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롤링 권하는 기술: 인게임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에 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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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3. 10. 10.
같이 하는 게임으로 시작해 다시 '같이'하는 게임으로 오기까지
디지털게임 안에서 작동하는 플레이어 상호간의 의사소통은 게임의 여러 요소 중에서도 굉장히 후대의 것에 가깝다. 특히 기원이 되는 디지털 이전의 게임까지 거슬러 올라가보면 애초에 게임 안의 커뮤니케이션은 굳이 따로 만들 이유가 없었는데, 장기나 바둑, 체스 같은 게임들은 같은 시공간에서 마주보고 한다는 대원칙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기적으로도 그렇지만 애초에 게임이 상호작용으로부터 빚어진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별도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게임 규칙 외에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점이다. 앞에서 바둑과 장기 이야기를 언급했지만, 이들 게임은 규칙으로서의 게임만 이야기한다면 대화가 불필요한 것이겠지만 실제 게임이 플레이되는 현장에서 바둑 두는 두 사람간의 대화는 또한 일상적이다. 프로 간의 대국에서라면 수담(手談)외에는 문답무용이겠지만, 일상의 놀이가 모두 프로 같지는 않을 것이다.
딱딱하게 구분해 본다면 텍스트로서의 게임은 순전히 규칙이 제시하는 방식 안에서만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부분만을 가리킬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모든 게임이 모여서 한다는 전제 하에 이루어졌음을 감안한다면 그 규칙 바깥의 커뮤니케이션은 언제나 게임과 함께 있어 온 존재이기도 했다. 이는 초창기 비디오게임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퐁>과 같은 경우는 기기 한 대에 두 명이 달라붙어 플레이하는 구조였고 그 과정에서 당연하게도 플레이어 두 사람간의 커뮤니케이션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곤 했다.
이 자연스러움이 없어지는 첫 번째 분기점은 아마도 싱글플레이 게임의 대두로부터일 것이다. <퐁>에서 <브레이크아웃>으로 변화하면서 혼자서도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이 대세가 되면서부터는 소프트웨어가 제시하는 규칙에 대응하는 것 외에 다른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이 불필요해지는 순간을 볼 수 있었다.
이보다 더 큰 분기점은 온라인 네트워크 기능의 도입일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멀티플레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둘 이상의 사람이 같은 시공간에 모여야 한다는 전제는 온라인이 도입되면서 깨졌다. 아니 애초에 온라인 멀티플레이의 도입이 이루어진 배경 자체가 굳이 한 공간에 있지 않더라도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오프라인 시절에는 당연했던, 함께 게임을 하며 이야기나누는 상호작용은 온라인 멀티플레이에 들어오면서 이제 별도로 구현해야만 가능한 무엇으로 그 성격을 바꾸었다.
멀티플레이 디지털게임에서 커뮤니케이션은 게임의 구성 요소가 아니면서도 게임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며 발전해 왔다. 그리고 이는 애초에 기술적인 시작점부터도 어느 정도 유사성을 가지고 있었다.
채팅과 온라인 멀티플레이는 같은 시작점을 가진다
네트워크 상에서 둘 이상의 사용자가 실시간으로 텍스트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의사소통하는 채팅 기술은 1974년 미국 일리노이대학의 PLATO 컴퓨터 시스템의 내부 네트워크를 통해 처음 세상에 등장했다. 본격적인 채팅 시스템은 핀란드 프로그래머 야르코 외카리넨(Jarkko Oikarinen)에 의해IRC(Internet Relay Chat) 프로토콜이 개발된 1988년 이후 보급되기 시작했으며, 한국에서는 초기 전화 모뎀을 이용한 PC통신 등에서 메일, 동호회, 게시판 기능과 함께 PC통신의 주요 기능 중 하나로 대중에 소개되었다.1)
채팅의 역사 속에서도 이미 공격적인 행동에 대한 우려는 나타난 바 있다. 영화 <접속>(1997)처럼 비대면의 익명 상대이기에 가능한 로맨스가 있었던 것 이상으로 사람들은 익명의 누군가에게 공격적이었다. 이는 채팅이라는 기술 자체가 가지고 있는 비대면의 다대 다 익명성으로부터 기인하는 문제다. 그리고 이러한 익명성의 문제는 동일하게 온라인게임에서도 나타난다.
