를 차지하는 세계 4위 시장임에도, 혹은 감안하지 않아도 작다. 그나마 한국 콘솔 게임 시장은 최근 7년 동안 꾸준한 성장을 해오긴 했다. 2015년에 1.8% 비중에 불과했던 이 시장은 ‘모여봐요 동물의 숲’이라는 히트작이 발매된 2020년에는 6.4%까지 성장했다. 다만 바로 대형 히트작이 없었던 바로 다음 해에 5.5%로 떨어지긴 했지만, 2022 대한민국 게임백서에서는 한국 게임사들의 출시 예정작이 출시되면 다시 성장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 출처 : 2022 대한민국 게임백서 하지만 게임 개발 현장과 전문가들의 지적은 콘솔 성장보다 PC와 모바일의 성장에 집중되어 있다. 일단 최고 파이인 모바일의 비중과 매출에서 성장세가 둔화되는 현상이 뚜렷하다. 팬데믹 특수를 탔던 2020년에 잠시 성장세가 늘어났을 뿐이다. 매출액 기준으로 보면 시장이 성장 한계점에 다다른 것이 더욱 눈에 띈다. 이런 상황은 PC 게임 시장 또한 마찬가지다. 유명 IP의 신작이 출시되면 잠시 매출이 늘어나는 정도인데, 이건 시장이 이미 한계에 도달한 후라는 의미다. * 출처 : 2022 대한민국 게임백서 이미 시장에서의 신호는 PC와 모바일에서 더 이상의 성장을 기대할 수 없음이 관측되고 있다. 게임사 입장에서 당장 오늘 먹을 것은 있지만 내일, 다음 주, 다음 달, 내년의 먹거리가 불확실해지는 상황이다. 게다가 시장과 개발 현장이 성숙해지고 법적 예술의 지위도 확보된데다 노조들이 제 역할을 하려고 나서기 시작하면서, 인건비 상승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다른 표현을 쓰자면 개발 비용 증가다. 그리하여 한국 게임사들은 다양한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블록체인과 NFT를 접목해서 환금성이 높은 게임을 만들어보는 시도가 있다. 하지만 이 시도는 기존의 과금유도 게임과 기본 구조가 같고, 한국 국내 시장에서는 게임사의 현금 환금을 금지하는 법안이 합헌이라는 판결까지 나와 갈 길이 애매하다. 메타버스 개념을 활용하는 방안도 시도되고 있다. 메타버스는 환경만 제대로 조성된다면 이용자가 곧 컨텐츠 창작자가 되어주기 때문에 컨텐츠 개발 소요가 많이 줄어드는 장점이 있다. 반면 시장에 안착한 후에는 여타의 MMO 게임과의 차별성을 두는 부분에서 실패할 가능성이 높고, 온라인 성범죄의 플랫폼이 되는 등 신종 범죄에 이용 당하는 부작용도 관찰된다. 게임 개발의 노하우를 다른 분야에 적용시켜 가상인간이나 버튜버를 만드는 수익 모델도 제시가 되었지만, 일단 이건 게임 분야가 아니니 논외로 하자. 이런 와중에 느리게나마 확실하게 성장 중인 국내 콘솔 시장과, 이미 확고한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 북미/유럽의 콘솔 시장이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현재 한국의 게임 수출 대상국 1위는 압도적으로 중국인데, 이런 중국의 게임 시장 상황은 최근 몇 년 동안 좋지가 않다. 중국 게임사의 개발 역량이 양질의 측면에서 궤도에 오르면서 경쟁이 심화되고 있는데다, 중국 정부가 자국의 게임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외국 게임에 대한 판호 발급을 줄이는 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콘솔 게임에 진출하는 것은 중국 시장 대신 북미/유럽 시장을 개척하는 2중의 개척이며, 필수불가결한 개척이 된다. 여기에 더해서 진출 정체 상태인 중국 시장에서조차 콘솔 게임은 성장 중이다. 2021년 대비 2022년의 중국 콘솔 시장의 매출은 17% 증가했다. 비록 불법인 그레이마켓 매출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혹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잠재 성장 예상은 더 높다. 그렇다면, 판호만 얻어낼 수 있다면, 이 성장하는 콘솔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것이다. 여러 모로 한국 게임사에게 콘솔이 다음 개척지가 될 이유들이다. * 출처 : 니코파트너스 그리고 배틀그라운드가 흥행했다. 배틀그라운드의 성공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게임 개발 현장에 준 메시지 중 하나는, 기존 MMO 게임처럼 온라인 퍼블리싱 판매가 아닌 ESD(Electronic Software Distribution)에서의 판매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었다. 한국 게임이 ESD에서 판매가 가능하다면, 그 ESD는 스팀일 수도 있고 플레이스테이션 스토어일 수도 있고 닌텐도샵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배틀그라운드의 2017년 이후 대작과 인디 가릴 것 없이 많은 게임이 스팀을 비롯한 ESD를 통해 출시되었다. 스팀 기준으로 판매 및 접속 성적을 보면 ‘블레스’, ‘섀도우 아레나’ 같은 게임들은 기대 이하의 성적이었지만, ‘스컬’, ‘플레비 퀘스트: 더 크루세이즈’, ‘영원회귀: 블랙서바이벌’ 등은 나쁘지 않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러고 보면 스위치에서 할 게임이 없다고 징징대던 내가 닌텐도샵에서 ‘더 코마: 커팅 클래스’를 샀던 시기도 배틀그라운드 이후인 2019년이었다. 따라서 한국 기업들의 콘솔 게임 시장 진출 시도는 약간의 절박함도 묻어 있다. 집 안에서는 더 이상의 산출이 어려운데, 바깥에서 희망의 씨앗을 보았기에, 그리로 가는 것이다. 당장의 먹거리는 있지만 통계 지표는 그 먹거리가 조만간 포화 상태가 될 것을 경고하고 있으니까. 이는 제국주의에 비유할 수도 있고 이민자에 비유할 수도 있다. 사실 비유의 측면에서는 두 가지 모두 같은 동인을 갖고 있다. 국내에서의 시장 성장이 한계이니 외국으로 나간다는 제국의 동인과, 국내에서 원하는 성취나 생존을 이루기 어려우니 외국으로 나간다는 이민의 동인은 사실 포화 상태에서 추동력을 얻는다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같다. 단지 서있는 입장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뿐이다. 매출 통계 보고서를 받아든 현장의 경영자와 개발자는 절박한 이민자의 마인드를 갖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절박함은 보상 받을까? 앞서 스팀에 진출했다가 실패를 맛본 게임들의 예를 들었는데, 최근에는 ‘칼리스토 프로토콜’이 비평적으로 실망을 끌어내면서 사실상 실패의 성적을 거뒀다. 이후에 올 도전들이 이런 식이 되면 큰일난다. 이미 ‘P의 거짓’과 ‘퍼스트 디센던트’는 아류작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눈길을 받고 있다. 우리가 출시 예정작의 미래를 전망할 때 쓸 수 있는 가장 쉬운 단어는 ‘완성도’다. 특히 콘솔이면 소위 ‘패키지 게임’이 우선 떠오르기에 차차 고쳐나갈 수 있는 온라인 기반 게임보다도 출시 직후의 완성도가 더욱 중요하다. 가장 흔히 그리고 가장 먼저 짚는 요건이고, 따라서 엄밀히 따지면 하나마나 한 말이다. 그러니 자칫 놓치기 쉬운 완성도의 중요 요소를 짚어 보는 것이 의미 있을 것이다. 경영 분야에서 비유를 빌려온다면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의 원리가 있다. 언론인 토머스 프리드먼이 동명의 저서에서 제시한 비유적 개념이다. 렉서스는 세계화, 보편성의 아이콘이고 올리브나무는 전통성, 문화적 오리지널리티의 아이콘이다. 이 짝패는 또한 개방성과 폐쇄성, 수출과 내 수의 상반된 개념을 의미하기도 한다. 프리드먼은 반대의 두 가치 중 하나를 선택하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다국적 요소에 의해 만들어져 다양한 국가로 팔려나가는 렉서스만을 택해 개방 일변도, 세계화로 나아가기만 하면 큰 시장에서 거대한 성과를 얻어낼 수는 있어도 지구 반대편의 악재로 인한 도미노 현상에 얻어맞을 수가 있다. 때 되면 찾아오는 금융 위기가 가장 확실한 예시다. 이것을 문화 분야로 번역하면 ‘상품에 줏대와 무게감이 없어진다’. 반면 동네 올리브나무를 놓고 싸우는 분쟁은 지엽적이고 유치해 보이지만, 동시에 지역의 뿌리이기도 하다. 프리드먼은 국가를 최후의 올리브나무라고 규정한다. 가족, 지역, 민족, 종교 등은 ‘우리’를 규정하는 판단 준거다. 배타주의와 혐오를 낳기 쉽고 확장성은 0에 가깝지만, 이 또한 렉서스만큼이나 확고한 인간 욕망의 한 축이다. 다시 이를 문화 분야의 언어로 번역하면 ‘확고한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컨텐츠’가 된다. 이 지점에서 떠오르는 장면은 ‘바이오하자드/레지던트 이블’의 1편, 도입부 컷신에서 흘러나왔던 전설적인 대사다. “Wow, What a Mansion!” 본래의 일본어 대사는 “대단한 저택이군” 정도의 문장이지만 허술한 영어 번역과 방만한 연기로 인해 저런 어처구니없는 감정선의 대사가 만들어졌다. 또는 드라마 ‘로스트’에서 한국 장면이랍시고 동남아 식생이나 60년대 간판을 등장시켰던 것을 떠올릴 수 있다. 두 경우 모두 제작진들이 렉서스를 제대로 타고 저쪽의 올리브나무에 도착하는 임무를 해내지 못한 경우다. * 1편의 왓어맨션은 밈이 되었지만 7편의 현지 재현도는 강력한 효과를 냈다. 반면 성공한 경우는 ‘바이오하자드/레지던트 이블’의 7편이다. 루이지애나 외딴 늪지에 위치한 베이커 저택의 음침함을 현실성 있게 표현해내기 위해, 제작사는 텍사스 출신의 작가를 기용하고 로컬라이제이션 디렉터를 따로 기용했다. 이는 해당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렉서스에 제대로 탑승한 시도였다. 반대의 경우는 드라마 ‘킹덤’이 있다. 일본도 중국도 아닌 조선의 복식과 정부 시스템이 등장하는 이 드라마에서 세계인의 관심을 끈 것은 의외로 복식, 특히 갓이었다. 생소하지만 멋져 보이는 ‘cool hats’에 대한 관심은 올리브나무가 렉서스를 타고 넘어가 전파에 성공한 경우다. 유사한 성과를 보인 게임으로 ‘고스트 오브 쓰시마’를 들 수도 있겠다. * 드라마 속 복식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시킨 드라마 ‘킹덤’. 이는 우리 동네 올리브나무를 설득력 있게 파는 방법에 대해 큰 힌트가 된다. 렉서스 개념과 올리브나무 개념은 서로 정반대의 원리 같아 보인다. 하지만 이 둘을 한 콘텐츠 안에서 구현하려고 한다면 둘의 지향점이 같아진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현실성 혹은 핍진성이다. 그리고 이 지향점의 끝은 몰입감으로 이어지고, 이는 완성도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향후의 콘솔 도전기에서 개인적인 기대작은 올리브나무를 제대로 분석해 딱 맞는 렉서스에 싣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펄어비스의 ‘도깨비’가 되겠다. 이 게임 역시 멀티 플랫폼으로 콘솔을 지원할 예정인데, 트레일러를 통해 본 예상 장점으로는 현대 한국적 환경을 훌륭히 녹여낸 배경이 있다. 한국적이라 하여 고궁이나 한복을 우선 내미는 구시대의 우를 범하지도 않고, 반대로 그런 요소를 철저히 배격하지도 않으며, 전통과 현대가 맥락을 넘어 뒤섞여 있는 현실 한국의 특색을 그대로 녹여냈다. 딱히 이런 배경을 선택하지 않은 다른 게임의 경우에도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의 원리는 적용될 수 있다. ‘쓰론 앤 리버티’에서는 ‘기상이 전술에 미치는 영향’을 얼마나 현실감 있게 구현해내는지가 이 게임의 올리브나무가 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한 명의 게이머로서, 아무쪼록 모든 출시 예정작들이 자신의 올리브나무를 잘 파악하길 바란다. 가능하면 닌텐도 스위치 버전으로 살 것 같지만, 어느 날의 내가 간이 커져서 PS5를 질렀을 수도 잇으니 장담은 못 한다. 다만 어느 버전이든 충분한 몰입감을 주는 핍진성 구축에 성공하였기를. 그리하여 우리의 게임 라이프가 PC와 모바일을 넘어 콘솔의 로망에 다시 가닿기를.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덕질인) 홍성갑 프리랜서 작가. 이 직업명은 ‘무직’의 동의어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딴지일보에서 기자를 시작하여 국정원 댓글 조작을 최초로 보도했다. 평생 게이머로서 살면서, 2001년에 처음 게임 비평을 썼고 현재 유실된 것을 매우 기뻐하고 있다.

