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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유령』: 소설이 탈북민과 게임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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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2. 2. 10.

소설 『유령』을 말하기에 앞서 


2020년 초 유튜브 채널 〈CLAB〉에 영상 두 편이 올라왔다.1) 영상은 〈배틀필드4〉를 플레이하는 남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FPS 게임의 왕좌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임이 〈배틀필드〉 시리즈이긴 하지만 〈배틀필드4〉의 경우 2020년을 기준으로 무려 출시 7주년이 되어가는 게임이었다. 그런데도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남녀의 영상은 (이 글을 쓰는 지금 기준으로) 두 편 합쳐서 약 658,000회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두 영상이 유튜브 이용자들의 이목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하다. ‘탈북자’가 가상의 ‘평양’이지만 ‘김일성 동상’을 향해 총을 쏜다. 이때 시청자들이 호응하는 것은 게임 플레이 그 자체보다는 김일성 동상을 보자마자 총을 쏘는 탈북자의 모습이다.


그리고 2021년에는 ‘북한 인민’을 흉내 내는 스트리머와 실제 ‘탈북자’가 함께 〈배틀그라운드〉를 플레이하는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왔다.2) 세 편으로 구성된 이 시리즈 역시 약 86만 조회수를 달성했다. 이 영상은 사전에 기획된 것으로, 〈조충현〉 채널에서는 커뮤니티 공지를 통해 사전에 탈북자를 모집했다. “배틀그라운드 및 다른 여러 가지 게임들 탈북민스쿼드를 계획 중에 있습니다. 실제 새터민분들 중 배그 및 롤을 해보신 적이 있는 분들은 전자우편함으로 날래 보내주심 감사하겠슴다”라는 내용의 익살맞은 공지에서 운영자가 예로 들고 있는 게임은 “〈배틀그라운드〉, 〈롤〉, 〈카트라이더〉 등”이다.3)  그렇게 성사된 〈배틀그라운드〉 플레이 영상은 〈배틀필드4〉 영상보다 더 단순했다. ‘대한민국 코미디언’이 ‘탈북자’와 ‘문화어’를 쓰며 게임을 한다. 시청자들은 아슬아슬한 〈배틀그라운드〉 플레이 상황보다 코미디언 스트리머 ‘복남 동지’와 탈북자 게스트 ‘억철 동지’의 입담에 열광한다.


〈CLAB〉와 〈조충현〉 채널에 올라온 영상 모두 탈북자의 게임 플레이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두 채널의 영상을 보는 시청자들은 탈북자가 보여주는 게임 플레이에 큰 관심이 없다. 시청자들이 호응하는 것은 탈북자들의 입담과 그들이 보여주는 과감함이다. 여타 게임 스트리머들의 영상을 보는 시청자들이 스트리머의 게임 실력과 센스에 따라 영상 시청을 결정한다면, 탈북자들의 게임 플레이 영상에서 중요한 것은 게임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그들이 게임에 투영하는 경험인지도 모른다. 통일부가 집계한 국내 정착 탈북자의 수는 33,815명이다.4)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탈북자는 여전히 새롭고 낯선 존재이다. TV 미디어를 통해 노출되는 탈북자는 경직되어 있거나 작위적이다. 유튜브 영상 속 탈북자는 북한 출신이지만 ‘우리’와 비슷한 존재로 다가온다. 오히려 ‘진짜 북한 사람’이 맞는지 의심받는 ‘진짜 탈북자’가 되기까지 한다.



우선 『유령』을 의심하자, 그러니까 과연 분단과 탈북자란


강희진의 장편소설 『유령』은 오래된 소설이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시간을 기준으로 하면 벌써 낡아버린 소설일 수도 있다. 2011년 〈제7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으로 출간된 『유령』은 “탈북자들의 소외를 리니지 게임과 연결시켜 서술한 점이 신선하고 흥미롭다”는 평가를 받음과 동시에 “분단 상황과 가상현실 문제를 뒤섞고 가로지르며 역동적인 탈주를 보인” 것으로 이목을 끌었다.5) 