최초의 다중접속 게임으로 거론되는 게임인 <MUD(Multi User Dungeon)>은 1978년 영국 에섹스 대학의 로이 트럽쇼가 개발한 게임으로, 채팅과 마찬가지로 PLATO 시스템 기반의 대학 서버 내에 올려진 TRPG 기반 텍스트 게임에 여러 사람이 동시접속할 수 있게 만든 게임이다. 접속한 플레이어들은 서로 같은 방에 위치한 플레이어들끼리 텍스트 채팅을 통해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고, 작동방식이나 기술적 측면에서 이 둘은 서로 비슷할 수 밖에 없었다.
혹자는 게임 안에서의 행동들이 일반적인 커뮤니케이션보다 더욱 거칠게 나타나는 것을 두고 게임이 가진 본질적인 공격성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위와 같은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게임 때문이라기보다는 애초에 비대면 다대다 커뮤니케이션 자체가 다분히 참여자들을 공격적으로 만든다고 보는 편이 좀더 합리적이다. 오히려 참여자가 공격적으로 변해가는 상황은 反게임적인데, 로제 카이와는 ‘놀이와 인간’에서 게임의 요소 중 하나인 경쟁agon이 단순히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규칙이라는 틀 안에서 질서정연하게 수행되는 것임을 지적한 바 있다. 놀이 안에서 일종의 학대와 골탕먹이기가 발생하는 과정은 카이와에 따르면 ‘경쟁에서 멀어지는’(42p) 어떤 순간이며, 게임을 벗어나 원시적인 투쟁으로 향하는 순간이다. 이는 게임 자체보다는 채팅이라는 기술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에 가까워 보인다.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대화상대가 누구냐는 것
오늘날 게임들은 네트워크 기술의 발전으로 더욱 방대한 대역폭을 활용하여 텍스트 채팅 이상의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을 제공한다. 보이스채팅이라고 불리는 이 음성 기반의 커뮤니케이션 채널은 이름부터 흥미로운데,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누군가와 음성으로 이야기나누는 것을 인터넷전화라고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름에 ‘채팅’을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전화’와 ‘채팅’의 위와 같은 용례는 이 둘의 구분이 어떤 상대와 커뮤니케이션하느냐에 있음을 드러낸다. 전화는 (일부 텔레마케팅을 제외하면) 상대가 누구인지 이미 아는 경우에 활용되고, 채팅은 익명성에 기반한다. 게임과 함께 하는 음성기반 커뮤니케이션을 보이스’채팅’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익명성에 기반한 음성 커뮤니케이션은 텍스트 채팅보다 훨씬 더 공격적이고 자극적이라는 사실이다. 미디어학자 매클루언은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의 차이를 두고 부족사회에서의 음성언어가 서구문명의 문자언어로 변화하고, 이것이 전기기술의 힘에 의해(전화, 라디오 등) 다시금 음성언어로 치환되면서 문자언어 중심의 사회에 일종의 내파를 일으키고 있음을 지적한다. 매클루언의 주장을 빌어 온다면, 우리는 과거 부족 사회처럼 옆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알 만큼 가까운 사이에서만 작동했던 음성언어가 그 제한과 한계를 기술을 딛고 넘어서면서 익명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공격적 보이스채팅의 문제를 마주하게 되었다고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멀티플레이 게임이 디디고 있는 '익명성'의 대전제
그러나 원인을 안다고 해서 딱히 해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멀티플레이 기반 게임들은 1:1의 멀티플레이 이상으로 팀 대 팀의 플레이에 중심을 두고 있는데, 이는 다시말해 하나의 팀이 유기적이고 효율적인 협동 플레이를 펼치기 위해서는 게임 규칙 안의 상호작용 외에 더 많은 커뮤니케이션이 게임 승리를 위해 필수적인 상황을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다.
<리그 오브 레전드>는 매우 강력하게 게임의 규칙에 “한 팀은 무조건 다섯 명으로 이루어집니다”를 내세우는 게임이다. 친구와 둘이 PC방에 가더라도 두 사람은 결국 모르는 세 명을 팀원으로 받아 다섯 명을 채워야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때에 따라서는 개인의 순수한 실력보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승패에 크게 영향을 주는 사례를 목격할 수 있다. 때문에 제작사인 라이엇게임즈는 초창기에 이용자들로부터 랜덤 매칭된 팀원 사이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해 줄 수단으로서의 보이스채팅 기능 추가를 요구받은 바 있는데, 그에 대해 답변한 기록은 오늘날 보이스채팅의 기능을 역으로 잘 드러내는 자료로 남아 있다.