  • 와 Player in Environment(PiE), '우연한 아름다움의 섬광'을 찾아서

    윌 라이트의 발언은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출발점을 제공한다. 이 장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전통적인 비디오 게임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승리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플레이어는 클리어해야 할 최종 보스도, 달성해야 할 명확한 목표도 부여받지 않는다. 대신 플레이어는 스스로 플레이의 명분과 이유를 만들어내야 한다. < Back 와 Player in Environment(PiE), '우연한 아름다움의 섬광'을 찾아서 27 GG Vol. 25. 12. 10. 라이프 시뮬레이션과 '승리 조건의 부재'의 나비효과 <심즈>의 아버지이자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의 개척자 윌 라이트는 2001년 Game Studies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인터랙티브 디자인 철학을 설명하며 주목할 만한 발언을 남긴다. 윌 라이트는 플레이어의 창조성을 활성화하는 것이 자신이 게임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라고 밝히며, 플레이어가 자신이 한 일이 자신만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일에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 발언은 단순히 게임 디자인의 기술적 측면을 넘어서, 라이프 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가 본질적으로 플레이어의 주관성과 분리될 수 없는 경험을 제공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진1. 윌 라이트(2010) (출처: 위키피디아) 윌 라이트의 발언은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출발점을 제공한다. 이 장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전통적인 비디오 게임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승리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플레이어는 클리어해야 할 최종 보스도, 달성해야 할 명확한 목표도 부여받지 않는다. 대신 플레이어는 스스로 플레이의 명분과 이유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은 시뮬레이션 게임 장르에서 플레이어가 단순히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을 넘어, 시뮬레이션과 어떤 방식으로든 의사소통을 주고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에서 플레이어와 시뮬레이션의 의사소통은 플레이어가 자신이 시뮬레이션 속에서 처한 상황과 환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조작하느냐와 다르지 않다.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는 플레이어가 플레이 디자인을 완성하는 장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는 플레이어에게 조작할 수 있는 플레이 환경만 제공해주는 것일까, 아니면 시뮬레이션에 대한 플레이어의 이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다. 플레이 공간을 제공하는 것과, 특정한 방향으로 플레이어의 이해를 유도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플레이어가 목표를 설정하는 과정 자체가 필연적인 것인지, 우연적인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플레이어의 목표설정은 필연인가, 우연인가? 시뮬레이션 게임은 자체적인 규칙을 가진 미시계를 모델링하여 시뮬레이션을 구현할 환경을 마련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플레이어는 자체적인 규칙을 가진 미시계와 상호작용을 통해 그 미시계의 규칙들을 파악하고, 나름의 해석을 덧붙여가며 시뮬레이션을 탐구해 나간다. 특히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는 게임 시스템의 복잡한 역학과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이 입력한 입력값의 결과를 우연히 확인해가며 플레이어만의 고유한 서사를 획득해 간다. 윌 라이트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게임들을 본질적으로 소프트웨어 장난감에 가깝다고 정의한 바 있다. 그는 게임이 거대한 가능성의 공간을 제공해야 하며, 모든 플레이어가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하는 특정한 가능성보다는 각 플레이어가 가능한 한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거대한 가능성의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플레이어에게 큰 해법 공간을 제공하면 플레이어는 자신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만약 플레이어가 자신이 한 일이 자신만의 고유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에 훨씬 더 큰 공감을 느끼게 된다고 설명했다. 장난감에는 정해진 목표도 없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려는 주체 스스로가 놀이의 규칙과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윌 라이트의 이런 인터렉티브 디자인 철학은 ‘심시리즈’를 비롯한 라이프 시뮬레이션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목적을 제시하는 일반적인 비디오 게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경험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에서 플레이어는 필연적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자신이 설정한 목표에 종속된 플레이를 한다고 봐야 할까, 아니면 우연히 시뮬레이션을 만지다보니 목표를 가지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까? 윌 라이트가 지적하는 라이프 시뮬레이션 게임의 장난감적인 특성은, 게임을 둘러싼 오래된 논쟁을 상기하게 만든다. 게임은 오랫동안 로저 이버트를 포함한 많은 평론가와 연구자에게 존재론적으로 예술의 특성을 가진 매체로는 인정될 수 없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들이 제시하는 평가의 근거는 대게 칸트가 『판단력 비판(Kritik der Urteilskraft)』에서 예술을 통한 미적 체험, 그리고 미적 판단의 기준을 제시했던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칸트는 미적 판단이 개념에 근거하지 않으며 어떤 의도도 갖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목적성’의 표상을 포함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합목적성은 특정한 목적의 귀속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칸트는 이를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고 불렀다. 칸트에게 미적 경험은 인식적 판단과는 다른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떤 개념적 파악이나 실용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순수한 관조의 영역에 속한다. 그리고 칸트는 자연에는 목적이 없기 때문에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이 어떤 질서인지는 모른다는 것이고, 종속된 것들은 딱히 목적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칸트에게 자연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는 것은 중요한데, 그 이유는 '자연이 어떤 것인지 몰라야' 내적인 질서 창출과 자발성을 바탕으로 법칙만을 추구하는 의지를 욕망과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칸트는 이를 ‘선의지’라고 부르며,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일치’라고 보았다. 미적 판단에서 상상력은 어떤 자유로운 유희를 허용받으며, 하나의 개념에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일반적인 지성의 합법칙성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칸트의 개념이 난해한 이유는, 칸트가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일치’와 같은 것들이 개념이 아니라 일종의 현상 같은 것으로 이야기한 것에 기인한다. 이 때문에 ‘목적 없는 합목적성’은 아주 우연히 도달하게 되는 경지 같은 것이 된다. 물론, 칸트가 이렇게까지 ‘선의지’를 주장할 수 있는 데에는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칸트의 주장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타우마제인(thaumazein)’이라고 부르는, 인간에게 철학을 하게 만들 수 있는 어떤 현상에 대한 개념이 기저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Metaphysica)』에서 인간이 경이로움 때문에 철학을 시작했다고 주장하며, 이는 무지에 대한 예리한 자각과 무지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다. 타우마제인은, 설명하자면 “매번 보는 노을이 달라지지 않았음에도, 나한테는 갑자기 다르게 보이는 현상” 정도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칸트에게 ‘선의지’란 무언가를 추구하는 힘이나 동력 같은 것이라기보단, 프로그래밍 코드를 돌리다가 리팩토링 안 한 스파게티 코드가 문득문득 시스템과 맞아떨어지며 돌아가고 있다고 느끼는 경이 체험 같은 것에 가깝다. 다시 말해, 플레이어가 자체적인 규칙을 가진 미시계와 상호작용을 통해 입력한 입력값의 결과가 우연히 시스템이 의도하지 않은 복잡한 역학의 질서와 맞아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체험을 제공한다면, 게임을 예술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는 힘을 잃게 된다. 이는 단순히 게임을 예술로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게임이 단순히 규칙의 집합이나 목표 달성의 도구가 아니라, 플레이어가 시스템과의 우연한 조우를 통해 미적 경험을 할 수 있는 매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게임 연구자들 역시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에서 게임을 예술의 한 형태로 볼 수 있게 만들만한 가능성을 보았으며, 이 가능성을 분석해왔다. 윌 라이트 자신도 플레이어가 게임을 플레이하며 시뮬레이션을 ‘역설계’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설명하기도 했었다. 시뮬레이션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플레이어가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더 정확하게 모델링할수록 앞으로의 전략이 더 나아진다는 것이다. 이는 컴퓨터가 중간 모델이며, 플레이어의 머릿속 모델을 형성하기 위한 하나의 단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MDA에서 DPE로, 시스템 산출물에서 주관적 경험으로 오늘날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를 이해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연구자는 아마 워킹 시뮬레이터 장르의 대표작으로 종종 소개되는 (Thatgamecompany, 2012)의 개발자이기도 한 로빈 후니케(Robin Hunicke)일 것이다. 후니케는 2004년 시뮬레이션 장르를 이해하기 위한 MDA 프레임워크를 발표했다. MDA 프레임워크란 시뮬레이션 게임의 플레이를 디자인하는 개발자를 위한 프레임워크로, 게임을 개발할 때 매커니즘, 상호작용, 미학 혹은 경험 순서로 플레이를 설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림1. MDA 도식과 요소별 개념] - 출처: 「MDA: A Formal Approach to Game Design and Game Research」(Robin Hunicke, 2004) - 동시에 후니케는 MDA 프레임워크가 복잡한 라이프 시뮬레이션 게임을 구조화해 분석할 수 있으며, 플레이 경험을 시스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고, 플레이 동기와 시스템 사이의 연관성을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개발자와 플레이어 모두에게 유용하다고 주장한다. 후니케는 개발자는 MDA의 흐름으로 '설계 순서의 관점'에서 게임에 접근하면 되고, 플레이어는 ADM의 흐름으로 '경험 순서의 관점'에서 게임을 분석할 수 있다고 말한다. 후니케의 MDA 프레임워크는 라이프 시뮬레이션이 가진 플레이 특성을 경험 지향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한 것은 분명하나, 미학 혹은 경험이 매커니즘과 상호작용에 종속된 결과로만 이해하게 만드는 한계 역시 품고 있다. MDA 프레임워크가 플레이에 대해 계층적으로 접근한 것은 게임플레이 디자인에 있어 명확함을 담보해줄 수 있으나, 한편으로 게임 디자인의 유기성을 저해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림2. DPE 도식] - 출처: 「The Design, Play, and Experience Framework」(Brian Winn, 2008) - (DPE는 본래 게이미피케이션 분석을 위한 프레임워크로, 베네디스는 DPE가 MDA보다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 분석에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제네시스 베네디스(Genesis Benedith)는 MDA 프레임워크의 이러한 한계를 지적하며, MDA 프레임워크가 UX전략이나 연출과 같은 규칙으로 환원 불가능한 게임 요소를 분석에서 배제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베네디스는 MDA가 <심즈>의 핵심 요소라고 할 수 있는 DLC 등에 의한 게임의 기술 변화가 플레이어의 경험을 어떻게 바꾸는지, 플레이어가 창출한 서사 아크 등을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하며, 궁극적으로 MDA가 게임 개발에 있어 매커니즘 편향을 만든다고 지적한다. 베네디스는 이러한 복잡한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의 게임요소를 포함시키기 위해 DPE 프레임워크를 제안하는데, 이는 MDA가 집중한 내재적 분석을 외재적 요소까지 확장시킨 것에 가깝다. 베네디스는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를 분석하기 위해 게임 요소를 Design, Play, Experience로 확장해서 분석해야 한다고 말하며, DPE 프레임워크를 제안한다. DPE 프레임워크의 핵심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의 맥락을 중심으로 게임을 분석하여, 주관적 경험에 분석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프레임워크를 지나치게 넓게 확장하고, MDA가 왜 오늘날 시뮬레이션 게임의 표준 모델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간과한 주장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다만, MDA에서 DPE 프레임워크로 넘어오며 주관성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는 점만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의 분석이 왜 하필 플레이어의 주관성을 향해 이동하고 있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인조이>, 콘텐츠 진공이 쏘아올린 작은 공 이즈음에서 크래프톤이 야심차게 ‘앞서 해보기’로 공개했던 <인조이(InZOI)>(2025~)를 떠올려보자. 분명하게 말할 수 있지만, <인조이>는 플레이어에게 까다로운 플레이 환경을 요구하는 주제에 지나치게 버그가 많고, 콘텐츠는 진공에 가까울 정도로 적다. 더구나 엔비디아와 협력을 통해 게임 내에 AI NPC ‘스마트조이’를 마련하겠다고 했지만, 현 상태만 두고 보면 <인조이>의 AI 환경 수준은, 긍정적으로 평가해봐야 ‘아직까지는’ CDPR의 <사이버펑크 2077>와 비슷하거나 못한 수준으로 보인다. 이는 분명히 <인조이>의 단점이며, 우발적 사건들이 난입할 가능성을 생각해가며 플레이해야 한다는 점에서 게임의 가장 중요한 소구점 중 하나인 ‘쾌적한 플레이 환경’을 기대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점으로 인해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플레이어들이 △게임의 최적화 문제 △잦은 크래시 △예측 불가능한 버그로 인해 좌절감을 경험하고 있다. 그 와중에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할 게 없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단점만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게임 커뮤니티가 비판하고 있는 ‘콘텐츠 진공상태’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상태를 굳이 나쁘게 말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이 ‘콘텐츠 진공상태’ 만큼은 (최소한 나는) 긍정적으로 보고 있으며, <인조이>의 치명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조이>가 ‘앞서 해보기’를 런칭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 요인이자 존재 가치라고 생각한다. 할 것이 없는 상태를 어떻게 긍정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라이프 시뮬레이션이 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상태는 <심즈>처럼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는 세계’보다는 ‘일상적 세계’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상이 무엇인지 되물어볼 필요가 있는데, 이는 게임에서 구현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가 아닌 ‘무엇을’에 가깝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 1901~1991)는 『현대세계와 일상성(La Vie Quotidienne Dans Le Monde Moderne)』에서 일상을 일종의 패턴이자 리듬이라고 지적하며, 반복되는 특징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르페브르는 일상생활을 ‘환상과 진실, 힘과 무력함이 교차하는 지점, 인간이 통제하는 영역과 통제하지 못하는 영역이 만나는 곳’이라고 변증법적으로 정의하며, 일상은 다양하고 구체적인 리듬들 사이의 끊임없이 변형되는 갈등이 발생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한편으로 반복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위치에 존재하는 두 개의 구간을 동일성을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앙리 르페브르가 일상이 패턴이라고 주장한 것에 동의할 수 있다면, 일상은 차이점을 통해 구분할 수는 없으나 동일성의 반복으로는 구분할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동일성’을 ‘차이 혹은 변화 없음’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일상은 차이 혹은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는 특징을 갖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차이와 변화가 있냐 없냐가 아니라, 그 차이와 변화를 제대로 인지할 수 없는 상태에 있으며, <인조이>는 플레이어가 사건과 사건 사이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인조이>에서 ‘콘텐츠 진공’이라고 느끼는 부분은 게임이 △플레이어의 플레이 방향을 지시하지 않음 △플레이어가 게임 빌드나 시퀀스 내의 사건에 개입하기 어려움(혹은 없음)에 가까워 보인다. <인조이>의 개발일지를 보아도 플레이어블한 개발보다는 생성형 인터랙티브 무비의 빌드를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때도 종종 있다. 가령, 가장 최근에 쓰여진 11월 26일 패치노트에는 “ 무법자 기질 조이가 자율 행동으로 '훔치기' 상호작용을 진행하지 않도록 개선” 이 올라와 있고, 11월 19일 패치노트에는 “ 식사 후 2시간이 지난 음식 그릇을 일괄 정리할 수 있도록 개선 ”이 올라와 있으며, 대부분의 패치에 AI의 행동을 감상하는 것으로 플레이 요소가 종결되는 빌드들이 개선사항으로 나온다. 이는 플레이어의 조작 경험을 ‘클릭 후 감상’ 정도의 극단적 단순함으로 느끼게 만들며, 폐쇄적인 플레이 환경 아래 놓여있다는 감각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플레이어는 조이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지만, 조이들이 그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변수들을 직접 통제할 수 없다. 조이들은 자율적으로 배고픔을 느끼고, 피로를 느끼며, 사회적 욕구를 느낀다. 플레이어는 이 모든 과정을 관찰할 수는 있지만, 직접적으로 개입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조이들에게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기는 하나 <심즈>와 달리 드라마적 요소가 강하지 않고,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이러한 <인조이>의 플레이 특성은, 심들이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니며 플레이어에게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적극적인 조치를 요구하는 <심즈>와는 분명 다른 특성이다. <심즈>에서는 심이 불을 내면 플레이어가 개입해 불을 끄거나 소방관을 불러야 한다. 심이 직장을 잃으면 플레이어가 새로운 직업을 찾아주어야 하고, 관계가 악화되면 플레이어가 적극적으로 개선 조치를 취해야 한다. <심즈>는 플레이어에게 끊임없는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게임이다. 