심사위원이기도 했던 우찬제는 「분단 환경과 경계선의 상상력」을 통해 강희진의 첫 장편소설이 “탈북할 수밖에 없었던 북한의 정치적 경제적 사정, 탈북 이후 남한의 경제적 문화적 사정 등을 실감 있게 기술”하는 동시에 “단순한 탈북자들의 생리를 그린 것이 아니라 21세기 세계의 문제의식을 독특하게 구성해 놓고 있다”고 평한다.6)  즉 강희진의 『유령』은 2011년이라는 상황 속에서 새롭고 독창적인 ‘분단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비슷하게 고인환은 「탈북 디아스포라 문학의 새로운 양상 연구」를 통해 이응준의 ????국가의 사생활????과 강희진의 『유령』을 동시에 호명한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가상의 디스토피아 현실’을 그린다는 점일 것이다. 차이점은 ????국가의 사생활????이 가까운 미래의 통일된 상황을 상상한다면 『유령』은 2010년의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는 정도이다.


고인환이 『유령』에 주목하는 것은 “탈북자들의 삶에 무관심한 우리 사회의 냉혹함은 물론, 그들에 대한 “지나친 감정 몰입”으로 객관적 거리감을 유지하지 못하는 일방적 태도 또한 경계하고 있는” 작가의 태도이다.7)  고인환에 따르면 ““객관화된 대상”으로서의 탈북자는 ‘공감의 부재’와 “지나친 감정 몰입”을 창조적으로 지양(止揚)하는 과정에서 온전히 형상화될 수 있을 것”이고, 강희진은 『유령』을 통해 그것을 적절히 보여줬다.8)  


이와 더불어 이경재는 “이주노동자나 결혼이민자 혹은 탈북자들을 무시와 모멸의 대상으로만 삼는 한국인의 식민주의적 (무)의식을 날카롭게 고발”하는 것으로 평가한다.9)  나아가 소설 속 “주인공의 부적응과 소외, 그리고 정체성의 혼란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탈북자들 모두에게 해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분석한다.10) 이것은 “이주민들이 한국 사회에서 배제되어 ‘벌거벗은 자’가 되어가는 현실을 재현하는 데 집중하는 소설”의 하나라는 입장이다.11) 


재차 강조해야 할 점은 이 소설이 2011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이다. 2011년. 남북관계가 다시 냉각기에 접어들었던 바로 그 무렵, 대한민국 공해에서 군함이 격침당하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이후 처음으로 대한민국 영토가 적의 포탄에 유린당한 직후의 언저리, 그리하여 반공의 기치가 다시 하늘 높이 휘날리던 바로 그 시절, 그럼에도 2천 명 넘는 탈북자가 해마다 한국으로 유입되고 있던 상황.



아주 잠깐 탈북자 현황을 알아보자, 『유령』에 대한 이야기에 앞서


소설의 배경이 되는 2010년을 기준으로 한국으로 입국한 탈북자는 2만 명에 가까웠다. 2만 명의 탈북자가 의미하는 것은 2만 가지 이상의 사연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가운데 ‘탈북자’이자 ‘청년’이며 ‘게임중독자’로 묘사되는 『유령』의 주인공은 과연 ‘탈북자’를, ‘탈북 청년’을 대표하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인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한국문학에 없던 존재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인물을 상징적인 존재로 위치시킴으로써 생겨난 문제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


반공의 기치가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면서 가뜩이나 차별받던 탈북자들은 무시와 멸시의 존재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그나마 동정과 긍휼의 대상으로 상상되던 탈북자들이 이제는 간첩은 아닌지 의심해야 하는 대상으로, 사회의 골칫거리로 떠오른 것이다. 항상 겪어야 하는 간첩 의혹, 눈치를 봐야 하는 정착 지원 제도. 다수의 시선은 언제나 소수를 불안과 공포로 내몰 뿐이다. 다수는 소수의 존재가 성가신 정도(불편도 아니다)에 그치겠지만, 소수에겐 무엇 하나 사소할 수 없는 법이다.