(중략) 이 논의를 시작할 때 먼저 고려해야 할 사항 중 하나는 친구들과 음성 채팅으로 게임을 즐길 때와, 모르는 사람들과 음성 채팅으로 게임을 즐길 때의 차이입니다. 예를 들어, 리그 오브 레전드 플레이어 여러분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면, 친구들과 음성 채팅을 하는 것에 대해선 79% 이상이 이것이 리그 오브 레전드를 더 즐겁게 플레이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데 동의한다고 응답합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과 음성 채팅을 하는 것이 즐거울지를 묻는 질문에는 겨우 50% 정도의 플레이어 여러분만이 동의하셨고, 나 되는 반대 의견이 나왔습니다. 4 명 중 1 명이 모르는 사람과 음성 채팅을 하고 싶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저희들에게도 놀라운 결과였습니다.
(중략)
음성 채팅을 하게 되면, 몇몇 플레이어만 끝까지 음성 채팅을 사용하며 나머지 플레이어들은 음성 채팅에 아예 참여하지 않거나 음성을 차단한 후 텍스트 채팅만을 사용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합니다. 기계 학습 (machine learning) 기법을 통해 실제 어떤 대화가 이루어지는지 분석하는 고도화된 모델을 개발하여 적용한 결과, 일부 플레이어들만 음성 채팅을 사용하고 다른 플레이어들은 텍스트 채팅으로 소통하는 게임의 경우 텍스트 채팅에 나타나는 공격적인 언어 사용이 126% 나 증가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플레이어 여러분도 저희도 리그 오브 레전드에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종 차별, 동성애 혐오, 욕설 등의 언어 사용이 126%나 증가한다는 뜻입니다. 음성 채팅을 활용하면 공격적인 언어 사용이나 욕설을 감지하기가 더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음성 채팅을 활용하는 플레이어들이 텍스트 채팅에서 공격적인 언어와 욕설을 훨씬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악성 플레이어를 감지하기가 더 쉬웠습니다. 놀랍지 않은 결과이지만, 모르는 사람과 음성 채팅으로 게임을 즐긴 플레이어들은 평균보다 신고되는 횟수가 47% 나 많았습니다.
(중략)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친구들과의 음성 채팅은 매우 훌륭한 게임 경험이며, 사실 리그 오브 레전드 플레이어 여러분께서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사실 많은 플레이어 여러분께서 스카이프 등의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친구들과 게임을 즐기고 계시며, 이는 매우 바람직한 직한 일입니다. 하지만 음성 채팅 앱이나 게임에 포함된 음성 채팅 기능은 모르는 사람과의 음성 채팅에 활용되기 쉬우며, 자동으로 그렇게 되기도 합니다. 그 결과 공격적인 언어 및 욕설이 126% 증가하고 신고 횟수는 47%나 증가하며 , 이는 플레이어가 서로를 차단하거나 음성 채팅 기능을 사용하지 않아도 나타나는 현상입니다.(라이엇게임즈 , 2014) 2)
홈페이지를 통해 게시된 라이엇게임즈의 이 공지문은 오늘날 보이스채팅 문제가 가지고 있는 난점들을 매우 정확하게, 그리고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다. 친구들과의 음성 채팅과 익명의 음성채팅은 완전히 다르며, <리그 오브 레전드>는 반드시 익명의 사람들이 모여 팀을 이뤄야 하는 구조다. 익명 보이스채팅이 가지는 공격성은 텍스트채팅보다 훨씬 강력하기에 우리는 익명 매칭을 기반으로 돌아가는 우리의 게임에 보이스채팅을 추가할 생각이 없다는 라이엇게임즈의 메시지는 우리가 즐기고 있는 익명 매칭 기반의 팀 온라인 게임이 근본적으로 넘어설 수 없는 소통의 지점을 또렷하게 가리키고 있다.
기술은 매 순간 우리의 기대를 넘어서는 발전 속도를 보여주지만, 결국 그 기술이 그려내고자 하는 것은 과거 우리가 맨몸으로 겪었던 어떤 순간이다. 반드시 한 자리에 모여야만 가능했던 게임을 디지털기술은 원거리에서도 게임 규칙이 제시하는 승부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무언가로 탈바꿈시켰고, 이제는 그 게임의 바깥에 존재하던 음성언어마저도 구현가능한 상황에 우리를 올려놓았다. 그러나 이는 단지 기술적으로 누군가의 목소리를 실시간으로 전달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시작되어 아직까지도 극복되지 못한 비대면 익명성이라는 대전제다. 기술이 모르는 사람들을 강제로 지인으로 만들어버리는 방향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전제가 깨어지지 않는다면 어떤 기술이 어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을 만들어내건간에 우리는 트롤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