동시에 ‘채무 갚기’라는 커다란 미션 아래 다양한 할 거리를 플레이어에게 제시하는 <동물의 숲>과도 다르며, 점수와 같은 수직적 성과를 확인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스타듀벨리>와도 다르게 보인다. <동물의 숲>은 채무 상환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제시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제공한다. <스타듀벨리> 역시 콘텐츠의 볼륨이 클지언정 농장 경영이라는 명확한 프레임워크 안에서 수익, 작물 품질, 마을 주민과의 관계 등 측정 가능한 수직적 성과 지표들을 제공한다. <인조이>에도 카르마 시스템이 있지만, 카르마 시스템이 수직적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플레이어에게 무언가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AI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람해보지 않겠냐는 권유로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인조이>의 플레이 특성은 조작 감각의 부재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인조이>의 게임 특성은, 환경이 플레이어에게 어떤 조작 압박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PvE가 아닌 PiE(Player in Environment)라고 부를 수도 있을 듯하다. PvE가 플레이어가 환경과 대결하는 구조라면, PiE는 플레이어가 환경 속에 존재하며 환경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PiE와 메타적 경험, 혹은 우연한 아름다움의 섬광 이때 우리는 Environment가 게임이 가진 미시계의 전체적인 세팅과 분위기를 이야기한다는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으며, 글의 서두에서 시뮬레이션 게임 장르에서 플레이어는 단순히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을 넘어, 시뮬레이션과 어떤 방식으로든 의사소통을 주고받아야 한다고 지적했던 것을 상기해보자. PiE에서 플레이어는 조작을 통해 환경을 이해하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시뮬레이션을 파악하고 상호작용해야 한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조작이 사실상 제한된 게임 환경을 벗어나 다른 장소에서 게임을 이해하게 되는데, <인조이> 디스코드 같은 공간이 그러한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인조이> 플레이어는 결국 게임 밖을 나와 디스코드 와 같은 공간을 통해 인조이의 단순한 조작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인조이>에서 자신이 원하는 공간에서 자신이 생각했던 상황이 펼쳐지는지 확인한다. 이 과정은 플레이어가 직접 <인조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야 하고, <인조이>와 <인조이> 밖을 오고가며 내가 <인조이>를 플레이하는 이유와 정보를 비교해가며 공략 아닌 공략을 확인하고 실현해야 한다. 그 과정은 하나의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과정에 가까우며, 매우 불편하고도 비효율적인 플레이 경로를 가졌다는 평가 역시 가능하다. 그러나 그 긴 경로와 과정은 <인조이>를 메타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동시에,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나와 다른 플레이어의 행태를 비교하게 만들고, 나아가 <인조이>와 그 개발자들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여기에는 많은 가능성이 나의 플레이 목표에 개입하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개입은 <인조이>의 플레이가 플레이어의 목적에 종속될 수 없는 상태로 귀결된다. 동시에 <인조이>를 플레이 과정을 늘어뜨려 <인조이>가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게 만들고, 결국 주관을 통해서만 <인조이>를 파악하게 만든다. 이러한 지난한 과정을 통해 <인조이>는 플레이어가 자체적인 규칙을 가진 미시계와 상호작용을 통해, 입력한 입력값의 결과가 우연히 시스템이 의도하지 않은 복잡한 역학의 질서와 맞아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체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게 된다. 윌 라이트는 인터뷰에서 플레이어가 시뮬레이션을 ‘역설계(reverse engineer)’한다고 표현했다. 플레이어는 시뮬레이션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는데, 시뮬레이션을 자신의 머릿속에서 더 정확하게 모델링할수록 앞으로의 전략이 더 나아진다는 것이다[^1]. 이는 플레이어의 머릿속 모델과 컴퓨터의 모델이 점차 가까워지는 과정이며, <인조이>는 이 과정을 의도적으로 복잡하게 만들어 플레이어로 하여금 더욱 능동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그 순간들이 우연히 상상했던 서사와 맞아떨어질 때의 경험이라는 점에서 칸트가 말한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체험이라고 주장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게임에서 ‘우연한 아름다움의 섬광’이란 바로 그 감각이 아닐까? 이는 <인조이>가 게임을 통해 AI를 효과적으로 구현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그러나 플레이어가 시스템의 복잡한 역학과 상호작용하며, 자신이 입력한 명령이 시스템의 자율적 질서와 우연히 조화를 이루는 순간을 경험하게 만드는 이상한 순간들이 있다. <인조이>가 제공하는 ‘콘텐츠 진공’ 상태는 역설적으로 이러한 경험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 게임이 명확한 목표나 방향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자신만의 의미를 발견하고 시스템과의 대화를 시도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는 모든 플레이어에게 매력적인 경험은 아닐 수 있다. <인조이>의 현재 상태는 분명히 미완성이며, 기술적 한계와 버그로 인해 필자를 비롯한 많은 플레이어들이 좌절감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때, <인조이>가 보여주는 실험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플레이어의 주관성과 시스템의 자율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예측 불가능하지만 의미 있는 경험이 창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게임을 예술로 보는 가능성이란, 그 플레이의 지난한 과정 속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아름다움의 섬광에 있다. 그리고 <인조이>는,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섬광을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을 열어두고 있다. 이것이 바로 PiE, 즉 환경 속의 플레이어로서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새로운 게임 경험의 지평은 아닐까. 참고문헌 ○ Celia Pearce (2001). 「Sims, BattleBots, Cellular Automata God and Go: A Conversation with Will Wright」. Game Studies. - https://www.gamestudies.org/0102/pearce/ ○ Hunicke, R., LeBlanc, M., & Zubek, R. (2004). 「MDA: A Formal Approach to Game Design and Game Research」. Proceedings of the AAAI Workshop on Challenges in Game AI. ○ Benedith, G. (2024). 「Decoding The Sims: Analysis of Gamification Frameworks, User Experience, and Game Design Evolution」. Arizona Journal of Interdisciplinary Studies.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원) 이현재 경희대학교 K컬쳐・스토리콘텐츠연구소 연구원. 콘텐츠와 IT 산업의 동향과 정책을 연구하며, 콘텐츠 전반에 대한 비평 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국 AI 및 디지털 정책 동향 조사·분석」(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디지털 보안 동향 조사 및 분석」(한국인터넷진흥원) ▲「글로벌 게임산업 트렌드」(한국콘텐츠진흥원) 등에 참여했으며,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부문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평론 신인상 △게임제네레이션 비평상에 당선되어 평론 활동을 하고 있다.

  • 게임으로 사랑을 담아 내기 -

    <댓 드래곤 캔서>가 ‘게임’으로 제작된 이유는 무엇일까? <댓 드래곤 캔서>는 게임으로 제작되었지만, 당시의 조류에 있어서 일반적인 형식을 취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것은 왜 반드시 게임이여야 했을까? < Back 게임으로 사랑을 담아 내기 - 16 GG Vol. 24. 2. 10. ※ 본 글은 의 주요한 게임의 줄거리 및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 사랑을 담은 게임 (이하 < 댓 드래곤 캔서 >) 는 2016 년 Numinous Games 의 소규모 팀에 의하여 개발된 자서전 형태의 게임이다 . 라이언 그린 (Ryan Green) 과 에이미 그린 (Amy Green) 은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게임을 제작하였는데 , 그들은 자신들의 셋째 아이인 조엘 (Joel) 이 암을 투병해 나가는 모습을 게임으로 담아내었다 . 게임의 제목인 ‘ 댓 드래곤 캔서 ’ 는 ‘ 암 (cancer)’ 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른 아이들에게 이야기 해주기 위하여 고안된 상징적 장치로 , 조엘이 겪고 있는 암을 무찔러야 할 ‘ 드래곤 ’ 그리고 투병 중인 조엘을 ‘ 용사 ’ 로 묘사한다 ( Green, 2017). 그림1, 2. 용사 조엘과 드래곤(Numinous Games) 그린 부부의 셋째 아들인 조엘은 생후 1 년 만에 뇌암을 진단받았다 . 당시 의사들은 아이의 수명이 4 개월 남짓 밖에 남지 않았다고 판단하였지만 , 조엘은 치료를 통해 3 년을 더 살았고 4 살이 되던 해에 숨을 거두었다 . 추가적으로 얻게 된 3 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린 부부는 “ 사랑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법 ” 을 배웠으며 이러한 경험을 전달하기 위하여 < 댓 드래곤 캔서 > 를 제작했다 (Aki, 2016). 그림3, 4. 라이언과 그의 아들 조엘(Robertson, 2016; Numinous Games) 게임은 간단한 포인트 앤 클릭 방식으로 1 인칭과 3 인칭을 오가며 진행된다 . 플레이어는 그린 부부의 시점에서 매 순간을 조엘과 함께하게 되는데 , 이로서 불치병을 앓고 있는 아이와 그를 돌보는 부모의 경험에 참여하게 된다 . 게임을 구성하는 14 개의 작은 챕터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기 보다는 특정 상황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 각 챕터들을 통해 플레이어는 투병 중인 아이와 함께하며 얻게 되는 기쁨과 , 불안 , 사랑과 , 의심 , 절망 등의 복합적인 감정들을 경험한다 . ‘게임’으로 ‘사랑’을 담아내기 조엘과 함께한 시간을 심리적으로 기록한 < 댓 드래곤 캔서 > 는 아이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담아낸 게임이다 . 그린 부부가 실제로 느꼈던 조엘에 대한 당시의 ‘ 사랑 ’ 을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임인 셈이다 . 한편 , ‘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 은 이야기를 다루는 모든 미디어에서 가장 흔한 주제 중 하나이다 . 자식에 대한 부모의 절절한 사랑을 다루는 글이나 영화는 특히나 넘쳐 난다 . 그럼에도 개발자들은 ‘ 게임 ’ 으로 자신들의 ‘ 사랑 ’ 을 담아 내길 선택했다 . 그렇다면 , < 댓 드래곤 캔서 > 는 왜 하필 게임이었을까 ? 제작자인 그린 부부가 자신들을 사랑을 기록하기 위해 ‘ 게임 ’ 이라는 매체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 그것은 왜 영화나 소설이 아니었을까 ? 이 질문에 대한 답은 2016 년 SDF 1) 에서 진행된 라이언 그린의 짧은 강연으로부터 엿볼 수 있다 . 2) 해당 강연에서 라이언은 제작 중 겪은 어려움을 바탕으로 , 게임이라는 매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며 그것이 어떻게 사랑을 담는 매체가 될 수 있는지 , 그리고 되어야 하는지를 제시한다 . “게임은 재미를 위한 매체 ” 라는 풍조 속에서 < 댓 드래곤 캔서 > 는 환영 받을 수 있는 주제는 아니었다 . ‘ 시한부 아이의 투병기 ’ 는 이용자들이 쉽게 즐기기에는 너무나도 어둡고 무거운 주제였기 때문이다 . 이러한 괴리는 투자금 확보에 있어 큰 장애가 되었는데 , 제작자들은 왜 이 새로운 주제가 게임으로서 가치가 있는지를 계속해서 증명해야만 했다 . 3) 여기서 라이언 그린은 게임이라는 미디어가 나아가야할 방향성을 이야기 하며 < 댓 드래곤 캔서 > 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 먼저 , 게임에 대한 그의 정의는 다소 광범위하다 . 라이언에 따르면 , 게임은 ‘ 인터렉티브 미디어 ’ 로 수용자의 행동을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독특한 매체이다 . 즉 , 어떠한 행동 (action) 을 취하는 것이 게임의 본질이라는 말이다 . 게임 제작자들은 특정한 행위성을 만들어 내고 , 수용자는 게임을 플레이하게 됨으로써 제작자가 정한 특정한 행위를 수행하게 된다 . 4 ) 한편 , 대부분의 게임들이 따르는 행위성은 매우 한정적이다 . 그들은 특정한 미션을 제시하고 , 플레이어의 행위에 대한 성공과 실패를 구분하는 형식을 취한다 . 그리고 , ‘ 성과 ’ 라는 기준으로 플레이어의 ‘ 행위 ’ 를 판단하는 위와 같은 게임들은 너무나도 신자유주의적이다 . 수많은 게임들이 장애물을 극복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를 중요한 행위의 척도로 설계되지만 , 이는 성취 지향적이고 자기책임 논리에 복속되어 있는 미디어의 한 형태일 뿐이다 . 결국 인터렉티브 미디어는 어떤 행위성에 대한 설계이며 , 그 행위성은 사회의 특정 가치를 담고 있다 . 그렇다면 , 게임이 담아낼 수 있는 행위성 역시 다양할 것이다 . 게임은 누군가를 이기는 것이 될 수 있고 ,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이 될 수도 있으며 ,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베풀고 그를 사랑하는 것 역시 될 수 있다 . 즉 , 게임이라는 매체가 담을 수 있는 행위는 무궁무진하다는 말이다 . 여기서 , 라이언 그린은 인터렉티브 미디어가 포용적이기 위해서는 미디어가 제시하는 행위가 사회 공동체적 가치와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성공이나 성취를 위한 행위 보다는 사랑과 배려 , 관용을 베푸는 게임 , 즉 그러한 행위를 할 수 있는 게임을 설계해야 한다는 말이다 . 그리고 , < 댓 드래곤 캔서 > 는 정확히 이러한 주장과 맞닿아 있다 . 그림5. 풍선을 타고 다른 행성으로 떠나가는 조엘(Numinous Games) <댓 드래곤 캔서 > 는 본질적으로 성취가 불가능한 게임이다 . 약 두 시간 남짓의 플레이 타임 동안 플레이어는 다양한 활동들을 하지만 , 그 어떤 행동도 조엘의 병을 이겨내게 할 수 없다 . 무슨 선택을 하더라도 ‘ 암으로 인한 조엘의 죽음 ’ 이라는 하나의 결말로 나아갈 뿐이다 . 실제로 , 플레이 과정 중 이용자들이 하는 모든 액션은 성공이나 실패로 나누어질 수 없는 것들이다 . < 댓 드래곤 캔서 > 에서 유저들은 아이와 놀아주고 , 사람들과 대화를 하며 , 편지를 읽는다 . 모두는 ‘ 실패가 불가능 ’ 한 활동들이다 . 이는 미니게임에서 역시 마찬가지인데 , 카트 라이딩에는 제한 시간이 없으며 , 드래곤을 무찌르고자 나아가는 용사 조엘은 어떤 상황에서도 계속 나아가며 미션을 완수한다 . 행위에 대한 적절성 보다는 무언가를 한다는 행위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 이와 같이 , < 댓 드래곤 캔서 > 는 ‘ 성취 ’ 가 아닌 ‘ 사랑 ’ 을 위해 디자인 된 게임이다 . 한 방의 역전이나 선택에 따른 긴장은 없지만 , 플레이어들은 ‘ 불치병에 걸린 아이와 함께 산다 ’ 라는 상황 안에서 벌어지는 행위들을 수행하며 전혀 다른 상황 안에 있는 사람들에 공감할 기회를 얻게 된다 . 이러한 접근은 게임이란 매체 자체의 지평을 확장하는 데에 기여하였는데 , 제작자들은 플레이어가 무언가를 반드시 얻어 내지 않더라도 즐길 수 있는 디자인을 선보임으로써 ‘ 혁신성 (Most Innovative)’ 분야의 상을 수상하였다 . 그림6,7. 미니게임 장면들(Numinous Games) 여기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자 . < 댓 드래곤 캔서 > 가 ‘ 게임 ’ 으로 제작된 이유는 무엇일까 ? < 댓 드래곤 캔서 > 는 게임으로 제작되었지만 , 당시의 조류에 있어서 일반적인 형식을 취하지도 않았다 . 그럼에도 그것은 왜 반드시 게임이여야 했을까 ? 이는 제작자들이 담아내고자 한 것이 아가페 (Ageape) 적 사랑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 ‘ 헌신적인 거룩한 사랑 ’ 을 의미하는 아가페는 대상에 무조건적으로 베풂으로써만 실천된다 . 시한부 아이를 돌보는 일은 아이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애정을 베푸는 것이다 . 이러한 의미에서 게임은 아가페적 사랑이 가능한 유일한 매체이다 . 게임은 플레이어가 직접 교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인터렉티브 미디어이기 때문이다 . 5) 이처럼 , < 댓 드래곤 캔서 > 는 사랑의 매체로서 게임을 보여준다 . 게임은 무언가를 얻어내는 것이 될 수도 있지만 그냥 주는 것 역시 될 수 있다 . 그리고 , 사랑은 순간적인 감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행동을 통해 표현하는 적극적인 행위이기에 , 행위성을 통해 보여지고 게임을 통해 담아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 참고문헌 라이언 그린 (2016, 5, 20). 친밀함을 위한 게임 디자인 : 댓 드래곤, 캔서 [That Dragon, Cancer]. . URL: https://www.sdf.or.kr/archive/2016/ko/video/10000000347 Aki, A. (2016, 1, 22). ‘That Dragon, Cancer’: Q&A With Developer Ryan Green. Voice of America. URL: https://blogs.voanews.com/techtonics/2016/01/22/that-dragon-cancer-qa-with-developer-ryan-green/ Eilon, S. (2018, 7, 21). That Dragon, Cancer. IEEE: Technology and Society. URL: https://technologyandsociety.org/that-dragon-cancer/ Green, A. (2017). A video game to cope with grief. TED. URL: https://youtube.com/watch?v=vWJwa7lntTs Tanz, J. (2016, 1). Playing for Time. WIRED. URL: https://www.wired.com/2016/01/that-dragon-cancer/ Robertson, A. (2016, 2, 12). That Dragon, Cancer: the video game that takes death seriously. The Guardian. URL: https://www.theguardian.com/technology/2016/feb/12/that-dragon-cancer-video-game Stafford, P. (2015, 4, 16). A GAME ABOUT CANCER, ONE YEAR LATER. Polygon. URL: https://www.polygon.com/features/2015/4/16/8374481/that-dragon-cancer 1) SDF(SBS D포럼)는 SBS가 사회공헌을 목적으로 실시해온 지식나눔 프로젝트를 의미한다. 2) 강연에 대한 전체 내용은 다음 링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sdf.or.kr/archive/2016/ko/video/10000000347 3) <댓 드래곤 캔서>의 투자금 유치에 있어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예술로서의 게임’ 논쟁으로 유명한 캘리 산티아고(Kellee Santiago)이다. 그녀는 <댓 드래곤 캔서>가 가지는 가능성에 주목하여 투자금 유치에 적극적인 조력자가 되어주었다(Stafford, 2015). 이후 개발자들은 클라우드 펀딩 사이트인 Kickstarter를 통해 약 3,700명의 후원자로부터 100,000달러 이상을 모금 받아 게임을 제작하였다. 때문에 게임 내부에는 클라우펀딩에 참여한 사람들의 사진 및 그림들이 수록되어 있다. 4) 이는 게임을 행위성의 매체로 본 티 응우옌(Nguyen, C. Thi)의 주장과도 닿아 있다. 5) 실제로, 제작자들은 조엘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 보다는 그와 무엇을 할 것인지에 방점을 맞추었다. 조엘을 그대로 남기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세세한 묘사에 효과적인 영화나 수필이 더 좋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연구자) 이연우 함께하는 게임에 관심을 가지고 게임의 관계성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게임으로 다함께 즐거워지길 바랍니다.

  • Disco Music as the Vestige of a Failed Revolution: Disco Elysium