2022년 현재 상황에서 이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오히려 간단하다. ‘탈북자’가 주인공인 이 소설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냉정한가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하는 까닭이다. 나아가 ‘탈북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소설을 과연 분단문학 혹은 디아스포라 문학이나 다문화 문학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 다시 물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탈북자를 끊임없이 ‘탈북자’라는 따옴표 속에 가둠으로써 생기는 왜곡과 굴절의 문제이며, 탈북자라는 지칭을 통해 그들을 계속해서 대한민국의 외부로 내몰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 의심하자 『유령』을, ‘탈북자’가 아닌 ‘탈북자 됨’에 대하여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탈북자에 대한 시선 중에 하나가 ‘미리 맞이한 통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 그 표현은 좌절되고 실패하였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유령』이 결코 그러한 현실에 대한 ‘고발’이 아니라는 점이다. 2011년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유령』이 묘사하고 있는 탈북자-북조선의 모습은 현실과 괴리가 있다. 오히려 『유령』이 그리고 있는 탈북자-북조선은 대한민국이 상상하는 ‘탈북자 됨’ 또는 ‘북조선 됨’의 재생산은 아닌지 의심해야 한다.


내가 갈 곳은 방송국이 아니라 리니지 세계다. 이번에 그 속으로 들어가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다. 귀환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바깥 세계로 나온다면 영원히 폐인으로 살아야할지 모른다. 한 달이고, 두 달이고, 1년이고, 2년이고 머물 것이다. 내게 리니지는 환상이 아니다. 그곳은 현실이다(325쪽).


위 인용은 『유령』의 결말 부분이다. 소설 속 주인공의 문제는 무엇하나 해결된 것이 없다. 그나마 ‘개명 신청’이 받아들여진 것이 주인공 ‘나’가 해결한 유일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소외와 차별, 무시와 멸시, 좌절과 낙담 속에서 ‘탈북자’인 주인공의 도피처는 온라인 게임 〈리니지2〉이다. 게임 속 주인공의 아바타-캐릭터 ‘쿠사나기’는 영웅이다. 혈맹의 군주인 동시에 혁명의 선봉에 섰던 전사이다. 다만 소설의 도입에서 ‘나’가 스스로 되뇌이듯 “육이오 전쟁 이후,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틀어 한반도에서 일어난 가장 위대한 혁명이었던 바츠 해방전쟁에 참여한 전사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영웅에게도 현실은 냉혹한 법이다.”(11쪽) 


현실이 아닌 가상, 현실보다 더 냉혹한 세계에서야 탈북자는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증명한다. 더욱이 ‘나’의 주변에 있는 탈북자들은 하나같이 고난과 고통 속에 살아간다. 노숙자이거나, 룸싸롱 접대부거나, 대딸방 핸플녀거나, 고아거나, 과부거나,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살거나, 마약에 찌들거나. 북조선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가와 상관없이 남한에서 살아가는 인생은 기구하기만 하다. 『유령』 속 탈북자는 그래서 ‘유령’이 된다. 그리고 『유령』을 읽는 독자들은 ‘탈북자 됨’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요즘은 탈북자에게 주는 정착금이 얼마 되지 않아 환상은 더 빨리 깨진다. 탈북자들이 컴퓨터 게임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169쪽). 


작가는 『유령』 속의 인물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틈틈이 현실에 대한 ‘고발’도 멈추지 않는다. 문제는 그 고발의 잘못됨이다. 2010년을 기준으로 2만 명, 2022년을 기준으로 3만 명의 탈북자 가운데 몇이나 컴퓨터 게임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지 의심해야 한다. 마치 지원금이 줄어서 탈북자가 힘들어졌다는 진술을 의심해야 한다. 돈이 없어서 현실을 피해 가상 세계로 뛰어든다는 시선을 의심하고 타파해야 한다. 하지만 독자는 『유령』을 읽는 동안 그러한 의심으로부터 차단된다. 작가는 그만큼 단호하고 당당하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 늘 당하는 배신, 게임 속에서는 그런 일이 없으리라 믿었다”(52쪽)는 주인공의 목소리는 의심하지 말자. 다만 게임이라고 다를 게 없다는 것을 탈북자인 주인공은 몰랐을 것이다. 엄연히 말하자면 게임과 현실은 다르다. 하지만 게임이라고 현실과 다르지 않다. 그러한 게임과 현실의 경계에 대하여 한 선학은 다음 인용의 멋진 문장을 새겨놓았다.