    The title of Disco Elysium, a highly controversial role-playing game that came out in 2019, does not tell you much about what kind of a game it is or what it's about. In fact, it's not easy to deduce why the word "disco" is included in the title of the game when its story centers around a derelict alcoholic detective investigating a murder in the port city Revachol, a place of mixed industrial prosperity and dilapidation. < Back Disco Music as the Vestige of a Failed Revolution: Disco Elysium 09 GG Vol. 22. 12. 10. - This post contains a significant spoiler of Disco Elysium. Please read at your own discretion if you haven't played the game. - **You can see a Korean version at this URL: https://gamegeneration.or.kr/board/post/view?match=id:91 The title of Disco Elysium, a highly controversial role-playing game that came out in 2019, does not tell you much about what kind of a game it is or what it's about. In fact, it's not easy to deduce why the word "disco" is included in the title of the game when its story centers around a derelict alcoholic detective investigating a murder in the port city Revachol, a place of mixed industrial prosperity and dilapidation. In the game, disco seems to be a metaphor for the somewhat outdated mindset of the hero. In Revachol, disco represents retro music and a culture of nostalgic sentiments about the past, similar to what it is today in the real world. There are times when the middle-aged detective enjoys some disco music from his glory days with fond reminiscence, but the current trends in music have long since moved on from disco, as evidenced by a certain event in the game. At a glance, disco seems to have been used as a trivial prop to highlight the generation of the hero. Then, why is it included in the game's title? As "Elysium" means some kind of a plane of existence or universe, the game title can be interpreted as "the world of disco." What does this game about uncovering the murder at a decrepit harbor have to do with disco? Revachol, the City of a Failed Revolution The events of Disco Elysium mainly take place in the harbor city of Revachol, and a wall in the Martinaise district of this city features a lot of bullet holes. The player has the option to visualize the scene of a mass execution of communards against this wall, which is a reference to the Communards' Wall of the Paris Commune. In the game, Revachol is a city state that saw great prosperity as a central hub of trading and finances in the whole world of Elysium, comprised of various groups of islands. With the Dockworkers' Union dominating the city, the rapidly growing economic disparity and similar problems led to a massive communist revolution. While the revolution successfully took over Revachol, its victory was short-lived when outside forces formed a Coalition of Nations to suppress the revolution through military conflict as they recognized the value of Revachol as an international trading hub. In sum, the former world capital of Revachol had been liberated through a significant revolution and was promptly conquered by outside forces. As a result, you can see both parts of its former glory and the devastation of conquest in this city. This revolution by the people quelled by external military forces seems to mirror the Paris Commune, a real-life example of such a movement during the era of imperialism in our own history. The events of Disco Elysium take place against the backdrop of remnants from a failed revolution. Thus, Revachol is presented as a city of a failed revolution where old royalists and republicans who used to fight each other in their youth now play ball together, and the Dockworkers' Union, who played a central role in the revolution, has become an oppressive mob in cahoots with the government. The music of the 1970s, disco At some point in the middle of the game, you can encounter a group of kids hanging out in a tent near a ruined church building. The ensuing dialogue with these druggies listening to hard-core music reveals just how much the hero loves disco music. To understand the significance of disco as an old-fashioned genre of music against the background of a city of a failed revolution, we should first think back on what disco in real-life means to us. Disco is a genre of music that was popular in the 70s and 80s of the 20th century. The name comes from the French word discothèque. In English, it means "library of phonograph records." This genre gained much popularity as dance music as disco came to refer to a place where you could dance to recordings of music when traditional dance venues generally involved live music. By offering a more economical space for dancing, discotheques quickly became popular in marginal areas like the slums and slowly rose to become the dominant dance music genre, replacing go-go and swing dancing. Disco's popularity reached its peak in the mid-1970s, of which a prime example is the movie Saturday Night Fever starring John Travolta. Travolta's disco dance moves, which were later reprised as the human male dance in World of Warcraft, became an icon of the heyday of disco in 1977. This popularity of disco even reached South Korea, manifesting in particular dance venues called discotheques and their distinct variants colatecs. For teenagers who weren't allowed to enter such clubs, roller skating rinks provided disco music with roller skates instead of alcohol. (Hence, a compilation album of 80s disco music in Korea is named "Memories of Skating Rinks.") Disco and the Fall of the Individual and Economic Prosperity After reaching the climax of its popularity in 1977, disco fever started to cool off. The decline of disco even led to a rally of Disco Demolition Night in 1979. From its emergence at the end of the 60s to its heyday stretching into the 80s, the history of the rise and fall of this genre contains many aspects that seem relevant to society as a whole at the time. In the 1970s, when disco boomed, the economic growth in the US was starting to slow down. The economic expansion in the US after World War II was wrapping up its golden age in the 1960s and came to a halt with the 1973 oil crisis, leading to a recession. As oil prices rose, the high-emission and poor-mileage cars of the US gave way to the high-efficiency and high-mileage cars manufactured in newly industrialized countries like Japan, which in turn contributed to the fall of cities like Detroit, which used to be the heart of the American automotive industry. These circumstances greatly affected the lives of industrial laborers in the US. Automotive plants that had relied on highly trained laborers were shut down, and their former full-time workers started taking part-time gigs such as washing cars and flipping burgers. Labor unions became less and less influential in unifying the workers, and the overall quality of employment started to drop, ushering in new trends that were totally different from the 60s. The era of hippies, where people were vocal about their demands for tangible social changes, such as the protests of 1968, was coming to an end. Those who had once supported and called for revolutions, anti-war movements, and peace donned immaculate suits and became businessmen. They must have looked like hypocritical boomers who only nominally preached revolution and ended up mingling with mainstream society in the eyes of the younger generations. With the living conditions becoming relatively harsher than in the past, the individuals grew more and more apart, and those in their 20s in the 1970s started to become more interested in their own individual lives rather than macroscopic social changes. This socioeconomic turn of events at the time might have played a role in ending the age of rock and ushering in the era of disco. Revolution and Disco Disco Elysium portrays how the changes in the socioeconomics and the working conditions of the young laborers in the 1970s were related to the rise of disco. The middle-aged hero is from a generation that grew up listening to disco music in an era of a failed revolution. Now, he is no longer in his prime, and even disco music is considered a vestige of the past. Having Revachol in the game be the place of a failed revolution where disco used to be popular but is no more demonstrates the relationship between revolution and music. This relationship between revolution and music can also be found in the history of Estonia, where the game was developed. As one of the three Baltic states, Estonia had been annexed into the Soviet Union after World War II but consistently sought independence while suffering the oppression of the USSR. In 1989, Estonia joined Latvia and Lithuania to form a human chain over 600 km (about 373 miles) and sang songs to protest the Soviet occupation, an event called the Singing Revolution. Given this historical background, it is not surprising that this unique link between revolution and music is replicated in the game. Thus, the disco in Disco Elysium is not a random prop but a central element of the worldbuilding of this game. Disco was the music that accompanied the era of those who fell apart as individuals after a failed revolution. The hero of the game is someone who spent his youth watching the previous generation after that failure and is now past the prime of his own life and moving on to be forgotten in history. In a gloomy city still full of remnants of the failed revolution, the passion of revolution must have looked like a distant memory of the past to the hero and those around him in the present. The Revolution May Fail, but That Doesn't Mean It's Over However, the game also offers a counterpoint by revealing the mythic creature Insulindian Phasmid, which had been the goal in a side quest at the end of the game. The side quest of going after the mystical, gigantic cryptid that nobody is even sure of its existence may at first seem to be an impossible task, like chasing a rainbow. However, the reveal and message of the Insulindian Phasmid at the very end of the game is a critical culmination of the theme of revolution and disco. Can you really call the efforts of the revolutionists who even sacrificed their own lives to change their lives and the world, which we've so far been calling the failed revolution, nothing more than a failure? The moment when the hero gets to see the fabled Insulindian Phasmid with his own eyes at the very end of the game poses this question: Are the idea humanity calls revolution and has been endlessly chasing even though we know we'll never reach it and the failed steps we've taken over the course really pointless? To those of us living in the 21st century, the word revolution seems to be associated with suffering and failure. Numerous revolutions, including the Paris Commune reflected in the game and the Russian Revolution after it, and the more recent revolts in the Arab world and the Umbrella Revolution in Hong Kong, have failed in our history, where the people had to go back to their previous afflictions. However, we are also survivors who stand on the remains of all those failed revolutions over the course of human history. Also, disco may be a vestige of the dismay and frustration born out of the failures in the 1960s. Thus, Disco Elysium is set against a city of a failed revolution and deliberately includes this outdated genre of music called disco in its title to indicate that the central theme of this game is not the murder case but a history of a failed revolution. The inclusion of an old couple who devote their lives to a seemingly impossible task of discovering a mythical creature and the existence of that illusive cryptid at the end of the story asks us how we shall address the history of failure and frustration called revolution, which could also be considered an unattainable holy grail. Thus, Disco Elysium becomes a poignant question about our own era as the remnants of failed revolutions. Thus, Disco Elysium becomes a poignant self-examination of our own era as the remnants of failed revolutions.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Editor-in-chief of game Generation) KyungHyuk Lee He has been close to games since childhood, but it was not until 2015 that he started talking about games in earnest. After living as an ordinary office worker, he entered the life of a full-time game columnist, critic, and researcher through a series of opportunities. Books such as "Game, Another Window to View the World" (2016), "Mario Born in 1981" (2017), "The Theory of Game" (2018), "Wise Media Life" (2019), and "The Birth of Reality" (2022); papers such as "Is purchasing game items part of play?" (2019); "Dakyu Prime" (EBS, 2022), Gamer (KBS), "The Game Law", 2019 BC) and "Economy of Game", etc. He is the director of the game research institute 'Dragon Lab'. (Translator) Un-So Diener Freelance translator specializing in video game localization. My first game crush was Gray Scavenger of War of Genesis II. Now, I get to experience all kinds of video games across various genres and platforms for a living. Credited in Ghostwire: Tokyo and Neo Cab.

  • 메타버스, 호흡을 고르고 냉정하게 바라보면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이 “메타버스가 오고 있다”고 발언했다. 에픽게임즈 CEO 팀 스위니도 10억 달러 규모 투자를 유치하고 메타버스를 핵심 비전으로 언급했다. 마크 저커버그는 "향후 5년 후에 페이스북을 메타버스 회사로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펄어비스와 텐센트도 메타버스를 주요 아젠다로 언급했고, 지난 NDC에서도 넥슨 김대훤 부사장이 “더이상 게임 회사, 게임 산업이라는 말을 쓰지 말자” 제안했다. 다분히 메타버스를 의식한 발언이다. < Back 메타버스, 호흡을 고르고 냉정하게 바라보면 01 GG Vol. 21. 6. 10. 바야흐로 오늘날 게임업계의 키워드는 메타버스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이 “메타버스가 오고 있다”고 발언했다. 에픽게임즈 CEO 팀 스위니도 10억 달러 규모 투자를 유치하고 메타버스를 핵심 비전으로 언급했다. 마크 저커버그는 "향후 5년 후에 페이스북을 메타버스 회사로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펄어비스와 텐센트도 메타버스를 주요 아젠다로 언급했고, 지난 NDC에서도 넥슨 김대훤 부사장이 “더이상 게임 회사, 게임 산업이라는 말을 쓰지 말자” 제안했다. 다분히 메타버스를 의식한 발언이다. 게임지에서 일하는 필자도 하루에도 몇 통씩 메타버스 관련 보도자료를 받는다. 오전에만 한국콘텐츠진흥원, 버추얼휴먼,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 그리고 에픽게임즈 코리아로부터 '메타버스'라는 키워드가 담긴 보도자료를 받아서 읽었다.그래서 대관절 메타버스란 무엇인가? 보도자료는 대답이 없다. 메타버스는 최근 만들어진 개념어가 아니다. 접두어 메타(Meta)에 세상을 의미하는 유니버스(Universe)가 합쳐진 메타버스는 ‘초월적 세상’ 정도로 읽을 수 있다. 영문 위키피디아는 메타버스를 "유저간 공유되는 영구적인 3차원 가상 공간을 현실 세계와 연결해 만들어진 미래의 인터넷" [1] 이라고 정의한다. 한국에 메타버스를 알리는 데 앞장서는 김상균 강원대 교수는 “디지털 미디어에 담긴 세상, 디지털화된 지구” [2] 라고 썼다. 최근 뜨는 용어로 부각된 메타버스를 완전 부정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메타버스가 약속하는 것이 ‘새로운 세상’이라는 들썩임에 동조하기 어렵다. 메타버스가 대단하다고 여겨지는 이유의 대부분은 이미 게임이라는 미디어가 제공하고 있어서 ‘새로운’ 감각을 받지 못했다. 또 과문한 탓에 아직 게임과 메타버스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결정적 단서를 찾지 못했다. 게임이라는 매체는 오래전부터 디지털 세상에서 유저간 공유되는 3차원 가상 공간을 제공해왔다. 어쩌면 게임이야말로 메타버스의 프로토타입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오늘날 메타버스를 아젠다로 삼은 기업들은 대부분 게임사이거나 게임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젠슨 황은 GPU와 메타버스 플랫폼 <옴니버스>를, 팀 스위니는 언리얼엔진과 <포트나이트>를, 마크 저커버그는 오큘러스 헤드셋과 <호라이즌>을 팔아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업계가 그간 게임이라고 호명하던 대상을 달리 불러야 할 까닭은 되지 않는다. 필자는 다소 확정적으로 오늘날 메타버스라는 마케팅 용어가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다고 주장한다. 유행어가 모이는 메타버스… 과연? 이런 와중에 ‘초월적 세상’의 화폐를 NFT, 대체 불가능 토큰으로 삼으려는 시도가 상당히 활발하다. 현재 생태계에서 메타버스는 기업들이 자사 콘텐츠에 기존 화폐가 아닌 NFT를 도입하기 유리하도록 활용되고 있다. 일찌감치 블록체인 사업에 뛰어든 위메이드는 <미르4> 글로벌 버전의 NFT 결제를 지원할 예정이다. 네이버제트가 서비스 중인 <제페토>는 ‘메타버스 플랫폼’으로 다른 유저와 만나 점프, 슈팅, 라이딩 게임을 할 수 있다. 현금으로 구입할 수 있는 인앱 재화가 있고, 페이팔 계정을 통해 재화를 현금으로 인출할 수 있다. 현행 게임법은 사행성을 띤 게임물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제페토>는 제재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네이버제트는 <제페토>가 게임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가상세계 플랫폼의 법적정의를 분명히 하고 게임과 구분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3] 고 제안했다. 메타버스라는 단어가 유행하기 훨씬 이전 일이다. 게임 생태계 일각에서는 게임산업진흥에 관한 법률(이하 게임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답을 찾으려는 이들이 있었다. 법에 가상세계를 어떻게 제도에 담을지에 관한 논의를 제대로 시작하지 않은 가운데 몇몇 사람들은 2021년 메타버스라는 방패를 들고 섰다. 그리고 필자는 <제페토>와 뒤에 살펴볼 <세컨드라이프> 의 지향점은 유사하다고 본다. 규제 당국은 암호화폐와 관련한 룰이 없어 난감하다. 스카이피플은 거래소 없이 자율등급을 받아서 게임을 연 뒤 게임 밖 NFT 거래소를 열어 아이템을 판매할 수 있게 했다. 그렇게 <파이브스타즈>는 15세 등급으로 운영됐고, 거래소 운영을 확인한 게임물관리위원회는 게임의 등급분류를 취소시켰다. (6월 23일 스카이피플은 행정처분 집행정지 가처분 소송에서 승소했다. [4] ) 7월 국회에서는 디지털 자산에 대한 가격을 암호화폐로 사고파는 것이 합당한지를 놓고 토론회가 열렸다. 이렇게 메타버스의 이름 아래 몇 년 동안 업계에서 유행했던 개념들이 하나로 모이고 있다. 메타버스는 VR과도 밀접하다. 전진수 SK텔레콤 메타버스 컴퍼니장은 “VR도 메타버스로 가는 여정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이 말을 듣고 VR에 대한 업계의 회의가 떠올랐다. 정부는 실감형 콘텐츠를 미래 먹거리로 보고 적잖은 공적 자원을 투자했다. 정부는 작년 실감형 콘텐츠 육성에만 1,500억 원을 투자했지만 모두가 기억하는 K-실감형 콘텐츠는 없다. 그런데 조사에 따르면, 2019년 연간 매출액 10억 원 미만인 VR 관련 회사가 68.7%다. 이 중 ‘1억 원 이상 3억 원 미만’이 23.4%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100억 원 이상 매출 기업은 전체 조사대상 중 6.3%, 4개 업체에 불과했다. [5] VR은 언젠가 크게 뜰 수 있고, 메타버스 콘텐츠의 톱니바퀴가 되겠지만, 오늘날 언급되는 장밋빛 전망은 대중이 실제로 콘텐츠를 받아들이는 수준보다 훨씬 높은 곳에 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누구를 위한 ‘초월적 세상’인가? 가장 우려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 있다. 메타버스를 건설하려는 사람들이 사용자 생각은 얼마나 하고 있냐는 것이다. 메타버스 IP의 소유권은 기업이 가지고 있다. 페이스북, 애플, 아마존,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MS) 같은 기업이 철저하게 소유권을 가지는 ‘초월적 세상’에서 유저들은 계속 행복할 수 있을까? 이윤 창출을 지상과제로 삼는 기업들이, 돈이 안 돼서 메타버스를 ‘섭종’한다면 메타버스에 진심이던 사람들은 세상을 잃어버리게 된다. 블리자드는 2018년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 공식 e스포츠 리그를 즉각 폐지해버린 적 있다. 비록 그 수가 주도적인 e스포츠보다 적었지만, 선수와 팬들은 하루아침에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던 대상을 잃어버린 것이다. 메타버스의 최우수 사례로 알려진 <마인크래프트>의 청소년 이용 불가 사태도 비슷하게 볼 수 있다. 세간에 알려진 바와 같이 바뀐 MS의 정책에 의해 미성년 회원들이 게임이 즐길 수 없게 되었다. 10년 넘게 유지 중인 셧다운제의 비합리성과 별개로 MS는 이 사건이 공론화되기 전까지 미성년자들을 차단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아울러 콘텐츠 산업은 흥행 산업이다. AR이 뜰 것 같았지만 널리 성공한 콘텐츠는 <포켓몬 GO> 하나였던 것처럼, 우후죽순 등장하는 메타버스 콘텐츠가 모두 성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간혹 <제페토>에서 <로블록스>로 또 <마인크래프트>로 디지털 국경을 넘나드는 정력적인 유저층도 존재하겠지만, 장기적으로 기업이 원하는 그림은 아닐 것이다. 게임이 메타버스의 프로토타입이라면, 넷마블의 스토리 플랫폼 〈BTS 유니버스 스토리〉가 모든 메타버스가 뜰 수 없다는 주장의 적절한 근거가 될 것이다. 사용자들은 그저 IP가 좋아서, 홍보모델의 팬이라는 이유로 그 콘텐츠에 애착관계를 가지고 오래도록 붙잡지 않는다. [6] 코로나19가 끝나도 메타버스에서'만' 만나시겠습니까? 한편 코로나19를 극복하려는 여러 모색은 세간의 메타버스 인플레이션을 부추겼다. 건국대 총학생회는 가상 캠퍼스를 만든 뒤 그곳에서 축제를 진행했고, 트래비스 스콧은 <포트나이트> 안에서 가상 콘서트를 열었다. BTS 멤버들도 <메이플스토리>와 <서든어택>으로 아미와 만남을 가진 적 있다. <마인크래프트>로 졸업식을 연 일본 초등학생 사례도 있다. 이러한 이벤트는 메타버스의 사례로 자주 호출되지만, 코로나19로 발생된 제약을 극복하려는 대체재 성격이 강하다. 건국대 학생들에게 코로나19가 종식된 이후에도 메타버스 축제를 열자 한다면 과연 기뻐할까? 코로나19가 끝난 뒤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뮤지션을 언택트로만 보려고 할까? 이전부터 뮤지션들은 인터넷으로 팬들과 소통하지 않았나? 또 <마인크래프트>로 졸업식을 연 학생들은 분명 귀엽고 독창적인 시도를 했지만, 알려진 총인원은 8명으로 그리 많지 않다. 인류는 코로나19와 그로 빚어진 고난을 반드시 극복해야 하고, 조금씩 그 길로 가고 있다. 그렇다면 코로나19 이후로도 우리는 언택트 라이프를 이어나갈까? 필자가 봤을 때, 판데믹은 온라인 소통의 이점을 재확인해주었을 뿐이지,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전격 이주하는 출발점은 아니다. 이미 많은 전문가가 메타버스는 현실의 삶을 완벽히 대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코로나19로 만나지 못해서 매일 밤 <클럽하우스>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 결국에는 ‘이 시국’을 뚫고 만났다는 유의 사례는 상당히 많다. “코로나 사태에도 붐비는 클럽과 헌팅포차”를 보면 알 수 있듯 “인간은 신체를 가졌기에 (중략) 지난 5천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모이는 경향은 크게 바뀌지 않을 것” [7] 이다.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수백만 년의 진화에 의해 만들어진 생화학적 체제의 지배를 받는다.” [8] 코로나19 이후에도 우리는 실제 만남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더 많은 토론이 메타버스의 밸류에이션을 바로 매길 수 있다 메타버스라는 신조어에 대한 토론도 부족하다는 인상이다. 독자들에게 묻고 싶다. <배달의민족>, <요기요> 등 배달 어플리케이션으로 음식을 주문하고 평점을 남기는 것도 메타버스라고 할 수 있을까? 에 국순당 주점 광고를 하는 게 메타버스인가? 어디까지가 메타버스이며, 메타버스와 게임의 차이는 무엇인가? 아직 메타버스에는 규범적, 기술적 의미에 대한 정의가 부족하다. 미국의 린든 랩에서 2003년 서비스를 시작한 <세컨드 라이프>는 가상세계에서 자신의 아바타를 통해 유무형의 가치를 실현시키고, ‘린든 달러’를 현금화 할 수 있도록 열어놓았다. 당시 <세컨드 라이프>가 게임인지 소셜미디어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이 토론은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대두와 함께 사그라들었다. 단일 플랫폼의 온라인 시뮬레이션보다는 라이프의 영토를 온라인 그 자체로 확대하는 것이 좋았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세컨드 라이프>를 소셜미디어가 아닌 게임으로 분류하는 것이 중론이다. 물론 메타버스가 일반화된 미래에 <세컨드 라이프>를 메타버스의 원류로 분류할 지도 모른다. 2007년, <세컨드 라이프>는 한국에서도 공식 서비스를 진행한 적 있다. 당시 문화관광부, 정보통신부, 여성가족부 3개 부처가 한 자리에 모여 <세컨드 라이프>를 어떻게 볼지 회의를 연 적 있다. 지난한 논의 과정을 생략하고 결론만 보자면, 린든 화폐의 환전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린든랩은 한국 공식 서비스를 2009년에 마쳤다. 이와 별개로 <세컨드 라이프>의 접속자 규모는 감소했다. 앞으로 우리가 메타버스의 벨류에이션을 매길 때 <세컨드 라이프> 사례는 참고할 만하다. 어떤 장벽이 작용했나, 사용자들은 어떻게 반응했나, 기업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앞서 살펴본 <제페토> 문제를 볼 때도 함께 비춰봄직하다. 마치며 메타버스에 ‘기회의 땅’이나 ‘골드러시’ 같은 수식어가 붙은 보도를 본다. 이것이야말로 일종의 은유가 아닐까 한다. 19세기 금을 따라 서쪽으로 ‘러시’한 개척민 중 성공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개중에는 지하 깊은 곳에서 금을 캤다고 착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착각한 사람들이 캤던 것은 금이 아니라 유황과 철을 화합한 파이라이트, 황철석이었다. 진짜로 금이 나와서 대박이 터진 곳도 있었지만, 금이 동나자 이내 유령 도시가 되어버렸다. [9] 1821년, 스코틀랜드의 탐험가 그레거 맥그레거는 항해에서 돌아와 중앙아메리카의 포야이스라는 나라의 왕이 되었다며 ‘기회의 땅’ 포야이스의 국채를 사라고 홍보했다. 비옥한 토양에 사금이 물처럼 흐르는 곳이라며. 그러나 포야이스 같은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10] 한 시장 조사 업체는 메타버스의 2025년 시장 규모가 2,800억 달러(약 315조 원)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지난달 기획재정부, 문화체육관광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공동으로 메타버스 TF를 꾸렸다. 언론과 시장은 메타버스에 대한 부푼 꿈으로 가득하다. 메타버스가 진정 잘 나가기 위해서는, 이런 매운 사례도 한 번쯤 봐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사족으로 붙여봤다. [1] 방승언, 「미래의 인터넷? '메타버스 게임', 거품일까 아닐까?」, 디스이즈게임, 2021.5.20. [2] 김상균, 「메타버스」, 플랜비디자인, 2020, p.23 [3] 한국콘텐츠진흥원, 「가상세계산업 관련법 개정 및 진흥법 제정방안 연구」 (2011) [4] 김한준, 「스카이피플 '파이브스타즈', 게임위에 집행정지 가처분 승소」,지디넷코리아, 2021.6.24. [5] 한국콘텐츠진흥원, 「2020 가상현실 게임사업체 실태조사」 [6] 김재석 「BTS 유니버스 스토리, 흥행 저조의 이유는?」, 디스이즈게임, 2020.10.7. [7] 유현준, 「공간의 미래」, 을유출판사, 2021, p.13 [8]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김영사, 2015, p.544 [9] https://ko.wikipedia.org/wiki/%EA%B3%A8%EB%93%9C_%EB%9F%AC%EC%8B%9C [10] https://en.wikipedia.org/wiki/Gregor_MacGregor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김재석 8년 동안 디스이즈게임 취재기자로 일했다. 지금은 서브컬처 스타트업에서 대외협력을 맡고 있다. 에디터와 치트키의 권능을 사랑한다.

  • [논문세미나] 여성 게이머들은 어떤 편견 속에서 플레이하며 어떻게 대처하는가?: 필리핀 AOS 게임 <모바일 레전드>를 사례로