어쩌면 한국 사회의 온라인 게임 열풍은 현실과 게임 사이의 이질감이 적다는 점에서 비록되는 것이 아닐까? 온라인 게임의 사건은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에서 발생한다. 허구의 캐릭터들은 가상의 육체와 현실의 영혼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 속 모든 현상은 사회를 투영한다. 하지만 게임은 현실의 의미망 속에서 만들어지는 동시에 현실의 의미망을 끊임없이 벗어난다. 그것이야말로 게임이 가진 탈주의 힘이다.12) 



‘게임’을 대하는 『유령』의 태도, 무엇이 그렇게 문제


이 소설의 또 다른 문제는 결코 게임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소설 시작부터 “온라인 게임을 정신없이 하다가 영양실조로 죽은 사람도 있다”(10쪽)고 적는다. 주인공을 상담하는 의사는 “이런 식으로 살다간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16쪽)다고 조언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온라인 게임 속으로 들어가 폐인이 되는 데는 이틀이면 충분하지만 폐인을 탈출하는 데는 한 달 이상이 걸린다”(117쪽)고 고백한다.


“게임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언제든지 벗어날 수 있지만 결코 빠져나올 수 없다. 공포에 대한 갈망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게임은 진짜 공포다.”(236~237쪽) 결국 “게임이, 그놈의 게임이 재밌지도, 자신에게 맞지도 않는데도 계속해 그것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동안 들인 시간과 돈, 공들여 온몸을 바쳐 쌓아올린 레벨 때문이다.”(280쪽) 하지만 정말 그럴까? 결국 유저는 언젠가 게임을 떠난다. ‘못 떠나는’ 유저는 없다. 안 떠날 뿐이다. “유저가 어떤 게임을 떠나는 것은 게임이 지겨워지는 순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13)


이것은 게임에 대한 무례이다. “산업적 담론에서 게임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첨단 IT 산업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문화적 담론에서는 사람들을 중독시키는 마약으로 묘사된다.”14) 강희진의 소설 『유령』은 게임을 ‘마약’으로 치부한다. 그렇다보니 〈리니지2〉만의 사건이 아닌 현실에서도 이목을 사로잡인 ‘바츠 해방전쟁’ 역시도 『유령』에선 도구적으로 소모될 뿐이다. (진짜 의미가 조금씩 밝혀지고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독재에 맞선 민중의 봉기, 독재를 물러나게 한 성공한 혁명, 혁명 뒤에 인간이 그렇듯 욕망에 점철되어 내분을 맞은 집단, 독재자의 귀환과 혁명 세력의 몰락.


그 자체로 소설이 될 수 있는 ‘바츠 해방전쟁’은 실제 ‘붉은혁명’이라는 혈맹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탈북자 중심의 혈맹 ‘뫼비우스의 띠’가 만들어지고, 〈적기가〉를 무르는 내복단이 등장하고, 해방전쟁이 혁명전쟁으로 묘사되면서 현실에선 낙오자일 뿐인 탈북자가 최전선에서 무기를 휘두르는 용맹한 전사가 되는 무대로 된다. 이때의 문제는 실제 벌어졌던 〈리니지2〉의 ‘바츠 해방전쟁’의 진의는 사라지고 ‘탈북자의 영웅 신화’로써 각색된 ‘바츠 해방전쟁’만 전면에 남는다는 점이다. 아래 인용에서 보여주는 ‘바츠 해방전쟁’이 벌어지던 즈음에 대한 상황을 기억해야 한다.


〈리니지2〉의 스토리 세계에는 현실 역사의 ‘민중 계층’에 비유될 수 있는 계층이 존재한다. 통계 자료를 보면 40레벨 이하의 캐릭터들로 규정되는 이 민중계층은 2003년 11월 25일 현재 전체 〈리니지2〉 플레이어의 85.9%를 차지한다. 한편 55레벨에서 75레벨 사이의 캐릭터이면서 지배혈맹에 소속되어 있는, 현실 역사의 ‘군사 귀족 계층’에 비유될 수 있는 계층 역시 뚜렷이 존재한다.