    <모바일 레전드>를 가장 많이 플레이하는 국가는 필리핀으로, 필리핀에서만 1억 명 이상이 등록되어 있으며 월별 접속인원은 2천 5백만 명에 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바일 레전드>의 필리핀 e-스포츠 리그에서 여성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으며, 게임의 이용자가 많아지면서 여성 게이머에 대한 젠더 고정관념과 편견의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여성의 온라인 게임 경험이 남성과는 상당히 다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 Back [논문세미나] 여성 게이머들은 어떤 편견 속에서 플레이하며 어떻게 대처하는가?: 필리핀 AOS 게임 <모바일 레전드>를 사례로 27 GG Vol. 25. 12. 10. TEXT: Amestoso, P. P., Colima, B. K. V., Damasin, A. D., De Cadiz, V. Y. E., Iglesias, M. A., & Nacionales, J. P. (2023). Exploring Gender Stereotypes among Filipina Gamers of Mobile Legends: A Phenomenological Study. Journal of Education and Social Studies, 4(3), 466-478. 들어가며 게임 산업의 규모가 전세계적으로 확대되면서 우리는 여러 통계조사 결과에서 여성 게이머들의 비율이 이전보다 크게 늘어났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여성들이 차별적 시선과 젠더 폭력의 위험 속에서 게이밍 경험을 쌓아가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은 여성에 대해 깊이 뿌리박혀 있는 도덕적 기준과 편견이 작동한 결과이자, 여성의 발전을 억압하는 혐오적 시선뿐 아니라 역사적인 젠더 권력의 불평등성까지 정당화하고 유지해 왔다. 특히 게임 세계에서는 여성의 게임 능력을 남성과 비교하는 커다란 장벽이 항상 존재하며, 이곳은 모든 기술산업 분야 중 가장 젠더 불균형이 심각한 곳으로도 지적된다. 게임 제작사 경영진 중 여성의 비율은 현저히 낮고 e-스포츠 선수들 중에서도 여성은 5%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모바일 레전드> 필리핀 게이머들의 젠더 고정관념 탐색하기(Exploring Gender Stereotypes among Filipina Gamers of Mobile Legends: A Phenomenological Study)’라는 이름의 이 연구는 게임 세계의 젠더 고정관념이 필리핀 여성 게이머에게 미치는 영향을 다루고 있다. <모바일 레전드: 뱅뱅(Mobile Legends: Bang Bang)>은 동남아 지역을 중심으로 국가, 인종, 젠더를 막론하고 많은 유저들이 플레이하는 유명한 AOS 온라인 게임이다. 플레이어는 영웅 10명 중 한 명을 고를 수 있으며 5명이 한 팀이 되어 적군에 맞서 타워를 수성한다. 휴대폰 전용으로 서비스됨으로써 이 게임은 PC 이용자 기반 게임보다 높은 접근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모바일 레전드>를 가장 많이 플레이하는 국가는 필리핀으로, 필리핀에서만 1억 명 이상이 등록되어 있으며 월별 접속인원은 2천 5백만 명에 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바일 레전드>의 필리핀 e-스포츠 리그에서 여성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으며, 게임의 이용자가 많아지면서 여성 게이머에 대한 젠더 고정관념과 편견의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여성의 온라인 게임 경험이 남성과는 상당히 다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필리핀의 디지털 산업과 e-스포츠 산업이 확장되는 시점에서, 여성 게이머에 대한 젠더 고정관념을 주목하는 것은 게이머에 대한 중립적 인식을 유지하고 온라인 플레이어의 다양성을 확대하는 데 있어 여전히 필요한 과제다. 젠더 고정관념과 사회적 역할 이론 젠더 고정관념(gender stereotype)은 ‘여성과 남성 모두가 각각 지녔거나, 지녀야 하거나 실제로 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특성, 특징, 역할에 대한 기대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재현이자 선입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현재 여성이 전세계 게이밍 인구의 절반을 차지함에도, 남성에 비해 짧은 시간 위주의 캐주얼 게임을 주로 한다는 인식이 이에 해당한다. 특히 온라인 게임은 남녀 모두에게 열려 있음에도 기존의 젠더 고정관념과 인식을 악화시키는 매개로 지적되어 왔다. 남성 게이머들이 공격적이고 지배적인 존재로 묘사되며 우월하게 여겨지는 한편, 여성 게이머는 순응적이거나 남성에 의존하는 모습으로 규정되며 일반적으로 낮은 위치에 놓이기 때문이다. 한편, 젠더 고정관념에 입각한 태도는 여성 게이머에게 가해지는 원치 않은 위협, 모욕적 태도, 괴롭힘이나 희롱으로도 나타난다. 이는 e-스포츠 분야의 여성들에게 차별이자 동시에 점점 더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으로 자리한다. ‘사회적 역할 이론(Social Role Theory)’에 따르면, 개인의 행위와 태도, 목표는 그들의 젠더에 상응하는 사회적 역할에 큰 영향을 받는다. 즉 사회적 규범과 기대가 남성과 여성에게 서로 다른 역할을 정의하기에, 문화적 규범과 믿음에 기반해 공고해지는 젠더 고정관념은 개인의 행위와 관점, 욕망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젠더의 역할을 구성하는 사회적 기준이 어떻게 개인 고유의 역량과 태도, 커리어 경로에 영향을 주는지를 주목한다는 점에서 이는 본 연구의 핵심적인 이론적 관점이다. 특히, 사회적 역할 이론은 사회적 역할에 변화가 일어날 경우 인식과 행동에도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관점에서 젠더 고정관념을 분석한다는 것은 모든 젠더의 플레이어가 임파워링할 수 있는 포용성을 구축하고 다양하고 환대적인 게임 커뮤니티를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연구문제와 방법 이 연구는 1) <모바일 레전드>를 플레이하는 여성 필리핀 게이머는 어떠한 젠더 고정관념을 경험하고, 2) 이들은 자신의 젠더와 관련한 고정관념을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대응하는가? 라는 두 가지 연구문제에서 출발한다. 이를 위해 <모바일 레전드> 플레이 경험이 있는 다양한 연령대의 필리핀 여성 게이머 16명을 대상으로 반구조화된 인터뷰를 시행했다. 인터뷰는 주로 페이스북 메신저, 구글 미트와 같은 비대면 SNS 플랫폼에서 진행되었으며, 위의 두 가지 연구문제에서 유래한 개방형 질문으로 구성하였다. 필리핀 게이머들의 실제 경험을 탐구하기 위해 연구는 기본적으로 해석학적 현상학(hermeneutic phenomenology)에 입각한 질적 방법을 사용했다. 인터뷰에서 수집된 자료는 표로 정리되고 코딩되었으며, 특정한 패턴이나 주제를 식별하기 위해 주제 분석(thematic analysis)을 수행했다. 대주제와 하위주제간의 식별을 위한 자료로 살다냐(Saldaña, 2021)의 코딩 기법을 활용하여 분석에 있어 보다 체계적이고 엄격한 접근을 시도하고자 했다. * 게임 일러스트, 출처 – https://www.ign.com * 게임 플레이 장면, 출처 - 구글 플레이스토어 <모바일 레전드> 여성 게이머들에 대한 젠더 고정관념 먼저 <모바일 레전드>를 플레이하는 여성 게이머가 대부분 경험하는 고정관념은 ‘내려치기(downgrading)’였다. 최선을 다해 게임을 하더라도 이들은 대부분 환영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으며 부정적 피드백을 받았는데, 이는 여성 게이머가 실력과 역량 면에서 남성보다 약하고 무능하다는 젠더 고정관념에 기반한다.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음에도 <모바일 레전드>가 남성, 그 중에서도 소년들만의 게임으로만 여겨지는 인식은 실제 존재하는 여성 게이머에 대한 배타적 인식과 낙인을 강화했다. 이들은 플레이 도중 남성들에게 게임을 접으라는 이야기를 듣는 등 여러 형태의 사이버 폭력을 겪었고, 그 결과 대다수가 남성이나 성 중립적으로 보이기 위해 자신의 프로필을 숨기거나 음성 마이크 사용을 망설이기도 했다. 다음으로, <모바일 레전드>의 여성 게이머들은 실력이 약하다는 고정관념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게임에서 항상 서포터를 하는 역할로만 낙인지워지기도 한다. 실력자가 아니라는 편견 때문에 여성 게이머들은 게임에서 실수하기를 두려워했는데, 혹여 게임이 잘 풀리지 않을 경우에는 언제나 ‘지원 영웅이나 하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기술 게이밍의 시대’라는 결과에 젠더 고정관념이 위협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주며, 온라인 게임 내 여성들이 실제 게임 경험에서 이 위협에 직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남초 게임인 <모바일 레전드>를 여성이 플레이한다는 이유 자체만으로 여성 게이머들은 ‘바이섹슈얼’이나 ‘레즈비언’이라는 취급을 받기도 했다. 오직 (시스젠더) 남성만이 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여성이 하는 상황이 펼쳐졌을 때, 그들은 젠더 규범의 바깥이라는 비정상적 영역에 속한 사람들로 낙인찍히게 되는 것이다. 젠더 고정관념에 대한 <모바일 레전드> 여성 게이머들의 대응 그렇다면, 상기한 이러한 젠더 고정관념에 대해 <모바일 레전드> 필리핀 여성 게이머들은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었을까? 우선 가능한 대응 메커니즘 중 하나로 ‘무시(ignoring)’가 있다. 내가 게임을 하고 싶고 그동안 이 게임을 잘 즐겨 왔기 때문에, 또 그들이 내게 개인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니까 내버려 두자고 마음 속에 새기며 다음 게임을 잘 준비하는 것이다. 즉 여성 게이머들은 주어진 젠더 고정관념을 적극적으로 무시하는 것이 이를 다룰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믿고 있었다. 가끔, 자신의 실수에 유독 끔찍하게 반응하는 남성 게이머에 맞서 이들은 차분히 대응하며 다음 전략을 준비하기도 한다. 무시와 비슷한 또 다른 대처법으로는 ‘보복(retaliate)’도 있다. 자기에게 악담이 온다면 똑같은 형태로 돌려주고, 누군가가 폭력적 언행을 한다면 신고하고 그 사람을 차단하는 것이다. 부정적인 젠더 고정관념에 맞서는 또 하나의 방법은 게임에 더더욱 헌신하고 게임을 즐기는 것이다. 남성뿐 아니라 여성도 탁월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그들의 능력을 증명하겠다는 목표로 게임에 집중하는 여성들도 있었다. 자신들에 대한 괴롭힘이나 부정적 평가를 피하고, 젠더 폭력이라는 두려움에 맞서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모바일 레전드>에서는 분명히 프로 게이머에 준할 만한 실력을 가진 여성 게이머들도 존재했는데, 이들은 곧 프로로 평가받지 못하는 다른 여성 게이머를 위해 목소리를 내고 싸우는 이들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모바일 레전드> 게임 시간을 줄이고 운동이나 야외활동이나 학업에 시간을 더 들이는 사례도 있었다. 정리하며 ‘<모바일 레전드> 필리핀 게이머들의 젠더 고정관념 탐색하기’는 <리그 오브 레전드>와 비슷한 형태의 휴대폰 전용 AOS 게임에서 여성 게이머들이 겪는 위기와 대응 방식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질적 접근법을 택하고 있으면서도 분석 내용이 표면적인 수준에 그친다는 점은 큰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여성 게이머들이 온라인 게임의 남성지배적 문화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이들이 취하는 소극적이거나 적극적인 서로 다른 방식의 전략들이 각자 어떤 맥락에서 발생했으며 어떤 효과를 가질 수 있는지의 문제는 심층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했다. 다만 이 연구의 주요 함의 중 하나는 ‘다양성과 포용성’의 문제를 마주한 게임의 시대에도 여전히 남성 게이머의 전유물로 인식되는 장르적 영역이 존재하며, 여전히 여러 연령과 젠더의 플레이어들이 접속하고 있는 모바일/온라인 게임 분야에서도 젠더 차별과 고정관념이 공고히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실질적 소비자로서의 비중을 높여 가고 있음에도 여성 게이머들이 겪는 불변의 게임문화를 구성하는 핵심 논리는 무엇인지, 게임 산업분야는 이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해법을 찾아 나가야 하는지, 좀더 문화적이고 실질적인 연구들이 더 많이 수행되어야 하는 시점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연구자) 김지수 문화와 지식, 공간과 학술 장 등 다양한 영역을 공부합니다. 게임의 역사와 게이머의 생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 In Search of Our UX: Remembering Arcade Co-op Play

    Back then, there was a kind of ritual among my schoolmates. No matter what games we played, the final stage of the night was always . Gals Panic, put simply, was a territory-capture style game where you control your marker in 8 direntions-up, down, left, right, and diagonally-to claim areas and win. < Back In Search of Our UX: Remembering Arcade Co-op Play 28 GG Vol. 26. 2. 10. ***You can see the Korean version of this article at: www.gamegeneration.or.kr 우리의 UX를 찾아서: 오락실 코옵을 추억하다 그 시절 같은 학교 친구들에게는 일종의 의식이 있었다. 무슨 게임을 하든 가장 마지막 코스는 <갈스패닉 S2>로 플레이하기로 한 것이었다. <갈스패닉>이란 쉽게 말해 땅따먹기 게임으로 상하좌우에 대각선까지 8방향으로 기체를 조작해 구역을 확보하면 승리하는 게임이다. 여기까지만 설명하면 거짓말에 가깝다. <갈스패닉>에서는 땅을 따먹으면 그 구역에는 ‘갈’이 등장했고, 특정 퍼센테이지를 완수하면 온전한 일러스트를 볼 수 있었다. 이 게임의 핵심 인기 요인은 일러스트였다. Every evening, the arcade was filled with passionate cheering Back then, there was a kind of ritual among my schoolmates. No matter what games we played, the final stage of the night was always . Gals Panic , put simply, was a territory-capture style game where you control your marker in 8 direntions-up, down, left, right, and diagonally-to claim areas and win. But stopping the explanation there would be almost a lie. In , once a territory was claimed, a “gal” appeared within that space, and upon reaching a certain percentage, a complete illustration was revealed. The game’s core appeal lay precisely in those illustrations. That was why, at the machine tucked away in the far corner of the arcade, cooperative play emerged as a means of meeting the game’s requirements. Whoever happened to have the most spare change that day became the sponsor, while the friend with the best control took the seat. Others called out incoming bullet patterns or the remaining time; some explained the next pattern, others how to trap enemy monsters. Since this was an era when you couldn’t photograph the finished result with a phone camera, the only option was to take the illustration in with your eyes. Everyone tried their hardest to store the image in their memory. This user experience (UX) is precisely the intriguing story I wish to tell. The arcade was, in every sense, a space optimized for cooperative play (Co-op). Beyond the previously mentioned Gals Panic, many other games also featured Co-op play. By virtue of the arcade’s nature—a place where many people gathered in the same physical space—even those who were not seated at the machine could participate, communicating with one another and collectively working through puzzles. In Search of Our UX In retrospect, the arcade was a space especially suited to two-player games. Most arcade machines were equipped with two seats, which naturally led to many games structured around competition between Player 1 and Player 2—but there were just as many that emphasized working together toward a shared goal. The first game that comes to mind is . Although the game was designed to allow players to choose from four characters—snow, lightning, water, and wind—in arcades it was typically limited to two-player play due to hardware constraints. Much of the fun lay in each player trapping monsters into balls and then bursting them at precisely the right moment. Belt-scrolling action games like the arcade versions of and could be said to represent the very essence of Co-op play. Two players would sit shoulder to shoulder at a cramped machine, bumping into one another as they frantically mashed the buttons. A quiet ethic of generosity was at work: yielding health recovery items to each other, or giving up buff items—or weapons—that would better suit the other player’s character. We would exchange high fives after clearing a mission, and at times, even if I had survived, I would gladly drop another 100 won to revive Player 2 rather than continue alone. Yes—paying money for someone else’s play was considered an undeniably cool thing to do in the arcade. Unless one resorted to unacceptable behavior—taking over someone else’s game, extorting money in a nearby shady alley, or secretly adding credits with a coin-up trick—everyone had to insert a 100-won coin into the machine to play. Within this strict 100-won rule, the reciprocity of sharing one’s single credit can occasionally be found in the online gaming era, in practices like quietly slipping help to newcomers. Even then, the weight of the gesture is different—it is often merely a veteran player distributing a fraction of their surplus resources. The Happiness of 100 Won With a bit of humor, the rule that everyone had to put in 100 won per game can be directly linked to what we now call P2W—Pay to Win. Because players who kept feeding more coins into a given machine naturally became more skilled, those who invested heavily in a game held a clear advantage in PvP. Once a player’s skill surpassed a certain threshold, however, they became a kind of “monster” who could see an entire game through on a single coin—earning the wary glances of the arcade owner. There was someone who would insert just one 100-won coin and spend the entire day playing , defeating everyone who challenged him. Soccer games were popular then, as they are now, so many people were waiting to play, but because he dominated the machine, its turnover rate was extremely low. In the end, what stopped him was an anonymous tip reporting that he was skipping mandatory evening self-study to be at the arcade. Friends much younger than him speculated that it was probably the arcade owner who had made the call. My personal favorite arcade game was , a shooter developed by Psikyo. I was completely absorbed by its distinctive Japanese look and feel and its thrilling gameplay. I would often walk with a close friend to a neighboring district’s arcade that had a cabinet, and that journey itself feels incomparable to anything today. In 2022, who would walk twenty minutes just to pay 100 won for a single round of a game? Game magazines existed, but it was difficult to find arcade strategies in them at the time, so during those twenty minutes on foot, my friend and I would discuss which characters to choose and how we might clear each stage. In , there was a hidden character named Ain. By inputting the command up, up, up; down, down, down; up, up, up, up, up, up, up on the selection screen, the character could be unlocked. Choosing such a hidden character for someone who didn’t know the command could itself be seen as a form of cooperation. In that sense, Co-op also functioned within PvP games like . Much like selecting “Orochi Iori” for a friend in KOF ’97—officially known as Insane Iori with Blood of Orochi Under the Night of the Moon. 3 Meters to a ‘Real-Life fight’ Couples often played games like or at the arcade. The sound of laughter, mixed with the rapid pounding of domed buttons, remains part of the memory. In many ways, feels like it presented a prototype for , which was named Game of the Year by multiple outlets in 2021. Both are two-player games, and both carry the risk that excessive immersion in play can result in damage to the relationship itself. Back when I was a regular arcade-goer, I once witnessed a couple arguing while playing , with one accusing the other of not going easy on them—“Why won’t you let me win?” In truth, fights between couples were usually just playful affirmations of affection, often endearingly minor in scale. But during competitive fighting games, there were occasions when disputes between two burly men escalated to the point that all gameplay in the arcade came to a halt. At the arcade in my neighborhood, there was once a physical fight during after one player repeatedly used Devil’s laser attacks, prompting the other to shout, “Stop using cheap tactics.” In arcade fighting games, after all, your opponent’s face sits directly across from your own. What Does Offline Co-op Mean to Us Today? We now live in an online era. Even to play —a game often regarded as a tribute to offline Co-op, with its many embedded mini-games—two people no longer need to meet in the same physical space. With a single click on an online “invite friend” button, they can depart together into the game world. So what meaning does offline cooperative play still hold for us? To be sure, the Nintendo Switch still offers many excellent party games, and even without software, solving puzzles together at an escape room café could also be considered a form of Co-op. Yet offline Co-op seems to have been pushed out of the mainstream, relegated to the realm of nostalgia. The experience of multiple people reacting together to a single screen is becoming a special event rather than an everyday occurrence. When offline Co-op in arcades was at its peak, access to the internet for new information was (relatively) scarce. Few households had consoles or PCs capable of running games, and of course, not everyone carried a phone in their pocket. The only way to leave a record of one’s play was to inscribe one’s initials on the leaderboard. In offline Co-op, each and every game mattered. In the online era, access to “a single game” has improved beyond comparison. Yet alongside this, we also see people who, shielded by the veil of anonymity during gameplay, unleash words they would otherwise hesitate to utter. In online random matchmaking, people sometimes insult casually—and disappear just as casually. Having lived through both eras, this is not an attempt to claim that “the arcade days were better.” The offline Co-op culture of old arcades also included various abuses carried out by so-called neighborhood toughs. Nevertheless, if we take the term UX literally—as the totality of user experience—then the distinctive environment of the arcade explored here deserves to be recorded as a special chapter in the history of game UX.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김재석 8년 동안 디스이즈게임 취재기자로 일했다. 지금은 서브컬처 스타트업에서 대외협력을 맡고 있다. 에디터와 치트키의 권능을 사랑한다. (문화연구자) 김지수 문화와 지식, 공간과 학술 장 등 다양한 영역을 공부합니다. 게임의 역사와 게이머의 생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 트롤링 권하는 기술: 인게임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에 대한 소고