높은 레벨이 되어 세력이 있는 혈맹에 들어가면 멋진 무기에 좋은 옷을 입고, 아름다운 성에서 살며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낮은 레벨의 군소 혈맹원들은 수시로 공격당해 죽고 들판에서 혈맹 모임을 가진다. 사냥터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없기 때문에 레벨을 높일 수 있는 기회도 적다.


이러한 계층 분화는 레벨 차이에 따른 이해관계의 상충을 가져와 혈맹 전쟁의 확산을 막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하략)15) 


하고 싶었던 『유령』에 대한 이야기, 탈북자와 게임(하기)


앞에서부터 조금씩 해왔던 이야기지만 소설 『유령』에서 ‘탈북자’가 〈리니지2〉라는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현실에서 겪는 좌절을 가상의 게임 세계에서는 겪지 않아도 된다. 현실에서 주인공 ‘나’는 무시와 멸시의 존재지만 〈리니지2〉의 혈맹 군주인 ‘쿠사나기’는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다. “현실에서 죽었다가 깨어나도 맛볼 수 없는 것이 있다. 게임의 세계에서만 펼쳐지는 낯설고 특별한 체험이다.”(53쪽) 여기서 말하는 ‘특별한 체험’이란 단순히 가상의 게임 세계에서 겪는 이벤트 그 이상일 것이다. 현실과 달리 게임 속 세계에선 ‘힘’이 곧 ‘권력’이다. 


자신을 탈북자가 아니라 조선족이라 속여야 할 만큼 탈북자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졌다. 탈북자가 온라인 게임 속의 영웅처럼 취급받던 시절도 있긴 했지만 그것은 이미 오래전이다(58쪽).


탈북자들이 목숨을 걸고 체제를 탈출하여 대한민국을 찾아오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낙오와 좌절, 무시와 멸시, 천대와 모욕을 위해 “북한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남쪽으로 온 것이 아니다.”(164쪽) 하지만 자유를 찾아, 진정한 낙원을 찾아 대한민국을 찾은 탈북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순전히 자본주의일 뿐이다. “그래서 가끔 자신도 탈북자라면 좋겠다는 황당한 소리를”(167쪽) 실없이 듣고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에서 태어나 자본주의에서 성장하여 자본주의 속에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탈북자는 ‘치트(Cheat)’일 뿐이다. 그래서 한국인은 탈북자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탈북자를 극도로 경계하거나, 탈북자를 혐오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태어나면서부터 겪어야 했던 경쟁에서 자유로운 존재. 학력도 주거도 쟁취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학력을 위해 돈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현실은 어쩌면 오히려 한국인이 갖는 낙심의 근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소설 속 탈북자들은 현실의 삶과 다르게 영웅이 될 수 있는 〈리니지2〉로 모여드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탈북자임을 숨겨야 하고, 탈북자임이 드러나는 순간 온갖 모욕을 견뎌야 한다. 그렇지만 게임에서는 탈북자임을 굳이 숨길 이유도 없고, 탈북자임이 드러나도 모욕을 각오할 필요가 없다. 게임 속 가상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힘’과 ‘권력’, 즉 레벨이다. 하지만 집단에서 벗어나 ‘솔플(solo play)’을 즐기는 유저의 상황은 좀 다르다.


저는 탈북 노숙자 한 사람의 주민번호를 빌려 아이디를 등록하고 본격적인 사냥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리니지에서 제가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제가 다른 인물들을 죽일 때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리니지 안에서 칼을 마구 휘둘렀습니다. 어떤 날은 밤새도록 잠도 자지 않고 사냥을 다니며 닥치는 대로 죽이고 피를 보았습니다. 때로는 제가 희생될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더 짜릿한 쾌감을 느꼈습니다(318쪽).