    기술은 매 순간 우리의 기대를 넘어서는 발전 속도를 보여주지만, 결국 그 기술이 그려내고자 하는 것은 과거 우리가 맨몸으로 겪었던 어떤 순간이다. 반드시 한 자리에 모여야만 가능했던 게임을 디지털기술은 원거리에서도 게임 규칙이 제시하는 승부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무언가로 탈바꿈시켰고, 이제는 그 게임의 바깥에 존재하던 음성언어마저도 구현가능한 상황에 우리를 올려놓았다. < Back 트롤링 권하는 기술: 인게임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에 대한 소고 14 GG Vol. 23. 10. 10. 같이 하는 게임으로 시작해 다시 '같이'하는 게임으로 오기까지 디지털게임 안에서 작동하는 플레이어 상호간의 의사소통은 게임의 여러 요소 중에서도 굉장히 후대의 것에 가깝다 . 특히 기원이 되는 디지털 이전의 게임까지 거슬러 올라가보면 애초에 게임 안의 커뮤니케이션은 굳이 따로 만들 이유가 없었는데 , 장기나 바둑 , 체스 같은 게임들은 같은 시공간에서 마주보고 한다는 대원칙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시기적으로도 그렇지만 애초에 게임이 상호작용으로부터 빚어진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별도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게임 규칙 외에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점이다 . 앞에서 바둑과 장기 이야기를 언급했지만 , 이들 게임은 규칙으로서의 게임만 이야기한다면 대화가 불필요한 것이겠지만 실제 게임이 플레이되는 현장에서 바둑 두는 두 사람간의 대화는 또한 일상적이다 . 프로 간의 대국에서라면 수담 ( 手談 ) 외에는 문답무용이겠지만 , 일상의 놀이가 모두 프로 같지는 않을 것이다 . 딱딱하게 구분해 본다면 텍스트로서의 게임은 순전히 규칙이 제시하는 방식 안에서만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부분만을 가리킬 것이다 . 그러나 애초에 모든 게임이 모여서 한다는 전제 하에 이루어졌음을 감안한다면 그 규칙 바깥의 커뮤니케이션은 언제나 게임과 함께 있어 온 존재이기도 했다 . 이는 초창기 비디오게임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 < 퐁 > 과 같은 경우는 기기 한 대에 두 명이 달라붙어 플레이하는 구조였고 그 과정에서 당연하게도 플레이어 두 사람간의 커뮤니케이션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곤 했다 . 이 자연스러움이 없어지는 첫 번째 분기점은 아마도 싱글플레이 게임의 대두로부터일 것이다 . < 퐁 > 에서 < 브레이크아웃 > 으로 변화하면서 혼자서도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이 대세가 되면서부터는 소프트웨어가 제시하는 규칙에 대응하는 것 외에 다른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이 불필요해지는 순간을 볼 수 있었다 . 이보다 더 큰 분기점은 온라인 네트워크 기능의 도입일 것이다 . 앞서 이야기한 , 멀티플레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둘 이상의 사람이 같은 시공간에 모여야 한다는 전제는 온라인이 도입되면서 깨졌다 . 아니 애초에 온라인 멀티플레이의 도입이 이루어진 배경 자체가 굳이 한 공간에 있지 않더라도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 오프라인 시절에는 당연했던 , 함께 게임을 하며 이야기나누는 상호작용은 온라인 멀티플레이에 들어오면서 이제 별도로 구현해야만 가능한 무엇으로 그 성격을 바꾸었다 . 멀티플레이 디지털게임에서 커뮤니케이션은 게임의 구성 요소가 아니면서도 게임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며 발전해 왔다 . 그리고 이는 애초에 기술적인 시작점부터도 어느 정도 유사성을 가지고 있었다 . 채팅과 온라인 멀티플레이는 같은 시작점을 가진다 네트워크 상에서 둘 이상의 사용자가 실시간으로 텍스트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의사소통하는 채팅 기술은 1974 년 미국 일리노이대학의 PLATO 컴퓨터 시스템의 내부 네트워크를 통해 처음 세상에 등장했다. 본격적인 채팅 시스템은 핀란드 프로그래머 야르코 외카리넨(Jarkko Oikarinen)에 의해IRC(Internet Relay Chat) 프로토콜이 개발된 1988년 이후 보급되기 시작했으며, 한국에서는 초기 전화 모뎀을 이용한 PC통신 등에서 메일, 동호회, 게시판 기능과 함께 PC통신의 주요 기능 중 하나로 대중에 소개되었다. 1) 채팅의 역사 속에서도 이미 공격적인 행동에 대한 우려는 나타난 바 있다. 영화 <접속>(1997)처럼 비대면의 익명 상대이기에 가능한 로맨스가 있었던 것 이상으로 사람들은 익명의 누군가에게 공격적이었다. 이는 채팅이라는 기술 자체가 가지고 있는 비대면의 다대 다 익명성으로부터 기인하는 문제다. 그리고 이러한 익명성의 문제는 동일하게 온라인게임에서도 나타난다. 최초의 다중접속 게임으로 거론되는 게임인 은 1978년 영국 에섹스 대학의 로이 트럽쇼가 개발한 게임으로, 채팅과 마찬가지로 PLATO 시스템 기반의 대학 서버 내에 올려진 TRPG 기반 텍스트 게임에 여러 사람이 동시접속할 수 있게 만든 게임이다. 접속한 플레이어들은 서로 같은 방에 위치한 플레이어들끼리 텍스트 채팅을 통해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고, 작동방식이나 기술적 측면에서 이 둘은 서로 비슷할 수 밖에 없었다. 혹자는 게임 안에서의 행동들이 일반적인 커뮤니케이션보다 더욱 거칠게 나타나는 것을 두고 게임이 가진 본질적인 공격성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위와 같은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게임 때문이라기보다는 애초에 비대면 다대다 커뮤니케이션 자체가 다분히 참여자들을 공격적으로 만든다고 보는 편이 좀더 합리적이다. 오히려 참여자가 공격적으로 변해가는 상황은 反게임적인데, 로제 카이와는 ‘놀이와 인간’에서 게임의 요소 중 하나인 경쟁agon이 단순히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규칙이라는 틀 안에서 질서정연하게 수행되는 것임을 지적한 바 있다. 놀이 안에서 일종의 학대와 골탕먹이기가 발생하는 과정은 카이와에 따르면 ‘경쟁에서 멀어지는’(42p) 어떤 순간이며, 게임을 벗어나 원시적인 투쟁으로 향하는 순간이다. 이는 게임 자체보다는 채팅이라는 기술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에 가까워 보인다.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대화상대가 누구냐는 것 오늘날 게임들은 네트워크 기술의 발전으로 더욱 방대한 대역폭을 활용하여 텍스트 채팅 이상의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을 제공한다. 보이스채팅이라고 불리는 이 음성 기반의 커뮤니케이션 채널은 이름부터 흥미로운데,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누군가와 음성으로 이야기나누는 것을 인터넷전화라고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름에 ‘채팅’을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전화’와 ‘채팅’의 위와 같은 용례는 이 둘의 구분이 어떤 상대와 커뮤니케이션하느냐에 있음을 드러낸다. 전화는 (일부 텔레마케팅을 제외하면) 상대가 누구인지 이미 아는 경우에 활용되고, 채팅은 익명성에 기반한다. 게임과 함께 하는 음성기반 커뮤니케이션을 보이스’채팅’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익명성에 기반한 음성 커뮤니케이션은 텍스트 채팅보다 훨씬 더 공격적이고 자극적이라는 사실이다. 미디어학자 매클루언은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의 차이를 두고 부족사회에서의 음성언어가 서구문명의 문자언어로 변화하고, 이것이 전기기술의 힘에 의해(전화, 라디오 등) 다시금 음성언어로 치환되면서 문자언어 중심의 사회에 일종의 내파를 일으키고 있음을 지적한다. 매클루언의 주장을 빌어 온다면, 우리는 과거 부족 사회처럼 옆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알 만큼 가까운 사이에서만 작동했던 음성언어가 그 제한과 한계를 기술을 딛고 넘어서면서 익명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공격적 보이스채팅의 문제를 마주하게 되었다고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멀티플레이 게임이 디디고 있는 '익명성'의 대전제 그러나 원인을 안다고 해서 딱히 해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멀티플레이 기반 게임들은 1:1의 멀티플레이 이상으로 팀 대 팀의 플레이에 중심을 두고 있는데, 이는 다시말해 하나의 팀이 유기적이고 효율적인 협동 플레이를 펼치기 위해서는 게임 규칙 안의 상호작용 외에 더 많은 커뮤니케이션이 게임 승리를 위해 필수적인 상황을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다. <리그 오브 레전드>는 매우 강력하게 게임의 규칙에 “한 팀은 무조건 다섯 명으로 이루어집니다”를 내세우는 게임이다. 친구와 둘이 PC방에 가더라도 두 사람은 결국 모르는 세 명을 팀원으로 받아 다섯 명을 채워야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때에 따라서는 개인의 순수한 실력보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승패에 크게 영향을 주는 사례를 목격할 수 있다. 때문에 제작사인 라이엇게임즈는 초창기에 이용자들로부터 랜덤 매칭된 팀원 사이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해 줄 수단으로서의 보이스채팅 기능 추가를 요구받은 바 있는데, 그에 대해 답변한 기록은 오늘날 보이스채팅의 기능을 역으로 잘 드러내는 자료로 남아 있다. (중략) 이 논의를 시작할 때 먼저 고려해야 할 사항 중 하나는 친구들과 음성 채팅으로 게임을 즐길 때와, 모르는 사람들과 음성 채팅으로 게임을 즐길 때의 차이입니다. 예를 들어, 리그 오브 레전드 플레이어 여러분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면, 친구들과 음성 채팅을 하는 것에 대해선 79% 이상이 이것이 리그 오브 레전드를 더 즐겁게 플레이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데 동의한다고 응답합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과 음성 채팅을 하는 것이 즐거울지를 묻는 질문에는 겨우 50% 정도의 플레이어 여러분만이 동의하셨고, 나 되는 반대 의견이 나왔습니다. 4 명 중 1 명이 모르는 사람과 음성 채팅을 하고 싶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저희들에게도 놀라운 결과였습니다. (중략) 음성 채팅을 하게 되면, 몇몇 플레이어만 끝까지 음성 채팅을 사용하며 나머지 플레이어들은 음성 채팅에 아예 참여하지 않거나 음성을 차단한 후 텍스트 채팅만을 사용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합니다. 기계 학습 (machine learning) 기법을 통해 실제 어떤 대화가 이루어지는지 분석하는 고도화된 모델을 개발하여 적용한 결과, 일부 플레이어들만 음성 채팅을 사용하고 다른 플레이어들은 텍스트 채팅으로 소통하는 게임의 경우 텍스트 채팅에 나타나는 공격적인 언어 사용이 126% 나 증가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플레이어 여러분도 저희도 리그 오브 레전드에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종 차별, 동성애 혐오, 욕설 등의 언어 사용이 126%나 증가한다는 뜻입니다. 음성 채팅을 활용하면 공격적인 언어 사용이나 욕설을 감지하기가 더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음성 채팅을 활용하는 플레이어들이 텍스트 채팅에서 공격적인 언어와 욕설을 훨씬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악성 플레이어를 감지하기가 더 쉬웠습니다. 놀랍지 않은 결과이지만, 모르는 사람과 음성 채팅으로 게임을 즐긴 플레이어들은 평균보다 신고되는 횟수가 47% 나 많았습니다. (중략)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친구들과의 음성 채팅은 매우 훌륭한 게임 경험이며, 사실 리그 오브 레전드 플레이어 여러분께서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사실 많은 플레이어 여러분께서 스카이프 등의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친구들과 게임을 즐기고 계시며, 이는 매우 바람직한 직한 일입니다. 하지만 음성 채팅 앱이나 게임에 포함된 음성 채팅 기능은 모르는 사람과의 음성 채팅에 활용되기 쉬우며, 자동으로 그렇게 되기도 합니다. 그 결과 공격적인 언어 및 욕설이 126% 증가하고 신고 횟수는 47%나 증가하며 , 이는 플레이어가 서로를 차단하거나 음성 채팅 기능을 사용하지 않아도 나타나는 현상입니다.(라이엇게임즈 , 2014) 2) 홈페이지를 통해 게시된 라이엇게임즈의 이 공지문은 오늘날 보이스채팅 문제가 가지고 있는 난점들을 매우 정확하게, 그리고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다. 친구들과의 음성 채팅과 익명의 음성채팅은 완전히 다르며, <리그 오브 레전드>는 반드시 익명의 사람들이 모여 팀을 이뤄야 하는 구조다. 익명 보이스채팅이 가지는 공격성은 텍스트채팅보다 훨씬 강력하기에 우리는 익명 매칭을 기반으로 돌아가는 우리의 게임에 보이스채팅을 추가할 생각이 없다는 라이엇게임즈의 메시지는 우리가 즐기고 있는 익명 매칭 기반의 팀 온라인 게임이 근본적으로 넘어설 수 없는 소통의 지점을 또렷하게 가리키고 있다. 기술은 매 순간 우리의 기대를 넘어서는 발전 속도를 보여주지만, 결국 그 기술이 그려내고자 하는 것은 과거 우리가 맨몸으로 겪었던 어떤 순간이다. 반드시 한 자리에 모여야만 가능했던 게임을 디지털기술은 원거리에서도 게임 규칙이 제시하는 승부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무언가로 탈바꿈시켰고, 이제는 그 게임의 바깥에 존재하던 음성언어마저도 구현가능한 상황에 우리를 올려놓았다. 그러나 이는 단지 기술적으로 누군가의 목소리를 실시간으로 전달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시작되어 아직까지도 극복되지 못한 비대면 익명성이라는 대전제다. 기술이 모르는 사람들을 강제로 지인으로 만들어버리는 방향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전제가 깨어지지 않는다면 어떤 기술이 어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을 만들어내건간에 우리는 트롤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1) IT동아 (2014, 5, 19). ‘ 채팅 ’ 탄생 40 주년 PC 통신과 메신저 거쳐 모바일까지 2) 라이엇게임즈(2014). 음성 채팅 기능에 대한 내부 논의 내용을 알려드립니다 >. URL: https://leagueoflegends.co.kr/?m=forum&mod=view&topic_id=7&thread _id= Wje_dd9l Uk Tags: 매클루언, 채팅, 보이스채팅, 커뮤니케이션, 음성언어, MUD, PLATO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게임평론가이자 연구자. 2015년부터 게임을 업으로 삼아, 평론가로서는 게임이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을, 연구자로서는 상품으로서의 게임이 사회 안에 자리잡는 구조를 살펴본다. 『81년생 마리오』(2017), 『현질의 탄생』(2022) 등을 썼고, 〈다큐프라임〉(EBS)을 비롯한 다큐멘터리와 여러 매체 연재에 참여했다. 디지털게임을 시간권리상품으로 분석한 연구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게임연구소 '드래곤랩'대표를 맡고 있으며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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