소설 속 중년 여성 탈북자(‘정주 아줌마’)에게 〈리니지2〉는 어떤 도피의 공간이기보다 본능적인 유희의 공간이었다. 다만 ‘정주 아줌마’가 즐기는 게임의 방식, 〈리니지2〉를 플레이하는 태도는 상당히 위험천만하다. 현실 세계에서 게임에 들이미는 ‘악’의 잣대에 가장 부합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주 아줌마’야 말로 『유령』 속 어떤 탈북자들보다 게임에 충실한 인물일 것이다. 아니, 게임의 정해진 규칙마저 뛰어넘는 존재다.


“RPG의 스토리텔링은 플레이어의 모험이 단순한 성장과 이동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교묘하게 감춘다. 이야기는 캐릭터의 성장을 위한 표지판이다. 그리고 이 길을 벗어난 플레이어는 성장이 제대로 되지 않는, 일종의 성장통을 겪게 된다.”16) 하지만 ‘정주 아줌마’는 스토리텔링을 벗어나고도 카타르시스를 느낄 뿐이다. ‘게임하기(gaming/playing)’를 통해 오히려 게임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석연찮은 『유령』, 의심의 끈을 끝까지


소설 속 탈북자에 대한 묘사에 수시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소설의 편의를 위해 설정된 탈북자들의 출신 배경을 곧이곧대로 믿어선 안 된다. 그렇다고 소설에 장치된 인물의 설정을 모두 거짓이라 여길 필요도 없다. 교묘한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독자는 극심한 스트레스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을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탈북자라고 해서 무엇인가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더 중요한 것은 ‘북한 출신’이라는 이상한 표현이다. 황해도, 평안도, 강원도, 함경도, 자강도, 양강도 (여기에 더하자면 평양직할시) 출신이 있을 뿐이다.


그래도 『유령』 속 탈북자들은 출신이 명확하다. 무산, 정주, 평양. 하지만 각각의 출신 배경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무책임하다. 소설을 읽는 내내 경험해야 하는 불편함은 탈북자의 탈북자 됨이 끊임없이 강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탈북자는 성공해선 안 되고, 성공의 기회도 잡아선 안 되고, 중독의 삶을 살아야 하며, 소외된 채로 몸부림치거나 체념해야 하며, 남성은 폭력과 무기력의 양극단 중에 하나를, 여성은 성적 대상화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 운명이고 숙명이며 주어진 생인 것처럼 묘사한다.


『유령』은 게임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부정한다. 주인공 ‘나’를 제외한 소설 속 모든 인물이 현실과 게임을 구분한다. ‘나’와 함께 〈리니지2〉에서 혈맹 활동을 했던 다른 탈북자들도 게임과 현실은 별개의 삶이라는 걸 안다. 주인공보다 더 극심한 삶을 사는 인물들조차 소설에서 제시하는 최후의 선택지가 게임 속은 아니다. 더 나락으로 떨어지더라도, 혹은 더 이상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발버둥을 치는 것이다. 그럼에도 주인공에게 “리니지는 환상이 아니다. 그곳은 현실이다.”(325쪽)


소외된 존재들의 사연을 드러내기 위한 소설로 생각한다면 『유령』은 썩 나쁘지 않은 작품이다. 하지만 소외된 존재들을 또 다른 틀로 가둔다는 점에서 『유령』은 썩 좋은 소설이라고 보기 어렵다. 탈북자가 등장하고, 탈북자 청년이 고뇌한다. 하지만 그것은 분단 현실이 아닌 자본주의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탈북자를 다문화의 범주로 넣는 순간 탈북자는 대한민국 국민이 될 수 없다. 그저 영원히 이방인으로 존재할 뿐이다. 탈북 이전의 삶까지만 디아스포라이다. 탈북으로 인하여 고향을 떠났기 때문에 이산(離散)이라 생각하는 것은 디아스포라에 대한 무책임이다.


2022년 『유령』을 읽어야 하는 독자가 있다면 이런 잔소리를 남기고 싶다. 끊임없이 의심하라. 소설 속 탈북자의 정체를 의심하고,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게임에 대해 의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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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연구자)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북한문학이 아닌 조선문학 연구자를 표방하지만, 주류문학 말고 비주류로 일컬어지는 대중‧통속‧장르 및 기타 등등 애호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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